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2 심화

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를 처음 읽을 때 가장 어리둥절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단8:14, 26의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라고 설명한 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때는 신앙이 없었으므로 ‘저녁’이며 주님의 오심 자체는 ‘아침’이라고 말하면서 다니엘서를 인용합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다니엘서에도 ‘저녁’과 ‘아침’이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가져온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에는 스베덴보리의 논지가 너무 깊습니다.

 

먼저 개역개정만 읽으면 이 연결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단8:14은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본문에는 ‘저녁’과 ‘아침’에 해당하는 말이 실제로 들어 있으며, Potts 번역도 AC.22에서 이를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이라는 형태로 제시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저녁-아침’이라는 표현 자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단어가 같다는 사실만으로 인용 이유가 모두 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단8의 문맥입니다. 단8에서는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며, 진리가 땅에 던져지는 황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14절에서는 일정한 ‘저녁-아침’ 후에 성소가 정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즉 이 구절에는 단순한 하루의 반복만이 아니라 거룩한 것들이 훼손된 상태와 그 뒤의 정결 및 회복이라는 구조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AC.22에서 말하는 ‘저녁’과 ‘아침’의 영적 의미와 만납니다.

 

AC.22에서 ‘저녁’은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이며, 일반적으로는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상태입니다. ‘아침’은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이며 주님께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니엘에서 성소와 진리가 황폐해진 상태는 AC.22의 언어로 보면 ‘저녁’의 성격을 가지며, 성소가 다시 정결하게 되는 것은 ‘아침’의 성격과 연결됩니다. 이것은 단8의 문자적 역사 의미를 지워 버리고 다른 뜻을 임의로 덧씌운다는 뜻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적 사건 안에서 동시에 영적 상태를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께서 오시는 때는 저녁이고, 주님의 오심은 아침이다’라는 다소 역설적인 표현도 이해됩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야 할 만큼 신앙이 쇠퇴하고 교회가 황폐해진 상태는 ‘저녁’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저녁 가운데 주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되기 때문에 주님의 오심은 ‘아침’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시점에 저녁과 아침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기 전의 영적 상태와 그분의 오심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상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8:14, 26은 AC.22에서 매우 적절한 인용이 됩니다. ‘저녁-아침’이라는 표현뿐 아니라 황폐에서 정결로 나아가는 문맥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이천삼백’이라는 숫자의 구체적인 속뜻까지 AC.22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락에서 그 숫자를 해설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저녁’과 ‘아침’이 시간의 이름을 넘어 영적 상태의 변화를 나타낸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이것을 ‘창세기에서 저녁은 언제나 무조건 A, 아침은 언제나 무조건 B라고 정의되었으므로 말씀 어디에서나 기계적으로 같은 뜻을 대입하면 된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를 사전처럼 치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문맥과 연결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AC.22에서 단8의 인용이 설득력을 갖는 것도 단지 같은 단어가 있어서가 아니라, 신앙과 거룩한 것들의 황폐 그리고 그 뒤의 회복이라는 문맥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단8:14, 26을 인용하는 이유는 ‘저녁과 아침’이라는 두 단어의 일치보다 더 깊습니다. ‘신앙이 없는 저녁의 상태 가운데 주님이 오심으로 아침이 시작된다’는 AC.22의 영적 질서가 다니엘의 ‘황폐와 정결’이라는 구조 속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8의 인용은 창1의 저녁과 아침을 단순한 자연의 하루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의 상태로 이해하게 해 주는 중요한 보조 본문이 됩니다. (AC.22 심화 1)

 

 

 

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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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의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에 악을 언제나 악처럼 느끼고 거짓을 언제나 거짓처럼 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에게서 나오는 어떤 생각과 행동을 선하고 옳은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악이 선처럼 보이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실제 삶에서 ‘빛처럼 보였던 어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다음 사례들은 AC.21의 상태를 판정하는 공식이 아니라, 그 표현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 ‘자기 의로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성실하게 살고 교회생활도 충실히 하며 큰 잘못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삶을 근거로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나는 적어도 저런 사람과는 다르다’는 마음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본인에게는 이것이 바른 삶에 대한 확신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빛 가운데 자신을 보기 시작하면서, 선하게 살았다는 자기평가 안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빛처럼 보였던 것이 더 큰 빛 가운데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인 선행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봉사하고 헌신하며 다른 사람을 실제로 돕습니다. 그 행동의 외적 쓰임 자체를 무조건 악하다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동기는 거듭남 과정에서 여러 요소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정과 칭찬을 얻는 것이 점점 그 행동의 지배적인 목적이 되는 경우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선행 자체를 후회하거나, 다른 사람이 칭찬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면 ‘나는 이웃을 위해서 했다’고 생각했던 일 안에 자기 사랑이 얼마나 깊이 섞여 있었는지를 보게 될 수 있습니다. AC.21의 빛은 바로 이런 분별을 가능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신앙적인 열심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교리를 소중히 여기며 진리를 전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는 진리를 알고 있고 저 사람들은 모른다’, ‘내 신앙이 더 높다’는 마음이 중심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 자체보다 ‘진리를 가진 나’가 중요해집니다. 이런 상태는 당사자에게 오히려 매우 밝은 신앙의 열심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빛이 비칠 때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진리를 이용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님을 조금씩 보게 됩니다.

