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3에서 스베덴보리는 호6:2-3을 인용하면서 천적 인간의 이 상태가 ‘셋째날’에 이루어지며, ‘셋째날’은 말씀에서 ‘일곱째날’과 같은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숫자로 보면 3과 7은 전혀 다른데, 어떻게 둘이 같은 것을 뜻할 수 있을까요?
먼저 ‘같은것을뜻한다’는 말을 숫자 3과 7의 모든 상응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93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숫자가 이 특정한 상태를 나타내는 점에서 서로 만난다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앞에서 ‘일곱째날’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여섯 날 동안의 싸움이 끝나고 주님께서 쉬시는 날이며,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의 안식입니다. AC.84-88에서 이 일곱째 날은 싸움의 종결, 주님의 안식, 그리고 주님 홀로 이루신 거듭남의 완성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런데 AC.93에서 인용한 호세아에서는 ‘셋째날’에 이와 매우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틀후에우리를살리시며셋째날에우리를일으키시리니우리가그의앞에서살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셋째 날은 죽음과 같은 상태에서 생명을 얻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사는 새로운 상태와 연결됩니다. 이어서 주님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과 같고, 그분은 땅을 적시는 ‘비’와 같이 오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93의 문맥에서 셋째 날과 일곱째 날이 만나는 지점은 새로운 생명의 상태입니다. 일곱째 날에는 싸움이 끝나고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시작되며, 셋째 날에는 사람이 살아나고 일으켜져 주님 앞에서 삽니다. 둘 다 이전 상태가 끝나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명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씀의 숫자를 단순한 산술적 수량으로만 읽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째날’과 ‘일곱째날’이라는 표현 안에서 사람이 거듭나는 상태를 봅니다. 그렇다고 해서 ‘3=7’이라는 새로운 상응 공식을 만들어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AC.93이 직접 말하는 범위는 이 천적 인간의 상태와 관련하여 ‘셋째날’이 ‘일곱째날’과 같은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호세아의 인용은 단순히 ‘셋째날’이라는 숫자의 증거 구절이 아닙니다. ‘살리심’, ‘일으키심’, ‘주님앞에서삶’, ‘새벽’, ‘비’가 한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이것들은 AC.84이후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안식과 평화, 그리고 AC.90-92에서 설명한 비와 평화의 생명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AC.93에서 ‘셋째날’과 ‘일곱째날’이 같은 것을 뜻한다는 말은 두 숫자의 모든 의미가 동일하다는 선언이라기보다, 말씀 안에서 둘 다 주님께서 사람을 새로운 생명의 상태로 이끄시는 완성과 일으키심을 나타낼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 세밀한 차이는 이후 스베덴보리가 각 숫자를 설명하는 곳에서 다시 살펴보아야 하지만, AC.93을 읽는 독자는 적어도 여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하고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AC.93심화1)
스베덴보리가 AC.433에서 마18:22를 인용한 이유는 라멕의 ‘일흔일곱배의보복’에 사용된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말씀은 얼핏 보면 서로 정반대의 내용을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형제를 끝없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창세기에서 라멕은 일흔일곱 배의 보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말씀을 연결합니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숫자 자체보다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을 먼저 살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문자적인 횟수로만 읽으면 용서할 수 있는 최대 횟수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말씀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형제가 죄를 범할 때마다 용서하여 그 용서가 끝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은 용서의 횟수를 계산하는 데 있지 않고, 용서에 끝을 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단순히 ‘계속용서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러한 숫자를 사용하셨을까요?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말씀의 ‘일곱’이 지니는 의미와 연결합니다. 일곱째 날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나타내며, 가장 높은 의미에서는 주님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일곱은 거룩한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에 나오는 일곱과 일흔 번씩 일곱 번은 단순한 계산을 넘어 거룩한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할 점이 있습니다. 창4:24의 표현은 ‘일흔일곱배’이고, 마18:22의 개역개정 표현은 ‘일흔번씩일곱번’입니다. 두 표현을 산술적으로 같은 수라고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구절을 연결하는 이유는 숫자가 계산상 동일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씀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을 나타내는 수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번 번호의 논증은 산술적 일치가 아니라 말씀의 영적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같은 계열의 숫자가 서로 다른 문맥에서 사용되는 이유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형제를 용서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는 표현을 끝없는 용서, 곧 영원한 용서로 풀이합니다. 