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하고,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an offering to Jehovah)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뜻합니다. By theend of daysis meant in process of time; by thefruit of the ground,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nd byan offering to Jehovah,worship thence derived.

 

해설

AC.346부터 창4:3의 속뜻으로 들어갑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라는 짧은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날들의 끝에는 시간이 흐른 뒤를, ‘땅의 소산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은 거기에서 나온 예배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AC.346의 가장 중요한 점은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고 예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반드시 아무런 종교적 행위도 하지 않거나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외적으로는 신앙에 속한 많은 행위와 예배가 그대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디에서 나오며 무엇이 그 안에 생명을 주고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먼저 날들의 끝에는 이 번호에서는 시간이 흐른 를 뜻합니다. 앞의 AC.338-345에서 가인이 의미하는 신앙의 성질이 차례로 밝혀졌습니다. 본래 태고교회에서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사랑 안에 있었고 퍼셉션으로 알려졌지만,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로 따로 인식되었으며,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참된 신앙의 생명을 잃는다는 사실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창4:3에서는 그 신앙으로부터 무엇이 나오는지를 다룹니다. 다만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 자체가 어떤 영적 과정의 완성이나 특정 단계를 직접 의미한다고 여기기보다는,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의 설명 그대로 시간이 흐른 라는 뜻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바로 다음 AC.347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그다음 땅의 소산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합니다. 여기서 땅의 소산이라는 표현 자체를 언제나 부정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 AC.343에서 인용된 사30:23땅의 소산의 양식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상응을 하나의 고정된 암호표처럼 사용하여 땅의 소산=나쁜 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가져오는 사람이 가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고, AC.345에서는 농사하는 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경작한 땅에서 나온 소산은 그와 같은 신앙에서 나온 행위를 의미합니다. 같은 표현도 그것이 놓인 문맥과 연결된 영적 상태에 따라 의미를 살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사실이 드러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는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했고 소산을 거두었으며 그것을 여호와께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문제를 단순히 선행을 하는 사람과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의 대비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일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이 자동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단지 어떤 종류의 외적 행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종교적 봉사나 헌신처럼 보여도 그것이 자기 의와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행하는 것인지에 따라 그 내적인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면을 쉽게 판단할 수 없으므로, 이 원리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행위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살피는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AC.346이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지점은 여호와께 제물로 드림거기에서 나온 예배라고 풀이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거기에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배가 앞에서 말한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예배와 그의 내적 생명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가인도 여호와께 제물을 드립니다. 그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 때문에 가인의 이야기는 더 깊은 경고가 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도 종교적인 형태를 갖출 수 있고,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심지어 여호와께 드리는 예배의 형태까지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의 설명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고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46에서는 문제가 단지 머릿속의 지식과 교리에만 머물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자기 나름의 삶과 종교적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적인 활동의 양만 가지고 신앙의 생명을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가보다 그 신앙과 행위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가 더 근본적인 질문이 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합니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 모두 여호와께 제물을 드립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을 가져오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식물 제사는 나쁘고 동물 제사는 좋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인 제물의 종류가 주님의 반응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AC.346이 이미 가인의 제물을 설명하면서 그 배후에 있는 신앙과 행위의 성질을 먼저 밝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인의 제물은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예배이고, 뒤에서 아벨의 제물은 체어리티에서 나온 예배로 설명됩니다. 두 예배의 차이는 외적인 물건의 차이보다 그것을 낳은 내적 상태의 차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46은 예배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 자체에 큰 의미를 둡니다. 물론 예배는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며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신앙생활의 소중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AC.346예배를 드렸는가?와 함께 예배는 어떤 신앙과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이것은 예배 중에 감정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형식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렸는지를 평가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가 우리를 주님 앞에서 낮추고, 자기 안의 악을 보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는지를 살피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예배와 삶은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아니라 같은 내적 생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특히 가인의 제물이 무거운 이유는 그가 예배하지 않았기때문이 아니라 예배했기때문입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도 교리는 남을 수 있고, 종교적 행위도 남을 수 있으며, 예배도 남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외적인 종교생활이 활발하다는 사실만으로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되어 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것을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의 예배를 의심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사람의 내적 사랑을 완전히 아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AC.346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나는 예배하고 있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예배와 신앙은 나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묻게 하는 말씀입니다.

 

결국 AC.346의 흐름은 매우 간결합니다. ‘시간이 흐른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 거기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앞의 AC.338-345가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는 상태의 성질을 설명했다면, 이제 AC.346-349는 그 상태에서 나온 행위와 예배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벌써 중요한 사실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행위가 있다는 것과 체어리티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같은 말이 아니며, ‘예배가 있다는 것과 예배의 내적 생명이 살아 있다는 것도 언제나 같은 말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하고, 참된 행위는 그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내며, 참된 예배 역시 그 생명에서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6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드리는 예배는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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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5, 창4:2,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농사하는 자’ 가인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5‘농사하는 자’(tiller of the ground)가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것, 곧 사랑에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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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5

농사하는 (tiller of the ground)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내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은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고, 그가 자기 형제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벨(Abel) 의미하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리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till the ground)이라고 했다는 것은 3:19, 23에서 분명합니다. 거기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 되었다(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atiller of the ground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is evident from what follows: that Jehovah had no respect to his offering, and that he slew his brother, that is, destroyed charity, signified byAbel. Those were said totill the groundwho look to bodily and earthly things, as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in Gen. 3:19, 23, where we read that the man wascast out of the garden of Eden to till the ground.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23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땅을 갈게 하시니라 (3:19, 23)

 

해설

AC.345는 창4:2의 마지막 표현,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AC.341부터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대비를 마무리합니다. 아벨은 치는 이고 가인은 농사하는 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자연적인 직업의 우열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43에서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고 사람을 그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을 나타냈고, AC.344에서는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과 교리의 목적이 체어리티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45는 그 반대편에 있는 가인을 보여 줍니다. 그는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체어리티가 없는 상태이며, 바로 그런 상태를 여기서는 농사하는 라고 합니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말씀에서 농사하는 땅을 경작하는 가 언제나 악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자연적인 농사나 노동 자체가 부정적인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말씀에서 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아벨은 목축을 했으므로 선하고 가인은 농사를 지었으므로 악하다는 식으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속뜻과 전혀 다릅니다. AC.345에서 농사하는 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가인이 의미하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는 단어 하나에 언제나 똑같이 붙어 있는 고정된 암호가 아니라 말씀의 문맥과 그 안에서 나타나는 영적 상태에 따라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앞으로 일어날 두 사건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특히 두 번째 사건은 결정적입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를 의미하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은 신앙 자체가 전혀 없는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라고 말합니다. 외적으로는 신앙이 매우 강해 보일 수도 있고, 신앙에 관한 지식과 교리가 풍부하며 그것을 열심히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있다면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단호하게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AC.341에서 나온 선언이 AC.345에서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이것이 가인의 정체를 이해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4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교리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이 사람을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고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이라고 했습니다. AC.345의 가인은 바로 그 위험이 실제로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신앙에 속한 지식과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채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고 선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된 것으로 여겨질 때, 신앙은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AC.345가 이 지점에서 창3:19, 23으로 돌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3에는 사람이 에덴동산에서 내보내져 땅을 경작하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345에서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창4의 가인이 농사하는 라는 말은 앞 장에서 나타난 이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에덴으로 표상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질서에서 멀어지면서 시선은 점차 더 낮고 외적인 것에 향하게 됩니다. AC.345는 그러한 상태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사이의 관계를 땅을 경작함이라는 같은 표현을 통하여 연결해 보여 줍니다.

