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의 결론은, 주님은 천사들에게 있는, 주님 자신의 것 안에 계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천국 전체의 모든 것이 되신다. 주께로부터 온 선함이 천사들과 함께 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주께로부터 온 것은 곧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에게 있어 천국을 이루는 것은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온 선이다. From all this it can now be seen that the Lord dwells in the angels of heaven in what is his own, and thus that the Lord is the all in all things of heaven; and this for the reason that good from the Lord is the Lord in angels, for what is from the Lord is the Lord; consequently heaven to the angels is good from the Lord, and not anything of their own.
※천국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고,주님이 그들 안에 계신다.이것은 주께서 다음의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2
천국을 만드는 것은주님의 신성이다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11
천국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그들 안에 계신다. 이것은 주께서 다음의 말씀으로 가르치신 것이다. The Lord teaches that those that are in heaven and in the church are in the Lord and the Lord is in them, when he says: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4, 5) Abide in Me and I in you. As the branch cannot bear fruit of itself except it abide in the vine, so neither can ye, except ye abide in Me. I am the Vine, ye are the branches. He that abideth in Me and I in him, the same beareth much fruit; for apart from Me ye can do nothing (John 15:4, 5).
※세상에 살 때 자기가 행한 선과 믿어온 진리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또는 자기 것이 되었다고 확신한 영들이 있다.
2
천국을 만드는 것은주님의 신성이다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10
세상에 살 때 자기가 행한 선과 믿어온 진리가 모두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또는 자기 것이 되었다고 확신한 영들이 있다. 선행을 자기 공로로 여기고,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 그런 신념이 있다. 그런 영들은 천국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천사들은 그들을 어리석은 도둑이라 여겨 피한다. 어리석다는 이유는, 그 영들의 관심사가 신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도둑이라는 이유는, 그들이 주님의 것을 가로채려 하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천사들 안에 있는 주의 신성이 천국을 이룬다는 천국의 신념에 반대되는 것이다. Such spirits as have confirmed themselves during their life in the world in the belief that the good they do and the truth they believe is from themselves, or is appropriated to them as their own (which is the belief of all who place merit in good actions and claim righteousness to themselves) are not received into heaven. Angels avoid them. They look upon them as stupid and as thieves; as stupid because they continually have themselves in view and not the Divine; and as thieves because they steal from the Lord what is his. These are averse to the belief of heaven, that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in the angels that makes heaven.
※천사들은 그들의 지혜로 이 사실을 더 깊이 알고 있다.그들은 선하고 참된 모든 것뿐 아니라,삶의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2
천국을 만드는 것은주님의 신성이다
It Is the Divine of the Lord That Makes Heaven
9
천사들은 그들의 지혜로 이 사실을 더 깊이 알고 있다. 그들은 선하고 참된 모든 것뿐 아니라, 삶의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그들이 이것을 확증하는 것은, 어떤 것도 그보다 먼저 있는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원리를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하나의 처음 존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 처음 존재를 모든 생명의 궁극적 존재라 부른다. 같은 원리로 만물은 존속한다. 존속한다는 것은 끊임없는 생겨남이며, 중간 매체들을 통해 처음 존재와 끊임없이 연결되지 않는 것은 그 즉시 사라지고 완전히 소멸되고 만다. 생명의 원천은 오직 하나이며, 사람의 생명은 거기서 나오는 물줄기라고 천사들은 덧붙인다. 따라서 그 물줄기가 끊임없이 원천으로부터 흐름을공급받지 않으면 즉시 말라 없어진다는 것이다.Angels from their wisdom go still further. They say that not only everything good and true is from the Lord, but everything of life as well. They confirm it by this, that nothing can spring from itself, but only from something prior to itself; therefore all things spring from a first, which they call the very being [esse] of the life of all things. And in like manner all things continue to exist, for continuous existence is a ceaseless springing forth, and whatever is not continually held by means of intermediates in connection with the first instantly disperses and is wholly dissipated. They say also that there is but one fountain of life, and that man’s life is a rivulet therefrom, which if it did not unceasingly continue from its fountain would immediately flow away.
