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3

말씀에서 ‘금’(gold)이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하고 표상하는 것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궤와 성전과 금상과 등잔대와 기구들과 아론의 의복에 사용된 모든 금은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하고 표상했습니다. 선지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겔에서는,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the good of wisdom or of love to be signified and represented by “gold.” All the gold in the ark, in the temple, in the golden table, in the candlestick, in the vessels, and upon the garments of Aaron, signified and represented the good of wisdom or of love. So also in the prophets, as in Ezekiel:

 

네 지혜와 총명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으며 (겔28:4) In thy wisdom and in thine intelligence thou hast gotten thee riches, and hast gotten gold and silver in thy treasures (Ezek. 28:4).

 

여기서는 지혜와 지성에서 ‘금과 은’(gold and silver), 곧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여기서 ‘은’(silver)은 진리를 뜻하며, 궤와 성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에서는, where it is plainly said that from wisdom and intelligence are “gold and silver,” or the good and the true, for “silver” here signifies truth, as it does also in the ark and in the temple. In Isaiah: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사60:6) The multitude of camels shall cover thee, the dromedaries of Midian and Ephah; all they from Sheba shall come, they shall bring gold and incense, and they shall show forth the praises of Jehovah (Isa. 60:6).

 

또한 이와 같이, Thus also: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2:1, 11) The wise men from the east, who came to Jesus when he was born, fell down and worshiped him; and when they had opened their treasures, they presented unto him gifts; gold, and frankincense, and myrrh (Matt. 2:1, 11).

 

여기서도 ‘금’(gold)은 선을 뜻하고, ‘유향과 몰약’(frankincense and myrrh)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에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뜻하며, 그러므로 그것들을 ‘여호와의 찬송’(the praises of Jehovah)이라 합니다. 그래서 시편에서는, Here also “gold” signifies good; “frankincense and myrrh,” things that are grateful because from love and faith, and which are therefore called “the praises of Jehovah.” Wherefore it is said in David: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시72:15) He shall live, and to him shall be given of the gold of Sheba; prayer also shall be made for him continually, and every day shall he bless him (Ps. 72:15).

 

해설

AC.113은 AC.110에서 하윌라 땅의 ‘금’이 선을 뜻한다고 한 해석을 말씀의 여러 용례를 통해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금이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하고 표상하는 것이 매우 흔하다고 하면서, 먼저 궤와 성전, 금상과 등잔대와 여러 기구, 그리고 아론의 의복에 사용된 금을 언급합니다. 이 거룩한 것들에 사용된 금은 단순히 값비싸고 아름다운 재료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표상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겔28:4은 금과 은을 함께 제시합니다. ‘네 지혜와 네 지성으로 재물을 얻었으며 금과 은을 곳간에 저축하였다’는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지혜와 지성에 대응하여 금과 은을 각각 선과 진리로 읽습니다. 여기서 ‘은’은 진리를 뜻합니다. 따라서 금이 선을 뜻한다는 해석은 금이라는 물질 하나만 고립시켜 정한 의미가 아니라,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서로 대응하여 나타나는 말씀의 구조 안에서 제시됩니다. 앞의 AC.112에서 지혜는 사랑에서 나오고 지성은 신앙에서 나오며,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온다고 한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60:6에서는 스바 사람들이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과 마2:1, 11의 동방박사 이야기를 서로 연결합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나신 주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금은 선을 뜻하고, 유향과 몰약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기 때문에 주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예물들은 단순히 귀중한 물품을 왕에게 바친 장면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것들을 주님께 드리는 표상으로 읽힙니다.

 

이 대목에서는 AC.113이 주님을 바라보는 방향도 주목할 만합니다. 동방박사들이 금을 가지고 와서 주님께 드렸다고 해서 선의 근원이 인간에게 있고 그것을 인간이 주님께 가져다드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112는 선이 사랑에서 나오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주님께 드리는 선조차 그 가장 깊은 근원에서는 먼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랑과 선을 받아 그것으로 다시 주님을 경배하는 질서가 여기에도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시72:15의 ‘스바의 금’은 사60의 스바와 연결되면서 같은 의미를 다시 뒷받침합니다. 금을 드리는 것과 기도하며 찬송하는 것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사랑과 신앙에서 나와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을 ‘여호와의 찬송’이라고 설명한 뒤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금이 나타내는 선은 사람 안에 보관된 어떤 영적 재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에서 나와 주님을 향하는 삶과 예배에 관계됩니다.

