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0

여러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음을 제가 있도록, 저는 육체 안에 사는 동안 알고 지내던 많은 사람들과 말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것도 단지 하루나 동안만이 아니라 여러 동안, 거의 동안이나 세상에서처럼 그들과 말하고 교제했습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 자신들이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죽은 뒤에는 살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그러한 불신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사실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안에 있게 됩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As it is permitted me to disclose what for several years I have heard and seen, it shall here be told, first, how the case is with man 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or how he enters from the life of the body into the life of eternity. In order that I might know that men live after death, it has been given me to speak and be in company with many who were known to me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and this not merely for a day or a week, but for months, and almost a year, speaking and associating with them just as in this world. They wondered exceedingly that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they were, and that very many others are, in such incredulity as to believe that they will not live after death; when in fact scarcely a day intervenes after the death of the body before they are in the other life; for death is a continuation of life.

 

해설

AC.70부터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예고한 다른 에 관한 실제 내용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했고, AC.68에서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다고 증언했으며, AC.69에서는 사람이 몸을 입은 영이기 때문에 육체 안에 있으면서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0에서는 그 다른 삶에 들어가는 첫 순간, 곧 사람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상태를 다루겠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처음 등장하는 중요한 표현이 소생될 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죽음 이후의 일을 소멸한 사람이 다시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소생은 죽음으로 존재가 끊어졌다가 다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AC.70의 마지막 문장이 그 의미를 가장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들이 죽은 뒤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자신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도 말합니다. 그는 육체 안에서 알고 지냈던 많은 사람들과 그들이 죽은 뒤에도 말하고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그 경험은 하루나 한 주 정도에 그치지 않고 여러 달 동안, 어떤 경우에는 거의 일 년 동안 이어졌으며, 그는 그들과 이 세상에서처럼 말하고 교제했다고 합니다. AC.68에서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다고 한 증언이 여기서부터 구체적인 내용으로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가 사후에 만난 사람들이 보인 반응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들은 육체 안에서 살 때 자신들도 죽은 뒤에 계속 살아갈 것을 믿지 않았으며, 지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지 않는다는 사실을 몹시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죽기 전에는 사후의 삶을 믿지 못했던 사람이 죽은 뒤에는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고, 과거의 자기 불신을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들의 불신을 책망하거나 그 원인을 자세히 분석하지 않고, 그들이 보인 놀라움 자체를 전합니다.

 

이어지는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은 다른 안에 있게 된다는 문장은 특히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장이 직접 말하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 사이에 긴 단절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거의 하루를 곧바로 영계의 하루라는 시간 단위로 해석하거나, 반대로 실제 시간이 전혀 아니라 하나의 상태만을 뜻한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부터 사람이 어떻게 소생되어 다른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차례로 설명하려 하고 있으므로, 그 구체적인 과정은 이어지는 기록을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같은 이유로 AC.70에서 곧바로 연옥이나 영들의 세계에 관한 완성된 교리를 끌어올 필요도 없습니다. 현재 해설에는 어떤 중간 지대나 공백이 없다’, ‘연옥이나 무의식 상태를 전제하지 않는다는 설명이 있지만, AC.70 자체가 여기서 연옥을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번호의 직접적인 강조점은 훨씬 단순하고 강합니다. 육체가 죽은 뒤 인간의 삶은 중단되지 않으며,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는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0의 마지막 문장은 이 번호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말은 죽음이 아무 변화도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간다는 분명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 가운데서도 살아 있는 인간 자체가 소멸했다가 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 번호의 중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연속성 안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음 번호들에서 더 자세히 말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AC.70 해설)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 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 심화1.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 영계에도 시간이 있는가?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육체의 죽음 이후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이 다른 삶 안에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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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다’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는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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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창2 앞, ‘인간은 본래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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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김으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던 길이 닫혔지만,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육체적인 것들을 물러가게 하면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AC.69가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정확히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들과 말할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금식이나 명상이나 특별한 기도법을 제시하지도 않고, 감각을 억제하거나 세상생활에서 물러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 본래 육체 안에서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으며, 태곳적에는 실제로 그러했지만, 사람들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에 너무 깊이 잠기면서 그 길이 닫혔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표현을 곧바로 어떤 수행 방법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몸 자체를 나쁜 것으로 여기거나 일상생활을 버리는 것이 그 길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69에서 문제는 인간에게 육체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겨 그 밖의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중심은 육체를 제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인간의 관심과 삶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사후의 일을 말하는 것일까요? AC.67부터의 흐름을 보면 다른 ’, 곧 육체의 삶 이후의 영적 삶이 중요한 배경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AC.69의 첫 문장은 명백히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인간이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마지막 문장을 오직 죽은 뒤에만 일어나는 일로 제한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바로 앞의 AC.67에서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러므로 우리도 스베덴보리와 같은 상태를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AC.69에는 그런 권고가 없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어떤 일이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모든 사람이 그것을 의도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현재 이 번호에서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영적 세계와 전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에 대한 깊은 잠김이 그 길을 닫았다는 것까지입니다.

