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년생 대한민국 남자 기대수명이 21.8세... (202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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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생 여자는 23.7세입니다. 구글링을 하니 나오는, 여성정책연구원 통계DB 완전생명표에 나오는 수치입니다. 참고로, 39년생 여자는 7.7세, 46년생 여자는 12.5세, 43년생 남자는 7.9세 등이 그 남은 기대수명입니다. 저는 61년생인데... 그러면, 이 통계대로라면, 제게 남은 시간은 22년이 채 안 되는군요...

 

꼭 이걸 신봉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러나 유의미한 무슨 지표는 되지 싶습니다. 가령, 앞으로는 절대 시간을 허투루 쓰면 안 되겠다. 앞으로는 오직 천국 입국 조건, 즉 주님의 신성에만 올인해야겠다 결심하는 등 말이지요.

 

저의 경우, 스베덴보리의 저술들 번역하는 일만 하기에도 너무 빠듯할 것 같은데요, 여러 저술 중 백미인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년 시작, 총 8년에 걸쳐 저술된,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라틴 주석, 총 10,837개의 글)의 경우, 하루 다섯 개씩만 잡아도 6년!

 

이 외에도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232),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581), ‘결혼애’(Conjugial Love, 696),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435),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299), 그리고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851) 등 꼭 번역을 남기고픈 주요 저작들만 추려도 4,094개의 글이나 되는데다가...

 

스베덴보리의 책들은 그 내용이 내적(內的, internal)이요, 영적이기 때문에, 읽어보시면들 아시겠지만, 뇌가 마비될 정도로 그 내용이 깊고 높아 어렵습니다. 하여, 1차 결과물들인 번역들과 일반 독자들을 이어주는, 무슨 가교역할을 할, 좀 대중적 풀이들이 필요한데요, 사실 이 2차 결과물들이 더 요긴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이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그의 모든 저작 중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경우, 그 엄청난 분량에도 불구, 이미 두 종류의 한글번역들이 나와 있는데요, 정말 고생고생하셔서들 번역하셨을 줄 믿기에 이 자리를 빌어 존경과 감사의 인사말씀 올립니다만... 그러나 저의 역량 때문인지 이 기존 번역들이 제게는 좀 맞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오랜 시간 고민하다가 그냥 제가 직접 번역하자 마음 먹게 된 것입니다.

 

번역 자체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번역자 본인이 영계에 대한 나름의 이해와 그 내면이 열려야 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영어나 라틴을 좀 한다고 바로 번역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고, 스베덴보리를 한 4, 5년 해야 겨우 제대로 된, 걸음마 수준의 번역이라도 할 수 있지요. 이 부분에서는 전문 번역가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번역의 전문성은 있지만 이 책에 합당한 내면이 열리지 않았을 경우, 그런 분의 번역은 도저히 감출 수 없는 어떤 엉뚱함, 살짝 영혼 없는 번역이 나타나거든요... 저 역시 이 문제 때문에 창세기 앞 부분만 일곱 번째 번역 중인데요, 이제는 더이상 유턴할 시간이 없어 이런 '처음부터 다시!'를 그만하고 그냥 쭈욱 가야만 할 것 같습니다. 지난 5년, 이런 되풀이를 반복한 것은 하다 보니 너무 바보같은 번역, 너무 어처구니 없는 실수,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한 번역을 한 게 하고 나면 또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만 62세를 조금 넘었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이렇게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키보드를 칠 수 있을까요? 저는 한쪽 눈이 안 보이는, 그리고 다른 눈은 사분의 일이 안 보이는 경험을 한 2년 했습니다. 지금은 주님의 은혜로 많이 회복, 번역하는 데 큰 지장은 없습니다. 운전도 별 무리 없고요. 그러나 늘 긴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 눈을 필히 영양가 있게 써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저도 모르게 유튜브 보는 일에 넋 놓고 있을 때가 많아 참 안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1688년에 태어나 1772년에 떠났습니다. 저도 저 위 기대수명만큼만 더 머물다가 간다면, 얼추 스베덴보리처럼 가게 되는데요... 그는 떠날 때, 자기가 떠나는 날을 알고 있었고, 저 위 마지막 저작, ‘참된 기독교’를 1771년에 끝마치고, 이듬해 어느 주일 오후, 아주 포근하고 향기롭게 눈을 감았습니다. 깔끔하게 떠났지요. 저 역시 떠나는 날까지 일하다가 깔끔하게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자식들을 비롯, 주변 사람들 폐 끼치지 않고 갈 수 있으니까요... 저대로라면, 저희 사모는 제가 먼저 가고 한 이 년 후, 따라오겠네요. ㅎㅎㅎ

 

자식들은 이런 얘기하면 질색들을 하겠지만... 그러나 나름 또 유익도 있겠지요. 저는 어머님은 고3 때인 1980년 9월에, 아버님은 대졸 때인 1988년 2월에 제 곁을 떠나셨는데요, 만일 그 시절에 저런 통계가 존재했다면, 그래서 대략 부모님이 앞으로 얼마를 더 사시겠다 그 기대수명을 알고 있었더라면, 좀 더 다른 시간들을 보냈을 텐데 하는, 진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가령, 아버님의 경우, 옛날엔 화장실이 밖에 있었고, 그래서 특히 추운 겨울엔 방마다 요강이 있어 그 방안 요강으로들 해결했지요. 저는 그 시절, 중1에서 고1 때였는데, 제 기억에 아침에 요강 비우는 건 늘 칠순을 바라보시는 아버님이셨습니다. 저는 더럽다고 거의 손도 대지 않았거든요... 저는 지금은 이런 거 하나까지 다 후회가 됩니다. 그 시절, 불과 2년 후에 어머님이 그렇게 갑자기 떠나실 줄은, 그리고 아버님이 8년 후, 그렇게 또 어머니 뒤를 따르실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이제는 주신 소명 마치는, 이 쓰임새의 일에만, 그리고 그와 더불어 더더욱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에만 올인해야겠습니다. 아직도 이 나라, 특히 내년 총선 걱정이 크지만, 균형을 잡아야겠다, 이제 저 나라로 이민 갈 준비도 착실히 하면서... 하는 생각을 오후 잠시 쉬면서 이렇게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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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란 말씀(The Word) 속에 주님이 깃들게 하신 '아르카나'(라틴, arcana, 단수 arcanum, 秘義, 감추어진 하늘의 신비)인데요, 특별히 저는 천사들이 말씀을 읽는 방식이라 소개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육이어서 말씀을 저마다의 지상 언어로 읽지만, 천사들은 영이어서 말씀을 그 안에 담긴 속뜻, 곧 천국의 언어로 읽기 때문인데요, 우리는 외적이어서 겉으로 읽지만, 천사들은 내적이어서 속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겉 글자가 그릇이라면, 말씀의 속뜻은 거기 담긴 내용이라 할 수 있겠고,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그렇게 되어 있는 걸로 이해하셔도 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The Word)이란 그 안에 '속뜻'이 있는 성경을 말합니다. 이와 관련,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성경 66권 중 말씀(The Word)은... (4/28)

성경 66권 중에서 속뜻(arcana, 秘義, internal meaning)이 있는 성경을 '말씀'(The Word, 총 34권)이라 하며,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속뜻은 오직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에만 있습니다. 구약 : 창, 출, 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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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의 속뜻을 이렇게 하나로 픽스하는 것은 사실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속뜻은 각 사람의 역량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인데요, (그렇다고 다양하다는 게 아니고, 깊이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뭐랄까... 이 피조세계에 두신 몇 가지 대원칙 중 하나는 '각자의 역량만큼만, 즉 내면이 열린 만큼만 누릴 수 있다'이기 때문입니다. 분수에 지나는 것은 그에게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고 온 천국이 저마다 조금씩 다 다른 것입니다. 속뜻 역시 그런데요, 그래서 '이 구절의 속뜻은 이거다'라고 고정하는 건 어찌 보면 넌센스입니다. 이 점을 감안하시고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속뜻만 한 줄 요약식으로 툭 제시하면 처음엔 많이들 당혹해 하실 것 같아요. 육과 영이 전혀 다르듯 말씀의 겉뜻과 속뜻 역시 그렇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처음 얼마동안은 충분한 설명까지 좀 함께 곁들이겠습니다. 뒤로 갈수록 이미 앞에서 다룬 풍부한 배경 지식이 있어, 그때는 속뜻 한 줄 요약만 말씀드려도 어느 정도들 이해하시겠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이 설명은 주로 스베덴보리의 직접 설명으로 제공하겠습니다.

 

'속뜻 설명' 중 이 '' 표시들이 나올 수 있는데요, 이는 역자인 제 설명을 곁들인 것입니다. 이 표시가 없으면 스베덴보리의 직접 설명입니다만, 아주 짧은 설명일 경우, 너무 엄격하게 구분하지는 않았습니다.

 

본문의 원본 관련 정보는 위 이미지를 참고하시기 바라며, 그 저술 및 번역에 걸린 대략적인 기간과 그 연대는, 제가 살핀 바로는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749-1756, 저자, 라틴, 창세기, 출애굽기 전체), John Clowes(1774-1806, 최초 번역, 라틴을 영어로), John Faulkner Potts(1905-1910)입니다. 저는 포츠(Potts) 역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20년 전 영어라 살짝 좀 어려우실 수 있습니다. 혹시, 누구 라틴을 할 줄 아시면, 가급적 라틴 원전으로 읽으시고, 괜찮으시면 번역까지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출애굽기만 한 것은 그 양(量)의 방대함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지만, 사실은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어떤 가이드, 원리들을 서술한 것이며,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 창세기, 출애굽기, 총 10,837개의 글로 된 속뜻 주석 안에서 사실은 나머지 말씀들을 거의 다 다루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원리만 익히면 나머지 말씀들 또한 굳이 따로 무슨 속뜻 주석 없이도 스스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을 병행, 읽어보시기를 진심으로 권합니다. 말씀은 천국과의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 되어 있기 때문인데, 천국에 대한 배경 지식이 풍부할수록 여기 이 내용 또한 이해하시는데 정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괜찮은 번역이 있어 소개합니다만, 참고로, 저는 이 역자 혹은 출판사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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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속뜻 주석을 시작하며

 

 

1. 구약 말씀을 단순히 그 겉 글자(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로만, 즉 기록된 글자로만, 겉으로만 읽어서는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말씀의 이면(裏面, this part of the Word)에는 천국의 깊은 비밀들(deep secrets of heaven)이 들어있으며,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것이 일반적이든 아니든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 믿음,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든것을 가리킨다는 사실들에 대해 심지어 알아차리는 것조차 쉽지 않으실 텐데요, 그 이유는, 겉 글자나 글자의 뜻(the letter or sense of the letter)만 가지고 살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보통은 고작해야 그저 유대교회의 외적 의식과 규례(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에 관한 것들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말씀 안 모든곳에 내적인 것들(內的, internal things)이 들어있는데, 이는 아주 몇 군데 주님이 사도들에게 계시하시고 설명하신 것들, 예를 들어, 희생제물이라는 것은 주님을 의미한다든지,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의미하며, 그래서 이들을 일컬어 천국의 가나안, 천국의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이라든지, 또 낙원도 유사한 의미를 갖는데, 이런 예들을 제외하고는 결코 외적인 것들(外的, the external things)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 각 글마다 글 번호가 있는데요,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Arcana Coelestia'는 그 끝번호가 10,837번으로 끝나는 정말 방대한 저작입니다.

 

 

2. 그러나 기독교계는 아직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말씀 안에 있는 모든것은 일반적이든 아니든 아니, 가장 작은 일점일획에 이르기까지(一點一劃,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영적, 천적(天的, celestial, heavenly)인 것들을 상징, 즉 그 안에 귀히 간직하고 있다는,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에 관한 이런 사실, 이런 실상을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구약에 대해 이렇게나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현실입니다. 말씀이라는 것이 참으로 이토록 놀라운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말씀이라는 것이 다른 그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주님이 하신 것이며,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안에는 필연적으로 천국과 교회, 그리고 종교적 믿음에 속한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하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런 건 주님의 말씀이라 할 수도, 그 안에 무슨 생명이 있다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생명에 속한 것들을 빼고,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일반적이든 아니든 그 안, 즉 말씀 안에 담긴 모든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 관한 것이라는 이 사실을 외면하고서는, 그 어디에서도 생명이라는 것이 비롯될 수가 없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내적으로는(內的, inwardly) 주님에 관한 게 아닌 그 어떤 것도 살아있는 게 아니며, 또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그 안에 주님이 담기지 않은 그 어떤 표현도, 다시 말하면, 어떤 식으로든 주님에 관한 게 아닌 그 어떤 표현도 신성하다(神性, Divine)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그런 생명 없이는, 그저 겉 글자 만이기만 한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기독교계에서 알려진 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된 인간의 경우와 같은데요, 속 사람과 분리된 상태에서는 겉 사람은 그저 몸(the body), 육(肉)일 뿐이며, 그건 곧 죽은 상태입니다. 살아있는(alive) 것은, 그리고 겉 사람을 살아있는 상태가 되게 하는 건 속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속 사람이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처럼 말씀도 겉 글자만 놓고 보면, 마치 영혼 없는 육체와 같습니다.

 

 

4.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해석하는 동안에는 그 안에 그러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 수 없는데요, 창세기의 첫 장에서 세상의 창조와 낙원이라고 불리는 에덴동산, 그리고 최초의 피조물이 아담이라는 것 외에는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거기서 다른 무엇을 가정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제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이러한 모든것이 아직 한 번도 밝혀지지 않은 아르카나(arcana, 秘義)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 곧 창세기 첫 장은 그 내적 의미로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 즉 그의 중생, 특히 가장 오래된 교회를 다루고 있는 등, 이러한 모든 표현 안에 아르카나가 포함되지 않은 말씀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될 것입니다.

 

 

5. 이런 사실은 실제로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무도 알 수 없는 그런 경우인데요, 그래서 저는 지난 수년간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계속 끊임없이 함께 지내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거나 그들과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즉 제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곧 주님의 신성하신 허락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며, 저는 그 결과, 전에는 그 어떤 사람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을 저세상에서 직접 보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영들의 여러 상태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는데요, 사후 영(영혼)들의 상태, 곧 지옥으로 알려진, 불성실한 자들의 통탄할 만한 상태와, 천국으로 알려진, 충실한 사람들의 축복받은 상태, 그리고 특히 천국에서 두루 인정되는 믿음의 교리에 관하여 등, 이런 여러 내용에 대하여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더 상세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런 내용을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 곧 주님의 거룩하신 허락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창1 본문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1.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20.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21.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24.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

 

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창1 개요

 

 

6. 6일이라는 기간은 사람의 중생(重生, regeneration, 거듭남) 전 과정 가운데 연이어 일어나는 수많은 상태를 말하는데, 보통은 다음과 같습니다.

 

 

7. 첫 번째 상태는 유아기 상태와 중생 시작 직전 상태 둘 다를 포함하는 선행 상태입니다. 이것을 ‘혼돈(void),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하며, 그 첫 번째 움직임을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고 하는데, 이는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입니다.

 

 

8. 두 번째 상태는 주님에게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들(which are proper to man) 사이 구별이 생기는 때입니다. 주님에게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신앙 관련 지식들(knowledges of faith), 그러니까 유아기 때부터 배워 온, 그리고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그러나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를 때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그런 신앙 지식들을 말합니다. 오늘날엔 이 상태는 쉽게 보기 어려운데요,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그러니까 인간한테나 어울리는 이런 일시적인 것들에 푹 빠져 정신 못 차리고 살다가 인생의 큰 시험이나 불행, 혹은 큰 슬픔을 만나면 그제서야 그런 삶이 마치 죽어버리기라도 한 듯 멈추고, 정신이 번쩍 들기 때문입니다. 이때 겉 사람(the ex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이 속 사람(the internal man)에게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즉 일시적인, 썩어 없어질 물질적인 것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때이지요. 이 속 사람 안에 앞서 말한 리메인스가 있는데, 이것은 주님이 이때, 그러니까 이 두 번째 상태 때 쓰시려고 그의 속 사람 안에 두신 것들입니다.

 

 

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신앙심 깊게, 그리고 경건하게 말하며,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인애, 자선, 기부 등)와 같은 선을 행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데(inanimate), 그 이유는 그가 이 모든 게 자기한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가 그러는 줄 아는 것이지요.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행위를 하다니 아, 나는 참 괜찮은 사람이야...’ 하면서 ^^ 이런 선을 ‘(the tender grass), ‘씨 맺는 채소(the 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나중에는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스런 애정의 사람이 되며,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 실제로 경건한 담론도 하고, 선도 행했습니다만, 그러나 그건 그가 수고한, 즉 자초한 시험과 엄격함(the temptation and straitness under which he labored)의 결과로 한 거지 신앙과 체어리티로 한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그의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은 상태가 되었으며, 그래서 이를 일컬어 두 ‘광명체(two luminaries)라 하고 있습니다.

 

 

11. 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의 담론을 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이 진리와 선 안에 있음을 확증하는 때인데요, 그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은 살아 움직이며(animate), 이를 일컬어 ‘바다의 물고기(the fish of the sea), ‘하늘의 새(the birds of the heavens)라고 합니다.

 

 

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에 기반한 사랑으로 참되게 말하고, 선을 행하는 때인데요, 이때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the living soul), 그리고 ‘가축(the beast)이라 합니다. 이때 사람은 신앙과 사랑 둘 다를 가지고 즉시 행동함으로써 영적인 사람(a spiritual man)이 되며, 이런 그를 ‘형상(an image)이라고 합니다. 그의 영적 생명(spiritual life)은 신앙에 속한 지식들과 체어리티(charity)에 속한 행위들로 기쁘게 유지되며, 이런 지식들과 행위들을 그의 ‘먹을거리(food)라고 합니다. 반면, 그의 자연적 생명(natural life)은 몸과 몸의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쁘게 유지되는데, 바로 이때 영적 전투가 벌어집니다. 그의 안에서 사랑이 주(, the dominion)가 되며, 그가 천적인 사람(天的, a celestial man)이 될 때까지 말이지요.

 

 

13. 거듭나는 중인 사람들이 모두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The greatest part) 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일부가 두 번째, 나머지가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그리고 여섯 번째는 별로 없으며(few), 일곱 번째 상태에 도달하는 사람은 희귀할 정도(scarcely)입니다.

 


 

한 가지 더

 

 

14. 이어지는 글 가운데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 의미합니다. 그분은 앞뒤 무슨 다른 이름을 덧붙이는 거 없이 오직 ‘주님(the Lord)으로만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온 천국에 걸쳐 그분은 주님으로 인식되시며, 사랑과 공경을 받으십니다. 모든 천국과 지상에서 오직 그분만이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제자들에게 친히 자신을 그렇게 부르라 명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요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그래서 그분의 부활 후, 제자들은 그분을 오직 ‘주님’으로만 불렀습니다.

 

 

15. 천국 전체가 오직 주님 외에 무슨 다른 아버지라는 건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시기 때문인데요, 이는 아래와 같이 그분 자신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6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요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창 1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 1절 속뜻 요약

 

사람의 거듭남 관련, 그 첫 번째 시기인 태초(太初, the beginning)에 하나님은 사람을 ‘(, heaven), ‘(, earth), 곧 속 사람(the internal man)과 겉 사람(the external man)으로 창조하셨습니다.

 

 

※ 1절 속뜻 설명

 

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서 여러 곳에서는 이때를 ‘옛날(days of old, [antiquitatis])이라고도 하고, ‘영원(days of eternity)이라고도 합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신32:7)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들을 기억하옵소서 (시25:6)

 

태초’는 또한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첫 번째 시기(the first period), 기간을 말하기도 하는데요, 이때 사람은 새롭게 태어나고, 생명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 자체를 사람의 ‘새 창조(a new creation)라고도 하지요. 선지서들 가운데 ‘창조하다(to create), ‘짓다(to form), ‘만들다(to make)라는 표현들이 나오는 거의 모든곳에서 그 상징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전부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이사야를 보면,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그리고 그래서 같은 선지서에서 주님은 ‘구속자(the redeemer), ‘태에서부터 지으신 이(the former from the womb), ‘만드신 이(the maker) 및 ‘창조자(the creator)라 일컬음을 받으십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사43:15) I am Jehovah your holy one, the creator of Israel, your king. (Isa. 43:15)  

 

시편에서는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시102:18) The people that is created shall praise Jah. (Ps. 102:18)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30)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30)

 

(, heaven)은 속 사람(the internal man)을, ‘(, earth)는 아직 거듭나기 전인 겉 사람(the external man)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 2절 속뜻 요약

 

거듭나기 전 사람의 상태는, 주님의 선(, good)과 진리(眞理, truth)가 전혀 없는 ‘혼돈(a void)과 ‘공허(an emptiness)의 상태, 그로 인한 완전한 어리석음과 무지의 ‘흑암(thick darkness) 상태, 그리고 그런 것들 안에 깊이 잠긴 ‘깊음(the deep)의 상태이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 곧 주님의 자비로 그의 안에 주님의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인 ‘리메인스(remains)를 두십니다.

 

 

 2절 속뜻 설명

 

17.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the earth void and empty), 또 ‘(the ground)이라고도 하는데요, 이는 아직 그 안에 선과 진리가 하나도 씨 뿌려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혼돈(void)은 선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공허(empty)는 진리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 결과, ‘흑암(thick darkness) 상태, 즉 어리석은 상태가 되며, 주님 신앙(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것에,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heavenly, celestial) 생명에 관한 모든것에 관해 무지한 상태가 됩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렘4:22-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18. ‘깊음 위(The faces of the deep)는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인데, 그는 전적으로 이런 것들로 되어 있는 사람이며, 이런 것들 안에 완전히 잠긴 사람입니다. 이 상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는 상태로, 그는 뭔가 희미하고 혼란스러운, 즉 무슨 ‘깊음’과도 같은, 그런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 여러 곳에서는 표현하기를 ‘깊음(deeps), ‘바다 깊은 곳(depths of the sea)이라 하는데, 이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 ‘말리신(dried up) 상태, ‘황폐해진(wasted) 상태를 말합니다. 이사야입니다.

 

9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10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11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사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런 사람은 또한 하늘에서 보면,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무슨 까만 덩어리(a black mass)로 보이는데요,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표현에는 인간의 황폐함(the vastation of man)이라는, 선지서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거듭남의 선행 상태, 즉 누구나 다 이런 상태에서 거듭남이 시작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 수 있기 전에, 그리고 선한 것으로 영향받기 전에, 먼저 이런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듭남에 저항하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하는데요. 이런 이유로, 새 사람(the new man)이 잉태될 수 있기 전에, 반드시 옛 사람(the old man)이 먼저 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19.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의미하는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to move)라든지, 혹은 마치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 ‘품으시다(to brood)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는 주님이 사람 안에 숨겨 보석처럼 소중하게 보관해 오신 것들을 가리킵니다. 말씀 전반에 걸쳐 이것을 ‘리메인스(remains), 즉 ‘남은 자(a remnant)라 하는데, 이는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리메인스라는 것은 겉에 속한 것들(external things)이 황폐해질 때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day)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들 지식을 여기서는 ‘수면 위(the faces of the waters)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 3절 속뜻 요약

 

그런 사람 안에 빛 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면서 거듭남의 여정이 시작됩니다.

