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 (16-17)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16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6, 17)

 

해설

AC.80은 창2:16-17의 개요이며,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질서에 하나의 중요한 제한을 제시합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과 같은 사람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아는 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이 금지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금지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알려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2:16-17의 금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등장한다고 해서 지식이나 이성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AC.75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말했고, AC.78에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하며 이것들까지도 지혜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80의 문제는 인간이 알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 및 신앙의 아르카나를 무엇으로부터 알고 판단하려 하는가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AC.77에서는 에덴동산의 보기에 좋은 나무들이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80은 그 퍼셉션의 근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오는 퍼셉션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을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직감이나 자기 확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뜻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그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안 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것들은 인간이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외적인 것들과 관계되고, ‘기억지식은 사람이 배우고 경험하여 기억에 받아들인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AC.78에서 기억지식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AC.80은 자연계의 사실을 관찰하거나 기억지식을 배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적인 것의 진실 여부를 인간 자신이 결정하려는 질서를 경계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는 된다는 말을 질문이나 연구 자체의 금지로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의 속뜻을 밝히면서 끊임없이 설명하고 구별하고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C.80에서 금지되는 것은 탐구라는 행위 자체라기보다, 그 앞에 붙어 있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라는 방식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 하는 것이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80을 반지성주의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자연적인 사실을 감각과 관찰을 통하여 확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것은 신앙의 아르카나입니다. 자연적인 것들을 알아보는 데 사용하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그대로 신적인 것의 최종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가 단순한 인식 방법의 차이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여기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닙니다. 2:17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이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AC.73에서 거듭남 이전의 사람이 죽어 있던상태라고 한 것과 AC.80에서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AC.79AC.80을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도 보입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두 번호 모두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가지거나 아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방향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를 여기서 proprium이나 인간의 자유에 관한 전체 교리로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AC.79AC.80이 보여 주는 직접적인 연결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80은 따라서 창2:16-17의 금령을 알지 말라는 명령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아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할 때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는 것이, 이 개요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16-17에 관하여 먼저 제시하는 핵심입니다. (AC.80 해설)

 

심화

1. 개역개정에는 열매 들어가 있는가?’(2:16-17)

 

2:16-17을 개역개정과 AC에 실린 영어 성경으로 함께 읽으면 작은 차이 하나가 눈에 띕니다. 개역개정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AC에 인용된 영어에서는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이라고 되어 있어 열매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개역개정은 왜 열매를 넣었을까요?

 

먼저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본문에도 이 두 절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별도의 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너는 먹을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먹지 말라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따라서 AC에 실린 영어가 tree를 그대로 살린 것은 히브리어의 표현 구조와 잘 맞습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나무에서 먹는다또는 문맥에 따라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이 독자에게 어색하거나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먹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의 나무의 열매는 이 뜻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전달하기 위해 먹는 대상을 명시적으로 풀어 준 번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열매가 히브리어 원문에 별도의 단어로 있는데 영어 번역이 빠뜨린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개역개정이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임의로 첨가했다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 차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개별 표현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역개정의 열매라는 번역 표현을 근거로 창2:16-17의 속뜻에 원문에 없는 별도의 열매상응을 추가해서는 안 됩니다. AC.80에서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것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알려 하거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AC와 함께 읽을 때는 개역개정의 자연스러운 한국어와 원문의 표현 구조를 함께 기억하면 좋습니다. 예배에서 개역개정을 읽을 때는 그대로 나무의 열매라고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AC의 속뜻을 검토할 때는 히브리어와 AC의 영어가 실제로 나무에서 먹는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번역문에 명시적으로 보이는 단어와 원문에 실제로 있는 단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 번역AC 속뜻 해설이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성경 번역은 원문의 뜻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한국어로 전달해야 하고, AC 해설에서는 그 번역 뒤에 있는 원문의 표현까지 확인하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2:16-17에서는 개역개정의 열매를 그대로 존중하여 읽되, AC의 상응을 판단할 때 그것을 원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어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0 심화 1)

 

 

 

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는데, 앞 장이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룬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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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절) The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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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사람은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 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 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 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verse 15).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5)

