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26)

 

AC.336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Enosh), 하나의 사람(man, homo)이라 하는데, 이것이 교회의 이름입니다. (26) The charity implanted by faith is called Enosh, or another man [homo], which is the name of that church. (verse 26)

 

해설

AC.336은 바로 앞 AC.335와 한 문장처럼 이어서 읽어야 합니다. AC.335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의미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입니다. 이제 AC.336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은 새로운 신앙이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이며, 동시에 그 상태로 형성된 교회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바로 앞 AC.335에서도 새로운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졌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체어리티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원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데 사용하시는 하나의 질서와 수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셋, 아벨과 에노스의 대조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했지만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고, 그 신앙은 결국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반면 셋 역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신앙은 아벨을 죽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만, 셋의 신앙에서는 에노스가 나타납니다.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그 질이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대조를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거듭남 순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바로 다음 AC.33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인간으로 설명하면서, 그들에게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그 신앙은 사실상 퍼셉션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AC.336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먼저 진리를 배우고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기는 후대 영적 인간의 일반적인 거듭남 단계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은 AC.336이 직접 말하는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그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했고, 그것이 그 교회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상태가 태고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는 이어지는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단순히 체어리티라고만 하지 않고 하나의 사람(another man, homo)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앞부분에서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뜻보다 더 깊은 교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살아 있고 서로 결합되어 있을 때, 그 상태가 참된 의미의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에노스를 하나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짐으로써 다시 교회라 할 수 있는 상태가 형성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무너졌지만, 셋과 에노스에서는 그 둘이 다시 교회 안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질서가 마련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에노스는 단순한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교회의 이름이 됩니다.

 

다만 하나의 사람이라는 말을 곧바로 최초의 태고교회와 똑같은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 하나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다시 형성되었음을 보여 주지만, 그 상태가 최초의 태고교회와 어느 점에서 같고 어느 점에서 달랐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을 따라가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AC.336 한 문장만으로 그 차이를 모두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블로그 해설에는 최초의 태고교회는 사랑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가졌고, 에노스 교회는 셋으로 의미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대비가 들어 있습니다. 큰 방향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이것을 최초의 퍼셉션은 이미 사라졌고 이제 신앙을 먼저 배우는 새로운 방식이 시작되었다는 식으로 강하게 말하면 너무 앞서갑니다. 이어지는 AC.337은 여전히 태고교회의 참된 상태를 사랑에서 오는 퍼셉션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최초 상태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새로운 교회적 상태라는 정도로 두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또한 AC.336의 마지막 표현인 이것이 교회의 이름입니다는 창세기 초기의 이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에노스는 단순히 셋의 아들이라는 개인적 이름에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실제로 하나의 교회의 이름이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창4의 계보에서 인물들의 이름은 교리적, 교회적 상태의 계승을 표상하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창4:25-26은 창4 전체의 긴 흐름을 매우 압축해서 마무리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은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그 분리는 여러 파생 상태를 거쳐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셋과 에노스는 바로 그 새로운 시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노스가 단순히 체어리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체어리티가 심어진 하나의 교회적 상태 전체의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될 수 있는 상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교회가 다시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참된 교회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 안에서 살아 있는 결합을 이룰 때 교회가 됩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가인, , 에노스의 역사적 표상과 개인의 거듭남을 곧바로 일대일 대응시키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그 속뜻에서 드러나는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가는지, 아니면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살아 있게 하시는 방향으로 가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특히 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많은 진리를 아는 것이 교회의 생명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수단이 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될 때 에노스’, 하나의 사람이 나타난다는 AC.336의 짧은 말은 참된 교회와 참된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깊게 보여 줍니다.

 

심화

1.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 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 심화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표현은 ‘another man [homo]’, 곧 ‘또 하나의 사람’일 것입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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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가인의 왜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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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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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심화

1. 가인 신앙이고,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면, 무엇이 한 신앙을 가인으로 만들고 다른 신앙을 셋으로 만드는 것일까요?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의 질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인에게도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높여 주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고, 그 분리된 상태는 점차 왜곡되어 마지막에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반면 셋은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신앙이며,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집니다. 따라서 셋으로 의미되는 신앙의 특징은 신앙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신앙을 사용하여 사람 안에 체어리티를 형성하실 수 있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AC.328에서 제시된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많은 교리를 알고 있는지, 얼마나 정확한 신조를 고백하는지, 얼마나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만으로는 그 신앙의 내적 질을 충분히 알 수 없습니다. 그 신앙이 실제로 어떤 사랑과 삶을 낳는지가 중요합니다.

