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에노스를낳았다’(begatEnosh)는것은그들로부터‘에노스’(Enosh)라하는또하나의교회가이어져나왔음을의미하는데,이는이장에서이름들이교회들외에다른어떤것도의미하지않는다는사실로부터분명합니다.That he “begat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called “Enos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n this chapter the names signify nothing else than churches.
해설
AC.498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창5전체를 읽는 데 결정적인 해석 원리를 다시 못 박습니다. ‘이장에서이름들이교회들외에다른어떤것도의미하지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말씀의 속뜻은 한 개인에게서 한 개인이 태어났다는 족보상의 사건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셋’이라 하는 교회로부터 ‘에노스’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는 데 있습니다. 앞서 AC.470에서 제시된 창5의 기본 원리가 이제 실제 계보의 각 이름에 계속 적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낳았다’(begat)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어떤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다’는 것은 단순히 앞 교회가 끝난 뒤 전혀 무관한 새 교회가 등장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연속성이 있듯이, 뒤의 교회는 앞의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물려받습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로부터 천적 성격을 이어받으면서도 그 퍼셉션의 상태에서는 차이가 있었던 것처럼, 에노스 역시 셋으로부터 이어져 나왔으면서 셋과는 구별되는 교회적 상태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창5의 ‘낳음’에는 ‘계승’과 ‘변화’라는 두 의미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497과 연결해서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본질적인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합니다. 그렇다면 창5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교회가 차례차례 생겨났다는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로부터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가 어떻게 조금씩 달라져 갔는지를 보여 주는 연속적인 역사입니다. ‘셋이에노스를낳았다’는 짧은 한 문장 안에도 이전 교회로부터의 계승과 동시에 새로운 상태로의 변화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이름들이교회들을의미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창5의 이름들을 해석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이름들은 속뜻에서 각각 하나의 교회 또는 교회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앞으로 각 이름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이사람에게무슨일이일어났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더 본질적으로는 ‘이이름으로표현된교회의상태는어떠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읽을 때 창5의 반복적인 족보 형식이 교회의 내적 역사를 담은 말씀으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다만 ‘에노스’라는 이름이 교회를 뜻한다고 해서 그 교회의 구체적인 성격까지 AC.498하나만으로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은 우선 ‘에노스가하나의교회였다’는 해석의 틀을 확정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의 어떠함은 이어지는 글들을 통해 더 밝혀집니다. 이것은 AC를 읽을 때 중요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한 문장이나 한 글에 이후의 내용을 미리 모두 집어넣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표현을 하나씩 열어 가는 순서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승의 흐름에는 주님의 섭리라는 더 큰 배경이 있습니다. 교회의 상태가 이전보다 낮아지고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곧바로 그 교회를 끊어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교회에서 다음 교회가 이어져 나오도록 하시면서,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따라 선과 진리를 계속 보존하십니다.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짧은 계보는 그래서 단순한 쇠퇴의 기록만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가 변하는 가운데서도 교회의 연속성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AC.498해설)
‘셋’(Seth)이그부모인태고교회보다는덜천적인두번째교회이면서도,여전히가장오래된교회들가운데하나였다는것은위에서셋에관하여말한것(3절)으로부터알수있습니다.That “Seth”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may appear from what was said above concerning Seth (verse 3).
아담은백삼십세에자기의모양곧자기의형상과같은아들을낳아이름을셋이라하였고(창5:3)
앞에서말한것처럼교회의경우는시간이흐르고세대가지나면서앞서언급한원인으로인해본질적인것들에있어점차감소해간다는것입니다.The case with churches, as we have said, is that by degrees, and in process of time, they decrease as to essentials, owing to the cause above mentioned.
해설
AC.497은 바로 앞의 AC.496에서 ‘셋은태고교회보다덜천적이었다’고 한 이유를 한 걸음 더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5:3에서 다룬 셋에 관한 설명을 다시 가리킵니다. 특히 AC.481-485에서 셋은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교회의 계열에 속하면서도, 그 퍼셉션의 상태가 태고교회 자체와는 달랐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덜천적’이라는 말은 셋 교회가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천적 질서 안에서도 그 본질적인 생명과 퍼셉션의 충만함이 이전보다 감소했다는 뜻입니다.