 

네 번째는 이른바 ‘의로운 분노’입니다. 불의한 일을 보고 분노하는 것 자체를 모두 자기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과 불의를 보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거나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일어난 분노를 ‘나는 진리를 위해 화내는 것이다’라고 포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자기 상처와 진리에 대한 열심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후 더 밝은 빛 가운데 들어가면서 ‘내가 정말 진리를 위해 분노한 것인가, 아니면 내 proprium이 상처받았기 때문인가?’라고 묻게 됩니다. 바로 이런 질문 자체가 이전에는 하나로 보였던 빛과 어둠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섯 번째로 목회나 신앙적 봉사에서도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하려는 열망은 선한 목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이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지나친 분노와 좌절이 일어난다면,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안에 ‘내가 이루어야 할 일’이라는 자기 소유의 마음이 섞여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역 자체가 어둠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proprium에서 나오는지를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례들을 이해할 때 ‘proprium’을 인간의 개성이나 인격 전체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의 문제는 사람이 가진 고유한 성격이나 재능 자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종교적이고 도덕적으로 보이는 일 안에서도 proprium은 작용할 수 있고, 반대로 자연적인 재능과 개성은 주님의 질서 아래에서 좋은 쓰임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안에서 혼합된 동기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선은 가짜였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AC.21은 사람에게서 나온 모든 행동을 분석하여 자기혐오에 빠지게 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전에는 서로 뒤섞여 하나처럼 보였던 것을 이제 구별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구별이 가능해져야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처럼 보였던 어둠’을 발견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구나’를 깨닫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님에게서 왔고 무엇이 아직 내 proprium에서 나오는가’를 분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20에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했다면, AC.21에서는 그 첫 빛 안에서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것과 참된 빛이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빛과 어둠의 분별입니다. (AC.21 심화 1)

 

 

 

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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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심화

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의 설명을 실제 인간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것을 선과 진리라고 여기다가, 새로 잉태되면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고, 더 빛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님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아간다는 이런 내적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것이 단순한 성경 해석에서 나온 것인지, 영계에서 관찰한 것인지, 아니면 스베덴보리 자신이 실제로 겪은 과정인지 궁금해집니다.

 

