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8 심화

1. 인간의 황폐(the vastation of man)

 

AC.18해설 중 황폐를 설명하는 데를 보면, 욕정과 거짓들이 먼저 약화되고,제거되어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선 이 약화된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고, 그래서 더욱 제거된다는 게 가능할까 싶습니다. 15돌아온 탕자가 스스로 돌이키는 장면이 이런 건가요? 구체적으로 좀 알고 싶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그 의문은 매우 현실적인 질문입니다. ‘욕정과 거짓이 약화되고 제거된다’는 말은 글로 읽으면 그럴듯하지만, 실제 인간 경험을 생각해 보면,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바로 이 지점 때문에 AC에서 ‘황폐(vastation, desolation)라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먼저 ‘약화’와 ‘제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제거’는 ‘완전히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의 악한 성향이나 욕정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여러 곳에서 인간의 본성에는 여전히 그런 것들이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습니다. 거듭남 이전에는 그것들이 ‘사람을 지배’하지만, 거듭남 이후에는 그것들이 ‘더 이상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제거된다’는 표현을 사용할 때 사실상 ‘지배력을 잃는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여기서 ‘약화된다’는 표현이 먼저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것입니다. 욕정이나 거짓이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힘을 잃어 가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명예욕이 강했다고 합시다. 이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면 크게 분노하고, 사람을 경쟁자로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람은 점점 그런 반응을 덜 하게 됩니다. 여전히 마음속에는 그런 감정이 올라올 수 있지만, 이전처럼 바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약화’입니다. 욕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삶을 지배하는 힘이 줄어든 상태입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AC에서 말하는 ‘황폐’입니다. 황폐는 단순한 고통이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말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의로운 존재라고 생각하다가, 어떤 사건을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욕정과 이기심을 분명히 보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자신을 의지하기보다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욕정의 힘이 점점 약해집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눅15의 탕자 이야기는 바로 이런 과정을 아주 잘 보여 주는 예입니다. 탕자는 처음에는 자유와 즐거움을 찾아 집을 떠납니다. 그때 그는 자기 선택이 옳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이 무너지고, 돼지를 치는 자리까지 내려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구절이 ‘이에 스스로 돌이켜’라는 부분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히 마음이 갑자기 착해진 순간이 아니라, ‘자기 삶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깨닫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의미에서 ‘황폐’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탕자의 마음을 조금 더 자세히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배고프고, 여전히 살 길을 찾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자기 방식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욕정의 지배력이 약해집니다. 이전에는 자기 욕망이 삶의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더 이상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거듭날 때, 욕정이 단번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욕정이 중심 자리에서 밀려나는 과정’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이 ‘약화’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욕정은 더 이상 삶을 결정하는 힘을 갖지 못합니다. 이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제거된다’고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욕정이 존재 자체를 잃는 것이 아니라 ‘지배력을 잃고 주변으로 밀려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비유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시다. 그 습관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그 습관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점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해집니다. 그러면 그 습관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지만, 더 이상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약화되고 제거되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AC에서 말하는 황폐와 욕정의 약화는 단순히 도덕적으로 착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무력함을 보게 되고, 그때 비로소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신 의문, 즉 ‘정말 욕정이 약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인간 혼자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욕정의 힘은 조금씩 약해집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삶의 중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바로 그 과정을 성경은 여러 이야기로 보여 주는데, 탕자의 귀향 이야기도 그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18, 심화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과 ‘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18.심화 2. 라틴어 ‘vastatio’의 영역 ‘vastation’과 ‘desolation’(혹은 ‘devastation’)의 비교 AC 포츠역 영어 ‘vastation’은 현대 사전엔 잘 안 나오고, 대신 ‘desolation’이 나오네요. ‘vast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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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faces of the deep), '황폐'(vastation)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 ‘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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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 혼돈 공허’, 그리고 흑암이 나오는데요, 제 경우를 보더라도 저는 심지어 모태신앙임에도 불구, 어린, 그리고 청소년 시절, 속 사람에 대해 전혀 몰랐고,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서는 비교적 최근, 그러니까 나이 57세 되기까지 그것이 주님의 신성이라는 걸 들어 본 적도 없어요. 평생 교회를 떠나본 적 없이 십자가 복음, 대속, 구원 등 이런 것만 알았지요. 거듭남 역시 예수님 영접 기도와 몇몇 성경 구절 굳게 믿으면, 그러니까 그 교리를 굳게 붙들며 살면 거듭나는 건 줄 알았습니다. 오히려 전도 많이 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큰 줄 알았고요. 저 같은 사람도 이런데 교회 밖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얼마나 더 요원, 오랜 시간이 걸릴까요? 외인이든 지인 및 혈연, 핏줄이든 말이지요... 저는 정원 목사의 책을 통해, 그리고 수도원을 통해 결국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되었지만, 안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의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요?

