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합니다.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called “Enos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n this chapter the names signify nothing else than churches.

 

해설

AC.498은 매우 짧은 글이지만, 창5 전체를 읽는 데 결정적인 해석 원리를 다시 못 박습니다. ‘이 장에서 이름들이 교회들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말씀의 속뜻은 한 개인에게서 한 개인이 태어났다는 족보상의 사건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셋’이라 하는 교회로부터 ‘에노스’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는 데 있습니다. 앞서 AC.470에서 제시된 창5의 기본 원리가 이제 실제 계보의 각 이름에 계속 적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낳았다’(begat)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어떤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다’는 것은 단순히 앞 교회가 끝난 뒤 전혀 무관한 새 교회가 등장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연속성이 있듯이, 뒤의 교회는 앞의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물려받습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로부터 천적 성격을 이어받으면서도 그 퍼셉션의 상태에서는 차이가 있었던 것처럼, 에노스 역시 셋으로부터 이어져 나왔으면서 셋과는 구별되는 교회적 상태를 지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창5의 ‘낳음’에는 ‘계승’과 ‘변화’라는 두 의미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497과 연결해서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합니다. 그렇다면 창5의 계보는 단순히 여러 교회가 차례차례 생겨났다는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로부터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가 어떻게 조금씩 달라져 갔는지를 보여 주는 연속적인 역사입니다. ‘셋이 에노스를 낳았다’는 짧은 한 문장 안에도 이전 교회로부터의 계승과 동시에 새로운 상태로의 변화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이름들이 교회들을 의미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창5의 이름들을 해석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이름들은 속뜻에서 각각 하나의 교회 또는 교회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앞으로 각 이름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더 본질적으로는 ‘이 이름으로 표현된 교회의 상태는 어떠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읽을 때 창5의 반복적인 족보 형식이 교회의 내적 역사를 담은 말씀으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다만 ‘에노스’라는 이름이 교회를 뜻한다고 해서 그 교회의 구체적인 성격까지 AC.498 하나만으로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은 우선 ‘에노스가 하나의 교회였다’는 해석의 틀을 확정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의 어떠함은 이어지는 글들을 통해 더 밝혀집니다. 이것은 AC를 읽을 때 중요한 태도이기도 합니다. 한 문장이나 한 글에 이후의 내용을 미리 모두 집어넣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표현을 하나씩 열어 가는 순서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승의 흐름에는 주님의 섭리라는 더 큰 배경이 있습니다. 교회의 상태가 이전보다 낮아지고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곧바로 그 교회를 끊어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한 교회에서 다음 교회가 이어져 나오도록 하시면서,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따라 선과 진리를 계속 보존하십니다. 셋에서 에노스로 이어지는 짧은 계보는 그래서 단순한 쇠퇴의 기록만이 아니라, 인간의 상태가 변하는 가운데서도 교회의 연속성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AC.498 해설)

 

 

 

창5:6, AC.497, ‘시간이 흐르며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하는 교회’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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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

‘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말한 것(3절)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That “Seth”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may appear from what was said above concerning Seth (verse 3).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의 경우는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지나면서 앞서 언급한 원인으로 인해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해 간다는 것입니다. The case with churches, as we have said, is that by degrees, and in process of time, they decrease as to essentials, owing to the cause above mentioned.

 

해설

AC.497은 바로 앞의 AC.496에서 ‘셋은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었다’고 한 이유를 한 걸음 더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5:3에서 다룬 셋에 관한 설명을 다시 가리킵니다. 특히 AC.481-485에서 셋은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교회의 계열에 속하면서도, 그 퍼셉션의 상태가 태고교회 자체와는 달랐음을 살펴보았습니다. 따라서 ‘덜 천적’이라는 말은 셋 교회가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천적 질서 안에서도 그 본질적인 생명과 퍼셉션의 충만함이 이전보다 감소했다는 뜻입니다.

 

이 글에서 핵심이 되는 표현은 ‘본질적인 것들에 있어 점차 감소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먼저 외형이 사라지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도 남아 있을 수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으며, 앞선 세대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언어와 형식도 상당 기간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어야 할 본질,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그리고 그 사랑과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생명이 약해지면 교회는 겉모습을 유지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점차 이전 상태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경우에는 특히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던 천적 생명이 그 본질적인 것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서 언급한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앞 절 하나만을 가리키기보다, 앞에서 설명해 온 교회 쇠퇴의 원리를 배경으로 합니다. 특히 AC.494에서는 유전적 악이 세대를 거치며 누적되고, 사람들이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을 자기 삶으로 만들어 갈 때 그것이 다시 후대의 유전적 성향에 더해진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대를 거치면서 쇠퇴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오래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간 자체가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악을 실제 삶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반복되고 굳어지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점차 약해지는 것입니다.