 

다만 이 원리를 다른 사람의 내면을 판정하는 잣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외적 행동 몇 가지를 보고 그의 신앙 전체가 참인지 거짓인지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AC.328의 원리는 무엇보다 자신의 신앙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내가 믿는 진리가 실제로 나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죄로 알고 피하게 하며, 주님의 뜻을 자기 뜻보다 앞세우게 하고,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를 단순히 외적인 선행의 양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내적 사랑이며, 외적인 행위는 그 사랑이 삶 속에서 나타나는 형식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의 차이는 교리를 가진 신앙 교리가 없는 사랑의 차이가 아닙니다. 셋 역시 신앙입니다. 신앙과 진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진리가 선을 향하고 신앙이 체어리티의 형성을 향할 때 신앙은 자신의 참된 기능을 수행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긴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도 있지만, 더 정확하게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신다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체어리티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신앙을 이용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며, 신앙의 진리는 주님께서 그 선을 인간 안에 형성하시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셋의 신앙도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AC.335 새로운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졌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가인의 실패 이후 인간이 스스로 더 나은 종교 체계를 만들어 셋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셨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말씀을 배우는 목적은 단지 더 많은 정보를 아는 데 있지 않습니다. 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목적도 논쟁에서 이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을 바로잡고, 악을 보게 하며, 선을 의도하고 행하는 삶으로 이끄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사람을 더 교만하게 만들고 다른 사람을 낮추어 보게 하며, 자기 옳음을 지키는 도구가 된다면 그 방향을 경계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리를 더 알수록 자신 안의 악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의 자비를 더 의지하며, 이웃의 유익을 더 지혜롭게 구하게 된다면 그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안다는 사실 자체가 셋의 신앙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그 지식이 자신의 영적 우월감을 키우면 가인의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고, 반대로 그 진리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더 의지하며 실제 체어리티와 쓰임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셋의 방향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의 가인,  안의 이라는 표현을 너무 문자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가인과 셋은 본래 태고교회 안의 서로 다른 교리적, 교회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우리는 그 속뜻에서 드러나는 영적 원리를 자신의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표상과 개인적 적용을 구별하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셋의 새로운 신앙을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신앙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우선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셨다 AC.335의 직접 진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AC.336에서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가 에노스라고 불립니다. 이것은 셋의 신앙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셋에서 이야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셋의 목적은 에노스, 곧 체어리티가 심어진 새로운 교회적 상태로 이어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AC.335는 매우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 것은 신앙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크게 주장하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얼마나 살아 있게 하실 수 있는가에 있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는 길이 되었습니다. 둘 다 신앙이지만 그 생명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의 표지는 신앙 자체를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인간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실 수 있도록 올바른 질서 안에 놓이는 데 있습니다.

 

 

 

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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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4:25)

 

AC.335

주제의 요약이 제시됩니다. 가인(Cain) 의미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습니다. 신앙을 (Seth)이라 합니다. (25) A summary of the subject is given: that after faith, signified by Cain, had extinguished charity, a new faith was given by the Lord, whereby charity was implanted. This faith is called Seth. (verse 25)

 

해설

AC.335는 창4 전체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요약하면서,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의 이야기와 셋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신앙을 서로 맞대어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가인으로 의미된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그 분리된 상태는 여러 교리적 형태로 파생되었고, 마지막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AC.335는 그 모든 흐름을 한 문장으로 되돌아보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졌다고 합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이 참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높인 신앙이었습니다. 반면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신앙입니다. 둘의 차이는 신앙의 존재 여부보다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 안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AC.335의 핵심 표현은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리와 신앙을 주시는 목적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 안에 선과 체어리티가 형성되고 살아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셋으로 의미되는 새로운 신앙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신앙입니다.