 

목사님께서 느끼신 마음은 아주 자연스럽고 또 깊은 목회적 고민입니다. AC.17에서 말하는 ‘혼돈’, ‘공허’, ‘흑암’을 자기 삶과 교회 현실에 대입해 보시면,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 빛을 보게 되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사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러 곳에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여러 단락으로 차분히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AC.17에서 말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이 무엇인지부터 다시 짚어 보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죄악 상태라고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질서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즉 사람의 삶에는 많은 생각과 감정이 있지만, 무엇이 참되고 무엇이 선한지에 대한 영적 질서가 아직 분명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혼돈’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공허’는 진리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태, ‘흑암’은 그 결과, 어리석음과 무지, 곧 주님 신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 그리고 그로 인한 영적, 천적 삶에 대한 걸 하나도 모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개인 경험은 사실 매우 전형적인 예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지만, 속 사람이나 거듭남의 구조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잘못이라기보다 ‘교회의 가르침이 주로 외적 신앙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교회의 ‘마지막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신앙의 핵심이 사랑과 거듭남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대신 교리나 외적 신앙 고백이 중심이 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판단할 때, ‘그 사람이 어떤 교리를 알고 있었는가’보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더 중요하게 봅니다. 이것은 목사님께서 이미 언급하신 ‘천국과 지옥 319번 글에서도 분명히 나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양심적으로 선하게 살았다면, 그는 이미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속 사람’이나 ‘거듭남’이라는 말을 몰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remains), 즉 선과 진리의 씨앗을 남겨 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린 시절에 경험한 선한 감정, 진실한 순간, 양심의 울림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람의 의식에서는 거의 잊힐 수 있지만, 주님은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적절한 때에 그것을 사용하여 사람을 깨우십니다. 목사님께서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된 과정도 사실 이런 섭리 속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한 가지를 매우 분명히 말합니다. 인간이 ‘빛을 인위적으로 켜 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빛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 역할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억지로 빛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빛이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아직 깊은 영적 진리를 이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 갑자기 깊은 신학을 설명하면 오히려 거부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진실하게 살도록 격려하고, 선을 행하도록 돕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 속에서 주님이 때를 따라 빛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주님의 섭리(providence)’라고 설명합니다. 섭리는 매우 부드럽고 점진적으로 역사합니다.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면서 조금씩 인도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젊은 나이에 빛을 만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인생 후반에 깨닫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을 떠난 뒤 영계에서 더 분명한 빛을 만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더 명확히 배우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안타까움,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늦게 빛을 보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각 사람의 삶과 자유를 존중하면서 가장 적절한 길로 인도하신다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AC 리딩 설교 자체가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바로 ‘‘빛이 있으라는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빛이 언제 켜질지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당장 빛을 줄 수는 없지만, 주님은 각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이미 씨앗을 심어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때가 되면 반드시 빛을 향해 자라납니다. 우리의 역할은 그 씨앗을 억지로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이 자랄 수 있는 선한 토양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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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본문 중,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의 차이를, 해설에서는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음, 곧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 부여하는 것을,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걸 가리킨다고 했는데, 이 부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네, 이 부분은 AC.16에서 아주 짧게 지나가지만, 사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목사님께서 적어 주신 해설 문장, 곧 ‘창조는 생명의 근원을 주시는 것,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설명은 방향이 아주 정확합니다. 다만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여전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니, 조금 더 천천히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큰 원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들도 그냥 수사적으로 겹쳐 쓴다고 보지 않습니다. 특히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처럼 나란히 오는 표현은, 다 비슷해 보여도 각각 다른 국면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즉 주님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한 단어로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세 동사를 통해 그 과정의 깊이와 순서를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6의 핵심은, 인간의 새 창조가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시작과 질서와 구현을 가진 전인적 과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창조하다(create)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없던 생명의 원리를 주님께서 넣어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지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 열릴 수 있는 영적 생명입니다. 사람이 전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중심으로만 살다가, 어느 순간 참된 선과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이 이대로는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하나님 쪽으로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 이 모든 출발이 ‘창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결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씨를 심으시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전혀 생명이 없던 땅에 처음으로 씨가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완전히 어두운 방에 처음으로 빛이 켜지는 것과 같습니다. 방의 구조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그 빛으로 무엇을 할지도 아직 모르지만, 일단 빛이 들어온 것 자체가 결정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다음 ‘형성하다, 짓다(form)는 그렇게 시작된 생명에 모양과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씨가 들어왔다고 바로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듯, 빛이 켜졌다고 곧바로 삶이 정돈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안에 들어온 진리와 선의 씨앗은 자라기 위해 배열과 분별과 구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형성, 곧 지음은 인간 안에서 무질서하게 섞여 있던 것들을 나누고, 위아래를 세우고, 중심과 주변을 정리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처음에는 종교적 열심과 자기 의, 참된 순종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 정말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은 그 사람 안에 분별을 세워 주십니다.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 속하는지, 무엇이 기억 지식이고, 무엇이 살아 있는 진리인지, 무엇이 자기 본성의 욕구이고, 무엇이 주님께서 주시는 선한 감동인지 조금씩 구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형성이고, 지음입니다. 그러므로 형성은 이미 주어진 생명을 ‘아름답고 바른 형식’ 안에 놓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설계도 없이 쌓여 있던 자재들이 하나의 집 구조를 이루어 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또는 태아가 단순한 생명 덩어리가 아니라 점차 눈, 귀, 손, 발을 갖춘 인격적 형체로 자라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들다(make)는 그렇게 창조되고 형성된 것이 실제 삶에서 구현되고 굳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지 계획이나 가능성의 단계가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 그것이 행동과 습관과 성품이 되어 가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진리가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선을 좋아한다고 해서 당장 선한 삶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진리와 선이 말과 선택과 관계와 습관 속에서 실제로 ‘만들어져’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와 형성의 단계에서는 이미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를 상하게 한 사람을 대할 때, 분노 대신 절제하고, 보복 대신 인내하고, 마음속 판단을 내려놓는 쪽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그 진리가 그의 삶 안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make는 삶의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는 차원입니다. 집의 비유로 말하면, 설계와 구조가 끝난 후 실제로 그 집에 사람이 살고, 방이 쓰이고, 문이 열리고 닫히고, 불이 켜지고 꺼지는 단계입니다. 즉 살아 있는 사용의 단계입니다.

