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

‘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days” signify states in general, and “years” states in special,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겔22:4) Thou hast caused thy days to draw near, and art come even unto thy years, (Ezek. 22:4)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자기 죄의 분량을 채우는 자들에 관한 말씀으로, 그들의 일반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날들’이라 하고 특별한 상태에 대해서는 ‘해들’이라 합니다. 이와 같이 시편에서는, speaking of those who commit abominations, and fill up the measure of their sins, of whose state in general are predicated “days,” and in special “years.” So in David: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시61:6) Thou shalt add days to the days of the king, and his years a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Ps. 61:6)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에 관한 말씀으로, 여기서도 ‘날들’과 ‘해들’은 그분의 나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speaking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where also “days” and “years” signify the state of his kingdom. Again: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시77:5) I have considered the “days of old,” the years of the ages, (Ps. 77:5)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옛날’(days of old)은 태고교회의 상태들을, ‘지나간 세월’(years of the ages)은 고대교회의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where “days of old” signify state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years of the ages,” states of the ancient church.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사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으로, ‘원수 갚는 날’(day of vengeance)은 정죄의 상태를, ‘구속할 해’(year of the redeemed)는 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speaking of the last times, where the “day of vengeance” signifies a state of damnation, and the “year of the redeemed” a state of blessedness. Again: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61:2) To proclaim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and the day of vengeance of our God; to comfort all that mourn, (Isa. 61:2)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날’과 ‘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where both “days” and “years” signify states. In Jeremiah: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where state is plainly meant.

 

[2] 요엘에서는, In Joel:

 

1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욜2:1, 2) The day of Jehovah cometh, for it is nigh at hand,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a day of cloud and of obscurity; there hath not been ever the like, neither shall be after it, even to 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Joel 2:1–2)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날’은 각 사람에게는 개별적으로, 모든 사람에게는 일반적으로 어둠과 캄캄함, 구름과 흑암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가랴에서는, where “day” signifies a state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of cloud and of obscurity, with each one in particular, and with all in general. In Zechariah:

 

9내가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10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슥3:9, 10) I will remove the iniquity of that land in one day; in that day shall ye cry a man to his companion under the vine, and under the fig tree. (Zech. 3:9–10)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슥14:7) It shall be one day which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Zech. 14:7)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neither day nor night) 날이 있으며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라’(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고 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말씀에서도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where it is plain that state is meant, for it is said that there shall be a day that is “neither day nor nigh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The same appears from expressions in the Decalogue: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신5:16; 25:15) Hono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prolonged, and that it may be well with thee upon the ground, (Deut. 5:16; 25:15)

 

여기서 ‘날들이 길어진다’(days prolonged)는 것은 생명의 기간이 길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행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where to have the “days prolonged” does not signify length of life, but a happy state.

 

[3] 문자적 의미에서는 ‘날’이 시간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천사들은 시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시간을 구별해 주는 해와 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날들과 해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오직 상태와 그 변화만을 압니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천사들 앞에서는 물질과 공간과 시간에 속한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에스겔의 다음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 그러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In the literal sense it must needs appear as if “day” signifies time, but in the internal sense it signifies state.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do not know what time is, for they have no sun and moon that distinguish times; consequently they do not know what days and years are, but only what states are and the changes thereof; and therefore before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everything relating to matter, space, and time disappears, as in the literal sense of this passage in Ezekiel:

 

그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 (겔30:3) The day is near, even the day of Jehovah is near, a day of cloud; it shall be the time of the nations, (Ezek. 30:3)

 

여기서 ‘구름의 날’(day of cloud)은 구름, 곧 거짓을 의미하고, ‘여러 나라들의 날’(day of the nations)은 여러 나라들, 곧 악을 의미하며, ‘여호와의 날’(day of Jehovah)은 황폐를 의미합니다. 또한 요엘에서는, where a “day of cloud” signifies a cloud, or falsity; the “day of the nations” signifies the nations, or wickedness; the “day of Jehovah” signifies vastation. and of this in Joel:

 

슬프다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욜1:15) Alas for the day! For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and as vastation shall it come, (Joel 1:15)

 

라고 하였습니다. 시간이라는 관념이 제거되면 그 시간에 존재했던 것들의 ‘상태’라는 관념이 남습니다. 이 장에서 그토록 자주 언급되는 ‘날들’과 ‘해들’도 이와 같습니다. When the notion of time is removed, there remains the notion of the state of the things which existed at that time. The case is the same with regard to the “days” and “years” that are so often mentioned in this chapter.

 

해설

AC.488은 왜 창5의 ‘날들’과 ‘해들’을 단순한 시간으로 읽지 않고 교회의 상태로 읽어야 하는지를 말씀의 여러 본문을 통해 입증합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문자에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표현 안에 천국에서 받아들여지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문자에서는 ‘날’과 ‘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그것들이 ‘상태와 상태의 변화’가 됩니다.

 

첫째, 인용된 말씀들을 보면 ‘날’이 단순한 24시간을 뜻한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여호와의 날’, ‘보복의 날’, ‘구속할 해’,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 한 날’과 같은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달력상의 어느 날짜가 아니라 그때 나타나는 영적 상태입니다. 특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며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다’는 표현은 문자적 시간의 틀만으로는 그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날’이 상태를 나타낸다는 원리를 적용할 때 그 말씀의 속뜻이 열립니다.

 

둘째, AC.488은 ‘날들’과 ‘해들’의 관계를 다시 확인합니다. ‘날들’은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은 그 안의 특별한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시77:5의 ‘옛날’과 ‘지나간 세월’을 각각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상태로 설명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따라서 창5에서 한 교회의 ‘모든 날들’이 언급되고 그 안에 구체적인 ‘해들’이 기록되는 것은, 한 교회의 전체적인 상태와 그 안에서 일어난 보다 세부적인 상태 변화들을 함께 나타내는 것입니다.

 

셋째, 이 글의 가장 중요한 설명은 [3]에 있습니다. 천사들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생각하지 않으며 ‘상태와 그 변화’를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천사들이 아무런 순서나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을 지상의 해와 달, 날과 해라는 물리적 시간 단위로 측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문자가 천국에 이르면 시간에 속한 관념은 벗겨지고, 그 시간 동안 일어난 영적 실재, 곧 상태와 그 변화가 남습니다.

