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Y.104 심화

1. 천국은 악과 어떻게 싸우는가?

천사들은 악령들과 어떻게 싸우나요? 직접 1:1로 마치 칼싸움하듯 싸우나요, 아니면 천사들의 아우라 범위를 악령들이 침범하지 못하는 건가요?

 

스베덴보리의 묘사를 종합하면 ‘둘 다 아니고, 훨씬 더 내적인 방식’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천사와 악령이 마치 육체를 가진 병사들처럼 칼을 들고 1:1로 싸우는 것이 기본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천사의 아우라가 강해서 악령이 접근하지 못한다’ 정도도 아닙니다. 핵심은 ‘선과 진리의 입류(influx)를 통한 영적 전투’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영계에서 천사와 영들은 모두 자신들의 사랑과 사고에 따른 ‘스피어(sphere, 영역·기운)’를 발산합니다. 천사에게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의 스피어가 나오고, 악령에게서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 거짓과 악의 스피어가 나옵니다. 그래서 서로 반대되는 스피어가 가까워지면 실제적인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랑과 생각이 자연계의 물리적 힘보다 훨씬 직접적인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사들이 악령과 싸울 때 중요한 것은 ‘천사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전달합니다. 악령은 그 진리를 견디지 못합니다. 자기 안에 있는 악과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진리를 말하거나 천사의 스피어가 임하면 악령이 고통을 느끼고 물러가거나 도망치는 일이 생깁니다. 어떤 경우에는 가까이 접근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두 번째 그림, 즉 ‘천사들의 아우라 범위를 악령들이 침범하기 어렵다’는 표현이 1:1 칼싸움보다는 훨씬 가깝습니다. 다만 ‘보이지 않는 방어막’처럼 이해하면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천사 개인의 초능력 같은 것이 아니라 ‘그 천사를 통해 임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영계의 전투를 때때로 ‘전쟁’, ‘무기’, ‘칼’, ‘방패’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다는 점입니다. 영계에서는 내적인 것이 외적인 형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들이 실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는 표상적 장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의 실체는 물리적인 근육과 철제 무기의 충돌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의 충돌’입니다. 성경에서 ‘칼’이 진리를, 반대 의미에서는 거짓을 뜻하는 것도 이 상응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영계에서 칼싸움 같은 장면이 보인다 해도 ‘천국에는 실제 무기고가 있고 천사들이 칼을 차고 출동한다’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영계론과는 상당히 멀어집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천사들은 악령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싸우지 않습니다. 영은 죽일 수도 없습니다. 천사들의 역할은 악령의 공격을 억제하고, 공격받는 사람이나 영을 보호하며, 악령이 주입하는 거짓에 맞서 진리를 불어넣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시험(temptation)을 겪을 때 이 구조가 선명합니다. 악령들은 인간 안의 악과 거짓, 과거의 기억과 욕망을 자극하고, 천사들은 그 반대편에서 선과 진리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 싸움이 ‘내 생각과 내 갈등’처럼 느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의 놀라운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이 가장 가깝습니다.

 

‘악령 → 인간 안의 악·거짓·두려움·절망을 자극 → 인간 ← 선·진리·소망을 일깨움 ← 천사 ← 주님’

 

그러나 이것조차 최종적으로는 ‘천사 대 악령’의 대등한 전쟁이 아닙니다. 천사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악령이 천사를 두려워하는 것도 천사라는 존재 자체가 무서워서라기보다 그 천사를 통하여 임하는 ‘주님의 선과 진리’를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자신의 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능력을 잃는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이걸 조금 전 ‘시티즌 비질란테’와 연결하면 아주 흥미로운 차이가 드러납니다. 비질란테의 방식은 ‘악인을 파괴하여 악을 제거하려는 방식’입니다. 반면 천국의 방식은 ‘악이 더 이상 다른 존재를 해치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분리하여 질서를 회복하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천사는 악령을 증오해서 두들겨 패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질서가 임하면 악이 그 질서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라’라는 표현을 조금 다듬는다면 ‘천사의 스피어(sphere)’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정확하게는 ‘천사의 스피어’조차 천사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천사를 통하여 흘러드는 주님의 선과 진리의 스피어’입니다.

 

 

 

SY.104, 씨네마톡, ‘시티즌 비질란테’(Citizen Vigilante, 2026) - 정의가 복수가 되는 순간

※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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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심화

4. ‘왜 아론은 제사를 마친 뒤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했을까?’

 

레9:22에서 아론은 속죄제와 번제와 화목제를 모두 마친 뒤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제사장으로 위임된 아론이 처음으로 실제 사역을 수행한 뒤 행한 마지막 행동이 ‘축복’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축복을 단순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비는 종교적 인사로 보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422(창12:3)는 ‘축복’이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천적·영적·자연적 차원의 좋은 것들을 포괄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백성을 축복한다는 것은 아론 자신이 복을 만들어 백성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제사장의 쓰임을 통해 백성에게 전달되는 것을 표상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레8의 장면을 기억하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레8에서는 아론의 ‘손’에 위임식의 제물들이 놓였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의 것이며 주님에게서 온다는 인정을 나타낸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손이 레9에서는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즉 먼저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레8에서는 손이 주님에게서 받고, 레9에서는 그 손이 백성을 향해 축복합니다. 이것이 쓰임의 질서입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영적 쓰임의 기준은 ‘내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나를 통해 얼마나 선한 쓰임으로 흘러가는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데 사용해야 하고, 물질을 받았다면 선한 쓰임에 사용하며, 경험과 지혜를 받았다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론은 ‘손을 들어’ 축복합니다. 손이 능력과 행함을 나타낸다는 스베덴보리의 일반적인 상응을 생각하면 축복은 말만의 행위가 아니라 선을 실제로 전달하는 쓰임과 잘 연결됩니다. 진정한 축복은 ‘복 받으십시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통해 실제로 이웃에게 선이 전달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레9의 첫 제사장 사역은 자기 영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론이 제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손이 백성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리고 곧이어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쓰임에 부름받은 사람의 방향입니다. 주님에게서 받고 이웃에게 흘려보내며, 마지막에는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레8에서 채워진 손이 레9에서 축복하는 손이 되는 것, 이것이 위임에서 쓰임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SW.레9 심화 4)

 

 

 

SWC.레9 심화5, ‘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살랐을까?’

SWC.레9 심화5. ‘왜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물을 살랐을까?’ 레9의 마지막은 장엄합니다. 아론이 모든 제사를 마치고 백성을 축복하고, 모세와 아론이 회막에 들어갔다가 나와 다시 백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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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9 심화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SWC.레9 심화3.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레9에는 같은 약속이 두 번 나옵니다. 6절에서 모세는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고 말하고, 23절에서는 모든 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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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5 심화

4. ‘왜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는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았을까?’

 

레5:11은 레2를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레2의 소제에서는 고운 가루에 반드시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레5에서는 형편이 어려워 비둘기조차 드릴 수 없는 사람이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를 속죄제로 가져오도록 하면서 정반대로 명령합니다. ‘이는 속죄제인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 같은 고운 가루인데 왜 소제에서는 기름과 유향을 더하고, 속죄제에서는 그것들을 의도적으로 빼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는 놀랍게도 스베덴보리가 거의 그대로 답한 대목이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37(출29:40)은 여러 소제의 규정을 설명하다가 레5:11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리고 죄와 허물을 위한 제사의 소제에는 십분의 일 에바의 고운 가루를 사용하되 ‘그 위에 기름이나 유향을 두지 않았다’고 한 뒤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기름’은 사랑의 선을, ‘유향’은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의미하지만, 속죄제와 속건제는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으로부터의 ‘정결과 속죄’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선 및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섞여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레5:11을 직접 다루는 원전이므로 이 부분의 상응은 매우 확실합니다.

 

이 설명을 이해하려면 레2를 잠시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2에서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은 함께 있었습니다. 고운 가루는 선에서 나오는 진리와 연결되고, 기름은 사랑의 선을, 유향은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소제는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가 인간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 예배와 쓰임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운 상태를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에서는 기름과 유향이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함께 있어야 소제가 나타내는 영적 상태가 온전히 표현됩니다.

 

그러나 레5의 상황은 다릅니다. 지금 인간은 이미 선과 진리가 조화롭게 결합된 상태를 표현하려고 제단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악과 거짓이 드러났고 그것으로부터 정결하게 되어야 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고운 가루를 가져오지만 거기에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 사람에게 사랑의 선과 진리가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이 제사가 표상하는 중심 사건이 ‘선과 진리의 결합’이 아니라 ‘악과 거짓으로부터의 정결’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의 재료는 같아도 제사의 목적과 계열이 달라지면 상응의 배열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레위기의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흔히 ‘기름 = 사랑’, ‘유향 = 진리’, ‘고운 가루 = 진리’와 같이 대응표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기계적으로 대입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그렇게 단순한 암호풀이가 아닙니다. 무엇이 무엇과 함께 있는지, 어떤 제사 안에 놓여 있는지, 그 제사가 전체적으로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0137의 설명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기름과 유향 자체는 선한 것을 표상하지만, 속죄제에서는 바로 그 선한 것들을 ‘넣지 않는 것’까지 의미가 있습니다. 악과 거짓을 정결하게 하는 과정과 이미 정결해진 선과 진리의 상태를 뒤섞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거듭남에서도 매우 실제적입니다. 자기 안에서 악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너무 빨리 그것을 좋은 것으로 포장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화를 내고도 ‘정의를 위한 분노였다’고 하고,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도 ‘그 사람을 사랑해서 그랬다’고 하며,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주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악을 악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속죄제의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넣지 않는 장면은 영적으로 이런 혼합을 경계하는 모습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정결해야 할 것은 먼저 정결해야 합니다. 악을 선이라고 부르거나 거짓을 좋은 의도라고 포장하지 않고 주님의 빛 앞에서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2와 레5의 차이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레2에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주님께 드려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레5에서는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악과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일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거듭남을 통해 이루어지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그 결합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서로 반대되는 제사가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큰 역사 안에서 서로 다른 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 레위기의 그토록 사소해 보이는 규정 하나까지 함부로 지나칠 수 없는지를 보여 줍니다. ‘기름을 넣는다’와 ‘기름을 넣지 않는다’, ‘유향을 놓는다’와 ‘유향을 놓지 않는다’의 차이 안에 인간의 거듭남에서 ‘정결’과 ‘결합’을 구별하는 아르카나가 숨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악과 거짓을 선과 진리로 위장하지 않고 드러내어 정결하게 하시며, 그렇게 깨끗하게 된 자리에서 비로소 선과 진리가 참으로 결합되게 하십니다. 레5:11의 비어 있는 고운 가루는 그래서 결핍의 표상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정확하게 보여 주는 제물입니다. (SWC.레5 심화 4)

 

 

 

SW.7 심화 5, ‘모르고 지은 죄도 죄인가? - 무지와 이노센스, 그리고 책임의 문제’

SW.7 심화5. ‘모르고 지은 죄도 죄인가? - 무지와 이노센스, 그리고 책임의 문제’ 레5:17은 읽는 사람을 멈추게 하는 말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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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7 심화 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SW.7 심화3. ‘죄를 깨닫고 자복한다는 것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할까?’ 레4와 레5를 이어 읽으면 매우 중요한 변화가 보입니다. 레4에서 반복되는 말은 ‘그가 범한 죄를 깨달으면’이고, 레5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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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3 심화

1. 화목제의 ‘화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무엇이 일어나는 것일까?

 

‘화목제’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사이가 나빠진 인간이 제물을 드려 하나님과 다시 사이좋게 되는 제사’를 떠올리기 쉽습니다. 더 강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죄 때문에 분노하신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그분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제사처럼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391(출24:5)은 이스라엘 백성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장면을 해설하면서, 이것이 ‘선으로부터, 그리고 선에서 나오는 진리로부터 드리는 주님에 대한 예배’를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번제가 특별히 사랑의 선으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한다면, 제사는 선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로부터 드리는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화목제의 중심에도 선과 진리가 함께 있습니다.

