사람들이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이야기

계속

CONTINUATION CONCERNING

MAN’S ENTRANCE

INTO ETERNAL LIFE

 

 

314. 소생한 사람, 즉, 영이 자신을 볼 수 있도록 그에게 빛의 사용이 주어지고 나면, 앞서 말한 영적 천사들이 그 상태에서 그가 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서비스하며, 저 세상 삶에 관한 정보를 그에게 제공하되 그가 수용할 수 있는 만큼만 합니다. After the use of light has been given to the resuscitated person, or soul, so that he can look about him, the spiritual angels previously spoken of render him all the kindly services he can in that state desire, and give him information about the things of the other life, but only so far as he is able to receive it.

 

만일 그가 신앙 안에 있었고, 원한다면, 천사들은 그에게 원더풀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천국을 보여줍니다. If he has been in faith, and desires it, they show him the wonderful and magnificent things of heaven.

 

 

315. 그러나 만일 그 깨어난 사람, 즉, 영이 지도받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그런 캐릭터라면, 그는 함께 있는 영들이 좀 가줬으면 하는데, 그러면 천사들은 그걸 즉시 알아차립니다. 저 세상에서는 모든 생각들이 서로 커뮤니케이션하기 때문입니다. But if the resuscitated person or soul is not of such a character as to be willing to be instructed, he then desires to be rid of the company of the angels, which they exquisitely perceive, for in the other life there is a communication of all the ideas of thought.

 

그들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그들을 떠나갑니다. Still, they do not leave him even then, but he dissociates himself from them.

 

천사들은 모두를 사랑하며, 그를 친절히 도와 인도하여서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 말고는 무슨 원하는 게 없습니다. The angels love everyone, and desire nothing more than to render him kindly services, to instruct him, and to convey him to heaven.

 

그들은 이것을 가장 기뻐합니다. In this consists their highest delight.

 

 

316. 그 영이 그렇게 스스로 물러나면, 이번에는 선한 영들의 순서가 되는데,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그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은 그에게 모든 친절한 사무를 제공합니다. When the soul thus dissociates himself, he is received by good spirits, who likewise render him all kind offices while he is in their company.

 

그러나 그가 세상 살 때 모습이 이런 선한 영들하고 있는 것조차 불편한 그런 것이었다면, 그는 이번에도 이들 선한 영들이 어서 좀 가줬으면 합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 또 반복, 결국 그가 세상 살 때 모습과 딱 맞는, 그래서 ‘완전 내 스타일이야!’ 싶은 영들을 만날 때까지 그에게 계속됩니다. If however his life in the world has been such that he cannot remain in the company of the good, he desires to be rid of these also, and this process is repeated again and again, until he associates himself with those who are in full agreement with his former life in the world, among whom he finds as it were his own life.

 

그때부터 그는 정말 놀랍게도 그가 몸 안에 있을 때 살던 그대로 그들 가운데서 생활합니다. And then, wonderful to say, he leads with them a life like that which he had lived when in the body.

 

이런 생활 속으로 들어가 버린 후에는 그는 그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이렇게 일부는 오래, 일부는 짧게 이곳에 머물다가들 지옥으로 전달됩니다. 반면, 주님 신앙 가운데 있었던 영들은 그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통해 한 걸음 한 걸음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But after sinking back into such a life, he makes a new beginning of life; and some after a longer time, some after a shorter, are from this borne on toward hell; but such as have been in faith toward the Lord are from that new beginning of life led step by step toward heaven.

 

 

317. 그러나 일부는 아주 천천히 천국을 향해 나아가고, 또 어떤 영들은 아주 빨리 나아갑니다. Some however advance more slowly toward heaven, and others more quickly.

 

저는 사후 즉시 천국으로 올려지는 영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허락하심으로 두 가지 케이스만 말씀드리겠습니다. I have seen some who were elevated to heaven immediately after death, of which I am permitted to mention only two instances.

 

 

318. 어떤 영이 제게 다가와 말을 걸었습니다. 몇 가지 점에서, 그는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음이 분명했습니다. A certain spirit came and discoursed with me, who, as was evident from certain signs, had only lately died.

 

처음에 그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그저 여전히 세상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저 세상에 와 있고, 자기는 더 이상 세상 살 때 소유했던 집, 부(富) 같은 것들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다른 나라에 있고, 그래서 세상 살 때 소유했던 모든 것을 박탈당했음을 알고, 근심에 쌓여 어디로 가야 할지, 지낼 곳을 위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At first he knew not where he was, supposing himself still to be in the world; but when he became conscious that he was in the other life, and that he no longer possessed anything, such as house, wealth, and the like, being in another kingdom, where he was deprived of all he had possessed in the world, he was seized with anxiety, and knew not where to betake himself, or whither to go for a place of abode.

 

그때 그는 오직 주님이 그를 위해 모든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과, 그는 세상 살 때처럼 혼자 자유롭게 생각해도 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He was then informed that the Lord alone provides for him and for all; and was left to himself, that his thoughts might take their wonted direction, as in the world.

 

그는 이제 생계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조차 없는 상태에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습니다. (사후 세계에서는 모든 이의 생각이 다 드러나기 때문에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이렇게 제가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근심 중에 그는 심장 지역에 속한 어떤 천적 영들의 교제권 속으로 옮겨졌습니다. 이들은 그가 원하는 것에 모든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He now considered (for in the other life the thoughts of all may be plainly perceived) what he must do, being deprived of all means of subsistence; and while in this state of anxiety he was brought into association with some celestial spirits who belonged to the province of the heart, and who showed him every attention that he could desire.

 

이런 일이 있고 나서, 그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체어리티 가운데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받은 이 엄청난 친절을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을까...?’ 이것을 보면, 그는 살아생전, 신앙의 체어리티로 살던 사람임이 틀림없었고, 그래서 그는 즉시, 천국으로 올려졌습니다. This being done, he was again left to himself, and began to think, from charity, how he might repay kindness so great, from which it was evident that while he had lived in the body he had been in the charity of faith, and he was therefore at once taken up into heaven.