 

 

※ 3절 속뜻 설명

 

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라는 걸 뭔가 좀 더 높은 걸로(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알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거의 외적(外的, altogether external, )이기만 한 사람들은 선과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데요, 그들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에 속한 모든것이 선이며, 그런 사랑들에 대해 호의적인 게 진리라는 환상(fancy)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은 악이며, 그런 진리는 거짓임을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처음으로 알기 시작하는데요, 그것은 먼저, 자기의 선은 선이 아니라는 사실과, 또 그가 빛 되신 주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갈수록 주님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신다(the Lord exists)는 사실을 사람들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함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친히 가르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 주님은 선 그 자체, 즉 생명이시며, 진리 그 자체, 즉 빛이시라는 사실과,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은 그 어떤 것도 선도, 진리도 아니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4-5.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 4, 5절 속뜻 요약

 

주님은 빛이시고, 선이십니다. 사람 안에 있는 두 가지 중 주님에게 속한 것은 ‘(the light), 곧 ‘(day)이고, 사람에게 속한 것은 ‘어둠(the darkness), 곧 ‘(night)입니다.

 

 

※ 4, 5절 속뜻 설명

 

21. 빛을 ‘(good)이라고 합니다. 빛은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님은 선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둠(the darkness)은 모든것, 곧 사람이 새롭게 잉태되어 태어나기 전, 그동안 빛처럼 보여 그런 줄 알았던 모든 걸 말하는데요,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기 전에는 악은 선처럼 보이고, 거짓은 진리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실상은 이들 악과 거짓은 어둠,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그래서 여전히 사람 안에 있는 걸로만 구성되는 것입니다. 주님에게 속하는 건 그게 뭐든지 다 ‘(day)으로 표현합니다. 빛에 속하기 때문이고요, 반면, 사람의 것, 인간 본성(man’s own)에 속한 것은 뭐든지 다 ‘(night)으로 표현합니다. 어둠에 속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표현, 이런 비교는 말씀에 자주 나옵니다.

 


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 5절 속뜻 요약

 

거듭남이 시작되었어도 사람은 ‘저녁(evening) 상태가 되었다가 다시 ‘아침(morning) 상태가 되었다가 합니다. ‘첫째 날(the first day)은 첫 번째 상태입니다.

 

 

※ 5절 속뜻 설명

 

22. ‘저녁(evening)이 의미하는 바와 ‘아침(morning)이 의미하는 바를 이제 알 수 있는데요,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every preceding state), 즉 좋아지기 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그늘 상태, 즉 거짓의 상태, 불신앙의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아침’은 모든 뒤따르는 상태(every subsequent state), 즉 좋아진 후의 상태입니다. 한 종류 빛이나 진리, 그리고 신앙 지식이 되는 상태이지요. 이걸 주님을 만나기 전 상태와 만난 후 상태로 이해하셔도 되겠고,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기 전 상태와 경험한 후 상태로 이해하셔도 되겠습니다. ‘저녁’은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man’s own)에 속한 모든것을 의미하는 반면, ‘아침’은 아래 시편 말씀처럼, 무엇이든지 다 주님에게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저녁’은 불신앙의 때요, ‘아침’은 신앙의 때이기 때문에, 주님이 세상에 오심은 ‘아침’, 주님의 떠나심, 그때는 불신앙의 때이므로, ‘저녁’이라 합니다. 다니엘입니다.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단8:14)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같은 식으로, 말씀에서 ‘아침’은 모든 주님의 오심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곤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새 창조에 관한 표현입니다.

 

 

23. 말씀에서 ‘(day)을 가지고 때(time) 자체를 가리키곤 하는 것만큼 더 흔한 것은 없는데요, 이사야입니다.

 

6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9보라 여호와의 날,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사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성읍이냐, 15그 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사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을 가지고 때를 가리키곤 하기 때문에, 이는 또 그때 그 상태를 가리키는 데에도 사용되곤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렘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25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렘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and 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 6, 7절 속뜻 요약

 

궁창(an expanse)은 속 사람을 말하며,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은 속 사람에게 있는 지식(knowledges [cognitiones])을, 그리고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은 겉 사람에게 있는 기억-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을 말합니다. 주님은 이 두 지식을 서로 구별하셨습니다.

 

 

※ 6, 7절 속뜻 설명

 

24. 하나님의 영, 즉 주님의 자비로 낮(day, ) 안에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이 생긴 다음, 처음으로 빛이 비취는데요, 이 빛은 곧 주님이시지요, 주님은 선 그 자체, 진리 그 자체이신 분으로,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 어떤 선과 진리도 없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 후, 주님은 속 사람(the internal man)과 겉 사람(the external) 간 일종의 어떤 구분, 구별을 두시는데요, 이는 결과적으로는 속 사람에게 있는 지식(knowledges [cognitiones])과 겉 사람에게 있는 기억-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간 구별이 됩니다. 지식은 주로 체험을 통한 내면화, 내재화가 된 지식을, 기억-지식은 주로 머릿속 기억으로만 있는 지식, 다방면에 걸쳐 학습한 박식한 지식을 말합니다. 궁창(an expanse)은 속 사람을 말하며, ‘궁창 위의 물(the waters above the expanse)은 속 사람에게 있는 지식을, 그리고 ‘궁창 아래의 물(the waters beneath the expanse)은 겉 사람에게 있는 기억-지식을 말합니다.

 

사람은, 거듭남이 진행되기 전에는 무슨 속 사람이라는 게 존재하는지조차, 하물며 속 사람이라는 것의 본성 및 그 퀄리티(its nature and quality)에 대해서는 더더욱 모릅니다. 그는 속 사람, 겉 사람이라는 것은 서로 구별할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자신,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것들 속으로 가라앉으면서, 그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들까지도 그동안 가라앉게 했기 때문인데, 심지어 누가 보더라도 분명한 것들까지도 무슨 혼란스럽고 흐릿한 덩어리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먼저 이르시기를,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으라(Let there be an expanse in the midst of the waters) 하시고, 이어 ‘물과 물로 나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in the waters) 하신 것입니다. 뒤에 나오는 구절들에서처럼, 먼저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라(Let it distinguish between the waters which a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are above the expanse) 하신 게 아니고 말입니다. 일단은 구별부터 하신 겁니다.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창1:7-8) And God made the expanse, and made a distinction between the waters which were under the expanse, and the waters which were above the expanse, and it was so.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Gen. 1:7–8)

 

이런 이유로, 거듭나는 중인 사람이 그다음 관찰하게 되는 것은, 속 사람이라는 게 있으며, 이 속 사람 안에 오직 주님께만 속한 선과 진리라는 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겉 사람은 거듭나고 있을 때, 선을 행해도 자기가 하는 줄로, 진리를 말해도 자기가 하는 줄로 아는 그런 본성 가운데 여전히 있습니다. 하지만, 또한 주님께 속한 이 선과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는 중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궁창 아래의 물이라는 일종의 구별이 먼저 언급되고, 나중에 궁창 위의 물이 언급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천국에 관한 일종의 아르카눔(arcanum, 秘義, 감추어진 비밀, 신비, 복수는 아르카나 arcana)인데요, 인간은 자기 본성에 속한 것들에 의해, 그리고 감각에 속한 거짓과 온갖 탐욕에 의해 살아가지만, 그런데 놀랍게도 이 모든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진리와 선 쪽으로 인도되며 구부러진다는 사실, 그래서 거듭남과 관련된 모든 움직임과 순간들이, 일반적으로든 아니든,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가는데, 그런 식으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즉 ‘(earth)에서 ‘하늘(heaven)로 진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지금 궁창, 즉 속 사람을 ‘하늘(heaven)이라 하는 것이지요.

 

 

25. ‘땅을 펼치며 하늘을 펴는(To spread out the earth and stretch out the heavens)이라는 표현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룰 때, 선지서에서 흔히 말하는 일종의 관용적 표현입니다. 이사야입니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am Jehovah that maketh all things,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lone, that spreadeth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그리고 다시, 주의 오심(the advent of the Lord)을 드러내어 말하는 데를 보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사42:3)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the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he shall bring forth judgment unto truth; (Isa. 42:3)

 

즉, 주님은 사람들의 거짓을 바로잡으시지도, 탐욕을 끄지도 않으시고 대신, 그것들을 진리와 선 쪽으로 구부리십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42:5) Jehovah God createth the heavens, and stretcheth them out; he spreadeth out the earth, and the productions thereof; he giveth breath unto the people upon it, and spirit to them that walk therein. (Isa. 42:5)

 


8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 8절 속뜻 요약

 

하나님은 사람 안에 속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늘이라 하셨습니다. 여기까지가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입니다.

 

 

※ 8절 속뜻 설명

 

26. ‘저녁(evening), ‘아침(morning) 및 ‘(day)의 의미는 위 5절에서 보여드렸습니다.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 9절 속뜻 요약

 

거듭나고 있는 사람한테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으로 흘러드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지식을 주님은 ‘한곳으로 모인 물(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 곧 ‘바다(seas)라 하시고, 겉 사람은 ‘(the dry [land])이라 하셨습니다.  

 

 

※ 9절 속뜻 설명

 

27.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게 있으며, 그리고 진리와 선이라는 것이 있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해(from, or through) 겉 사람으로 흘러든다는 사실, 비록 그게 겉으로는 안 나타나지만 말입니다. 이런 걸 알게 될 때, 그때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 있는 진리와 선, 즉 참과 선에 관한 지식은 그의 기억 속으로 차곡차곡 쌓이며, 그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되는데요, 그 이유는, 겉 사람의 기억 속으로 밀어 넣어지는 게 무엇이든, 그게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아니면 천적이든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이라는 형태로 거기 머물다가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들 지식이 ‘한곳으로 모인 물(the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바다(seas)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겉 사람 자체는 ‘(the dry [land])이라 하고, 지금은 이어지는 10절에서처럼 ‘(earth)이라고 합니다.

 


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 10절 속뜻 요약

 

뭍을 ‘(the earth), 곧 일종의 그릇(recipient, 用器)이라 하시고, 모인 물, 곧 모든 지식(knowledges, 체험적 지식 및 학문적 지식, cognitiones et scientifica)을 한데 모아놓으시고는 ‘바다(seas)라고 하셨습니다.

 

 

※ 10절 속뜻 설명

 

28. ‘(waters)을 가지고는 지식(knowledges, 체험적 지식 및 학문적 지식, cognitiones et scientifica)을, 그리고 그 결과인 ‘바다(seas)를 가지고는 그런 지식을 한데 모아놓은 걸 의미하는 것이 말씀에서는 아주 흔한 일입니다. 이사야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11:9)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Jehovah, as the waters cover the sea. (Isa. 11:9)

 

그리고 이사야 다른 데서는 지식의 결핍(a lack of knowledges [cognitionum et scientificorum])을 다루면서

 

5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사19:5-6) The waters shall fail from the sea, and the river shall be dried up and become utterly dry, and the streams shall recede. (Isa. 19:5–6)

 

학개에서는, 새로운 교회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서

 

6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학2:6-7)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the dry [land]; and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Hag. 2:6–7)

 

그리고 스가랴에서는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있는 사람과 관련하여

 

7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슥14:7-8) There shall be one day, it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but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and it shall be in that day that living waters shall go out from Jerusalem, part of them toward the eastern sea, and part of them toward the hinder sea. (Zech. 14:7–8)

 

시편 또한 지금은 황폐하나 앞으로는 거듭나 주님을 경배하게 될 사람을 묘사하면서

 

33여호와는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시69:33-34) Jehovah despiseth not his prisoners; let the heavens and the earth praise him, the seas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therein. (Ps. 69:33–34)

 

스가랴를 보면 ‘(the earth)은 일종의 리시피언트(recipient, 그릇, 用器)로 나옵니다.

 

여호와 곧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 (슥12:1) Jehovah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 of the earth, and formeth the spirit of man in the midst of him. (Zech. 12:1)

 


11-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 11-13절 속뜻 요약

 

주님은 주님으로부터 천적(天的, celestial) 씨앗을 받아 뭔가 선하고 참된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된 사람에게 먼저 ‘(the tender herb), ‘씨 맺는 채소(the herb yielding seed),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순으로 나게 하십니다. 이런 사랑과 자비, 돌봄을 베푸시는 주님은 참으로 선하신 분입니다. 여기까지가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입니다.

 

 

※ 11-13절 속뜻 설명

 

29. ‘(the earth), 즉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천적(天的, celestial)인 씨앗을 받아 뭔가 선하고 참된 열매를 맺을 준비가 되면, 이제 주님은 먼저 무슨 부드러운 것, (the tender herb), 그리고 뭔가 좀 더 유용한, 그 안에 씨를 맺을 수 있는 것, 씨 맺는 채소(the 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끝으로 열매까지 맺을 수 있는 어떤 선한 것,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를 각기 종류대로 나게 하십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처음 상태, 퀄리티(quality)는 다음과 같은데요, 그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다 자기한테서 나오는 줄로 압니다.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인 데도 말입니다. 누구나 이렇게 선과 진리가 자기로 말미암는 줄로 아는 한, 그 사람은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the life of true faith)을 가진 게 아닙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받게 되지요. 이 모든것은 그가 이런 게 주님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아직은 믿을 수 없는, 그는 이제 겨우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는 단계, 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를 여기서는 못 움직이는(inanimate) 것으로, 그리고 이어지는 다음 상태에서는 움직이는(animate)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복음서 여러 본문에서 마지못해 친히 언급하신 것처럼, 주님은 씨뿌리는 농부요, ‘(the seed)는 그분의 말씀이고, ‘(the earth)은 사람입니다. (마13:19-24, 37-39; 막4:14-21; 눅8:11-16)

 

또 주님은 이렇게도 설명하시는데요,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막4:26-28) So is the kingdom of God, as a man when he casteth seed into the earth, and sleepeth and riseth night and day, and the seed groweth and riseth up, he knoweth not how; for the earth bringeth forth fruit of her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ear, after that the full corn in the ear. (Mark 4:26–28)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일반적으로는 천국 전체(the universal heaven)를, 그보다 덜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참된 교회(the true church of the Lord)를, 그리고 구체적으로는 참된 신앙의 사람(who is of true faith), 즉 신앙생활을 통해 거듭나는 사람(who is regenerate by a life of faith)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또한 ‘천국(heaven)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그의 안에 천국이 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안에 있기 때문인데요, 주님이 친히 이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입니다.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 Being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Luke 17:20–21)

 


14-17.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 14-17절 속뜻 요약

 

주님은 새롭게 빚어지는 중인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사랑과 신앙, 곧 ‘두 큰 광명체와 별들(two great luminaries and the stars)을 두시고, ‘낮과 밤(the day and the night)을 주관하게 하시며,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를 이루게 하십니다. ‘낮을 주관하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는 사랑을, ‘밤을 주관하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과 사랑의 신앙에서 주님의 생명이 나오며, 거듭남의 전체 과정 중 이쯤에서 그의 신앙은 움직이는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 14-17절 속뜻 설명

 

30.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의 의미는 먼저 신앙의 에센스(the essence of faith, 本質), 그리고 또 새롭게 빚어지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그 진행 과정을 알기 전까지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에센스와 생명 그 자체이신 분은 주님뿐이신데요,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 친히 요한복음에서 선언하신 것처럼 말이지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새롭게 빚어지고 있는 사람들한테서 볼 수 있는 신앙의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맨 처음, 그들에게는 생명이라는 게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은 오직 선과 진리 안이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데요, 먼저는 기억 신앙(faith of the memory)입니다. 일종의 지식일 뿐인 신앙(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이지요. 다음은 머리 신앙(faith in the understanding)으로, 일종의 지적 신앙(an intellectual faith)입니다. 끝으로 가슴 신앙(faith in the heart)입니다. 사랑 신앙(the faith of love), 구원 신앙(saving faith)이라고도 하지요. 앞 첫 두 종류의 신앙을 3절로 13절에서는 못 움직이는(inanimate) 것으로, 사랑으로 활기찬 신앙을 20절로 25절에서는 움직이는(animate)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여기서 먼저 다루는 것이며, 이르시기를 ‘광명체들(luminaries)이라 하시고, 이때 사랑을 ‘낮을 주관하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밤을 주관하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단수로 언급됩니다.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luminaries)be 동사의 라틴어 표현을 보면 sit입니다. 복수 표현인 sint가 아니지요.

 

※ 즉, 움직이지 못하는(inanimate) 식물 신앙, 앉은뱅이 신앙에서 움직이는(animate) 동물 신앙, 걸어 다니는 신앙으로 넘어가기 위한 다리 역할을 이 ‘광명체들’에 대한 기술이 담당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보시겠지만, 말씀에서 ‘동물’은 애정(愛情, affection)을 의미합니다.

 

속 사람의 사랑과 신앙은 육체를 가진 겉 사람에게 있어 열과 빛 같은 것인데요, 이런 이유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되며, 이것이 광명체들을 일컬어 ‘하늘의 궁창에 있다(set in the expanse of heaven), 즉 속 사람 안에 있다 하는 이유입니다. 큰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의지(will)에, 작은 광명체는 속 사람의 이해(understanding)에 말입니다. 그러나 햇빛은 그 빛의 수용체(its recipient objects)가 있어야만 볼 수 있듯 이들 사랑과 신앙은 의지와 이해 안에서만 나타납니다. 의지는 사랑으로 영향을, 그리고 이해는 진리, 즉 신앙으로 영향을 받게 하신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입니다.

 

 

31. ‘큰 광명체들(the great 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의미하며, ‘해, 달, 별들(sun, moon, and stars)이라고도 한다는 사실은 에스겔 같은 선지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겔32:7-8) 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 (Ezek. 32:7–8)

 

이 구절에 나오는 바로와 애굽 사람들은 말씀에서 그저 감각이요, 지식일 뿐인 원리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감각과 지식일 뿐인 것들을 통해 사랑과 신앙이 끝나버렸음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그렇습니다.

 

9보라 여호와의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사13:9-10) The day of Jehovah cometh to set the land in desolation, for the stars of heaven and the constellations thereof shall not give their light; the sun is darkened in his going forth, and the moon shall not cause her light to shine. (Isa. 13:9–10)

 

다시, 요엘에서

 

1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욜2:1-2,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 (Joel 2:1–2, 10)

 

다시 이사야에서, 주님의 오심(the advent of the Lord)과 이방인들,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새로운 교회이지요, 어두움 가운데서 빛을 받아 거듭나고 있는 모든 사람의 눈이 밝아짐에 관해 말하면서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사60:1-3, 20) 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Isa. 60:1–3, 20)

 

그래서 시편에서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 7큰 빛들을 지으신 이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 (시136:5-9) Jehovah in intelligence maketh the heavens; he stretcheth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he maketh great luminaries, the sun to rule by day,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 (Ps. 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148:3-4) Glorify ye Jehovah, sun and moon, glorify him, all ye stars of light, glorify him, ye heavens of heavens, and ye waters that are above the heavens. (Ps. 148:3–4)

 

이들 모든 구절에서 ‘광명체들(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의미합니다.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끊임없이 등불이 타오르게 하신 이유는 바로 이것, 곧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상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교회의 모든 규례가 주님에 관한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었기 때문인데요, 이 등불(this luminary)에 대하여 기록된 바로는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출27:20-21) Command the sons of Israel that they take oil for the luminary, to cause the lamp to ascend continually: in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ithout the veil, which is before the testimony, shall Aaron and his sons order it from evening even until morning, before Jehovah. (Exod. 27:20–21)

 

이런 것들이 사랑과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 곧 주께서 거기에 불을 붙이셔서 먼저 속 사람에게 빛을 비추시고, 그렇게 속 사람을 통해서 이번에는 겉 사람을 비추시는 이런 주님의 신성하신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대해서 앞으로 해당 말씀에서 보시게 됩니다.

 

※ 짐작하셨겠지만,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어떤 것을 가지고, 정확히는 지상의 사물을 가지고 주님과 주님께 속한 것을 가리키는, 나타내는 것입니다. 무대 위에 올라와 자기가 맡은 역할을 연기하는 연기자들도 일종의 표상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32.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고 하시다가, 그다음엔 사랑은 ‘큰 광명체(a greater luminary), 신앙은 ‘작은 광명체(a lesser luminary)라 하시고, 계속해서 사랑에 관해서는 ‘낮을 주관하라(rule by day), 신앙에 관해서는 ‘밤을 주관하라(rule by night) 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감추어진 아르카나(arcana, 단수 arcanum, 秘義, 감추어진 하늘의 신비)인데, 특히 종말의 때인 이때 이들에 대한 설명이 주님의 신성하신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허락되었습니다. 이들 아르카나가 종말인 이때 특히 더 봉인된 이유는, 지금이 시대의 끝(the consummation of the age), 곧 사랑이라는 게 아주 희귀하고, 그 결과 신앙이라는 것 또한 아주 희귀한 때이기 때문인데요, 주님 친히 복음서에서 이미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예언하신 것입니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24:29)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 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 (Matt. 24:29)

 

여기서 ‘(the sun)는 사랑을 의미하는데 어두워지며, ‘(the moon)은 신앙을 의미하는데 빛을 내지 않습니다. ‘별들(the stars)은 신앙에 관한 지식인데 하늘에서 떨어지며, 이들이 곧 ‘하늘의 권능들(the 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입니다.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사랑 그 자체 말고는 무슨 다른 신앙을 인식하지도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天的, The celestial angels) 또한 사랑의 신앙 말고는 신앙이라는 게 뭔지도 몰랐습니다. 천국 전체가 일종의 사랑의 천국인데요, 천국에서는 사랑의 생명 말고 무슨 다른 생명이라는 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천국의 모든 행복이 시작되는 것이며, 이는 단 한 번도 그 설명이 허락된 적도, 심지어 인류 그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어서 그래서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사랑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선언하고, 지각하기도 하는데요, 그것은 모든 사랑은,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모든 생명은, 이 생명은 오직 사랑에만 속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결과 모든 행복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며, 자기들한테서는 그 어떤 사랑이나 생명, 행복도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은 또한 기록된 대로, 주님의 변모, 변형(變形, his transfiguration) 관련, 큰 광명체, 즉 ‘(sun)로 설명되었습니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마17:2)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Matt. 17:2)

 

내면 가장 깊은 것들이 얼굴로,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것들이 옷으로 상징되는데요, 그래서 주님의 신성(神性, the Lord’s Divine)이 ‘(the sun), 즉 사랑으로, 주님의 인성(人性, his human)은 ‘(the light), 즉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상징된 것입니다.

