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뒤 곧바로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무엇을 그렇게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며, 왜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우리가 대신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AC.49는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 ‘섭리적으로 감추어 두셨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확정한다면 그것은 AC.49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우리의 추론이 됩니다.

 

이 문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에게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문제에 관하여 여기 기록한 것보다 훨씬 더 말할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그것을 AC.49에서는 아직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의도적으로 유보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상을 이 한 문장만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이 아무 의미 없는 편집상의 메모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설명하려는 본문의 중심에 필요한 만큼 말하고, 다른 주제는 뒤로 남겨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AC.49의 중심은 태고교회의 현현 방식 자체를 상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왜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문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직후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이어집니다. 따라서 AC.49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태고교회와 주님의 교통에 관한 모든 세부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과 그것이 태고교회의 ‘사람’ 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자연계의 대화 장면처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주님께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그 현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각되었는지, 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했는지, 얼마나 자주 그러했는지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적 눈으로 보았다’, ‘내적 시야가 열렸다’와 같은 세부를 AC.49의 설명인 것처럼 덧붙이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영계 경험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및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의 ‘얼굴과 얼굴’ 교통이 정확히 같은 방식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서로 관련하여 연구할 수 있는 주제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가장 안전한 답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는 더 말할 것이 많이 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것을 다루지 않겠다.’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그가 직접 밝히지 않았으므로 열린 채로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는 독법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유보가 AC.49의 중심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놀라운 영적 경험 자체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짧게 언급하고 곧바로 더 중요한 문제, 곧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로 돌아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고, 자기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AC.49에서 지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을 때에도 좋은 원칙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완성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한 문장을 만났다고 해서 관련 교리를 모두 끌어와 그 빈칸을 채우기보다, ‘지금 이 글이 말하는 만큼’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AC의 긴 흐름 속에서 어떤 주제가 처음에는 짧게 언급되고 이후 점차 자세해지는 과정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는 신비한 비밀을 암시하므로 우리가 그 내용을 추측해야 한다는 초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고 경계를 그은 문장입니다. 그 경계를 존중하면서 AC.49가 지금 밝히는 핵심, 곧 주님이 최고의 뜻에서 유일한 ‘사람’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는 데 집중하는 것이 이 문장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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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창1:26)

 

AC.49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 주님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man)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사람’(men)이라고 했고, 자기 자신을 그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안에서 인식된 것들, 곧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된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of man)이라 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 예언서들에서 ‘사람’(man)과 ‘인자’(the son of man)는 최고의 뜻으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man)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최고의 뜻으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이 때문에 주님은 예언자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같은 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 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도 자신을 자주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하시며, 다니엘에서와 같이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여기 ‘하늘 구름’(The clouds of heaven)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power and great glory)은 말씀의 속뜻을 뜻합니다. 이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옵니다.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는 창1:26의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이제 ‘사람’이라는 말 자체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앞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영적 인간’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사람’이라고 하며, 더 근본적으로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AC.49의 대답은 매우 강렬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자기들 자신조차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당황스러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나 AC.49가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이나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과 태고교회의 영적 인식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참된 사람됨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자기 안에서 ‘사람의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AC.49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모든 진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단순히 사람이 선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48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9에서는 같은 원리가 ‘사람됨’에 적용됩니다.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가리키며, 속뜻에서는 주님에게서 지혜와 총명을 받아 거듭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만이 참 사람’이라는 말을 인간을 낮추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사람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생명을 만들어 내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갑니다. 따라서 이 말의 초점은 ‘누가 인간 자격이 있는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참된 영적 생명의 근원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49의 첫 문장에는 또 하나 매우 놀라운 내용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해 ‘많이 말할 수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상상하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과, 바로 이것이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유보 문장은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일으키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사람’과 ‘인자’는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에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모든 성경 인용을 읽는 열쇠입니다.