 

레3의 의식 자체가 이것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제물의 피는 제단 사방에 뿌려지고 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살라집니다. AC.10033(출29:22)은 피가 신적 진리를, 기름이 신적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화목제의 중심에는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은 무엇일까요?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미워하시다가 제물을 보고 마음을 바꾸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변해야 하는 쪽은 인간입니다. 인간 안의 악과 거짓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그 결과 인간 스스로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진리를 통해 인간에게 무엇이 악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보여 주십니다. 인간이 그 진리에 따라 악을 죄로 여겨 피하기 시작하면 주님께서 선을 심으실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진리가 선과 결합되면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점차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화목’은 단순한 감정적 관계 회복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것은 ‘결합’입니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고,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함으로써 인간이 주님과 결합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목제에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는 행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AC.10047(출29:16)은 피를 제단 둘레에 뿌리는 것이 신적 진리와 신적 선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거듭남 역시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제를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는 제사’로만 읽으면 레3의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놓칠 수 있습니다. 화목제는 오히려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당신과 결합시키시는 거듭남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인간 안에서 악과 거짓이 물러가고, 주님의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가 선과 결합하며, 그 선이 삶의 가장 바깥쪽까지 내려올 때 인간은 점점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결과가 ‘평화’입니다. 성경의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서로 싸우던 것들이 주님의 질서 안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는 상태와 깊이 관계합니다. 진리와 선이 하나가 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며, 인간의 뜻이 점차 주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 평화가 옵니다.

 

따라서 화목제는 ‘내가 무엇을 드려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들 것인가?’를 묻는 제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내 안에서 무엇을 바로잡으셔야 내가 다시 그분의 생명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가?’를 묻게 하는 제사입니다.

 

화목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주님에 의해 변화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진리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고, 그 진리를 선과 결합시키시며, 마침내 우리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이 하나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우리는 주님과의 결합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화목제의 깊은 중심입니다. (SWC.레3 심화 1)

 

 

 

SW.5 심화 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SW.5 심화2. ‘왜 하나님께서는 내장과 콩팥의 기름까지 요구하셨을까?’ 레위기 3장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가장 낯선 부분은 아마 제물의 내장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대목일 것입니다. ‘내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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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5, 레3, ‘모든 기름은 여호와의 것이니라 - 화목제에 감추어진 선과 진리의 결합’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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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C.레2 심화

1. ‘왜 고운 가루에 기름과 유향을 함께 놓았을까?’

 

레위기 2장의 소제를 가장 짧게 표현한다면 ‘고운 가루 + 기름 + 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 가지를 함께 드리도록 하셨을까요? 단순히 향기롭고 좋은 제물을 만들기 위한 조리법이었을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세 가지의 결합 속에서 소제의 핵심적인 영적 질서를 봅니다.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1757-1759, AE) 324(계5:8)은 놀랍게도 레2:1-2를 직접 인용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고운 가루가 진정한 진리를 의미하고, 기름은 천적 사랑의 선,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소제의 세 재료는 단순한 음식 재료가 아니라 ‘진리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함께 있는 예배를 보여 줍니다.

 

고운 가루부터 살펴보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9995(출29:2)는 고운 가루를 ‘선에서 나오는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진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신적 선에서 신적 진리가 나오며, 인간 안에서도 참된 진리는 결국 선을 섬기고 선으로 인도합니다. 따라서 고운 가루는 단순히 많이 배운 교리 지식이 아닙니다. 삶을 선하게 만드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고운 가루만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위에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기름은 사랑의 선을 표상합니다. 진리에 사랑이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확한 진리라도 사랑과 분리되면 사람을 살리는 진리가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위한 진리,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진리, 지적 우월감을 위한 진리는 고운 가루만 있고 기름이 없는 상태와 비슷합니다. 주님의 진리는 사랑 안에서 사용될 때 그 본래의 목적을 이룹니다.

 

그리고 거기에 유향이 더해집니다. 유향은 영적 사랑의 선과 관계합니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이웃 사랑과 체어리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소제 안에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질서가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사랑의 선이 오고, 그 선에서 진리가 나오며, 그 사랑과 진리가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을 점검하는 매우 좋은 기준이 됩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 물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에는 기름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향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더 온유하고 정직하며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제는 신앙과 사랑과 체어리티를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신앙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면 메마른 지식이 되기 쉽고, 사랑이라고 하면서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으로 선한 것인지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주님 사랑을 말하면서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 사랑 역시 삶에서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이 한 소제 안에 함께 놓이는 것은 그래서 매우 아름다운 상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사람’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고, 그 사랑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흘러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은 하나의 소제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과 사랑과 삶도 하나가 됩니다. (SWC.레2 심화 1)

 

 

 

SW.4 심화 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SW.4 심화2. ‘왜 누룩과 꿀은 금하고 소금은 반드시 넣으라 하셨을까?’ 레위기 2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규정 가운데 하나는 누룩과 꿀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못하게 하면서 소금은 모든 소제에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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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4, 레2,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고 - 선과 진리가 하나 되어 삶의 예물이 되기까지’

※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 말씀’은 주님의 말씀 위에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덧붙이거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보다 더 깊은 뜻을 스베덴보리에게서 찾고자 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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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1부

 

이 영상은 처음부터 ‘장자권’이라는 교리를 차분히 설명하는 성경강의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약 35분 동안 찬양과 기도, 집회를 향한 기대와 사모함이 길게 이어지고, 그 가운데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은 ‘이번 집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것을 받아 가자’, ‘이영환 목사를 통해 주시려는 것을 취하고 가자’는 태도입니다. 특히 인도자는 이영환 목사가 자신의 몸을 찢어 주듯 무엇인가를 전하려 한다는 상당히 강한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이 영상의 ‘장자권’을 이해하려면 단순히 하나의 성경 주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는 ‘어떤 영적 유산을 전달받고, 그것을 다시 가지고 가는 것’이라는 강한 전수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형성되어 있습니다. 실제 영상 후반에는 ‘장자선교회’ 정기후원과 ‘장자권 교재’가 소개되고, 이 교재를 그동안의 핵심 내용을 모은 일종의 ‘장자권의 완결판 교재’라고 설명합니다. 즉 ‘장자권’은 이 집회에서 우연히 선택한 한 번의 설교 제목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체계적인 교육 내용과 운동으로 발전한 주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처음부터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에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역시 성경의 ‘장자’, ‘처음 난 것’, ‘장자권’을 결코 사소하게 다루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다 보면 아벨의 ‘양의 첫 새끼’에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에서와 야곱의 장자권 문제, 르우벤의 장자권에 이르기까지 ‘처음 난 것’과 ‘장자권’은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을 강조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장자권을 무엇으로 이해하느냐’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일반적인 장자권 운동과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들어갑니다. ‘장자’는 단순히 집안에서 먼저 태어난 사람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으며, 더구나 ‘하나님의 특별한 복을 남들보다 먼저, 더 많이 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미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장자’는 무엇이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가’, 다시 말해 사람과 교회 안에서 무엇이 우선권과 주도권을 갖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생각보다 아주 미묘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는 먼저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인 뒤, 마침내 그것을 삶으로 살아 선에 이르게 됩니다. 시간적으로 보면 ‘진리와 신앙’이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어떤 문맥에서 신앙이나 진리가 ‘장자’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실제 질서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가 먼저 배워진다고 해서 진리가 목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진리가 되는 것은 그것이 선과 결합할 때이며,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것도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입니다.

 

이것이 ‘장자권’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먼저 나타난 것’과 ‘실제로 첫째인 것’이 반드시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가 먼저 글자를 배우고 나중에 그 글자로 사랑의 편지를 쓴다고 해서 글자가 사랑보다 높은 것은 아닙니다. 의학을 먼저 공부하고 나중에 환자를 치료한다고 해서 의학지식 자체가 환자를 살리려는 사랑보다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형성하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선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의미의 ‘장자권’은 단순한 특권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나를 지배해야 하는가’라는 질서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최근 우리가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놀랍도록 직접 연결됩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먼저 등장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가인이 ‘장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이유는 결국 그 진리를 따라 선하게 살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자신을 첫째 자리에 놓고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어떻게 됩니까?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이것이 단순한 형제 살인의 역사적 사건을 넘어, ‘신앙이 사랑보다 자신을 높일 때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한다’는 무서운 속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장자권 회복’을 말하려면 상당히 조심해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내가 영적 장자가 되어 특별한 권세를 얻는다’, ‘내 가문이 특별한 복을 받는다’, ‘내 자녀에게 축복이 계승된다’, ‘내가 남보다 앞선 영적 위치를 차지한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성경의 장자권을 자연적인 특권 체계로 되돌려 놓을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내 안에서 무엇이 첫째가 되어야 하는가’, ‘내가 아는 진리가 사랑을 섬기고 있는가’, ‘내 신앙이 체어리티를 낳고 있는가’, ‘주님께서 내 삶의 첫째 자리를 실제로 차지하고 계시는가’를 묻는다면 장자권은 대단히 깊은 거듭남의 주제가 됩니다.

 

특히 AC에서 ‘처음 난 것’이 궁극적으로 주님께 속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아벨이 드린 ‘양의 첫 새끼’가 거룩했던 까닭도 인간 자신이 어떤 영적 우월성을 소유하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참된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돌리는 표상은 ‘내가 장자이므로 이것은 내 권리다’라는 선언이라기보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내 안에 있는 선도, 진리도, 사랑도, 신앙도 그 근원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사용자가 작업해 둔 AC 자료에서도 ‘처음 난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장자권’이라는 말은 오히려 인간의 특권의식을 꺾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참된 장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먼저 받았다면 그것은 남보다 높은 사람이 되라는 뜻이 아니라, 먼저 받은 것을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해 사용하라는 뜻이 됩니다. 진리를 먼저 알았다면 진리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진리대로 먼저 살아야 하고, 은혜를 먼저 받았다면 그것을 자신의 영적 계급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야 합니다. 직분을 먼저 받았다면 권위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쓰임의 책임이 커집니다. 이 의미에서 ‘장자권’은 ‘특권’보다 ‘쓰임’에 가깝습니다.

 

영상 초반의 뜨거운 찬양과 기도 역시 바로 이 기준으로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한 분밖에는 사랑할 이가 없다’,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 원한다’는 고백 자체는 매우 귀합니다. ‘이 집회를 통해 무엇인가를 받아 가겠다’는 사모함 역시 그 자체로 잘못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진리를 향한 애정이 필요하며, 냉랭한 지성만으로는 영적 생명이 자라기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사람의 의지와 애정이 실제 생명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이 집회의 뜨거움 자체를 경계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매우 세심하게 보아야 합니다. 초반 인도자가 반복해서 ‘이영환 목사를 통해 주시려는 것’, ‘목사가 찢어 주듯 주려는 것’을 ‘취하여 가자’고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이것을 선의로 이해하면 ‘한 목회자가 평생 깨닫고 살아온 신앙의 유산을 배우자’는 뜻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앙의 선배에게서 배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도 반드시 하나의 안전장치를 둡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진리라 해도 그 진리가 참된 것은 그 사람에게서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과 말씀에서 나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사는 통로일 수 있지만 근원은 아닙니다. 어떤 목회자의 체험이나 교리 체계가 아무리 강력하더라도 그것이 말씀보다 높은 해석의 열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상의 첫 35분을 단순히 ‘찬양이 길다’ 정도로 지나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이 도입부가 이후 장자권 강의를 받아들이는 청중의 마음을 미리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중은 단순히 ‘장자권이라는 성경 개념을 공부하겠다’는 상태가 아니라 ‘이 집회에는 특별히 받아야 할 무엇인가가 있고, 이영환 목사를 통해 그것이 전달된다’는 기대 속에서 강의를 듣게 됩니다. 이것은 강력한 장점이면서 동시에 위험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선한 진리가 전달된다면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는 좋은 토양이 되지만, 특정한 인간의 해석이 지나치게 절대화될 경우에는 검증보다 수용이 먼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영환 목사나 장자선교회를 처음부터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아주 단순한 질문 하나를 끝까지 붙들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장자권은 결국 누구를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입니다. 주님을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아니면 장자권을 가진 인간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가. 선과 사랑을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아니면 신앙의 지식과 영적 권위를 첫째 자리에 세우는가.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나와 내 가문이 특별한 복을 받는 체계로 나아가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영상 초반만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후 이영환 목사가 장자권을 실제로 어떻게 풀어 가는지를 충분히 들은 뒤 판단해야 합니다.