 

 

33. 약간의 사랑이라도 없이는 생명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며,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고서는 기쁨이라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사실, 이 사실을 아주 잘 아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능력입니다. 사랑, 생명, 기쁨이란 이런 것, 곧 이렇게 서로 본질적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한테서 사랑을, 같은 말이지만 무언가 그가 간절히 원하는 걸 제거한다면, 그 순간 그는 그 즉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게 되며, 놀랍게도 무슨 죽은 사람처럼 되고 맙니다. 생명에 대해 지금까지 제가 영계, 특히 천국에서 목격했던 장면들처럼 말입니다. 자기 사랑(the loves of self)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the world) 안에도 생명이나 기쁨하고 뭔가 닮은 게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둘은 참된 사랑 하고는 정반대이기 때문에, 사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미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그는 그에 비례해서 이웃을, 그리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까닭에, 참된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이요, 참된 생명은 주님으로 말미암는 사랑의 생명(the life of love from him)이고, 참된 기쁨은 그 생명에 속한 기쁨(the joy of that life)입니다. 참된 사랑은 단 하나만 있을 수 있으며, 참된 생명 역시 그런데요, 이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더할 나위 없는 참된 행복이 흘러나오지요. 천국에 있는 천사들에게 속한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34. 사랑과 신앙은 분리가 허락된 적이 없습니다. 이 둘은 하나를 이루며, 같은 것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명체들(luminaries)이 처음 언급될 때, 그들은 하나로 간주 되었으며, 그래서 이르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다음의 정말 놀라운 세부적인 내용들을 이런 배경과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은 천적 사랑(the celestial love)에 힘입어,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 사랑 안에 있는데요, 신앙 관련 모든 지식에 있어 이 사랑으로 말미암으며, 설명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그런 어떤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신앙의 교리들에 관한 지식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러나 사랑은 없는 그런 영들의 경우, 그들은 천국 마당의 첫 번째 문턱조차 접근은 고사하고, 도로 달아날 수밖에 없는, 그런 어떤 냉기 어린 삶이나 희미한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 중 더러는 그분의 계명대로 살지 않았으면서도 말하기를, 자기들은 주님을 믿어왔다고 하는데요, 이것을 주님은 마태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마7:21-22, 끝까지) Not every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s, but he that doeth my will: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through thy name. (Matt. 7:21–22, to the end)

 

그래서 분명한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또한 신앙 안에 있으며, 그렇게 해서 또한 천국의 생명 가운데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 즉 말로는 자기들은 신앙 안에 있다 하면서, 그러나 실제 사랑의 생명 가운데 있지는 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생활은 볕(열) 없는 빛과도 같습니다. 겨울철에도 물론 햇빛은 있지만, 그 빛 안에 열이 없어 결국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고 만물이 죽은 듯 무기력해지는 그런 빛처럼 말입니다. 반면, 사랑을 동반한 신앙은 봄철 햇빛과도 같아서, 열매 맺게 하는 햇볕 아래 만물이 자라고 번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영적, 천적인 것과 관련하여 정확히 일치하는데요, 그래서 말씀에서는 보통 지상에 존재하는 것을 가지고, 영적, 천적인 것을 설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시대의 끝, 종말을 예언하실 때, 신앙이 없거나 사랑 없는 신앙을 또한 ‘겨울(winter)에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입니다.

 

18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막13:18-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이 일(Flight, 비행, 들림, 휴거)은 마지막 때를,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가 죽는 때를 의미합니다. ‘겨울(Winter)은 사랑이 결핍된 삶을, ‘환난의 날(the day of affliction)은 저세상 삶의 끔찍한 상태를 말합니다.

 

※ 휴거는 특히 개신교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겉 글자의 뜻 그대로 이해를 했기 때문인데요, 같은 본문의 마태복음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24:31)

 

AC.4060번 글을 보면, 이 말씀은 새 교회의 일어남을 의미합니다. ‘택하신 자들’은 사랑의 선, 신앙의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방에서’는 선과 진리의 모든 상태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는 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즉 휴거란 종말의 때임에도 불구, 여전히 사랑과 신앙의 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으켜 주님의 새 교회 세우시는 걸 의미하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갑자기 사람들이 공중으로 들림 받고 하는 게 아닙니다. 태고교회 종말의 때에, 그런 암흑과도 같은 상황에서도 노아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주님 신앙을 이어가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즉, 그들을 리메인스처럼 보관하셨다가 나중에 쓰신 것입니다.

 

 

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능력이 있는데, 바로 의지(意志, will), 곧 의도하는 능력과, 이해(理解, understanding), 곧 이해하는 능력입니다. 이해가 의지의 통치를 받을 때, 이 둘은 한마음이 되며, 그것은 곧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그때 사람은 마음먹고 행하는 것(wills and does)을 또한 생각하고 의도하기(thinks and intends)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불일치할 때, 즉 말로는 신앙을 가졌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신앙과 모순되게 사는 경우처럼, 이때는 한마음이 둘로 나뉘는데요, 하나는 천국을 향하고자 하고, 다른 하나는 지옥을 향하고자 합니다. 의지는 모든 행위에 있어 행위자(doer)이기 때문에, 이 사람은 완전히 지옥으로 곤두박질치는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만일 주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시지 않으면 말입니다.

 

 

36.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해 온 사람들은 사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을 생각할 때, 어떤 사람들은 그건 단지 생각일 뿐이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건 주님을 직접 향하는(directed toward the Lord) 거라고 합니다. 소수만이 그것은 신앙의 교리(the doctrine of faith)라고 하지요.

 

※ ‘주님을 직접 향한다’는 것은 예를 들면, 왕 앞에 나아가듯 주님을 직접 알현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기독교 거의 모든 신앙인이 대부분 다 이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할 때, 천국에서는 근본적으로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천국에서는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 개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다. 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선을 의도하고 사랑으로 선을 행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이웃을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나오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진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HH.15)

 

신앙이라는 것은 신앙의 교리를 구성하는 모든것에 대한 일종의 지식과 인정(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및 뿐만 아니라, 특히 그 교리들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것에 대한 일종의 복종(an obedience)입니다. 신앙이 가르치는, 그리고 사람들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주된 포인트는 바로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안에 있는 게 아니라면, 그는 신앙 안에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마가복음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아주 명료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29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막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이 둘 중 첫째를 ‘크고 첫째 되는 계명(the 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셨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마22:37-41)라고 하셨습니다.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율법과 선지자(The law and the prophets)는 신앙 관련 범우주적 교리와 말씀 전체를 말합니다.

 

 

37. 광명체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이루게 하라 하십니다. 이들 말씀에는 지금 단계에서 밝힐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들어 있습니다. 글자 상으로는 이런 종류의 아르카나가 전혀 보이지 않아도 말이지요.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 사이에는 교대, 반복(alternations)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 일반적이든 아니든 말이지요. 날과 해의 변화와도 비교할 수 있겠네요, 네, 이런 사실을 관찰하는 정도만으로도 충분하겠습니다. 날의 변화는 아침, 정오, 그렇게 저녁, 밤을 거쳐 다시 아침이지요. 해의 변화도 비슷합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그렇게 가을, 겨울을 거쳐 다시 봄으로 이어집니다. 열과 빛의 교대가 그래서 가능한 것이고, 땅에서 나는 소산물들도 그렇습니다. 영적, 천적인 것들 간의 교대를 이들을 가지고 비교할 수 있는데요, 이런 교대와 다양성이 없으면 삶은 천편일률적이 되며, 그 결과, 전혀 삶이라고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선과 진리도 전혀 알아차리지도, 구분, 심지어 지각조차도 할 수 없게 되지요. 이런 교대를 선지서에서는 ‘법도(ordinances, [statuta])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3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는 해를 낮의 빛으로 주셨고 달과 별들을 밤의 빛으로 정하였고... 36이 법도가 내 앞에서 폐할진대 (렘31:35-36) Said Jehovah, who giveth the sun for a light by day, and the ordinances of the moon and of the stars for a light by night, . . . these statutes shall not recede from before me. (Jer. 31:35–3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5) Said Jehovah, If my covenant of day and night stand not, and if I have not appointed the ordinances of heaven and earth. (Jer. 33:25)

 

그러나 이런 것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창세기 8장 22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8:22)

 


18-19.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 18, 19절 속뜻 요약

 

주님은 속 사람 안에 두신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들로 하여금 선과 악을 주관하게 하시고, 진리와 거짓을 나누게 하셨습니다. 여기까지가 네 번째 상태입니다.

 

 

※ 18, 19절 속뜻 설명

 

38. ‘(day)은 선(good), ‘(night)은 악(evil)을 의미하며, 그런 이유로 선(goods)은 낮의 일, 악(evils)은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아래 주님의 말씀처럼 ‘(light)은 진리, ‘어둠(darkness)은 거짓을 의미합니다.

 

19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요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20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 of the heavens.

 

※ 20절 속뜻 요약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신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한 그는 아직 살아있는 상태가 아니지만, 사랑과 신앙의 빛으로 생생해져서 오직 주님으로만 말미암는 줄 알 때부터 그는 살아있는 상태가 됩니다. 전자는 식물, 후자는 동물로 표현되는데요, ‘수중생물(the creeping thing)로 표현된 겉 사람의 기억-지식, ‘(fowl)로 표현된 속 사람의 합리와 지성 등 ‘생물(the living soul)은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 20절 속뜻 설명

 

39. 큰 광명체들이 불이 켜져 속 사람 안에 배치된 후, 그 빛을 겉 사람이 받으면서 일단 사람은 살기 시작합니다(first begins to live). 지금까지는 사람은 소위 살아왔다고 하기가 참 곤란한데요, 사람이 선을 행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하는 줄로,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걸 자기가 말하는 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는 한, 자기 힘으로 사는 사람은 죽은 상태이기(man of himself is dead) 때문이지요. 그런 사람 안에는 악하고 거짓된 것밖에는 없기 때문인데요, 이런 이유로,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하든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닙니다(whatsoever he produces from himself is not alive). 선 그 자체인 그런 선을 사람은 자기 힘으로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선한 것을 생각하는 것조차, 선한 것을 의도하는 것조차 절대 불가능하며,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선한 것을 절대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은 신앙의 교리를 보면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마13:37)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Matt. 13:37)

 

또 다른 데서 하신 주님 말씀처럼 선은 그 유일하신 참 근원 되시는 분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눅18:19) None is good save one, God. (Luke 18:19)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 주님은 사람을 소생시키실 때, 즉 그로 하여금 생명을 향해 거듭나게 하실 때, 주님은 먼저 그가 선을 행하는 것도 자기요, 진리를 말하는 것도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허락하시는데요, 그 이유는 그때는 사람이 그밖에 무슨 다른 걸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또 그때에는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홀로 한 분이신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는 사실을 믿도록(to believe), 그리고 나중에는 지각하도록(to perceive) 그를 인도할 무슨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동안은 그에게 있는 진리와 선은 ‘(the tender grass)과 ‘씨 맺는 채소(the herb yielding seed), 그리고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bearing fruit), 곧 못 움직이는(inanimate) 것으로 비유되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가 사랑과 신앙으로 생생해져서 자기가 행하는 모든 선과 말하는 모든 진리를 역사하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에, 그는 먼저 ‘물에서 번성하는 생물들(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 이어서 ‘땅 위를 나는 새들(the fowls which fly above the earth), 끝으로 ‘짐승들(beasts), 곧 이 모든 움직이는(animate) 것들, 그래서 ‘생물(living souls)이라 하는 것으로 비유됩니다.

 

 

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생물(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the memory-knowledge)을, ‘새들(birds)은 보통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속 사람에게 속한 것입니다. ‘수중생물’이나 ‘물고기(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가 기억-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서를 보면 분명합니다.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사50:2-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계속해서 에스겔서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거기서 주님은 새로운 성전, 즉 일반적으로 새 교회 및 그 교회에 속한 사람, 곧 거듭난 사람(a regenerate person)을 묘사하십니다. 모든 거듭난 사람(who is regenerate)은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겔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 인간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 주님이 갈릴리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신 말씀,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4:19)

 

가 생각납니다 ^^

 

(birds)가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들을 나타낸다는 것은 이사야 같은 선지서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사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그리고 예레미야에서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에서

 

22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23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17:22-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그리고 호세아에서 새 교회, 혹은 거듭난 사람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호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 ‘들짐승(wild beast)은 정말 들짐승을, ‘(bird)도 그냥 새를 상징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누가 보아도 분명한 것은, 주님은 이들과 ‘언약을 맺겠다(to make a new covenant) 하시기 때문입니다.

 

 

41.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게 제법 메인으로 보일지라도 천사들이 볼 때는 무슨 딱딱한 뼈나 까만 덩어리로 보이지요. 그러나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거기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영적, 천적인 것이 들어 있으며, 만일 볼 수 있도록 재현될 때는 휴먼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것으로(human and living) 나타납니다. 정말 믿기 어렵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참된 사실은, 천사 같은 영(an angelic spirit)의 모든 표현 하나, 모든 아이디어 하나, 그리고 모든 지극히 사소한 생각까지도 살아 있는 상태(alive)라는 것입니다. 가장 작은 조각들 안에도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애정을 포함하면서 말입니다.

 

※ 사람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주님께 사로잡힌 사람은 그 모든 언행에서 주님의 생명이 흘러나오며, 빛처럼 뿜어져 나옵니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주변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목격하며, 생명력을 경험합니다. 삼층천 천사들인 천적 천사들이 그러하며, 지상에서는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고, 성 분도 요셉 라브르가 그랬습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들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들 안에 주님을 향한 신앙이 들어있기 때문인데요, 이들이 여기서 말하는 ‘생물(the living soul)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일종의 몸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스스로 움직이는 것(what moves itself), ‘기는 것(creeps)이라 한 것입니다. 이들 진리는 사람에게는 아직 너무나 깊은 비밀들임에도 살짝 말씀드리는 것은 본문에 ‘생물(the living soul), ‘스스로 움직이는 것(the thing moving itself)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21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 21절 속뜻 요약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Fishes)은 이제 주님 신앙으로 움직이는(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상태가 된, 그래서 살아있는(alive) 상태가 된 기억-지식들(memory-knowledges)을, ‘큰 바다짐승들(whales)은 기억-지식들의 일반 원리들을 말합니다. ‘날개 있는 모든 새(every winged fowl)는 속 사람의 모든 합리적이고 지성적인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의 안에 이런 것들을 질서 있게 배치하시는 주님은 선하십니다.

 

 

※ 21절 속뜻 설명

 

42.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Fishes)은, 앞서도 말했듯, 이제 주님 신앙으로 움직이는(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상태가 된, 그래서 살아있는(alive) 상태가 된 기억-지식(memory-knowledges)을 말합니다.

 

※ 무엇이든 주님으로 말미암으면 ‘살아있는(alive), ‘움직이는(animate) 상태이지만, 자신으로 말미암으면 ‘죽은(dead), ‘못 움직이는(inanimate) 상태입니다. 지식이 이런 상태가 되는 것이 지식의 거듭남입니다. 지식의 거듭남이란, 비록 여전히 세상, 세속 지식이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듭나 주님을 향해, 주님을 위해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 특히 세상 지식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닙니다. 다만 그걸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 모든 상태가 결정됩니다.

 

큰 바다짐승들(whales, 고래, 또는 고래와 같은 거대한 수중생물들)은 그들, 곧 기억-지식의 일반 원리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세부 원리들이 이들과 종속 관계에 놓여 말미암게 되는(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그런 것들입니다. 이 우주에서는 존재와 존속을 할 수 있으려면(may exist and subsist) 다 자기의 근원이 되는 그런 더 일반적인 원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큰 바다짐승들(Whales, or great fishes)이 선지서에 가끔 언급되는 이유는, 이들이 거기서 기억-지식의 일반 원리들을 뜻하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어, 에스겔 29장 3절을 보면, 애굽 왕 바로를 가리켜 ‘큰 악어(great whale)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큰 악어’는 인간의 지혜, 지성, 즉 일반적으로 지식(knowledge [scientia])을 말하는 것이지요.

 

애굽의 바로 왕이여 내가 너를 대적하노라 너는 자기의 강들 가운데에 누운 큰 악어라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 하는도다 (겔29:3) Behold, I am against thee, Pharaoh king of Egypt, the great whale that lieth in the midst of his rivers, that hath said, my river is mine own, and I have made myself. (Ezek. 29:3)

 

그리고 다른 데서도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는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겔32:2) Take up a lamentation for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unto him, thou art as a whale in the seas, and hast gone forth in thy rivers, and hast troubled the waters with thy feet, (Ezek. 32:2)

 

이 말씀이 가리키는 바는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 안으로 들어가고자 무척 애를 쓰는 사람들인데요, 이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힘으로 뭘 해보겠다는 사람들인 겁니다, 이사야에서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사27:1) In that day Jehovah, with his hard and great and strong sword, shall visit upon leviathan the longish [oblongum] serpent, even leviathan the crooked serpent, and he shall slay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 (Isa. 27:1)

 

여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slaying the whales that are in the sea)는 것은 진리의 일반적 원리들조차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렘51:34) Nebuchadnezzar the king of Babylon hath devoured me, he hath troubled me, he hath made me an empty vessel, he hath swallowed me as a whale, he hath filled his belly with my delicacies, he hath cast me out, (Jer. 51:34)

 

이는 큰 물고기가 요나에게 한 것처럼, ‘좋은 음식(delicacies)이라고 한 신앙의 지식을 그가 삼켰다는 것입니다. ‘큰 뱀(a whale)은 신앙 지식의 일반 원리들을 단지 기억-지식으로만 소유하고, 또 그런 식으로만 행동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 지식 중에서도 신앙에 관한 지식은 아주 값비싼 지식이며, 그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일반적 지식, 가령,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

 

와 같은 말씀 지식은 가히 그 한계를 알 수 없는 너무나도 귀한 생명의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걸 그저 지식으로만, 머리로만 알고 가볍게 여기며, 도무지 무슨 가슴 신앙으로 감동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자기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신앙인이다 하는 이런 사람들을 위 예레미야 본문에서는 ‘큰 뱀’이라 한 것입니다.

 

※ 세상 지식을 학습, 습득하면서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또 그 지식을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사용하여 천국 지성에 이르는 중에도 그 원천이 주님이심을 늘 시인하고, 지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고 싶으시면 그냥 간단히 허락만 하시면 될 것 같은데, 왜 주님은 이렇게 속 사람, 겉 사람, 내면, 외면, 기억-지식, 합리와 이성, 지성 등 복잡하게 조직하시며, 다 일일이 경험하게, 순서대로 모든 단계를 다 밟게 하실까요? 그것은 천국은 내면의 나라, 내적 상태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 아무리 겉으로 그럴듯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설령 주님의 허락이 있다 해도 사람은 천국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방열복을 안 입고 용광로 작업을 하는 것과 같아서, 천국에 들어갔는데도 지옥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은 사전에 이렇게 아주 단단히 준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22-23.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

 

 

※ 22-23절 속뜻 요약

 

생육하다(生育, to be fruitful)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관한, 그리고 ‘번성하다(繁盛, to multiply)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관한 서술입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the fruit)에는 ‘(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말미암아 놀랍게 번성하는데요, 이처럼 주님의 생명이 있는 모든것은 이생뿐 아니라 사후 삶에서도 정말 어리둥절할 정도로 결실하고 번성합니다. 이런 것이 복이며, 여기까지가 다섯 번째 상태입니다.

 

 

※ 22-23절 속뜻 설명

 

43. 그 안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는 모든것은 어마어마하게 결실하며 번성하는데요(fructifies and multiplies), 몸 안에 사는 이생뿐 아니라 사후 삶에서는 정말 어리둥절할 정도입니다. 말씀에서 ‘생육하다(生育, to be fruitful)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관한, 그리고 ‘번성하다(繁盛, to multiply)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관한 서술입니다. 사랑에 속한 ‘열매(the fruit)에는 ‘(seed)가 들어 있는데, 이 씨로 말미암아 놀랍게 번성하지요.

 

※ 들의 풀과 나무, 강과 바다의 물고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꽃 한 송이, 가령 해바라기는 그 넓은 둥그런 꽃 한 판에 얼마나 많은 씨가 있으며, 열매, 가령, 옥수수 한 자루엔 얼마나 많은 알갱이가, 벼나 보리, 수수 같은 곡식들 한 줄기 줄기엔 또 얼마나 많은 낱알이 맺히는지... 나무 한 그루도 보면, 가령 은행, 호도, 대추, 밤, 감, 사과 등등... 얼마나 많은 열매, 과일이 열리는지... 물고기는 또 어떤가요? 명란젓 만드는 명태 한 마리가 낳는 알은?, 대구는?, 오징어는? 등등... 또한 얼마나 그렇게 어마어마한지... 끝이 없습니다. 참으로 어리둥절할 정도로 아주 심하게 번성합니다 ^^

 

※ 인간과 달리 동, 식물의 경우, 주님의 이 정하신 복, 명령하신 축복이 예외 없이 그대로 시행되는 이유는, 동, 식물의 경우는 본능만 있을 뿐 스스로 무엇이 없어 주님이 정하신 질서를 거역하거나 뒤집거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정하신 쓰임새 그대로 존재하며, 존속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 판단하고 마음먹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게 최선인 줄을 알면서도 버젓이 악을 행하고, 창조주의 질서를 뒤집어 훼방을 놓고 엇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변수가 많으며, 오히려 주님의 복 받기가 너무너무 어렵습니다. 인간의 삶 가운데 화와 불행은 그 스스로가 자초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오늘 본문 동, 식물의 이런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 가운데 살기를 원한다면... 마찬가지로 주님의 질서 안에서 살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과 능력으로 하여금 자기 안에 흘러 들어오게 하면 됩니다.

 

※ 스베덴보리(1688-1772)를 통해 주님이 알리신 이 아르카나가 250년이 지난 지금도 아주 미미하게 세상에서 천대받고, 변죽만 울리고 있습니다. 홍수 후 고대교회 초창기에도, 아브라함 이후 유대교회 초창기에도, 주님 성육신 이후 기독교회 초창기에도 늘 시작은 아주 미미했습니다만... 그러나 결국은 저마다 오랜 세월 대하처럼 흐르는 시대별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이 주님의 새 교회도 그럴 것입니다. 각 시대 초기 교회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도 주님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에서 주님의 ‘(福, blessing)은 풍성한 결실과 번성을 의미하는데요, 이런 생육과 번성이 모두 복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 복은 사람 안에 천국이 있는 상태이며, 피조물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문제이지, 주님이 주시고, 안 주시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 지난번 다룬 것처럼 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과정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다릅니다. 즉, 첫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과 두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이 다르며, 두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과 세 번째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이 다릅니다. 그런 식으로 나머지도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 사람의 거듭남 풀코스 가운데서 사람은 비록 주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살피시며 동행하시지만, 그렇다고 늘 하하 호호한 상태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바로 사람의 연약함 때문인데요, 사람은 주님을 바라보다가도 또 어느새 자아를 바라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의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천국의 천사들조차 이런 상태변화를 겪는다 하니 우리는 자신의 이런 연약함의 오르락내리락을 결코 이상하게, 또는 수치스럽게 여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 분명한 건, 천사들의 증언처럼, 오히려 이런 굴곡을 통해 더욱 예리해져 가며, 더욱 주님의 사랑과 자비, 은혜에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의 과정 가운데 이런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반복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욱 성장, 성숙해져 가며, 그래서 어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보다 오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만큼, 그리고 오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보다 내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만큼 그만큼 우리는 더 성장, 성숙해져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한, 우리가 우리를 포기할 필요도, 그래서도 안 됩니다. 힘을 다해 공부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사고해야 합니다. 힘을 다해 지성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 지식에 힘쓰고, 그걸 선용(善用, 쓰임새, use), 천적 지혜에 이르기를 힘써야 합니다.

 


24-25.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 24-25절 속뜻 요약

 

사람은 땅처럼 자기 안에 먼저 신앙 관련 지식이 심기지 않고서는 어떤 선도 생산, 즉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야 그걸 가지고 뭘 믿어야 할지, 뭘 행해야 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땅은 생물을 내되(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가축과 기는 것(the beast and creeping thing),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at earth)은 의지(will)에 속한 것을 말합니다. 24절과 25절의 순서가 다른 것은,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은 24절 순서이지만, 사람으로부터 나아가는 것은 25절 순서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거듭남의 다섯 번째 과정 중에 있는 사람의 안에 이런 순서로 일하시고, 그의 감각, 기억-지식, 합리, 이성, 지성, 애정 등을 모두 ‘생물(the living soul)이 되게 하십니다. 이런 것이 주님의 선하심입니다.