 

렘4:23,25에서 예레미야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 빛이 없고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AC.49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사람’이라는 말이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서 ‘사람’의 속뜻을 지혜와 총명, 따라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사람이 없다’는 표현 역시 그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함께 나오는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표현도 앞의 AC.40에서 새가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된다고 설명한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49는 여기서 예레미야 전체의 황폐 상태를 단계별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세밀하게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45:11-12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속뜻의 ‘사람’을 거듭난 사람으로, 최고의 뜻의 ‘사람’을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과 연결합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자연계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의 ‘사람’이라는 표현에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겔1:26은 주님께서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보여 주는 직접적인 예로 인용됩니다. 에스겔은 보좌 위에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을 봅니다. AC.49는 이 환상의 보좌나 남보석 등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것이 예언자들의 환상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최고의 뜻에서 ‘사람’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논증에 사용됩니다.

 

단7:13-14에서는 그 표현이 ‘인자’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니엘에게 보이신 분이 ‘인자’, 곧 ‘사람’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같은 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인자의 왕국과 권세에 관한 모든 세부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자’라는 호칭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인용의 직접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복음서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자주 ‘인자’라고 부르셨으며, 마24:30에서는 다니엘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49는 ‘사람’이라는 주제와 함께 말씀의 문자 의미와 속뜻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짧게 엽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 구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이 말씀의 속뜻을 뜻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바로 거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AC.49가 직접 말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속뜻을 깨닫는 순간 곧 인자의 재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이 확실히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심리나 도덕적 교훈을 흥미롭게 찾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사람’ 역시 결국 인간 자신에게서 설명이 완성되지 않고,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형상의 원형이신 주님을 보아야 한다는 방향이 여기서 열립니다.

 

이 점에서 AC.49는 앞의 AC.48과 다음 글들을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49는 곧바로 인간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먼저 주님을 바라봅니다.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 참으로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도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위대함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하는 사람됨과 관계됩니다.

 

동시에 여기서 ‘거듭난 사람만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사람의 사회적 가치나 존엄을 분류하는 글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이 최고의 뜻과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글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스베덴보리의 매우 깊은 인간론을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는 주장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결국 AC.49가 말하는 ‘사람’의 비밀은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 안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소유라고 여기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을 ‘사람’이라 불렀고, 주님에게서 온 것들만을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서의 ‘사람’과 ‘인자’, 에스겔과 다니엘의 사람 형상, 복음서의 인자, 그리고 말씀의 구름과 영광까지 이어지는 모든 인용은 결국 이 중심을 향합니다.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의 참된 지혜와 총명과 사람됨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깁니다.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심화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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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창1:26, ‘하나님의 형상 : 주님의 통치가 천사와 영들을 통해 사람 안에 흐르는 상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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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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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4, 25)

 

AC.48

이로부터 사람이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있을 때가 분명해집니다. 이때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그것들을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fishes of the sea), ‘하늘의 새’(fowl of the heavens)라 합니다. 사람이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들을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을 ‘생물’(living soul), ‘가축’(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신앙으로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 of the sea,” and the “fowl of the heavens.”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of 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AC.48은 지금까지 이어진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차이를 짧고 분명하게 정리하는 글입니다. 특히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가 실제로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앞에서는 물고기와 새, 생물과 짐승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 놓고 두 상태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먼저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신앙으로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이미 ‘생명이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다섯째 날의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로 표현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섯 번째 상태를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지 않은 상태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48은 이때 산출되는 것들을 분명히 ‘animate’, 곧 생명이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앞의 AC.39에서도 큰 광명체들이 켜진 뒤 사람이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에 와서 처음으로 영적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지만, 그 생명이 나타나는 중심이 아직 주로 이해에 속한 신앙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이해에 속한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세밀한 변화가 있습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사랑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도 신앙은 그대로 있으며, 거기에 그 신앙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함께합니다.

 