 

이 세 단어를 한 번에 붙들면, 스베덴보리가 왜 굳이 셋을 구별했는지가 더 또렷해집니다. ‘창조’는 시작의 은혜이고, ‘형성’은 질서의 은혜이며, ‘만듦’은 구현의 은혜입니다. 창조가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형성이 없으면 시작된 것이 무질서하게 흩어지며, 만듦이 없으면 모든 것이 관념과 가능성에만 머물고 실제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하셨다’는 한 문장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심으시고, 그 생명을 정리하시고, 마침내 그것이 삶이 되게 하시는 전 과정을 포함합니다.

 

초심자에게는 이렇게 풀어도 이해가 쉽습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심으시고’(창조), 그다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정리하시며’(형성), 마지막에는 그것이 실제 성품과 행동이 되게 ‘빚어 가십니다’(만듦). 또는 신앙의 말로 하면, 주님은 먼저 우리를 깨우시고, 그다음 가르치시고, 마지막에는 살게 하십니다. 이 셋이 합쳐져야 비로소 사람이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AC.16의 이 구별은 단지 단어 공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안에 겨우 씨앗만 들어온 상태인데, 벌써 열매 맺지 못한다고 낙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주님은 먼저 창조하시고, 그다음 형성하시고, 그다음 만들어 가신다고. 그러므로 아직 질서가 덜 잡혀 있거나, 실제 삶이 더디게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단계가 다 주님의 일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사람은 조급함 대신 신뢰를 배우게 됩니다.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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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 심화

1. 주님 예수 그리스도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주님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키겠다고 말합니다.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익숙한 독자라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삼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님으로 높인다는 뜻인가?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삼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가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와 크게 달라지는 지점은 삼위가 어디에 존재하는가?입니다. 그는 삼위를 서로 구별되는 세 신적 인격으로 이해하기보다 한 분 하나님, 곧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 삼위로 이해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이라고 할 때, 그 뜻은 성부와 성령을 제외하고 삼위 가운데 성자만 주님이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읽으면 여전히 성부, 성자, 성령을 세 분처럼 먼저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어느 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것인가를 묻는 셈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출발점은 그와 다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신적 삼위는 그 한 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관계를 설명할 때 인간 안의 영혼과 몸과 그것에서 나오는 활동을 하나의 유비로 사용합니다. 한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활동이 있다고 해서 그를 세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신적 삼위 역시 세 하나님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물론 인간에 대한 이 비유가 하나님의 신비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왜 삼위를  이 아니라   안의 삼위로 이해하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 관점에서 성부, 성자, 성령을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에서는 성부를 근원적인 신성, 성자를 신적 인성, 성령을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활동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서로 떨어져 존재하는 세 신적 존재로 나누지 않습니다. 한 분 주님 안에서 구별되는 신적 삼위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 예수 그리스도라는 AC.14의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보다 높이거나 성령보다 우위에 놓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애초에   가운데 누가  높은가?라는 질문의 틀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주님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만 주님이라면 여호와 하나님은 어디로 가는가?라고 묻는 것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질문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호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서로 다른 두 하나님으로 두지 않습니다. 다만 이 관계가 성육신과 영화의 과정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는 매우 큰 주제이며, AC.14 한 단락에서 모두 설명되지 않습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가 우선 밝히는 것은 더 단순합니다. 앞으로 자신의 글에서 주님이라고 할 때 그 이름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천국에서 그분만이 주님으로 인정되고 경배를 받으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부는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흥미롭게도 스베덴보리 자신도 바로 다음 AC.15에서 이 문제로 들어갑니다. 거기서는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주님과 아버지가 하나이심을 복음서의 말씀들을 통해 설명합니다.

