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묘사를 종합하면 ‘둘다아니고, 훨씬더내적인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천사와 악령이 마치 육체를 가진 병사들처럼 칼을 들고 1:1로 싸우는 것이 기본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천사의아우라가강해서악령이접근하지못한다’ 정도도 아닙니다. 핵심은 ‘선과진리의입류(influx)를통한영적전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 천사와 영들은 모두 자신들의 사랑과 사고에 따른 ‘스피어(sphere, 영역·기운)’를 발산합니다. 천사에게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의 스피어가 나오고, 악령에게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 거짓과 악의 스피어가 나옵니다. 그래서 서로 반대되는 스피어가 가까워지면 실제적인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랑과 생각이 자연계의 물리적 힘보다 훨씬 직접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사들이 악령과 싸울 때 중요한 것은 ‘천사자신의힘으로싸우는것이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합니다. 악령은 그 진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진리를 말하거나 천사의 스피어가 임하면 악령이 고통을 느끼고 물러가거나 도망치는 일이 생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까이 접근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그림, 즉 ‘천사들의아우라범위를악령들이침범하기어렵다’는 표현이 1:1 칼싸움보다는 훨씬 가깝습니다. 다만 ‘보이지않는방어막’처럼 이해하면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천사 개인의 초능력 같은 것이 아니라 ‘그천사를통해임하는주님의선과진리의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의 전투를 때때로 ‘전쟁’, ‘무기’, ‘칼’, ‘방패’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영계에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들이 실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표상적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의 실체는 물리적인 근육과 철제 무기의 충돌이 아니라 ‘진리와거짓, 선과악의충돌’입니다. 성경에서 ‘칼’이 진리를,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뜻하는 것도 이 상응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영계에서 칼싸움 같은 장면이 보인다 해도 ‘천국에는실제무기고가있고천사들이칼을차고출동한다’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영계론과는 상당히 멀어집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천사들은 악령을 ‘죽이는것’을 목표로 싸우지 않습니다. 영은 죽일 수도 없습니다. 천사들의 역할은 악령의 공격을 억제하고, 공격받는 사람이나 영을 보호하며, 악령이 주입하는 거짓에 맞서 진리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시험(temptation)을 겪을 때 이 구조가 선명합니다. 악령들은 인간 안의 악과 거짓, 과거의 기억과 욕망을 자극하고, 천사들은 그 반대편에서 선과 진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싸움이 ‘내생각과내갈등’처럼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의 놀라운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가장 가깝습니다.
‘악령 → 인간안의악·거짓·두려움·절망을자극 → 인간←선·진리·소망을일깨움←천사←주님’
그러나 이것조차 최종적으로는 ‘천사대악령’의 대등한 전쟁이 아닙니다. 천사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악령이 천사를 두려워하는 것도 천사라는 존재 자체가 무서워서라기보다 그 천사를 통하여 임하는 ‘주님의선과진리’를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능력을 잃는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이걸 조금 전 ‘시티즌비질란테’와 연결하면 아주 흥미로운 차이가 드러납니다. 비질란테의 방식은 ‘악인을파괴하여악을제거하려는방식’입니다. 반면 천국의 방식은 ‘악이더이상다른존재를해치지못하도록억제하고분리하여질서를회복하는방식’에 가깝습니다. 천사는 악령을 증오해서 두들겨 패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질서가 임하면 악이 그 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라’라는 표현을 조금 다듬는다면 ‘천사의스피어(sphere)’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천사의스피어’조차 천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천사를통하여흘러드는주님의선과진리의스피어’입니다.
레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이 처음으로 실제 사역을 수행한 뒤 행한 마지막 행동이 ‘축복’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축복을 단순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비는 종교적 인사로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422(창12:3)는 ‘축복’이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천적·영적·자연적 차원의 좋은 것들을 포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론 자신이 복을 만들어 백성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제사장의 쓰임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는 것을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레8의 장면을 기억하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레8에서는 아론의 ‘손’에 위임식의 제물들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손이 레9에서는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즉 먼저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레8에서는 손이 주님에게서 받고, 레9에서는 그 손이 백성을 향해 축복합니다. 이것이 쓰임의 질서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쓰임의 기준은 ‘내가얼마나많이가지고있는가?’가 아니라 ‘주님에게서받은것이나를통해얼마나선한쓰임으로흘러가는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데 사용해야 하고, 물질을 받았다면 선한 쓰임에 사용하며, 경험과 지혜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론은 ‘손을들어’ 축복합니다. 손이 능력과 행함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일반적인 상응을 생각하면 축복은 말만의 행위가 아니라 선을 실제로 전달하는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진정한 축복은 ‘복받으십시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통해 실제로 이웃에게 선이 전달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레9의 첫 제사장 사역은 자기 영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론이 제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이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리고 곧이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쓰임에 부름받은 사람의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마지막에는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레8에서 채워진 손이 레9에서 축복하는 손이 되는 것, 이것이 위임에서 쓰임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SW.레9심화4)
레5:11은 레2를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레2의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반드시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레5에서는 형편이 어려워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속죄제로 가져오도록 하면서 정반대로 명령합니다. ‘이는속죄제인즉그위에기름을붓지말며유향을놓지말고.’ 같은 고운 가루인데 왜 소제에서는 기름과 유향을 더하고, 속죄제에서는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빼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는 놀랍게도 스베덴보리가 거의 그대로 답한 대목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37(출29:40)은 여러 소제의 규정을 설명하다가 레5:11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죄와 허물을 위한 제사의 소제에는 십분의 일 에바의 고운 가루를 사용하되 ‘그위에기름이나유향을두지않았다’고 한 뒤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기름’은 사랑의 선을, ‘유향’은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의미하지만, 속죄제와 속건제는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으로부터의 ‘정결과속죄’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선 및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섞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5:11을 직접 다루는 원전이므로 이 부분의 상응은 매우 확실합니다.
이 설명을 이해하려면 레2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2에서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은 함께 있었습니다. 고운 가루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연결되고, 기름은 사랑의 선을, 유향은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소제는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 예배와 쓰임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상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에서는 기름과 유향이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함께 있어야 소제가 나타내는 영적 상태가 온전히 표현됩니다.
그러나 레5의 상황은 다릅니다. 지금 인간은 이미 선과 진리가 조화롭게 결합된 상태를 표현하려고 제단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악과 거짓이 드러났고 그것으로부터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지만 거기에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사람에게사랑의선과진리가전혀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이 제사가 표상하는 중심 사건이 ‘선과진리의결합’이 아니라 ‘악과거짓으로부터의정결’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의 재료는 같아도 제사의 목적과 계열이 달라지면 상응의 배열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흔히 ‘기름=사랑’, ‘유향=진리’, ‘고운가루=진리’와 같이 대응표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대입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그렇게 단순한 암호풀이가 아닙니다. 무엇이 무엇과 함께 있는지, 어떤 제사 안에 놓여 있는지, 그 제사가 전체적으로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0137의 설명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기름과 유향 자체는 선한 것을 표상하지만, 속죄제에서는 바로 그 선한 것들을 ‘넣지않는것’까지 의미가 있습니다. 악과 거짓을 정결하게 하는 과정과 이미 정결해진 선과 진리의 상태를 뒤섞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남에서도 매우 실제적입니다. 자기 안에서 악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너무 빨리 그것을 좋은 것으로 포장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를 내고도 ‘정의를위한분노였다’고 하고,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도 ‘그사람을사랑해서그랬다’고 하며,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주님의영광을위한열심’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악을 악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는 장면은 영적으로 이런 혼합을 경계하는 모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결해야 할 것은 먼저 정결해야 합니다. 악을 선이라고 부르거나 거짓을 좋은 의도라고 포장하지 않고 주님의 빛 앞에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2와 레5의 차이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레2에서는 ‘고운가루에기름을붓고유향을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께 드려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5에서는 ‘기름을붓지말며유향을놓지말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일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거듭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그 결합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서로 반대되는 제사가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큰 역사 안에서 서로 다른 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 레위기의 그토록 사소해 보이는 규정 하나까지 함부로 지나칠 수 없는지를 보여 줍니다. ‘기름을넣는다’와 ‘기름을넣지않는다’, ‘유향을놓는다’와 ‘유향을놓지않는다’의 차이 안에 인간의 거듭남에서 ‘정결’과 ‘결합’을 구별하는 아르카나가 숨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악과 거짓을 선과 진리로 위장하지 않고 드러내어 정결하게 하시며, 그렇게 깨끗하게 된 자리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참으로 결합되게 하십니다. 레5:11의 비어 있는 고운 가루는 그래서 결핍의 표상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정확하게 보여 주는 제물입니다. (SWC.레5심화4)
‘화목제’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사이가나빠진인간이제물을드려하나님과다시사이좋게되는제사’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더 강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제사처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91(출24:5)은 이스라엘 백성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장면을 해설하면서, 이것이 ‘선으로부터,그리고선에서나오는진리로부터드리는주님에대한예배’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번제가 특별히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면, 제사는 선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제의 중심에도 선과 진리가 함께 있습니다.
레3의 의식 자체가 이것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제물의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AC.10033(출29:22)은 피가 신적 진리를, 기름이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화목제의 중심에는 ‘신적진리와신적선’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미워하시다가 제물을 보고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해야 하는 쪽은 인간입니다.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그 결과 인간 스스로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인간에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인간이 그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선을 심으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합되면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목’은 단순한 감정적 관계 회복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결합’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함으로써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목제에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행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AC.10047(출29:16)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리는 것이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거듭남 역시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를 ‘하나님의분노를달래는제사’로만 읽으면 레3의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놓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오히려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당신과 결합시키시는 거듭남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인간 안에서 악과 거짓이 물러가고, 주님의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그 선이 삶의 가장 바깥쪽까지 내려올 때 인간은 점점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결과가 ‘평화’입니다. 성경의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서로 싸우던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는 상태와 깊이 관계합니다. 진리와 선이 하나가 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며, 인간의 뜻이 점차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 평화가 옵니다.
