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2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더 깊은 아르카나가 함축되어 있음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woman)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는 것은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곧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It requires but little attention in anyone to discern that 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 and that deeper arcana are here implied than any person has heretofore been aware of. And that by the “woman” is signified man’s own may be known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3:1-6)

 

해설

AC.152는 먼저 창2:21-22의 갈빗대와 여자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직접적인 입장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실제로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으며, 이 말씀 안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152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하는 범위에서는 이 장면을 먼저 신체적으로 여성이 만들어진 과정을 기록한 사건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에 관한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되어 온 해석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48-149에서는 뼈와 살의 의미를 통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AC.152의 첫 문장은 갑자기 등장하는 주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진 속뜻의 설명을 전제로 한 결론입니다. 문자에 나타난 갈빗대와 여자의 장면 안에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생명을 얻는가 하는 더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여자’(woman)가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창3의 이야기와 연결합니다. 그 근거는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2의 여자와 창3의 여자를 하나의 연속된 내적 의미 안에서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창2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여자’로 표현되었고, 이후 창3에서는 바로 그 여자가 속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연결을 통해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곧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만 떼어 놓으면 ‘proprium은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며 언제나 악하다’고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주님께서 proprium을 주시며,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이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라고 했습니다. AC.151에서도 여자는 단순히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52의 마지막 문장을 앞의 설명들과 분리하여 proprium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속임을 당하는’ 상태에 놓인 인간의 proprium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으려 할 때, proprium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proprium이 인간을 속입니다. 이것은 AC.146에서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에게 proprium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의 지배를 받는가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52는 창2와 창3 사이에 중요한 다리를 놓습니다. 창2에서는 인간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면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그대로 죽어 있는 상태에 두지 않으시고 생명을 주어 인간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이 proprium이 이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쪽으로 기울게 되면, 창3에서 여자가 뱀에게 속임을 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 이야기는 창2와 단절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된 proprium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여자 = proprium’이라는 표현 역시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51-15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현재 창2-3의 이 특정한 문맥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응의 의미는 다루는 주제와 문맥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여자’가 등장할 때마다 무조건 proprium으로 바꾸어 읽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현재 이 여자를 왜 proprium으로 해석하는지를 그 이야기의 연속성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AC.152는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창2 후반부의 해석을 창3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갈빗대와 여자는 인간 남녀의 기원에 관한 문자적 설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며, 특히 여자가 속임을 당한다는 다음 장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앞 번호들을 함께 읽으면 proprium 자체를 악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되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어 인간을 속이는 proprium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게 됩니다. (AC.152)

 

 

 

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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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1, 창2:22, ‘여자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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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짓는 것’(build)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하고, ‘갈빗대’(rib)는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며, ‘그 여자를 사람에게로 이끌어 오신 것’(he brought her to the man)은 그의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교회의 후손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천적 인간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proprium으로 기울었고, 그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었으며, 그러므로 ‘여자’(woman)라 하고, 뒤에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By to “build” is signified to raise up what has fallen; by the “rib,” man’s own not vivified; by a “woman,” man’s own vivified by the Lord; by “he brought her to the man,” that what is his own was granted him. The posterity of this church did not wish, like their parents, to be a celestial man, but to be under their own self-guidance; and, thus inclining to their own, it was granted to them, but still an own vivified by the Lord, and therefore called a “woman,” and afterwards a “wife.”

 

해설

AC.151은 창2:22의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는 말씀의 주요 표현들을 하나씩 풀이하면서, AC.131부터 이어져 온 proprium의 논의를 중요한 지점까지 정리합니다. 특히 이제 ‘갈빗대’와 ‘여자’의 차이가 명확하게 제시됩니다. 갈빗대는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입니다.

 

먼저 ‘짓는 것’(build)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여자를 지으신다는 것은 속뜻에서 전혀 없던 어떤 독립적인 proprium을 새로 만들어 인간에게 붙여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의 인도를 원하며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 있는 인간을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얻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짓는다’는 것은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의미를 가집니다.