그래서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의 차이를 단순히 ‘아는 단계와 행하는 단계’라고만 나누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상태의 사람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AC.48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내적인 것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에서 말하며 그로써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처음 읽으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섯째 상태에는 사랑이 전혀 없고 여섯째 상태에서 갑자기 사랑이 생긴다는 뜻인가?’ 그렇게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8은 거듭남 전체에서 사랑이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섯째 상태에서 사람이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이 글의 초점은 사랑의 최초 존재 여부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신앙과 함께 사랑이 실제 의지에 속한 원리로서 행동의 근원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기존 해설에서처럼 이를 ‘처음에는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애쓰다가 나중에는 좋아서 자연스럽게 한다’는 예로 설명하면 어느 정도 감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AC.48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상태에 반드시 심한 억지와 갈등이 있고, 여섯째 상태에 이르면 모든 선행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AC.48이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과 갈등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AC.48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행동의 근원’에 관한 변화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이 전면에 나타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과 더불어,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 이제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뿐 아니라’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의 원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산출되는 것들이 창1:24-25의 ‘생물’과 ‘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앞의 AC.44-46에서 이미 이 짐승들이 의지에 속한 것들, 특히 애정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에서 여섯째 날의 생물과 짐승으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피조물의 종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신앙의 상태에서 의지에 속한 사랑까지 포함하는 상태로 깊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AC.48의 절정입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임의로 ‘하나님과 작동 방식이 같아지는 것’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8 자체가 그 이유를 간단히 제시합니다.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서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의 여러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반복하여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신적인 생명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과 사랑이 그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져 삶으로 나타나는 상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AC.47과의 연결도 중요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하며,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8에서는 그 진행 가운데 여섯째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하게 되고, 사람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용어상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AC.48은 이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AC를 읽다 보면 ‘영적’과 ‘천적’이 서로 구별되는 더 세밀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적 인간’이라는 말을 보고 곧바로 이후의 모든 영적·천적 구별을 이 한 문장에 끌어와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여섯째 상태에 이른 거듭난 사람을 ‘영적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 창1:26 이하에서 ‘형상’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어집니다.

 

AC.48은 결국 다섯째 상태를 낮추고 여섯째 상태만 참된 것으로 만드는 글이 아닙니다. 다섯째 상태도 이미 살아 있는 거듭남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이해가 진리를 알고 신앙으로 확증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나타나고, 사람은 신앙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는 ‘영적 인간’,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이 글의 흐름을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만 표현하기보다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이 되는 데로’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다섯째 날에 살아난 이해에 속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에는 의지에 속한 사랑과 함께 하나의 더 온전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창조의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 사이에서 AC.48이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AC.49, 창1:26, ‘참 사람은 오직 주님 : 사랑과 진리 안에서만 성립되는 사람됨'(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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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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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를 하다가 갑자기 ‘회개의 상태’라는 말이 등장하기 때문에 논리 점프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창1 해석 구조를 보면 이것은 갑작스러운 전환이 아니라 ‘앞 단계에서 준비된 상태의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이 연결을 이해하려면 창1에서 말하는 거듭남의 초기 단계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의 첫 부분을 인간 거듭남의 초기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대략 이런 흐름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완전히 혼돈과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다음 진리의 빛이 조금씩 들어옵니다. 그리고 진리와 거짓이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 사람 안에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 곧 식물로 상징되는 단계가 나타납니다. 바로 여기서 ‘풀’과 ‘나무’가 등장합니다. 즉 사람 안에 처음으로 선과 진리의 싹이 나타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회개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반드시 함께 일어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상태를 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 자신의 생각과 삶이 괜찮다고 여겼던 것들이 진리의 빛 속에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순간에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바꾸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입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말을 오늘날 흔히 생각하는 의미—큰 죄를 뉘우치며 눈물로 회개하는 사건—으로 이해하면 연결이 어려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훨씬 더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기 삶을 돌아본 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고, 그것을 바꾸려는 의지’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맞추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의 식물 비유와 회개는 실제로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풀’은 사람이 처음으로 진리를 듣고 마음이 움직이는 상태입니다. ‘씨 맺는 채소’는 그 진리가 생각 속에서 자라 다른 진리를 낳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는 그 진리가 실제 삶 속에서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기 시작하는 바로 그 과정이 ‘회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식물 단계 전체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듣다가 ‘나는 지금까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듭니다. 이것이 풀입니다. 그다음 그는 말씀을 더 배우면서 자신의 행동들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내가 왜 이렇게 말했을까?’, ‘이 행동은 옳았을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것이 씨 맺는 채소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는 실제 행동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쉽게 화를 냈다면 이제는 참아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전에는 남을 비판했다면 이제는 말을 조심합니다. 이것이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바로 이 전체 과정이 회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AC.29에서 회개가 갑자기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식물의 성장 비유가 바로 회개의 실제 모습’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 그 순간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회개를 거듭남의 매우 초기 단계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 완전히 거듭난 상태는 아니지만,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삶을 진리의 빛 속에서 고치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그것을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회개는 어떤 특별한 감정 사건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사람이 ‘자기 삶을 그 진리에 맞추어 바꾸기 시작하는 과정’입니다. 창1에서 식물이 처음 자라는 장면이 바로 그 회개의 시작을 상징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C.29 심화 3)

