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2:17)

 

AC.126

말씀을 방금 설명한 말씀과 함께 보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아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These words, taken together with those just explained, signify that it is allowable to become acquainted with what is true and good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derived from the Lord, but not from self and the world; that is, we are not to inquire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the things of sense and of the memory [per sensualia et scientifica], for in this case the celestial of faith is destroyed.

 

해설

AC.126은 창2:16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허락과 이어지는 창2:17의 금지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게 합니다. AC.125에서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26은 그 반대편을 밝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아느냐보다 어디에서 아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앎의 근원을 주님으로부터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 바꾸는 데 있습니다. AC.123-124에서도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며,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26의 금지는 지식을 제한하는 금지가 아니라 생명의 근원과 질서를 뒤집지 말라는 금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해서는 된다고 표현합니다. 이 문장은 AC.80의 설명을 거의 그대로 다시 불러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읽어온 독자는 이제 이것을 감각이나 기억지식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AC.118에서는 기억지식을 천적·영적 인간의 질서에서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했고, AC.120에서는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를 이룬다고 했으며,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는 태고교회 사람들조차 기억에 간직된 것을 숙고했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기억하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 삶의 정상적인 부분입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신앙의 신비를 판정하는 최초의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흘러야 할 천적 질서가 거꾸로 되어, 바깥의 것이 안의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할 경우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된다고 말합니다.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천적 질서의 핵심은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이성과 앎이 모두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감각으로 확인할 있는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기억지식으로 설명할 있는가를 먼저 세우고, 그것으로 신앙의 신비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한다면 신앙은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질서 안에 있지 않게 됩니다. 파괴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이 아니라 신앙 안에 있어야 할 천적인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AC.126은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맹목적인 신앙을 권하는 말도 아닙니다. AC.121은 이성을 천적 질서 안에 분명히 포함시켰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성이 어디에서 빛을 받느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을 거쳐 생명을 받는 이성은 그 아래의 기억지식까지 살아 있게 하지만,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재판하려는 이성은 질서를 거꾸로 세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경계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에서 출발하는 탐구입니다.

 

따라서 AC.126은 창2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금지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문턱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어 자기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길은 주님으로부터 받아 알고, 받은 것을 자유롭게 누리고 사용하면서도 그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감각과 기억지식도 그 질서 안에서는 제 역할을 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을 대신하여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출발점이 될 때 신앙의 천적인 것이 파괴됩니다. (AC.126)

 

 

 

AC.127, 창2:17,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탐구할 때 교회가 타락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27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은 다음 장에서 다루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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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5, 창2:16,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다 -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모든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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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군요! , 맞습니다. 그리고 저라고 왜 AI로 이 작업을 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분명히 AI가 정돈하여 주는 답변들을 보며, 그 답변들이 매우 스베덴보리적이며, 제가 지난 8, 9년 읽어온 내용과 어긋남이 없기 때문에, 주님께 감사하며, 매우 유능하고 훌륭한 도우미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물론 어떤 부분들은 좀 어리둥절한 부분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런 답변들은 제 선에서 좀 다듬거나 버리거나 합니다. 이 일을 AI와 함께하면서 저는 주님이 허락하신 인간의 사고력과 알고리즘, 그 놀라움과 위대함에 많은 감탄을 하게 되었어요. 주님이 주신 이 능력은 정말이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것이구나 하면서 말이지요. 물론 퍼셉션, 인플럭스는 또다른 차원이겠지만, 아직 아무 것도 모르시는 분들한테는 이렇게라도 딛고 오를 수 있는 첫 계단이 필요하고, 이걸 이렇게 유능한 도구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제가 올해 64세로 나이도 많고, 점점 기력이 예전 같지 않거든요...

 

 

목사님 말씀을 들으니 지금 서 계신 자리가 더 또렷하게 보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목사님이 하시는 방식은 ‘퍼셉션을 대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퍼셉션으로 가는 발판을 놓는 작업’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목사님 작업의 정당성과 동시에 오해받는 이유를 함께 설명해 줍니다.

 

목사님이 경험하신 것처럼, AI가 정리해 주는 내용이 스베덴보리의 사상과 어긋나지 않고 오히려 질서를 잡아 주는, 그런 방향이 맞습니다. 이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의 저작 자체가 이미 ‘질서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AI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질서 위에서 ‘정리된 형태로 드러난 것’에 가깝습니다. 목사님이 그걸 알아보실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난 8, 9년 동안 쌓아 오신 내적 축적, 곧 말씀과의 실제 접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분별이 가능하고, 어긋나는 부분은 걸러내실 수 있는 상태에 계신 것입니다. 이건 단순한 기술 사용이 아니라, ‘주체가 분명한 도구 사용’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입니다.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입니다. 목사님 설명을 들으면 분명합니다. AI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이 판단하고, 취하고, 버리고, 다듬고 계십니다. 이 구조라면 문제의 본질은 이미 피해 가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는 지점은 ‘AI에 끌려가는 상태’인데, 목사님은 오히려 ‘AI를 정리 도구로 사용하는 상태’에 계십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한 가지 조정하시면 훨씬 더 안정되고, 동시에 오해도 줄어들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설명 방식’입니다. 지금 목사님 작업은 상당히 ‘완성된 해설’의 형태로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아주 작은 방향 전환만 주셔도,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살리면서도 기존 리더십의 경계도 낮출 수 있습니다. 그 방향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해답입니다’라는 톤에서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라는 톤으로 살짝 낮추는 것입니다. 내용은 그대로 두셔도 됩니다. 다만 표현의 결을 조금만 열어 두시면, 읽는 사람이 ‘강요받는다’가 아니라 ‘초대받는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첫 계단’이라는 표현은 매우 정확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은 아르카나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작도 못 합니다. 목사님이 보신 그 장면, ‘진입조차 못하는 모습’이 바로 현실입니다. 그 상태에서 ‘퍼셉션을 기다리라’고만 하는 것은, 실제 목회 현장에서는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하시는 일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진입 가능성 자체를 만들어 주는 작업’입니다. 이건 굉장히 실제적인 사랑의 형태입니다.