 

해설

AC.79는 창2:15의 개요입니다. 바로 앞의 AC.77에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안의 나무들이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78에서는 동산의 강이 지혜이고, 거기에서 나온 네 강이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며, 이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고 그 지혜가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9는 이 모든 설명을 받아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에덴동산은 단지 천적 인간이 들어가 있는 외부의 장소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천적 인간 자신이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앞에서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차례로 언급된 뒤, 이제 그 전체를 천적 인간이라는 하나의 동산으로 묶어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매우 중요한 제한을 덧붙입니다. ‘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천적 인간이 동산이라고 해서 그 동산이 천적 인간 자신의 소유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78에서도 네 강으로 묘사된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고, 그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9에서는 그 동산 자체가 주님의 것이라고 명시합니다.

 

이 때문에 이어지는 누리는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의 구별이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 그 동산에 속한 모든 것을 누리는 은 허락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버리거나 사용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누리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은 허락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기 것으로 소유한다는 말을 단순한 물질적 소유의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말하는 동산은 천적 인간 자신과 그의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 등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러한 것들을 실제로 가지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것인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AC.79의 문장 자체 안에 들어 있습니다. ‘누리는 은 허락되고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인간은 아무것도 받아서는 안 된다거나, 아무것도 자기 삶 안에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천적 인간은 동산에 속한 것들을 실제로 누립니다. 다만 그 동산이 누구의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

 

현행 해설은 여기에서 인간의 자유와 책임, 선을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하는 문제, 그리고 proprium의 교리까지 연결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앞으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AC.79라는 개요에서는 아직 그 전체 교리를 미리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자기 것으로 소유한다는 한 표현만으로 이후의 proprium 교리 전체를 이 번호 안에 끌어들이기보다, 우선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누림소유의 대조를 정확하게 보존하는 편이 좋습니다.

 

2:15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씀 역시 아직 여기서 자세히 풀 필요가 없습니다. AC.79는 그 명령의 세부적인 속뜻을 설명하기보다, 천적 인간이 이와 같은 동산이며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가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있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는 개요를 먼저 제시합니다. ‘경작하며 지킨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해당 본문의 상세 해설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원리를 곧바로 창3의 타락에 적용하여 에덴의 상실은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한 결과라고 완성해 버리는 것도 아직은 기다려야 합니다. AC.79가 이후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번호 자체는 아직 타락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독자는 우선 에덴의 상태에서 무엇이 허락되고 무엇이 허락되지 않는지를 분명히 기억하면 됩니다.

 

AC.79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결국 매우 단순하면서도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그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그는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문장으로 천적 인간과 그가 누리는 모든 것 사이에 하나의 분명한 질서를 세웁니다. 인간은 동산을 누리는 자이지만, 동산의 주인은 아닙니다. (AC.79 해설)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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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강,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것들’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입니다. 이것들은 속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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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강이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입니다.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합니다셋째는 이성이고, 넷째는 기억지식이며,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합니다. 모든 것은 지혜에서 나오며,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 (10-14) Wisdom is meant by the river in the garden. From thence were four rivers, the first of which is good and truth; the second i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of good and truth, or of love and faith. These are of the internal man. The third is reason, and the fourth is memory-knowledge [scientia],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All are from wisdom, and this is from love and faith in the Lord (verses 1014).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땅을 둘렀으며 12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0-14)

 

해설

AC.78은 창2:10-14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강과 네 강의 속뜻을 개요로 보여 줍니다. AC.77에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동산의 나무들이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8에서는 동산의 강이 지혜를 의미한다고 하고, 거기에서 나온 네 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차례대로 밝힙니다.

 

먼저 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는 강이라는 자연물의 특징을 살펴 우리가 지혜라는 상응을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 의미를 밝혀 줍니다. 따라서 이 개요에서 우선 붙들어야 할 것은 에덴동산의 강이 지혜를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강이 지혜를 의미하며, 왜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에서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강에서 네 강이 나옵니다.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가리켜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합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첫째와 둘째 강이 속 사람과 관계된다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해석이 아니라 AC.78이 직접 밝히는 내용입니다.