따라서 화목제는 ‘내가무엇을드려하나님을내편으로만들것인가?’를 묻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내안에서무엇을바로잡으셔야내가다시그분의생명을온전히받을수있는가?’를 묻게 하는 제사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 의해 변화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진리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며, 마침내 우리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우리는 주님과의 결합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화목제의 깊은 중심입니다. (SWC.레3심화1)
레위기 2장의 소제를 가장 짧게 표현한다면 ‘고운가루+기름+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를 함께 드리도록 하셨을까요? 단순히 향기롭고 좋은 제물을 만들기 위한 조리법이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세 가지의 결합 속에서 소제의 핵심적인 영적 질서를 봅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은 놀랍게도 레2:1-2를 직접 인용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고운 가루가 진정한 진리를 의미하고,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소제의 세 재료는 단순한 음식 재료가 아니라 ‘진리와주님을향한사랑과이웃을향한사랑’이 함께 있는 예배를 보여 줍니다.
고운 가루부터 살펴보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95(출29:2)는 고운 가루를 ‘선에서나오는진리’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진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선에서 신적 진리가 나오며, 인간 안에서도 참된 진리는 결국 선을 섬기고 선으로 인도합니다. 따라서 고운 가루는 단순히 많이 배운 교리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선하게 만드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고운 가루만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위에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기름은 사랑의 선을 표상합니다. 진리에 사랑이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진리라도 사랑과 분리되면 사람을 살리는 진리가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한 진리,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진리, 지적 우월감을 위한 진리는 고운 가루만 있고 기름이 없는 상태와 비슷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사랑 안에서 사용될 때 그 본래의 목적을 이룹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향이 더해집니다.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과 관계합니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이웃 사랑과 체어리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제 안에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사랑의 선이 오고, 그 선에서 진리가 나오며, 그 사랑과 진리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을 점검하는 매우 좋은 기준이 됩니다. ‘나는진리를알고있는가?’만 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진리에는기름이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향이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더 온유하고 정직하며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는 신앙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면 메마른 지식이 되기 쉽고, 사랑이라고 하면서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으로 선한 것인지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주님 사랑을 말하면서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 사랑 역시 삶에서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한 소제 안에 함께 놓이는 것은 그래서 매우 아름다운 상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사람’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고,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은 하나의 소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사랑과 삶도 하나가 됩니다. (SWC.레2심화1)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1부
이 영상은 처음부터 ‘장자권’이라는 교리를 차분히 설명하는 성경강의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약 35분 동안 찬양과 기도, 집회를 향한 기대와 사모함이 길게 이어지고, 그 가운데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이번집회를통하여하나님께서주시려는것을받아가자’, ‘이영환목사를통해주시려는것을취하고가자’는 태도입니다. 특히 인도자는 이영환 목사가 자신의 몸을 찢어 주듯 무엇인가를 전하려 한다는 상당히 강한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의 ‘장자권’을 이해하려면 단순히 하나의 성경 주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영적유산을전달받고, 그것을다시가지고가는것’이라는 강한 전수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형성되어 있습니다. 실제 영상 후반에는 ‘장자선교회’ 정기후원과 ‘장자권교재’가 소개되고, 이 교재를 그동안의 핵심 내용을 모은 일종의 ‘장자권의완결판교재’라고 설명합니다. 즉 ‘장자권’은 이 집회에서 우연히 선택한 한 번의 설교 제목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체계적인 교육 내용과 운동으로 발전한 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처음부터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에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성경의 ‘장자’, ‘처음난것’, ‘장자권’을 결코 사소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다 보면 아벨의 ‘양의첫새끼’에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문제, 르우벤의 장자권에 이르기까지 ‘처음난것’과 ‘장자권’은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을강조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장자권을무엇으로이해하느냐’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일반적인 장자권 운동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갑니다. ‘장자’는 단순히 집안에서 먼저 태어난 사람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더구나 ‘하나님의특별한복을남들보다먼저, 더많이받을권리를가진사람’이라는 의미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장자’는 무엇이 ‘첫째자리를차지하는가’, 다시 말해 사람과 교회 안에서 무엇이 우선권과 주도권을 갖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보다 아주 미묘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는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뒤, 마침내 그것을 삶으로 살아 선에 이르게 됩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진리와신앙’이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어떤 문맥에서 신앙이나 진리가 ‘장자’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제 질서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가 먼저 배워진다고 해서 진리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는 것은 그것이 선과 결합할 때이며,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도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입니다.
이것이 ‘장자권’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먼저나타난것’과 ‘실제로첫째인것’이 반드시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먼저 글자를 배우고 나중에 그 글자로 사랑의 편지를 쓴다고 해서 글자가 사랑보다 높은 것은 아닙니다. 의학을 먼저 공부하고 나중에 환자를 치료한다고 해서 의학지식 자체가 환자를 살리려는 사랑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형성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장자권’은 단순한 특권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나를지배해야하는가’라는 질서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최근 우리가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놀랍도록 직접 연결됩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가인이 ‘장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이유는 결국 그 진리를 따라 선하게 살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자신을 첫째 자리에 놓고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어떻게 됩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형제 살인의 역사적 사건을 넘어, ‘신앙이사랑보다자신을높일때교회안에서체어리티가소멸한다’는 무서운 속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장자권회복’을 말하려면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내가영적장자가되어특별한권세를얻는다’, ‘내가문이특별한복을받는다’, ‘내자녀에게축복이계승된다’, ‘내가남보다앞선영적위치를차지한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성경의 장자권을 자연적인 특권 체계로 되돌려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내안에서무엇이첫째가되어야하는가’, ‘내가아는진리가사랑을섬기고있는가’, ‘내신앙이체어리티를낳고있는가’, ‘주님께서내삶의첫째자리를실제로차지하고계시는가’를 묻는다면 장자권은 대단히 깊은 거듭남의 주제가 됩니다.
특히 AC에서 ‘처음난것’이 궁극적으로 주님께 속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벨이 드린 ‘양의첫새끼’가 거룩했던 까닭도 인간 자신이 어떤 영적 우월성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참된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난것’을 여호와께 돌리는 표상은 ‘내가장자이므로이것은내권리다’라는 선언이라기보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내안에있는선도, 진리도, 사랑도, 신앙도그근원은내가아니라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사용자가 작업해 둔 AC 자료에서도 ‘처음난것은모두거룩했는데, 이는그것들이오직홀로장자이신주님을가리켰기때문’이며,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 장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장자권’이라는 말은 오히려 인간의 특권의식을 꺾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참된 장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먼저 받았다면 그것은 남보다 높은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먼저 받은 것을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이 됩니다. 진리를 먼저 알았다면 진리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진리대로 먼저 살아야 하고, 은혜를 먼저 받았다면 그것을 자신의 영적 계급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야 합니다. 직분을 먼저 받았다면 권위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쓰임의 책임이 커집니다. 이 의미에서 ‘장자권’은 ‘특권’보다 ‘쓰임’에 가깝습니다.
영상 초반의 뜨거운 찬양과 기도 역시 바로 이 기준으로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한분밖에는사랑할이가없다’, ‘주님의마음이있는곳에나의마음이있기원한다’는 고백 자체는 매우 귀합니다. ‘이집회를통해무엇인가를받아가겠다’는 사모함 역시 그 자체로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진리를 향한 애정이 필요하며, 냉랭한 지성만으로는 영적 생명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사람의 의지와 애정이 실제 생명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이 집회의 뜨거움 자체를 경계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매우 세심하게 보아야 합니다. 초반 인도자가 반복해서 ‘이영환목사를통해주시려는것’, ‘목사가찢어주듯주려는것’을 ‘취하여가자’고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을 선의로 이해하면 ‘한목회자가평생깨닫고살아온신앙의유산을배우자’는 뜻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앙의 선배에게서 배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반드시 하나의 안전장치를 둡니다. ‘사람에게서받은진리라해도그진리가참된것은그사람에게서나왔기때문이아니라주님과말씀에서나왔기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사는 통로일 수 있지만 근원은 아닙니다. 어떤 목회자의 체험이나 교리 체계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그것이 말씀보다 높은 해석의 열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상의 첫 35분을 단순히 ‘찬양이길다’ 정도로 지나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이 도입부가 이후 장자권 강의를 받아들이는 청중의 마음을 미리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중은 단순히 ‘장자권이라는성경개념을공부하겠다’는 상태가 아니라 ‘이집회에는특별히받아야할무엇인가가있고, 이영환목사를통해그것이전달된다’는 기대 속에서 강의를 듣게 됩니다. 이것은 강력한 장점이면서 동시에 위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선한 진리가 전달된다면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는 좋은 토양이 되지만, 특정한 인간의 해석이 지나치게 절대화될 경우에는 검증보다 수용이 먼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이영환 목사나 장자선교회를 처음부터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를 끝까지 붙들면 됩니다. ‘여기서말하는장자권은결국누구를첫째자리에세우는가?’입니다. 주님을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아니면 장자권을 가진 인간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가. 선과 사랑을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아니면 신앙의 지식과 영적 권위를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나와 내 가문이 특별한 복을 받는 체계로 나아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영상 초반만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후 이영환 목사가 장자권을 실제로 어떻게 풀어 가는지를 충분히 들은 뒤 판단해야 합니다.
다만 출발점 하나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장자권’은 ‘내가남보다먼저복받을권리’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내안에서주님의선과사랑이첫째가되고, 진리와신앙은그것을섬기는질서로돌아가는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인간 누구도 스스로 장자가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처음이시며 근원이신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장자권을 제대로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기 것으로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것이라고생각했던선과진리와능력까지주님께돌려드리는것’입니다.
이 기준을 세워 놓고 다음 2부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본격적으로 ‘장자권’을 어떤 성경적 구조로 설명하는지 들어가 보겠습니다. 특히 ‘장자에게주어진복’, ‘장자의명분’, ‘아브라함·이삭·야곱과에서’,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성도와 가정과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적용된다고 보는지를 따라가면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먼저인진리와실제로첫째인선’,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와 하나씩 대조해 보겠습니다.
2부
1부에서는 이 집회의 전체 분위기와 ‘장자권’이라는 주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렌즈를 먼저 세웠습니다. 이번 2부부터는 그 렌즈를 조금 더 안쪽으로 가져가 보겠습니다. 이 집회에서 장자권은 단순히 ‘이스라엘사회에서맏아들이가졌던권리’라는 역사적 지식을 가르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장자선교회라는 조직과 교육용 교재가 따로 있을 만큼 하나의 영적 체계로 발전해 있습니다. 영상 끝에서도 현재 사용하는 교재를 이전 교재들의 핵심적인 장자권 내용을 모은 사실상의 ‘완결판교재’처럼 설명하고, 목회자 전문교재가 아니라 평신도 교육용으로 보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도 단순한 설교 한 편이 아니라 ‘장자권이라는성경개념을오늘의그리스도인에게적용하는하나의해석체계’입니다.