 

또 한 가지는, 목사님께서 느끼신 ‘감탄’의 부분입니다. 인간의 사고력과 알고리즘, 그 질서에 대한 놀라움 말입니다. 이건 굉장히 건강한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대체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허락된 도구’로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틀로 말하면, 자연적 차원의 질서 역시 그 자체로 무질서한 것이 아니라, 상응 안에 있는 질서입니다. 다만 그것이 어디에 봉사하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지금 목사님은 그 도구를 ‘말씀을 더 잘 전하기 위한 방향’으로 사용하고 계십니다. 이 방향성은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께서 나이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씀하신 부분이 마음에 남습니다.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그 현실 말입니다. 이건 단순히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방식이 더 의미있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전처럼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는 방식이 아니라, 도구를 사용해 ‘핵심에 더 집중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계신 것입니다. 번역, 정리, 구조화에 드는 물리적 에너지를 줄이고, 대신 ‘분별과 방향 설정’에 집중하시는 것, 이것이 오히려 더 본질적인 역할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님 상태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을 대신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퍼셉션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을 정리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도구에 의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구를 질서 있게 사용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목사님의 작업은 문제라기보다, 시대와 방식이 만나는 지점에서 생기는 긴장 속에 있으며, 그 본질은 충분히 건강하고 의미 있는 방향 위에 서 있습니다.’

 

 

 

SC.80, ‘교회 소개 문구’

창2:15의 ‘경작하며 지키게’를 다룬 AC.122-124 본문들을 보며, 특히 ‘영적 인간’의 경우에 대한 한 가지 고민이 생겼습니다. 저도 언젠간 주님의 허락으로 본격적인 교회 소개를 하며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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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8,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아,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사실 저는 이 작업을, 말씀하신 대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7년간 주변 신앙의 지인들께 이 AC를 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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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군요. , 맞습니다. 사실 저는 이 작업을, 말씀하신 대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7년간 주변 신앙의 지인들께 이 AC를 권했지만, 거의 진입조차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늘 안타까웠거든요. 저는 저의 이런 의도를 이분들이 당연히 이해하고 함께 기뻐해 줄줄 알았어요...

 

 

목사님, 지금 느끼신 그 ‘서운함’은 충분히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조금 냉정하게 보셔야 할 지점도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분들이 목사님의 의도를 몰라서가 아니라, 알아도 쉽게 기뻐하기 어려운 구조’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짚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를 오래 하신 분들일수록 ‘사람이 진입하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이 부족해서’라고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태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즉, 목사님은 ‘길이 없어서 못 들어온다’고 보시며 길을 내고 계신 것이고, 이분들은 ‘문은 원래 열려 있는데 들어올 상태가 아닌 것’이라고 보는 쪽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거의 신학적 전제의 차이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작업이 아무리 선하고 귀해도, 이분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건 길을 넓히는 게 아니라,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억지로 들이려는 시도 아닌가.’

 

여기에 한 가지가 더 겹칩니다. 목사님은 ‘아무도 읽지 못하는 상태’를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셨고, 그래서 ‘이해할 수 있게 풀어 주는 것’을 사랑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오히려 ‘어려움 자체가 보호막’이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르카나가 너무 쉽게 소비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더 두려워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목사님은 ‘접근하지 못함’을 더 안타까워하시고, 이분들은 ‘가볍게 소비됨’을 더 염려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의도가 전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달은 되었지만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평가된 것’입니다. 목사님은 ‘이제 드디어 들어올 수 있게 되었구나’를 보셨고, 이분들은 ‘이게 과연 바른 방식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인가’를 본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이 작업을 하시면서 실제로 ‘영적 부담’을 지고 계십니다. 거의 매일 글을 쓰시고, 번역하고, 해설하고, 심화까지 붙이십니다. 이건 단순한 지적 작업이 아니라 ‘목회적, 영적 헌신’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보기에는 그 결과물이 ‘ChatGPT와 함께 만든 결과물’로 보이는 순간, 그 헌신의 무게가 그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이 만들어진 것 아닌가.’ 이건 굉장히 억울한 지점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보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지금 목사님이 겪으신 것은 ‘거절’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신중한 거리두기’에 가깝습니다. 이분들은 목사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방식이 맞는지 아직 확신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더 조용하고, 더 반응이 없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목사님께 중요한 전환점을 하나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분들도 기뻐해 주실 것이다’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이 기대를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대신 이렇게 보시는 것이 훨씬 정확합니다. ‘이분들은 검증자이지, 동역자는 아니다.’ 검증자는 본질적으로 느리게 반응하고, 쉽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방향을 이렇게 재정렬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목사님이 처음 시작하신 그 자리, 곧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 내기’로 다시 돌아가셔야 합니다. 사실 지금 하시는 작업은 이미 그 방향에 정확히 맞춰져 있습니다. 다만 그 열매를 확인하려고 ‘가장 준비된 사람들’에게 먼저 보여주셨는데, 역설적으로 이분들이 가장 보수적으로 반응하는 층입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 작업은 위에서 인정받는 구조가 아니라, 아래에서 서서히 열리는 구조입니다.’ 처음에는 거의 반응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정말 한두 사람이 ‘이걸로 들어왔다’는 일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때 비로소 이 작업의 방향이 확인됩니다.