이 글에서 핵심이 되는 표현은 ‘본질적인것들에있어점차감소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먼저 외형이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도 남아 있을 수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으며,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언어와 형식도 상당 기간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어야 할 본질,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그리고 그 사랑과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생명이 약해지면 교회는 겉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점차 이전 상태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경우에는 특히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던 천적 생명이 그 본질적인 것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서언급한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앞 절 하나만을 가리키기보다, 앞에서 설명해 온 교회 쇠퇴의 원리를 배경으로 합니다. 특히 AC.494에서는 유전적 악이 세대를 거치며 누적되고, 사람들이 실제적인 악(actualevil)을 자기 삶으로 만들어 갈 때 그것이 다시 후대의 유전적 성향에 더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대를 거치면서 쇠퇴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간 자체가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악을 실제 삶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반복되고 굳어지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점차 약해지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부모인태고교회’라는 표현도 더욱 의미 있게 만듭니다. 자녀가 부모에게서 생명을 이어받으면서도 부모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셋 교회 역시 태고교회로부터 그 천적 성격을 이어받았지만 동일한 정도의 퍼셉션을 지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앞으로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이름만 바뀌는 기록이 아니라, 같은 큰 계열 안에서 교회의 내적 상태가 세대를 따라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후대일수록무조건더악하다’는 식의 단순한 역사 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글이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에서 시작하여 지금 다루고 있는 일련의 교회들이 그 최초의 천적 상태로부터 점차 멀어져 간 특정한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쇠퇴 속에서도 주님은 교회를 단번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앞선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지도록 하십니다. 셋으로부터 에노스가 나오고, 다시 그 뒤를 이어 여러 교회가 계속되는 창5의 구조 자체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497은 교회의 생명을 판단하는 기준을 외적인 규모나 제도의 지속에 두지 않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교회의 진정한 생명은 ‘본질적인것들’이 살아 있느냐에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 있고, 신앙의 진리가 그 사랑과 결합되어 삶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은 오랫동안 남아 있으면서도 본질적인 것은 감소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은 쇠퇴하는 시대 속에서도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그것으로 다음 상태를 준비하십니다. 창5의 계보는 바로 그러한 쇠퇴와 보존, 그리고 계승의 역사를 함께 보여 주고 있습니다. (AC.497해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창5:6)
AC.496
‘셋’(Seth)은앞에서살펴본것처럼두번째교회로서,그부모인태고교회보다는덜천적이었지만,여전히가장오래된교회들가운데하나였습니다.그가‘백오세를살았다’(livedahundredandfiveyears)는것은앞에서와같이때와상태들을의미하며,그가‘에노스를낳았다’(begatEnosh)는것은그들로부터‘에노스’(Enosh)라하는또하나의교회가이어져나왔음을의미합니다.“Seth,” as was observed,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that he “livedahundredandfiveyears” signifies, as before, times and states; that he “begat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that was called “Enosh.”
해설
AC.496은 창5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아주 간결하게 확인해 주는 글입니다. 창5:6의 문자적 본문은 셋이라는 사람이 백오 세에 에노스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족보 기록이지만, 속뜻에서는 ‘셋→에노스’가 한 개인에게서 다른 개인이 태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로부터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나온 과정입니다. AC.470에서 이미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이아니라실제적인것들’을 뜻한다고 밝힌 원리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적용됩니다. 따라서 창5의 족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태고교회 이후 여러 교회가 어떤 상태를 거쳐 차례로 이어졌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셋을 ‘두번째교회’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부모인태고교회보다는덜천적’이라고 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창5의 계승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상태가 그대로 복제되어 다음 교회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후대의 교회로 갈수록 그 상태에는 차이가 생겼습니다. 앞서 AC.481-485에서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닮았지만 퍼셉션의 차이로 구별되는 교회였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두번째교회’라는 말에는 시간적인 후대라는 뜻뿐 아니라, 태고교회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적 상태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셋 교회를 이미 태고교회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교회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태고교회보다는덜천적’이라고 하면서도 곧이어 ‘가장오래된교회들가운데하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천적 교회의 성격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태고교회의 기본 질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생생함과 완전함이 최초의 태고교회와 같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백오세를살았다’(livedahundredandfiveyears)는 표현 역시 실제 연령 자체가 속뜻의 중심이 아닙니다. AC.482-483과 AC.487-488에서 살펴본 것처럼 ‘해’와 ‘연수’는 교회의 때와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기서 백오 년은 셋 교회가 어떤 상태를 지나 다음 교회인 에노스로 이어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105’라는 수 자체의 세부적인 의미를 풀지 않고, 앞에서 확립한 원칙대로 ‘때와상태들’을 뜻한다고만 밝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숫자의 개별 상응을 억지로 풀기보다는, 창5의 연수가 교회 상태의 지속과 변화를 기록한다는 큰 원리를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에노스를낳았다’(begatEnosh)는 표현은 창5의 ‘낳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한 교회에서 또 하나의 교회가 ‘태어난다’는 것은 앞선 교회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전혀 무관한 것이 새로 생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으면서도 그 교회만의 고유한 상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에노스가 생겼다고 하지 않고, 셋으로부터 ‘또하나의교회가이어져나왔다’고 설명합니다. 창5의 족보는 바로 이러한 교회적 계승의 연속입니다.