 

‘갈빗대’(rib)는 AC.147-149에서 설명한 것처럼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게는 이것이 매우 소중하고 심지어 모든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이 천국에서 볼 때 생명 없는 뼈처럼 보이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갈빗대에서 여자가 지어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죽어 있는 proprium이 그대로 존속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로 생명을 얻는 방향으로 변화되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여자’(woman)는 이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 대목은 앞의 AC.138을 읽을 때 우리가 조심스럽게 유보했던 부분을 본문 자체가 확정해 줍니다. AC.138에서는 ‘그를 돕는 배필’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고 뒤에서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라고 한다는 정도까지만 설명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때에는 ‘여자’를 문맥과 관계없이 언제나 proprium을 뜻하는 고정된 상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AC.151에 이르러서야 현재 창2:22의 문맥에서 ‘여자’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직접 밝혀집니다. 곧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입니다.

 

‘그 여자를 사람에게로 이끌어 오신 것’(he brought her to the man)은 그의 proprium이 그에게 허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 역시 AC.132 이후 반복되어 온 ‘허락된 proprium’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욕구 자체를 인간 안에 악으로 주입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원하는 proprium을 그 자체로 죽어 있는 상태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proprium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둘째 문단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역사적·교회적 배경을 다시 분명히 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사람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입니다. 그들은 조상들처럼 천적 인간이 되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습니다. 바로 이 욕구 때문에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기울어진 상태에서조차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지만, 그것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이 창2의 이 장면을 단순한 타락의 묘사로만 읽을 수 없게 합니다.

 

여기서 AC.147의 ‘깊은 잠’도 다시 의미를 갖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기며, 자기에게 속한 것을 가진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AC.149-150에서 밝혀졌듯 실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제 AC.151은 인간이 원했던 바로 그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그에게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역사는 인간에게 자기 경험을 빼앗아 자기 자신이 없는 존재로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이 자기 것으로 경험하는 proprium이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을 ‘여자’(woman)라 하고 뒤에는 ‘아내’(wife)라고 한다고 말합니다. 현재 번호에서는 아직 ‘여자’와 ‘아내’라는 두 표현 사이의 차이를 자세히 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 차이에 별도의 의미를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문맥의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이며, 그 proprium이 인간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 설명에서 이 여자가 사람과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가 더 밝혀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51)

 

 

 

AC.152, 창2:22,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2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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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0, 창2:21, ‘깊은 잠 -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기는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50인간이 자신의 proprium 안에 있을 때, 곧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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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8

인간의 proprium, 곧 그에게 소중한 proprium을 가슴의 뼈인 ‘갈빗대’(rib)라고 하는 까닭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가슴은 심장과 폐를 모두 담고 있기 때문에 체어리티를 의미했고, 뼈는 생명력이 극히 적기 때문에 더 비천한 것들을 의미했으며, 살은 생명력이 있는 것들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들의 근거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알고 있던 가장 깊은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이며, 이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뒤에서 다루겠습니다. The reason why what is man’s own (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 is called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 is that among the most ancient people the chest signified charity, because it contains both the heart and the lungs; and bones signified the viler things, because they possess a minimum of vitality; while flesh denoted such as had vitality. The ground of these significations is one of the deepest arcana known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해설

AC.148은 AC.147에서 인간의 proprium을 ‘갈빗대’(rib)라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으면서도 인간에게 소중한 proprium을 의미하고,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8은 왜 이러한 의미가 갈빗대와 살에 담길 수 있는지를 태고교회 사람들이 알고 있던 신체의 상응을 통해 설명합니다.

 

먼저 가슴은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이유는 가슴 안에 심장과 폐가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 번호에서는 심장과 폐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며,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체어리티와 연결되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심장은 사랑이고 폐는 신앙이라는 식으로 뒤의 설명을 미리 가져와 체계를 완성하기보다, 우선 ‘가슴은 심장과 폐를 함께 담고 있기 때문에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AC.148의 직접적인 설명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음으로 뼈는 ‘더 비천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뼈에 생명력이 극히 적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AC.147에서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한 배경입니다. 여기서 ‘비천하다’는 말을 곧바로 ‘악하다’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근거는 뼈가 악한 신체 부위이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력이 극히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초점은 도덕적인 악의 판정이라기보다 생명력의 정도에 있습니다.

