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창2:5, 6)
AC.90
‘들의관목’(shrubofthefield)과‘들의초목’(herbofthefield)은일반적으로그의겉사람이산출하는모든것을의미합니다.겉사람은그가영적인간으로있는동안에는‘땅’(earth)이라불리지만,천적인간이되면‘지면’(ground),그리고또한‘들’(field)이라불립니다.곧이어‘안개’(mist)라고불리는‘비’(Rain)는싸움이그칠때의평화의평온입니다. By the“shrubofthefield”and the“herbofthefield”are meant in general all that his external man produces. The external man is called“earth”while he remains spiritual,but“ground”and also“field”when he becomes celestial. “Rain,”which is soon after called“mist,”is the tranquility of peace when combat ceases.
해설
AC.90은 바로 앞 AC.89에서 제시한 어휘 변화 가운데 하나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창2에서는 앞의 창조 기사와 달리 ‘땅’뿐 아니라 ‘지면’과 ‘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문체상의 변화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은 일반적으로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산출하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식물의 표현들은 자연계의 식물 자체보다 천적 인간의 겉 사람 안에서 나타나는 것들을 묘사하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같은 겉 사람을 가리키면서도 인간의 상태에 따라 말씀에서 사용되는 표현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있는 동안 그의 겉 사람은 ‘땅(earth)’이라 불리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ground)’, 그리고 ‘들(field)’이라 불립니다. AC.89에서 스베덴보리는 창2에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없던 ‘지면’과 ‘들’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천적 인간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했습니다. AC.90은 이제 그 이유를 직접 밝힙니다. 겉 사람 자체가 없어지거나 전혀 다른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겉 사람이 천적 질서 안에 들어감에 따라 그것을 나타내는 말씀의 표현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점은 AC.89의 ‘천적인간의형성은속사람,곧하늘로부터시작된다’는 설명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갖게 되면 그 질서가 겉 사람에까지 미치고, 겉 사람은 그에 따라 산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이 ‘그의겉사람이산출하는모든것’을 의미한다는 말은 겉 사람이 독립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88에서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라고 했고, AC.89에서는 천적 인간의 형성이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90의 겉 사람의 산출 역시 그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땅’, ‘지면’, ‘들’을 하나의 고정된 상응 사전처럼 다루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90이 직접 말하는 범위는 현재의 문맥에서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이 ‘땅’이라 불리고,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라 불린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연물의 명칭 자체보다 인간의 내적 상태가 달라지면서 동일한 겉 사람도 말씀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앞 AC.88에서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비슷해 보이는 표현에도 서로 구별되는 관념이 있다고 한 것과 함께,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세밀한 어휘 차이를 얼마나 중요하게 읽는지를 보여 줍니다.
마지막 문장은 다시 안식의 주제로 돌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비’를 곧이어 나올 ‘안개’와 연결하면서 그것을 ‘싸움이그칠때의평화의평온’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AC.84-87의 흐름과 직접 이어집니다. 여섯 날 동안에는 싸움과 수고가 있었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이 될 때 싸움이 그칩니다. AC.87에서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오면서 싸움이 그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90은 그 뒤에 오는 상태를 단순히 ‘싸움이없음’이라는 소극적인 상태로만 말하지 않고 ‘평화의평온’이라는 적극적인 상태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외부의 갈등이 없거나 마음이 잠시 편안한 심리 상태와 같지 않습니다. 문맥상 이것은 거듭남의 싸움이 그치고 주님의 질서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흘러들어 가는 천적 상태의 평온입니다. 바로 앞 AC.85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하며, 그 결과 내적인 평화와 행복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AC.90의 ‘평화의평온’도 그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와 ‘안개’는 그러한 안식의 상태와 관련하여 앞으로 더 구체적으로 설명될 것입니다.
결국 AC.90은 짧은 번호 안에서 창2의 새로운 어휘와 천적 인간의 상태를 연결합니다. 영적 인간의 겉 사람을 나타내던 ‘땅’은 천적 인간의 문맥에서 ‘지면’과 ‘들’로 표현되고, 그 겉 사람에서 산출되는 것들은 ‘들의관목’과 ‘들의초목’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싸움 이후의 ‘평화의평온’이라는 상태 안에서 다루어집니다. AC.89가 천적 인간의 형성이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큰 방향을 제시했다면, AC.90은 그 속 사람의 질서 아래 놓인 겉 사람이 어떤 새로운 상태에 들어가는지를 보여 주기 시작하는 번호입니다. (AC.90)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창2:4)
AC.89
‘하늘과땅의내력’(nativitiesoftheheavensandoftheearth)은천적인간의형성을뜻합니다.여기서그의형성이다루어지고있다는것은뒤따르는모든세부사항으로부터매우분명합니다.아직초목이자라지않았다는것,땅을갈사람이없었다는것,여호와하나님께서사람을지으셨다는것,그리고그후에들의모든짐승과하늘의모든새를만드셨다는것등이그러합니다.이들의형성은이미앞장에서다루어졌음에도여기서다시언급됩니다.이모든것으로부터여기서는다른사람이다루어지고있음이분명합니다.그러나이것은이제처음으로주님을‘여호와하나님’(JehovahGod)이라한다는사실에서더욱분명합니다.앞에서영적인간을다루는구절들에서는단지‘하나님’(God)이라고만하였습니다.더나아가이제는‘지면’(ground)과‘들’(field)이언급되는반면,앞에서는오직‘땅’(earth)만언급되었습니다. 또이구절에서는먼저‘하늘’(heaven)이‘땅’(earth)보다앞에언급되고,그후에는‘땅’(earth)이‘하늘’(heaven)보다앞에언급됩니다.그이유는‘땅’(earth)은겉사람을,‘하늘’(heaven)은속사람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영적인간에게서는개혁이‘땅’(earth),곧겉사람으로부터시작되는반면,여기서다루는천적인간에게서는속사람,곧‘하늘’(heaven)로부터시작됩니다.The “nativitiesoftheheavensandoftheearth” are the formations of the celestial man.That his formation is here treated of is very evident from all the particulars which follow,as that no herb was as yet growing;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as well as that Jehovah God formed man,and afterwards,that he made every beast and bird of the heavens,notwithstanding that the formation of these had been treated of in the foregoing chapter;from all which it is manifest that another man is here treated of.This however is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act that now for the first time the Lord is called “JehovahGod,” whereas in the preceding passages,which treat of the spiritual man,he is called simply “God”;and,further,that now “ground” and “field” are mentioned,while in the preceding passages only “earth” is mentioned.In this verse also “heaven” is first mentioned before “earth,” and afterwards “earth” before “heaven”;the reason of which is that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and “heaven” the internal,and in the spiritual man reformation begins from “earth,” that is,from the external man,while in the celestial man,who is here treated of,it begins from the internal man,or from “heaven.”
