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2026/10/11)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7, ‘사랑의 하나님’, 찬130, ‘찬란한 주의 영광은’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첫 번째, 1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469번에서 495번입니다. 먼저 창세기 본문입니다.

 

 

1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5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1-5)

 

 

제목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

 

 

이며, 다음은 ‘3분 요약’입니다. 이 요약은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겉 글자의 뜻을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천국의 비밀, 창, 출 속뜻 주석)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냈으며,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아벨이 죽임을 당하고 그 계열은 라멕에 이르러 황폐해졌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해 신앙을 보존하시고, 마침내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시작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황폐보다 주님의 섭리와 회복이 더 깊다는 것이 창4의 마지막 메시지였습니다.

 

오늘부터는 창5로 들어갑니다. 창5는 겉으로는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족보이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되어 갔는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첫 다섯 절에서는 그 출발점인 태고교회의 본래 모습을 먼저 살펴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천적으로 만드시며, 신앙과 사랑을 하나로 결합하셨을 때 비로소 그들을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셋에 이르면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셋 교회에서도 신앙은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지만, 태고교회에서처럼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창5의 ‘날과 해’는 교회의 여러 상태를, ‘아들들과 딸들’은 그 안에서 생겨나는 진리와 선을 나타냅니다. 마침내 ‘죽었더라’는 말씀은 태고교회의 고유한 생명이었던 ‘퍼셉션’, 곧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던 상태가 점차 사라져 갔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은 이것을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신앙이 사랑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고, 그 둘이 하나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 질서에 작은 변화가 시작되면서 교회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오늘은 창5의 첫 리딩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신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와, 그 질서 안에서 시작되는 변화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469-495 요약입니다. 그전에 오늘부터는 그동안 창 각 장 앞뒤로 소개하던 ‘영계 체험’ 및 각 장이나 단락의 ‘개요’는 생략, 바로 각 장 본문으로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이 첫 요약에서만큼은 그 내용 역시 요약 버전으로 조금 언급하는 것이 그 연결성 면에서 적절할 것 같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AC.449-468을 리딩하시면 되겠습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 자손의 계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겉으로 보면 아담에서 노아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의 이름과 나이, 그리고 죽음이 반복되는 족보입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이 장을 단순히 오래전 사람들의 혈통을 기록한 족보로만 읽지 않습니다. 그 속뜻에서는 태고교회로부터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그 내적 상태가 어떻게 변화되어 마침내 노아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로 읽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 본문을 해설하기에 앞서, AC.449-459에서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한 영계 경험을 먼저 소개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5장의 각 절을 직접 풀이하는 부분은 아니지만, 이어질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천국을 세상에서 경험하는 가장 좋은 것들이 끝없이 계속되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 부족한 것 없이 풍요롭게 사는 것, 찬란한 빛 가운데 있는 것, 아무런 수고 없이 평안히 쉬는 것, 혹은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는 것 등을 천국의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만난 영들은 그러한 생각만으로는 천국의 참된 기쁨을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먼저 어떤 ‘장소’가 아니라, 사람 안에 형성된 사랑과 체어리티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AC.450은 천국을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다룹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다른 사람보다 위에 서는 것이 행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욕망 자체가 천국의 질서와 반대됩니다. 천국의 기쁨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하고 그 행복을 위하여 섬기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AC.452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원하며 그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 섬김 역시 자신이 인정받거나 보상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에서 나와야 합니다. 여기서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가 드러납니다. 천국의 기쁨은 자기 자신을 위한 만족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하여 흘러가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AC.454는 천사들의 삶을 ‘쓰임’과 연결합니다. 천사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영원히 평안만 누리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새로 영계에 들어온 영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섬기며, 악한 영들의 영향을 억제하고, 사람들에게 선한 것을 불어넣으며, 이 세상을 떠난 영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일으키고, 준비된 영들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천사들의 행복은 이러한 쓰임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쓰임 안에서, 쓰임으로부터, 그리고 쓰임에 따라 행복을 누립니다.

 

찬란한 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천국의 행복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놀라운 외적인 광경이라도 그것만 계속된다면 결국 익숙해집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삶은 끝없이 입술로 찬양만 하는 삶이 아닙니다. 참된 찬양은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에서 나오는 결과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지 입술의 찬양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사랑이 실제로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천국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양성이 있습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수많은 천국 사회가 있고, 그 안에서도 각자의 사랑과 신앙에 따라 무수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모든 다양성은 하나를 이룹니다. 그 하나 됨의 근원은 ‘오직 주님’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서로 다른 존재들을 조화롭게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하나 됨은 모두가 똑같아지는 획일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주님 안에서 사랑으로 조화를 이루는 하나 됨입니다.

 