 

이것은 ‘상응’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합니다. 지상에서는 우리의 삶이 시간의 연속 안에서 펼쳐집니다. 기쁨의 때, 시험의 때, 무지의 때, 깨달음의 때가 모두 ‘언제’라는 시간 속에서 경험됩니다. 그러나 그 시간 자체가 우리의 영적 삶의 본질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동안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입니다. 그래서 문자에서는 시간으로 표현된 것이 천국에서는 그 시간에 담긴 상태로 지각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를 창5에 적용하면 800년이나 930년이라는 숫자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집니다. AC.487이 이 숫자들 안에 교회의 수많은 상태 변화가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면, AC.488은 왜 그러한 해석이 가능한지를 천사들의 말씀 이해 방식에서 설명합니다. 문자에서는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보이지만, 시간의 관념이 제거되면 그 시간에 해당하는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가 남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5의 긴 연수들은 속뜻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어떤 상태들을 거쳐 갔는지를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시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문장을 ‘천국에는 아무런 변화나 순서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88 자체가 천사들은 ‘상태와 그 변화’를 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지상에서는 변화의 연속을 주로 시간으로 경험하지만, 천국에서는 그것이 사랑과 신앙, 지혜와 행복 등 내적 상태의 변화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시간은 사라져도 삶의 변화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라는 외적 틀을 벗고 그 안에 있던 영적 실재가 드러나는 셈입니다.

 

결국 AC.488은 창5의 연수를 해석하는 문제를 넘어 말씀의 속뜻 자체가 어떤 차원의 언어인지를 보여 줍니다. 문자에는 사람과 장소와 시간과 숫자가 기록되어 있지만, 천사들은 그 안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그리고 상태와 그 변화를 지각합니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관념이 제거되면 그 시간에 존재했던 것들의 상태라는 관념이 남는다’는 마지막 설명은 이 글 전체를 압축합니다. 창5의 ‘날들’과 ‘해들’을 상태로 읽는 것은 숫자를 임의로 상징화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지상적 표현 안에 담긴 천국의 실재를 읽는 일입니다. (AC.488 해설)

 

 

 

창5:4, AC.489, ‘교회가 낳는 아들들과 딸들, 진리와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며, 특히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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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7, ‘날들과 해들에 기록된 교회의 상태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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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

‘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는 모든 시간을 ‘날들’이라 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데, 이는 이 구절과 뒤이어 나오는 구절들(5, 8, 11, 14, 17, 20, 23, 27, 31절)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상태들도 일반적으로 ‘날들’에 의해 의미됩니다. 그리고 ‘해들’(years)이 덧붙여질 때에는 그 해들의 시기들에 의해 상태들의 어떠함이 의미되며, 따라서 특별한 상태들이 의미됩니다. 태고인들은 숫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로 교회와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했습니다. 이를테면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숫자들과, 이것들과 다른 숫자들을 조합하여 만든 많은 수들이 있었고, 그것들로 교회의 상태들을 묘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은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상태를 헤아리고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말씀의 많은 곳, 특히 예언서들에도 나타납니다. 유대교회의 의식에도 시간과 측량에 관한 숫자들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희생 제사와 소제와 봉헌물과 그 밖의 것들에 관한 숫자들이 그러하며, 그것들은 적용되는 바에 따라 어디에서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팔백’이라는 수와 다음 절의 ‘구백삼십’, 그리고 이어지는 여러 구절의 연수에 담겨 있는 것들, 곧 각 교회의 일반적인 상태에 적용된 그 교회의 상태 변화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 이 저작의 뒤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둘’까지의 단순한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줄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들의 의미를 알기 전에는 조합된 숫자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That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was shown in the first chapter, where the “days” of creation have no other signification. In the Word it is very usual to call all time “days,” as is manifestly the case in the present verse, and in those which follow (5, 8, 11, 14, 17, 20, 23, 27, 31); and therefore the states of the times in general are likewise signified by “days”; and when “years” are added, then by the seasons of the years are signified the qualities of the states, thus states in special.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heir numbers, by which they signified various things relating to the church, as the numbers “three,” “seven,” “ten,” “twelve,” and many that were compounded of these and others, whereby they described the states of the church; wherefore these numbers contain arcana which would require much time to explain. It was an account or reckoning of the states of the church. The same thing occurs in many parts of the Word, especially the prophetical.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lso there were numbers, both of times and measures, as for instance in regard to the sacrifices, meat offerings, oblations, and other things, which everywhere signify holy things, according to their application. The things here involved, therefore, in the number “eight hundred,” and in the next verse, in the number “nine hundred and thirty,” and in the numbers of years in the verses following—namely, the changes of state of their church as applied to their own general state—are too many to be recounted.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ake occasion to show what the simple numbers up to “twelve” signify, for until the signification of these is known, it would be impossible to apprehend the signification of the compound numbers.

 

해설

AC.487은 앞의 AC.482와 AC.486에서 제시한 원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날들’은 교회의 상태를 일반적으로 나타내고, ‘해들’은 그 일반적인 상태 안에 들어 있는 특별한 상태와 그 어떠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에 반복되는 ‘그의 모든 날은 몇 년이었다’는 표현은 속뜻에서 단순한 수명 계산이 아니라 한 교회가 존속하는 동안 겪은 전체적인 상태와 그 안의 여러 변화를 묘사하는 언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첫 근거로 창1의 창조의 ‘날들’을 듭니다. 창조의 여섯 날이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을 의미했던 것처럼, 창5의 날들도 단순히 24시간 단위의 날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창1과 창5가 서로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창1에서 한 사람 또는 교회가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상태들이 ‘날들’로 묘사되었다면, 창5에서는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거쳐 간 상태들이 다시 시간의 언어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AC.487은 여기서 숫자 자체의 의미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태고인들은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단순한 숫자들로 교회에 속한 여러 상태를 표현했고, 이 숫자들을 서로 조합하여 더 복잡한 상태들도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5의 800이나 930과 같은 큰 숫자를 곧바로 하나의 간단한 상응으로 바꾸어 ‘800은 이것, 930은 저것’이라고 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여러 단순한 수가 결합된 숫자이며, 그 안에는 각 교회가 겪은 복합적인 상태 변화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기서 800과 930의 의미를 하나하나 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포함된 교회의 상태 변화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숫자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절제의 원칙을 보여 줍니다. 숫자에 속뜻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숫자의 모든 의미를 곧바로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먼저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기본적인 숫자의 의미와 그것들이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알아야 조합된 숫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유대교회의 희생 제사와 소제와 봉헌물 등의 숫자를 함께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에서 숫자는 단순한 계산상의 장식물이 아니라,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과 문맥에 따라 거룩한 것들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제물의 수, 기간, 측량 등이 예배의 영적 실재를 표상했던 것처럼, 창5의 연수 역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내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숫자의 의미는 숫자만 떼어 내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특히 ‘그것은 교회의 상태를 헤아리고 기록한 것이었다’는 설명은 창5의 족보를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문자에서는 아담이 몇 살에 셋을 낳았고 이후 몇 년을 더 살았으며 모두 몇 세에 죽었는지를 계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한 교회가 어떤 상태에서 시작하여 어떤 변화들을 거쳤으며 그 전체적인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헤아리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5의 숫자들은 사람의 나이를 세는 계산표라기보다 교회의 상태를 기록하는 영적 언어인 셈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483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의 이름들이 각각 서로 다른 교회를 나타내고 그 교회들이 주로 퍼셉션의 차이로 구별되었다면, 각 이름 옆에 기록된 연수는 그 서로 다른 교회들의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창5에서는 ‘이름’과 ‘숫자’를 따로 떼어 읽을 수 없습니다. 이름은 어떤 교회인지를 보여 주고, 숫자는 그 교회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묘사합니다.