 

여기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본다는 말을 자연계의 삶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몸을 돌보고, 일하고, 돈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자연계에서 맡겨진 수많은 쓰임을 수행해야 합니다. 자연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 악하지 않으며 오히려 영적인 목적을 실현하는 중요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무엇을 바라보는가입니다. 곧 무엇을 중심과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자연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을 섬긴다면 그것들은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종교까지 자기 명예와 이익, 우월감과 세상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하게 된다면 질서는 뒤집힙니다. 신앙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시선과 목적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농사하는 가인이 보여 주는 위험입니다.

 

이렇게 보면 치는 아벨과 농사하는 가인의 대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AC.343에서 보았듯 참된 목자는 양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체어리티는 모으고 결합합니다. 반면 AC.345의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붙들면서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바라보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한쪽은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선과 쓰임으로 나아가는 방향이고, 다른 한쪽은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져 점점 자기 자신에게 머무는 방향입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아주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을 서로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처럼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살펴보았듯 문제는 구별 자체가 아니라 분리입니다. 구별된 신앙이 사랑과 다시 결합되지 않고 독립적인 것이 되면,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그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45는 앞으로 일어날 아벨의 죽음을 이미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갑자기 일어난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AC.338부터 설명해 온 분리의 결과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꺼내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정하고,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을 단지 지식으로 알게 되며, 신앙을 체어리티라는 목적에서 분리한 결과가 마침내 형제를 죽이는데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인간의 모든 교리적 구별에 적용하여 교리를 세우는 자체가 결국 체어리티를 죽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후대의 인간에게는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교리로 이해하며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와 결합하느냐,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완결적인 신앙으로 남느냐에 있습니다.

 

결국 AC.345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 신앙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말씀과 교리를 많이 알고 신앙을 강하게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기 우월성을 확인하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세상적인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낸다면 우리는 농사하는 가인의 모습을 우리 자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인의 비극은 신앙을 버린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면서 그 신앙의 생명과 목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를 잃은 데 있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이것이 AC.341에서 시작하여 AC.345에서 다시 한번 확정되는 창4:2의 결론입니다.

 

 

 

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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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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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4

신앙,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앙의 교리(doctrine of faith)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입니다(12:28-35; 22:34-39). What avails faith, that is, the memory-knowledge [scientia], the knowledge [cognitio], and the doctrine of faith, but that the man may become such as faith teaches? And the primary thing that it teaches is charity. (Mark 12:28-35; Matt. 22:34-39)

 

28서기관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계명이 없느니라 32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분이시요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5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12:28-35)

 

34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중의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4-39)

 

이것이 신앙이 지향하는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이나 교리가 대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불과합니다. This is the end of all it has in view, and if this be not attained, what is all knowledge or doctrine but a mere empty nothing?

 

해설

AC.344는 짧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가인과 아벨의 문제를 매우 날카로운 질문 하나로 압축합니다.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신앙을 낮추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하여 주어졌는지를 묻는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scientia), 인식 지식(cognitio), 그리고 신앙의 교리(doctrine of faith)를 차례로 언급한 뒤, 그 모든 것의 목적은 사람이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진리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사람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 있으며, 그 진리를 아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 그리고 교리를 불필요하거나 낮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말씀의 내용을 배우고 기억해야 하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고 인식해야 하고, 서로 관련된 진리들을 질서 있게 연결하여 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도 올바르게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 모든 것에 무엇을 위해서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지식과 교리는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사람이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의 목적은 사람이 단지 무엇을 믿는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고, 그가 믿는 진리가 가르치는 대로 그러한 사람이 되는데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진리가 자기 삶의 성질이 되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는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 정확한 교리 체계만을 만들어 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사랑과 삶을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이 가르치는 여러 항목 가운데 조금 더 중요한 한 항목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진리들이 궁극적으로 사람을 이끌어 가야 할 방향과 목적이 체어리티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342에서 르우벤은 신앙을,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한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은 자신에게 머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이 먼저 신앙을 만들고, 그다음 행위를 쌓아 마침내 자기 힘으로 체어리티를 만들어 낸다는 기계적인 과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그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지만,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고 살아 있는 체어리티가 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12:28-35와 마22:34-39가 여기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두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모든 계명의 중심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두십니다. 특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과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계명은 신앙이 궁극적으로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신앙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라고 말할 때, 그는 단순히 교리보다 윤리적 행동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계명과 주님에 관한 모든 참된 진리는 결국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12장에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고까지 말합니다. 따라서 외적인 종교 행위나 신앙고백 역시 그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으면 자기 목적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 두 복음서 인용은 바로 이 한 가지 사실을 확증하기 위해 함께 제시된 것이므로, 각각 별도의 심화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가 목적이므로 신앙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 없는 막연한 선의나 인간적인 호감이 아닙니다.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 무엇이 주님의 질서에 맞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는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는 관계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며, 선은 진리와 결합하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목적이 수단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의 참된 가치를 결정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할 때 신앙은 비로소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에 맞게 쓰이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통하여 바른 방향과 형태를 얻습니다. 그러므로 AC.344의 질문은 신앙인가, 체어리티인가?가 아니라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이것을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놓으면 AC.344가 이 자리에서 등장하는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신앙을 없애거나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따로 구별하고 교리로 정리하여 그것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AC.340에서는 그 결과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어 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4는 그 분리가 왜 치명적인지를 목적의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는 것은 단순히 두 요소가 서로 떨어지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신앙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잃는 것입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가인이 아벨에게서 분리된다는 것은 신앙이 자신이 향해야 할 목적에서 분리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무엇인가 한 부분이 조금 부족한 신앙이 아니라 자기 생명과 목적을 잃은 신앙이 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두고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단언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AC.344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체어리티라는 목적에 이르지 못한다면 모든 지식과 교리는 아무것도 아닌 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지식과 교리 그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적과 생명에서 분리된 지식과 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방대하고 정교한 신학 체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께로 돌이키고, 자기 안의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선을 행하게 하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아직 영적인 목적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진리가 사람 안에서 악을 드러내고, 회개하게 하고, 삶을 바꾸며, 이웃을 향한 선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진리는 더 이상 머리에만 있는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 갑니다.

 

이 점은 AC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특히 직접적인 질문이 됩니다. 우리는 신앙, 체어리티, 퍼셉션, 상응, proprium, 리메인스, 속 사람과 겉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같은 수많은 아르카나를 배우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식은 귀하며,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44는 바로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아르카나를 더 많이 알수록 다른 사람의 오류를 더 잘 찾아내는 사람이 되는 데 그치고 있는지, 아니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잘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며 이웃의 참된 선을 더 구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아르카나에 대한 지식마저 자기 우월성을 세우는 수단이 된다면, 우리는 가인의 문제를 공부하면서 동시에 가인의 길을 걸을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배운 진리가 우리 자신을 살피게 하고, 악을 피하게 하며,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지식은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귀한 수단이 됩니다.