먼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AC.20의 각 단계를 곧바로 스베덴보리 자신의 자서전으로 읽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깊은 내적 변화와 영적 위기를 경험했다는 사실과, 그가 자신의 생각과 정서와 꿈을 세밀하게 관찰했다는 사실은 그의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학 저술기로 넘어가기 전후의 개인 기록은 그가 자기 사랑, 명예욕, 지적 자부심, 주님에 대한 의존 같은 문제를 매우 깊이 씨름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그에게 거듭남이 순전히 책상 위의 추상적인 주제만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므로 AC.20은 스베덴보리가 자기에게서 직접 겪은 단계를 기록한 것이다’라고 단정하면 한 걸음 너무 나갑니다. AC.20 자체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창1:3의 속뜻을 해설하면서 거듭나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반적인 첫 상태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의 개인적 영적 경험이 이런 설명을 이해하는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과, AC.20의 교리를 그의 자전적 경험과 동일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감각이 열린 뒤 오랜 기간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반복해서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AC 자체에서도 그는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과 사후 인간의 상태, 천국과 지옥, 영들의 성질에 관한 경험을 매우 자주 기록합니다. 이것은 그의 신학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인간의 생각과 정서가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해 흘러들고 악과 거짓은 지옥적 영향과 연결된다는 거대한 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AC.20의 여섯 날의 각 단계는 영계에서 여러 사람을 관찰하여 통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계 경험을 교리의 중요한 확증으로 제시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창세기 1장의 거듭남 해석 자체는 무엇보다 말씀의 속뜻에 대한 해설로 제시됩니다. 따라서 ‘영계에서 보았기 때문에 창1을 그렇게 해석했다’고 한 방향으로만 설명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이며 가장 직접적인 층위가 바로 말씀입니다. AC는 처음부터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밝히는 저작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인간이 임의로 상징을 붙여 해석하는 문서가 아니라,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이 담겨 있으며 천국과 결합되어 있는 신적 말씀입니다. 따라서 창1의 빛, 낮과 밤, 물, 땅, 식물, 광명체, 동물, 사람은 서로 흩어진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하나의 내적 질서를 이룹니다. AC.20의 첫 빛 역시 이 말씀의 속뜻 안에서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개인 경험, 영계 경험, 말씀의 속뜻이라는 세 가지를 어떻게 관계 지어야 할까요? 셋을 완전히 분리할 필요는 없지만, 모두 똑같은 무게의 ‘세 가지 자료원’이라고 기계적으로 병렬시키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AC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말씀과 그 속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경험은 그가 설명하는 영적 세계와 인간의 내적 구조를 이해하고 확증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며, 그의 개인적 경험은 그가 이런 문제를 단순한 관념으로만 다루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AC.20의 교리적 근거를 최종적으로 그의 개인 체험에 두는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에 부여한 위치와도 맞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는 AC.20의 문장은 스베덴보리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특수한 심리 경험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 교리 전체와 연결됩니다. 선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며, 사람이 거듭날수록 자기가 선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은 이후 AC 전체에서 계속 깊어지는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어느 특정한 위기나 회심 사건과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말씀의 속뜻 안에서 제시된 거듭남의 보편적인 질서로 읽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생애가 이 설명과 전혀 관계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개인 기록을 읽어 보면, 훗날 그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해지는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것’, 자기 지성과 공로, 주님께 대한 의존 같은 문제들이 그에게도 실제적인 문제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러한 거듭남의 문제와 무관한 관찰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디까지가 그의 개인적 체험이고 어디서부터가 말씀의 계시적 해설인지를 우리가 임의로 확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질문에 가장 안전하게 답한다면 이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의 허락으로 영계가 열린 상태에서 오랫동안 영적 세계를 경험했다고 증언했고, 자신의 내적 삶에서도 깊은 변화를 겪었으며, 무엇보다 말씀의 속뜻이 열려 그 안에서 인간 거듭남의 질서를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배경을 함께 고려할 수 있지만, AC.20 자체는 스베덴보리 개인의 체험담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 대한 해설로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의 개인적 경험을 지나치게 확대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왜 인간의 내적 변화에 이토록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설명했는지를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0 심화 2)

 

 

 

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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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심화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문장으로 읽으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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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문장으로 읽으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실제 목회 현장에서 이런 변화를 분명하게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이 옳고 자신이 선하다는 확신은 오히려 더 강해질 수 있고, 봉사와 헌신까지 자기 의를 강화하는 재료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AC.20이 말하는 첫 빛은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사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들은 AC.20의 상태를 판정하는 공식이 아니라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가장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열심히 봉사하는 신앙인의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교회에서 많은 일을 하고 다른 사람을 돕습니다. 자신도 그것을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의 봉사가 인정받지 못했을 때 예상보다 훨씬 큰 섭섭함과 분노가 올라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받으면 질투하고, ‘나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라는 생각이 반복됩니다. 이때 그 사람이 단순히 ‘나도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이라고 생각했던 이 일 안에도 나를 높이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있었구나’라고 보기 시작한다면, AC.20의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는 말씀을 이해하는 데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매우 정직하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는 자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 실수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 ‘나는 원래 선한 사람인데 이번에만 잘못했다’는 자기상을 지키는 대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자기 사랑이 훨씬 깊게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 역시 자기 자신을 선의 기준으로 삼던 확신에 처음 빛이 비치는 모습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용서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신앙인이니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용서하려 애씁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기를 기다리고, 자신이 용서하는 사람이라는 도덕적 우월감까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내 힘으로는 이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없구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기 시작합니다. 훗날 마음에 실제 변화가 생겼을 때 그것을 자기 의지력이나 인격의 성취로 돌리기보다 ‘이것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라고 느끼게 된다면, 자기 선에서 주님의 선으로 시선이 옮겨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설교하고 가르치고 상담하며 사람을 돕는 일은 그 자체로 선한 쓰임입니다. 그러나 사역의 열매가 보이지 않거나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지나치게 낙심하고 분노한다면, 그 안에 ‘내가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자기 소유의 마음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나는 주님의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문제다’라고 끝내지 않고, 선한 사역조차 자기 공로와 자기 성취로 붙들 수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면 이것도 AC.20을 이해하는 실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례를 보고 ‘자기 동기가 불순함을 발견했으니 이 사람은 AC.20의 첫 상태에 들어갔다’고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심리학적인 자기성찰만으로도 사람은 자기 모순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20의 빛에는 방향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할 뿐 아니라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아갑니다. 따라서 단순한 자기비판이나 낮은 자존감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선의 근원을 찾던 데서 주님에게로 방향이 옮겨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AC.20은 사람이 자기 안에서 악을 많이 발견하여 점점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선의 허상을 보는 목적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절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참된 선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서 나온 선의 한계를 볼수록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립니다. 이것이 ‘빛 안으로 더 들어간다’는 방향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이런 변화가 드물게 보인다는 느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직접 볼 수 없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난 변화만으로 거듭남의 정도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작은 깨달음처럼 보이는 것이 내적으로 중요한 시작일 수도 있고, 반대로 매우 극적인 회심의 말이 실제 삶의 지배적인 사랑을 아직 바꾸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영적 단계를 판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빛을 가능한 한 분명하게 제시하고,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바라보도록 돕는 것입니다.

