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4:19)

 

AC.405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여섯 번째인 ‘라멕’(Lamech)은 황폐함(vastation)과 상응합니다. 더 이상 그 어떤 신앙도 없는 상태이지요. 그의 ‘두 아내’(two wives)는 새 교회의 도래, 일어남과 상응하는데, ‘아다’(Adah)는 그 교회의 천적,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와, ‘씰라’(Zillah)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와 상응합니다. By “Lamech,” who was the sixth in order from Cain, is signified vastation, in consequence of there being no longer any faith; by his “two wives” is signified the rise of a new church; by “Adah,” the mother of it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nd by “Zillah,” the mother of its natural things.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계보에서 여섯째에 해당하는 ‘라멕’을, 더 이상 신앙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일어나는 ‘황폐(vastation)를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거듭남의 여섯 단계 이후 일곱째에 이르는 질서와 대응되듯, 황폐 역시 단계적으로 진행되어 마침내 거의 모든 신앙이 소멸된 상태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라멕이 두 아내를 취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도덕적 문제가 아니라, ‘이 황폐의 끝에서 새로운 교회가 싹트기 시작함’을 암시합니다. 아다는 그 새 교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 곧 사랑과 신앙의 상위 차원을 낳는 어머니를 의미하고, 씰라는 그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 곧 외적 삶과 실천의 영역을 낳는 어머니를 의미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신앙이 거의 사라진 지점에서도,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AC.406, 창4:19, 라멕의 상태, ‘황폐’(vastation)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 ‘라멕’이 황폐함, 즉 어떤 신앙도 없는 상태와 상응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23, 24절을 보면 분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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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4, 창4:18, 첫 이단 '가인'에서 유래된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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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4:18)

 

AC.404

 

이 이름들은 모두 ‘가인’(Cain)이라 하는 첫 이단에서 유래된 이단들을 말합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이름들밖에는 현존하는 무슨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무슨 언급을 하는 건 적절치 않아 보입니다. 다만 이 이름들의 기원들을 가지고 뭔가 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이랏’(Irad)은 ‘성의 후손’(descends from a city)이라는 것, 그렇다면 ‘에녹’(Enoch)이라는 이단에서 비롯되었나? 뭐 그런 것입니다. All these names signify heresies derived from the first, which was called “Cain”; but as there is nothing extant respecting them, except the names, it is unnecessary to say anything about them. Something might be gathered from the derivations of the names; for example, “Irad” means that he “descends from a city,” thus from the heresy called “Enoch,” and so on.

 

 

해설

 

스베덴보리는 창4:18에 나열되는 이름들이 모두 가인에서 시작된 첫 번째 분열, 곧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는 이단적 상태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적 형태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이름들에 대해 성경이 더 이상의 설명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세부 내용을 추정하거나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름의 어원은 그 흐름을 암시하는 정도의 의미는 지니는데, 예를 들어 ‘이랏(Irad)이라는 이름은 ‘성읍에서 내려온 자(descends from a city)를 뜻하여, 앞서 말한 에녹이라는 교리적 성읍, 곧 이단적 체계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분열된 교리 상태임을 시사하는 식이지요. 이는 가인의 신앙이 하나의 오류로 끝나지 않고, ‘교리에서 교리로, 체계에서 체계로 연쇄적으로 분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결국 사랑을 잃은 신앙이 스스로를 기준 삼아 끝없이 새로운 분파를 만들어 내는 영적 구조를 드러낸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AC.405, 창4: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405-41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 가인으로부터 순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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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3, 창4:17, 태고교회 사람들의 서술 방식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 우리는 지금까지 ‘성’(城, city)이 뭘 상징하는지 보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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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4:17)

 

AC.403

 

우리는 지금까지 ‘성’(, city)이 뭘 상징하는지 보았습니다. 하지만 창세기 이 부분들은 모두 일종의 역사서술식으로 되어 있어서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곧 실제 역사, 실제 일어난 일로만 읽으시는 분들한테는 이 모든 게 틀림없이, 예를 들면, 가인이 성 하나를 건설하였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하였다는 식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 분명히 그 땅에는 이미 인구가 많았음을 가정해야 하는데... 가인이 단지 아담의 첫 번째 아들일 뿐임을 생각하면, 이 많은 사람은 갑자기 다 어디서 나타난 걸까요? 또 가인의 아내는 누가 낳은 딸인가요? 역사 서술식 기록들, 즉 창세기 12장, 아브람 전까지 기록들을 실제 일어난 역사로 읽을 경우는 다 그 안에 이런 문제점들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앞에서 관찰한 것처럼, 태곳적 사람들은 모든 걸 이렇게 일종의 역사적 형태를 띠는 이야기체, 일종의 스토리텔링식으로 정리하는 데 아주 익숙했는데요, 이런 일이 그들에게는 굉장히 고차원적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걸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We have now seen what a “city” signifies. 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 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 and was called Enoch, 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 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 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 But as we observed above,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 under representative types,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 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해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4장의 이 부분이 역사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문자적 의미에 머무는 사람에게는 가인이 실제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문자 그대로 읽을 경우, 가인이 아담의 첫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땅이 인구로 가득 차 있어 성읍을 세울 수 있었다고 상정해야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이 점은 본문이 자연적 역사를 기록하려는 의도가 아님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모든 영적 상태와 변화를 ‘대표, 그러니까 표상적 형상과 역사적 서사로 배열하는 방식’에 익숙했으며, 이러한 서술은 그들에게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영적 실재를 살아 움직이듯 체험하게 하는 표현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상태, 신앙의 분열, 교리의 형성 같은 내적 과정을 인물과 사건의 역사로 풀어내었고, 이를 통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생동감 있게 드러내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AC.402, 창4:17, 가인이 쌓은 '성'(城, city)의 속뜻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 ‘성을 쌓고’(city that was built)는 그 이단에서 나오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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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창4에 나오는 가인 계보인 이단의 범주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통일교,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JMS 같은 이단들을 포함해도 되나요? 한국에서 스베덴보리 오래 하신 분들 보면 이 부분이 좀 선명하지가 않은 느낌들을 받았거든요...