 

 

※ 24-25절 속뜻 설명

 

44. 사람은 땅처럼 자기 안에 먼저 신앙 관련 지식이 심기지 않고서는 어떤 선도 생산, 즉 행할 수 없습니다. 그래야 그걸 가지고 뭘 믿어야 할지, 뭘 행해야 할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understanding)의,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will)의 일입니다.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행하지는 않는 것은 마치 우리는 믿음대로 살지는 않지만 믿고는 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들음과 행함을 분리, 결국 일종의 나뉜 마음을 갖게 되며,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주님이 ‘어리석다(foolish) 하신 사람들처럼 됩니다.

 

24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4, 26) Whosoever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I will liken unto a wise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a rock; but everyone that heareth my words, and doeth them not, I liken to a foolish man, who built his house upon the sand. (Matt. 7:24, 26)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the fowl upon the earth, and upon the faces of the expanse)는 앞서 보여드린 대로 이해에 속한 것을, 여기 ‘땅은 생물을 내되(the living soul which the earth produces), ‘가축과 기는 것(the beast and creeping thing),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at earth)은 의지에 속한 것들을 말합니다.

 

 

45. 태고 시대(太古, the most ancient times)를 살았던 사람들은 이해와 의지에 관련된 것들을 이런 식으로 의미했는데요, 이런 이유로,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에서도 늘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가지고 같은 걸 표현하고 있습니다. 짐승은 두 종류가 있는데, 사람들을 해치는 짐승은 악하다 하고, 해를 끼치지 않는 짐승은 선하다 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악들은 악한 짐승들, 가령, 곰, 늑대, 개 등으로 표현하는 반면,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같은 본성을 가진 짐승들, 가령, 어린 암소, 양, 어린 양 등으로 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가축(The beasts)은 선하고 온순한 것들이며, 그래서 애정(affections)을 의미하는데요, 이 본문은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더 낮은 것들, 즉 몸(body)과 더 관련된 것들은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이라 하며, 이는 탐욕과 쾌락을 말합니다.

 

 

46. ‘가축(beasts)이 사람의 애정, 곧 악을 수반하는 악한 애정과 선을 수반하는 선한 애정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나오는 수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먼저 에스겔입니다.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겔36:9, 11 거듭남을 다루면서) Behold, I am for you, and I will look back to you, that ye may be tilled and sown, and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be multiplied and bring forth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Ezek. 36:9, 11, treating of regeneration)

 

요엘에서는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 (Joel 2:22)

 

시편에서도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시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예레미야에서는 거듭남을 다루면서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렘31:27-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짐승(Wild animals)도 유사한 의미인데요, 호세아입니다.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호2:18)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 of the heavens, and with the creeping thing of the earth. (Hos. 2:18)

 

욥기에서

 

22너는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욥5:22-23) Thou shalt not be afraid of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for thy covenant is with the stones of the field, and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be at peace with thee. (Job 5:22–23)

 

에스겔에서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겔34:25) I will make with you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animal to cease out of the land, that they may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Ezek. 34:25)

 

이사야에서

 

장차 들짐승이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낼 것임이라 (사43:20)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honor me, because I have given waters in the wilderness. (Isa. 43:20)

 

에스겔에서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겔31:6) All the fowls of the heavens made their nests in his boughs, and under his branches did all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bring forth their young, and under his shadow dwelt all great nations. (Ezek. 31:6)

 

이것은 앗수르에 관한 말씀인데요,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의미하며, 이는 에덴동산으로 비유됩니다.

 

시편에서는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시148:2, 7, 9-10) Glorify ye him, all his angels, glorify Jehovah from the earth, ye whales, fruit trees, wild animal, and every beast, creeping thing, and flying fowl. (Ps. 148:2, 7, 9–10)

 

여기서도 같은 것들이 언급되는데요, 바로 ‘(whales), ‘과수(the fruit tree), ‘짐승(wild animal), ‘모든 가축(the beasts), ‘기는 것(creeping thing), ‘나는 새(fowl)입니다. 이것들이 사람 안에 있는 살아있는 원리들(living principles in man)을 가리킨 게 아니라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도록 호명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선지서들은 ‘가축(beasts)과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earth), 그리고 ‘가축’과 ‘들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field)을 조심스럽게 구분하는데요, 그러면서 사람에게 있는 선들을 ‘가축(beasts)이라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과 계시록을 보면, 천국에서 주님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을 ‘생물(animals)이라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계7:11)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and the elders, and the four animals, (Rev. 7:11)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the lamb. (Rev. 19:4)

 

또한 복음을 듣게 될 사람들을 가리켜 ‘만민(creatures)이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새롭게 창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

 

 

47. 이들 말씀에 거듭남에 관한 비의(秘義, arcana)가 들어 있다는 것은 또한 앞 구절 말씀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앞 구절인 24절에서는, 땅은 ‘생물, 가축, 땅의 짐승(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순으로 내라 하시는 반면, 다음 구절인 25절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지요, 즉 하나님이 ‘땅의 짐승(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을 만드시고, 마찬가지로 ‘가축(the beast)도 만드셨다고 말이지요. 바로 이 순서에 비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먼저, 그리고 나중에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 될 때까지는, 사람은 일단은 자기 힘으로 나아가기 때문인데요, 사람의 거듭남은 이렇게 먼저 사람의 겉(the external)에서부터 시작, 차근차근 속(the internal)으로 진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또 다른 순서가 등장하는 것이며, 겉의 일들이 먼저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48. 그래서 이때 이 사람을 가리켜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가운데 있다 하는데요, 이때 이 사람은 말을 할 때, 신앙과 관련된, 이해에 속한 어떤 원리로(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지금 진리 안에, 선 안에 있음을 스스로 확신합니다. 이때 이 사람으로 말미암는 모든것이 ‘움직이는(animate) 것이며, 이를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the fishes of the sea), ‘하늘의 새(the fowl of the heavens)라 하는 것이지요. 그가 이해에 속한 신앙으로(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진리를 말하며,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선을 행할 때, 그는 여섯 번째 상태 가운데 있으며, 이때 그로 말미암는 것들을 가리켜 ‘생물(the living soul), ‘가축(the beast)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그가 신앙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기를 시작할 때, 그는 영적 인간이 되며,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라 하는데, 이것이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입니다.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 26절 속뜻 요약

 

주님은 각 사람에게 와있게 하신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주님의 목표는 거듭남 가운데 있는 영적 인간(靈的, the spiritual man)으로 하여금 참 사람이신 주님, 곧 천적 인간(天的, the celestial man)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영적 인간이어서 그 순서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것’입니다.

 

 

※ 26절 속뜻 설명

 

49. 주님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에 한 사람(a man)으로 나타나셔서 그 교회 사람들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셨습니다. 이와 관련된 더 많은 깊은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은 나눌 때가 아닌 것 같고요, 이런 이유로, 그들은 아무한테도 ‘사람(man)이라 하지 않고, 오직 홀로 주님한테만, 그리고 주님에게 속한 것들에만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도 이 ‘사람(men)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요. 대신 다만 자기들한테 있는 것들 중, 모든 사랑의 선과 모든 신앙의 진리 같은, 주님으로 말미암았다 지각된(perceived) 것들에 한해서만 사용했습니다.

 

※ 처음에 주님이 ‘사람’으로 나타나시는 걸 본 태고교회 사람들은 이후 자신들을 향해 감히 ‘사람’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말한 이런 것들은 ‘사람에게 속한 것(of man)이었는데요, 그 이유는, 이런 것들, 곧 모든 사랑의 선과 모든 신앙의 진리 같은 것들은 오직 주님에게만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서들에 나오는 ‘사람(man), ‘사람의 아들(the son of man)은 가장 높은 뜻(the supreme sense)으로는 주님을, 속뜻(the internal sense)으로는 지혜와 지성, 즉 거듭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가장 높은 뜻으로는 한 사람이신 주님 자신(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을 의미합니다.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45:11-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들에게 사람으로(as a man)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은 두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인자(人子, the son of man), 즉 같은 말인데, 사람(the man)이라 하였습니다.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또한 주님은 자주 자신을 가리켜 ‘인자(the son of man), 즉, 사람이라 하시고, 다니엘에서처럼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그 때에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구름을 타고(The clouds of heaven)는 말씀의 겉 글자의 뜻(the literal sense of the Word)인 반면, ‘능력과 큰 영광으로(power and great glory)는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인데요, 말씀의 모든것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나 구체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가리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능력과 영광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50. 태고교회는 ‘주님의 형상(the image of the Lord)이라는 표현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서 주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있다는 것과 모든 사람한테는 영과 천사들이 최소한 둘씩 와 있다는 사실들을 거의 모르고 있습니다.

 

※ 이렇게 둘씩 와 있는 이유는, 사람이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로 되어 있기 때문인데요, 즉 사람의 의지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이 있고, 사람의 이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천사들하고는 천국과 커뮤니케이션을 합니다.

 

※ 여기서 말하는 영들은 지옥에서 파견된 영들, 곧 악한 영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지옥에서 파견되어 천국도, 지옥도 아닌,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라는 곳(상태)에 있게 되는데, 이마저도 이들에겐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상태여서 굉장히 기뻐하며, 다시는 자기들이 원래 있던 지옥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참고로, 영들의 세계는 모든 사람이 사후 일단 머무르게 되는 곳(상태)입니다. 다음 말씀은 이런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떠오른 본문입니다.

 

30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이르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31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눅8:30-31)

 

영들을 통한 영들의 세계와의 커뮤니케이션 없이는, 그리고 천사들을 통한 천국과, 그리고 천국을 통한 주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없이는 사람은 전혀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전적으로 이러한 결합에 달려 있으며, 그래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떠나가 버리면 사람은 즉시 소멸될 것입니다.

 

※ 우리가 잠시라도 생존할 수 있으려면 이런 악한 영들과 결합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참 놀랍습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참으로 우리는 태생적으로 악한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악이 우리의 태생적 생명이니 말입니다...

 

아직 거듭남의 여정을 시작하지 않은 사람은 이미 시작한 사람과는 사뭇 다른 다스림을 받습니다. 아직 거듭남이 시작되지 않은 사람한테는 그와 함께하는 악한 영들이 매사 천사들보다 더 우위를 점하는 반면, 천사들은 그가 가장 저급한 악 안으로 거꾸러져 들어가는 대신 어떤 선 쪽으로 구부러지도록 그를 그저 겨우 가이드만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뿐이며, 그마저도 사실, 그 사람의 탐욕을 가지고 선으로, 거짓된 감각을 가지고 진리로 구부리는 정도입니다.

 

※ 예를 들면, 자살하려고 최종 결심, 이제 막 실행에 옮기려는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난다든지, 또는, 탐욕의 끝에 가서 갑자기 그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추하고 한심하게 느껴진다든지, 그리고 성적(性的)으로 문란한 생활을 하던 중 어느 순간, 그런 감각의 충족이 가져다주는 모든 쾌락이 헛것이요,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뭐 이런 경우들을 예로 들 수 있겠으며, 누가복음에 나오는, 아버지의 재산 중 제 몫을 먼저 달라 하여 그걸 가지고 먼 나라에 가 허랑방탕하다가 굶어 죽게 되자 정신을 차리게 된 둘째 아들 이야기가 바로 이런 경우가 되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자기하고 있는 영들을 통해 영들의 세계와 커뮤니케이션을 하지만, 천국하고는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그를 다스리기 때문이며, 이 경우, 천사들은 그들의 다스림을 외면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 천사가 뭘 하고 싶어도 사람이 마음을 먹어야만 가능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은 악한 영들에게 사로잡힌 나머지, 오직 악하고 거짓된 것만 마음먹기 때문에, 도무지 천사들이 무엇을 할 여지가, 그 결과, 도저히 천국하고는 커뮤니케이션을 할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애정이 악한 것을 좋아하여 악한 영들과 호흡이 맞는 한, 천사들은 멀찍이 떨어져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설령 내가 뭘 잘못해도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착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듭남 가운데 있게 되면, 그는 모든 선과 진리에 대해서는 천사들의 다스림(rule)과 격려를 받지만,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워하며 끔찍하게 여기게 됩니다. 겉으로는 천사들이 다스리는(lead) 것 같아도 그들은 단지 사역자들일 뿐입니다.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는(governs)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먼저 복수(the plural number)로 이르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하는 것이며, 그러나 여전히 주님 홀로 다스리시며 다 하시기 때문에, 다음 구절에서는 단수(the singular number)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하시는 것입니다.

 

이 또한 주님이 이사야에서 분명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Jehovah make all things, stretching forth the heavens alone, spreading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천사들은 더더욱 스스로 이렇게들 고백합니다. ‘저희에게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오직 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행하는 것입니다.

 

※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는, 본문에 나오는 ‘우리’라는 표현을 저는 그동안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삼위 하나님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세 하나님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인간 창조에 관한 의논을 하시는 줄 알았지요. ^^

 

 

51. ‘형상(the image) 관련해서는, 형상은 모양(a likeness)이 아니고, 모양처럼 생긴 것(according to the likeness)이며,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하신 것입니다. 영적(靈的, spiritual) 인간은 형상이고,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은 모양, 즉 닮음, 유사함(similitude)입니다.

 

※ 형상, 이미지를 그릇으로 보면, 모양, 닮음은 그 그릇에 담긴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그 겉모습만 보면 얼핏 주님의 이미지이지만, 실제 그의 행실, 성품, 인성 등 그 속에 담긴 내용을 가지고 주님을 닮았다, 안 닮았다 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이 장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은 영적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영적 인간은, 일종의 ‘형상(an image)인데요, 주님은 그를 가리켜 ‘빛의 아들(a son of l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35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요12:35-36) 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 While ye have the light, believe in the light, that ye may be sons of light. (John 12:35–36)

 

그를 일컬어 ‘친구(a friend)라고도 하시지요.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요15:14-15) 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 (John 15:14–15)

 

그러나 천적 인간은, 이 사람이 ‘모양(a likeness)인데요, 주님은 그를 가리켜 ‘하나님의 자녀(a son of God)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1:12-13)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who were born not of bloods,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 (John 1:12–13)

 

 

52. 사람이 영적인 한, 그의 전반적인 경향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말씀에,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것을 다스리게 하자(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하신 것입니다. 반면, 그가 천적인 사람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때는 그의 전반적인 경향은 반대로 속 사람에게서 겉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주님이 시편에서 자신을,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모양인 천적 인간을 묘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시8:6-8)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the flock and all cattle,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s,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th through the paths of the seas. (Ps. 8:6–8)

 

그래서 여기 먼저 ‘들짐승(beasts)이, 그리고 차례대로 ‘(fowl), ‘바다의 물고기(the fish of the sea)가 언급되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출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의지(the will)에 속한 사랑, 즉 무엇을 의도할 때,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 인간하고는 다른 점이, 영적 인간은 먼저 ‘물고기(fishes)와 ‘(fowl)가 나오고, 나중에 ‘들짐승(beasts)이 언급된다는 점입니다. 이 물고기와 새는 이해(the understanding)에 속하며, 이 이해는 곧 신앙에 속합니다.

 

※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그 성향과 속성 등 근본적인 것이 정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의지에서 출발, 이해로 나아간다면, 영적 인간은 반대로 이해에서 출발, 의지로 나아갑니다. 천적 인간은 가슴이 먼저 움직인다면, 영적 인간은 머리가 먼저 움직입니다. 천적 인간은 선의 사람인 반면, 영적 인간은 진리의 사람입니다. 참 다릅니다. 그래서 천국도 두 나라, 천적 나라, 영적 나라로 되어 있습니다.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 27절 속뜻 요약

 

주님은 사람을 신앙(‘자기 형상’, his image)과 사랑(‘하나님의 형상’, the image of God), 곧 이해(‘남자’, the understanding)와 의지(‘여자’, the will)로 창조하셨습니다. 이 신앙과 사랑의 하나 됨, 이해와 의지의 하나 됨의 상태가 바로 결혼인데, 주님은 사람이 늘 이 상태 가운데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상태가 바로 주님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은 아직 영적 인간 상태이기 때문에 신앙이, 이해가 순서상 먼저 나옵니다.

 

 

※ 27절 속뜻 설명

 

53. 여기 ‘형상(image)이 두 번 언급되는 이유는 ‘자기 형상(his image)은 신앙을,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은 사랑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전자인 신앙은 이해(the understanding)에 속하는 반면, 후자인 사랑은 의지(the will)에 속하는데요, 이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 있어서는 뒤따라 나오는(comes after) 거지만, 천적 인간에게 있어서는 앞서 나가는(precedes) 것입니다.

 

 

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의미하는 것, 그 속뜻을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를 잃어버리면서, 이 비의(秘義, arcanum, 단수, 복수는 arcana) 역시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그들 행복과 기쁨의 최고의 원천이었으며, 결혼의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지각하고자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만 있으면 모두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 가령, 햇볕, 곧 해의 빛과 열의 융합을 결혼으로, 자녀들 및 모든 동식물의 자식 및 열매들을 결혼의 결과로, 사람을 영과 육의 결혼으로, 삼위일체를 결혼으로 등등, 가능한 모든것을 다 ‘결혼’으로 보고 설명할 수 있었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또한 그들은 내적(內的, internal)이었기 때문에, 오직 내적인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외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그들은 육안으로는 그저 볼 뿐, 그러나 이게 뭘 표현하는 걸까 그 영적, 천적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 이는 참 부러운 특성입니다. 오늘 21세기 이 시대 사람들에게는 말이지요. 지금 사람들은 너무나 외적(external)이요, 겉, 감각의 사람들이어서 영적, 천적인 주의 말씀들도 오로지 감각적으로만 이해합니다. 가령, 신령한 사람은 방언도 유창하고 세련되게 해야 하며, 안수기도를 하면 바로 눈앞에서 병이 척척 낫고, 각종 장애도 바로 나아야 하며, 예언 기도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 받기를 참 좋아하며, ‘’의 참 의미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고, 아주 무지하며, 내적(internal)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를 아예 이해조차 못 하면서도 자기는 믿는 사람이요, 신앙인이라고 말하는, 자기는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사람이므로 죽으면 천당 간다고 믿는 그런 현실입니다.

 

외적인 것들은 그들에겐 그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 내적인 것들로 돌리게 하는, 그 정도의 역할을 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내적인 것들에서 천적인 것들로, 그렇게 그들의 모든것 되신 주님께로,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자기들 결혼의 행복의 근원일 것이라고 지각한 천국의 결혼에까지 연결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하였고, 이 둘이 하나로 움직일 때, 그걸 결혼이라 하였습니다.

 

※ 즉, 태고교회는 어떤 사람의 말과 행실이 일치할 때, 그는 이해와 의지가 결혼한 상태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 교회에서 오늘날 관습이 된 말들이 나왔는데요, 선에 관한 교회의 애정으로부터 교회 그 자체를 가리켜 ‘(daughter), ‘처녀(virgin), 이 경우, ‘시온의 처녀(the 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the virgin of Jerusalem) 등으로 묘사했지요, 그리고 또한 ‘아내(wife)라 하였습니다. 이들 주제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장 15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 28절 속뜻 요약

 

주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돌보실 때, 즉 사람이 신앙과 사랑으로, 이해와 의지로 하나 되어 결혼 상태가 되면, 그때 태어나는 선과 진리가 어마어마하게 증가되어 충만한 상태가 되는데, 이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하신 것이며, 이때 그는 일종의 전투 상태에 있게 되어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하신 것입니다.

 

 

※ 28절 속뜻 설명

 

55. 태고인들(太古人, the most ancient people)은 이해와 의지, 즉 신앙과 사랑 간 결합을 결혼이라고 했는데요, 그래서 이 결혼의 결과, 태어나는 모든 선을 ‘생육(fruitfulness), 모든 진리를 ‘번성(multiplications)이라고 하였습니다.

 

※ 실제로 천국 역시 남녀의 결혼이 있지만, 천국에서는 지상처럼 무슨 ‘아이를 낳는’ 그런 결혼이 아닌, 선과 진리가 생겨나는, 전혀 다른 결혼입니다.

 

그래서 선지서들에서도 그렇게 부르는데요, 예를 들면, 에스겔입니다.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12내가 사람을 너희 위에 다니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 (겔36:11-12)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multiply and be fruitful,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and will do better unto you than at your beginnings,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yea, I will cause man to walk upon you, even my people Israel. (Ezek. 36:11–12)

 

여기 ‘사람(man)은 이스라엘이라 하는 영적 인간을, ‘전 지위(ancient times)는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를, ‘처음(beginnings)은 홍수 후 일어난 고대교회(古代, the ancient church)를 말합니다. 먼저 진리에 속한, ‘수가 많고(multiplication)가 언급되고, 그 다음에 선에 속한, ‘번성하게(fruitfulness)가 언급되는 이유는, 이 구절이 이미 거듭난 사람이 아닌, 앞으로 거듭나게 될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의지와, 즉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주님은 이 사람을 ‘결혼한 땅(a married land)이라 하십니다. 이사야입니다.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사62:4) Thy land shall be no more termed waste, but thou shalt be called Hephzibah [my delight is in her], and thy land Beulah [married], for Jehovah delighteth in thee, and thy land shall be married. (Isa. 62:4)

 

이때 열리는 열매들이 진리에 속하였으면 ‘아들들(sons)이라 하고, 선에 속하였으면 ‘딸들(daughters)이라 합니다. 이런 표현은 말씀에 아주 자주 나옵니다.

 

※ 그래서 저는 제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며느리와 손녀, 더 나아가 형제와 처가, 사돈 및 친구, 친지 등을 주님의 선과 진리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니 점점 핏줄에 대한 무슨 집착(?) 같은 것을 내려놓게 되면서, 이들을 주께 맡기기가 한결 쉬워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12:50)

 

하신 주님의 이 말씀이 점점 더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진리와 선이 많아졌을 때, 땅은 ‘충만한(replenished) 상태, 가득 채워진 상태가 됩니다. 주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실 때, 즉 사람을 돌보실 때는 선과 진리가 어마어마하게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31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32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13:31-32) The kingdom of the heavens is like to a grain of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sowed in his field, which indeed is the least of all seeds, but when it is grown, it is the greatest among herbs, and becometh a tree, so that the birds of the heavens come and build their nests in the branches thereof. (Matt. 13:31–32)

 

겨자씨 한 알(A grain of mustard seed)은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기 전에 갖고 있던 선을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씨보다 작은 것(the least of all seeds)입니다. 그 이유는, 그때는 그가 자기 스스로 그 선을 행하는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사람의 것은 악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그가 거듭남의 어떤 상태 가운데 있게 되면서 그의 안에 뭔가 선한 게 생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모든것 중에서 가장 작습니다.

 

결국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으로써 점점 자라 ‘(herb)이 되더니, 마침내 결합이 완성되면서 ‘나무(a tree)가 되어, ‘공중의 새들(the birds of the heavens)이 ‘그 가지에 깃들게(build their nests in its branches) 됩니다. ‘공중의 새들’은 진리나 지적인 것을(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그 가지에 깃들게’는 기억-지식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동안뿐 아니라 영적일 때(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그는 일종의 전투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이르시기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subdue the earth and have dominion) 하신 것입니다.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 29절 속뜻 요약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영적 인간이기 때문에, 주님은 그들에게 맞는 양식인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먹을거리로 주십니다.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 ‘씨 가진 나무(the tree yielding seed)는 모두 영적 양식을 표상합니다.