 

반대로 살은 생명력이 있는 것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AC.147의 ‘갈빗대 대신의 살’이라는 표현에는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과 생명력이 있는 proprium 사이의 차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AC.148 역시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까지는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분명한 것은 갈빗대와 살의 차이가 단순히 신체 조직의 차이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생명력이 거의 없는 것과 생명력이 있는 것의 차이를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신체의 특징을 관찰하여 우리가 새로운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슴에는 심장과 폐가 있으니 이런 뜻일 것이다’, ‘뼈는 단단하니 이런 성질을 뜻할 것이다’라는 식으로 자유롭게 상징을 추론하도록 초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의미들의 근거가 태고교회 사람들이 알고 있던 ‘가장 깊은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현재 본문에서 밝혀진 가슴과 뼈와 살의 의미는 받아들이되, 그 이상의 세부 관계는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직접 설명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살펴본 고대인들의 상응 이해와도 연결됩니다. AC.143에서는 고대인들이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었고 영계에서 애정들이 동물로 표상되기 때문에 짐승을 통해 애정을 말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AC.144에서는 이름이 본질과 성질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그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8에서는 인간 신체의 가슴과 뼈와 살에도 태고교회 사람들이 알고 있던 깊은 의미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대상과 영적인 실재의 관계가 동물이나 이름에만 한정되지 않고 인간의 몸에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서 멈춥니다. 그 근거가 ‘가장 깊은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라고 밝힌 뒤 ‘주님의 신적 자비로 뒤에서’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이 유보 자체가 현재 독자에게 중요한 지침이 됩니다. 갈빗대가 왜 proprium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첫 번째 답은 얻었습니다. 가슴은 체어리티를 의미하고, 갈빗대는 그 가슴의 뼈이며, 뼈는 생명력이 극히 적은 것을 의미하고, 살은 생명력이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이상의 깊은 근거는 아직 독자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AC.148은 AC.147의 갈빗대와 살의 대비에 상응적 근거를 제공하면서도 동시에 해석의 경계를 분명히 정해 주는 번호입니다. 인간에게 소중하지만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이 왜 ‘갈빗대’로 표현되는지 이제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상응의 가장 깊은 질서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밝혀 준 만큼 정확히 이해하고, 그가 뒤에서 다시 이 아르카나를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이 번호를 읽는 가장 적절한 태도입니다. (AC.148)

 

 

 

AC.149, 창2:21, ‘죽어 있는 인간의 proprium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9말씀에서도 인간의 proprium은 ‘뼈들’(bones)로 의미되며, 실제로는 주님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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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7, 창2:21, ‘갈빗대와 깊은 잠 - 자기에게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 (AC.147-15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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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창2:21)

 

AC.147

가슴의 뼈인 ‘갈빗대’(rib)는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며, 실제로는 그에게 소중한 proprium을 의미합니다. ‘갈빗대 대신의 살’(flesh in the place of the rib)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합니다. ‘깊은 잠’(deep sleep)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속한 것을 가진 것처럼 스스로에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들어가도록 허용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상태는 잠과 비슷한데, 그 안에 있는 동안 사람은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그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일깨워져 깨어 있게 됩니다. By a “rib,” which is a bone of the chest, is meant man’s own, in which there is but little vitality, and indeed an own which is dear to him; by “flesh in the place of the rib” is meant an own in which there is vitality; by a “deep sleep” is meant the state into which he was let so that he might seem to himself to have what is his own, which state resembles sleep, because while in it he knows not but that he lives, thinks, speaks, and acts, from himself. But when he begins to know that this is false, he is then roused as it were out of sleep, and becomes awake.