 

 

319. 저는 또 다른 경우를 보았는데, 그는 즉시 천사들에 의해 천국으로 옮겨져 주님의 영접을 받고 천국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약간 경과 후에 천국으로 옮겨지는 훨씬 더 많은 경우에 대해서까지 일일이 말씀드릴 필요는 없지 싶습니다. I saw another also who was immediately translated into heaven by the angels, and was accepted by the Lord and shown the glory of heaven; not to mention much other experience respecting others who were conveyed to heaven after some lapse of time.

 

2021-05-14(D6)-창세기(창3 클로징, AC.314-319), '창3 클로징, 사후 영원한 삶을 시작하기 (3)'.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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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jMi2n0ajR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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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창3:24)

 

311. 홍수로 사라진 사람들의 저세상 상태는 이렇습니다. 그들은 영들의 세계 그 어디에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른 영들과 함께 할 수도 없지요. 있을 데라고는 오직 지옥뿐인데, 그마저도 다른 어떤 지옥으로부터도 분리된, 어떤 산 아래인 것 같은 지옥에 있습니다. In the other life, the state of those who perished by the flood is such that they cannot be in the world of spirits, or with other spirits, but are in a hell separated from the hells of others, and as it were under a certain mountain.

 

이것은 그들의 무서운 판타지들과 설득들의 결과, 마치 중간에 가로막는 산처럼 나타납니다. This appears as an intervening mountain in consequence of their direful fantasies and persuasions.

 

그들의 판타지들과 설득들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영들을 아주 중증(重症) 인사불성 상태에 이르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지금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게 하는데, 이것은 그들이 다른 영들에게서 진리에 대한 그들의 모든 이해력을 빼앗아 그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Their fantasies and persuasions are such as to produce so profound a stupor in other spirits that they do not know whether they are alive or dead, for they deprive them of all understanding of truth, so that they perceive nothing.

 

세상 살 동안의 그들의 설득 능력, 사람의 혼을 쏙 빼먹는 능력 또한 그랬습니다. 저 세상에서도 그들은 다른 영들을 일종의 죽음으로 이르게 하지 않고는 그들과 어울릴 수가 없는 자들임이 예견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소멸되었고, 저 세상에서도 저렇게 격리된 채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들과는 다른 상태들을 허락하셨습니다. Such also was their persuasive power during their abode in the world; and because it was foreseen that in the other life they would be incapable of associating with other spirits without inducing on them a kind of death, they all became extinct, and the Lord of his Divine mercy induced other states on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312. 이 절에서, 이들 홍수 전 시대를 산 사람들의 상태가 아주 충분히 설명되었습니다. 그들은 ‘쫓아내시고’, 혹은 천적 선으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을 두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In this verse, the state of these antediluvians is fully described, in that they were “cast out,” or separated from celestial good, and in that “cherubim were placed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이 표현, 개역 성경 표현인 ‘에덴 동산 동쪽에’라는 표현 대신 아래 영어 성경을 원어 그대로 옮기면 ‘에덴 동산을 향하여(toward) 동쪽으로부터(from)’라는 표현은 그들에게만 쓸 수 있는 표현입니다. 홍수 후 세대들에게는 쓸 수 없습니다. 만일 홍수 후 세대들에게 이 표현을 썼다면 ‘에덴 동산으로부터 동쪽을 향하여’라고 했을 것입니다. This expression,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is applicable only to them, and could not be used in relation to those who lived afterwards, of whom it would have been said, “from the garden of Eden toward the east.

 

마찬가지로, 말씀 ‘두루 도는 불 칼’, 즉, ‘스스로 도는 검의 화염’이라는 표현을 오늘날 사람들에게 쓰고자 하였다면, ‘스스로 도는 화염의 검’이라고 표현해야 했을 것입니다. In like manner, had the words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been applied t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they would have been “the sword of a flame turning itself.

 

뿐만 아니라, ‘생명 나무’, 즉, ‘생명들의 나무’ 역시 ‘생명의 나무’로 표현했을 것입니다. 설명이 불가능한, 오직 천사들에게만 이해되는 이런 일련의 다른 것들은 더 이상 말씀드릴 것도 없습니다. 모든 상태마다 무한한 아케이나가 들어 있으며, 그 중 단 한 개도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이걸 이해하는데 그 이유는, 주님이 이들에게는 계시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며, 이들은 그 계시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내면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Nor would it have been said the “tree of lives,” but the “tree of life”; not to mention other things in the series that cannot possibly be explained, being understood only by the angels, to whom the Lord reveals them; for every state contains infinite arcana, not even one of which is known to men.

 

 

313. 여기서 말씀드리는 내용이 첫 사람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분명한 것은, 오늘날 존재하는 모든 유전된 악은 그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가정한 것입니다. From what is here said of the first man, it is evident that all the hereditary evil existing at the present day did not come from him, as is falsely supposed.

 

여기서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교회이며, 이 교회를 ‘아담’이라 부를 때, 그것이 상징하는 것은, 사람은 땅에서, 즉 ‘사람이 아닌 상태’(nonman)에서 시작,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For it is the most ancient church that is here treated of under the name of “man”; and when it is called “Adam,” it signifies that man was from the ground, or that from being nonman he became man by regeneration from the Lord.

 

이것이 그 이름, 곧 ‘사람’이라는 이름의 기원과 상징입니다. 유전악에 대해서는,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실제 죄를 짓는 사람마다 그로 인해 그 자신 안에 어떤 본성이 초래되며, 그로 인한 악이 그의 어린 시절에 심겨 유전되는 것입니다. This is the origin and signification of the name. But as to hereditary evil, the case is this. Everyone who commits actual sin thereby induces on himself a nature, and the evil from it is implanted in his children, and becomes hereditary.

 

그렇게 해서 모든 부모로부터,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 그리고 가계를 따라 그들의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며, 그렇게 각 세대 후손들 안에서 배가하고 늘어납니다. 유전악은 각 사람 안에 남으며, 각자 실제 짓는 죄로 인해 증가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절대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저절로 소멸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It thus descends from every parent, from the father, grandfather, great-grandfather, and their ancestors in succession, and is thus multiplied and augmented in each descending posterity, remaining with each person, and being increased in each by his actual sins, and never being dissipated so as to become harmless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모든 주의 깊게 관찰하시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 진리임을 분명히 아십니다. 부모의 악한 경향은 자녀 안에 눈에 보이게 남아 한 가족, 심지어 그 가계 전체가 그로 인해 서로 구별될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을 말입니다. Every attentive observer may see evidence of this truth in the fact that the evil inclinations of parents remain visibly in their children, so that one family, and even an entire race, may be thereby distinguished from every other.