 

다만 출발점 하나만큼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장자권’은 ‘내가 남보다 먼저 복 받을 권리’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내 안에서 주님의 선과 사랑이 첫째가 되고, 진리와 신앙은 그것을 섬기는 질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인간 누구도 스스로 장자가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처음이시며 근원이신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장자권을 제대로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자기 것으로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선과 진리와 능력까지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이 기준을 세워 놓고 다음 2부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본격적으로 ‘장자권’을 어떤 성경적 구조로 설명하는지 들어가 보겠습니다. 특히 ‘장자에게 주어진 복’, ‘장자의 명분’, ‘아브라함·이삭·야곱과 에서’,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의 성도와 가정과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적용된다고 보는지를 따라가면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먼저인 진리와 실제로 첫째인 선’,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와 하나씩 대조해 보겠습니다.

 

2부

1부에서는 이 집회의 전체 분위기와 ‘장자권’이라는 주제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렌즈를 먼저 세웠습니다. 이번 2부부터는 그 렌즈를 조금 더 안쪽으로 가져가 보겠습니다. 이 집회에서 장자권은 단순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맏아들이 가졌던 권리’라는 역사적 지식을 가르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장자선교회라는 조직과 교육용 교재가 따로 있을 만큼 하나의 영적 체계로 발전해 있습니다. 영상 끝에서도 현재 사용하는 교재를 이전 교재들의 핵심적인 장자권 내용을 모은 사실상의 ‘완결판 교재’처럼 설명하고, 목회자 전문교재가 아니라 평신도 교육용으로 보급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별해야 할 것도 단순한 설교 한 편이 아니라 ‘장자권이라는 성경 개념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하는 하나의 해석 체계’입니다.

 

이 점에서 먼저 인정할 것은 ‘장자권을 소중히 여기라’는 권면 자체에는 상당히 좋은 영적 직관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판 사건은 분명히 가볍지 않습니다. 눈앞의 욕구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더 높은 것을 하찮게 여겼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눈앞의 욕망 때문에 영적인 것을 팔아 버리지 말라’는 교훈으로 읽는 것은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 다른 관련 강의 자료에서도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것을 ‘식욕의 지배를 받아 하나님이 주신 영적 우선순위, 영적 질서를 파괴한 행위’라고 설명합니다. 이 적용에는 귀담아들을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의 낮은 자연적 욕망이 더 높은 영적인 것을 지배하게 되는 상태를 매우 심각하게 봅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지배하던 질서가 뒤집혀,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의 통치 아래 놓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팥죽 한 그릇 때문에 장자권을 팔지 말라’를 ‘순간적인 자연적 욕망 때문에 영적인 선과 진리를 희생하지 말라’고 읽는다면,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도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중요한 갈림길이 생깁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팔았다’는 것을 단순히 ‘에서는 귀한 영적 복을 가볍게 여겼고 야곱은 그것을 귀하게 여겼다’ 정도로 읽으면 비교적 간단합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에서와 야곱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에서는 나쁜 사람, 야곱은 좋은 사람’, ‘에서는 장자권을 잃은 사람, 야곱은 장자권을 쟁취하여 복 받은 사람’이라는 도식만으로는 말씀의 내적 구조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에서와 야곱은 두 개인의 성격을 넘어 사람의 거듭남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 진리의 관계’를 표상합니다. 크게 말하면 에서는 자연적 차원의 ‘선’을, 야곱은 자연적 차원의 ‘진리’를 표상합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아직 직접적으로 사랑하고 지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옳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뜻이다’라는 진리를 배우고, 처음에는 그것을 의무와 순종으로 실천합니다. 그래서 시간의 순서에서는 진리가 앞에 나섭니다. 이 단계에서는 야곱이 앞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질서가 아닙니다. 진리는 왕이 되기 위해 먼저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선을 섬기기 위해’ 먼저 들어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서 처음에는 ‘진리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지만’, 나중에는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진리를 행하는’ 상태로 바뀝니다. 처음에는 ‘주님께서 하라고 하셨으니 해야 한다’였다면, 나중에는 ‘그것이 선하기 때문에 하고 싶다’가 됩니다. 바로 이때 외적으로 먼저였던 진리가 본래 자리로 물러나고, 실제로 첫째인 선이 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장자권을 둘러싼 말씀의 역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래서 ‘누가 장자인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에게 단순히 출생순위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서 무엇이 첫째가 되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진리가 먼저 배워지므로 진리가 장자처럼 보이지만, 실제 목적에서는 선이 먼저입니다. 신앙이 먼저 형성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생명에서는 체어리티가 먼저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먼저 배우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목적은 그를 교리를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장자권이 쉽게 ‘영적 특권론’으로 변합니다. ‘나는 장자권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 가정에는 장자권의 복이 있다’, ‘내가 이 장자권을 자녀에게 물려준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장자권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인간에게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모의 신앙과 삶이 자녀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가 주님을 사랑하고 정직하게 살며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친다면 그것은 자녀에게 귀한 영적 환경과 리메인스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부모가 가진 영적 신분이나 권리가 혈통을 따라 자녀에게 이전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구원도, 거듭남도, 천국도 혈통으로 상속되지 않습니다. 선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녀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목회자의 자녀라는 이유로 영적인 장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자유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돌이키고,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받은 진리를 삶으로 살아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장자권’이 있다면 그것은 특별한 영적 신분증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것’일 것입니다.

 

이 점에서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돌리라는 성경의 명령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장자권이라고 하면 ‘장자가 무엇을 받는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오히려 ‘처음 난 것은 누구의 것인가’를 묻습니다. 그리고 대답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것’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양의 첫 새끼’가 주님께 속한 것을 표상한다고 설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 난 것은 거룩하게 구별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오직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신앙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용자가 번역·해설해 둔 AC 자료에서도 이 점을 분명히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성경의 장자권에는 놀라운 방향 전환이 일어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장자이므로 더 받는다’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속뜻은 ‘처음 난 것이므로 주님께 돌린다’고 말합니다. 자연적인 인간은 ‘나에게 어떤 복이 오는가’를 묻지만, 영적인 인간은 ‘내가 받은 것이 누구에게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가’를 묻습니다. 자연적인 장자권은 소유의 언어로 읽기 쉽지만, 영적인 장자권은 ‘귀속과 질서와 쓰임’의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장자권과 함께 ‘복’을 말할 때도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복에는 자연적인 차원도 분명히 있습니다. 자녀, 토지, 풍요, 건강, 평안 같은 것이 복으로 표현됩니다. 이것을 억지로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계의 좋은 것들도 모두 주님의 섭리 안에서 감사히 받을 수 있는 선물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영적 실체 그 자체로 만들어 버릴 때입니다. ‘장자권을 회복하면 사업이 잘된다’, ‘가문이 일어난다’, ‘자녀가 성공한다’, ‘물질적인 형통이 따라온다’는 식의 공식이 만들어지는 순간, 말씀의 영적인 복이 자연적인 성공의 약속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정한 복은 훨씬 안쪽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과 결합하는 것,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게 되는 것, 진리를 단지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기쁨으로 행하게 되는 것, 자기중심적인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사람의 삶을 이끌게 되는 것,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주어진 쓰임을 이웃을 위해 기쁘게 감당하게 되는 것이 복입니다. 이런 사람이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할 수도 있고 병들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고 이름 없이 살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형편이 그의 장자권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에서의 팥죽 이야기도 한층 깊어집니다. 에서의 문제를 단순히 ‘먹는 것을 좋아했다’는 데 두어서는 안 됩니다. 팥죽은 눈앞에 있는 즉각적인 자연적 만족입니다. 장자권은 그보다 더 깊고 먼 질서에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눈앞의 자연적 만족 때문에 영적인 질서를 뒤집어 버리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돈 때문에 양심을 버리는 것, 인정받고 싶은 욕망 때문에 진리를 왜곡하는 것, 교회 성장을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는 것, 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미워하는 것, 영적 권위를 얻으려다 겸손을 잃는 것, 심지어 ‘장자권을 얻겠다’는 열심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고 싶은 욕망에 빠지는 것까지 모두 이 원리 아래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경우는 역설적입니다. ‘장자권을 귀하게 여기라’는 가르침을 듣다가 오히려 ‘내가 장자가 되어야 한다’는 자기 우월성에 사로잡힌다면, 장자권을 지키려다가 장자권의 속뜻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나라에서 첫째가 된다는 것은 다른 사람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더 높은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쓰임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평가할 권리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 진리대로 살아야 할 책임을 더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을 ‘권세’보다 ‘책임’, ‘소유’보다 ‘귀속’, ‘특권’보다 ‘쓰임’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장자권’보다 ‘주님의 장자권’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내가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첫째가 되셔야 합니다. 내 신앙이 첫째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체어리티가 첫째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가인과 아벨 이야기가 다시 연결됩니다. ‘양의 첫 새끼’를 드린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AC.351 자료에서도 ‘양의 첫 새끼’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을 상징하며,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순서입니다. ‘신앙과 거기서 비롯된 사랑’이 아니라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사실 장자권 전체를 뒤집습니다. 사람이 처음 거듭날 때에는 ‘신앙에서 사랑으로’ 가는 것처럼 경험합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믿고, 그 결과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에서 실제 유입의 질서는 ‘사랑에서 신앙으로’입니다.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오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가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순서’이고 후자는 주님에게서 오는 ‘실제 질서’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신앙이 영원히 장자 자리를 차지하려 하고,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상태, 곧 신앙이 체어리티를 억압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장자권’이라는 주제가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기에 아주 좋은 주제라고 봅니다. 일반적인 설교에서는 장자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할 복’으로 읽기 쉽지만, 속뜻에서는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 ‘내 안에서 무엇이 진짜 장자인가’를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 장자인가?’라는 질문마저 내려놓게 합니다. 모든 선과 모든 참된 신앙의 근원이신 주님만이 참된 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장자권을 회복한다는 것은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지식이 삶이 되며, 자기 사랑이 쓰임의 사랑 아래 놓이고, 마침내 나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진다면 장자권이라는 표현을 굳이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그 사람 안에서는 말씀의 ‘장자권’이 실제로 회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준을 가지고 보면 다음 단계에서 더 민감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조상의 신앙과 죄, 부모와 자녀, 가문과 장자의 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입니다. 제공된 자막에는 후반부에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와 탈상, 장자에게 제사 음식을 먹이는 관습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는 장자들이 빨리 죽는다’는 상당히 강한 주장까지 등장합니다. 이 지점부터는 단순한 ‘장자권의 영적 의미’ 문제를 넘어 ‘조상의 죄와 영적 영향, 가문의 저주, 제사와 장자, 세대 간 영적 계승’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훨씬 중요한 분별의 문제가 시작됩니다. 바로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 영들의 유입, 인간의 자유, 책임, 섭리를 함께 놓고 보아야 정확히 풀립니다. 3부에서는 이 문제를 집중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부

2부 끝에서 저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이 ‘가문·조상·제사·유전적 영적 영향’의 문제로 들어간다고 예고했습니다. 그런데 자막의 해당 부분을 더 자세히 확인해 보니, 여기서는 한 가지를 먼저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이영환 목사는 흔히 일부 영적 전쟁이나 가계치유 계열에서 주장하는 ‘가계의 저주’를 오히려 매우 강하게 부정합니다. 그는 부모나 조상의 죄가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어떤 영적 저주로 계속 이어진다는 주장을 거부하면서, 갈라디아서 3장 13절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는 말씀과 고린도후서 5장 17절의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을 근거로 듭니다. 부모가 살아온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조상의 죄 때문에 지금도 저주받는다’는 영적 법칙으로 만드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무리 신령하고 아무리 대단해도 가계를 저주하면 저주 부분에서는 잘못된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부분은 앞서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건전하며, 정확하게 평가해 주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유전악’이라는 말을 분명히 사용하지만, 이것은 ‘조상이 지은 특정 죄의 형벌이 후손에게 영적 저주로 전가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책 그 자체가 아니라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람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축적된 자연적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 성향 때문에 곧바로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의지로 받아들여 실제 악으로 만들 때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에 이런 죄가 있었으니 나는 영적으로 묶여 있다’, ‘조상이 우상숭배를 했으므로 후손이 그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식으로 개인의 현재 상태를 조상의 행위와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도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영환 목사가 ‘삶의 공간에서 문화와 정서는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구별한 대목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폭력적인 가정에서 성장하면 폭력적인 반응방식을 배우기 쉽고,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가정에서 성장하면 물질 중심의 가치관을 습득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정직과 섬김과 기도가 일상화된 가정에서 성장하면 그러한 삶의 형식들이 마음에 깊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 저주가 혈통을 타고 흐른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전자는 인간의 유전적·심리적·문화적 조건이고, 후자는 조상의 죄책이 후손에게 영적으로 전가된다는 주장입니다. 이영환 목사가 이 둘을 구별하려 한 것은 좋은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더하면 이 문제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더욱 선명하게 만듭니다. 사람에게 악으로 기울어지는 수많은 유전적 성향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을 그 성향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어린 시절부터 선과 진리에 관한 수많은 상태를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데, 이것이 우리가 계속 다루어 온 ‘리메인스’입니다. 사람에게 유전악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밀하게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성장하여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죄로 여기며 싸우기 시작할 때, 주님은 그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이야기는 ‘조상에게서 무엇을 물려받았는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주님께서 내게 주시는 선과 진리에 내가 어떻게 응답하는가’입니다.