 

 

 

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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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 심화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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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마침내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까지 등장합니다. 단순히 진리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열매’까지 맺는 단계라면 상당히 깊은 거듭남에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것을 아직 ‘생명 없는 것들’(inanimate things)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열매를 맺고 있는데도 ‘생명 없는’ 상태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AC.29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생명’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생명 없는’이라는 표현은 식물이 자연계에서 생물인가 무생물인가를 말하는 생물학적 구분이 아닙니다. 또한 이 단계의 사람에게 선도 진리도 전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아 무엇인가가 돋아나고 자라며 열매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을 사람이 아직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아직 이것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단계는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전의 준비 상태입니다. 따라서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만으로 생명의 유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선한 열매가 나타나고 있어도, 사람이 그 선의 생명을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AC.29의 의미에서는 아직 다음 단계의 생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반드시 되갚아 주었는데, 말씀을 배우고 회개하면서 이제는 보복하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겨우 분노를 억제하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험담도 삼가고, 마침내 상대방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실제로 도와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열매’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전에는 없던 선한 행동이 실제 삶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많이 변했다. 예전 같으면 절대 이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이제는 저 사람까지 도와주었다.’ 이것이 반드시 노골적인 교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실제로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선의 근원까지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바로 이 상태에서부터 이끌어, 나중에는 자기가 행하는 모든 참된 선의 생명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AC.29의 ‘생명 없는’ 상태를 ‘가짜 선’, ‘쓸모없는 선’, 혹은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선’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단계는 거듭남에서 반드시 필요한 준비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먼저 선과 진리에 관한 것을 배우게 하시고, 그것에 따라 실제로 행동하게 하시며, 그 과정 가운데 점차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이러한 준비가 실제 삶에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라는 표현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열매가 있다는 것은 선과 진리가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실제 삶에서 무엇인가를 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나무’는 셋째 날 안에서는 매우 발전한 모습이지만, 전체 거듭남의 여섯 상태를 놓고 보면 여전히 다음 단계의 생명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점은 ‘내가 선을 행하는가?’와 ‘그 선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가 서로 다른 질문임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는 셋째 날에도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악한 행동을 멈추고 선한 일을 시작하며 진리에 따라 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서는 아직 더 깊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안의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고,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니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거듭남의 질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택하고 싸우고 행해야 합니다. 다만 점차 깊어지는 거듭남 속에서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능력으로 이렇게 하고 있으며, 선 자체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라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셋째 날의 ‘생명 없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죽은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향하여 준비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씨앗은 이미 뿌려졌고, 연한 것이 돋았으며, 씨를 맺고, 마침내 열매까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직 그 모든 것의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참으로 인정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것을 ‘생명 없는 것들’이라고 하고, 다음에 비로소 ‘살아 있는 것들’이 등장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열매를 맺는데도 왜 생명 없는가?’라는 역설은 오히려 AC.29의 핵심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거듭남은 단지 ‘나쁜 행동이 좋은 행동으로 바뀌는 것’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곳에서는 선의 근원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주님에게 있던 그 근원을 사람이 인정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여기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더 깊이 이끄실수록 그는 자기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셋째 날의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는 결코 하찮은 단계가 아닙니다. 실제 열매가 나타나는 귀중한 회개의 상태입니다. 다만 그 열매를 바라보며 ‘이것은 나의 선이다’라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가능하게 한 씨앗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알아 가야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셋째 날의 준비는 다음 단계의 ‘참된 신앙의 생명’을 향하여 열리기 시작합니다. (AC.29 심화 2)

 

 

 

AC.29 심화 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 심화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의 문맥을 처음 읽으면 앞에서는 식물 이야기—‘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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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 심화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의 ‘연한 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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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심화

1.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실제 예

 