 

2021-05-12(D4)-창세기(창3,24, AC.311-313), '여섯 번째, 일곱 번째 후손 이야기 (3)'.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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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창3:24)

 

 

309. ‘두루 도는 불 칼’이 비정상적인 탐욕들과 설득들을 동반한 자아 사랑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페이지들을 가득 채울 수도 있을 만큼 많은 인용구절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에스겔에 나오는 몇 구절만 인용하고자 합니다. 이 ‘비정상적인 탐욕들과 설득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의 신비들을 추구하게 하지만, 사실은 육체적, 세속적인 것들에게 끌려 휩쓸려 버리고 말게 하는 그런 것들입니다. That by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is signified self-love with its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which are such that they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ut are carried away to corporeal and earthly things, might be confirmed by so many passages from the Word as would fill pages; but we will cite only these from Ezekiel:

 

9인자야 너는 예언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이같이 말하라 칼이여 칼이여 날카롭고도 빛나도다 10그 칼이 날카로움은 죽임을 위함이요 빛남은 번개 같이 되기 위함이니 우리가 즐거워하겠느냐 내 아들의 규가 모든 나무를 업신여기는도다 14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예언하며 손뼉을 쳐서 칼로 두세 번 거듭 쓰이게 하라 이 칼은 죽이는 칼이라 사람들을 둘러싸고 죽이는 큰 칼이로다 15내가 그들이 낙담하여 많이 엎드러지게 하려고 그 모든 성문을 향하여 번쩍번쩍하는 칼을 세워 놓았도다 오호라 그 칼이 번개 같고 죽이기 위하여 날카로웠도다 Prophesy and say, Thus saith Jehovah, Say a sword, a sword, it is sharpened, and also burnished to make a sore slaughter; it is sharpened that it may be as lightning. Let the sword be doubled the third time, the sword of his slain; the sword of a great slaughter, which entereth into their bed chambers, that their heart may melt, and their offenses be multiplied, I have set the terror of the sword in all their gates. Alas! it is made as lightning. (겔21:9-10, 14-15)

 

여기 ‘’은 사람의 황량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람이 선과 진리는 전혀 못 보고, 대신 ‘많이 엎드러지게 하다’로 표현한 거짓들과 잘못된 일들만 볼 뿐임을 상징합니다. A “sword” here signifies the desolation of man such that he sees nothing that is good and true, but mere falsities and things contrary, denoted by “multiplying offenses.

 

또 나훔에도 나오는데요, 거기 신앙의 신비들을 추구하는 자들을 가리켜,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라 하고 있습니다. It is also said in Nahum, of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The horseman mounting, and the flame of the sword, and the flash of the spear, and a multitude of the slain. (나3:3)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죽임 당한 자의 떼, 주검의 큰 무더기,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나3:3)

 

 

310. 이 구절 각각의 표현들에는 가장 깊은 의미들을 가진 아케이나가 너무나 많아 그걸 다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아케이나에 들어있는 것들은 홍수로 사라진 지금 이 사람들의 천성에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홍수 후 살았던 사람들의 천성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Each particular expression in this verse involves so many arcana of deepest import (applicable to the genius of this people who perished by the flood, a genius totally different from that of those who lived subsequent to the flood), that it is impossible to set them forth.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간략히 보겠습니다. 그들의 첫 부모 세대는 태고 교회를 형성한 세대로서, 천인(天人)들이었고, 그 결과, 그들 안에 심긴 천적(天的)인 씨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은 천적 기원을 가진 씨를 자기들 안에 가졌습니다. We will briefly observe that their first parents, who constituted the most ancient church, were celestial men, and consequently had celestial seeds implanted in them; whence their descendants had seed in them from a celestial origin.

 

천적 기원을 가진 씨는 사랑이 온 마음을 다스리며, 하나로 만드는 그런 것입니다. Seed from a celestial origin is such that love rules the whole mind and makes it a one.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 의지와 이해력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방금 ‘하나로 만든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즉, 이 두 가지가 하나되게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For the human mind consists of two parts,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사랑 혹은 선은 의지에, 신앙 혹은 진리는 이해력에 각각 속합니다. 태고 교회 사람들은 사랑 혹은 선을 가지고 무엇이 신앙 혹은 진리에 속하는지를 지각하였으며,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Love or good belongs to the will, faith or truth to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or good those most ancient people perceived what belongs to faith or truth, so that their mind was a one.

 

이런 인류의 후손이기 때문에, 동일한 천적 기원을 가진 씨가 필연적으로 남게 됩니다. 진리와 선이 각각 자기 쪽, 곧 진리는 진리 쪽에서, 선은 선 쪽에서 조금씩이라도 떨어져 나가는 것은 가장 끔찍한 경우인데요, 그렇게 되면 그들의 온 마음이 너무나 왜곡되어 저 세상에서 도저히 회복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With the posterity of such a race, seed of the same celestial origin necessarily remains, so that any falling away from truth and good on their part is most perilous, since their whole mind becomes so perverted as to render a restoration in the other life scarcely possible.

 

한편, 천적인 씨 대신 영적인 씨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홍수 후 사람들이 여기에 해당하며, 오늘날 사람들도 해당합니다. It is otherwise with those who do not possess celestial but only spiritual seed, as did the people after the flood, and as also do the people of the present day.

 

이들에겐 사랑이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선한 의지도 없지요. 그러나 신앙, 혹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은 여전히 있습니다. 이 능력으로, 이 사람들은 어느 정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록 방식은 다르지만, 즉, 진리에 관한 지식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에 기반, 주님으로 말미암은 양심의 암시라는 방식, 즉, 이런 양심을 주님이 은근히 사람들 속으로 주입하시는 방식이지만 말입니다. There is no love in these, consequently no will of good, but still there is a capability of faith, or understanding of truth, by means of which they can be brought to some degree of charity, although by a different way, namely, by the insinuation of conscience from the Lord grounded in the knowledges of truth and the derivative good.