 

따라서 AC.14 단계에서 너무 많은 것을 앞당겨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하나의 오해만 풀어 두면 충분합니다.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이라는 말은 삼위 가운데 성자만 선택하여 그분을 높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을 세 분으로 나눈 뒤 그 가운데 한 분을 주님이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신적 삼위가 한 분 주님 안에 있다고 이해합니다.

 

이것이 전통적인 세 위격의 삼위일체 이해와 스베덴보리의 주님 이해 사이에 있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붙들고 AC.15로 넘어가면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다음 문장이 왜 나오는지도 훨씬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AC.14 이어지는 모든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며, 다른 무슨 보조적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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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하고, 이어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고 합니다. 또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는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2는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래의 예들은 스베덴보리가 AC.12에서 바로 이런 경우를 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AC.12가 말하는 상태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해해 보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합시다. 그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곁의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 실제로 도와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단지 순간적인 기분이나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면 AC.12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가 말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선한 행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정직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면 훨씬 유리한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거짓을 피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면, 단지 정직이라는 원칙을 알고 있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자기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을 실제 삶에서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을 했으니  사람은 AC.12 여섯 번째 상태에 있다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는 외적인 행동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를 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의 거듭남 단계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한다는 표현이 실제 삶과 무관한 추상적인 말이 아님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이것 역시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기능처럼 기계적으로 나누기보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고 행하는 것이 함께 가는 상태로 이해하면 조금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 사랑한다고 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무엇이 아이에게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고, 필요하면 가르치고 바로잡으면서도 아이의 선을 진심으로 원합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옳고 유익한가를 살피는 것과 실제로 아이의 선을 원하는 것이 함께 필요합니다. 이것 역시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의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무조건 감싸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옳고 그름만 따지면서 상대방의 형편을 전혀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진정한 유익을 바란다면, 우리는 진리와 선이 함께한다는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2의 또 하나 어려운 표현은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착한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정도로 축소해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는 영적 인간의 생명이 무엇을 먹고 사는가를 설명하면서, 자연적 생명은 음식과 물로 유지되고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는 것을 점점 소중히 여기고, 알고 있는 선을 실제로 행하는 삶에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에는 자기 이익과 인정만이 중요했는데,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 소중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2가 직접 제시한 구체적인 사례라기보다 영적 생명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유지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적용입니다.

 

여기서 기쁨도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마다 반드시 감정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으며, 용서하거나 참고 섬기는 일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기쁨을 단순한 감정적 즐거움과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점차 진리와 선에 속한 것들을 향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AC.12에서 특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상태가 앞선 상태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앞선 상태들을 거치면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어 가며, 이제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 그리고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위의 생활 사례들도  행동 하나를 하면 여섯 번째 상태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와 실제로 사랑하고 행하는 선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처음에는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참된 것을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는 것이 점점 함께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말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 삶 안에서 함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2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표현도 조금 덜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신앙은 머릿속에만 있고 사랑은 막연한 감정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참된 것을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서 선한 것을 원하며 실제로 행하는 삶 속에서 둘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모든 예보다 중요한 것은 AC.12 자체가 말하는 방향입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을 가장 간단히 풀어 말한다면, ‘내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이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점점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AC.12, 창1 개요, '여섯 번째 상태'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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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심화

1.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 무슨 뜻인가?

 