 

이 점은 AC.328의 원리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다고 했고,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셋은 가인의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신앙을 보여 줍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도록 그 길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교리적 구별이 필요합니다. AC.335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표현을 곧바로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 나타나는 거듭남의 질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으며, 이어지는 AC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본래 성격을 사랑으로부터 오는 퍼셉션과 연결하여 계속 설명합니다. 따라서 셋의 새로운 신앙은 이미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고 양심이 그 자리를 대신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AC.335에서는 먼저 스베덴보리의 표현 그대로 붙드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신앙의 더 구체적인 성격과 그로부터 형성된 교회는 바로 다음 AC.336과 이어지는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AC.330가인의 AC.335은 매우 의미 있게 연결됩니다.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므로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35에서는 실제로 새로운 신앙이 주님께 주어지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 자체가 회복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신앙이라는 수단을 구원의 질서 안에서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표와 셋 사이에는 깊은 섭리적 연속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주님께서는 신앙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신앙을 새로운 질서 안에서 다시 사용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게 하십니다. 인간이 왜곡한 것을 그대로 승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다시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라멕은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특정 교리적 계열의 종말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한 계열에서 신앙이 소멸되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류 가운데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실 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AC.335의 셋은 바로 그 점을 보여 줍니다. 한 교회적 상태는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구원의 섭리는 종말에 이르지 않습니다.

 

4:25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씀도 이 속뜻을 매우 아름답게 담고 있습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했고, 가인은 그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른 를 주십니다. 뒤의 상세 해설에서 이 는 새로운 신앙과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 체어리티가 소멸된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체어리티가 다시 형성될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의 씨를 마련하십니다.

 

여기서 셋을 단순히 죽은 아벨 대신 태어난 좋은 아들로만 읽으면 창4의 속뜻을 놓치게 됩니다. 셋은 아벨과 똑같은 것을 직접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였고, 셋은 그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바로 다음 AC.336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가 에노스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창4:25-26새로운 신앙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인 에노스라는 연결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벨을 단순히 되살려 원상복구하시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되돌리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이미 어떤 상태를 지나온 뒤에는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질서 안에서 다시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이 말을 곧바로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의 거듭남 질서와 동일시하기보다, 우선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의 분리 이후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을 마련하셨다는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또한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역사적 시간순으로만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문자에서는 가인의 여러 후손과 라멕의 이야기가 진행된 뒤 마지막에 셋의 출생이 기록됩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서로 다른 교리적,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가인 계열의 모든 세대가 역사적으로 끝난 뒤에야 셋이 태어났다는 식의 연대표를 AC.335의 속뜻에서 끌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셋은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이후 창5에서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은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적 상태의 계승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 계열에서도 퍼셉션의 상태가 점차 변화하고 쇠퇴해 가며, 마침내 홍수에 이르는 큰 흐름이 전개됩니다. 그러므로 셋을 곧바로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으로 옮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35의 핵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가인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고, 셋은 주님께서 다시 신앙을 체어리티의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세우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을 높여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인간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줍니다.

 

그러므로 AC.335는 신앙을 낮추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참된 존엄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의 존엄은 체어리티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살아 있는 수단이 되는 데 있습니다. 가인과 셋은 모두 신앙을 의미하지만, 하나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가 심어지게 하는 신앙입니다. 그 차이가 바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심화

1. 가인 신앙이고,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 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 심화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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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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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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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들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영적인 폭력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이 없거나 체어리티가 부족한 상태보다 더 심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자신의 악과 거짓에 맞추어 왜곡하는 것은 다릅니다. 또한 체어리티를 충분히 행하지 못하는 것과 체어리티 자체를 자기 욕망에 방해되는 것으로 여기며 배척하는 것도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가인 계열의 처음을 보면 이 차이가 잘 드러납니다. 가인의 처음 문제는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마침내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AC.330에서는 그것이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 분리가 계속되면서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에서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가 생겨났으며,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이제 AC.334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이 가해졌다고 합니다. 단순한 상실에서 적극적인 훼손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잘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체어리티의 진리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잘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웃을 해치고, 더 나아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비틀어 이것이 오히려 주님의 뜻이다라고 한다면 상태가 달라집니다. 이제 진리는 악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거꾸로 사용됩니다.