 

그들의 상태는 그래서 홍수 전 사람들의 상태와 아주 다릅니다. 그 상태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후 다루겠습니다. Their state is therefore quite different from that of the antediluvians, concerning which stat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현 세대에게는 정말 낯선 아케이나가 있습니다. 오늘날은 아무도 천인이 무엇인지, 심지어 영인 조차 아는 사람이 없고, 그 결과, 사람의 마음과 생명의 퀄러티에 대해서조차 아는 바가 없고, 최종 결과인 사후 상태에 대해서도 그렇기 때문입니다. These are arcana with which the present generation are utterly unacquainted, for at the present day none know what the celestial man is nor even what the spiritual man is, and still less what is the quality of the human mind and life thence resulting, and the consequent state after death.

 

2021-05-11(D3)-창세기(창3,24, AC.309-310), '여섯 번째, 일곱 번째 후손 이야기 (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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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And he cast out the man; and he made to dwell from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cherubim, and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to keep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창3:24)

 

 

306.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그에게서 선에 관한 모든 의지와 진리에 관한 모든 이해를 깡그리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그것들과 분리되었고, 그렇게 ‘사람’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것들을 찾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더 이상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To “cast out the man” is to entirely deprive him of all the will of good and understanding of truth, insomuch that he is separated from them, and is no longer man.

 

동쪽에 그룹들을 두어’, 무슨 비밀스런 신앙의 일 안으로 못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위 표현이 이런 뜻인 것은, ‘에덴 동산 동쪽’은 天的인 것이며, 지성은 여기서 나오기 때문이며. ‘그룹’이란, 저런 사람이 신앙의 일들에 들어가는 것을 금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To “make cherubim from the east to dwell” is to provide against his entering into any secret thing of faith; for the “east toward the garden of Eden” is the celestial, from which is intelligence; and by “cherubim” is signified the providence of the Lord in preventing such a man from entering into the things of faith.

 

두루 도는 불 칼’이 상징하는 것은 비정상적인 것들을 원하고, 그 결과 그런 것들로 고착화된 자아 사랑입니다. 그는 정말 거룩한 것들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지만 본능적으로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에게 끌려 휩쓸려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즉, 거룩한 것들에 대한 신성모독을 금하시는 이유입니다. By the “flame of a sword turning itself” is signified self-love with its insane desires and consequent persuasions, which are such that he indeed wishes to enter, but is carried away to corporeal and earthly things, and this for the purpose of “keeping the way of the tree of lives,” that is, of preventing the profanation of holy things.

 

 

307. 여기서 다루는 후손들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입니다. 이들은 홍수로 사라졌고, 모두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신’, 즉, 진리에 관한 모든 이해가 박탈되어, 비정상적인 탐욕들과 설득들만 남은, 그래서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It here treats of the sixth and seventh posterities, which perished by the flood, and were altogether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hat is, from all understanding of truth, and became as it were not men, being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and persuasions.

 

 

308. ‘동쪽’과 ‘에덴 동산’에 관한 상징은 위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이들을 가지고 오래 머물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그룹’이 주님의 섭리를 가리킨다는 것은 말씀들 가운데 ‘그룹’이 나오는 모든 구절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이 비정상적으로 자기 본성을 따라, 그리고 감각들과 기억-지식을 따라 신앙의 신비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시는, 그리고 그렇게 해서 그것들을 신성모독하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결국 자기 자신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섭리입니다. As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and of the “garden of Eden” were given above, it is needless to dwell longer on them; but that “cherubim” denote the providence of the Lord lest man should insanely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from his own, and from what is of the senses and of memory-knowledge, and should thus profane them, and destroy himself, is evident from all the passages in the Word where mention is made of “cherubim.

 

유대인들은, 만일 그들이 주님의 오심에 관하여, 그 교회의 표상들이나 형식들이 주님을 상징한다는 것에 관하여, 그리고 사후에도 계속되는 삶에 관하여, 또한 속 사람과 말씀의 속뜻에 관하여 어떤 명료한 지식을 갖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그것을 모독하고, 영원히 소멸되었을 그런 퀄러티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상과 같은 사실을 궤 위(above) 속죄소 위(on), 성막 휘장들 위(upon), 성전 안 휘장 위(upon) ‘그룹’으로 표현하신 것이며, 이것은 또한 주님이 그들을 지키심을 상징한 것입니다. As the Jews were of such a quality that if they had possessed any clear knowledge concerning the Lord’s coming, concerning the representatives or types of the church as being significative of him, concerning the life after death, concerning the interior man and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they would have profaned it, and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therefore this was represented by the “cherubim” on the mercy seat over the ark, upon the curtains of the tabernacle, upon the veil, and also in the temple; and it was signified that the Lord had them in keeping. (출25:18-21; 26:1, 31; 왕상6:23-29, 32)

 

18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출25:18-21)

 

1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31너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짜서 휘장을 만들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 놓아서 (출26:1, 31)

 

23내소 안에 감람나무로 두 그룹을 만들었는데 그 높이가 각각 십 규빗이라 24한 그룹의 이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요 저쪽 날개도 다섯 규빗이니 이쪽 날개 끝으로부터 저쪽 날개 끝까지 십 규빗이며 25다른 그룹도 십 규빗이니 그 두 그룹은 같은 크기와 같은 모양이요 26이 그룹의 높이가 십 규빗이요 저 그룹도 같았더라 27솔로몬이 내소 가운데에 그룹을 두었으니 그룹들의 날개가 퍼져 있는데 이쪽 그룹의 날개는 이쪽 벽에 닿았고 저쪽 그룹의 날개는 저쪽 벽에 닿았으며 두 날개는 성전의 중앙에서 서로 닿았더라 28그가 금으로 그룹을 입혔더라 29내 외소 사방 벽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와 핀 꽃 형상을 아로새겼고 32감람나무로 만든 그 두 문짝에 그룹과 종려와 핀 꽃을 아로새기고 금으로 입히되 곧 그룹들과 종려에 금으로 입혔더라 (왕상6:23-29, 32)

 

이 구절에서, 그 안에 증거판이 들어있었던 증거궤가 생명 나무와 같은 것, 즉, 주님과 오직 주님에게 속한 천적인 것들 상징했기 때문입니다. For the ark, in which was the testimony, signified the same as the tree of lives in this passage, namely, the Lord and the celestial things which belong solely to him.