 

결국 AC.344의 핵심은 단순히 지식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말보다 훨씬 정교합니다. ‘진리는 삶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기억 지식과 인식 지식과 신앙의 교리는 모두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중심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곧 체어리티입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을 귀하게 여긴 데 있지 않고 신앙을 그 목적에서 분리하여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게 한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44가 우리에게 묻는 가장 중요한 질문도 나는 얼마나 정확한 신앙을 알고 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는 주님께서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쓰이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고, 진리가 삶이 되며, 그 모든 것 안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실 때 비로소 신앙은 자신의 목적에 이르고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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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3

치는 (shepherd of the flock)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에서 아주 익숙하게 사용하는 표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shepherd)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flock)라고 합니다.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며,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떼에 속하지 않습니다. 목자 이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씀의 인용으로 확증할 필요는 거의 없지만, 다음 구절들을 인용할 있습니다. 이사야에서, That ashepherd of the flocki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must be obvious to everyone, for this is a familiar figure in the Word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s. He who leads and teaches is called ashepherd,and those who are led and taught are called theflock. He who does not lead to the good of charity and teach it, is not a true shepherd; and he who is not led to good, and does not learn what is good, is not of the flock. It is scarcely necessary to confirm this signification ofshepherdandflockby quotations from the Word; but the following passages may be cited. In Isaiah:

 

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날에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30:23) The Lord shall give th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owest the ground, and 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in that day shall he feed thy cattle in a broad meadow, (Isa. 30:23)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다시 이사야에서, wherebread of the increase of the ground,denotes charity. Again:

 

그는 목자같이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0:11) The Lord Jehovih shall feed his flock like a shepherd; he shall gather the lambs into his arm, and carry them in his bosom, and shall gently lead those that are with young. (Isa. 40:11)

 

시편에서, In David:

 

요셉을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이여 빛을 비추소서 (80:1) Give ear, O Shepherd of Israel, thou that leadest Joseph like a flock; thou that sittest on the cherubim, shine forth. (Ps. 80:1)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2아름답고 우아한 시온의 딸을 내가 멸절하리니 3목자들이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6:2, 3) I have likened the daughter of Zion to a comely and delicate woman; the shepherds and their flocks shall come unto her, they shall pitch tents near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everyone his own space.(Jer. 6:2, 3)

 

에스겔에서, In Ezekiel:

 

37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38제사 드릴 예루살렘이 정한 절기의 무리 같이 황폐한 성읍을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알리라 하셨느니라 (36:37, 38) Thus saith the Lord Jehovih, I will multiply them as a flock of man, as a hallowed flock, as the flock of Jerusalem in her appointed times; so shall the waste cities be filled with the flock of man. (Ezek. 36:3738)

 

이사야에서, In Isaiah:

 

게달의 무리는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60:7) All the flocks of Arabia shall be gathered together unto thee, the rams of Nebaioth shall minister unto thee. (Isa. 60:7)

 

떼를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떼를 모으는(gather the flock) 사람들이며,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떼를 흩는(scatter the flock) 사람들입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They who lead the flock to the good of charity are they whogather the flock”; but they who do not lead them to the good of charityscatter the flock”; for all gathering together and union are of charity, and all dispersion and disunion are from want of charity.

 

해설

AC.343은 앞의 AC.341-342에서 아벨을 치는 라고 한 이유를 말씀 전체에 익숙한 목자와 의 표상을 통하여 설명합니다. AC.341에서는 치는 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고, AC.342에서는 체어리티를 의미하는 레위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치는 를 표상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3은 그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하면서 사람들을 인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을 목자라고 하고, 인도와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을 떼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목자=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이라는 대응 관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지 않고 그것을 가르치지도 않는 사람은 참된 목자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AC.343 전체를 여는 핵심 질문은 목자가 얼마나 많이 가르치는가?가 아니라 목자가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하는가?입니다. 그 목적지는 분명히 체어리티의 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42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라는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참된 목자는 사람에게 무엇이 참인지를 알려 주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그 신앙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고, 마침내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이루시도록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렇다고 진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목자는 분명히 인도하고 가르치는사람이며, 양 떼 역시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는사람들입니다. 참된 선을 행하려면 무엇이 참으로 선한지를 진리를 통하여 배워야 합니다. 다만 진리는 그 자체에 사람을 붙잡아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가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세운 데 있었다면, 참된 목자의 역할은 정반대로 진리를 통하여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의미가 말씀 전체에서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에 사실 많은 인용으로 확증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면서도 여러 구절을 제시합니다. 이 구절들을 각각 독립된 주제로 확장하기보다 하나의 공통된 그림으로 읽는 것이 AC.343의 의도에 더 잘 맞습니다. 30:23에서는 주님께서 비를 주시고 땅이 양식을 내며 가축이 넓은 목장에서 먹는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땅의 소산의 양식을 체어리티라고 합니다. 80:1에서는 주님을 이스라엘의 목자’, 요셉을 같이 인도하시는 라고 부릅니다. 6:2-3에서는 목자들과 양 떼가 나타나고, 36:37-38에서는 사람들을 제사 드릴 로 표현하며, 60:7에서도 양 무리가 모여드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 모든 인용의 중심은 목자와 양 떼라는 말이 말씀에서 사람을 영적으로 인도하고 선으로 이끄는 관계를 나타내는 익숙한 표상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40:11은 이 전체 의미를 가장 아름답게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주 여호와께서 친히 목자같이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십니다.여기서는 참된 목자의 원형이 결국 주님 자신이심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신다는 일련의 모습은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단순히 올바른 교리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영적 생명을 위한 선과 진리를 공급하시고, 흩어진 것을 모으시며, 연약한 것을 품으시고, 각 사람의 상태에 맞추어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사람인 목자가 참된 목자인 것은 자기에게서 목자직의 능력이나 선이 나오기 때문이 아니라,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그 쓰임을 섬기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사람들을 자기에게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 인도하며, 자기 생각으로 먹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하여 사람들이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이 점에서 AC.343은 목회와 가르침을 바라보는 상당히 엄중한 기준도 제시합니다. 성경을 많이 가르치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많은 사람을 이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참된 목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이 사람을 어디로 이끌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배우면서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겸손해지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실제 선을 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그 가르침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지식은 많아지는데 자기 교리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며, 끊임없이 편을 나누고 적을 만들어 간다면 그 가르침이 정말 AC.343이 말하는 체어리티의 으로 사람을 인도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위험도 있습니다.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흐리거나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가르치는 일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참된 목자는 진리를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양 떼의 편에서도 똑같이 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선으로 인도받지 않고,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지 않는 사람은 떼에 속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양 떼에 속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회에 등록되어 있거나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듣는다는 외적인 소속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된 양 떼는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고 그 선으로 인도받으려 합니다. 목자가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해야 한다면 양 떼 역시 그 선을 배우고 받아들여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결국 목자와 양 떼 모두의 중심에는 체어리티가 있습니다. 목자는 자기 권위와 지식을 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양 떼도 단지 종교적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하시고, 사람은 그 인도를 받아 실제 삶에서 선을 행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AC.343의 마지막은 이 모든 설명을 모임과 결합이라는 매우 중요한 원리로 모읍니다. ‘모든 모임과 결합은 체어리티에서 나오고, 모든 흩어짐과 분리는 체어리티가 없는 데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모임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한 장소에 모여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교회에 속하고 같은 예배에 참석하며 같은 교리를 고백한다고 해서 반드시 내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결합을 이루는 것은 체어리티입니다. 반대로 외적인 생각과 판단에 어느 정도 차이가 있더라도 서로의 참된 선을 바라며 주님 안에서 이웃의 유익을 구한다면 더 깊은 차원에서 결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교리적 차이가 모두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고 체어리티가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다만 진리가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생명을 가지려면 체어리티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마지막 원리에서 가인과 아벨의 대비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의 길은 분리의 길입니다.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세우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며, 마침내 자기 형제인 아벨을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치는 입니다. 체어리티는 양 떼를 선으로 인도하고, 모으고, 결합합니다. 특히 사40:11의 주님은 양들을 모아 품에 안으시는목자로 나타나시므로, 가인이 보여 주는 분리와 목자이신 주님이 보여 주시는 모음은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가인은 나쁜 사람, 아벨은 착한 사람이라는 도덕적 대비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독립하려는 신앙의 질서를, 아벨은 신앙이 본래 결합되어야 할 체어리티의 선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신앙이 단지 하나의 덕목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 자신이 사람을 선으로 인도해야 하는 목적과 생명을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결국 AC.343참된 목자는 어디로 인도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답은 체어리티의 선으로입니다. 참된 목자는 진리를 가르치지만 사람을 지식에 머물게 하지 않고, 그 진리가 삶이 되고 선이 되도록 인도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참된 인도의 근원은 사람인 목자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친히 양 떼를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하십니다. 사람은 그 주님의 목자직에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AC.343은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진리를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하고, 돌보는 모든 자리에서 우리는 같은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전하는 진리는 사람을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하고 있는가?그리고 우리 자신이 양 떼의 자리에서는 나는 단지 진리를 듣고 아는 머무르는가, 아니면 주님의 인도를 받아 무엇이 선인지를 배우고 선을 행하려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가 있는 곳에서는 모이고 결합하며, 체어리티가 사라지는 곳에서는 흩어지고 분리됩니다. 이것이 치는 아벨을 통하여 AC.343이 보여 주는 참된 목자의 모습입니다.