해설
AC.89는 창2:4부터 시작되는 내용이 창1의 창조 기사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님을 먼저 밝힙니다. ‘하늘과땅의내력’은 속뜻에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뒤따르는 내용으로부터 매우 분명하다고 합니다. 창1에서는 이미 초목이 나고 사람과 동물과 새가 창조되었는데, 창2에서는 다시 아직 초목이 자라지 않았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다고 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후에 들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미 앞 장에서 그 형성이 다루어졌는데도 다시 언급되는 것은 이제 ‘다른사람’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른사람’은 두 번째 역사적 개인을 뜻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다룬 영적 인간과 구별되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AC.83에서 영적 인간에게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84-88에서는 그 천적 인간을 일곱째 날과 안식일, 그리고 하나님의 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89부터는 그 천적 인간의 형성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부터 다른 사람이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본문상의 변화도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단지 ‘하나님’이라고 하였지만, 이제 처음으로 ‘여호와하나님’이라 합니다. 또한 앞에서는 ‘땅’만 언급되었지만 이제는 ‘지면’과 ‘들’이 등장합니다. 이 변화들은 우연한 표현상의 차이가 아니라 지금부터 천적 인간의 형성이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다만 AC.89는 왜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하나님’이라 하고 여기서는 ‘여호와하나님’이라 하는지 그 정확한 이유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에서는 우선 호칭의 변화 자체가 의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차이의 더 깊은 이유는 별도로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지면’과 ‘들’역시 이 번호에서 아직 각각의 의미가 설명되지 않으므로 뒤따르는 해설을 기다려야 합니다.
AC.89의 가장 중요한 설명은 창2:4의 어순에 있습니다. ‘이것이천지가창조될때에하늘과땅의내력이니’에서는 하늘이 땅보다 먼저 나오지만, 이어지는 ‘여호와하나님이땅과하늘을만드시던날에’에서는 땅이 하늘보다 먼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서까지 속뜻에서 의미 있게 읽습니다. ‘땅’은 겉 사람을, ‘하늘’은 속 사람을 의미하며, 영적 인간에게서는 개혁이 ‘땅’, 곧 겉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반면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 곧 ‘하늘’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게 속 사람이 없고 천적 인간에게만 속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지만,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구별하는 것은 개혁과 형성이 시작되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곧바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형성 과정을 세부적으로 완성해 설명하기보다, 영적 인간의 개혁은 겉 사람으로부터,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원문 자체의 구별을 정확히 보존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89는 앞으로 이어지는 창2의 상세 해설을 읽는 중요한 안내판입니다. 초목과 지면과 들, 사람과 짐승과 새가 다시 등장한다고 해서 창1과 같은 내용을 되풀이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다루는 것은 천적 인간의 형성이며, ‘여호와하나님’이라는 이름과 ‘지면’과 ‘들’이라는 새로운 표현, 그리고 ‘하늘과땅’, ‘땅과하늘’의 순서가 그 전환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영적 인간의 개혁이 겉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데 비하여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이 번호에서 밝혀지는 핵심적인 차이입니다. 다만 이것을 인간이 자기 내면을 탐색하여 스스로 천적 인간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 AC.88에서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이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역시 그 형성의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창조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89해설)
심화
1.왜‘하나님’에서‘여호와하나님’으로바뀌는가?
AC.89에서 스베덴보리는 창2부터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단지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천적 인간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여호와하나님’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하나님’으로 호칭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먼저 AC.89가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호칭의 변화를 분명히 지적하고, 이것을 지금부터 앞에서 다루었던 영적 인간과는 다른 사람, 곧 천적 인간이 다루어진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AC.89자체에서는 왜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하나님’이라 하고 천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여호와하나님’이라 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한 번호만으로 ‘여호와는언제나사랑을의미하고하나님은언제나진리를의미한다’거나, ‘여호와하나님은언제나사랑과진리의결합을의미한다’는 식으로 고정해서 설명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차이를 설명하는 내용들을 찾을 수 있더라도, 그것을 확인하지 않은 채 AC.89의 짧은 언급만으로 전체 호칭 체계를 먼저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이 질문을 계기로 ‘예수’, ‘그리스도’, ‘주’, ‘구주’,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아들’, ‘인자’, ‘성령’등 주님에 관한 모든 호칭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도 AC.89의 독자가 지금 필요로 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러한 호칭들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각각 성경의 문맥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호칭을 설명하는 곳에서 살펴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여러 호칭이 나온다고 해서 먼저 각 호칭에 하나씩 고정된 ‘기능’이나 ‘작용’을 배정해 놓고 이후의 본문을 그 틀에 맞추어 읽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89의 호칭 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것을 천적 인간의 형성이 새롭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제시했으므로 반드시 주목해야 합니다. 창1에서 영적 인간이 형성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창2에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면서 ‘여호와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합니다. 독자는 우선 이 변화가 우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방법에서도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질 때 그 차이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이름 하나를 발견하자마자 미리 만든 의미표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 이름의 차이를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89에서는 우선 ‘하나님’에서 ‘여호와하나님’으로의 변화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주제가 전환되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지라는 데까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하나님에서여호와하나님으로바뀌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서 완전히 닫기보다 가지고 가는 편이 좋습니다. AC.89가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 주는 것은 호칭의 변화가 의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더 깊은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이후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들을 직접 설명할 때 하나씩 확인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먼저 만든 주님의 호칭 체계로 AC를 읽는 것이 아니라, AC자체가 주님의 여러 이름을 어떻게 열어 가는지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89심화1)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8
영적인간이천적인간이될때그는‘하나님의일’(workofGod)이라합니다.주님홀로그를위하여싸우셨고,그를창조하고,형성하고,만드셨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여기서‘하나님이일곱째날에그의일을마치셨다’(Godfinishedhisworkontheseventhday)고하며,또두번이나‘그모든일을마치고쉬셨다’(herestedfromallhiswork)고합니다.선지서들에서도사람은거듭‘여호와의손과손가락으로하신일’(workofthehandsandofthefingersofJehovah)이라합니다.거듭난사람에관하여말하는이사야의다음말씀과같습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becomes celestial,he is called the “workofGod,” because the Lord alone has fought for him,and has created,formed,and made him;and therefore it is here said,“Godfinishedhisworkontheseventhday”;and twice,that “herestedfromallhiswork.” By the prophets man is repeatedly called the “workofthehandsandofthefingersofJehovah”;as in Isaiah,speaking of the regenerate man:
이로부터새로운창조,곧거듭남은주님홀로하시는일이라는것이분명합니다.‘창조하다’(create),‘형성하다’(form),‘만들다’(make)라는표현들은위의구절,곧‘하늘을창조하시고,땅을형성하시며,그것을만드신다’(creatingtheheavens, formingtheearth, andmakingit)는말씀에서뿐아니라같은선지서의다른곳에서도서로뚜렷이구별되어사용됩니다.다음말씀과같습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new creation,or regeneration,is the work of the Lord alone.The expressions to “create,” to “form,” and to “make,” are employed quite distinctively,both in the above passage—“creatingtheheavens,formingtheearth,andmakingit”—andin other places in the same prophet, as:
또한앞장과이창세기2장에서도그러합니다.지금다루고있는말씀,곧‘하나님이만드시면서창조하신그의모든일을마치고쉬셨다’(herestedfromallhisworkwhichGodinmakingcreated)는구절에서도그러합니다.속뜻에서는이러한용법이언제나서로구별되는관념을전달합니다.주님을‘창조자’(creator),‘형성자’(former),또는‘만드신이’(maker)라할때에도마찬가지입니다. and also in both the preceding and this chapter of Genesis;as in the passage before us:“herestedfromallhisworkwhichGodinmakingcreated.”In the internal sense this usage always conveys a distinct idea;and the case is the same where the Lord is called “creator,” “former,” or “maker.”