AC.29의 ‘연한 풀’(tender herb),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는 실제 거듭남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세 표현을 통하여 셋째 날에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처음 싹트고 점차 자라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다만 한 가지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 단계는 아직 거듭남이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AC.29은 이때 나타나는 것들을 아직 ‘생명 없는 것들’이라고 부르며, 이 사람은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실제 예도 완성된 천적·영적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다, 회개 가운데 선과 진리가 처음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사람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 직장에서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동료를 몹시 싫어합니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며칠 동안 분을 품고,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흠을 말하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거나 읽는 가운데 ‘나는 저 사람이 잘못한 것만 보고 있는데, 내 안의 미움은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처음 생깁니다. 전에는 상대의 잘못만 보였는데 이제 처음으로 자기 안의 악을 조금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처음 돋아나는 것이 ‘연한 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아직 매우 약합니다. 그날은 ‘미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상대가 다시 자기를 자극하면 곧 화가 납니다. 그래도 이전과 다른 것이 하나 생겼습니다. 전에는 자기 분노를 당연하게 여겼지만 이제는 ‘내가 이 사람을 이렇게 미워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행동 전체를 바꿀 만큼 강하지 않고, 그 진리가 자기 삶을 지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씨앗으로부터 이전에는 없던 무엇인가가 연한 싹처럼 돋아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은 말씀을 더 배우고 자신의 상태도 조금씩 살펴봅니다. 단지 ‘미워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 상황에서 자기 분노를 억제하려고 합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을 때 말을 멈추어 보기도 하고, 상대에게 일부러 차갑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평소처럼 대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실패할 때도 많지만 이제 진리가 단순히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실제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태를 ‘씨 맺는 채소’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연한 풀보다 한 단계 더 진행된 것입니다. 선과 진리가 조금 더 형태를 갖추고, 사람의 실제 삶 속에서 쓰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내가 참 많이 변했다’, ‘나는 이제 저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분노를 참은 자기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선한 행동이 나타난다고 해서 아직 그 선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의 행동에는 이전보다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상대가 잘못하면 즉시 보복하거나 험담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멈추는 일이 많아집니다. 상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필요한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이라도 공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속에서 미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미움이 행동 전체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진리가 실제 선한 행동이라는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한 실제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이 이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므로 이미 참된 신앙의 생명에 들어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은 오히려 이 단계에서도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셋째 날의 식물들은 아직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선한 열매가 실제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마음 깊이 인정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다음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교회에서의 봉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설교를 듣다가 ‘나도 어려운 사람을 좀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직 실제 행동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을 ‘연한 풀’과 같은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실제로 시간을 내어 누군가를 돕고, 자기 편의를 조금 포기하면서 봉사하기 시작합니다. 선에 관한 진리가 행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씨 맺는 채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선한 행동이 일회적인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생활 가운데 반복되어 실제 유익을 만들어 낸다면 ‘열매 맺는 나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동기는 아직 혼합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기쁠 수도 있고, ‘나는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만족이 있을 수도 있으며, 자기가 선한 일을 했다는 생각을 붙들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불완전한 상태 때문에 시작된 선을 모두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계속 이끄시면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차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앞의 AC.25에서 살펴본 ‘꺾지 않고 굽히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따라서 ‘연한 풀 → 씨 맺는 채소 →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단순히 ‘좋은 생각 → 진리 이해 → 완성된 선한 성품’이라는 세 단계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의 중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아 사람 안에서 처음 연약한 것이 돋아나고, 그것이 점차 더 유용한 것이 되며, 마침내 실제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아직 셋째 날, 곧 ‘회개의 상태’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큰 위로가 됩니다. 자기 안에 겨우 ‘연한 풀’ 같은 변화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악을 오늘 처음 악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면 이미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직 자주 실패하더라도 진리에 따라 실제 행동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면 그 연한 것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삶에서 실제 선한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을 더 깊은 단계로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과정에서 사람은 한 가지를 배워 가야 합니다. ‘땅’인 사람이 씨앗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은 씨앗을 받아 싹을 내고 열매를 맺지만, 천적 씨앗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 이렇게 선해졌다’는 데 머물지 않고, 자기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그 더 깊은 생명을 향하여 자라고 있는 거듭남의 첫 열매들입니다. (AC.29 심화 1)

 

 

 

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 심화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가 나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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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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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심화

1. ‘스베덴보리는 AC 초기부터 어떻게 여러 말씀의 속뜻을 알 수 있었을까?’