 

이 질문은 ‘목회적으로도, 신학적으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포함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는 ‘예, 그러나 방식이 중요하다’가 정확한 답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틀은 ‘특정 단체 낙인찍기가 아니라 영적 구조 분별’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단’은 ‘교리 구조’이지 ‘명단’이 아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AC.399-403에서 말하는 ‘이단(heresy)은 특정 조직이나 이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스스로를 체계화한 교리 구조’를 뜻한다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단이란 ‘틀린 주장을 하는 집단’이 아니라, ‘사랑보다 신앙, 지식, 교리, 계시 체계를 우위에 두고, 그 체계를 ‘성읍’처럼 방어, 확장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어떤 단체가 이 범주에 들어가는지는 ‘이름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그 단체의 중심 동력이 체어리티인가, 아니면 분리된 신앙과 지식인가’로 판단해야 합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오용됩니다.

 

둘째, 대한민국의 주요 이단 단체들은 ‘가인의 성읍’ 구조에 해당하는가?

 

질문하신 통일교, 신천지, 하나님의교회, JMS 등은 ‘스베덴보리적 범주에서 ‘가인의 계열’로 분류할 수 있는 구조적 특징’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체로 특별한 계시자, 중개자, 시대적 선택을 강조하고, 교리를 단계화, 교육화하며 (에녹의 의미), 내부 논리를 외부 비판으로부터 방어하는 체계를 강하게 구축합니다. 특히 ‘구원, 진리, 종말, 하나님의 역사’를 특정 교리 구조 안에 가두고, 체어리티(이웃 사랑, 자유, 양심, 겸손)를 ‘교리 복종의 하위 개념’으로 전락시킬 때, 이는 AC.402에서 말하는 ‘성읍으로 조직된 이단적 교리’의 전형적 모습과 정확히 겹칩니다. 이런 의미라면 ‘구조적으로는 포함해도 무방’합니다.

 

셋째, 그러나 ‘모든 구성원’을 동일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균형점은 여기입니다. 그는 ‘이단적 교리 구조’와 ‘그 안에 있는 개인의 영적 상태’를 철저히 구분합니다. AC 전반에서 반복되듯, 어떤 사람은 이단적 체계 안에 있으면서도 ‘체어리티의 선을 따라 살고’, 주님에 대한 단순한 신앙과 양심을 지닌 채 보호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표’와 직접 연결됩니다. 즉, ‘잘못된 성읍 안에 있어도, 주님은 그 사람 안의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따라서 목회적으로는 ‘그 단체는 가인의 성읍적 구조를 가졌다’라는 진단과,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동일하다’라는 판단을 절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넷째, 한국 스베덴보리 연구에서 이 부분이 흐릿한 이유

 

목사님이 느끼신 ‘한국에서 오래 하신 분들조차 이 부분이 선명하지 않다’는 인상은 매우 정확합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세 가지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를 ‘영적 체험가’나 ‘신비주의자’로만 읽고, 그의 ‘교회론, 이단론, 교리 비판의 날카로움’을 의도적으로 완화시켜 온 경향이 있습니다. 둘째, 한국 교회 현실에서 ‘이단’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정치화, 감정화되어 있기 때문에, 반대로 ‘침묵이나 모호성으로 회피’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셋째, 스베덴보리의 이단 비판은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구조 분석’이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려면 최소한 AC.1번 글부터 AC.400번 대 글까지를 읽고 거기 나오는 교회론을 충분히 소화해야 하는데, 그 작업이 매우 어렵습니다. 그 결과 핵심을 흐리는 설명들이 반복되어 온 것입니다.

 

다섯째, 목회적으로 어떻게 말하는 것이 가장 스베덴보리적인가?

 

가장 스베덴보리적인 방식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단은 특정 단체 명단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와 체계로 굳어진 상태’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여러 이단 단체들은 이 구조적 특징을 분명히 보여주지만, 주님은 그 안에 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동일하게 보지 않으시며, 각 사람 안의 신앙과 체어리티의 가능성을 구별하여 다루십니다.