 

그래서 또한 주님은 자주 일컬음 받으시기를,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하셨고, 그래서 주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두 그룹 사이에서’ 말씀하셨습니다. Hence also the Lord is so often called the “God of Israel sitting on the cherubim,” and hence he spoke with Moses and Aaron “between the cherubim. (출25:22; 민7:89)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출25:22)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말하려 할 때에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 사이에서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이었더라 (민7:89)

 

이것은 그룹이 언급된, 에스겔에 잘 나와 있습니다. This is plainly described in Ezekiel, where it is said:

 

3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 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7그가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성전을 더럽혀 시체로 모든 뜰에 채우라 너희는 나가라 하시매 그들이 나가서 성읍 중에서 치더라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was uplifted from upon the cherub whereon he was, to the threshold of the house. And he called to the man clothed with linen, and said unto him, Go through the midst of the city, through the midst of Jerusalem, and set a mark upon the foreheads of the men who groan and sigh for all the abominations done in the midst thereof. And to the others he said, Go ye after him through the city, and smite; let not your eye spare, neither have ye pity; slay to blotting out the old man, and the young man, and the virgin, the infant, and the women; defile the house, and fill the courts with the slain. (겔9:3-7)

 

2하나님이 가는 베 옷을 입은 사람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그룹 밑에 있는 바퀴 사이로 들어가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서 들어가더라 7그 그룹이 그룹들 사이에서 손을 내밀어 그 그룹들 사이에 있는 불을 집어 가는 베 옷을 입은 자의 손에 주매 그가 받아 가지고 나가는데 He said to the man clothed in linen, Go in between the wheel to beneath the cherub, and fill thy palms with coals of fire from between the cherubim, and scatter them over the city; the cherub put forth his hand from between the cherubim unto the fire which was between the cherubim, and took thereof, and put it into the palms of him that was clothed in linen, who took it and went out. (겔10:2, 7)

 

이 구절들에서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이 신앙의 신비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그룹’으로 상징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비정상적인 탐욕들 가운데 남겨졌다는 사실을 여기 ‘성읍 위에 흩을 숯불’이 상징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아무도 불쌍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From these passages it is evident that the providence of the Lord in preventing men from entering into the mysteries of faith is signified by the “cherubim”; and that therefore they were left to their insane cupidities, here also signified by the “fire that was to be scattered over the city,” and that “none should be spared.

 

2021-05-10(D2)-창세기(창3,24, AC.306-308), '여섯 번째, 일곱 번째 후손 이야기 (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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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Therefore Jehovah God sent him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창3:23)

 

 

305.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는 모든 지성과 지혜를 박탈당하는 것이며,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이었던 상태로 돌아가는 것, 짐승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To be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is to be deprived of all intelligence and wisdom; and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is to become corporeal, as he was previous to regeneration.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가 모든 지성과 지혜를 박탈당하는 것임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동산’, 그리고 ‘에덴’의 상징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동산’은 지성, 혹은 진리를 이해함을 상징하며, 사랑을 상징하는 ‘에덴’은 지혜, 혹은 선에 대한 의지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That to be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is to be deprived of all intelligence and wisdom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garden,” and of “Eden,” as above; for a “garden” signifies intelligence, or the understanding of truth; and “Eden,” being significative of love, signifies wisdom, or the will of good.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가 사람이 거듭나기 전 상태였던, 짐승과 다름없는 상태가 됨을 상징한다는 것은 위 19절 말씀에서 이미 보았는데요, 그 말씀도 비슷합니다. That to “till the ground from which he was taken” signifies to become corporeal, such as he was before regeneration, has been shown above (verse 19), where similar words occur.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창3:19)

 

2021-05-09(D1)-창세기(창3,23, AC.305), '태고 교회 다섯 번째 후손 이야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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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5-09(D1)-제9권19호통402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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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창3:22)

 

 

303. 사람은 그가 설득을 받은, 즉, 인정하고 믿는 모든 것을 통해 생명을 얻습니다. A man acquires a life by all the things he is persuaded of, that is, which he acknowledges and believes.

 

설득되지 않거나, 인정하고 믿지 않는 것으로는 사람은 마음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That of which he is not persuaded, or does not acknowledge and believe, does not affect his mind.

 

그리고 그래서 사람은 설득을 받아 인정하고 있는 한, 그리고 아직 부인하지는 않고 있는 한, 아무도 거룩한 것들을 모독할 수 없습니다. And therefore no one can profane holy things unless he has been so persuaded of them that he acknowledges them, and yet denies them.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마 알면서도 마치 모르는 것처럼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아는 사람들처럼 말이지요. Those who do not acknowledge may know, but are as if they did not know, and are like those who know things that have no existence.

 

주님의 강림 시기에 유대인들의 모습이 저랬습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저들을 가리켜 ‘황폐해졌다’, 혹은 ‘파괴되어 초토화되었다’, 즉, 더 이상 무슨 신앙이라는 게 없다 하는 것입니다. Such were the Jews abou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and therefore they are said in the Word to be “vastated” or “laid waste,” that is, to have no longer any faith.

 

이런 상황 가운데서는, 말씀의 속 뜻들이 그들에게 오픈된다고 해서 그들이 무슨 해를 받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은 비록 보고 있으나 아직 못 보며, 듣고 있으나 아직 못 듣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꽉 막혀 있습니다. 이들에 관하여 주님은 이사야에서 말씀하셨습니다. Under these circumstances it does men no injury to have the interior contents of the Word opened to them, for they are as persons seeing, and yet not seeing; hearing, and yet not hearing; whose hearts are stopped up; of whom the Lord says in Isaiah: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Go and tell this people, Hearing hear ye, but understand not, and seeing see ye, but know not. Make the heart of this people fat, and make their ears heavy, and smear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and hear with their ears, and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be converted, so that they be healed. (사6:9-10)

 

사람들이 그런 상태, 즉, 너무나 황폐해져서 더 이상 아무 것도 안 믿는 상태(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들이 신앙의 신비들을 모독할 수 없는)가 될 때까지 신앙의 신비들은 밝히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은 같은 이사야 계속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아주 분명히 선포하고 계십니다. That the mysteries of faith are not revealed until men are in such a state, that is, are so vastated that they no longer believe (in order, as before said, that they may not be able to profane them),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the subsequent verses of the same prophet: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Then said I, Lord, how long? And he said, Even until the cities are desolated, so that there be no inhabitant; and the houses, so that there be no man, and the ground be utterly desolated, and Jehovah have removed man. (사6:12)

 

그를 일컬어 지혜로운, 혹은 인정하고 믿는 ‘사람’이라 하고 있습니다. He is called a “man” who is wise, or who acknowledges and believes.

