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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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 구약 말씀을 단순히 그 겉 글자로만(the mere letter of the Word), 즉 기록된 글자 그대로만 읽어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말씀의 이면(裏面, this part of the Word)에는 천국의 깊은 비밀들(de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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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 그러나 기독교계는 아직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일반적이든 아니든 아니, 가장 작은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一點一劃, the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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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 그런 생명 없이는, 그저 겉 글자 만이기만 한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3 그런 생명 없이는, 그저 겉 글자 만이기만 한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계에서 알려진 대로 속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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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 창세기 첫 장, 그 내적 의미로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 또는 그의 중생, 특히 가장 오래된 교회를 다루고 있는 등, 이러한 모든 표현 안에 아르카나가 포함되지 않은 말씀은 하나도 없다 4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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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창1, AC.서문, '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AC.1-5)

※ 저는 지난 수년간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계속 끊임없이 함께 지내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거나 그들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즉 제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주님의 신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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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7(D1)-주일예배(2535, 눅17,20-27), ‘인자(人子)의 날, 번개의 번쩍임’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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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4-03-17(D1)-주일예배(2535, 눅17,20-27), ‘인자(人子)의 날, 번개의 번쩍임’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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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人子)의 날, 번개의 번쩍임’의 속뜻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24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26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눅17:20-27)

 

 

천사들이 이 천국 또는 저 천국에 있는 것은 그들의 내면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면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는 만큼 그들은 보다 내적인 천국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 33, 이순철 역) with the angels it is the interiors that cause them to be in one heaven or another; for as their interiors are more open to the Lord they are in a more interior heaven. (HH.33)

 

 

유대인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다 돌아온 이후 의기소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구약의 예언에 따라 언젠가는 메시아가 오셔서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더구나 주님이 오셨을 당시는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암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열망은 더욱 컸습니다. 그들이 그런 바람을 가지게 된 것은 구약의 예언 때문이었는데, 특히 이사야서 11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4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9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1, 4, 9)

 

유대인들은 이 말씀 속에 속뜻이 있다는 것은 모르고 단지 메시아가 오셔서 다윗 왕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고만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곧 메시아의 출현이었던 것입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메시아이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물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도 세상 나라들처럼 물질로 만들어지는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세워지는 사랑과 지혜의 나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임할까요? 마가복음 4장 26절 이하에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막4:26-29)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자연적인 나라가 아니라 사람의 내면에 세워지는 영적 나라이며,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한 사람의 생애 전체를 통해 아주 천천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번에는 제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때가 이른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의미합니다. 즉 교회 안에 더 이상 사랑도 없고 진정한 믿음도 없는 때입니다. 교회들이 영적으로 그렇게 피폐해질 때, 신실한 신앙인들은 진리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닙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진정한 진리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즉 참된 진리를 찾아다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교인들의 모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말씀에서 ‘인자’는 진리이신 주님을 뜻하고,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는 것은 교회 안에 진리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에 진리가 없는 이유가 뭘까요? 그들이 말씀을 왜곡, 거짓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마3:10)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나무는 진리 또는 믿음을 뜻하고, 열매는 진리에 따른 삶의 행위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진리만 있고, 진리에 따른 삶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교회가 그와 다르게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거짓입니다. 거짓된 교리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랑과 진리를 파괴하고, 그렇게 해서 교회를 내적으로 붕괴시킵니다. 교회의 종말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23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교회의 마지막 때는 진리를 가장한 수많은 거짓과 이설이 나타나 진리에 목마른 신앙인들을 현혹합니다. 그 거짓들은 아주 교묘해서 가끔은 진리를 많이 안다는 사람조차도 빠져듭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신실한 교인들을 향해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 하십니다. 진리를 잘 모르는 사람이 거짓에 빠져드는 것은 큰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를 잘 아는 사람이 거짓에 빠지는 것은 큰 죄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더럽히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24절에서는 세상의 종말, 즉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24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여기서 ‘인자의 날’은 교회의 마지막 때를 뜻하며, 동시에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의 교리로서 참된 진리를 선포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그때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번쩍이는 것은 교회의 거짓들과 맞서 싸우는 신성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번개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신성한 진리를 가지고 어떻게 싸우실까요? 한편으로는, 진리를 찾아 헤매던 신실한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밝혀 주십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진리를 알면서도 왜곡했던 사람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들에게서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빼앗아 버리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 것이 오히려 큰 화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것에 대해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9:39)

 