 

이것은 장자권 문제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만일 영적 저주가 혈통을 따라 자동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반대로 영적 장자권이나 축복 역시 혈통을 따라 자동으로 전달된다고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가문의 저주’를 부정하면서 ‘가문의 영적 특권’은 자동적으로 계승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양쪽에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조상의 악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정죄되지 않는 것처럼 조상의 선 때문에 내가 자동적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해서 자녀가 자동으로 천국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며, 반대로 부모가 악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자녀가 그 때문에 지옥의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각 사람을 자유로운 존재로 대하십니다.

 

그렇다고 부모와 조상의 삶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그 영향의 방식이 ‘영적 신분의 자동 이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선하게 살면 자녀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고, 말씀과 기도와 체어리티의 삶을 보여 줄 수 있으며, 어린 마음에 귀한 리메인스가 형성되는 자연적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부모의 악한 삶은 자녀에게 매우 어려운 자연적 조건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그 자녀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훨씬 깊고 개별적입니다.

 

여기서 ‘장자’라는 말의 의미도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가정에서는 장자가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고 가문의 책임을 이어받을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에서도 장자에게 특별한 법적·종교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영적 세계에 옮겨 ‘영적인 장자도 부모의 영적 권세와 축복을 상속받는다’고 하면 자연적 질서와 영적 질서를 혼동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계의 장자 제도는 영적 실재를 표상하는 하나의 형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 자체를 오늘날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이 무엇을 표상했는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의에는 또 하나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합니다. 이영환 목사는 한국의 전통적인 제사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농촌에서 성장하며 실제로 보았던 옛 상례와 제례의 모습을 상당히 생생하게 회상합니다. 특히 탈상 때까지 죽은 이를 위해 밥을 차려 놓고, 그 음식을 장자가 먹던 풍습을 언급하면서 ‘그래서 우리나라는 장자들이 빨리 죽어 버려요’, ‘조선시대부터 장자들이 빨리 죽어 버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 ‘제사 문화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는 앞의 ‘가계의 저주’를 부정한 대목과 달리 상당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조상을 신적 존재처럼 섬기거나 죽은 사람에게 종교적인 제의를 드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제사 음식을 장자가 먹었기 때문에 한국의 장자들이 빨리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주장입니다. 전자는 신앙과 예배의 대상에 관한 신학적 판단이지만, 후자는 역사적·의학적 인과관계에 관한 주장입니다. 제공된 자막 안에서는 ‘조선시대부터 장자들이 실제로 다른 형제보다 일찍 죽었다’는 통계나 역사적 근거가 제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대목은 설교자의 어린 시절 경험과 해석을 일반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더구나 조금 전까지 ‘경험도 존재할 수 없고 사람들의 논리도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진리가 선포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로 가계저주론을 비판했던 논리와도 긴장이 생깁니다.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반복되니 가계의 저주다’라는 경험적 추론을 경계했다면, ‘내가 농촌에서 이런 제사 풍습을 보았고 장자들이 일찍 죽었다’는 경험 역시 같은 엄격한 기준으로 검증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앞에서 세운 좋은 원칙을 자기 자신의 제사문화 해석에도 동일하게 적용했으면 훨씬 더 설득력 있었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를 또 다른 방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자연계 어딘가에 머물면서 제삿밥을 받아먹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물질적인 몸을 벗는 것이며, 사람은 영적 몸을 가진 채 영계에서 계속 살아갑니다. 따라서 죽은 조상이 제삿날 집으로 돌아와 차려 놓은 음식을 먹는다거나, 그 음식에 어떤 영적인 기운이 들어가 그것을 먹은 장자에게 죽음의 영향이 전달된다는 식의 사고는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음식은 자연계에 속하고 영은 영계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사 행위의 ‘영적 의미’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음식 자체에 어떤 마력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의 애정과 의도’입니다. 사람이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과, 그 조상에게 자신의 운명과 복을 맡기며 종교적인 숭배를 드리는 것은 다릅니다. 부모와 조상을 존경하고 그들의 선한 삶을 기억하는 것은 체어리티의 질서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영을 주님에게 속한 자리에 올려놓고 그에게 복과 화를 좌우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핵심은 ‘제삿밥이라는 물질’이 아니라 ‘예배와 신뢰가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이 구별은 한국 기독교가 제사 문제를 다룰 때도 상당히 중요합니다. 제사를 반대한다면서 조상에 대한 모든 기억과 존경까지 악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면 가족 간 갈등만 커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냥 문화일 뿐’이라며 그 행위에 담긴 종교적 의미를 전혀 살피지 않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라면 외적인 형식만 보고 판단하기보다 그 형식 안에 있는 ‘애정과 목적’을 보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께 돌려야 할 예배가 죽은 인간에게 향한다면 바로잡아야 하지만, 돌아가신 부모를 기억하며 감사하고 가족이 함께 모여 그들의 선한 삶을 되새기는 것까지 같은 범주로 묶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죽은 조상이 살아 있는 후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라는 더 미묘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의 유입을 매우 실제적으로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애정에는 영계로부터 유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 할아버지의 영이 나를 따라다닌다’, ‘우리 가문의 조상 영들이 후손에게 붙어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사람에게 결합되는 영들은 사람이 그들의 개인적 정체를 알아보고 관계를 맺도록 붙어 있는 것이 아니며, 유입은 주님의 섭리 아래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는 질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영계론을 한국적인 ‘조상신’ 개념이나 기독교 일부에서 말하는 ‘가계의 영’과 섞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오히려 이영환 목사가 ‘가계의 저주’를 부정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와 만날 수 있는 중요한 접점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저주를 받는다’는 사고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려는 방향은 옳습니다. 강의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말씀을 붙들고 ‘옛것은 지나갔다’고 강조하는 것도, 신약의 문자적 의미 안에서는 분명한 복음적 힘이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을 단지 신분의 즉각적인 변경으로만 보지 않고 ‘거듭남’이라는 실제적인 과정으로 봅니다. 주님께 돌아섰다고 해서 오랜 세월 형성된 악한 성향과 습관이 순간적으로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죄책의 전가나 가계저주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물려받고 스스로 강화해 온 악한 성향과는 평생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저주가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자유롭게 거듭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 믿었으니 가계의 저주는 끝났다’에서 멈추면 사람은 자기 안의 실제 악을 너무 쉽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조상의 죄 때문에 정죄받는 사람이 아니지만, 내 안에는 유전적으로 기울어진 수많은 악의 성향이 있으며 그것이 실제 악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주님 앞에서 날마다 살펴야 한다’고 이해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여기에는 두려움이 아니라 책임이 생깁니다. ‘우리 집안이 원래 화를 잘 내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조상의 분노의 영을 끊으면 된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분노를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려 할 때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피해야 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반대로 부모가 훌륭한 신앙인이었다고 해서 안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집안은 몇 대째 목회자 집안이다’, ‘우리 부모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우리 가문에는 장자의 복이 흐른다’는 사실이 나의 거듭남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장자권 가르침에서 특히 지켜야 할 균형입니다. ‘저주는 상속되지 않지만 복은 자동으로 상속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 환경과 영적 기회는 전달될 수 있지만, 사랑과 신앙 자체는 각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아 자기 삶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적 유산은 ‘내가 받은 장자권을 네게 넘긴다’는 선언보다 훨씬 실제적입니다. 부모 자신이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잘못했을 때 자녀에게 사과하는 것, 말씀을 삶보다 앞세우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어려운 사람을 섬기는 것, 돈과 명예보다 선한 양심을 귀하게 여기는 것, 자녀를 자기 소유가 아니라 주님께 맡겨진 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 속에서 자녀의 마음에는 수많은 선한 상태가 심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앗을 나중에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일은 결국 그 자녀 자신의 자유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보면 ‘가문의 회복’이라는 말도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가문의 회복은 어떤 영적 의식을 통해 조상의 저주를 끊는 일이 아니라, ‘나에게서부터 악의 반복을 멈추는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폭력적이었고 아버지도 폭력적이었다면 ‘폭력의 영을 끊는다’는 선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분노와 폭력을 죄로 여기고 실제 삶에서 그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집안이 대대로 돈 때문에 싸웠다면 ‘가난의 저주’를 끊는 것보다 탐욕과 소유욕을 살피는 것이 먼저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억압해 왔다면 내가 내 자녀에게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가문의 영적 질서를 바꾸는 실제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훨씬 가깝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지점에서 ‘장자권’이라는 말을 아주 아름답게 다시 사용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내가 우리 가문의 장자가 되어 복을 독점하겠다’가 아니라 ‘내게서부터 악의 대물림을 멈추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장자권’을 직접 이런 문장으로 정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의 거듭남 교리를 오늘의 가정 문제에 적용한 표현입니다.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정직해지고, 내가 먼저 악을 끊고, 내가 먼저 이웃을 섬기며, 내 자녀에게 이전 세대와 다른 선한 환경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라면 ‘영적 장자’라는 표현은 특권이 아니라 매우 무거운 책임을 뜻하게 됩니다.

 

더 깊게는 그 책임마저 ‘내 힘으로 우리 가문을 바꾸겠다’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지만,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내가 장자니까 내가 우리 집안을 구한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부터 고쳐 주셔서, 나를 통하여 다음 세대에 조금 더 선한 길이 열리게 하신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장자권은 인간의 영적 영웅주의에서 벗어나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이라는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결국 이영환 목사의 이 부분에는 ‘함께 보존해야 할 것’과 ‘분별해서 내려놓아야 할 것’이 동시에 있습니다. ‘조상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계속 저주 아래 있다’는 가계저주론을 거부하는 것은 보존할 만합니다. 부모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실제 영향을 미친다는 구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제사 음식을 장자가 먹었기 때문에 한국 장자들이 일찍 죽었다는 식의 주장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으며, 앞서 자신이 가계저주론을 비판할 때 사용한 엄격한 기준과도 잘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둘을 함께 볼 수 있게 합니다. 사람을 심판할 필요도 없고, 한 대목의 오류 때문에 그가 말한 모든 진리까지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반대로 좋은 가르침 몇 가지가 있다고 해서 검증되지 않은 주장까지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조상의 죄책은 나의 죄책이 아니다. 그러나 유전된 악의 성향은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은 저주풀이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평생의 거듭남을 통해 질서가 바로잡힌다. 부모의 선도 자동으로 나의 선이 되지는 않는다. 나는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직접 받아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저는 이 정도가 이 부분을 통과하는 가장 균형 잡힌 정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4부는 자연스럽게 ‘그러면 장자에게 주어진 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복’을 가정과 자녀와 물질과 사역의 형통으로 읽을 것인지, 아니면 그 자연적 표현들 안에서 더 깊은 영적 실재를 읽을 것인지가 핵심입니다. 이 지점이 이 장자권 가르침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분별할 때 사실상 가장 중요한 고비 가운데 하나입니다.