 

따라서 AC.113에서 ‘금 = 선’이라는 상응만 떼어 외우는 것은 이 번호가 보여 주려는 내용의 일부만 붙드는 것입니다. 궤와 성전에서부터 선지서와 동방박사의 예물에 이르기까지 금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까닭을 스베덴보리는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이라는 하나의 내적인 질서에서 바라봅니다. 그리고 앞의 AC.110-112와 연결하면 그 선의 근원 역시 더욱 분명해집니다. 하윌라 땅에 금이 있다는 것은 천적 인간이 자기 힘으로 귀한 선을 만들어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생명 안에 선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금의 가치는 결국 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사랑의 선, 그리고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게 합니다. (AC.113 해설)

 

 

 

AC.114, 창2:11-12,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들을 뜻하고 표상함’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4신앙의 진리는 말씀에서 보석들(precious stones)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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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2, 창2:11-12, ‘참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옴’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2또한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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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2

또한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습니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선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선도 없습니다.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진리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진리도 없습니다.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고,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들도 실제로 이러한 이름들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진정한 것이 아닙니다. Be it known moreover that there is no wisdom which is not from love, thus from the Lord; nor any intelligence except from faith, thus also from the Lord; and that there is no good except from love, thus from the Lord; and no truth except from faith, thus from the Lord. What are not from love and faith, and thus from the Lord, are indeed called by these names, but they are spurious.

 

해설

AC.112는 앞의 AC.110-111에서 다소 어렵게 느껴졌던 여러 구별을 매우 간결한 질서로 정리합니다. 지혜는 사랑에서 나오고, 지성은 신앙에서 나오며,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네 관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나온다는 말 뒤에도, 신앙에서 나온다는 말 뒤에도 계속 ‘따라서 주님으로부터’라고 덧붙입니다. 결국 이 번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다’는 말은 앞에서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을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라고 한 설명과 그대로 이어집니다(AC.107). 참된 지혜는 사랑과 분리되어 머리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지성은 없다’는 말은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한 AC.110과 연결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에서 지성이 나오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사랑, 신앙, 지혜와 지성은 서로 떨어진 여러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과 진리도 같은 구조 안에 있습니다.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AC.110에서 금이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을,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사랑의 진리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뜻한다고 한 설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단순한 도덕적 행동과 정확한 지식으로만 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선에는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사랑이 있고, 진리에는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신앙이 있으며,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은 다시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AC.112는 앞의 AC.111에서 기억지식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겉 사람의 상태를 왜 문제 삼았는지도 밝혀 줍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 매우 정교하게 추론할 수 있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성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겉으로 선해 보이는 행동이나 사실에 맞는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여기서 말하는 선과 진리의 생명이 모두 설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AC.112가 보는 것은 그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고 있는가 하는 근원과 질서입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 문장의 ‘진정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표현을 세심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것들도 실제로 ‘지혜’, ‘지성’, ‘선’, ‘진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여기서 말하는 본래적인 의미의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얻는 모든 지식이나 이성적 사고, 또는 자연적인 선행을 무가치하다고 선언하는 말이라기보다, 그것들을 참으로 살아 있게 하는 영적 생명의 근원이 따로 있음을 구별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AC.112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이 선명해집니다. 주님은 단지 인간에게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바깥에서 알려 주시는 분만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원도 주님이시고, 신앙의 근원도 주님이시며, 그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참으로 지혜롭고 선해지는 것은 자기 안에 주님과 별개의 또 하나의 선과 지혜의 원천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이 자기 안에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AC.112의 반복되는 ‘따라서 주님으로부터’는 그래서 단순한 교리적 수식어가 아닙니다. 앞에서 에덴으로부터 강이 흘러나오고 그 강이 동산을 적셨던 것처럼, 이제 그 생명의 흐름이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름은 인간에게 붙고 그 지혜와 지성은 인간 안에서 실제로 나타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이 근원의 질서를 놓치지 않는 것이 AC.110-112의 여러 세밀한 구별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AC.112 해설)

 

 

 

AC.113, 창2:11-12, ‘금은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하고 표상함’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3말씀에서 ‘금’(gold)이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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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 창2:11-12,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과 그 지혜와 지성을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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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창2:11, 12)

 

AC.110

‘첫째’(first) 강, 곧 ‘비손’(Pishon)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뜻하고, ‘하윌라 땅’(land of Havilah)은 마음을 뜻하며, ‘금’(gold)은 선을 뜻하고,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는 진리를 뜻합니다. ‘금’(gold)이 두 번 언급되는 것은 그것이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을 뜻하기 때문이며,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가 언급되는 것은 하나는 사랑의 진리를,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천적 인간입니다. The “first” river, or “Pishon,” signifies the intelligence of the faith that is from love; “the land of Havilah” signifies the mind; “gold” signifies good; “bdellium and the onyx stone,” truth. “Gold” is mentioned twice because it signifies the good of love and the good of faith from love; and “bdellium and the onyx stone” are mentioned because the one signifies the truth of love, and the other the truth of faith from love. Such is the celestial man.