주님이 오셔서 참된 진리를 세상에 밝히실 때 거짓 교리 안에 있는 교회들은 가만히 있을까요?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핍박하고 말살하려고 합니다. 그것을 본문 25절에서는,

 

25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이 말씀은 교회들이 신성한 진리를 모독하고 배척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유대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장로의 전통이라는 인간의 교리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모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어린 양같이 순결하신 주님을 욕하고 폭행하며,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주님을 폭행하고 죽이는 것은 신성한 진리를 모독하고 말살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그 본질에 있어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시기 때문이며, 이 진리는 선 자체이신 여호와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진리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요한복음에서는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1:9, 10)

 

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항상 교회들에 의해 말씀이 왜곡되고 조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주님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이 시대도 그렇습니다. 이 시대의 새 교회도 이유 없이 박해를 받았고, 교리가 부인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시험을 이기시고, 신성한 인간으로 부활하신 것처럼 새 교회의 진리도 시험을 딛고 이겨냄으로써 보다 완전하고 단단한 진리가 됩니다. 완전한 진리가 된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진리와 선, 또는 믿음과 인애, 체어리티의 삶이 더욱 긴밀하게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악과 거짓의 위협과 유혹을 이겨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 주님이 밝혀 주시는 새로운 진리를 통해 눈이 밝아진 사람들은 그들 마음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거짓 진리를 끝까지 붙들고 참된 진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은 점점 눈이 어두워져 나중에는 진리가 뭔지 거짓이 뭔지도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맹인, 소경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 신앙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어린 양 같은 순진함입니다. 그래야 주인이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진리의 우리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진리는 그냥 가지고만 있는 진리가 아닙니다. 고난의 진리이며, 형제와 이웃들로부터 버림받을 수도 있는 진리입니다. 시험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의 손을 잡고, 시험을 이기고 또 이기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새 교회의 모든 성도들, 그리고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웃들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6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눅17:26, 27)

 

아멘

 

원본

2021-09-1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4-03-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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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구원 시스템, 주님의 구원 시스템 (2024/3/16)

 

다음은 교보문고 웹사이트에서 검색한 책, ‘위대한 선물’(스베덴보리 연구회 편역)에 달린 후기들에 대한 통계인데요, 총 48개의 후기 중 부정적인 후기는 전체의 12%인 반면, 나머지 88%가 긍정적이었습니다. 아래는 부정적인 몇 가지 후기입니다.

 

 

ra*****|2009.08.01

종교 1위라니 지금 깜짝 놀랐습니다.

 

베스트셀러라고 무턱되고 보지마세요 검증된거 하나도 없습니다.

 

이책과 관련된 세미나도 있는데요 가지마세요

 

정 은혜 회복 되고 싶으시면 예배생활과 성경을 보세요

 

su*******|2009.06.18

제가 이 서적을 비방하려고 하는것이 아닙니다. 저는 장로교에 다니는 일반 성도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 서적을 보면 우리에 교리와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것입니다.

 

10장도 채안되서 그냥 버렸습니다 .새일교인가? 몰몬교인가? 아무튼 외국 이단종파에 서적일뿐입니다.

 

말도 안되는 계시를 받고 어쩌고 저쩌고 보지 맙시다.

 

ch******|2009.11.06

대단히 위험한 책입니다... 왜 기독교 도서부문 베스트셀러가 됐는지 이해가 안되는군요 종교다원주의와 뉴에이지에 관한 내용인데 말입니다...

 

dm******|2009.10.29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말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사도행전 4장12절)

 

스베덴보리에 대해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왔기에 그의 책을 한번 읽어보겠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가 영계를 다녀오고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는 내용과 스베덴보리 연구회에서 한국적 시각에서 일부를 편집한 책이다.

 

이 책을 펴낸 스베덴보리 연구회는 여러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으로 종교에 상관없이 누구나 선하게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이 책에서 끊임없이 하고 있다. 특히 불교의 인물들을 예로 들며 종교다원주의적인 엉뚱한 결론을 내고 있다. 정작 스베덴보리는 불교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는데도 연구회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결론을 내림으로써 독자들을 우롱하고 있는 책이다.

 

종교다원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현실이지만 천국은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장 6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구절을 적당히 인용해서 자기들 입맛대로 편집한 책은 읽으면 우리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고 마음을 미혹하게 하는 사탄의 앞잡이 노릇만을 하는 도구가 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절대로 읽을 가치가 없는 책입니다.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천국과 지옥을 찾아보실 것을 권유합니다.