 

 

※ 29절 속뜻 설명

 

56. 천적 인간(天的, The celestial man)은 천적인 것(celestial things)으로만 기뻐합니다. 그것이 그의 생명에 맞기 때문인데요, 이름하여 천적 양식(celestial food)이라고 합니다. 영적 인간(靈的, The spiritual man)은 영적인 것(spiritual things)으로 기뻐합니다. 그 이유 역시 그것이 그의 생명과 맞기 때문이며, 이번엔 영적 양식(spiritual food)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자연적 인간(自然的, The natural man)은 자연적인 것(natural things)으로 기뻐합니다. 그에게는 이런 것이 맞기 때문인데, 이름하여 양식(food)이라 하며, 주로 기억-지식으로 구성됩니다.

 

※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은 그 출처가 세상인 지식을 말하며, 학습을 통해서 습득하는 지식을 말합니다.

 

여기서는 영적인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적 양식을 표상(表象, representatives)하는, 즉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를 가지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열매 맺는 나무’는 보통은 ‘씨 가진 나무(the tree yielding seed)라고도 하지요. 그의 자연적 양식은 다음 절에서 설명합니다.

 

 

57. ‘씨 맺는 채소(The herb bearing seed)는 쓰임새(use)와 관련된 모든 진리입니다. ‘열매 맺는 나무(the tree in which is fruit)는 신앙의 선인데, 여기서 ‘열매(fruit)는 주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반면, ‘열매 맺는 씨(seed producing fruit)는 영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며, 그래서 ‘씨 가진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하시는 것입니다. 천적 양식을 나무의 열매라 하는 것은 다음 장을 보면 분명한데요, 다음 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이걸 확인하기 위해 여기서는 에스겔에서 하신 주님 말씀들만 인용합니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 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겔47:12) By the river, upon the bank thereof,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there cometh up every tree of food, whose leaf shall not fade, neither shall the fruit thereof be consumed; it is born again in its month; because these its waters issue out of the sanctuary; and the fruit thereof shall be for food, and the leaf thereof for medicine. (Ezek. 47:12)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는 ‘성소(the sanctuary)이신 주님의 생명과 자비를 의미합니다. ‘열매(Fruit)는 그들의 양식이 될 지혜(wisdom)이며, ‘잎사귀(the leaf)는 ‘약재료(medicine)라는 이름으로 쓰임 받게 될 지성(intelligence)입니다. 한편, 영적 양식을 ‘(herb)이라고 하는 건 시편을 보면 나옵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는도다 (시23:1-2)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thou makest me to lie down in pastures of herb. (Ps. 23:1–2)

 

※ 다음은 ‘쓰임새(use)와 관련된,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402번 글입니다.

 

쓰임새 안에 천국의 모든 기쁨이 모이며, 거기에 다 있습니다. 쓰임새는 사랑과 체어리티(charity)의 선인데, 천사들이 바로 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천사는 그의 쓰임새만큼, 그리고 쓰임새에 대한 애정만큼 기쁨 가운데 있습니다.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wherein is a living soul, every green herb for food; and it was so.

 

 

※ 30절 속뜻 요약

 

주님은 영적 인간의 자연적 속성, 곧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것’을 위해 자연적 음식, 즉 ‘모든 푸른 풀’ 또한 준비하시는데요, 겉으로는 악한 영들의 손을 빌려 주십니다.

 

 

※ 30절 속뜻 설명

 

58. 동일인, 곧 영적 인간의 자연적 음식을 여기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적 인간의 자연적 속성을 ‘땅의 모든 짐승(the wild animal of the earth)과 ‘하늘의 모든 새(the fowl of the heavens)를 가지고 상징하고 있는데요, 그런 그에게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을 보면, 그의 자연적, 영적 양식 둘 다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먹을 것이 나게 하셔서 (시104:14) Jehovah causeth the grass to grow for the beast, and herb for the service of man, that he may bring forth bread out of the earth, (Ps. 104:14)

 

여기서 ‘가축(the beast)이라는 말이 같은 시편 앞 구절들인 11, 12절에서 언급한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he fowl of the heavens) 둘 다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11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12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도다 (시104:11-12)

 

 

59. 여기 자연적 인간의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the vegetable and the green of the herb)만 말하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자연적 인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거듭나는 중인 사람의 자연적인 속성, 면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을 보면,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어가는 동안 그는 계속해서 전투 상황 가운데 놓이게 되는데, 이런 이유로 주님의 교회를 ‘전투적(militant)이라고 하지요. 거듭나기 전엔 탐욕이 지배적이기 때문인데, 사람이라는 존재는 전반적으로는 그저 탐욕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으로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교회 안에 별별 사람이 다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것이 아주 정상이며, 교인 하나하나, 성도 하나하나를 이런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모두 안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 거듭남이란 악과 거짓의 사람이 선과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으로, 태생적으로 지옥에 적합한 사람이 주님의 사랑과 자비로 천국에 적합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 사람은 의지와 이해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의지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그리고 이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에 각각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연결은 천국과 지옥에서 파송된 두 종류의 천사들과 악한 영들로 이루어지며, 그래서 모든 사람은 최소 두 명의 천사와 두 명의 악한 영들이 와 있는 상황에서, 본인의 의지와 이해로 매 순간 일평생 천국 또는 지옥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이들 탐욕과 거짓이 순식간에 사라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존재 자체가 파괴되기 때문인데, 이들 탐욕과 거짓은 그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습득한 유일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한 영들은 오랫동안 그와 함께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즉 그들은 일단 그의 탐욕을 자극하여 흥분시킬 수는 있습니다만 그러나 계속 끊임없이 그러다 보면, 사람은 나중엔 이런 걸 지루해하며, 싫증을 느끼고 느슨해져서 결국은 주님에 의해 선 쪽으로 기울어질 정도가 되고, 그렇게 해서, 즉 이런 식으로 사람은 개혁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그래서 인생 막장,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거기서 회심하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대표적인 이야기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이지요. 악한 영들이 아무리 끈질겨도 그들이 우리 주님의 한결같으심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무슨 의로운 습관을 새로이 결심했음에도 불구, 반나절이 못 되어 또 넘어지더라도, 그리고 똑같은 결심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하더라도,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이제는 더 이상 못 믿겠다 하더라도 이런 나를 끝까지 붙드시는 주님을 믿고 다시 일어서며, 다시 결심, 다시 정진하는 태도, 자세가 필요합니다.

 

※ 주님은 우리와 달리 우리 안의 악을 한방에 어떻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조차 우리의 생명이심을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지요. 주님의 놀라우심은 그 악조차 우리를 돌이키는 재료로 사용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 이 이야기는 저를 비롯,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며, 방황하는 자녀를 둔 모든 부모가, 그러나 그 자녀를 한결같이 사랑하여 끝까지 갈 수 있는, 즉 이 아이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선하고 진실한 모든것, 즉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관한 거라면 뭐든지 - 오직 이런 것들만 선하고 진실한데요, 그것은 그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 아주아주 극도로 증오하는 악한 영들은 사람에게 양식으로 ‘채소와 푸른 풀’에 비교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과 달리 주님은 그에게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교되는 양식도 주시는데요, 이는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이며, 주님은 이 양식을 간격을 두고 사람에게 주십니다.

 

※ 여기서 우리는 악한 영들의 정체와 그들이 주는 달콤한 것의 그 숨은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아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주는 것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그것은 그 안에 생명이 없는, 결국은 보잘 것 없는 ‘채소와 푸른 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곧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있어 우리로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하시는, 그래서 기쁨, 즐거움과 함께 더할 나위 없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에 들게 하시는 분임을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 즉 악한 영들이 주는 것은 짝퉁, 모조품, 가짜인 반면, 오직 주님이 주시는 것만이 진품, 정품, 진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사람을 매 순간, 아니 정말 눈 깜빡할 순간이라도 막아주지 않으셨으면, 인간은 즉시 소멸되었을 것입니다. 영들의 세계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 및 신앙과 관련된 것들을 향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지독한 증오가 만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지난 수년간, (저는 분명히 몸 안에 있었음에도) 저세상의 영들, 특히 아주 못된 영들과 본의 아니게 어울려 왔습니다.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저는 수천의 영들에 둘러싸이기도 했고, 그들은 저를 향해 독을 뱉기도 했습니다.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그들은 저를 향해 우글거렸지요. 하지만 그들은 제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릴 수 없었는데, 그것은 제가 주님의 보호 아래 안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여러 해 경험으로, 저는 정말 영들의 세계와 그 본성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현재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영생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왜 반드시 견뎌야만 하는지 하는, 영적 전투에 대하여 정말 철저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주제,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도 전혀 의심 없이 믿기에는 일반적인 설명으로는 도저히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를 아주 구체적으로 보이셨는데요, 그것은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다루겠습니다.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 31절 속뜻 요약

 

거듭남의 마지막 단계 때 상황입니다. 이때 이 사람 안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 즉 영적인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 즉 천적인 것들이 하나가 됩니다. 마치 결혼한 상태가 되는데요, 이를 가리켜 ‘심히 좋았더라(very good) 하시는 것입니다.

 

 

※ 31절 속뜻 설명

 

60. 앞의 상태들에 대해서는 단지 ‘좋았더라(good)고만 하시는 반면, 이 상태를 가리켜서는 ‘심히 좋았더라(very good)고 하시는 이유는, 지금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이 마치 서로 결혼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 천국 전체가 결혼 상태입니다. 삼위일체도, 주님과 천국, 주님과 천사들, 주님과 교회, 주님과... 주님과... 모든것이 결혼의 상태입니다. 결혼은 주님 사랑, 즉, 주님이 이 피조 세계를 사랑하시는 궁극적 목적입니다.

 

 

61. 신앙의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과 관련된 모든 것을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주님 사랑, 이웃 사랑(love to the Lord and our neighbor)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天的, celestial)이라 합니다. 전자는 사람의 이해에, 후자는 사람의 의지에 속합니다.

 

※ 조금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머리 신앙은 영적이요, 가슴 신앙은 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열의 문제라기보다는 태생적 특성에 가깝지만, 하여튼 주님은 천적 천사들은 가까이, 영적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 다음으로 가까이하십니다. 그러므로 본인의 특성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가급적 너무 교리, 교리 하지 마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62. 사람의 거듭남과 관련하여 그 시기와 상태를 일반적, 그리고 구체적으로 여섯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를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 합니다. 전혀 사람이 아닌 상태에서 서서히 그는 먼저 뭔가가 되고,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여섯째 날을 향해 가기 때문입니다. 이 여섯째 날에 그는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이 됩니다.

 

※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즉 영적인 사람은 형상, 곧 주님을 담는 그릇이 되는 것이며, 천적인 사람은 그 영적인 사람 안에 담기는 주님이십니다.

 

 

63. 그를 위해 악과 거짓을 대항하여 끊임없이 싸우시는 한편, 주님은 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서 확실하게 하십니다.

 

※ 이 ‘주님이 나를 위해 대신 악과 거짓에 대항하여 싸우심’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577번 글(김은경 역)입니다.

 

천사에게 지혜와 지성이 있는 것처럼 지옥 영들에게는 그만큼의 악의와 교활함이 있다. 사람의 영은 몸을 벗어나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 안에 있기 때문이다. 천사적 영이 그의 선 안에 있다면, 지옥적 영은 그의 악 안에 있다. 앞에서 자주 설명했듯이 모든 영이 그 자신의 선 아니면 악인 것은 영이 그 자신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적 영은 그의 선에서, 지옥적 영은 그의 악에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악 자체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그 악에 포함된 모든것으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사람이 몸을 입고 살 동안은 그렇지 않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받는 법의 제재와 이득, 명성, 평판을 얻을 희망 또는 그것을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의 제재로 그 영의 악이 억눌려 있었고, 따라서 그 악의 참모습이 밖으로 터져 나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때는 사람의 영에 있는 악은 그가 세상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꾸미는 외적인 정직함, 올바름,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 등으로 포장되고 가려져 있다. 이런 가면 뒤에서 그 악은 너무도 단단히 밀폐되고 숨겨져 있어 그 자신도 자기 영이 그렇게 엄청난 악의와 교활함을 숨기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즉 사후에 영이 되면 드러날 자기의 본성이 악마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후에는 그런 악의가 스스로 드러나는데 그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악하다. 악은 하나에서 수천 가지 종류가 파생하는데 그중에는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나는 내게 허락된 수많은 경험으로 그 악들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고 관찰할 수 있었다. 주께서 내게 영으로는 영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몸으로는 자연계에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은 너무도 엄청나서 그 천분의 일을 기록하는 것도 어렵다는 것을 나는 증언한다. 그 악이 너무도 커서, 만일 사람이 주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결코 지옥에서 구원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 사람에게는 천국에서 온 천사들과 지옥에서 온 영들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292, 293) 사람이 신성을 인정하고 신앙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지 않으면 주께서는 그를 보호하실 수 없다.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 등을 돌리고 지옥 영들에게 돌아서며, 그렇게 되면 그의 영은 자기와 동질의 악의를 흡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끊임없이 사람을 그가 달라붙는 악에서, 그리고 지옥의 영들과 교류함으로써 스스로 끌어들인다고 할 수 있는 악에서 떼어내신다. 사람이 신성을 부인하면 양심의 내적 제재를 받지 못하는데, 사람이 양심의 내적 제재로 악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외적 제재로 떼어내신다. 외적 제재는 앞에서 말한 대로 법에 대한 두려움과 이득, 명성, 평판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다. 사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의 즐거움을 통해서, 그 즐거움을 잃거나 빼앗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서 악에서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영적 선으로 인도되지 못한다. 그런 사람이 영적 선을 대하면 그 즉시 남을 꾀고 속이려고 선함과 정직함과 올바름을 가장함으로써 그 선을 술책과 교활함으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교활함은 그의 영에 들어있는 악과 결탁하여 그 특성을 주입함으로써 악에 형태를 부여한다.

 

전투의 때는 주님이 일하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는 거듭난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빚으신 작품(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 합니다.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시8)

 

사랑이 그의 모든 행위의 원리가 될 때까지, 이때 전투가 그치는데요,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이 일이 아주 순조롭게 되어 드디어 신앙과 사랑 간 결합이 일어날 때가 바로 ‘심히 좋았더라(very good) 하시는 때입니다. 이때 주님은 그를 주님의 모양대로(as his likeness) 행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 거듭 ‘형상(image)은 그릇, ‘모양(likeness)은 내용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릇, 천적인 사람은 내용입니다. 그릇보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듯 주님의 목표, 즉 거듭남의 최종목표는 천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천적인 사람의 상태가 바로 안식의 상태요, 안식일입니다.

 

※ 천적인 사람은 가슴 신앙이며, 매사 생각하고, 의도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것의 동기가 주님 사랑인 상태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의도하며,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 프란체스코입니다.

 

※ 프란체스코 앞에 ‘’(聖)자를 붙여 부르는 것은 단순히 관례를 따른 것일 뿐입니다. 참으로 ‘’(聖), 즉 ‘거룩하신 분(The Holy)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시며, 그래서 이 칭호는 오직 주님에게만 사용해야 하는 칭호입니다.

 

※ 은성출판사(http://eunsungpub.co.kr/)의 엄두섭 저, ‘성 프란치스코’를 꼭 읽어 보시기 바라며, 읽으신 분들도 거듭거듭 계속 읽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책을 읽는 우리를 깊은 신앙, 무거운 영성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은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천국, 혹은 천적인 낙원(the celestial paradise)으로 인도됩니다. 이곳에 관하여는 다음 장에서 다룹니다.

 

※ 우리는 악을 직접 상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본성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악을 상대하실 수 있습니다.

 

※ 그래서 우리 안에 와 있는 지옥의 영들을 상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는 주님과 악한 영들 간 싸움입니다.

 

※ 우리가 거듭남의 최종단계에서 이제는 의지로도 주님을 사랑하여 매사에 주님 편에 서면 악한 영들은 더 이상 우리를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만 우리를 포기하고 떠납니다.

 

※ 우리 안에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게 되어 드디어 싸움이 끝나고 쉼이 찾아오는데, 이 쉼은 주님의 쉼입니다. 우리 안에서 주님이 싸워오셨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주님이 쉬시는 걸 표상한 것이며, 그래서 주님은 안식일을 가리켜 ‘내 안식일’이라 하신 것입니다.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19:30)

 


 

말씀의 속뜻, 아르카나는 말씀의 생명 그 자체

 

 

64. 이것이 말씀의 속뜻, 즉 겉 글자의 뜻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말씀의 생명 그 자체(its veriest life)입니다. 그런데 이 아르카나(arcana, 秘義, 말씀에 담긴 숨겨진 의미)는 너무나 엄청나 이 정도의 볼륨들 가지고는 그 속에 담긴 것을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아주 조금만 제시하는데요,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도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게 거듭남이며, 거듭남이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한다(perceive)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인데요, 그들은 글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심지어 어떤 단어 하면 탁 떠오르는 의미조차 전혀 모릅니다. 나라, 도시, 강과 인물 등, 말씀 내 역사, 예언 쪽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이런 것들 역시 더더욱 모릅니다. 그들은 오직 그 단어들과 이름들에 의해 상징되는 것들에 관한 어떤 아이디어만 갖고 있을 뿐입니다(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그래서 낙원의 아담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를 지각합니다. 물론, 그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가 가졌던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을 지각하는 것이지요. 노아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과 함께 살아남아 아브람의 때까지 계속되었던 교회를 지각합니다. 아브라함 하면 천사들은 결코 아브라함 한 개인이 아닌, 그가 표상한(which he represented) 어떤 구원 신앙(a saving faith)을 지각하는 식입니다. 천사들은 이렇게 단어들과 이름들하고는 완전 별개인 영적, 천적인 것들을 지각합니다.

 

 

65. 제가 말씀(the Word)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천국 뜰 첫 번째 입구로 옮겨져 거기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그들은 말하길, 자기들은 그 안에 있는 무슨 단어나 글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대신 그 가장 가까운 속뜻이 뭔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너무도 아름답고(so beautiful), 그런 일련의 순서로 자기들을 깊이 감동, 감명케 한다(so affecting them)고, 그것은 영광(glory)이라고 가슴 벅차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66. 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다음과 같았는데요, 그들은 어떤 지상에 속한, 세속적인 것들을 언급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 천적인 것들을 생각하면서 하는 그런 것이었지요. 그들은 이만하면 그 영적, 천적인 의미를 충분히 띠겠다 싶은 것들을 가지고(by representatives) 언급했을 뿐 아니라, 또한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무슨 스토리 텔링 같은 일종의 그럴듯한 역사 시리즈로도 만들었는데요, 이런 식의 표현 방식으로 그들은 정말 최고 수준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예언이 바로 이런 스타일입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 위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은 사실 많이 빗나간 번역입니다. 병행 본문(영어)을 보니 너무나 다르지요? 태고교회, 고대교회 같은 이런 배경, 즉 아르카나를 전혀 모르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런 표상(表象, representatives)을 시편에서는,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Dark sayings of old)이라고 했습니다.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78:2-4)

 

창조, 에덴동산 등 아브람의 때까지 내려오는 이들 자세한 내용들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얻었습니다.

 

두 번째 스타일은 역사적 기술이며, 아브람의 때부터 이어진 모세의 책들에서, 그리고 여호수아, 사사 시대, 사무엘, 열왕기의 책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책에서는 역사적 사실들이 글자의 뜻 그대로입니다. 즉 실제 역사 그대로 기록된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이든 아니든 속뜻으로는 아주 다른 것들이 그 안에 들어 있는데요, 그것은 주님의 신성하신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음이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순서대로 보시게 됩니다.

 

세 번째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인데, 이것은 태고교회 시절 아주 높은 존경을 받았던 스타일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스타일은 그러나 계속 연결되어 태고 스타일 같은 역사적 형태로 남지를 못하고 그만 끊어져, 이제는 속뜻, 곧 그 안에 가장 깊은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있어 아름답게 연결된 순서로 이어지며,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다양한 상태들, 천국 그 자체, 그리고 주님을 향한 가장 내적 의미와도 관련되는, 이런 속뜻을 제외하고는 이제는 거의 이해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과 상용어 스타일 간 중간 스타일입니다. 주님은 이 스타일에서 속뜻으로는 왕으로서의 다윗이라는 인격을 통해 다루어지십니다.

 

※ 이렇게 해서 창세기 1장을 마칩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진행됩니다. 즉 본문 주석 앞뒤로 어떤 아르카나가 곁들여져 말씀을 읽는 우리의 이해를 깊게, 아주 넓고 깊게 열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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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3(D1)-주일예배(2517, 눅14,25-30), '부모와 처자, 형제자매 및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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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2-03(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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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HW97au7zXo

 

 

'부모와 처자, 형제자매 및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의 속뜻

 

 

25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눅14:25-30)

 

 

주님 신앙 안에서 그의 계명에 따라 사는 사람들한테는 영적인 시험이 있는데, 이 시험은 그들이 자기들과 같이 있는 악한 영들을 쫓아낼 때 있습니다. 이 악한 영들은 그들의 욕망과 마치 한 몸처럼 행하는 자들입니다. 다음 말씀에 나오는 십자가는 바로 이 시험을 뜻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10:38) (계시록 속뜻 639:2) By “temptations” are here meant spiritual temptations, which exist with those who have faith in the Lord and live according to his commandments, when they drive away the evil spirits that are with them, who act as one with their lusts. These temptations are signified by “the cross” in the following passages: And he that taketh not his cross and followeth after me is not worthy of me (Matt. 10:38).

 

 

복음서에 보면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많은 무리가 모였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요, 가령 키가 작은 삭개오가 주님을 보려고 뽕나무 위로 올라간 이야기, 주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나 되는 무리를 먹였다는 에피소드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주님을 따라다녔을까요? 병을 고치려고 온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단순히 기적을 보기 위해 온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님의 놀라우신 말씀을 듣기 위해 온 사람들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나아왔던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얻어갔습니다. 그러나 그 많던 무리 중 마지막까지 남아 주님의 곁을 지켰던 사람은 불과 몇 명이 안 되었는데요, 주님 골고다 십자가 마지막 현장까지 함께했던, 주님이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과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몇 명의 여인들뿐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많은 무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였습니다. 말씀에서 ‘무리(multitude)는 진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므로 주님이 가시는 곳에 무리가 따라다닌다는 것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5, 6절입니다.