 

해설

AC.110은 창2:10에서 ‘네 근원’으로 갈라진 강 가운데 첫째 강인 비손의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이며, 그 강이 동산을 적시는 것은 지성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AC.107). 이제 그 지성이 네 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묘사되는데, 첫째 강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뜻합니다. 따라서 비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에덴의 사랑에서 흘러나온 지혜의 흐름 안에 있는 지성입니다.

 

이 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표현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신앙의 지성’이라고 하지 않고 그 신앙이 ‘사랑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앞에서 생명나무가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한다고 했던 것과 같은 질서입니다(AC.102).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비손이 나타내는 지성 역시 사랑과 분리되어 스스로 진리를 판단하고 축적하는 지성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지성입니다.

 

‘하윌라 땅’은 이러한 지성이 펼쳐지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발견되는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는 그 마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금은 선을 뜻하는데,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그것을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으로 구별합니다. 베델리엄과 호마노 역시 진리를 뜻하면서 각각 ‘사랑의 진리’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하윌라의 귀한 것들은 단순히 천적 인간이 많은 지식이나 훌륭한 덕목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서 사랑을 중심으로 선과 진리가 질서 있게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 ‘사랑의 진리’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구별한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AC.110은 아직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임의로 각각의 내용을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서로 무관하게 흩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속한 선과 진리조차 사랑에서 나오며,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천적 질서 안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AC.111-115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상응들을 어떻게 더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AC.110의 마지막 문장, ‘이러한 사람이 천적 인간입니다’가 앞의 모든 설명을 하나로 묶습니다. 천적 인간은 단순히 특별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이나 높은 영적 체험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이 번호에서 묘사되는 그의 특징은 사랑이 생명의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질서 안에서 지성과 선과 진리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계속 보아 온 것처럼 그 사랑과 생명의 근원 자체도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지성과 선과 진리는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하여 주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생명에서 흘러나와 그의 마음 안에 자리 잡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비손이 하윌라 온 땅을 두르고 그곳에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다는 창세기의 묘사는 단순한 지리적 정보 이상의 내적인 질서를 보여 줍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에 지성이 있으며, 그 마음 안에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상태입니다. AC.110은 아직 그 각각의 상응을 제시하는 단계이지만, 마지막의 ‘이러한 사람이 천적 인간입니다’라는 한 문장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생명의 질서로 보게 합니다. (AC.110 해설)

 

 

 

AC.111, 창2:11-12,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과 그 지혜와 지성을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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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9, 창2:10, ‘지혜와 지성은 사람 안에 나타나지만 오직 주님의 것임’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9지혜와 지성이 사람 안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들은 오직 주님의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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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 (16-17절)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6, 17절)

 

해설

AC.80은 창2:16-17의 개요이며,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질서에 하나의 중요한 제한을 제시합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과 같은 사람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아는 것’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이 금지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금지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알려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2:16-17의 금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등장한다고 해서 지식이나 이성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AC.75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말했고, AC.78에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하며 이것들까지도 지혜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80의 문제는 인간이 알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 및 신앙의 아르카나를 무엇으로부터 알고 판단하려 하는가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AC.77에서는 에덴동산의 보기에 좋은 나무들이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80은 그 퍼셉션의 근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을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직감이나 자기 확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뜻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그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것들’은 인간이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외적인 것들과 관계되고, ‘기억지식’은 사람이 배우고 경험하여 기억에 받아들인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AC.78에서 기억지식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AC.80은 자연계의 사실을 관찰하거나 기억지식을 배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적인 것의 진실 여부를 인간 자신이 결정하려는 질서를 경계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질문이나 연구 자체의 금지로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의 속뜻을 밝히면서 끊임없이 설명하고 구별하고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C.80에서 금지되는 것은 탐구라는 행위 자체라기보다, 그 앞에 붙어 있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라는 방식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 하는 것이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80을 반지성주의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자연적인 사실을 감각과 관찰을 통하여 확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것은 ‘신앙의 아르카나’입니다. 자연적인 것들을 알아보는 데 사용하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그대로 신적인 것의 최종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가 단순한 인식 방법의 차이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 여기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닙니다. 창2:17의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이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AC.73에서 거듭남 이전의 사람이 ‘죽어 있던’ 상태라고 한 것과 AC.80에서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AC.79와 AC.80을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도 보입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두 번호 모두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가지거나 아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방향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를 여기서 proprium이나 인간의 자유에 관한 전체 교리로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AC.79와 AC.80이 보여 주는 직접적인 연결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80은 따라서 창2:16-17의 금령을 ‘알지 말라’는 명령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아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할 때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는 것이, 이 개요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16-17에 관하여 먼저 제시하는 핵심입니다. (AC.80 해설)