 

이렇게 말할 때, ‘분별은 분명하고, 정죄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인의 표를 주신 주님의 방식이며, 스베덴보리의 길입니다. ‘단체와 사람을 구별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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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4:17)

 

AC.402

 

‘성을 쌓고’(city that was built)는 그 이단에서 나오는 모든 교리적, 이단적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이는 말씀에서 어떤 성(, city) 이름이 나오는 모든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그 구절들 중 단 한 곳도 성을 의미하는 구절은 없고, 항상 무슨 교리나 아니면 어떤 이단적인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성의 이름에 대해서도 전혀 모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천사들은 그 생각이 영적, 천적이어서, 성에 관한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 있지도, 가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저 성과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만 지각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성’(holy city), ‘거룩한 예루살렘’(holy Jerusalem)이라고도 하는, 이 역시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나라(the kingdom of the Lord)요, 특별한 의미로는 그 나라에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의미 말고는 전혀 없습니다. ‘성’(city)과 ‘시온산’(mountain of Zion) 역시 비슷하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후자는 신앙의 천적인 것을, 전자는 그 영적인 걸 가리키는 것으로 말이지요. That by the “city that was built” is signified all the doctrinal and heretical teaching that came from that heresy, is evident from every passage of the Word in which the name of a city occurs; for in none of them does it ever mean a city, but always something doctrinal or else heretical. The angels are altogether ignorant of what a city is, and of the name of any city; since they neither have nor can have any idea of a city, in consequence of their ideas being spiritual and celestial, as was shown above. They perceive only what a city and its name signify. Thus by the “holy city,” which is also called the “holy Jerusalem,” nothing else is meant than the kingdom of the Lord in general, or in each individual in particular in whom is that kingdom. The “city” and “mountain of Zion” also are similarly understood; the latter denoting the celestial of faith, and the former its spiritual.

 

[2] ‘성읍들’(cities), ‘궁전들’(palaces), ‘집들’(houses), ‘성곽들’(walls), ‘성곽 기초석들’(foundations of walls), ‘성벽들’(ramparts), ‘문들’(gates), ‘빗장들’(bars) 및 그 가운데 ‘성전, 성소’(temple) 또한 천적, 영적인 것 그 자체를 묘사합니다. 에스겔 48장입니다. The celestial and spiritual itself is also described by “cities,” “palaces,” “houses,” “walls,” “foundations of walls,” “ramparts,” “gates,” “bars,” and the “temple” in the midst; as in Ezekiel 48;

 

1모든 지파의 이름은 이와 같으니라 북쪽 끝에서부터 헤들론 길을 거쳐 하맛 어귀를 지나서 다메섹 경계선에 있는 하살에논까지 곧 북쪽으로 하맛 경계선에 미치는 땅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단의 몫이요 2단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아셀의 몫이요 3아셀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납달리의 몫이요 4납달리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므낫세의 몫이요 5므낫세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에브라임의 몫이요 6에브라임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르우벤의 몫이요 7르우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유다의 몫이요 8유다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너희가 예물로 드릴 땅이라 너비는 이만 오천 척이요 길이는 다른 몫의 동쪽에서 서쪽까지와 같고 성소는 그 중앙에 있을지니 9곧 너희가 여호와께 드려 예물로 삼을 땅의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이라 10이 드리는 거룩한 땅은 제사장에게 돌릴지니 북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요 서쪽으로 너비는 만 척이요 동쪽으로 너비가 만 척이요 남쪽으로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라 그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고 11이 땅을 사독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지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될 때에 레위 사람이 그릇된 것처럼 그릇되지 아니하였느니라 12땅의 예물 중에서 그들이 예물을 받을지니 레위인의 접경지에 관한 가장 거룩한 예물이니라 13제사장의 경계선을 따라 레위 사람의 몫을 주되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으로 할지니 이 구역의 길이가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가 각기 만 척이라 14그들이 그 땅을 팔지도 못하며 바꾸지도 못하며 그 땅의 처음 익은 열매를 남에게 주지도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 거룩히 구별한 것임이라 15이 이만 오천 척 다음으로 너비 오천 척은 속된 땅으로 구분하여 성읍을 세우며 거주하는 곳과 전원을 삼되 성읍이 그 중앙에 있게 할지니 16그 크기는 북쪽도 사천오백 척이요 남쪽도 사천오백 척이요 동쪽도 사천오백 척이요 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며 17그 성읍의 들은 북쪽으로 이백오십 척이요 남쪽으로 이백오십 척이요 동쪽으로 이백오십 척이요 서쪽으로 이백오십 척이며 18예물을 삼아 거룩히 구별할 땅과 연접하여 남아 있는 땅의 길이는 동쪽으로 만 척이요 서쪽으로 만 척이라 곧 예물을 삼아 거룩하게 구별할 땅과 연접하였으며 그 땅의 소산을 성읍에서 일하는 자의 양식을 삼을지라 19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그 성읍에서 일하는 자는 그 땅을 경작할지니라 20그런즉 예물로 드리는 땅의 합계는 길이도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도 이만 오천 척이라 너희가 거룩히 구별하여 드릴 땅은 성읍의 기지와 합하여 네모반듯할 것이니라 21거룩하게 구별할 땅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에 남은 땅은 군주에게 돌릴지니 곧 거룩하게 구별할 땅의 동쪽을 향한 그 경계선 앞 이만 오천 척과 서쪽을 향한 그 경계선 앞 이만 오천 척이라 다른 몫들과 연접한 땅이니 이것을 군주에게 돌릴 것이며 거룩하게 구별할 땅과 성전의 성소가 그 중앙에 있으리라 22그런즉 군주에게 돌려 그에게 속할 땅은 레위 사람의 기업 좌우편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이며 유다 지경과 베냐민 지경 사이에 있을지니라 23그 나머지 모든 지파는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베냐민의 몫이요 24베냐민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시므온의 몫이요 25시므온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잇사갈의 몫이요 26잇사갈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스불론의 몫이요 27스불론 경계선 다음으로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갓의 몫이며 28갓 경계선 다음으로 남쪽 경계선은 다말에서부터 므리바가데스 샘에 이르고 애굽 시내를 따라 대해에 이르나니 29이것은 너희가 제비 뽑아 이스라엘 지파에게 나누어 주어 기업이 되게 할 땅이요 또 이것들은 그들의 몫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0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쪽의 너비가 사천오백 척이라 31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쪽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32동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33남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34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35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48)