 

 

 

AC.344, 창4:2, ‘신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4신앙, 곧 신앙에 관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 scientia)과 인식 지식(knowledge, cognitio), 그리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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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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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4:2)

 

AC.342

교회의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야곱에게서 레아의 아들들도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르우벤(Reuben) 신앙을, 시므온(Simeon)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레위(Levi)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29:32-34). 이런 이유로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으며, 치는 (shepherd of the flock) 표상했습니다. That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chur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nothing else than faith and charity. The same is signified by the first children of Leah from Jacob; “Reubendenoting faith; “Simeon,” faith in act; andLevi,” charity (Gen. 29:32, 33, 34), wherefore also the tribe of Levi received the priesthood, and represented theshepherd of the flock.”

 

32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33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34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아들을 낳았으니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29:32-34)

 

체어리티는 교회의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brother)라고 하며, 이름을 아벨(Abel)이라고 합니다. As charity is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t is calledbrother,and is namedAbel.

 

해설

AC.342는 바로 앞 AC.341교회의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과 형제가 이를 의미한다는 설명을 말씀의 다른 곳을 통하여 뒷받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잉태하고 낳는다는 표현은 AC.339에서 살펴본 것처럼 교회 안에서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다른 상태로부터 생겨나는 것을 출생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교회 안에서 참으로 생겨나야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신앙과, 그 진리가 선과 삶으로 결합되어 나타나는 체어리티입니다. 이 둘은 서로 독립하여 경쟁하는 두 요소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적 생명을 이루도록 결합되어야 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야곱과 레아에게서 난 첫 세 아들, 곧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를 가져옵니다. 르우벤은 신앙,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레위는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이 세 이름을 함께 놓으면 AC.342가 보여 주려는 질서가 선명해집니다. 신앙은 단지 어떤 진리를 알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받아들인 진리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렇게 삶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마침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신앙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체어리티라는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이 나아가는 방향과 정반대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세우려 하지만, 말씀에 나타나는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신앙이 자기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삶으로 나아가며 체어리티를 향합니다.

 

다만 이 흐름을 먼저 머리로 진리를 알고, 그다음 일정 기간 행동을 반복하면, 마지막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기계적인 세 단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인간의 반복된 행위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고 진리와 선을 결합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행위로 나아가고 체어리티에 이르는 과정 전체는 인간이 스스로 선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행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서 이루시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또한 이것을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에 그대로 소급해서도 안 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가졌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AC.337이 말하는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는 특히 진리를 배워 삶으로 받아들이고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후대 인간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이것을 모든 시대의 인간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단일한 시간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29:32-34가 인용된 이유도 바로 이 정도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40에서는 르우벤과 시므온의 이름을 비롯한 여러 사례를 인용하여 고대인들이 어떤 상태와 의미를 이름에 담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AC.342에서는 같은 창29의 구절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이번에는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가 차례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통하여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더 넓은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는 르우벤의 이름이 , 시므온이 들음, 레위가 연합과 연결되어 각각 더 깊은 의미를 갖지만, AC.342 자체에서는 그 세부 상응까지 모두 풀 필요가 없습니다. 이 번호가 직접 밝히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르우벤은 신앙, 시므온은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 레위는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창29:32-34는 세 인물에 관한 별도의 주제를 여는 인용이라기보다 AC.342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하나의 연속된 계보로 보여 주는 근거입니다.

 

이어지는 레위 지파와 제사장직에 관한 설명도 같은 중심에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레위가 체어리티를 의미하기 때문에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았고 치는 를 표상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제사장직의 역사나 제도 전체로 논의를 넓히기보다, 왜 이것이 아벨의 치는 와 연결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앞 AC.341에서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양 치는 자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이제 AC.342에서는 레위 역시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그 레위 지파가 제사장직을 맡아 치는 를 표상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아벨 - 체어리티 - 치는 레위 - 체어리티 - 제사장직 - 치는 가 같은 중심에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말씀의 서로 멀리 떨어져 보이는 부분들이 속뜻에서는 하나의 영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치는 를 곧바로 오늘날의 목회자와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AC.342의 직접적인 초점은 체어리티입니다. 양 치는 자가 체어리티와 연결되는 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이웃의 선을 실제로 돌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단지 마음속의 따뜻한 감정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의 참된 유익을 구하며 그것을 실제 쓰임으로 행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사장직 역시 그 본질을 지위나 권위에서 찾기보다 선을 섬기고 사람을 주님의 선과 진리로 인도하는 쓰임에서 보아야 합니다. 다만 목자가 양을 먹이고 모으고 품고 인도한다는 이미지는 바로 다음 AC.343에서 훨씬 직접적으로 전개되므로, AC.342에서는 그 주제를 지나치게 앞당겨 확장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다시 형제라는 표현으로 돌아옵니다. ‘체어리티는 교회의 번째 자손이므로 형제라고 하며, 이름을 아벨이라고 합니다.이것은 가인과 아벨이 단지 한 부모에게서 난 두 사람이라는 사실을 넘어,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결합되어 있어야 하는 관계임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정상적인 방향이 르우벤에서 시므온을 거쳐 레위로, 곧 신앙에서 행위로 나타나는 신앙을 거쳐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가인의 비극은 바로 이 방향을 거부한 데 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이고 함께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마침내 그 형제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뒤에 가인이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하는 장면도 더욱 무겁게 읽히게 됩니다. 다만 그 구절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AC에서 자세히 다루는 것이 좋고, 여기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형제로서 결합되어야 한다는 데까지만 붙드는 것이 적절합니다.

