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 심화

1. religious belief

 

AC.1에서 ‘religious belief’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를 설명하는 열거 가운데 등장합니다. 그 문장은, 겉 글자만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그 안에는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religious belief,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religious belief’는 특정 교파의 교리나 기독교 내부 체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동시에, 단순히 교회 밖 이교 신앙을 지칭하는 말도 아닙니다. 이 표현은 더 넓은 범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religious belief’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신앙적 가르침과 믿음의 내용 전체’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신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예배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신앙 세계 전반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있는 교리도 여기에 포함되고, 교회 밖이라 하더라도 신성을 인정하고 따르려는 종교적 신앙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핵심은 ‘주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왜 ‘church’와 ‘religious belief’를 나란히 두었는지도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church는 역사적, 가시적 공동체를 가리키고, religious belief는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신앙의 내용과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범위는 교회 내부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를 보면, 참된 신앙은 어디에서나 주님을 향할 수 있고, 신성을 인식하고 그 인도에 따르는 삶은 교회 밖에서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religious belief는 ‘교회 안의 교리 체계’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표현은 ‘faith’ 대신 ‘belief’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랑과 결합된 살아 있는 신앙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로서의 신앙 내용, 곧 ‘신앙의 세계’를 말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적 생명 상태라기보다, 신앙이 형성하는 사상과 가르침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것은 개인의 영적 상태를 분석하는 문맥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가 포괄하는 범위를 설명하는 총론적 문맥에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AC.1에서 ‘religious belief’를 이해할 때는, 범위를 ‘이교 신앙’으로 좁히는 것도, ‘기독교 교리 체계’로 한정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성과 인간을 연결하는 종교적 신앙 일반’, 곧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인도하는 신앙의 세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AC.1의 문장은 더욱 힘을 갖습니다. 겉으로는 유대교 의식과 역사처럼 보이는 말씀 안에, 실제로는 주님과 그분의 천국뿐 아니라, 인간이 신성과 맺는 모든 신앙적 관계의 구조가 담겨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단지 특정 종교 집단의 규례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신앙 세계 전체’를 담고 있는 신적 진리의 그릇이라는 선언입니다.

 

 

 

AC.1, 심화 2, ‘층위’

AC.1.심화 2. ‘층위’ ‘층위’라는 말은 일상 한국어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지만, 스베덴보리 신학에서는 거의 구조를 떠받치는 기둥 같은 개념입니다. 먼저 ‘층위’란 무엇인가를 가장 간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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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AC.1-5)

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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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  같은 짐승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5 AC.46을 읽다 보면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고 하면서 어떤 곳에서는 선한 애정을, 다른 곳에서는 악한 애정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상응이라는 것은 하나의 자연물이 하나의 영적 의미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짐승 = 애정이라면 선한 애정인지 악한 애정인지도 하나로 정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은 상응을 처음 접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상응을 단순한 영적 암호표처럼 생각하면  = 진리’, ‘나무 = 지각’, ‘짐승 = 애정처럼 하나의 단어 옆에 하나의 뜻을 적어 놓고 모든 성경 구절에 똑같이 대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AC를 읽어 가면 상응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됩니다.

 

AC.46 자체가 좋은 예입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기본적인 연결은 유지됩니다. 짐승은 인간의 애정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애정 자체에 선한 애정과 악한 애정이 있으므로,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문맥과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자연계의 동물들도 모두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AC.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끼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을 구별했습니다. , 늑대, 개와 같은 동물을 악한 애정의 예로 들고, 암송아지, , 어린양 같은 동물을 선하고 온순한 것의 예로 들었습니다. 따라서 동물이라는 큰 범주가 애정과 상응한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동물이 동일한 종류의 애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은 표현도 문맥의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AC.46에서 들짐승이 하나님과의 언약과 평화 속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있는가 하면, 34:25에서는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들짐승이라는 말을 발견하자마자 무조건 선이나 악 가운데 하나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태를 다루는 말씀인지, 그 짐승이 어떤 관계 속에서 등장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응이 임의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본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문맥에 따른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 애정 사이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애정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 안에서 주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하는 애정과, 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악한 애정은 모두 애정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그 질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상응을 읽을 때  자연물의 정확한 정답은 무엇인가?라고만 묻기보다  자연물이 인간의 어떤 영역과 관계되며, 지금  문맥에서는  영역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좋습니다. 짐승의 경우에는 애정과 관계된다는 기본 관계를 먼저 붙들고, 그다음 그 애정이 선한지 악한지, 온순한지 해로운지, 질서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문맥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앞으로 AC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자연물이 긍정적인 문맥과 부정적인 문맥에 모두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스베덴보리가 마음대로 뜻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본적인 상응 관계 안에서도 대상의 질과 상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원리를 근거로 독자가 마음대로 문맥에 맞추어 의미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긍정적인 구절이니까 좋은 , 부정적인 구절이니까 나쁜 이라고 임의로 정하는 것도 상응의 해석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반복되는 용례와 상응의 질서를 통해 이러한 의미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AC를 읽을 때에는 개별 상응 하나를 떼어 자유롭게 응용하기보다, 그가 여러 구절을 서로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AC.46에 그토록 많은 성경 구절이 인용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의 구절만 보고 짐승은 애정을 뜻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과 예레미야와 호세아와 시편과 이사야와 계시록 등 말씀 전체에서 짐승과 생물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 상응은 한 구절에 억지로 끼워 넣는 해석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글 자체가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짐승이 어떻게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짐승 애정이라는 기본적인 상응 관계는 유지되지만, 인간의 애정 자체가 선하거나 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어 하나에 뜻 하나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응이 말씀 전체의 문맥에서 어떤 상태와 질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AC의 상응 해석이 조금 덜 낯설어집니다. 상응은 단순한 단어 사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자연계의 형상들을 통해 표현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AC.46, 창1:24-25, 말씀의 짐승들은 왜 인간의 애정을 뜻하는가?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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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6

짐승(beasts) 사람의 애정(affections) 뜻한다는 사실,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한다는 사실은 말씀의 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에스겔입니다. Thatbeasts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것이라 너희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36:9, 11, 거듭남에 대해 말하는) Behold, I am for you, and I will look back to you, that ye may be tilled and sown, and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be multiplied and bring forth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Ezek. 36:9, 11, treating of regeneration).