 

결국 AC.487은 창5의 기이하게 긴 수명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고대 사람들이 정말 800년, 900년을 살 수 있었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주님께서 왜 바로 그 숫자들을 사용하셨으며, 그것들을 통해 교회의 어떤 상태와 변화를 나타내셨는가가 핵심입니다. 아직 그 모든 숫자의 아르카나를 우리가 풀어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창5의 숫자들이 무의미한 장식도 아니고 단순한 연대 자료만도 아니라는 것, 그것들이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 변화를 담아내는 말씀의 정교한 언어라는 사실을 AC.487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487 해설)

 

 

 

창5:4, AC.488, ‘천사들에게 시간은 상태와 그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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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6, '날들과 해들,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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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

‘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고, ‘해들’(years)은 특별한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며,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은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by “years,” times and states in special;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perceived.

 

해설

AC.486은 매우 짧지만 창5의 계보를 읽는 데 필요한 세 가지 기본 열쇠를 한꺼번에 제시합니다. 창5:4에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되어 있는데, 속뜻에서는 이 ‘날들’과 ‘해들’,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이 모두 교회의 내적 상태와 그 안에서 생겨난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먼저 ‘날들’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시간’은 단순히 달력 위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교회가 거쳐 간 영적 상태의 지속과 변화를 포함합니다. 앞의 AC.482에서 이미 창5의 연수는 문자 그대로의 세속적 연수보다 교회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AC.486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날들’과 ‘해들’ 사이에도 의미의 차이가 있음을 밝힙니다.

 

‘해들’은 ‘특별한 시간과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날들과 해들은 서로 전혀 다른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일반과 특별의 관계에 있습니다. ‘날들’이 한 교회가 지나온 상태를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표현이라면, ‘해들’은 그 전체 안에 포함된 보다 구체적인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AC.482에서 가장 작은 시간과 가장 큰 시간 사이에도 유사성이 있다고 설명한 것과 연결됩니다. 전체가 부분들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일반적인 상태 안에는 여러 특별한 상태들이 들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들들과 딸들’입니다. 문자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자녀를 낳았다는 족보의 표현이지만, 속뜻에서는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한 교회가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것은 단순히 인구가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여러 진리와 선이 퍼셉션되었음을 나타냅니다.

 

특히 AC.486은 단순히 ‘그들이 알고 있던 진리와 선’이라고 하지 않고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와 선’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483과 직접 연결됩니다. 당시 여러 교회를 구별하는 주된 특징은 퍼셉션이었고, 각 교회는 서로 다른 퍼셉션의 상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들들과 딸들’은 외부에서 배워 기억 속에 저장한 교리적 지식이라기보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퍼셉션했던 진리와 선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창5의 ‘낳음’이라는 표현도 더욱 깊어집니다. 앞에서는 한 교회가 다른 교회로 이어지는 것을 ‘낳음’으로 표현했다면, 여기서는 한 교회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 역시 ‘아들들과 딸들’이라는 출생의 언어로 표현됩니다. 말씀에서 영적인 생명이 실제 생명의 출생과 성장이라는 언어로 묘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 사람과 교회 안에서 실제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영적 생명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5:4의 한 구절 안에는 교회의 전체적인 상태와 그 안의 구체적인 상태들, 그리고 그 상태 가운데서 생겨난 진리와 선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날들’은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은 그 안의 특별한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은 그 교회가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나타냅니다. 문자에서는 한 사람의 긴 생애와 많은 자녀가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한 교회가 일정한 상태를 지나면서 주님으로부터 수많은 선과 진리를 받아 풍성해지는 모습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AC.486 해설)

 

 

 

창5:4, AC.487, ‘날들과 해들에 기록된 교회의 상태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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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5,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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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첫 주일입니다. 보통은 신년 주일이라 하여 설교도 그에 맞게 준비하지만, 저희는 당분간 아주 특별한 절기 외에는 오직 이 AC에만 전념하기로 한 점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5장입니다. 오늘부터 6주에 걸쳐 창세기 5장을 살피게 되며,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 1절로 3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1-3)

 

위 본문을 아래

창5 아담 계보의 속뜻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겉으로 보면 무슨 가계 족보의 서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성경 전체에서 인간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인지를 가장 압축적으로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아담의 계보’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이는 한 개인의 혈통 기록이 아니라, 태고교회라는 최초의 교회 상태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다음 상태로 넘어갔는지를 말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인간의 기원이 아니라, ‘사람됨의 기원’, 곧 교회의 기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혀 새로울 수 있는 이 관점을 아래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 ‘사람’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입니다

 

본문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떤 한 사람의 족보를 떠올리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그 기대를 깨뜨립니다.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아담’(אָדָם, Adam)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을 뜻하는 말이며, 성경은 이 ‘사람’을 단수로 말하면서도 동시에 복수로 취급합니다. 이는 분명히 어떤 한 개인,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류 최초의 인간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닌 것이지요.

 

성경에서 ‘사람’은 언제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 상태를 뜻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 다시 말해 교회가 존재할 때, 그 상태를 성경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곧 ‘사람’이었고, 그 교회에 속한 이들은 개인이기 이전에 교회의 일부였습니다. 그들의 사고, 사랑, 퍼셉션(perception), 삶 전체가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아담의 계보’로 시작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계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상태의 계승’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보다, ‘그 이름으로 불리던 교회가 어떤 상태로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가’를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으며, 나 자신을 한 개인으로 보기보다, 지금 나는 어떤 교회 상태에 서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모양’은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뜻합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인간이 외적으로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살도록 지어졌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참인지를 배움과 학습을 통해서 알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즉각적으로 인식, 곧 지각(perception,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이라 부릅니다. 아래는 관련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483에서 창세기 5장에 나열된 이름들, 곧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라멕’(Lamech), ‘노아’(Noah)라는 이름들을 다시 한번 분명히 정리합니다. 셋에서 노아에 이르는 모든 이름들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각각 하나의 ‘교회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교회들 가운데 첫째이자 중심이 되는 교회를 ‘사람’이라 했습니다. 이는 앞서 여러 차례 보았듯이, 태고교회가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가장 온전하게 반영했던 교회였기 때문이지요. 이후에 나오는 모든 교회들은 이 ‘사람’의 상태에서 파생된 변형들이었습니다.

