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2:19-20)

 

AC.142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짐승(beasts)은 의지에 속한 것들을, ‘(fowls)는 이해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그가 그것들의 성질(quality)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며, 그가 그것들에게 이름을 주니라(giving them names)는 그가 그 성질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선한 애정들과 인식한 진리들의 성질을 그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기의 것, 곧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졌는데, 이것은 앞에서와 같은 말로 표현된,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라는 것입니다. By “beasts” are signified celestial affections, and by “fowls of the heavens,” spiritual affections; that is to say, by “beasts” are signified things of the will, and by “fowls” things of the understanding. To “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 is to enable him to know their quality, and his “giving them names” signifies that he knew it. But notwithstanding that he knew the quality of the affections of good and of the knowledges of truth that were given him by the Lord,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which is expressed in the same terms as before—that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해설

 

이 단락은 창2:19-20의 장면, 곧 짐승들과 새들이 아담 앞으로 나오고 그가 이름을 붙이는 장면을 ‘지식의 충만함과 내적 결핍의 대비’로 읽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을 분명히 합니다. 인간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 앎이 그의 중심을 바꾸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먼저 상징의 구조가 명확히 정리됩니다. 짐승들은 천적인 애정들, 곧 의지에 속한 것들이고, 하늘의 새들은 영적인 애정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입니다. 이는 창세기 1장에서 이미 등장했던 상응이지만, 여기서는 천적 인간의 내부에서 ‘의지와 이해가 어떤 내용들로 채워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끌어 가시니’와 ‘이름을 주니라’라는 표현은 인식의 성숙을 뜻합니다. 이름을 준다, 붙인다는 것은 단순한 분류가 아니라, ‘본질과 질을 분별하여 파악했다’는 뜻입니다. 즉,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한 애정들과 인식된 진리들이 무엇인지, 그것들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 이 구절은 무지나 결핍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장이 뒤따릅니다. 그렇게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 그는 여전히 자기의 것, 곧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는 인간의 핵심 문제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중심의 방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아무리 많은 선과 진리를 인식해도, 그것들이 주님께로 다시 돌아가 결합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려는 성향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다시 같은 결론으로 돌아옵니다.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는 말은, 외부의 대상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proprium과 결합할 형식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의지와 이해의 내용들은 충만하지만, 그것들이 자기성(自己性)이라는 proprium 속에서 하나로 작동할 구조가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로써 다음 단계, 곧 깊은 잠과 갈빗대의 사건이 필연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AC.142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를 충분히 인식할 수 있지만, 그 인식만으로는 자기 중심성을 해소하지 못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proprium’이 보다 분명한 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AC.142, 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AC.142.심화 1. ‘이름을 준다 = 성질(quality)을 안다’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bring them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them)는, 그가 그것들의 성질(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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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AC.142, 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AC.142.심화 2. ‘천적 애정들’, ‘영적 애정들’ ‘짐승’(beasts)은 천적 애정들을 뜻하고, ‘하늘의 새’(fowls of the heavens)는 영적 애정들을 뜻하는데 윗글은 AC.142 본문 내용인데요, 여기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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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랑이 바르고

 

 

AC.142, 심화 3, ‘사랑이 바르고’

AC.142.심화 3. ‘사랑이 바르고’ 바로 위에 ‘천적 인간은 먼저 사랑이 바르고’에서 이 ‘사랑이 바르고’가 무슨 뜻인가요? 여기서 ‘사랑이 바르다’는 말은, 단순히 감정이 착하다거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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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3, 창2:19-20, ‘성경이 끊임없이 동물의 언어로 말하는 이유’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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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창2:18,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본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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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5/1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9, ‘성도여 다 함께’, 74, ‘오 만세 반석이신입니다.

 

오늘은 2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7절로 18, AC 글 번호로는 128번에서 141번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참고로 잠깐 창2 중간 배경 설명이 조금 필요하여 말씀드립니다.

 

창세기 21절로 17절까지는, 태고교회 사람 안에 형성된 ‘천적 상태’와 그 생명의 질서를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는 장면은, 단순히 창조 활동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과의 싸움과 분리가 멈추고 사랑과 평안이 자리 잡은 상태를 뜻합니다. 이어지는 에덴동산과 네 강의 묘사는, 천적 인간 안에 흐르는 지혜와 지성, 이성과 기억 지식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모든 것은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며, 가장 바깥의 기억 지식까지도 위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동산에 두어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는 것은, 인간이 그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있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명령은, 인간이 계속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 곧 퍼셉션으로 접해야 하며, 자기 자신으로 선악을 판단하려는 독립적 proprium 쪽으로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보여 줍니다. 전체적으로 이 첫 단락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천적 인간의 질서와 평안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반면 창세기 218절로 끝 절인 25절까지는, 인간 안에 proprium, 곧 ‘자기처럼 느껴지는 것’이 어떻게 허락되기 시작하는지를 보여 주는 부분입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은 단순한 외로움 문제가 아니라, 인간 안에 이제 ‘자기 스스로 느끼고 선택하고자 하는 구조’가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돕는 배필’을 만드시는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외적 배우자 이전에, 인간 안에 형성되는 proprium의 시작으로 설명합니다. 이어서 아담이 짐승과 새들에게 이름을 짓는 장면은, 인간이 자기 안의 다양한 애정들과 상태들을 분별하고 인식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돕는 배필’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결국 여자의 창조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인간 안에 자기감과 자유의 구조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지막의 ‘둘이 한 몸을 이룬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씀은, 아직 이 proprium이 완전히 자기중심으로 굳어지지 않았고, 주님의 질서 안에서 순수하게 결합되어 있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전체적으로 이 둘째 단락은, 천적 인간 안에 자유와 자기감의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과정, 곧 이후 타락의 가능성과 동시에 참사랑의 가능성이 함께 열리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비록 17, 18, 두 구절뿐이지만, 이 두 구절이 두 큰 부분, 곧 전, 후반의 마침과 시작에 걸쳐 있어서, 그리고 해설 및 심화를 통한 많은 깊은 설명이 필요한 본문이어서 여전히 원고량이 제법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7-18)

 

이 본문을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돕는 배필

 