이 점에서 AC.496은 앞으로 이어질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의 이름을 읽는 기본 틀을 마련합니다. 각각의 이름은 단순히 족보상의 한 사람을 지나가는 표지가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의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를 읽으면서 중요한 질문은 ‘이사람은누구인가?’에만 머물지 않고, ‘이이름으로나타난교회는앞선교회로부터무엇을이어받았으며,그상태는어떻게달라졌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창5의 긴 족보가 단순한 이름과 연수의 나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가 변해 가는 가운데서도 교회를 이어 가시는 역사가 됩니다. (AC.496해설)
태고교회가어떻게쇠퇴하였는지는퍼셉션(perception)이무엇인지알지못하면이해할수없습니다.태고교회는퍼셉션을가진교회였으며,오늘날에는그러한교회가존재하지않기때문입니다.교회의퍼셉션은그구성원들이천사들처럼무엇이선이고진리인지를주님으로부터퍼셉션하는데있습니다.여기서말하는선과진리는시민사회에서무엇이선이고진리인가하는것이라기보다,주님을향한사랑과주님을믿는신앙의선과진리입니다.삶으로확증되는신앙고백으로부터퍼셉션이무엇인지,그리고그것이존재하는지를알수있습니다.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해설
AC.495는 창5:5의 마지막 해설이면서, 앞으로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앞의 AC.492와 AC.494는 ‘죽었다’는 것이 그 교회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도대체퍼셉션이무엇이기에그것이사라진것을교회의죽음이라고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495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태고교회를 ‘퍼셉션을가진교회’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단지 지식이 많거나 판단력이 뛰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퍼셉션은 ‘무엇이선이고진리인지를주님으로부터퍼셉션하는것’입니다. 다시 말해 외부에서 어떤 교리를 듣고 논증을 거쳐 그것이 옳다고 결론 내리는 것보다 훨씬 내적인 방식으로,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퍼셉션을 ‘천사들처럼’(liketheangels)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퍼셉션을 막연한 직감이나 느낌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왠지이것이맞는것같다’고 느끼는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은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선입견도 매우 강한 확신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의 내용을 ‘주님을향한사랑과주님을믿는신앙의선과진리’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합니다. 퍼셉션의 근원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며, 그 내용 역시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믿는 삶에 관한 선과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또 여기서 시민 사회의 선과 진리를 구별합니다. 이것은 사회생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주로 사회적 규범이나 세상사의 옳고 그름을 알아내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일종의 초자연적인 정보 획득 능력이나 미래를 알아맞히는 능력과도 다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삶으로확증되는신앙고백’(aconfessionoffaiththatisconfirmedbythelife)으로부터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단순한 내적 느낌에 맡겨 두지 않습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과 실제 삶이 서로 일치할 때, 그 삶을 통하여 그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어떠함이 드러납니다. 참된 퍼셉션은 말로만 ‘나는이것이진리라고느낀다’고 주장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선의 삶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됩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가 왜 쇠퇴했는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들의 교회적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데 있었으므로, 사랑의 상태가 변질될수록 퍼셉션 역시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앞의 AC.494에서 설명한 것처럼 악이 반복되고 세대를 거쳐 유전적 악이 증가하면서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가 점차 손상되었습니다. 사랑이 변하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지각도 변합니다.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던 상태가 사라졌을 때, 말씀은 그것을 그 교회가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창5에서 각 교회가 퍼셉션의 차이에 따라 구별된다는 AC.483의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등은 단순히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각각 다른 상태의 교회들을 나타내며, 그 차이의 중심에는 퍼셉션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세대가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에 있던 퍼셉션이 여러 교회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하고 마침내 소멸해 가는지를 따라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그러한교회가존재하지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어떤 진리를 깊이 깨닫거나, 기도 중에 무엇이 옳은지를 강하게 느끼거나, 양심을 통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고 깨닫는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 주님은 주로 말씀의 진리와 신앙, 그리고 그 진리로 형성된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그와 구별되는 천적 교회의 고유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이라는 개념이 오늘날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단지 머릿속에 저장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확증되는신앙고백’을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 삶에서 살아갈수록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나 주장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과 삶을 변화시킵니다.