 

해설

AC.147은 이제 창2:21의 ‘갈빗대’와 ‘깊은 잠’을 직접 설명하면서, AC.132부터 계속 다루어 온 proprium의 문제가 어떻게 인간의 실제 경험 속에 자리 잡게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proprium을 원했고, 주님께서 그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을 허락하셨다고 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 상태를 갈빗대와 살, 그리고 깊은 잠이라는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먼저 ‘갈빗대’(rib)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두 가지 중요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것은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소중한’ proprium입니다. 이 둘은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그것 자체에는 참된 생명이 거의 없습니다. 앞에서 계속 말해 온 것처럼 실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가장 자기 것이라고 여기고 애착을 가지는 바로 그것이, 그 자체로는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는 역설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이어 ‘갈빗대 대신의 살’(flesh in the place of the rib)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합니다. AC.147은 아직 갈빗대가 어떻게 살로 바뀌며 그 변화가 어떤 과정을 뜻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적어도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과 생명력이 있는 proprium 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둡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proprium을 하나의 고정된 부정적 개념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141에서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proprium이 있다고 했던 것처럼, 이제 갈빗대와 살의 대비를 통해 proprium의 성질이 변화될 수 있다는 방향이 다시 나타납니다.

 

‘깊은 잠’(deep sleep)의 의미는 더욱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자기에게 속한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들어가도록 허용된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인간이 정말로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을 갖게 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그렇게 ‘보이는’ 상태가 허용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40의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이라는 표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상태를 잠에 비유하는 이유도 바로 이어서 설명됩니다. 사람은 그 상태 안에 있는 동안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여깁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과 사고와 말과 행동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AC.147은 이것을 사실 그대로의 인식이 아니라 ‘잠과 같은 상태’로 설명합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생명의 실제 근원을 아직 깨어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사람이 ‘이것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그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일깨워져 깨어 있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에게서 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고 느끼는 경험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경험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인식입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기 시작할 때 비로소 인간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은 상태로 들어갑니다.

 

이 설명은 AC.140-141에서 제시한 proprium의 구조를 한층 더 분명하게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주어지고,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깨어난다는 것은 자기 삶의 경험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임을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재 AC.147이 직접 말하는 범위 안에서는 여기까지가 가장 안전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AC.147의 ‘깊은 잠’은 단순한 육체적 수면을 넘어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아간다고 여기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갈빗대’는 인간이 소중히 여기지만 생명력이 거의 없는 proprium을,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사람이 자기 자신이 생명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거짓임을 알기 시작할 때 그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깨어 있게 됩니다. 이제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이 proprium이 어떻게 ‘여자’로 지어지는지가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AC.147)

 

 

 

AC.148, 창2:21, ‘왜 proprium을 갈빗대라고 하는가 - 가슴과 뼈와 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AC.148인간의 proprium, 곧 그에게 소중한 proprium을 가슴의 뼈인 ‘갈빗대’(rib)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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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6, 창2:19-20, ‘선과 진리를 알고도 proprium으로 기울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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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창2:18)

 

AC.138

‘혼자’(alone)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 인도받기를 원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를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며, 이것은 뒤에서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rib built into a woman)라고 합니다. By “alone” is signified that he was not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d to be led by self and the world; by a “help as with him” is signified man’s own, which is subsequently called a “rib built into a woman.”

 

해설

AC.138부터는 AC.132에서 미리 요약했던 창2:18의 속뜻을 구체적으로 풀기 시작합니다. 먼저 ‘혼자’(alone)는 단순히 곁에 다른 사람이 없는 외로운 상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여기서 ‘혼자’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창2:18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는 이 문맥에서 사회적 고독의 문제보다 먼저, 주님의 인도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에게 속한 어떤 것으로도 살아가기를 원하는 인간의 상태를 다룹니다.