해설
AC.88은 앞에서 계속되어 온 ‘주님의일’이라는 표현을 매우 분명하게 결론짓습니다.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의일’이라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 홀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 그를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87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싸움을 수행한 것이 사람 자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주님 홀로 하신 것이라고 했고, 이제 AC.88에서는 싸움뿐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는 것까지 모두 주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2에서 ‘하나님이일곱째날에그의일을마치셨다’, ‘그모든일을마치고쉬셨다’고 하는 ‘일’은 속뜻에서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일과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더 이상 우리가 추론할 필요도 없을 만큼 명확하게 ‘새로운창조,곧거듭남은주님홀로하시는일’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창1과 창2의 창조를 거듭남과 연결하는 것은 창조 이야기 위에 후대의 교리를 임의로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이 번호에서 직접 밝히는 속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확증하기 위하여 사45:11-12, 18, 21을 인용합니다. 이 인용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는 주체가 한결같이 여호와라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인용하기 직전에 ‘거듭난사람에관하여말하는이사야의다음말씀’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중심은 사45에 등장하는 모든 표현에 각각 새로운 상응을 부여하는 데 있지 않고, 거듭난 사람 역시 여호와의 손으로 하신 일이며 새로운 창조의 주체는 주님이심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나외에다른이가없느니라’라는 반복을 곧바로 ‘인간에게서나오는것은아무것도없다’는 별도의 상응으로 바꾸기보다, AC.88이 이 인용을 통하여 실제로 내리는 결론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 결론은 ‘새로운창조,곧거듭남은주님홀로하시는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AC.88에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 또 하나의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세 표현입니다. AC.84에서 스베덴보리는 ‘이와같이사람이창조되고,형성되고,만들어졌다’고 했지만 그때는 세 동사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AC.88에서는 적어도 한 가지를 분명히 밝힙니다. 이 세 표현은 아무 차이 없이 반복되는 동의어가 아니라 ‘서로뚜렷이구별되어’사용되며, 속뜻에서는 각각 서로 구별되는 관념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여 주기 위해 사45에 이어 사43:7의 ‘내가내영광을위하여창조한자’, ‘그를내가지었고’, ‘그를내가만들었느니라’를 다시 인용하고, 창1과 창2에서도 같은 구별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AC.88은 ‘창조하다’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고 ‘형성하다’와 ‘만들다’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까지는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세 표현을 속 사람과 겉 사람, 신앙과 사랑과 행위 같은 세 단계에 임의로 대응시켜서는 안 됩니다.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세 표현이 서로 구별된다는 사실이며, 그 정확한 차이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더 밝혀 줄 때 확인하면 됩니다.
따라서 AC.88에서 세 동사의 차이보다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그 모든 동사의 주체입니다. 사람을 창조하시는 분도 주님이고, 형성하시는 분도 주님이며, 만드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도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결과가 아닙니다. AC.87에서는 주님 홀로 사람을 위하여 싸우셨다고 했고, AC.88에서는 주님께서 그를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 자신이 ‘하나님의일’입니다. 이것이 창조와 거듭남을 하나로 연결하며, 하나님께서 ‘그의일을마치시고’안식하셨다는 말씀을 사람의 새로운 창조와 연결합니다. AC.88의 중심은 결국 스베덴보리 자신의 한 문장으로 가장 정확하게 정리됩니다. ‘새로운창조,곧거듭남은주님홀로하시는일’입니다. (AC.88해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7
천적인간이‘안식일’(sabbath)또는‘안식’(rest)인또하나의이유는,그가천적인간이될때싸움이그치기때문입니다.악한영들은물러가고선한영들이가까이오며,천적천사들도가까이옵니다.이들이함께있을때에는악한영들이도저히머물수없으므로멀리달아납니다.그리고싸움을수행한것은사람자신이아니라사람을위하여주님홀로하신것이므로,주님께서‘쉬셨다’(rested)고합니다. Another reason why the celestial man is the “sabbath,” or “rest,” is that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 evil spirits retire,and good ones approach,as well as celestial angels;and when these are present,evil spirits cannot possibly remain,but flee far away. And since it was not the man himself who carried on the combat,but the Lord alone for the man,it is said that the Lord “rested.”
해설
AC.87은 천적 인간이 ‘안식일’또는 ‘안식’인 또 하나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AC.84에서는 천적 인간에게서 모든 싸움이 그치기 때문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고, AC.85에서는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며 천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안식일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87에서는 싸움이 그칠 때 영계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그리고 왜 사람의 안식이 아니라 ‘주님께서쉬셨다’고 하는지를 밝힙니다. 천적 인간이 될 때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이 가까이 오며 천적 천사들도 가까이 옵니다. 그리고 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어 멀리 달아납니다. 따라서 AC.84에서 말한 ‘모든싸움이그친다’는 것이 AC.87에서는 악한 영들, 선한 영들, 천적 천사들의 관계를 통하여 한층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여기서 ‘악한영들이도저히머물수없다’는 말을 천적 인간에게는 악과 거짓의 공격이 다시는 전혀 일어날 수 없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81은 천적 인간도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들을 업신여긴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따라서 AC.87의 초점은 천적 인간에게 악한 영들이 더 이상 가까이 머물면서 이전과 같은 싸움을 지속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다만 현행 해설처럼 여기에서 곧바로 사람의 ‘지배적인사랑에따라어떤영적사회와연결되는지’, ‘영적환경과결합의질서자체가달라진다’는 전체적인 영계 구조까지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AC.87이 직접 말하는 데까지 따르면 충분합니다.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오며, 그들이 함께 있을 때 악한 영들은 머물 수 없어 달아나고, 그리하여 싸움이 그칩니다.