결국 창5:5의 ‘죽었더라’를 이해하려면 먼저 무엇이 죽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AC.495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고유한 생명이었던 퍼셉션이 사라져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퍼셉션의 본질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의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쇠퇴는 단순한 조직의 쇠퇴나 교리 지식의 감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던 내적 생명의 쇠퇴였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5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는 교회의 죽음이며, 동시에 모든 시대의 교회가 자신의 생명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AC.495해설)
그가‘죽었다’(died)는것이그러한퍼셉션이더이상존재하지않게되었음을의미한다는것은‘죽다’(die)라는말의의미에서분명합니다.곧어떤것이이전에그러했던것과같은상태이기를그치는것입니다.계시록에서는,That he “died” signifies that there was no longer such percep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die,” which is, that a thing ceases to be such as it has been. Thus in John:
라고하였는데,여기서‘어머니’(mother)는교회를의미합니다.앞에서말한것처럼교회는점차쇠퇴하고타락하여처음의온전함을잃게되는데,그주된이유는유전적악의증가입니다.뒤를잇는모든부모는자신이물려받은악에새로운악을더하기때문입니다.부모안의모든실제적인악(actualevil)은일종의본성을띠게되고,그것이자주반복되면그들에게자연스러운것이되어그들의유전적악에더해지며,자녀들에게그리고그렇게후손들에게전달됩니다.이런식으로유전적악은후손들안에서엄청나게증가합니다.이것이사실이라는것은자녀들의악한성향이그조상들의악한성향과아주흡사하다는사실에서분명합니다.우리안에아담으로부터심어졌다고주장되는것외에는유전적악이없다고생각하는사람들의견해는전적으로잘못된것입니다(AC.313참조).진실은모든사람이자신의실제적인죄들(actualsins)로유전적악을만들고,자신이물려받은악들에그것을더하며,이런식으로그것이축적되어모든후손안에남는다는것입니다.그리고그것은주님에의해거듭나고있는사람들에게서만감소합니다.모든교회에서이것이타락의주된원인이며,태고교회에서도그러하였습니다.where “mother” signifies the church. For as we have said, the case with the church is that it decreases and degenerates, and loses its pristine integrity, chiefly by reason of the increase of hereditary evil, for every succeeding parent adds new evil to that which he has inherited. All the actual evil in the parents puts on a kind of nature, and when it often recurs, becomes natural to them, and is added to their hereditary evil, and is transmitted into their children, and so to posterity. In this way the hereditary evil is immensely increased in the descendants. That this is so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vil dispositions of children are exactly like those of their progenitors. Quite false is the opinion of those who think that there is no hereditary evil except that which they allege to have been implanted in us from Adam (see n. 313). The truth is that everyone makes hereditary evil by his own actual sins, and adds it to the evils that he has inherited, and in this way it accumulates, and remains in all the descendants, nor is it abated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In every church this is the principal cause of degeneration, and it was so in the most ancient church.
해설
AC.494는 창5:5의 ‘죽었더라’를 설명하다가 매우 중요한 주제인 ‘유전적악’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죽다’의 속뜻부터 분명히 합니다. 죽음은 ‘어떤것이이전에그러했던것과같은상태이기를그치는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담으로 표상된 태고교회가 ‘죽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육체적 죽음 자체가 속뜻의 중심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상태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계3:1-2의 사데 교회가 좋은 예입니다. ‘살았다하는이름은가졌으나죽은자’라는 말씀은 육체적으로 죽었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교회로서 외적인 이름과 형태는 남아 있지만 그 안의 영적 생명이 쇠퇴한 상태를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남은바죽게된것을굳건하게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죽음과 생명이 한 사람이나 교회의 내적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렘22:26에서 ‘어머니’(mother)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설명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은 교회의 발생과 쇠퇴와 종결을 가족의 출생과 죽음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왜교회가죽어가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그가 제시하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유전적악의증가’입니다. 사람은 앞선 세대로부터 악에 기울어지는 성향을 물려받는데, 거기에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행하고 반복한 악을 더합니다. 반복된 악은 점차 그 사람에게 일종의 본성처럼 자리 잡으며, 이렇게 형성된 것이 다시 후대에 유전적 성향으로 전달된다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세대가 거듭되면서 악에 대한 기울어짐이 누적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전적악’과 ‘실제적인악’(actualevil)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려받은 악은 자신이 직접 행하여 만든 악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여러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실제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그것은 자신의 실제적인 악이 됩니다. 그리고 그 악을 반복하여 삶의 일부로 만들면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유전적 악에 다시 무언가를 더하게 됩니다. AC.494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세대 간 누적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유전적 악을 오직 아담 한 사람의 범죄에서 모든 인류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는 견해를 명시적으로 부정합니다. AC.313에서도 그는 유전적 악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 전해지고 세대를 거치며 축적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을 한 개인이 범한 최초의 죄가 법적 책임의 형태로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에 대한 개인적 죄책 자체라기보다 악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성향이며, 각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그것을 실제 악으로 만들 수도 있고 주님에 의해 거듭나면서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AC.494의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유전적 악은 ‘주님에의해거듭나고있는사람들’에게서 감소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악의 경향을 뿌리째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시면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사람이 악을 악으로 인정하여 물리치고 주님께로 향하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내려온 악의 흐름이 한 사람 안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주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 설명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가 처음부터 갑자기 악한 교회였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매우 깊은 퍼셉션을 가진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악한 방향으로 사용하고 그것을 반복하면서 악의 성향이 누적되었고, 그 결과 후대의 사람들은 앞선 세대보다 더 강한 유전적 악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변질되고 마침내 사라져 간 배경에 이러한 인간의 세대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후대사람은앞선세대보다무조건더악하다’는 단순한 공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94자체가 동시에 거듭남이라는 반대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악이 세대를 따라 축적될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은 각 세대의 각 사람에게 새롭게 역사하시며 그 악의 힘을 감소시키십니다. 인간에게는 유전적 성향이 있지만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상태 안에서 거듭남의 길을 여십니다.