 

신앙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어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진리를 알면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짓에 봉사하게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말씀의 진리를 자기 권력과 명예,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면 외적으로는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진리를 본래의 목적과 반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폭력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질서의 전도입니다. 본래 진리는 인간의 악을 드러내고 선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악이 오히려 진리를 붙잡아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진리가 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악이 진리를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같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로 인도하고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고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려 합니다. 그 질서가 계속 뒤집히면 처음에는 분리였던 것이 나중에는 체어리티의 소멸과 신앙의 왜곡, 그리고 마침내 선과 진리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진행될 수 있습니다.

 

4:23의 라멕의 말은 바로 이러한 종말의 상태를 표상적으로 묘사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C.334의 개요에서는 사람과 소년 각각의 세부 의미를 미리 모두 확정하기보다, 이 말씀이 교회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파괴하는 상태와 관련된다는 큰 그림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를 극도의 모독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모독은 단순히 거룩한 것을 모르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고, 거룩하지 않은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데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proprium을 섬기는 수단으로 뒤집히는 것입니다.

 

교회 차원에서도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가 약한 것과 체어리티를 신앙에 방해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다릅니다.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권력과 명예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왜곡하는 것도 다릅니다. 특히 사람의 악을 드러내고 돌이키게 해야 할 말씀이 오히려 그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면 진리의 본래 기능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화를 다른 교회나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 사람은 진리에 폭력을 가한다고 다른 사람의 내면을 쉽게 판정하기보다, 먼저 내 안에서 진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진리를 통하여 나 자신을 고치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를 이용하여 나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특히 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이것은 중요한 경고입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그 진리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보다 깊이 안다는 우월감을 강화한다면 진리의 목적이 조금씩 뒤집히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개인적 적용을 곧바로 AC.334가 말하는 극도의 모독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34는 라멕으로 표상되는 매우 깊은 종말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 원리를 통하여 자기 안에서 같은 방향의 작은 시작을 미리 살피고 피할 수 있습니다. 작은 자기 합리화 하나가 곧 라멕의 극단적 상태라는 뜻이 아니라, 질서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데 이 말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을 압축하면 분리에서 폭력으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리를 계속 허용하면서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진리가 왜곡되었으며, 마침내 신앙에 속한 것마저 사라지고 선과 진리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AC.334의 경고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진리를 자기 악과 자기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진리는 우리의 proprium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악에서 돌이켜 선으로 이끌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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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 심화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로운 교회가 이전 교회적 상태가 조금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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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4:23-24)

 

AC.334

교회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을 일어났으며, 이는 극도의 모독이었습니다. (23-24) That this church arose when everything of faith and charity was extinguished, and had violence done to it, which was in the highest degree sacrilegious, is described. (verses 2324)

 

해설

AC.334는 바로 앞 AC.333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말에서 그때가 어떤 때였는지를 밝혀 줍니다. AC.333에서는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그 교회의 천적인 것들은 야발, 영적인 것들은 유발, 자연적인 것들은 두발가인으로 의미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34는 이 새로운 교회가 이전 상태가 어느 정도 쇠퇴했을 때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져 극도의 모독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32와 직접 이어집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상태에는 처음에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기는 했어도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리된 상태가 계속 파생되고 변질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상태에 이릅니다. AC.334는 그 종말을 더욱 강한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에 폭력까지 가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폭력이 가해졌다는 말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가 부족해졌다는 뜻보다 훨씬 강합니다.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이미 알려진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AC.334가 말하는 폭력은 바로 후자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생명에 속한 것을 단순히 잃어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슬러 파괴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극도의 모독이라고 부릅니다. 모독은 거룩한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와는 다릅니다. 거룩한 것에 속한 것을 알고 받아들였으면서도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거나 거룩하지 않은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심각한 영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AC.334는 아직 모독의 전체 교리를 상세히 설명하는 번호는 아니지만, 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이 단순한 무지나 결핍보다 훨씬 깊은 상태였다는 점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4:23의 라멕의 말도 이 종말을 표상적으로 묘사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AC.334의 개요 단계에서는 각 표현의 세부 상응을 미리 모두 풀기보다, 이 말씀이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을 가하는 극도의 상태를 묘사한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각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이후 해당 절의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이어지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역시 가인에서 라멕으로 갈수록 상태가 얼마나 더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문맥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AC.334 자체는 칠십칠 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는 번호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라멕의 상태가 가인의 처음 상태보다 훨씬 더 깊은 종말에 이르렀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흐름을 보면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점진적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는 예배에 나타났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에서 여러 파생된 이단적 상태들이 생겨났고,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3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 폭력을 가하는 극도의 모독까지 묘사됩니다.