AC.459에서는 이러한 천국의 질서를 ‘천적’과 ‘영적’이라는 구분으로 마무리합니다. 천적인 존재는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신앙을 받으며, 영적인 존재는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습니다. 이 차이는 이제 창세기 5장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창세기 5장의 출발점인 태고교회는 바로 ‘천적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먼저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습니다. 진리를 먼저 배운 뒤 그것을 사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인지 알았습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AC.460-468은 창세기 5장 전체의 지도를 먼저 보여 줍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속뜻에서 태고교회로부터 홍수에 이르기까지 여러 교회가 차례로 이어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사람’, 곧 아담은 천적 교회였던 태고교회 자체를 나타내고, 셋은 그 뒤를 잇는 두 번째 교회, 에노스에서 므두셀라까지는 그 뒤를 이어 나타나는 여러 교회를 나타냅니다. 라멕은 아홉 번째 교회이며, 노아는 열 번째 교회로서 홍수 이후의 새로운 교회로 이어지는 출발점이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이름들을 속뜻에서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각각의 인물을 단순히 개인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의 상태’를 보는 것입니다. 각 교회는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특별히 그 차이는 ‘퍼셉션’의 차이에서 나타났습니다. 태고교회가 지녔던 퍼셉션이 후대의 교회들로 이어지면서 조금씩 달라지고 약해졌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에녹은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모든 것을 교리로 정리하여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퍼셉션이 점차 사라질 것을 대비하여, 태고교회에서 받은 계시와 퍼셉션을 교리의 형태로 모아 보존하는 일이 필요해졌습니다. 이것을 나타내는 교회가 에녹입니다. 당시에는 아직 그 교리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지만, 훗날을 위하여 보존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셨다’는 말씀도 이러한 보존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마침내 노아에 이르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은 거의 사라졌지만 모든 것이 완전히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5장의 마지막에서 노아로 이어지는 중요한 의미이며, 여기서 ‘리메인스’라는 주제가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가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다음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선과 진리를 남겨 두십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들을 주님께서 보존하시고, 훗날 거듭남을 위하여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창세기 5장 전체에는 두 흐름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쇠퇴하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쇠퇴 속에서도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는 흐름입니다. 인간의 상태만 보면 점점 내려가는 역사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섭리에서 보면 그 안에서도 끊임없이 보존과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실제 본문인 창세기 5장 1절에서 5절, AC.469-495로 들어갑니다. 첫 말씀은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입니다. AC.469는 여기서 ‘계보를 적은 책’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교회들을 열거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나오는 이름과 숫자를 단순한 족보의 정보로만 읽지 않고,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여러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게 됩니다.

 

이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창조하다’와 ‘만들다’는 비슷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AC.472에 따르면 ‘창조하다’는 사람이 새롭게 창조되어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 곧 거듭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만들다’는 그 사람이 더욱 완전해져 천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우리가 이미 살펴본 거듭남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천적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면서 먼저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시고, 더 나아가 천적인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영적인 사람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인 사람은 주님의 ‘모양’입니다. 형상에서 모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알고 믿는 진리가 사랑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사랑으로부터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아직 신앙이 먼저 보입니다. 진리를 배우고, 그것이 옳기 때문에 믿으며, 그 진리를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천적인 사람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참인지 알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신앙과 사랑은 서로 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라, 사랑 안에 신앙이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AC.473은 ‘하나님의 모양’을 천적인 사람과 연결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영적인 사람과 연결합니다. 형상은 모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 진리를 주시는 목적도 단지 많은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사람의 의지와 삶이 변화되고, 마침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안에서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어 2절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고 합니다. 여기서 ‘남자’와 ‘여자’ 역시 단순히 성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AC.475-476에 따르면 ‘남자’는 이해와 신앙을, ‘여자’는 의지와 사랑을 나타냅니다.

 

사람이 아직 영적인 상태에 있을 때에는 이해와 신앙이 앞서고 의지와 사랑이 뒤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어 천적인 상태에 이르면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의 결혼을 이룹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고 합니다. 신앙만 따로 있어도 온전한 사람이 아니고, 사랑을 말하면서 진리를 떠나 있어도 온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를 이룰 때 비로소 속뜻에서의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말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가장 높은 의미에서 오직 주님만이 참으로 ‘사람’이십니다. 교회가 ‘사람’이라 불릴 수 있는 것도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주님의 모양과 형상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참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자기 안에서 하나를 이룰 때 참된 의미에서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아담’이라는 이름 역시 이 속뜻에서는 한 남성 개인만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AC.478-479는 ‘아담’이 ‘사람’을 뜻하며, 여기서는 특별히 태고교회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표현 자체가 남자와 여자 모두를 함께 ‘사람’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본문의 중심이 한 개인의 전기가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하나를 이루었던 교회의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AC.480은 ‘그들이 창조되던 날’이라는 표현도 설명합니다. 여기서 ‘날’은 단순한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째 날 끝에서 사람은 ‘사람’이 되고, 이어지는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의 상태에서 천적인 사람이 됩니다. 결국 창세기 5장의 첫 두 절은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다루었던 거듭남의 전체 과정을 아주 압축된 형태로 다시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 3절에서 새로운 변화가 시작됩니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백삼십 년’은 단순히 세속적인 시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가 일어나기까지의 하나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가 ‘셋’입니다.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전혀 다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AC.484는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고 설명합니다. 신앙도 여전히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주 중요한 차이가 하나 나타납니다. ‘사랑이 그만큼 주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겉으로 보면 매우 작아 보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아직 분리된 것도 아니고, 사랑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가장 본래적인 질서에서는 사랑이 모든 것의 중심이었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셋 교회에서도 둘은 여전히 결합되어 있지만, 사랑의 중심성이 이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교회의 상태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창세기 4장에서 보았던 셋과도 구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름은 같지만 속뜻에서 언제나 같은 교회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485는 창세기 5장의 셋 교회가 창세기 4장 25절의 셋과는 다른 교회라고 분명히 설명합니다. 같은 이름이 사용되더라도 문맥과 계열에 따라 서로 다른 교리와 교회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4절에서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라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창세기 5장을 읽을 때 반복해서 만나게 될 중요한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날’, ‘해’, 그리고 ‘아들들과 딸들’입니다.

 

AC.482와 AC.486 이하에서는 이러한 ‘해’와 숫자들이 교회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시간은 상태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어떤 일이 몇 년 동안 지속되었는지를 생각하지만, 천사들은 말씀의 속뜻에서 그러한 시간보다 그 기간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와 그 변화를 지각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의 긴 수명과 숫자들은 단순한 연대 계산을 넘어, 각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문자적 의미의 역사성을 단순히 지워 버린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여기서 집중하는 것은 말씀의 속뜻입니다. 속뜻에서 천사들은 세상의 시간과 숫자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들이 나타내는 상태를 지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이 장을 읽으면서 ‘몇 년을 살았는가?’만이 아니라 ‘그 숫자를 통하여 어떤 교회의 상태가 표현되고 있는가?’를 보게 됩니다.