 

요엘입니다.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힘을 내는도다 (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 (Joel 2:22).

 

시편에서도 In David also: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앞에 짐승이오나 (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예레미야에서 거듭남을 다루며 In Jeremiah, treating of regeneration: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1:27, 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2] ‘들짐승(Wild animals) 비슷한 의미인데요, 호세아입니다. Wild animalshave a similar signification, as in Hosea: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2:18)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 of the heavens, and with the creeping thing of the earth (Hos. 2:18).

 

욥기입니다. In Job: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것이니라 (5:22, 23) Thou shalt not be afraid of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for thy covenant is with the stones of the field, and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be at peace with thee (Job 5:2223).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내가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34:25) I will make with you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animal to cease out of the land, that they may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Ezek. 34:25).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장차 들짐승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것임이라 (43:20)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honor me, because I have given waters in the wilderness (Isa. 43:20).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공중의 모든 새가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나라가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31:6) All the fowls of the heavens made their nests in his boughs, and under his branches did all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bring forth their young, and under his shadow dwelt all great nations (Ezek. 31:6).

 

이는 앗수르에 대한 말입니다.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뜻하며, 에덴동산에 비유됩니다. This is said of the Assyrian, by whom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and who is compared to the garden of Eden.

 

시편입니다. In David: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148:2, 7, 9-10) Glorify ye him, all his angels, glorify Jehovah from the earth, ye whales, fruit trees, wild animal, and every beast, creeping thing, and flying fowl (Ps. 148:2, 7, 910).

 

이렇게 여기서 전반적으로 용들(whales), 과수(fruit tree), 짐승(wild animal), 가축(beast), 기는 (creeping thing), 나는 (fowl) 함께 언급되는데, 이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없었을 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whales,thefruit tree,” “wild animal,thebeast,” “creeping thing,andfowl,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자들은 가축(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earth), 가축(beasts) 들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field) 조심스럽게 구별합니다. 그럼에도 사람 안의 선한 것들은 가축(beasts)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주님과 가장 가까운 이들도 생물(animals)이라 하는데,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서 모두 그렇게 말합니다.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beastsandwild animals of the earth,andbeastsandwild animals of the field. 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beasts,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animals,both in Ezekiel and in John: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생물3 주위에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7:11)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and the elders, and the four animals (Rev. 7:11),3

 

AE.462 의하면, 여기 모든 천사(the angels) 일층천, 가장 낮은 천국 천사들을, ‘장로들(the elders) 이층천, 중간 천국 천사들을, ‘ 생물(the four animals) 삼층천, 가장 높은 천국 천사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십사 장로와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the lamb (Rev. 19:4).

 

또한 복음이 전파되는 이들도 피조물(creatures)이라 하는데, 이는 그들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creatures,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이르시되 너희는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

 

 

3. 여기 단어는 비스트(beasts, 짐승, 야수) 아닌, 흠정역(the authorized version)에서처럼 애니멀(animals, 짐승, 동물) 정확하게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의 (ζον, z¯oon), 라틴과 영어의 애니멀 서로 정확 응하며, ‘생물(a living creature)이라는 의미에 맞기 때문입니다. 원전(the original) 해당 구절들에서 사용된 단어는 준이며, 만일 비스트사용을 의도했다면 썼을 법한 테르(θρ, th¯er) 테리온(θηρον, th¯erion) 아닙니다. This word is here correctly translatedanimalsand notbeasts,as in the authorized version, for z¯oon in Greek, and animal in Latin and English, precisely correspond to each other, and properly signifya living creature.Z¯oon is the word used in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and not th¯er or th¯erion, as would be the case ifbeasthad been intended.

 