 

심화

1. 왜 개역개정에는 ‘열매’가 들어가 있는가? (창2:16-17)

 

AC.80 심화 1, 왜 개역개정에는 ‘열매’가 들어가 있는가? (창2:16-17)

AC.80 심화1. 왜 개역개정에는 ‘열매’가 들어가 있는가? (창2:16-17) 창2:16-17을 개역개정과 AC에 실린 영어 성경으로 함께 읽으면 작은 차이 하나가 눈에 띕니다. 개역개정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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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루는데, 앞 장에서는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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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그러한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15절) The celestial man is su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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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를 하다가 갑자기 ‘회개의 상태’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에 논리 점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창1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은 갑작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앞 단계에서 준비된 상태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 연결을 이해하려면 창1에서 말하는 거듭남의 초기 단계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의 첫 부분을 인간 거듭남의 초기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대략 이런 흐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완전히 혼돈과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다음 진리의 빛이 조금씩 들어옵니다. 그리고 진리와 거짓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 사람 안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 곧 식물로 상징되는 단계가 나타납니다. 바로 여기서 ‘풀’과 ‘나무’가 등장합니다. 즉 사람 안에 처음으로 선과 진리의 싹이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회개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자신의 생각과 삶이 괜찮다고 여겼던 것들이 진리의 빛 속에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바꾸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입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말을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의미—큰 죄를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연결이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훨씬 더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돌아본 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고,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맞추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의 식물 비유와 회개는 실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풀’은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씨 맺는 채소’는 그 진리가 생각 속에서 자라 다른 진리를 낳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는 그 진리가 실제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기 시작하는 바로 그 과정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식물 단계 전체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다가 ‘나는 지금까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듭니다. 이것이 풀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더 배우면서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 행동은 옳았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이 씨 맺는 채소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실제 행동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쉽게 화를 냈다면 이제는 참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전에는 남을 비판했다면 이제는 말을 조심합니다. 이것이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바로 이 전체 과정이 회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에서 회개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의 성장 비유가 바로 회개의 실제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그 순간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회개를 거듭남의 매우 초기 단계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거듭난 상태는 아니지만,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삶을 진리의 빛 속에서 고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떤 특별한 감정 사건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자기 삶을 그 진리에 맞추어 바꾸기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창1에서 식물이 처음 자라는 장면이 바로 그 회개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9 심화 3)

 

 

 