[2] 더 나아가, 그 유일한 생명의 원천은 주님이시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오직 신적 선과 신적 진리밖에 없으며,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영향이 달라진다고 한다. 즉 선과 진리를 믿음과 생활 안에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천국이 되고, 선과 진리를 거부하고 질식시키는 사람은 그것을 지옥으로 만든다. 그가 선을 악으로, 진리를 거짓으로 변질시켜 생명을 죽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또 천사들은 생명의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확증한다. 우주 만물은 선과 진리에 연관되어 있다. 선은 사람의 의지의 생명, 즉 사랑의 생명에 연관되어 있고, 진리는 사람의 사고력의 생명, 즉 그의 신앙의 생명에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선과 진리가 위에서 오기 때문에 삶의 모든 것도 위에서 오는 것이다. Again, they say that from this one fountain of life, which is the Lord, nothing goes forth except Divine good and Divine truth, and that each one is affected by these in accordance with his reception of them—those who receive them in faith and life find heaven in them while those who reject them or stifle them change them into hell; for they change good into evil and truth into falsity, thus life into death. Again, that everything of life is from the Lord they confirm by this: that all things in the universe have relation to good and truth—the life of man’s will, which is the life of his love, to good, and the life of his understanding, which is the life of his faith, to truth; and since everything good and true comes from above it follows that everything of life must come from above.
[3] 천사들은 이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자기들의 선행에 대한 감사를 전부 거절하고, 선을 천사들의 공로로 돌리는 사람들이 있으면 화를 내고 물러선다. 그들은 누군가 지혜와 선이 자아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자아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천사들은 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선 자체를 목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은 신성에서 온 선이라고 부른다. 그 선이야말로 주께로부터 나오는 선이며, 이것이 천국을 이룬다고 천사들은 말한다.주18This being the belief of the angels they refuse all thanks for the good they do, and are displeased and withdraw if anyone attributes good to them. They wonder how anyone can believe that he is wise from himself or does anything good from himself. Doing good for one’s own sake they do not call good, because it is done from self. But doing good for the sake of good they call good from the Divine; and this they say is the good that makes heaven, because this good is the Lord.18
주18.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은 그 안에 내적으로 주님이 계시지만, 사람으로 말미암는 선은 그렇지 않다. Good from the Lord has the Lord inwardly in it, but good from one’s own has not (n. 1802, 3951, 8480).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눅18:15-17)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는 만큼 선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순진함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結婚愛 414, 이순철 역) The reason why good is good insofar as innocence is within it is that all good is from the Lord, and innocence is to be led by the Lord. (CL.414)
주님께서는 천국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예전의 아이들은 지금과 많이 달랐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니고, 어린아이의 속뜻이 순진함, 이노센스(innocence)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먼저 15절입니다.
15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사람들이 주님이 만져주시기를 바라고,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주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린 아기는 순진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기를 데리고 주님 앞에 나아오는 것은, 그 속뜻으로는, 사람들이 주님께 진리를 배우러 나올 때 순진한 마음으로 나아온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주님이 자기의 아기를 만져주시기 원했습니다. 주님이 아기를 만지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이 순진한 마음 가운데로 오셔서 사람들과 교류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순진한 마음으로 말씀을 가까이할 때, 주님께서 그 마음속으로 오셔서 진리의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아기를 만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말씀에서 주님의 제자는 보통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을 뜻하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주님을 잘못 믿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 거짓 교리를 만들거나, 또는 진리를 알면서도 행하지는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는 사람들을 꾸짖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배우려는 사람들을 방해하거나 박해하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순진한 사람들을 박해할까요? 순진함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것에 따라 박해하는 방법도 다릅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전혀 모르는 교회 밖의 사람들의 순진함이 있습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들은 무조건 베푸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새 교회에서는 이런 걸 무지의 순진함이라고 합니다. 이때 우리가 이런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순진한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가 하면,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순진함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순진함이란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한 그것에 따라 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 안에 있는 이들을 거짓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질시하고 핍박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 또한 순진한 사람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 가령, 이런 아르카나, 말씀의 속뜻에 기반한 새로운 내용들을 전한다 하여 기존 기독교회, 개신교회에서 이단으로 규정, 여러 방법을 통해 괴롭히는...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 주님의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을 꾸짖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순진함의 단계 내지는 유형은 다양한데요, 그래서 말씀에서는 아이를 젖먹이라 하기도 하고, 아기, 또는 어린아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젖먹이가 가장 순진한 것이고, 아기나 어린아이로 갈수록 그보다는 덜 순진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꾸짖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6절입니다.