이라는 키워드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128,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의 속뜻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8 세상적이며 육적인 인간은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보고 믿을 수 있도록 감각적인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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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9, 창2:17, ‘인간은 어떤 원리로 살아가는 존재, 그 출발점이 주님인가 자신인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9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전제로 삼는 원리에 따라 지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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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0, 창2:17, ‘원래 주님의 것을 자기 것이라 하는 자들의 상태와 결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30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 지식을 자기의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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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1, 창2:18-25 개요, '창2 후반부 : 자기 자신에게로 기울어진 태고교회의 후손들'(AC.131-137)

창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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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proprium, own)(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절) AC.132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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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 창2:18-25 개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 그럼에도 자신의 프로프리움으로’(19-20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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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창2:18-25 개요, ‘여자의 창조 : 프로프리움의 형성’(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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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5, 창2:18-25 개요, ‘결합되어 있으되 동일하지 않은 상태’(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사람의 프로프리움에 결합, 그것들이 하나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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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innocence)가 이 프로프리움(proprium, own) 안에 주입되어, 그것이 여전히 용납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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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7, 창2:18-25 배경, ‘창1, 2, 3을 읽는 법’

AC.137 창세기 처음 세 장은 일반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불립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그 교회가 가장 번성하였던 상태, 곧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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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 창2:18, ‘proprium에 의한 내적 방향 변화의 시작’(AC.138-141)

창2:18-25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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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창2:18, ‘혼자 사는 것’(dwell alone)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에 있던 이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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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0, 창2:18,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사람의 proprium을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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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1, 창2:18, ‘인간의 세 가지 유형으로 본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 사람의 proprium(man’s own)에 대하여는, 육적, 세상적 인간과,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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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오늘은 특별히 AC 본문 리딩보다는 전체 범위에서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및 ‘돕는 배필’, 그리고 오늘 전체를 관통하는 ‘proprium’(프로프리움)을 키워드로 각각 요약, 아래 요약본을 리딩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먼저 ‘선악과’입니다.

 

AC.128-130에서 ‘선악과’는 단순히 어떤 금지된 과일이나 도덕 시험의 상징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을 지혜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인간이 주님과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받으려 하지 않고, 자기 감각과 기억 지식과 자기 이성으로 영적인 것을 판단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곧 ‘보아야 믿겠다’, ‘이해되어야 믿겠다’, ‘내 기준에 맞아야 받아들이겠다’라는 내적 자세 자체가 선악과를 먹는 행위입니다.

 

AC.128은 특히 이 상태를 매우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세상적 인간은 감각과 학문을 신앙의 기준으로 삼고, 천적이고 신적인 것까지 감각으로 파악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수록 그는 오히려 영적인 것에 대해 눈이 멀어지고, 결국 영원한 생명 자체도 믿지 않게 됩니다. 여기서 선악과의 핵심은 ‘지식’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판단의 중심에 두는 욕망’입니다. 반대로 주님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워지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다음에 이성과 지식을 사용하여 그것을 확증합니다. 즉, 같은 지식과 같은 이성도 ‘주인이 되느냐, 종이 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AC.129는 이 문제를 ‘원리(principle)의 문제로 더 깊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세운 전제를 중심으로 사고하며, 그 전제가 거짓이어도 모든 지식과 추론은 그것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원리를 붙잡은 사람은 영적인 것에 결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이고 천적인 것은 감각과 상상으로 붙잡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 참된 질서는, 먼저 주님과 말씀을 출발점으로 삼고, 그다음에 학문과 이성과 기억 지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학문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유익하고 즐거운 것이라 말합니다. 다만 문제는 ‘누가 중심인가’입니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면 죽음이고, 주님이 중심이면 생명입니다. 이것이 선악과 사건의 본질입니다.

 

AC.130에서는 이 상태가 더 심각하게 발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사람은 감각과 기억 지식을 자기의 ‘에덴동산’으로 삼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자기의 ‘에덴’으로 삼습니다. 그의 ‘동쪽’은 더 이상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원래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강처럼 흘러와야 할 지식과 이성이, 이제는 자기 사랑을 섬기는 체계로 뒤틀립니다. 그래서 기억 지식은 ‘애굽’이 되고, 거짓 추론은 ‘앗수르’가 되며, 결국 지혜처럼 보이는 마지막 상태는 말씀에서 ‘마술’이라고 부르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자기 지식과 자기 이성으로 스스로 진리의 근원이 되려는 상태’를 뜻합니다. 바로가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만들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주님에게서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돌리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AC.128-130이 말하는 ‘선악과’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가려 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며, 자기 지식과 자기 이성을 생명의 근원 자리에 앉히려는 것, 바로 그것이 선악과를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점점 영적 생명을 잃어버리는 ‘죽음’입니다. 반대로 사람은 말씀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 아래에서 이성과 지식을 사용할 때에만 참된 생명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반복해서 말하는 가장 근본적인 경고입니다.

 

 

다음은 ‘혼자 사는 것’입니다.

 

AC.138-139에서 ‘혼자 사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외로움이나 사회적 고립이 아니라, ‘누구의 인도를 받으며 살 것인가’라는 영적 방향의 문제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2:18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를 매우 깊은 내적 의미로 읽는데, 여기서 ‘혼자’란 인간이 더 이상 주님께만 인도받는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고자 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곧 ‘나도 스스로 판단하고 싶다’, ‘나도 내 힘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아주 미세한 내적 방향의 변화가 시작된 상태입니다. 이것이 에덴의 인간 안에서 처음 생겨나는 ‘독립 욕구’이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혼자 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 역시 단순한 외적 타인이 아니라, 인간 안에 형성되는 ‘proprium’(프로프리움, 라틴, 영어로는 own), 곧 자기성(自己性)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 proprium은 처음부터 악으로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며 주님의 인도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도록 허락된 구조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단순히 외부 힘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처럼 실제로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기감(自己感)의 자리’입니다. 문제는 이 proprium이 끝까지 ‘주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남느냐, 아니면 ‘진짜 내 것’으로 굳어지느냐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돕는 배필이던 것이, 중심 자리를 차지하면 결국 주님을 대신하는 독립 욕구가 됩니다.

 

심화에서는 이 상태를 ‘내적 방향의 변화’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원래 천적 인간은 자연스럽게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인간 안에 ‘나도 중심이 되고 싶다’, ‘나도 근원이 되고 싶다’는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아직 노골적 반역은 아니지만, 시선이 ‘주님으로부터 받는 방향’에서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고 싶은 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결핍 때문이 아니라 자유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자유 안에서 사랑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자기 쪽으로 향할 가능성 자체도 허락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유 때문에 proprium도 허락됩니다. 주님은 인간을 억지로 복종시키지 않으시고, 끝까지 자유 안에서 사랑하도록 이끄십니다. 그래서 심지어 독립하고자 하는 가능성조차 제거하지 않으십니다.