AC.11을 처음 읽으면 자신을 확증하다(confirms himself)라는 표현에서 조금 멈추게 됩니다. 우리말의 확증하다는 보통 어떤 사실이 틀림없음을 증명하거나 확인한다는 뜻으로 들리고, ‘자신을 확증한다고 하면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스스로 옳다고 굳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11의 문맥을 그대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진리와 안에 있음을 확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확증의 중심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자기 생각이 옳다는 증거를 모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신앙으로 말하게 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AC.10과 비교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AC.11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제 신앙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즉 앞에서 받은 신앙이 단지 순간적으로 비추는 빛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말로 나타날 정도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확증한다는 것을 삶의 경험을 통해 진리가 참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고 설명해도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AC.11이 직접 내리는 정의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AC.11은 사람이 여러 경험을 해 보고 진리의 효용을 검증한 뒤 확신하게 된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그가 이제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진리를 그렇다고 하니까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진리가 점점 자기 생각과 말의 바탕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길이 여러 번 다니다 보면 점차 익숙한 길이 되는 것처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확증의 정확한 사전적 정의라기보다 AC.11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자신을 확증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진리와 선 안에 세운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부터 계속되는 전체 문맥은 사람의 거듭남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로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표현을 인간이 독립적으로 자기 안에 진리와 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굳힌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확증이라는 말까지 생각하면 또 하나의 구별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확증할 수도 있지만 거짓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확증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좋은 영적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참이라고 받아들이고 무엇 안에서 자신을 굳히느냐가 중요합니다. AC.11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 이므로 좋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확증이라는 단어만 떼어 읽으면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더욱 굳게 믿는 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AC.11에서는 그런 완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아직 거듭남의 마지막 상태도 아닙니다. 바로 다음 AC.12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여섯 번째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11확증을 거듭남의 완성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여섯 상태 가운데 다섯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중요한 변화입니다.

 

따라서 AC.11자신을 확증하다는 표현은 우선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한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를 가리킨다.그리고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적용하여 설명할 때에는 배운 진리가 점차 자기 생각과 말의 바탕으로 자리 잡아 간다고 풀어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AC.11에서 왜 신앙으로 말한다는 것과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한다는 것이 함께 나오는지도 조금 더 쉽게 보입니다.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멀리서 들은 가르침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신앙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안에서 점차 확고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AC.11, 창1 개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는 때 :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AC.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은 생기를 지닌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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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7

말씀들 안에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절에서 땅이 생물, 가축, 땅의 짐승(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것이라고 말한 반면, 다음 절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 가축(the wild animal of the earth, the beast) 만드셨다고 말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그리고 이후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는 마치 자기에게서인 산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사람에서 시작되어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이런 이유로 여기 다른 순서가 나오는 것이며,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the wild animal of the earth,and likewisethe 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해설

AC.47은 아주 짧지만 창1:24-25의 문장을 얼마나 세밀하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단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순서의 변화입니다. 24절에서는 땅이 생물, 가축, 땅의 짐승을 내라고 하지만, 2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 가축을 만드셨다고 하여 앞에서와 순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작은 차이 안에도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정도의 어순 차이에 정말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AC.47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단순히 자연계 창조의 순서를 기록한 문장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을 담은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대상들이 왜 다른 순서로 언급되는가도 그에게는 설명되어야 할 말씀의 일부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설명의 중심은 사람이 처음에는, 그리고 이후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는 마치 자기에게서인 산출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치 자기에게서인 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실제로 영적 생명과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9-43에서 이미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47을 그 흐름과 분리해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마치 자기에게서인 이라고 말할까요? AC.47은 그 이유나 작동 방식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렇게 산출하며, 바로 그 때문에 거듭남이 사람에서 시작하여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이 두 진술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거듭남이 사람에서 시작한다는 말을 사람이 외적인 행동을 반복하면 그것이 차츰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하나의 심리적 훈련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실제 삶의 순종과 행함은 거듭남에서 중요합니다. 바로 앞의 AC.44도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47 자체는 행동 습관 애정 사람이라는 단계나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사람에서 사람으로라는 말을 주님께서 겉 사람에서 일을 시작하여 점차 속 사람으로 들어가신다는 공간적 이동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나는 사람이 경험하고 산출하는 질서를 설명하면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및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가는 AC가 진행되면서 훨씬 더 세밀하게 설명되므로, 이 한 문장에 그 모든 메커니즘을 미리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24절과 25절의 순서 변화가 왜 중요할까요? 24절에서는 이 무엇인가를 내는 장면이 먼저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마치 자기에게서인 산출하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반면 25절에서는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 만드시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AC.47이 특별히 설명하는 것은 단순히 땅이 하다가 하나님이 하신다는 주어 변화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언급되는 것들의 순서도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순서에서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뒤바뀐 순서는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질서를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각각의 땅의 짐승가축을 다시 세분하여 이것은 외적 행동, 이것은 습관, 이것은 길들여진 애정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세부 대응을 우리가 만들어 넣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외적인 것들이 먼저 언급된다는 설명을 그대로 중심에 두는 편이 좋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마치 자기에게서인 실제로 자기에게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는 내가 생각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행한다고 경험합니다. 그러나 앞선 AC의 흐름에 따르면 그 안에 참으로 살아 있는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47은 이 둘을 서로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마치 자기에게서인 산출한다는 표현으로 그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매우 중요해질 주제입니다. 다만 AC.47 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 섭리, 공로 없음의 관계를 모두 완성된 교리로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것은 그보다 작지만 분명한 단서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에게는 마치 자기에게서인 행하는 상태가 있으며, 그 과정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현재 제목처럼 이것을 곧바로 자기에서 주님으로 옮겨가는 방향이라고 요약하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모든 생명과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분명해졌지만, AC.47이 설명하는 순서 변화 자체의 직접적인 의미는 자기에서 주님으로 주체가 이동한다기보다 거듭남이 사람에서 시작하여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 차이를 지켜 주어야 이 짧은 글이 말하는 아르카나가 오히려 더 선명해집니다.