반면 창세기에서는 라멕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두 구절은 같은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대상에 적용된 숫자의 의미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마태복음의 용서와 창세기의 정죄를 단순히 ‘하나는무한한자비,다른하나는무한한복수’라는 대칭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433에서 스베덴보리는 마태복음의 용서가 끝없고 영원하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라멕에 대해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했기 때문에 정죄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번 번호에서 정죄를 ‘끝없는복수’라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두 구절을 연결하되, 각각에 관해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내용은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의 용서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용서란 잘못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기거나 피해를 계속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433이 직접 설명하는 것은 용서의 횟수에 끝을 정하지 말라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실제 관계에서 잘못을 어떻게 바로잡고 어떤 경계를 세워야 하는지까지 이번 번호가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거룩한 의미를 받아들이면서도, 본문이 다루지 않은 문제에 관한 결론을 성급히 덧붙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마18:22를 인용한 것은 라멕의 보복을 용서와 동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말씀에서 일곱과 그에 연결된 수들이 문자적인 횟수를 넘어 거룩한 의미를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그 의미가 끝없는 용서로, 창세기에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로 나타납니다. 이 구별을 이해하면 ‘일흔일곱배의보복’이라는 낯선 표현을 단순한 형벌의 배율로 읽지 않고, 라멕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문맥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433심화1)
‘날들’(days)과‘해들’(years)이시대들과상태들을의미한다는것은더설명할필요가없습니다.다만세상에서는시간들과척도들이반드시있어야하며,그것들은자연의가장바깥차원에있기때문에거기에숫자들이적용될수밖에없다는점만말해두고자합니다.그러나시간들과척도들이말씀에사용될때에는언제나날들과해들의숫자들뿐아니라척도의숫자들까지도,그숫자의의미에따라시간과척도에서추상된의미를갖습니다.이를테면엿새동안일하고일곱째날은거룩하다고한것에대해서는위에서설명하였습니다.또한희년은마흔아홉째해마다선포하여쉰째해에지키도록하였고,이스라엘의지파들은열둘이었으며주님의사도들도같은수였고,장로들은일흔이었으며주님의제자들도그와같은수였습니다.이밖에도많은경우에숫자들은그것들이적용된대상에서추상된고유한의미를가지며,이처럼추상될때그숫자들이의미하는것은상태들입니다.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해설
AC.493은 앞의 AC.487에서 시작된 말씀의 숫자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분명하게 합니다. 핵심은 ‘말씀에숫자가나오면시간이나수량은아무의미가없고오직상징적인뜻만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자연계에서는 시간과 척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정합니다. 자연계는 ‘자연의가장바깥차원’(ultimatesofnature)에 있기 때문에 날과 해, 길이와 수량처럼 측정할 수 있는 형태가 필요하고, 거기에 숫자가 붙습니다. 문제는 말씀이 그 자연적인 숫자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담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493에서 중요한 표현은 ‘적용된대상에서추상된’(abstractedlyfromthethingstowhichtheyareapplied)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일곱’이라는 숫자가 날에 붙으면 일곱 날이 되고, 해에 붙으면 일곱 해가 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수에 붙으면 일곱 사람 또는 일곱 사물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에서는 그 외적인 대상에서 숫자를 추상하여 그 숫자 자체가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를 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추상되었을 때 숫자가 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상태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 어떤 숫자가 반복되는 것은 우연한 수치의 일치로만 볼 수 없습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 마흔아홉째 해 뒤에 쉰째 해를 희년으로 지키는 것,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둘이고 주님의 사도도 열둘인 것, 장로가 일흔이고 주님께서 보내신 제자들도 일흔인 것은 서로 전혀 다른 역사적 사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같은 숫자가 서로 다른 대상에 적용되면서도 그 숫자에 고유한 영적 의미를 유지하기 때문에, 말씀 전체 안에서 일정한 질서와 상응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숫자의 의미를 기계적인 암호 풀이로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7은언제나이것,12는언제나저것’이라는 식으로 숫자 하나에 하나의 한국어 뜻을 붙이는 방식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숫자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숫자는 고유한 기본 의미를 지니지만, 실제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는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과 