 

둘째 강에 사용된 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Pottsknowledge라고 번역하면서 라틴어 cognitio를 함께 표시하고 있는데, 넷째 강에 사용된 memory-knowledge [scientia]와는 다른 말입니다. 둘을 모두 일반적인 지식으로 옮기면 이 번호에서 나타나는 구별이 흐려질 수 있으므로, 여기서는 cognitio’, ‘scientia기억지식으로 구별합니다. 다만 AC.78 한 번호만으로 이 두 라틴어의 모든 용례와 차이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셋째는 이성이고 넷째는 기억지식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겉 사람에게 속한다고 합니다. 이 점은 AC.75와 함께 읽으면 특히 중요합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언급되었지만 그것들이 어디에 속하는지는 아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AC.78에 와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성과 기억지식을 겉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밝힙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이 이성과 기억지식을 잃는다는 뜻이 아님도 다시 확인됩니다.

 

여기서 속 사람은 선하고 겉 사람은 악하다고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AC.78은 겉 사람에게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까지도 지혜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가 제시하는 구별은 선한 부분과 악한 부분의 구별이 아니라, 속 사람에 속하는 것과 겉 사람에 속하는 것의 구별입니다. 겉 사람 자체나 그 안의 이성과 기억지식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할 근거는 이 번호에 없습니다.

 

이 네 가지를 말한 뒤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문장으로 전체를 묶습니다. ‘ 모든 것은 지혜에서 나오며,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첫째의 선과 진리, 둘째의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 셋째의 이성, 넷째의 기억지식이 모두 하나의 지혜와 관계되며, 그 지혜는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문장 때문에 AC.78은 앞의 개요 번호들보다 천적 인간의 내적·외적 관계를 조금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스베덴보리가 말한 것 이상으로 구조를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기억지식에서 이성으로, 이성에서 선과 진리로 올라가는 길과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를 거쳐 아래로 내려오는 길을 서로 대립시키는 완성된 인식론을 이 한 번호에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78이 직접 말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고, 그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성과 기억지식이 사람을 섬긴다고까지 아직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에서 분명한 것은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과 그것들도 지혜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하고 하나가 되는지는 뒤에서 더 설명됩니다. 따라서 지금은 그 관계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한 구별과 공통의 근원을 정확히 보존하는 것이 좋습니다.

 

AC.77과의 연결도 중요합니다. AC.77에서는 생명나무가 사랑을, 지식의 나무가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고, AC.78에서는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랑과 신앙이 천적 인간의 지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 어느 것이 주된 것인지에 관한 더 자세한 설명까지 이 개요에서 미리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이 네 강을 창3의 타락과 곧바로 연결하여, 사람이 자기 이성과 기억지식을 최종 판단자로 삼으면 이 질서가 뒤집힌다고 설명하는 것도 지금은 기다리는 편이 좋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지만 AC.78은 타락한 질서가 아니라 현재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에게 속한 것들을 개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AC.78에서 먼저 기억할 구조는 명확합니다. 동산의 강은 지혜입니다. 첫째 강은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이며, 이 둘은 속 사람에게 속합니다. 셋째는 이성이고 넷째는 기억지식이며, 이 둘은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지혜에서 나오며, 그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 각각의 강이 왜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지는 앞으로 창2:10-14의 상세 해설에서 하나씩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AC.78 해설)

 

 

 

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절) The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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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의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8-9절)

AC.77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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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8-9) 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 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 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verses 89).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8, 9)

 

해설

AC.77은 창2:8-9의 개요입니다. AC.73에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되는 것을 창2에서 다룬다고 했고,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라고 했습니다. AC.75에서는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을 말했습니다. 이제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된다고 하고, 그 동산 안에 있는 나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간략하게 밝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는 앞에서 계속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이 개요에서 천적 인간의 지성을 묘사합니다. 다만 왜 에덴인지, 동산인지, 동쪽인지에 관한 각각의 속뜻은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AC.77은 창2:8-9의 상세 해설이 아니라 개요이므로,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연결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 동산 안의 나무들이 나옵니다.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보기에 좋은 것과 먹기에 좋은 것을 구별하고 각각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에 연결합니다. 그러나 왜 보는 이 진리와 관계되고 먹는 이 선과 관계되는지까지 AC.77에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개요에서는 그 대응 관계를 먼저 확인하고, 세부적인 근거는 뒤의 본문 해설을 기다리는 편이 안전합니다.

