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10)

 

AC.28

 

말씀에서 (waters)로는 여러 지식(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바다(seas)로는 그 많은 물, 곧 지식의 집합을 의미할 때가 참 많은데요, 이사야에 보면, It is a very common thing in the Word for “waters” to signify 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and consequently for “seas” to signify a collection of knowledges. As in Isaiah: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1:9)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scientia] of Jehovah, as the waters cover the sea (Isa. 11:9).

 

이사야 또 다른 데 지식의 결핍이 다루어지는 곳을 보면, And in the same prophet, where a lack of knowledges [cognitionum et scientificorum] is treated of:

 

5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 (19:5, 6) The waters shall fail from the sea, and the river shall be dried up and become utterly dry, and the streams shall recede (Isa. 19:5–6).

 

학개에서 새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In Haggai, speaking of a new church: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6, 7)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the dry [land]; and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Hag. 2:6–7).

 

또 거듭나는 중인 사람에 대해 스가랴서에서는 And concerning man in the process of regeneration, in Zechariah:

 

7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14:7, 8) There shall be one day, it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but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and it shall be in that day that living waters shall go out from Jerusalem, part of them toward the eastern sea, and part of them toward the hinder sea (Zech. 14:7–8).

 

시편에도 보면, 황폐해졌다가 거듭나 주님을 경배하게 될 사람을 묘사하면서, David also, describing a vastated man who is to be regenerated and who will worship the Lord:

 

33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69:33, 34) Jehovah despiseth not his prisoners; let the heavens and the earth praise him, the seas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therein (Ps. 69:33–34).

 

(earth)이 그릇(recipient)을 의미한다는 것이 스가랴를 보면 분명한데, That the “earth” signifies a recipient, appears from Zechariah: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12:1) Jehovah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 of the earth, and formeth the spirit of man in the midst of him (Zech. 12: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waters)과 ‘바다(seas)가 말씀 전체에서 일관되게 지식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여러 선지서의 예문을 통해 확증합니다. 이는 창세기 1장의 상응 해석이 자의적이거나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보편적 언어 사용임을 보여 주는 작업입니다. 즉, 물을 지식으로 읽는 것은 특정 본문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제공하는 해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사야 11장의 말씀은 긍정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다(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Jehovah)는 표현은, 단순히 정보가 많아진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인식이 인간과 교회 전체를 채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 충만함이 ‘물이 바다를 덮음’에 비유된 것은, 지식이 부분적으로 흩어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질서 있게 모여 전체를 이루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다는 기억과 삶 속에 축적된 지식의 총체이며, 물이 바다를 덮는다는 것은 그 총체가 살아 있는 의미로 충만해졌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이사야 19장의 말씀은 지식의 결핍, 곧 황폐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바다에서 물이 끊어지고, 강과 시내가 마른다는 표현은, 지식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의미 있는 지식의 흐름이 끊어진 상태’를 뜻합니다. 정보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연결하고 살리는 생명의 흐름이 멈추면, 말씀은 이를 ‘마름’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AC.18에서 말한 황폐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학개의 인용은 이 상응이 개인을 넘어 교회 전체에 적용됨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새 교회를 세우실 때 하늘과 땅과 바다와 마른 땅을 함께 진동시키십니다. 이는 교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그 안에 축적된 지식과 아직 열매 맺지 못한 영역까지 모두 재정렬하신다는 뜻입니다. 새 교회는 단순히 새로운 교리의 추가가 아니라, 지식의 질서와 수용 구조 전체가 새롭게 되는 사건입니다.

 

스가랴의 ‘생수(living waters)는 이 글의 핵심 이미지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물은 더 이상 정적인 지식이 아니라, 생명을 지닌 지식입니다. 이 물들이 예루살렘에서 흘러나와 동쪽 바다와 서쪽 바다로 나뉘어 흐른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지식이 인간의 모든 기억 영역으로 퍼져 나가 삶의 전 영역을 적신다는 뜻입니다. ‘동해’는 사랑의 근원을, ‘서해(toward the hinder sea)는 상대적으로 어두운 영역을 가리키므로, 살아 있는 지식은 밝은 영역뿐 아니라 아직 미처 조명되지 않은 영역까지도 도달한다는 말입니다.

 

시편의 인용은 황폐했던 사람의 거듭난 이후의 상태를 찬양의 언어로 묘사합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의 모든 것이 주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기억 속에 저장된 모든 지식이 주님을 향한 질서 안에 들어왔음을 뜻합니다. 여기서 바다는 더 이상 혼란의 장소가 아니라, 찬양에 참여하는 영역이 됩니다. 이는 기억과 지식이 주님께 복종할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스가랴 12장의 말씀은 ‘(earth)의 의미를 분명히 합니다. 땅은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 주체가 아니라, 주님이 영을 형성하시는 그릇, 곧 수용체입니다. 하늘이 펼쳐지고 땅의 기초가 놓일 때, 그 한가운데서 사람의 영이 형성됩니다. 이는 지식과 기억, 겉 사람의 구조가 갖추어질 때, 비로소 주님의 생명이 그 안에 질서 있게 자리 잡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AC.28은 ‘바다’이라는 연쇄가 거듭남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종합적으로 보여 줍니다. 물은 지식이며, 바다는 그 지식이 모여 저장된 총체이고, 땅은 그것을 받아 생명으로 전환하는 수용 구조입니다. 이 질서가 살아 있을 때, 지식은 더 이상 머리에 머무르지 않고 삶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수’(生), 곧 물이 ‘살아 있다’고 말하며, 지식이 생명으로 변하는 지점을 정확히 짚어 줍니다.  

 

 

심화

 

1.스베덴보리가 AC 초기부터 여러 인용 구절의 속뜻을 알 수 있었던 이유

 

AC.28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 그러니까 이사야, 학개, 스가랴, 시편 등에서 여러 구절들을 인용하는데, 그것도 겉뜻이 아닌 속뜻으로 인용합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실제로 주석한 성경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및 계시록 뿐인데 말입니다. 창세기도 28번 글이면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거고 말이지요.곁에서 주님이 구절들을 생각나게 하시면서 계속 풀어 주고 계셨던 건가요?