16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린아이에 비유되는 순진함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스베덴보리 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414번 글에서는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는 만큼 선이다. 왜냐하면 모든 선은 주님으로부터 있고, 순진함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합니다. 즉 순진함이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인데, 그러므로 순진함이 없으면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고, 그렇다면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선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럴 경우, 비록 겉보기엔 선처럼 보일지라도 그 선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이 아니므로 참된 선이라 할 수 없겠습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말씀하신 것은 그런 까닭입니다. 주님은 교회 안의 사람이든 교회 밖의 사람이든 그들의 순진하고 선한 마음 안으로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의 비밀’(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059번 글에 의하면, 놀랍게도 주님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로 더 많이 오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진리를 대적하지 않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는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랍니다. 진리를 대적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님 당시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왜곡해서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을 대적하고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만일 돌이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3장 23절 이하에서는 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3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24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29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30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눅13:23-30)
여기서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고 주님께 여쭙는 것은 ‘교회 안에 주님을 대적하는 자가 많은데 구원받을 자가 과연 있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중 된 자는 교회 밖의 타 종교 사람들을 뜻하고, 먼저 된 자는 교회 안에 있는 자로서 말씀을 왜곡한 자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교회 안의 사람들보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구원받기가 쉽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덮고 있는 지적 어둠은 주님에 의해 쉽게 걷히지만, 진리를 알면서도 더럽힌 자들은 그들을 덮고 있는 어둠이 걷히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지요. 17절입니다.
17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순진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뜻합니다.
※ 참고로,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국을 떠받치는 두 키워드는 ‘순진함’(innocence)과 ‘평화’(peace)라고 합니다.
순진한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이유에 대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281번 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순진성(innocence)에 대해 천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순진성이 모든 선함의 본질이라는 것과, 선은 그 안에 순진성이 있을 때만 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지혜(wisdom)도 순진성이 있어야 지혜이며, 사랑(love), 이타심(charity), 신앙(faith)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순진성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
선은 그 안에 순진함이 있어야 선이다. 모든 선은 주께로부터 오며, 순진함이란 주의 인도하심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말하기를, 오직 순진성에 의해서만 진리는 선에, 선은 진리에 결합될 수 있으므로 천사는 순진성이 있어야 천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선과 진리가 천국적 결혼으로 결합되지 않은 사람 안에는 천국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과 진리의 결합을 천국적 결혼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천국적 결혼이 바로 천국인 것이다.
또 천사에게 들은 것은, 참된 결혼애는 순진성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그 까닭은 참된 결혼애는 남편과 아내의 마음이 선과 진리의 결합 안에 있을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결합이 낮은 단계로 내려와 결혼애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했다. 부부는 각자의 마음이 사랑 안에 있는 만큼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결혼애에는 애들 같은 천진난만한 장난스러움이 있다고 했다. (천국과 지옥 281, 김은경 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진리 안에 들어온 우리들은 나름대로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 이 진리를 택했고, 진리에 따라 살고자 지금 노력하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타 종교나 타 교파의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들 중에도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린 아기를 데리고 주님께로 오는 사람들을 꾸짖는 제자들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진리 안에 있다고 우월감을 가지거나 다른 종교나 교파 사람들을 경시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영적 순진함을 잃어버리거나 시험에 들 수가 있습니다.
※ 아래 이야기는 이 설교의 원 저자이신 이순철 목사님의 에피소드입니다.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미묘한 우월감을 갖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한국 불교계의 큰 스님 중 한 분인 탄허 스님에 대한 강연이 있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연자에 의하면, 탄허 스님은 기독교의 교리에 대해 기독교 신학자보다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을 모두 외우고 이해하는데 자신은 3년이 걸렸는데 재능이 있는 사람은 3개월이면 될 거라고 했다고 합니다. 불교에 비해 기독교의 교리가 그만큼 깊이가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면서도 기독교와 동양의 유, 불, 선이 서로 회통(會通)해야 한다 주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탄허 스님에 대해 더 궁금해졌습니다. 강연하는 스님이 말하기를, 탄허 스님은 석가나 공자, 예수 같은 성인을 생각이 끊어진 자라고 정의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슨 말일까요? 개인적으로 이해하기는, 성인들은 우주 만물의 본질인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도 모두 안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그것을 아는 지는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생각하는 자는 영적인 사람이고, 생각이 끊어진 자, 즉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아는 사람은 천적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천적인 사람은 천국으로부터 오는 신성한 지각, 즉 퍼셉션(perception)을 통해 주님과 직접 소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앉은 자리에서, 생각하지 않고 바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강연자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밖에 있지 않고 사람 안에 있다고 할 뿐 모호하게 설명했습니다. 성경을 모두 이해했다는 탄허 스님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요? 만약 알았다면 예수님을 석가와 공자와 같은 성인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군지 모르면서 하나님을 믿고 진리를 믿어야 한다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잘 모르는 존재를 왜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까? 이 모든 의문들을 주님께서는 직접 세상에 오심으로써 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몸소 보여주시고, 음성을 들려주시며, 손으로 직접 만져보게 하셨습니다. 새 교회의 진리를 통해 이제 누구나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진리가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진리를 믿고 따르는 일은 순진함이 없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항상 순진함을 구하시기를 바라고, 주님이 주신 순진함으로 늘 자신과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6:30-34)
스베덴보리가 알려주고 있는 바에 따르면, 사람 안에는 두 창문이 있는데, 한쪽 창이 열리면 다른 쪽 창은 닫힌답니다. 즉 세상, 세속을 향한 창이 열리면, 천국을 향한 창이 닫히고, 천국을 향한 창이 열리면 세상을 향한 창은 닫히는 것이지요.