 

여기서 퍼셉션이라는 말은 앞으로 천적 인간과 태고교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용어가 됩니다. 다만 AC.77 한 번호만으로 퍼셉션의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천적 인간의 지성을 묘사하는 에덴동산 안에 진리에 대한 퍼셉션과 선에 대한 퍼셉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퍼셉션이 정확히 어떤 것이며 일반적인 직감이나 주관적인 확신과 어떻게 다른지는 앞으로의 설명을 따라가며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나무가 특별히 언급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 의미를 밝혀 주므로 그대로 붙들어야 합니다. 특히 지식의 나무가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지식의 나무라는 이름만 보고 지식이나 이성 자체를 악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AC.75에서도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이미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AC.77에서 곧바로 생명나무는 좋은 것이고 지식의 나무는 나쁜 것이라고 나누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생명나무가 사랑을 의미하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을 의미한다고 할 뿐, 신앙 자체가 악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후 두 나무가 어떤 질서와 문맥 속에서 다시 등장하는지는 그때의 설명을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창3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가져와 지식의 나무를 부정적인 원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같은 이유로 이 번호만으로 사랑과 신앙의 전체적인 관계를 미리 체계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행 해설은 천적 인간에게 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며,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된다는 차이까지 설명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앞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AC.77의 역할은 그 전체 질서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가 각각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먼저 제시합니다.

 

AC.77에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각각의 상응을 서로 연결하여 아직 제시되지 않은 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쪽은 주님이고, 에덴동산은 지성이며, 생명나무는 사랑이므로, 에덴동산은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지성이다라고 여기서 바로 결론을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각의 요소가 뒤에서 어떻게 설명되고 서로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를 스베덴보리 자신의 순서를 따라 확인하는 편이 더 충실합니다.

 

따라서 AC.77은 짧지만 앞으로 에덴 이야기를 읽기 위한 중요한 표지판을 여러 개 세워 줍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안의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그리고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이 연결들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각각의 의미와 관계는 창2의 실제 본문 해설을 따라가면서 하나씩 더 깊어질 것입니다. (AC.77 해설)

 

 

 

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강,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것들’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입니다. 이것들은 속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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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창2:1-17 개요, ‘그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 (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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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7)

 

해설

AC.76은 창2:7의 개요입니다. AC.73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되는 것을 창2에서 다룬다고 했고,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AC.75에서는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6에서는 그 사람의 생명이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밝힙니다. 그것은 창2:7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입니다.

 

여기서 그의 생명에서 는 앞에서 계속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AC.76은 일반적인 생물학적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번호가 아닙니다. 2:7의 문자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사람이 생령이 되는 장면이 나오지만,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2:1-17의 속뜻을 개괄하면서 그 말씀으로 천적 인간의 생명이 묘사된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 한 문장에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의 속뜻 전체를 미리 풀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무엇을 뜻하는지, 에 불어넣는다고 하는지, ‘생명의 은 무엇이며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는 창2:7의 상세한 해설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AC.76은 아직 그러한 세부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천적 인간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는 큰 연결만 제시합니다.

 

또한 생명의 을 곧바로 성령과 동일시하는 것도 이 단계에서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에서 숨과 호흡과 영이 서로 관련되는 경우가 있지만, AC.76은 그러한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Potts 영어의 the breath of lives에서 lives가 복수형이라는 사실만 가지고 여러 종류나 단계의 생명을 뜻한다고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원문의 세부 표현은 기억해 둘 수 있지만, 그 의미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기다려야 합니다.