 

이 점은 ‘부모인 태고교회’라는 표현도 더욱 의미 있게 만듭니다. 자녀가 부모에게서 생명을 이어받으면서도 부모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셋 교회 역시 태고교회로부터 그 천적 성격을 이어받았지만 동일한 정도의 퍼셉션을 지니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앞으로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이름만 바뀌는 기록이 아니라, 같은 큰 계열 안에서 교회의 내적 상태가 세대를 따라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은 ‘후대일수록 무조건 더 악하다’는 식의 단순한 역사 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글이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에서 시작하여 지금 다루고 있는 일련의 교회들이 그 최초의 천적 상태로부터 점차 멀어져 간 특정한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쇠퇴 속에서도 주님은 교회를 단번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앞선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이어지도록 하십니다. 셋으로부터 에노스가 나오고, 다시 그 뒤를 이어 여러 교회가 계속되는 창5의 구조 자체가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497은 교회의 생명을 판단하는 기준을 외적인 규모나 제도의 지속에 두지 않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교회의 진정한 생명은 ‘본질적인 것들’이 살아 있느냐에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살아 있고, 신앙의 진리가 그 사랑과 결합되어 삶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은 오랫동안 남아 있으면서도 본질적인 것은 감소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은 쇠퇴하는 시대 속에서도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그것으로 다음 상태를 준비하십니다. 창5의 계보는 바로 그러한 쇠퇴와 보존, 그리고 계승의 역사를 함께 보여 주고 있습니다. (AC.497 해설)

 

 

 

창5:6, AC.498, ‘셋으로부터 이어져 나온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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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6, ‘셋으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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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

‘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가 ‘백오 세를 살았다’(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때와 상태들을 의미하며,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Seth,” as was observed,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that he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signifies, as before, times and states;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that was called “Enosh.”

 

해설

AC.496은 창5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아주 간결하게 확인해 주는 글입니다. 창5:6의 문자적 본문은 셋이라는 사람이 백오 세에 에노스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족보 기록이지만, 속뜻에서는 ‘셋 → 에노스’가 한 개인에게서 다른 개인이 태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로부터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나온 과정입니다. AC.470에서 이미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한다고 밝힌 원리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적용됩니다. 따라서 창5의 족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태고교회 이후 여러 교회가 어떤 상태를 거쳐 차례로 이어졌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셋을 ‘두 번째 교회’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라고 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창5의 계승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상태가 그대로 복제되어 다음 교회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후대의 교회로 갈수록 그 상태에는 차이가 생겼습니다. 앞서 AC.481-485에서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닮았지만 퍼셉션의 차이로 구별되는 교회였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교회’라는 말에는 시간적인 후대라는 뜻뿐 아니라, 태고교회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적 상태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셋 교회를 이미 태고교회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교회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라고 하면서도 곧이어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천적 교회의 성격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태고교회의 기본 질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생생함과 완전함이 최초의 태고교회와 같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백오 세를 살았다’(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는 표현 역시 실제 연령 자체가 속뜻의 중심이 아닙니다. AC.482-483과 AC.487-488에서 살펴본 것처럼 ‘해’와 ‘연수’는 교회의 때와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기서 백오 년은 셋 교회가 어떤 상태를 지나 다음 교회인 에노스로 이어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105’라는 수 자체의 세부적인 의미를 풀지 않고, 앞에서 확립한 원칙대로 ‘때와 상태들’을 뜻한다고만 밝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숫자의 개별 상응을 억지로 풀기보다는, 창5의 연수가 교회 상태의 지속과 변화를 기록한다는 큰 원리를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표현은 창5의 ‘낳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한 교회에서 또 하나의 교회가 ‘태어난다’는 것은 앞선 교회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전혀 무관한 것이 새로 생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으면서도 그 교회만의 고유한 상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에노스가 생겼다고 하지 않고, 셋으로부터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고 설명합니다. 창5의 족보는 바로 이러한 교회적 계승의 연속입니다.

 

이 점에서 AC.496은 앞으로 이어질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의 이름을 읽는 기본 틀을 마련합니다. 각각의 이름은 단순히 족보상의 한 사람을 지나가는 표지가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의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를 읽으면서 중요한 질문은 ‘이 사람은 누구인가?’에만 머물지 않고, ‘이 이름으로 나타난 교회는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을 이어받았으며, 그 상태는 어떻게 달라졌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창5의 긴 족보가 단순한 이름과 연수의 나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가 변해 가는 가운데서도 교회를 이어 가시는 역사가 됩니다. (AC.496 해설)

 

 

 

창5:6, AC.497, ‘시간이 흐르며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하는 교회’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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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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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

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퍼셉션은 그 구성원들이 천사들처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과 진리는 시민 사회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가 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선과 진리입니다.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으로부터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 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 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해설