 

계시록 2115절 이하 끝 절까지, 그리고 거기 2절과 10절, ‘거룩한 예루살렘’이라 하는 데 in Revelation 21:15 to the end, where it is also called the holy Jerusalem, verses 2, 10;

 

15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16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17그 성곽을 측량하매 백사십사 규빗이니 사람의 측량 곧 천사의 측량이라 18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19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21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22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26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27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21:15-27)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21:2, 10)

 

그리고 예레미야 3138절에서 and in Jeremiah 31:38.

 

보라, 날이 이르리니 이 성은 하나넬 망대로부터 모퉁이에 이르기까지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38)

 

시편에서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the city of God, the holy place of the tabernacles of the most high)(46:4)라 부르고 있습니다. In David it is called “the city of God, the holy place of the tabernacles of the most high;”(Ps. 46: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46:4)

 

에스겔에서 ‘여호와 삼마’(the city, Jehovah there)(48:35)로, 그리고 이사야에 기록되기를 in Ezekiel, “the city, Jehovah there,”(Ezek. 48:35) and of which it is written in Isaiah: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48:35)

 

10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 14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 (60:10, 14) The sons of the stranger shall build thy walls, all they that despised thee shall bow themselves down at the soles of thy feet, and they shall call thee the city of Jehovah, the Zion of the holy one of Israel. (Isa. 60:10, 14)

 

스가랴에서 In Zechariah: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시온에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예루살렘은 진리의 성읍이라 일컫겠고 만군의 여호와의 산은 성산이라 일컫게 되리라 (8:3) Jerusalem shall be called the city of truth; and the mountain of Zion, the mountain of holiness, (Zech. 8:3)

 

여기 ‘진리의 성읍’(city of truth), 혹은 ‘예루살렘’(Jerusalem)은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그리고 ‘성산’(聖山, mountain of holiness), 혹은 ‘만군의 여호와의 산’(of Z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where the “city of truth,” or “Jerusalem,” signifies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and the “mountain of holiness,” or “of Zion,”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3] 신앙의 천적, 영적인 것들을 성읍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처럼, 유다와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가지고 모든 교리적인 것들 또한 그렇게 상징합니다. 이 성읍들 이름 하나하나가 다 나름의 어떤 교리적인 것을 상징하지만, 그 속뜻을 모르고서는 아무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지요. ‘성읍들’(cities)이 교리적인 것들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단들의 경우도 그런데요, 이 경우, 모든 특정 성읍마다 그 이름을 따라 무슨 특별한 이단적 입장을 상징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아래 이어지는 말씀들을 통해 이런 사실들을 보여만 드릴 건데요, 즉 일반적으로 ‘성읍’(city)은 어떤 교리적, 그밖에 이단적인 걸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As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are represented by a city, so also are all doctrinal things signified by the cities of Judah and of Israel, each of which when named has its own specific signification of something doctrinal, but what that is no one can know except from the internal sense. As doctrinal things are signified by “cities,” so also are heresies, and in this case every particular city, according to its name, signifies some particular heretical opinion. At present we shall only show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 that in general a “city” signifies something doctrinal, or else heretical.

 

[4] 자, 먼저 이사야입니다. Thus we read in Isaiah:

 

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그 중 하나를 멸망의 성읍이라 칭하리라 (19:18) In that day there shall be five cities in the land of Egypt speaking with the lip of Canaan, and swearing to Jehovah Zebaoth; one shall be called the city Heres, (Isa. 19:18)

 

여기서 다루어진 주제는 주님 오실 때, 영적, 천적인 일들에 관한 기억-지식인데요, where the subject treated of is the memory-knowledge of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at the time of the Lord’s advent.