 

이 교회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 특징은 바로 ‘퍼셉션’(perception)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이란, 지식이나 판단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즉각적으로 알아보는 내적 지각’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선한지를 배워서 알지 않았고, 명령을 통해 분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랑 안에서 곧바로 퍼셉션, 곧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 교회들 사이의 차이는 교리의 차이나 제도의 차이가 아니라,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이 퍼셉션의 삶은 율법 이전의 삶이었고, 교리 이전의 삶이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로 계산하지 않아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마음으로 직관적으로 알았던 삶입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는 규범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사랑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인간이 그와 같은 질서 안에 놓였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나 이 모양은 자동적으로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 퍼셉션의 삶은 점차 약해졌고, 결국 다른 방식의 교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먼저 이 가장 완전한 상태를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창조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상태에 이르지 못할지라도, 성경은 여전히 그 방향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셋째, ‘셋을 낳았다’는 것은 새로운 교회가 세워졌음을 뜻합니다

 

본문 3절에서 갑자기 시간이 흐르고, 아담이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셋’(Seth)이라 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오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한 사람이 나이 들어 아들을 낳은 것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새로운 교회 상태의 출현’을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완전한 퍼셉션의 상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고, 주님께서는 그 리메인스(remains)를 보존하시어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셋’으로 대표, 표상됩니다. 이 교회는 태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동일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이 여전히 중요했으나, 더 이상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했고, 신앙이 점점 더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가장 순수한 상태가 지나가도, 주님은 언제나 그다음 상태를 준비하십니다. 셋은 타락의 결과가 아니라, ‘섭리의 응답’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교회는 계속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 역시 셋의 교회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즉각적 퍼셉션의 삶을 살지 못하지만, 사랑과 신앙의 결합 안에서 여전히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사랑이 신앙과 분리되지 않을 때, 교회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기 위해 창조하지 않으셨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무너져도 끝나지 않고, 언제나 다음 상태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계보 위에 서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삶은 다음 상태를 낳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이 말씀 앞에서 함께 돌아보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 신앙의 핵심은 ‘속 사람의 상태’입니다. 천국도 지옥도 모두 이 속 사람의 상태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무슨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무엇보다도 자기 속 사람의 상태 관리에 매진해야 합니다. 대신 ‘나는 교회 몇 년 다녔어’, ‘나는 예수님 영접 기도한 지 벌써 30년이나 된 사람이야’, ‘나는 교회에서 목사로, 장로로, 권사, 집사로 평생 섬겼어’ 등등 이런 다분히 겉 사람에 치우친 공로에 의지하시다가는 나중에 큰일 납니다.

 

동일한 원리로 우리는 성경도 이제는 겉이 아닌 속으로, 아니 겉도 보고 속도 보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하게 해석하는 바람에 삼천포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겉도 중요하지만, 속으로 읽는 훈련, 곧 천사들이 읽는 방식으로 읽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오, 사랑의 주님,

 

오늘 신년을 맞아 창세기 5장 첫 본문으로 주님 음성에 귀 기울였습니다. 다소 생소하고 낯선 내용들이 혹시 있었을지라도 반발심 대신 주님을 사랑하는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저마다 자기 내면을 들을 귀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자 힘써 노력하는 심령들에게는 주님, 아낌없이 놀라운 하늘의 계시를 부어주시옵소서. 그래서 놀라운 일, 곧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결실의 기적들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렇지 못한 심령들에게도 주님, 저들을 어루만지사 부드러운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그래서 다들 올 한 해 능히 주님의 계시를 받기에 합당한 심령들 되게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다음 본문은 창5:4-20(AC.486-515)입니다.

 

 

 

설교

2026-01-0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632, 25. 창5.1, 2026-01-04(D1)-주일예배(창5,1-3, AC.469-485, 성찬), ‘창5 아담 계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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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1/11, 창5:4-20),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오늘은 창세기 5장 두 번째 시간, 4절로 20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6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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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5/12/28, 창4:25-26),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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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

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a different church is here meant by “Seth” from that which was described above (Gen. 4:25), may be seen at n. 43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진 교회들이 같은 이름으로 일컬어졌다는 것은 앞 장에서(창4:17-18) ‘에녹’(Enoch)과 ‘라멕’(Lamech)이라 한 교회들과,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에녹’과 ‘라멕’이라 하는 다른 교회들(창5:21, 30)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churches of different doctrine were called by the same name, is evident from those which in the foregoing chapter (Gen. 4:17–18) were called “Enoch” and “Lamech,” while here other churches are in like manner called “Enoch” and “Lamech” (Gen. 5:21, 30).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18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창4:17, 18)

 

21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30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1, 30)

 

해설

AC.485는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문자적 족보만 따라 읽으면 창4:25의 셋과 창5:3의 셋은 당연히 동일 인물이며, 창5는 창4 끝부분에서 등장한 셋의 족보를 다시 이어 가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명시합니다.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합니다.

 

AC.485가 직접 참조하라고 한 AC.435를 보면 그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4:25의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된 ‘새 교회’를 의미하고, 거기서 태어난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합니다. 반면 창5:1-4에서 다시 등장하는 ‘사람과 그의 아내’와 ‘셋을 낳음’은 ‘태고교회의 첫 후대’를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는 명시합니다. 그는 같은 사람과 사건이 다시 언급되는 것처럼 보여도 속뜻에서는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반복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AC.435)

 

따라서 창4와 창5를 하나의 단순한 직선적 계보로 이어 붙이면 속뜻에서 중요한 차이를 놓치게 됩니다. 창4는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발생과 그로부터 나온 여러 이단과 교리적 계열,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서 새 교회가 일어나는 흐름을 다룹니다. 그 마지막에 등장하는 셋은 바로 그 문맥 안에서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반면 창5는 태고교회 자체와 그 후대의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다루며, 여기의 셋은 태고교회에 이어지는 두 번째 교회입니다. AC.460-463의 장 전체 개요와 AC.481-484의 설명도 이 흐름을 일관되게 보여 줍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현상이 ‘셋’ 하나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창4에도 ‘에녹’과 ‘라멕’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과 ‘라멕’이 나옵니다. 그러나 AC.485는 이들도 각각 서로 다른 교회들이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속뜻에서 같은 교회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서로 다른 교리를 가진 교회들이 같은 이름을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름 자체보다 그 이름이 놓인 문맥과 그 교회가 표상하는 내적 상태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창4부터 계속 살펴 온 한 가지 질문에도 중요한 빛을 던집니다. 곧 ‘가인 계열이 태고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갔다면, 태고교회 자체와 그 후대는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AC.485와 AC.435는 적어도 창4의 셋과 창5의 셋을 하나의 동일한 교회 계열로 합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창4의 마지막은 그 장에서 전개된 교회적 흐름의 결론이고, 창5는 태고교회와 그 첫 후대로부터 다시 시작되는 별도의 교회적 계승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4와 창5의 모든 교회들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같은 시기에 나란히 존재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85가 직접 확정하는 것은 ‘같은 이름이 서로 다른 교회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며, AC.435가 확정하는 것은 창4:25의 새 교회와 창5:1-4의 태고교회 첫 후대가 서로 다른 문맥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만으로도 두 장을 단순히 하나의 직선적인 교회 계보로 읽는 것은 어렵습니다. 두 계열의 시간적 관계와 서로의 관계는 앞으로 나오는 설명들을 더 모아 보면서 판단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창5의 셋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앞의 AC.484에서 보았듯이 이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사랑이 태고교회에서처럼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으나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창5의 셋은 창4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와 회복이라는 문맥 가운데 나타난 셋과 달리, 태고교회 자체로부터 이어지면서 그 천적 질서가 조금씩 변화해 가는 과정 가운데 나타난 교회입니다.