이 점에서 먼저 인정할 것은 ‘장자권을소중히여기라’는 권면 자체에는 상당히 좋은 영적 직관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사건은 분명히 가볍지 않습니다. 눈앞의 욕구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더 높은 것을 하찮게 여겼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눈앞의욕망때문에영적인것을팔아버리지말라’는 교훈으로 읽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 다른 관련 강의 자료에서도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것을 ‘식욕의지배를받아하나님이주신영적우선순위, 영적질서를파괴한행위’라고 설명합니다. 이 적용에는 귀담아들을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의 낮은 자연적 욕망이 더 높은 영적인 것을 지배하게 되는 상태를 매우 심각하게 봅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지배하던 질서가 뒤집혀,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통치 아래 놓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팥죽한그릇때문에장자권을팔지말라’를 ‘순간적인자연적욕망때문에영적인선과진리를희생하지말라’고 읽는다면,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도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갈림길이 생깁니다. ‘에서가장자권을팔았다’는 것을 단순히 ‘에서는귀한영적복을가볍게여겼고야곱은그것을귀하게여겼다’ 정도로 읽으면 비교적 간단합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에서와 야곱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에서는나쁜사람, 야곱은좋은사람’, ‘에서는장자권을잃은사람, 야곱은장자권을쟁취하여복받은사람’이라는 도식만으로는 말씀의 내적 구조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에서와 야곱은 두 개인의 성격을 넘어 사람의 거듭남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진리의관계’를 표상합니다. 크게 말하면 에서는 자연적 차원의 ‘선’을, 야곱은 자연적 차원의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아직 직접적으로 사랑하고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옳다’, ‘이렇게살아야한다’, ‘이것은주님의뜻이다’라는 진리를 배우고, 처음에는 그것을 의무와 순종으로 실천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순서에서는 진리가 앞에 나섭니다. 이 단계에서는 야곱이 앞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질서가 아닙니다. 진리는 왕이 되기 위해 먼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선을섬기기위해’ 먼저 들어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서 처음에는 ‘진리이기때문에선을행하지만’, 나중에는 ‘선을사랑하기때문에진리를행하는’ 상태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하라고하셨으니해야한다’였다면, 나중에는 ‘그것이선하기때문에하고싶다’가 됩니다. 바로 이때 외적으로 먼저였던 진리가 본래 자리로 물러나고, 실제로 첫째인 선이 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장자권을 둘러싼 말씀의 역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래서 ‘누가장자인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히 출생순위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사람안에서무엇이첫째가되어야하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진리가 먼저 배워지므로 진리가 장자처럼 보이지만, 실제 목적에서는 선이 먼저입니다. 신앙이 먼저 형성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생명에서는 체어리티가 먼저입니다. 사람은 ‘무엇을믿어야하는가’를 먼저 배우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그를 교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사랑하고행하는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장자권이 쉽게 ‘영적특권론’으로 변합니다. ‘나는장자권을가진사람이다’, ‘우리가정에는장자권의복이있다’, ‘내가이장자권을자녀에게물려준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장자권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인간에게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모의 신앙과 삶이 자녀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가 주님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며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자녀에게 귀한 영적 환경과 리메인스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부모가가진영적신분이나권리가혈통을따라자녀에게이전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구원도, 거듭남도, 천국도 혈통으로 상속되지 않습니다. 선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녀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목회자의 자녀라는 이유로 영적인 장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유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돌이키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받은 진리를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장자권’이 있다면 그것은 특별한 영적 신분증이 아니라 ‘주님을사랑하고이웃에게선을행하는삶이무엇인지보여주는것’일 것입니다.
이 점에서 ‘처음난것’을 여호와께 돌리라는 성경의 명령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장자권이라고 하면 ‘장자가무엇을받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오히려 ‘처음난것은누구의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대답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것’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에서 ‘양의첫새끼’가 주님께 속한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은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오직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용자가 번역·해설해 둔 AC 자료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장자권에는 놀라운 방향 전환이 일어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장자이므로더받는다’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속뜻은 ‘처음난것이므로주님께돌린다’고 말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나에게어떤복이오는가’를 묻지만, 영적인 인간은 ‘내가받은것이누구에게서왔으며무엇을위해사용되어야하는가’를 묻습니다. 자연적인 장자권은 소유의 언어로 읽기 쉽지만, 영적인 장자권은 ‘귀속과질서와쓰임’의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장자권과 함께 ‘복’을 말할 때도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복에는 자연적인 차원도 분명히 있습니다. 자녀, 토지, 풍요, 건강, 평안 같은 것이 복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을 억지로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의 좋은 것들도 모두 주님의 섭리 안에서 감사히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영적 실체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릴 때입니다. ‘장자권을회복하면사업이잘된다’, ‘가문이일어난다’, ‘자녀가성공한다’, ‘물질적인형통이따라온다’는 식의 공식이 만들어지는 순간, 말씀의 영적인 복이 자연적인 성공의 약속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정한 복은 훨씬 안쪽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과 결합하는 것,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 진리를 단지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기쁨으로 행하게 되는 것, 자기중심적인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사람의 삶을 이끌게 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쓰임을 이웃을 위해 기쁘게 감당하게 되는 것이 복입니다. 이런 사람이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할 수도 있고 병들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고 이름 없이 살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형편이 그의 장자권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에서의 팥죽 이야기도 한층 깊어집니다. 에서의 문제를 단순히 ‘먹는것을좋아했다’는 데 두어서는 안 됩니다. 팥죽은 눈앞에 있는 즉각적인 자연적 만족입니다. 장자권은 그보다 더 깊고 먼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팥죽한그릇에장자권을판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눈앞의자연적만족때문에영적인질서를뒤집어버리는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양심을 버리는 것,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는 것, 교회 성장을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는 것, 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 영적 권위를 얻으려다 겸손을 잃는 것, 심지어 ‘장자권을얻겠다’는 열심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욕망에 빠지는 것까지 모두 이 원리 아래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경우는 역설적입니다. ‘장자권을귀하게여기라’는 가르침을 듣다가 오히려 ‘내가장자가되어야한다’는 자기 우월성에 사로잡힌다면, 장자권을 지키려다가 장자권의 속뜻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나라에서 첫째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높은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쓰임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권리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 진리대로 살아야 할 책임을 더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을 ‘권세’보다 ‘책임’, ‘소유’보다 ‘귀속’, ‘특권’보다 ‘쓰임’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장자권’보다 ‘주님의장자권’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내가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첫째가 되셔야 합니다. 내 신앙이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체어리티가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다시 연결됩니다. ‘양의첫새끼’를 드린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AC.351 자료에서도 ‘양의첫새끼’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을 상징하며,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 ‘장자’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순서입니다. ‘신앙과거기서비롯된사랑’이 아니라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사실 장자권 전체를 뒤집습니다. 사람이 처음 거듭날 때에는 ‘신앙에서사랑으로’ 가는 것처럼 경험합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믿고, 그 결과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에서 실제 유입의 질서는 ‘사랑에서신앙으로’입니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오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가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나타나는순서’이고 후자는 주님에게서 오는 ‘실제질서’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신앙이 영원히 장자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 곧 신앙이 체어리티를 억압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장자권’이라는 주제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읽기에 아주 좋은 주제라고 봅니다. 일반적인 설교에서는 장자권을 ‘빼앗기지말아야할복’으로 읽기 쉽지만, 속뜻에서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내안에서무엇이진짜장자인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장자인가?’라는 질문마저 내려놓게 합니다. 모든 선과 모든 참된 신앙의 근원이신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장자권을 회복한다는 것은 ‘내가특별한사람이되는것’이 아닙니다. ‘내안의질서가회복되는것’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지식이 삶이 되며, 자기 사랑이 쓰임의 사랑 아래 놓이고, 마침내 나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장자권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그 사람 안에서는 말씀의 ‘장자권’이 실제로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을 가지고 보면 다음 단계에서 더 민감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조상의신앙과죄, 부모와자녀, 가문과장자의관계는어떻게보아야하는가?’입니다. 제공된 자막에는 후반부에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와 탈상, 장자에게 제사 음식을 먹이는 관습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는장자들이빨리죽는다’는 상당히 강한 주장까지 등장합니다. 이 지점부터는 단순한 ‘장자권의영적의미’ 문제를 넘어 ‘조상의죄와영적영향, 가문의저주, 제사와장자, 세대간영적계승’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훨씬 중요한 분별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바로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 영들의 유입, 인간의 자유, 책임, 섭리를 함께 놓고 보아야 정확히 풀립니다. 3부에서는 이 문제를 집중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부
2부 끝에서 저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이 ‘가문·조상·제사·유전적영적영향’의 문제로 들어간다고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자막의 해당 부분을 더 자세히 확인해 보니, 여기서는 한 가지를 먼저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이영환 목사는 흔히 일부 영적 전쟁이나 가계치유 계열에서 주장하는 ‘가계의저주’를 오히려 매우 강하게 부정합니다. 그는 부모나 조상의 죄가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영적 저주로 계속 이어진다는 주장을 거부하면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그리스도께서우리를위하여저주를받은바되사율법의저주에서우리를속량하셨다’는 말씀과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누구든지그리스도안에있으면새로운피조물’이라는 말씀을 근거로 듭니다. 부모가 살아온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조상의죄때문에지금도저주받는다’는 영적 법칙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무리신령하고아무리대단해도가계를저주하면저주부분에서는잘못된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부분은 앞서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건전하며, 정확하게 평가해 주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전악’이라는 말을 분명히 사용하지만, 이것은 ‘조상이지은특정죄의형벌이후손에게영적저주로전가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책 그 자체가 아니라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축적된 자연적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 성향 때문에 곧바로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의지로 받아들여 실제 악으로 만들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집안에이런죄가있었으니나는영적으로묶여있다’, ‘조상이우상숭배를했으므로후손이그저주를끊어야한다’는 식으로 개인의 현재 상태를 조상의 행위와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영환 목사가 ‘삶의공간에서문화와정서는영향을줄수있다’고 구별한 대목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폭력적인 가정에서 성장하면 폭력적인 반응방식을 배우기 쉽고,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가정에서 성장하면 물질 중심의 가치관을 습득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정직과 섬김과 기도가 일상화된 가정에서 성장하면 그러한 삶의 형식들이 마음에 깊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저주가혈통을타고흐른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는 인간의 유전적·심리적·문화적 조건이고, 후자는 조상의 죄책이 후손에게 영적으로 전가된다는 주장입니다. 이영환 목사가 이 둘을 구별하려 한 것은 좋은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더하면 이 문제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악으로 기울어지는 수많은 유전적 성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그 성향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수많은 상태를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데, 이것이 우리가 계속 다루어 온 ‘리메인스’입니다. 사람에게 유전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밀하게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성장하여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며 싸우기 시작할 때, 주님은 그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야기는 ‘조상에게서무엇을물려받았는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주님께서내게주시는선과진리에내가어떻게응답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장자권 문제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만일 영적 저주가 혈통을 따라 자동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반대로 영적 장자권이나 축복 역시 혈통을 따라 자동으로 전달된다고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문의저주’를 부정하면서 ‘가문의영적특권’은 자동적으로 계승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양쪽에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상의 악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정죄되지 않는 것처럼 조상의 선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해서 자녀가 자동으로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부모가 악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자녀가 그 때문에 지옥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각 사람을 자유로운 존재로 대하십니다.