 

‘아들들과 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AC.489-491에서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나타냅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살아 있으면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태어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어 있으면 그 결합으로부터 새로운 진리와 선이 생겨납니다.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 진리가 삶에서 선한 행위와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 ‘아들들과 딸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들과 딸들의 상태는 그들을 낳는 교회의 상태와 관계됩니다.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그 교회가 받아들이고 산출하는 진리와 선도 달라집니다. 사랑이 중심에 있는 교회가 받아들이는 진리와, 자기 자신이나 세상을 중심에 둔 교회가 받아들이는 진리는 겉으로 같은 말처럼 보여도 그 내적인 생명은 다를 수 있습니다. 진리의 생명은 그것이 어떤 사랑에서 나오는가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같은 성경 말씀을 알고 같은 교리를 고백하더라도,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에서 받아들여지는지 아니면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 위하여 사용되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열매를 낳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진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어떤 선을 낳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5절은 ‘그는 죽었더라’는 말로 끝납니다. 창세기 5장에서는 앞으로 이 표현이 계속 반복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사람의 생애가 끝났다는 뜻이지만, AC.492 이하에서는 이것을 교회의 내적 상태와 관련하여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태고교회가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독특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퍼셉션’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머리가 좋아서 진리를 빨리 이해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495에 따르면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참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지각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과 그분을 향한 신앙의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내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어떤 문제를 놓고 먼저 교리를 찾아보고 논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지각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 깊이 하나 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랑으로부터 무엇이 참인지 지각하는 내적인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천적 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퍼셉션은 점차 쇠퇴합니다. AC.494는 그 배경에서 유전적인 악을 다룹니다. 인간의 실제적인 악이 계속되면서 그것이 후대에 영향을 미치고, 인간의 내적 상태는 점점 더 이전의 순수한 상태에서 멀어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담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악해졌다’는 식으로만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하는 악이 쌓이고 이어지면서 유전적인 악의 경향도 더욱 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494는 여기서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유전적인 악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거듭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심으로 그 악을 억제하고 약화시키십니다. 사람 자신의 힘으로 악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를 통하여 그를 새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앞서 창세기 5장 전체 개요에서 살펴본 ‘리메인스’와도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주에 읽는 모든 내용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천국의 참된 기쁨은 자기 자신을 위한 행복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체어리티가 이웃을 위한 쓰임이 되는 데 있음을 보았습니다. 천국의 모든 다양성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그리고 천적인 존재에게서는 바로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옵니다.

 

그러한 천적 질서를 지상에서 가장 온전히 나타냈던 교회가 태고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영적으로 창조하시고, 더 나아가 천적인 사람으로 완성해 가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하나를 이룹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함께 ‘사람’이라 부르셨습니다. 참된 사람은 진리만 가진 사람도 아니고 사랑만 말하는 사람도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결합으로부터 ‘아들들과 딸들’, 곧 진리와 선이 계속 태어납니다. 살아 있는 교회는 진리와 선을 낳습니다. 살아 있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는 것이 실제 사랑으로 이어지고, 그 사랑이 다시 삶의 선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창세기 5장 앞의 ‘천국의 기쁨은 쓰임에 있다’는 가르침과 오늘 본문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말씀이 서로 만납니다.

 

그러나 동시에 변화도 시작됩니다. 셋 교회에서도 신앙과 사랑은 아직 결합되어 있지만 사랑의 중심성은 태고교회와 조금 달라집니다. 교회가 계속 이어지면서 상태가 변하고, 마침내 태고교회가 지녔던 고유한 퍼셉션도 점차 쇠퇴합니다. ‘그는 죽었더라’는 짧은 한마디 안에 한 사람의 죽음뿐 아니라, 한 교회의 고유한 내적 생명이 더 이상 이전과 같지 않게 되는 깊은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창세기 5장의 이야기는 단순한 쇠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달라지고 퍼셉션이 사라져 가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필요한 것을 보존하십니다. 태고교회의 계시와 퍼셉션은 에녹을 통하여 교리로 보존되고, 마지막에는 노아라는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인간에게서 무엇인가가 사라질 때마다 주님의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붙드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음 단계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읽으며 우리는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을 묻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내가 알고 믿는 진리는 어떤 사랑에서 나오고 있는가?’, ‘내 신앙과 사랑은 서로 결합되어 있는가?’, ‘내가 받은 진리는 실제 삶에서 선을 낳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선은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주어져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의 근원은 여전히 같습니다.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우리의 거듭남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신앙과 사랑을 하나 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며, 우리 안에서 진리와 선의 열매가 태어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태가 약해지고 이전에 가졌던 것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남겨 두신 것을 보존하시며 다시 거듭남의 길을 여십니다.

 