 

AC.139에서는 ‘혼자 사는 것’이 다시 한번 더 깊게 재정의됩니다. 놀랍게도 고대에는 ‘홀로 거한다’는 표현이 오히려 천적 인간의 가장 복된 상태를 뜻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의 침해를 받지 않고, 오직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거하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주님의 교회를 가리켜 ‘홀로 있다’고 할 때, 그것은 고립이 아니라 ‘악의 질서와 섞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발람의 예언인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는 말씀도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여기서 ‘민족들’은 악을 뜻하며, 홀로 거함은 세상적 자기중심 질서와 분리되어 오직 주님께 속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더 이상 이런 ‘홀로 있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고, ‘민족들 가운데에’, 곧 자기 자신과 세상의 질서 가운데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인간은 먼저 원하고, 그다음에 그것이 허락됩니다.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제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가기를 원하면 그 길도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따라서 AC.138-139에서 ‘혼자 사는 것’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원래 참된 ‘홀로 있음’은 주님 안에서만 사는 천적 평안의 상태였지만, 인간은 그 상태를 떠나 자기 자신 안에 홀로 서고 싶어 했고, 바로 거기서 proprium과 이후의 타락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입니다.

 

AC.140-141에서 ‘돕는 배필’은 단순히 남자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주어진 여성이 아니라, 인간 안에 허락된 proprium, 곧 ‘자기처럼 느껴지는 자기성’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돕는 배필’이 사람의 proprium이라고 직접 밝히며, 특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proprium이 허락되었는가’입니다. 이 시점의 인간은 아직 ‘바른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허락된 proprium은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지되 실제로는 주님께 열려 있는 자기감’의 형태였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주님을 대신하는 독립적 중심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자기 삶처럼 느끼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매개 구조’입니다.

 

AC.140은 이 점을 매우 섬세하게 설명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도 자유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에게 proprium을 허락하시되, 그것이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닫힌 독립성이 되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느끼게 하는 자기감’으로 기능하도록 하십니다. 바로 이 때문에 ‘그와 함께 있는 듯한’, ‘그의 것 같은’이라는 뜻의 ‘a help as with him’(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 개역 개정)이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완전히 자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외부 힘도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을 자기처럼 느끼며 살아가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인간을 주님에게서 떼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유롭게 주님께 응답하도록 돕는 구조입니다.

 

심화에서는 이 proprium의 변화가 ‘새로운 proprium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기성이 ‘주님께 열린 방향으로 재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원래 proprium은 자기중심적이며,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으려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재형성될 때, 같은 자기감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여전히 ‘내가 한다’고 느끼지만, 그 생명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더 알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 혹은 ‘천적 proprium’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돕는 배필’은 인간 안에 형성되는 새로운 자기성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41에서는 proprium이 육적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 안에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가 정리됩니다. 육적 인간에게 proprium은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proprium을 잃으면 자기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지옥적입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어느 정도 알고 고백하지만, 아직 그것이 완전히 마음의 퍼셉션으로 내려가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 proprium이 실제 생명처럼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심을 ‘퍼셉션’, 곧 직접적인 지각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는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그런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proprium이 주어집니다.

 

proprium은 더 이상 자기 자신에게 닫힌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들로 충만한 proprium입니다.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행복, 평안이 모두 그 안에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바로 이런 proprium 안에 있으며, 그래서 가장 높은 평안과 고요 속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 천사들을 proprium 없이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다스리신다는 점입니다. 결국 AC.140-141이 말하는 ‘돕는 배필’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인간의 완성은 proprium의 제거가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의 생명으로 재형성되는 데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절대적 근원으로 삼는 proprium은 지옥이 되지만,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받아들이는 proprium은 천국이 됩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단순한 보조자가 아니라, 인간이 자유 안에서 주님과 결합할 수 있도록 허락된 가장 깊은 자기성의 구조입니다.

 

 

다음은 끝으로 ‘proprium’입니다.

 

AC.128-141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심 주제는 ‘proprium’, 곧 ‘자기의 것’, ‘자기성’(自己性)입니다. 이 본문들은 단순히 ‘교만하지 말라’는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이 왜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처럼 느끼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자기감이 어떻게 타락과 천국의 갈림길이 되는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는 단순한 악행 이전에,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느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128 이하에서는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받는 질서’와 ‘내 것이라 주장하는 상태’가 대비됩니다. 인간이 감각과 기억 지식과 이성을 주인으로 삼아 말씀을 판단하기 시작할 때, 그는 점점 ‘자기 proprium’을 중심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선악을 스스로 알겠다’는 상태이며, 에스겔의 바로가 ‘이 강은 내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하는 모습과 연결됩니다.

 

AC.130 부근에서는 이 proprium의 본질이 더욱 날카롭게 드러납니다. 인간은 본래 받은 것일 뿐인데, 그것을 자기 소유처럼 붙들기 시작합니다. 기억 지식도, 이성도, 심지어 진리까지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순간, 인간은 영적 질서를 거꾸로 세웁니다. 원래 질서는 ‘주님 지혜 지성 이성 기억 지식’의 흐름인데, proprium은 맨 아래 단계가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선언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황폐의 시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단순한 실수나 약점이 아니라, ‘생명을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상태’라고 봅니다. 그래서 지옥의 본질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AC.138-140에 이르면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돕는 배필’을 설명하면서, 그것이 바로 인간의 proprium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설명입니다. 왜냐하면 proprium은 앞에서는 타락과 자기중심의 근원처럼 보였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인간에게 허락된 어떤 필요한 구조처럼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모든 proprium이 동일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반드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느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도 사랑도 책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에게 ‘자기처럼 느껴지는 자리’를 허락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proprium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근원이 아니라 ‘마치 자기 것처럼 느껴지게 허락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AC.140은 ‘a help as with hi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이것이 ‘그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proprium은 두 방향으로 갈라집니다. 하나는 ‘내가 근원이다’라고 굳어지는 타락한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것을 내 삶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자리’가 되는 proprium입니다. 후자의 proprium은 인간이 주님의 인도를 실제 자기 삶으로 체험할 수 있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돕는 배필’은 단순한 외적 조력자가 아니라, ‘주님과의 인도 관계를 매개하는 자기성’입니다. 인간은 이 자기감(自己感)을 통해 주님의 생명을 자기 삶처럼 경험합니다. 만약 proprium이 전혀 없다면, 인간은 살아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 기계처럼 될 것입니다. 반대로 proprium이 자기 폐쇄적 중심으로 굳어지면, 인간은 주님과 분리됩니다. 따라서 문제는 proprium 자체가 아니라, 그 방향과 귀속입니다.