 

그런데 AC.334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종말 자체가 아니라 문장의 주어입니다. ‘ 교회는 일어났다.곧 바로 이러한 종말의 때에 AC.333에서 말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른 상태가 인간 편에서는 완전한 끝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섭리에서는 그것이 교회의 모든 가능성의 끝은 아닙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가 라멕의 타락이 개선되어 생긴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악이 충분히 발전하면 선으로 바뀐다는 구조가 아닙니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한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종말에 이른 때,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전 상태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구별하면서도 둘이 같은 시점에 말씀 안에서 나란히 묘사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후 AC 전체에서 반복해서 만나게 될 교회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라는 질서를 미리 보여 줍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선과 진리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뜻과 섭리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면서도 교회의 생명이 인류 가운데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섭리하십니다.

 

다만 이것을 이전 교회가 타락하면 주님께서 곧바로 다른 조직이나 교단을 세우신다는 식으로 외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핵심은 조직의 이름보다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 교회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다시 선과 진리가 결합될 수 있는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마련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AC.334는 그래서 매우 어두우면서 동시에 희망적인 글입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소멸시키고, 심지어 거룩한 것에 폭력을 가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종말이 주님의 섭리의 종말은 아닙니다. 바로 그 가장 어두운 때에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적 생명을 일으키실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AC.333AC.334를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서가 보입니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밝은 선언 뒤에는 이전 상태의 극심한 종말이 있었고, 그 종말 뒤에는 다시 주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에 끝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주님의 구원의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심화

1.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일어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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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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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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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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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있는가?

 

가인 계열을 따라 읽다 보면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모습이 겹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한 가지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은 가인 계열이  오늘날 개신교다라는 역사적 동일시가 아닙니다. AC.332가 오늘날 특정 교단을 직접 예언하거나 규정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가능한 것은 창4가 보여 주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될  나타나는 교회의 영적 패턴을 오늘의 교회에도 적용하여 성찰해 보는 것입니다.

 

가인 계열의 시작에는 신앙 자체를 버리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문제는 그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고, 마침내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어느 시대 어느 교회에서도 반복될 수 있는 위험입니다.

 

살아 있는 종교 운동은 처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말씀에 대한 열정, 삶의 변화에 대한 강한 요구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교리와 제도와 신조가 정리됩니다. 이것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보존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그 교리적 형식이 그것을 낳은 생명보다 앞서기 시작할 때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가?보다 어떤 명제를 정확하게 믿는가?가 거의 전부처럼 여겨지고, 신앙의 정확성이 체어리티와 삶의 선에서 분리되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원리가 다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개신교의 일부 모습이 창4와 겹쳐 보이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신조와 교리적 분화, 교단과 신학적 논쟁 자체가 곧 악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교리는 필요하고 진리의 분별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화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는 삶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된다면 우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다시 살펴야 합니다.

 