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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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 심화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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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의 ‘연한 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는 실제 거듭남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세 표현을 통하여 셋째 날에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처음 싹트고 점차 자라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다만 한 가지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 단계는 아직 거듭남이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AC.29은 이때 나타나는 것들을 아직 ‘생명 없는 것들’이라고 부르며, 이 사람은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실제 예도 완성된 천적·영적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다, 회개 가운데 선과 진리가 처음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사람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 직장에서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동료를 몹시 싫어합니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며칠 동안 분을 품고,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흠을 말하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거나 읽는 가운데 ‘나는 저 사람이 잘못한 것만 보고 있는데, 내 안의 미움은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처음 생깁니다. 전에는 상대의 잘못만 보였는데 이제 처음으로 자기 안의 악을 조금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처음 돋아나는 것이 ‘연한 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아직 매우 약합니다. 그날은 ‘미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상대가 다시 자기를 자극하면 곧 화가 납니다. 그래도 이전과 다른 것이 하나 생겼습니다. 전에는 자기 분노를 당연하게 여겼지만 이제는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 미워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행동 전체를 바꿀 만큼 강하지 않고, 그 진리가 자기 삶을 지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씨앗으로부터 이전에는 없던 무엇인가가 연한 싹처럼 돋아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은 말씀을 더 배우고 자신의 상태도 조금씩 살펴봅니다. 단지 ‘미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 상황에서 자기 분노를 억제하려고 합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을 때 말을 멈추어 보기도 하고, 상대에게 일부러 차갑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평소처럼 대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실패할 때도 많지만 이제 진리가 단순히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실제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태를 ‘씨 맺는 채소’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연한 풀보다 한 단계 더 진행된 것입니다. 선과 진리가 조금 더 형태를 갖추고, 사람의 실제 삶 속에서 쓰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내가 참 많이 변했다’, ‘나는 이제 저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분노를 참은 자기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선한 행동이 나타난다고 해서 아직 그 선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의 행동에는 이전보다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상대가 잘못하면 즉시 보복하거나 험담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멈추는 일이 많아집니다. 상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필요한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이라도 공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속에서 미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미움이 행동 전체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진리가 실제 선한 행동이라는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한 실제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이 이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므로 이미 참된 신앙의 생명에 들어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은 오히려 이 단계에서도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셋째 날의 식물들은 아직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선한 열매가 실제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마음 깊이 인정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다음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교회에서의 봉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설교를 듣다가 ‘나도 어려운 사람을 좀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직 실제 행동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을 ‘연한 풀’과 같은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실제로 시간을 내어 누군가를 돕고, 자기 편의를 조금 포기하면서 봉사하기 시작합니다. 선에 관한 진리가 행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씨 맺는 채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선한 행동이 일회적인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생활 가운데 반복되어 실제 유익을 만들어 낸다면 ‘열매 맺는 나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동기는 아직 혼합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기쁠 수도 있고, ‘나는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만족이 있을 수도 있으며, 자기가 선한 일을 했다는 생각을 붙들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불완전한 상태 때문에 시작된 선을 모두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계속 이끄시면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차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앞의 AC.25에서 살펴본 ‘꺾지 않고 굽히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따라서 ‘연한 풀 → 씨 맺는 채소 →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단순히 ‘좋은 생각 → 진리 이해 → 완성된 선한 성품’이라는 세 단계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의 중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아 사람 안에서 처음 연약한 것이 돋아나고, 그것이 점차 더 유용한 것이 되며, 마침내 실제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아직 셋째 날, 곧 ‘회개의 상태’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큰 위로가 됩니다. 자기 안에 겨우 ‘연한 풀’ 같은 변화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악을 오늘 처음 악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면 이미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직 자주 실패하더라도 진리에 따라 실제 행동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면 그 연한 것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삶에서 실제 선한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을 더 깊은 단계로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과정에서 사람은 한 가지를 배워 가야 합니다. ‘땅’인 사람이 씨앗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은 씨앗을 받아 싹을 내고 열매를 맺지만, 천적 씨앗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 이렇게 선해졌다’는 데 머물지 않고, 자기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그 더 깊은 생명을 향하여 자라고 있는 거듭남의 첫 열매들입니다. (AC.29 심화 1)

 

 

 

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 심화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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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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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로 지나치게 좁아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적인 사랑과 구별하기 어려우며, ‘인애’라고 하면 현대 한국어에서 뜻이 즉시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은 상당히 가까운 표현이지만, 이것 역시 charity가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나타나는 폭넓은 의미를 언제나 다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과 해설에서는 charity를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라고 음역하여 사용하고, 그 의미를 문맥에서 풀어 설명합니다.

 

체어리티의 가장 기본적인 방향은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주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charity toward the neighbor)를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웃의 선과 유익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삶의 방향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현대 영어의 charity에서 흔히 떠올리는 ‘자선 행위’보다 훨씬 넓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도 체어리티의 한 표현이 될 수 있지만, 체어리티 전체가 그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참된 유익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 역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체어리티를 단순한 ‘착한 행동’과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 행동의 동기와 목적까지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닙니다. 칭찬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때로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해 그의 잘못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에는 단순한 감정적 친절을 넘어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진리도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지 어떤 교리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진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후 AC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끊임없이 다루어집니다. 진리가 삶과 분리되어 머릿속 지식으로만 남아 있으면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의 인도 없이 단순한 호의나 감정에 머물러서는 온전한 질서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AC.9에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체어리티의 일들’(works of charity)을 언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이제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하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에 속한 선들을 행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앞선 상태보다 큰 진전입니다. 체어리티가 생각 속의 이상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행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AC.9의 핵심 문제는 그 사람이 아직 그 선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9는 ‘체어리티의 일을 행한다’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실제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 수 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도왔다’, ‘내가 이런 좋은 일을 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사랑이 많다’는 생각이 중심에 자리 잡으면 체어리티의 외적인 행위 안에도 proprium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선들이 아직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선의 참된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 번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면서 배우고, 자기 안에 섞여 있는 동기들을 발견하며, 점차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선을 선택하고 행하는 가운데 그 사람을 이끄십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한두 번의 특별한 선행보다 삶 전체의 방향과 더 깊이 관련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시간만 체어리티의 시간이 아니라 가정에서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 직장에서 맡은 일을 처리하는 방식, 돈을 사용하는 태도, 다른 사람의 명예를 다루는 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같이 일상의 수많은 선택 속에서 체어리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삶에서 분리된 종교적 활동 하나가 아니라, 이웃의 선과 유익을 향하도록 삶이 질서 잡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번역과 해설에서 영어 charity를 ‘체어리티’라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뜻을 설명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풍성한 의미를 하나의 한국어 단어로 성급하게 축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문맥에 따라 ‘이웃을 향한 사랑’, ‘이웃의 선을 위한 삶’, ‘체어리티의 행위’ 등이 무엇을 뜻하는지 풀어 설명할 수 있지만, 기본 용어 자체는 ‘체어리티’로 유지합니다. 이렇게 해야 이후 AC에서 신앙과 체어리티, 사랑과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관계가 점점 더 정교하게 전개될 때 동일한 개념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선도, 따뜻한 감정도, 외적인 선행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선과 유익을 바라며 삶으로 행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삶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에 완성된 상태가 아니지만, 사람이 실제로 체어리티의 일을 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는 거듭남의 중요한 진전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선을 행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배우도록 이끄십니다. (AC.9 심화 2)