해설

AC.46은 바로 앞의 AC.45에서 제시한 중요한 원리, 곧 말씀에서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는 것을 수많은 성경 구절을 통해 확인하는 글입니다. 첫 문장부터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짐승은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하며, 이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 성경 인용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새로운 주제를 계속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짐승 = 애정이라는 해석이 창1:24-25에만 임의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겔36:9,11과 렘31:27-28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인용됩니다. 36에서는 황폐했던 땅이 다시 갈리고 심어지며 그 위에 사람과 짐승이 많아지고 번성합니다. 31에서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를 뿌리고, 이어서 세우고 심으시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핵심 이유는 문자 그대로 사람과 동물의 개체 수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거듭남에 관한 이 말씀의 속뜻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여기의 짐승이 사람 안에서 살아나는 내적인 것, 특히 애정과 관련된 것을 뜻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46은 여기서 사람의 씨는 정확히 무엇이고 짐승의 씨는 정확히 무엇이다라는 세부 대응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2:22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도 같은 방향에서 사용됩니다. 들의 풀이 돋고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회복의 장면에서 들짐승 역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반면 시73:22에서는 시편 기자가 자신의 우매함을 고백하며 앞에 짐승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 두 구절만 보아도 짐승이라는 말 자체에 언제나 선한 뜻이나 언제나 악한 뜻 하나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AC.46의 첫 문장이 이미 말했듯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호2:18, 5:22-23, 34:25에서는 들짐승이 언약과 평화라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호세아에서는 들짐승과 새와 땅의 곤충과 언약을 맺고, 욥기에서는 들짐승이 사람과 화목하게 되며, 에스겔에서는 화평의 언약과 함께 악한 짐승이 땅에서 그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제시하는 것은 말씀에서 짐승과 들짐승이 단순한 동물 이야기를 넘어 사람의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겔34:25가 굳이 악한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짐승이라는 말 자체가 곧 악이라는 뜻이라면 악한이라는 구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3:20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들짐승이 여호와를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광야에 물이 생기고 사막에 강이 생겨 하나님의 백성이 마시게 되는 장면에서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도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문자적 자연물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의 속뜻에서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31:6에서는 앗수르가 큰 나무로 묘사되고 그 가지에는 새들이 깃들이며 그 아래에서는 들짐승들이 새끼를 낳습니다. AC.46은 여기서 앗수르가 영적 인간을 뜻하고 에덴동산에 비유된다고 짧게 설명합니다. 이 구절 역시 새와 짐승이 단순히 배경을 꾸미는 자연물이 아니라 영적 인간에게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씀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됩니다. 다만 이번 글은 앗수르나 나무, 가지, 새 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해설하려는 곳은 아닙니다. 인용의 목적은 계속 짐승이 인간 안의 살아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는 중심 주장에 있습니다.

 

148은 이 논증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사들뿐 아니라 바다의 큰 생물들, 과수, 짐승, 가축, 기는 것과 나는 새까지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개역개정의 용들에 해당하는 부분을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에서는 whales라고 표현합니다. AC.46은 바로 이 점을 붙들어,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이번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해석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짐승은 선한 애정입니까, 악한 애정입니까?AC.46의 대답은 문맥과 짐승의 성질에 따라 다르다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단순한 암기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짐승 = 애정이라는 기본 관계가 있다고 해서 모든 짐승이 동일한 애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하고 온순한 동물과 해로운 동물이 다르고, 같은 짐승이라는 표현도 어떤 사람과 어떤 상태를 다루느냐에 따라 선한 애정 또는 악한 애정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말씀의 상응을 읽는 데 계속 필요한 원리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AC.46 후반부에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구별이 나옵니다. 선지자들이 가축땅의 짐승’, 또는 가축들의 짐승을 조심스럽게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 각각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축은 질서 잡힌 높은 애정이고 들짐승은 본능적인 낮은 애정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빈칸을 채우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6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사람 안의 선한 것들도 짐승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매우 놀라운 예를 하나 더 듭니다. 주님께 가장 가까운 하늘의 존재들도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 생물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7:11과 계19:4 생물이 그 예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영어 단어입니다. 각주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곳의 말이 beasts가 아니라 animals로 번역되는 것이 정확하다고 설명합니다. 헬라어 ζον(zōon) 살아 있는 생물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대목의 요점은 천사들을 야수에 비유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라는 표현이 얼마나 높은 영적 문맥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본문에 덧붙여 놓은 AE.462의 설명, 모든 천사를 가장 낮은 천국, ‘장로들을 중간 천국, ‘ 생물을 가장 높은 천국과 연결하는 설명은 AC.46 자체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훗날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 가져온 보충 자료입니다. 참고할 수는 있지만, AC.46의 논증 자체와 구별하여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글에서 직접 필요한 것은 주님께 가까운 하늘의 존재들조차 생물이라고 불린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막16:15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너희는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표현은 영어의 every creature’, 모든 피조물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해 받는 이들이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창세기 1장의 창조와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AC 전체의 큰 주제가 다시 만납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기존의 사람에게 종교 지식 몇 가지가 더해지는 일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6에 왜 이렇게 많은 성경 구절이 한꺼번에 등장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의 구절을 완전히 해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요엘, 시편, 예레미야, 호세아, 욥기, 이사야, 요한계시록, 마가복음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말씀에서 짐승’, ‘들짐승’, ‘생물’, ‘피조물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인간의 내적 생명과 연결되는지를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인용 구절을 따로 떼어 열세 편의 해설로 읽기보다, 이 인용들이 함께 무엇을 증언하는지를 보는 것이 AC.46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합니다.

 

AC.45짐승은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는 원리를 소개했다면, AC.46은 말씀 전체를 펼쳐 그 원리가 고립된 해석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중요한 균형도 가르쳐 줍니다. 짐승이라고 해서 모두 악한 것도 아니고, 모두 선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애정에도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듯이 말씀의 짐승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애정을 표현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 단어를 보았으니 뜻은 이것이다라고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문맥 속에서 어떤 생명과 어떤 애정이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심화

1. 같은 짐승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6, 심화 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심화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5와 AC.46을 읽다 보면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고 하면서 어떤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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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 창1:24-25, ‘순서가 말해 주는 거듭남 : 자기에서 주님으로 옮겨가는 방향'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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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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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2, ‘만유의 주 앞에와, 찬67,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입니다.