이것이 오늘 창세기 5장 첫 다섯 절을 통해 보게 되는 큰 그림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자신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이끄십니다. 그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을 하나 되게 하시고, 그 결합으로부터 진리와 선이 삶 가운데 태어나게 하십니다. 교회의 상태가 변하고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쇠퇴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며 다음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5장의 족보는 단지 ‘누가 누구를 낳고 몇 년을 살다가 죽었다’는 반복되는 기록이 아닙니다. 그 이름과 날과 해,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죽었더라’는 말씀 속에는 사람과 교회의 내적 상태가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그리고 그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구원의 역사를 계속 이어 가시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다시 주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신앙이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아는 진리가 삶의 선으로 이어지게 하시며, 그 선이 이웃을 위한 쓰임이 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의 좋은 것들이 약해지고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에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다시 생명의 길을 준비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창세기 5장은 바로 그 주님의 오래 참고 보존하시며 이어 가시는 섭리 속에서 이제 첫걸음을 시작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469, 창5:1, '계보의 책, 영적으로 창조되어 천적으로 된 태고교회'(AC.469-474)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This is the book of the births of man. In the day that God created man, in the likeness of God made he him. (창5:1) AC.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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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0, 창5:1, ‘이름들은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한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0‘계보의 책’(book of the births)이 태고교회에 속했던 사람들을 열거한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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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1, 창5:1,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살았던 이유’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1그들이 이처럼 따로 떨어져 살면서 오직 집과 가족과 민족으로 구별되어 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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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2, 창5:1, ‘창조함과 만드심,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2‘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날’(day in which God created man)이 그가 영적으로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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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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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4, 창5:1,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간 태고교회’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4그러므로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태고교회의 출생 또는 번성(birth or propagation)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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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 창5:2,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룬 교회’(AC.475-480)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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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6, 창5:2, ‘남자와 여자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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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7, 창5:2, ‘오직 주님만이 참된 사람이시며, 교회는 그분의 형상과 모양’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7‘사람’(man)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자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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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8, 창5:2, ‘아담이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8그를 ‘아담’(Adam)이라 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아담’(A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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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9, 창5:2, ‘흙에서 취하여 거듭나고 참된 사람이 된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9말씀에서 ‘이름을 부르다’(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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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0, 창5:2, ‘여섯째 날의 끝과 안식일의 시작에 이른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일컬어졌다는 것은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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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1, '태고교회와 닮은 새 교회 셋(Seth)'(AC.481-485)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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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2,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는 교회의 상태를 의미’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2이 장에 나오는 ‘해’(years)와 ‘연수’(numbers of years)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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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3, ‘퍼셉션(perception)의 차이로 구별된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3뒤이어 나오는 ‘셋’(Seth), ‘에노스’(Enosh), ‘게난’(Kenan), ‘마할랄렐’(Mahalalel),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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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4, ‘사랑이 여전히 신앙과 결합되어 있었던 셋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4‘셋’(Seth)이라 하는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했다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모양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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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3, AC.485, ‘창4의 셋과 창5의 셋은 서로 다른 교회’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5:3) AC.485여기서 ‘셋’(Seth)이 앞에서 묘사된 교회(창4:25)와는 다른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AC.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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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6, '날들과 해들,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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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7, ‘날들과 해들에 기록된 교회의 상태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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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8, ‘천사들에게 시간은 상태와 그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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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89, ‘교회가 낳는 아들들과 딸들, 진리와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며, 특히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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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0, ‘딸들이 의미하는 사랑과 신앙의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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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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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 ‘사라진 퍼셉션을 의미하는 사람의 죽음’(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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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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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4, ‘퍼셉션의 죽음과 유전적 악의 누적’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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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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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아래는 오늘 범위 창5:1-5, AC.469-495 중 리딩 필독 3편 링크입니다. 혹시 몹시 바쁘신 분들은 꼭 이 3개 링크만이라도 읽으시기 바랍니다.

 

 

AC.473, 창5:1, ‘하나님의 형상에서 하나님의 모양으로’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5:1) AC.473‘하나님의 모양’(likeness of God)이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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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6, 창5:2, ‘남자와 여자에서 하나의 사람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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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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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이며, 다음은 다음 주 본문 소개입니다.

 

다음 주에는 창5:6-14, AC.496-509를 읽습니다.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에노스에서 게난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 이 이름들이 단순한 개인들이 아니라 태고교회 이후 차례로 이어진 서로 다른 교회들을 나타냄을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한 교회가 다음 교회로 이어지면서도 ‘본질적인 것들’은 점차 감소해 가는 모습과, 그럼에도 그 흐름을 끊지 않으시고 교회를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10-11(D1)

 

2672, 1, 창5.1, 2026-10-11(D1)-주일예배(창5,1-5, AC.469-495), ‘하나님의 형상에서 모양으로, 그리고 시작된 변화’.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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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18, 창5:6-14, AC.496-509), ‘흐려지는 퍼셉션, 변함없는 주님의 섭리’

※ 오늘(2026/10/18)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8, ‘성도들아 찬양하자’, 찬131, ‘다 나와 찬송부르세’입니다. 오늘은 창5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6절로 14절, AC 글 번호로는 496번에서 509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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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10/04, 창4:25-26, AC.434-442), ‘보존된 신앙에서 체어리티의 예배로’

※ 오늘(2026/10/04)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6, ‘은혜로신 하나님 우리 주 하나님’,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6,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일곱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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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5 심화

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읽으면 질문이 생깁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은 기도하거나 말씀을 읽는 가운데 ‘이것은 옳다’,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내적인 깨달음을 경험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유를 길게 따져 보지 않아도 무엇이 선하고 진실한지를 깊이 확신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태고교회의 ‘퍼셉션’(perception)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후대 영적 인간의 양심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계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그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지만, 영적 인간은 ‘배운 진리로부터 양심이 형성되어 선으로 인도’됩니다. AC.2831은 이 차이를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일종의 내적인 지각으로 즉시 알아차립니다. 그들이 주님과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적 인간에게는 그러한 퍼셉션이 없으며 그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양심은 부모와 스승에게서 배우고, 교리와 말씀을 통하여 받아들인 선과 진리로부터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단순히 ‘양심이 아주 강해진 상태’가 아닙니다. 둘은 주님께서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질서에 속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먼저 있었고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진리인지 퍼셉션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부에서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이것이 참이므로 믿겠다’고 하는 방식이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선 안에서 무엇이 진리인지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 살펴온 ‘천적 질서’, 곧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은 진리를 먼저 배웁니다. 말씀을 읽고, 가르침을 받고,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배운 뒤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행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인 진리가 사람의 속 사람에 깊이 새겨지고 삶으로 확증되면 그것이 양심을 형성합니다. AC.7935는 영적 교회 사람들의 양심이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이후 삶으로 확증한 교회의 진리들로부터 ‘태어나고 형성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진리가 내면에 자리 잡으면 사람은 그것에 따라 생각하고 원하고 행동하도록 내적으로 이끌립니다. 이것이 영적 인간에게 있는 양심입니다.