 

유대인들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이 오셨을 때 그 정도로 황폐한 상태였습니다. 동일한 이유로,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탐욕들, 특히 그들의 욕망, 허욕 때문에 그런 황폐함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주님에 관해 수천번을 듣고, 또 그들의 교회의 여러 상징들이 그 어느 것 하나 예외 없이 다 주님을 가리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아무것도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고 있습니다. The Jews were thus vastated, as already said,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and for the same reason they are still kept in such vastation by their cupidities, and especially by their avarice, that although they hear of the Lord a thousand times, and that the representatives of their church are significative of him in every particular, yet they acknowledge and believe nothing.

 

이것이 노아 이전 사람들이 에덴 동산에서 내쫓기고, 그리고 더 이상 어떠한 진리도 인정할 수 없는 바로 그 지경까지 황폐해진 사유입니다. This then was the reason why the antediluvians were 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and vastated even until they were no longer capable of acknowledging any truth.

 

 

304. 이 모든 사실로부터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라는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해지는데요, From all this it is evident what is meant by the words,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는 사랑과 신앙에 대해서 알되 얼마든지 시인하고, 인정하기 위해서 아는 걸 말합니다. ‘생명’이 이렇게 복수로 사용되면 사랑과 신앙을 뜻하며, 여기 ‘먹다’는 전에도 말씀드렸듯 ‘알다’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To “take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is to know even so as to acknowledge whatever is of love and faith; for “lives” in the plural denote love and faith, and to “eat” signifies here as before, to know.

 

영생하다’는 몸, 육체를 가지고 영원히 산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는 사후 지옥에서 영원히 산다는 뜻입니다. To “live to eternity” is not to live in the body to eternity, but to live after death in eternal damnation.

 

죽은’ 사람이라고 하는 이유는, 사람은 몸의 생명, 육체의 생명이 다 한 후에는 죽기 때문이며, 그러나 그는 사후에도 계속해서 죽음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지옥같은 삶이며, 곧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A man who is “dead” is not so called because he is to die after the life of the body, but because he will live a life of death, for “death” is damnation and hell.

 

살다’라는 표현 역시 에스겔을 보면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The expression to “live,” is used with a similar signification by Ezekiel:

 

18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려고 손목마다 부적을 꿰어 매고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수건을 만드는 여자들에게 화 있을진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은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는 영혼을 살리려 하느냐 19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Ye hunt souls for my people, and save souls alive for yourselves, and ye have profaned me among my people, to slay souls that will not die, and to make souls live that will not live. (겔13:18-19)

 

2021-05-08(D7)-창세기(창3,22, AC.303-304), '생명 나무를 먹지 못하게 하신 이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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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창3:22)

 

 

301. 다른 아케이나는, 그들이 신앙의 신비들을 밝히 알게 되면, 그들은 영원히 소멸된다는 것으로, 이것이 본문,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가 상징하는 것입니다. The other arcanum is that had they been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they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which is signified by the words,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이것은 이런 경우입니다. 그동안 생명의 질서들하고는 반대로 살아온 사람들은 그래서 이제는 살아가는 것도, 지혜로워지는 것도 자기 자신들로만, 그리고 자신들의 고유 본성으로만 하려고 하게 되면, 그들은 자신들이 신앙에 대해 듣는 모든 것을 그게 과연 그런지 아닌지 따져보기 시작합니다. The case is this: When men have become inverted orders of life, and are unwilling to live, or to become wise, except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ey reason about everything they hear respecting faith, as to whether it is so, or not;

 

그리고 그들이 이런 짓을 자신들로부터, 그리고 감각과 기억-지식들로 구성된 자신들의 고유 본성의 일들로부터 하기 때문에, 이들은 필연적으로 부인하게 되고, 그 결과, 신성모독(神性冒瀆)과 불경(不敬)에 이르게 되며, 그래서 결국, 그들은 세속(世俗)에다가 거룩을 섞는 일을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합니다. and as they do this from themselves and from their own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it must needs lead to denial, and consequently to blasphemy and profanation, so that at length they do not scruple to mix up profane things with holy.

 

사람이 이 지경이 되면, 그는 저 세상에서 유죄 선고를 받아 구원을 받을 아무 희망도 남지 않게 됩니다. When a man becomes like this, he is so condemned in the other life that there remains for him no hope of salvation.

 

그 이유는, 신성모독으로 섞인 것들은 그렇게 섞인 상태로 있게 되고, 그래서 어떤 거룩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과 결합 되어 있는 불경한 생각 또한 따라 나오게 되어, 그 결과, 그 사람은 지옥 말고는 그 어떤 데에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For things mixed up by profanation remain so mixed up, so that whenever any idea of something holy presents itself, an idea of something profane that is conjoined with it is also there, the consequence of which is that the person cannot be in any society except one of the damned.

 

이렇게 세속적인 것에 거룩한 것을 섞는 식으로 살아온 사람은 어떤 한 조각 생각을 하더라도, 저 세상에서는 정말 기가 막힌 방법으로 지각되는데요, 바로 영들의 세계에 있는 영들에 의해서, 그리고 천사 같은 영들에 의해서는 더욱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자신의 캐릭터 전체가 정말 기가 막힌 방법으로 지각된다는 사실입니다. Whatever is present in any idea of thought in consequence of being conjoined with it, is most exquisitely perceived in the other life, even by spirits in the world of spirits, and much more so by angelic spirits, so exquisitely indeed that from a single idea they know a person’s character.

 

이렇게 서로 묶여 있는 세속과 거룩 간 분리는, 지옥과도 같은 고통이 아니고서는 일어날 수가 없는데요, 사람이 이런 것을 깨닫고, 정말 지옥 자체를 피하듯 조심조심 신성모독을 피하려고 할 때만 이 둘의 분리는 일어납니다. The separation of profane and holy ideas when thus conjoined cannot be effected except by means of such infernal torment that if a man were aware of it he would as carefully avoid profanation as he would avoid hell itself.