이 어느 쪽 창이 열리는가가 아주 중요한데, 그 이유는, 그 열린 창을 통해 그곳의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인데요, 즉 천국을 향한 창이 열리면, 천국의 모든 입류(入流, influx)가, 지옥을 향한 창이 열리면, 지옥의 모든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세상을 향한 창을 닫기로 하고, 그래서 가급적 스마트폰을 닫고 있고, 부득이 보게 되어도 그냥 제목들 정도만 보고 꾹 참습니다. 그리고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천국을 향한 창을 여느라 애쓰고 있습니다. 밤낮 없이 창세기 번역에 힘쓰고 있고, 또 저희 사모와 함께 몇 가지 성독(聖讀), 즉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속뜻 주석,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스베덴보리 저) 및 ‘성 프란치스코’(엄두섭 저)를 일주일에 두 번씩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금 상황이 너무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는데... 그러나 주님의 섭리를 믿고 꾹 참습니다. 우리의 경우, 지난 6.25, 그 전 일제 치하, 외국의 경우, 가령, 나치 히틀러의 2차 세계 대전 때, 유럽 및 유대인들의 처지 등을 말이지요. 특히 주님 당시, 로마의 식민지 시절 등... 그때도 주님은 주님이 직접 나서 모든 상황을 그때그때 즉각 바로잡아 주시지 않으셨지요, 전에 나눈 아래와 같은 말씀처럼 말입니다.
위 말씀의 속뜻은,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생명은 오직 거짓과 탐욕밖에 없기 때문인데, 만일 이때 이 유일한, 비록 악하고 거짓되더라도, 생명을 건드리게 되면, 더 이상의 생명이 없어 사람은 바로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대신 비록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와 동행, 그가 자의로 주님의 선과 진리 쪽으로 돌이키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역량에 맞춰 강약을 조절하시면서 말이지요...
목사님, 모두 힘드시지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님을 믿으시며, 주님 주시는 ‘평안’ 가운데 힘써 거하시기 바랍니다. 가급적 세상, 세속의 창은 잠시 닫으시고요...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눅18:9-14)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선과 진리는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선한 것, 진실한 것, 성실하고 공정한 것을 속 사람과 관계없이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 행한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악이다. (계시록 해설 794:3, 이순철 역) all good and truth are from the Lord and not from man, because they are done from the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But when a man does and speaks what is good, true, sincere, and just, for the sake of self and the world he does and speaks them from self, because from the external man without the internal; and such deeds or works are all evil (AE.794:3)
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선하고 진실한 사람인지 아니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인지는 오직 주님만 아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판단할 때는 겉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행동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고, 살아오면서 그가 했던 일들을 잘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와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본문 10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주님 당시 유대교회 안에는 신학적 견해가 다른 몇 개의 분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리새파나, 사두개파, 에세네파 같은 사람들인데, 그 중 바리새파 사람들은 토라라고 하는, 모세의 오경을 글자 그대로 지키는 경건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의 신망이 아주 높았고, 그들 스스로도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세리는 유대 사회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나름 전문직이었고 무식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천대를 받았던 까닭은 그들의 직업이 돈을 만지는 일이었고, 그러다 보니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며, 또 당시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서 아무래도 세리는 지배 계급의 수족 역할을 할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성전에서 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이 먼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리새인들은 십계명을 글자 그대로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토색을 하거나 간음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토색이란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 것인데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소득의 십분의 일을 십일조로 바쳤으며, 유대교회의 전통인 이른바 장로의 전통에 따라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누구보다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그 역시 토색질하는 자요 간음자였습니다. 말씀에서 간음은 영적 의미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의 생각을 섞어 왜곡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처럼 많이 아는 사람들이 말씀을 왜곡했고, 또한 그것으로 교인들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교인들에게서 진리와 선을 빼앗는 일이었습니다. 영적으로 볼 때는, 그것이 바로 간음이요 토색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자들이었지만, 속으로는 토색하는 자요, 간음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세리를 내려다보며,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다음은 세리의 기도입니다.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자신이 저지른 악과 거짓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죄를 고백했습니다.
참고로, 이 기도는 특히 정교회에서 아주 유명한, 그리고 가장 기본이 되는 기도입니다. 정교회에서는 이를 ‘예수기도’라고 하는데 묵주를 한알 한알 돌리며, 밤을 새워 이 문장만 반복합니다.