따라서 창5:5의 ‘죽었더라’는 한 교회의 종결을 알리는 짧은 표현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교회가 왜 쇠퇴하는가를 보여 주는 깊은 진단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세대를 지나며 인간의 악이 반복되고 누적되는 가운데 점차 그 처음의 온전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AC.494의 결론은 쇠퇴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누적된 흐름을 거슬러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 역사가 바로 거듭남입니다. ‘죽음’의 역사가 아무리 오래 누적되어도 주님은 그 가운데서 다시 생명으로 향하는 길을 여십니다. (AC.494해설)
‘날들’(days)과‘해들’(years)이시대들과상태들을의미한다는것은더설명할필요가없습니다.다만세상에서는시간들과척도들이반드시있어야하며,그것들은자연의가장바깥차원에있기때문에거기에숫자들이적용될수밖에없다는점만말해두고자합니다.그러나시간들과척도들이말씀에사용될때에는언제나날들과해들의숫자들뿐아니라척도의숫자들까지도,그숫자의의미에따라시간과척도에서추상된의미를갖습니다.이를테면엿새동안일하고일곱째날은거룩하다고한것에대해서는위에서설명하였습니다.또한희년은마흔아홉째해마다선포하여쉰째해에지키도록하였고,이스라엘의지파들은열둘이었으며주님의사도들도같은수였고,장로들은일흔이었으며주님의제자들도그와같은수였습니다.이밖에도많은경우에숫자들은그것들이적용된대상에서추상된고유한의미를가지며,이처럼추상될때그숫자들이의미하는것은상태들입니다.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해설
AC.493은 앞의 AC.487에서 시작된 말씀의 숫자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분명하게 합니다. 핵심은 ‘말씀에숫자가나오면시간이나수량은아무의미가없고오직상징적인뜻만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자연계에서는 시간과 척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정합니다. 자연계는 ‘자연의가장바깥차원’(ultimatesofnature)에 있기 때문에 날과 해, 길이와 수량처럼 측정할 수 있는 형태가 필요하고, 거기에 숫자가 붙습니다. 문제는 말씀이 그 자연적인 숫자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담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493에서 중요한 표현은 ‘적용된대상에서추상된’(abstractedlyfromthethingstowhichtheyareapplied)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일곱’이라는 숫자가 날에 붙으면 일곱 날이 되고, 해에 붙으면 일곱 해가 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수에 붙으면 일곱 사람 또는 일곱 사물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에서는 그 외적인 대상에서 숫자를 추상하여 그 숫자 자체가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를 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추상되었을 때 숫자가 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상태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 어떤 숫자가 반복되는 것은 우연한 수치의 일치로만 볼 수 없습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 마흔아홉째 해 뒤에 쉰째 해를 희년으로 지키는 것,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둘이고 주님의 사도도 열둘인 것, 장로가 일흔이고 주님께서 보내신 제자들도 일흔인 것은 서로 전혀 다른 역사적 사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같은 숫자가 서로 다른 대상에 적용되면서도 그 숫자에 고유한 영적 의미를 유지하기 때문에, 말씀 전체 안에서 일정한 질서와 상응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숫자의 의미를 기계적인 암호 풀이로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7은언제나이것,12는언제나저것’이라는 식으로 숫자 하나에 하나의 한국어 뜻을 붙이는 방식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숫자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숫자는 고유한 기본 의미를 지니지만, 실제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는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과 대상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487이 말했듯이 800이나 930같은 합성된 큰 숫자에는 여러 상태와 그 변화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숫자 하나처럼 곧바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이 원리는 창5의 긴 연수들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아담이구백삼십세를살고죽었더라’라는 말씀에서 930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으로는 연수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그 숫자를 자연적인 ‘930년’이라는 시간 단위에서 추상하여 그 안에 담긴 교회의 상태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492가 ‘날들과해들’을 시대와 상태로 설명한 데 이어 AC.493은 그 상태가 말씀의 숫자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우리가 왜 창5의 숫자들을 성급하게 하나씩 해독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AC.487에서 800과 930을 비롯한 뒤의 숫자들에는 너무 많은 상태 변화가 들어 있어 여기서 하나하나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각 숫자의 암호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숫자가 자연적인 시간과 척도를 통하여 영적인 상태를 표현한다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AC.493은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무관한 두 세계가 아니라 상응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음을 숫자의 경우를 통해 보여 줍니다. 자연계에서는 상태가 시간과 척도와 수량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말씀은 바로 그 자연적인 형식을 사용하여 영적인 상태를 담아냅니다. 따라서 말씀의 문자에 기록된 숫자를 무시할 수도 없고, 반대로 문자적인 수량에만 붙잡혀서도 안 됩니다. 문자에 있는 숫자를 존중하면서 그 숫자를 통해 주님께서 어떤 영적 상태와 질서를 나타내시는지를 살피는 것, 이것이 AC.493이 제시하는 말씀의 숫자를 읽는 기본 원리입니다. (AC.493해설)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창5:5)
AC.492
여기서‘날들’(days)과‘해들’(years)은위에서와같이시대들과상태들을의미하며,‘사람이죽음’(man’sdying)은그러한퍼셉션이더이상존재하지않게되었음을의미합니다.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해설