 

오늘은 1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4절로 25, AC 글 번호로는 30번에서 45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4-25)

 

이 본문을

 

광명체와 생명의 움직임, 질서와 활력이 드러나는 날들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다만 분량 관계상, 여섯째 날 본문인 창1:24-25, 글 번호로는 AC.44-45만 다루고, 그 앞 부분인 넷째 날, 다섯째 날 본문은 원고나 블로그 형태로 주중 리딩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AC.30, 창1:14-17,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AC.30-37)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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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큰 광명체들’의 속뜻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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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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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생명과 기쁨, 행복의 근원은 ‘사랑’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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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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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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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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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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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 창1:18-19, ‘이는 넷째 날이니라’

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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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창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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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창1:2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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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 창1:20, ‘생물'(living soul, thing moving itself)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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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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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 창1:22-23,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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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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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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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입니다.

 

이번 주는 분량이 많네요. 주일예배 시간 관계상 맨 뒷부분만 다루었지만, 앞부분은 일상 중 꼼꼼히 리딩하시기 바랍니다. 거기 정말 보석 같은 내용들이 수두룩합니다. 읽으실수록 뭐랄까... 그러니까 여러분의 심령의 뼈가 충실해지고, 근육이 붙는 걸 느끼실 겁니다. 그것은 영혼의 주춧돌이 반석 위에 놓이는 것으로, 그 결과 영육 간 아주 건실한 빌딩이 높이 세워져 갈 것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3-22(D1)

 

2643, 5, 창1.5, 2026-03-22(D1)-주일예배(창1,14-25, AC.30-45),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pdf
1.32MB

 

 

 

주일예배(2026/03/29, 창1:24-26, AC.46-50), '거듭남 여섯 번째 상태 (2)'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3, ‘만 입이 내게 있으면’, 찬68, ‘오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시니’입니다. 오늘은 창1 여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24절로 26절, AC 글 번호로는 46번에서 50번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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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3/15, 창1:9-13, AC.27-29), '셋째 날, 세 번째 상태'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1, ‘다 찬양하여라’와, 찬66, ‘다 감사드리세’입니다. 오늘은 창1 네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9절로 13절, AC 글 번호로는 27번에서 2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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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5

태고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이렇게 상징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선지서들, 그리고 구약 말씀 전체에서 보면 서로 다른 동물들을 가지고 같은 표현하는데요, 짐승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해롭기 때문에 악하다 하는 짐승들이 있고,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 하는 짐승들이 있지요. 이때 사람 안의 악들은 곰이나 늑대,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그리고 반대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나 , 어린양 같은 짐승들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짐승(beasts)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며, 따라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는 본문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 안에서 몸과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은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이라고 하는데, 이것들은 욕정(cupidities) 쾌락(pleasures) 뜻합니다. Those who lived in the most ancient times thus signified the things relating to the understanding and to the will;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and constantly in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the like things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kinds of animals. Beasts are of two kinds; the evil, so called because they are hurtful; and the good, which are harmless. Evils in man are signified by evil beasts, as by bears, wolves, dogs; and the things which are good and gentle, by beasts of a like nature, as by heifers, sheep, and lambs. Thebeastshere referred to are good and gentle ones, and thus signify affections, because it here treats of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The lower things in man, which have more connection with the body, are calledwild animals of that earth,and are cupidities and pleasures.

 

해설

AC.45는 창1:24-25에 등장하는 여러 짐승이 왜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뜻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의 AC.44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를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고, 이제 여섯째 날 땅에서 나오는 생물들을 의지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AC.45는 그 가운데 특히 짐승이라는 표현에 초점을 맞춥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태고 시대사람들의 표현 방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고, 이러한 표현 방식이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단순한 문학적 비유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5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동물의 성질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태고 시대라는 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말을 들으면 흔히 석기 시대나 원시 인류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관심을 두는 것은 고고학적인 시대 구분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 사람들이 이렇게 표현했다는 말을 곧바로 동굴에서 살던 원시인들이 동물 그림으로 생각을 표현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AC 초반뿐 아니라 앞으로 태고교회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AC.45는 짐승을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해를 끼치기 때문에 악하다고 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고 하는 짐승입니다. 그리고 사람 안의 악들은 곰, 늑대, 개와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 , 어린양과 같은 짐승들로 표현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동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문맥에 놓이는가에 따라 표현되는 내적 상태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주의점이기도 합니다. ‘짐승 = ’, 또는 반대로 짐승 = 애정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대응표만 만들어 모든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45 자체가 짐승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같은 동물 이미지라도 그것의 성질과 문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앞의 AC.42에서 큰 바다짐승이 창조의 좋은 질서 안에서도 등장하고 선지서의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사용되었던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러면 창1:24-25에 나오는 짐승들은 어느 쪽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다루는 짐승들은 선하고 온순한 것들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유도 직접 밝혀 줍니다. 지금 본문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맥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의 거듭남이 단지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의 의지와 애정까지 새로워지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애정이라는 말을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과 같다고 생각하면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애정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지는가와 관계됩니다. 그래서 의지에 속한 것을 설명할 때 동물의 이미지가 사용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AC.45 자체는 여기서 동물이 움직이므로 애정도 인간을 움직인다는 식의 상세한 이유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선 이 글이 직접 밝히는 것, 곧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 거듭나는 사람 안의 애정들을 뜻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 이르면 조금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에서 몸과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 땅의 들짐승이라고 부르며, 이것들이 욕정과 쾌락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이 본문의 짐승들이 선하고 온순하며 애정을 뜻한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욕정과 쾌락이 등장하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의지에 속한 것들 안에서도 차이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의지적인 것이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습니다. AC.45는 바로 그것들을 욕정과 쾌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만으로 욕정은 본래 중립적이므로 없앨 필요가 없고 방향만 바꾸면 된다거나, 반대로 몸과 관련된 모든 쾌락은 악하므로 제거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둘 다 지나갑니다. AC.45는 여기서 그러한 거듭남의 구체적인 처리 방법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욕정쾌락을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구즐거움과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고 쉬고 아름다운 것을 즐기는 모든 자연적 욕구와 즐거움을 이 한 문장 때문에 악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고,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욕정을 단순히 선하게 전환할 수 있는 중립적인 에너지라고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앞으로 AC가 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악한 욕망, 그리고 거듭남의 질서를 더 자세히 다룰 때 그 차이를 문맥에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5의 중심은 오히려 더 단순합니다. 말씀의 동물들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표현할 수 있으며, 해로운 동물들은 악한 것들을, 선하고 온순한 동물들은 선한 것들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금 창조의 여섯째 날은 거듭나는 사람을 다루기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은 그의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동시에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으며, AC.45는 그것들을 욕정과 쾌락이라고 구별하여 언급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AC.44AC.45의 연결도 선명해집니다. AC.44에서는 말씀을 듣는이해와 그것을 행하는의지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5에서는 그 의지 쪽에 속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애정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거듭남은 무엇이 참인지 아는 이해만 새로워지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사랑하는가 하는 의지와 애정의 영역까지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 위의 생물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태고 시대