 

4부

앞의 3부에서는 이영환 목사가 ‘가계의 저주’를 오히려 분명하게 부정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조상의 죄책이 후손에게 자동으로 넘어오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유전악’ 개념과 구별하면서도 상당 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4부에서는 장자권 가르침에서 더 중요한 문제, 곧 ‘복’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장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은 성경적으로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복을 ‘무엇’이라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장자권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이영환 목사의 다른 강의 자료에서 초보적 신앙의 성도가 좋아하는 것을 ‘주일성수, 교회 봉사, 물질 축복, 행복한 가정’ 등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을 신앙의 완성으로 보지 않고 이후 죄성과 정욕을 다루는 연단의 과정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도 함께 참고할 만합니다. 즉 그의 전체 가르침을 단순히 ‘장자권 = 물질축복’이라고 축소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장자에게 주어지는 복을 생각하면 먼저 ‘두 몫’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신명기의 율법에서도 장자는 아버지 소유 가운데 다른 자녀보다 두 몫을 받았습니다. 이삭의 축복을 둘러싼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도 있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통하여 요셉이 사실상 두 지파의 몫을 받게 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의미에서 ‘장자권’과 ‘더 많은 몫’이 연결되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있습니다. 문제는 이 자연적인 질서를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그대로 옮겨 ‘영적 장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물질과 성공과 권세를 받는다’는 공식으로 만드는 순간입니다. 그렇게 되면 표상이 가리키는 실재를 보는 대신 표상의 외형을 다시 붙잡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에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구약의 토지, 재산, 자녀, 장수, 승리, 풍요는 실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연적인 복이었습니다. 그것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신적 말씀인 이유는 그 자연적인 사건들 안에 영원하고 천국적인 실재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땅’은 단지 부동산을, ‘곡식과 포도주’는 단지 식량과 경제적 풍요를, ‘자손’은 단지 생물학적 후손의 증가를 의미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으로 들어가면 그것들은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 교회의 번성, 거듭남에서 생겨나는 영적인 열매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갑절의 복’을 받는다는 것도 반드시 ‘연봉이 두 배가 된다’, ‘사업 규모가 두 배가 된다’, ‘자녀가 남보다 크게 성공한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가 풍성해지고, 그것을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이 커지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았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뜻보다 ‘더 많이 섬길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복 개념과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많이 가진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질서에서는 ‘많이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권한이 커지면 나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지만, 천국에서는 쓰임이 커집니다. 지혜가 많으면 사람들을 지배할 자격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진리를 나눌 책임이 생깁니다. 재물이 많으면 그것 자체가 높은 영적 상태의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어떤 애정과 목적으로 사용하는지가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장자의 두 몫’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는다면 ‘두 배의 특권’보다 ‘두 배의 쓰임’이라고 읽는 편이 훨씬 안전합니다. 이것은 ‘두 몫’의 모든 속뜻을 단순히 ‘쓰임’ 하나로 번역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말씀의 각 문맥마다 상응은 더 정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다만 오늘날 우리의 삶에 적용할 때, ‘장자는 더 받아 누리는 사람’보다 ‘먼저 받아 더 많이 섬기는 사람’이라는 방향이 천국의 질서와 훨씬 잘 맞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물질적인 복을 구하면 안 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삶을 하찮게 여기지 않습니다. 집이 필요하고, 음식이 필요하고, 건강이 필요하며, 자녀가 평안하기를 바라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경제적 조건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주기도문에도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가 있습니다. 문제는 자연적인 복 자체가 아니라 ‘질서’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느냐,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느냐입니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큽니다. ‘주님을 사랑하니 주님께서 내 사업을 잘되게 해 주실 것이다’와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업을 통하여 정직하게 일하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며 얻은 재물을 선한 쓰임에 사용하고 싶다’는 말은 겉으로는 모두 신앙과 사업을 연결하지만 안쪽의 방향이 다릅니다. 첫 번째에서는 주님이 나의 성공을 위한 수단이 되기 쉽고, 두 번째에서는 자연적인 사업이 주님의 선을 행하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전자는 종교가 자연적 욕망을 섬기는 방향으로 뒤집힐 위험이 있고, 후자는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목적을 섬기는 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장자권의 복’을 분별하는 핵심입니다. 장자권을 배운 뒤 사람이 ‘이제 우리 가정이 잘되고, 자녀가 잘되고, 사업이 잘되고, 경제적으로 형통할 것이다’라는 기대를 주로 갖게 된다면, 그 가르침이 아무리 성경 구절을 많이 사용하더라도 그 열매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장자권을 배운 뒤 ‘나는 우리 가정에서 먼저 회개해야겠다’, ‘내가 먼저 용서해야겠다’, ‘내가 가진 것을 가족과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해야겠다’, ‘자녀를 내 성공의 연장이 아니라 주님께 맡겨진 독립된 영혼으로 대해야겠다’, ‘더 많이 받기를 구하기보다 더 충실하게 쓰임을 감당해야겠다’는 방향으로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 장자권 가르침은 상당히 다른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의 복’은 매우 조심해서 다룰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라면 자녀가 잘되기를 원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건강하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사회에서도 인정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복이 이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자녀에게 가장 큰 복은 ‘천국에 적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정직을 사랑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이웃의 선을 기뻐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히 감당하며,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자녀가 세상에서 크게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 수도 있고 뜻밖의 질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외적인 사건 하나하나를 ‘장자권의 복을 받았는가, 잃었는가’를 판단하는 척도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필연적으로 결과 중심이 됩니다. 일이 잘되면 ‘하나님이 복 주셨다’고 하고, 일이 안 되면 ‘내가 장자권을 놓쳤나’, ‘가정에 무슨 문제가 있나’, ‘신앙이 부족한가’를 찾게 됩니다. 그러면 고난당하는 의인과 가난한 성도, 병든 사람을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는 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가능한 한 편안하고 성공하게 만드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자연적 성공은 그 사람에게 허용될 수 있고, 어떤 성공은 오히려 막힐 수도 있습니다. 어떤 실패가 사람을 겸손하게 하여 더 깊은 선으로 이끄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큰 성공이 사람의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키워 영적으로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건만 보고 그 섭리 전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 = 형통’이라는 공식은 영적으로 매우 위험합니다. 이 공식이 자리 잡으면 자연스럽게 ‘고난=복 없음’이라는 반대 공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은 세상적인 의미에서 형통한 생애를 사신 분이 아닙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의 행복을 자연적인 부와 명예의 확대판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천국의 기쁨은 사랑과 쓰임에서 옵니다. 다른 사람의 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기쁨,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자신을 통해 흘러간다는 기쁨이 천국의 행복과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 이영환 목사의 전체 가르침에는 흥미롭게도 ‘번영신학’과 단순히 동일시하기 어려운 요소가 보입니다. 관련 강의에서 그는 초보적인 성도가 ‘물질 축복 받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죄성을 뼈저리게 발견하고 다루는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또 부자 청년 본문을 설명하면서 예수께서 ‘소유를 다 팔라’고 하신 것을 단지 물질적 재산만이 아니라 사람 안의 ‘정욕, 죄성과 정욕이라는 소유’까지 내려놓는 문제로 확대합니다. 이것 역시 문자적 본문의 정밀한 속뜻 해석과는 별도로, 자연적인 소유보다 내면의 악을 더 근본적인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합니다.

 

따라서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을 평가하면서 ‘결국 돈 많이 벌고 자녀 잘되자는 이야기’라고 단순화하면 그의 가르침에 있는 중요한 부분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영적 훈련과 죄의 처리, 헌신과 사명도 강조합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여러 요소들이 ‘장자권’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어떻게 결합되느냐입니다. 자연적 축복과 영적 성숙이 함께 언급될 때 무엇이 목적이고 무엇이 수단인지 끝까지 지켜봐야 합니다. 이 구별 하나가 전체 가르침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특히 유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을 없애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몸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가정도 필요하고, 직업도 필요하며, 교회라는 외적 조직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그 안에 영적인 것이 담길 때 제자리를 찾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릇이고 영적인 것은 그 안의 내용입니다. 그릇을 깨뜨릴 필요는 없지만, 빈 그릇을 내용 자체라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래서 ‘복된 가정’도 새롭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가정이 반드시 복된 가정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이 반드시 복된 가정도 아닙니다. 자녀들이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한 가정도 그것만으로는 복된 가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서로 잘못했을 때 용서를 구할 수 있고, 약한 가족을 버리지 않으며, 돈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갈등 속에서도 진리를 따라 자신을 돌아보며, 가족 구성원을 자기 소유물로 대하지 않는 가정이라면 그 안에는 천국의 질서가 조금씩 형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된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높은 소득은 감사할 조건일 수 있지만 영적인 복의 척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자녀가 자기 능력을 남을 누르는 데 쓰지 않고 쓰임에 사용하며, 성공했을 때 교만해지지 않고 실패했을 때 악한 길을 선택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부모로서는 그보다 더 큰 복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복된 장자’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남들보다 두 몫을 차지한 사람이 아니라 ‘두 몫을 맡은 사람’입니다. 많이 받은 만큼 많이 책임지고, 먼저 깨달은 만큼 먼저 실천하며, 먼저 주님을 알게 된 만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을 정죄하기보다 섬기는 사람입니다. 장자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지배할 권위가 아니라 섬길 책임에서 나오는 권위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첫째’의 역설이 장자권을 비추는 매우 좋은 빛이 됩니다. 제자들은 누가 큰가를 자주 다투었지만 주님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장자권에 적용하면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장자이므로 첫째다’에서 ‘첫째이므로 가장 먼저 섬긴다’가 됩니다. ‘장자이므로 더 받는다’에서 ‘더 받았으므로 더 많이 내어놓는다’가 됩니다. ‘장자이므로 내 자녀가 복 받는다’에서 ‘내가 먼저 거듭나 자녀에게 더 선한 삶을 보여 준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 전환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가인과 아벨의 문제까지 다시 풀어 줍니다. 가인의 오류는 단순히 ‘신앙이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서려 한 것입니다. 먼저 태어난 것이 실제로도 첫째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서에서는 진리가 선을 섬겨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장자권의 회복은 ‘신앙의 우월권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 자기 자리를 찾아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AC.351의 ‘양의 첫 새끼’가 다시 결정적인 빛을 줍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해당 자료에는 ‘처음 난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며, 이어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문장이 뒤따릅니다.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십니다.’

 

이 한 문장은 인간 중심의 장자권 이해를 근본에서 뒤집습니다. ‘내가 장자다’가 최종 진리가 아닙니다. ‘주님이 장자이시다’가 최종 진리입니다. 내가 받은 복의 근원도 주님이고, 내가 가진 진리의 근원도 주님이며, 내가 행할 수 있는 선의 근원도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남보다 먼저 무엇을 받았다는 사실은 자랑할 근거가 아니라 감사하고 돌려드릴 이유가 됩니다. 장자의 첫 열매가 여호와께 속했던 것처럼, 내 삶의 첫째도 주님께 속해야 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장자권은 ‘성공의 신학’에서 ‘헌신의 신학’으로, ‘소유의 신학’에서 ‘쓰임의 신학’으로, ‘가문의 특권’에서 ‘거듭남의 책임’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저는 이 변화가 이영환 목사의 가르침 안에 있는 좋은 요소들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장자권을 훨씬 안전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고 봅니다. 사명을 강조하는 것은 살릴 수 있습니다.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것도 살릴 수 있습니다. 신앙의 유산을 전하자는 열망도 살릴 수 있습니다. 부모가 먼저 바로 서야 한다는 책임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중심에서 ‘장자인 나’가 점점 커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장자이신 주님’이 점점 커져야 합니다.

 

결국 ‘장자의 복’은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얼마나 받았는가?’가 아니라 ‘받은 것이 내 안에서 무엇이 되었는가?’입니다. 재물이 선한 쓰임이 되었는가, 지식이 지혜가 되었는가, 신앙이 체어리티가 되었는가, 권위가 섬김이 되었는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소유욕이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선을 구하는 사랑이 되었는가, 그리고 내가 받은 진리가 나 자신을 먼저 고치는 진리가 되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장자권의 가장 큰 복은 어쩌면 ‘갑절의 재산’이 아니라 ‘질서의 회복’일 것입니다. 내 안에서 주님이 첫째가 되고, 선이 진리를 다스리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 되고,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을 다스리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쓰임을 향해 배열되는 것, 이것이 이루어질수록 사람은 천국의 질서에 가까워집니다. 자연적인 형통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지만, 이 질서가 사람 안에 이루어진다면 그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5부에서는 조금 더 넓게 보겠습니다.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놓고 ‘무엇은 보존할 것인가, 무엇은 재해석할 것인가, 무엇은 내려놓아야 하는가’를 정리하겠습니다. 특히 ‘장자권이라는 별도의 교리 체계가 과연 필요한가?’라는 질문까지 들어가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장자권이 독립된 영적 특권의 교리라기보다 ‘선과 진리의 질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 거듭남과 쓰임’이라는 훨씬 큰 질서 안에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5부에서 이 영상 전체를 종합하겠습니다.