AC.332의 라멕은 여기에서 특히 무거운 경고를 줍니다. 출발점에서는 신앙을 높였지만 마지막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도 외적으로는 건물과 조직, 신학교와 교단, 설교와 성경공부, 선교와 교육이 매우 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내적인 교회의 생명이 건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외적 제도와 활동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라멕 상태라고 판정해서도 안 됩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생명을 위한 귀중한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선과 진리의 결합,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실제로 살아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아다와 씰라, 그리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의 존재가 의미심장합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내적으로 쇠퇴해도 그 안에서 신학, 예배, 음악, 교육, 선교, 연구, 사회적 봉사와 같은 유용한 외적 요소들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이 많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내적 상태를 자동으로 판단할 수도 없고, 반대로 내적 쇠퇴의 위험이 있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것을 악하다고 버릴 수도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종말을 단순한 외적 붕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외적 제도와 활동은 오래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내적인 생명, 곧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의 결합이 약해지고 마침내 사라지면 내적으로는 종말을 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를 오늘날 기독교에 적용할 때 가장 먼저 시선을 밖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 교단이 가인이다’, ‘ 교회가 라멕이다라고 판정하는 순간 창4가 주는 말씀의 칼날을 다른 사람에게만 돌리게 됩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안의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알고 AC를 읽는 사람 역시 이 위험에서 면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뜻과 상응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지식이 이웃을 사랑하고 악을 피하며 쓰임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바로 그 AC 지식이 체어리티보다 앞서는 가인적 기능을 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의 종류가 아무리 고상해도 선과 분리되면 위험합니다.

 

따라서 창4를 오늘의 개신교와 겹쳐 읽는다면 목적은 개신교가 끝났다는 선언을 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교회가 어떻게 교리적 형식을 만들고, 그 형식이 어떻게 생명에서 분리될 수 있으며, 분리가 계속되면 어떻게 처음의 신앙 자체까지 약화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희망도 있습니다. 한 특정 교회적 상태가 종말에 이른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 자체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AC 전체에서 주님께서는 교회의 종말 가운데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다음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인간의 형식은 쇠퇴하고 끝날 수 있지만 주님의 구원의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창4와 겹쳐 볼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누가 가인인가?가 아니라 우리 가운데 무엇이 가인처럼 되고 있는가?이며,  개신교가 끝나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도 무엇을 보존하시고 어떻게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를 다시 결합시키고 계시는가?일 것입니다.

 

이러한 독법이라면 창4는 과거의 태고교회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어느 시대의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는 영적 거울이 됩니다. 그러나 그 거울을 다른 사람에게 들이대기 전에 먼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교회의 상태를 살피는 데 사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도 유익한 적용입니다.

 

 

 

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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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AC.332 심화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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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1.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길의 마지막인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신앙을 높이려 했는데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역설은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선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 따라서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처음에는 여전히 진리의 지식과 형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 진리가 자기 목적을 잃게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 참된지를 알고 믿는 것은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무엇을 믿는가 자체만을 신앙의 본질로 만들면, 진리는 점차 삶과의 연결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교리도 남아 있고 성경에 관한 지식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매우 강하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삶의 선을 향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proprium은 그 진리를 자기 생각과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진리 때문에 자기 생각을 고치기보다, 자기 생각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해석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더 이상 자신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됩니다. 신앙의 언어는 남아 있지만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은 점점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중요하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계속되면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지키려 했던 신앙 자체마저 변질됩니다.

 

이것은 진리가 선에서 생명을 받는다는 스베덴보리의 기본 질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의 지식이 아무리 정확해도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 지식만으로는 살아 있는 신앙을 이루지 못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2를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말씀으로 사용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아는 것이 사는 것보다 앞설 수 있고, 교리적 확신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배운 진리가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과 자기 의를 지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이 경고는 더욱 중요합니다. AC에 관한 지식이 많아지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속뜻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신앙의 생명이 깊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더 분명하게 보고,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며,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AC.325부터 AC.332까지 이어 보면 그 흐름은 분명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이어 교리가 왜곡되고, 그 왜곡된 상태가 확장되어 여러 파생 교리를 낳고, 마지막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됩니다.

 

결국 라멕은 신앙을 버린 사람의 단순한 표상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높이고 신앙을 그 생명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AC.332의 가장 무거운 질문은 나는 신앙을 얼마나 강하게 붙들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심화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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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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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4:18)

 

AC.332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 역시 각각 이름들로 불렸으며, 마지막이 라멕(Lamech)인데,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8) The heresies that sprang from this one are also called by their names, in the last of which, called Lamech, there was nothing of faith remaining. (verse 18)

 