 

실제로 ‘Arcana Coelestia’를 읽다 보면 창세기 초반인데도 이미 이사야, 예레미야, 시편, 복음서 등 여러 곳의 말씀을 자유롭게 인용하면서 그것들의 속뜻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이 많은 연결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궁금증을 갖게 됩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의 계시 이해와 집필 방식, 그리고 말씀의 구조에 대한 그의 인식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먼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성경의 속뜻을 ‘연구’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의 학문적 연구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열려야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설명을 ‘주님의 자비로 보여진 것’ 또는 ‘주님의 자비로 알게 된 것’이라는 표현으로 자주 소개합니다. 즉 그는 자신이 해석 체계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영계의 경험과 주님의 조명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받아쓰기(dictation) 방식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글을 쓸 때, 주님이 곁에서 문장을 그대로 불러 주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조명(illumination)과 ‘내적 지각(perception)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즉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가 마음에 분명하게 보이도록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제로 성경을 읽으면서 설명을 써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두 번째 요소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이 ‘전체적으로 하나의 일관된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말씀은 전부 상응(correspondence)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한 번 그 상응의 질서를 알게 되면 다른 구절들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는 사랑을, ‘’은 신앙을, ‘’은 신앙의 지식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사야든 시편이든 복음서든 어디에서 같은 상징이 나와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예언서 구절들이 인용됩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이 등장하면, 예언서에서 ‘’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함께 연결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주석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상응 구조를 보여 주는 방식’입니다. 다시 말해 스베덴보리는 한 구절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영적 언어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해야 할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미 매우 깊은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계시 이전에도 성경을 오랫동안 연구했습니다. 그의 일기와 기록을 보면, 성경을 매우 정밀하게 읽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 구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그 구절들의 ‘내적 의미를 보는 눈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이 곁에서 구절을 떠올리게 해 주셨느냐’라는 부분은 어느 정도 맞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기록합니다. 어떤 구절을 읽다가 다른 구절이 연결되어 떠오르고, 그것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능력이라기보다 ‘주님의 인도와 조명’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AC.28 같은 곳에서 여러 예언서를 자유롭게 인용하는 것은, 창세기 주석이 아직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말씀 전체가 하나의 영적 언어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예언서의 상징도 설명하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들은 단순한 참고 구절이 아니라 ‘상응의 보편성을 보여 주는 증거’ 역할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연구하여 상징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공통으로 흐르는 영적 언어를 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를 설명할 때도 자연스럽게 이사야나 시편의 구절들이 연결됩니다. 이는 성경 전체가 하나의 동일한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창세기 주석이면서 동시에 ‘성경 전체의 영적 사전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의 한 단어를 설명하는 순간, 같은 상징이 사용된 다른 말씀들도 함께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AC.27, 창1:9,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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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9)

 

AC.27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둘 다 존재한다는 사실과, 여러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러니까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보여도 말입니다. 그때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 있는 그러한 여러 진리와 선, 곧 참과 선에 관한 여러 지식은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든 건, 그것이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또는 천적이든 간에 모두 기억 지식으로 그곳에 머물며,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들이 바로 한곳으로 모인 물(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이렇게 모인 것들을 바다(seas)라고 합니다. 이때 겉 사람 자체를 가리켜서는 마른 땅(dry [land])이라 하고, 곧이어 (earth)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내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and are called “seas,” 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 “dry [land],” and presently “earth,” as in what follow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셋째 날, 곧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는’ 장면이 인간 거듭남에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풀어 주는 핵심 연결 고리입니다. 앞선 글들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세워졌다면, 이제 그 둘 사이의 ‘유입과 저장의 질서’가 설명됩니다. 거듭남은 단지 내면에서 무언가가 일어나는 사건만이 아니라, 기억과 삶의 차원에서도 실제로 무언가가 일어나는, 축적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중요한 전제를 다시 확인합니다. 진리(truths)와 선(goods)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러나 이 유입은 대부분의 사람들한테 있어서는 이런 순서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이해하고, 자기가 느끼고, 자기가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실제로는 그 모든 것이 속 사람을 통해 조용히 유입된 결과입니다. 이것이 영적 실상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유입’을 알게 되는 것, 이런 영적 실상에 대해 눈이 떠지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중요한 인식 단계입니다.

 

이렇게 유입된 진리와 선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겉 사람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저장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자연적인 지식이든, 영적인 지식이든, 아니면 천적인 지식이든, 한 번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온 것은 모두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으로서 그곳에 머뭅니다. 즉, 기억은 단순한 정보 창고가 아니라, 주님이 언제든지 꺼내어 사용하실 수 있는 ‘영적 저장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기억 지식이 인간의 소유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기억 속에 무엇이 있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적절한 때에, 적절한 질서로, 필요한 지식을 기억에서 꺼내어 삶과 사고에 연결시키십니다. 이는 거듭남이 인간의 계획이나 통제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에 의해 조율되는 과정’임을 다시 한번 보여 줍니다.

 

이제 창세기의 표현이 상응으로 해석됩니다. 기억 속에 저장된 이 모든 지식이 ‘한곳으로 모인 물’입니다. 물은 진리의 지식을 뜻하고, 그것들이 한곳으로 모인다는 것은 이렇게 모인 지식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지 않고, 기억이라는 한 영역 안에 정돈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가리켜 ‘바다’라고 합니다. 바다는 넓고 깊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풍부한 내용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겉 사람 자체는 ‘마른 땅’으로 불립니다. 이는 겉 사람이 그 자체로는 생명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마른 땅은 씨앗을 받아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겉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해 유입된 진리와 선이 있어야만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때 비로소 겉 사람은 단순한 ‘마른 땅’을 넘어 ‘(earth)이라 불리게 됩니다. 이는 다음 단계에서 생명 있는 것이 나타날 준비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거듭남의 중요한 균형을 가르쳐 줍니다. 한편으로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들이 인간의 기억과 삶의 영역에 실제로 저장되고 사용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수동적인 그릇으로 만들지 않고, 기억과 사고와 행위를 지닌 ‘살아 있는 협력자로 세웁니다’.