대상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487이 말했듯이 800이나 930같은 합성된 큰 숫자에는 여러 상태와 그 변화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숫자 하나처럼 곧바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이 원리는 창5의 긴 연수들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아담이구백삼십세를살고죽었더라’라는 말씀에서 930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으로는 연수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그 숫자를 자연적인 ‘930년’이라는 시간 단위에서 추상하여 그 안에 담긴 교회의 상태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492가 ‘날들과해들’을 시대와 상태로 설명한 데 이어 AC.493은 그 상태가 말씀의 숫자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우리가 왜 창5의 숫자들을 성급하게 하나씩 해독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AC.487에서 800과 930을 비롯한 뒤의 숫자들에는 너무 많은 상태 변화가 들어 있어 여기서 하나하나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각 숫자의 암호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숫자가 자연적인 시간과 척도를 통하여 영적인 상태를 표현한다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AC.493은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무관한 두 세계가 아니라 상응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음을 숫자의 경우를 통해 보여 줍니다. 자연계에서는 상태가 시간과 척도와 수량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말씀은 바로 그 자연적인 형식을 사용하여 영적인 상태를 담아냅니다. 따라서 말씀의 문자에 기록된 숫자를 무시할 수도 없고, 반대로 문자적인 수량에만 붙잡혀서도 안 됩니다. 문자에 있는 숫자를 존중하면서 그 숫자를 통해 주님께서 어떤 영적 상태와 질서를 나타내시는지를 살피는 것, 이것이 AC.493이 제시하는 말씀의 숫자를 읽는 기본 원리입니다. (AC.493해설)
‘날들’(days)이일반적인시간과상태를의미한다는것은1장에서보여주었습니다.거기서창조의‘날들’은다른어떤것도의미하지않습니다.말씀에서는모든시간을‘날들’이라하는것이매우일반적인데,이는이구절과뒤이어나오는구절들(5, 8, 11, 14, 17, 20, 23, 27, 31절)에서분명히볼수있습니다.그러므로시간의상태들도일반적으로‘날들’에의해의미됩니다.그리고‘해들’(years)이덧붙여질때에는그해들의시기들에의해상태들의어떠함이의미되며,따라서특별한상태들이의미됩니다.태고인들은숫자들을가지고있었으며,그것들로교회와관련된여러가지것들을의미했습니다.이를테면‘셋’,‘일곱’,‘열’,‘열둘’과같은숫자들과,이것들과다른숫자들을조합하여만든많은수들이있었고,그것들로교회의상태들을묘사했습니다.그러므로이숫자들은설명하는데많은시간이필요한아르카나를담고있습니다.그것은교회의상태를헤아리고기록한것이었습니다.이와같은것은말씀의많은곳,특히예언서들에도나타납니다.유대교회의의식에도시간과측량에관한숫자들이있었는데,이를테면희생제사와소제와봉헌물과그밖의것들에관한숫자들이그러하며,그것들은적용되는바에따라어디에서나거룩한것들을의미합니다.그러므로여기‘팔백’이라는수와다음절의‘구백삼십’,그리고이어지는여러구절의연수에담겨있는것들,곧각교회의일반적인상태에적용된그교회의상태변화들은너무많아서일일이열거할수없습니다.이저작의뒤에서주님의신적자비로‘열둘’까지의단순한숫자들이무엇을의미하는지보여줄기회를갖게될것입니다.이것들의의미를알기전에는조합된숫자들의의미를이해하는것이불가능하기때문입니다.That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was shown in the first chapter, where the “days” of creation have no other signification. In the Word it is very usual to call all time “days,” as is manifestly the case in the present verse, and in those which follow (5, 8, 11, 14, 17, 20, 23, 27, 31); and therefore the states of the times in general are likewise signified by “days”; and when “years” are added, then by the seasons of the years are signified the qualities of the states, thus states in special.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heir numbers, by which they signified various things relating to the church, as the numbers “three,” “seven,” “ten,” “twelve,” and many that were compounded of these and others, whereby they described the states of the church; wherefore these numbers contain arcana which would require much time to explain. It was an account or reckoning of the states of the church. The same thing occurs in many parts of the Word, especially the prophetical.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lso there were numbers, both of times and measures, as for instance in regard to the sacrifices, meat offerings, oblations, and other things, which everywhere signify holy things, according to their application. The things here involved, therefore, in the number “eighthundred,” and in the next verse, in the number “ninehundredandthirty,” and in the numbers of years in the verses following—namely, the changes of state of their church as applied to their own general state—are too many to be recounted.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ake occasion to show what the simple numbers up to “twelve” signify, for until the signification of these is known, it would be impossible to apprehend the signification of the compound numbers.