 

yo***|2009.05.02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기독교 신앙에 도움을 받았다는 식으로 글을 쓴다.하지만 포장을 잘 헤치고 내용을 보면이 책은 기독교 서적이 아니다.오히려 단전호흡 등을 통해 영계로 들어간 사람들의 경험담과 흡사하다. 이 책을 읽고 천국에 대한 인식을 통해 성실히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면 긍정적이다.하지만 이를 넘어서 기독교 신앙에 접목시키는 것은 머리를 안개속에 담가 놓는 것과 같을 것이다.

 

xf****|2014.02.28

추천해서 읽게 되었지만 추천하고 싶지 않다.

완전 대실망이다. 사후세계를 말하는 책들이 의례 허무맹랑하지만 한 시대의 저명한 과학자가 저술한 책답게 사후세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긴 하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성격이 말하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고 사후세계를 지극히 현세적 관점으로 그리고있다.

중간 즘 읽다가 멈췄는데 끝까지 읽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다음은 제가 위 글들 중 두 군데에 단 댓글들입니다.

 

 

Ca*******|2024.03.16

저는 연구회 사람은 아니지만 위 글 중 '연구회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결론을 내림으로써'라는 부분에 대해 그건 좀... 하며 생각나는 바 있어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이라는 챕터가 있으니 혹시, 시간되시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역본이 있으나 '김은경 역'을 추천합니다.

 

Ca*******|2024.03.16

위 내용 중, '이 책은 기독교 서적이 아니다'라는 부분에 대해 좀 바로잡았으면 하여 댓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라 하면 천주교를 포함, 개신(改新)교 전체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기독’(基督, 중국어로는 ‘기두’로 발음)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에 대한 한자 표기인 ‘基利斯督’(중국어로는 ‘기리스두’로 발음)를 음역(音譯), 그러니까 우리 식대로 축약해서 읽은 건데요, 가령, 프랑스를 ‘佛蘭西’(중국어 발음은 포란시), 즉 우리말 불란서로 읽는 것과 같은 겁니다. 개신교와 천주교는 둘 다 그 뿌리가 ‘기독’, 곧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타 종교 입장에서 봤을 땐 다 기독교인 것이지요. 이 외에도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뿌리로 하는 다양한 종파, 예를 들면, 정교회라든지, 콥트라든지 등등 모두 무슨 세계 종교 분포도 같은 통계를 낼 때는 다 합쳐서 기독교로 분류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그 출발이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기독교인 것이 확실하지요.

 

잠깐 위키백과를 보니 세계 종교에서 기독교가 25억이며, 그 안에서 가톨릭이 12억, 개신교가 6억, 정교회 3억 등으로 나옵니다. 현 전 세계 인구가 대략 80억으로 나오는 걸 보면, 기독교는 30프로 좀 넘네요. 주님의 시야엔 이 나머지 70프로, 55억의 인구 역시 천국으로 인도해야 할 자녀라는 사실과, 만일 개신교 6억만 놓고 볼 때도, 주님의 구원은 나머지 74억한테도 중요하지요. 그래서 주님은 현 개신교의 구원 시스템 외에 나머지 74억 모두를 아우르는 어떤 공정한 구원 시스템을 준비하셔야만 했는데, 그게 그렇게 언짢고 못 마땅하신지요?

 

 

두 번째 댓글 맨 마지막 문장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는데요, 위 부정적 후기를 올린 분들이 거의 개신교인들인 것 같고, 대부분 몹시 불편해하시는 걸 보면서 요나 생각이 났습니다. 특히 요나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들이 말이지요.

 

10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욘4:10, 11)

 

거듭, 80억 인류 가운데 고작(?) 6억인 개신교인들이 나머지 74억을 위해서도 구원의 방도를 마련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처사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다음은 위 첫 번째 댓글에서 언급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36장 '천국의 비기독교인들'(The Heathen, or Peoples outside of the Church, in Heaven)이라는 챕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김은경 역입니다.