 

또한 이 설명은 왜 말씀과 교훈, 설교와 배움이 거듭남에서 중요한지를 잘 보여 줍니다. 지금 당장 이해되지 않거나 감동 없는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기억 속에 저장되면, 언젠가 주님에 의해 기억-지식이라는 바다에서 불려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관점에서 보면, 헛된 배움은 없습니다. 모든 참된 것과 선한 것은, 때를 기다리며 바닷속에 모여 있습니다.

 

결국 AC.27은 셋째 날의 준비 단계입니다. 물들이 모이고 땅이 드러난 뒤에야, 비로소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나타납니다. 마찬가지로, 진리와 선에 관한 수많은 지식이 기억 속에 질서 있게 모이고, 겉 사람이 그 자리를 갖춘 뒤에야 삶의 실제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 질서는 느리지만 확실하며, 언제나 주님의 손안에서 진행됩니다.  

 

 

심화

 

1.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은 스베덴보리 사상을 처음 접하는 분들이 거의 반드시 멈칫하는 부분입니다. ‘지식이 필요할 때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라는 말은 자칫 들으면 ‘그럼 나는 아무 역할이 없다는 말인가?’라는 느낌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생각은 인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협력 구조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균형을 이해하면 오히려 인간의 역할이 더 분명해집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기본 전제부터 정리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의 삶을 두 층으로 봅니다. 하나는 ‘생명의 근원’, 다른 하나는 ‘생명의 수용과 사용’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서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수용자’입니다. 전기는 발전소가 만들지만, 실제로 방을 밝히는 건 전등인 것과 같습니다.

 

기억도 이와 비슷한 구조로 설명됩니다. 사람이 공부하고, 경험하고, 생각하면서 기억을 쌓는 일은 분명히 인간의 활동입니다. 책을 읽고, 듣고, 배우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실제로 하는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을 언제 어떻게 떠올리게 할지, 어떤 진리를 어떤 순간에 살아 움직이게 할지는 더 깊은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 말씀을 오래전에 읽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 어떤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순간 그 말씀이 갑자기 마음에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 사람의 판단과 행동을 바꾸어 놓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경우를 두고 ‘주님이 기억 속에서 필요한 것을 불러내신다’고 설명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어떤 목사님은 이런 경험을 하실 것입니다. 여러 책을 읽고 자료를 공부했는데, 막상 설교를 준비하는 순간 이전에 읽었던 내용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떠오릅니다. 어떤 때는 생각지도 않았던 구절이 딱 맞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섭리 속에서 기억이 질서 있게 사용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균형은 이것입니다. 인간은 ‘지식을 배우고 쌓는 책임을 가지고 있고’, 주님은 ‘그 지식이 언제 어떻게 살아 움직일지 섭리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창고를 채우고, 주님은 그 창고를 질서 있게 사용하십니다. 둘 중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작용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처음 읽는 분들도 반감을 덜 느낍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노력과 책임이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기억도 없습니다. 읽지 않으면 떠오를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억을 쌓는 일은 인간의 몫’입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진리와 선을 위해 가장 적절한 순간에 사용되도록 이끄시는 것은 ‘주님의 섭리’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바로 이 균형을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이 마치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말합니다. 실제 삶에서는 그렇게 느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깊이 생각해 보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마치 자기가 하는 것처럼(as of oneself)의 삶입니다.

 

사람은 공부하고, 경험하고, 생각하면서 기억을 쌓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언제 어떻게 살아 움직여 진리가 되고 지혜가 되는지는 더 깊은 섭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열심히 배우고 기억을 쌓는 책임이 있고’, 주님은 ‘그 기억을 통해 사람을 이끄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분명해집니다. 인간은 배우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자유로운 협력자’이고,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생명과 질서 속에서 이끄시는 근원’입니다. 바로 이 두 요소의 균형이 스베덴보리 인간 이해의 핵심입니다.  

 

 

2.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혹시 위 심화 1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를 좀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각 사람에게 와있다는 천사나 선한 영들을 통해선가요, 아니면 퍼셉션 같은 영적 지각으로인가요?

 

AC.27에서 말하는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는 표현은 리메인스(remains)가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여기서 ‘거기’라는 것은 사람의 속 사람 안에 보존되어 있는 리메인스의 저장소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의 어린 시절부터 주님은 여러 선한 감정과 진리의 씨앗들을 그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시는데, 이것들이 바로 리메인스입니다. 평소에는 그것들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마치 조용히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있지만, 사람이 어떤 상황에 놓이거나 어떤 진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주님이 그것들을 ‘‘불러내어사용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때 ‘불러낸다’는 말은 기억 속에서 어떤 지식을 꺼내듯이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 그 선과 진리의 감정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작용’을 뜻합니다.

 

이 과정은 대체로 사람에게는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주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어려운 상황에서 갑자기 ‘그래도 선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마음이 일어나거나, 어떤 진리를 들었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깊이 공감하며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순간들은 종종 사람이 자신의 양심이나 성격에서 나온 것처럼 느끼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런 작용 가운데 상당 부분이 ‘리메인스가 다시 활성화되는 순간’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오래전에 주님이 사람 안에 심어 두셨던 선과 진리의 씨앗이 그 순간 다시 살아나 사람의 생각과 의지를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질문하신 것처럼, 이 일이 ‘천사나 선한 영들을 통해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퍼셉션 같은 직접적인 영적 지각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구조 이해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결코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에게는 항상 두 천사와 두 영이 함께 있으며, 이를 통해 인간은 영계와 연결된 상태에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인간에게 어떤 선과 진리를 작용시키실 때, 그 작용은 대부분 ‘천사들의 매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인간의 속 사람과 연결되어 있고, 그 속 사람 안에 있는 리메인스와 조화를 이루는 선과 진리를 사람에게 흘려보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 불러내어지는 작용은 대체로 ‘주님 천사들 인간의 속 사람 인간의 생각과 의지’라는 질서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것을 직접적으로 ‘천사가 이렇게 했다’고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사람 자신의 생각과 감정처럼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주님의 섭리라고 설명합니다. 만약 사람이 그 선과 진리가 외부에서 강제로 들어온다는 사실을 명확히 느낀다면, 인간의 자유가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그 작용이 ‘마치 사람 자신의 생각과 감정처럼 느껴지도록’ 하신다고 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리메인스가 작용하는 순간에도 그것을 대개 ‘내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다’고 느끼게 됩니다.