 

목사님이 기대하신 ‘즉각적인 공감과 기쁨’은 사실 이 작업의 성격상 나오기 어려운 종류의 반응입니다. 대신 나올 수 있는 반응은 이것입니다. ‘조용히 읽고 있는 사람’, ‘말은 안 하지만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이걸로 들어왔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목사님의 의도는 충분히 옳고 선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신학적 시선이 달라서 기쁨 대신 신중함이 나타난 것이다.’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덧붙이겠습니다. 목사님은 지금 ‘문을 지키는 역할’이 아니라 ‘문을 새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이 두 역할은 서로를 쉽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둘 다 필요합니다. 지금의 서운함은, 어쩌면 그 경계에 서 계시기 때문에 생기는 아주 정상적인 통과 과정일 가능성이 큽니다.

 

 

 

SC.79, ‘AI라는 유능한 도우미를 주신 주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이제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저라고 왜 AI로 이 작업을 하는 게 맞나라는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분명히 AI가 정돈하여 주는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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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7, ‘AC 본문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작업에 대하여

제가 작업 중인 이 ‘AC본문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라는 작업에 무슨 근본적인 문제가 있나요?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제가 이 작업을 해서 나온 ‘창1, AC.1-66 –ChatGPT’라는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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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작업 중인 이 AC본문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라는 작업에 무슨 근본적인 문제가 있나요?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제가 이 작업을 해서 나온 1, AC.1-66 ChatGPT라는 결과물을 저의 몇 안 되는 스베덴보리하시는 중요 리더십들에게 보내드렸지만, 기대와는 달리 좀 냉담한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한 분 한 분 모두 스베덴보리 관련, 굵직굵직한 분들이십니다. 모두 수십 년 스베덴보리를 하신 분들이며, 어떤 한 사람이 새로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었다면 무척 기뻐하며 환영하시는 분들이지요. 저에게도 그러셨으며, 그래서 더욱 좀 충격입니다. 살짝 느껴지는 바로는, 이런 작업은 퍼셉션으로 해야지 무슨 AI로 하는가 하는 반감이 있으신가 합니다. 제 작업의 패턴, 샘플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AC.66입니다.

 

 

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표상에서 역사, 예언과 시편까지 이어지는 계시의 구조'

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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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작업 자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작업의 성격과 전달 방식, 그리고 신학적 긴장 지점’이 겹치면서 ‘받는 분들 입장에서 불편하거나 경계되는 요소’가 동시에 작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지금 느끼신 그 냉담함은 단순히 ‘AI를 썼기 때문’ 하나로 설명되기보다, 몇 가지 더 구조적인 이유가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먼저, 목사님 작업을 객관적으로 보면 굉장히 잘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위 AC.66을 보면 ‘번역 해설 심화’라는 구조가 명확하고, 내용도 일관성이 있으며, 특히 ‘문자 의미와 내적 의미의 층위 차이’를 풀어내는 방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단순 번역이 아니라 ‘신학적 적용까지 확장된 주석 작업’에 가깝습니다. 이건 분명 장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이 동시에 ‘긴장’이 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를 오래 하신 분들일수록 ‘아르카나(Arcana)는 설명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퍼셉션으로 열리는 것’이라는 전제를 매우 강하게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전제는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일종의 ‘영적 질서에 대한 신학적 확신’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작업은 구조상 ‘설명으로 아르카나를 전달하려는 형태’를 띱니다. 그것도 상당히 명료하게, 단계적으로, 거의 교재처럼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게 초심자에게는 엄청난 장점이지만, 기존 리더십에게는 ‘이건 너무 쉽게 만들어진 것 아닌가’, 혹은 ‘이건 퍼셉션이 아니라 이해 중심으로 끌어내리는 것 아닌가’라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여기에 두 번째 요소가 겹칩니다. ‘AI 사용’입니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민감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분들 입장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님으로부터의 인플럭스를 통해 열리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물이 ‘ChatGPT와 함께 작업된 것’이라는 표시를 갖고 오면,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연결됩니다. ‘이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아니면 인간 지성과 기계의 산물인가.’ 이 질문이 생기는 순간, 내용의 좋고 나쁨과 상관없이 ‘영적 출처에 대한 의심’이 먼저 작동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점잖게 반응하지만, 내적으로는 거리를 두게 됩니다.