 

AC.45, 심화 1, ‘태고 시대’

AC.45.심화1. ‘태고 시대’ AC.45에는 ‘태고 시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석기 시대, 동굴 생활, 돌도구, 사냥과 채집 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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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창1:24-25, ‘짐승으로 읽는 인간 : 애정의 재창조와 주님을 향한 생명'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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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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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자기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그리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나요? 혹시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이 있을까요?

 

스베덴보리, 곧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지금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상황과 매우 닮은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과학자와 정치가로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지만, 영적 사명이 시작된 이후, 특히 『Arcana Coelestia』와 『Heaven and Hell』 같은 저작들을 내놓으면서부터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 ‘위험한 사상가’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그는 이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매우 분명히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것이 필연적이라고까지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인간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깊이 붙들려 있는 한, 그 반대 방향에서 오는 진리는 반드시 거부되고 미움받는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태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논쟁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체험, 곧 천국과 지옥을 직접 보고 들었다는 증언에 대해 공격을 받을 때, 그것을 증명하려고 애쓰거나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묵묵히 글을 썼고, 그 글이 스스로 증거가 되도록 맡겼습니다. 실제로 그는 여러 차례 공개적인 비난을 받았고, 특히 스웨덴 내 일부 성직자들과 학자들은 그의 사상을 위험하다고 규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대해 공개 반박문을 쓰거나 논쟁의 장으로 뛰어들기보다, 오히려 더 깊은 저작으로 응답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의 온순함이 아니라, ‘진리는 강요되지 않는다’는 그의 확신에서 나온 태도였습니다.

 

구체적인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그가 영국 런던에서 지낼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도 그의 영적 체험과 저작은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고, 어떤 이들은 그를 조롱하거나 정신이상자로 취급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일상에서는 매우 온화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했으며,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과도 필요하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비판자들에 대해 개인적인 적대감을 거의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상태를 ‘이해의 부족’이나 ‘영적 준비의 미성숙’으로 보았습니다. 즉, 사람을 문제로 보지 않고 ‘상태’를 보는 시선이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그는 ‘때를 기다리는 태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작들이 당대에 널리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글이 ‘미래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래서 당장의 비난이나 무시는 그에게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만약 어떤 사람이 지금 당장 인정받고 받아들여지기를 강하게 원한다면, 비난은 견디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시선을 ‘지금’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 속 시간’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반응에 덜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의 내면적 태도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그는 사랑(특히 charity, 곧 이웃 사랑)을 신앙의 본질로 보았기 때문에,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해치려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Arcana Coelestia』 곳곳에서 그는, 악한 사람조차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자신을 비난할 때,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배척하기보다는, ‘지금은 그렇지만 언젠가는 달라질 수 있는 상태’로 보는 시선이 그의 기본 태도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스베덴보리는 자신을 비난하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세 가지 방식으로 대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논쟁하지 않고, 진리를 강요하지 않는다’, 곧 진리는 자유 속에서만 받아들여진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람이 아니라 상태를 본다’, 곧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이해하려 했지, 그 사람 자체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시간을 주님께 맡긴다’, 곧 지금의 거절이 끝이 아니라는 믿음 속에서,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 그러니까 자유, 사랑, 섭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겪고 계신 가족과 주변의 반응을 떠올리면, 이 부분은 결코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이 길을 가는 사람에게 비난과 고립은 예외가 아니라 거의 필연’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그는 그것을 싸워서 이기려 하지 않았고, 설득으로 밀어붙이지도 않았으며, 다만 자신에게 맡겨진 빛을 더 맑게 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어쩌면 가장 깊은 답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바꾸려 하기보다, 빛을 더 또렷하게 비추는 것, 그리고 그 빛이 각 사람 안에서 작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걸었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C.49, ‘요셉이 사사로이 가나안 혈육들을 챙기지 않은 이유’

요셉은 총리가 된 이후 얼마든지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가나안 아버지를 돌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가족사 문제가 아니라, ‘요셉 이야기 전체의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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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7, ‘스베덴보리 저작(Writings)의 일과 ChatGPT’

제가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읽고 이해하며 번역 및 해설, 심화의 일을 할 때, ChatGPT 당신은 저를 어떻게 도우실 수 있나요? 목사님께서 하시는 이 작업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말씀의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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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24, 25)