 

AC.47은 동시에 말씀을 읽는 스베덴보리의 방식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 눈에는 같은 것을 조금 다른 순서로 쓴 문체상의 변화처럼 보이는 것도, 그는 거듭남의 질서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물론 여기서 곧바로 성경의 모든 어순 변화에는 반드시 별개의 속뜻이 있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7이 직접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창1:24-25의 순서 변화에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글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의 근원을 온전히 지각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 자기에게서인 산출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가며, 1:2425의 미묘한 순서 변화가 바로 그 질서를 표현합니다. AC.47은 단어 하나뿐 아니라 배열의 변화까지도 거듭남의 관점에서 읽어 내면서, 창세기 창조 이야기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얼마나 세밀하게 담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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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창1:24-25, ‘짐승'(beasts), 사람의 애정(affections)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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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 무엇인가? :  한국어  단어로 번역하기 어려운가

 

AC.9 체어리티(charity)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너무 좁고, ‘사랑이라고 하면 love와의 구별이 흐려지며, ‘선행이라고 하면 행위만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이웃 사랑이라고 하면 상당히 가까워지지만,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가 charity라는 말에 담아 사용하는 모든 의미를 언제나 충분히 전달하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번역과 해설에서는 charity를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라고 음역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낯선 말 하나를 굳이 더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개념을 가능한 한 같은 용어로 추적하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현대 영어에서 charity라고 하면 흔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이나 기부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charity는 그보다 훨씬 넓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행위도 체어리티에 속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체어리티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말 이웃 사랑 charity의 중요한 의미를 상당히 잘 전달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love to the Lord,  주님을 향한 사랑 charity toward the neighbor,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함께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이해할 때 이웃이라는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를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감정을 갖는 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사람 안의 애정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웃의 선을 바라고, 이웃에게 선한 것을 행하며, 자신의 맡은 일을 정직하고 올바르게 수행하는 실제 삶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를 곧바로 선행이라고 번역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선행은 이미 밖으로 나타난 행위를 강조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에는 행위뿐 아니라 그 행위를 낳는 사랑과 의지, 그리고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는 방향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행위는 체어리티가 삶 가운데 나타나는 중요한 형태이지만 체어리티 전체와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닙니다.

 

바로 AC.9의 표현도 이 차이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charity 자체라고 하지 않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실제로 그런 선들을 행하지만, 아직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 선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겉으로 체어리티처럼 보이는 행위를 한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 안에 체어리티가 완전하게 살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AC.9의 사람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하지만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히 외적으로 관찰되는 착한 행동의 목록만으로 정의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마음속의 좋은 의도만으로 제한할 수도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 이웃의 선을 전혀 구하지 않는다면 체어리티의 삶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체어리티는 내적인 사랑과 의지, 그리고 그것이 삶에서 나타나는 선한 행위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진리도 중요합니다.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해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무엇이 실제로 선한지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역시 맹목적인 호의나 감정적인 친절로만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악한 행동까지 돕는다면 그것을 참된 체어리티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당장 원하는 것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참된 선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에는 사랑뿐 아니라 무엇이 선한지를 분별하는 진리도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자선은 너무 좁고, ‘선행은 행위 쪽으로 치우치며, ‘사랑은 너무 넓고, ‘이웃 사랑은 상당히 가깝지만 문맥에 따라 여전히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에서는 charity 체어리티라고 두고 그 의미를 문맥에 따라 해설하는 방식을 기본으로 삼습니다.

 