 

심화에서는 이 변화가 ‘proprium이 하나 더 추가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자기성이 재형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라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전에는 자기 안에서 생명이 나온다고 느꼈다면, 이제는 자기 안에 흐르는 생명이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퍼셉션으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새 proprium은 자기감의 제거가 아니라, 자기감 안에 새로운 생명 질서가 스며드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도 여전히 기뻐하고 선택하고 사랑하지만, 그 중심은 자기 자신에게 닫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heavenly proprium’, 곧 ‘천적 proprium’입니다.

 

마지막으로 AC.141proprium을 세 인간 유형 안에서 결정적으로 정리합니다. 육적 인간에게 proprium은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proprium 외에는 실재를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으면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지옥적입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알기는’ 하지만, 아직 그것이 입술의 고백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의 proprium은 여전히 실제 생명처럼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심을 퍼셉션으로 압니다. 그래서 그는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proprium이 주어집니다. 마치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proprium 안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과 행복과 평안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바로 이런 proprium 안에 있으며, 주님은 그들의 proprium을 통해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AC.141의 결론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인간은 자기 것을 붙들수록 죽은 proprium 안에 갇히고, 자기 것을 주님께 돌릴수록 오히려 더 살아 있는 자기성을 받습니다. 결국 인간의 완성은 proprium의 제거가 아니라, proprium이 주님의 것으로 충만해지는 데 있습니다.

 

proprium이란,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자기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여자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내 자식’으로 사랑합니다. 비록 말로는 ‘이 아이는 주님의 자녀이며, 저는 다만 청지기일 뿐입니다’ 고백하더라도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주님이 기뻐하신 것은 그가 거기서 이 proprium 시험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백 세에 낳은 아들을 ‘내 아들’이라 움켜쥐지 않고,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기꺼이 주님께 돌려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 것, 자기 자식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9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7:9-11)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각 사람에게 와있는 악한 영들조차 그 사람의 악한 기억이 마치 자기 것인 줄 알고 그 사람을 보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런 게 바로 proprium입니다. 이 proprium이 있음에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런 장치가 없어야 주님을 사랑하겠다는 것은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 들려주신 이 모든 내용, 모든 이야기가 저희에게, 그리고 저에게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근본 중에서도 근본이 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창2돕는 배필’ 이야기를 무슨 결혼 본문 정도로만 알고 살아왔습니다. 오늘 그 속뜻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오, 주님, 저를 새롭게 하여 주세요. 그리고 제게도 주신 이 proprium 역시 거듭나 부디 천적 인간 상태로 들어가게 해 주세요.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5-10(D1)

 

 

2650, 5, 창2.5, 2026-05-10(D1)-주일예배(창2,17-18, AC.128-141),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돕는 배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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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5/17, 창2:19-22, AC.142-155), ‘선악과, 혼자 사는 것, 돕는 배필’

※ 오늘(2026/05/17)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30, ‘전능하고 놀라우신’, 찬75, ‘주여 우리 무리를’입니다. 오늘은 창2 여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9절로 22절, AC 글 번호로는 142번에서 155번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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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5/03, 창2:11-17, AC.114-127, 성찬), ‘누리되 소유하려 하지 말고, 오직 퍼셉션으로만’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8,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73, ‘내 눈을 들어 두루 살피니’입니다. 오늘은 창2 네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1절로 17절,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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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41

인간의 proprium 관해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그것이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 영적 인간에게서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 그리고 천적 인간에게서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를 설명하면서 무수히 많은 것을 말할 있습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는 그의 proprium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신의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앞에서 말한 것처럼 proprium 잃으면 자기가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그의 proprium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를 주시고,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도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러한 앎은 마음으로 믿는 것이라기보다 입술로 고백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은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분별합니다.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자신의 proprium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proprium 주시는데, 그것은 선하고 참된 것에 관한 모든 퍼셉션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 안에 있으며, 동시에 가장 높은 평화와 평온 가운데 있습니다.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proprium 다스리시며, 그들의 proprium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proprium이야말로 가장 참된 천적인 자체이며, 반면 육체적 인간의 proprium 지옥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proprium 관해서는 뒤에서 말하겠습니다. Innumerable things might be said about mans own in describing its nature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with the spiritual man, and with the celestial man. With the corporeal and worldly man, his own is his all, he knows of nothing else than his own, and imagines, as before said, that if he were to lose this own he would perish. With the spiritual man also his own has a similar appearance, for although he know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wisdom and understanding, and consequently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yet this knowledge is rather the profession of his lips than the belief of his heart. But the celestial man discerns that the Lord is the life of all and gives the power to think and to act, for he perceives that it is really so. He never desires his own, nevertheless an own is given him by the Lord, which is conjoined with all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and with all happiness. The angels are in such an own, and are at the same time in the highest peace and tranquility, for in their own are those things which are the Lords, who governs their own, or them by means of their own. This own is the veriest celestial itself, whereas that of the corporeal man is infernal. But concerning this own more hereafter.

 

해설

AC.141은 지금까지 이어진 proprium의 설명 가운데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앞에서는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고 그것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인다고 했지만, 이제 스베덴보리는 proprium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성질을 가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 영적 인간, 천적 인간에게서 proprium이 각각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구별하며, 마지막에는 천사들의 상태까지 연결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proprium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악한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먼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는 proprium이 그의 전부입니다. 그는 자기 proprium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것은 AC.123에서 이미 설명된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도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가 멸망할 것처럼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인간이 자기의 삶을 자기의 것으로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보다, proprium을 자기 존재와 생명의 전부로 여기고 그 너머에 있는 생명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지혜와 이해를 주시고, 따라서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까지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의 한계도 매우 솔직하게 말합니다. 그것을 알고는 있지만 아직 마음으로 믿는 보다 입술로 고백하는 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이 위선적으로 말한다는 뜻이라기보다,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아직 천적 인간의 퍼셉션처럼 그의 생명 전체에서 직접 지각되는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AC.123에서 천적 인간은 퍼셉션으로 인정하고 영적 인간은 말씀에서 배워 인정한다고 구별했던 내용이 여기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납니다. 그는 주님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각하고 행동할 능력도 주님께서 주신다는 것을 단지 배워서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AC.139와의 차이가 선명해집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상태로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지만, 참된 천적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이 proprium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의 proprium을 원하지 않는데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proprium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proprium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퍼셉션 및 모든 행복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proprium 원하지 않는 proprium 전혀 갖지 않는 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온 독립적인 proprium을 추구하지 않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 proprium을 주십니다. AC.132부터 반복되어 온 허락된 proprium이라는 표현이 이제 훨씬 구체적인 내용을 갖기 시작합니다.