 

예를 들어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이 어떤 일을 마주했을 때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으로부터 그것이 선인지 아닌지를 퍼셉션했습니다. 반면 오늘날 영적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에서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이웃을 사랑하라는 진리에 비추어 이것은 옳은가’, ‘내가 알고 믿는 진리에 따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통하여 양심의 인도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배운 진리를 기억하여 판단하지만, 그 진리에 따라 오래 살아가면 그것이 내면에 깊이 자리 잡아 일일이 논리를 펼치지 않아도 ‘이것은 해서는 안 된다’는 내적인 요구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양심 역시 단순한 사회적 죄책감이나 심리적 불편함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AC.2831은 시민 생활에서의 정의와 공정함을 지각하는 것, 도덕생활에서 명예로운 것을 지각하는 것과 신앙의 선과 진리에 관한 영적 퍼셉션을 구별합니다. 또한 사람의 양심은 그가 받아들인 선과 진리에 의해 형성되므로, 그가 배운 것이 충분히 참되지 않다면 양심 역시 불완전하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 양심이 그렇게 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판단이 언제나 절대적으로 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양심도 말씀의 진리에 의해 계속 밝혀지고 바로잡혀야 합니다.

 

이 점은 퍼셉션과 개인적인 직감을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강하게 떠오르는 것’, ‘내적으로 어떤 음성을 듣는 것’, ‘설명하기 어렵지만 확신이 드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강한 느낌은 자기애, 욕망, 두려움, 선입견에서도 나올 수 있습니다. AC.2515는 퍼셉션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에서 나오는 생각, 양심 없이 욕망과 환상에서 나오는 생각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확신의 강도가 그 근원이 주님이라는 보증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퍼셉션과 양심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둘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주님이며, 둘 다 인간을 선과 진리로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차이는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질서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의 선이 의지 안에 자리 잡아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질서가 있었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 이해 안에 받아들여지고 그 진리에 따라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면서 양심이 생기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과 양심은 서로 무관한 두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서로 다른 상태의 인간을 이끄시는 서로 다른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알면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지는 것이 그렇게 중대한 ‘죽음’이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교회의 생명은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의지가 악으로 물들면서 그 질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던 통로가 변질되면, 자기 욕망을 주님의 뜻으로 오인하는 훨씬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타락한 인간에게 옛 퍼셉션을 그대로 유지시키시는 대신 진리를 외적으로 배우고 그것으로 새로운 내면을 형성하는 영적 질서, 곧 신앙과 양심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억지로 회복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도 주님으로부터 직접 무엇이 진리인지 느끼고 싶다’며 특별한 내적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진리를 겸손히 배우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삶으로 확증될수록 그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기억된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을 형성하며, 마침내 양심을 통하여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이끄는 살아 있는 진리가 됩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모든 신앙생활이 계속 외적인 규칙 확인에만 머문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높은 형태의 양심과 선으로부터의 지각도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성급하게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신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고 있는가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을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는 창세기 초반 전체를 관통하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 선에서 진리로 나아갔고, 영적 인간은 진리를 받아들여 신앙으로 삼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됩니다. 방식은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태고교회의 상태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과 신앙과 양심의 길을 따라 주님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리가 삶이 되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될 때, 주님은 우리를 영적 인간에서 더욱 온전한 사랑의 질서로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AC.492-495 심화 2)

 

 

 

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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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5, AC.492-496 심화 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창5:5, AC.492-496 심화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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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2, AC.475-480 심화

1, 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사람’이라 하는가?

 

창5:2에는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AC.475-48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태고교회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남자’는 이해(understanding)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따라서 신앙을 의미하고, ‘여자’는 의지(will)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따라서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말씀은 이 둘을 끝까지 ‘남자와 여자’라고 따로 부르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의 ‘사람’(homo)이라 합니다. 왜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었을 때 비로소 둘을 하나의 ‘사람’이라 하는 것일까요?

 

그 출발점은 AC.477의 매우 중요한 선언에 있습니다. ‘가장 높은 의미로는 오직 주님 자신만이 사람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참된 사람이 되는 기준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천적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 교회가 주님의 ‘모양’이기 때문이고, 영적 교회를 ‘사람’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와 사람이 ‘사람’이라 하는 것은 그들 안에 독립적으로 참된 인간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어야 합니까? 남자가 의미하는 신앙은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는 쪽과 관계되고, 여자가 의미하는 사랑은 그 진리를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쪽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의 이해와 의지는 하나가 아닙니다. 반대로 선을 원한다고 하면서도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밝혀 주는 진리와 분리되어 있다면 역시 온전한 질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은 이처럼 나뉘어 있던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를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하시는 과정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AC.479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으로 말미암아 가장 탁월한 의미로 ‘사람’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의 결혼은 두 요소를 반반씩 결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질서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고,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진리를 보고,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 진리인지를 지각하며, 그렇게 알게 된 진리를 다시 삶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이 표상하는 상태와 정확히 대조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사랑과 분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만든 데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본래 질서에서는 사랑이 신앙의 중심이었으며,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들을 지각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하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AC.337). 따라서 창5:2의 ‘남자와 여자’의 결혼은 창4에서 무너진 바로 그 질서의 본래 모습을 보여 줍니다.

 

AC.476에서 결혼이 이루어진 뒤 더 이상 ‘남자와 여자’라 하지 않고 ‘사람’이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움직일 때에는 아직 둘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둘을 결합하시면 하나의 삶이 됩니다. 사람이 믿는 것과 사랑하는 것, 아는 것과 원하는 것, 고백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말씀에서 ‘그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 한 것은 바로 이 하나 됨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480은 이 상태를 창1의 여섯째 날의 끝과 일곱째 날의 시작에 연결합니다. 여섯째 날에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며, 그때 사랑이 중심이 되는 천적 상태가 시작됩니다. AC.83도 여섯째 날이 완성되는 때를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어 사랑이 중심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의 안식은 단순히 모든 활동이 중단된 상태가 아니라, 사람 안의 질서가 주님을 중심으로 바로잡혀 더 이상 신앙과 사랑이 서로 갈라져 싸우지 않는 천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결국 ‘사람’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종의 명칭만이 아닙니다. 속뜻으로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를 결합하여 하나의 생명으로 이루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의미로는 오직 주님만이 사람이시고, 교회와 거듭난 사람은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 ‘사람’이 됩니다. 참된 인간성은 많이 아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받은 진리가 사랑이 되고 그 사랑에서 다시 신앙과 삶이 흘러나오는 데서 완성됩니다. 창5:2의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말씀은 바로 이러한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AC.475-480 심화 1)

 

 

 

AC.475-480 심화 2, ‘아담은 한 사람인가, 태고교회인가?’