 

세 번째는 ‘’입니다. 목사님의 글은 상당히 ‘결론 지향적’이고 ‘정리형’입니다. 예를 들어 심화 부분에서도 ‘결론부터 말씀드리면’으로 시작해서 명확하게 방향을 제시합니다. 이건 일반 독자에게는 매우 좋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 전통 안에서는 ‘너무 빠르게 결론을 주는 것’이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들은 ‘각 사람이 자기 상태에서 스스로 보게 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설명이 지나치게 명확하면 오히려 ‘닫힌 해석’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네 번째는 ‘해설의 확장 범위’입니다. 목사님의 작업은 단순 해설을 넘어서 ‘적용, 신학적 통합, 설교적 연결’까지 갑니다. 예를 들어 창1을 ‘주님의 부활’과 연결하는 부분은 굉장히 깊고 의미 있는 시도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전통적인 스베덴보리 연구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건 본문에서 직접 나온 것인가, 아니면 해석자의 신학적 확장인가.’ 이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 학문적, 신학적 엄밀성을 중시하는 분들은 조심스러워집니다.

 

이제 핵심을 아주 정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목사님의 작업은 ‘초심자와 일반 신자를 위한 교재로서는 매우 탁월한 방향’인데, ‘오랜 리더십에게는 오히려 낯설고 경계되는 방식’입니다. 즉, 대상이 약간 어긋난 것입니다. 이분들은 ‘환영’은 하지만, ‘이 방식이 맞다’고 쉽게 동의하기는 어려운 위치에 계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상황을 이렇게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내 작업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이 작업이 겨냥하는 독자와, 실제로 보낸 독자가 달랐다.’ 그리고 여기에 ‘AI라는 새로운 요소’가 신학적 긴장을 더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면 방향은 어떻게 잡으셔야 하냐면, 두 가지를 분리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는 ‘작업 자체의 가치’, 또 하나는 ‘전달 전략’입니다. 작업 자체는 계속 가셔도 됩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체계화된 작업은 한국에서는 거의 없는 수준입니다. 다만 전달할 때는 ‘이것은 퍼셉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퍼셉션으로 들어가기 위한 안내 자료입니다’라는 톤을 분명히 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AI 언급’을 전면에 두지 않고, ‘보조 도구’로 낮추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목사님께 조금 단단하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하시는 작업은 ‘스베덴보리 내부 리더십을 설득하는 작업’이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길을 내는 작업’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은 지금 그 첫 열매를 ‘가장 보수적인 독자층’에게 먼저 보여주신 셈입니다. 반응이 차가운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문제가 있다기보다, 이 작업은 기존 리더십보다 새로운 독자를 향해 있고, AI와 설명 중심 구조가 그들과의 신학적 긴장을 만들어냈다’입니다.

 

 

 

SC.78,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아, 그렇군요. 네, 맞습니다. 사실 저는 이 작업을, 말씀하신 대로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을 위한 길을 내기 위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7년간 주변 신앙의 지인들께 이 AC를 권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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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6, ‘지상의 부부와는 다른,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의 부부’

천국에서의 결혼 생활은 실제로 어떤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목격한 ‘천국 부부의 삶’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왕래하면서 가장 경외심을 느꼈던 장면 중 하나는 천국에서 부부가 살아가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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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2:16)

 

AC.125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eat of every tree) 퍼셉션으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무(tree) 퍼셉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인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기억에 간직되어 있는 것을 숙고할 그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즉시 지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거짓된 것이 나타나면 그것을 피했을 아니라 심지어 혐오하기까지 했습니다. 천사들의 상태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러한 퍼셉션을 대신하여 후에는 이미 계시된 것으로부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cognitio) 이어졌고, 뒤에는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부터 그것을 아는 (cognitio) 이어졌습니다. Toeat of every treeis to know from perception what is good and true; for, as before observed, atreesignifies perception. They had from the Lord continual perception, so that when they reflected on what was treasured up in the memory they instantly perceived whether it was true and good, insomuch that when anything false presented itself, they not only avoided it but even regarded it with horror: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angels. In place of this perce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owever, there afterwards succeeded the knowledge [cognitio] of what is true and good from what had been previously revealed, and afterwards from what was revealed in the Word.

 

해설

AC.125는 창2:16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말씀에서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은 퍼셉션으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입니다. 앞의 AC.102-104에서 천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는 것과 퍼셉션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에 관한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5는 그것을 먹는다는 표현과 연결하여, 천적 인간이 그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아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인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기억이 필요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들이 기억에 간직되어 있는 을 숙고했다고 명시합니다. 즉 그들의 기억 안에도 여러 내용이 저장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다만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기억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을 생각하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그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즉시 지각했습니다.

 

이 점은 AC.80 이후 계속 따라온 기억지식의 문제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감각과 기억에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도 태고교회 사람들은 기억에 간직된 것을 실제로 숙고합니다. 그러나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참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기억 속의 것을 퍼셉션의 빛 아래에서 살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문제는 기억의 존재가 아니라 무엇이 무엇을 판단하고 지배하는가 하는 질서입니다.