주님께서 두 사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바리새인들은 말씀의 영적 의미는 몰랐기 때문에, 오로지 문자적인 뜻만을 지켰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능히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신앙 안에 있는 사람, 이를테면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잘 지키며, 이웃에게 겸손한 사람들도 구원을 받습니다. 비록 속뜻을 모르더라도 말이지요. 그러나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계명을 지킨다고 자랑하며, 함부로 이웃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공으로 돌리는 사람들에 대해 마태복음 7장 22, 2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겉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 같은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에 대해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영적인 마음과 자연적인 마음, 두 마음이 있습니다. 영적인 마음을 다르게 말하면 속 사람(internal man)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주님과 연결된 마음입니다. 그에 비해 자연적 마음은 겉 사람(external man)이라 불리고, 이는 세상과 연결된 마음입니다. 여기서 사람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모두 겉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다만 겉 사람이 하되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 있고, 속 사람과 관계없이 겉 사람 혼자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즉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나 후자, 즉 겉 사람 혼자서 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입니다. 주님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겉과 속이 같으며, 그러므로 진실하고 선합니다. 반대로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은 겉과 속이 다르며, 그러므로 악하고 위선적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 중에도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요3:2) 하였고, 거듭남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바리새인들은 겉과 속이 다른, 교활하고 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1장에서 주님은 그들에게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눅11:39-41)
라고 말씀하십니다. 잔은 포도주를 담는 그릇이므로 영적으로는 진리와, 그리고 대접은 떡을 담는 그릇이므로 영적으로는 선과 각각 관련됩니다. 포도주와 떡은 각각 진리와 선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겉으로만 보면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것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악과 거짓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모두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셨습니다.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것은 이웃에게 선을 베풀 때는 속 사람으로부터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의미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세리의 심정으로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반성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14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계시록해설 794:3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통해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선과 진리는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 행한다면 그것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악이다.
일이 뜻대로 안 되면 자기도 모르게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말만 그럴듯하고 진심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축복을 하면서 속으로는 안 되기를 바랄 때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인간의 자아로부터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매사가 뜻대로 안 될 때는 니고데모처럼 은밀하게 말씀이신 주님을 찾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무슨 일이든 겉 사람 혼자 하던 버릇을 버리고 겸손하게 속 사람의 뜻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또한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7)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18:1-8)
기도에 의존하면 안 되는 이유는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기도하는 사람은 그가 구하는 것이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는 오직 주님만 아신다고 항상 생각하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들어주실지 말지를 주님께 맡겨야 하고 그에 따라 겟세마네의 가장 쓰라린 시험 가운데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한다. (천국의 비밀 8179, 이순철 역) prayer is not to be relied upon. For in prayer from the Divine it is always thought and believed that the Lord alone knows whether it is profitable or not; and therefore the suppliant submits the hearing to the Lord, and immediately after prays that the will of the Lord, and not his own, may be d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in His own most grievous temptation at Gethsemane (Matt. 26:39, 42, 44).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39)
오늘부터 18장입니다. 오늘 말씀이 있기 바로 전인, 요 앞 장 17장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은, 교회의 마지막 때 환난과 심판이 있는데, 그때 신앙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는데요, 교회의 마지막 때 모습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4장 1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는 교회의 거짓된 교리를 의미하고, ‘불법’은 교회들이 저지르는 악을 뜻합니다. 교회의 상태가 이렇다 보니, 교회의 마지막 때 신앙인들에게는 시험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분별력을 잃고 거짓 진리에 휩쓸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세상 즐거움에 빠져 신앙을 포기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신앙인들에게 닥치는 시험을 창세기에서는 노아 시대에 큰 홍수가 났을 때, 방주에 오른 사람들이 오랫동안 격랑 속을 떠다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 당시 사도들도 그런 시험을 겪었고, 그리고 오늘 이 시대 우리도 역시 그런 시험 가운데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런 환난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시험을 극복하고 마음속에 주님의 새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요?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험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본문에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로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절과 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어떤 도시에 사는 과부가 재판장에서 가서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는데, 특이한 것은, 그 재판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도시’나 ‘성읍’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니까 과부는 교회의 교리 안에서 생활하는 어떤 신앙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판장은 누굴까요? ‘재판장’은 보통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진리가 아니라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지식,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합니다. 