AC.475-480 심화2, ‘아담은 한 사람인가, 태고교회인가?’ AC.478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인류 최초의 어떤 한 사람의 창조가 아니라 태고교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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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 창5:2,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룬 교회’(AC.475-480)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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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심화

1.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99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강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영적 인간 역시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사람인데, 그의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그가 잘못된 상태에 있다는 뜻일까요?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이 되기 전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뜻일까요?

 

먼저 AC.99 자체가 말하는 것을 정확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뒤집혀 있다’는 것은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 생명의 근원은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입니다. 문제는 그 생명이 흘러드는 실제 질서와 사람이 그것을 경험하고 퍼셉션하는 방식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과 싸웁니다. 이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는데도, 사람에게는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곧 ‘내가 배우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추론하여 이해하게 되었다’는 방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AC.99이 말하는 ‘뒤집힘’은 우선 이 질서와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이 관계가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 없으므로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다시 말해 천적 인간은 이성과 기억지식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생명과 지성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그 질서대로 퍼셉션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뒤집혀 있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단순히 ‘잘못된 사람’과 ‘올바른 사람’, 또는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으로 나누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AC.99가 강조하는 차이는 주님의 유입 자체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다만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앞서고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의 싸움이 아직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의 실제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싸움이 그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가 더 이상 거꾸로 보이지 않고 실제 그러한 것으로 퍼셉션됩니다.

 

따라서 ‘뒤집혀 있다’는 표현 때문에 영적 인간의 신앙과 이성, 기억지식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AC.99는 그것들 안에도 이미 주님께서 흘러들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다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질서 안에서 그 유입의 근원이 더욱 직접적으로 퍼셉션됩니다. 바로 이 회복된 생명의 질서, 곧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지성이 흘러드는 사람을 스베덴보리는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합니다. (AC.99 심화 1)

 

 

 

AC.99, 창2:8, ‘영적 인간에게 뒤집혀 있던 생명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됨’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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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5 심화

1. 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할 뿐이고,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가?

 

AC.9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강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그를 준비하지만,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만으로는 왜 아직 충분하지 않으며, 왜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일까요?

 

이 말을 신앙의 가치를 낮추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생명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사람을 ‘준비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준비는 없어도 되는 단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이해가 진리를 받아들이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 배우며, 주님과 말씀에 속한 것들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거듭남의 실제 과정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떤 진리를 이해하고 믿는 것과 그 진리가 그의 의지와 사랑의 생명이 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선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는 이해 안에 있지만 아직 사람의 삶 전체를 움직이는 사랑이 된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합니다.

 

앞의 AC.83에서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될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95의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은 신앙이 없어지고 사랑만 남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사람이 알고 믿는 진리가 그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과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AC.91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와도 연결됩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할 때 싸움이 그칩니다. 단지 이해로 ‘순종해야 한다’고 아는 것만으로는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바람 자체가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질서와 조화를 이루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 순종은 억지 복종이 아니라 삶이 됩니다. AC.85에서 주님의 뜻이 천적 인간의 ‘바람’이 된다고 했던 것도 이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사랑은 여기서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자신의 삶으로 삼는가와 관련됩니다. AC.95가 사랑을 의지와 나란히 놓아 ‘사랑 또는 의지의 생명’이라고 하는 것도 이 점을 보여 줍니다. 진리가 이해 안에서 받아들여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의지와 사랑 안에서 살아날 때, 그것은 실제 삶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생명은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은 사람을 ‘사람’이 되게 한다’는 말은 신앙과 사랑의 경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의 질서를 말합니다. 진리는 사람을 준비하고 인도하지만, 마침내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의 생명이 되어 사람이 그것을 원하고 살아갈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룹니다. AC.95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을 비로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명의 질서가 겉 사람에까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AC.95 심화 1)

 

 

 

AC.95, 창2:7, ‘신앙의 생명은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은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을 다룹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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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

‘하늘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를 이룰 때에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이, 다시 말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 are said to be “finished,”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 for then faith and love make a one. When they do this, love, and not faith, or in other words the celestial principle, and not the spiritual, begins to be the principal, and this is to be a celestial man.

 

해설

AC.83은 창2:1의 ‘하늘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만상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이 사람의 거듭남에서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었을 때 그것들이 ‘다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완성’은 단순히 여러 영적 요소가 모두 갖추어졌다는 뜻에 그치지 않고, 그동안 형성되어 온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질서를 이루게 된 상태와 관계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신앙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없어지거나 무가치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달라지는 것은 신앙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둘 사이의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주된 위치에 있었다면, 천적 인간으로 나아가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은 그 사랑과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은 AC.81의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 영적 인간은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에서 선과 진리를 인정하고 행동하지만,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랑에서 행동한다고 했습니다. AC.83의 ‘신앙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는 말은 바로 그 차이를 창2:1의 ‘다 이루어졌다’는 표현과 연결하여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을 이해할 때 ‘신앙에서 사랑으로 갈아탄 사람’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 됨으로써 신앙도 사랑에서 나오고 사랑과 하나를 이루는 사람입니다.

 

또한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는 표현에서 ‘되기 시작한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AC.83은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을 아무 관계 없는 두 상태로 끊지 않습니다. 여섯째 날에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 곧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고, 이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1의 여섯째 날은 영적 인간의 완성인 동시에 창2에서 본격적으로 다룰 천적 상태로 이어지는 경계에 놓여 있습니다.

 

AC.83은 이처럼 ‘다 이루어졌다’는 말씀을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읽게 합니다. 그리고 그 결합 안에서 무엇이 주된 것인가를 분명히 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으면서도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질서, 바로 이것이 AC.83이 보여 주는 천적 인간으로의 변화입니다. (AC.83 해설)

 

심화

1. the ‘sixth day’와 ‘the sixth day’는 다른 뜻인가?