 

318. 일반적 견해에 의하면 교회 밖에서 난 사람들, ‘이교도’, ‘비기독교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몰라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데, 주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구원받는다는 것은 다음 한 가지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의 자비는 보편적이며 모든 사람을 향한 자비라는 사실이다. 또 비기독교인들은 이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한 교회 사람들과 다를 것 없이 사람으로 태어나며, 또 그들이 주를 모르는 것도 그들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밝은 이성으로 생각한다면, 사람은 단 한 명도 지옥에 가도록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주는 사랑 자체이시고, 그분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321. 나는 많은 경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덕적으로 살고, 자기 종교에 따라 순종과 겸손과 서로 간의 이웃사랑으로 살았으며, 그래서 양심을 지니게 된 비기독교인들이 내세에 가면 천사들이 이들을 받아들여 정성을 다해 선과 신앙적 진리에 대해 세심히 가르쳐준다. 이 사람들은 일단 배우고 나면, 겸손하고 총명하고 지혜롭게 행하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한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신앙적 진리에 위배되는, 뽑아버려야 할 그릇된 관념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특히 주님을 보통 사람으로밖에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는 것과 같은, 주님을 함부로 여기는 관념은 더욱 없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로 비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고, 그렇게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셨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수긍하고, 주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은 천상천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인류는 그분의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당신을 온전히 나타내신 것이라고 말한다. 주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는 것은 신적 진리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위 글들의 하이라이트는 각각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시고, 그 종교에 의해 신성과 내적 삶을 인식할 수 있게 섭리하셨다. 자기 종교에 따라 사는 것이 곧 내적으로 사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신성을 바라보게 되며, 사람이 신성을 바라보는 만큼 그는 세상을 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즉 외적 삶인 세속적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살고, 자기 종교에 따라 순종과 겸손과 서로 간의 이웃사랑으로 살았으며, 그래서 양심을 지니게 된 비기독교인들이 내세에 가면 천사들이 이들을 받아들여 정성을 다해 선과 신앙적 진리에 대해 세심히 가르쳐준다. 이 사람들은 일단 배우고 나면, 겸손하고 총명하고 지혜롭게 행하고, 기꺼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흡수한다.

 

입니다. 이 글들은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글이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인들은 이러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지요.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이런 조건(?)들은 천국 생활을 위한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에, 비록 주님의 말씀을 가진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실제 삶이, 그 내면이 이런 기본과 거리가 멀다면 그는 천국에서 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가 개신교에서 말하는 소위 ‘영접기도’라든지, ‘구원의 확신’이라든지, 그리고 ‘오직 믿음’, ‘오직 은혜’의 교리에 정통, 목숨 걸고 그 교리를 지킨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사실 이런 교리들은 다 바울서신에서 뽑아낸 것들이요, 복음서와 계시록, 그리고 창세기를 비롯한 ‘말씀(The Word)에는 나오지 않는 교리입니다. 오히려 복음서에서는 아래와 같이 가르칩니다.

 

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4:35-40)

 

그러므로 확실히 오늘 글 제목처럼 개신교의 구원 시스템과 주님의 구원 시스템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개신교인이지만 그 신앙에서 체어리티(charity, 이웃사랑)를 분리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내면이 천국에 합당하게 되어 구원받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담는 그릇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글 제목을 좀 더 정확히 잡는다면, ‘개신교인들 중에서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한 사람들의 구원 시스템과 주님의 구원 시스템은 다르다’가 되겠습니다. 사실 개신교인들 뿐이겠습니까? 기독교인들 전체가 그렇겠지요!

 

다음 주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 21)

 

즉 그 내면, 그 속 사람의 상태가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인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며, 이런 상태는 오직 ‘주님 사랑, 이웃 사랑(Love to the Lord and Charity toward the Neighbor)의 삶을 산 사람이라야만, 오직 그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하지 않은 사람이라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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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97,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AC.292-297) - '가죽옷', 옷을 입는 첫 번째 선인 영적 자연적 선을 상징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297

천적 선은 옷을 입지 않습니다. 가장 내적이며, 천진(天眞, innocent)하기 때문입니다. 천적 영적 선은 옷을 입는 첫 번째 선이며, 그 다음은 자연적 선입니다. 이들은 더 외적이기 때문인데 이런 이유로, 이들 선은 ‘’(garments)에 비유되며, 이들 선을 ‘’이라 합니다. 에스겔, 고대교회에 대한 말씀입니다. Celestial good is not clothed, because it is inmost, and is innocent; but celestial spiritual good is that which is first clothed, and then natural good, for these are more external, and on that account are compared to and are called “garments”; as in Ezekiel, speaking of the ancient church:

 

수 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두르고 모시로 덧입히고 (겔16:10) I clothed thee with broidered work, and shod thee with badger, I girded thee about with fine linen, and I covered thee with silk. (Ezek. 16:10)

 

이사야에서 In Isaiah:

 

시온이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네 힘을 낼지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여 네 아름다운 옷을 입을지어다 이제부터 할례 받지 아니한 자와 부정한 자가 다시는 네게로 들어옴이 없을 것임이라 (사52:1) Put on thy beautiful garments, O Jerusalem, the city of holiness. (Isa. 52:1)