 

25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려면,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는 것은 신앙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십계명에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미워하라고 하시는데요, 그 이유가 뭘까요? 여기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는 그 속뜻으로는, 실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가 아니라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악과 거짓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자아 사랑을 뜻하고, ‘어머니’는 세상 사랑을, ‘처자와 형제, 자매’는 그 사랑에서 나오는 온갖 악한 애정과 거짓된 생각을 뜻합니다. 그것은 모두 진리와 반대되는 것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숨’은 자아라고 하는 인간의 타고난 생명을 뜻하기 때문인데, 인간의 자아는 악과 거짓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선과 진리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사랑한다면,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도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선하고 진실한 것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 그런 숭고한 마음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도 사람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 신자들은 인간의 내면에 부처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들이 말하는 부처는 바로 주님이시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 그들은 사람이 곧 하나님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교회에서는 사람 안에 계신 주님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결합해야 할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이시지만, 그러나 그분이 곧 우리 자신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마치 자기가 주님인 것처럼 말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은 내면에 계신 주님이 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 하신 주님이 27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을 미워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요, 왜냐하면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생명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버리는 일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아와 세상을 버리는 일은 한 번에 되지 않습니다. 많은 시험과 내적 싸움이 필요한데요,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신 것은 그래서입니다. ‘십자가’는 내적 싸움과 시험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먹을 것이나 입을 것, 또는 주거 문제와 같은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물질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느냐, 곧 그 쓰임새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 것들은 주님과 이웃을 위해 쓰일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는 인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시험에 임할 때, 능히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험에는 내적인 시험이 있고, 외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내적인 시험은 자신의 자아, 또는 자아의 악과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적 시험은 뭘까요? 외적인 시험은 질병이나 불운 같은 것이며, 또는 주님이 바리새인들로부터 공격을 받으신 것처럼, 교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교리적으로 공격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시험의 성격과 종류가 모두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외적인 시험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내적인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다르다고 걱정할 일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맞는 시험을 허용하시고, 그 시험을 통해 그들에게 있는 그들 고유의 악들을 몰아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28절에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28너희 중의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망대는 적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감시하는 탑입니다. 그래서 ‘망대를 세우는 것’은 영적으로는 진리를 획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는 시험이 올 때, 악과 거짓을 미리 감지하고 맞서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대해 “천국의 비밀” 8960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은 사람의 악과 거짓 안에 있는 악령들이 끌어들이는 것이며, 그때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주님의 천사들은 신앙의 진리를 불러내 그것으로 악령들을 막아낸다.” 그러니까 신앙의 진리가 바로 영적인 망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망대를 준공하기까지 자기가 가진 것을 계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시험에서 이겨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시험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의지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는 시험의 악들과 맞서 싸우고, 한편으로는 쉬지 않고 주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험에서 한 번 두 번 이길 때, 주님으로부터 우리 마음속에 신앙의 진리가 심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내면에 세워지는 진리의 망대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기 전에는 사실은 신앙이 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신앙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시험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29절과 3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초’는 신앙을 형성하는 교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따라서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한다’는 것은 교리의 지식만 있고, 신앙의 진리는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신앙인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교리에 대해 조금 안다고 해서 신앙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위한 싸움에서 이겨야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사력을 다해 시험에서 이길 때, 주님께서 신앙의 진리를 주십니다. 그리고 신앙의 진리를 소유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점점 더 많은 시험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진리 안에는 선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가 신앙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의 진리가 아니라 교리의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시험에서 항상 집니다. 기억 속에만, 즉 알고만 있고, 삶에 적용하지 않는, 즉 실천하지 않는 교리의 지식 안에는 선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의 믿음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앉은뱅이 신앙이지요. 바로 이런 사람들이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공사를 시작하고 마치지는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들을 비웃는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선과 진리가 이끄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제자가 되고자 사람은 자아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 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부모와 처자, 형제, 자매는 영적으로, 즉 그 속뜻으로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오는 모든 악에 대한 애정과 거짓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악은 한 번에 없어지지 않고, 단계적으로 천천히 없어집니다. 그 과정은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으로부터 교리를 배웁니다. 그래야 무엇이 자아이고, 자아의 악인지를 알기 때문이지요. 그다음에는 교리의 지식을 그때그때 삶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내적 싸움이 시작됩니다. 겉 사람의 저항 때문이지요. 그 싸움이 바로 각자가 짊어지고 갈 십자가입니다. 주님이 이런 말씀을 전하실 때, 알아듣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요?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알아듣지 못할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질문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듣고 죄를 지으면 더 큰 화를 입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차라리 그들이 모르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 중에는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을 알아보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런가 하면 진리를 알았음에도 막상 시험이 닥치면 그냥 주저앉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리를 받아들이는 각자의 마음 상태가 모두 다르기 때문인데요, 우리 모두 얼마나 어렵게 이 진리를 만났습니까? 항상 자신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서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제거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의 씨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주님께서는 망대를 높이 세우려다 기초만 쌓고 마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지옥의 악령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참된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진정 복된 사람들입니다. 진리의 망대를 높이 세우시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주님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막10:21)

 

아멘

 

원본

2021-03-2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2-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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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8, AC.218-225

8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Verse 8,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 8절 속뜻

 

이들 태고교회 네 번째 후손은 선조들의 그 찬란했던 황금시대의 영광과 퍼셉션은 거의 다 사라지고, 이제 겨우 그 흔적만 남아 자신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즉 주님의 선과 진리가 다 떨어져 나가 벌거벗은 상태임을 지각, 두려워하며 부끄러워 숨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21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내면의 소리(an internal dictate, an inner dictate, the inner call)입니다. 그들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건데요, 이 소리는 그들이 전에 소유했던 퍼셉션(perception) 가운데 아직 남아 있던 겁니다. ‘그날 바람이 불 때(the air or breath of the day)는 그 교회가 아직 약간의 퍼셉션을 소유하던 기간을 가리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는 그 소리를 두려워하는 것이지요, 마치 악을 의식하는 사람들한테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숨긴 곳에 있는 ‘동산 나무 사이에(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의미합니다. 여기 가장 안쪽(inmost)사이에(the midst)라 하며, ‘나무(the tree)는 앞서 살핀 대로 퍼셉션을 가리킵니다만, 그러나 이제는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어서 마치 유일하게 남은 것인 양 나무를 단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signified an internal dictate which caused them to feel afraid, this dictate being the residue of the perception which they had possessed;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denoted a period when the church still possessed some residue of perception;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s to fear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by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in which they hid themselves, is signified natural good; that which is inmost is called the “midst”; the “tree” denotes perception as before; but because there was little perception remaining, the tree is spoken of in the singular number, as if there were only one remaining.

 

 

219.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는 그들이 두려워한 내면의 소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소리(voice)가 상징하는 걸 보면 분명한데요, 말씀에서 여호와의 소리(the voice of Jehovah)는 말씀 그 자체, 신앙의 교리, 양심이나 내적으로 주의, 경고하기, 그리고 또 그 결과 이어지는 모든 책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곤 합니다. 그래서 천둥소리를 여호와의 소리라고 하는데요, 요한계시록입니다. That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meant an internal dictate of which they were afrai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voice” in the Word, where the “voice of Jehovah” is used to designate the Word itself, the doctrine of faith, conscience or a taking notice inwardly, and also every reproof thence resulting; whence it is that thunders are called the “voices of Jehovah,” as in John: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계10:3) The angel cried with a loud voice, as a lion roareth, and when he had cried seven thunders uttered their voices, (Rev. 10:3)

 

그때 외적, 내적 둘 다인 어떤 소리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계속해서 denoting that there was then a voice both external and internal. Again: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계10:7) In the days of the voice of the seventh angel the mystery of God shall be consummated. (Rev. 10:7)

 

시편입니다. In David: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시68:32-33) Sing unto God, sing praises unto the Lord, who rideth upon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lo, he shall send out his voice, a voice of strength. (Ps. 68:32–33)

 

옛적 하늘들의 하늘(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은 태고교회의 지혜를 말하며, ‘소리는 계시, 그리고 또한 내면의 소리를 뜻합니다. 계속해서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denote the wisdom of the most ancient church; “voice,” revelation, and also an internal dictate. Again: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시29:3-5, 7-9) The voice of Jehovah is upon the waters; the voice of Jehovah is in power; the voice of Jehovah is in glory; the voice of Jehovah breaketh the cedars; the voice of Jehovah divideth the flames of fir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wilderness to shak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hinds to calve and uncovereth the forests. (Ps. 29:3–5, 7–9)

 

이사야입니다. And in Isaiah: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사30:30-31) Jehovah shall cause the excellency of his voice to be heard, for through the voice of Jehovah shall Asshur be beaten down. (Isa. 30:30–31)

 

 

220. 거니시는 소리(the voice going to itself)는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음을, 말하자면 마치 그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상태를 의미하는데요, 다음 절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Jehovah called to the man)를 보면, 거기서도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voice going to itself,” is meant that there was but little perception remaining, and that alone as it were by itself and unheard, as is manifest also from the following verse where it is said, “Jehovah called to the man.”  

 

※ ‘아담을 부르시며’의 ‘부르시며’는 ‘shouted’에 가까운 ‘called’입니다. 사람이 자기 본성에 깊이 잠긴 상태를 ‘깊이 잠들게 하시매’라 표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죄를 지었으나 양심의 소리가 들리는 사람한테는 이런 소리가 천둥 번개의 소리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에서 So in Isaiah: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사40:3, 6)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the voice said, Cry. (Isa. 40:3, 6)

 

광야(The wilderness)는 신앙이라는 게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교회를, ‘외치는 자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수태고지(受胎告知,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곧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모든 소식입니다. 거듭난 사람들과 그 안에 내면의 소리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 말이지요. The “wilderness” is 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 the “voice of one crying” is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and in general every announcement of his coming, as with the regenerate, with whom there is an internal dictate.

 

 

221. That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signified a period when the church had still somewhat of perception remaining,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day” and of “night.”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the states of the church to the times of the day and of the night, to the times of the day when the church was still in light, wherefore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breath or air “of the day,” because there was still some remnant of perception by which they knew that they were fallen. The Lord also calls the state of faith “day,” and that of no faith “night”; as in John: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9:4)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ometh when no man can work. (John 9:4)

 

Th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were for the same reason called “days” in chapter 1.

 

 

222. That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means to be afraid of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is evident from their reply (verse 10):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The “face of Jehovah,” or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as is clearly evident from the benediction: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6:25-26)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merciful unto thee;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Num. 6:25–26)

 

And in David: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시67:1)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Ps. 67:1)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4:6)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ght of thy faces upon us. (Ps. 4:6)

 

The mercy of the Lord is therefore called the “angel of faces,” in Isaiah: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사63:7-9) I will make mention of the mercies of Jehovah; he hath requited them according to his mercies, and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his mercies; and he became their savior. In all their affliction he was afflicted, and the angel of his faces saved them; in his love and in his pity he redeemed them. (Isa. 63:7–9)

 

 

223. As the “face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it is evident that he regards all from mercy, and never averts his countenance from any; but that it is man, when in evil, who turns away his face, as is said by the Lord in Isaiah: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사59:2)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d your God, and your sins have hid his face from you; (Isa. 59:2)

 

and here, “they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because they were naked.

 

 

224. Mercy, peace, and every good, or the “faces of Jehovah,” are the cause of the dictate with those who have perception, and also, although in a different manner, with those who have conscience, and they always operate mercifully, but are received according to the state in which the man is. The state of this man, that is, of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ne of natural good; and they who are in natural good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hide themselves through fear and shame because they are naked; while such as are destitute of natural good do not hide themselves, because they are insusceptible of shame; concerning whom, in Jeremiah 8:12–13. (See above, n. 217.)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렘8:12-13)

 

 

225. That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signifies natural good, in which there is some perception which is called a “tree,” is also evident from the “garden” in which the celestial man dwelt; for everything good and true is called a “garden,”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man who cultivates it. Good is not good unless its inmost is celestial, from which, or through which, from the Lord, comes perception. This inmost is here called the “midst,” as also elsewhere in the W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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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7, AC.211-217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Verse 7,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 7절 속뜻

 

그들은 내면의 소리를 통해 자신들은 더 이상 선조들의 이노센스 대신 악 가운데 있음을, 천적 영적 선은 다 사라지고 대신 자연적 선만 남았음을 깨닫고 부끄러워하며 변명했습니다.

 

 

211. 그들의 눈이 밝아져(eyes being opened)는 그들이 어떤 내적 음성(an interior dictate)을 듣고, 자기들이 벗은(naked) 줄을 알게 되었다, , 더 이상 전처럼 자기들이 이노센스(innocence)가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signifies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from an interior dictate, that they were “naked,” that is,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212. 눈이 밝아져(the eyes opened)가 무슨 내적 음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들, 가령, 발람(Balaam)이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그 구절에서 발람은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나서는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the man whose eyes are opened)(24:3)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That by having the “eyes opened” is signified an interior dictate is evident from similar expressions in the Word, as from what Balaam says of himself, who in consequence of having visions calls himself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Num. 24:3)

 

이 부분, 한글 개역개정에서는 감았던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위 영역을 보면 분명 ’, 혹은 밝아진입니다. ‘전엔 감았으나 지금은 뜬’, 차라리 이렇게 번역했더라면...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민24:3)

 

그리고 요나단인데요, 그는 벌집의 꿀을 조금 맛본 후, 지금 그들이 처한 상황이 악하다는 내적 음성을 듣습니다(had a dictate from within).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지요.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his eyes saw), , 자신의 내적 시야가 열려 전엔 몰랐던 것을 지금은 보게 되었다고 말입니다.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1 Sam.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삼상14:29)

 

더더욱 말씀에 보면, ‘(the eyes)은 종종 이해(the understanding)와 거기서 나오는 내적 음성(an interior dictate therefrom)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시편입니다. Moreover in the Word, the “eyes” are often used to denote the understanding, and thus an interior dictate therefrom, as in David: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시13:3)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Ps. 13:3)

 

여기 (eyes)은 이해를 가리킵니다. 에스겔에서도 보면, 의도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자들,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는(have eyes to see, and see not)(12:2) 족속들에 대해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where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So in Ezekiel, speaking of those who are not willing to understand,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Ezek. 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겔12:2)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사6:10)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Isa. 6:10)

 

위 말씀은 그들로 볼 수 없게 해야지, 안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denotes that they should be made blind, lest they should understand. So Moses said to the people,  

 

※ 우리 생각엔 ‘어? 사람들이 깨닫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왜 그걸 막으시는 거지?’ 하지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게,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은 차라리 깨닫지 못하는 게 더 그들에겐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민족적 특성상, 그들은 오히려 깨닫게 되면 나중에 반드시 돌이켜 배신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차라리 몰랐더라면 그냥 그 정도에 머무를 텐데, 알고 나서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가게 되면, 그때는 그의 사후 상태가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이런 것이 바로 신성모독이며, 이 신성모독의 죄가 정말 무서운 이유는, 이 신성모독의 삶을 산 사람은 그 영이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이 영이 오염된다는 건 영의 상태가 계속 이랬다저랬다 영원히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4)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Deut. 29:4)

 

여기서 마음(heart)은 의지(the will), ‘(eyes)은 이해(the understanding)를 가리킵니다. 이사야에서는 주님을 가리켜,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he should open the blind eyes)(42:7)라 하십니다. where “heart” denotes the will, and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In Isaiah it is said of the Lord, that “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Isa.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42:7)

 

계속해서 이사야에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29:18)라 하십니다. And in the same prophet: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Isa. 29:18)

 

그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사29:18)

 

 

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knowing that they were naked)는 자기들이 더 이상 전처럼 이노센스(innocence)가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데요, 이것은 앞장 마지막 구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2:25)를 보면 분명합니다. 이걸 그들이 벌거벗었으므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로 읽고는, 이노센스(to be innocent)를 의미하는 걸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들의 부끄러워함(being ashamed)의 의미는 오히려 정반대인데요, 본 절의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고는 자신들을 숨겼다(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는 데를 보면 말입니다. 이는 이노센스가 전혀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nakedness)이라는 것은 일종의 스캔들이요, 창피이기 때문입니다. 저절로 악이 떠오르기(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때문이지요. By “knowing that they were naked” is signified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themselves to be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as is evident from the last verse of the preceding chapter, where it is said,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and where it may be seen that “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 signifies to be innocent. The contrary is signified by their “being ashamed,” as in this verse, where it is said that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 이 ‘벌거벗음(nakedness)이라는 것은 이노센스의 유무에 따라 완전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nakedness)은 어떤 수치스럽고 악한 걸로 사용되며, 전도된(顚倒, perverted) 교회를 서술할 때 사용됩니다. 에스겔입니다. For this reason “nakedness” is used in the Word as a type of disgrace and evil, and is predicated of a perverted church, as in Ezekiel: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겔16:22)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Ezek. 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겔23:29)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Ezek. 23:29)

 

계시록에서는, In John: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계3:18)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r. (Rev. 3:18)

 

그리고 마지막 날에 관하여는, And concerning the last day: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16:15)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Rev. 16:15)

 

신명기에서는, In Deuteronomy: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 (신24:1) If a man hath found some nakedness in his wife, let him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Deut. 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봉사할 때,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입어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안 그러면 죄를 짊어진 채 죽으리라(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하시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aron and his sons were commanded to have linen breeches when they came to the altar, and to minister, 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Exod. 28:42–43)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출28:42-43)

 

 

214. 그들은 자신의 본성(their own)만 남은 상태이기 때문에, ‘벌거벗겨졌다(naked)고 합니다. 본성, 즉 자기 자신(themselves)만 남은 사람들은 지성과 지혜, 혹은 신앙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며, 그래서 결국 진리와 선에 대하여 벌거벗겨진(naked) 상태이고, 그 결과는 악 가운데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They are called “naked” because left to their own; for they who are left to their own, that is, to themselves, have no longer anything of intelligence and wisdom, or of faith, and consequently are “naked” as to truth and good, and are therefore in evil.

 

, 우리는 주님의 진리와 선이라는 옷을 입어야 천국 갈 수 있는데, 반대로 이 옷이 다 벗겨져서 악과 거짓의 알몸 상태가 되면 천국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은 지금도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으면일어나는 일입니다.

 

 

215. 인간의 본성(man’s own)은 악과 거짓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nothing but evil and falsity) 저는 그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히 알게 되었는데요, 그것은 영들이 스스로(from themselves) 하는 말, 곧 주님 말씀이 아닌, 영들 본인 생각에서 나오는 말은 그게 무슨 말이든 언제나 모두 악하고 거짓이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그런 식으로 말하고 있음을 제가 알게 될 때마다, 저는 듣는 즉시 그 말은 거짓이며, 심지어 그들이 자기들이 하는 말이 진리임을 자기들은 정말 철저히 확신하고 있으니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has been made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atever spirits have at any time said from themselves has been so evil and false that whenever it was made known to me that they spoke from themselves I at once knew that it was false, even though while speaking they were themselves so thoroughly persuaded of the truth of what they said as to have no doubt about it.

 

※  영계는 실상을 확인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세상은 그래도 몸으로 살짝 가릴 수 있어 겉과 속이 달라도 시치미 떼고 살아갈 수 있지만 영계는 몸을 벗고 가는 데라 선이든 악이든 어느 한쪽으로 겉과 속이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영계 체험과 증언을 통해 사람의 자아, 인간 본성이라는 게 실제로는 어떤 건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즉 자기 생각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같은 말인데요, 어떤 사람들이 영적, 천적인 일들이나 신앙의 일들에 관하여 이성적 접근을 시작할(have begun to reason) 때마다, 저는 그들은 의심, 심지어 부인(denied)까지 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관한 걸 이성으로 접근한다는 건(to reason concerning faith)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것이 자아, 곧 그들의 본성으로 말미암는 것이어서, 그들은 그저 거짓들 가운데로 가라앉으며, 그 결과, 짙은 어둠, 곧 거짓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들이 이 심연 가운데 있을 때는 아주 작은 것 하나로도 수천의 진리들을 압도할 수가 있는 것이, 마치 눈동자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 한 조각만으로도 온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모든것에 관해 눈을 감게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이사야에서 말씀하시기를, The case is the same with men who speak from themselves. And in the same way, whenever any persons have begun to reason concerning the thing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or those of faith, I could perceive that they doubted, and even denied, for to reason concerning faith is to doubt and deny. And as it is all from self or their own, they sink into mere falsities, consequently into an abyss of thick darkness, that is, of falsities, and when they are in this abyss the smallest objection prevails over a thousand truths, just as a minute particle of dust in contact with the pupil of the eye shuts out the universe and everything it contains. Of such persons the Lord says in Isaiah: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사5:21) Woe un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 and intelligent before their own faces. (Isa. 5:21)

 

10네가 네 악을 의지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나를 보는 자가 없다 하나니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사47:10-11) Thy wisdom and thy knowledge, it hath turned thee away, and thou hast said in thine heart, I, and none else besides me; and evil shall come upon thee, thou shalt not know from whence it riseth, and mischief shall fall upon thee, which thou shalt not be able to expiate, and vastation shall come upon thee suddenly, of which thou art not aware. (Isa. 47:10–1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렘51:17) 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 [scientia], 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 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 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 (Jer. 51:17)

 

만든 신상(A graven image)은 거짓이요, ‘부어 만든 우상(a molten image)은 악, 곧 인간의 본성 속 악입니다. A “graven image” is the falsity, and a “molten image” the evil, of man’s own.

 

 

216.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잎을 엮어(To sew leaves together)는 자신들을 변명하는 것(to excuse themselves), ‘무화과나무(the fig tree)는 자연적 선(natural good), ‘치마로 삼았더라(to make themselves girdles)는 부끄러워했다는 것(to be affected with shame)입니다. 태고인들은 이렇게 말했고, 그들은 그 교회의 후손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 묘사는 그들이 전에 즐거워하던 이노센스(the innocence) 대신 이제는 자연적 선만, 곧 그 안에 그들의 악이 들어 있는 그런 선만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런 자연적 선 안에 있게 된 것을 그들은 부끄러워했다는 그런 묘사입니다. To “sew leaves together” is to excuse themselves; the “fig tree” is natural good; and to “make themselves girdles” is to be affected with shame. Thus spoke the most ancient people, and thus they described this posterity of the church, signifying that instead of the innocence they had formerly enjoyed, they possessed only natural good, by which their evil was concealed; and being in natural good, they were affected with shame.

 

 

217. 말씀에서 포도나무(the vine)는 영적 선(spiritual good), ‘무화과나무(the fig tree)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을 상징하기 위한 것임을 오늘날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 사라졌기 때문인데요, 그럼에도 이 표현들이 나오는 데들을 보면, 여전히 이런 의미를 뜻하거나 포함하고 있지요. ‘포도원(a vineyard)무화과나무와 관련, 주께서 비유들을 통해 하신 말씀들처럼 말입니다. 마태복음입니다. That the “vine” is used in the Word to signify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becaus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has been lost; nevertheless, wherever these expressions occur, they signify or involve this meaning; as also in what the Lord spoke in parables concerning a “vineyard” and a “fig tree”; as in Matthew: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21:19) Jesus seeing a fig tree in the way, came to it, but found nothing thereon save leaves only, and he said unto it, Let no fruit grow on thee henceforward forever; and presently the fig tree withered away, (Matt. 21:19)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그 어떤 선도, 심지어 자연적 선조차도 땅, 곧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에 나오는 포도나무무화과나무역시 유사한 의미입니다. by which is meant, that no good, not even natural good, was to be found upon the earth. Similar is the meaning of the “vine” and “fig tree” in Jeremiah: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렘8:12-13) Were they ashamed when they had committed abomination? Nay, they were not at all ashamed, and they knew not how to blush; therefore I will surely gather them, saith Jehovah; there shall be no grapes on the vine, nor figs on the fig tree, and the leaf hath fallen, (Jer. 8:12–13)

 

이 말씀은 모든 선, 곧 영적, 자연적 선이 사라져 버렸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너무도 타락한 나머지 심지어 부끄러워하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인데요, 마치 오늘날, 악 가운데 있어 자기들의 사악함에도 불구, 얼굴이 붉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그걸 자랑하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호세아입니다. by which is signified that all good, both spiritual and natural, had perished, since they were so depraved as to have lost even the sense of shame, like those at the present day who are in evil, and who, so far from blushing for their wickedness, make it their boast. In Hosea: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호9:10) I found Israel like grapes in the wilderness; I saw your fathers as the first ripe in the fig tree in the beginning. (Hos. 9:10)

 

요엘입니다. And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hall bear its fruit, the fig tree and the vine shall yield their strength. (Joel 2:22)

 

여기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가리킵니다. The “vine” here denotes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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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6, AC.207-210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Verse 6, And the woman saw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and that it was pleasant to the eyes, and a tree to be desired to give intelligence, and she took of the fruit thereof and did eat, and she gave also to her man [vir] with her, and he did eat.