재판장이 진리의 지식을 뜻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는 건 주님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재판장은 사랑 없는 진리, 즉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지식,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합니다. 과부는 누굴까요? ‘과부’는 남편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삶 가운데서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진리가 없어서 잘못 행하는 걸 말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웃의 호의는 받아들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베풀기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선한 행동 같지만, 상대가 원치 않을 때는 자칫 인간관계가 소원해질 수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서도 그게 잘못인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요, 예를 들면 이런 게 모두 선만 있고 진리가 없어서 생기는 일입니다. 신앙인들이 스스로 진리 없음을 느낄 때, 말씀을 통해 또는 교리 공부를 통해 진리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통해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과부가 재판장에게 달려가 원한을 풀어달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한’은 진리가 없음으로 인해 생겼던 모든 어리석은 행동들을 뜻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종류의 과부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과부가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과부라면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과부는 반대로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는 과부입니다.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에 대해 아는 건 많은데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인데요, 이 경우에 ‘과부가 재판장을 찾아가는 것’은 의지가 약한 신앙인들이 진리를 통해 그것을 극복하려고 기도하면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부가 자꾸 찾아가자 마침내 재판장이 마음의 결심을 합니다. 그것에 대해 4절과 5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재판장은 처음 얼마 동안은 과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들이 진리를 통해 영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할 때, 처음에는 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 신앙인들이 처음 가지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관한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은 마치 나무토막과 같은 것이어서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태에서는 영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진리의 지식들은 어떻게 해야 능력 있는 진리로 변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신앙인들이 가진 진리에 관한 애정을 ‘과부가 수시로 재판장을 찾아가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과부처럼 우리도 거듭남에 관한 모든 문제를 재판장인 진리와 그 능력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진리를 통해 거듭남에 관한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쓸 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애정 가운데로 오셔서 죽어 있던 진리의 지식 속으로 주님의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그렇게 해서 그 지식을 살아있는 진리로 만드십니다. 바로 그때가 본문에서 재판장이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제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리라 결심하는 순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라는 것은 사랑 없는 진리가 주님에 의해 사랑 있는 진리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는 건 사랑 있는 진리로 이제는 어떤 시험에서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냅니다. 과부가 품고 있었던 ‘원한’은 뭘까요? 진리 또는 선이 없음으로 해서 그동안 지옥의 영들에게 당했던 수모와 아픔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재판장은 신앙인들이 처음 가지는 진리인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재판장을 불의하다 하는 것은 진리의 지식은 그 자체로 사랑 없는 진리이며, 그러므로 의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비록 사랑 없는 진리라도 신앙인들이 그걸 붙들고 거듭나기를 힘쓸 때, 주님은 그 지식 안으로 오셔서 그것을 살아있는 진리로 만드시고, 그것으로 항상 시험에서 이길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이 말씀의 속뜻은, 말씀의 문자적 진리에라도 순종하면,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재판장의 말을 듣는 것은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십니다. 여기서는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한을 풀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여기 ‘하나님’은 뉘십니까? 말씀의 내적 의미로 다시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말씀의 내적 진리를 통해 그동안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 안에는 지옥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에 대해 이사야서 30장 2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일곱 배’란 그때의 진리의 능력이 전보다 완전하고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진리인, 말씀의 내적 진리를 붙들고 각자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바로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되 오래 참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로 오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미친다면 모든 원한이 속히 풀릴 것입니다. 병이 고쳐지고, 가난에서 건짐을 받을 것이고, 그 밖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주님이 말씀의 내적 진리로 다시 오셨다는 것과, 그 진리 가운데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진리의 능력이 속히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믿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새 교회 가르침 ‘신앙에 관한 교리’ 69항을 보면,
인애는 믿음의 생명이고 본질이다. 그러므로 인애에서 분리된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의 교리 69, 이순철 역)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is no faith, because charity is the life of faith: its soul, and its essence. (F.69)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 신앙의 본질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인애, 체어리티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시험에서 번번히 넘어진다면, 자신이 과연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으면 진정한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간단하고 쉬운 일이라도 매일 같이 체어리티를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진실한 믿음이 생기고 그것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와 우리들의 삶을 높이 들어 올릴 것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는 낙심하지 마시고, 과부의 심정으로 재판장이신 주님께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만약 시험에서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다면, 시험을 통해 이루시려는 주님의 목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들의 