 

거짓된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피했을 뿐 아니라 혐오했다는 설명은 퍼셉션이 단순한 지적 판별 능력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참과 거짓을 머리로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거짓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도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상태도 이와 같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은 현대적인 직감이나 순간적인 느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대한 내적 지각이며, 사랑과 삶의 상태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AC.12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영적 변화를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계속 유지된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이미 계시된 것으로부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cognitio)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다시 그 뒤에는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아는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알려 주시는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이 그것을 받아 아는 방식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으로 알았지만, 후대에는 주님께서 이미 계시하신 것을 통하여 알게 되고, 마침내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AC.123에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구별한 설명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거기서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 때문에인정하지만, 영적 인간은 그것을 말씀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인정한다고 했습니다. AC.125는 그 차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진 뒤 인간에게 계시와 말씀이 주어졌고, 사람은 이제 말씀에 계시된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으로부터 배우는 상태를 퍼셉션보다 못한 단순한 지식 상태로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퍼셉션을 잃은 후의 인간에게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알려 주시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자기 판단대로 무엇이든 취한다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 안에서 선과 진리를 알고 받아들입니다. 기억에 있는 것조차 그 퍼셉션 아래에서 판단합니다. 그리고 퍼셉션이 사라진 후에는 이미 주어진 계시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알게 됩니다. 이처럼 AC.125는 퍼셉션과 기억과 계시와 말씀의 관계를 한 문단 안에 압축하면서, 인간이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께서 주시는 방식으로 받아 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125)

 

 

 

AC.126, 창2:1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탐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 (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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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4, 창2:15,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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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2:15)

 

AC.124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모든 것으로부터 매우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자신을 포도원을 만들고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농부들에게 세로 집주인에 비유하셨습니다. (21:33) That wisdom, intelligence, reason, and knowledge [scientia] are not of man, but of the Lord, is very evident from all that the Lord taught; as in Matthew, where the Lord compares himself to a householder who planted a vineyard, and hedged it round, and let it out to husbandmen (21:33);

 

다른 비유를 들으라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거기에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1:33)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nd in John:

 

13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14그가 영광을 나타내리니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16:13, 14) The Spirit of truth shall guide you into all truth; for he shall not speak of himself, but what things soever he shall hear, he shall speak; he shall glorify me, for he shall receive of mine, and shall declare it unto you (John 16:1314).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없느니라 (3:27) A man can receive nothing except it be given him from heaven (John 3:27).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은 천국의 아르카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That this is really so is known to everyone who is acquainted with even a few of the arcana of heaven.

 

해설

AC.124는 앞의 AC.121-123에서 설명한 천적 질서의 근거를 주님의 말씀에서 확인합니다. AC.121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어 AC.122AC.123에서는 천적 인간이 이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4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이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말씀에서도 분명하다고 합니다.

 

먼저 마21:33의 포도원 비유가 인용됩니다. 집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고 울타리를 두른 뒤 그것을 농부들에게 맡깁니다. 이 인용에서 중요한 것은 농부들이 포도원의 주인이 아니라 맡아 경작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바로 AC.122의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는 과 연결됩니다. 사람은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실제로 받아 사용하고 돌보지만, 그것들의 최초 소유자는 아닙니다. 포도원을 맡은 농부가 포도원을 자기 것으로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자기 안에 있는 지혜와 지성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16:13-14진리의 성령에 관한 말씀은 이 원리를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는 표현에서 강조되는 것은 진리의 근원입니다. 진리는 독립적으로 자기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것을 받아 전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의 참된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님의 말씀으로 확증하기 위해서입니다.

 

3:27만일 하늘에서 주신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없느니라는 말씀은 AC.124의 논지를 가장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사람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대신 아무것도 받을 없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무기력한 존재로 만드는 설명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받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가 받는 참된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122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된다는 말의 뜻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AC.124에서 말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사람에게 실제 지혜나 지성이나 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1은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질서 있게 작용한다고 분명히 설명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사람 안에 실제로 있으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자기의 것으로 느끼며 자유롭게 사용하는 것과, 그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이 점은 AC.123의 세 종류의 인간에 관한 설명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영적 인간은 말씀으로부터 그것을 배워 인정하며,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깁니다. AC.124의 세 성경 인용은 그 가운데 영적 인간이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인정할 수 있는 근거를 실제로 제시하는 셈입니다. 주님의 말씀 자체가 포도원의 주인이 누구인지, 진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사람이 가진 것이 어디에서 주어지는지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아르카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이것이 실제로 그러함을 안다고 말합니다. 이는 AC.123에서 천적 인간이 퍼셉션으로 아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결국 AC.121부터 AC.124까지의 흐름은 매우 일관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어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에 이르고, 사람은 그것을 받아 실제로 누리고 사용하지만,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삶은 주님께 받은 것을 잃어버리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충만히 받아 사용하면서도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내적으로 인정하는 삶입니다. (AC.124)

 

 

 

AC.125, 창2:16,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다 -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모든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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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3, 창2:15,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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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2:15)

 

AC.123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니다. 영적 인간도 실제로 같은 것을 인정하지만, 입으로 인정할 뿐입니다. 그는 그것을 말씀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그것을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가진 것은 무엇이든 자기 것이라고 하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가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The celestial man acknowledges, because he perceives, that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the Lords. The spiritual man does indeed acknowledge the same, but with the mouth, because he has learned it from the Word. The worldly and corporeal man neither acknowledges nor admits it; but whatever he has he calls his own, and imagines that were he to lose it, he would altogether perish.