 

 

302. 이것이 왜 신앙의 신비들이 유대인들에게는 절대로 계시되지 않았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This is the reason why the mysteries of faith were never revealed to the Jews.

 

그들은 사람의 사후에도 삶이 있다는 것과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말씀들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They were not even plainly told that they were to live after death, nor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to save them.

 

그들은 아주 대단할 정도로 무지하고 어리석어서 그렇게 고집스러웠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속 사람과, 혹은 내적인 일들의 존재에 관해 몰랐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만일 그들이 전부터 그걸 알았었거나 지금 알게 되어 그걸 인정하게 되면, 그들은 기어코 그걸 신성모독하고, 그래서 기어코 저 세상에서 자기들 몫의 어떤 구원도 남겨 놓지 않을 그런 캐릭터들이기 때문입니다. So great were the ignorance and stupidity in which they were kept, and still are kept, that they did not and do not know of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 man, or of anything internal, for if they had known of it, or if they now knew of it, so as to acknowledge it, such is their character that they would profane it, and there would be no hope of any salvation for them in the other life.

 

이것이 주께서 요한복음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This is what is meant by the Lord in John: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He hath blinded their eyes, and stopped up their heart, that they should not see with their eyes, nor understand with their heart, and convert themselves, and I should heal them. (요12:40)

 

그리고 주께서 그들에게 풀이 없이 비유로만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안 그러면 그들이 보며, 들으며,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입니다. And by the Lord speaking to them in parables without explaining to them their meaning, lest (as he himself says),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Seeing they should see, and hearing they should hear, and should understand. (마13:13)

 

같은 이유로, 신앙의 모든 신비가 그들에게는 숨겨졌고, 그들의 교회를 대표하는 것들 속으로 봉인되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또한 말씀도 예언적 스타일로 주신 것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ll the mysteries of faith were hidden from them, and were concealed under the representatives of their church, and for the same reason the prophetic style is of the same character.

 

그렇지만,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It is however one thing to know, and another to acknowledge.

 

알고는 있는데 인정하지는 않는 사람은 마치 그걸 몰랐던 사람인 것처럼 있습니다. 그런데 인정을 하고, 나중에 신성모독을 하고, 불경스럽게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이것이 위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들의 의미입니다. He who knows and does not acknowledge is as if he knew not; but it is he who acknowledges and afterwards blasphemes and profanes, that is meant by these words of the Lord.

 

2021-05-07(D6)-창세기(창3,22, AC.301-302), '생명 나무를 가져다 먹고 영생하는 것'.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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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And Jehovah God said, Behol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and now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and eat, and live to eternity, (창3:22)

 

 

298. ‘여호와 하나님’이 처음엔 단수로, 그리고 나중엔 복수로(in the plural number) 언급되는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님을, 그리고 동시에 천사들의 천국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Jehovah God” is first mentioned in the singular, and afterwards in the plural number, is that by “Jehovah God” is meant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the angelic heaven.

 

그 사람의 ‘선악을 아는 일’이 상징하는 것은, 그가 天人이 되었고, 그래서 지혜와 지성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가 의미하는 것은, 그는 절대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해 밝아서는 안 되며, 만일 그렇게 되면, 그는 영원히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영원히 산다는 것’의 뜻입니다. The man’s “knowing good and evil” signifies that he had become celestial, and thus wise and intelligent; “lest he put forth his hand, and take also of the tree of lives” means that he must not be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for then never to all eternity could he be saved, which is to “live to eternity.

 

 

299. 여기엔 두 가지 아케이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님과, 그리고 동시에 천국을 상징한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들이 신앙의 신비들을 밝히 알게 되면, 그들은 영원히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Here are two arcana: first, that “Jehovah God” signifies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heaven; secondly, that had they been instructed in the mysteries of faith they would have perished eternally.

 

 

300. 첫 번째 아케이나인, ‘여호와 하나님’이 주님과, 그리고 동시에 천국을 의미한다는 것과 관련, 말씀에서는 늘 어떤 비밀스런 이유로, 주님을 어떨 때는 단지 ‘여호와’로만, 어떨 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어떨 때는 ‘여호와’와 그리고 ‘하나님’으로, 어떨 때는 ‘주 여호와’로, 어떨 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그리고 어떨 때는 ‘하나님’으로만 부릅니다. As regards the first arcanum—that by “Jehovah God” is meant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heaven—it is to be observed that in the Word, always for a secret reason, the Lord is sometimes called merely “Jehovah,” sometimes “Jehovah God,” sometimes “Jehovah” and then “God,” sometimes the “Lord Jehovih,” sometimes the “God of Israel,” and sometimes “God” only.

 

그래서 창세기 첫 장, 거기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복수 표현이 나오는 데서 ‘하나님’으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일컬음 받으시는 것은, 天人을 다루는 다음 장부터입니다. Thus in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where it is also said, in the plural,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he is called “God” only, and he is not called “Jehovah God” until the following chapter, where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그는 ‘여호와’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그는 홀로 계시며, 혹은 사시고, 그래서 본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전능하시며, 그래서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런 구분들이 있는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He is called “Jehovah” because he alone is or lives, thus from essence; and “God,” because he can do all things, thus from power; as is evident from the Word, where this distinction is made. (사49:4, 5; 55:7; 시18:2, 28, 29, 31; 31:14)

 

4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5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사49:4-5)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55:7)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9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시18: 2, 28-29, 31)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31:14)

 

이런 이유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리고 어떤 능력을 가진 것으로 여겨졌던 모든 천사나 영을 일컬어, ‘하나님’이라 하였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지요. On this account every angel or spirit who spoke with man, and who was supposed to possess any power, was called “God,” as appears from David: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God hath stood in the congregation of God, he will judge in the midst of the gods; (시82:1)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Who in the sky shall be compared unto Jehovah? Who among the sons of the gods shall be likened to Jehovah? (시89:6)

 

2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Confess ye to the God of gods, confess ye to the Lord of lords. (시136:2–3)

 

사람들도 능력을 소유했을 때는 그들을 일컬어 ‘신들’이라 합니다. Men also as being possessed of power are called “gods,” as in Ps. 82:6; John 10:34, 35.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82:6)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요10:34-35)

 

모세 또한 ‘바로에게 신’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Moses also is said to be “a god to Pharaoh. (출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출7:1)

 

이런 이유로, 히브리어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은 ‘엘로힘’이라는 복수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For this reason the word “God” in the Hebrew is in the plural number—“Elohim.