 

결국 AC.485는 창4와 창5를 읽는 우리의 지도를 수정해 주는 글입니다. 같은 이름이 반복된다고 같은 교회가 아니며, 같은 ‘사람과 그의 아내가 셋을 낳았다’는 서술이 반복된다고 같은 교회적 사건을 단순히 되풀이한 것도 아닙니다. 말씀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이름과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교회와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담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5를 읽을 때에는 창4의 이름들을 그대로 연결하기보다,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새로운 교회적 계승의 흐름 안에서 각각의 이름과 상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AC.485 해설)

 

 

 

창5:4, AC.486, '날들과 해들,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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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4, ‘사랑이 여전히 신앙과 결합되어 있었던 셋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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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

‘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자기의 형상을 따라 낳고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고 한 데서 분명합니다. 여기서 ‘모양’(likeness)은 신앙과 관계되고, ‘형상’(image)은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 교회가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에 있어서 태고교회와 같지는 않았다는 것은 바로 앞에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고 한 데서 분명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의 모양은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신앙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That the church called “Seth” was very nearly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is evident from its being said that the man begat in his likeness, according to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the term “likeness” having relation to faith, and “image” to love; for that this church was not like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regard to love and its derivative faith, is plain from its being said just before,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as was said above, so that the likeness of this man was to the spiritual man of the sixth day, that is, love was not so much the principal, but still faith was conjoined with love.

 

해설

AC.484는 앞의 AC.481에서 ‘셋’이라는 새 교회가 태고교회와 ‘아주 다르지는 않았다’고 한 말의 의미를 한층 정확하게 밝혀 줍니다. 셋 교회는 태고교회의 성격을 상당히 이어받았지만 태고교회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차이는 바로 ‘사랑’과 ‘신앙’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에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사람은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참인지를 퍼셉션했으며, 따라서 신앙은 사랑과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앞의 AC.479에서도 천적 인간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장 탁월한 의미에서 ‘사람’이 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본래적인 천적 질서입니다.

 

그런데 셋 교회에 이르러서는 미묘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사랑이 더 이상 이전처럼 압도적으로 ‘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AC.484의 마지막 말 그대로 ‘여전히 신앙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셋 교회는 태고교회의 완전한 천적 상태와는 차이가 있었지만,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라는 본질적인 질서는 아직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창4의 가인과 비교하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것은 사랑 또는 체어리티로부터 분리된 신앙이었습니다. 반면 창5의 셋 교회에서는 사랑이 이전만큼 주된 위치에 있지는 않았어도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와 차이가 있지만 그 방향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우위가 약해지면서도 신앙과 사랑의 결합 자체는 유지되는 방향입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창4의 계열과 창5의 계열을 함께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셋 교회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창1의 거듭남의 질서에서 여섯째 날은 사람이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 이른 상태이지만, 완전한 천적 상태를 의미하는 일곱째 날, 곧 안식일과는 구별됩니다. AC.480에서는 여섯째 날의 끝에서 일곱째 날이 시작되며,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484가 셋 교회를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연결하는 것은, 셋 교회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그대로 되풀이한 교회가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다른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481의 ‘모양’과 ‘형상’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여기서는 ‘모양’이 신앙에, ‘형상’이 사랑에 관계됩니다. 중요한 것은 두 요소가 모두 셋 교회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사라지고 신앙만 남은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이 여전히 함께 있었습니다. 다만 그 관계에서 사랑이 태고교회의 가장 완전한 상태에서처럼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셋 교회를 단순히 ‘태고교회와 비슷한 또 하나의 교회’라고만 이해하면 이 글의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은’ 그 차이를 정확히 짚고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의 결합은 유지되었으나 사랑의 주도성이 약해졌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후대 교회들이 어떻게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점차 다른 퍼셉션과 영적 상태로 옮겨 가는지를 보여 주는 첫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입니다.

 

결국 AC.484에서 셋은 단절보다는 ‘계승 속의 변화’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앞선 교회의 모든 상태가 그대로 반복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 안에 있던 선과 진리를 다음 교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셋 교회에서는 태고교회의 가장 높은 천적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가장 중요한 질서 하나, 곧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독립하지 않고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는 질서는 보존되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셋 교회는 창4의 가인으로 표상된 길과 뚜렷이 구별됩니다. (AC.484 해설)

 

 

 

창5:3, AC.485,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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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3, ‘퍼셉션(perception)의 차이로 구별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뒤이어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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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