해설
AC.487은 앞의 AC.482와 AC.486에서 제시한 원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날들’은 교회의 상태를 일반적으로 나타내고, ‘해들’은 그 일반적인 상태 안에 들어 있는 특별한 상태와 그 어떠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에 반복되는 ‘그의모든날은몇년이었다’는 표현은 속뜻에서 단순한 수명 계산이 아니라 한 교회가 존속하는 동안 겪은 전체적인 상태와 그 안의 여러 변화를 묘사하는 언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첫 근거로 창1의 창조의 ‘날들’을 듭니다. 창조의 여섯 날이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을 의미했던 것처럼, 창5의 날들도 단순히 24시간 단위의 날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창1과 창5가 서로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창1에서 한 사람 또는 교회가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상태들이 ‘날들’로 묘사되었다면, 창5에서는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거쳐 간 상태들이 다시 시간의 언어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AC.487은 여기서 숫자 자체의 의미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태고인들은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단순한 숫자들로 교회에 속한 여러 상태를 표현했고, 이 숫자들을 서로 조합하여 더 복잡한 상태들도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5의 800이나 930과 같은 큰 숫자를 곧바로 하나의 간단한 상응으로 바꾸어 ‘800은이것,930은저것’이라고 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여러 단순한 수가 결합된 숫자이며, 그 안에는 각 교회가 겪은 복합적인 상태 변화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기서 800과 930의 의미를 하나하나 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포함된 교회의 상태 변화가 ‘너무많아서일일이열거할수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숫자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절제의 원칙을 보여 줍니다. 숫자에 속뜻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숫자의 모든 의미를 곧바로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먼저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기본적인 숫자의 의미와 그것들이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알아야 조합된 숫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유대교회의 희생 제사와 소제와 봉헌물 등의 숫자를 함께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에서 숫자는 단순한 계산상의 장식물이 아니라,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과 문맥에 따라 거룩한 것들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제물의 수, 기간, 측량 등이 예배의 영적 실재를 표상했던 것처럼, 창5의 연수 역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내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숫자의 의미는 숫자만 떼어 내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특히 ‘그것은교회의상태를헤아리고기록한것이었다’는 설명은 창5의 족보를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문자에서는 아담이 몇 살에 셋을 낳았고 이후 몇 년을 더 살았으며 모두 몇 세에 죽었는지를 계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한 교회가 어떤 상태에서 시작하여 어떤 변화들을 거쳤으며 그 전체적인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헤아리고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5의 숫자들은 사람의 나이를 세는 계산표라기보다 교회의 상태를 기록하는 영적 언어인 셈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483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의 이름들이 각각 서로 다른 교회를 나타내고 그 교회들이 주로 퍼셉션의 차이로 구별되었다면, 각 이름 옆에 기록된 연수는 그 서로 다른 교회들의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창5에서는 ‘이름’과 ‘숫자’를 따로 떼어 읽을 수 없습니다. 이름은 어떤 교회인지를 보여 주고, 숫자는 그 교회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묘사합니다.
결국 AC.487은 창5의 기이하게 긴 수명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고대사람들이정말800년,900년을살수있었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주님께서 왜 바로 그 숫자들을 사용하셨으며, 그것들을 통해 교회의 어떤 상태와 변화를 나타내셨는가가 핵심입니다. 아직 그 모든 숫자의 아르카나를 우리가 풀어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창5의 숫자들이 무의미한 장식도 아니고 단순한 연대 자료만도 아니라는 것, 그것들이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 변화를 담아내는 말씀의 정교한 언어라는 사실을 AC.487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487해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5:3)
AC.482
이장에나오는‘해’(years)와‘연수’(numbersofyears)가속뜻에서무엇을의미하는지는지금까지알려지지않았습니다.문자적의미에머무르는사람들은이것들을세상의실제연수라고생각합니다.그러나여기서부터12장에이르기까지는문자적의미에나타나는모습그대로의역사적인것은아무것도없으며,전체적으로나하나하나에있어서나모두다른것들을담고있습니다.이것은이름들뿐아니라숫자들도마찬가지입니다.말씀에는숫자‘셋’이자주나오고숫자‘일곱’도자주나오는데,이숫자들이나오는곳마다시간이나그밖의것들이포함하거나표상하는상태와관련하여어떤거룩한것또는지극히거룩한것을의미합니다.그리고가장짧은시간의간격에서도가장긴시간의간격에서와같은의미를지닙니다.부분들이전체에속하는것처럼가장작은것들도가장큰것들에속하기때문입니다.전체가부분들로부터,또는가장큰것이가장작은것들로부터합당하게이루어지려면서로간에유사성이있어야하기때문입니다.이사야에서는다음과같이말씀합니다.What the “years” and the “numbersofyears,” which occur in this chapter, signify in the internal sense, has hitherto been unknown. Those who abide in the literal sense suppose them to be secular years, whereas from this to the twelfth chapter there is nothing historical according to its appearance in the literal sense, but all things in general and every single thing in particular contain other matters. And this is the case not only with the names, but also with the numbers. In the Word frequent mention is made of the number three, and also of the number seven, and wheresoever they occur they signify something holy or most sacred in regard to the states which the times or other things involve or represent; and they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n the least intervals of time as in the greatest, for as the parts belong to the whole, so the least things belong to the greatest, for there must be a likeness in order that the whole may properly come forth from the parts, or the greatest from its leasts. Thus in Isaiah:
여기서‘수년내’(midstoftheyears)는주님의오심을의미합니다.더짧은시간의간격에서는사람이거듭날때와같은주님의모든오심을의미하고,더긴시간의간격에서는주님의교회가새롭게일어날때를의미합니다.이것은이사야에서‘내가구속할해’(yearoftheredeemed)라고도합니다.where the “midstoftheyears” signifies the Lord’s advent. In lesser intervals it signifies every coming of the Lord, as when man is being regenerated; in greater, when the church of the Lord is arising anew. It is likewise called the “yearoftheredeemed,” in Isaiah:
그러므로이장의시간들역시상태들을포함하고있음이분명합니다.각교회는타고난성향과후천적으로형성된성향의차이에따라다른교회들과서로다른퍼셉션의상태에있었기때문입니다.Hence it is evident that the times in this chapter also involve states; for every church was in a different state of perception from the rest,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genius, hereditary and acquired.