그렇다고 부모와 조상의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그 영향의 방식이 ‘영적신분의자동이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선하게 살면 자녀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고, 말씀과 기도와 체어리티의 삶을 보여 줄 수 있으며, 어린 마음에 귀한 리메인스가 형성되는 자연적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모의 악한 삶은 자녀에게 매우 어려운 자연적 조건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그 자녀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깊고 개별적입니다.
여기서 ‘장자’라는 말의 의미도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가정에서는 장자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고 가문의 책임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서도 장자에게 특별한 법적·종교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영적 세계에 옮겨 ‘영적인장자도부모의영적권세와축복을상속받는다’고 하면 자연적 질서와 영적 질서를 혼동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계의 장자 제도는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하나의 형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 자체를 오늘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형식이무엇을표상했는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의에는 또 하나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합니다. 이영환 목사는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농촌에서 성장하며 실제로 보았던 옛 상례와 제례의 모습을 상당히 생생하게 회상합니다. 특히 탈상 때까지 죽은 이를 위해 밥을 차려 놓고, 그 음식을 장자가 먹던 풍습을 언급하면서 ‘그래서우리나라는장자들이빨리죽어버려요’, ‘조선시대부터장자들이빨리죽어버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 ‘제사문화는반드시없어져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앞의 ‘가계의저주’를 부정한 대목과 달리 상당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조상을 신적 존재처럼 섬기거나 죽은 사람에게 종교적인 제의를 드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제사음식을장자가먹었기때문에한국의장자들이빨리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주장입니다. 전자는 신앙과 예배의 대상에 관한 신학적 판단이지만, 후자는 역사적·의학적 인과관계에 관한 주장입니다. 제공된 자막 안에서는 ‘조선시대부터장자들이실제로다른형제보다일찍죽었다’는 통계나 역사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대목은 설교자의 어린 시절 경험과 해석을 일반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 ‘경험도존재할수없고사람들의논리도존재할수없다’, 결국 진리가 선포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로 가계저주론을 비판했던 논리와도 긴장이 생깁니다. ‘우리집안에이런일이반복되니가계의저주다’라는 경험적 추론을 경계했다면, ‘내가농촌에서이런제사풍습을보았고장자들이일찍죽었다’는 경험 역시 같은 엄격한 기준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앞에서 세운 좋은 원칙을 자기 자신의 제사문화 해석에도 동일하게 적용했으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이 문제를 또 다른 방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자연계 어딘가에 머물면서 제삿밥을 받아먹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물질적인 몸을 벗는 것이며, 사람은 영적 몸을 가진 채 영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따라서 죽은 조상이 제삿날 집으로 돌아와 차려 놓은 음식을 먹는다거나, 그 음식에 어떤 영적인 기운이 들어가 그것을 먹은 장자에게 죽음의 영향이 전달된다는 식의 사고는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음식은 자연계에 속하고 영은 영계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사 행위의 ‘영적의미’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음식 자체에 어떤 마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행위를하는사람의애정과의도’입니다. 사람이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과, 그 조상에게 자신의 운명과 복을 맡기며 종교적인 숭배를 드리는 것은 다릅니다. 부모와 조상을 존경하고 그들의 선한 삶을 기억하는 것은 체어리티의 질서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을 주님에게 속한 자리에 올려놓고 그에게 복과 화를 좌우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핵심은 ‘제삿밥이라는물질’이 아니라 ‘예배와신뢰가누구에게향하고있는가’입니다.
이 구별은 한국 기독교가 제사 문제를 다룰 때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제사를 반대한다면서 조상에 대한 모든 기억과 존경까지 악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가족 간 갈등만 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냥문화일뿐’이라며 그 행위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전혀 살피지 않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라면 외적인 형식만 보고 판단하기보다 그 형식 안에 있는 ‘애정과목적’을 보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 돌려야 할 예배가 죽은 인간에게 향한다면 바로잡아야 하지만, 돌아가신 부모를 기억하며 감사하고 가족이 함께 모여 그들의 선한 삶을 되새기는 것까지 같은 범주로 묶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죽은조상이살아있는후손에게영향을미칠수있는가?’라는 더 미묘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의 유입을 매우 실제적으로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애정에는 영계로부터 유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할아버지의영이나를따라다닌다’, ‘우리가문의조상영들이후손에게붙어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사람에게 결합되는 영들은 사람이 그들의 개인적 정체를 알아보고 관계를 맺도록 붙어 있는 것이 아니며, 유입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는 질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영계론을 한국적인 ‘조상신’ 개념이나 기독교 일부에서 말하는 ‘가계의영’과 섞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오히려 이영환 목사가 ‘가계의저주’를 부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와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입니다. ‘아버지와어머니가무슨죄를지었기때문에내가저주를받는다’는 사고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려는 방향은 옳습니다. 강의에서 ‘그리스도안에있으면새로운피조물’이라는 말씀을 붙들고 ‘옛것은지나갔다’고 강조하는 것도, 신약의 문자적 의미 안에서는 분명한 복음적 힘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새로운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단지 신분의 즉각적인 변경으로만 보지 않고 ‘거듭남’이라는 실제적인 과정으로 봅니다. 주님께 돌아섰다고 해서 오랜 세월 형성된 악한 성향과 습관이 순간적으로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책의 전가나 가계저주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물려받고 스스로 강화해 온 악한 성향과는 평생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저주가남아있기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자유롭게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믿었으니가계의저주는끝났다’에서 멈추면 사람은 자기 안의 실제 악을 너무 쉽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조상의죄때문에정죄받는사람이아니지만, 내안에는유전적으로기울어진수많은악의성향이있으며그것이실제악으로나타나지않도록주님앞에서날마다살펴야한다’고 이해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여기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책임이 생깁니다. ‘우리집안이원래화를잘내니까어쩔수없다’고 할 수도 없고, ‘조상의분노의영을끊으면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분노를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려 할 때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반대로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집안은몇대째목회자집안이다’, ‘우리부모는기도의사람이었다’, ‘우리가문에는장자의복이흐른다’는 사실이 나의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장자권 가르침에서 특히 지켜야 할 균형입니다. ‘저주는상속되지않지만복은자동으로상속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 환경과 영적 기회는 전달될 수 있지만, 사랑과 신앙 자체는 각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아 자기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적 유산은 ‘내가받은장자권을네게넘긴다’는 선언보다 훨씬 실제적입니다. 부모 자신이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잘못했을 때 자녀에게 사과하는 것, 말씀을 삶보다 앞세우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어려운 사람을 섬기는 것, 돈과 명예보다 선한 양심을 귀하게 여기는 것, 자녀를 자기 소유가 아니라 주님께 맡겨진 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 속에서 자녀의 마음에는 수많은 선한 상태가 심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을 나중에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일은 결국 그 자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가문의회복’이라는 말도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가문의 회복은 어떤 영적 의식을 통해 조상의 저주를 끊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서부터악의반복을멈추는것’입니다. 할아버지가 폭력적이었고 아버지도 폭력적이었다면 ‘폭력의영을끊는다’는 선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분노와 폭력을 죄로 여기고 실제 삶에서 그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집안이 대대로 돈 때문에 싸웠다면 ‘가난의저주’를 끊는 것보다 탐욕과 소유욕을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억압해 왔다면 내가 내 자녀에게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가문의 영적 질서를 바꾸는 실제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훨씬 가깝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지점에서 ‘장자권’이라는 말을 아주 아름답게 다시 사용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내가우리가문의장자가되어복을독점하겠다’가 아니라 ‘내게서부터악의대물림을멈추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장자권’을 직접 이런 문장으로 정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거듭남 교리를 오늘의 가정 문제에 적용한 표현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정직해지고, 내가 먼저 악을 끊고, 내가 먼저 이웃을 섬기며, 내 자녀에게 이전 세대와 다른 선한 환경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영적장자’라는 표현은 특권이 아니라 매우 무거운 책임을 뜻하게 됩니다.
더 깊게는 그 책임마저 ‘내힘으로우리가문을바꾸겠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마치자기힘으로하는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지만,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내가장자니까내가우리집안을구한다’가 아니라 ‘주님께서나부터고쳐주셔서, 나를통하여다음세대에조금더선한길이열리게하신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장자권은 인간의 영적 영웅주의에서 벗어나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라는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결국 이영환 목사의 이 부분에는 ‘함께보존해야할것’과 ‘분별해서내려놓아야할것’이 동시에 있습니다. ‘조상의죄때문에그리스도인이계속저주아래있다’는 가계저주론을 거부하는 것은 보존할 만합니다. 부모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실제 영향을 미친다는 구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사 음식을 장자가 먹었기 때문에 한국 장자들이 일찍 죽었다는 식의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으며, 앞서 자신이 가계저주론을 비판할 때 사용한 엄격한 기준과도 잘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이 둘을 함께 볼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을 심판할 필요도 없고, 한 대목의 오류 때문에 그가 말한 모든 진리까지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반대로 좋은 가르침 몇 가지가 있다고 해서 검증되지 않은 주장까지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조상의죄책은나의죄책이아니다. 그러나유전된악의성향은실제로존재한다. 그것은저주풀이로없어지는것이아니라주님안에서평생의거듭남을통해질서가바로잡힌다. 부모의선도자동으로나의선이되지는않는다. 나는주님에게서선과진리를직접받아자유롭게살아야한다.’ 저는 이 정도가 이 부분을 통과하는 가장 균형 잡힌 정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4부는 자연스럽게 ‘그러면장자에게주어진복이란도대체무엇인가?’라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복’을 가정과 자녀와 물질과 사역의 형통으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그 자연적 표현들 안에서 더 깊은 영적 실재를 읽을 것인지가 핵심입니다. 이 지점이 이 장자권 가르침을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분별할 때 사실상 가장 중요한 고비 가운데 하나입니다.