 

그러나 천사들은 자기들 스스로는 그 어떤 힘도 갖고 있지 않으며, 자기들은 실제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고, 대신 힘이라는 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기 때문에, 그리고 오직 한 분 하나님만 계시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 하면 주님 홀로 한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But as the angels do not possess the least power of themselves, as indeed they acknowledge, but solely from the Lord, and as there is but one God, therefore by “Jehovah God” in the Word is meant the Lord alone.

 

그러나 천사들의 사역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가령 창세기 첫 장에서처럼, 그분은 복수로 표현되십니다. But where anything is effected by the ministry of angels, as in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he is spoken of in the plural number.

 

여기서는 또한 天人이, 이 역시 사람인데요, 주님하고는 감히 비교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천사하고만 비교 가능한 존재, 즉,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즉, 지혜와 지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Here also because the celestial man, as man, could not be put in comparison with the Lord, but with the angels only, it is sai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that is, is wise and intelligent.

 

2021-05-06(D5)-창세기(창3,22, AC.298-300), '‘여호와 하나님’이 상징하는 것'.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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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창3:21)

 

 

296. 염소의 새끼들, 양, 염소들, 해달들과 숫양들이 영적, 자연적 선들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야곱을 다룬 곳과, 또 궤를 다룬 곳의 속뜻으로부터 분명합니다. That the skins of kids, sheep, goats, badgers, and ram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s, is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ere Jacob is treated of, and also where the ark is treated of.

 

야곱의 경우, ‘에서의 의복으로 옷 입혀졌고’, 그의 손과 목 매근매끈한 곳에는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입혔으며, 그리고 이삭이 그 향취를 맡았을 때, ‘내 아들의 향취는 밭의 향취로다’ 말하였다 하고 있습니다. Of Jacob it is said that he was “clothed with the raiment of Esau,” and on his hands and on his neck, where he was naked, “with skins of kids of the goats,” and when Isaac smelled them, he said, “the smell of my son is as the smell of a field. (창27:15, 16, 27)

 

15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27:15, 16, 27)

 

이 가죽들이 영적, 자연적 선들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해당 부분을 다룰 때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 3577번 글 참조) That these skin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s,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een in that place.

 

궤의 경우는, 성막의 덮개는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Of the ark it is said that the covering of the tent was “of rams’ skins and badgers’ skins, (출26:14; 36:19)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출26:14)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었더라 (출36:19)

 

그리고 그들이 전진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증거궤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같은 식으로 상과 대접들, 등잔대와 그릇들, 금제단, 그리고 성소에서 봉사하는 데에 쓰는 그릇들도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and that when they set forward Aaron and his sons covered the ark with a covering “of badgers’ skins,” and likewise the table and its vessels, the candlestick and its vessels, the altar of gold, and the vessels of ministry and of the altar. (민4:6–14)

 

6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7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8홍색 보자기를 그 위에 펴고 그것을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9청색 보자기를 취하여 등잔대와 등잔들과 불 집게들과 불똥 그릇들과 그 쓰는 바 모든 기름 그릇을 덮고 10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를 해달의 가죽 덮개 안에 넣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1금제단 위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고 그 채를 꿰고 12성소에서 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를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3제단의 재를 버리고 그 제단 위에 자색 보자기를 펴고 14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 곧 불 옮기는 그릇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부삽들과 대야들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두고 해달의 가죽 덮개를 그 위에 덮고 그 채를 꿸 것이며 (민4:6-14)

 

이 가죽들이 영적,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는 것 또한 주님의 신적 자비로 해당 부분에서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증거궤, 성막, 혹은 장막 안에 있던 모든 것, 네, 아론이 거룩한 옷을 입었을 때, 그 옷 위에 있었던 모든 것이 사실은 천적, 영적인 것을 상징하고 있었고, 그래서 아주 사소한 것 하나도 그 나름의 고유한 표현을 갖지 않은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will in that place also be seen that these skin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 for whatever was in the ark, the tabernacle, or the tent, yea, whatever was upon Aaron when clothed with the garments of holiness, signified what is celestial spiritual, so that there was not the least thing that had not its own representation.

 

 

297. 천적 선은 옷을 입지 않습니다. 가장 내적이며, 천진(天眞)하기 때문입니다. 천적 영적 선은 옷을 입는 첫 번째 선이며, 다음은 자연적 선입니다. 이들은 더 외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이것으로 비유되며, 이런 선을 가리켜 ‘’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에스겔에서 고대교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말이지요. Celestial good is not clothed, because it is inmost, and is innoce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is that which is first clothed, and then natural good, for these are more external, and on that account are compared to and are called “garments”; as in Ezekiel,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두르고 모시로 덧입히고 I clothed thee with broidered work, and shod thee with badger, I girded thee about with fine linen, and I covered thee with silk. (겔16:10)

 

이사야에서는 In Isaiah: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Put on thy beautiful garments, O Jerusalem, the city of holiness. (사52:1)

 

계시록에서는 In Revelation: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and they shall walk with me in white, for they are worthy, (계3:4–5)

 

4장 4절에서도, ‘흰옷을 입은’ 이십사 장로들에 대해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where it is likewise said of the four and twenty elders that they were “clothed in white raiment. (4:4)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계4:4)

 

그래서 천적 영적인 더 외적인 선들은 ‘옷들’입니다. 또한 그런 이유로, 체어리티의 선들이 있는 사람들은 천국에서는 광채 나는 옷을 입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몸 안이기 때문에, ‘가죽옷’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Thus the more external goods, which are celestial spiritual, and natural, are “garments”; wherefore also those who are endowed with the goods of charity appear in heaven clothed in shining garments; but here, because still in the body, with a “coat of skin.

 

2021-05-05(D4)-창세기(창3,21, AC.296-297), '가죽, 옷'.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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