 

바로 앞의 AC.75와 비교하면 개요의 진행도 보입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말했고,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순서만으로 기억지식과 이성은 낮은 것이고 생명은 높은 것이라는 위계를 만들거나, 기억지식과 이성에는 생명이 없고 별도로 생명이 주어져야 한다는 체계를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2:1-17의 여러 절이 천적 인간의 무엇을 묘사하는지를 한 항목씩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행 해설에서는 불어넣으심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설명하고,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사랑과 지혜와 생명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장 내적으로 인정하는 인간이라고까지 나아갑니다. 이러한 주제는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매우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AC.76 자체가 여기서 그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개요에서는 말씀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이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정확히 확인하고 멈추는 편이 좋습니다.

 

같은 이유로 proprium의 문제도 아직 끌어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의 생명과 proprium이 이후 깊이 연결되더라도 AC.76에는 proprium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후대의 설명을 앞당기면 오히려 독자가 창2의 실제 전개를 따라가면서 그 관계를 발견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AC.76의 역할은 매우 단순합니다. 2:7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것은 속뜻에서 지금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의 생명을 묘사합니다. 그 생명이 정확히 무엇인지, ‘생명의 의 각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AC.76은 그것을 미리 완성하는 번호가 아니라, 뒤에서 자세히 풀어 갈 창2:7의 핵심을 한 문장으로 먼저 보여 주는 개요입니다. (AC.76 해설)

 

 

 

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의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8-9절)

AC.77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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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창2:1-17 개요, ‘안개로 적셔지는 땅의 관목과 초목, 기억지식과 이성’ (5-6절)

AC.75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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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셨더라 (5, 6)

 

해설

AC.75는 창2:5-6의 개요입니다. AC.73에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된다고 했고,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5에서는 그 사람의 기억지식과 이성이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간략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관목과 초목입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천적 인간에게도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적 인간이 된다는 것은 사람이 기억지식이나 이성을 잃거나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AC.75는 오히려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다만 이 번호에서는 그것들이 천적 인간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고, 2:5-6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고만 개괄합니다.

 

scientificum을 단순히 일반적인 지식으로 옮기기보다 기억지식으로 옮기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이 말은 사람이 배우고 경험하여 기억에 받아들인 지식의 층위와 관련됩니다. ‘rationale이성입니다. 따라서 AC.75는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없어진다고 하지 않고, 그것들이 창2:5-6의 특정한 자연적 표상들을 통해 묘사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관목은 기억지식이고 초목은 이성이라고 하나씩 고정하여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AC.75의 문장은 두 가지를 함께 묶어 말합니다.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따라서 이 개요 단계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제시한 묶음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목과 초목 각각의 의미와 관계는 실제 본문 해설에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기다리는 편이 안전합니다.

 

현행 해설에서는 관목과 초목이 나무보다 낮게 자라므로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주인이 아니라 섬기는 이며, 삶을 지탱하고 섬기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 이미지로서는 아름다운 설명이지만 AC.75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특히 자연물의 외형적 특징을 보고 그 상응을 추론하여 확정하는 방식은 조심해야 합니다. 상응은 단순히 나무는 높고 관목은 낮으므로 높은 것은 중심이고 낮은 것은 섬김과 같은 방식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개에 대해서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현행 해설은 안개가 비처럼 위에서 내리지 않고 땅에서 올라온다는 점을 근거로, 이것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계시나 교훈이 아니라 내적으로 스며드는 생명의 영향이라고 해석하고, 천적 인간에게는 생명이 안에서 밖으로 부드럽게 흘러간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AC.75 자체는 아직 안개의 속뜻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기억지식과 이성이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된다는 연결만 제시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인식 방법을 완성된 체계로 대비시키는 것도 조금 기다리는 편이 좋습니다. 현행 해설은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이고 기억지식과 이성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지만, 천적 인간에게는 선이 먼저이므로 기억지식과 이성이 그 선을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앞으로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지만, AC.75 한 문장이 그것을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요에서는 앞으로 설명될 요소들을 먼저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AC.75가 아무 내용도 주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사실 하나를 미리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면서도 스베덴보리는 기억지식과 이성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2가 사랑이나 천적 상태를 다룬다고 해서 기억지식과 이성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놓이며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앞으로의 설명을 통해 밝혀져야 하지만, 적어도 천적 인간에게도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다는 사실은 이 개요에서 이미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5에서는 서둘러 천적 인간의 인식 구조를 완성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한 그림을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그것들은 창2:5-6에서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의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왜 관목과 초목인지, 안개가 무엇을 뜻하는지, 기억지식과 이성이 천적 인간 안에서 어떠한 질서에 놓이는지는 실제 본문 해설이 시작될 때 하나씩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AC.75 해설)