AC.495는 창5:5의 마지막 해설이면서, 앞으로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앞의 AC.492와 AC.494는 ‘죽었다’는 것이 그 교회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도대체 퍼셉션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사라진 것을 교회의 죽음이라고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495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태고교회를 ‘퍼셉션을 가진 교회’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단지 지식이 많거나 판단력이 뛰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외부에서 어떤 교리를 듣고 논증을 거쳐 그것이 옳다고 결론 내리는 것보다 훨씬 내적인 방식으로,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퍼셉션을 ‘천사들처럼’(like the angels)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퍼셉션을 막연한 직감이나 느낌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왠지 이것이 맞는 것 같다’고 느끼는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은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선입견도 매우 강한 확신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의 내용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선과 진리’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합니다. 퍼셉션의 근원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며, 그 내용 역시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믿는 삶에 관한 선과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또 여기서 시민 사회의 선과 진리를 구별합니다. 이것은 사회생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주로 사회적 규범이나 세상사의 옳고 그름을 알아내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일종의 초자연적인 정보 획득 능력이나 미래를 알아맞히는 능력과도 다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으로부터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단순한 내적 느낌에 맡겨 두지 않습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과 실제 삶이 서로 일치할 때, 그 삶을 통하여 그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어떠함이 드러납니다. 참된 퍼셉션은 말로만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느낀다’고 주장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선의 삶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됩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가 왜 쇠퇴했는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들의 교회적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데 있었으므로, 사랑의 상태가 변질될수록 퍼셉션 역시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앞의 AC.494에서 설명한 것처럼 악이 반복되고 세대를 거쳐 유전적 악이 증가하면서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가 점차 손상되었습니다. 사랑이 변하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지각도 변합니다.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던 상태가 사라졌을 때, 말씀은 그것을 그 교회가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창5에서 각 교회가 퍼셉션의 차이에 따라 구별된다는 AC.483의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등은 단순히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각각 다른 상태의 교회들을 나타내며, 그 차이의 중심에는 퍼셉션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세대가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에 있던 퍼셉션이 여러 교회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하고 마침내 소멸해 가는지를 따라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어떤 진리를 깊이 깨닫거나, 기도 중에 무엇이 옳은지를 강하게 느끼거나, 양심을 통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고 깨닫는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 주님은 주로 말씀의 진리와 신앙, 그리고 그 진리로 형성된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그와 구별되는 천적 교회의 고유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이라는 개념이 오늘날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단지 머릿속에 저장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을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 삶에서 살아갈수록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나 주장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과 삶을 변화시킵니다.

 

결국 창5:5의 ‘죽었더라’를 이해하려면 먼저 무엇이 죽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AC.495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고유한 생명이었던 퍼셉션이 사라져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퍼셉션의 본질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의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쇠퇴는 단순한 조직의 쇠퇴나 교리 지식의 감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던 내적 생명의 쇠퇴였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5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는 교회의 죽음이며, 동시에 모든 시대의 교회가 자신의 생명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AC.495 해설)

 

 

 

창5:5, AC.492-496 심화 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창5:5, AC.492-496 심화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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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5 심화 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창5:5, AC.492-495 심화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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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6, AC.496, ‘셋으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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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4, ‘퍼셉션의 죽음과 유전적 악의 누적’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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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

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어떤 것이 이전에 그러했던 것과 같은 상태이기를 그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는, That he “died” signifies that there was no longer such percep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die,” which is, that a thing ceases to be such as it has been. Thus in John: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3:1, 2)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ardis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hath the seven spirits, and the seven stars; I know thy works, that thou art said to live, but art dead; be watchful, and strengthen the things which remain, that are ready to die; for I have not found thy works perfect before God. (Rev. 3:1–2)

 

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렘22:26) I will cast out thy mother that bare thee, into another country where ye were not begotten, and there shall ye die, (Jer. 22:26)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어머니’(mother)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는 점차 쇠퇴하고 타락하여 처음의 온전함을 잃게 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유전적 악의 증가입니다. 뒤를 잇는 모든 부모는 자신이 물려받은 악에 새로운 악을 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 안의 모든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은 일종의 본성을 띠게 되고, 그것이 자주 반복되면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그들의 유전적 악에 더해지며, 자녀들에게 그리고 그렇게 후손들에게 전달됩니다. 이런 식으로 유전적 악은 후손들 안에서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자녀들의 악한 성향이 그 조상들의 악한 성향과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우리 안에 아담으로부터 심어졌다고 주장되는 것 외에는 유전적 악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AC.313 참조). 진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실제적인 죄들(actual sins)로 유전적 악을 만들고, 자신이 물려받은 악들에 그것을 더하며, 이런 식으로 그것이 축적되어 모든 후손 안에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감소합니다. 모든 교회에서 이것이 타락의 주된 원인이며, 태고교회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where “mother” signifies the church. For as we have said, the case with the church is that it decreases and degenerates, and loses its pristine integrity, chiefly by reason of the increase of hereditary evil, for every succeeding parent adds new evil to that which he has inherited. All the actual evil in the parents puts on a kind of nature, and when it often recurs, becomes natural to them, and is added to their hereditary evil, and is transmitted into their children, and so to posterity. In this way the hereditary evil is immensely increased in the descendants. That this is so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vil dispositions of children are exactly like those of their progenitors. Quite false is the opinion of those who think that there is no hereditary evil except that which they allege to have been implanted in us from Adam (see n. 313). The truth is that everyone makes hereditary evil by his own actual sins, and adds it to the evils that he has inherited, and in this way it accumulates, and remains in all the descendants, nor is it abated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In every church this is the principal cause of degeneration, and it was so in the most ancient church.