 

천사들에 대한 설명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천사들도 이러한 proprium 안에 있으면서 가장 높은 평화와 평온을 누립니다. 그 까닭은 그들의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표현입니다. 천사에게 proprium이 없다고 하지 않고, 천사의 proprium 안에 주님의 것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없애고 천사를 대신하여 생각하고 행동하시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proprium을 다스리시며 그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주님의 인도와 인간 또는 천사의 고유한 삶은 서로를 제거하는 관계가 아니라, 주님의 것이 proprium 안에 있으면서 그 proprium을 통하여 삶이 이루어지는 관계로 묘사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proprium가장 참된 천적인 자체라고까지 말합니다. 반면 육체적 인간의 proprium은 지옥적이라고 합니다. 이 대조를 보면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그것을 언제나 악이나 자기 사랑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proprium이 누구의 지배 아래 있으며 그 안에 무엇이 있는가입니다. 육체적 인간에게서는 proprium이 자기 존재의 전부가 되어 지옥적인 성질을 띠지만, 천적 인간과 천사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다스리십니다. 같은 proprium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도 그 성질은 정반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AC.141은 그래서 지금까지 열어 두었던 질문에 상당한 답을 줍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된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지만, 그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으며 주님께서 그 proprium을 통하여 그들을 인도하십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인간과 천사에게 자기 자신의 삶처럼 경험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 자신이 마지막에 이 proprium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말하겠다고 했으므로, 여기서 자유와 생명의 유입에 관한 교리 전체를 미리 완성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독자가 붙들어야 할 핵심은 proprium 있느냐 없느냐보다 proprium 안에 무엇이 있으며 누가 그것을 다스리는가라는 구별입니다. (AC.141)

 

 

 

AC.140, 창2:18, ‘돕는 배필 -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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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네 사는 오랜 신앙 지인의, 미국에서 박사 학위 중인, 그러면서 지역 교회에서는 부사역자로, 그리고 함께 간, 역시 박사 학위 중인 아내와 미국 가서 얻은 아이와 함께 열심히 살던 아들의, 뇌출혈 및 그로 인한 수술, 특히 로봇 수술, 그리고 현재 재활 치료 중이라는 소식을 아내를 통해 전해 들었습니다. 아들도 아들이지만, 미국의 살인적인 의료비가 먼저 떠올랐는데요... 이 아들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정말 성실한 귀한 사람이요, 신앙인입니다. 무슨 말로 지인들께 위로의 말씀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정말 진국, 참으로 알토란 같은 신앙인들에게 이런 청천벽력 같은 불행이 찾아오는 이유가 뭘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을 당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일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나요?

 

 

이런 소식은 정말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더구나 목사님처럼 그 청년의 삶과 성품을 직접 아시는 분에게는 단순한 ‘안타까운 사건’이 아니라, 거의 자기 일처럼 가슴에 들어오는 일이실 것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젊고 성실하고, 신앙도 진지하고, 학문과 교회 섬김까지 함께 감당하며 살아가던 부부에게 갑작스러운 뇌출혈이라니요. 거기다 낯선 미국 땅에서의 재활과 의료비 문제까지 겹치면, 인간적으로는 정말 ‘왜 이런 일이 이런 사람에게?’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실 성경도, 스베덴보리도, 이 질문 자체를 이상한 질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순간은 대개 바로 이런 자리입니다. ‘악한 자는 잘되는데 왜 선한 자에게 이런 일이 오는가?’, ‘왜 주님은 막지 않으셨는가?’, ‘신앙이 있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 말입니다. 시편도 그렇고, 욥기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그렇고, 심지어 제자들조차도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 죄 때문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인간은 고통 앞에서 반드시 의미를 묻게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문제를 다룰 때, 먼저 아주 중요한 원칙 하나를 붙듭니다. 곧 ‘주님은 누구에게도 악이나 재앙 자체를 보내시는 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섭리는 본질적으로 사랑과 구원만을 향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질병, 사고, 붕괴, 죽음 같은 것은 ‘주님이 직접 내려치는 형벌’이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한 인간 세계 전체의 질서 속에서 허용되는 일들입니다. 육체 세계는 이미 질병과 사고와 불완전성이 존재하는 세계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중력의 영향을 안 받지 않듯이, 신앙인이라고 해서 육체적 취약성에서 완전히 제외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그다음입니다. 주님은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일어난 이후에는 그것을 통해 영원한 선을 이끌어내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섭리론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은 현재의 몇 달, 몇 년만 보지만, 주님은 영원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철저히 무너지는 일처럼 보여도, 훗날 영원한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지요.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깊은 고난을 통과할 때, 이전에는 열리지 않던 내면이 열리는 경우를 자주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고난이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뇌출혈 자체가 좋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의 고통은 언제나 비극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평온과 성공만으로는 결코 배우지 못하는 어떤 깊이를 고난 속에서 배우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단지 ‘하나님을 안다’ 수준이었다면, 이제는 존재 전체로 매달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전에는 자기 능력과 계획 속에서 살았다면, 이제는 하루하루 생명 자체를 의탁하게 됩니다. 이전에는 머리로만 이해하던 사랑이, 이제는 실제 공동체와 돌봄과 눈물 속에서 경험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삶은 ‘지상 수명 몇십 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현대인은 모든 것을 이 세상 성공과 건강 기준으로 판단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진짜 삶은 영원 속에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지상에서의 고난은 그 자체만으로 최종 평가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이 현실 고통을 가볍게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재활의 두려움도 실제이고, 가족의 눈물도 실제이며, 의료비 부담도 실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한 사람의 영혼을 놓치지 않고 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시선입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를 읽다 보면, 주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일수록 더 깊은 내적 싸움을 허락받는 경우들이 자주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 더 깊은 선과 진리가 형성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함부로 당사자 앞에서 직접 꺼낼 말은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설명보다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실패한 이유도, 너무 빨리 해석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고난의 현장에서는 교리보다 먼저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지인분들께 전하실 말도, 너무 ‘의미 설명’ 중심일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오히려 조용하고 따뜻하게, ‘얼마나 놀라셨겠습니까’, ‘매일이 얼마나 무겁고 두려우시겠습니까’, ‘멀리서나마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재활의 모든 과정 가운데 붙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정도의 말이 더 깊이 들어갈 가능성이 큽니다. 때로는 신학적 정답보다, ‘함께 아파해 주는 존재’ 자체가 주님의 위로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 마음속에 떠오른 ‘미국 의료비’ 걱정도 사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사랑의 반응입니다. 그건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제 삶을 보는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결코 현실 고통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현실의 두려움과 피곤함과 생계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다룹니다. 그러니 지금 목사님이 느끼시는 답답함과 안타까움 역시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다만 이런 순간, 그리스도인이 붙드는 마지막 희망은 결국 이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 사람을 붙들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결과를 모르고, 회복 정도도 모르고, 미래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주님의 섭리는 단 한 순간도 인간에게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사람이 완전히 무너져 자기 힘으로 설 수 없게 될 때, 오히려 가장 깊은 곳에서 주님의 붙드심이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손이 비어야 비로소 주님의 손을 느끼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결국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일을 당할 때 해야 하는 가장 깊은 일은, 설명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지면서도 주님 손을 놓지 않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그 곁에서, 함부로 이유를 단정하지 않고, 조용히 함께 버텨주는 것이고요.