 

 

 

AC.76, 창2:1-17 개요, ‘그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 (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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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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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 3)

 

해설

AC.74는 바로 앞의 AC.73을 이어받습니다. AC.73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되며 창2에서는 바로 이것을 다룬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을 창2:2-3일곱째 과 연결하여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은 일곱째 이라는 말은 천적 인간이 문자 그대로 어떤 하루라는 뜻이 아닙니다. 1에서 여섯 날은 사람이 거듭나는 연속적인 상태들을 나타냈으며, 이제 그 과정에 이어지는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2:2-3에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다는 말씀도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연결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이 쉰다고 하지 않고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현행 해설은 이것을 주님의 신적 작용이 방해받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는 상태’, ‘주님이 사람 안에서 편히 거하실 있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방향은 앞으로의 설명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겠지만, AC.74 자체는 아직 그 의미를 풀어 주지 않습니다. 이 번호에서는 우선 천적 인간과 일곱째 날, 그리고 주님의 안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을 곧바로 이상 무엇을 이루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상태라고 정의하거나, 천적 인간에게는 삶이 이상 투쟁이 아니라 흐름이 된다고 설명하는 것도 여기서는 조금 이릅니다. 1에서 여섯째 날까지 거듭남의 과정과 싸움이 있었고, 일곱째 날이 그 뒤에 온다는 큰 흐름은 분명하지만, 왜 이 상태를 특별히 주님의 안식이라 하는지는 뒤의 설명을 따라가며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AC.74를 사후의 천국 상태와 바로 연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행 해설은 여기서 천국을 안식의 상태로 설명하고, 천적 인간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며 사랑에서 나오는 활동이 수고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확장합니다. 그러나 AC.74의 문맥은 AC.73과 마찬가지로 사후 소생을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라 창2:1-17의 속뜻을 개괄하는 부분입니다. 지금은 거듭나는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가는 흐름 안에서 일곱째 날을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1과 창2의 연결도 여기에서 다시 분명해집니다. 1에서 여섯 날에 걸쳐 진행된 거듭남이 창2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2:2-3의 일곱째 날은 앞의 여섯 날에 이어집니다. AC.73에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고 한 뒤 AC.74에서 그 천적 인간을 일곱째 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74는 천적 인간의 모든 특징을 설명하는 번호가 아닙니다. 이 번호가 하는 일은 훨씬 단순합니다. 2:2-3의 일곱째 날이 속뜻에서 천적 인간을 가리키며, 바로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쉬신다는 사실을 개괄적으로 알려 주는 것입니다. 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지, 주님께서 그 안에서 쉬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뒤의 본문 해설에서 차츰 밝혀질 것입니다.

 

AC.73AC.74를 함께 읽으면 창2의 출발점이 선명해집니다.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되며,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입니다. 그리고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이것이 지금 스베덴보리가 독자에게 먼저 제시하는 창2:1-3의 큰 그림입니다. (AC.74 해설)

 

 

 

AC.75, 창2:1-17 개요, ‘안개로 적셔지는 땅의 관목과 초목, 기억지식과 이성’ (5-6절)

AC.75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난 관목과 초목으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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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3, 창2:1-17 개요, ‘죽어 있던 상태에서 영적으로, 영적 상태에서 천적으로’ (1절)

창2:1-17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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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2:1-17)

 

AC.73

사람은 죽어 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바로 이것을 다룹니다. (1) 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 (1)

 

해설

AC.73부터 창2:1-17의 개요가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2:1이 무엇을 다루는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사람은 죽어 있던 상태에서 영적 인간이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됩니다.이 짧은 문장은 창1과 창2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죽어 있던 상태는 육체적으로 죽은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의 AC.67-72에서 사후의 삶과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지는 일을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오해하기 쉽지만, AC.73에서는 다시 창세기 본문의 거듭남에 관한 설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1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나기 전의 사람을 죽은 사람이라 했고, 창조의 여섯 날을 거치면서 사람이 점차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창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을 다룹니다.