그러나 AC.87의 절정은 마지막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싸움을 수행한 것이 사람 자신이 아니라 ‘사람을위하여주님홀로’하신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쉬셨다’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AC.84에서 여섯 날 동안의 일을 ‘그분의일’이라고 한 이유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거듭남의 여섯 날 동안 싸움을 경험하는 사람은 인간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싸움을 실제로 수행하신 분을 주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싸움이 끝났을 때 ‘사람이쉬었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주님홀로싸우신다’는 말을 인간에게 아무런 자유나 책임도 없다는 뜻으로 곧바로 확대하거나, 반대로 이 한 문장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협력의 전체 교리를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87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싸움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현행 해설의 ‘인간의공로’, ‘수동주의’, ‘마치자기힘으로싸우는것처럼’, proprium까지 이어지는 설명은 스베덴보리 전체 교리에서는 중요한 주제이지만 이번 번호에서는 조금 앞서 나갑니다. AC.87자체가 주는 놀라운 진술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사람은 그 싸움을 자신의 싸움으로 경험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사람을위하여주님홀로’하신 싸움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적 인간의 상태에 이르면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오며 싸움은 그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천적 인간은 ‘안식일’또는 ‘안식’이고, 싸움을 하신 분이 주님이셨기 때문에 그 싸움이 그쳤을 때 주님께서 ‘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AC.87해설)
AC.86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전환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시작할때’, 바로 그 상태가 ‘안식일의저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83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거기서는 사람이 여섯째 날에 이르면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그때 신앙이 아니라 사랑, 곧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6에서는 바로 그 변화가 시작되는 상태를 ‘안식일의저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 사이를 서로 아무 관계 없는 두 상태처럼 끊어서 볼 것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어 가는 전환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녁’을 곧바로 어둠이나 악이나 타락의 상태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6은 이 ‘저녁’이 무엇인지를 직접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고정된 사전처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어떤 표현이 다른 문맥에서 특정한 의미를 나타냈다고 해서 그 의미를 모든 곳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안식일의저녁’이 어떤 상태인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으므로 그 설명을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동시에 이 상태를 몇 단계로 이루어진 별도의 심리적 과정처럼 세분할 필요도 없습니다. AC.86이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안식일의저녁’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가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표상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AC.85에서 유대교회에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제정되지 않았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여섯 날의 수고와 일곱째 날의 안식이 싸움과 평화를 표상했듯이, 저녁부터 시작되는 안식일도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표상한 것입니다. 다만 AC.86은 여기서 유대교회의 안식일 규례 전체의 역사나 그 세부적인 의미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녁부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다는 사실을 통하여 ‘안식일의저녁’이라는 전환의 상태를 보여 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적인간은아침’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대해서는 곧 이어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침’의 의미를 미리 자세히 풀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 번호에서 확실히 밝혀진 것만 붙들면 충분합니다.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가 ‘안식일의저녁’이고, 천적 인간은 ‘아침’입니다. AC.83에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시작한다’고 한 설명과 AC.86에서 천적 인간이 ‘되기시작한다’고 한 설명이 서로 이어지면서,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의 변화가 한순간의 단절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아침’에 관해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곧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리는 그 설명을 기다리면 됩니다. (AC.86해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2:2, 3)
AC.85
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이며,따라서일곱째날이거룩하게구별되어안식일이라하였다는것은지금까지밝혀지지않았던아르카나입니다.천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이아무도없었고,영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도거의없었기때문입니다.이러한무지로인해사람들은영적인간을천적인간과같은것으로여겨왔지만,그둘사이에는큰차이가있습니다.이는AC.81에서볼수있습니다.일곱째날에관하여,그리고천적인간이‘일곱째날’(seventhday)또는‘안식일’(sabbath)이라는것에관하여말하자면,이는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라는사실로부터분명합니다.그러므로주님께서는말씀하십니다.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day,” 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and called the sabbath,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as may be seen in n.81.As regards the seventh day,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 “seventhday” or “sabbath,” 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and therefore he says:
이말씀은주님께서사람그자체이시며안식일그자체이심을함축합니다.하늘과땅에있는주님의나라는주님으로말미암아안식일,곧영원한평화와안식이라합니다.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and the sabbath itself.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from him,a sabbath,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다루고있는태고교회는그뒤를이은모든교회보다더욱주님의안식일이었습니다.이후의모든주님의가장내적인교회도역시안식일이며,거듭난사람도천적인간이될때안식일입니다.그가주님의형상이기때문입니다.그에앞서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가있습니다.이러한것들은유대교회에서수고하는날들과안식일인일곱째날로표상되었습니다.그교회에서는주님과주님의나라를표상하지않는것은아무것도제정되지않았기때문입니다.같은것이법궤가나아갈때와쉴때에도표상되었습니다.광야에서법궤가나아간것은싸움과시험을표상하였고,법궤가쉰것은평화의상태를표상하였습니다.그러므로법궤가떠날때모세가말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which is here treated of,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and by the seventh day,which was the sabbath;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and when it rested,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and therefore,when it set forward,Moses said:
천적인간의본성은이와같아서그는자기자신의뜻에따라행동하지않고주님의선하신뜻에따라행동하며,그주님의뜻이그의‘뜻’(desire)이됩니다.이리하여그는내적인평화와행복을누리는데,이것이여기서는‘땅의높은곳에올림을받는것’(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으로표현되며,동시에외적인평온과기쁨을누리는데,이외적인평온과기쁨은‘야곱의기업으로양육되는것’(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이라는표현으로나타납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 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 which is his “desire.” 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 “beingupliftedovertheloftythingsoftheearth”— and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 which is signified by “beingfedwiththeheritageofJacob.”
해설
AC.85는 AC.84에서 제시한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라는 아르카나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를 먼저 말합니다. 천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영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AC.81을 가리킵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신앙의 원리로부터 선과 진리를 인정하고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우는 사람이며,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인정하고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악과 거짓을 업신여기는 사람으로 구별되었습니다.