 

이 설명은 AC.131부터 이어져 온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AC.132에서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AC.133에서는 주님께서 먼저 그에게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지만 그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다고 했으며, AC.134에서는 마침내 그가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138의 ‘혼자’는 지금까지 설명된 이 상태를 창2:18의 한 표현 안에서 다시 짚어 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그를 돕는 배필’(help as with him)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해석입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마련하시는 장면이지만, 지금 다루는 속뜻에서는 인간이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그 proprium이 중심에 놓입니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스베덴보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남성과 여성 가운데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돕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인간에게 proprium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C.138은 이 proprium을 뒤에 나오는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rib built into a woman)와도 직접 연결합니다. AC.134에서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장면 전체가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것을 묘사한다고 했는데, 이제 그 관계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창2:18의 ‘그를 돕는 배필’과 창2:21-23의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는 서로 떨어진 두 표상이 아니라 동일한 proprium의 문제를 이어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만 왜 하필 ‘갈빗대’이며, 그것이 ‘여자’로 지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 설명되지 않았으므로 다음 번호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이 proprium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중요한 질문을 낳습니다. 앞에서는 인간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것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창2:18에서는 바로 그 proprium에 해당하는 것이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원했던 proprium을 주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다루셔서 인간의 삶 가운데 둘 수 있게 하시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 AC.138은 아직 그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앞의 개요에서는 이미 몇 가지 중요한 단서가 주어졌습니다. AC.134에서는 인간이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는다고 했으며, AC.135에서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그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AC.136에서는 다시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그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것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하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주어진 proprium을 주님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를 허용하시면서도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여기서 ‘여자’를 곧바로 proprium의 고정된 상응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것은 창2:18-23의 특정한 문맥입니다. AC.103에서 확인했듯이 말씀의 표현은 그것이 놓인 주제와 문맥을 떠나 기계적인 일대일 대응표처럼 다룰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가 주제이므로 ‘그를 돕는 배필’과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가 그 proprium을 묘사합니다. 이후 다른 문맥에서 ‘여자’가 등장한다고 해서 언제나 같은 의미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138에서 지금 붙들어야 할 것은 세 가지 표현을 하나의 흐름 안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혼자’는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상태를 의미하고, ‘그를 돕는 배필’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며, 그 proprium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여자로 지어진 갈빗대’로 묘사됩니다. 이제 남는 질문은 ‘그를 돕는 배필’이 왜 proprium을 의미하는지, 갈빗대가 왜 proprium을 나타내는지, 그리고 그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과정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입니다. 이 질문들은 앞질러 답하기보다 이어지는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며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38)

 

 

 

AC.137, 창2:18-25 배경,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 천적 인간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후

AC.137창세기의 처음 세 장은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이 교회는 그 처음 시기부터 멸망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합니다. 이 장의 앞부분은 태고교회가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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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1-23절)

 

AC.134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그에게 proprium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21-23절) Wherefore he is let into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is given him, which is described by the rib built into a woman (verses 21 to 23).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1-23절)

 

해설

AC.134는 AC.131부터 시작된 짧은 개요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주님께서는 먼저 그들에게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자, 이제 그들은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창2:21-23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는 장면이 바로 이 과정을 묘사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들어가도록 허용되고’와 ‘주어집니다’라는 두 표현입니다. 인간이 단순히 주님에게서 벗어나 자기 힘으로 proprium을 만들어 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proprium을 원하지만, 그 상태로 들어가는 것조차 허용되며 proprium도 그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 본문을 읽을 때에는 인간의 proprium을 주님과 완전히 독립하여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왜 주님께서 이것을 허용하시며 어떤 의미에서 proprium을 ‘주신다’고 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AC.134는 창2:21-23의 ‘여자’를 해석하는 방향을 미리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이 문맥에서 여자는 우선 자연적 성별로서의 여성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proprium을 묘사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근거로 남성과 여성의 가치나 우열을 논하는 것은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속뜻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갈빗대가 여자로 만들어지는 장면 전체가 태고교회 후손들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내적 과정을 나타낸다는 것이 AC.134의 요점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여자 곧 proprium’이라는 고정된 상응 공식을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AC.103에서 이미 보았듯이 어떤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놓인 주제와 문맥에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AC.131부터 계속 다루고 있는 주제가 태고교회 후손들의 proprium이므로, 창2:21-23의 여자가 그 proprium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왜 ‘갈빗대’이며, 왜 그것을 ‘여자’로 만드셨는지는 아직 AC.134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는 ‘proprium이 주어졌다’는 말을 곧바로 ‘악이 주어졌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132에서도 ‘허락된 proprium’이라고 했고, AC.134에서는 다시 ‘proprium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성향이 이 과정의 배경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주님께서 그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고 어떤 proprium을 주시는지는 아직 설명 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proprium의 성질에 대한 최종 판단은 다음 번호들을 읽은 뒤 내려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32-134에는 하나의 분명한 순서가 있습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그에게 주님께서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자, 그가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시고 그에게 proprium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갈빗대와 여자의 이야기는 인간의 요구를 주님께서 단순히 거절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요구를 주님의 질서 안에서 다루시는 과정으로 읽기 시작해야 합니다.