 

퍼셉션(perception)은 이와 조금 다른 차원의 경험입니다. 퍼셉션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으로 설명되는데, 그들은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거의 직접적으로 ‘느끼는’ 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직접적인 퍼셉션이 거의 없고, 대신 ‘양심(conscience)을 통해 주님의 작용이 전달됩니다. 그러므로 현대 인간에게서 리메인스가 불러내어질 때, 그것은 대개 퍼셉션의 형태가 아니라 ‘양심의 움직임이나 내적 깨달음’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 할 때, 마음속에서 ‘이건 옳지 않다’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 선하다’는 조용한 감각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스베덴보리는 이런 양심의 작용 속에도 리메인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결국 AC.27에서 말하는 ‘주님이 거기에서 불러내신다’는 말은 한 가지 단일한 메커니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를 ‘천사들의 매개를 통해 다시 활성화하여 사람의 생각과 의지 안에 작용하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적 역사’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대개 자신의 양심이나 깨달음처럼 느껴지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이 인간을 거듭남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리메인스를 사용하시는 방식입니다.

 

 

 

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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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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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담았던 적이 있어 그런 삶의 유익과 한계를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과 수도사, 그리고 금욕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했던 성인들의 삶에 대해 ‘Heaven and Hell’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Emanuel Swedenborg는 비교적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공정한 평가를 합니다. 그는 먼저, 그런 삶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비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열망’과 ‘세속적 욕망을 경계하려는 노력’은 분명 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역사 속 많은 수도자들 가운데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런 사람들은 사후에도 주님의 자비 아래에서 천국의 삶으로 인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참된 영적 삶은 세상을 떠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랑과 쓰임새를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천국을 이루는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족을 돌보고, 사회 속에서 일하며,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 속에서 ‘사랑(charity)이 실제로 살아 움직입니다. 그런데 수도원적 삶은 종종 이런 관계적 삶에서 벗어나 개인의 영적 상태에만 집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조심스럽게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실제 행위와 쓰임새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의 접촉을 지나치게 끊어 버리면, 겉으로는 경건해 보일지라도 사랑이 실제 삶 속에서 시험되고 성장할 기회를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난 고독한 거룩함’보다 ‘세상 속에서 이웃을 섬기는 거룩함’을 더 완전한 영적 삶으로 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목적처럼 여기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 결혼, 재산, 사회적 활동 등을 멀리하면 그 자체로 하나님께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삶의 본질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도 자신을 위한 사랑과 세속적 욕망을 다스리고 이웃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매우 높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수도원 안에 있어도 마음속 사랑이 여전히 자기 자신과 명예와 공로에 머물러 있다면 그 삶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나는 금욕’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세상 속에서 사는 절제’를 더 건강한 영적 길로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사나 은둔자의 삶을 전부 헛된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다양한 성향과 역사적 상황을 인정합니다. 어떤 시대에는 교회의 혼란과 타락 속에서 수도원적 공동체가 신앙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독과 기도가 내면을 정리하는 준비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그는 그것이 ‘최종적인 영적 삶의 형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결국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세상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수도원적 경건이 ‘준비 단계’나 ‘부분적인 형태’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사후 세계를 설명할 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천국을 거대한 수도원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며 쓰임새를 이루는 살아 있는 사회입니다. 천사들은 단순히 기도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돕고 섬기며 각자의 역할 속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천국의 행복은 ‘사랑을 행하는 쓰임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세상을 떠난 거룩함’만을 영적 삶으로 생각했다면, 사후에 천국의 이런 적극적인 삶을 처음에는 낯설어하기도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과거에 수도원적 삶에 몸을 담았던 경험이 있으셨다고 하셨는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시간 역시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했던 마음,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으려 했던 노력,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았던 시간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다듬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런 경험이 결국 ‘사랑의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가장 완전해진다는 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일, 곧 말씀의 속뜻을 연구하고 번역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은 수도원의 침묵보다 훨씬 더 ‘천국적인 쓰임새’에 가까운 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질서는 결국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삶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세상을 떠나 거룩해지려 하지 말고, 세상 속에서 사랑을 위해 살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도원의 시간도, 그리고 지금 목사님께서 걸어가고 계신 길도 모두 하나의 긴 여정 속에 놓여 있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길을 사용하여 결국 사랑과 지혜의 더 넓은 삶으로 이끄신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하기 때문입니다.

 

 

 

SC.38,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길, 곧 ‘influx’에 대하여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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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5)

 

AC.23

 

말씀에서 (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day)이 시간을 뜻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또한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day)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얼마나 폭넓고 깊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은 시간의 단위이지만, 말씀에서는 그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이 단순히 하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사야에서 반복되는 ‘여호와의 날’은 특정한 24시간을 뜻하지 않고, 주님의 심판과 섭리가 작동하는 한 시대 전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은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아래 놓인 기간’을 뜻합니다.