뒤이어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렛’(Jared), ‘에녹’(Enoch), ‘므두셀라’(Methuselah), ‘라멕’(Lamech), ‘노아’(Noah)라는 이름들은 그만큼 많은 교회들을 의미하며, 그 가운데 첫째이자 으뜸이 되는 교회는 ‘사람’(man)이라 하였습니다. 이 교회들의 주된 특징은 퍼셉션이었으므로, 당시 교회들 사이의 차이는 주로 퍼셉션의 차이였습니다. 여기서 퍼셉션에 관하여 한 가지 언급하자면, 보편 천국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외에는 아무것도 다스리지 않으며, 그 퍼셉션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고 무수한 차이가 있어서 서로 같은 퍼셉션을 누리는 두 공동체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곳에 존재하는 퍼셉션들은 유와 종으로 구별되는데, 유는 무수하며 각 유에 속한 종들 역시 무수합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By the names which follow: “Seth,” “Enosh,” “Kenan,” “Mahalalel,” “Jared,” “Enoch,” “Methuselah,” “Lamech,” “Noah,” are signified so many churches, of which the first and principal was called “man.” The chief characteristic of these churches was perception, wherefore the differences of the churches of that time were chiefly differences of perception. I may here mention concerning perception, that in the universal heaven there reigns nothing but a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which is such as cannot be described, with innumerable differences, so that no two societies enjoy similar perception; the perceptions there existing are distinguished into genera and species, and the genera are innumerable, and the species of each genus are likewise innumerable; but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이처럼 무수한 유가 있고, 각 유 안에도 무수한 종이 있으며, 그 종들 안에는 더욱 무수한 변이들이 있으므로, 오늘날 세상이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얼마나 적게 알고 있는지, 실로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만큼 적게 알고 있는지가 분명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퍼셉션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그것에 관하여 들어도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의 유와 종의 차이에 있어서까지 주님의 천적 나라를 표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퍼셉션의 본질이 가장 일반적인 면에서조차 완전히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이 교회들의 퍼셉션의 유와 종에 관하여 설명한다면 필연적으로 어둡고 낯설게 보일 것입니다. 당시 그들은 집안(houses), 일가(families), 민족(nations)으로 구별되어 있었고, 퍼셉션의 유와 종이 존재하며 부모로부터 타고난 성향이 전해지는 것과 꼭 같이 이어지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집안과 일가 안에서 혼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에 속했던 이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거주합니다. Since then there are innumerable genera, and innumerable species in each genus, and still more innumerable varieties in the species, it is evident how little—so little that it is almost nothing—the world at this day knows concerning things celestial and spiritual, since they do not know even what perception is, and if they are told, they do not believe that any such thing exists; and so with other things also. The most ancient church represented the celestial kingdom of the Lord, even as to the generic and specific differences of perception; but whereas the nature of perception, even in its most general aspect,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any account of the genera and species of the perceptions of these churches would necessarily appear dark and strange. They were at that time distinguished into houses, families, and nations, and contracted marriage within their houses and families, in order that genera and species of perceptions might exist, and be derived from the parents precisely as are the propagations of native character; wherefore those who were of the most ancient church dwell together in heaven.

 

해설

AC.483은 창5에 나오는 이름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는 속뜻에서 단순히 한 가문의 아홉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많은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의 첫째이자 으뜸은 ‘사람’이라 하는 태고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후대 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적 계보입니다.

 

그런데 이 여러 교회를 서로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퍼셉션’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서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성경의 가르침이나 교리, 양심적 판단 등을 통해 분별하는 것이 익숙하지만,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지각하는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태고교회가 똑같은 퍼셉션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마다 퍼셉션의 성격과 정도가 달랐습니다. 따라서 셋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교회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단순히 교리의 차이보다 먼저 ‘퍼셉션의 차이’를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천국의 구조와 연결합니다. 천국 전체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다스리지만, 그것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서로 완전히 같은 퍼셉션을 가진 두 천국 공동체가 없을 만큼 다양하며, 그 차이는 유와 종, 그리고 다시 그 안의 무수한 변이로 펼쳐집니다. 따라서 천국의 하나 됨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차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데서 생깁니다.

 

태고교회도 바로 이러한 주님의 천적 나라를 표상했습니다. 하나의 태고교회 안에 집안과 일가와 민족이 있었고, 그 각각은 서로 다른 고유한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앞서 AC.470-471에서 살펴본 ‘집안-일가-민족’의 구조를 한층 더 깊게 설명해 줍니다. 그들의 구별은 단순히 생활 편의를 위한 사회적·행정적 구획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다른 퍼셉션의 유와 종이 보존되고 펼쳐지는 하나의 영적 질서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AC.483은 당시 사람들이 자기들의 집안과 일가 안에서 혼인했다고 설명합니다. 오늘날의 가족제도나 혼인관계를 그대로 이 시대에 투사하여 이해하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이 글의 초점은 혈연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당시의 퍼셉션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 타고난 성향이 전해지는 것처럼 이어졌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비슷한 내적 성향을 가진 집안과 일가 안에서 혼인이 이루어짐으로써 특정한 퍼셉션의 유와 종이 계속 보존되고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창5의 계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하나 더 줍니다. 셋, 에노스, 게난 등의 교회가 앞선 교회와 전혀 무관하게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앞선 교회로부터 어떤 내적 성향과 퍼셉션을 이어받으면서도 각각 고유한 상태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5의 ‘낳고’라는 표현 역시 단순한 생물학적 출산을 넘어, 한 교회로부터 다음 교회가 파생되고 그 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이 형성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태고교회에 속했던 이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거주한다’는 말은 지상에서의 이러한 질서가 단순히 일시적인 사회 형태가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의 내적 성향과 퍼셉션이 서로 어울렸기 때문에 지상에서도 함께 살았고, 사후에도 서로 어울리는 이들이 하나의 천국 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지상의 집안과 일가와 민족의 구별이 그대로 천국의 혈연집단으로 보존된다는 뜻이라기보다, 그들을 하나로 묶었던 내적 사랑과 퍼셉션의 유사성이 천국에서도 공동체를 이루게 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AC.483은 창5를 단순한 장수 족보에서 ‘퍼셉션의 역사’로 바꾸어 읽게 합니다. 이름들은 서로 다른 교회들을, 연수는 그 교회들의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내며, 그 차이의 중심에는 퍼셉션이 있습니다. 하나의 태고교회로부터 서로 다른 퍼셉션을 가진 여러 교회가 생겨나고, 그 다양성이 다시 주님의 천적 나라의 무수한 다양성을 표상했습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는 단순히 ‘누가 누구를 낳았는가’를 기록한 목록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나의 교회 안에서 얼마나 다양하고 정교한 천적 질서를 이루셨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이기도 합니다. (AC.483 해설)

 

 

 

창5:3, AC.484, ‘사랑이 여전히 신앙과 결합되어 있었던 셋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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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2,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는 교회의 상태를 의미’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이 장에 나오는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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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

이 장에 나오는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문자적 의미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이것들을 세상의 실제 연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12장에 이르기까지는 문자적 의미에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의 역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전체적으로나 하나하나에 있어서나 모두 다른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름들뿐 아니라 숫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에는 숫자 ‘셋’이 자주 나오고 숫자 ‘일곱’도 자주 나오는데, 이 숫자들이 나오는 곳마다 시간이나 그 밖의 것들이 포함하거나 표상하는 상태와 관련하여 어떤 거룩한 것 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가장 짧은 시간의 간격에서도 가장 긴 시간의 간격에서와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부분들이 전체에 속하는 것처럼 가장 작은 것들도 가장 큰 것들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전체가 부분들로부터, 또는 가장 큰 것이 가장 작은 것들로부터 합당하게 이루어지려면 서로 간에 유사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What the “years” and the “numbers of years,” which occur in this chapter, signify in the internal sense, has hitherto been unknown. Those who abide in the literal sense suppose them to be secular years, whereas from this to the twelfth chapter there is nothing historical according to its appearance in the literal sense, but all things in general and every single thing in particular contain other matters. And this is the case not only with the names, but also with the numbers. In the Word frequent mention is made of the number three, and also of the number seven, and wheresoever they occur they signify something holy or most sacred in regard to the states which the times or other things involve or represent; and they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n the least intervals of time as in the greatest, for as the parts belong to the whole, so the least things belong to the greatest, for there must be a likeness in order that the whole may properly come forth from the parts, or the greatest from its leasts. Thus in Isaiah: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해와 같이 삼 년 내에 모압의 영화와 그 큰 무리가 능욕을 당할지라 (사16:14) Now hath Jehovah spoken, saying, Within three years, as the years of a hireling, and the glory of Moab shall be rendered worthless. (Isa. 16:14)