 

결국 AC.342의 핵심은 신앙의 목적지는 신앙 자체가 아니다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삶으로 나아가야 하고, 삶으로 나타나는 신앙은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체어리티에 이르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자신의 생명과 목적을 얻습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될 때 참된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단지 머릿속에서 더 많은 교리 지식으로 쌓이고 있는가, 아니면 실제 삶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주님께서 그것을 체어리티와 결합하시도록 받아들이고 있는가? ‘르우벤 시므온 레위는 신앙이 자신에게 머무르지 않고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방향을 보여 주며, 바로 그 점에서 체어리티인 아벨이 왜 신앙인 가인의 형제인지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43, 창4:2, ‘참된 목자는 체어리티의 선으로 인도합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3‘양 치는 자’(shepherd of the flock)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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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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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4:2)

 

AC.341

교회의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아벨(Abel) 형제(brother) 이를 의미합니다. 치는 (shepherd of the flock)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을 나타내고, 농사하는 (tiller of the ground)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을 나타냅니다. 비록 그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있다 하더라도 그러하며,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The second offspring of the church is charity, signified byAbelandbrother”; ashepherd of the flockdenotes one who exercises the good of charity; and atiller of the ground,is one who is devoid of charity, however much he may be in faith separated from love, which is no faith.

 

해설

AC.341은 매우 짧지만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핵심 구조를 한 문장 안에 압축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 AC.338-340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첫 번째 자손을 신앙이라고 하고 그것을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2로 넘어오면서 교회의 두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이며, 그것을 아벨형제가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속뜻에서 처음부터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체어리티를 아벨뿐 아니라 형제도 의미한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남남인 두 가지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이며, 체어리티는 신앙의 형제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결국 신앙이 자신과 결합되어 있어야 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번째 자손은 신앙이고 번째 자손은 체어리티라는 말을 시간적 또는 영적 우선순위로 곧바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태고교회에서 먼저 신앙이 생긴 뒤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겼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37에서 이미 살펴보았듯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먼저이고, 그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을 받는 질서였습니다. AC.338 번째 자손AC.341 번째 자손은 그 본래의 천적 질서를 뒤집어 신앙이 본질적으로 체어리티보다 먼저라는 교리를 세우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AC.339에서 설명한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서로 어떻게 파생되고 관계를 이루는지를 출생과 계보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태고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의 질서와 후대 영적 인간의 거듭남의 질서를 뒤섞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벨은 치는 였는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체어리티의 매우 중요한 성격이 담겨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마음속에서 이웃에게 좋은 감정을 품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로 선을 행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를 단순한 외적 선행과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어떤 행동이 겉으로 선해 보인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곧 체어리티인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선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자리에서 실제 쓰임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치는 라는 표현에서 AC.341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양이나 목축에 관한 세부 상응보다 체어리티의 선을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체어리티는 살아 움직이고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선입니다.

 

반면 가인은 농사하는 인데,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강하게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농사 자체가 부정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은 문맥에 따라 좋은 의미로도 사용되며, 이후 AC에서는 그 의미가 훨씬 세밀하게 설명됩니다. AC.341에서 중요한 것은 농사하는 라는 표현이 가인이라는 상태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가인은 앞에서 보았듯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구별하여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교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제 그 신앙이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아무리 깊이 들어가 있더라도 체어리티가 없다면 결국 체어리티 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AC.341의 가장 중요한 문장이 나옵니다.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단순히 불완전한 신앙이나 조금 부족한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을 잃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참된 의미에서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문제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40에서는 본래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구별하여 교리로 정리하고, 그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상태를 보았습니다. 그때에는 아직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지 쉽게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1은 그 분리의 본질을 이미 드러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사람이 붙들고 있는 것은 이름으로는 신앙일 수 있어도 생명을 가진 참된 신앙은 아닙니다.

 

이것은 교리나 신앙고백 자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앞의 AC.337에서도 오늘날에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신앙이 먼저 배워지는가?가 아니라 신앙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마침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 역시 진리를 불필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주님의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배우고 분별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를 서로 경쟁시키면서 신앙이 중요한가, 사랑이 중요한가?라고 묻는 것 자체가 이 둘의 본래 관계를 놓치게 할 수 있습니다. 둘은 형제이며,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약속과 원칙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약속을 지키고 서로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하는 것은 사랑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 자체는 사라지고 나는 정해진 규칙을 모두 지켔으므로 좋은 배우자다라는 주장만 남는다면, 규칙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관계의 생명은 크게 훼손된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참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신앙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된 채 자기 완결적인 것으로 남는다면 교리적 형식은 유지되어도 신앙의 생명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41체어리티가 없는 신앙도 신앙이기는 하지만 조금 부족하다하지 않고 단호하게 그런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이 기준은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정하기 위한 잣대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하며, 신학적인 오류를 잘 찾아내는 것 자체는 귀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참된 신앙인지는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어떤 생명을 이루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자기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며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며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이웃의 선에는 무관심하고, 그 지식을 자기 우월성과 정당성을 세우는 데 사용한다면 나는 무엇을 믿는가?뿐 아니라 신앙은 지금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41은 앞으로 펼쳐질 가인과 아벨의 비극을 이미 한 문장으로 예고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이고 형제역시 체어리티이며, ‘ 치는 는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가인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인다는 것은 단지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분리된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때 죽는 것은 아벨만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 역시 자기 생명을 잃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이 짧고 단호한 선언이 AC.341의 핵심이며, 앞으로 이어지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AC.342, 창4:2, ‘신앙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체어리티로’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4:2) AC.342교회의 두 번째 자손이 체어리티라는 것은,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 것은 신앙과 체어리티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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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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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4:1)

 

AC.34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라는 말은 가인(Cain)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장의 처음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합니다. 이전에는 그들이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에 관한 구별된 교리를 만들기 시작했을 ,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가져다가 교리로 정리하였고, 그것을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마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이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습니다. 고대에는 새로운 것이 생길 때마다 그것에 이름을 붙였으며, 이런 식으로 이름 안에 담긴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여호와께서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라는 말로 설명되고(16:11), That the wordsI have gotten a man, Jehovahsignify that with such as are calledCainfaith is recognized and acknowledged as a thing by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t the beginning of this chapter. Previously, they had been as it were ignorant of what faith is, because they had a perception of all the things of faith. But when they began to make a distinct doctrine of faith, they took the things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reduced them into doctrine, calling itI have gotten a man, Jehovah,” as if they had found out something new; and thus what was before inscribed on the heart became a mere matter of knowing. In ancient times they gave every new thing a name, and in this way set forth the things involved in the names. Thus the signification of the name Ishmael is explained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her affliction;” (Gen. 16:11)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라는 말로(29:32), that of Reuben, by the expression, “Jehovah hath looked upon my affliction;” (Gen. 29:32)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라는 말로(29:33), the name Simeon, by the saying, “Jehovah hath heard that I was less dear;” (Gen. 29: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라는 말로 설명됩니다(29:35). and that of Judah by, “This time will I praise Jehovah;” (Gen. 29:35)

 

그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 (29:35)

 

또한 모세는 자신이 세운 제단을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깃발(Jehovah my banner)이라고 불렀습니다(17:15). and an altar built by Moses was called, “Jehovah my banner.” (Exod. 17:15)

 

모세가 제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17:15)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여기서는 신앙의 교리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가인(Cain)이라고 것입니다. In like manner the doctrine of faith is here denominatedI have gotten a man, Jehovah,orCain.