해설

AC.332는 앞의 AC.331에서 말한 이단의 확장이 계속되어 마침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31에서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된 이단, 곧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욱 확장된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18에는 에녹에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타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집안의 계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에서 여러 파생된 상태들이 생겨나며 점차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AC.332가 먼저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입니다. 처음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였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가 한 번 일어나고 계속 유지되면 그것이 한 형태로만 머물지 않고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4낳고, 낳고, 낳았다는 계보의 언어는 속뜻에서 단순한 혈통의 계승만이 아니라 교리와 교회의 상태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영적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특정 교단을 정죄하는 의미로 곧바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24부터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면서 생겨난 교리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는 말은 단순히 교파의 수가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의 영적 분리에서 여러 변형된 교리적 상태들이 파생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하나의 점진적인 변질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 자체를 없앤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려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아직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AC.330에서 가인이 를 받아 보존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했기 때문에 신앙 자체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소멸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고 해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승인된 것은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채 전개되면 그 상태 역시 점차 변질될 수 있습니다. AC.331의 에녹은 그 첫 확장이고, AC.332에서는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을 거쳐 라멕에 이릅니다. 각각의 이름은 앞의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AC.332에서 가장 무거운 말이 나옵니다. ‘ 마지막이 라멕인데,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출발점은 신앙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정작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 계열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설입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앞세워 신앙을 지키려 했지만, 신앙을 그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의 성질도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단지 어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진리가 되고, 신앙은 삶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되어 있다면 처음에는 여전히 신앙의 지식과 형식을 유지할 수 있어도, 그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을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32는 가인에서 파생되어 라멕에 이른 특정한 교리적 계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당시 인류 전체에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전체 흐름을 함께 보면 주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교회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과정이 계속 나타납니다.

 

이 점은 AC.330가인의 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가인 계열의 모든 후손이 반드시 끝까지 참된 신앙을 유지하도록 강제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과 결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그것을 계속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은 단순히 이단이 여러 이단으로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한 번 무너진 뒤 그 분리가 계속될 때 어떠한 영적 붕괴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고, 이어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이 계속 확대되자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높였던 신앙 자체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창4의 계보 전체를 단순한 절망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한 계열의 성공이나 실패에 매이지 않습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에서 신앙마저 잃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의 말씀에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어떤 것들이 보존되고, 또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준비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AC.332는 우리에게 매우 엄중하면서도 단순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신앙을 많이 말하고 진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 신앙이 살아 있다고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그 진리가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결합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자신만을 높이기 시작하면, 끝에는 체어리티뿐 아니라 신앙 자체까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이 라멕에 이른 가인 계열의 무거운 경고입니다.

 

심화

1. 분리된 신앙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 심화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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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심화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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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AC.332 심화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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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있는가?

 

AC.332 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AC.332 심화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수 있는가? 가인 계열을 따라 읽다 보면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모습이 겹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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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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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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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4:17)

 

AC.331

이단의 확장을 에녹(Enoch)이라 합니다. (17) The amplification of this heresy is calledEnoch.(verse 17)

 

해설

AC.331은 매우 짧은 한 문장이지만, 4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4:17에는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의 아들 에녹의 출생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에녹을 앞에서 가인이라 한 이단이 더 확장된 상태로 봅니다. 그래서 AC.331은 단순히 에녹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이후 어떻게 더 전개되는지를 보여 주는 첫 계보적 표지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이단은 앞의 AC.324-325에서 이미 설명된 것입니다. AC.324에서는 창4에서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리들, 곧 이단들을 다룬다고 했고, AC.325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AC.331 이단의 확장은 새로운 종류의 이단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더 진행되고 전개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점은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이러한 낳음과 계승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어지는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말씀은 속뜻에서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적 상태로부터 또 하나의 발전된 상태가 생겨났다는 식으로 읽게 됩니다.

 

다만 확장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이단 단체가 사람을 많이 모으고 조직을 넓혔다는 뜻으로 곧바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AC.331 자체는 그런 외적 조직 확대를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적 상태의 전개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그대로 머물지 않고 더 펼쳐지고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 에녹으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흐름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25에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AC.327에서는 그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AC.329에서 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AC.330에서는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지만,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 자체는 보존되었습니다. 이제 AC.331에서는 그 보존된 신앙이 당시의 분리된 상태 그대로 여러 형태로 더 전개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이 점에서 보존승인을 다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30에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옳다고 인정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장차 체어리티를 다시 심는 통로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존된 신앙은 곧바로 본래의 질서로 회복된 것이 아니라, 4의 이어지는 계보에서 여러 교리적 상태로 더 전개됩니다. 그 첫 번째가 에녹입니다.