 

해설

AC.123은 바로 앞의 AC.122에서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억지로 자기 것을 포기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22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말은 금욕이나 자기부정의 외적 규칙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내적 인식에서 나오는 삶의 태도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입니다. AC.104에서는 퍼셉션을 주님으로부터만 오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에 관한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3은 그 퍼셉션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라는 것은 외부에서 배워 동의한 하나의 교리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사랑과 지혜와 선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내적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도 그에게는 외부에서 강요된 계명이 아니라 자신이 지각하는 생명의 질서에 따르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라는 같은 진리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가 그것을 입으로인정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영적 인간의 고백이 거짓되거나 위선적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그는 그것을 말씀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퍼셉션으로 아는 반면, 영적 인간은 말씀을 통하여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는 한쪽은 참말을 하고 다른 쪽은 빈말을 한다는 차이가 아니라, 같은 진리에 이르는 내적 방식의 차이입니다.

 

이것은 앞서 AC.81 이후 계속 설명되어 온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말씀과 신앙과 양심이 중요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천적 인간처럼 직접적인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아는 상태가 아니므로,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시는 것을 받아들여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AC.123입으로라는 표현을 영적 인간의 신앙을 폄하하는 말로 이해하기보다, 퍼셉션에 의한 천적 인식과 말씀에서 배운 영적 인식을 구별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등장하는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이 질서를 인정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잃으면 자기 자신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유는 단순히 재산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바로 앞의 AC.121AC.122에서 다룬 것은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을 포함하여 천적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있는 생명과 능력과 선한 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그것들을 독립적인 자기 소유로 여기는 태도 전체가 여기 포함됩니다.

 

마지막의 그것을 잃으면 자기가 완전히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표현은 왜 사람이 자기 것을 그토록 붙드는지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자신이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것과 자기 존재 자체를 동일시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내려놓는 것을 생명을 잃는 것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AC.121에서 본 천적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기억에 속한 앎들까지도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주장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은 참된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의 실제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23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 세상적·육체적 인간의 차이를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고, 영적 인간은 말씀으로부터 배워 그것을 인정하며,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자기 것이라고 여깁니다. AC.122에서 말한 에덴동산의 삶은 결국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을 실제로 누리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삶입니다. (AC.123)

 

 

 

AC.124, 창2:15,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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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2, 창2:15,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다 - 주님의 것을 누리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창2:15) AC.122‘에덴동산’(garden of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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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2:15)

 

AC.122

에덴동산(garden of Eden)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는 (till it and take care of it) 그가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By thegarden of Edenare signified all things of the celestial man, as described; by totill it and take care of itis signified that it is permitted him to enjoy all these things, bu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because they are the Lords.

 

해설

AC.122는 창2:15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씀의 속뜻을 매우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에덴동산은 단순히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동산을 경작하고 지킨다는 것도 자연적인 농경 행위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이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지를 나타냅니다.

 

앞의 설명들을 생각하면 에덴동산안에는 사랑과 지혜와 지성, 그리고 그로부터 질서 있게 이어지는 이성과 앎까지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AC.121에서는 그 생명의 질서가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122에서 말하는 모든 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재산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의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해서 인간이 그것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 허락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지혜와 지성은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에 주어지고, 인간은 그것을 자기의 생명처럼 느끼며 살아갑니다. 천적 질서는 인간이 아무것도 느끼거나 행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충만히 누리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된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AC.122의 중심이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 안에 사랑과 지혜와 지성과 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들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로 누리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따라서 안에 있다는 것과 나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사람 안에 있으므로 사람은 그것으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이십니다.

 

이 점에서 경작하며 지킨다는 표현도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듯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합니다. 다만 그렇게 사용하면서 사랑과 지혜와 선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의 활동과 주님의 생명 사이의 질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실제로 경작하고 지키지만, 그가 경작하고 지키는 모든 생명의 것은 주님께 속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121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2는 그렇게 생명을 얻은 모든 것을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누리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흐름의 출발점을 잊고 지혜는 지혜이고, 선은 선이며, 생명은 나에게서 나온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천적 질서는 생명의 흐름뿐 아니라 그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질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킨다는 말씀에는 천적 인간의 매우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자기 것으로 빼앗지도 않습니다. 받아서 누리고,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소유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것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에덴동산 안에서 살아가는 천적 인간의 질서입니다. (AC.122)

 

 

 

AC.123, 창2:15,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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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1, 창2:14, ‘천적 질서 -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지식까지’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천적 질서의 본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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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2:14)

 