4부
앞의 3부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가계의저주’를 오히려 분명하게 부정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조상의 죄책이 후손에게 자동으로 넘어오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 개념과 구별하면서도 상당 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4부에서는 장자권 가르침에서 더 중요한 문제, 곧 ‘복’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장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복을 ‘무엇’이라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장자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이영환 목사의 다른 강의 자료에서 초보적 신앙의 성도가 좋아하는 것을 ‘주일성수, 교회봉사, 물질축복, 행복한가정’ 등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을 신앙의 완성으로 보지 않고 이후 죄성과 정욕을 다루는 연단의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도 함께 참고할 만합니다. 즉 그의 전체 가르침을 단순히 ‘장자권 = 물질축복’이라고 축소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장자에게 주어지는 복을 생각하면 먼저 ‘두몫’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신명기의 율법에서도 장자는 아버지 소유 가운데 다른 자녀보다 두 몫을 받았습니다. 이삭의 축복을 둘러싼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도 있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하여 요셉이 사실상 두 지파의 몫을 받게 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의미에서 ‘장자권’과 ‘더많은몫’이 연결되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자연적인 질서를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그대로 옮겨 ‘영적장자는다른사람보다더많은물질과성공과권세를받는다’는 공식으로 만드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되면 표상이 가리키는 실재를 보는 대신 표상의 외형을 다시 붙잡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구약의 토지, 재산, 자녀, 장수, 승리, 풍요는 실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연적인 복이었습니다. 그것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신적 말씀인 이유는 그 자연적인 사건들 안에 영원하고 천국적인 실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땅’은 단지 부동산을, ‘곡식과포도주’는 단지 식량과 경제적 풍요를, ‘자손’은 단지 생물학적 후손의 증가를 의미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그것들은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 교회의 번성, 거듭남에서 생겨나는 영적인 열매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갑절의복’을 받는다는 것도 반드시 ‘연봉이두배가된다’, ‘사업규모가두배가된다’, ‘자녀가남보다크게성공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풍성해지고, 그것을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이 커지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보다 ‘더많이섬길수있게되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복 개념과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많이가진사람이복받은사람’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많이흘려보낼수있는사람이복받은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권한이 커지면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지만, 천국에서는 쓰임이 커집니다. 지혜가 많으면 사람들을 지배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나눌 책임이 생깁니다. 재물이 많으면 그것 자체가 높은 영적 상태의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어떤 애정과 목적으로 사용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장자의두몫’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두배의특권’보다 ‘두배의쓰임’이라고 읽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이것은 ‘두몫’의 모든 속뜻을 단순히 ‘쓰임’ 하나로 번역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의 각 문맥마다 상응은 더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 ‘장자는더받아누리는사람’보다 ‘먼저받아더많이섬기는사람’이라는 방향이 천국의 질서와 훨씬 잘 맞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물질적인복을구하면안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삶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집이 필요하고, 음식이 필요하고, 건강이 필요하며, 자녀가 평안하기를 바라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주기도문에도 ‘오늘우리에게일용할양식을주시옵고’가 있습니다. 문제는 자연적인 복 자체가 아니라 ‘질서’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느냐,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느냐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주님을사랑하니주님께서내사업을잘되게해주실것이다’와 ‘주님께서맡겨주신사업을통하여정직하게일하고사람들에게유익을주며얻은재물을선한쓰임에사용하고싶다’는 말은 겉으로는 모두 신앙과 사업을 연결하지만 안쪽의 방향이 다릅니다. 첫 번째에서는 주님이 나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기 쉽고, 두 번째에서는 자연적인 사업이 주님의 선을 행하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전자는 종교가 자연적 욕망을 섬기는 방향으로 뒤집힐 위험이 있고, 후자는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목적을 섬기는 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장자권의복’을 분별하는 핵심입니다. 장자권을 배운 뒤 사람이 ‘이제우리가정이잘되고, 자녀가잘되고, 사업이잘되고, 경제적으로형통할것이다’라는 기대를 주로 갖게 된다면, 그 가르침이 아무리 성경 구절을 많이 사용하더라도 그 열매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장자권을 배운 뒤 ‘나는우리가정에서먼저회개해야겠다’, ‘내가먼저용서해야겠다’, ‘내가가진것을가족과이웃의선을위해사용해야겠다’, ‘자녀를내성공의연장이아니라주님께맡겨진독립된영혼으로대해야겠다’, ‘더많이받기를구하기보다더충실하게쓰임을감당해야겠다’는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 장자권 가르침은 상당히 다른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의복’은 매우 조심해서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라면 자녀가 잘되기를 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사회에서도 인정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이 이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자녀에게 가장 큰 복은 ‘천국에적합한사람이되어가는것’입니다. 정직을 사랑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이웃의 선을 기뻐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히 감당하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녀가 세상에서 크게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도 있고 뜻밖의 질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외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장자권의복을받았는가, 잃었는가’를 판단하는 척도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필연적으로 결과 중심이 됩니다. 일이 잘되면 ‘하나님이복주셨다’고 하고, 일이 안 되면 ‘내가장자권을놓쳤나’, ‘가정에무슨문제가있나’, ‘신앙이부족한가’를 찾게 됩니다. 그러면 고난당하는 의인과 가난한 성도, 병든 사람을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섭리’는 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편안하고 성공하게 만드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자연적 성공은 그 사람에게 허용될 수 있고, 어떤 성공은 오히려 막힐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실패가 사람을 겸손하게 하여 더 깊은 선으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큰 성공이 사람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키워 영적으로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건만 보고 그 섭리 전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 = 형통’이라는 공식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합니다. 이 공식이 자리 잡으면 자연스럽게 ‘고난=복없음’이라는 반대 공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세상적인 의미에서 형통한 생애를 사신 분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의 행복을 자연적인 부와 명예의 확대판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사랑과 쓰임에서 옵니다.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기쁨,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자신을 통해 흘러간다는 기쁨이 천국의 행복과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 이영환 목사의 전체 가르침에는 흥미롭게도 ‘번영신학’과 단순히 동일시하기 어려운 요소가 보입니다. 관련 강의에서 그는 초보적인 성도가 ‘물질축복받고행복한가정을꾸리는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죄성을 뼈저리게 발견하고 다루는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 부자 청년 본문을 설명하면서 예수께서 ‘소유를다팔라’고 하신 것을 단지 물질적 재산만이 아니라 사람 안의 ‘정욕, 죄성과정욕이라는소유’까지 내려놓는 문제로 확대합니다. 이것 역시 문자적 본문의 정밀한 속뜻 해석과는 별도로, 자연적인 소유보다 내면의 악을 더 근본적인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합니다.
따라서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을 평가하면서 ‘결국돈많이벌고자녀잘되자는이야기’라고 단순화하면 그의 가르침에 있는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영적 훈련과 죄의 처리, 헌신과 사명도 강조합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여러 요소들이 ‘장자권’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어떻게 결합되느냐입니다. 자연적 축복과 영적 성숙이 함께 언급될 때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 끝까지 지켜봐야 합니다. 이 구별 하나가 전체 가르침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특히 유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을 없애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몸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가정도 필요하고, 직업도 필요하며, 교회라는 외적 조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그 안에 영적인 것이 담길 때 제자리를 찾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릇이고 영적인 것은 그 안의 내용입니다. 그릇을 깨뜨릴 필요는 없지만, 빈 그릇을 내용 자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복된가정’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이 반드시 복된 가정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이 반드시 복된 가정도 아닙니다. 자녀들이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한 가정도 그것만으로는 복된 가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로 잘못했을 때 용서를 구할 수 있고, 약한 가족을 버리지 않으며,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갈등 속에서도 진리를 따라 자신을 돌아보며, 가족 구성원을 자기 소유물로 대하지 않는 가정이라면 그 안에는 천국의 질서가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된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높은 소득은 감사할 조건일 수 있지만 영적인 복의 척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녀가 자기 능력을 남을 누르는 데 쓰지 않고 쓰임에 사용하며, 성공했을 때 교만해지지 않고 실패했을 때 악한 길을 선택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부모로서는 그보다 더 큰 복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복된장자’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남들보다 두 몫을 차지한 사람이 아니라 ‘두몫을맡은사람’입니다. 많이 받은 만큼 많이 책임지고, 먼저 깨달은 만큼 먼저 실천하며, 먼저 주님을 알게 된 만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섬기는 사람입니다. 장자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지배할 권위가 아니라 섬길 책임에서 나오는 권위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첫째’의 역설이 장자권을 비추는 매우 좋은 빛이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가를 자주 다투었지만 주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장자권에 적용하면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장자이므로첫째다’에서 ‘첫째이므로가장먼저섬긴다’가 됩니다. ‘장자이므로더받는다’에서 ‘더받았으므로더많이내어놓는다’가 됩니다. ‘장자이므로내자녀가복받는다’에서 ‘내가먼저거듭나자녀에게더선한삶을보여준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전환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문제까지 다시 풀어 줍니다. 가인의 오류는 단순히 ‘신앙이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서려 한 것입니다. 먼저 태어난 것이 실제로도 첫째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서에서는 진리가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장자권의 회복은 ‘신앙의우월권을회복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자기 자리를 찾아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AC.351의 ‘양의첫새끼’가 다시 결정적인 빛을 줍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해당 자료에는 ‘처음난것은모두거룩했는데, 이는그것들이오직홀로장자이신주님을가리켰기때문’이며, 이어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장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문장이 뒤따릅니다.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 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습니다. 그러므로오직주님만이장자이십니다.’