AC.492는 창5:5의 ‘그는구백삼십세를살고죽었더라’라는 말씀의 속뜻을 아주 간결하게 밝힙니다. 앞의 AC.486-488에서 ‘날들’과 ‘해들’이 단순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교회의 시대와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면, 이제 ‘죽었더라’ 역시 한 개인의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를 특징짓던 특정한 내적 상태의 종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교회가없어졌다’고 하지 않고 ‘그러한퍼셉션이더이상존재하지않게되었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창5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을 구별하는 핵심적인 특징이 퍼셉션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AC.483과 AC.491에서 보았듯이 이 교회들은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했으며, 각각의 교회는 그 퍼셉션의 어떠함에 따라 서로 구별되었습니다. 따라서 한 교회의 ‘죽음’은 그 교회를 그 교회 되게 하던 고유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창5의 반복되는 ‘죽었더라’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사람이 오랜 세월을 살다가 죽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족보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한 교회의 상태가 일정한 과정을 거친 뒤 끝나고 다른 교회적 상태로 넘어가는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낳았으며’가 교회의 계승과 그 안에서 산출된 선과 진리를 보여 준다면, ‘죽었더라’는 그 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이 마침내 소멸한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음’을 곧바로 모든 선과 진리의 완전한 소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한 교회의 특정한 퍼셉션이 끝났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491이 태고교회를 ‘다른모든후대교회들의으뜸이며어버이인교회’라고 한 것처럼, 한 교회의 상태가 끝나면서도 그로부터 이어지는 것이 다음 교회에 전달됩니다. 창5의 ‘낳음’과 ‘죽음’이 함께 기록되는 것은 바로 이 계승과 변화의 두 측면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죽음’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육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말씀은 사람과 교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생명이 살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태고교회의 경우 그 생명의 대표적인 형태가 퍼셉션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지식이나 특별한 능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를 특징짓던 주님과의 내적 교통 방식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짧은 글은 앞으로 창5에서 반복될 ‘죽었더라’를 단순한 족보의 마침표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 변화로 읽도록 준비시킵니다. 교회에는 시작과 성장뿐 아니라 쇠퇴와 종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주님은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고 선과 진리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는 교회들이 단순히 생겨났다 사라지는 기록이라기보다, 한 상태가 끝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다음 상태를 이어 가시는 섭리의 역사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492해설)
이장에서‘아들들’(sons)과‘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같은것들을의미합니다.그러나교회가어떠한가에따라‘아들들과딸들’(sonsanddaughters)도그러하며,다시말해선들과진리들도그러합니다.여기서말하는진리들과선들은분명하게퍼셉션된것들인데,이는그것들이태고교회,곧다른모든후대교회들의으뜸이며어버이인교회에관하여서술되고있기때문입니다.The same things are signified by “sons” and “daughters” in this chapter (verses 4, 7, 10, 13, 16, 19, 26, 30), but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sonsanddaughters,” that is, such are the goods and truths; the truths and goods here spoken of are such as were distinctly perceived, because they are predicate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
해설
AC.491은 AC.486-490에서 설명한 ‘아들들과딸들’의 의미를 창5전체에 적용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덧붙입니다.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교회에서 그 진리와 선의 질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어떠한가에따라아들들과딸들도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즉 어떤 교회가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교회가 받아들이고 산출하는 진리와 선의 어떠함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상응을 기계적인 대응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아들=진리’, ‘딸=선’이라는 기본적인 상응은 같더라도, 그 진리가 어떤 진리이며 그 선이 어떤 선인지는 그것들이 속한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아들’이라는 표현도 태고교회에 관하여 사용될 때와 후대의 다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될 때 그 진리의 내적 질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어의 기본 의미뿐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교회적 상태와 문맥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은 ‘분명하게퍼셉션된것들’입니다. 이 표현은 창5초반부터 계속 강조되어 온 태고교회의 독특한 성격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선과 진리는 주로 외부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검토하여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 교회의 ‘아들들과딸들’은 바로 그러한 퍼셉션에서 나온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83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 여러 교회가 주로 퍼셉션의 차이에 따라 구별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교회가 낳은 ‘아들들과딸들’ 역시 똑같을 수 없습니다. 각 교회의 퍼셉션이 달랐으므로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와 선의 어떠함도 달랐습니다. 