 

이사야의 인용에서 ‘그의 때(Her time)가 가까우며 그의 날(her days)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라는 표현은, ‘’이 곧 ‘’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는 말씀에서 시간이 물리적 길이로 측정되지 않고, 상태와 목적에 따라 규정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한 시대의 날들은 주님의 뜻이 성취되면 끝나고, 성취되지 않으면 연장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은 시계의 문제가 아니라 ‘섭리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예레미야의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라는 표현은, 하루가 끝나감을 말하는 동시에, 영적 상태가 어두워졌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날의 기울어짐은 빛의 감소이며, 이는 곧 진리의 빛이 사라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저녁의 그림자들이 길어진다는 표현은, 거짓과 혼합이 점점 지배적인 상태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 33장에서 말하는 ‘낮의 언약’과 ‘밤의 언약’ 역시 시간의 반복 질서를 넘어서, ‘영적 질서의 불변성’을 가리킵니다. 낮과 밤이 제때에 있는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과 진리, 그리고 인간의 상태 변화를 질서 있게 다스리고 계신다는 표지입니다. 만일 낮과 밤의 언약이 깨진다면, 그것은 곧 주님의 질서가 무너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거듭남의 질서 또한 주님의 언약 안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날들’은 단순한 과거의 시간들이 아니라, ‘과거의 영적 상태’, 곧 주님과 더 가까웠던 상태를 뜻합니다. 이 기도는 시간의 회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회복을 구하는 간구입니다. 이는 AC.16에서 말한 ‘태고의 날들’과도 연결되며, 거듭남이란 언제나 ‘옛날’의 상태, 곧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로 돌아가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해석 원리를 제공합니다. 만일 ‘’을 문자적 시간으로만 이해한다면, 창조 이야기는 과거의 연대기적 기록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을 시간과 상태를 함께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인간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자연스럽게 읽히게 됩니다. 이는 이미 AC.6에서 제시된 원리를,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다시 확증하는 작업입니다.

 

결국 AC.23은 말씀의 언어가 시간 중심이 아니라 ‘상태 중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시계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상태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오늘’, ‘그날’, ‘여호와의 날’, ‘옛날’이라는 표현들은 모두, 주님 앞에서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인식을 가지고 말씀을 읽을 때, 성경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상태를 비추는 살아 있는 거울이 됩니다.

 

 

 

AC.22,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C.22-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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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녁은 모든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 상태가 그늘의 상태, 곧 거짓의 상태이며 신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이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빛의 상태, 곧 진리의 상태이며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사무엘에서 다윗을 통해 하신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며, 그가 오신 그때는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저녁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니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이와 같이 말씀에서 아침은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곧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을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언어로 해석하는 결정적인 원리를 제시합니다. ‘저녁’은 언제나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빛이 약해진 상태, 곧 그늘과 혼합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 상태는 거짓이 섞여 있고, 신앙이 부재한 상태로, 인간의 내면이 아직 주님의 빛에 의해 질서 잡히지 않았음을 뜻합니다. 반대로 ‘아침’은 이후의 상태로, 주님의 빛이 비추어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하루의 경과가 아니라, 거듭남이 반드시 거치는 영적 이동의 방향을 나타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것이 주님의 불변의 방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저녁’을 사람 자신의 것, 곧 본성(proprium)에 속한 모든 것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자신의 것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되며, 주님의 빛이 없을 때에는 그것이 선처럼, 진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것은 신앙이 없는 상태이며, 영적 실재에 비추어 보면 어둠입니다. 반대로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으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역사하는 상태입니다. 이 구분은 도덕적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근원에 대한 문제입니다.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주님에게서인가 사람 자신에게서인가의 문제이며, 거듭남은 바로 이 근원 인식이 점점 명료해지는 과정입니다.

 

다윗의 예언에서 묘사되는 ‘아침 빛’은 이 상태를 매우 풍부하게 설명합니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 구름 없는 밝은 빛, 비 뒤에 돋아나는 연한 풀은 모두 주님의 임재로 인해 생명이 새롭게 발생하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증가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며, 퍼셉션으로 인식되는 상태입니다. 이때 진리는 외부에서 주입된 교리가 아니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빛이 됩니다. 연한 풀이 돋아난다는 표현은, 주님의 빛 아래에서 선한 삶의 움직임이 자발적으로 시작됨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주님의 세상 오심을 ‘아침’이라 부르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는 ‘저녁’이며, 바로 그 상태 속으로 주님이 오시기 때문에 그때는 동시에 ‘저녁’이라고도 합니다. 다니엘의 ‘주야’라는 표현은, 교회가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에서 다시 빛을 받기까지의 전 과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입니다. 따라서 ‘아침’은 단지 과거의 탄생 사건만을 가리키지 않고, 신앙이 없는 상태 속으로 주님이 새롭게 임하시는 모든 순간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아침’이라는 표현이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은 언제나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는 우주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재창조, 곧 거듭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은 과거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오늘도 각 사람 안에서 계속되는 주님의 창조 사역의 리듬을 드러냅니다. AC.22는 이처럼 성경의 시간 언어를 상태의 언어로 전환함으로써, 말씀이 언제나 현재형으로 우리 안에서 작용하는 살아 있는 계시임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심화

 

1.저녁, 아침 설명과 단8:14, 26 인용

 