 

따라서 AC.73은 사후에 사람이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계속 상승한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현행 해설은 사후 역시 성장과 변화의 과정이며 땅에서 영적 삶을 얼마나 성실히 살았는가에 따라 천적 상태로 들어가는 깊이와 속도도 달라진다고 설명하지만, AC.73은 그런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창1에서 시작된 인간의 거듭남이 창2에서 어떻게 더 깊은 상태로 나아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영적에서 천적으로 간다는 표현도 이 번호에서는 우선 그 순서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 왜 영적 상태 다음에 천적 상태가 오는지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앞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적 인간은 이해와 진리를 중심으로 살고 천적 인간은 의지와 사랑을 중심으로 산다는 전체 구도를 미리 충분히 전개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3은 우선 독자에게 창2가 다룰 새로운 상태를 알려 주는 개요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창1과 창2 사이의 큰 전환은 분명합니다. 1의 여섯 날을 거치며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었고, 이제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창2는 창1과 무관한 두 번째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앞에서 진행되던 거듭남의 연속선 위에 놓여 있습니다. 1에서 이루어진 상태가 끝이 아니라, 그 위에서 더 깊은 변화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지금 여기에서는 바로 이것을 다룹니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는 창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를 문자적인 창조의 완성만으로 읽지 않고, 속뜻에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상태의 변화와 연결합니다. 다만 AC.73은 아직 천지와 만물각각의 의미나 이루어지다의 세부적인 속뜻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창2:1이 전체적으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일을 다룬다고 개괄할 뿐이며, 구체적인 설명은 뒤의 번호들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창2를 읽는 기본 방향이 정해집니다. 1에서 다룬 것은 죽어 있던 사람이 거듭남을 통하여 영적 인간이 되는 과정이었고, 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AC.73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단절점이라기보다, 1에서 시작된 거듭남이 한층 더 깊은 상태로 이어지는 전환점입니다. 이 구별을 붙들고 읽으면 앞으로 등장하는 일곱째 ’, ‘안식’, ‘에덴동산’, ‘생명나무등의 설명이 어떤 큰 흐름 안에 놓여 있는지를 차츰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AC.73 해설)

 

 

 

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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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앞,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가’

AC.72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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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그러므로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해설

AC.72AC.67부터 이어진 짧은 서론을 마무리하면서, 이 장의 끝에서 다룰 내용을 한 문장으로 예고합니다. 바로 앞의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이 말씀 본문의 해설 사이에 끼어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므로,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AC.72의 첫말 그러므로는 바로 그 설명을 받습니다. 이제 그는 그 원칙에 따라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라는 표현은 중요하지만, 이 한 문장만 가지고 그 과정의 성격을 미리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행 해설에서는 죽음을 아래로 떨어지는 사건과 대조하고, 사람이 능동적으로 다른 안으로 옮겨지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원문은 단지 사람이 어떻게 raised from the dead되는지를 말하겠다고 할 뿐입니다. 특히 일으켜 세워져는 수동형이므로 인간이 능동적으로 다른 삶으로 옮겨진다는 설명은 오히려 원문의 표현과 맞지 않습니다. 그 소생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이 장 끝에 이어질 기록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설명하도록 두는 것이 좋습니다.

 

영원한 안으로 들어간다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현행 해설은 여기서 영원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 있는 상태이며, 사람이 자기 삶의 참된 자리로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AC.72는 아직 그런 정의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앞의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미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했고,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72에서는 그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 전환 과정이 뒤에서 설명될 것이라는 정도로 읽는 것이 충분합니다.