 

계시록에서 In Revelation:

 

4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5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3:4–5) Who have not defiled their garments, and they shall walk with me in white, for they are worthy, (Rev. 3:4–5)

 

4장 4절에서도 ‘흰옷을 입은’ 이십사 장로들에 대해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적 영적 및 자연적인 더 외적인 선들이 ‘’입니다. 또한 이런 이유로, 체어리티의 선들을 가진 사람들은 천국에서는 광채 나는 옷을 입은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직 몸 안이기 때문에, ‘가죽옷’을 입은 것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where it is likewise said of the four and twenty elders that they were “clothed in white raiment” (4:4). Thus the more external goods, which are celestial spiritual, and natural, are “garments”; wherefore also those who are endowed with the goods of charity appear in heaven clothed in shining garments; but here, because still in the body, with a “coat of skin.”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앉았더라 (계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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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96,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AC.292-297) - 영적 자연적 선을 상징하는 '가죽옷'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296

염소의 새끼, 양, 염소, 해달 및 숫양이 영적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는 건 말씀에서 야곱이 나오는 데와 또 궤(the ark)가 나오는 데의 속뜻을 보면 분명합니다. 야곱의 경우, ‘에서의 의복으로 옷 입혀졌고’, 그의 손과 목 매근매끈한 곳에는 염소 새끼의 가죽으로 대신했으며, 이삭이 그 향취를 맡았을 때, ‘내 아들의 향취는 밭의 향취로다 하였습니다 (27:15, 16, 27). 이 가죽들이 영적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는 것은 주님의 허락으로 해당 부분(AC.3540)을 다룰 때 보시게 됩니다. 궤와 관련, 성막의 덮개는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26:14; 36:19). 그리고 그들이 전진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증거궤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같은 식으로 상과 대접들, 등잔대와 그릇들, 금제단, 그리고 성소에서 봉사하는 데에 쓰는 그릇들도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4:614). 이 가죽들이 영적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는 것 또한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해당 부분에서 보시게 됩니다. 궤, 성막 혹은 장막 안에 있던 것들은 그게 무엇이었던지 간에, 네, 아론이 입은 거룩한 옷 위에 있던 것들 또한 그게 무엇이었던지 간에 사실은 천적 영적인 것을 상징하였고, 그래서 아주 사소한 것 하나도 그 나름의 고유한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skins of kids, sheep, goats, badgers, and ram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s, is evident from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ere Jacob is treated of, and also where the ark is treated of. Of Jacob it is said that he was “clothed with the raiment of Esau,” and on his hands and on his neck, where he was naked, “with skins of kids of the goats,” and when Isaac smelled them, he said, “the smell of my son is as the smell of a field” (Gen. 27:15, 16, 27). That these skin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s,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een in that place. Of the ark it is said that the covering of the tent was “of rams’ skins and badgers’ skins” (Exod. 26:14; 36:19), and that when they set forward Aaron and his sons covered the ark with a covering “of badgers’ skins,” and likewise the table and its vessels, the candlestick and its vessels, the altar of gold, and the vessels of ministry and of the altar (Num. 4:6–14).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will in that place also be seen that these skins signify spiritual and natural good, for whatever was in the ark, the tabernacle, or the tent, yea, whatever was upon Aaron when clothed with the garments of holiness, signified what is celestial spiritual, so that there was not the least thing that had not its own representation.

 

15리브가가 집 안 자기에게 있는 그의 맏아들 에서의 좋은 의복을 가져다가 그의 작은 아들 야곱에게 입히고 16또 염소 새끼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의 매끈매끈한 곳에 입히고 (창27:15, 16)

 

27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27:27)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출26:14; 36:19)

 

6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7진설병의 상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대접들과 숟가락들과 주발들과 붓는 잔들을 그 위에 두고 또 항상 진설하는 떡을 그 위에 두고 8홍색 보자기를 그 위에 펴고 그것을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 9청색 보자기를 취하여 등잔대와 등잔들과 불 집게들과 불똥 그릇들과 그 쓰는 바 모든 기름 그릇을 덮고 10등잔대와 그 모든 기구를 해달의 가죽 덮개 안에 넣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1금제단 위에 청색 보자기를 펴고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고 그 채를 꿰고 12성소에서 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를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어 메는 틀 위에 두고 13제단의 재를 버리고 그 제단 위에 자색 보자기를 펴고 14봉사하는 데에 쓰는 모든 기구 곧 불 옮기는 그릇들과 고기 갈고리들과 부삽들과 대야들과 제단의 모든 기구를 두고 해달의 가죽 덮개를 그 위에 덮고 그 채를 꿸 것이며 (민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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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95,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AC.292-297) -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이유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295