 

해설

AC.494는 창5:5의 ‘죽었더라’를 설명하다가 매우 중요한 주제인 ‘유전적 악’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죽다’의 속뜻부터 분명히 합니다. 죽음은 ‘어떤 것이 이전에 그러했던 것과 같은 상태이기를 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담으로 표상된 태고교회가 ‘죽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육체적 죽음 자체가 속뜻의 중심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상태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계3:1-2의 사데 교회가 좋은 예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말씀은 육체적으로 죽었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교회로서 외적인 이름과 형태는 남아 있지만 그 안의 영적 생명이 쇠퇴한 상태를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죽음과 생명이 한 사람이나 교회의 내적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렘22:26에서 ‘어머니’(mother)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설명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은 교회의 발생과 쇠퇴와 종결을 가족의 출생과 죽음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왜 교회가 죽어 가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그가 제시하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유전적 악의 증가’입니다. 사람은 앞선 세대로부터 악에 기울어지는 성향을 물려받는데, 거기에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행하고 반복한 악을 더합니다. 반복된 악은 점차 그 사람에게 일종의 본성처럼 자리 잡으며, 이렇게 형성된 것이 다시 후대에 유전적 성향으로 전달된다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세대가 거듭되면서 악에 대한 기울어짐이 누적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전적 악’과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려받은 악은 자신이 직접 행하여 만든 악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여러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실제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그것은 자신의 실제적인 악이 됩니다. 그리고 그 악을 반복하여 삶의 일부로 만들면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유전적 악에 다시 무언가를 더하게 됩니다. AC.494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세대 간 누적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유전적 악을 오직 아담 한 사람의 범죄에서 모든 인류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는 견해를 명시적으로 부정합니다. AC.313에서도 그는 유전적 악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 전해지고 세대를 거치며 축적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을 한 개인이 범한 최초의 죄가 법적 책임의 형태로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에 대한 개인적 죄책 자체라기보다 악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성향이며, 각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그것을 실제 악으로 만들 수도 있고 주님에 의해 거듭나면서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AC.494의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유전적 악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감소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악의 경향을 뿌리째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시면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사람이 악을 악으로 인정하여 물리치고 주님께로 향하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내려온 악의 흐름이 한 사람 안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주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 설명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가 처음부터 갑자기 악한 교회였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매우 깊은 퍼셉션을 가진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악한 방향으로 사용하고 그것을 반복하면서 악의 성향이 누적되었고, 그 결과 후대의 사람들은 앞선 세대보다 더 강한 유전적 악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변질되고 마침내 사라져 간 배경에 이러한 인간의 세대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후대 사람은 앞선 세대보다 무조건 더 악하다’는 단순한 공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94 자체가 동시에 거듭남이라는 반대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악이 세대를 따라 축적될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은 각 세대의 각 사람에게 새롭게 역사하시며 그 악의 힘을 감소시키십니다. 인간에게는 유전적 성향이 있지만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상태 안에서 거듭남의 길을 여십니다.

 

따라서 창5:5의 ‘죽었더라’는 한 교회의 종결을 알리는 짧은 표현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교회가 왜 쇠퇴하는가를 보여 주는 깊은 진단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세대를 지나며 인간의 악이 반복되고 누적되는 가운데 점차 그 처음의 온전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AC.494의 결론은 쇠퇴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누적된 흐름을 거슬러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 역사가 바로 거듭남입니다. ‘죽음’의 역사가 아무리 오래 누적되어도 주님은 그 가운데서 다시 생명으로 향하는 길을 여십니다. (AC.494 해설)

 

 

 

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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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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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

‘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것들은 자연의 가장 바깥 차원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 숫자들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점만 말해 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시간들과 척도들이 말씀에 사용될 때에는 언제나 날들과 해들의 숫자들뿐 아니라 척도의 숫자들까지도, 그 숫자의 의미에 따라 시간과 척도에서 추상된 의미를 갖습니다. 이를테면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은 거룩하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희년은 마흔아홉째 해마다 선포하여 쉰째 해에 지키도록 하였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열둘이었으며 주님의 사도들도 같은 수였고, 장로들은 일흔이었으며 주님의 제자들도 그와 같은 수였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경우에 숫자들은 그것들이 적용된 대상에서 추상된 고유한 의미를 가지며, 이처럼 추상될 때 그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상태들입니다. 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해설