 

5부

이제 마지막 5부에서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 전체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겠습니다. 앞의 네 편에서 우리는 이 가르침 안에 분명히 보존할 만한 요소가 있다는 것과,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상당히 깊게 재해석해야 할 부분도 있다는 것을 함께 보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결론을 ‘장자권은 옳다’ 또는 ‘장자권은 잘못되었다’ 가운데 하나로 단순하게 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질문은 ‘성경의 장자권이라는 표상이 궁극적으로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입니다.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이 사람을 주님께 더 가까이 데려가고, 자기 안의 악을 살피게 하며, 받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 가정과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그 안에는 분명 보존해야 할 선한 것이 있습니다. 반대로 장자권이 ‘특별한 사람’, ‘특별한 가문’, ‘특별한 복’, ‘특별한 영적 권세’를 소유하는 의식으로 굳어진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장자권의 속뜻과 멀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신앙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는 강한 책임의식입니다. 영상 마지막까지 ‘장자선교회’라는 이름으로 후원과 교재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고, 장자권에 관한 여러 내용을 하나의 교재로 정리하여 평신도들도 배우게 하려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영환 목사에게 장자권이 단순히 설교를 위한 흥미로운 소재가 아니라 자신의 목회와 사역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주제임을 보여 줍니다. 이런 열심 자체를 가볍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한 세대가 받은 신앙을 자기 세대에서 소비하고 끝내지 않고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오늘날 교회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또 하나 보존할 것은 ‘가계의 저주’를 함부로 말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3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영환 목사는 조상의 죄 때문에 오늘의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저주 아래 있다는 주장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부모의 삶과 문화와 정서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과 조상의 죄책이 영적으로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구별합니다. 이것은 장자와 가문을 강조하는 가르침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가문을 강조하다 보면 쉽게 ‘가문의 저주’와 ‘가문의 복’이라는 양극단으로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영환 목사의 전체 가르침을 단순한 ‘물질축복론’으로 규정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관련 강의에서는 물질 축복과 행복한 가정을 신앙생활의 최종 단계로 보지 않고, 사람이 자기 안의 죄성과 정욕을 발견하고 다루는 더 깊은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 점은 중요합니다. 장자권과 복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곧바로 ‘번영신학’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면 실제로 그가 말하고 있는 더 넓은 신앙의 구조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가장 먼저 조정해야 할 것은 ‘장자권’이라는 개념 자체의 위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장자권은 기독교인의 삶 전체를 설명하는 독립된 중심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 안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매우 중요한 ‘표상’이며, 그 표상이 가리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선과 진리의 우선순위’, ‘사랑과 신앙의 질서’, 그리고 더 깊게는 주님 자신입니다. 따라서 장자권을 하나의 거대한 교리 체계로 확대하여 성경 전체와 신앙생활 전체를 그 틀로 설명하려 하면, 본래 더 큰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하나의 표상이 오히려 전체를 지배하는 해석의 틀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성경 주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언약’을 붙들고 성경 전체를 언약 하나로만 읽을 수도 있고, ‘성전’을 붙들고 모든 것을 성전으로 설명할 수도 있으며, ‘영적 전쟁’을 중심에 놓고 모든 문제를 귀신과 전쟁으로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주제에는 분명 성경적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진리가 다른 모든 진리를 흡수하기 시작하면 균형이 깨집니다. 장자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권은 중요하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열쇠’는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중심은 장자권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시다’는 설명이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사용자가 작업한 AC 자료에는 ‘처음 난 것은 모두 거룩했는데, 이는 그것들이 오직 홀로 장자이신 주님을 가리켰기 때문’이며, 이어 ‘사랑과 거기서 비롯된 신앙’이 장자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더욱 결정적으로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며, 인간에게서 오는 것은 조금도 없으므로 오직 주님만이 장자이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을 장자권 가르침의 맨 중심에 놓으면 많은 것이 저절로 정리됩니다. ‘내가 장자가 되는 법’보다 ‘주님이 내 안에서 첫째가 되시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의 복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보다 ‘내가 받은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는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의 권세를 어떻게 행사할 것인가?’보다 ‘내가 받은 것을 어떤 쓰임에 돌릴 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 장자권의 초점이 인간에게서 주님에게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최근 AC에서 계속 만나 온 ‘가인과 아벨’의 문제가 정확하게 들어옵니다. 가인이 먼저 태어났습니다. 외적인 시간의 순서에서는 가인이 장자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표상하고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거듭날 때 경험하는 순서와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형성한 뒤 그것을 따라 살아가면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것처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먼저’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 질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해 존재합니다.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진리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먼저 나타난 신앙이 자기 자신을 본질적으로도 첫째라고 주장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바로 이 비극을 표상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자신을 첫째 자리에 놓으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장자권 운동을 바라볼 때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장자권을 그렇게 열심히 강조하면서도 그 결과 사람이 더 사랑하지 못하고, 더 용서하지 못하고, 더 섬기지 못하며, 오히려 ‘나는 특별한 영적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의식이 강해진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반대로 장자권을 배운 사람이 ‘내가 먼저 회개하겠다’, ‘내가 먼저 용서하겠다’, ‘내가 먼저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겠다’, ‘내가 먼저 가족을 섬기겠다’고 한다면 그 가르침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무는 열매로 분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가문’이라는 말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장자권 가르침에서는 자연스럽게 ‘우리 가문’과 ‘다음 세대’가 중요해집니다. 이것에는 좋은 면이 있습니다. 현대사회가 지나치게 개인화되면서 신앙도 ‘나와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자녀에게 영향을 주고, 한 세대의 선택이 다음 세대의 환경을 바꾸며, 내가 받은 선한 것을 다음 사람에게 전해야 한다는 책임의식은 소중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반드시 ‘자유’를 놓습니다. 나의 거듭남을 자녀에게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받은 천국의 상태를 유산처럼 자녀에게 넘길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하고 말씀을 가르치며 선한 삶을 보여 주고, 주님께서 그 어린 마음에 귀한 리메인스를 보존하시는 데 자연적 도구가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 자녀 역시 자기 자유 안에서 주님을 향하여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유산은 ‘영적 신분의 상속’이 아니라 ‘거듭남에 유리한 선한 환경과 본보기의 전달’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부모가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도 달라집니다. ‘너는 우리 집안의 장자권을 이어받았다’고 가르치는 것보다 ‘나는 주님 앞에서 이렇게 살려고 애썼다. 너도 사람을 두려워하기보다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악을 죄로 여기며, 네게 맡겨진 쓰임을 찾아 살아라’고 삶으로 보여 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부모의 신앙이 진짜였다면 자녀가 물려받아야 할 것은 부모의 영적 지위가 아니라 부모가 사랑했던 ‘선과 진리’입니다.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자권을 말할 때 자연적인 복이 자꾸 중심으로 올라오면 경계해야 합니다. 건강, 물질, 성공, 자녀의 형통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장자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가 아닙니다. 4부에서 살펴보았듯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의 최종 목적은 사람을 자연계에서 가능한 한 성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이 허용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실패가 허용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인 결과만 가지고 주님의 복을 측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놓치면 장자권 신앙은 매우 고통스러운 역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열심히 믿었는데 자녀가 잘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장자권을 붙들고 기도했는데 사업이 망하면 어떻게 합니까? 병이 낫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장자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다’, ‘믿음이 부족했다’, ‘무엇인가 영적 원리를 어겼다’는 설명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복음이 오히려 사람을 짓누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는 그런 공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자권의 ‘두 몫’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한다면 ‘두 배의 소유’보다 ‘더 큰 쓰임’으로 읽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먼저 받은 사람은 먼저 섬깁니다. 많이 배운 사람은 많이 가르치기 전에 먼저 많이 살아야 합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더 넓은 쓰임의 가능성을 갖습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은 더 큰 책임을 집니다. 부모는 자녀보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지배자가 아니라 돌보는 사람이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보다 높은 계급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아니라 말씀과 사람을 섬기는 쓰임을 맡았기 때문에 목회자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장자’라는 말이 오히려 무거워집니다. 장자가 되려고 경쟁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장자권이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라면 ‘내가 장자다’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내가 먼저 섬기겠다’고 하는 것이 장자의 실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천국의 첫째 자리 역시 바로 이런 역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 문제 역시 마지막으로 이 기준에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영환 목사가 제사문화를 강하게 비판하는 배경에는 ‘예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신앙적 의도가 있습니다. 그 핵심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사 음식을 먹은 장자들이 일찍 죽었다’는 식의 경험적 주장은 별도로 검증되어야 하며, 신학적 확신과 역사적 인과관계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죽은 조상을 기억하고 존경하는 것과 그들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구별합니다. 외적 형식만 보지 않고 그 행위 안의 애정과 목적을 살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영적 전쟁’ 역시 장자권과 결합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한 영들의 실재를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인간에게 영계로부터 유입이 있다는 것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모든 실패와 질병과 가정 문제를 어떤 특정한 영이나 조상에게 연결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가 보존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이 있다고 해서 ‘내가 악을 행한 책임’을 악한 영에게 넘길 수 없습니다. 선한 천사가 있다고 해서 ‘내가 선하다’고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고 악은 인간이 자기 것으로 만든 proprium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장자권의 회복도 어떤 특별한 영적 선언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거듭남’이라는 긴 과정이 필요합니다. 오늘 진리를 하나 배우고, 그 진리의 빛으로 자기 안의 악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피하고, 그 자리에 반대되는 선을 행합니다. 그리고 또 넘어지고 다시 일어섭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상태를 지나면서 주님께서 사람의 내적 질서를 조금씩 바꾸십니다.

 

그러므로 ‘장자권 회복’이라는 말을 굳이 스베덴보리식으로 번역한다면 저는 ‘질서의 회복’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장자권 회복=질서의 회복’이라는 용어로 정의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전체 교리를 바탕으로 오늘의 장자권 담론을 재해석한 표현입니다. 내 안에서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아래 놓이고, 거짓이 진리에 의해 밝혀지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고, 자기애가 쓰임의 사랑 아래 놓이고,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주님의 통치 아래 배열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장자권’이라는 말을 사용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아주 깊은 말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무엇을 더 받을까?’가 먼저 떠오르느냐, ‘내 안에서 무엇이 첫째가 되어야 할까?’가 먼저 떠오르느냐입니다. 전자는 자연적인 장자권의 욕망으로 내려가기 쉽고, 후자는 거듭남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 가르침에서 가장 귀하게 건질 수 있는 부분도 바로 이 방향이라고 봅니다. ‘내 세대에서 끝내지 말자. 다음 세대를 생각하자. 받은 것을 전하자. 먼저 선 사람이 책임을 감당하자.’ 이런 정신은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개인주의적인 신앙에 필요한 부분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가문의 특별한 영적 권리’에서 떼어 내고 ‘선과 진리를 다음 세대에 삶으로 전달하는 책임’으로 바꾸면 훨씬 깊어집니다.

 

그러면 장자선교회의 ‘장자’도 새로운 의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장자들이다’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들었으니 먼저 살자’입니다. ‘우리가 장자의 복을 받자’가 아니라 ‘먼저 받은 만큼 먼저 섬기자’입니다. ‘우리 자녀에게 장자권을 물려주자’가 아니라 ‘우리 자녀가 주님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선과 진리를 살아 보여 주자’입니다. 이렇게 바뀐다면 장자라는 이름은 우월성의 이름이 아니라 책임의 이름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면서도 가르침을 분별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이영환 목사의 내면이 어떠한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오랜 목회 가운데 어떤 사랑으로 장자권을 가르쳤는지, 주님 앞에서 그 사역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도 우리가 최종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내용은 말씀 앞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 진리가 있다면 받아들이고, 자연적 의미에 머문 부분은 영적으로 더 깊게 읽고, 충분한 근거가 없는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됩니다. 사람을 버리지 않으면서 오류를 분별하고, 오류를 발견했다고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으며, 진리를 발견했다고 그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다섯 편의 해설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저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참된 장자권은 내가 남보다 먼저 복 받을 권리가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이 첫째가 되시고 선이 진리를 다스리며 신앙이 체어리티의 생명이 되어, 먼저 받은 내가 먼저 이웃을 섬기는 천국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붙인다면 이것입니다.