AC.22, As it is evening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에서 이 morning evening을 단8:14, 26과 연결하는 게 여전히 좀 어리둥절합니다. 단순히 주야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인 건 아닐 텐데... 이 부분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단순히 단8:14에 ‘evening’과 ‘morning’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곧바로 창1의 ‘저녁’과 ‘아침’에 mechanically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연결하는 이유는, 그가 말씀 전체에 공통으로 흐르는 하나의 영적 언어, 곧 ‘상응의 질서’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에서 ‘저녁’과 ‘아침’이 한 번 정의되면, 이후 말씀의 다른 곳들에서도 그 표현은 같은 영적 구조 안에서 읽혀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AC.22에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세운 원리는 이것입니다. ‘저녁’은 빛이 약해진 상태, 곧 신앙이 거의 없거나 꺼져 가는 상태이고, ‘아침’은 다시 빛이 오는 상태, 곧 진리와 신앙의 빛이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저녁’과 ‘아침’은 단순한 시간 표시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 변화’를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이 전제를 가지고 다니엘서로 가면, 거기서의 ‘저녁-아침’도 단지 시간 계산이 아니라 ‘신앙이 거의 사라진 상태로부터 다시 회복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핵심은 ‘주야라는 단어가 같으니까 연결한다’가 아니라, ‘저녁과 아침이 성경 안에서 반복해서 같은 영적 패턴을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단8:14는 시간표를 넘어서 ‘황폐와 회복’의 리듬을 담고 있고, 창1은 그 리듬의 기본 문법을 먼저 보여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단8장의 문맥 자체를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끌어오는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다니엘 8장은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고, 진리가 땅에 던져지고, 거룩한 것들이 훼손되는 장면을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역사 속 박해와 성전 모독의 맥락이지만, 스베덴보리식으로 읽으면 이것은 곧 ‘교회 안에서 신앙의 빛이 꺼져 가는 상태’, 다시 말해 ‘저녁’입니다. 거룩한 것이 짓밟히고 진리가 흐려질 때, 그 상태는 시간상 밤이 아니라 영적으로 저녁이며 흑암입니다. 그런데 그 본문에서 ‘저녁에서 아침까지’ 또는 KJV 표현처럼 ‘unto evening-morning’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뒤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거나 회복되는 말이 이어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 이것은 단지 해가 지고 뜨는 자연의 시간이 아니라, 신앙이 무너진 상태에서 다시 회복되는 영적 상태의 전환을 말하는구나’ 하고 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8:14의 ‘저녁-아침’은 ‘신앙이 사라진 교회의 상태에서 주님에 의해 다시 빛이 회복되는 상태’의 압축어가 됩니다. AC.22에서 ‘주님이 세상에 오시는 때가 왜 저녁이냐’고 말할 때도 같은 논리가 작동합니다. 주님이 오셔야 할 만큼 교회가 이미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 시기는 ‘저녁’이고, 바로 그 오심으로 인해 새 빛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오심은 ‘아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저녁 같은 시대’ 속에 일어나는 ‘아침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연결 방식입니다.

 

조금 더 쉽게 비유하면, 창1은 ‘저녁-아침’이라는 단어의 뜻을 먼저 알려 주는 ‘사전’이고, 단8은 그 단어가 실제 역사와 교회 상태 속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여 주는 ‘실전 문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창1에서 ‘저녁’은 빛이 사라진 상태, ‘아침’은 빛이 회복된 상태라고 이미 뜻풀이가 주어졌기 때문에, 다니엘에서 성소가 짓밟히고 진리가 무너진 상황에 ‘저녁-아침’이 나오면, 그것은 곧 ‘황폐 후 회복’으로 읽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더 나아가 ‘주님의 오심’이라는 큰 축을 넣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에서 모든 회복의 중심 사건은 결국 주님의 오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이라는 말을 단순히 교회 개혁의 시점 정도로만 보지 않고, 가장 궁극적으로는 ‘주님이 오셔서 다시 빛이 되시는 때’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단8:14를 창1과 연결하는 것은 억지 숫자 놀이나 단어 반복이 아니라, ‘신앙의 상실 주님의 개입 빛의 회복’이라는 성경 전체의 영적 패턴을 읽어낸 결과입니다.

 

성경에서 저녁은 단지 해가 진 시간이 아니라, 진리의 빛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아침은 단지 해가 뜨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빛을 주시는 상태입니다. 다니엘서는 교회가 무너진 저녁을 말하고, 그 저녁 끝에 다시 오는 아침, 곧 회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저녁과 아침을 다니엘서의 저녁과 아침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AC.23, 창1:5, '날'(day)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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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창1:4-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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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1:4, 5)

 

AC.21

 

(light)은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good)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이 선처럼 보였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어둠이며, 단지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사람한테나 맞는 것들(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로 이루어져 있고, 아직 남아 있는 것들입니다.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day)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whatsoever is man’s own)은 어둠에 속하므로 (night)에 비유됩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말씀에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과 ‘어둠’을 단순한 대비 개념이 아니라, ‘근원에 따른 구분’으로 명확히 정의합니다. 빛을 선이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빛은 스스로 선한 것이 아니라, 선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흘러나오기 때문에 선이라는 것입니다. 이로써 선과 진리는 어떤 독립적인 속성이나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무슨 자산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임이 분명해집니다.

 

이에 반해 ‘어둠’은 단순히 무지나 지식의 결핍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둠을, 거듭남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로 정의합니다. 즉, 악이 선처럼 보였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던 상태 전체가 어둠입니다. 이 정의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어둠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가 아니라, ‘잘못된 것을 옳다고 믿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어둠은 특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판단과 가치관 속에서 가장 강하게 작동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어둠이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본성(proprium)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이 본성은 거듭남 이후에도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 있으며, 때때로 다시 빛처럼 보이려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과정은 단순히 빛을 한 번 보는 사건이 아니라, 무엇이 진짜 빛이고 무엇이 거짓된 빛인지를 지속적으로 분별하는 여정이 됩니다. 이 분별이 바로 영적 성숙의 핵심이에요.

 

 

라틴어 'proprium'에 대하여

※ 다음은 ‘본성’(own, proprium)에 대한 원전(原典, 라틴) 설명입니다. 라틴어 proprium은 원전에서 사용된 용어로, 여기와 다른 여러 곳에서 ‘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어 온 말입니다. propius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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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제시되는 ‘’과 ‘’의 비유는 이러한 근원적 구분을 매우 직관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에 비유됩니다. 낮과 밤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지배하는 근원의 문제입니다. 낮에는 태양이 지배하고, 밤에는 태양이 보이지 않듯이, 영적 삶에서도 주님이 중심이 될 때는 낮이고, 자기가 중심이 될 때는 밤입니다.

 

이러한 대비는 말씀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낮과 밤, 빛과 어둠, 해와 달, 깨어 있음과 잠듦의 이미지들은 모두 같은 영적 질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반복이 우연이 아니라, 말씀 자체가 인간의 내적 상태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일관된 언어라고 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구조 역시, 단순한 하루의 경과가 아니라, 밤에서 낮으로, 자기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이 글은 또한 거듭남 이후에도 경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어둠은 한 번 물리치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으며 다시 빛처럼 보이려 합니다. 그래서 영적 삶은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나오는 빛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삶입니다. 무엇이 주님에게서 왔는지, 무엇이 아직도 자기에게서 나오는지를 묻는 이 분별이 없으면, 어둠은 다시 빛으로 위장합니다.