 

그러므로 AC.69을 읽고 우리가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나도 영들을   있을까?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나는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만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이 본문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몸을 입은 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삶도 영적 생명과 무관한 시간이 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실재의 전부로 여기지 않는 것이 AC.69이 독자에게 먼저 열어 주는 시야입니다.

 

앞으로 AC가 진행되면 인간과 영계의 관계,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히 허락된 상태, 그리고 사후에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에 관하여 더 구체적인 설명들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AC.69에서 그 모든 문제를 미리 해결하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간다는 말을 영적 체험을 얻기 위한 기술이나 수행의 지침으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설명하는 것은 인간이 본래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으며, 왜 태곳적에 열려 있던 길이 닫히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C.69 심화 1)

 

 

 

AC.69, 창2 앞, ‘인간은 본래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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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되어,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두지 않게 되었고, 그리하여 길이 닫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리며, 그는 영들 가운데 있게 되고 그들과 공동의 안에 있게 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 for, 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 he is one with them. 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 the way was closed. 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 the way is again opened, and he is among spirits, 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AC.69는 앞의 두 번호에서 제기된 문제를 인간의 창조 질서와 연결합니다. AC.67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다고 했고, AC.68에서는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사람들이 상상이라고 여길 것을 알면서도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때문에 물러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9에서는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의 대답은 사람이 주님에 의해 처음부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제시되는 문장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이므로 영들과 하나라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육체만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육체 안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인간에게도 영적 차원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육체를 입지 않은 영들과 전적으로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AC.69가 말하는 영들과의 관계는 인간에게 전혀 낯선 능력이 외부에서 추가되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고,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가에서 출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로 태곳적에는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메인 해설처럼 태고교회 사람들이 자연계와 영계를 동시에 인식했으며 영적 교통이 일상적 삶이었다고 여기서부터 자세히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곳적 사람들이 육체 안에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었다는 데까지입니다. 그들의 내적 상태와 퍼셉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는 이후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점차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은 이러한 일이 일반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요? AC.69는 그 원인을 인간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에 너무 깊이 잠기게 에서 찾습니다. 여기서 육체와 세상 자체를 악하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이 문제 삼는 것은 사람이 그것들에 너무 깊이 잠겨 그 밖의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인간의 관심이 감각으로 접하는 것과 세상에 속한 것에 압도되면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던 길이 닫혔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길이 닫혔다는 표현 역시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메인 해설은 길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닫혔으므로 인간의 본성 안에 영적 교통의 가능성이 차단된 상태로 남아 있다고 설명합니다.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지만, AC.69가 직접 설명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간 표현입니다. 이 번호에서 분명한 것은 육체적인 것들에 잠김으로 길이 닫혔고, 그것들이 물러가면 다시 열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의 인간론적 구조는 뒤의 설명과 함께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면서도 오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기만 하면 길은 다시 열린다고 합니다. 이것을 읽고 그렇다면 나도 육체적인 것들을 물러가게 하면 영들과 말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AC.69 자체는 그것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나 수행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육체적 감각을 억제하라거나 세상생활을 떠나라거나 영들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추구하라는 권고도 없습니다. 이 번호는 그 길이 어떤 조건에서 닫혔고 어떤 조건에서 다시 열리는지를 설명할 뿐입니다.

 

따라서 현재 메인 해설의 마지막 부분처럼 AC.69만으로 스베덴보리가 육체적 일상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영계를 지속적으로 지각했고, 두 가지 활동을 동시에 수행했다고 구체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이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의 특별한 상태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앞으로 그의 증언을 더 읽으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붙들어야 할 핵심은 더 근본적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육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몸을 입은 이며, 그래서 영적 세계와 전적으로 무관한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AC.67-69를 함께 읽으면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67은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다고 밝히고, AC.68은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직접 경험했다고 증언하며, AC.69는 그러한 경험의 가능성을 인간이 몸을 입은 이라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동시에 인간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에 깊이 잠김으로 그 길이 닫혔다고 설명합니다. 이로써 앞으로 이어질 영계에 관한 증언은 인간과 전혀 관계없는 낯선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육체의 삶 이후에도 어떻게 계속 살아가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AC.69 해설)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 심화 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 심화1.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AC.69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적인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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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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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앞, ‘나는 보았고, 들었고, 느꼈다’

AC.68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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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천사들과 말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제가 신뢰를 얻기 위해 이런 것들을 이야기한다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밖의 여러 반대를 제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저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 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 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 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 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 for I have seen, I have heard, I have felt.