 

 

 

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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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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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4, 5)

 

AC.21

‘빛’(light)은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선’(good)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이 선처럼 보였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어둠이며, 단지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proprium에 속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아직 남아 있는 것들입니다.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낮’(day)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밤’(night)에 비유됩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말씀에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AC.21은 바로 앞 AC.20에서 처음 나타난 ‘빛’이 무엇이며, 그 빛이 이전의 ‘어둠’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설명합니다. AC.20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고,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AC.21에서는 그 첫 빛이 비침으로써 이전에는 구별할 수 없었던 두 근원이 드러납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4의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는 거듭남 가운데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분별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빛’이 선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 주님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21에서 선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사람이 그것을 얼마나 선하게 느끼는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칭찬받는가, 심지어 종교적으로 얼마나 경건해 보이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AC.20에서 ‘주님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라고 한 설명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빛이 나타났다는 것은 단지 사람이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지를 분별할 가능성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어둠’은 흥미롭게도 처음부터 어둠처럼 보였던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악이 선처럼 보이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둠인 것들이 ‘빛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21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영적인 어둠의 위험은 사람이 언제나 ‘나는 지금 어둠 속에 있다’고 느끼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선이라고 여기고 거짓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빛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AC.20의 첫 빛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빛이 비치기 전에는 어둠을 어둠으로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proprium에 속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proprium을 단순히 인간의 개성, 재능, 성격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문맥에서 말하는 proprium은 사람이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에게서 생각하고 의도하며 행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상태와 깊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사람 자신의 것’이 어둠이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자연적 능력이나 개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것이 영적으로는 빛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표현은 이러한 것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첫 빛을 받았다고 해서 이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AC.20에서도 사람은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AC.21에서도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어둠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달라진 것은 이제 그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빛 사이에 구별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첫 단계는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이전에는 하나처럼 보였던 것을 주님의 빛 가운데 서로 다른 것으로 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창1:4의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에서 분별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빛으로 자기 어둠을 완전하게 밝혀내는 것이 아닙니다. AC.20에서 빛 자체가 주님에게서 왔듯이,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를 참으로 분별하게 하는 기준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느낌과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빛 안에서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전에는 선처럼 보였던 악과 진리처럼 보였던 거짓이 무엇이었는지 점차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어 창1:5의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낮’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밤’에 비유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도 기준은 근원입니다. ‘낮’은 단순히 기분이 밝거나 신앙생활이 잘되는 때를 뜻하고 ‘밤’은 낙심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때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속한 것은 낮이며,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것은 밤입니다. 이 비유가 말씀에 자주 나온다고 스베덴보리가 덧붙이는 것도 빛과 어둠, 낮과 밤의 이러한 구별이 말씀 전체에서 반복되는 영적 언어임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21에서는 아직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의미까지 앞당겨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 AC.2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다룹니다. AC.21의 초점은 먼저 빛과 어둠이 ‘나뉘고’, 그것들이 낮과 밤으로 불린다는 데 있습니다. 첫 빛이 비친 뒤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 구별이 없으면 사람은 여전히 자기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어둠을 빛으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21은 거듭남에서 ‘분별’이 얼마나 근본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전에는 악이 선처럼,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지만 주님의 빛이 비치면서 그 둘이 나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 자신의 것이 즉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한 번 빛을 보았다는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과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을 구별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AC.20이 ‘빛의 첫 인식’을 말했다면 AC.21은 그 빛으로 비로소 시작되는 ‘빛과 어둠의 분별’을 보여 줍니다. (AC.21 해설)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 심화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의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에 악을 언제나 악처럼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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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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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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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들은 선과 진리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데, 이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선이라 여기고, 그러한 사랑들을 지지하는 모든 것을 진리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선들이 악이며, 이러한 진리들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그는 비로소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며, 또한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주님 자신이 요한복음에서 가르치십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또한 주님이 선 자체, 곧 생명이시며, 진리 자체, 곧 빛이시고, 따라서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선언하십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해설