 

또한 장의 끝에서라는 위치 자체에 별도의 영적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행 해설은 장의 끝을 독자가 말씀의 속뜻을 삶의 실제로 연결하는 자리라고 설명하지만, AC.71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이유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이 말씀 본문 사이에 끼어들어 흩어지고 연결되지 않게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AC.72 장의 끝에서역시 우선 그 편집상의 설명과 연결해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72에서 다시 한번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이 사용된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AC.67부터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것과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된 것,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일정한 순서로 배치하는 것을 계속 주님의 신적 자비와 허락의 언어로 표현해 왔습니다. AC.72에서도 자신이 이제 사후의 소생 과정을 설명하겠다는 일을 같은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AC.71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주어졌는지는 여기서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AC.72의 역할은 새로운 교리를 자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번호는 하나의 예고입니다. AC.67-71에서 다른 삶에 관하여 왜 말하는지,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경험했다고 하는지, 인간과 영계의 관계를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그 기록을 AC 안에 어떻게 배치할지를 설명한 뒤, 이제 실제로 다룰 첫 주제를 알려 줍니다.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안으로 들어가는가입니다.

 

이 한 문장을 지나면 곧바로 창2 본문의 속뜻에 관한 해설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약속한 내용은 이 장의 끝에 가서 실제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지금 소생의 과정을 미리 채워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AC.72는 그 문을 열어 놓고, 자세한 설명은 약속한 자리에 남겨 둡니다. (AC.72 해설)

 

 

 

AC.73, 창2:1-17 개요, ‘죽어 있던 상태에서 영적으로, 영적 상태에서 천적으로’ (1절)

창2:1-17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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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다’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는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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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는다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와 별도로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But as these matters would be scattered and disconnected if inserted among those contained in the text of the Word,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append them in some order, at the beginning and end of each chapter; besides those which are introduced incidentally.

 

해설

AC.71AC.67부터 시작된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을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안에서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를 설명하는 짧은 안내문입니다. AC.7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의 상태를 말하기 시작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의 해설 사이에 계속 끼워 넣으면 서로 흩어지고 연결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밝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어떤 순서대로라고 한 점입니다. 다른 삶에 관한 기록들은 그때그때 생각나는 경험을 무작위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일정한 순서 안에서 제시됩니다. 따라서 독자는 앞으로 창세기 본문의 속뜻에 관한 해설과 함께, 각 장의 처음과 끝에서 다른 삶과 영계에 관한 별도의 연속된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다만 이것을 현행 해설처럼 장의 처음은 독자의 인식을 열어 주는 자리이고, 장의 끝은 인식을 가라앉히고 확장하는 자리라고까지 설명할 근거는 AC.71에 없습니다. 또한 본문 해설의 중심부에는 철저히 말씀의 문자와 내적 의미만이 놓인다고 절대화하기도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이어서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것들도 있다고 덧붙이기 때문입니다. 기본적인 배치 원칙은 각 장의 처음과 끝이지만, 필요에 따라 다른 곳에 부수적으로 들어가는 내용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경험보다 말씀을 우위에 놓기 위해 이러한 구성을 선택했다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가 말씀의 속뜻을 밝히는 저작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AC.71에서 그가 직접 밝힌 배치 이유는 이러한 내용들이 말씀 본문의 내용들 사이에 삽입될 경우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직접 설명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여기서 다시 등장하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도 눈에 띕니다. AC.6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했고,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도 허락의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AC.70에서도 여러 해 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1에서는 내용뿐 아니라 그것을 어떤 순서로 덧붙일 것인가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었는지는 이 번호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점은 별도로 물어볼 만한 중요한 질문입니다.

 

따라서 AC.71의 역할은 크지만 그 내용은 단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다른 삶에 관한 많은 내용을 기록할 것이며, 그것들이 서로 흩어지지 않고 연결되도록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배치합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부수적으로 삽입되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이 짧은 설명을 기억하면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왜 창세기 본문의 속뜻을 따라가다가 장의 경계에서 영계와 사후의 삶에 관한 긴 기록들이 등장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무관한 자료가 우연히 한 책 안에 섞인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처음부터 밝힌 구성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AC.71 해설)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 심화 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 심화1. ‘허락되었습니다’ -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허락을 받았는가?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내용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떤 순서대로 덧붙이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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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앞,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가’

AC.72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말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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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앞, ‘죽음은 삶의 연속이다’

AC.70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그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하고자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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