AC.85가 천적 인간을 ‘일곱째날’또는 ‘안식일’이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천적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주님자신이안식일이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밝히기 위해 막2:28의 ‘인자는안식일에도주인이니라’를 인용합니다. 그는 이 말씀이 주님께서 사람 그 자체이시며 안식일 그 자체이심을 함축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안식일인 것은 그가 주님과 독립하여 스스로 안식의 상태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AC.85는 뒤에서 거듭난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안식일인 이유를 ‘그가주님의형상이기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주님은 안식일 그 자체이시고 천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입니다. 이 구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도 안식일, 곧 ‘영원한평화와안식’이라 합니다. 이로써 안식일의 속뜻은 단순히 일을 멈추는 날이라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그 근원은 주님 자신에게 있으며, 주님의 나라의 상태가 영원한 평화와 안식으로 묘사됩니다.
이 원리는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여기서 다루는 태고교회는 그 뒤를 이은 모든 교회보다 더욱 주님의 안식일이었으며, 이후의 모든 주님의 가장 내적인 교회도 역시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 모든 거듭난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될 때 안식일입니다. 이것은 AC.82에서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다고 했던 원리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안식에 앞서는 것이 있습니다. ‘여섯날의싸움또는수고’입니다. 이것은 AC.84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에 이르면 모든 싸움이 그친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싸움과 안식의 질서가 유대교회에서 수고하는 날들과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상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제정되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이어지는 법궤의 인용도 바로 이 싸움과 안식의 대조를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법궤가 광야에서 나아간 것이 ‘싸움과시험’을 표상하고, 법궤가 쉰 것이 ‘평화의상태’를 표상했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민10:35-36에서 법궤가 떠날 때 ‘여호와여일어나사주의대적들을흩으시고’라고 하고, 쉴 때에는 ‘여호와여이스라엘종족들에게로돌아오소서’라고 한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자리에서는 대적이나 이스라엘의 수많은 종족 각각의 상응을 따로 풀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법궤의나아감은싸움과시험,쉼은평화의상태’라는 인용 목적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민10:33의 ‘그들의쉴곳을찾기위하여’라는 말씀도 같은 이유로 이어집니다. AC.85가 여기서 직접 강조하는 것은 법궤의 광야 여정과 쉼을 통하여 싸움과 안식의 질서가 표상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삼일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법궤가 앞서가는 것의 세부적인 상응이 무엇인지를 이 번호에서 새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3]에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사58:13-14를 통하여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인용만 한 뒤 멈추지 않고 그 의미를 직접 풀이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85의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천적 인간의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행동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이 단지 외부에서 그에게 명령되는 뜻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뜻’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AC.81에서 천적 인간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도 없는 것처럼 보이며 자유롭지만, 그의 보이지 않는 결박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한 설명을 한층 더 이해하게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 주님의 뜻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외부에서 강제로 시키는 명령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하신 뜻이 그의 뜻이 되기 때문에 그는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자신의뜻에따라행동하지않는다’는 말을 인간에게 더 이상 의지가 없다거나 인간이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문 자체가 주님의 선하신 뜻이 ‘그의뜻’이 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AC.85가 말하는 안식은 행동이나 의지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천적 인간의 뜻이 주님의 선하신 뜻과 일치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결과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내적인 평화와 행복을 누리며, 이것이 ‘땅의높은곳에올림을받는것’으로 표현됩니다. 동시에 외적인 평온과 기쁨을 누리며, 이것이 ‘야곱의기업으로양육되는것’으로 의미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두 표현의 의미를 직접 밝혀 주므로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따라서 사58:13-14가 AC.85에 인용된 핵심도 분명합니다. 안식일의 외적인 규정을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의 안식이 자기 자신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이 자신의 뜻이 된 상태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 외적인 평온과 기쁨이 있습니다.
AC.85전체의 흐름은 하나로 이어집니다.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며, 주님의 가장 내적인 교회도 안식일이고, 거듭난 사람도 천적 인간이 될 때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입니다. 그 안식에 앞서 여섯 날의 싸움 또는 수고가 있으며, 이것이 유대교회의 수고하는 날들과 안식일, 그리고 법궤의 나아감과 쉼으로 표상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는 사58:13-14를 통하여 설명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뜻이 됩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 그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 외적인 평온과 기쁨을 누립니다. (AC.85해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창2:2, 3)
AC.84
천적인간은‘일곱째날’(seventhday)입니다.주님께서여섯날동안일하셨으므로그것을‘그분의일’(hiswork)이라하며,그때모든싸움이그치므로주님께서‘그모든일을마치고쉬신다’(restfromallhiswork)고합니다.이때문에일곱째날은거룩하게구별되었고,‘안식’(rest)을뜻하는히브리어에서유래하여안식일이라하였습니다.이와같이사람이창조되고,형성되고,만들어졌습니다.이러한것들은말씀자체로부터매우분명합니다.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day,” which,as theLordhas worked during the six days,is called “hiswork”;and as all combat then ceases,theLordis said to “restfromallhiswork.” On this account the seventh day was sanctified,and called the sabbath,from a Hebrew word meaning “rest.” And thus was man created,formed,and made.These things are very evident from the words.
해설
AC.84는 창2:2-3의 ‘일곱째날’과 ‘안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직접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첫 문장에서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일곱째 날은 단순히 여섯 날의 창조가 끝난 뒤 이어지는 시간상의 하루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거듭남을 통하여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83과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었을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그 하나 됨 가운데 신앙이 아니라 사랑, 곧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을 ‘일곱째날’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진행이 아니라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와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여섯 날 동안 이루어진 일을 ‘그분의일’, 곧 주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창1에서 묘사된 여섯 날 동안 사람 안에서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만, AC.84는 그 전체를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하신 일로 돌립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 것과 함께, 그 앞의 여섯 날 동안 이루어진 일이 ‘그분의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은 거듭남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84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것은 여섯 날의 일이 누구의 일이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인간의 자유와 싸움에서의 역할이 어떻게 주님의 역사와 함께 성립하는지는 이후의 더 충분한 설명을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이 번호에서 분명한 것은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형성되어 천적 인간에 이르는 과정 전체의 근원적인 역사가 주님의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싸움이그치기’때문입니다. 이것은 AC.81에서 이미 설명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와 직접 연결됩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언제나 승리한다고 했고,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 그것들을 업신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4에서는 그 차이를 일곱째 날의 안식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모든싸움이그친다’는 것은 천적 인간에게 악과 거짓이 다시는 접근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81은 천적 인간도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적 인간처럼 그것들과 싸움 가운데 있지 않고 그것들을 업신여깁니다. 그러므로 AC.84의 ‘싸움의그침’은 일반적인 삶의 어려움이 모두 사라진다는 뜻도 아니고, 악과 거짓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지금 말하는 것은 거듭남의 문맥에서의 싸움입니다.