 

주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품꾼의 정한 기한 같이 일 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사21:16) Thus hath the Lord said unto me, Within a year, according to the years of a hireling, and all the glory of Kedar shall be consumed, (Isa. 21:16)

 

여기서는 가장 짧은 시간의 간격과 가장 긴 시간의 간격이 모두 의미됩니다. 하박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where both the least and the greatest intervals are signified. In Habakkuk: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합3:2) Jehovah, I have heard thy renown, and was afraid; O Jehovah, revive thy work in the midst of the years, in the midst of the years make known, (Hab. 3:2)

 

여기서 ‘수년 내’(midst of the years)는 주님의 오심을 의미합니다. 더 짧은 시간의 간격에서는 사람이 거듭날 때와 같은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고, 더 긴 시간의 간격에서는 주님의 교회가 새롭게 일어날 때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내가 구속할 해’(year of the redeemed)라고도 합니다. where the “midst of the years” signifies the Lord’s advent. In lesser intervals it signifies every coming of the Lord, as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in greater, when the church of the Lord is arising anew. It is likewise called the “year of the redeemed,”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사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마찬가지로 사탄이 결박되어 있을 ‘천 년’(계20:2, 7)과 첫째 부활의 ‘천 년’(계20:4-6)도 결코 천 년이라는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보여 준 것처럼 ‘날들’(days)이 상태들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듯이 ‘해들’(years)도 그러하며, 그 상태들은 그 연수에 의해 묘사됩니다. So also the thousand years in which Satan was to be bound (Rev. 20:2, 7), and the thousand years of the first resurrection (Rev. 20:4–6), by no means signify a thousand years, but their states; for as “days” are used to express states, as shown above, so also are “years,” and the states are described by the number of the years.

 

2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7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계20:2, 7)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리라 (계20:4-6)

 

그러므로 이 장의 시간들 역시 상태들을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각 교회는 타고난 성향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향의 차이에 따라 다른 교회들과 서로 다른 퍼셉션의 상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times in this chapter also involve states; for every church was in a different state of perception from the rest,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genius, hereditary and acquired.

 

해설

AC.482는 창5의 긴 수명과 숫자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정면으로 다루는 중요한 글입니다. 아담 130세, 이후에 이어지는 800년, 807년, 815년 등의 숫자를 오늘날의 연대기처럼 읽기 전에, 스베덴보리는 먼저 말씀에서 ‘시간’과 ‘숫자’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창5의 ‘해’는 속뜻에서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며, 그 연수의 숫자는 그 상태의 어떠함을 묘사합니다.

 

특히 이 글에는 매우 강한 문장이 나옵니다. ‘여기서부터 12장에 이르기까지는 문자적 의미에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의 역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78에서 ‘아담’이 인류 최초의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가리킨다고 한 설명과 같은 방향입니다. 창5의 이름들이 여러 교회를 의미한다면, 그 이름들 옆에 붙어 있는 연수 역시 그 교회에 속한 개인들의 생물학적 수명을 기록한 숫자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름뿐 아니라 ‘숫자들도’ 다른 것들을 담고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다고 말씀의 숫자를 임의로 상징화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482가 예로 드는 ‘셋’과 ‘일곱’처럼 말씀의 숫자에는 일정한 영적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숫자가 나타나는 문맥 속에서 그때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에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동일한 영적 질서가 짧은 시간에서도, 긴 시간에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숫자가 서로 다른 시간 규모에서 사용되더라도 그 안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는 유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수년 내’가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의 오심’으로 풀이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오심은 한 가지 규모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삶이라는 작은 규모에서는 사람이 거듭날 때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오시는 것을 의미할 수 있고, 교회 전체라는 큰 규모에서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때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규모는 다르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적 질서는 서로 상응합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계20의 ‘천 년’도 문자 그대로 1,000년이라는 기간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AC.482는 사탄이 결박되는 천 년과 첫째 부활의 천 년이 ‘결코 천 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태들을 의미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말씀의 예언적·상응적 시간 표현을 읽을 때 중요한 질문은 ‘정확히 몇 년인가?’만이 아니라 ‘이 기간이 어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창5 전체를 읽는 중요한 열쇠를 줍니다. 각각의 교회는 ‘서로 다른 퍼셉션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각 교회의 타고난 성향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향에 따라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창5에 나타나는 서로 다른 연수는 단순히 ‘누가 몇 살까지 살았는가’를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아담에서 셋, 에노스, 게난 등으로 이어지는 여러 교회가 어떤 퍼셉션의 상태에 있었는지를 표현하는 숫자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81의 ‘백삼십 년’도 이해의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태고교회의 한 개인이 정확히 130년을 산 뒤 아들을 낳았다는 시간 정보가 속뜻의 중심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셋’이라 하는 새 교회가 일어나기까지의 상태와 과정을 나타냅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숫자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설명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개별 숫자의 의미를 앞질러 확정하기보다, 먼저 ‘창5의 연수는 교회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AC.482의 해석 원리를 분명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창5의 족보는 이름과 숫자가 결합된 하나의 내적 역사입니다. 이름들은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들을 나타내고, 그 옆의 연수들은 그 교회들의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냅니다. 문자에서는 수백 년에 이르는 인간의 수명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태고교회가 여러 후대 교회로 이어지면서 그 퍼셉션과 내적 상태가 어떻게 달라져 갔는지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AC.482 해설)

 

 

 

창5:3, AC.483, ‘퍼셉션(perception)의 차이로 구별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뒤이어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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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1, 창5:3, '태고교회와 닮은 새 교회 셋' (AC.481-485)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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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백삼십 년’(a hundred and thirty years)은 새 교회가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는 태고교회와 아주 다르지는 않았으므로 ‘자기의 모양대로, 자기의 형상을 따라 낳았다’(into its likeness, and after its image)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모양’(likeness)은 신앙과 관계되고, ‘형상’(image)은 사랑과 관계됩니다. 이 교회를 ‘셋’(Seth)이라 하였습니다. By a “hundred and thirty years” there is signified the time before the rise of a new church, which, being not very unlike the most ancient, is said to be born “into its likeness, and after its image”; but the term “likeness” has relation to faith, and “image” to love. This church was called “Seth.”