 

해설

AC.68AC.67에서 시작된 스베덴보리의 영계에 관한 증언을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딛게 합니다. AC.67에서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그동안 듣고 본 것을 이제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곧바로 그러한 주장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으면서 영들과 천사들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사람들, 모든 것이 상상이라고 할 사람들, 사람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할 사람들이 있을 것임을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러한 반대에 대해 논증으로 답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하는 것이 철학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를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자신의 말을 믿어야 할 이유들을 길게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대답은 매우 짧습니다.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AC.68에서 스베덴보리가 내세우는 것은 이론적 가능성이 아니라 자신에게 실제로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경험의 증언입니다.

 

그렇다고 보았다’, ‘들었다’, ‘느꼈다라는 세 동사에 각각 별도의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보았다는 형상과 구조와 질서를 인식했다는 뜻이고, ‘들었다는 의미와 소통이 있었다는 뜻이며, ‘느꼈다는 실재로서 경험했다는 선언이라고 세분합니다. 그러나 AC.68 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세 표현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단순한 생각이나 추측이 아니라 직접적인 경험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정도로 읽는 것이 더 충실합니다.

 

또한 이 세 가지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증언이 상상이나 자기 암시일 수 없다고 논증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 해설에는 상상이라면 질서 있게 보고 들을 수 없고, 자기 암시라면 일관된 구조와 반복 가능한 경험으로 남기 어려우며, 조작이라면 수십 년 동안 내부 정합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AC.68에서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논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반론을 하나씩 논파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경험했다고 증언하는 데 머뭅니다. 그 절제된 태도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는 편이 이 단락의 힘을 더 잘 살립니다.

 

AC.68은 독자에게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무조건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보고 듣고 느꼈다고 말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중요한 것은 독자에게 믿을 것인가, 거짓말이라고 것인가를 당장 선택하게 만드는 데 있다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기록의 성격을 분명히 밝히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계에 관하여 앞으로 기록할 내용들을 추측이나 철학적 사색이 아니라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하도록 허락된 것에 관한 증언으로 제시하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7AC.68은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8에서는 그러한 말을 사람들이 믿기 어려워할 것이라는 사실까지 인정하면서도 그 증언을 거두지 않습니다. 독자는 바로 이 전제를 알고 이후의 기록을 읽게 됩니다.

 

그러므로 AC.68의 마지막 세 동사는 짧지만 중요합니다. ‘저는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기 때문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 문장으로 모든 반론이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론을 예상하면서도 자신이 경험했다고 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침묵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앞으로 그의 영계에 관한 기록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지만,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어떤 성격의 기록으로 제시하고 있는지는 이 짧은 번호에서 분명해집니다. (AC.68 해설)

 

 

 

AC.69, 창2 앞, ‘인간은 본래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사람은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은 몸을 입은 영이므로 그들과 하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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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창2 앞, ‘왜 말씀의 속뜻을 알려면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하는가’ (AC.67-72)

AC.67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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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심화

1. 다른 삶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AC.67을 처음 읽는 독자는 거의 즉시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는 다른 삶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 은 무엇이며,  본성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AC.67은 아직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예고합니다. 그러므로 이 심화에서도 뒤에 나올 내용을 모두 앞당겨 설명하기보다, 앞으로의 독서를 위해 꼭 필요한 정도만 먼저 짚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다른 은 이 세상의 육체적 삶과 구별되는 사후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삶은 단지 죽은 뒤 어딘가에서 존재한다는 막연한 교리가 아닙니다. 사람이 육체의 죽음 뒤에도 의식과 인격을 지닌 채 계속 살아가며, 영들과 천사들이 실제로 살아가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것이 그의 증언의 중요한 전제입니다. AC.67에서 그가 여러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었다고 말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다른 삶이 그에게 관념이나 추측이 아니라 듣고 볼 수 있도록 허락된 실제의 삶이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AC.67은 단순히 사후세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그 삶을 향하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문자에는 땅과 하늘, 집과 성, 사람과 짐승, 올라감과 내려감,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 같은 자연계의 언어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그러한 표현들이 인간의 영적 생명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의미만 알고 영적 삶의 질서를 전혀 알지 못한다면, 속뜻에서 말하는 많은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다른 삶의 본성을 안다는 것을 영계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미리 외워 두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기 전에 천국과 지옥의 구조를 모두 알아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AC.67부터 이어지는 글 자체가 독자에게 그 세계를 차례로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속뜻이 자연계의 사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 영적 생명과 영적 세계의 질서를 향하고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읽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사후세계 호기심과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삶을 말하는 이유는 죽은 뒤 무엇을 보고 어디를 돌아다니는지가 흥미롭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과 연결되는 것은 그 세계가 인간의 내적 생명과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AC가 진행되면서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 천국과 지옥, 거듭남과 같은 주제들이 계속 등장하게 됩니다.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 가는 것은 결국 인간이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이 세상에서 어떤 생명을 형성해야 하는지를 알아 가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AC.67에서 다른 삶의 본성을 모르면 속뜻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알 수 없다고 한 말을 지나치게 부담스럽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먼저 영계를  알아야 AC 읽을 자격이 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자연계의 시야 안에서만 읽었던 말씀을 더 넓은 실재 안에서 읽도록 독자의 시선을 여는 말에 가깝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며,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실재를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AC.67은 창2의 시작에 영계에 관한 이야기를 갑자기 끼워 넣은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창2의 속뜻을 읽기 위해 독자가 갖추어야 할 하나의 중요한 시야를 먼저 열어 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에 관하여 보고 들은 것을 이제 밝히겠다고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독자는 앞으로 그의 증언을 따라가면서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조금씩 배우게 되고, 동시에 왜 그것을 알아야 말씀의 속뜻이 더 깊이 열리는지도 차츰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AC.67 심화 1)