 

‘참된 장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이 두 문장을 붙들면 장자권을 지나치게 높일 필요도, 반대로 장자권이라는 성경의 귀중한 표상을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장자권은 그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라 주님께로 향하게 하는 하나의 표지판이 됩니다. 그 표지판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나의 권리’에서 ‘주님의 질서’로, ‘나의 복’에서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내 가문의 특별함’에서 ‘모든 사람을 향한 주님의 섭리’로, ‘신앙의 우월성’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아벨의 ‘양의 첫 새끼’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 난 것’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사랑도 주님에게서 오고, 그 사랑에서 살아나는 신앙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의 완성은 결국 ‘내가 장자권을 얻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주님, 처음 것도 마지막 것도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영환 목사의 ‘장자권’이라는 긴 가르침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아주 뜻밖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장자가 되어라’에서 출발했지만 마지막에는 ‘참된 장자는 오직 주님이시다’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남는 것은 장자의 특권이 아니라 ‘먼저 받은 만큼 먼저 사랑하고, 먼저 섬기며, 먼저 살아내는 쓰임’입니다. 저는 바로 그 지점에 이 영상에서 건져 올릴 수 있는 가장 깊고 아름다운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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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창2:16)

 

AC.125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 of every tree)은 퍼셉션으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무’(tree)는 퍼셉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인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기억에 간직되어 있는 것을 숙고할 때 그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즉시 지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거짓된 것이 나타나면 그것을 피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혐오하기까지 했습니다. 천사들의 상태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러한 퍼셉션을 대신하여 후에는 이미 계시된 것으로부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앎(cognitio)이 이어졌고, 그 뒤에는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부터 그것을 아는 앎(cognitio)이 이어졌습니다. To “eat of every tree” is to know from perception what is good and true; for, as before observed, a “tree” signifies perception. They had from the Lord continual perception, so that when they reflected on what was treasured up in the memory they instantly perceived whether it was true and good, insomuch that when anything false presented itself, they not only avoided it but even regarded it with horror: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angels. In place of this perce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owever, there afterwards succeeded the knowledge [cognitio] of what is true and good from what had been previously revealed, and afterwards from what was revealed in the Word.

 

해설

AC.125는 창2:16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말씀에서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은 퍼셉션으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입니다. 앞의 AC.102-104에서 천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는 것과 퍼셉션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에 관한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5는 그것을 ‘먹는다’는 표현과 연결하여, 천적 인간이 그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아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인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기억이 필요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들이 ‘기억에 간직되어 있는 것’을 숙고했다고 명시합니다. 즉 그들의 기억 안에도 여러 내용이 저장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다만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기억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을 생각하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그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즉시 지각했습니다.

 

이 점은 AC.80 이후 계속 따라온 기억지식의 문제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감각과 기억에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도 태고교회 사람들은 기억에 간직된 것을 실제로 숙고합니다. 그러나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참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기억 속의 것을 퍼셉션의 빛 아래에서 살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문제는 기억의 존재가 아니라 무엇이 무엇을 판단하고 지배하는가 하는 질서입니다.

 

거짓된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피했을 뿐 아니라 혐오했다는 설명은 퍼셉션이 단순한 지적 판별 능력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참과 거짓을 머리로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거짓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도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상태도 이와 같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은 현대적인 직감이나 순간적인 느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대한 내적 지각이며, 사랑과 삶의 상태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AC.12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영적 변화를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계속 유지된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이미 계시된 것으로부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앎’(cognitio)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다시 그 뒤에는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아는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알려 주시는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이 그것을 받아 아는 방식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으로 알았지만, 후대에는 주님께서 이미 계시하신 것을 통하여 알게 되고, 마침내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AC.123에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구별한 설명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거기서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 때문에’ 인정하지만, 영적 인간은 그것을 ‘말씀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AC.125는 그 차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진 뒤 인간에게 계시와 말씀이 주어졌고, 사람은 이제 말씀에 계시된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으로부터 배우는 상태를 퍼셉션보다 못한 단순한 지식 상태로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퍼셉션을 잃은 후의 인간에게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알려 주시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자기 판단대로 무엇이든 취한다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 안에서 선과 진리를 알고 받아들입니다. 기억에 있는 것조차 그 퍼셉션 아래에서 판단합니다. 그리고 퍼셉션이 사라진 후에는 이미 주어진 계시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알게 됩니다. 이처럼 AC.125는 퍼셉션과 기억과 계시와 말씀의 관계를 한 문단 안에 압축하면서, 인간이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께서 주시는 방식으로 받아 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125)

 

 

 

AC.126, 창2:1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탐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 (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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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4, 창2:15,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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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창2:13)

 

AC.117

또한 ‘구스 땅’(land of Cush), 곧 에티오피아에는 금과 보석들과 향료가 풍부했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들은 선과 진리,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들과 같은 것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앞서 인용한 사60:6, 마2:1, 11, 시72:15의 구절들(AC.113)에서도 분명합니다. The “land of Cush,” or Ethiopia, moreover, abounded in gold, precious stones, and spices, which, as before said, signify good, truth, and the things thence derived which are grateful, such as are those of the knowledges of love and faith. This is evident from the passages above cited (n. 113) from Isa. 60:6; Matt. 2:1, 11; Ps. 72:15.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사60:6)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2:1, 11)

 

그들이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그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 (시72:15)

 

말씀에서 ‘구스’(Cush), 곧 ‘에티오피아’(Ethiopia)와 ‘스바’(Sheba)가 이와 유사한 것들을 뜻한다는 것은 선지서에서도 분명합니다. 스바냐에서는 ‘구스의 강들’(rivers of Cush)도 언급됩니다. That similar things are meant in the Word by “Cush” or “Ethiopia,” and also by “Sheba,”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Zephaniah, where also the “rivers of Cush” are mentioned:

 

5그 가운데에 계시는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9그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 10내게 구하는 백성들 곧 내가 흩은 자의 딸이 구스 강 건너편에서부터 예물을 가지고 와서 내게 바칠지라 (습3:5, 9-10) In the morning he will give his judgment for light; for then will I turn to the people with a clear language, that they may all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to serve him with one shoulder; from the passage of the rivers of Cush my suppliants shall bring mine offering. (Zeph. 3:5, 9–10)

 

또 다니엘에서는 북방 왕과 남방 왕에 관하여, And in Daniel, speaking of the king of the north and of the south:

 

그가 권세로 애굽의 금은과 모든 보물을 차지할 것이요 리비아 사람과 구스 사람이 그의 시종이 되리라 (단11:43) He shall have power over the treasures of gold and of silver, and over all the desirable things of Egypt; and the Lybians and the Ethiopians shall be under his steps, (Dan. 11:43)

 

라고 합니다. 여기서 ‘애굽’(Egypt)은 기억지식을, ‘구스 사람들’(Ethiopians)은 앎들을 뜻합니다. where “Egypt” denotes memory-knowledges, and the “Ethiopians” knowledges.

 

[2] 에스겔에서도, So in Ezekiel:

 

스바와 라아마의 상인들도 너의 상인들이 됨이여 각종 극상품 향 재료와 각종 보석과 황금으로 네 물품을 바꾸어 갔도다 (겔27:22) The merchants of Sheba and Raamah, these were thy merchants, in the chief of all spices, and in every precious stone, and in gold (Ezek. 27:22),

 

라고 하는데, 이들도 마찬가지로 신앙에 관한 앎들을 뜻합니다. 또 주님에 관하여, 따라서 천적 인간에 관하여 말하는 시편에서는, by whom in like manner are signified knowledges [cognitiones] of faith. So in David, speaking of the Lord, consequently of the celestial man:

 

7그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10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조공을 바치며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시72:7, 10) In his days shall the righteous flourish, and abundance of peace until there shall be no moon; the kings of Tarshish and of the isles shall bring presents; the kings of Sheba and Seba shall offer a gift (Ps. 72:7, 10).

 

라고 합니다. 이 말씀들은 앞뒤 구절과의 연결에서 분명한 것처럼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솔로몬에게 와서 어려운 질문들을 하고 향료와 금과 보석들을 가져온 스바 여왕도 이와 유사한 것들을 뜻했습니다(왕상10:1-2). These words, as is plain from their connection with the preceding and subsequent verses, signify celestial things of faith. Similar things were signified by the queen of Sheba, who came to Solomon, and proposed hard questions, and brought him spices, gold, and precious stones (1 Kings 10:1–2).

 

1스바의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고자 하여 2예루살렘에 이르니 수행하는 자가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낙타에 실었더라 그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왕상10:1, 2)

 

말씀의 역사 부분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은 선지서에 있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아르카나를 뜻하고, 표상하며,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For all things contained in the historical parts of the Word, as well as in the prophets, signify, represent, and involve arcana.

 

해설

AC.117은 앞의 AC.116에서 ‘구스 땅’이 마음 또는 능력을 뜻하고, 기혼이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을 뜻한다고 한 해석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뒷받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구스, 곧 에티오피아에 금과 보석과 향료가 풍부했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앞의 AC.113-114에서 금은 선을, 보석은 신앙의 진리를 나타냈고, 향료와 같은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것들과 연결되었습니다. 따라서 구스와 그 부요함은 여기서 단순한 지역적 풍요를 넘어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들을 나타내는 말씀의 이미지가 됩니다.

 

습3:5, 9-10을 인용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여기에는 ‘구스의 강들’이 등장하고, 그 너머에서 주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예물을 가져옵니다. 지금 창2:13에서도 둘째 강 기혼이 ‘구스 온 땅을 두른다’고 했으므로, ‘강’과 ‘구스’가 함께 등장하는 이 말씀은 기혼과 구스의 속뜻을 뒷받침합니다. 더구나 그곳에서 오는 것은 주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따라서 구스와 관련된 앎들은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정보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에 속하며 주님을 향하는 것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단11:43은 이 번호에서 특히 중요한 구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애굽’은 기억지식을 뜻하고 ‘구스 사람들’은 앎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두 표현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여기서는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앞의 AC.111에서 겉 사람이 기억지식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여기는 문제를 지적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기억지식은 사람이 외적으로 배우고 기억하는 지식과 관계되지만, 여기서 구스가 나타내는 앎들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AC.116-117의 기혼을 단순히 지식이 많아지는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겔27:22의 스바와 라아마의 상인들이 향료와 보석과 금을 가져오는 장면도 같은 의미를 뒷받침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을 ‘신앙에 관한 앎들’과 연결합니다. 여기에서도 금과 보석과 향료가 다시 함께 등장합니다. 앞 번호들에서 각각 따로 설명했던 선과 진리,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들이 이제 ‘앎들’이라는 주제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스와 스바가 나타내는 앎은 생명과 분리된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선과 진리의 내용, 곧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을 알고 있는 상태와 관계됩니다.

 

시72:7, 10에서는 다시스와 섬의 왕들, 스바와 시바의 왕들이 예물을 드립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시편이 주님에 관하여 말하며, 따라서 천적 인간에 관하여 말한다고 설명하고, 이 말씀들이 ‘신앙의 천적인 것들’을 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님에 관하여, 따라서 천적 인간에 관하여’라는 연결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천적 인간을 동일시한다는 뜻이 아니라, 천적 인간에게 있는 참된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지금까지의 설명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 안에 나타나는 신앙의 천적인 것들은 그 사람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의 질서에 속합니다.