 

AC.28을 처음 읽으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이제 겨우 창1을 설명하는 AC.28인데,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학개, 스가랴, 시편 등 말씀의 여러 곳을 자유롭게 오가며 그 구절들을 겉뜻이 아니라 속뜻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해설하면서 그때그때 처음 속뜻을 알아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혹시 글을 쓰는 동안 주님께서 필요한 성경 구절을 하나씩 생각나게 하시고 그 뜻까지 알려 주셨던 것일까요?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글 번호 순서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순서를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28이 창세기 주석의 스물여덟 번째 글이라는 사실은 독자인 우리가 설명을 스물여덟 번째 단계까지 읽었다는 뜻이지, 스베덴보리가 그때 비로소 스물여덟 번째 속뜻을 발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그가 이미 열렸다고 말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펼쳐 보이는 저술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자신의 학문적 연구나 추론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곳곳에서 그는 이전에는 누구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말씀의 아르카나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렸다고 말하며, 자신에게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것들을 기록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기 이해를 존중해서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독창적인 상징 해석법을 만들어 성경에 적용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어 보여 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고 있으면 주님께서 곁에서 다음에 인용할 성경 구절을 하나씩 불러 주셨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장면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28은 자신의 집필 과정이 그런 방식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계시와 조명 아래 기록했다는 것과, 매 문장과 인용 구절을 받아쓰기처럼 직접 전달받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그 과정을 세밀하게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AC.28에서 여러 예언서와 시편을 한꺼번에 인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말씀의 속뜻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이해가 있습니다. 속뜻은 창세기에만 따로 존재하는 암호 같은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같은 대상과 표현이 말씀 안에서 같은 영적 실재와 연결되는 상응의 질서가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물’을 설명하면서 이사야의 물, 스가랴의 물, 시편의 물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AC.28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물’이 여러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한 뒤 사11:9, 사19:5-6, 학2:6-7, 슥14:7-8, 시69:33-34 등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그리고 ‘땅’이 그릇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슥12:1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구절을 독립적으로 길게 주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성경책에 등장하는 동일하거나 관련된 표현들이 하나의 영적 의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독법을 알려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서 이사야, 예레미야, 시편, 복음서 등의 여러 구절을 인용할 때, 그것들을 단순한 ‘참고 성구’ 정도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그 인용들을 통하여 말씀의 한 부분에서 발견되는 영적 의미가 다른 부분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AC를 계속 읽다 보면 하나의 표현에 대한 설명이 여러 성경책을 가로질러 점점 풍성해지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의 상응을 알면 말씀의 모든 구절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물은 지식이다’라는 공식을 외운 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물에 무조건 같은 한 단어를 대입하면 속뜻이 자동으로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과 연결되는 다른 표현들, 다루어지는 주제와 상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상응은 사람이 임의로 만든 상징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는 영적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주석이 아직 AC.28인데 어떻게 다른 성경의 속뜻까지 알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AC의 글 번호는 스베덴보리가 속뜻을 발견해 간 시간 순서가 아닙니다. 그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열렸다고 증언하며,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는 그것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를 따라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말씀 전체가 하나의 상응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한 표현을 설명하면서 다른 성경책의 관련 구절들을 함께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그 순간 주님께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그 구절을 생각나게 하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답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모든 내적 의미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돌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실제 집필 순간마다 주님의 조명이 어떤 심리적·의식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을 더 정확하게 존중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보면 AC.28의 수많은 성경 인용은 오히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한 권의 숨은 뜻만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한 표현을 통하여 말씀의 여러 부분이 어떻게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지를 조금씩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AC.28 심화 1)

 

 

 

AC.28, 창1:10, ‘물과 바다와 땅 : 지식이 모이고, 생명을 받아들일 거듭남의 그릇’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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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 심화