 

※ 이 내용이 주님의 오심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은, 이 이사야 191절에, ‘보라 여호와께서 빠른 구름을 타고 애굽에 임하시리니’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비전, 곧 환상의 골짜기를 다룰 때 So again, when treating of the valley of vision, that is, of fantasy:

 

소란하며 떠들던 성, 즐거워하던 고을이여 너의 죽임을 당한 자들은 칼에 죽은 것도 아니요 전쟁에 사망한 것도 아니라 (22:2) Thou art full of tumults, a tumultuous city, an exulting city. (Isa. 22:2)

 

예레미야에서는 ‘남쪽에’(in the south, 네겝) 있는, 곧 진리의 빛 가운데 있으나 그 빛을 소멸하는 사람들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In Jeremiah, speaking of those who are “in the south,” that is, in the light of truth, and who extinguish it:

 

네겝의 성읍들이 봉쇄되어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13:19) The cities of the south have been shut up, and none shall open them. (Jer. 13:19)

 

8여호와께서 딸 시온의 성벽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고 무너뜨리는 일에서 손을 거두지 아니하사 성벽과 성곽으로 통곡하게 하셨으매 그들이 함께 쇠하였도다 9성문이 땅에 묻히며 빗장이 부서져 파괴되고 왕과 지도자들이 율법 없는 이방인들 가운데에 있으며 그 성의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묵시를 받지 못하는도다 (2:8, 9) Jehovah hath purposed to destroy the wall of the daughter of Zion; therefore he maketh the rampart and the wall to lament; they languished together. Her gates are sunk into the ground; he hath destroyed and broken her bars, (Lam. 2:8–9)

 

여기서는 누가 보더라도 ‘성벽’(wall), ‘성곽’(rampart), ‘성문’(gates), ‘빗장’(bars)이 교리적 의미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where anyone may see that by a “wall,” a “rampart,” “gates,” and “bars,” doctrinal things only are meant.

 

[5] 같은 식으로 이사야에 In like manner in Isaiah:

 

1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2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의를 지키는 의로운 나라가 들어오게 할지어다 (사26:1, 2) This song shall be sung in the land of Judah, We have a strong city; salvation will set the walls and the bulwark; open ye the gates, that the righteous nation which keepeth fidelities may enter in. (Isa. 26:1–2)

 

1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2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3강한 민족이 주를 영화롭게 하며 포학한 나라들의 성읍이 주를 경외하리이다 (25:1-3) I will exalt thee, I will confess to thy name, for thou hast made of a city a heap, of a defensed city a ruin; a palace of strangers shall not be built of the city forever. Therefore shall the strong people honor thee, the city of the terrible nations shall fear thee, (Isa. 25:1–3)

 

이들 구절에는 어떤 특정 성읍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발람의 예언에 in which passage there is no reference to a particular city. In the prophecy of Balaam:

 

18그의 원수 에돔은 그들의 유산이 되며 그의 원수 세일도 그들의 유산이 되고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19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하고 (24:18, 19) Edom shall be an inheritance, and out of Jacob shall one have dominion, and shall destroy the residue of the city. (Num. 24:18–19)

 

여기 나오는 ‘성읍’(city)이 어떤 성읍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합니다. 이사야에 where it must be plain to everyone that “city” here does not mean a city. In Isaiah:

 

10약탈을 당한 성읍이 허물어지고 집마다 닫혀서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 11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24:10, 11) The city of emptiness is broken; every house is shut, that the cry over wine in the streets cannot enter, (Isa. 24:10–11)

 

여기 ‘약탈을 당한 성읍’(city of emptiness)은 텅 빈 교리, 교리의 공허함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기 ‘거리’(streets)는 여기서도 다른 데서처럼 거짓이든 참이든 성읍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계시록에 where the “city of emptiness” denotes emptinesses of doctrine; and “streets” signify here as elsewhere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city, whether falsities or truths. In John:

 

17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중에 쏟으매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이르되 되었다 하시니, 19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지니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16:17, 19) When the seventh angel poured out his vial, the great city was divided into three parts, and the cities of the nations fell. (Rev. 16:17, 19)

 

‘큰 성’(great city)은 어떤 이단적인 것을 가리키며, ‘만국의 성들’(cities of the nations)도 그러함은 누가 봐도 분명합니다. 또 이 큰 성은 요한이 본 여자(17:18)였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That the “great city” denotes something heretical, and that the “cities of the nations” do so too, must be evident to everyone. It is also explained that the great city was the woman that John saw; (Rev. 17:18)

 

또 네가 본 그 여자는 땅의 왕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17:18)

 