 

결국 AC.21은 빛과 어둠을 감정이나 지식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기준은 언제나 근원입니다. 주님에게서 나온 것은 빛이며 낮이고, 자기에게서 나온 것은 어둠이며 밤입니다. 이 단순하지만 엄격한 기준 위에서만, 거듭남의 길은 혼란 없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심화

 

1.빛처럼 보였던’,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것들

 

AC.21, The darkness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에 나오는 빛처럼 보였던이나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것들의 생생한 예, 구체적 사례들을 좀 알려주세요.

 

AC.21의 문장은 사실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빛처럼 보였던 것’이라는 표현은, 사람이 거듭나기 전까지는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이 선하고 옳다고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사람에게는 어떤 생각과 행동이 매우 옳고 밝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것이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AC.21에서 말하는 ‘빛처럼 보였던 어둠’입니다.

 

첫 번째로 가장 흔한 예는 ‘자기 의로움’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성실하게 살고, 교회도 잘 다니며, 도덕적으로도 큰 흠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나는 비교적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그 사람에게는 매우 밝은 빛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더 깊은 자기 성찰을 하게 되면 이런 사실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선하게 살았다고 느꼈던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사실은 ‘자기만족과 자기 확신’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저 사람들보다 낫다’, ‘나는 그래도 양심적으로 산다’ 같은 생각들이 그 선한 삶 속에 섞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는 그것이 의로운 빛처럼 보였지만, 더 큰 빛 속에서는 그것이 ‘자기 사랑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 예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선행’입니다. 어떤 사람이 봉사를 많이 하고, 헌신적으로 일합니다. 겉으로 보면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이 숨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신실한 사람으로 봐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헌신하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이런 동기가 완전히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선행의 중심이 될 때 그 선은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한 선’이 됩니다. 그런데 당사자는 그것을 선한 일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빛처럼 보이는 어둠’이 됩니다.

 

세 번째 예는 ‘신앙적인 열심 자체가 빛처럼 보이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적으로 매우 열심입니다. 전도도 많이 하고, 교리도 열심히 공부하며,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열심 속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마음은 매우 미묘해서 본인은 그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신앙의 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사실은 ‘신앙을 통한 자기 확증’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런 것들이 하나씩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

 

네 번째 예는 ‘도덕적 분노’입니다. 사람은 때로 불의한 일을 보면 강하게 분노합니다. 이 분노는 겉으로 보면 정의로운 감정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분노 속에는 종종 ‘자기 감정이 상한 것’이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무시했을 때, ‘저 사람은 틀렸다’고 분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정의를 위한 분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사람에게는 그것이 정의의 빛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빛 속에서는 ‘자기 사랑의 그림자’로 보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즉 ‘proprium’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proprium은 단순히 인간의 개성이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인간 자신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이 중심은 대부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나오는 생각과 판단은 처음에는 매우 자연스럽고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선과 진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처음 경험하는 빛이 바로 ‘자기 안에 있던, 그동안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어둠이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빛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경험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자연스럽고 옳다고 느껴졌다면, 이제는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생각과 감정이 모두 옳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이 조금 더 들어오면, 이전에는 옳다고 느꼈던 것들 속에서도 ‘자기중심적 동기’가 섞여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사람은 처음으로 진짜 빛과 이전의 ‘빛처럼 보였던 것’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과정이 스베덴보리가 AC.21에서 말하는 ‘어둠이 드러나는 단계’입니다.

 

 

 

AC.22,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C.22-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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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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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이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걸 선이라, 그런 사랑들을 지지하는 모든 것을 진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선들이 악이며, 이러한 진리들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그는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며, 또한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건 주님 자신, 요한복음에서 가르치십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한 주님이 선 자체, 곧 생명이시며, 진리 자체, 곧 빛이시고, 따라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 속에서 다시 한번 ‘첫 번째 상태’를 언급하지만, 앞선 AC.7의 첫 상태와는 관점이 다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첫 상태는 완전한 어둠의 상태가 아니라, ‘빛이 처음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즉, 사람은 아직 선과 진리를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그것들이 자기 자신이나 세상보다 더 높은 차원에 속한 것임을 어렴풋이 알기 시작합니다. 이 ‘알기 시작함’이 바로 빛의 최초 침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의 상태를 매우 분명하게 묘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그들에게 선이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유익한 것이고, 진리란 그러한 사랑을 정당화해 주는 생각들입니다. 이때의 선과 진리는 외형상으로는 그럴듯해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악과 거짓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악과 거짓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무지가 바로 영적 어둠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상황이 달라집니다. 여기서 ‘잉태(conceived anew)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아직 출생이나 성숙이 아니라, 생명이 시작되는 지점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람은 비로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합니다. 이는 매우 불편한 깨달음이지만, 동시에 거듭남의 필수 조건입니다. 자기 선에 대한 확신이 무너지지 않는 한, 주님의 선은 들어올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깨달음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점점 더 빛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빛 안에서 그는 단지 도덕적 기준의 문제를 넘어, ‘주님의 실재’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여기서 선과 진리는 더 이상 추상적 개념이나 윤리적 목표가 아니라, ‘인격적 근원’을 지닌 실재가 됩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며, 주님과 분리하여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8:24)

 

라는 말씀은, 신앙이 단순한 교리 동의가 아니라 ‘주님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인식’임을 보여 줍니다. 주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른 채 선과 진리를 말하는 것은, 결국 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선언이에요. 요한복음 1장의 인용은 이 인식을 더욱 깊게 확증합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1, 3-4, 9)

 

이 말씀은 거듭남의 첫 인식이 왜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인지를 보여 줍니다. 빛은 항상 먼저 비치며, 어둠은 그 빛에 의해 비로소 어둠임이 드러납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첫 상태는 그래서 매우 미세하지만 결정적입니다. 사람은 아직 선을 행하지도,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하지만, 최소한 ‘자기 자신이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시작합니다. 선과 진리가 자신 위에 있으며, 그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인식의 싹이 트는 것입니다. 이 작은 전환이 이후 모든 거듭남의 과정을 가능하게 합니다.