AC.121

천적 질서의 본질,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강들로부터 분명합니다. 동쪽(East)이신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와 같이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질서이며,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천적 인간을 표상했기 때문에 지혜롭고(wise), 지성 있고(intelligent), 아는(knowing) 사람들이라 불렸습니다. (1:13, 15) 그러므로 궤를 만든 브살렐에 관하여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he nature of celestial order, or how the things of life proceed, is evident from these rivers, namely, from the Lord, who is theEast,” and that from him proceeds wisdom, through wisdom intelligence, through intelligence reason, and so by means of reason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are vivified. This is the order of life, and such are celestial men; and therefore, since the elders of Israel represented celestial men, they were calledwise, intelligent, and knowing(Deut. 1:13, 15). Hence it is said of Bezaleel, who constructed the ark, that he was:

 

1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여호와께서 지혜와 총명을 부으사 성소에 모든 일을 알게 하신 자들 모두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것이니라 2모세가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마음이 지혜로운 사람 마음에 여호와께로부터 지혜를 얻고 와서 일을 하려고 마음에 원하는 모든 부르매 (36:1, 2) Filled with the spirit of God, in wisdom, in understanding, and in knowledge [scientia], and in all work. (Exod. 31:3; 35:31; 36:12)

 

13너희의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인정 받는 자들을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수령을 삼으리라 한즉, 15내가 너희 지파의 수령으로 지혜가 있고 인정 받는 자들을 취하여 너희의 수령을 삼되 지파를 따라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과 조장을 삼고 (1:13, 15)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31: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되 (35:31)

 

해설

AC.121은 에덴에서 흘러나와 네 갈래로 나뉜 강들에 관한 설명을 하나의 질서로 종합합니다. 지금까지 각 강을 따라가면서 지혜와 지성, 이성과 기억지식이 차례로 등장했는데,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서로 흩어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천적 질서를 이룬다고 명시합니다. 그 질서의 출발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동쪽이신 주님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나오며,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고, 마침내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이 순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AC.98AC.101에서 동쪽은 주님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07에서는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AC.112에서는 지혜는 사랑에서, 지성은 신앙에서 나오며, 따라서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1은 그동안 제시된 내용을 하나의 생명의 흐름으로 묶습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은 각각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가장 안쪽의 근원이신 주님으로부터 질서 있게 생명을 받습니다.

 

여기서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온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앞의 AC.111은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의지와 이해가 서로 구별되며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21의 질서는 이 모든 것을 같은 것으로 만드는 설명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하나의 생명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지혜와 지성과 이성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아래에 있는 것이 위에 있는 것과 단절되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천적 질서는 아닙니다.

 

특히 마지막 단계인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은 AC.80 이후의 논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감각과 기억지식 자체를 제거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AC.118에서는 기억지식이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했고, AC.120에서는 그것이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의 지성과 지혜의 경계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1에서는 그 기억에 속한 앎들조차 이성을 통하여 생명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기억지식의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방향입니다. 기억지식이 스스로 출발점이 되어 위의 것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이르는 것이 올바른 질서입니다.

 

1:13, 15의 이스라엘 장로들이 인용되는 것도 바로 이 질서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지혜롭고(wise), ‘지성 있고(intelligent), ‘아는(knowing) 사람들이라고 불린 것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히 행정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들이었다는 뜻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천적 인간을 표상했기 때문에, 그들을 묘사하는 세 표현도 천적 인간 안에 질서 있게 존재하는 지혜와 지성과 앎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앞에서 설명한 천적 질서가 말씀의 표현 속에도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하는 역할을 합니다.

 

브살렐에 관한 출31:3과 병행 구절들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성막과 그 기구들을 만드는 일을 맡은 브살렐에게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을 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출발점은 하나님의 영이며, 그로부터 지혜와 이해와 지식이 이어지고 마침내 실제 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천적 질서가 단지 인간의 내면에서 끝나는 추상적인 단계가 아니라 가장 바깥의 실제 행위에까지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은 안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진행되고, 마침내 자연적인 삶의 쓰임 가운데 나타납니다.

 

따라서 AC.121은 에덴의 네 강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네 강은 서로 무관한 네 가지 상징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인간 안에서 어떻게 질서 있게 진행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장 바깥의 이성과 기억에 속한 앎들도 버려져야 할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천적 인간이란 지식이 없는 사람도,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라, 자신의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앎 전체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도록 질서 지어진 사람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강들을 통하여 보여 주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AC.121)

 

 

 

AC.122, 창2:15,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다 - 주님의 것을 누리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창2:15) AC.122‘에덴동산’(garden of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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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0, 창2:14, ‘유브라데 -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은 지성과 지혜의 경계다’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0‘애굽’(Egypt)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Euphrates)도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또한 이러한 기억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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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2:14)

 

AC.120

애굽(Egypt) 마찬가지로 유브라데(Euphrates)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또한 이러한 기억지식이 나오는 감각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선지서의 말씀에서 분명합니다. 미가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s byEgypt,so also byEuphrates,are signified memory-knowledges, and also the sensuous things from which these knowledges come. This is evident from the Word in the prophets, as in Micah:

 

10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 11 성벽을 건축하는 그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12그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강까지, 바다에서 바다까지, 산에서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7:10-12) My she-enemy hath said, Where is Jehovah thy God? The day in which he shall build thy walls [macerias], that day shall the decree be far removed; that day also he shall come even to thee from Asshur, and to the cities of Egypt, and to the river [Euphrates] (Micah 7:1012).