그리고 이 여자는 앞서 지금까지 보여드린 그런 캐릭터의 교회임을 가리킵니다. and that the woman denotes a church of that character has been shown before.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세운 성’이 단순한 거주지나 문명의 상징이 아니라, ‘그 이단적 상태에서 파생된 모든 교리적, 신학적 체계 전체’를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성경에서 ‘성읍’이라는 말이 문자 그대로의 도시를 뜻하는 경우가 결코 없고, 언제나 ‘교리적인 것, 곧 신앙과 관련된 사상 체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천사들은 ‘도시’라는 개념 자체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들의 인식이 자연적,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천적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도시라는 외형을 보지 않고, 그 도시가 상징하는 ‘영적 상태와 교리적 내용’만을 지각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거룩한 성’, ‘거룩한 예루살렘’이라 할 때, 그것은 특정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주님의 나라 전체’, 혹은 그 나라가 임한 각 개인의 내적 상태를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시온의 산’은 신앙의 천적인 것, 곧 사랑의 차원을 가리키고, ‘예루살렘 성’은 그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영적인 차원을 가리킵니다. 성경 곳곳에서 언급되는 성읍, 궁전, 집, 성벽, 문, 빗장, 성전 등의 표현 역시 모두 ‘교회와 신앙의 내적 구조와 질서’를 다양한 측면에서 묘사한 것입니다.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새 예루살렘의 구조 묘사도 마찬가지로, 이는 건축 도면이 아니라 ‘완성된 교회와 신앙의 질서에 대한 영적 묘사’입니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유다와 이스라엘의 각 성읍들은 각각 특정한 교리적 의미를 지니며, 그 정확한 의미는 오직 내적 의미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읍이 참된 교리를 의미할 수 있는 것처럼, ‘이단적 교리 역시 성읍으로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즉, 하나의 잘못된 신앙 체계도 스스로의 질서와 구조를 갖추게 되며, 그것이 ‘’으로 나타나는 것이지요.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민수기, 요한계시록 등에서 언급되는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25:2), ‘성읍을 돌무더기로(25:2), ‘약탈을 당한 성읍(24:10), ‘큰 성(16:19), ‘만국의 성들(16:19)은 모두 특정 도시의 멸망이 아니라, ‘교리의 붕괴, 혹은 거짓 교리의 심판’을 가리킵니다.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큰 성’이 여자, 곧 특정한 교회의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되는 것은, 성읍과 교회, 교리와 신앙 체계가 동일한 범주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따라서 가인이 성을 쌓았다는 말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더 이상 개인의 오류로 머무르지 않고, ‘조직화되고 방어 가능한 교리 체계’, 곧 하나의 이단적 신앙 구조로 굳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앙이 사랑을 잃을 때, 생명 대신 교리가 중심이 되고, 진리 대신 체계가 중심이 되는 영적 필연성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결국 AC.402는 성경의 ‘성읍’이라는 언어가 곧 ‘신앙의 지도’, 교리의 구조도임을 밝히며, 가인의 성읍은 사랑 없는 신앙이 만들어 낸 가장 체계적인 자기 보호 장치임을 보여줍니다.

 

 

 

AC.403, 창4:17, 태고교회 사람들의 서술 방식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 우리는 지금까지 ‘성’(城, city)이 뭘 상징하는지 보았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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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1, 창4:17, 가인의 아들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1 이것이 ‘에녹’(Enoch)이라고 부르던, 모든 교리적,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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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4:17)

 

AC.401

 

이것이 ‘에녹’(Enoch)이라고 부르던, 모든 교리적, 혹은 이단적 가르침을 가진 일종의 이단이었다는 건 이 이름을 보면 어느 정도 분명한데요, 이 이름은 그렇게 시작된, 즉 개시된 가르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That it was a heresy with all its doctrinal or heretical teaching that was called “Enoch” is in some measure evident from this name, which means the instruction so begun or initiated.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계보에서 언급되는 ‘에녹(Enoch)이 어떤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이단적 교리 체계 전체’를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 근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에녹’이라는 이름의 의미인데, 이 이름은 ‘가르침이 시작됨’, 혹은 ‘교훈이 체계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랑에서 나온 생명이 아니라, 신앙만을 중심으로 한 가르침이 ‘교육과 전달의 형태로 조직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줍니다. 즉, 에녹은 살아 있는 체어리티의 열매라기보다, 분리된 신앙이 스스로를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만든 ‘교리적 교육 시스템’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성읍의 이름이 에녹이라 불린 것은, 그 분파의 모든 교훈과 신학적 구조가 이 ‘에녹’이라는 교육적 틀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음을 의미하며, 이는 신앙이 사랑을 잃을 때 교리가 생명보다 앞서 서게 되는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AC.402, 창4:17, 가인이 쌓은 '성'(城, city)의 속뜻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 ‘성을 쌓고’(city that was built)는 그 이단에서 나오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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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0, 창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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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4:17)

 

AC.400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이 스키즘(schism)이나 이단(heresy)에서 또 다른 이단이 나왔다는 말씀인데요, 이는 앞서 언급되어 온 것들로부터, 그리고 첫 번째 절에 서술된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가 가인을 낳았다’로부터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제 뒤에 나오는 내용들은 그게 교회에 속한 것이든 이단에 속한 것이든 임신 및 해산과 유사, 그러니까 교회나 이단의 탄생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그렇게 해서 하나의 계보(genealogy)가 형성된 것입니다. 서로 유사하게 연관되기 때문이지요. 하나의 이단이 태동하는 곳에는 한 무리의 이단이 생겨납니다. That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ies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aid, as well as from what is stated in the first verse, that the man and Eve his wife produced Cain; so that the things which now follow are similar conceptions and births, whether of the church, or of heresies, whereof they formed a genealogy, for these are similarly related to each other. From one heresy that is conceived there are born a host of them.