 

AC.134는 아직 그 과정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창2:21-23이 무엇을 묘사하는지만 먼저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갈빗대가 왜 proprium인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주시는 proprium은 인간이 처음 원했던 proprium과 같은 것인가’ 같은 질문을 열어 둔 채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이 질문들이 이어지는 본문을 읽게 하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AC.134)

 

 

 

AC.135, 창2:18-25 개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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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 창2:18-25 개요, ‘먼저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다’ (19-20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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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1-23)

 

 

※ 오늘은 창세기 2장,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갈빗대 하나를 꺼내 여자를 만드셨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창세기 본문을 통해, 과연 이 본문의 속뜻, 겉 글자의 뜻이 아닌, 거기 담긴 아르카나(arcana 라틴, 秘義)는 무엇인지, 특히 여기 등장하는 ‘여자’는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거의 모든 결혼식이나 결혼 관련 글마다 언급되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표현이 과연 무슨 뜻인지 등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본문은 사람 안의 두 자아(自我, self, own, proprium 라틴, 본성)에 대한 내용인데요, 처음 주신 자아가 본래의 기능을 못 하게 되자, 여호와 하나님은 새로운 자아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여자’라는 것입니다.

 

※ 이 자아는 ‘본성’(本性)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데 초창기 영역에서는 영어 ‘own’(proprium, 라틴, 고유 본성, 자아)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영어 역본인 NCE(New Century Edition) 역에서는 ‘a sense of self’, ‘selfhood’, ‘a sense of autonomy’, 혹은 ‘identity’ 등으로도 옮기고 있습니다.

 

새 교회에서는 자아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까요? 새 교회의 교리는 자아는 악 그 자체라고 하고,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아가 죽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아는 정말 그렇게 악한 것일까요? 엄밀히 말하면, 자아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인데, 거듭나기 전의 자아가 있고,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주님에 의해 새롭게 주어지는 자아가 있습니다. 자아를 악하다 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의 자아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지 않는 죽은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 ‘악’(惡, evil)이란 주님에 대한 안 좋은 태도로서, 사람이 자기 본성을 주님보다 더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태도가 안 좋은 것은, 이것으로 인해 주님의 모든 창조의 질서가 헝클어지고, 훼손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주어지는 자아는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살아있는 자아입니다.

 

※ 아래는 본문 중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만드시고’에 관한 글입니다.

 

갈빗대를 가리켜 ‘여자를 만드시고’(to be built into a woman)라고는 하시지만, 전에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창조하다’(created), ‘짓다’(formed), ‘만들다’(made)라고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만드는 것’(to build)은 쓰러져 있는 걸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서 이 뜻으로 쓰이는 곳마다, ‘만드는 것’(to build)은 주로 악에 관한, ‘일으켜 세우는 것’(to raise up)은 거짓에 관한, 그리고 ‘새롭게 하는 것’(to renew)는 둘 다에 관한 서술일 때입니다. (AC.153, 변일국 역)

 