 

 

 

SC.82, ‘지구 나이 45억 년 : 현 지구 문명 1만 년 = 24시간 : 0.2초’

우주에 백만 개의 지구가 있다고 하자. 그 각각의 지구에 3백만 명의 사람이 6천 년간 2백 세대를 내려왔다고 할 때 사람, 즉 영 한 명당 3평방 큐빗씩 잡아도 우리 지구를 다 채우지 못할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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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80, ‘교회 소개 문구’

창2:15의 ‘경작하며 지키게’를 다룬 AC.122-124 본문들을 보며, 특히 ‘영적 인간’의 경우에 대한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도 언젠간 주님의 허락으로 본격적인 교회 소개를 하며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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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40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 인간의 proprium 의미한다는 것은 proprium 본질과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는 교회의 사람은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proprium 허락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 그러한 proprium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고 것입니다. That bya help as with himis signified mans own, is evident both from the nature of this own, and from what follows. As however the man of the church who is here treated of was well disposed, an own was granted him, but of such a kind that it appeared as it were his own, and therefore it is saida help as with him.

 

해설

AC.140AC.138에서 제시한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proprium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구별이 처음 나타납니다. 여기서 다루는 교회의 사람은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지만,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실제로 소유하는 자기 생명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proprium이었습니다.

 

이 설명은 AC.139의 마지막 문장과 직접 이어집니다.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인간으로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욕구에는 이미 악의 방향이 들어 있었지만, AC.140은 이들이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지금 다루는 상태를 완전히 타락한 인간의 상태로 앞당겨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당시 상태에 맞는 proprium을 허락하십니다.

 

proprium의 성격을 보여 주는 핵심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것으로 경험되는 어떤 것이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AC.124에서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AC.135에서도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0은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 자체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성격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이로써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과 나는 이것을 것으로 느끼며 살아간다는 인간의 경험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할 중요한 실마리가 생깁니다.

 

이 점에서 그를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이 표현의 모든 세부를 풀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는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과 별개의 독립적인 생명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초점은 인간에게 주님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생명 근원이 생겼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인간이 자기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상태가 어떻게 허용되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122부터 계속되어 온 주님의 자기의 의 문제에도 중요한 빛을 던집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요구를 단순히 끊어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실제로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믿는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이제 조금씩 볼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proprium을 해석할 때 특히 중요합니다. 인간이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곧바로 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140에서 다루는 사람은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게도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자기의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의 근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있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구별의 전체 의미는 이어지는 설명을 더 읽은 뒤 확정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AC.140AC.132에서 시작된 허락된 proprium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은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실제적인 자기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인간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proprium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삶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관계가 앞으로 갈빗대와 여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어떻게 더 밝혀지는지를 계속 따라가야겠습니다. (AC.140)

 

 

 

AC.141, 창2:18, ‘육체적·영적·천적 인간의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인간의 proprium에 관해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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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창2:18, ‘혼자 거하다 -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을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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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을 혼자 거하는(dwell alone)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교회에서도 그들이 이방 민족들을 몰아낸 혼자 거하는 것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말씀에서는 때때로 주님의 교회가 혼자(alone) 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에서는, In ancient times those were said todwell alonewho were under the Lords guidance as celestial men, because such were no longer infested by evils, or evil spirits. This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also by their dwelling alone when they had driven out the nations. On this account it is sometimes said of the Lords church, in the Word, that she isalone,as in Jeremiah: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ly, saith the Lord, which hath neither gates nor bar; they dwell alone. (Jer. 49:31)

 

신명기에서는, In the prophecy of Moses: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And still more clearly in the prophecy of Balaam: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백성은 홀로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Num. 23:9)

 

라고 합니다. 여기서 민족들(nations) 악들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천적 인간이 되거나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지 않고, 유대교회처럼 여러 민족 가운데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원했기 때문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라고 것입니다. 원하는 사람은 이미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가 원하는 것이 그에게 허락됩니다. wherenationssignify evils.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disposed to dwell alone, that is, to be a celestial man, or to be led by the Lord as a celestial man, but, like the Jewish church, desired to be among the nations. And because they desired this,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for he who desires is already in evil, and it is granted him.

 

해설

AC.139AC.138에서 설명한 혼자(alone)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분명해지는 것은 혼자가 본래 부정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사람들을 혼자 거하는사람들이라 했습니다. 그들이 혼자 거한다는 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고립되어 산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된 천적 인간의 상태와도 잘 연결됩니다. AC.84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싸움이 그친다고 했고, AC.87에서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39에서 말하는 혼자 거함은 외적인 고독이 아니라 악의 침입과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께 인도받는 내적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는 오히려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던 가장 번성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가 유대교회에서도 표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을 몰아내고 혼자 거하는 모습은 주님의 교회가 악으로부터 분리되어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서는 홀로 사는 국민을 말하고,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는 모습을 말하며, 민수기의 발람의 예언에서는 백성은 홀로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나 지리적 고립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거함이 주님의 교회가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인용합니다.