 

결국 AC.20의 실제 사례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나는 생각보다 덜 선한 사람이구나’라는 자기평가 자체가 아닙니다. 더 본질적인 변화는 ‘참된 선의 근원은 내가 아니구나’라는 방향 전환입니다. 자기에게서 선을 찾던 사람이 자기의 선을 의심하기 시작하고, 그 의심이 단순한 자기비난으로 끝나지 않고 주님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아가는 데까지 이어질 때, 우리는 창1:3의 ‘빛이 있으라’가 인간의 삶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0 심화 1)

 

 

 

AC.20 심화 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 심화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의 설명을 실제 인간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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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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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영어만 읽으면 ‘move’는 ‘움직이다’, ‘brood’는 새가 알을 ‘품다’라는 서로 다른 말인데 왜 두 단어가 나란히 나오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 경우에는 Potts의 영어만 가지고 의미를 추측하기보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표현과 창1:2의 성경적 배경을 함께 보는 것이 좋습니다.

 

창1:2의 히브리어에서 ‘운행하시니라’에 해당하는 동사는 רחף 계열의 말이며, 신32:11에서도 독수리가 자기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동사는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는 뜻만으로 읽기보다, 무엇인가의 위에서 움직이거나 너풀거리는 이미지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히브리어 단어 자체가 곧 암탉이 알을 품는다는 뜻이다’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9에서 결정적인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표현을 어떻게 해설하는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주님의 자비라고 밝히면서 그 자비의 운행을 새가 알을 품는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Potts의 ‘brood’는 바로 이 설명을 전달하기 위한 말입니다. 따라서 ‘move’와 ‘brood’는 서로 경쟁하는 두 번역이라기보다, 성경 본문의 ‘운행’이라는 표현과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풀어 주는 ‘품음’의 이미지를 함께 보여 준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라는 비유는 AC.19의 전체 문맥과 잘 맞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감추어 보존하시며, 이것들을 리메인스라고 합니다. 아직 그것들이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았는데도 주님의 자비는 그 위에서 운행합니다. 그러므로 ‘품는다’는 그림은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을 보호하고 보존하며 장차 생명이 나타날 때를 준비하는 모습을 매우 자연스럽게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암탉, 알, 따뜻함 같은 요소 하나하나에 별도의 상응을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AC.19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사용하는 비유의 목적은 주님의 자비가 수동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 위에서 이미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아직 거듭남을 의식하지 못하고 ‘빛이 있으라’는 상태에 이르지 않았어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거듭남을 위한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번역에서도 ‘move’와 ‘brood’를 하나의 한국어로 억지로 합칠 필요는 없습니다. 창1:2의 성경 표현을 따라 ‘운행하다’를 살리고,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는 ‘품다’를 함께 제시하면 됩니다. 현재처럼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 ‘품는다’(brood)라고 옮기면 두 층위가 모두 드러납니다.