 

따라서 AC.331에녹은 가인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 가인 안에 있던 원리가 한 단계 더 확장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것이 창4의 계보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이후 등장하는 이름들도 각각 앞선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들을 나타내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에녹이라는 이름 자체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5에도 에녹이 등장하지만 그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과 계열 안에서 설명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에녹 = 언제나 이것이라는 고정된 암호표를 적용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이름이라도 그것이 놓인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이름이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1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는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확장되고 전개되었으며, 그 첫 상태를 에녹이라 합니다. 4의 계보는 이제부터 바로 그 분리된 신앙이 이후 어떤 교리적 형태들로 발전해 가는지를 추적하게 합니다.

 

이 짧은 한 문장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때에도 하나의 경고를 줍니다. 어떤 잘못된 분리는 작은 생각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계속 유지되면 점차 설명과 논리를 얻고 하나의 확고한 체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교리가 얼마나 잘 정리되어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교리가 여전히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결합 안에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심화

1. 4 에녹 5 에녹 같은 의미인가?

 

AC.331 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331 심화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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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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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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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시 가인의 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면 가인은 부정적인 것의 연속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고, 그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 결과 교리는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으며,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켜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 놓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보호하셨을까요?

 

AC.330은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보호받은 것은 그가 잘했기 때문도 아니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주님께 인정받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에 속한 것이 장차 인간의 거듭남에 다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보존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가인의 를 단순히 살인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는 도덕적 교훈으로만 읽으면 AC.330이 말하는 더 깊은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물론 문자적 이야기에서는 보호라는 모습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보존입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이라 하더라도 신앙에 속한 것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에게 심어질 때 바로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을까요? 여기에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이후 인간의 상태 사이의 변화가 배경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적 상태가 상실되어 가면서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받아들여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되는 길이 필요하게 됩니다.

 

다만 AC.330 한 번호만으로 이 이후의 거듭남 질서 전체가 완성되어 설명되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직접 말하는 핵심은 체어리티가 이후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것이므로 신앙이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 이후 영적 인간의 차이는 뒤의 AC에서 더욱 상세하게 전개됩니다. AC.330은 그 큰 전환을 미리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다는 말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보호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장차 체어리티로 이끄는 기능 때문에 보호받았습니다. 신앙의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그 진리가 삶 안에서 선이 되고 체어리티로 살아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28 AC.330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보다 높이려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결국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께서는 가인마저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보존하여 장차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될 길을 남겨 두십니다.

 

여기서 창3 마지막 장면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잘못된 상태에서 취하여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이 보호되었습니다. AC.330의 가인의 표와 동일한 상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두 장면 모두 인간의 타락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구원의 길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질서를 무너뜨려도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 맞추어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특히 아벨은 죽었지만 가인은 보존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만 남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AC.330의 의미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가인이 보존된 이유는 아벨이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아벨에 해당하는 체어리티가 인간에게 심어질 길을 남겨 두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의 보존은 체어리티의 포기가 아니라 체어리티의 미래를 위한 보존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연구하며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려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신앙과 지식의 목적은 결국 삶입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는다면 신앙이 보존된 본래의 목적을 잃게 됩니다.

 

특히 아르카나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가인의 는 의미심장한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교리를 정확하게 배우는 일은 귀하지만, 그 지식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존하시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까닭은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삶이 변화되고 체어리티가 우리 안에 심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AC.325부터 AC.330까지를 하나로 읽으면 창4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이어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나며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의 를 두십니다.

 

인간은 하나였던 것을 갈라놓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것 가운데서도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에 담긴 섭리입니다. 신앙은 신앙 자체를 위해 보존된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 안에 심어지도록 하기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AC.330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인간의 타락보다 한 걸음 앞서 구원의 길을 남겨 두시는 주님의 섭리가 놓여 있습니다.

 

 

 

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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