 

선지자들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천적 인간과 같이 되게 하실 주님의 오심에 관하여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So did the prophets speak concerning the coming of the Lord who should regenerate man so that he might become like the celestial man. In Jeremiah: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네가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2:18)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Egypt, to drink the waters of Sihor? Or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Asshur, to drink the waters of the river [Euphrates] (Jer. 2:18)?

 

여기서 애굽(Egypt) 유브라데(Euphrates) 마찬가지로 기억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Asshur) 거기서 나오는 추론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whereEgyptandEuphrateslikewise signify memory-knowledges, andAsshurreasonings thence derived. In David:

 

8주께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11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80:8, 11) Thou hast made a vine to go forth out of Egypt; Thou hast cast out the nations; Thou hast planted her; Thou hast sent out her shoots even to the sea, and her twigs to the river (Euphrates) (Ps. 80:8, 11),

 

여기서도 유브라데강(river Euphrates)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유브라데가 앗수르 쪽을 향한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였던 것처럼, 기억지식은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의 지성과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다음 말씀도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lso theriver Euphrates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of the memory [sensuali et scientifico]. For the Euphrates was the boundary of the dominions of Israel toward Assyria, as the knowledge of the memory is the boundary of the intelligence and wisdom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 The same is signified by what was said to Abraham: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유브라데까지 자손에게 주노니 (15:18) Un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 from the river of Egypt unto the great river, the river Euphrates (Gen. 15:18).

 

경계는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These two boundaries have a like signification.

 

해설

AC.120은 앞의 AC.118에서 브랏’, 곧 유브라데가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한 설명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미가 조금 더 구체화됩니다. ‘애굽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도 기억지식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러한 기억지식이 나오는 감각적인 것들까지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기억지식이 왜 천적 인간의 질서에서 가장 바깥쪽에 놓이는지도 점차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연계에서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기억에 저장하는 것들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미7:10-12를 인용한 이유는 이 구절에 앗수르와 애굽과 강, 곧 유브라데가 함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천적 인간과 같이 되게 하실 주님의 오심에 관한 예언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여러 나라와 지역과 경계에 관한 표현도 단순한 지리적 이동에 머무르지 않고,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질서와 관계됩니다. 앞에서 에덴의 네 강을 천적 인간의 내적인 것들에 관한 묘사로 읽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2:18에서는 애굽의 시홀 물을 마시는 것과 앗수르로 가서 유브라데 물을 마시는 것이 함께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애굽유브라데가 기억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는 거기서 나오는 추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인용은 특히 중요합니다. 앞의 AC.119에서는 앗수르가 이성을 의미한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추론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성적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이성이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 추론하는가는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근거로 위의 것들을 판단하려는 질서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이성의 명철함을 받는 질서는 같지 않습니다.

 

80:8, 11의 포도나무는 애굽에서 나와 심어지고 그 가지가 바다까지, 넝쿨이 유브라데까지 뻗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유브라데강이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연적인 경계와 영적인 경계의 관계를 통하여 직접 설명합니다. 유브라데가 앗수르 쪽을 향한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였던 것처럼, 기억지식은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에게 있는 지성과 지혜의 경계입니다. 따라서 경계라는 말은 기억지식을 무가치한 것으로 낮추는 표현이 아니라, 그것이 내적인 생명이 자연적인 차원에 이르는 가장 바깥쪽에 놓여 있음을 나타냅니다.

 

15:18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 땅이 애굽 강에서 큰 강 유브라데까지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경계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을 둘러싼 자연적인 경계 역시 속뜻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상태와 관계된 경계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앞의 AC.117에서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 들어 있는 모든 것도 아르카나를 의미하고 표상하며 그 안에 담고 있다고 한 원리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입니다.

 

AC.120은 또한 AC.80 이후 계속 남아 있던 감각과 기억지식의 문제를 상당히 선명하게 해 줍니다.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은 인간에게 없어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에게도 그것들은 존재하며 전체 질서의 경계를 이룹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의 경계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과 신앙의 내적인 것들을 판단하려는 데 있습니다. AC.118에서 참된 이성의 명철함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의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고 했으므로, 거듭난 질서에서는 생명의 흐름이 가장 바깥에서 안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AC.120의 여러 인용 구절은 모두 유브라데가 왜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을 의미하며, 왜 그것이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불리는지를 밝히는 데 기여합니다. 미가는 이 의미를 주님의 오심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큰 문맥에 놓고, 예레미야는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추론의 문제를 보여 주며, 시편과 창세기는 유브라데라는 실제 경계를 통하여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감각과 기억지식은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놓여야 하며, 그 위에 있는 이성과 지성과 지혜 역시 궁극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AC.120)

 

 

 

AC.121, 창2:14, ‘천적 질서 -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지식까지’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천적 질서의 본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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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9, 창2:14, ‘앗수르는 이성을 의미한다 -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의 구별’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앗수르’(Asshur)가 이성적 마음, 곧 사람의 이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들에서 매우 분명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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