 

결국 ‘move’와 ‘brood’가 나란히 있는 이유를 ‘히브리어 한 단어에 두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너무 단순하게 정리하기보다, ‘창1:2의 운행이라는 성경 표현을 스베덴보리가 품음의 이미지로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이 두 단어는 어색한 중복이 아니라 AC.19의 핵심, 곧 아직 빛이 나타나기 전부터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을 품고 계시는 주님의 자비를 보여 주는 매우 아름다운 표현이 됩니다. (AC.19 심화 2)

 

 

 

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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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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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에,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반복해서 ‘자비’라는 말을 만나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한국어의 ‘자비’가 일상적으로 불교와도 자주 연결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차라리 ‘은혜’라고 번역하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두 말을 임의로 하나로 합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사용한 말을 구별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에서 영어 ‘mercy’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말은 ‘misericordia’입니다. 이것은 긍휼, 자비, 불쌍히 여김과 관련된 말입니다. 따라서 Potts가 이를 ‘mercy’로 옮겼을 때 한국어로 ‘자비’라고 번역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자비’가 반드시 불교적 용어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mercy’를 ‘자비’라고 하는 것은 다른 종교의 개념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는 기독교적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반면 ‘grace’는 일반적으로 ‘은혜’라고 번역합니다. 두 말은 서로 매우 가까우며 실제 신앙 언어에서는 겹치는 영역도 많기 때문에 ‘자비는 이것, 은혜는 저것’이라고 완전히 분리된 두 개념처럼 정의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뉘앙스에서 ‘mercy’는 비참하고 연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grace’는 값없이 베풀어지는 호의와 은혜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를 돕는 구별이지 두 단어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교리적 경계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19에서는 특히 왜 ‘자비’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지가 본문의 흐름에서 드러납니다. 사람은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고, ‘깊음’으로 표현되는 욕정과 거짓에 잠겨 있습니다. 아직 빛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사람이 먼저 선해져서 주님의 관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직 그런 어두운 상태에 있을 때부터 주님께서 그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감추어 보존하시고 그 위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런 문맥에서는 ‘자비’라는 말이 AC.19의 장면을 매우 잘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작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도 같은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보고 이해하며 인간의 구원과 거듭남에 관한 것을 알게 되는 근원을 자기 지성이나 공로에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는 표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mercy’를 사용하는 모든 곳을 하나의 간단한 공식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각의 문맥에서 그 말이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더 깊이 보면 주님의 자비는 주님의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속성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타락하고 연약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 사랑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향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와 긍휼의 언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비’를 단순히 불쌍해서 봐주는 감정 정도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AC.19에서 주님의 자비는 실제로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보존하고, 그것들 위에서 운행하며, 장차 거듭남에 사용하시는 적극적인 신적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어 번역에서는 ‘mercy’를 ‘은혜’로 바꾸어 익숙하게 만들기보다 ‘자비’로 구별하여 두는 편이 좋습니다. 독자에게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도 AC를 계속 읽으면서 ‘주님의 자비’가 어떤 문맥에서 반복되는지를 경험하면 그 말의 깊이가 점차 드러납니다. ‘grace’가 나오면 ‘은혜’, ‘mercy’가 나오면 ‘자비’라는 기본적인 구별을 유지하되, 둘을 서로 경쟁하는 신학 개념으로 만들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19에서 이 차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그림은 결국 ‘품으심’입니다. 아직 빛이 나타나기도 전에 주님의 자비는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며, 사람 안에 감추어 보존하신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새 생명을 만들어 내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그를 떠나지 않고 거듭남을 준비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자비’는 단순한 번역어 하나가 아니라 거듭남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AC.19 심화 1)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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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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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심화

2. ‘황폐’(vastation, vastatio)란 무엇인가?

 