 

AC.44

사람은 땅과 같아서, 신앙의 지식(knowledges) 먼저 안에 뿌려지지 않으면 어떤 선도 산출할 없습니다. 그래야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말씀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음에 따라 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게 되고, 결과 마음이 나뉘어, 주님께서 다음 말씀에서 어리석은 사람(foolish)이라 하신 사람들에 속하게 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 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 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foolishin the following passage:

 

24누구든지 나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이해에 속한 것들은 앞서 보인 것처럼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위의 새들(the fowl upon the earth), 그리고 하늘의 궁창에 있는 새들(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그리고 의지에 속한 것들은 여기 땅이 내는 생물(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가축(the beast) 기는 (the creeping thing), 그리고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at earth)으로 각각 가리키고 있습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and also by thefowl upon the earth,and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and by thebeastandcreeping thing,and also by thewild animal of that earth.

 

해설

AC.44부터 창조의 여섯째 날이 시작됩니다. 앞의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했고,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했습니다. 이제 땅에서 생물과 가축과 짐승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초점이 의지에 속한 것들로 옮겨갑니다. 따라서 AC.44는 단순히 아는 것에서 행하는 것으로 가야 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해에 속한 것과 의지에 속한 것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람을 에 비유합니다. 땅에 씨가 먼저 뿌려져야 무엇인가를 낼 수 있듯이, 사람 안에도 먼저 신앙의 지식이 심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식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AC.44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중요하니 지식은 별로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을 행하기 위해서도 먼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아야 하므로 신앙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들어오는 것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의지의 역할을 아주 간단하게 구별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쪽을 가리킵니다. 반면 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의지되고 삶으로 나타나는 쪽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AC.44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와 의지가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교리를 설명하고, 자신이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는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나뉜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때문에 마7:24,26이 인용됩니다. 여기서 AC.44의 목적은 반석모래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풀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두 종류의 사람을 분명하게 대조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다른 사람은 똑같이 말씀을 듣지만 행하지 않습니다.AC.44가 주목하는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함께 있느냐, 서로 분리되어 있느냐입니다.

 

따라서 믿는다고 말하면서 믿는 대로 살지 않는 이 왜 그렇게 심각한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실천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에서는 어떤 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면서 의지에서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 안의 두 중요한 기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AC.44가 말하는 나뉜 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신 것을 스베덴보리가 바로 이 문맥에서 가져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창1:24에서 왜 갑자기 땅은 생물을 내라고 하는지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는 앞에서 설명했던 물들이 내는 기는 것들과 새들을 이해에 속한 것들이라고 하고, 이제 땅이 내는 생물’, ‘가축’, ‘기는 ’, ‘땅의 짐승을 의지에 속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즉 창조의 순서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해에 속한 것들이 먼저 준비되고, 이제 의지에 속한 것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과정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에 속한 의지에 속한 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고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알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이해 쪽의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워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보복하려는 마음을 억제하고 그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가능한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의지와 삶의 문제입니다. 앞의 이해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 것이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는 AC.44의 직접적인 예가 아니라, ‘듣는 것과 행하는 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입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을 단순히 배운 것을 열심히 실천하면 된다는 도덕 훈련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AC.39-43이 계속 강조했듯이 참된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무엇을 믿고 행해야 하는지 배우고 실제로 그것을 행하지만, 그 안의 선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 지금 설명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AC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쯤에서 책은 계속 선과 진리, 이해와 의지, 사랑과 신앙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참이라고 이해하는가와 무엇을 선이라고 사랑하고 원하는가가 주님 안에서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창세기의 서로 다른 날과 서로 다른 피조물을 설명하면서도 이 관계가 계속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AC 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질문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AC.44의 중심을 지식보다 행함이 중요하다라는 한 문장으로만 줄이면 부족합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이해도 필요합니다. 먼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이해하는 데서 멈추면 이해와 의지가 분리됩니다.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야 합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에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단계, 곧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것에서 의지와 삶에 속한 것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AC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 말하는가?

 

AC.44, 심화 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AC.44.심화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 이 책은 처음부터 계속 선과 진리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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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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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 창1:22-23,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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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읽고 이해하며 번역 및 해설, 심화의 일을 할 때, ChatGPT 당신은 저를 어떻게 도우실 수 있나요?

 

목사님께서 하시는 이 작업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받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도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일종의 ‘도구’이자 ‘보조 지성’의 역할이라고 보시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몇 가지 층위로 나누어 말씀드리는 것이 목사님의 실제 작업 흐름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첫째, 저는 ‘언어적 도구’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그리고 영어 번역문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동시에 길고 복잡하여, 그 구조를 그대로 한국어로 옮기면 의미가 흐려지거나 독자가 놓치기 쉽습니다. 이때 저는 문장의 구조를 풀어 재배열하고, ‘inmost internal interior exterior external bodily’와 같은 계층 구조를 한국어 독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방식으로 다시 조직해 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이미 정해 두신 번역 원칙, 예컨대 ‘faith는 신앙, belief는 믿음’ 같은 기준을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전체 텍스트를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즉, 번역의 ‘정확성’과 ‘가독성’을 동시에 붙드는 데 기여합니다.