모든 싸움이 그치므로 주님께서 ‘그모든일을마치고쉬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안식을 인간처럼 일을 많이 하신 뒤 피곤하여 쉬시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 자체가 주님의 안식을 모든 싸움의 그침과 직접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섯 날 동안 주님께서 일하셨고, 천적 인간의 상태에 이르러 모든 싸움이 그치므로 주님께서 그 모든 일에서 쉬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며, ‘안식’을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하여 안식일이라 하였습니다. AC.84에서 안식일의 의미는 먼저 천적 인간과 싸움의 그침에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단순히 외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날로만 이해하면 이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을 충분히 보지 못하게 됩니다. 일곱째 날이 나타내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 주님의 안식이 안식일의 속뜻을 이루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와같이사람이창조되고,형성되고,만들어졌습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다’는 세 표현이 각각 정확히 무엇을 구별하여 의미하는지는 AC.84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번호만으로 세 동사에 각각 별도의 상응을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설명한 여섯 날의 일과 일곱째 날의 안식을 인간이 ‘창조되고,형성되고,만들어지는’과정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이 문장은 창1과 창2의 창조 이야기를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다시 확인하게 합니다. 앞 장에서는 죽어 있던 사람으로부터 영적 인간이 형성되는 여섯 날의 과정이 설명되었고, 이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어 사랑이 주된 것이 되면서 천적 인간, 곧 일곱째 날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와같이사람이창조되고,형성되고,만들어졌다’는 말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인간의 거듭남 전체를 돌아보게 하는 문장입니다.
AC.84는 이렇게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사이의 전환을 매우 간결하게 정리합니다. 천적 인간은 ‘일곱째날’이며, 그 앞의 여섯 날 동안 이루어진 것은 ‘주님의일’입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에서는 모든 싸움이 그치므로 주님께서 ‘그모든일을마치고쉬신다’고 하며, 이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AC.84해설)
‘하늘과땅과그모든만상’(heavensandtheearthandallthearmyofthem)은사람이‘여섯째날’(sixthday)이되었을때‘다이루어졌다’(finished)고합니다.그때신앙과사랑이하나를이루기때문입니다.신앙과사랑이하나를이룰때에는신앙이아니라사랑이,다시말해영적인것이아니라천적인것이주된것이되기시작합니다.이것이천적인간이되는것입니다. The “heavensandtheearthandallthearmyofthem” are said to be “finished,”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day,” for then faith and love make a one.When they do this,love,and not faith,or in other words the celestial principle,and not the spiritual,begins to be the principal,and this is to be a celestial man.
해설
AC.83은 창2:1의 ‘다이루어지니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한 단계 더 설명합니다. AC.82에서는 사람이 이제 ‘여섯째날’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으며, ‘하늘’은 그의 속 사람, ‘땅’은 그의 겉 사람이고, ‘그모든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앎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83에서는 왜 이 모든 것이 사람이 ‘여섯째날’이 되었을 때 ‘다이루어졌다’고 하는지를 밝힙니다. 그 이유는 그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이루어졌다’는 것은 사람의 거듭남에 더 이상 아무 변화도 남아 있지 않은 절대적인 완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에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시작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에는 창1에서 다루어 온 영적 인간의 형성이 하나의 완성에 이르면서 동시에 천적 인간의 상태로 들어가는 새로운 전환이 시작됩니다.
그 전환의 핵심을 스베덴보리는 ‘신앙과사랑이하나를이룬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AC.81에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비교한 내용과 직접 연결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하지만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 그렇게 하고, 또한 그 신앙으로부터 행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사랑으로부터 행합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AC.83은 신앙과 사랑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하나를이룬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달라지는 것은 그 둘의 관계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룰 때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시 ‘신앙이아니라사랑이’, ‘영적인것이아니라천적인것이’주된 것이 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신앙이아니라’라는 말을 신앙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 문장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에게도 신앙이 있지만, AC.81에서 이미 보았듯 그것은 ‘사랑에서나오는신앙’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것이아니라천적인것이주된것이된다’는 말도 영적인 것이 제거되거나 무가치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번호의 초점은 무엇이 없어지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주된것’이 되는가에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으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바로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은 AC.77에서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던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사랑과 신앙은 모두 천적 인간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의 나무가 신앙을 의미한다는 사실만으로 신앙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도 다시 확인됩니다. 다만 AC.83에서는 아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나 이후의 타락을 설명하고 있지 않으므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해당 본문의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되기시작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만 하지 않고 ‘되기시작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을 서로 완전히 단절된 두 상태처럼 생각하기보다, 여섯째 날에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고, 이어지는 일곱째 날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가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흐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AC.83에서 ‘여섯째날’의 완성은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입니다. 창1에서 형성되어 온 영적 인간에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그 안의 질서가 변화하고, 사랑 곧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창1의 여섯째 날에서 창2의 천적 인간으로 이어지는 전환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단순히 ‘사랑이많은사람’이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83이 말하는 것은 감정의 강도가 아닙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그 하나 됨 가운데 사랑이 주된 것이 되는 내적인 질서입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핵심을 단순히 ‘사랑이신앙보다중요하다’고 요약하면 원문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AC.82와 AC.83을 함께 읽으면 창2:1의 속뜻이 상당히 분명해집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땅’은 겉 사람이며, ‘그모든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앎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이루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날’이 되어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 됨 가운데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며, 바로 이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AC.83해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창2:1)
AC.82
이말씀은사람이이제‘여섯째날’(sixthday)이될만큼영적으로되었다는것을의미합니다.‘하늘’(heaven)은그의속사람이고,‘땅’(earth)은그의겉사람이며,‘그것들의만상’(thearmyofthem)은사랑과신앙및그것들에관한앎들인데,이것들은앞에서큰광명체들과별들로의미되었습니다.속사람이‘하늘’(heaven)이라하고겉사람이‘땅’(earth)이라한다는것은앞장에서이미인용한말씀의구절들로부터분명하며,여기에이사야의다음말씀을덧붙일수있습니다. By these words is meant that man is now rendered so far spiritual as to have become the “sixthday”; “heaven” is his internal man, and “earth” his external; “thearmyofthem” are love,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which were previously signified by the great luminaries and the stars. That the internal man is called “heaven,” and the external “earth,” is evident from the passages of the Word already cited in the preceding chapter, to which may be added the following from Isaiah:
이말씀들로부터‘하늘’(heaven)과‘땅’(earth)이모두사람에대하여서술된다는것이분명합니다.비록이말씀들이주로태고교회를가리키지만,말씀의내적인것들은교회에관하여말한것은무엇이든그교회의각사람에게도말할수있는그러한본성을지니고있습니다.그자신이교회가아니면결코교회의일부가될수없기때문입니다.이는주님의성전이아닌사람은성전이의미하는것,곧교회와천국이될수없는것과같습니다.바로이런이유로태고교회가단수로‘사람’(man)이라합니다. From these words it is evident that both “heaven” and “earth” are predicated of man; for although they refer primarily to the most ancient church, yet the interiors of the Word are of such a nature that whatever is said of the church may also be said of every individual member of it, who, unless he were a church, could not possibly be a part of the church, just as he who is not a temple of the Lord cannot be what is signified by the temple, namely, the church and heaven.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man,” in the singular number.