이렇게 하면 love charity의 구별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love라고 할 때마다 그것을 체어리티라고 번역할 필요가 없고, charity라고 할 때마다 단순히 사랑이라고 번역하여 두 개념의 표현상 차이를 없앨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AC를 계속 읽다 보면 신앙과 체어리티’,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 ‘체어리티의 생명 같은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하나의 일관된 용어를 유지하는 것이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를 한 문장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완전한 정의라고 하기보다는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따라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려는 사랑과 삶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주님에게서 오는 이라는 말을 넣는 이유도 AC.9과 관계가 있습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살아 있는 선을 이해하려면 결국 선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유로 AC.9의 선한 행위들을 무가치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여전히 선들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먼저 선을 배우고 행하면서, 그 선의 참된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차 알아 갑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도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계속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알고 믿는 것과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것은 거듭남 가운데 서로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창4의 가인과 아벨에 이르면 훨씬 더 본격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 AC.9에서는 체어리티의 모든 교리를 한꺼번에 다 설명하려 하기보다 두 가지를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첫째, 체어리티는 현대적인 의미의 자선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둘째, 체어리티는 단순한 감정이나 외적 선행 어느 한쪽으로 축소할 수 없으며,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사랑의 방향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 번역에서 체어리티라는 조금 낯선 말을 만나더라도  그냥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charity라는 말로 가리키는 개념을 계속 추적하기 위한 번역어라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문맥에 따라 이웃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체어리티의  등의 설명을 덧붙일 수 있지만, 기본 용어는 체어리티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결국 체어리티는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만도 아니고 남을 좋아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진리에 따라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 처음 나타나는 세 번째 상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구별을 기억하면 앞으로 AC에서 체어리티가 등장할 때 그 의미를 훨씬 정확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9, 창1 개요, '회개의 시작, 그러나 아직 생기 없는 선 : 자라나는 풀과 씨의 단계'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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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의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이어지는 내용인,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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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데  회개의 상태인가?

 

AC.9에서 세 번째 상태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선들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선의 근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왜 벌써 회개의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AC.9 회개 내가 행하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깨달은 상태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아직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바로 그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 선들을 여전히 생기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AC.9 회개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사람이 이제 자기 선은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고 말하면 순서가 조금 뒤바뀝니다. 그 깨달음이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 AC.9의 설명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회개일까요? 이 질문에는 AC.9이 바로 이어서 말하는 사람의 실제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며,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을 행합니다. 즉 이전 상태와 달리 이제 실제 삶에서 선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회개를 단순히  죄를 짓고 몹시 후회하는 감정으로만 생각하면 AC.9의 표현이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에는 삶의 방향을 악에서 선으로 돌리는 실제적인 변화가 포함됩니다. 사람이 이전과 같은 삶에 그대로 머물면서 마음속으로 미안하다고 느끼는 것만이 회개의 전부는 아닙니다.

 

AC.9에서 바로 그 변화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말하기 시작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실제로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영적으로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실제적인 선의 방향으로 삶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 보면 회개 아직 생기 없는 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회개의 상태에 들어가 실제로 선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삶의 방향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은 아직 온전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거듭남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인 상태의 변화라는 AC.6의 설명과도 잘 맞습니다. 첫째 상태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첫째에서 둘째로, 둘째에서 셋째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상태인 회개 역시 완성된 영적 인간의 상태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AC.9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사람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회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선이 어디에서 오는지 완전히 알게 된 다음에야 선한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배우고, 돌이키고, 말하고, 행하면서 거듭남의 다음 상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그래도 아직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회개하기  아닌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AC.9은 바로 그런 불완전한 상태를 세 번째 상태로 제시합니다. 사람은 실제 선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생기 없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이 단계의 회개와 선한 행위가 모두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여전히 선들이라고 부릅니다. 다만 사람이 그 선들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직 참된 생명을 가진 상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두 극단으로 가기 쉽습니다. 하나는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하니  선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일을 하고 있으니 이미 영적으로 충분히 살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AC.9은 어느 쪽도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 선이 나타났지만 아직 생기가 없는, 거듭남 도중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회개는 무엇에 대한 회개일까요? AC.9 한 단락은 구체적으로 어떤 죄목을 열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 공로를 죄로 깨닫고 회개하는 이라고 특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문이 직접 보여 주는 것은 회개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새로운 방향, 곧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하기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AC.9 회개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극적인 회심 장면을 상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눈물이나 강렬한 죄책감이 있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에 실제 변화가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감정을 포함할 수 있지만 감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여기서 일반적인 회개론 전체를 AC.9 한 문장 안에 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회개를 어떻게 더 자세히 설명하는지는 별도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AC.9에서 우리의 우선 과제는 이 세 번째 상태가 왜 회개의 상태라고 불리는지를 이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두 번째 상태까지는 주님의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고 리메인스가 드러나는 준비가 이루어졌다면, 세 번째 상태에서는 이제 그 내적인 변화가 말과 행위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합니다. 회개가 실제 삶의 방향 전환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여전히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며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킵니다. 그래서 그 선은 아직 생기 없는 것으로 불립니다. 앞으로의 거듭남에서는 이 선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가 더 분명해져야 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9 회개의 상태는 비약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의 연속성을 잘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회개했다고 해서 사람이 단번에 자기중심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 선의 근원을 완전히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돌이킴이 시작되고 실제 선이 나타나면서도 여전히 자기에게 속한 것이 섞여 있는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9에서 회개란 완성된 회개라기보다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돌이킴의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선에는 참된 생명이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회개할 정도로 무슨  죄를 지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회개를 주로  잘못을 저지른  크게 뉘우치는 사건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AC.9에서 중요한 것은 죄의 크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사람이 이전 상태에서 벗어나 선을 향하여 실제로 말하고 행하기 시작하는 것, 그러나 아직 그 선의 참된 근원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 바로 이 미완성의 전환이 여기서 말하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AC.9.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체어리티(charity)를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그런 게, 우리말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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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세 번째 상태'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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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심화

1. 시험, 불행, 슬픔을 통해 사람의 것들이 잠잠해지는가?