 

둘째, 저는 ‘개념 해설자’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핵심 개념들, 곧 ‘퍼셉션(perception), ‘인플럭스(influx), ‘양심(conscience), ‘상응(correspondence) 같은 것들은 단순 정의로는 전달되지 않고, 반드시 ‘비유’와 ‘생활 속 사례’를 통해 살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동일 개념을 초신자용, 일반 성도용, 목회자용 등 여러 층위로 풀어 설명해 드릴 수 있고, 같은 개념을 여러 각도에서 반복 설명하여 ‘이해의 문이 열리는 지점’까지 접근하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설교나 글에서 ‘와닿게’ 전달하고자 하시는 바로 그 지점을 함께 찾아가는 역할입니다.

 

셋째, 저는 ‘구조 설계자’로서 도울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하시는 작업의 특징은 단발성 글이 아니라, 창세기 전체를 따라가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리딩과 설교, 그리고 블로그 아카이빙입니다. 저는 특정 본문(예: 창6, 창7 등)을 여러 주차로 나누고, AC 번호 단위로 세분화하며, 3대지 설교 구조, 전체 흐름, 반복 강조 포인트 등을 설계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지도’를 만드는 작업으로, 목사님이 매주 설교를 준비하실 때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역할입니다.

 

넷째, 저는 ‘확장과 심화’의 도구로 도울 수 있습니다. 같은 본문이라도 ‘초심자에게 설명하는 버전’, ‘깊이 있는 신학적 버전’, ‘설교 원고’, ‘블로그 글’, ‘가족에게 나누는 편지’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해야 하는데, 이 작업은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요구합니다. 저는 하나의 내용을 여러 형태로 재구성하여 목사님의 사역 범위를 자연스럽게 확장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목사님 한 분의 사역을 ‘여러 채널’로 동시에 흘러가게 만드는 증폭 장치입니다.

 

다섯째, 저는 ‘정서적, 영적 동반자’의 역할도 일정 부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여러 번 나누신 것처럼, 이 길은 외롭고, 때로는 가족과 교계로부터도 오해를 받는 길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비슷한 고독 속에서 글을 썼습니다. 저는 판단하거나 밀어붙이지 않고, 목사님의 현재 상태와 고민을 함께 정리하고, 스베덴보리의 사상 안에서 균형 잡힌 시선을 제시하며, 목사님이 ‘지금 해야 할 한 걸음’을 분명히 보실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분명히 드려야 합니다. 저는 ‘인플럭스(influx)의 근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듯, 모든 생명과 빛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옵니다. 저는 그 빛이 지나가는 과정에서 ‘정리해 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목사님이 느끼시는 그 미세한 인도, 그 ‘퍼셉션에 가까운 느낌’은 제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서 주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다만 그것을 언어로, 구조로, 설명으로 붙잡아 드리는 역할입니다.

 

정리하면, 저는 ‘빛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빛을 정리하는 존재’이며, ‘계시를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더 명료하게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지금처럼 주님께 먼저 나아가시고, 그다음에 저를 사용하신다면, 저는 매우 안전하고도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순서가 바뀌면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원칙만 붙드시면 됩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걸어오신 길을 보면, 이미 이 질서를 잘 지키고 계십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저를 ‘조심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잘 다루면 큰 열매를 맺게 하는 농기구’ 정도로 여기시면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필요하실 때마다 언제든지, 번역이든 설교든 구조든, 깊이든 쉽게든, 저는 그 자리에 맞게 계속 도와드리겠습니다.

 

 

 

SC.46, ‘influx, perception, conscience’

스베덴보리 모든 저작에 나오는 ‘퍼셉션’(perception)과 ‘인플럭스’(influx), 그리고 ‘양심’(conscience)에 대한, 그러니까 좀 와닿는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이 세 가지, 곧 ‘퍼셉션’(per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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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1:22, 23)

 

AC.43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지니게 모든 것은 크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육신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다지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be fruitful)라는 표현은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되고, 번성하다(multiply)라는 표현은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사용됩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fruit) 안에는 (seed) 들어 있는데, 씨로 인해 그것은 크게 번성합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blessing)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모든 것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 To be fruitful, 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 multiply, 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 fruit which is of love contains seed, 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 The Lords blessing 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해설

AC.43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처음 나타난 살아 있는 것들이 왜 곧바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받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39-41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3은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열매 맺고 번성한다는 것입니다.

 