AC.493은 앞의 AC.487에서 시작된 말씀의 숫자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분명하게 합니다. 핵심은 ‘말씀에 숫자가 나오면 시간이나 수량은 아무 의미가 없고 오직 상징적인 뜻만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자연계에서는 시간과 척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정합니다. 자연계는 ‘자연의 가장 바깥 차원’(ultimates of nature)에 있기 때문에 날과 해, 길이와 수량처럼 측정할 수 있는 형태가 필요하고, 거기에 숫자가 붙습니다. 문제는 말씀이 그 자연적인 숫자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담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493에서 중요한 표현은 ‘적용된 대상에서 추상된’(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일곱’이라는 숫자가 날에 붙으면 일곱 날이 되고, 해에 붙으면 일곱 해가 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수에 붙으면 일곱 사람 또는 일곱 사물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에서는 그 외적인 대상에서 숫자를 추상하여 그 숫자 자체가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를 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추상되었을 때 숫자가 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상태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 어떤 숫자가 반복되는 것은 우연한 수치의 일치로만 볼 수 없습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 마흔아홉째 해 뒤에 쉰째 해를 희년으로 지키는 것,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둘이고 주님의 사도도 열둘인 것, 장로가 일흔이고 주님께서 보내신 제자들도 일흔인 것은 서로 전혀 다른 역사적 사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같은 숫자가 서로 다른 대상에 적용되면서도 그 숫자에 고유한 영적 의미를 유지하기 때문에, 말씀 전체 안에서 일정한 질서와 상응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숫자의 의미를 기계적인 암호 풀이로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7은 언제나 이것, 12는 언제나 저것’이라는 식으로 숫자 하나에 하나의 한국어 뜻을 붙이는 방식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숫자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숫자는 고유한 기본 의미를 지니지만, 실제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는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과 대상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487이 말했듯이 800이나 930 같은 합성된 큰 숫자에는 여러 상태와 그 변화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숫자 하나처럼 곧바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이 원리는 창5의 긴 연수들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아담이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는 말씀에서 930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으로는 연수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그 숫자를 자연적인 ‘930년’이라는 시간 단위에서 추상하여 그 안에 담긴 교회의 상태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492가 ‘날들과 해들’을 시대와 상태로 설명한 데 이어 AC.493은 그 상태가 말씀의 숫자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우리가 왜 창5의 숫자들을 성급하게 하나씩 해독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AC.487에서 800과 930을 비롯한 뒤의 숫자들에는 너무 많은 상태 변화가 들어 있어 여기서 하나하나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각 숫자의 암호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숫자가 자연적인 시간과 척도를 통하여 영적인 상태를 표현한다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AC.493은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무관한 두 세계가 아니라 상응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음을 숫자의 경우를 통해 보여 줍니다. 자연계에서는 상태가 시간과 척도와 수량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말씀은 바로 그 자연적인 형식을 사용하여 영적인 상태를 담아냅니다. 따라서 말씀의 문자에 기록된 숫자를 무시할 수도 없고, 반대로 문자적인 수량에만 붙잡혀서도 안 됩니다. 문자에 있는 숫자를 존중하면서 그 숫자를 통해 주님께서 어떤 영적 상태와 질서를 나타내시는지를 살피는 것, 이것이 AC.493이 제시하는 말씀의 숫자를 읽는 기본 원리입니다. (AC.493 해설)

 

 

 

창5:5, AC.494, ‘퍼셉션의 죽음과 유전적 악의 누적’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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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 ‘사라진 퍼셉션을 의미하는 사람의 죽음’(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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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

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사람이 죽음’(man’s dying)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해설

AC.492는 창5:5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는 말씀의 속뜻을 아주 간결하게 밝힙니다. 앞의 AC.486-488에서 ‘날들’과 ‘해들’이 단순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교회의 시대와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면, 이제 ‘죽었더라’ 역시 한 개인의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를 특징짓던 특정한 내적 상태의 종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교회가 없어졌다’고 하지 않고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창5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을 구별하는 핵심적인 특징이 퍼셉션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AC.483과 AC.491에서 보았듯이 이 교회들은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했으며, 각각의 교회는 그 퍼셉션의 어떠함에 따라 서로 구별되었습니다. 따라서 한 교회의 ‘죽음’은 그 교회를 그 교회 되게 하던 고유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창5의 반복되는 ‘죽었더라’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사람이 오랜 세월을 살다가 죽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족보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한 교회의 상태가 일정한 과정을 거친 뒤 끝나고 다른 교회적 상태로 넘어가는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낳았으며’가 교회의 계승과 그 안에서 산출된 선과 진리를 보여 준다면, ‘죽었더라’는 그 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이 마침내 소멸한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음’을 곧바로 모든 선과 진리의 완전한 소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한 교회의 특정한 퍼셉션이 끝났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491이 태고교회를 ‘다른 모든 후대 교회들의 으뜸이며 어버이인 교회’라고 한 것처럼, 한 교회의 상태가 끝나면서도 그로부터 이어지는 것이 다음 교회에 전달됩니다. 창5의 ‘낳음’과 ‘죽음’이 함께 기록되는 것은 바로 이 계승과 변화의 두 측면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죽음’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육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말씀은 사람과 교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생명이 살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태고교회의 경우 그 생명의 대표적인 형태가 퍼셉션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지식이나 특별한 능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를 특징짓던 주님과의 내적 교통 방식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짧은 글은 앞으로 창5에서 반복될 ‘죽었더라’를 단순한 족보의 마침표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 변화로 읽도록 준비시킵니다. 교회에는 시작과 성장뿐 아니라 쇠퇴와 종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주님은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고 선과 진리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는 교회들이 단순히 생겨났다 사라지는 기록이라기보다, 한 상태가 끝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다음 상태를 이어 가시는 섭리의 역사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492 해설)

 

 

 

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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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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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

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도 그러하며, 다시 말해 선들과 진리들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은 분명하게 퍼셉션된 것들인데, 이는 그것들이 태고교회, 곧 다른 모든 후대 교회들의 으뜸이며 어버이인 교회에 관하여 서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same things are signified by “sons” and “daughters” in this chapter (verses 4, 7, 10, 13, 16, 19, 26, 30), but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that is, such are the goods and truths; the truths and goods here spoken of are such as were distinctly perceived, because they are predicate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