이 한 문장은 인간 중심의 장자권 이해를 근본에서 뒤집습니다. ‘내가장자다’가 최종 진리가 아닙니다. ‘주님이장자이시다’가 최종 진리입니다. 내가 받은 복의 근원도 주님이고, 내가 가진 진리의 근원도 주님이며, 내가 행할 수 있는 선의 근원도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남보다 먼저 무엇을 받았다는 사실은 자랑할 근거가 아니라 감사하고 돌려드릴 이유가 됩니다. 장자의 첫 열매가 여호와께 속했던 것처럼, 내 삶의 첫째도 주님께 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장자권은 ‘성공의신학’에서 ‘헌신의신학’으로, ‘소유의신학’에서 ‘쓰임의신학’으로, ‘가문의특권’에서 ‘거듭남의책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저는 이 변화가 이영환 목사의 가르침 안에 있는 좋은 요소들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장자권을 훨씬 안전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고 봅니다. 사명을 강조하는 것은 살릴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것도 살릴 수 있습니다. 신앙의 유산을 전하자는 열망도 살릴 수 있습니다. 부모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는 책임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에서 ‘장자인나’가 점점 커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장자이신주님’이 점점 커져야 합니다.
결국 ‘장자의복’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얼마나받았는가?’가 아니라 ‘받은것이내안에서무엇이되었는가?’입니다. 재물이 선한 쓰임이 되었는가, 지식이 지혜가 되었는가, 신앙이 체어리티가 되었는가, 권위가 섬김이 되었는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소유욕이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선을 구하는 사랑이 되었는가, 그리고 내가 받은 진리가 나 자신을 먼저 고치는 진리가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장자권의 가장 큰 복은 어쩌면 ‘갑절의재산’이 아니라 ‘질서의회복’일 것입니다. 내 안에서 주님이 첫째가 되고, 선이 진리를 다스리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 되고,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쓰임을 향해 배열되는 것, 이것이 이루어질수록 사람은 천국의 질서에 가까워집니다. 자연적인 형통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이 질서가 사람 안에 이루어진다면 그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5부에서는 조금 더 넓게 보겠습니다.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놓고 ‘무엇은보존할것인가, 무엇은재해석할것인가, 무엇은내려놓아야하는가’를 정리하겠습니다. 특히 ‘장자권이라는별도의교리체계가과연필요한가?’라는 질문까지 들어가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장자권이 독립된 영적 특권의 교리라기보다 ‘선과진리의질서, 신앙과체어리티의질서, 거듭남과쓰임’이라는 훨씬 큰 질서 안에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5부에서 이 영상 전체를 종합하겠습니다.
5부
이제 마지막 5부에서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 전체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겠습니다. 앞의 네 편에서 우리는 이 가르침 안에 분명히 보존할 만한 요소가 있다는 것과,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상당히 깊게 재해석해야 할 부분도 있다는 것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을 ‘장자권은옳다’ 또는 ‘장자권은잘못되었다’ 가운데 하나로 단순하게 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성경의장자권이라는표상이궁극적으로우리를어디로데려가는가?’입니다.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이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고, 자기 안의 악을 살피게 하며, 받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 가정과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안에는 분명 보존해야 할 선한 것이 있습니다. 반대로 장자권이 ‘특별한사람’, ‘특별한가문’, ‘특별한복’, ‘특별한영적권세’를 소유하는 의식으로 굳어진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장자권의 속뜻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신앙을다음세대에전해야한다’는 강한 책임의식입니다. 영상 마지막까지 ‘장자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후원과 교재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고, 장자권에 관한 여러 내용을 하나의 교재로 정리하여 평신도들도 배우게 하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영환 목사에게 장자권이 단순히 설교를 위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라 자신의 목회와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주제임을 보여 줍니다. 이런 열심 자체를 가볍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한 세대가 받은 신앙을 자기 세대에서 소비하고 끝내지 않고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오늘날 교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또 하나 보존할 것은 ‘가계의저주’를 함부로 말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3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영환 목사는 조상의 죄 때문에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저주 아래 있다는 주장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부모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과 조상의 죄책이 영적으로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구별합니다. 이것은 장자와 가문을 강조하는 가르침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가문을 강조하다 보면 쉽게 ‘가문의저주’와 ‘가문의복’이라는 양극단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영환 목사의 전체 가르침을 단순한 ‘물질축복론’으로 규정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관련 강의에서는 물질 축복과 행복한 가정을 신앙생활의 최종 단계로 보지 않고, 사람이 자기 안의 죄성과 정욕을 발견하고 다루는 더 깊은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장자권과 복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곧바로 ‘번영신학’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면 실제로 그가 말하고 있는 더 넓은 신앙의 구조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가장 먼저 조정해야 할 것은 ‘장자권’이라는 개념 자체의 위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장자권은 기독교인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독립된 중심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 안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표상’이며, 그 표상이 가리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선과진리의우선순위’, ‘사랑과신앙의질서’, 그리고 더 깊게는 주님 자신입니다. 따라서 장자권을 하나의 거대한 교리 체계로 확대하여 성경 전체와 신앙생활 전체를 그 틀로 설명하려 하면, 본래 더 큰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의 표상이 오히려 전체를 지배하는 해석의 틀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성경 주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언약’을 붙들고 성경 전체를 언약 하나로만 읽을 수도 있고, ‘성전’을 붙들고 모든 것을 성전으로 설명할 수도 있으며, ‘영적전쟁’을 중심에 놓고 모든 문제를 귀신과 전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주제에는 분명 성경적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진리가 다른 모든 진리를 흡수하기 시작하면 균형이 깨집니다. 장자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권은 중요하지만, ‘모든것을설명하는열쇠’는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중심은 장자권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오직주님만이장자이시다’는 설명이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AC 자료에는 ‘처음난것은모두거룩했는데, 이는그것들이오직홀로장자이신주님을가리켰기때문’이며, 이어 ‘사랑과거기서비롯된신앙’이 장자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더욱 결정적으로 ‘모든사랑은주님에게서오는것이며, 인간에게서오는것은조금도없으므로오직주님만이장자이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장자권 가르침의 맨 중심에 놓으면 많은 것이 저절로 정리됩니다. ‘내가장자가되는법’보다 ‘주님이내안에서첫째가되시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의복을어떻게받을것인가?’보다 ‘내가받은모든선과진리가주님에게서왔음을인정하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의권세를어떻게행사할것인가?’보다 ‘내가받은것을어떤쓰임에돌릴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권의 초점이 인간에게서 주님에게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최근 AC에서 계속 만나 온 ‘가인과아벨’의 문제가 정확하게 들어옵니다. 가인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외적인 시간의 순서에서는 가인이 장자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표상하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거듭날 때 경험하는 순서와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형성한 뒤 그것을 따라 살아가면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것처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먼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먼저 나타난 신앙이 자기 자신을 본질적으로도 첫째라고 주장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바로 이 비극을 표상합니다. ‘사랑과분리된신앙’이 자신을 첫째 자리에 놓으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자권 운동을 바라볼 때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장자권을 그렇게 열심히 강조하면서도 그 결과 사람이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용서하지 못하고, 더 섬기지 못하며, 오히려 ‘나는특별한영적권리를가진사람’이라는 의식이 강해진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반대로 장자권을 배운 사람이 ‘내가먼저회개하겠다’, ‘내가먼저용서하겠다’, ‘내가먼저악을죄로여기고피하겠다’, ‘내가먼저가족을섬기겠다’고 한다면 그 가르침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무는 열매로 분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가문’이라는 말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장자권 가르침에서는 자연스럽게 ‘우리가문’과 ‘다음세대’가 중요해집니다. 이것에는 좋은 면이 있습니다. 현대사회가 지나치게 개인화되면서 신앙도 ‘나와하나님사이의개인적인문제’로 축소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자녀에게 영향을 주고, 한 세대의 선택이 다음 세대의 환경을 바꾸며, 내가 받은 선한 것을 다음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반드시 ‘자유’를 놓습니다. 나의 거듭남을 자녀에게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받은 천국의 상태를 유산처럼 자녀에게 넘길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선한 삶을 보여 주고, 주님께서 그 어린 마음에 귀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데 자연적 도구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자녀 역시 자기 자유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유산은 ‘영적신분의상속’이 아니라 ‘거듭남에유리한선한환경과본보기의전달’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도 달라집니다. ‘너는우리집안의장자권을이어받았다’고 가르치는 것보다 ‘나는주님앞에서이렇게살려고애썼다. 너도사람을두려워하기보다선과진리를사랑하고, 악을죄로여기며, 네게맡겨진쓰임을찾아살아라’고 삶으로 보여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부모의 신앙이 진짜였다면 자녀가 물려받아야 할 것은 부모의 영적 지위가 아니라 부모가 사랑했던 ‘선과진리’입니다.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권을 말할 때 자연적인 복이 자꾸 중심으로 올라오면 경계해야 합니다. 건강, 물질, 성공, 자녀의 형통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장자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4부에서 살펴보았듯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의 최종 목적은 사람을 자연계에서 가능한 한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이 허용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실패가 허용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인 결과만 가지고 주님의 복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장자권 신앙은 매우 고통스러운 역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열심히 믿었는데 자녀가 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장자권을 붙들고 기도했는데 사업이 망하면 어떻게 합니까?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장자권을제대로행사하지못했다’, ‘믿음이부족했다’, ‘무엇인가영적원리를어겼다’는 설명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복음이 오히려 사람을 짓누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런 공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자권의 ‘두몫’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면 ‘두배의소유’보다 ‘더큰쓰임’으로 읽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먼저 받은 사람은 먼저 섬깁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가르치기 전에 먼저 많이 살아야 합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더 넓은 쓰임의 가능성을 갖습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은 더 큰 책임을 집니다. 부모는 자녀보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지배자가 아니라 돌보는 사람이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보다 높은 계급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아니라 말씀과 사람을 섬기는 쓰임을 맡았기 때문에 목회자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장자’라는 말이 오히려 무거워집니다. 장자가 되려고 경쟁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장자권이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라면 ‘내가장자다’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내가먼저섬기겠다’고 하는 것이 장자의 실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의 첫째 자리 역시 바로 이런 역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 문제 역시 마지막으로 이 기준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영환 목사가 제사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는 배경에는 ‘예배의대상은오직하나님이어야한다’는 신앙적 의도가 있습니다. 그 핵심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음식을먹은장자들이일찍죽었다’는 식의 경험적 주장은 별도로 검증되어야 하며, 신학적 확신과 역사적 인과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존경하는 것과 그들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구별합니다. 외적 형식만 보지 않고 그 행위 안의 애정과 목적을 살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영적전쟁’ 역시 장자권과 결합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한 영들의 실재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영계로부터 유입이 있다는 것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실패와 질병과 가정 문제를 어떤 특정한 영이나 조상에게 연결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이 있다고 해서 ‘내가악을행한책임’을 악한 영에게 넘길 수 없습니다. 선한 천사가 있다고 해서 ‘내가선하다’고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고 악은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든 proprium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장자권의 회복도 어떤 특별한 영적 선언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거듭남’이라는 긴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늘 진리를 하나 배우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기 안의 악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피하고, 그 자리에 반대되는 선을 행합니다. 그리고 또 넘어지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상태를 지나면서 주님께서 사람의 내적 질서를 조금씩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장자권회복’이라는 말을 굳이 스베덴보리식으로 번역한다면 저는 ‘질서의회복’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장자권회복=질서의회복’이라는 용어로 정의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전체 교리를 바탕으로 오늘의 장자권 담론을 재해석한 표현입니다. 내 안에서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아래 놓이고, 거짓이 진리에 의해 밝혀지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자기애가 쓰임의 사랑 아래 놓이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주님의 통치 아래 배열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장자권’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아주 깊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무엇을더받을까?’가 먼저 떠오르느냐, ‘내안에서무엇이첫째가되어야할까?’가 먼저 떠오르느냐입니다. 전자는 자연적인 장자권의 욕망으로 내려가기 쉽고, 후자는 거듭남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에서 가장 귀하게 건질 수 있는 부분도 바로 이 방향이라고 봅니다. ‘내세대에서끝내지말자. 다음세대를생각하자. 받은것을전하자. 먼저선사람이책임을감당하자.’ 이런 정신은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개인주의적인 신앙에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가문의특별한영적권리’에서 떼어 내고 ‘선과진리를다음세대에삶으로전달하는책임’으로 바꾸면 훨씬 깊어집니다.