 

 

해설

 

스베덴보리는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라는 표현을, 이미 앞에서 설명한 원리에 따라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는 분열된 상태가 자기 내부에서 또 다른 분열을 낳는 과정’으로 해석합니다. 이는 창세기 41절에서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라고 말한 구조와 동일한데, 성경에서 이러한 ‘잉태’와 ‘출산’은 언제나 육체적 사건이 아니라 ‘교회적 상태나 이단적 상태가 사상과 교리를 산출하는 영적 과정’을 뜻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두 계열, 곧 가인 계열과 셋 계열 둘 다 나란히 이러한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계보를 이루는데, 지금 이 본문의 가인 계열의 경우, 가인 이후 동일한 구조가 왜곡된 형태로 작동하여, 하나의 이단적 신앙에서 또 다른 이단적 교리가 연속적으로 생겨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계보’라는 말로 설명하는데, 이는 사람의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혈통’, 곧 교리와 신앙 형태들이 서로를 낳고 확장해 가는 내적 연관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하나의 분열된 신앙이 일단 형성되면, 그것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기 논리를 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수많은 파생 형태들을 만들어 내게 되며, 이로부터 다양한 이단과 분파가 끝없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결국 AC.400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는 순간부터 그 분리는 단일한 오류로 머무르지 않고, ‘자가 증식적 구조’를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며, 이것이 가인의 계보가 계속 이어지는 근본 이유임을 보여줍니다.

 

 

 

AC.40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1 이것이 ‘에녹’(Enoch)이라고 부르던, 모든 교리적,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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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9, 창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AC.399-403)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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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4:17)

 

AC.399

 

다음 말씀들, 곧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이 스키즘(schism)이나 이단(heresy)에서 ‘에녹’(Enoch)이라는 또 다른 이단이 나왔음을, ‘성을 쌓고’(the city which he built)는 거기서 나오는 모든 교리적이고 이단적인 가르침과, 그리고 그 스키즘이나 이단을 ‘에녹’(Enoch)이라 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라고 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The words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signify that this schism or heresy produced another from itself that was called “Enoch.” By “the city which he built” is signified all that was doctrinal and heretical therefrom, and because the schism or heresy was called “Enoch,” it is said that “the name of the city was called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해설

 

스베덴보리는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는 말을,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의 분파 혹은 이단적 상태가 자기 안에서 또 다른 교리적 형태를 산출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여기서 ‘알다’와 ‘낳다’는 육체적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 체계가 자기 논리 안에서 새로운 사상과 체계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뜻합니다. 이때 낳은 ‘에녹(Enoch)은 어떤 개인이 아니라, 가인의 신앙에서 파생된 ‘특정한 교리적 형식’을 상징합니다. 이어서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부른 것은, 이 분파에서 나온 모든 교리적, 신학적 구조가 바로 이 에녹이라는 중심 사상에 의해 조직되고 규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성읍은 외적 건물이 아니라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세운 교리 체계 전체’를 가리키며, 그 교리의 이름과 성격이 그 분파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AC.400, 창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0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C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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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8,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사랑의 신앙의 선과 분리되는 걸 의미한다는 건 14절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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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4:16)

 

AC.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사랑의 신앙의 선과 분리되는 걸 의미한다는 건 14절에 관한 설명(AC.387)을 보시기 바랍니다. ‘놋 땅에 거주하더니’(dwell in the land of Nod)가 진리와 선의 바깥을 의미한다는 건, ‘놋’(Nod)이라는 말의 의미를 보면 분명한데, 이 ‘놋’은 ‘피하며 유리하는 자’(a wanderer and a fugitive)가 되는 것이며,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건 진리와 선을 다 빼앗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다룬 내용입니다.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은 지적 마인드 근처(near the intellectual mind), 전에 사랑이 다스렸던 곳이며, 또 래셔널 마인드 근처(near the rational mind), 전에 체어리티가 다스렸던 곳이라는 것은 ‘에덴 동쪽’(the east of Eden)의 의미, 곧 ‘동쪽’(the east)은 주님을, ‘에덴’(Eden)은 사랑을 의미한다고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o “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may be seen in the explication of verse 14; that to “dwell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Nod,” which is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and that to be “a wanderer and a fugitive” is to be deprived of truth and good, may be seen above. That “toward the east of Eden” signifie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had previously reigned, and also near the rational mind, where charity had previously reig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said of the signification of “the east of Eden,” namely, that “the east” is the Lord, and “Eden” love.

 

내적 세계인 영계에서는 마인드, 사랑, 체어리티 같은 추상 개념들이 마치 우리가 이 지상에서 자연계 어떤 걸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듯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렇게 무슨 근처, 뭐 했던 곳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에덴, 동쪽, , 성읍, 추방, 거주, 방황 등 이 모든 것은 창세기를 비롯, ‘말씀에서는 영적 지리(spiritual geography)입니다.