AC를 영어로 읽다 보면 오늘날에는 다소 낯선 ‘vastation’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AC.18에서 Potts는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인간의 황폐’라는 대목에 ‘vastation’을 사용합니다. 현대 영어 독자에게는 ‘devastation’이나 ‘desolation’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에, 왜 이런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정확히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하는지가 자연스럽게 문제가 됩니다. 이 경우에는 영어 단어 자체에서 의미를 추측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라틴어와 AC 안에서의 용례를 함께 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원문에서 중요한 말은 ‘vastatio’입니다. 이것은 황폐하게 함, 비워짐, 황폐 상태와 관련된 말이며, 영어 번역의 ‘vastation’은 이 라틴어를 형태상 매우 가깝게 따라간 번역어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일반 영어에서 ‘vastation’이 얼마나 흔한가만 가지고 그 뜻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Potts 번역에서 이 단어를 만날 때는 일상 영어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전문 개념을 가능한 한 일관되게 전달하려는 번역어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vastatio’를 한국어로 무엇이라 해야 할까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황폐’가 가장 적절합니다. ‘황폐’는 무언가가 비어 가고 이전의 것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AC의 여러 문맥을 비교적 폭넓게 담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일상 한국어에서 ‘황폐’라고 하면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되거나 마음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처럼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릴 수 있으므로, AC에서의 뜻은 반드시 문맥을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AC.18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을 직접 제공합니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황폐는 단순한 파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이루시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처리되고 물러나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AC.18에서는 ‘깊음이 마르거나 황폐해진다’는 표현과 ‘옛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표현이 서로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vastatio’를 단순히 ‘고난’이나 ‘시련’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큰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AC가 말하는 황폐인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황폐의 과정이 반드시 눈에 띄는 외적 재난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황폐의 핵심은 외적인 사건의 종류보다 사람의 영적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전에 의지하던 것, 선과 진리를 방해하던 것, 거짓이라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그 힘을 잃고 사람이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황폐’를 곧바로 ‘악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AC.18의 표현은 분명 강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 전체에서 사람의 proprium과 유전적 악이 단순히 소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주님께서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는 것을 물리치시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심에 따라, 이전에 사람을 지배하던 것이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황폐’는 파괴보다 ‘새 질서를 위한 비움과 준비’라는 방향에서 이해할 때 AC.18의 문맥에 더 잘 맞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vastatio’의 용례를 하나의 간단한 정의로 고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을 개인의 거듭남뿐 아니라 교회의 상태, 진리와 선의 결핍, 시험과 준비 등 여러 문맥에서 사용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AC에서 ‘vastatio’가 나올 때마다 무조건 ‘악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과정’이라고 기계적으로 대입하기보다 그 번호의 문맥에서 무엇이 황폐해지고 있으며 왜 그런 상태가 필요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한국어 용어는 ‘황폐’로 일관되게 유지하되, 그 구체적인 의미는 각 문맥에서 해설하는 방식이 가장 안전합니다.

 

‘desolation’이나 ‘devastation’과의 관계도 이 관점에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현대 영어에서 이 단어들은 ‘vastation’보다 훨씬 익숙하지만, 단어 하나하나의 현대적 뉘앙스를 가지고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개념을 역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Potts가 어떤 특별한 신학적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vastation을 창안하거나 선택했다’고 단정할 근거가 없다면 그런 설명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우리 번역의 최종 기준은 Potts의 영어 단어 자체가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원문과 그가 AC 전체에서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번역 원칙도 비교적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라틴어 ‘vastatio’와 Potts의 ‘vastation’은 기본적으로 ‘황폐’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독자가 ‘완전한 파괴’나 단순한 ‘고난’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는 해설을 통해 그 문맥의 뜻을 밝혀 줍니다. AC.18에서는 특히 ‘참된 것과 선한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 새 사람이 잉태될 준비가 이루어지는 상태’라는 설명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결국 AC.18의 ‘vastatio’는 절망의 단어가 아닙니다. 그 자체만 보면 무너짐과 비어짐을 말하지만, 거듭남의 전체 질서 안에서는 그 뒤에 올 새 생명을 위한 준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깊음이 마르는 것은 그곳에 아무것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이 나게 하기 위해서이고, 옛사람이 죽는 것은 죽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새 사람이 잉태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황폐’라는 말을 만날 때 우리는 무엇이 사라지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빈자리에서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시려 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8 심화 2)

 

 

 

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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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심화 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 심화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깊음’이 마르고 황폐해져야 하며,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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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심화