 

※ 6절 속뜻

 

네 번째 후손, 곧 선대와 달리 사랑할 정도로 자아를 원했고, 그 결과 감각과 세상에서 배운 걸로 이해가 안 되면 비록 주님의 신성한 계시라 하더라도 완강하게 거부하던 이들 네 번째 후손에 이르자 모든 걸 거꾸로 보기 시작, 주님의 것들, 곧 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모든 주님 신앙과 그 교리들을 건강하고 균형 잡힌 시선이 아닌, 탐욕과 환상, 쾌락의 대상으로 보았고, 거기에 이들의 합리적 이성조차 동조함으로써 그만 선을 넘게 되었습니다.

 

 

207. 먹음직도 하고(Good for food)는 탐욕(cupidity), ‘보암직도 하고(pleasant to the eyes)는 환상(fantasy),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은 쾌락(pleasure)을 각각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다 본성(the own), 여자(woman)에게 속한 것들이며, ‘그도 먹은지라(the husband eating)는 이성의 동의(the consent of the rational)를 의미합니다. (AC.265) Good for food” signifies cupidity; “pleasant to the eyes,” fantasy; and “desirable to give intelligence,” pleasure: these are of the own, or “woman”; by the “husband eating” is signified the consent of the rational (n. 265).  

 

※ AC.265. ‘남편(the husband or man)이 합리적, 이성적 능력(the rational capacity)을 의미한다는 것이 본 장인 3장 6절에 보면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즉, 그도 동의했음을 의미합니다. 같은 내용이 158번 글, 사람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분명한데요, 거기 보면, 사람은 지혜와 지성(understanding)을 가진 존재인데요, 하지만 여기 나오는 ‘사람(the man)은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the ability to reason)에 머무를 뿐입니다. 지식의 나무,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합리적, 이성적 능력은 지적 이해(an intelligent understanding)를 모방하는 것, 혹은 그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 AC.158. 사람(man, 아담)이 내적 인간, 같은 말이지만, 지성과 지혜의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내가 본즉 한 사람(vir)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사41:28)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입니다.

 

※ 위 본문의 ‘사람’은 라틴어로 ‘비르(vir)입니다. 라틴어에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homo)라는 말이 따로 있지만, 호모에 비해 비르는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에도 보면은,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렘5:1)

 

여기 ‘정의를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을, ‘진리를 구하는 자’는 지성인을 각각 의미합니다.

 

 

208. 태고교회의 네 번째 후손 이야기인데요, 이들은 자기 사랑(self-love [amore proprio])에 빠져 유혹에 넘어갔고, 비록 계시라 할지라도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확인이 안 되면 계시 믿기를 언짢아하고 싫어했습니다. This was the fourth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o suffered themselves to be seduced by self-love [amore proprio] and were unwilling to believe what was revealed, unless they saw it confirmed by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 세상에서 경험하고 학습한 지식과 주님의 계시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 후자, 곧 주님의 계시 믿기를 꺼렸다, 내켜 하지 않았다는 말인데요, 이처럼 태고교회도 그 후손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 주님 사랑의 반대인 자기 사랑으로 경도되어 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209. 여기 사용된,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라는 표현은 저 태고 때 살던 사람들의 지니어스(genius)에 맞춘 표현인데, 특별히 의지(the will)와 관련해서입니다. 그들의 악이 콸콸 흘러나오기 시작한 게 바로 이 의지에서부터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이 나오는 데를 보면, 위 표현들은 의지보다는 이해(the understanding)와 관련되어 사용되고 있는데요, 이는 태고인들은 선에서 비롯된 진리(truth from good)를 가지고 있었지만, 홍수 후를 살았던 사람들은 진리에서 비롯된 선(good from truth)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The expressions here employed, as that “the tree was good for food, pleasant to the eyes, and desirable for giving intelligence,” are such as were adapted to the genius of those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having especial reference to the will, because their evils streamed out from the will. Where the Word treats of the people who lived after the flood, such expressions are used as relate not so much to the will as to the understanding; for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ruth from good, but those who lived after the flood had good from truth.  

 

※ 홍수 전 사람들은 그 DNA에 선을 타고났지만, 홍수 후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학습을 통해서만 선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10. 인간의 본성(man’s own)이라는 걸 이렇게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인간 본성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그리고 주님이나 말씀을 믿는 대신 자기 자신을 믿는, 끝으로 감각과 기억-지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즉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없거나 세상 경험과 배움에 비춰 볼 때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이 세 가지 태도로부터 샘처럼 솟아나는 모든 악과 거짓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그저 악과 거짓이 되며, 그 결과, 모든 걸 반대로 봅니다. 악한 걸 선으로 보며, 선한 걸 악으로 보고, 거짓된 걸 참으로 보며, 참된 걸 거짓으로 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없다 하고, 없는 걸 그들은 모든것이라 하지요. 증오를 사랑이라, 어두움을 빛이라, 죽음을 삶이라 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데요, 말씀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다리를 저는 사람들(the lame), ‘눈먼 사람들(the blind)이라고 합니다. 이런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 자체로 지옥이요, 저주받은 것이지요. What man’s own is may be stated in this way. Man’s own is all the evil and falsity that springs from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nd from not believing in the Lord or the Word but in self, and from supposing that what cannot be apprehended sensuously and by means of memory-knowledge [sensualiter et scientifice] is nothing. In this way men become mere evil and falsity, and therefore regard all things pervertedly; things that are evil they see as good, and things that are good as evil; things that are false they see as true, and things that are true as false; things that really exist they suppose to be nothing, and things that are nothing they suppose to be everything. They call hatred love, darkness light, death life, and the converse. In the Word, such men are called the “lame” and the “blind.” Such then is the own of man, which in itself is infernal and accur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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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6(D1)-주일예배(2516, 눅14,15-24), '주님의 큰 잔치를 맛보는 사람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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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6(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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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SMx16Q-jKo

 

 

 주님의 큰 잔치를 맛보는 사람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14:15-24)

 

 

만찬에서의 떡은 사랑의 선으로서 주님을 뜻하고, 포도주는 신앙의 진리로서 주님을 뜻하며, 동시에 인간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 두 가지가 교회의 본질이며,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비밀 10149)

 

 

※ 오늘 본문 역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본문입니다. 특히 23절 말씀,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은 교회들, 특히 본당이 큼지막하게 있는 교회들마다 대형 세로 표어에 써서 특히 전도와 선교, 복음 전파를 강조하는 그런 말씀이기도 하지요. 오늘도 우리에게 익숙한 본문을, 그러나 여전히 그 속뜻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우리는 갖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다들 너무 바빠 남의 잔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이웃에게 만찬을 베풀려거든 가까운 사람을 부르지 말고, 대신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를 먼저 부르라는 뜻일까요? 이 말씀에는 더 깊은 의미, 속뜻이 숨겨져 있는데요, 먼저 15절로 17절부터 보겠습니다.

 

15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여기서 잔치를 베푸는 집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잔치가 열리는 곳은 주님의 교회, 또는 천국이고요. 교회와 천국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마시는 것은 주님에게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고, 먹는 것은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진리와 선을 먹고 마셔야 주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은 겉으로는 생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악과 거짓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매일 같이 우리를 당신의 잔치에 초대하십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들 합니다. 본문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는데요,

 

18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9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20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첫 번째 사람은 밭을 샀기 때문에 잔치에 오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이 ‘밭을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한글 성경에는 ‘’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ground’로 되어 있습니다. ground는 밭으로도, ‘’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전자의 경우, 교회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교회라는 밭에 진리의 씨를 뿌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ground는 교회가 아니라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을 뜻하며, 그래서 밭이라고 번역하면 안 되고, 땅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이란 무엇입니까? 영적으로 높은 것은 천국에 속한 것이고, 낮은 것은 세상의 물질이나 명예 같은 세속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 밭을 산다는 것은 교회 안의 사람들이 영적인 것에는 뜻, 관심이 없고, 오직 세상 것만을 좇는, 세속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걸 그는 잔치에 갈 수 없다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 사람은 소의 겨리를 샀기 때문에 잔치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소의 겨리가 뭘까요? 겨리라는 것은 소가 밭을 갈 때 사용하는 도구들인데, 예를 들면 쟁기나 멍에 같은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멍에는 무슨 뜻일까요? 멍에는 사람들을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세상 욕망을 뜻합니다. 욕망을 좇는 일은 어찌 보면 자유롭고 행복한,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지만, 그러나 이 욕망이라는 것은 만족을 모릅니다. 그 결과, 세상의 욕망은 사람을 가두고 속박하는 감옥이며 멍에입니다. 한편, 주님이 지워주시는 진리의 멍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욕망에 매인 사람을 구원하는 멍에입니다. 그것을 멍에라고 부르는 이유는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진리로 자신을 강제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28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소의 멍에를 산 사람이나 앞에서 땅을 산 사람이나 영적으로는 비슷한 사람들이지요. 즉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 즐거움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 물론 밭을 샀기 때문에 보러 가고, 새로 산 소 다섯 겨리를 시험하는 일이 무조건 악한 일은 아닌, 그저 일상의 일이지만, 그러나 다른 날에도 할 수 있는 이런 일을 굳이 이 큰 잔치에 특별히 초대받은 날에 하고자 하는 걸로 보아, 그리고 미리 선 초청을 한 상태로 일정 조정할 여유가 이미 충분히 있었음에도, 이들이 이러는 것은 이들은 그냥 가기가 싫었던 것이며, 이 큰 잔치를 베푼 주인과 평소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구나 짐작해 봅니다.

 

그러면 세 번째 사람은 뭐라고 했나요? 장가를 가서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장가를 가는 것은 육신의 쾌락이나 세상 즐거움하고 결혼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이 역시 거 참 이유치고는...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이렇게 세상의 욕망에 빠져 삽니다. 그것에 대해 마태복음 24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7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마24:37-39)

 

노아의 홍수는 아담교회(태고교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인 노아교회(고대교회)가 세워질 때의 진통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에 사람들이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아담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이 주님이 아니라 세상의 욕망과 결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종들이 주인에게 돌아와 그대로 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1절 말씀입니다.

 

21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주님은 당신의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주인이 화를 냈다고 표현한 것은 인간에 대한 주님의 사랑, 또는 구원의 열정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은 누구일까요?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을 몸 불편한 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행하는 선이 진리를 바탕으로 한 온전한 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결핍이 있는 것이지요. 선과 진리는 서로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요, 선은 진리를 바탕으로 행해야 하고, 진리 또한 그 바탕에 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한 것은 주님께서 교회 밖 선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스스로 주님의 교회를 버렸기 때문입니다.

 

종들이 주인의 명에 따라 이들을 데리고 와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비어있는 곳이 있습니다. 종이 이 사실을 고하자 주인이 종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22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23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앞 절에서는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저들을 데리고 오라 하더니, 여기서는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이 ‘길과 산울타리 가’, 곧 길에서 만난 자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다를까요? 둘 다 진리 알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선을 올바르게 행할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이고, 울타리 근처에서 만난 사람들은 세상 거짓과 맞서 싸울 목적으로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울타리는 거짓과 맞서 싸우는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이웃을 올바르게 사랑하기 위해서거나 또는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워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고, 또한 악과 거짓과 싸워 이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과 울타리 근처에서 데리고 온 사람들은 모두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뜻합니다. 주님은 그런 순수한 사람들을 데리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며, 절대로 진리를 강요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속뜻은 이렇습니다. 새 교회가 처음 세워질 때의 모습은 마치 길에 나가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가진 사람들을 모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진리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극히 적고, 교세 또한 빈약합니다. 누구나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교회가 없어져 버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인간의 생각일 뿐이며, 주님께서 이 교회를 급하게 부흥시키실 때가 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우리는 모르고, 오직 주님만이 아십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미약하나마 이 교회를 유지시켜야 하는 사명을 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들이 주인에게 자리가 아직 비어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우리 새 교회인들이 ‘주님, 불과 몇 평도 안 되는 이 교회에 왜 이렇게 빈자리가 많습니까...’라고 하며 안타까워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때가 되면 주님께서 급하게 사람들을 모아 이 교회를 크게 부흥시키실 것입니다. 사람들을 강권하여 잔치에 데리고 오는 것은 바로 그때를 말합니다. 24절에서 주인이 말했습니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전에 청하였던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주님 당시에는 유대교회 사람들이고, 오늘날에는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주류 기독교인들인데, 특별히 그 가운데 겉과 속이 다르며, 저들이 말하는 믿음과 사랑이 따로 노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겉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지만, 속으로는 진리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자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잔치에 초대받았으나 아무도 응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보다 세상의 재물과 명성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며, 외적인 것, 곧 겉에 관한 것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내적인 것, 곧 속에 관한 것의 가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지상의 일에는 시력이 2.0, 3.0, 4.0에 가까웠으나 천국의 일에는 아주 깜깜, 장님이었기 때문이지요. 본문에는 그들을 땅을 산 사람, 소의 겨리를 장만한 사람, 장가를 간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참된 진리를 찾기 위해 ‘시내의 거리와 골목’, ‘길과 산울타리 가’를 헤메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잔치가 아직 끝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잔치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천국의 진리와 선으로 먹이고 입히시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주님이 부르실 때 우리는 기꺼이 항상 응하고 있을까요? 그동안 우리 모습을 보면, 주님이 베푸신 밥상과 세상이 차려놓은 밥상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자아와 세상에 속한 것들이 더 달콤해 보였기 때문이지요. 이와 관련된 말씀이 계시록 3장 15절에 있습니다. 거기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5)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의 상태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두 주인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이 그런 상태에 있습니다.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 믿고, 인애, 체어리티, 이웃 사랑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거나 마지못해 눈길 한번 주는 수준입니다. 우리 새 교회 교인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머리로는 진리를 아는데 행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지옥은 매 순간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때 자신의 힘으로 이기려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그간 경험을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의 것은 모두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지혜와 능력에 기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이 집요한, 매 순간의 시험들을 완벽하게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2:17)

 

주님의 말씀을 믿으시고 매일 같이 이기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5)

 

아멘

 

원본

2021-03-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1-2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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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4-5, AC.204-206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Verses 4, 5, And the serpent said unto the woman, Ye shall not surely die. For God doth know that in the day ye eat thereof, then your eyes shall be opened, and ye shall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 4, 5절 속뜻

 

주님 신앙을 주님의 퍼셉션과 계시가 아닌, 감각과 자아, 세상 학문과 배움으로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은 주님 기준이 아닌 자기 기준, 사람 기준으로 참과 거짓,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되어 하나님의 자리에 서게 되고, 이후 자기 맘대로 살아가려 할 것을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204.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Their 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는 신앙에 관한 것을 감각과 지식, 곧 자기 자신,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걸 기준 삼아 신앙에 관한 것을 헤아릴 경우, 분명히 말하지만, 오히려 신앙에 관한 게 잘못되었다 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as God, knowing good and evil)은 만일 그들이 그런 짓, 곧 스스로를 기준 삼아 그런 짓을 하면, 그들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양 스스로를 인도하려 할 것이라는, 즉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대신 오직 자기 힘으로만 살아가려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by eating of the fruit of the tree” signifies that if they were to examine the things of faith from what is of sense and knowledge [ex sensuali et scientifico], that is, from themselves, they would plainly see those things as if erroneous. And that they would be “as God, knowing good and evil,” denotes that if they did so from themselves, they would be as God, and could guide themselves.

 

 

205. 모든 구절에는 교회의 어떤 특별한 상태나 상태의 변화가 들어있습니다. 앞선 구절들에는 그들이 그렇게 기울어졌음에도 그들, 곧 그 당시 교회는 자신들의 상태가 주님 보시기에 불법이라는 걸 지각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는 반면, 이 구절들에는 막 시작된 의심, 곧 자신들이 볼 땐, 이들은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들인데, 합법적이지가 않다(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자신들의 감각과 세상에서 배운 걸로 봤을 땐, 자신들이 그동안 선대로부터 들어온 것들, 곧 주님과 천국, 이 세상에 관한 이야기들, 교리들이 좀 안 맞는 것 같다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자신들의 눈이 열렸다는, (사실은 정반대로 오히려 더 눈이 멀어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우리가 너무 교회 중심으로, 교리 중심으로만 살아왔구나. 실제 세상 지식과 감각 경험은 전혀 다른데...하는, 그리고 결국 이런 식의 자기 사랑, 이렇게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깊어지면서(at length, in consequence of the ascendancy of self-love), 그들은 이 정도면 우리 스스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주님과 같아질 수 있지 않을까?여기기 시작했다는 그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런 게 자기 사랑의 본질인데요, 이는 주님 따르는 건 꺼리고, 대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to be self-guided) 걸 더 선호하며, 믿음 관련한 일들을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컨설팅하기 위해 혼자 알아서 하는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Every verse contains a particular state, or change of state, in the church: the preceding verses, that although thus inclined they nevertheless perceived it to be unlawful; these verses, an incipient doubt whether it might not be lawful for them, since they would thus see whether the things they had heard from their forefathers were true, and so their eyes would be opened; at length, in consequence of the ascendancy of self-love, they began to think that they could lead themselves, and thus be like the Lord; for such is the nature of the love of self that it is unwilling to submit to the Lord’s leading, and prefers to be self-guided, and being self-guided to consult the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s to what is to be believed.  

 

※ 이 글 번역은 특별히 쉽지가 않아 여러 날 걸렸고, 이해를 돕기 위해 최대한 풀어 번역했습니다.

 

 

206.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된 사람들, 그리고 자기를 사랑하고 동시에 세상 배움에 탁월한 사람들, 이 둘 중 누가 더 대단한 믿음(a stronger belief)을 가진 걸까요? 그러나 사실은 누가 더 눈이 먼 걸까요? 그들에게 단지 질문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은 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기는 고사하고, 심지어 알지도 못하며, 영적, 천적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낯설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삶을 인정하지 않는데요, 그들은 스스로를 사라질 짐승과도 같은 존재라 믿으며, 주님도 인정하지 않고, 대신 오직 자신들과 자연만 숭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좀 신중하게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르기를, 어떤 최고의 존재(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가 만물을 다스리지만, 자신들은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감각 및 기억-지식과 관련 일들을 가지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을 입증할 때 사용하는 원리들(the principles)이 있는데요, 그들은 맘만 먹으면 온 우주를 앞에 놓고도 그럴 겁니다. 그들은 남에게 신(神, gods)처럼, 또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처럼 여겨지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만약 그들의 본성(their own) 가운데 없는 게 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그런 건 없다고, 다만 자신들의 본성 전부를 잃게 되면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될 거라고 대답들을 할 겁니다. Who have a stronger belief that their eyes are open, and that as God they know what is good and evil, than those who love themselves, and at the same time excel in worldly learning? And yet who are more blind? Only question them, and it will be seen that they do not even know, much less believe in, the existence of spirit; with the nature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they are utterly unacquainted; they do not acknowledge an eternal life; for they believe themselves to be like the brutes which perish; neither do they acknowledge the Lord, but worship only themselves and nature. Those among them who wish to be guarded in their expressions, say that a certain supreme existence [ens] of the nature of which they are ignorant rules all things. These are the principles in which they confirm themselves in many ways by things of sense and of memory-knowledge, and if they dared, they would do the same before all the universe. Although such persons desire to be regarded as gods, or as the wisest of men, if they were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it is not to have anything of their own, they would answer that it is to have no existence, and that if they were deprived of everything that is their own, they would be nothing.  

 

※ 조금이라도 영의 존재를 시인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사후 자기 영의 상태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사람에게 맨 먼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빛나는 성취를 이루었어도 정작 그가 자기 영에 대하여 전혀 무지하며, 관심조차 없고, 그저 철저히 세속적이며, 물질적이기만 하다면, 이 사람에겐 가장 시급한 질문이 바로 이 영, 다른 말로는 그의 본성과 관련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타고난 자연 상태로는 악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얼른 주님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 새로운 상태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그런 건 일종의 환상(a fantasy)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심(conscience)이라는 걸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건 그저 상상 속 산물로서, 천민들(賤民, the vulgar)을 통제하는 방법으로 써먹을 수 있는 거라고 할 겁니다.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는 아느냐는 질문에는, 그들은 씨익 비웃으며, 그런 건 광적인 쓰레기, 곧 종교 마니아들 간 사용하는 일종의 무슨 싸인 같은 거라고 할 겁니다.If they are asked what it is to live from the Lord, they think it a fantasy.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conscience is, they would say it is a mere creature of the imagination, which may be of service in keeping the vulgar under restraint. If asked whether they know what perception is, they would merely laugh at it and call it enthusiastic rubbish.

 

※ 스베덴보리 시절인 1750년대 유럽의 영적 분위기가 이랬나 봅니다. 이 하나하나의 사례가 모두 스베덴보리가 직접 겪었던 사례이지 싶은데요, 오늘날 한국 사회라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신교를 비롯, 거의 모든 기독교가 외적(外的, external) 사고, 즉 ‘겉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데, 말로는 ‘영성, 영성’ 하지만 그 사고의 뿌리는 ‘겉’에 있습니다. 내적(內的, internal) 사고, 즉 ‘속’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말해도 거의 이해를 못 합니다.

 

이런 게 그들의 지혜이며,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소위 ‘눈이 밝아지는 것’(open eyes)입니다. 이런 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gods)입니다. 이런 원리들, 그들 생각에는 대낮보다 더 밝은 원리들인데, 이런 원리들을 가지고 그들은 모든것의 출발점 삼으며, 이런 식으로 그들은 계속해서 신앙의 신비들에 대한 이성질(理性, reason)을 하는데요, 그 결과는 과연 어둠의 깊은 심연밖에 뭐가 더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이런 것이 바로 세상을 꾀는 ‘뱀’(the serpents)인 것입니다만,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은 아직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되는 건 본 장 14절로 19절에서 다루게 됩니다.Such is their wisdom, such “open eyes” have they, and such “gods” are they. Principles like these, which they think clearer than the day, they make their starting point, and so continue on, and in this way reason about the mysteries of faith; and what can be the result but an abyss of darkness? These above all others are the “serpents” who seduce the world. But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as yet of such a character. That which became such is treated of from verse 14 to verse 19 of this chap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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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2-3, AC.198-203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Verses 2, 3, And the woman said unto the serpent, We may eat of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But of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God hath said, Ye shall not eat of it, neither shall ye touch it, lest ye die.

 

※ 2, 3절 속뜻

 

태고교회 선조들로부터 밝히 계시되어 내려온 주님 신앙에 관한 선과 진리에 대해, 주님으로 말미암은 퍼셉션이 아닌, 감각과 세상 학문, 지식을 가지고 들여다보려 하는 것은 주님이 금하신 바, 만일 그런 짓을 하면, 그동안 주님 주신 모든 지혜와 지성이 사라질 것입니다.