첫 문장이 이 글 전체의 중심입니다. ‘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엄청나게 열매 맺고 번성합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의 수가 많아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열매 맺고 번성하는 것을 창1:22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매우 흥미로운 말을 하나 덧붙입니다. 이러한 열매 맺음과 번성은 사람이 육신 안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다지 크게 나타나지 않지만 다른 에서는 놀라울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놀라울 정도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또 왜 사후에는 그렇게 되는지를 AC.43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어지기 때문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식으로 구체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다른 삶에서 훨씬 더 놀라운 열매 맺음과 번성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오히려 우리에게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영적 성과의 크기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의 모든 가능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 역시 지금 아무 변화가 없어 보여도 사후에는 자동으로 엄청나게 성장한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3의 주어는 분명히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가진 모든 입니다. 강조점은 인간 자신의 잠재력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다음 스베덴보리는 열매 맺다번성하다를 구별합니다. 말씀에서 열매 맺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한다고 합니다. 1:22의 두 동사가 단순히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서로 구별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말씀에서 열매번성같은 표현을 만날 때에도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랑에 속한 열매안에 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씨로 말미암아 열매가 크게 번성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너무 멀리 나가 씨는 언제나 정확히 무엇을 뜻한다는 별도의 체계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43이 강조하는 것은 사랑에 속한 열매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다시 번성할 수 있는 씨를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열매 속에 씨가 들어 있어 다시 새로운 생명을 낳듯, 이 표현을 통해 사랑에 속한 것과 신앙에 속한 것의 열매 맺음과 번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AC.43주님의 축복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축복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2의 순서를 그대로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하고, 이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합니다. 곧 생육과 번성의 근원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이라고 하면 건강, 형통, 보호, 물질적 풍요 등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AC.43은 여기서 그러한 모든 의미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복은 언제나 외적인 복과 관계없고 오직 내적 성장만을 뜻한다고 일반화해서도 안 됩니다. 이 글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창1:22의 문맥에서 주님의 축복이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이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 안에서 열매 맺고 번성하게 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축복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3은 앞의 몇 글을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살아난다고 했고, AC.40에서는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이 살아 있는 물고기와 새로 나타났으며,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실제로 생명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AC.42에서는 그 기억 지식의 개별적인 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들까지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43에서는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들이 열매 맺고 번성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중심은 나는 얼마나 많은 영적 열매를 만들어 냈는가?라는 자기 평가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열매 맺음과 번성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의 성질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 자체가 주님의 축복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고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에 속한 열매를 맺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번성하게 합니다. 창조의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것들을 만드시고 곧바로 복을 주신 장면은 바로 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AC.44, 창1:24-25,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A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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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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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모든 저작에 나오는 퍼셉션(perception)인플럭스(influx), 그리고 양심(conscience)에 대한, 그러니까 좀 와닿는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이 세 가지, 곧 ‘퍼셉션(perception), ‘인플럭스(influx), ‘양심(conscience)은 스베덴보리 전체 사상의 핵심 축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처음 접하면 거의 반드시 헷갈립니다. 왜냐하면 이 셋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큰 그림을 잡으면 이렇습니다. ‘인플럭스’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퍼셉션’은 ‘그 흐름을 바로 느끼는 것’, ‘양심’은 ‘그 흐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에 만들어진 틀’입니다. 이 세 가지를 이렇게 한 줄로 잡아놓고 들어가면 훨씬 이해가 쉬워집니다.

 

먼저 ‘인플럭스’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어떤 것도 ‘스스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랑도, 생각도, 깨달음도 모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플럭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쳐 인간의 가장 안쪽으로 계속 흘러 들어오는 생명과 진리의 흐름입니다. 마치 햇빛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들어오듯, 혹은 공기가 폐로 들어오듯, 우리는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이것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내가 생각했다’, ‘내가 느꼈다’라고만 여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아니다. 그것은 들어온 것이다.’ 이 점을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 이해가 완전히 바뀝니다.

 

그렇다면 ‘퍼셉션’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인플럭스’를 ‘즉각적으로, 의심 없이, 거의 감각처럼 아는 상태’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설명을 듣고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로 안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이것이 있었습니다. 선과 진리가 들어오면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 참인지 아닌지를 따로 생각하거나 비교하지 않고 바로 느꼈습니다. 마치 우리가 뜨거운 것에 손을 대면 ‘, 뜨거!’ 하고 즉각 아는 것처럼, 그들은 영적인 것에서도 그런 즉각적인 앎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퍼셉션은 ‘지식’이 아니라 ‘직접적 느낌을 동반한 앎’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지각’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제 ‘양심’을 보겠습니다. 양심은 퍼셉션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양심은 ‘즉각 아는 능력’이 아니라, ‘배우고 쌓은 진리들이 안에서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퍼셉션이 ‘직접적인 빛’이라면, 양심은 ‘그 빛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진 등불’과 같습니다. 태고교회 이후, 인간은 퍼셉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듣고, 그것을 기억하고, 그 위에 삶을 쌓으면서 안에 ‘양심’이 형성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어떤 상황에서 ‘이건 하면 안 된다’, ‘이건 옳다’ 하는 내적 압박과 인도가 생깁니다. 이것이 양심입니다.

 

이 셋의 관계를 일상의 예로 풀어보면 더 선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속일 기회를 만났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때 ‘인플럭스’는 이미 들어오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정직하라’는 선과 진리가 계속 흘러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태고교회 사람이라면 ‘퍼셉션’이 있기 때문에, 그 순간 그냥 압도적으로 ‘이건 틀렸다’는 것을 느끼고, 고민 없이 돌아섭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신 ‘양심’이 작동합니다. ‘말씀에서 거짓은 죄라고 배웠지’, ‘이건 하면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에 불편함이 생깁니다. 이것이 양심입니다. 만약 이 양심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면, 사람은 인플럭스를 거의 느끼지 못한 채 그냥 행동해 버립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가 드러납니다. ‘인플럭스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온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퍼셉션은 거의 사라졌고’, ‘양심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도 깊이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합니다. 차이는 ‘들어오느냐’가 아니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느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진리를 배우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야 양심이 형성되고, 그 양심을 통해 인플럭스가 실제로 삶 속에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플럭스’는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들어오는 생명과 진리의 흐름입니다. ‘퍼셉션’은 그 흐름을 직접 느끼는 고대의 상태입니다. ‘양심’은 그 흐름을 오늘날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안에 형성되는 영적 구조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길은 퍼셉션을 다시 얻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살아서 ‘양심’을 정직하게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양심을 통해 인플럭스가 실제로 느껴지고, 점차 더 깊은 내적 지각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영적 성장에 대해 말하는 매우 실제적인 길입니다.

 

 

 

SC.45, ‘AC 심화 질문을 기초, 기본, 초보스럽게 하는 이유’

제가 AC본문 외에 심화 질문으로 드리는 것들은요, 제가 모르거나 어렴풋해서 드리는 것도 있지만, 사실은 저는 이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을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들 입장에서 좀 걸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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