 

 

 

AC.67, 창2 앞, ‘왜 말씀의 속뜻을 알려면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하는가’ (AC.67-72)

AC.67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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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없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바로 삶을 향하고 있고,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로 하여금 여러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기간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As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iven me to know 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in which are contained deepest arcana that have not before come to anyones knowledge, nor can come unless the nature of the other life is known (for very many things of the Words internal sense have regard to, describe, and involve those of that life), I am permitted to disclose what I have heard and seen during some years in which it has been granted me to be in the company of spirits and angels.

 

해설

AC.67은 창2의 본문 해설로 들어가기 전에 놓인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곧바로 창2의 속뜻을 설명하지 않고, 자신이 이제부터 무엇을 밝히려 하는지 먼저 말합니다. 그것은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이며, 특히 그 가운데 매우 많은 것은 다른 ’, 곧 사후에도 계속되는 영적 삶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AC.67은 창2의 첫 해설이라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AC.67-72의 영계에 관한 증언을 여는 서문에 가깝습니다.

 

첫 문장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일을 자신의 학문이나 추론의 성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에게 허락된일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도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었던 일과 그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일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AC.67의 처음과 끝이 모두 인간의 성취보다 주님의 허락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의 본성을 연결하는 이유도 본문 안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그 삶을 향하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사후세계를 많이 알면 성경 해석에 도움이 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 자체가 영적 세계와 인간의 영원한 삶에 관계되는 것들을 품고 있으므로, 그 세계의 본성을 전혀 모른다면 속뜻의 많은 부분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사후세계에 관한 책이다라고까지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메인 해설에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후 세계를 바라보며 기록된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AC.67의 직접 진술은 그보다 신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다른 삶을 향하고 그것을 묘사하며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이후 주님과 그분의 나라, 교회,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의 질서 등 훨씬 넓고 깊은 내용을 펼쳐 보일 것이므로, AC.67에서는 원문이 정한 범위를 그대로 지키는 편이 좋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겠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다른 삶의 본성을 철학적 추론으로 재구성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합니다. 바로 다음 AC.68부터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사람들이 보일 반응까지 예상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67은 앞으로 이어질 영계에 관한 기록을 어떤 성격의 글로 읽어야 하는지를 미리 알려 주는 역할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AC.67 하나만으로 스베덴보리의 영적 경험 전체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확정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 메인 해설에는 공간을 이동한 것이 아니라 인식과 지각의 차원이 열렸다고 단정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번호 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그가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고 그 가운데서 듣고 보았다고 말하는 데까지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 경험의 구체적인 성격은 이어지는 번호들과 다른 관련 저작을 통해 점차 확인해야 합니다.

 

결국 AC.67의 무게는 말씀의 속뜻과 영계에 관한 증언을 처음부터 서로 연결해 놓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 창2의 속뜻을 읽는 독자는 단지 자연계의 사건과 인간 심리만을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려 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만나게 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그 다른 삶을 알게 된 것도, 그것을 이제 밝히게 된 것도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자비와 허락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 두 축,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의 관계주님의 허락 아래 주어진 증언AC.67 이후를 읽는 출발점입니다. (AC.67 해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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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심화1. ‘다른 삶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AC.67을 처음 읽는 독자는 거의 즉시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는 ‘다른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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