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에는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것들은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 것이든 모두 그곳에 ‘기억 지식’(scientifica)으로 머물며,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짧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배우고 기억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단지 기억 속에 쌓여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거듭남의 과정에서 주님에 의해 사용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거기에서’라는 말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장의 흐름상 ‘거기’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어떤 별도의 영적 저장소가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겉 사람의 기억’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라도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가면 그곳에서는 기억 지식으로 머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말씀이나 부모와 교사에게 배운 선한 가르침, 훗날 읽고 배운 성경의 진리들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거나 실제 삶과 연결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삶의 어떤 상황에서 그 말씀이 다시 떠오르고, 이전에는 단순한 지식이었던 것이 자신의 삶을 비추는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AC.27의 표현을 실제 삶에 적용해 본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특정한 기억이 떠오르는 모든 현상을 곧바로 ‘주님께서 불러내셨다’고 판정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 지식’ 자체가 곧 영적 생명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기억하며, 선과 진리에 관한 말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사람이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AC.27은 오히려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조차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그곳에서 기억 지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기억 속에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와 그것이 실제로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가는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억 지식이 하찮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으로 배우고 기억해 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이후 거듭남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고 배우고 기억하는 일, 선과 진리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들이 기억 속에 들어갈 당시에는 단순한 지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AC.27은 그것들이 그곳에 머물다가 나중에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기억은 거듭남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은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데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 표현을 리메인스(remains)와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및 그와 관련된 상태들을 가리키며, 인간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AC.27에서 직접 말하는 것은 ‘속 사람의 리메인스 저장소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의 기억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이 된 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는’ 것입니다. 두 주제 사이에 더 넓은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AC.27 한 문장만으로 둘을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것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불러내시는 것일까요? 천사나 선한 영들을 통해서인지, 퍼셉션이나 양심을 통해서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인간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천사와 영들의 매개가 있다는 사실, 또한 퍼셉션과 양심의 서로 다른 상태들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러나 AC.27은 여기서 그 작동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근거로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기억 지식을 꺼내신다’거나 ‘양심을 통하여 리메인스를 활성화하신다’는 식의 일정한 메커니즘을 확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설명이 됩니다.

 

오히려 AC.27에서 확실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더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그곳에 기억 지식으로 머물며, 그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기억과 생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거듭남의 생명과 질서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과 진리를 배우고 기억하는 일은 그 자체가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일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받아들여 기억 속에 간직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라는 표현의 중심은 기억의 세부적인 작동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27의 중심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기억 지식으로 모여 ‘바다’를 이루고, 그곳에 머물러 있던 것들이 이후 주님에 의해 사용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사람이 배운 지식 자체를 영적 생명으로 착각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주님께서 그 지식들을 거듭남 가운데 쓰실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기억 지식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며,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AC.27 심화 1)

 

 

 

AC.27, 창1:9, ‘물이 모이고 땅이 드러남 : 기억 속에 모인 진리와 겉 사람의 준비’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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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5 심화

 

1.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사42:3)

 

AC.25에서 스베덴보리는 사42:3의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를 인용하면서 거듭남의 매우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등불’ 각각에 별도의 세밀한 상응을 붙이는 것보다, 주님께서 사람 안의 오류를 ‘꺾지’ 않으시고 욕정을 ‘끄지’ 않으시며 그것들을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굽히신다’는 AC.25 자체의 설명입니다. 이 표현은 주님께서 아직 불완전한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거듭남을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순수한 선과 진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면서도 자기 생각을 고집할 수 있고, 선을 행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으며, 주님을 찾으면서도 자기에게 돌아올 유익을 먼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의 생각과 의도에는 감각에서 오는 착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정, 이미 굳어진 습관과 잘못된 판단들이 함께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그런 것들이 있다는 이유로 사람의 현재 상태 전체를 한꺼번에 부수고 전혀 다른 상태를 강제로 만들어 내시는 것은 아닙니다.

 

AC.25가 말하는 ‘굽히심’은 바로 여기서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그를 이끄십니다. 아직 낮은 동기가 섞여 있는 상태에서도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시며, 그 과정에서 점차 무엇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고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인지를 분별하게 하십니다. 처음에는 자기 유익 때문에 선을 행하던 사람이 차츰 이웃의 유익을 생각하게 되고, 처음에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진리를 말하던 사람이 차츰 진리 자체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 말하게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 시작하시되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게 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굽힌다’는 말을 ‘오류 자체가 점차 진리가 되고 욕정 자체가 점차 선한 사랑으로 변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을 잘 다듬으면 진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사랑을 정화하면 그대로 천국적 사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직 오류와 욕정의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에서도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자유와 수용 능력에 따라 점차 거짓에서 진리로, 악한 사랑의 지배에서 선한 사랑의 질서로 방향을 바꾸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굽힘’은 악을 선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을 선과 진리 쪽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섭리적 역사입니다.