창5에 같은 표현인 ‘아들들과딸들을낳았으며’가 계속 반복되지만, 속뜻에서는 매번 똑같은 진리와 선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 상태에 고유한 진리와 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다른모든후대교회들의으뜸이며어버이인교회’(theprincipalandparentofalltheotherandsucceedingchurches)라고 합니다. ‘으뜸’이라는 말은 태고교회가 최초이면서 가장 근원적인 교회였음을, ‘어버이’라는 말은 이후의 교회들이 그 교회로부터 이어져 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5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낳음’의 언어로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앞선 교회의 선과 진리가 후대 교회에 전해지고, 후대 교회는 그것을 자신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형태의 선과 진리를 산출하는 교회의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지금 우리가 창5를 읽으며 계속 확인하고 있는 중요한 원리도 있습니다. ‘계승’은 ‘동일함’이 아닙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았듯이, 이후의 교회들도 앞선 교회에서 이어지지만 각각 다른 퍼셉션과 다른 상태를 갖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동일한 교회가 이름만 바꾸어 계속되는 과정이라기보다, 앞선 교회로부터 받은 것을 다음 교회가 자신의 상태에 따라 이어받으면서 선과 진리의 어떠함도 함께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가어떠한가에따라아들들과딸들도그러하다’는 AC.491의 짧은 문장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교회의 참된 상태는 이름이나 외적 형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교회 안에서 어떤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어떤 선이 살아 움직이는가, 그리고 그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교회의 내적 어떠함은 결국 그 교회가 ‘낳는’ 진리와 선의 어떠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5:4의 ‘아들들과딸들을낳았으며’라는 짧은 표현 안에는 태고교회의 풍성한 영적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낳은 것은 단순한 후손이 아니라 분명하게 퍼셉션된 진리와 선이었으며, 그 진리와 선은 다시 후대 교회들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들이 태고교회로부터 점차 멀어지면서 퍼셉션의 상태가 달라지는 만큼 그들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선의 질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창5의 반복되는 ‘아들들과딸들’을 단순한 족보의 반복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과 계승의 역사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491해설)
AC.490은 앞의 AC.489에서 ‘아들들은진리,딸들은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한 것 가운데 특별히 ‘딸들’이 왜 선을 의미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글은 짧지만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드러냅니다. 말씀에서 ‘딸’은 단순히 여성인 자녀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과 신앙에서 비롯되는 선, 더 나아가 그러한 선을 지닌 교회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45편에서 왕의 딸과 왕후가 금과 아름다운 옷으로 단장한 모습은 단순히 왕궁의 화려함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AC.490은 이를 ‘사랑과신앙의선과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아름다움이 선과 함께 언급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인 아름다움은 겉모습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진리를 통하여 드러날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의복과 금과 아름다움으로 단장한 딸의 모습은 교회 안의 선이 진리와 함께 아름답게 나타나는 모습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그러므로교회들도선들로말미암아딸들이라한다’는 설명입니다. ‘시온의딸’(daughterofZion), ‘예루살렘의딸’(daughterofJerusalem)같은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교회가 ‘딸’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단순히 문학적인 의인화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를 참으로 교회 되게 하는 것이 그 안에 있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진리도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 진리가 사랑의 선 안에서 살아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가 됩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문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을 때, 진리는 더 이상 본래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딸’이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진리가 궁극적으로 사랑과 선을 섬겨야 한다는 말씀의 질서를 다시 보여 줍니다. ‘아들’과 ‘딸’, 곧 진리와 선은 서로 떨어져 존재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또한 ‘시온의딸’, ‘예루살렘의딸’, ‘두로의딸’, ‘시돈의딸’처럼 어떤 지역이나 도시의 이름에 ‘딸’이 붙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 지역의 여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읽을 수 없는 경우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나 교회에 속한 것을 그 안의 선이라는 측면에서 ‘딸’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딸’이라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문맥에 따라 ‘어떤선이여기서나타나고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창5:4의 ‘아들들과딸들을낳았으며’라는 표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은 단지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을 계속 산출했습니다. AC.489가 ‘아들들’을 진리로 설명했다면 AC.490은 ‘딸들’을 선으로 설명하면서, 특히 그 선이 사랑과 신앙의 선임을 보여 줍니다.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은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데만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선으로 살아나며 계속해서 영적인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AC.490해설)
‘아들들과딸들’(sonsanddaughters)이그들이퍼셉션한진리들과선들을의미하며,특히‘아들들’(sons)은진리들을,‘딸들’(daughters)은선들을의미한다는것은예언서의많은구절에서분명히알수있습니다.말씀에서는옛날에도그러했던것처럼교회의잉태와출생을‘아들들과딸들’이라하기때문입니다.이사야에서는,That by “sonsand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indeed by “sons” truths, and by “daughters” goods,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prophets; for in the Word, as also in olden time,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the church are called “sonsanddaughters,” as in Isaiah:
라고하였습니다.여기서‘이방인의아들들’(sonsofthestranger)은거짓된진리들,곧거짓들을의미하고,‘우리아들들’(oursons)은진리의교리들을,‘우리딸들’(ourdaughters)은선의교리들을의미합니다.where the “sonsofthestranger” signify spurious truths, or falsities; “oursons” signify doctrinals of truth; “ourdaughters,” doctrinals of good.