 

의지(the will)와 이해(the understanding)로 구성되는 마인드가, 태고교회 사람들의 경우에는 하나였습니다. 의지가 모든 것의 전부였고, 이해는 의지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의지에 속한 사랑과 이해에 속한 신앙 사이에 아무런 구분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사랑은 모든 것의 전부였고, 신앙은 사랑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Cain)이라 하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후, 의지는 더 이상 다스릴 수 없게 되었고, 그런 마인드에서는 반대로 의지 대신 이해가, 사랑 대신 신앙이 다스렸기 때문에, 그는 ‘에덴 동쪽에 거주하였다’(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하는 것입니다. 방금 보신 것처럼, 인류의 유익을 위해 보전될 수 있도록 신앙을 구별하신 것이지요. ‘가인에게 표를 주신’(had a mark set upon it) 것입니다. With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mind, consisting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was one; for the will was the all in all, so that the understanding was of the will. This was because they made no distinction between love, which is of the will, and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because love was the all in all, and faith was of love. But after faith was separated from love, as was the case with those who were called “Cain,” no will reigned any longer, and as in that mind the understanding reigned instead of the will, or faith instead of love, it is said that he “dwelt toward the east of Eden”; for as was just now observed, faith was distinguished, or “had a mark set upon it,” that it might be preserved for the use of mankind.

 

※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기 524절,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또한 이와 같습니다.

 

 

해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라는 말은 이미 앞 절에서 설명되었듯이, 신앙이 ‘사랑에서 나온 신앙의 선’, 곧 체어리티의 선과 분리되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놋 땅에 거주하더니(dwell in the land of Nod)라는 표현은, 진리와 선의 영역 안이 아니라 그 ‘바깥에 머무는 상태’, 곧 방황과 불안정의 상태를 가리키는데, 그 이유는 이 ‘(Nod)이라는 말 자체가 ‘방랑자’와 ‘도망자’를 뜻하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이 표현은 참과 선을 상실한 상태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가인이 ‘에덴의 동쪽’에 거하였다는 말은, 이 신앙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멀리 버려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성적 영역’, 곧 이전에 사랑이 다스리던 자리와 가까운 곳에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음은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가 하나였고, 의지가 모든 것이었으며 이해는 의지에 속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그때는 사랑이 전부였고, 신앙은 사랑에서 나왔기 때문에 사랑과 신앙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가인으로 상징되는 상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이후에는 더 이상 의지가 다스리지 못하고, 대신 이해가, 다시 말해 ‘사랑 대신 신앙이 마음의 중심에 자리’하게 됩니다. 가인이 에덴에서 멀어지지 않고 ‘에덴의 동쪽’에 머문 것으로 묘사하는 이유가 이것이며, 이를 통해 신앙이 여전히 사랑과 가까운 지성적 영역에 보존되었음을 뜻한다고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표가 주어진 이유를 다시 상기시키는데, 그것은 이렇게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인류의 거듭남을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구별되어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398은, 사랑이 떠난 뒤에도 신앙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인간 지성의 영역 안에서 주님의 섭리에 따라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구원의 길이 아직 닫히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AC.399, 창4:17,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AC.399-403)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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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7,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AC.397-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창4:16) AC.397 다음 말씀들, 곧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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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4:16)

 

AC.397

 

다음 말씀들, 곧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신앙이 사랑의 신앙의 선(the good of the faith of love)으로부터 분리되었음을, ‘놋 땅에 거주하더니’(he dwelt in the land of Nod)는 진리와 선의 바깥(outside of truth and good)을, ‘에덴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은 지적 마인드 근처(near the intellectual mind), 전에 사랑이 다스렸던 곳을 각각 의미합니다. By the words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is signified that faith was separated from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he dwelt in the land of Nod” signifies outside of truth and good; “toward the east of Eden” is near the intellectual mind, where love reigned before.  

 

 

해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라는 표현을,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곧 체어리티의 선과 분리된 상태로 들어갔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을 떠나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사랑을 버림으로써 주님의 자비와 선을 더 이상 인식하지 못하게 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어서 ‘놋 땅에 거주하더니(he dwelt in the land of Nod)라는 말은, 신앙이 더 이상 진리와 선의 영역 안에 있지 않고 그 밖에 머무르게 되었음을 뜻하는데, 놋 땅은 방황과 불안정, 곧 ‘참과 선을 알지 못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에덴 동쪽, 곧 ‘에덴의 동쪽(toward the east of Eden)에 거했다는 표현은, 신앙이 완전히 멀리 떠나 파괴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지성적 영역’, 곧 과거에 사랑이 다스리던 자리와 가까운 위치에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시고, 장차 다시 사랑과 결합될 가능성을 남겨 두셨다는 섭리의 표현입니다.

 

 

 

AC.398, 창4:16,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창4:16) AC.398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go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는 사랑의 신앙의 선과 분리되는 걸 의미한다는 건 14절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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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6, 창4:15,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 ‘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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