 

이 점에서 AC.24와 AC.25는 매우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AC.24에서는 사람이 감각의 착각이나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주님에 의해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는 아르카나가 제시되었습니다. AC.25에서는 사42:3을 통하여 바로 그 원리가 말씀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이미 완전해진 뒤에야 그를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자기 자신의 것들 속에 있는 바로 그 상태에서부터 그를 붙드시고 거듭남을 진행하십니다.

 

따라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한다’는 말씀을 단순히 ‘주님은 온유하시다’는 위로의 말씀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AC.25의 문맥에서는 이것이 실제 거듭남의 방식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시며, 아직 혼합되고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질서 안에서 이끄십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현재 상태를 그대로 보존하는 데 있지 않고, 마침내 사람 자신의 것에서 나온 것으로 여겼던 삶의 중심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 아래 놓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AC.25에서 말하는 ‘꺾고 끄는 대신 굽히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입니다. (AC.25 심화 1)

 

 

 

AC.25, 창1:6-7, ‘하늘과 땅을 펴심 : 파괴가 아니라 굽힘으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질서’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6, 7) AC.25‘땅을 펼치고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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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이라는 표현은 처음 접하면 조금 낯설지만, AC를 읽으면서 자주 만나게 되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AC.24의 영어 번역에서 Potts는 라틴어 scientifica를 ‘memory-knowledges’라고 옮깁니다. 여기 붙은 개정자의 주(Reviser)는 이것을 ‘외적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들로, 신학적인 것이든 그 밖의 것이든 온갖 종류가 대량으로 축적되어 있는 것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기억 지식’은 특별히 신비하거나 영적인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배우고 읽어 외적 기억에 축적한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 사실이나 지리 정보, 과학 지식, 언어와 직업에 관한 지식뿐 아니라 성경에 관하여 배운 사실들도 기억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이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도 그 내용이 성경적이라는 이유만으로 곧 속 사람의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외적 기억에 저장되어 내가 필요할 때 떠올리고 말할 수 있는 지식으로 있는 한, 그것은 기억 지식의 차원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scientifica의 핵심은 단순히 ‘세속적인 지식’이라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이 사람의 외적 기억에 속해 있다는 데 있습니다.

 

AC.24가 이 용어를 특별히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지식을 cognitiones라 하고,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scientifica라 합니다. 개정자의 주는 cognitiones를 우리가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것을 안다’고 할 때의 앎이라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 구별을 ‘scientifica는 죽은 지식이고 cognitiones는 살아 있는 지혜다’라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AC.24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이 둘이 속하는 층위가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기억 지식 자체가 나쁘거나 거듭남에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 세계에서 습득하고 기억해 둔 수많은 것들을 사용하여 그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십니다. AC.24의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여기지만, 주님께서는 그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끼는 것들을 통해서도 그를 선과 진리로 이끄십니다. 따라서 겉 사람과 그 안의 기억 지식은 없애 버려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속 사람과 올바른 질서 안에서 연결되어 주님께 쓰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성경 지식도 좋은 예가 됩니다. 사람이 말씀의 내용을 많이 기억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지식은 주님께서 사람을 가르치시는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전에 외워 두었던 한 구절이 어느 순간 자신의 악을 보게 하거나, 이웃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게 하거나,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깨닫게 하는 데 쓰일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기억 지식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높은 질서 아래 놓이고 올바른 쓰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억 지식’은 쉽게 말하면 ‘외적 기억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들’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그것을 단순히 머릿속에 있다는 이유로 경시할 필요도 없고, 많이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곧 영적 지혜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AC.24가 보여 주는 거듭남의 질서는 이러한 겉 사람의 기억 지식과 속 사람 안의 것들이 처음에는 혼란스럽게 섞여 있다가, 주님께서 그 둘을 구별하시고 각각 제자리에 놓으시는 과정입니다. 바로 그 구별을 나타내는 것이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입니다. (AC.24 심화 1)

 

 

 

AC.24, 창1:6-7(AC.24-25), ‘궁창의 구별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때’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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