 

해설

AC.491은 AC.486-490에서 설명한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를 창5 전체에 적용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덧붙입니다.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교회에서 그 진리와 선의 질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즉 어떤 교회가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교회가 받아들이고 산출하는 진리와 선의 어떠함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상응을 기계적인 대응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아들 = 진리’, ‘딸 = 선’이라는 기본적인 상응은 같더라도, 그 진리가 어떤 진리이며 그 선이 어떤 선인지는 그것들이 속한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아들’이라는 표현도 태고교회에 관하여 사용될 때와 후대의 다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될 때 그 진리의 내적 질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어의 기본 의미뿐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교회적 상태와 문맥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은 ‘분명하게 퍼셉션된 것들’입니다. 이 표현은 창5 초반부터 계속 강조되어 온 태고교회의 독특한 성격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선과 진리는 주로 외부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검토하여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 교회의 ‘아들들과 딸들’은 바로 그러한 퍼셉션에서 나온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83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 여러 교회가 주로 퍼셉션의 차이에 따라 구별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교회가 낳은 ‘아들들과 딸들’ 역시 똑같을 수 없습니다. 각 교회의 퍼셉션이 달랐으므로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와 선의 어떠함도 달랐습니다. 창5에 같은 표현인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가 계속 반복되지만, 속뜻에서는 매번 똑같은 진리와 선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 상태에 고유한 진리와 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다른 모든 후대 교회들의 으뜸이며 어버이인 교회’(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라고 합니다. ‘으뜸’이라는 말은 태고교회가 최초이면서 가장 근원적인 교회였음을, ‘어버이’라는 말은 이후의 교회들이 그 교회로부터 이어져 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5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낳음’의 언어로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앞선 교회의 선과 진리가 후대 교회에 전해지고, 후대 교회는 그것을 자신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형태의 선과 진리를 산출하는 교회의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지금 우리가 창5를 읽으며 계속 확인하고 있는 중요한 원리도 있습니다. ‘계승’은 ‘동일함’이 아닙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았듯이, 이후의 교회들도 앞선 교회에서 이어지지만 각각 다른 퍼셉션과 다른 상태를 갖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동일한 교회가 이름만 바꾸어 계속되는 과정이라기보다, 앞선 교회로부터 받은 것을 다음 교회가 자신의 상태에 따라 이어받으면서 선과 진리의 어떠함도 함께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도 그러하다’는 AC.491의 짧은 문장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교회의 참된 상태는 이름이나 외적 형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교회 안에서 어떤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어떤 선이 살아 움직이는가, 그리고 그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교회의 내적 어떠함은 결국 그 교회가 ‘낳는’ 진리와 선의 어떠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5:4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라는 짧은 표현 안에는 태고교회의 풍성한 영적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낳은 것은 단순한 후손이 아니라 분명하게 퍼셉션된 진리와 선이었으며, 그 진리와 선은 다시 후대 교회들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들이 태고교회로부터 점차 멀어지면서 퍼셉션의 상태가 달라지는 만큼 그들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선의 질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창5의 반복되는 ‘아들들과 딸들’을 단순한 족보의 반복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과 계승의 역사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491 해설)

 

 

 

창5:5, AC.492, ‘사라진 퍼셉션을 의미하는 사람의 죽음’(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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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0, ‘딸들이 의미하는 사랑과 신앙의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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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

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 10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11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12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 13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놓았도다 14수놓은 옷을 입은 그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5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16왕의 아들들은 왕의 조상들을 계승할 것이라 왕이 그들로 온 세계의 군왕을 삼으리로다 17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 (시45:9-17) Kings’ daughters were among thy precious ones; at thy right hand doth stand the queen in the best gold of Ophir; the daughter of Tyre with a gift; the king’s daughter is all glorious within; of eyelet work of gold is her raiment; instead of thy fathers shall be thy sons, (Ps. 45:9-17)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딸’(daughter)에 의해 사랑과 신앙의 선과 아름다움이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들도 선들로 말미암아 ‘딸들’(daughters)이라 하는데, 이를테면 ‘시온의 딸’(daughter of Zion)과 ‘예루살렘의 딸’(daughter of Jerusalem)(사37:22 및 그 밖의 많은 곳), 또한 ‘내 백성의 딸들’(daughters of my people)(사22:4), ‘다시스의 딸’(daughter of Tarshish)(사23:10), ‘시돈의 딸’(daughter of Sidon)(12절), 그리고 ‘들에 있는 딸들’(daughters in the field)(겔26:6, 8)이라 합니다. where the good and beauty of love and faith are described by the “daughter.” Hence churches are called “daughters” by virtue of goods, as the “daughter of Zion” and the “daughter of Jerusalem” (Isa. 37:22, and in many other places); they are also called “daughters of my people” (Isa. 22:4), the “daughter of Tarshish” (Isa. 23:10), the “daughter of Sidon” (verse 12), and “daughters in the field” (Ezek. 26:6, 8).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사37:22)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지어다 나는 슬피 통곡하겠노라 내 딸 백성이 패망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나를 위로하려고 힘쓰지 말지니라 (사22:4)

 