그렇기 때문에 보통 전자를 지옥적 자아라고 부르고, 후자를 천국적 자아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지옥적 자아의 상태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려고 하며, 심지어 주님이 도와주시려 해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옥적 자아를 버리고 주님으로부터 천국적 자아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인간에게 자아라는 것을 주셨을까요? 자아는 인간을 독립적인 존재로 만드는 일종의 자발성(voluntary)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을 당신에게 종속된 기계와 같은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판단하여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독립적인 존재로서 주님과 대화하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다시 그것을 주님께 돌려드리는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창조물 가운데 인간 말고는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자아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겁게 생각해야 하고, 또한 주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인간의 자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1입니다.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잠이 들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심지어 알려고 하지도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상태인데요, 그것이 영적으로는 깊이 잠들어 있는 상태, 잠든 상태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갈비뼈를 하나 취하셨습니다. 갈비뼈는 인간의 첫 자아로,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지 않는 자아를 뜻합니다. 그것은 지독하리만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자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갈비뼈에 비유했습니다. 갈비뼈의 단단하면서 안으로 구부러져 있는 모양이 자아의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위 말씀에 대한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 148번 글입니다. 참고하세요.

 

사람의 고유 본성(man’s own), 실제로 그가 무척 소중히 여기는 본성을 가슴에 속한 뼈인 ‘갈빗대’(a rib)라 하는 이유는, 태고인들 사이에서 가슴은 체어리티(charity)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심장과 폐가 들어있기 때문이지요. 뼈(bones)라는 건 아주 꺼림칙한 걸 의미했는데, 그 안에 생기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살(flesh)은 생기 있는 걸 가리켰지요. 이런 상응들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알려진 가장 깊은 아르카나 중 일부인데, 이 아르카나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에 속한 것입니다. (AC.148, 변일국 역)

 

주님께서 갈빗대 하나를 들어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채우셨습니다. 살은 사람이 거듭나기 시작할 때, 주님이 새롭게 주시는 자아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살아 있는 자아인 것이지요. 살아있는 자아이기 때문에 그것을 뼈가 아니라 부드러운 살로 표현했습니다. 살아있는 자아란,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며,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과 함께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신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자아입니다. 그러니 살아 있는 자아를 소유한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높이면서 다른 사람은 가볍게 여길 수 없으며, 모든 사람과 화합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자아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갈빗대 일부가 살로 채워졌다는 것은 생명 없는 죽은 자아가 생명이 흐르는 살아있는 자아로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아가 바뀌게 되면 사람도 따라 바뀝니다. 전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생각대로만 하려고 하고, 자신의 이익만 좇던 사람이 점차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살피면서 그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가 생긴다는 것은, 잠들어 있던 사람이 깨어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여호와께서 아담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갈빗대’는 거듭나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자아, 즉 지옥적 자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여자’는 거듭나는 사람에게 주님이 새로 주시는 천국적 자아를 뜻합니다. 따라서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자아가 지옥적 자아에서 천국적 자아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자를 데리고 오시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에게 새로운 자아인 천국적 자아를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처음부터 천국적인 자아를 주시지 않고, 지옥적 자아를 주시고 나서 천국적 자아를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거듭나기 전의 사람에게 천국적 자아를 주시는 것은 그의 자유를 해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이기적인 사람에게 억지로 이웃 사랑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거듭나기 전에는 그의 애정에 맞는 자아, 즉 지옥적 자아를 허락하시고, 거듭나려고 애쓰기 시작할 때, 비로소 천국적인 자아를 주십니다.

 