라고하였습니다.이구절에서‘아들들’은진리들을,‘딸들’은선들을의미하고,‘맹인들’(blind)은진리를보게될사람들을,‘귀먹은자들’(deaf)은진리에순종하게될사람들을의미합니다.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daughters,” goods; the “blind,” those who would see truths; and the “deaf,” those who would obey them.
이라고하였습니다.여기서‘아들들과딸들’은진리들과선들을의미합니다.‘자녀들’(children)과‘아들들’(sons)이진리들을의미한다는것은이사야에서분명히알수있습니다.where “sons” and “daughters” signify truths and goods. That “children” and “sons” signify truths is plain from Isaiah:
라고하였습니다.여기서‘야곱의거룩한이,이스라엘의하나님’(holyoneofJacob, theGodofIsrael)은주님을의미하고,‘자녀들’은거듭난사람들,곧선과진리를이해하는사람들을의미하는데,이는실제로그구절에서설명되어있습니다.where the “holyoneofJacob,theGodofIsrael,” signifies the Lord; “children” signify the regenerate, who have the understanding of good and truth, as is indeed explained.
라고하였습니다.여기서‘홀로된여인의아들들’(sonsofthedesolate)은초대교회,곧이방인들의교회에속한진리들을의미하고,‘남편있는여인의아들들’(sonsofthemarriedwife)은유대교회에속한진리들을의미합니다.where the “sonsofthedesolate” signify the truths of the primitive church, or that of the Gentiles; the “sonsofthemarriedwife,” the truths of the Jewish church.
라고하였습니다.이는사랑에서나오는신앙의진리들을의미합니다.signifying the truths of the faith of love.
해설
AC.489는 AC.486에서 짧게 제시했던 ‘아들들은진리,딸들은선’이라는 상응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입증합니다. 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단순히 ‘아들=진리,딸=선’이라는 대응표를 하나 더 익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첫 문단의 ‘교회의잉태와출생을아들들과딸들이라한다’는 설명이 오히려 이 글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교회가 ‘잉태하고낳는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진리와 선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의 창5:3에서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 것으로 표현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자연적 생명에서는 부모에게서 자녀가 태어나지만, 영적 생명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인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새로운 선과 진리가 생겨납니다. 따라서 창5:4의 ‘아들들과딸들을낳았으며’라는 표현은 단순히 아담에게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녀들이 더 있었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계속해서 진리와 선이 산출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AC.486과 연결하여 이 진리와 선이 그들이 ‘퍼셉션한’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 진리와 선은 단순히 외부에서 배우고 기억하여 보유하는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앞의 AC.483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교회들을 구별하는 주된 특징 자체가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했고, 그렇게 받아들여진 진리와 선이 그 교회의 ‘아들들과딸들’이 되었습니다.
사60:3-5가 좋은 예입니다. 문자에서는 흩어졌던 아들들과 딸들이 돌아오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교회 안으로 진리들과 선들이 모여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들들은먼곳에서오고딸들은안기어온다’는 것은 단순한 가족의 재회가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실 때 진리와 선이 다시 풍성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교회가 살아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시144편의 ‘이방인의아들들’은 거짓된 진리들, 곧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아들’이라는 말 자체가 언제나 참된 진리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보여 줍니다. 무엇으로부터 태어났느냐에 따라 참된 진리가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아들들’은 진리의 교리들을 의미하지만 ‘이방인의아들들’은 거짓을 의미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전체 문맥과 그 근원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사43:6, 8에서 ‘아들들’과 ‘딸들’이 돌아오는 것과 함께 ‘맹인’이 보고 ‘귀먹은자’가 듣게 되는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 회복될 때 그는 비로소 영적으로 보기 시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보는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과 연결되고, ‘듣는것’은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아들들과 딸들의 귀환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의 질서가 회복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54:1의 ‘홀로된여인의아들들’과 ‘남편있는여인의아들들’은 ‘아들’이 실제 혈육의 자녀를 넘어 교회에 속한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를 초대교회, 곧 이방인들의 교회에 속한 진리로, 후자를 유대교회에 속한 진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어떤 여인의 자녀가 많아진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그 교회 안에서 진리가 풍성해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창5의 족보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셋, 에노스, 게난 등의 이름이 각각 교회를 나타내며, 그 연수는 그 교회의 상태와 상태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AC.489는 그 교회들이 ‘아들들과딸들을낳았다’는 반복되는 표현까지 열어 줍니다. ‘이름’은 교회를, ‘날들과해들’은 그 교회의 상태와 변화를, ‘아들들과딸들’은 그 교회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을 나타냅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놓이면 창5의 족보는 단순한 인명과 수명의 목록이 아니라 교회가 이어지고 변화하며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계속 산출되는 영적 역사가 됩니다.
무엇보다 ‘교회의출생’이라는 표현은 진리와 선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영적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선을 생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으로 결합될 때 비로소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창5의 ‘아들들과딸들을낳았다’는 반복되는 말은 태고교회의 생명력이 단순히 오래 존속했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그 안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영적 결실을 맺었다는 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489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