 

결국 AC.20은 빛의 첫 인식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적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이 스스로를 빛으로 계시하시는 사건입니다. 사람은 그 빛 앞에서 자기 선의 한계를 보고, 주님의 선을 향해 눈을 들기 시작합니다. 이때 비로소 거듭남은 방향을 갖게 되며, 어둠 속에서 길을 찾기 시작합니다.  

 

 

심화

 

1.실제 사례들

 

AC.20,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에 해당하는 구체적 사례를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실제 목회현장에선 이 마저도 정말 쉽지 않은, 정말 보기 힘든 경우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끼는 어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목회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AC.20의 문장은 읽으면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 인간 삶에서는 거의 드물게 보이는 변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 상태는 갑자기 성인(聖人)이 되는 어떤 극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가면서 ‘자기 자신을 다르게 보게 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몇 가지 실제적인 유형을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AC.20의 문장을 다시 보면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선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단계는 사실 하나의 경험 안에서 이어집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선의 근원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유형은 목회 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열심 있는 신앙인의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신도 많이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신앙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자기 마음속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봉사를 하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지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헌신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속에 우월감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내가 하는 선한 일도 사실은 완전히 순수한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에서 말하는 첫 단계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실패를 통해 오는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고 합시다. 그는 자신이 비교적 선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건에서 예상하지 못한 분노나 이기심이 폭발합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자기 사랑이 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내 힘만으로는 참된 선을 이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이 조금 더 깊어지면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됩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두 번째 깨달음이 나타납니다. 즉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는 ‘용서의 경험’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성경 말씀도 알고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교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깨닫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마음을 바꾸어 주셔야 가능한 일이구나.’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기도하게 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이 말하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느끼시는 것처럼 이런 변화는 실제로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성인(聖人)의 상태가 아니라 ‘빛이 조금 더 들어온 상태’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자신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가는 것은 드물지만, 자기 선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보는 순간 이미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빛 속으로 더 들어갈수록’ 이런 깨달음이 깊어진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정도로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내 선에도 자기 사랑이 섞여 있다’는 것을 봅니다.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선을 행할 때 자연스럽게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자라면 ‘내 선에도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이런 ‘점진적인 빛의 증가’입니다.

 

그래서 AC.20의 문장은 어떤 이상적인 신앙인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갈 때 나타나는 ‘아주 현실적인 영적 경험의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스베덴보리의 경험

 

위 심화 1번에 이어지는 질문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본인이 직접 이런 과정을 밟은 건가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연구에서 매우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인간 내면의 과정을 어떻게 그렇게 구체적으로 알았는가?’ 하는 문제는 결국 그의 저술이 어떤 경험과 근거에서 나온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대체로 세 가지 층위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차원은 ‘개인적 영적 경험의 층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자신이 단순한 사상가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통해 실제로 거듭남의 과정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의 개인 기록인 ‘Spiritual Diary’와 ‘Adversaria’ 같은 글들을 보면, 그는 자신이 겪는 생각의 변화, 유혹, 내적 싸움, 깨달음 등을 매우 세밀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기록들을 보면, 그가 단순히 교리를 정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변화들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어떤 생각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영들의 영향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어떤 선한 감정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AC에서 설명하는 많은 심리적 과정들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체험하고 관찰한 것들’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두 번째 층위는 ‘영계 경험의 층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1740년대 중반 이후 영계가 열려서 천사들과 영들과 교통하게 되었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그들과 수십 년 동안 교통하며, 인간 영혼의 상태, 거듭남의 과정, 선과 진리의 작용 등을 직접 관찰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영계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의도가 거의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어떤 선이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지, 어떤 선이 주님에게서 오는지 매우 분명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이런 관찰을 통해 그는 인간의 선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왜 거듭남이 점진적으로 진행되는지, 왜 리메인스가 보호되어야 하는지 등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이것이 믿기 어려운 주장처럼 보일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 자신은 그의 신학 대부분이 이런 ‘영적 관찰을 통해 얻은 지식’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세 번째 층위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통해 얻은 이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성경을 읽을 때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그 안의 영적 의미가 열린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를 읽을 때, 그는 그것을 우주의 물리적 창조가 아니라 ‘인간 거듭남의 과정’으로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해석은 단순한 상징적 해석이 아니라, 천사들이 말씀을 이해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창세기의 ‘여섯 날’을 인간 내면의 여섯 단계로 보고, 각 단계에서 일어나는 영적 상태들을 설명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성경의 여러 구절을 통해 인간 영혼의 구조와 거듭남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이 세 가지를 서로 분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설명이 ‘개인 경험, 영계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서로 일치하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그는 단순히 자기 경험만 말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성경 해석만 한 것도 아니며, 단순히 영적 체험만 말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서로 확인되면서 하나의 교리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 AC.20 같은 설명도 단순히 인간 심리를 추측해서 쓴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보기에는 ‘자신의 내적 경험과 영적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가 모두 가리키는 동일한 원리’였습니다. 그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선을 선으로 생각하다가, 점점 빛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과정은 그가 자신에게서도 보았고, 영계에서도 관찰했으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 속에서도 발견했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한 신학자가 아니라 ‘영계를 관찰하는 자연과학자처럼 인간 영혼을 연구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인간 마음을 단순히 도덕적으로 평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왜 거듭남이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지, 왜 자기 선이 먼저 무너져야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AC.20 같은 문장은 바로 그런 연구의 한 부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하면, 스베덴보리가 이런 내용을 알게 된 이유는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가 겹쳐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내적 경험, 영계에서의 관찰, 그리고 말씀의 내적 의미에 대한 통찰’이 서로 맞아떨어지면서 이런 설명이 나오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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