 

해설

AC.340은 바로 앞 AC.338에서 말한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전혀 새로운 거짓 신앙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들이 교리로 정리한 것은 이전부터 태고교회 안에 있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이었습니다. 달라진 것은 진리의 내용 자체라기보다 그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방식이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마치 알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고 합니다. 신앙에 무지했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분리된 하나의 독립적인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따로 떼어 정의하고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에 속한 것은 이미 사랑과 생명 안에 들어 있었고, 말하자면 마음에 새겨져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신앙에 속한 것들을 하나씩 따로 꺼내어 구별하고, 그것들을 신앙에 관한 교리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변화를 이전에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이제는 단지 지식으로 아는 것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그들이 정리한 모든 내용이 갑자기 거짓이 되었다는 뜻도 아니고, 교리를 만들었다는 행위 자체가 악이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문제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 본래 사랑 안에 살아 있던 신앙이 점차 사랑으로부터 구별되고, 마침내 자체로 하나의 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AC.338에서 보았듯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 안에 있어야 할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무엇으로 세우기 시작한 데 있습니다. AC.340은 그 분리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퍼셉션으로 알던 지식으로 알게 의 대비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한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에 전혀 몰랐던 진리를 처음 발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사랑 안에서 퍼셉션으로 알고 있던 것을 따로 꺼내어 교리적으로 정리하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무엇인가를 새로 얻었다고 여겼고, 그렇게 얻었다고 여긴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묘한 역설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더 내적인 앎의 방식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진리를 사랑 안에서 살아서 알았는데 이제는 그것을 자기 앞에 하나의 대상으로 세워 지식으로 알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생명 안에서 알려지는 것에서 신앙에 관하여 아는 것으로 옮겨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퍼셉션은 좋고 지식은 나쁘다’, 또는 교리가 없는 신앙이 교리가 있는 신앙보다 높다는 일반적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특수한 천적 상태를 설명하는 문맥이기 때문입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퍼셉션이 주어졌다고 설명하면서, 곧이어 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고 했습니다. 후대의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공부하며 선과 진리를 구별하여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거듭남에 필요한 과정입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지식에만 머물러 체어리티와 결합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마음에 새겨져 있던 것이 단지 지식이 되어 가는 방향으로 쇠퇴가 나타났다면, 후대 인간에게서는 주님께서 지식과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를 다시 사랑과 삶 안으로 이끄셔서 체어리티와 결합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두 시대의 질서를 단순히 같은 공식으로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AC.340 후반에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그리고 여호와 닛시가 차례로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이 가인이라는 이름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마엘은 여호와께서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는 말과 함께 이름이 주어지고(16:11), 르우벤은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므로라는 말과 연결되며(29:32), 시므온은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라는 말과 연결됩니다(29:33). 유다는 이번에는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는 말에서 그 이름이 주어지고(29:35), 모세가 세운 제단에는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이 붙습니다(17:15).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인용한 것은 여기서 이스마엘이나 르우벤, 시므온, 유다의 속뜻을 각각 해설하거나 여호와 닛시의 상응을 따로 밝히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 모든 예가 보여 주는 공통점은 고대에는 어떤 상태나 사건의 성질을 이름 안에 담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역시 단순한 호칭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라는 말로 표현된 교회적, 교리적 상태를 담고 있는 이름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바로 앞 AC.339와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AC.339에서는 태고인들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하였으며, 교회에 속한 것들이 자연적인 출생처럼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관계를 이루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들로 계보를 구성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40에서는 그 원리를 실제 성경의 여러 이름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인용구절은 각각 독립된 다섯 가지 주제를 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설명을 여러 사례로 뒷받침합니다. ‘이스마엘’, ‘르우벤’, ‘시므온’, ‘유다’, ‘여호와 닛시가 각각 그 이름과 관련된 상태와 의미를 담고 있듯이, ‘가인이라는 이름에도 태고교회 안에서 일어난 특정한 변화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39AC.340은 서로 떨어진 설명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이름과 계보로 표현되는가를 설명하는 하나의 연속된 해석 원리가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가인의 시작이 얼마나 미묘한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처음부터 사랑은 필요 없다’, ‘체어리티는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에 속한 것을 따로 구별하여 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것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신앙은 점차 사랑으로부터 독립된 위치를 갖게 됩니다. 이후 창4의 흐름에서 이 분리는 더 분명해져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40은 단순히 옛사람들은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가?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가인이라는 교리적 상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마음에 새겨져 있던 신앙이 지식의 대상이 되고, 그 지식이 사랑 안에 다시 머물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의 것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의 본래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이 대목은 AC를 읽고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실제적인 경고가 됩니다. 우리는 상응’, ‘퍼셉션’, ‘리메인스’, ‘ 사람과 사람’,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같은 개념을 배우면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것을 내가 얻은 으로 여기고, 그 지식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밝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위험도 생길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가 소유하여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수단입니다. 배운 진리를 통하여 자기 안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겨 피하며,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는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갈 때 그 진리는 비로소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40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보다 더 깊습니다. ‘내가 아는 진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머리에만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역사하심으로 마음과 삶에도 새겨지고 있는가?바로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가인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살아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AC.341, 창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AC.341-345)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창4:2) AC.341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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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9, 창4:1, ‘창4의 계보를 읽는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39앞의 세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가 태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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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4:1)

 

AC.339

앞의 장에서 아담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밝혀졌으므로, 이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교회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잉태와 출생 역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태고인들에게는 이름을 붙이고, 이름으로 어떤 것들을 의미하게 하며, 그렇게 해서 계보를 구성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교회에 속한 것들은 서로 이러한 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나는 것처럼, 교회에 속한 것들도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는 교회에 속한 것들을 잉태(conceptions), 출생(births), 자손(offspring), 갓난아이(infants), 어린아이(little ones), 아들(sons), (daughters), 청년(young men)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말씀의 예언적 부분에는 이와 같은 표현들이 매우 많이 나옵니다. In the three foregoing chapters it has been sufficiently shown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e most ancient church, so that it cannot be doubted, and this being admitted, it is evident that the conception and the birth effected by that church were of the nature we have indicated. It was customary with the most ancient people to give names, and by names to signify things, and thus frame a genealogy. For the things of the church are related to each other in this way, one being conceived and born of another, as in generation. Hence it is common in the Word to call things of the church conceptions, births, offspring, infants, little ones, sons, daughters, young men, and so on. The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abound in such expressions.