영적 행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때 막혔던 혈관이 뚫리는 것처럼 진리의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와 모든 문제가 풀릴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2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3들어가니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하더라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눅24:1-12)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외적인 것은 호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지식과 가장 바깥쪽의 것인 감각에 속한 것인데, 감각에 속한 것이란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짐으로써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외적인 것에 내적인 것들이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영적 의미로 사람이 걸치는 피복이나 옷으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바로 이 외적인 것을 말한다. (천국의 비밀 9216:2, 이순철 역) These also follow in order from interior to exterior things. Exterior things are memory-knowledges with their pleasant feelings; and outermost things are those of the senses, which communicate with the world by the sight, the hearing, the taste, the smell, and the touch. Upon these the interior things rest, for in these they terminate. These are the things which are signified in the spiritual sense by the “covering” or “garment wherein he may sleep.” (AC.9216:2)
오늘은 부활절, 주님 부활하신 이 아침에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주님은 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을까요? 그와 관련해 새 교회 가르침 “천국의 비밀” 9216번 글 2번 항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은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 차례로 흘러들어온다. 내적인 것들이 외적인 것에 머무는 까닭은 내적인 것의 흐름이 거기서 끝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장 내적 존재인 주님은 가장 외적 존재인 인간에게로 오셔서 영원히 그와 함께 사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셨던 무한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조물인 유한한 인간과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는 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은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정도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지극히 높은 천국으로부터 지극히 낮은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모진 고난을 이기시고, 신성하고 완전한 진리가 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진리를 통해서만 인간은 주님을 바르게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완전하고 신성한 진리(Divine Truth)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1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
‘새벽’은 영적으로, 즉 그 속뜻으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부활하신 주님이 완전하신 진리로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시는 때이며, 동시에 그 진리를 가지고 낡고 부패한 교회를 심판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여시는 때입니다. 그때가 새벽입니다. 그때 여자들이 향품을 준비해 무덤으로 갔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리를 사랑하여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심판 때 구원받을 사람들이며, 주님이 세우시는 새 교회에 참여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살아계신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시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는 진리가 죽은 자의 시신처럼 아직 생명 없는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시신’은 죽은 진리, 즉 생명 없는 말씀의 지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의 진리는 생명이 없는 진리, 못 움직이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창세기 1장 창조의 순서 중 식물부터 먼저 창조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이유는, 처음에는 진리를 믿기만 할 뿐 아직 행동하지는 않기 때문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여자들이 향품을 가지고 주님의 시신에 바르는 것은 죽은 것 같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는 최초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향품’은 내적 진리를 획득하기 전에 신앙인들이 소유하는 자연적인 진리, 이를테면 십계명의 문자적인 가르침 같은 것을 뜻합니다.
여자들이 무덤에 갔을 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었고, 그 안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시신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덤을 막은 돌’은 뭘까요? 신앙인들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걸 방해하는 여러 가지 자아의 거짓을 뜻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이나 진리에 대한 잘못된 추론, 또는 그 밖에 이기적인 악과 그것에서 비롯한 거짓들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동안에는 진리는 무덤 밖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로, 그리고 다음에는 내적 진리로 말씀을 이해하고 지키려고 할 때, 주님에 의해 진리를 방해하던 거짓들이 물러갑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자아의 거짓을 물리칠 수 없고, 심지어 어떤 게 거짓인지도 잘 모릅니다. 거짓들은 마치 칡넝쿨이 나무를 감아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가 자라는 걸 가로막습니다. 주님만이 그것들을 잘라내 치워주실 수 있습니다. 그때 죽었던 진리가 살아납니다. 바로 그런 상태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는 것이고, 주님이 무덤에서 살아나시는 것입니다.
※ 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이 새로운 계시, 그러니까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롭게 여신 이 계시를 지난 2017년 가을에 처음 접했습니다. 당시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을 준비하시면서 수도사 학교(후에 수도 학교로 개명)를 시작하셨는데, 첫 학기 종강 때인 그해 초여름, 강사로 오신 시흥 영성수련원 원장 박희진 수도사의 권유로 저는 그 후 틈틈이 대전 바이블아카데미를 다니게 되면서 거기 주교재인 ‘핵심진리’를 접하게 되었는데, 거기에 나오는 ‘영계의 구조’에 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이 나오는 걸 보고 말이지요. 나중에 혹시나 하여 저의 지난날 일지를 보니 과거 제가 부사역자로 있던 교회에서 제가 돌보던 어느 목장 목자를 통해 제 생애 처음으로 이 ‘스베덴보리’라는 이름을 들었더군요. 목장원 중 한 분이 이 이름으로 모이는 무슨 이상한 성경공부 모임에 다닌다는 그런 상담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흔한 이단 분파, 신천지 같은 덴 줄 알고 금했죠. 그때가 2011년 2월이었습니다. 아무튼, 지난 2017년 1학기부터 1기생으로 출발한 저는 그때부터 접하는 모든 내용이 지난 50여 년 알아 오던 모든 기존 교리 내지는 신앙의 결을 내려놓고, 완전 새롭게 시작해야만 하는 것들이었는데, 그것은 마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 것과 같았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스베덴보리 연구회 출판, ‘위대한 선물’로 시작, 이어 그의 많은 저작 중 가장 대중적인 ‘천국과 지옥’으로 만나기 시작했고, 그렇게 이어진 주님의 이끄심으로 현재는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라틴, 天界秘義) 번역과 함께 이런저런 나름의 활동, 즉 유튜브와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더욱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시간을 갖겠습니다.