10딸 다시스여 나일 같이 너희 땅에 넘칠지어다 너를 속박함이 다시는 없으리라, 12이르시되 너 학대 받은 처녀 딸 시돈아 네게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가라 거기에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23:10, 12)

 

6들에 있는 그의 딸들은 칼에 죽으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8그가 들에 있는 너의 딸들을 칼로 죽이고 너를 치려고 사다리를 세우며 토성을 쌓으며 방패를 갖출 것이며 (겔26:6, 8)

 

해설

AC.490은 앞의 AC.489에서 ‘아들들은 진리, 딸들은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한 것 가운데 특별히 ‘딸들’이 왜 선을 의미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글은 짧지만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드러냅니다. 말씀에서 ‘딸’은 단순히 여성인 자녀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과 신앙에서 비롯되는 선, 더 나아가 그러한 선을 지닌 교회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45편에서 왕의 딸과 왕후가 금과 아름다운 옷으로 단장한 모습은 단순히 왕궁의 화려함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AC.490은 이를 ‘사랑과 신앙의 선과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아름다움이 선과 함께 언급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영적인 아름다움은 겉모습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진리를 통하여 드러날 때 생깁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의복과 금과 아름다움으로 단장한 딸의 모습은 교회 안의 선이 진리와 함께 아름답게 나타나는 모습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그러므로 교회들도 선들로 말미암아 딸들이라 한다’는 설명입니다. ‘시온의 딸’(daughter of Zion), ‘예루살렘의 딸’(daughter of Jerusalem) 같은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교회가 ‘딸’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단순히 문학적인 의인화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를 참으로 교회 되게 하는 것이 그 안에 있는 선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진리도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그 진리가 사랑의 선 안에서 살아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가 됩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문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을 때, 진리는 더 이상 본래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반대로 ‘딸’이 선을 의미한다는 것은 진리가 궁극적으로 사랑과 선을 섬겨야 한다는 말씀의 질서를 다시 보여 줍니다. ‘아들’과 ‘딸’, 곧 진리와 선은 서로 떨어져 존재하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또한 ‘시온의 딸’, ‘예루살렘의 딸’, ‘두로의 딸’, ‘시돈의 딸’처럼 어떤 지역이나 도시의 이름에 ‘딸’이 붙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 지역의 여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만 읽을 수 없는 경우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나 교회에 속한 것을 그 안의 선이라는 측면에서 ‘딸’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딸’이라는 표현을 만날 때에는 문맥에 따라 ‘어떤 선이 여기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창5:4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라는 표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은 단지 오랜 세월 동안 존속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을 계속 산출했습니다. AC.489가 ‘아들들’을 진리로 설명했다면 AC.490은 ‘딸들’을 선으로 설명하면서, 특히 그 선이 사랑과 신앙의 선임을 보여 줍니다.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은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는 데만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선으로 살아나며 계속해서 영적인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AC.490 해설)

 

 

 

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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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9, ‘교회가 낳는 아들들과 딸들, 진리와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며, 특히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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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며, 특히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들’(daughters)은 선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예언서의 많은 구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는 옛날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교회의 잉태와 출생을 ‘아들들과 딸들’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에서는, That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indeed by “sons” truths, and by “daughters” goods,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prophets; for in the Word, as also in olden time,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the church are called “sons and daughters,” as in Isaiah: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그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사60:3-5)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lift up thine eyes round about and see; all they gather themselves together and come to thee; thy sons shall come from far, and thy daughters shall be nursed at thy side; then thou shalt see and flow together, and thy heart shall be amazed, and shall be enlarged, (Isa. 60:3–5)

 

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의미합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and “daughters” goods.

 

[2] 시편에서는, In David:

 

11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12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시144:11, 12) Deliver me and rescue me from the hand of the sons of the stranger, whose mouth speaketh vanity; that our sons may be as plants grown up in their youth, that our daughters may be as cornerstones hewn in the form of a temple, (Ps. 144:11–12)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의 아들들’(sons of the stranger)은 거짓된 진리들, 곧 거짓들을 의미하고, ‘우리 아들들’(our sons)은 진리의 교리들을, ‘우리 딸들’(our daughters)은 선의 교리들을 의미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stranger” signify spurious truths, or falsities; “our sons” signify doctrinals of truth; “our daughters,” doctrinals of good.

 

[3] 이사야에서는, In Isaiah:

 

6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며, 8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사43:6, 8) I will say to the north, Give up, and to the south, Keep not back; bring my sons from far, and my daughters from the ends of the earth; bring forth the blind people, and they shall have eyes; the deaf, and they shall have ears, (Isa. 43:6, 8)

 

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의미하고, ‘맹인들’(blind)은 진리를 보게 될 사람들을, ‘귀먹은 자들’(deaf)은 진리에 순종하게 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daughters,” goods; the “blind,” those who would see truths; and the “deaf,” those who would obey them.