해설
AC.482는 창5의 긴 수명과 숫자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정면으로 다루는 중요한 글입니다. 아담 130세, 이후에 이어지는 800년, 807년, 815년 등의 숫자를 오늘날의 연대기처럼 읽기 전에, 스베덴보리는 먼저 말씀에서 ‘시간’과 ‘숫자’가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창5의 ‘해’는 속뜻에서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며, 그 연수의 숫자는 그 상태의 어떠함을 묘사합니다.
특히 이 글에는 매우 강한 문장이 나옵니다. ‘여기서부터12장에이르기까지는문자적의미에나타나는모습그대로의역사적인것은아무것도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78에서 ‘아담’이 인류 최초의 어떤 한 사람이 아니라 태고교회를 가리킨다고 한 설명과 같은 방향입니다. 창5의 이름들이 여러 교회를 의미한다면, 그 이름들 옆에 붙어 있는 연수 역시 그 교회에 속한 개인들의 생물학적 수명을 기록한 숫자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름뿐 아니라 ‘숫자들도’ 다른 것들을 담고 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렇다고 말씀의 숫자를 임의로 상징화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482가 예로 드는 ‘셋’과 ‘일곱’처럼 말씀의 숫자에는 일정한 영적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는 숫자가 나타나는 문맥 속에서 그때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에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는 원리를 설명합니다. 동일한 영적 질서가 짧은 시간에서도, 긴 시간에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숫자가 서로 다른 시간 규모에서 사용되더라도 그 안에 담긴 본질적인 의미는 유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수년내’가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의오심’으로 풀이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오심은 한 가지 규모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삶이라는 작은 규모에서는 사람이 거듭날 때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오시는 것을 의미할 수 있고, 교회 전체라는 큰 규모에서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때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시간의 규모는 다르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적 질서는 서로 상응합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계20의 ‘천년’도 문자 그대로 1,000년이라는 기간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AC.482는 사탄이 결박되는 천 년과 첫째 부활의 천 년이 ‘결코천년을의미하는것이아니라그상태들을의미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말씀의 예언적·상응적 시간 표현을 읽을 때 중요한 질문은 ‘정확히몇년인가?’만이 아니라 ‘이기간이어떤영적상태를나타내는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창5전체를 읽는 중요한 열쇠를 줍니다. 각각의 교회는 ‘서로다른퍼셉션의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차이는 각 교회의 타고난 성향과 후천적으로 형성된 성향에 따라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창5에 나타나는 서로 다른 연수는 단순히 ‘누가몇살까지살았는가’를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아담에서 셋, 에노스, 게난 등으로 이어지는 여러 교회가 어떤 퍼셉션의 상태에 있었는지를 표현하는 숫자들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81의 ‘백삼십년’도 이해의 방향이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태고교회의 한 개인이 정확히 130년을 산 뒤 아들을 낳았다는 시간 정보가 속뜻의 중심이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셋’이라 하는 새 교회가 일어나기까지의 상태와 과정을 나타냅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그 숫자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설명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개별 숫자의 의미를 앞질러 확정하기보다, 먼저 ‘창5의연수는교회의상태를나타낸다’는 AC.482의 해석 원리를 분명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창5의 족보는 이름과 숫자가 결합된 하나의 내적 역사입니다. 이름들은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진 여러 교회들을 나타내고, 그 옆의 연수들은 그 교회들의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냅니다. 문자에서는 수백 년에 이르는 인간의 수명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태고교회가 여러 후대 교회로 이어지면서 그 퍼셉션과 내적 상태가 어떻게 달라져 갔는지가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AC.482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