AC.20에서 창1:3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는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를 나타냅니다. 바로 앞 AC.17-19에서는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고, 깊음이 있으며, 그럼에도 주님의 자비가 사람 안에 보존된 리메인스 위에서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처음으로 ‘빛’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빛은 사람이 스스로 어둠을 헤치고 얻어 낸 깨달음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시던 주님에게서 오는 첫 영적 빛입니다. AC.19에서 아직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았던 것이 AC.20에 이르러 비로소 빛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번째 상태를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더 높은 것’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전적으로 외적이기만 한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것을 선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사랑을 지지하는 것을 진리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문제는 그 사람에게 선과 진리에 관한 말이나 지식이 전혀 없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기준으로 선과 진리를 판단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악인 것을 선이라 하고 거짓인 것을 진리라고 여기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의 시작은 무엇인가를 많이 아는 데서보다 ‘내가 지금까지 선이라고 여긴 것이 정말 선인가?’라는 새로운 분별이 시작되는 데서 나타납니다.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처음 일어나는 변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즉시 자기의 모든 악을 보고 완전히 버린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 표현의 정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도 인정과 칭찬을 원하고, 선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공로를 마음속에 붙들 수 있습니다. 이런 사례는 AC.20의 직접적인 정의라기보다 그 뜻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적용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전에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선을 그대로 선이라고 여겼지만, 이제 처음으로 그 판단 자체가 흔들리고 참된 선의 기준이 자기 자신보다 높다는 것을 알아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라, 말 그대로 새 생명이 ‘잉태되는’ 최초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두 번째 인식이 열립니다. 곧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AC.20의 두 인식은 서로 연결됩니다.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절대적인 선과 진리의 기준으로 삼던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20의 빛은 단순한 자기반성이나 도덕적 성찰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빛이 깊어질수록 그 인식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먼저 요8:24의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를 인용합니다.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앞 문장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주님 자신이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AC.20에서 지나치게 넓은 구원론이나 특정 교리의 증명 구절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남의 빛이 결국 주님의 존재와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향한다는 것을 확증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최종 기준으로 삼는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요1:1, 3-5, 9의 인용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앞의 요8:24가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면, 요1의 말씀은 왜 주님이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이신지를 밝히는 데 사용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에서 생명과 빛이 주님 안에 있으며,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라는 말씀은 빛의 근원이 인간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는 말씀은 AC.16에서 시작된 ‘새 창조’의 주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첫 창조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새 창조에서도 생명과 빛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특히 Potts 본문에 포함된 요1:5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AC.17-20의 흐름에서 의미가 선명합니다. 앞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었고, 이제 그 어둠 가운데 빛이 비칩니다. 그러나 이것을 창세기와 요한복음의 모든 표현이 일대일로 상응한다고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AC.20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요한복음 구절들을 인용한 직접적인 목적은 주님이 생명 자체, 곧 선 자체이시며, 빛 자체, 곧 진리 자체이시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면 참된 선도 진리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빛이 있으라’의 속뜻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따라서 AC.20의 ‘첫 번째 상태’를 AC.7의 첫 번째 상태와 서로 다른 두 체계처럼 나눌 필요도 없습니다. AC.7은 거듭남의 전체 여섯 날을 개괄하면서 첫 상태를 ‘유아기에서부터 거듭남 직전까지의 상태’와 ‘거듭남이 시작되는 상태’로 설명했고, AC.20은 이제 창1:3의 실제 본문을 따라 그 첫 빛이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여기서 사람은 갑자기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절대적인 선과 진리로 여기던 상태에서 깨어나 선과 진리가 자기보다 높은 것이며, 더 나아가 그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20에서 ‘빛이 있으라’는 말씀은 거듭남의 매우 작지만 결정적인 전환입니다. 사람은 아직 많은 싸움을 앞두고 있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사라진 것도 아니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온전히 행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전에는 어둠을 어둠으로 알지 못했지만 이제 빛이 비치면서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니었음을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빛 안으로 더 들어갈수록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됩니다. 거듭남의 첫 빛은 결국 자신을 더 선한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하는 빛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시선을 돌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게 하는 빛입니다. (AC.20 해설)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심화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문장으로 읽으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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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 심화 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 심화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의 설명을 실제 인간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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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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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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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창1:2)