 

해설

AC.339는 앞으로 이어질 창4의 이름과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바로 앞 AC.338에서 스베덴보리는 아담과 그의 아내를 태고교회로, 그 교회의 번째 자손, 처음 을 신앙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사랑 안에 머물지 않고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기 시작한 상태를 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가 어떻게 잉태하고 낳으며’, 신앙이나 교리에 속한 것이 어떻게 그 교회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39는 바로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인들에게는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으로 어떤 것을 의미하게 하며, 그렇게 해서 계보를 구성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 이유는 교회에 속한 것들도 자연적인 혈연관계와 비슷한 발생 관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출생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잉태되고 태어나지만, 영적인 의미에서는 하나의 교회적 상태가 다른 상태에서 생겨나고, 하나의 교리적 원리가 또 다른 교리적 상태를 낳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교회에 속한 것들을 잉태’, ‘출생’, ‘자손’, ‘갓난아이’, ‘어린아이’, ‘아들’, ‘’, ‘청년등의 가족과 출생의 언어로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말씀의 예언적 부분에는 이와 같은 표현들이 매우 많이 나온다고 덧붙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창4의 이름들을 읽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설에서 가인과 아벨, 에녹과 이랏, 므후야엘과 므드사엘, 라멕 등을 읽을 때 중심이 되는 것은 개인들의 가족사를 재구성하는 일이 아니라, 그 이름들이 의미하는 교리적, 교회적 상태와 그 상태들의 발생 관계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계보를 읽으면서 우리가 계속 물어야 할 것은 사람은 역사적으로 누구였는가?만이 아니라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은 앞의 어떤 상태로부터 생겨났고 다시 무엇을 낳는가?입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그러므로 이것은 실제 역사가 아니라 지어낸 비유다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339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하려는 핵심은 역사성 여부를 논증하는 데 있지 않고, 말씀의 이름과 계보 안에 교회에 속한 것들의 영적 발생과 파생이 담겨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잉태출생이라는 표현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9가 이 둘의 세부 상응을 각각 따로 정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핵심은 분명합니다. 교회에 속한 것들은 서로 아무 관계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생겨납니다. 이 원리를 우리의 내적 상태에 적용해 보면, 어떤 생각이나 원리가 마음에서 받아들여지고 자라다가 마침내 하나의 확고한 신앙이나 삶의 형태로 나타나는 과정을 잉태출생의 이미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AC.339의 직접적인 단어별 정의라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한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잉태되고 태어난다는 원리를 인간의 내적 삶에 적용하여 이해한 것입니다.

 

바로 앞 AC.338의 가인과 연결하면 이 원리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에는 본래 사랑 안에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하고 인정하는 교리적 상태가 생겨났으며, 그것이 가인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자리 잡으면 그 원리에서 다시 다른 교리적 상태들이 파생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게서 에녹이 나오고,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계보가 이어집니다. AC.331에서 에녹을 이 이단의 확장이라고 했고, AC.332에서는 이 하나의 이단에서 여러 이단이 생겨났으며 그 마지막 라멕에게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AC.339는 바로 그러한 앞의 개요가 왜 아버지-아들-후손이라는 계보의 형식으로 기록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해석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앞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살피면서 중요하게 구별했던 문제에도 빛을 줍니다.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을 단순히 두 집안의 연대기로 놓고 가인 계열이 먼저 진행된 계열이 시작되었는가?’, ‘ 가문은 정확히 어느 시점에 함께 존재했는가?와 같은 질문만으로 접근하면 스베덴보리가 이 계보에서 읽는 핵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 계보들은 태고교회 안에서 나타난 교리적, 교회적 상태들의 계승과 파생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가인 계열과 계열이 나란히 이어진다고 말할 때에도 두 실제 가문의 정확한 역사적 병행 연표를 우리가 알고 있다는 뜻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각각의 계보를 통하여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와 그 흐름을 보여 주며, AC.339는 그 계보를 무엇보다 그러한 영적 발생 관계로 읽도록 가르칩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영적 원리는 대개 혼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받아들여지면 그것으로부터 또 다른 선한 생각과 애정이 생겨나고, 그것들은 다시 선한 말과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의 거짓된 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정당화하기 시작하면 그 거짓을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이 필요해지고, 그것이 다시 다른 악과 거짓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잉태하고 낳는것입니다. 이것은 AC.339의 직접적인 역사 서술이라기보다, 이 번호가 제시하는 발생과 파생의 원리를 우리 자신의 영적 삶에 적용해 본 것입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반대로 악과 거짓은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proprium으로 돌이킬 때 서로 연결되고 증식합니다.

 

바로 이 원리가 가인의 계보를 무겁게 만듭니다. AC.338에서 나타난 시작은 겉으로 보면 미세해 보입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하고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AC.339가 보여 주는 계보의 원리에 따르면 하나의 교리적 상태는 그 자체로 고립되어 머무르지 않고 다른 상태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다시 그 분리를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교리를 낳고, 그 교리가 다른 왜곡을 낳으며, 그렇게 파생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4의 계보는 바로 이러한 영적 발생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의 작은 분리를 정도는 괜찮다고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 라멕의 상태가 완성되어 있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처음 받아들인 원리 안에 그다음 상태들이 파생될 수 있는 방향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우리 각 사람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생각과 애정은 서로 아무 관계 없이 흩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 삶에서 살아가면 그 진리가 다른 선한 생각과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고, 반대로 하나의 거짓을 허용하고 자기 합리화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거짓을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도 일종의 계보가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창4의 각 인물을 개인의 심리 단계와 기계적으로 일대일 대응시키는 방식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39의 직접적인 대상은 태고교회와 그 교회에 속한 것들의 발생 관계이며,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는 내가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을 낳고 있는가?라는 영적 자기 성찰의 원리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따라서 AC.339는 창4의 낯선 이름들을 읽기 위한 단순한 사전 설명이 아닙니다. 앞으로 가인의 계보를 읽을 때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하나의 중요한 해석 열쇠입니다. 이름을 보면서 단지 사람을 찾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이름으로 의미된 교리적, 교회적 상태를 보고, 출생을 보면서 생물학적 혈통만을 따라가는 데 머물지 않고 무엇이 무엇으로부터 생겨났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39를 읽고 난 뒤 창4의 계보 앞에서 계속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부터 태어났으며, 무엇을 낳고 있는가?이 질문을 붙들고 가인의 계보를 읽으면 창4는 더 이상 낯선 고대 이름들의 목록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의 교회적 상태가 다른 상태를 낳고, 그 상태가 다시 또 다른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계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우리 안에서 지금 어떤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는 어떤 거짓을 허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앞으로 무엇을 낳게될지를 주님 앞에서 살피게 됩니다.

 

 

 

AC.340, 창4:1,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4:1) AC.340‘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I have gotten a man, Jehov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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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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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가인의 분리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자체로 하나의 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이미 그 분리가 장차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창4의 흐름을 따라가면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그 분리가 처음 나타났을 때 강제로라도 막지 않으셨을까요?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그것을 방치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섭리 이해에서 주님은 인간이 악과 거짓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사람이 돌이킬 수 있도록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다만 그 모든 일을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하십니다.