 

해설

AC.481부터 창5:3이 시작됩니다. 앞의 창5:1-2가 태고교회 자체의 어떠함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부터는 그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후대 교회의 계승이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아담이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는 말씀은 속뜻으로 한 아버지가 백삼십 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보다, 태고교회 이후 그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먼저 ‘백삼십 년’은 문자 그대로의 연대가 아니라 ‘새 교회가 일어나기까지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30이라는 숫자를 곧바로 우리가 익숙한 역사적 연수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글에서 그 숫자가 어떤 기간, 곧 태고교회로부터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기까지의 상태와 과정에 관계된다는 점을 먼저 밝힙니다. 이 숫자의 구체적인 의미는 이어지는 글에서 더 설명됩니다.

 

새롭게 일어난 교회가 바로 ‘셋’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이 교회가 태고교회와 ‘아주 다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셋은 태고교회와 완전히 단절된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가 아니라, 그 교회의 본질적인 성격을 상당 부분 이어받은 새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가 ‘자기의 모양대로, 자기의 형상을 따라’ 태어났다고 표현합니다. 창5의 계보가 단순한 생물학적 혈통의 기록이 아니라 교회들의 발생과 계승을 보여 주는 기록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모양’과 ‘형상’의 설명입니다. 앞의 AC.473에서는 창5:1의 ‘하나님의 모양’이 천적 인간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모양’이 신앙과, ‘형상’이 사랑과 관계된다고 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모양 = 신앙, 형상 = 사랑’이라는 고정된 사전식 대응으로 받아들이면 앞의 설명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의 의미는 언제나 해당 문맥과 관계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 표상된 태고교회와 그로부터 나온 ‘셋’이라는 새 교회의 유사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핵심은 셋이라는 새 교회 안에도 태고교회를 이루었던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이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앞의 창5:2에서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어 하나의 ‘사람’이 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셋은 그 태고교회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그 신앙과 사랑의 성격을 닮은 교회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말씀에서 ‘자기의 모양대로, 자기의 형상을 따라’ 낳았다고 한 속뜻입니다.

 

이 대목은 창4의 ‘셋’과 창5의 ‘셋’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지금 AC.481만으로 그 문제를 모두 결론지을 필요는 없지만, 이어지는 AC.485에서 스베덴보리는 두 ‘셋’이 서로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고 명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선 창5의 셋이 ‘태고교회와 아주 다르지는 않았던 새 교회’라는 사실을 붙들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AC.482-485를 따라가면 이 새 교회가 태고교회와 무엇을 공유하면서도 어떻게 구별되는지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결국 AC.481은 창5의 계보를 읽는 방향을 다시 한번 보여 줍니다. 한 사람이 늦은 나이에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다시 다음 세대를 낳았다는 족보의 표면 아래에는, 주님의 섭리 가운데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가 일어나고 그 교회 안에 앞선 교회의 신앙과 사랑이 이어지는 내적 역사가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쇠퇴해 간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 안의 모든 것을 사라지게 두시는 것이 아니라, 다음 교회가 받아 이어 갈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창5:3의 ‘셋’은 바로 그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보여 줍니다. (AC.481 해설)

 

 

 

창5:3, AC.482,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는 교회의 상태를 의미’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이 장에 나오는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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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0, 창5:2, ‘여섯째 날의 끝과 안식일의 시작에 이른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일컬어졌다는 것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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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일컬어졌다는 것은 1장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창1:26-27). 곧 여섯째 날의 끝인데, 이는 안식일의 저녁, 다시 말해 안식일 또는 일곱째 날이 시작되는 때에 해당합니다. 앞에서 보여 준 것처럼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은 천적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That they were called “man” in the day that they were created, appears also from the first chapter (Gen.1:26–27), that is, at the end of the sixth day, which answers to the evening of the sabbath, or when the sabbath or seventh day began; for the seventh day, or sabbath, is the celestial man, as was shown above.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6, 27)

 

해설

AC.480은 창5:2의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라는 표현을 창1:26-27의 여섯째 날과 연결합니다. 창1에서 ‘사람’이 등장하는 때는 여섯째 날의 마지막이며, 곧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눈앞에 둔 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날’은 단순히 시간의 하루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하나의 영적 상태가 완성되고 다음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섯째 날은 거듭남의 싸움이 거의 완성되는 단계입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악과 거짓에 맞서고,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아직 여섯째 날인 동안에는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 상태가 완성되고 일곱째 날이 시작되면서 사람은 천적 인간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AC.480이 ‘사람’이라는 이름을 여섯째 날의 끝과 일곱째 날의 시작에 연결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날의 끝을 ‘안식일의 저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이 완전히 끊어진 두 상태가 아니라, 앞의 상태가 완성되면서 다음 상태가 열리는 연속적인 거듭남의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전혀 다른 존재인 천적 인간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영적 인간 안에 이루어 오신 일을 완성하시면서 그를 천적 상태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72-479에서 이어져 온 설명을 다시 하나로 묶어 줍니다. ‘창조하다’는 영적 인간과 관련되고, ‘만들다’는 천적 인간과 관련되며,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은 천적 인간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로 나타나는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었을 때 그 둘을 함께 ‘사람’이라 합니다. 이제 AC.480은 이 모든 과정이 창1의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 넘어가는 구조 안에 이미 들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안식일’의 의미도 중요합니다. 안식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듭남의 앞선 단계에서는 사람이 마치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느끼지만,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질서 안에 더욱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서로 맞서지 않고 하나를 이루며, 선을 행하는 것이 억지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 됩니다. 이러한 천적 상태가 바로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이 의미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창5:2의 말씀은 창1의 창조 이야기를 다시 불러옵니다. 창1의 여섯 날은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이며, 그 과정은 일곱째 날의 천적 상태를 향합니다. 창5는 그 전체 과정을 길게 반복하지 않고, ‘창조되던 날’과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 완성된 태고교회의 상태를 다시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AC.480은 창1과 창5가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창1에서 여섯 날에 걸쳐 묘사된 거듭남은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에 이르고, 창5는 바로 그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교회로부터 후대의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인간의 명칭이 아니라, 주님께서 거듭남의 전 과정을 통하여 신앙과 사랑을 결합하시고 마침내 안식의 질서 안으로 이끄신 교회의 상태를 담고 있습니다. (AC.480 해설)

 

 

 

AC.481, 창5:3, '태고교회와 닮은 새 교회 셋' (AC.481-485)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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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9, 창5:2, ‘흙에서 취하여 거듭나고 참된 사람이 된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9말씀에서 ‘이름을 부르다’(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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