 

AC.17

거듭남 이전의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the earth void and empty)라 하며, 또한 선과 진리가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땅’(the ground)이라고 합니다. ‘혼돈’(void)은 선이 전혀 없는 곳을, ‘공허’(empty)는 진리가 전혀 없는 곳을 뜻합니다. 이로부터 ‘흑암’(thick darkness)이 나오는데, 이것은 어리석음을, 그리고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그 결과 영적, 천적 삶(spiritual and heavenly life)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를 뜻합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십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22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렘4:22, 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해설

AC.17은 창1:2의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가운데 먼저 ‘혼돈’, ‘공허’, ‘흑암’을 해설합니다. 바로 앞 AC.16에서 창세기의 창조가 사람의 ‘새 창조’, 곧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으므로, 이제 창조가 시작되기 전의 땅은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사람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람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고 부르며, 또한 선과 진리가 아직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땅’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창1:2는 단순히 창조 이전 우주의 물리적 모습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하시기 전 그의 영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혼돈’(void)과 ‘공허’(empty)는 막연히 뒤섞이고 텅 빈 상태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두 말을 정확히 구별하여 ‘혼돈’은 선이 없는 상태, ‘공허’는 진리가 없는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사람 안에 막연한 종교성을 더하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그것들이 사람의 삶 안에서 질서를 이루게 하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선이 없다’, ‘진리가 없다’는 이 표현을 근거로 거듭남 이전 사람의 모든 외적 선행이나 모든 자연적 진실성을 무가치하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7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거듭남의 관점에서 사람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 선과 진리가 아직 생명 있게 자리 잡지 않은 상태입니다. 사람에게 리메인스가 어떻게 보존되어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는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밝혀집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가 없는 이 상태에서 ‘흑암’(thick darkness)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흑암을 ‘어리석음’과 ‘무지’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 지식이 부족하거나 지능이 낮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에 대한 무지인가가 중요합니다. 먼저 ‘주님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이며, 그 결과 ‘영적, 천적 삶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무지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연적이고 세상적인 일에는 상당히 영리하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것에는 흑암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AC.17의 ‘흑암’은 지적 능력의 부족보다 주님과 영적 생명에 관한 빛이 아직 사람의 의식과 삶 안에서 밝혀지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렘4:22-23을 인용합니다. 먼저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는 말씀은 AC.17에서 ‘흑암’을 ‘어리석음’과 주님 신앙에 관한 ‘무지’라고 설명한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여기서 문제는 단순히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알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곧 주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영적 어리석음과 무지의 근본적인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이어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라는 말씀은 사람이 자연적 총명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반드시 영적 선을 아는 지혜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은 AC.17의 ‘어리석음’을 세상적인 무능이나 지적 결핍으로 오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렘4:23은 창1:2와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고 하는데,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이 창1:2와 거의 그대로 겹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우연한 어휘의 유사성을 보여 주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에서는 이미 존재하는 백성과 그들의 영적 상태를 두고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혼돈과 공허’가 물질적 우주의 최초 상태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영적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의 언어로도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AC.16에서 ‘창조’가 거듭남을 의미한다는 것을 여러 선지서와 시편의 말씀으로 확인했다면, AC.17에서는 ‘혼돈과 공허’ 역시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킬 수 있음을 예레미야를 통해 확인하는 셈입니다.

 

또한 예레미야는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라고 말합니다. AC.16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천’(heaven)이 거듭남 이전의 속 사람을, ‘지’(earth)가 겉 사람을 의미한다고 미리 밝혔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늘에 빛이 없다’는 표현도 AC.17의 ‘흑암’과 함께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속 사람 자체가 주님에게서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아직 사람에게 영적 빛이 드러나 그의 의식과 삶을 밝혀 주는 상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AC.18과 AC.19에서는 이 어둡고 황폐한 상태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므로, AC.17만으로 거듭남 이전 인간의 내적 상태 전체를 닫힌 체계처럼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AC.17의 진단은 매우 엄중하지만 절망을 선언하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혼돈’은 선의 없음, ‘공허’는 진리의 없음, ‘흑암’은 주님 신앙과 영적, 천적 삶에 대한 어리석음과 무지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이야기는 바로 이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사람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빛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빛을 비추심으로써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AC.17은 인간을 정죄하기 위한 인간론이라기보다, 왜 우리에게 주님의 새 창조가 필요한지를 보여 주는 거듭남의 첫 진단이라고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17 해설)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 심화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의 ‘혼돈’, ‘공허’, ‘흑암’을 자신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신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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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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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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