그러면 장자선교회의 ‘장자’도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남들과다른특별한장자들이다’가 아니라 ‘우리가먼저들었으니먼저살자’입니다. ‘우리가장자의복을받자’가 아니라 ‘먼저받은만큼먼저섬기자’입니다. ‘우리자녀에게장자권을물려주자’가 아니라 ‘우리자녀가주님을자유롭게선택할수있도록우리가먼저선과진리를살아보여주자’입니다. 이렇게 바뀐다면 장자라는 이름은 우월성의 이름이 아니라 책임의 이름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가르침을 분별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이영환 목사의 내면이 어떠한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오랜 목회 가운데 어떤 사랑으로 장자권을 가르쳤는지, 주님 앞에서 그 사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우리가 최종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내용은 말씀 앞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진리가 있다면 받아들이고, 자연적 의미에 머문 부분은 영적으로 더 깊게 읽고, 충분한 근거가 없는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사람을 버리지 않으면서 오류를 분별하고, 오류를 발견했다고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으며, 진리를 발견했다고 그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 문장을 붙들면 장자권을 지나치게 높일 필요도, 반대로 장자권이라는 성경의 귀중한 표상을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장자권은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라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하나의 표지판이 됩니다. 그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나의권리’에서 ‘주님의질서’로, ‘나의복’에서 ‘이웃을위한쓰임’으로, ‘내가문의특별함’에서 ‘모든사람을향한주님의섭리’로, ‘신앙의우월성’에서 ‘신앙과체어리티의결합’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아벨의 ‘양의첫새끼’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난것’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사랑도 주님에게서 오고, 그 사랑에서 살아나는 신앙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의 완성은 결국 ‘내가장자권을얻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 처음것도마지막것도모두주님의것입니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이라는 긴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아주 뜻밖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장자가되어라’에서 출발했지만 마지막에는 ‘참된장자는오직주님이시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남는 것은 장자의 특권이 아니라 ‘먼저받은만큼먼저사랑하고, 먼저섬기며, 먼저살아내는쓰임’입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에 이 영상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가장 깊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창2:16)
AC.125
‘모든나무의열매를먹는것’(eatofeverytree)은퍼셉션으로무엇이선하고참된지를아는것입니다.앞에서살펴본것처럼‘나무’(tree)는퍼셉션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그들은주님으로부터계속적인퍼셉션을가지고있었으므로,기억에간직되어있는것을숙고할때그것이참되고선한지를즉시지각했습니다.그리하여어떤거짓된것이나타나면그것을피했을뿐아니라심지어혐오하기까지했습니다.천사들의상태도이와같습니다.그러나태고교회의이러한퍼셉션을대신하여후에는이미계시된것으로부터무엇이참되고선한지를아는앎(cognitio)이이어졌고,그뒤에는말씀에계시된것으로부터그것을아는앎(cognitio)이이어졌습니다. To “eatofeverytree” is to know from perception what is good and true; for, as before observed, a “tree” signifies perception. They had from the Lord continual perception, so that when they reflected on what was treasured up in the memory they instantly perceived whether it was true and good, insomuch that when anything false presented itself, they not only avoided it but even regarded it with horror: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angels. In place of this perce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owever, there afterwards succeeded the knowledge[cognitio]of what is true and good from what had been previously revealed, and afterwards from what was revealed in the Word.
해설
AC.125는 창2:16의 ‘동산각종나무의열매는네가임의로먹되’라는 말씀에서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모든나무의열매를먹는것’은 퍼셉션으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입니다. 앞의 AC.102-104에서 천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는 것과 퍼셉션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에 관한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5는 그것을 ‘먹는다’는 표현과 연결하여, 천적 인간이 그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아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인퍼셉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기억이 필요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들이 ‘기억에간직되어있는것’을 숙고했다고 명시합니다. 즉 그들의 기억 안에도 여러 내용이 저장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다만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기억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을 생각하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그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즉시 지각했습니다.
이 점은 AC.80이후 계속 따라온 기억지식의 문제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감각과 기억에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도 태고교회 사람들은 기억에 간직된 것을 실제로 숙고합니다. 그러나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참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기억 속의 것을 퍼셉션의 빛 아래에서 살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문제는 기억의 존재가 아니라 무엇이 무엇을 판단하고 지배하는가 하는 질서입니다.
거짓된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피했을 뿐 아니라 혐오했다는 설명은 퍼셉션이 단순한 지적 판별 능력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참과 거짓을 머리로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거짓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도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상태도 이와 같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은 현대적인 직감이나 순간적인 느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대한 내적 지각이며, 사랑과 삶의 상태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AC.12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영적 변화를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계속 유지된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이미 계시된 것으로부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앎’(cognitio)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다시 그 뒤에는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아는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알려 주시는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이 그것을 받아 아는 방식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으로 알았지만, 후대에는 주님께서 이미 계시하신 것을 통하여 알게 되고, 마침내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AC.123에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구별한 설명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거기서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때문에’ 인정하지만, 영적 인간은 그것을 ‘말씀으로부터배웠기때문에’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AC.125는 그 차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진 뒤 인간에게 계시와 말씀이 주어졌고, 사람은 이제 말씀에 계시된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으로부터 배우는 상태를 퍼셉션보다 못한 단순한 지식 상태로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퍼셉션을 잃은 후의 인간에게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알려 주시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나무의열매를먹는다’는 것은 자기 판단대로 무엇이든 취한다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 안에서 선과 진리를 알고 받아들입니다. 기억에 있는 것조차 그 퍼셉션 아래에서 판단합니다. 그리고 퍼셉션이 사라진 후에는 이미 주어진 계시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알게 됩니다. 이처럼 AC.125는 퍼셉션과 기억과 계시와 말씀의 관계를 한 문단 안에 압축하면서, 인간이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께서 주시는 방식으로 받아 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125)
또한‘구스땅’(landofCush),곧에티오피아에는금과보석들과향료가풍부했는데,앞에서말한것처럼이것들은선과진리,그리고거기서나오는기쁘게받아들여지는것들,곧사랑과신앙에관한앎들과같은것들을뜻합니다.이것은앞서인용한사60:6,마2:1,11,시72:15의구절들(AC.113)에서도분명합니다. The “landofCush,” or Ethiopia, moreover, abounded in gold, precious stones, and spices, which, as before said, signify good, truth, and the things thence derived which are grateful, such as are those of the knowledges of love and faith. This is evident from the passages above cited (n. 113) from Isa. 60:6; Matt. 2:1, 11; Ps. 72:15.
말씀에서‘구스’(Cush),곧‘에티오피아’(Ethiopia)와‘스바’(Sheba)가이와유사한것들을뜻한다는것은선지서에서도분명합니다.스바냐에서는‘구스의강들’(riversofCush)도언급됩니다. That similar things are meant in the Word by “Cush” or “Ethiopia,” and also by “Sheba,”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Zephaniah, where also the “riversofCush” are mentioned:
라고하는데,이들도마찬가지로신앙에관한앎들을뜻합니다.또주님에관하여,따라서천적인간에관하여말하는시편에서는, by whom in like manner are signified knowledges[cognitiones]of faith.So in David,speaking of the Lord,consequently of the celestial man:
라고합니다.이말씀들은앞뒤구절과의연결에서분명한것처럼신앙의천적인것들을뜻합니다.솔로몬에게와서어려운질문들을하고향료와금과보석들을가져온스바여왕도이와유사한것들을뜻했습니다(왕상10:1-2). These words,as is plain from their connection with the preceding and subsequent verses,signify celestial things of faith.Similar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queen of Sheba,who came to Solomon,and proposed hard questions,and brought him spices,gold,and precious stones(1 Kings 10:1–2).
말씀의역사부분에들어있는모든것은선지서에있는것들과마찬가지로아르카나를뜻하고,표상하며,그안에담고있기때문입니다. For all things contained in the historical parts of the Word,as well as in the prophets,signify,represent,and involve arcana.
해설
AC.117은 앞의 AC.116에서 ‘구스땅’이 마음 또는 능력을 뜻하고, 기혼이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을 뜻한다고 한 해석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뒷받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구스, 곧 에티오피아에 금과 보석과 향료가 풍부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앞의 AC.113-114에서 금은 선을, 보석은 신앙의 진리를 나타냈고, 향료와 같은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것들과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스와 그 부요함은 여기서 단순한 지역적 풍요를 넘어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들을 나타내는 말씀의 이미지가 됩니다.