 

따라서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방식으로 막지 않으셨다고 대답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인간이 주님과 결합하려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제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사람의 행동을 외적으로 통제할 수는 있어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만일 인간이 잘못된 선택을 전혀 할 수 없도록 의지와 사고가 강제된다면, 겉으로는 질서 있는 행동이 나타날지 몰라도 자유로운 사랑의 결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허용의 원리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악을 허용하신다는 것은 악을 원하시거나 승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는 가운데 그 자유가 잘못 사용되는 것까지 허용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허용방치는 전혀 다릅니다. 방치는 인간을 내버려 두는 것이지만, 주님의 허용 안에는 끊임없는 억제와 인도와 보존이 함께 있습니다. 사람이 악으로 기울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악이 가능한 한 더 멀리 진행되지 않도록 억제하시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돌아설 수 있는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4의 가인 이야기에서도 주님께서는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가인이 분하여 안색이 변했을 때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가인이 더 멀리 나아가기 전에 다시 선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AC.328에 따르면 체어리티는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삼아 체어리티보다 높아지지만 않는다면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신앙을 버려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이 다시 선과 체어리티와 올바른 관계 안에 놓이도록 부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지막 선택을 강제로 빼앗지 않으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내면을 강제로 조종하시거나 다른 생각밖에는 할 수 없도록 만드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유가 거듭남과 결합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을 보여 주시고 진리로 깨우치시며, 악을 억제하시고 내적으로 경고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마지막 자리까지 대신 차지하지는 않으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유를 잘못 사용한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실패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가인은 결국 아벨을 죽이고, 속뜻에서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인간 편에서 보면 매우 깊은 실패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표를 주십니다. AC.330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것이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보존된 것은 분리된 신앙의 잘못된 상태 자체가 승인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장차 선한 목적에 사용하실 수 있는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방식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잘못되면 그것을 통째로 없애 버리고 싶어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왜곡한 것 가운데에서도 장차 구원의 질서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은 잘못되었지만 신앙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그것을 사랑에서 떼어 냈지만 주님께서는 신앙이라는 수단 자체를 버리지 않으시고, 이후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될 수 있도록 보존하십니다.

 

이 점은 바로 뒤의 셋과 에노스에서도 보게 됩니다. AC.335에서는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시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고 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신앙을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신앙 자체를 폐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 넓은 이후의 AC 문맥에서는 태고교회의 종말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마침내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도록 준비하시는 흐름도 나타납니다. 다만 이것은 AC.338 한 번호가 직접 말하는 내용이라기보다 이후 AC에서 더 넓게 전개되는 섭리의 맥락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실패와 주님의 섭리는 동시에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유를 오용하여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빼앗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한 악을 억제하시고,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새로운 회복의 길을 준비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인간에게 잘못 선택할 있는 자유까지 허용하셨는가?라는 더 깊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유가 주님과의 결합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유롭게 사랑하려면 반드시 실제로 악을 행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유란 악을 행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인간이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악을 선택할 가능성은 자유의 오용에서 따라오는 것이지 주님께서 원하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섭리는 인간이 한 번도 잘못 선택하지 못하도록 모든 길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와 이성을 보존하면서 선으로 이끄시고, 악을 억제하시며, 잘못 선택했을 때에도 가능한 한 회개의 길을 열어 두십니다. 이것이 허용방치의 차이입니다. 방치는 인간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섭리는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한순간도 구원의 목적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인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억지로 없애지는 않으시지만, 동시에 그가 다시 선으로 돌아설 길도 계속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섭리를 강제로 개입하지 않으셨는가?라는 기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깊은 섭리는 때로 인간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안에서 선을 향해 이끄시고, 인간의 실패 가운데에서도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여 다시 구원의 질서 안에서 사용하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사랑과 신앙을 분리할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 자체를 선이라고 하시지 않으면서도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시고,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될 길을 마련하십니다. 인간의 실패는 실제이지만, 그 실패보다 주님의 섭리가 더 깊습니다.

 

 

 

AC.338,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AC.338-340)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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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 심화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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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8 심화

1. ‘가인은 처음부터 사랑에서 완전히 분리된 신앙이었나?

 

AC.338을 읽다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앞의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분명히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설명했는데,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번째 자손, 처음 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가인은 신앙 자체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먼저 태고교회에도 신앙은 있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신앙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떤 교리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방식의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나란히 서 있는 별개의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알았습니다. AC.337에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설명한 것도 바로 이 뜻입니다.

 

그런데 AC.338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에게서 신앙이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식되고 인정되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갑자기 신앙을 버렸거나 처음부터 거짓된 신앙을 만들어 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본래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을 사랑과 별개로 성립할 수 있는 하나의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8에서 가인=신앙이라고 한 말과 앞에서 가인=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고 한 말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가인은 참된 것인 신앙을 붙들고 있지만, 그 신앙을 본래의 사랑의 질서에서 떼어 독립적인 것으로 세우는 교리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이 처음에는 완전히 정상적인 신앙이었다가 나중에 분리된 신앙으로 변했다고 너무 선명하게 시간적 단계를 나누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338의 바로 이 시점에서 이미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으로 인정하는 분리의 성격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분리의 결과가 처음부터 모두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4의 뒤를 따라가면 신앙이 점차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질을 드러낸다는 질서를 거부하며,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진행됩니다. 따라서 AC.338은 분리의 원리가 처음 드러나는 지점을 보여 주고, 후속 본문은 그 원리가 어디까지 발전하는지를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이 구별분리의 차이입니다. 신앙과 사랑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는 오히려 그렇게 해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신앙이고 무엇이 체어리티인지, 진리와 선이 어떻게 관계하는지 분명히 배우는 것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구별된 신앙을 사랑 없이도 참된 신앙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는 것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전자는 이해를 위한 구별이지만 후자는 생명의 질서를 깨뜨리는 분리입니다.

 

부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 차이를 조금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로 깊이 사랑하는 부부에게 배려와 존중과 신실함의 원칙은 사랑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그 원칙을 글로 정리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 자체가 사랑을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서로 사랑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원칙들만 정확히 지키면 좋은 부부다라고 생각한다면 원칙은 사랑을 섬기는 자리에서 벗어나 사랑을 대신하기 시작합니다. 원칙 자체가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참된 것이 본래의 관계에서 분리된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중요하다’, ‘교리는 정확해야 한다’, ‘진리와 거짓을 분별해야 한다는 말 자체는 모두 옳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과 교리와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만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가인의 질서가 나타납니다.

 

이 때문에 가인의 문제는 매우 미묘합니다.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참된 것 하나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로 높이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단 역시 반드시 처음부터 모든 진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것 하나를 지나치게 높이고 다른 선과 진리와의 살아 있는 결합을 끊을 때에도 왜곡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37오늘날에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는 설명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후대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 앞서며, 주님께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리를 배우고 신앙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 자체를 가인의 상태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먼저 나타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채 독립적인 최종 목적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진리를 배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진리는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38의 핵심은 가인은 신앙이다가인은 분리된 신앙이다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하지만, 바로 그 신앙을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자체로 독립된 것으로 인정한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리고 창4의 뒤는 그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독립된 것으로 바라보았고, 나중에는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338은 분리가 처음 드러나는 아주 중요한 지점입니다. 신앙 자체는 참된 것이지만, 그것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 살아 있는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지만, 사랑에서 떨어져 자기 자신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신앙은 가인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의 신앙을 쉽게 가인이라고 판정하기보다 먼저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진리를 더 알수록 주님 앞에서 더 겸손해지고, 악을 더 잘 보고 피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한다면 그 진리는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있습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자기 옳음을 증명하고 다른 사람을 낮추며, 사랑보다 교리적 승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면 우리는 신앙이 그 생명의 자리에서 분리되기 시작하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가인의 이야기는 남을 정죄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살피게 하는 말씀입니다.

 

 

 

AC.338 심화 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 심화2. 주님께서는 왜 ‘가인의 분리’를 처음부터 막지 않으셨을까? AC.338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따로 떼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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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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