※ 다음은 ‘천국과 지옥’ 456번 글 3번 항 인용입니다. 역시 같은 질문, 즉 ‘왜 주님은 처음부터 보여주거나 알려주지 않으시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떠나는 사람들 거의 모두가 자기들이 살아있으며, 전과 하나도 다름없이 보고 듣고 말하고 몸의 모든 촉감이 살아있는 똑같은 사람임을 발견하고 크게 놀란다. 그들은 자신에 대해 놀라고 난 다음에는 이 세상에 산 모든 사람이 저 세상에서 사람으로 살고 있는데도 교회가 사람의 이러한 사후 상태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따라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놀란다. 또 그들은 교회의 신앙에 있어 이토록 핵심적인 사실을 왜 사람들에게 환상으로라도 보여 주지 않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면 천국에서 이런 대답을 들려준다. 주께서 하고자 하시면 그보다 쉬운 일은 없으므로 그렇게 할 수 있었겠지만, 반대되는 거짓을 확고히 한 사람들은 그들의 눈으로 본다고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거짓 안에 있을 때, 환상으로 무엇을 확신시키는 일은 위험하다. 그렇게 하면 그들은 처음에는 믿겠지만, 나중에 부인하게 되고, 그것은 진리 자체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믿다가 나중에 부인하는 것이 모독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모독한 사람들은 모든 지옥 중에서도 가장 낮은 무서운 지옥에 가게 된다. (HH.456:3, 김은경 역)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자를 데려가셨을 때 아담이 한 말입니다.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아담이 여자를 가리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겉 사람 안으로 새로운 자아를 보내 주실 때의 자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겉 사람 안에 천국적 자아와 지옥적 자아가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하지요.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뼈 중의 뼈는 겉 사람 안에 본래부터 있던 지옥적 자아를 말하고, 살 중의 살은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해 새로 주시는 천국적 자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동안, 겉 사람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처럼, 자아도 천국적 자아와 지옥적 자아가 공존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는 지옥적 자아가 천국적 자아를 누르고 올라서고, 어느 때는 천국적 자아가 지옥적 자아를 누르고 올라섭니다. 그런 과정들을 거쳐 천국적 자아가 지옥적 자아를 완전히 누를 때, 인간은 비로소 거듭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아담이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말하는 것은 사람이 천국적 자아를 통해 거듭난 상태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것’은 거듭나고자 힘쓰는 사람에게 주시는 새로운 자아인 천국적 자아를 뜻하고, ‘남자’는 속 사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여자’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잘못된 번역이고, ‘아내’(wife)가 맞습니다. 그리고 본문 원전에 여자라고 하지 않고, 아내라고 한 것은 완전히 거듭난 사람의 겉 사람 안에 있는 자아는 아내가 남편을 섬기는 것처럼 속 사람에게 완전히 복종하는 자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의 자아를 아내라고 부를 때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완전하게 결합한 상태, 즉 완전히 거듭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해 인간이 거듭나는 데 있어서 자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란 누구의 강요 없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주님께 복종하도록 하는 자발성, 또는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76번 글 2번 항은, ‘자아가 없다면 아무도 주님으로부터 믿음과 인애에 관한 모든 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76:2, 이순철 역) As good and truth so appear, so do all things of the church and of heaven, and all things of love and wisdom, and all things of charity and faith; yet none of them is man’s. No one can receive them from the Lord unless it seems to him that he perceives them for himself. (DP.76:2)

 

※ 위 문장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5장, ‘사람이 이성으로 자유롭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법칙 중 하나다’(It Is a Law of Divine Providence That Man Shall Act from Freedom According to Reaso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없는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두 가지 자아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거듭나기 전의 자아로 지옥적 자아이고, 또 하나는 거듭나기 시작하면서 주시는 천국적 자아입니다. 새 교회 가르침에서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자아는 천국적 자아이며, 그 전의 자아는 자아의 외관(appearance of proprium)일 뿐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적 자아가 생기기 전의 자아는 진정한 자아가 아니고, 자아처럼 보이는 어떤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적 자아에는 주님의 생명이 있고, 인간의 자아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 진정한 자아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매 순간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로 지옥적 자아를 딛고, 천국적 자아를 선택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이 주신 자유를 선용하여 부단히 천국적 자아를 획득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하나 되어 영원히 사는 일이며,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얻는 길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겔37:5)

 

아멘

 

 

2021-11-0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2025-02-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025-02-16(D1)-주일예배(2584, 창2,21-23),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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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도.2025-02-16(D1)-주일예배(2584, 창2,21-23),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의 속뜻.pdf
0.23MB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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