 

솔로몬을 찾아온 스바 여왕의 이야기를 인용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스바 여왕은 어려운 질문들을 가지고 솔로몬에게 와서 향료와 금과 보석을 가져왔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역사적 사건에도 앞의 선지서에서 본 것과 유사한 것들이 표상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마지막 문장이 중요해집니다. ‘말씀의 역사 부분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은 선지서에 있는 것들과 마찬가지로 아르카나를 뜻하고, 표상하며, 그 안에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역사적 서술도 단순히 과거 사건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내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따라서 AC.117의 여러 인용은 ‘구스 = 앎’이라는 대응 하나를 증명하기 위한 자료의 나열에 그치지 않습니다. 금과 보석과 향료, 구스와 스바, 예물과 경배라는 이미지들이 반복되면서,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이 사랑과 신앙의 생명 안에 있을 때 어떤 성질을 가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2:13의 기혼으로 돌아오면 그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에덴에서 시작된 생명의 강이 이제 인간의 이해와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앎들에까지 이릅니다. 사람은 단순히 기억지식을 쌓아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 안에서 선과 진리를 알고 이해하게 됩니다. 기혼과 구스는 바로 그 이해와 앎의 영역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AC.117 해설)

 

 

 

AC.116, 창2:13, ‘기혼은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을 뜻함’ (AC.116-117)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창2:13) AC.116‘둘째 강’(second river), 곧 ‘기혼’(Gihon)은 선과 진리,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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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창2:13)

 

AC.116

‘둘째 강’(second river), 곧 ‘기혼’(Gihon)은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을 뜻하고, ‘구스 땅’(land of Cush)은 마음 또는 능력을 뜻합니다. 마음은 의지와 이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째 강에 관하여 말한 것은 의지에 관계하고, 이 둘째 강에 관하여 말한 것은 이해에 관계하는데, 선과 진리에 관한 앎들은 이해에 속합니다. The “second river,” which is called “Gihon,” signifie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that belong to the good and the true, or to love and faith, and the “land of Cush” signifies the mind or faculty. The mind is constituted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and what is said of the first river has reference to the will, and what of this one to the understanding to which belong the knowledges [cognitiones] of good and of truth.

 

해설

AC.116은 에덴에서 나온 네 강 가운데 둘째 강 ‘기혼’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기혼은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을 뜻하고, 기혼이 두르는 ‘구스 땅’은 마음 또는 능력을 뜻합니다. 앞의 첫째 강 비손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나타냈다면, 이제 둘째 강 기혼은 선과 진리에 관한 ‘앎’과 관계됩니다. 이로써 에덴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강이 여러 강으로 갈라진다는 말씀이 인간 안의 서로 구별되는 능력과 그 작용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앎’을 앞에서 자주 등장했던 ‘기억지식’과 곧바로 같은 것으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원문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cognitio와 cognitiones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AC.111에서 겉 사람들이 거의 기억지식밖에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른다고 했던 것과 달리, 여기서 말하는 앎들은 ‘선과 진리, 또는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들입니다. 따라서 기혼이 나타내는 것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기억하고 축적하는 능력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을 알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마음의 영역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마음은 의지와 이해로 이루어져 있다’는 설명을 통해 더욱 분명해집니다. 앞의 AC.111에서는 많은 사람이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둘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16은 그 원리를 네 강의 해석에 직접 적용합니다. 첫째 강에 관한 것은 의지에 관계하고, 둘째 강에 관한 것은 이해에 관계합니다. 하나의 마음 안에 의지와 이해가 있으면서도 둘은 서로 구별되고, 에덴의 첫째 강과 둘째 강은 그 구별되는 두 측면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기혼은 이해와 관계할까요? AC.116 자체가 그 이유를 바로 밝혀 줍니다. ‘선과 진리에 관한 앎들은 이해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해는 단순히 논리적으로 추론하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선이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인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받아들이는 능력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기혼’이 나타내는 앎은 인간의 이해 안에서 선과 진리에 관한 것들이 자리 잡는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강과 둘째 강을 함께 보면 앞에서 다소 추상적으로 들렸던 의지와 이해의 구별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입니다. AC.110-115에서 첫째 강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과 관계되었고, 그 설명은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드는 데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제 둘째 강 기혼은 선과 진리에 관한 앎들을 가진 이해와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마음을 하나의 막연한 영적 능력으로 다루지 않고, 의지와 이해라는 서로 구별되는 두 능력이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각각 고유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별 역시 인간의 능력을 주님과 독립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설명되는 네 강 전체의 출발점은 여전히 에덴에서 흘러나온 하나의 강입니다. 앞에서 그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이며, 그 지혜가 동산을 적셔 지성을 주는 것으로 설명되었습니다(AC.107). 그리고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는 모두 그 근원에서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AC.112). 그러므로 의지와 이해, 그리고 그 이해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앎들도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면 AC.116은 인간의 마음을 설명하면서도 다시 에덴의 강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잊지 않게 합니다. 마음에는 의지와 이해가 있고, 이해에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앎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살아 있는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것은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들기 때문입니다. 기혼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과 진리를 파악하여 주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서 인간의 이해가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 주는 둘째 강입니다. (AC.116 해설)  

 

심화

1. ‘비손은 지성을 뜻하는데 왜 첫째 강은 의지에 관계한다고 하는가?’

 

AC.116 심화 1, ‘비손은 지성을 뜻하는데 왜 첫째 강은 의지에 관계한다고 하는가?’

AC.116 심화1. ‘비손은 지성을 뜻하는데 왜 첫째 강은 의지에 관계한다고 하는가?’ AC.110에서는 첫째 강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AC.116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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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 창2:13, ‘구스는 사랑과 신앙에 속한 앎들을 뜻함’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창2:13) AC.117또한 ‘구스 땅’(land of Cush), 곧 에티오피아에는 금과 보석들과 향료가 풍부했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들은 선과 진리,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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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5, 창2:11-12, ‘하윌라 땅과 비손이 두르는 것은 지성과 그 유입을 뜻함’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5태고인들은 ‘땅들’(lands)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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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4

신앙의 진리는 말씀에서 보석들(precious stones)에 의해 뜻해지고 표상됩니다. 그 예로 판결 흉패에 있는 보석들과 아론의 에봇 어깨에 있는 보석들이 있습니다. 흉패에서 ‘금, 청색, 자색, 두 번 물들인 홍색, 가늘게 꼰 베실’(gold, blue, bright crimson, scarlet double-dyed, and fine-twined linen)은 사랑에 속한 것들을 표상했고, 보석들(stones)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했습니다. 에봇 어깨에 있는 두 ‘기념의 보석’(stones of memorial)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것들은 금테에 물린 호마노였습니다(출28:9-22). The truth of faith is signified and represented in the Word by precious “stones,” as by those in the breastplate of judgment, and on the shoulders of Aaron’s ephod. In the breastplate, “gold, blue, bright crimson, scarlet double-dyed, and fine-twined linen,” represented such things as are of love, and the precious “stones” such as are of faith from love; as did likewise the two “stones of memorial” on the shoulders of the ephod, which were onyx stones, set in ouches of gold (Exod. 28:9–22).

 

9호마노 두 개를 가져다가 그 위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새기되 10그들의 나이대로 여섯 이름을 한 보석에, 나머지 여섯 이름은 다른 보석에 새기라 11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 테에 물리고 12그 두 보석을 에봇의 두 어깨받이에 붙여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 보석을 삼되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그 두 어깨에 메워서 기념이 되게 할지며 13너는 금으로 테를 만들고 14순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고 그 땋은 사슬을 그 테에 달지니라 15너는 판결 흉패를 에봇 짜는 방법으로 금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정교하게 짜서 만들되 16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 두 겹으로 네모 반듯하게 하고 17그것에 네 줄로 보석을 물리되 첫 줄은 홍보석 황옥 녹주옥이요 18둘째 줄은 석류석 남보석 홍마노요 19셋째 줄은 호박 백마노 자수정이요 20넷째 줄은 녹보석 호마노 벽옥으로 다 금 테에 물릴지니 21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둘이라 보석마다 열두 지파의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기고 22순금으로 노끈처럼 땋은 사슬을 흉패 위에 붙이고 (출28:9-22)

 

보석들의 이러한 의미는 에스겔에서도 분명합니다. 거기서는 지혜와 지성이라는 천국의 부요를 가진 사람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This signification of precious stones is also plain from Ezekiel, where, speaking of a man possessed of heavenly riches, which are wisdom and intelligence, it is said:

 

12인자야 두로 왕을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어 그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는 완전한 도장이었고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도다 13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음이여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너를 위하여 소고와 비파가 준비되었도다, 15네가 지음을 받던 날로부터 네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네게서 불의가 드러났도다 (겔28:12-13, 15) Full of wisdom, and perfect in beauty, thou hast been in Eden, the garden of God; every precious stone was thy covering, the ruby, the topaz, the diamond, the beryl, the onyx, and the jasper; the sapphire, the chrysoprase, the emerald, and gold; the workmanship of thy tabrets and of thy pipes was in thee; in the day that thou wast created they were prepared; thou wast perfect in thy ways from the day that thou wast created (Ezek. 28:12–13, 15),

 

이 말씀들이 돌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분명할 것입니다. 참으로 각각의 돌은 신앙의 어떤 본질적인 것을 표상했습니다. which words it must be evident to everyone do not signify stones, but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of faith; yea, each stone represented some essential of faith.

 

해설

AC.114는 앞의 AC.110에서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진리를 뜻한다고 한 해석 가운데 특히 ‘호마노’를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의 배경을 제시합니다. AC.113에서 금이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한다는 것을 여러 성경 구절로 확인했다면, 이제 AC.114에서는 보석들이 신앙의 진리를 뜻하고 표상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하윌라 땅에 ‘금’과 함께 ‘호마노’가 있다는 것은 선과 진리가 함께 있다는 앞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아론의 판결 흉패와 에봇을 예로 듭니다. 흉패를 만드는 데 사용된 금과 청색, 자색, 홍색, 가늘게 꼰 베실은 ‘사랑에 속한 것들’을 표상했고, 그 위에 놓인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보석 = 진리’라는 하나의 대응 관계가 아닙니다. 보석들이 나타내는 신앙 자체가 사랑과 분리된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점입니다. 앞의 AC.110-112에서 계속 설명해 온 질서가 아론의 흉패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에봇 어깨에 있던 두 ‘기념의 보석’이 호마노였다는 사실은 창2:12의 호마노와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출28:9-22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의 하윌라 땅에서 금과 호마노가 함께 등장하고, 성막의 거룩한 의복에서도 금과 호마노가 함께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의 연결을 통하여 금이 선을, 호마노를 비롯한 보석들이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2의 호마노를 단순히 그 지역의 귀한 광물에 관한 정보로만 읽지 않고,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진리의 표상으로 읽는 근거가 여기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이어지는 겔28:12-13, 15은 더욱 흥미롭습니다. 이 말씀에는 ‘에덴’, ‘하나님의 동산’, ‘각종 보석’, ‘금’이 한 장면 안에 함께 나타납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창2의 에덴동산과 금과 호마노의 이미지가 에스겔에서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사람은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다’고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까닭은 이러한 보석들이 단순한 물질적 부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와 지성이라는 천국의 부요’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보석의 상응을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보석들을 한꺼번에 막연히 ‘진리’라고만 처리하지 않고, ‘각각의 돌은 신앙의 어떤 본질적인 것을 표상했다’고 말합니다. 즉 보석들은 모두 신앙과 진리에 관계되지만 각각이 완전히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앞의 AC.111에서 주님께서 천국을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으신다고 한 설명과도 잘 연결됩니다. 하나의 신앙 안에도 서로 구별되는 수많은 진리들이 있으며, 그 차이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성질을 지닌 채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아론의 흉패는 AC.111의 ‘하나를 이루면서도 가장 뚜렷하게 구별된다’는 원리를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여러 보석이 하나의 흉패에 놓여 있지만 각각의 보석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의 돌이 신앙의 어떤 본질적인 것을 표상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질서는 다양성을 없애 하나로 만드는 질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들을 각각의 자리에서 구별하시면서 하나의 질서 안에 결합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다시 AC.112의 ‘따라서 주님으로부터’라는 말로 돌아갑니다. 신앙의 진리가 보석처럼 귀한 것은 인간이 스스로 그것을 만들어 내어 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참된 진리는 신앙에서 나오고, 그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지 않으며,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의 금과 호마노, 아론의 흉패와 에봇의 보석들, 에스겔의 하나님의 동산을 장식한 보석들은 서로 떨어진 이미지들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이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의 풍성함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AC.114 해설)

 

 

 

AC.115, 창2:11-12, ‘하윌라 땅과 비손이 두르는 것은 지성과 그 유입을 뜻함’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5태고인들은 ‘땅들’(lands)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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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3, 창2:11-12, ‘금은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하고 표상함’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3말씀에서 ‘금’(gold)이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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