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21)
AC.42
앞서 말했듯이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Fishes)은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이제 생명을 얻은 기억 지식을 뜻합니다. 그리고 ‘큰 바다짐승들’(great whales, Whales)은 그러한 지식들의 일반 원리를 뜻하는데, 개별적인 것들은 이 일반 원리 아래에 있으며, 또 거기에서 나옵니다. 우주 안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어떤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은 것은 없는데, 그래야 그것이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래’(Whales)나 ‘큰 물고기’(great fishes)는 선지자들에 의해 종종 언급되며, 그때마다 기억 지식의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애굽 왕 바로는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곧 일반적으로 말해 지식(scientia)을 표상하는데, 그래서 ‘큰 악어’(great whale)라고 합니다. 에스겔을 보면, “Fishes,” 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 “Whales” 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 “Whales,” or “great fishes,” 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 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 “great whale.” As in Ezekiel:
너는 말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겔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2] 또 다른 곳에서는 And in another place: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겔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말씀은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그러니까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사야에서는 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 In Isaiah: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는 그런 사람들이 진리의 일반 원리조차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도 By “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So in Jeremiah: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여기 ‘좋은 음식’(delicacies)이라 한 것은 신앙의 지식(knowledges)을 뜻하며, 요나를 삼킨 고래처럼 그것들을 삼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큰 뱀’(whale)은 신앙의 지식에 관한 일반 원리를 단지 기억 지식으로만 지니고, 그런 방식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 “delicacies,” as the whale did Jonah; a “whale” 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해설
AC.42는 창1:21의 ‘큰 바다짐승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0에서 물고기는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물고기 하나하나보다 더 큰 것이 등장합니다. 바로 ‘큰 바다짐승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개별적인 기억 지식들을 포괄하는 ‘일반 원리들’(general principles)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이 ‘일반 원리’라는 말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여러 개별 지식을 한데 묶어 이해하게 해 주는 보다 포괄적인 지식이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실을 각각 따로 가지고만 있지 않습니다. 비슷한 것들을 묶고, 그 관계를 파악하고, 보다 큰 개념 아래에서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우주 안에는 어떤 일반 원리 아래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개별적인 것들이 존재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창1:21의 거대한 물고기 또는 큰 바다짐승은 바로 이러한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들’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AC.42는 ‘큰 바다짐승’이라는 상징 자체를 처음부터 악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창1:21에서는 하나님께서 큰 바다짐승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큰 바다짐승=악한 지식’이라는 고정된 상응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의 첫 설명에서 큰 바다짐승은 우선 기억 지식의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이후 선지서에서 인용되는 부정적인 사례들은 그러한 지식과 일반 원리가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하여 잘못 사용될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애굽 왕 바로를 예로 듭니다. 겔29:3에서 바로는 자기 강들 가운데 누운 ‘큰 악어’로 묘사되며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AC.42는 바로가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곧 일반적으로 말해 지식’을 표상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초점은 단순히 ‘애굽이나 악어가 나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기억 지식과 인간의 지성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특히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는 말은 바로 앞의 AC.39-41에서 계속 강조했던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주제와도 자연스럽게 대비됩니다.
겔32:2는 처음 읽으면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바로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이며, 강에서 움직이면서 발로 물을 휘저어 더럽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곧바로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그러므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풀이합니다. 독자는 당연히 ‘어떻게 저 구절에서 이런 뜻이 나오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AC.42 안에서 확실하게 붙들 수 있는 연결고리는 이렇습니다. 물고기는 기억 지식을 뜻하고, 큰 물고기 또는 고래는 그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들을 뜻하며, 바로는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곧 지식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기억 지식을 수단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면서 그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하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붙인 ‘and thus from themselves’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많이 알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지식과 지성을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앞의 AC.39-41과 함께 읽으면 더 분명해집니다. 거기서도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AC.42에서도 기억 지식과 지성 자체를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1:21의 물고기와 큰 바다짐승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좋다’고 하신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겨난 지혜처럼 붙들고, 그 힘으로 신앙의 신비를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사27:1의 인용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는 것’이 그러한 사람들이 ‘진리의 일반 원리조차 알지 못하게 된 상태’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 한 절의 모든 상징을 여기서 따로 해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2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큰 바다짐승이 ‘일반적인 것들’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것이 상실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은 진리의 일반적인 것들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렘51:34에서는 느부갓네살이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좋은 음식’이 신앙의 지식을 뜻하며, 그것을 고래가 요나를 삼킨 것처럼 삼켰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경우의 ‘고래’는 ‘신앙의 지식에 관한 일반 원리를 단지 기억 지식으로만 지니고, 그런 방식으로 행하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핵심은 지식을 많이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살아 있는 신앙의 것이 되지 못하고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머무르는 상태입니다.
이 대목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한 구별을 줍니다. AC.40에서 기억 지식은 결코 악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생명을 얻은 기억 지식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살아 있는 물고기로 표현됩니다. AC.4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 지식에는 개별적인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들이 있으며, 이 질서 자체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지식을 단지 기억 속에 쌓아 두거나, 자기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장악하려 하면 같은 상징이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42를 ‘지식은 위험하다’는 경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방대한 학문과 지식을 사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글이 묻는 것은 지식의 양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있으며, 그것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에 접근할 때 그 출발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억 지식이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살아날 때 그것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자기 지혜의 소유물로 붙들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 하면, 같은 지식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42의 여러 선지서 인용을 읽으면서 ‘스베덴보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구절에서 이런 속뜻을 알아내는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것은 겔32:2 한 절만 더 자세히 풀이한다고 해결되는 질문이 아닙니다.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을 때 반복해서 만나게 될 중요한 문제이므로, 이 질문은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심화
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AC.42, 심화 1, 스베덴보리는 인용 구절들의 이런 속뜻을 어떻게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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