해설
AC.82부터 창2본문의 상세 해설이 시작됩니다. 앞의 AC.73-80은 창2:1-17의 개요였고, AC.81은 이 장에서 다룰 천적 인간을 죽은 사람과 영적 인간에 비교하여 설명하는 배경이었습니다. 이제 AC.82는 창2:1의 ‘천지와만물이다이루어지니라’를 직접 풀이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이 사람이 ‘여섯째날’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81의 첫 문장과 연결됩니다. 앞 장인 창1에서는 죽은 사람으로부터 영적 인간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루었고, 이제 그 과정이 여섯째 날의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여섯째날’은 자연적인 하루가 아니라 거듭남을 통하여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형성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창2:1의 ‘하늘’은 그의 속 사람이고 ‘땅’은 그의 겉 사람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 속 사람이 하늘이라고 해서 속 사람 자체를 천국과 단순히 동일시하거나, 겉 사람이 땅이라고 해서 겉 사람을 악한 부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다루는 사람은 이미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이며, 그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것들의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앎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앞에서 큰 광명체들과 별들로 의미되었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창2:1은 창1과 단절된 새로운 창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1에서 형성되어 온 영적 인간의 상태를 이어받습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 만상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속뜻에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앎들이 형성된 상태와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과 ‘땅’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자신의 해석으로만 제시하지 않고 말씀의 다른 구절들을 인용하여 뒷받침합니다. 앞 장에서 이미 여러 구절을 인용했다고 한 뒤, 여기에서는 사13:12-13과 사51:13, 16을 덧붙입니다. 이 두 인용에서 우리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금이나 오빌, 학대자, 시온 등 모든 표현의 속뜻을 새로 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AC.82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하늘’과 ‘땅’이 사람에 대하여 서술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사13:12-13에서는 ‘사람’이 언급된 문맥에서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흔들리는 것이 함께 말해집니다. AC.82는 이 구절을 인용한 뒤 ‘이말씀들로부터하늘과땅이모두사람에대하여서술된다는것이분명하다’고 결론짓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사람이 금보다 희귀한지, 하늘의 진동과 땅의 흔들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적 붕괴를 나타내는지까지 우리가 먼저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자리에서 이사야를 인용한 직접적인 논증 목적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안전합니다.
사51:13, 16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여호와께서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시는 일이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보호하시는 문맥과 함께 나타납니다. 이것 역시 AC.82에서는 ‘하늘’과 ‘땅’이 사람에게 서술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학대자’가 무엇에 상응하는지, ‘손그늘’과 ‘시온’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 번호에서 따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두 인용 뒤에 AC.82의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원리가 나옵니다. 이 말씀들은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지만, ‘말씀의내적인것들은교회에관하여말한것은무엇이든그교회의각사람에게도말할수있는그러한본성’을 지닌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번 두 이사야 구절만을 위한 설명에 그치지 않고, 왜 말씀의 속뜻에서 교회와 한 사람의 거듭남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그자신이교회가아니면결코교회의일부가될수없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자신이교회’라는 말을 외적인 교단이나 조직의 구성원 자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교회를 이루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의 질서가 각 사람 안에도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관하여 말한 속뜻이 각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은 교회를 이루는 영적 실재가 그 교회의 구성원 안에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성전의 비유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의 성전이 아닌 사람은 성전이 의미하는 것, 곧 교회와 천국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핵심은 외적인 성전 건물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전이 속뜻에서 교회와 천국을 의미한다면, 그것이 나타내는 영적 질서가 사람 안에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단수로 ‘사람’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가 역사적으로 한 개인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이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전체를 단수의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한 사람은 서로 전혀 관계없는 두 주제가 아니라, 말씀의 내적인 것들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AC.82에서 ‘하늘은속사람이고땅은겉사람이다’라는 설명과 ‘각사람이교회여야한다’는 설명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교회에 관하여 말하는 하늘과 땅이 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유를 스베덴보리가 바로 뒤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원리를 지나치게 확대하여 교회의 모든 역사적 사건이 언제나 개인의 심리 상태와 정확히 일대일로 대응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82가 말하는 것은 말씀의 내적인 것들이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을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는 본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의미와 적용은 각각의 본문에서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 확인해야 합니다.
AC.82는 이렇게 창2:1의 짧은 말씀에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힙니다. 사람은 이제 여섯째 날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고, 그의 속 사람은 ‘하늘’, 겉 사람은 ‘땅’이며, 그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앎들입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이 먼저 자기 안에서 교회여야 그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태고교회를 단수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AC.82해설)
이장은천적인간을다루는데,앞장이죽은사람으로부터형성된영적인간을다룬것과같습니다.그러나오늘날에는천적인간이무엇인지알려져있지않고,영적인간이나죽은사람이무엇인지조차거의알려져있지않으므로,그차이를알수있도록각각의본성이어떠한지를간략히말하는것이저에게허락되었습니다. 첫째,죽은사람은몸과세상에속한것외에는아무것도참되고선한것으로인정하지않으며,바로그것을숭배합니다.영적인간은영적이고천적인진리와선을인정합니다.그러나그는사랑에서라기보다는신앙의원리로부터그렇게하며,또한그것을바탕으로행합니다.천적인간은영적이고천적인진리와선을믿고퍼셉션하며,사랑에서나오는신앙외에는다른신앙을인정하지않고,또한그사랑으로부터행합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or a dead man,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First,then,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and this he adores.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and not so much from love.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죽은사람에게영향을미치는목적들은오직육체적이고세상적인삶만을향하며,그는영원한삶이무엇인지,주님이어떤분이신지도알지못합니다.혹안다하더라도믿지않습니다.영적인간에게영향을미치는목적들은영원한삶을향하고,그것을통하여주님을향합니다.천적인간에게영향을미치는목적들은주님을향하고,그것을통하여주님의나라와영원한삶을향합니다. Second: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or what the Lord is;or should he know,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죽은사람은싸움가운데있을때거의언제나굴복하며,싸움가운데있지않을때에는악과거짓이그를지배하고그는종이됩니다.그의결박은외적인것으로서,법에대한두려움,생명을잃는것에대한두려움,재산과이익을잃는것에대한두려움,그리고그가이러한것들때문에중요하게여기는평판을잃는것에대한두려움과같은것들입니다.영적인간은싸움가운데있지만언제나승리합니다.그를제어하는결박은내적인것이며,양심의결박이라합니다.천적인간은싸움가운데있지않으며,악과거짓의공격을받을때그것들을업신여깁니다.그러므로그는정복자라합니다.그는겉으로보기에는아무런결박에도제어되지않는듯하며자유롭습니다.그의결박은겉으로드러나지않는데,그것은선과진리에대한퍼셉션입니다. Third: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and when not in combat,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such as the fear of the law,of the loss of life,of wealth,of gain,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but is always victorious;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he despises them,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but is free. His bonds,which are not apparent,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AC.81은 창2에서 말하는 ‘천적인간’이 어떤 사람인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 장인 창1이 ‘죽은사람으로부터형성된영적인간’을 다루었고, 이 장인 창2는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먼저 밝힙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영적 인간과 죽은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셋의 차이를 알 수 있도록 각각의 본성을 간략히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81은 앞으로 창2를 읽을 때 계속 기준이 되는 중요한 비교표와 같은 번호입니다.