※ 생각해 보면, 누구보다도 특히 교리적인 부분에서는 절대 타협이 없는, 골수도 정말 특이한 골수인 제가 달라도 너무 다른, 완전 그 근본부터 다른 이 아르카나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 역시 주님이 하신 것이며, 처음엔 요나처럼 도망가기 바빴던 저를 그러나 끊임없이 권하시되 마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듯’ 저로 하여금 주님을 향하게 하신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저를 옴짝달싹, 마치 칡넝쿨처럼 옭아맨, 기존 기독교, 특히 개신교 교리인 ‘오직 믿음’ 교리를 모두 잘라내 치워주셨던 것입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을 치우시고, 살아나신 주님께서 말입니다. 제가 주님의 이끄심으로 스베덴보리를 통해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있었던 것은, 마치 태생적으로 유대교인이었던 주님의 제자들이, 그리고 바울이, 그러나 주님을 만나 자기들의 DNA에 새겨진 것과도 같았던 유대교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과도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지고, 주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여자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그 모습을 4절과 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는지라 5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한글 성경에는 여자들이 근심했다고 하지만, 영어 성경에는 perplex, 즉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는 것이지요. 주님이 부활하셨는데 여인들은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왜 공황 상태에 빠졌을까요? 첫째는, 신앙인의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려면 자아에 속한 게 죽어야 하는데, 그때 모든 걸 잃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진리가 살아났다 해도 처음 한동안은 진리가 나를 주장한다는 걸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앞에 바로 나타나시지 않은 것과도 같은 일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날 때, 신앙인들은 역설적으로 어디에도 기댈 진리가 없는 것 같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인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때 그들 곁에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두 사람은 누굴까요?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살아있는 진리이신 주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입은 빛나는 옷’은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가장 밝고 완전한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두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을까요?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는 선만 있고 진리가 없거나 진리만 있고 선이 없는 그런 진리가 아니라,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여인들은 주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거라는 말을 듣기는 했으나 실제로 이루어질 거라고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아직 자연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직접 눈으로 봐야만 믿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천사들을 보고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주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들이 두려워 떨거나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은 말씀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을 쓴 요한도 주님의 발 앞에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했습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면에서 어떤 영적 변화가 일어날 때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의미합니다. 주님의 신성이 사람 안으로 임하실 때, 인간이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들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여자들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그에게서 죽은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며, 그로 인해 자연적 신앙이 영적 신앙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것입니다.
7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리니 10(이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라 또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 11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
여자들이 마침내 주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사신다고 한 것을 기억해 내고는 무덤에서 돌아가 그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렸습니다. 무덤은 그들이 죽은 진리를 만나던 곳이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를테면 진리의 지식이 보관된 내면의 기억과 같은 곳이죠. 그러나 진리가 완전히 살아날 때, 이제는 애써 그곳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진리, 살아계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를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은 사도들은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 역시 아직은 자연적 신앙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직접 보고 만져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베드로가 주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그것에 대해 1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2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세마포만 보이는지라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란 이름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뜻합니다. 실제로 베드로의 성품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급히 무덤으로 달려가 몸을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봤습니다. ‘무덤으로 달려가는 것’은 진리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뜻합니다. 그리고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는 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 안에 있는 진리들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말씀을 대할 때는 언제나 몸을 낮춰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진리가 보이고, 또한 죽었던 진리가 살아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베드로의 눈에 들어온 것은 뭘까요? 주님의 시신이 아니라 세마포였습니다. ‘세마포’는 주님이 주시는 내적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본 진리는 이전에 알던 생명 없는 지식이 아니라 내적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에게 있던 진리들이 살아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면에서 진리가 살아나는 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것 이상의 기적입니다. 흔히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리가 살아나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기질이 바뀝니다. 그것은 주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다고 합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절을 맞아 다시 한번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자들은 향품으로 표상되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연적 진리란 말씀의 문자로 표현된 진리이며, 내적 진리를 담기 위한 그릇 역할을 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그 자체로는 아직 완전한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자연적 진리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점차 그 안에 내적 진리를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까닭은, 내적 진리가 자연적 그릇 안에 담길 때, 온전하고 힘 있는 진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옥을 이기신 주님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세상에 계실 때, 완전하지 않은 진리의 상태에서 지옥의 시험을 완전히 이기시고, 신성한 진리 자체가 되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처음부터 신성한 진리 그 자체셨다면, 주님은 시험을 당하실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지옥이 감히 주님을 대적하거나 도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는 시험을 당하시는 주님의 진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완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께 기대어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매일 살려야 하고, 더 내적인 진리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온전히 거듭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호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