 

특히 민23:9민족들(nations)이 여기서는 악들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민족 자체를 악하게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의 속뜻에서 민족들이 악들을 나타내므로, ‘홀로 산다는 것은 악들과 뒤섞여 그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현실의 특정 민족이나 종교 집단과의 분리를 정당화하는 말씀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것은 교회의 내적 상태입니다.

 

이제 이 설명을 창2:18에 적용하면 매우 중요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문자만 읽으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에서 혼자가 좋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139에 따르면 본래 혼자 거하는 은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를 받는 좋은 상태였습니다. 문제는 그 상태 자체가 좋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더 이상 그 상태를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인간으로 혼자 거하기보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천적 상태 자체를 좋지 않다고 판정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139은 그들이 이미 다른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AC.132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다시 말해 혼자가 나빠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혼자 거하는천적 상태를 원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의 원하는 사람은 이미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가 원하는 것이 그에게 허락됩니다라는 문장은 이 변화의 심각성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넣어 주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인간 쪽에서 주님의 인도만을 원하지 않는 욕구가 생겼고, 그 욕구 자체가 이미 악의 방향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인간이 원하는 것을 강제로 없애어 천적 상태에 붙들어 두시는 대신 그것이 허락되는 가운데 인간을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바로 그 과정에서 앞서 말한 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AC.139는 창2:18혼자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번호입니다. ‘혼자는 고독이나 결핍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본래 주님의 인도 아래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그 상태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창2:18의 전환점은 혼자 있는 인간에게 무엇이 부족했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를 이상 원하지 않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찾아야 합니다. (AC.139)

 

 

 

AC.140, 창2:18, ‘돕는 배필 -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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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 창2:18, ‘혼자와 돕는 배필 - 인간이 원하는 proprium’ (AC.138-141)

창2:18-25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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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2:18)

 

AC.138

혼자(alone)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 인도받기를 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를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 인간의 proprium 의미하며, 이것은 뒤에서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rib built into a woman)라고 합니다. Byaloneis signified that he was not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d to be led by self and the world; by ahelp as with himis signified mans own, which is subsequently called arib built into a woman.

 

해설

AC.138부터는 AC.132에서 미리 요약했던 창2:18의 속뜻을 구체적으로 풀기 시작합니다. 먼저 혼자(alone)는 단순히 곁에 다른 사람이 없는 외로운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여기서 혼자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창2:18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는 이 문맥에서 사회적 고독의 문제보다 먼저, 주님의 인도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에게 속한 어떤 것으로도 살아가기를 원하는 인간의 상태를 다룹니다.

 

이 설명은 AC.131부터 이어져 온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AC.132에서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AC.133에서는 주님께서 먼저 그에게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지만 그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다고 했으며, AC.134에서는 마침내 그가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138혼자는 지금까지 설명된 이 상태를 창2:18의 한 표현 안에서 다시 짚어 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그를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해석입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마련하시는 장면이지만, 지금 다루는 속뜻에서는 인간이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 proprium이 중심에 놓입니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남성과 여성 가운데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돕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인간에게 proprium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C.138은 이 proprium을 뒤에 나오는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rib built into a woman)와도 직접 연결합니다. AC.134에서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장면 전체가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을 묘사한다고 했는데, 이제 그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2:18그를 돕는 배필과 창2:21-23여자로 지어진 갈빗대는 서로 떨어진 두 표상이 아니라 동일한 proprium의 문제를 이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만 왜 하필 갈빗대이며, 그것이 여자로 지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으므로 다음 번호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기서 돕는 배필proprium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중요한 질문을 낳습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것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2:18에서는 바로 그 proprium에 해당하는 것이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원했던 proprium을 주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다루셔서 인간의 삶 가운데 둘 수 있게 하시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AC.138은 아직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앞의 개요에서는 이미 몇 가지 중요한 단서가 주어졌습니다. AC.134에서는 인간이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는다고 했으며, AC.135에서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AC.136에서는 다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것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주어진 proprium을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를 허용하시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여기서 여자를 곧바로 proprium의 고정된 상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창2:18-23의 특정한 문맥입니다. AC.103에서 확인했듯이 말씀의 표현은 그것이 놓인 주제와 문맥을 떠나 기계적인 일대일 대응표처럼 다룰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가 주제이므로 그를 돕는 배필여자로 지어진 갈빗대가 그 proprium을 묘사합니다. 이후 다른 문맥에서 여자가 등장한다고 해서 언제나 같은 의미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138에서 지금 붙들어야 할 것은 세 가지 표현을 하나의 흐름 안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혼자는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그를 돕는 배필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며, proprium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로 묘사됩니다. 이제 남는 질문은 그를 돕는 배필이 왜 proprium을 의미하는지, 갈빗대가 왜 proprium을 나타내는지, 그리고 그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과정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입니다. 이 질문들은 앞질러 답하기보다 이어지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며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38)

 

 

 

AC.137, 창2:18-25 배경,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 천적 인간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후

AC.137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그 처음 시기부터 멸망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태고교회가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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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7

창세기의 처음 장은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교회는 처음 시기부터 멸망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합니다. 장의 앞부분은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던 가장 번성한 상태를 다루며, 여기서는 이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후손들을 다룹니다. 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treat in genera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called man [homo] from its first period to its last, when it perished; the preceding part of this chapter treats of its most flourishing state, when it was a celestial man; here it now treats of 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 and of their posterity.