첫 번째 차이는 사람이 ‘무엇을참되고선한것으로인정하며,무엇으로부터행하는가’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여기서 ‘죽은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창1에서 이미 다루었던,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의 사람입니다. 그의 관심과 판단의 중심이 몸과 세상에 속한 것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를 ‘죽은사람’이라 합니다.
영적 인간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제한이 붙습니다. 그는 ‘사랑에서라기보다는신앙의원리로부터’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원리를 바탕으로 행합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그 신앙으로부터 행합니다. 다만 아직 사랑 자체로부터 알고 행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표현이 다시 달라집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퍼셉션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사용되지 않았던 ‘퍼셉션’이 여기에서 직접 등장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사랑에서나오는신앙외에는다른신앙을인정하지않는다’고 합니다. 그가 행하는 것도 바로 그 사랑으로부터입니다. 따라서 AC.77에서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던 것이 AC.81에 이르러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 사랑과 신앙은 서로 무관한 두 가지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에서나오는신앙’을 신앙이 사라진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천적 인간에게 신앙이 없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에서나오는신앙’을 인정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천적 상태를 ‘신앙을넘어사랑으로간상태’라고 단순화하면 원문의 표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차이는 신앙의 존재 여부보다 그 신앙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있습니다.
두 번째 차이는 ‘목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세 사람을 그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를 통해 다시 구별합니다. 죽은 사람의 목적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을 향합니다. 그는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지 못하며, 혹 안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몸과 세상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의 목적이 오직 그것만을 향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의 목적은 영원한 삶을 향하며, ‘그것을통하여주님’을 향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목적은 먼저 ‘주님’을 향하며, ‘그것을통하여주님의나라와영원한삶’을 향합니다. 이 순서는 AC.81이 직접 제시하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영원한 삶이 먼저 언급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 향하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주님이 먼저이며 그분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적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중심적인 목적이 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가지고 영적 인간은 자기 구원만 생각하고 천적 인간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지나치게 낮추어 말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 역시 영원한 삶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은 죽은 사람과 달리 모두 주님과 영원한 삶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목적의 질서에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세 번째 차이는 ‘싸움’과 ‘결박’입니다. 죽은 사람은 싸움 가운데 있을 때 거의 언제나 굴복하고, 싸움이 없을 때에는 악과 거짓의 지배를 받아 종이 됩니다. 그를 제어하는 것은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이나 재산이나 이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러한 것들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는 평판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외적인 결박입니다. 여기서 ‘결박’은 사람을 악에서 붙잡아 두는 제어의 수단을 가리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그 결박이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으며 언제나 승리하고, 그를 제어하는 결박은 ‘양심의결박’이라 합니다. 이것은 창1에서 거듭나는 영적 인간의 과정에 싸움이 있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싸움이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죽은 상태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싸우며, 그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다시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는 ‘싸움가운데있지않습니다.’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 그것들을 업신여기며, 그러므로 ‘정복자’라 합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에게 악과 거짓의 공격 자체가 전혀 없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악과거짓의공격을받을때’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차이는 공격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싸워서 이기지만, 천적 인간은 그것들을 업신여깁니다.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도 없는 것처럼 보이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에게도 ‘결박’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것은 외적으로 보이지 않는 ‘선과진리에대한퍼셉션’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천적 인간의 자유는 아무런 질서도 없고 아무 제어도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외적인 두려움이나 양심의 싸움에 의해 억지로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자체가 그의 내적인 결박이 됩니다.
이 점에서 첫 번째 비교와 세 번째 비교가 서로 만납니다. 첫 번째에서 천적 인간은 진리와 선을 ‘퍼셉션한다’고 했고, 세 번째에서는 그의 보이지 않는 결박이 ‘선과진리에대한퍼셉션’이라고 합니다. 퍼셉션은 천적 인간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방식일 뿐 아니라, 그가 자유롭게 살아가면서도 선과 진리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내적인 결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AC.77에서 처음 등장했던 퍼셉션의 의미를 한 단계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AC.81의 세 비교를 함께 보면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차이는 단순히 세 등급의 지식이나 도덕성의 차이가 아닙니다. 무엇을 선과 진리로 인정하는지, 무엇으로부터 행하는지, 삶의 목적이 어디를 향하는지, 악과 거짓을 대할 때 어떤 상태에 있는지, 무엇이 그를 제어하는지가 모두 달라집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에 머물고 외적인 결박에 붙들립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선과 진리를 신앙으로 인정하고 그 신앙으로부터 행하며, 양심의 결박 안에서 싸워 승리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인정하고 사랑으로부터 행하며, 주님을 목적으로 삼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AC.81은 앞에서 짧게 반복되었던 ‘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으로’라는 말을 처음으로 상당히 구체적으로 풀어 주는 번호입니다. 특히 ‘신앙에서행함’과 ‘사랑에서행함’, ‘영원한삶을통하여주님을향함’과 ‘주님을통하여주님의나라와영원한삶을향함’, ‘싸워서승리함’과 ‘싸움없이악과거짓을업신여김’, ‘양심의결박’과 ‘선과진리에대한퍼셉션’이라는 차이를 함께 붙들면, 앞으로 창2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를 훨씬 분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AC.81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