습3:5, 9-10을 인용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여기에는 ‘구스의강들’이 등장하고, 그 너머에서 주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예물을 가져옵니다. 지금 창2:13에서도 둘째 강 기혼이 ‘구스온땅을두른다’고 했으므로, ‘강’과 ‘구스’가 함께 등장하는 이 말씀은 기혼과 구스의 속뜻을 뒷받침합니다. 더구나 그곳에서 오는 것은 주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따라서 구스와 관련된 앎들은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에 속하며 주님을 향하는 것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11:43은 이 번호에서 특히 중요한 구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애굽’은 기억지식을 뜻하고 ‘구스사람들’은 앎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두 표현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여기서는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앞의 AC.111에서 겉 사람이 기억지식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여기는 문제를 지적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기억지식은 사람이 외적으로 배우고 기억하는 지식과 관계되지만, 여기서 구스가 나타내는 앎들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AC.116-117의 기혼을 단순히 지식이 많아지는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겔27:22의 스바와 라아마의 상인들이 향료와 보석과 금을 가져오는 장면도 같은 의미를 뒷받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신앙에관한앎들’과 연결합니다. 여기에서도 금과 보석과 향료가 다시 함께 등장합니다. 앞 번호들에서 각각 따로 설명했던 선과 진리,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이제 ‘앎들’이라는 주제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스와 스바가 나타내는 앎은 생명과 분리된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내용, 곧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을 알고 있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시72:7, 10에서는 다시스와 섬의 왕들, 스바와 시바의 왕들이 예물을 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시편이 주님에 관하여 말하며, 따라서 천적 인간에 관하여 말한다고 설명하고, 이 말씀들이 ‘신앙의천적인것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님에관하여,따라서천적인간에관하여’라는 연결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천적 인간을 동일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천적 인간에게 있는 참된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지금까지의 설명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 안에 나타나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은 그 사람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질서에 속합니다.
솔로몬을 찾아온 스바 여왕의 이야기를 인용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스바 여왕은 어려운 질문들을 가지고 솔로몬에게 와서 향료와 금과 보석을 가져왔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역사적 사건에도 앞의 선지서에서 본 것과 유사한 것들이 표상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마지막 문장이 중요해집니다. ‘말씀의역사부분에들어있는모든것은선지서에있는것들과마찬가지로아르카나를뜻하고,표상하며,그안에담고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역사적 서술도 단순히 과거 사건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따라서 AC.117의 여러 인용은 ‘구스=앎’이라는 대응 하나를 증명하기 위한 자료의 나열에 그치지 않습니다. 금과 보석과 향료, 구스와 스바, 예물과 경배라는 이미지들이 반복되면서,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이 사랑과 신앙의 생명 안에 있을 때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2:13의 기혼으로 돌아오면 그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에덴에서 시작된 생명의 강이 이제 인간의 이해와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앎들에까지 이릅니다. 사람은 단순히 기억지식을 쌓아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 안에서 선과 진리를 알고 이해하게 됩니다. 기혼과 구스는 바로 그 이해와 앎의 영역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117해설)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창2:13)
AC.116
‘둘째강’(secondriver),곧‘기혼’(Gihon)은선과진리,또는사랑과신앙에속한모든것에관한앎을뜻하고,‘구스땅’(landofCush)은마음또는능력을뜻합니다.마음은의지와이해로이루어져있습니다.첫째강에관하여말한것은의지에관계하고,이둘째강에관하여말한것은이해에관계하는데,선과진리에관한앎들은이해에속합니다. The “secondriver,” which is called “Gihon,” signifie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that belong to the good and the true, or to love and faith, and the “landofCush” signifies the mind or faculty. The mind is constituted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and what is said of the first river has reference to the will, and what of this one to the understanding to which belong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good and of truth.
해설
AC.116은 에덴에서 나온 네 강 가운데 둘째 강 ‘기혼’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기혼은 ‘선과진리,또는사랑과신앙에속한모든것에관한앎’을 뜻하고, 기혼이 두르는 ‘구스땅’은 마음 또는 능력을 뜻합니다. 앞의 첫째 강 비손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나타냈다면, 이제 둘째 강 기혼은 선과 진리에 관한 ‘앎’과 관계됩니다. 이로써 에덴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강이 여러 강으로 갈라진다는 말씀이 인간 안의 서로 구별되는 능력과 그 작용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앎’을 앞에서 자주 등장했던 ‘기억지식’과 곧바로 같은 것으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문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cognitio와 cognitiones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AC.111에서 겉 사람들이 거의 기억지식밖에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른다고 했던 것과 달리, 여기서 말하는 앎들은 ‘선과진리,또는사랑과신앙에속한모든것’에 관한 앎들입니다. 따라서 기혼이 나타내는 것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축적하는 능력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을 알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마음의 영역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마음은의지와이해로이루어져있다’는 설명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앞의 AC.111에서는 많은 사람이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둘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16은 그 원리를 네 강의 해석에 직접 적용합니다. 첫째 강에 관한 것은 의지에 관계하고, 둘째 강에 관한 것은 이해에 관계합니다. 하나의 마음 안에 의지와 이해가 있으면서도 둘은 서로 구별되고, 에덴의 첫째 강과 둘째 강은 그 구별되는 두 측면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혼은 이해와 관계할까요? AC.116자체가 그 이유를 바로 밝혀 줍니다. ‘선과진리에관한앎들은이해에속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는 단순히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선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인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받아들이는 능력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기혼’이 나타내는 앎은 인간의 이해 안에서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이 자리 잡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강과 둘째 강을 함께 보면 앞에서 다소 추상적으로 들렸던 의지와 이해의 구별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AC.110-115에서 첫째 강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과 관계되었고, 그 설명은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드는 데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제 둘째 강 기혼은 선과 진리에 관한 앎들을 가진 이해와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마음을 하나의 막연한 영적 능력으로 다루지 않고, 의지와 이해라는 서로 구별되는 두 능력이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각각 고유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별 역시 인간의 능력을 주님과 독립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설명되는 네 강 전체의 출발점은 여전히 에덴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강입니다. 앞에서 그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이며, 그 지혜가 동산을 적셔 지성을 주는 것으로 설명되었습니다(AC.107). 그리고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는 모두 그 근원에서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AC.112). 그러므로 의지와 이해, 그리고 그 이해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앎들도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AC.116은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면서도 다시 에덴의 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잊지 않게 합니다. 마음에는 의지와 이해가 있고, 이해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앎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살아 있는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것은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기 때문입니다. 기혼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과 진리를 파악하여 주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서 인간의 이해가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주는 둘째 강입니다. (AC.116해설)
보석들의이러한의미는에스겔에서도분명합니다.거기서는지혜와지성이라는천국의부요를가진사람에관하여이렇게말합니다. This signification of precious stones is also plain from Ezekiel,where,speaking of a man possessed of heavenly riches,which are wisdom and intelligence,it is said:
이말씀들이돌들을뜻하는것이아니라신앙의천적이고영적인것들을뜻한다는사실은누구에게나분명할것입니다.참으로각각의돌은신앙의어떤본질적인것을표상했습니다. which words it must be evident to everyone do not signify stones,but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yea,each stone represented some essential of faith.
해설
AC.114는 앞의 AC.110에서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진리를 뜻한다고 한 해석 가운데 특히 ‘호마노’를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의 배경을 제시합니다. AC.113에서 금이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한다는 것을 여러 성경 구절로 확인했다면, 이제 AC.114에서는 보석들이 신앙의 진리를 뜻하고 표상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하윌라 땅에 ‘금’과 함께 ‘호마노’가 있다는 것은 선과 진리가 함께 있다는 앞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아론의 판결 흉패와 에봇을 예로 듭니다. 흉패를 만드는 데 사용된 금과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은 ‘사랑에속한것들’을 표상했고, 그 위에 놓인 보석들은 ‘사랑에서나오는신앙에속한것들’을 표상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보석=진리’라는 하나의 대응 관계가 아닙니다. 보석들이 나타내는 신앙 자체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나오는신앙’이라는 점입니다. 앞의 AC.110-112에서 계속 설명해 온 질서가 아론의 흉패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에봇 어깨에 있던 두 ‘기념의보석’이 호마노였다는 사실은 창2:12의 호마노와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출28:9-22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의 하윌라 땅에서 금과 호마노가 함께 등장하고, 성막의 거룩한 의복에서도 금과 호마노가 함께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의 연결을 통하여 금이 선을, 호마노를 비롯한 보석들이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2의 호마노를 단순히 그 지역의 귀한 광물에 관한 정보로만 읽지 않고,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진리의 표상으로 읽는 근거가 여기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이어지는 겔28:12-13, 15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이 말씀에는 ‘에덴’, ‘하나님의동산’, ‘각종보석’, ‘금’이 한 장면 안에 함께 나타납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창2의 에덴동산과 금과 호마노의 이미지가 에스겔에서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사람은 ‘지혜가충족하며온전히아름다웠다’고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까닭은 이러한 보석들이 단순한 물질적 부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지성이라는천국의부요’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보석의 상응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보석들을 한꺼번에 막연히 ‘진리’라고만 처리하지 않고, ‘각각의돌은신앙의어떤본질적인것을표상했다’고 말합니다. 즉 보석들은 모두 신앙과 진리에 관계되지만 각각이 완전히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앞의 AC.111에서 주님께서 천국을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으신다고 한 설명과도 잘 연결됩니다. 하나의 신앙 안에도 서로 구별되는 수많은 진리들이 있으며, 그 차이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성질을 지닌 채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아론의 흉패는 AC.111의 ‘하나를이루면서도가장뚜렷하게구별된다’는 원리를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여러 보석이 하나의 흉패에 놓여 있지만 각각의 보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의 돌이 신앙의 어떤 본질적인 것을 표상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질서는 다양성을 없애 하나로 만드는 질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을 각각의 자리에서 구별하시면서 하나의 질서 안에 결합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다시 AC.112의 ‘따라서주님으로부터’라는 말로 돌아갑니다. 신앙의 진리가 보석처럼 귀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 내어 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참된 진리는 신앙에서 나오고, 그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지 않으며,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의 금과 호마노, 아론의 흉패와 에봇의 보석들, 에스겔의 하나님의 동산을 장식한 보석들은 서로 떨어진 이미지들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의 풍성함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AC.114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