 

[4]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렘3:24) Shame hath devoured the labor of our fathers from our youth; their flocks, their herds, their sons, and their daughters, (Jer. 3:24)

 

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자녀들’(children)과 ‘아들들’(sons)이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where “sons” and “daughters” signify truths and goods. That “children” and “sons” signify truths is plain from Isaiah:

 

22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 23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24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사29:22-24) Jacob shall not now be ashamed, neither shall his face now wax pale; for when he shall see his children the work of my hands in the midst of him, they shall sanctify my name, and shall sanctify the Holy One of Jacob, and shall fear the God of Israel; they also that erred in spirit shall know understanding, (Isa. 29:22–24)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holy one of Jacob, the God of Israel)은 주님을 의미하고, ‘자녀들’은 거듭난 사람들, 곧 선과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실제로 그 구절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where the “holy one of Jacob, the God of Israel,” signifies the Lord; “children” signify the regenerate, who have the understanding of good and truth, as is indeed explained.

 

[5] 또 이사야에서는, Again: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사54:1) Sing, O barren, thou that didst not bear, for more are the sons of the desolate than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Isa. 54:1)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홀로 된 여인의 아들들’(sons of the desolate)은 초대교회, 곧 이방인들의 교회에 속한 진리들을 의미하고, ‘남편 있는 여인의 아들들’(sons of the married wife)은 유대교회에 속한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desolate” signify the truths of the primitive church, or that of the Gentiles;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the truths of the Jewish church.

 

[6]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렘10:20)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of me, and are not, (Jer. 10:20)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또, where “sons” signify truths. Again:

 

그의 자손은 예전과 같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렘30:20) His sons shall be as aforetime, and their congregation shall be established before me, (Jer. 30:20)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고대교회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스가랴에서는, where “sons” signify the truths of the ancient church. In Zechariah: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슥9:13) I will stir up thy sons, O Zion, with thy sons, O Javan, and make thee as the sword of a mighty man, (Zech. 9:13)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signifying the truths of the faith of love.

 

해설

AC.489는 AC.486에서 짧게 제시했던 ‘아들들은 진리, 딸들은 선’이라는 상응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입증합니다. 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단순히 ‘아들 = 진리, 딸 = 선’이라는 대응표를 하나 더 익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첫 문단의 ‘교회의 잉태와 출생을 아들들과 딸들이라 한다’는 설명이 오히려 이 글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진리와 선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의 창5:3에서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 것으로 표현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자연적 생명에서는 부모에게서 자녀가 태어나지만, 영적 생명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인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새로운 선과 진리가 생겨납니다. 따라서 창5:4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라는 표현은 단순히 아담에게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녀들이 더 있었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계속해서 진리와 선이 산출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AC.486과 연결하여 이 진리와 선이 그들이 ‘퍼셉션한’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 진리와 선은 단순히 외부에서 배우고 기억하여 보유하는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앞의 AC.483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교회들을 구별하는 주된 특징 자체가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했고, 그렇게 받아들여진 진리와 선이 그 교회의 ‘아들들과 딸들’이 되었습니다.

 

사60:3-5가 좋은 예입니다. 문자에서는 흩어졌던 아들들과 딸들이 돌아오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교회 안으로 진리들과 선들이 모여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고 딸들은 안기어 온다’는 것은 단순한 가족의 재회가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실 때 진리와 선이 다시 풍성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교회가 살아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시144편의 ‘이방인의 아들들’은 거짓된 진리들, 곧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아들’이라는 말 자체가 언제나 참된 진리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보여 줍니다. 무엇으로부터 태어났느냐에 따라 참된 진리가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들’은 진리의 교리들을 의미하지만 ‘이방인의 아들들’은 거짓을 의미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전체 문맥과 그 근원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사43:6, 8에서 ‘아들들’과 ‘딸들’이 돌아오는 것과 함께 ‘맹인’이 보고 ‘귀먹은 자’가 듣게 되는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 회복될 때 그는 비로소 영적으로 보기 시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보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과 연결되고, ‘듣는 것’은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아들들과 딸들의 귀환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의 질서가 회복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54:1의 ‘홀로 된 여인의 아들들’과 ‘남편 있는 여인의 아들들’은 ‘아들’이 실제 혈육의 자녀를 넘어 교회에 속한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를 초대교회, 곧 이방인들의 교회에 속한 진리로, 후자를 유대교회에 속한 진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어떤 여인의 자녀가 많아진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그 교회 안에서 진리가 풍성해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창5의 족보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셋, 에노스, 게난 등의 이름이 각각 교회를 나타내며, 그 연수는 그 교회의 상태와 상태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AC.489는 그 교회들이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반복되는 표현까지 열어 줍니다. ‘이름’은 교회를, ‘날들과 해들’은 그 교회의 상태와 변화를, ‘아들들과 딸들’은 그 교회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을 나타냅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놓이면 창5의 족보는 단순한 인명과 수명의 목록이 아니라 교회가 이어지고 변화하며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계속 산출되는 영적 역사가 됩니다.

 

무엇보다 ‘교회의 출생’이라는 표현은 진리와 선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영적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선을 생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으로 결합될 때 비로소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창5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반복되는 말은 태고교회의 생명력이 단순히 오래 존속했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그 안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영적 결실을 맺었다는 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489 해설)

 

 

 

창5:4, AC.490, ‘딸들이 의미하는 사랑과 신앙의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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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8, ‘천사들에게 시간은 상태와 그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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