 

해설

AC.137은 지금까지 읽어 온 창세기 1장과 2,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3장을 하나의 큰 역사로 묶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처음 세 장이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태고교회를 그 처음 시기부터 마침내 멸망하는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람은 단지 한 개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1-3의 속뜻에서는 태고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었던 사람들의 상태가 하나의 연속적인 역사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우리가 창1과 창2를 읽어 온 흐름도 다시 정리해 줍니다. 1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묘사되었고, 2 앞부분에서는 그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된 상태가 다루어졌습니다. AC.137은 이 장의 앞부분을 태고교회의 가장 번성한 상태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번성했다는 것은 외적인 세력이나 물질적 풍요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께 인도받고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며, 모든 지혜와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질서 안에 있었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 창2 안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AC.131에서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했고, AC.132-136은 창2:18-25가 바로 그 문제를 다룬다는 전체 개요를 제시했습니다. AC.137은 이 전환을 태고교회 전체 역사 속에 놓아 줍니다. 앞부분이 태고교회의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였다면, 이제부터는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창2 후반부는 창3의 타락 이야기와 단절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상태가 변화해 가는 과정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후손들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한 사람의 어느 순간의 심리 변화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따라 변화해 가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보고 있습니다. AC.127에서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이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37은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되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과 그 후손들의 상태가 결국 창3까지 이어지는 큰 흐름 속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단계를 거쳐 멸망에 이르게 되는지는 앞으로의 본문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AC.137태고교회라는 말을 읽을 때 한 시점의 고정된 상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같은 태고교회 안에도 가장 번성한 상태가 있었고, 이후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상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창1-3 전체가 그 처음 시기부터 마지막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모두 천적 인간이었다는 식으로 모든 시기를 동일하게 묶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자체에도 시작과 절정, 변화와 쇠퇴의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창3을 읽을 때에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3의 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타락을 갑자기 등장한 한 개인의 단회적인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이미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된 태고교회 후손들의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어떻게 더 진행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37은 아직 그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창1-3 전체가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다루며, 바로 이 지점부터 이야기의 초점이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후손들로 이동한다는 큰 구조를 붙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37은 짧지만 창1-3 전체의 독법을 결정하는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1의 거듭남, 2 앞부분의 천적 인간, 2 후반부에서 시작되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 그리고 앞으로 창3에서 전개될 태고교회의 쇠퇴와 멸망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역사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 큰 틀을 기억하면 이제부터 상세히 설명될 창2:18-25도 단순히 최초 남녀의 창조와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지 않고, 태고교회가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 가기 시작하는 중대한 전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137)

 

 

 

AC.138, 창2:18, ‘혼자와 돕는 배필 - 인간이 원하는 proprium’ (AC.138-141)

창2:18-25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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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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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

 

AC.136

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proprium 여전히 받아들일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25) And innocence from the Lord is instilled into this own, so that it still might not be unacceptable (verse 25).

 

아담과 그의 아내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

 

해설

AC.136은 창2:25아담과 그의 아내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의 속뜻을 미리 요약하면서, AC.132부터 이어져 온 proprium의 문제가 어떤 상태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고,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 데 이어, 이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이노센스의 근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인간의 proprium 안에 이노센스가 있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확인해 온 질서와 일치합니다. 지혜와 지성, 이성과 지식이 주님의 것이며,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도 주님께서 부여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proprium 안에 들어오는 이노센스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다고 해서 생명과 선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옮겨간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노센스가 proprium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스며든다는 점입니다. AC.134에서는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고, AC.135에서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었습니다. 그런데 AC.136에서도 proprium 자체를 제거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흐름만 놓고 보면, 주님께서는 인간이 proprium으로 기울려는 성향을 단순히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이노센스가 함께할 수 있도록 다루고 계십니다.

 

이 때문에 받아들일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이 문장은 proprium 그 자체를 아무 문제 없는 것으로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어야 그것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136까지 읽은 단계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을 독립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볼 수도 없고, 반대로 주님께서 단순히 제거하시는 대상으로만 볼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고 생명을 결합하시며 이노센스를 스며들게 하시는 과정 전체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설명은 창2:25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를 읽는 방향도 미리 보여 줍니다. 아직 벌거벗음부끄러워하지 않음각각의 구체적인 속뜻은 뒤의 설명을 기다려야 하지만, AC.136에 따르면 이 구절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proprium 안에 있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벌거벗음은 곧바로 수치나 죄의 상태를 뜻한다고 미리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창3에서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게 되는 상태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이후 설명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AC.132부터 AC.136까지를 함께 보면 이제 하나의 흐름이 드러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인간에게 자신이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지만, 인간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되었고, 이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인간의 proprium을 허용하시면서도 그것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주님의 질서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36에서 아직 이노센스란 정확히 무엇인가?를 후대의 교리까지 끌어와 완성해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독자가 붙들어야 할 것은 더 단순하면서도 중요합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졌지만,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자기 생명의 근원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영적 생명이 결합되고, 다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스며듭니다. 바로 이 상태가 창2:25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상태를 이해하는 문을 열어 줍니다. (AC.136)

 

 

 

AC.137, 창2:18-25 배경,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 천적 인간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후

AC.137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그 처음 시기부터 멸망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태고교회가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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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5, 창2:18-25 개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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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

 

AC.135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re adjoined to the mans own, so that they appear as a one (verse 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몸을 이룰지로다 (24)

 

해설

AC.135는 창2:24둘이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의 속뜻을 미리 요약합니다. AC.132-134에서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었으며, 마침내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는 과정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AC.135에서는 그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지가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proprium이 주어졌다고 해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의 AC.124에서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고, AC.129에서는 출발점이 주님이면 생명이고 자기 자신이면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진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AC.135는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된다고 말합니다.

 

특히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는 표현을 주의 깊게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영적 생명과 인간의 proprium이 그 근원에서 실제로 하나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사랑하고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나 앞에서 계속 밝혀 온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인간이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삶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이 점에서 AC.135허락된 proprium이라는 AC.132의 표현도 조금씩 이해하게 합니다. 만일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진다는 것이 단순히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라면, 이어서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된다는 설명은 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에게 자기의 것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이 주어지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거기에 결합됨으로써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가 형성됩니다. 다만 이 결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아직 이 한 문장만으로 더 나아가 규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이 때문에 창2:24둘이 몸을 이룰지로다도 이 문맥에서는 먼저 자연적인 부부의 결합을 넘어 인간의 proprium과 천적·영적 생명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앞에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것이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을 묘사한다고 했으므로, 이제 이 되는 것은 그 proprium에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구체적인 각 표현의 상응은 이어지는 번호에서 설명될 것이므로 여기서는 그 전체 구조만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AC.135는 또한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을 엽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받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AC.135의 표현을 따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기때문에 이러한 경험이 가능하다고 이해할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자유와 책임의 관계까지 여기서 완성해서 설명하기보다는, 현재 본문이 직접 말하는 범위 안에서 그 가능성만 열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AC.135proprium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한 문장을 제공합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별도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오며, 그것들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인간에게는 하나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창2:24를 해설하면서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된다는 말만이 아니라 하나처럼 보인다는 스베덴보리의 섬세한 구별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AC.135)

 

 

 

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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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4, 창2:18-25 개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다 -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짐’ (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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