 

 

198. 동산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는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revealed), 계승된 선과 진리이며,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 그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은 주님께 속한 신앙의 선과 진리인데, 이는 그들이 자신들한테서 배워서는 안 되는(were not to learn from themselves) 것입니다. ‘만지지도 말라(not to touch it)는 금지(a prohibition)입니다. 그들 자신이나 감각과 기억-지식(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 et scientifico])에 속한 걸 가지고 감히 주님께 속한 신앙의 선과 진리 생각하는 행위를 금하는 것이지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lest ye die)는 그랬다가는 신앙, 즉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지혜와 총명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is the good and tru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the “fruit of the tree which is in the midst of the garden, of which they were not to eat” i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which they were not to learn from themselves; “not to touch it” is a prohibition against thinking of the good and truth of faith from themselves, or from what is of sense and memory-knowledge [sensuali et scientifico]; “lest ye die” is because thus faith, or all wisdom and intelligence, would perish.

 

 

199.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가 태고교회로부터 그들에게 계시, 계승된 선과 진리, 즉 신앙에 관한 지식(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한데요, 앞서 천적 인간, 곧 태고교회를 다루던 창2:16에서는 동산의 나무(the tree of the garden)라 한 반면, 여기서는 대신 그들이 먹을 수 있는 동산 나무의 열매(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fruit of the tree of which they might eat” signifies the good and truth of faith revealed to them from the most ancient church, or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t is said to be the “fruit of the tree of the garden of which they might eat,” and not the “tree of the garden,” as before when treating of the celestial man, or the most ancient church (Gen.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창2:16)

 

※ 우리말 개역 개정에서는 위 창2:16 번역을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라 하여 원전에는 없는 ‘열매’를 첨가했습니다. 원전에는 ‘동산 각종 나무’인데요, 이런 속뜻을 알 길이 없었던 번역자들은 ‘나무를 먹는다고?’ 하면서 이 부분을 원전 그대로 번역하기가 굉장히 어색했을 것입니다.

 

위 창2:16 본문의 ‘동산 나무’(The tree of the garden)는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퍼셉션(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이며, 이 선과 진리는 퍼셉션의 산물이기 때문에(which good and truth, because they are from that source), 여기서 ‘열매’(fruit)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열매’는 자주 이 선과 진리를 의미합니다. The “tree of the garden,” as it is there called, is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which good and truth, because they are from that source, are here called “fruit,” and are also frequently signified by “fruit” in the Word.

 

 

200. 앞서 창2:9에서는 동산 중앙에(in the midst of the garden) 있는 나무는 생명나무이지 지식의 나무가 아니라고 하더니, 여기서는 지식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라고 하는 이유는, 동산 중앙(the “midst” of the garden)이라고 하는 게 가장 내적인(the inmost), 가장 깊은 내면을 상징하기 때문인데요, 천적 인간, 즉 태고교회의 가장 깊은 내면은 이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 곧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었던 반면, 여기 이 사람, 천적 영적 인간(a celestial spiritual man)이라고 하는, 혹은 그 후손이라고 하는 이 사람한테서는 신앙이 동산의 중앙’, 즉 가장 깊은 내면이었기 때문입니다. 태곳적 사람들의 퀄리티(quality)를 아주 제대로 묘사하는 건 불가능한데요, 왜냐하면, 오늘날은 그들에 대해서 알려진 게 전혀 없고, 그들의 지니어스(genius)는 지금까지 발견된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정말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지니어스에 대한 어떤 걸 좀 전달, 알려드리고자 할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그들은 선을 통해 진리를 알았고, 사랑을 통해 신앙이라는 게 뭔지를 알았다는 걸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세대가 막을 내렸을 때, 그다음에 일어난 세대는 완전히 다른 지니어스를 가졌는데요, 그들은 이전 세대처럼 선을 통해 진리를 알거나, 사랑을 통해 신앙이라는 게 뭔지를 아는 대신, 선이 무엇인지를 진리를 가지고 습득하거나 신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사랑에 관한 걸 아는, 즉 선과 사랑을 지식으로 습득, 학습으로 아는 그런 세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 거의 대부분이 지식(knowledge [quod scirent])밖에는 거의 가진 게 없었습니다. 이것이 홍수 후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한 생긴 변화였지요. The reason why the “tree of knowledge” is here spoken of as being “in the midst of the garden,” although previously (Gen. 2:9), the tree of lives was said to be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not the tree of knowledge, is that the “midst” of the garden signifies the inmost; and the inmost of the celestial man, or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the “tree of lives,” which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whereas with this man, who may be called a celestial spiritual man, or with this posterity, faith was the “midst” of the garden, or the inmost. It is impossible more fully to describe the quality of the men who lived in that most ancient time, because at the present day it is utterly unknown, their genius being altogether different from what is ever found with anyone now. For the purpose however of conveying some idea of their genius, it may be mentioned that from good they knew truth, or from love they knew what is of faith. But when that generation expired, another succeeded of a totally different genius, for instead of discerning the true from the good, or what is of faith from love, they acquired the knowledge of what is good by means of truth, or what is of love from the knowledges of faith, and with very many among them there was scarcely anything but knowledge [quod scirent]. Such was the change made after the flood to prevent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201. 이렇게 홍수 이전에 존재했던 태고인들의 이런 지니어스가 오늘날엔 발견되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이 본문에 들어있는 참된 의미, 곧 속뜻을 제대로 설명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릅니다. 천국에서는 온전한 이해가 가능한데요, 천적이라고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angelic spirits)은 홍수 전에 거듭난 태고인들과 같은(same) 지니어스를 지닌 반면, 영적이라고 하는 천사들과 천사적 영들은 홍수 후 거듭난 사람들과 유사한(similar) 지니어스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비록 두 경우 모두 무한히 다양하지만 말입니다. Seeing therefore that such a genius as that of the most ancient people anterior to the flood is not found and does not exist at the present day, it is no easy matter to explain intelligibly what the words of this passage in their genuine sense imply. They are, however, perfectly understood in heaven, for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called celestial are of the same genius as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regenerate before the flood; while the angels and angelic spirits who are termed spiritual are of a similar genius to the regenerate after the flood, although in both cases with indefinite variety.

 

 

202.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교회는 지식의 나무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즉 신앙에 속한 걸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배우는 일을 삼가야(to abstain from learning) 할 뿐 아니라, 그 나무를 만지는 것조차, 즉 신앙에 관한 걸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생각하는(not even allowed to think) 것조차 허용될 수 없었던 그런 캐릭터였는데요, 안 그러면, 그들은 천적 삶에서 영적 삶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적 천사들의 삶 또한 그런데요, 그들이 더욱 내적, 더욱 천적일수록, 신앙이라고 이름하는 경험도, 영적인 걸 약간 접해보는 경험도 그들에게는 일절 불허됩니다. 이 신앙이라는 말을 남들을 통해 들을 경우, 그들에게는 신앙 대신 사랑의 퍼셉션이 있는데요, 이게 어떻게 다른 건지는 오직 그들만 알지요. 이렇게 무엇이든 신앙에 속한 것을 그들은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기원(derive from), 시작합니다. 그들은 신앙에 관한 그 어떤 이성질하는 말(理性질, any reasoning about faith) 정말 굉장히 못 견뎌 하며, 그와 관련된 그 어떤 기억-지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데요,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랑으로 퍼셉션, 곧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주님으로 말미암는 퍼셉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퍼셉션으로 어떤 일이 과연 그런지 안 그런지를 즉시 압니다. 그런 까닭에, 어떤 신앙에 관한 말을 듣게 되면, 그들은 그저 단순히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하는데요, 그들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걸 지각, 즉시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의미, 이유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was a celestial man, was of such a character as not only to abstain from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that is, from learning what belongs to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but was not even allowed to touch that tree, that is, to think of anything that is a matter of faith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lest they should sink down from celestial life into spiritual life, and so on downward. Such also is the life of the celestial angels, the more interiorly celestial of whom do not even suffer faith to be named, nor anything whatever that partakes of what is spiritual; and if it is spoken of by others, instead of faith they have a perception of love, with a difference known only to themselves; thus whatever is of faith they derive from love and charity. Still less can they endure listening to any reasoning about faith, and least of all to anything of memory-knowledge respecting it; for, through love, they have a perception from the Lord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from this perception they know instantly whether a thing is so, or is not so. Therefore when anything is said about faith, they answer simply that it is so, or that it is not so, because they perceive it from the Lord.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Lord’s words in Matthew: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마5:37) Let your communication be Yea, yea; nay, nay; for whatsoever is more than these cometh of evil. (Matt. 5:37)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지식의 나무 열매를 만지지 못하게 하셨다는 말의 의미, 속뜻입니다. 그들이 그걸 만지면, 그들은 악 가운데 있게 될, 즉 결과적으로 그들은 죽게(die)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특별한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천적 천사들은 다양한 주제에 관해 다른 천사들처럼 서로 대화합니다. 다만 천적 언어(天的, a celestial language)로 하지요. 이 언어는 사랑으로 되어 있고, 사랑에서 나오며, 영적 천사들의 언어보다 더욱 형용, 형언할 수 없는 언어입니다. This then is what was meant by their not being allowed to touch the fruit of the tree of knowledge; for if they touched it, they would be in evil, that is, they would in consequence “die.” Nevertheless the celestial angels converse together on various subjects like the other angels, but in a celestial language, which is formed and derived from love, and is more ineffable than that of the spiritual angels.

 

 

203. 영적 천사들도 신앙에 관한 대화를 하는데요, 이들은 신앙에 관한 것들을 심지어 지성과 이성, 그리고 많이 배운 사람들의 언어로 확실히 보여 주지만, 그러나 그들은 신앙과 관련된 일들에 이런 걸로 무슨 자기들만의 결론을 내리는 짓은 절대로 안 합니다. 그런 짓을 하는 자는 악 가운데 있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또한 신앙에 관한 모든 진리의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 부여받는데요, 비록 천적 천사들의 것과 같은 그런 퍼셉션은 아닐지라도 말입니다. 영적 천사들의 퍼셉션은 일종의 양심(conscience) 같은 건데요, 이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력을 갖는, 마치 천적 퍼셉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건 아니고, 단지 영적 퍼셉션일 뿐인 그런 겁니다. The spiritual angels, however, converse about faith, and even confirm the things of faith by those of the intellect, of the reason, and of the memory, but they never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matters of faith on such grounds: those who do this are in evil. They are also endowed by the Lord with a perception of all the truths of faith, although not with such a perception as is that of the celestial angels. The perception of the spiritual angels is a kind of conscience which is vivified by the Lord and which indeed appears like celestial perception, yet is not so, but is only spiritual per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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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1, AC.194-197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Verse 1,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which Jehovah God had made; and he said unto the woman,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of the garden?

 

※ 1절 속뜻

 

태고교회 세 번째 후손에 이르러서는 이들은 선조들에게는 당연했던 주님의 계시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계시들일지라도 자기들의 감각과 세상 학문, 철학 등으로 확인, 검증을 하고자 했습니다.

 

 

194. 여기 (the serpent)은 인간이 신뢰하고 있는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 of man in which he trusts)를 말합니다. 여기 들짐승(the wild animal of the field)은 앞에서처럼 겉 사람의 모든 애정(every affection of the external man), ‘여자(the woman)는 인간의 본성(man’s own)을 말하며, 뱀이 하고 있는 말,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는 그들이 의심하기 시작했다(began to doubt)는 말입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세 번째 후손으로서, 그들은 계시된 것들(things revealed)에 관하여 그것이 과연 그런지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어야만(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믿기 시작했습니다. 본 절과 다음 절은 그들의 첫 번째 상태, 즉 의심의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By the “serpent” is here meant the sensuous part of man in which he trusts; by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here, as before, every affection of the external man; by the “woman,” man’s own; by the serpent’s saying, “Yea, hath God said, Ye shall not eat of every tree?” that they began to doubt.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third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began not to believe in things revealed unless they saw and felt that they were so. Their first state, that it was one of doubt, is described in this and in the next following verse.

 

 

195. 태고인들(The most ancient people)은 인간의 모든것(all things in man)을 짐승과 새에 비유하는(compare to) 대신 실제로 그렇게 명명하였으며(denominated),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그들의 스피킹은 홍수 후 고대교회(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에까지도 이어져, 이후 선지자들한테까지 전해졌습니다. 사람 안의 감각적인 것(The sensuous things in man)을 그들은 (serpents)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뱀이 땅에 가까이 붙어 지내는 것처럼, 감각적인 것들(sensuous things) 역시 몸하고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의 신비(the mysteries of faith)에 관한, 감각적 증거에 기초한 이성 활동(reasonings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즉 신앙의 신비를 감각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일련의 이성적 활동을 뱀의 독(the poison of a serpent)이라 하였고,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the reasoners themselves)이라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많은 걸 감각, 즉 보이는 걸(visible things) 가지고 하기 때문에, 이르기를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하는 것입니다. 이 보인다는 것은 땅에 속한 거, 육적인 거, 일상적인 거, 자연적인 거(things terrestrial, corporeal, mundane, and natural)를 말합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did not compare all things in man to beasts and birds, but so denominated them; and this their customary manner of speaking remained even in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nd was preserved among the prophets. The sensuous things in man they called “serpents,” because as serpents live close to the earth, so sensuous things are those next the body. Hence also reasonings concerning the mysteries of faith, founded on the evidence of the senses, were called by them the “poison of a serpent,” and the reasoners themselves “serpents”; and because such persons reason much from sensuous, that is, from visible things (such as are things terrestrial, corporeal, mundane, and natural), it is said that “the serpent was more subtle than any wild animal of the field.”

 

[2] 그리고 또 시편에 보면, 이성 놀이(reasonings)를 통해 사람을 유혹하는 자들에 대해 이르기를, And so in David, speaking of those who seduce man by reasonings:

 

뱀 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에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 (시140:3) They sharpen their tongue like a serpent; the poison of the asp is under their lips. (Ps. 140:3)

 

3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4그들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그들은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5술사의 홀리는 소리도 듣지 않고 능숙한 술객의 요술(주1)도 따르지 아니하는 독사로다 (시58:3-5) They go astray from the womb, speaking a lie. Their poison is like the poison of a serpent, like the deaf poisonous asp that stoppeth her ear, that she may not hear the voice of the mutterers, of a wise one that charmeth charms [sociantis sodalitia]1. (Ps. 58:3–5)

 

현자(賢者)가 하는 말이나 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조차 하지 않으려는 그런 캐릭터를 가진 사람들의 이성 놀이, 이성질(Reasonings)을 가리켜 여기서는 뱀의 독(the poison of a serpent)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대인들 사이에서 뱀이 귀를 막는다(The serpent stoppeth the ear)는 말이 하나의 속담이 되었지요. 아모스입니다. Reasonings that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 men will not even hear what a wise one says, or the voice of the wise, are here called the “poison of a serpent.” Hence it became a proverb among the ancients, that “The serpent stoppeth the ear.” In Amos:

 

19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20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암5:19-20) As if a man came into a house, and leaned his hand on the wall, and a serpent bit him. Shall not the day of Jehovah be darkness and not light? even thick darkness, and no brightness in it? (Amos 5:19–20)

 

손을 벽에 대는 것(The hand on the wall)은 자기가 힘의 근원(self-derived power)이라는 것, 그리고 감각적인 것들을 신뢰한다는 의미이며, 여기에 나오는 실명(失明, the blindness)이 이런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The “hand on the wall” means self-derived power, and trust in sensuous things, whence comes the blindness which is here described.

 

[3] 예레미야입니다. In Jeremiah:

 

22애굽의 소리가 뱀의 소리 같으리니 이는 그들의 군대가 벌목하는 자 같이 도끼를 가지고 올 것임이라 2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황충보다 많아서 셀 수 없으므로 조사할 수 없는 그의 수풀을 찍을 것이라 24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여 북쪽 백성의 손에 붙임을 당하리로다 (렘46:22-24) The voice of Egypt shall go like a serpent, for they shall go in strength, and shall come to her with axes as hewers of wood. They shall cut down her forest, saith Jehovah, because it will not be searched; for they are multiplied more than the locust, and are innumerable. The daughter of Egypt is put to shame; she shall be delivered into the hand of the people of the north. (Jer. 46:22–24)

 

애굽(Egypt)은 신성한 것(Divine things), 주님께 속한 일을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 곧 세상에서 학습한 지식으로 헤아리는 것(reasoning)을 말합니다. 그런 짓(reasonings)을 가리켜 뱀의 소리(the voice of a serpent)라 하며, 그로 인해 야기된 실명(the blindness)북쪽 백성(the people of the north)이라고 한 것입니다. 욥기입니다. Egypt” denotes reasoning about Divine things from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Such reasonings are called the “voice of a serpent”; and the blindness thereby occasioned, the “people of the north.” In Job:

 

16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7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욥20:16-17) He shall suck the poison of asps; the viper’s tongue shall slay him. he shall not see the brooks, the flowing rivers of honey and butter. (Job 20:16–17)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Rivers of honey and butter)은 영적, 천적인 것들(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인데, 이는 단지 이성적이기만 한 사람들은(by mere reasoners) 볼 수 없는 것들입니다. 위 본문에서는 이성적이기만 한 것(reasonings)을 일컬어 독사의 독(the poison of the asp), ‘뱀의 혀(the viper’s tongue)라고 합니다. 뱀에 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14, 15절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Rivers of honey and butter” are thing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cannot be seen by mere reasoners; reasonings are called the “poison of the asp” and the “viper’s tongue.” See more respecting the serpent below, at verses 14 and 15.

 

 

196. 고대에는 계시된 것들에서보다 감각적인 것들에서 더 확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serpents)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은 사정이 더욱 안 좋은데요, 지금 사람들은 자기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see and feel)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대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과학 지식이라는 걸 가지고 더욱 자신들을 그런 불신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이며, 그 결과 스스로를 더욱 더 깊이 눈먼 상태 가운데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눈멀게 하는지, 그 결과 나중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지, 이 사람들은 천국에 관한 일들(heavenly matters)을 감각과 기억-지식, 그리고 철학에 관한 걸(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로 자신들의 결론을 내리며, 그리고 말씀에서 자주 귀머거리 뱀(deaf serpents)이요, ‘날아다니는 뱀(the flying serpents)으로 언급되는 사람들인데, 이 경우가 훨씬 더 치명적이지요, 이런 게 사람들에게 알려지도록 우리는 영에 대해 그들이 믿는 게 뭔지 한 가지 예를 들고자 합니다. In ancient times those were called “serpents” who had more confidence in sensuous things than in revealed ones. But it is still worse at the present day, for now there are persons who not only disbelieve everything they cannot see and feel, but who also confirm themselves in such incredulity by knowledges [scientifica] unknown to the ancients, and thus occasion in themselves a far greater degree of blindness. In order that it may be known how those blind themselves, so as afterwards to see and hear nothing, who form their conclusions concerning heavenly matters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who are not only “deaf serpents,” but also the “flying serpents” frequently spoken of in the Word, which are much more pernicious, we will take as an example what they believe about the spirit.

 

[2] 감각적인 사람, 즉 오직 감각의 증거(the evidence of his senses)만을 믿는 사람은 영의 존재(the existence of the spirit)를 부인합니다. 그가 영을 볼 수 없기 때문인데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내가 그걸 느낄 수 없으니까 당연한 거 아냐? 만약 내가 그걸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면, 그땐 당연히 존재하는 거지. 그걸 내가 왜 모르겠어?(It is nothing because I do not feel it: that which I see and touch I know exists.)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기억-지식의 사람, 곧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결론을 내리는 사람은 말하기를, ‘영이라는 게, 말하자면 눈앞에서 허공 중에 사라지는 수증기나 열기, 혹은 그 밖의 무슨 과학적 실체가 아니면, 영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동물에게도 일종의 몸, 감각 및 이성과 유사한 뭔가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동물은 죽지만, 인간의 영은 산다고들 하네요.이런 식으로 그들은 영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The sensuous man, or he who only believes on the evidence of his senses, denies the existence of the spirit because he cannot see it, saying, “It is nothing because I do not feel it: that which I see and touch I know exists.” The man of memory-knowledge [scientificus], or he who forms his conclusions from memory-knowledges says, What is the spirit, except perhaps vapor or heat, or some other entity of his science, that presently vanishes into thin air? Have not the animals also a body, senses, and something analogous to reason, and yet it is asserted that these will die, while the spirit of man will live. Thus the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3]철학자들의 경우입니다. 인류의 대부분보다 훨씬 예리한 이들 철학자들도 영에 대해 말할 때는 결과적으로 자신들도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말하는데요, 이들은 서로 논쟁하기를, 물질이나 유기물, 혹은 그 밖의 것들에 관한 그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도 이 영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면서 다투기 때문이며, 그래서 이들은 영에 대해 머리를 쥐어짜 너무 추상화한 나머지(so abstract it from their ideas that) 영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라는 게 결국은 그냥 사라져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그중에서 좀 나은 사람은 영은 생각(thought)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생각에 대한 그들의 소위 이성적이라는 주장을 보면, 생각에서 모든 실재(substantiality), 알맹이를 다 분리하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그들은 결국 몸이 끝나면 영도 사라져야 하는 결론에 도달하지요. 결국 감각에 속한, 기억-지식에 속한, 그리고 철학에 속한 걸 가지고 이성적 사고를 한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영의 존재를 부인하며, 영과 영적인 것들에 관하여 하는 모든 말을 전혀 믿지 않지요. 마음이 단순한 사람들(the simple in heart)은 그렇지 않은데요, 그들은 영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기를, 자기들은 그게 존재한다는 걸 안다고 해요. 주님 말씀하시기를, 자기들은 사후에도 살 것이라 하셨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소멸시키는 대신, 주님의 말씀으로 그것을 생생하게 하지요. Philosophers also, who would be more acute than the rest of mankind, speak of the spirit in terms which they themselves do not understand, for they dispute about them, contending that not a single expression is applicable to the spirit which derives anything from what is material, organic, or extended; thus they so abstract it from their ideas that it vanishes from them, and becomes nothing. The more sane however assert that the spirit is thought; but in their reasonings about thought, in consequence of separating from it all substantiality, they at last conclude that it must vanish away when the body expires. Thus all who reason from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deny the existence of the spirit, and therefore believe nothing of what is said about the spirit and spiritual things. Not so the simple in heart: if these are questioned about the existence of spirit, they say they know it exists, because the Lord has said that they will live after death; thus instead of extinguishing their rational, they vivify it by the Word of the Lord.

 

 

197. 태고인들, 천적 인간들(celestial men)이었지요, 이런 태고인들 가운데서 은 세심함, 신중함(circumspection)을 의미했으며, 또한 감각 파트(the sensuous part) 의미했지요. 이를 통해 그들은 신중함을 훈련, 부상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에 관한 이러한 의미는 제자들에게 하신 주님 말씀으로도 알 수 있는데요,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celestial men, by the “serpent” was signified circumspection, and also the sensuous part through which they exercised circumspection so as to be secure from injury. This signification of a “serpent” is evident from the Lord’s words to his disciples: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마10:16) Behold, I send you forth as sheep into the midst of wolves; be ye therefore prudent as serpents, and simple as doves. (Matt. 10:16)

 

그런가 하면 또 광야에 세워진 놋뱀(the brazen serpent)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요. 놋뱀은 주님의 감각 파트를 상징하는데요, 주님만이 홀로 천적 인간이시며, 홀로 모두를 돌보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지요. 그래서 이 놋뱀을 쳐다본 모두가 산 것입니다. And also from the “brazen serpent” that was set up in the wilderness, by which was signified the sensuous part in the Lord, who alone is the celestial man, and alone takes care of and provides for all; wherefore all who looked upon it were preserved.  

 

※ 놋뱀 에피소드는 아래 민수기 본문에 나옵니다.

 

4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5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6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7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8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9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민21:4-9)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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