 

AC.83 심화 1, the ‘sixth day’와 ‘the sixth day’는 다른 뜻인가?

AC.83 심화1. the ‘sixth day’와 ‘the sixth day’는 다른 뜻인가? AC 영어 원문을 자세히 읽다 보면 작은 따옴표 문제가 눈에 들어옵니다. AC.83의 Potts 영어는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라고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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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4, 창2:2-3, ‘일곱째 날, 모든 싸움이 그치고 주님께서 쉬신다’ (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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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창2:1,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 (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이 말씀들은 사람이 이제 ‘여섯째 날’(sixth day)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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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하고, 이어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고 합니다. 또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는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2는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래의 예들은 ‘스베덴보리가 AC.12에서 바로 이런 경우를 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AC.12가 말하는 상태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해해 보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합시다. 그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곁의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 실제로 도와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단지 순간적인 기분이나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면 AC.12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가 말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선한 행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정직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면 훨씬 유리한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거짓을 피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면, 단지 정직이라는 원칙을 알고 있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자기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을 실제 삶에서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을 했으니 이 사람은 AC.12의 여섯 번째 상태에 있다’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는 외적인 행동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를 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의 거듭남 단계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한다’는 표현이 실제 삶과 무관한 추상적인 말이 아님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이것 역시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기능처럼 기계적으로 나누기보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고 행하는 것이 함께 가는 상태로 이해하면 조금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 사랑한다고 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무엇이 아이에게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고, 필요하면 가르치고 바로잡으면서도 아이의 선을 진심으로 원합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옳고 유익한가를 살피는 것과 실제로 아이의 선을 원하는 것이 함께 필요합니다. 이것 역시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의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무조건 감싸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옳고 그름만 따지면서 상대방의 형편을 전혀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진정한 유익을 바란다면, 우리는 ‘진리와 선이 함께한다’는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2의 또 하나 어려운 표현은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착한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정도로 축소해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는 영적 인간의 생명이 무엇을 먹고 사는가를 설명하면서, 자연적 생명은 음식과 물로 유지되고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는 것을 점점 소중히 여기고, 알고 있는 선을 실제로 행하는 삶에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에는 자기 이익과 인정만이 중요했는데,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 소중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2가 직접 제시한 구체적인 사례라기보다 ‘영적 생명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유지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적용입니다.

 

여기서 ‘기쁨’도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마다 반드시 감정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으며, 용서하거나 참고 섬기는 일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기쁨을 단순한 감정적 즐거움과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점차 진리와 선에 속한 것들을 향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AC.12에서 특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상태가 앞선 상태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앞선 상태들을 거치면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어 가며, 이제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위의 생활 사례들도 ‘이 행동 하나를 하면 여섯 번째 상태’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와 실제로 사랑하고 행하는 선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처음에는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참된 것을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는 것이 점점 함께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말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 삶 안에서 함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2의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표현도 조금 덜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신앙은 머릿속에만 있고 사랑은 막연한 감정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참된 것을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서 선한 것을 원하며 실제로 행하는 삶 속에서 둘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모든 예보다 중요한 것은 AC.12 자체가 말하는 방향입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을 가장 간단히 풀어 말한다면, ‘내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이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점점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AC.12 심화 1)

 

 

 

AC.12, 창1 개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움직이는 영적 인간의 여섯 번째 상태’

AC.12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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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그는 ‘형상’(image)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이 그의 ‘음식’(food)이 됩니다. 또한 그의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로부터 싸움이 일어나며,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고, 그 후 그는 천적 인간이 됩니다. The sixth state is when, from faith, and thence from love, he speaks what is true, and does what is good: the things which he then brings forth are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at once and together from both faith and love,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His spiritu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such things as belong to the knowledges of faith, and to works of charity, which are called his “food”; and his natural life is delighted and sustained by those which belong to the body and the senses; whence a combat arises, until love gains the dominion, and he becomes a celestial man.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30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24-3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는데, 이는 창1의 여섯째 날, 곧 짐승과 사람의 창조에 해당하는 단계입니다. 앞선 다섯 번째 상태에서 신앙은 이미 살아 있는 생명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사람은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고해지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만이 아니라 사랑이 함께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은 신앙으로 말할 뿐 아니라,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순서를 제시합니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단계의 사람이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질서 가운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앞선 상태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신앙이 이제 사랑과 함께 작용하면서, 사람이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생물’(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한다는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여기서 ‘짐승’은 일상적인 말에서처럼 거칠고 악한 본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등장하는 생물들과 짐승들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들을 표상합니다. 다만 각각의 생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뒤의 해당 절에서 자세히 다루어지므로, 여기서는 여섯 번째 상태에서 더욱 충만한 생명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큰 흐름을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동시에 그를 ‘형상’(image)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6-27의 ‘하나님의 형상’과 직접 연결됩니다. 여기서는 형상의 모든 의미를 미리 풀기보다,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함께 행동하기 시작한 거듭난 사람을 스베덴보리가 ‘영적 인간’이며 ‘형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형상’의 구체적인 속뜻은 이어지는 창조 본문의 해설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단계에서 사람의 삶은 두 층위로 유지됩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되는데, 이것들을 그의 ‘음식’(food)이라고 합니다. 몸이 음식을 통해 유지되듯이 영적 생명도 그것을 기르고 유지하는 양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지식만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행위들이 함께 언급된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알고 받아들이는 것과 그 진리를 선한 삶으로 살아 내는 것이 함께 영적 생명을 이루어 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적 생명은 몸과 감각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됩니다. 이것은 몸이나 감각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몸을 가지고 살아가며 감각을 통하여 세상을 접합니다. 문제는 영적 생명과 자연적 생명 가운데 무엇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는가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싸움’이 일어납니다.