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깊음’이 마르고 황폐해져야 하며,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먼저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이 진행되면 사람 안의 욕정과 거짓이 실제로 없어지는 것인가? 악한 성향이 완전히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인가?’ 실제 삶을 돌아보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에게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이나 잘못된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 때가 있기 때문에, AC.18의 ‘제거’와 ‘황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먼저 AC.18은 인간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이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소멸한다고 설명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참된 것과 선한 것이 사람에게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황폐의 핵심은 사람 안에 있던 모든 악의 흔적이 사라지는가보다, 지금까지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고 있던 것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사람 안에 이루시려면 옛 질서가 주도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AC.18 마지막의 ‘옛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자연적 인간 자체가 없어지거나 사람의 개성과 기억과 감정이 파괴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악에 대한 모든 가능성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나’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삶의 질서가 더 이상 절대적인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서 올라오는 욕망과 생각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곧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여 따르지 않고 주님의 진리 앞에서 분별하고 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거듭남은 자연적 인간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질서 아래 두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 눅15장의 돌아온 아들을 떠올려 보는 것은 좋은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비유가 AC.18의 ‘황폐’를 직접 해설하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둘 사이에는 구조적으로 생각해 볼 만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자기 뜻대로 살다가 모든 것을 허비하고 궁핍해집니다. 마침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해도 주는 자가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그때 비로소 ‘이에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자기 힘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여겼던 이전의 질서가 무너지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의 궁핍 자체가 그를 자동적으로 거듭나게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누구나 주님께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태에서 사람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응답하는가입니다. 그러므로 탕자의 궁핍을 AC.18의 황폐와 비교한다면 ‘고난 = 황폐’라는 공식으로 연결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지하던 것이 무너지고 이전의 삶의 방식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면서 새로운 방향이 열리는 모습에서 유사성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 삶에서 겪는 실패와 상실을 해석할 때도 중요합니다. 질병, 경제적 어려움, 관계의 파탄, 계획의 실패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주님께서 나를 황폐하게 하신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18의 황폐는 단순히 외적인 고통의 크기로 판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선과 진리의 유입을 방해하던 것이 약화되고, 사람이 이전에 붙들고 있던 거짓과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는가에 있습니다. 외적 고난이 그런 과정에 사용될 수도 있지만, 고난 그 자체와 황폐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과정이 필요한 것일까요? 사람은 자기 욕정과 거짓이 자신에게 생명과 행복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쉽게 내려놓지 않습니다. 머리로 진리를 배우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여 악을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붙들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보고 그것에서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욕망이나 생각이 더 이상 생명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선과 진리를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황폐가 거듭남을 준비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욕정과 거짓이 제거된다’는 말을 ‘나는 거듭났으므로 이제 내 안에는 악한 욕망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은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더 분명히 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지배하는가입니다. 욕정과 거짓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주님의 진리로 분별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과 진리가 삶의 중심을 차지하도록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 거듭남의 실제적인 싸움입니다.

 

AC.18의 마지막 표현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옛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 아직 ‘새 사람이 완성된다’거나 심지어 ‘태어난다’고 하지 않고 ‘잉태된다’고 합니다. 황폐는 완성이 아니라 준비입니다. 주님께서 새 생명을 시작하실 수 있도록 옛것의 지배가 물러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황폐의 목적은 사람을 빈자리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잉태될 자리를 마련하는 데 있습니다. 깊음을 마르게 하시는 것도 주님이시고, 그 깊은 곳에 길을 내시는 것도 주님이시며, 그 길을 통하여 사람을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AC.18 심화 1)

 

 

 

AC.18 심화 2, ‘황폐’(vastation, vastatio)란 무엇인가?

AC.18 심화2. ‘황폐’(vastation, vastatio)란 무엇인가? AC를 영어로 읽다 보면 오늘날에는 다소 낯선 ‘vastation’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AC.18에서 Potts는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인간의 황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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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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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의 ‘혼돈’, ‘공허’, ‘흑암’을 자신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속 사람이나 거듭남,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 채 지낼 수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하면 ‘그 사람의 속 사람을 비출 빛을 조금이라도 일찍 켜 줄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적 생명을 염려하는 데서 나오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먼저 AC.17의 표현을 정확히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혼돈’은 선이 없는 상태이고, ‘공허’는 진리가 없는 상태이며, ‘흑암’은 주님 신앙과 영적, 천적 삶에 대한 어리석음과 무지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어떤 사람이 교회 용어나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모르기 때문에 곧 영적으로 완전히 버려진 상태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주님께서 그 사람의 내면에서 보존하고 준비하시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후 AC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리메인스’가 바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그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랑받고 사랑했던 경험, 순진함,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진실을 기뻐했던 순간처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것들이 사람 자신도 모르는 깊은 곳에 간직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존하십니다. 훗날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 들어갈 때 주님께서는 이러한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신앙 지식의 정도만으로 그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지금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빛을 앞당겨 켜 줄’ 수 있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빛 자체를 켜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영적 빛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 사람을 직접 열 수도 없고, 어떤 진리를 강제로 이해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진리는 자유 가운데 받아들여져야 그 사람의 삶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뜻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상태를 무시한 채 영적 진리를 밀어 넣으려는 것은 주님의 방법과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의 진리를 전할 수 있고, 상대방이 질문할 때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 사람이 선을 사랑하고 악을 악으로 인식하도록 돕는 삶의 본을 보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한마디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한 번 경험한 진실한 사랑이 훗날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중요한 준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 어떤 씨앗이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아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특정한 신학 용어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고, 악을 피하며, 자신의 종교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선을 추구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영적 진리를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에도 사람은 자신의 내적 상태에 따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기회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와 영원한 운명을 성급하게 판단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결국 모든 사람은 때가 되면 반드시 빛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고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시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습니다. 리메인스가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도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면서도 사람의 선택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빛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그 빛을 향해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빛을 앞당겨 켜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우리의 역할과 주님의 역할을 구별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의 내면을 억지로 열어 빛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진리와 사랑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도, 교우에게도, 교회 밖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지금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조급해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언젠가 저절로 다 잘될 것이라고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고 선을 행하며, 그 진리가 언제 어떻게 생명이 될지는 주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어쩌면 ‘빛을 조금 일찍 켜 주고 싶다’는 목회자의 마음 자체도 주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의 도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중심은 ‘내가 그 사람을 깨우겠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필요한 빛을 주실 때, 제가 그 일을 방해하지 않고 쓰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AC.17의 흑암 다음에는 곧 주님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흑암 속에 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지막 시선은 그 사람의 어둠이 아니라, 그 어둠 위에서도 이미 일하고 계시는 주님께 향해야 합니다. (AC.17 심화 1)