태고인(太古人)들을 일컬어 ‘가죽으로 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들이 ‘벌거벗은 사람들’(naked)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노센스(innocence, 순진무구)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에게 있던 이 이노센스를 잃어버렸고, 그러자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역시 ‘벌거벗음’(nakedness)이기 때문입니다. (태고인들의 스피킹 방식에 맞춰) 모든 일이 상호 긴밀히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 그들은 벗은 채로 있게 될까 봐 주님이 자기들에게 옷을 입히셨다 라고 합니다. 악 가운데 있는 것은 벗은 채로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영적 자연적 선 가운데 있음이 분명한 것은 그들에 관한 언급인 위 본 장 1절로 13절까지 내용과, 그것이 여기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내용과 연관되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여기서는 그 교회의 첫 번째, 그리고 더욱 특별히는 두 번째, 세 번째 후손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인데, 이들은 그런 선을 받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hey are said to be “clothed with a coat of skin,” is tha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said to be “naked,” on account of their innocence; but when they lost their innocence they became conscious that they were in evil, which also is called “nakedness.” That all things might appear to cohere historically (in accordance with the way of speaking of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are here said to be “clothed lest they should be naked,” or in evil. Their being in spiritual and natural good is evident from what was remarked above concerning them, from verse 1 to 13 of this chapter, as well as from its being here related that “Jehovah God made them a coat of skin, and clothed them”; for it here treats of the first—and more especially of the second and third—posterities of the church, who were endowed with such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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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94,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AC.292-297) - '가죽'이 새끼 염소나 양, 숫양의 가죽으로 이해되는 이유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294

속뜻에 관한 어떤 계시 없이도, 그리고 말씀 내 유사 표현들이 나오는 여러 일련의 비교 구절들 없이도, 그 어느 쪽도 사람들이 여기 ‘가죽옷’이 영적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고 볼 거라는 건 아니지 싶습니다. 겉 글자만 읽고 그걸 안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가죽(skin)이라는 보통 쓰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새끼염소나 양, 또는 숫양의 가죽으로 이해가 되는데요, 말씀에서 이들 동물들은 선,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에 속한 애정, 그리고 체어리티에 속한 것, 즉 희생제사 때 쓰이던 양과 똑같은 걸 상징합니다. 체어리티의 선, 곧 영적 자연적 선을 가진 걸로 보이는 사람들을 (sheep)이라 하며, 그래서 주님도 양의 목자(the shepherd of the sheep)시라 하고, 체어리티를 가진 걸로 보이는 사람들을 그분의 이라 하는 것입니다. 다들 아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Neither would it be evident to anyone that a “coat of skin” signifies spiritual and natural good, except by a revelation of the internal sense, and a subsequent comparison of passages in the Word where similar expressions occur. The general term “skin” is here used, but that of a kid, sheep, or ram, is understood, which animals in the Word signify affections of good, charity, and that which is of charity, as was likewise signified by the sheep used in the sacrifices. Those are called “sheep” who are endowed with the good of charity, that is, with spiritual and natural good, and hence the Lord is called the “shepherd of the sheep,” and those who are endowed with charity are called his “sheep,” as everybody kn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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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93,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AC.292-297) -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가 따로 속뜻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293

이런 내용들은 겉뜻, 즉 겉 글자상으로는 도저히 보실 수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분명, 여기엔 어떤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는 게 틀림없는데요,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정말로 가죽옷을 지으셨다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It could never appear from the letter that these things are signified; and yet there is evidently here enfolded some deeper meaning, for everyone must be aware that Jehovah God did not make a coat of skin for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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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C.292, 창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AC.292-297) -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의 속뜻 개요

 

21절,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And Jehovah God made for the man and for his wife coats of skin, and clothed them.

 

292

이들 워딩은 주께서 그들을 영적 자연적 선(spiritual and natural good)으로 가르치셨음을 의미합니다. ‘지어(making)와 ‘입히시니라(clothing)는 주님이 그들을 가르치셨음을, ‘가죽옷(the coat of skin)은 영적, 자연적 선을 표현합니다. These words signify that the Lord instructed them in spiritual and natural good; his instructing them is expressed by “making” and “clothing,” and spiritual and natural good, by the “coat of s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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