AC.8에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 나옵니다. ‘오늘날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왜 하필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어야 할까요? 그리고 실제로 주변을 보면 큰 고난을 겪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AC.8이 말하지 않는 것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을 겪어야 거듭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많이 거듭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원문 자체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없이는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예외의 가능성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중심을 사람에게 얼마나 고난이 필요한가?에 두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그 고난 가운데 무엇이 일어난다고 말하는가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시험과 불행과 슬픔을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하고, 세상 역시 사람이 자신의 삶과 쓰임을 수행하는 자리입니다. AC.8의 관심은 몸이나 세상을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에서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평소에는 이 구별이 쉽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몸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며 세상의 여러 관계와 일 가운데 살아갑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계획하는 것, 의지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삶의 전면에 놓입니다. 그런데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은 사람이 의지하고 있던 자연적 조건들이 언제나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합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병들 수 있고, 계획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 자체가 사람을 영적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전까지 강하게 활동하던 몸과 세상에 속한 관심들이 그러한 상황에서는 이전과 똑같은 힘으로 작용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문맥입니다. 실제로 몸과 세상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겉 사람이 파괴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죽은 것처럼 된다는 표현은 그것들의 활동이 잠잠해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AC.8에서 이것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목적은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는 데 있습니다.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면서 속 사람에 속한 것들과의 구별이 나타나고, 그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꺼내시기 위해 사람에게 고난을 보내신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AC.8은 각각의 불행이 왜 발생했는지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다면 주님께서 그의 사람을 꺾으려고 병을 주셨다고 해석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리메인스를 드러내기 위해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 글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AC.8이 설명하는 것은 고난의 개별적인 원인이 아니라, 거듭남의 이 상태에서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그 결과 이전에는 잘 구별되지 않던 주님의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는 상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의 후반부, ‘그런 고난 없이도 거듭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도 자연스럽게 답할 수 있습니다. AC.8 자체가 이미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거의 없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예외의 이유를 굳이 만들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 사람은 어린 시절 리메인스가 특별히 많아서 그렇다’, ‘이미 양심이 형성되어 있어서 그렇다’, 또는 겉으로는 몰라도 반드시 숨은 고난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AC.8은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이 상태가 시험과 불행과 슬픔 없이도 가능한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지 않은 예외의 이유를 우리가 채워 넣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모든 사람의 고난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체계를 만들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에 주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우리가 외부에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더구나 같은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영적 결과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AC.8 역시 시험, 불행, 슬픔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주체는 고난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고난 그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거나 일부러 고난을 찾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불행을 겪지 않았으니 아직 제대로 거듭나지 못한 것인가?라고 걱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나는 많은 고난을 겪었으니 영적으로 많이 성장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근거도 없습니다. AC.8이 우리에게 주는 기준은 고난의 양이 아닙니다.

 

오히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두 번째 상태의 본질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하고 참되다고 여기는 것이 정말 나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간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는지, 이것이 거듭남의 방향과 관련됩니다.

 

이렇게 보면 시험과 불행과 슬픔의 의미도 조금 달라집니다. 그것들은 주님께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반드시 보내셔야 하는 거듭남의 필수 과정이 아닙니다. AC.8오늘날이 두 번째 상태가 그러한 것들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관찰하면서, 그 이유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그 가운데 잠잠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고난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이것을 보내셨을까?라고 모든 원인을 해석하려 하기보다, 그 상황 가운데 내가 절대적인 것으로 붙들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주님께 속한 것과 자신에게 속한 것을 나는 구별하고 있는가?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편이 AC.8의 취지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누군가 불행을 겪는 것을 보고 사람은 사람이 너무 강해서 주님께서 꺾고 계시는 것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AC.8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해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 자신의 내적 질서를 이해하도록 주어진 설명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중요한 이유는 고통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AC.8의 표현대로라면, 그것들을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면서, 속 사람에 속한 것들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구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보존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의 중심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구별되어야 한다입니다. 고난은 그 구별과 관련하여 자주 나타나는 하나의 상황이며, 거듭남의 생명과 능력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에게서 옵니다.

 

 

 

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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