 

 

 

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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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가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단어를 단순한 동의어의 반복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 안에서는 서로 비슷해 보이는 표현도 각각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며, 스베덴보리는 이 세 동사 역시 거듭남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나타낸다고 봅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AC.16 자체는 그 차이를 여기서 자세히 정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창조는 생명을 처음 넣어 주는 단계, 형성은 그 생명을 질서 있게 만드는 단계, 만듦은 그것을 행동으로 구현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세 동사를 하나의 고정된 순서표로 확정하는 것은 AC.16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런 설명은 이해를 돕는 비유로는 사용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AC.16에서 그렇게 정의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창조하다’는 거듭남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날 때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에 거듭남 자체를 ‘새 창조’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창조’는 자연적 인간이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일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실제로 뒤의 AC에서도 ‘창조하다’는 사람이 새로 창조되거나 거듭나는 것과 특별히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만들다’ 역시 단순한 물건 제작의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뒤의 설명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가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경우 ‘만들다’라는 표현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들다’를 단순히 외적인 행동으로 구현하는 단계라고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시작하신 거듭남의 역사가 사람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측면까지 포함한다고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짓다’ 또는 ‘형성하다’(form)도 고유한 뜻을 갖습니다. 이 말은 이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것이 일정한 형식과 질서를 갖도록 형성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AC.16 한 번호만으로 세부 의미를 완전히 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여러 곳에서 ‘형성하다’를 다른 표현들과 구별하여 사용하며, 각 문맥에서 그 속뜻을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가 모두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를 말하지만 서로 같은 뜻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43:7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라고 한 사람을 두고 세 동사가 연속하여 사용됩니다. 만일 세 말이 완전히 같은 뜻이라면 이런 반복은 단순한 수사적 장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에 속뜻의 차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세 동사 역시 한 사람의 거듭남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나타낸다고 읽습니다.

 

AC.88에서도 이 원칙은 다시 확인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주님의 ‘일’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그를 ‘창조하시고, 형성하시고,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세 표현이 말씀에서 ‘아주 구별되게’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대목에서도 각 단어를 간단한 세 단계 공식으로 정의하기보다는, 말씀에서 각각 고유한 관념을 전달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AC.16을 읽을 때도 가장 안전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세 동사의 차이를 기억할 때는 ‘첫째는 이것, 둘째는 이것, 셋째는 이것’이라고 너무 빨리 고정하기보다, ‘거듭남은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형성하시며, 마침내 온전하게 이루어 가시는 전적인 역사이고, 말씀은 이 한 역사를 여러 고유한 표현으로 구별하여 말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후 AC에서 이 단어들이 다시 나타날 때마다 그 문맥에서 구체적인 뜻을 확인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한 ‘의미의 차이’가 점차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세 동사가 함께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거듭남의 주체가 주님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하지만, 사람 자신이 스스로를 새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시고, 형성하시고,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AC.16에서 이 세 단어의 차이를 묻는 일은 단순한 어휘 연구가 아니라, 거듭남 전체가 누구의 역사인가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AC.16 심화 1)

 

 

 

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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