 

AC.12는 이 싸움을 길게 설명하지 않고 그 방향과 결과를 짧게 제시합니다. 싸움은 ‘사랑이 지배권을 얻을 때까지’ 계속되며, 그 후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됩니다. 여기서 사랑은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뜻합니다.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던 사람이 마침내 사랑이 지배하는 상태에 이를 때, 스베덴보리는 그를 천적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단순히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의 사람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12에서는 아직 이 둘의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진행 가운데 처음에는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가고, 마침내 사랑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는 질서입니다.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더 깊은 차이는 이후 AC에서 훨씬 정교하게 밝혀집니다.

 

결국 AC.12는 창조의 여섯째 날에 대응하는 거듭남의 여섯 번째 상태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사람은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함께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영적 인간’이며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그의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로 양육되고, 자연적 생명과의 싸움을 지나 마침내 사랑이 지배하는 질서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AC.12는 여섯 번째 상태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너머의 천적 상태를 바라보게 합니다. (AC.12 해설)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 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 심화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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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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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 창1 개요,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 선 안에서 확고해지는 다섯 번째 상태’

AC.11다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말하고,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생명 있는 것들이며,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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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80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사람’이라 일컬어졌다는 것은 1장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창1:26-27). 곧 여섯째 날의 끝인데, 이는 안식일의 저녁, 다시 말해 안식일 또는 일곱째 날이 시작되는 때에 해당합니다. 앞에서 보여 준 것처럼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은 천적 인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That they were called “man” in the day that they were created, appears also from the first chapter (Gen.1:26–27), that is, at the end of the sixth day, which answers to the evening of the sabbath, or when the sabbath or seventh day began; for the seventh day, or sabbath, is the celestial man, as was shown above.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6, 27)

 

해설

AC.480은 창5:2의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라는 표현을 창1:26-27의 여섯째 날과 연결합니다. 창1에서 ‘사람’이 등장하는 때는 여섯째 날의 마지막이며, 곧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눈앞에 둔 때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날’은 단순히 시간의 하루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하나의 영적 상태가 완성되고 다음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섯째 날은 거듭남의 싸움이 거의 완성되는 단계입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악과 거짓에 맞서고, 신앙을 통하여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아직 여섯째 날인 동안에는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이 상태가 완성되고 일곱째 날이 시작되면서 사람은 천적 인간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AC.480이 ‘사람’이라는 이름을 여섯째 날의 끝과 일곱째 날의 시작에 연결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날의 끝을 ‘안식일의 저녁’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이 완전히 끊어진 두 상태가 아니라, 앞의 상태가 완성되면서 다음 상태가 열리는 연속적인 거듭남의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전혀 다른 존재인 천적 인간이 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영적 인간 안에 이루어 오신 일을 완성하시면서 그를 천적 상태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72-479에서 이어져 온 설명을 다시 하나로 묶어 줍니다. ‘창조하다’는 영적 인간과 관련되고, ‘만들다’는 천적 인간과 관련되며,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 인간을, ‘하나님의 모양’은 천적 인간을 의미합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로 나타나는 신앙과 사랑이 결혼을 이루었을 때 그 둘을 함께 ‘사람’이라 합니다. 이제 AC.480은 이 모든 과정이 창1의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 넘어가는 구조 안에 이미 들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안식일’의 의미도 중요합니다. 안식은 단순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듭남의 앞선 단계에서는 사람이 마치 자신의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느끼지만,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질서 안에 더욱 온전히 들어가게 됩니다.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서로 맞서지 않고 하나를 이루며, 선을 행하는 것이 억지스러운 의무가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 됩니다. 이러한 천적 상태가 바로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이 의미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는 창5:2의 말씀은 창1의 창조 이야기를 다시 불러옵니다. 창1의 여섯 날은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이며, 그 과정은 일곱째 날의 천적 상태를 향합니다. 창5는 그 전체 과정을 길게 반복하지 않고, ‘창조되던 날’과 ‘사람’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 완성된 태고교회의 상태를 다시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결국 AC.480은 창1과 창5가 서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창1에서 여섯 날에 걸쳐 묘사된 거듭남은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에 이르고, 창5는 바로 그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교회로부터 후대의 여러 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다루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인간의 명칭이 아니라, 주님께서 거듭남의 전 과정을 통하여 신앙과 사랑을 결합하시고 마침내 안식의 질서 안으로 이끄신 교회의 상태를 담고 있습니다. (AC.480 해설)

 

 

 

AC.481, 창5:3, '태고교회와 닮은 새 교회 셋' (AC.481-485)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And man lived a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begat into his likeness, after his image, and called his name Seth. (창5:3) AC.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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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9, 창5:2, ‘흙에서 취하여 거듭나고 참된 사람이 된 태고교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9말씀에서 ‘이름을 부르다’(calling a name) 또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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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6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신앙과 사랑 사이의 결혼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밝히고 입증하였습니다. 거기서 남자, 곧 남성(man [vir])은 이해(understanding)와 거기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고, 여자, 곧 여성은 의지(will) 또는 의지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며, 따라서 사랑과 관계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를 ‘하와’(Eve)라 하였는데, 이 이름은 생명을 의미하며, 생명은 오직 사랑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보여 준 것처럼 여자는 또한 교회를 의미하고, 남자는 교회에 속한 사람(man [vir] of the church)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루는 것은 교회가 영적이었을 때의 상태와 그 후 천적으로 만들어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창1:26-27에서와 같이 ‘여자’보다 ‘남자’가 먼저 언급됩니다. 또한 ‘창조하다’(create)라는 표현은 영적 인간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그 후 결혼이 이루어졌을 때, 곧 교회가 천적으로 만들어졌을 때에는 ‘남자와 여자’라고 하지 않고 ‘사람’(man [homo])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그들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둘 모두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곧이어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고 하며, 이것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That by “male and female” is signified the marriage between faith and love was declared and proved above, where it was shown that the male or man [vir] signifies the understanding and whatever belongs to it, consequently everything of faith; and that the female or woman signifies the will, or the things appertaining to the will, consequently whatever has relation to love; wherefore she was called Eve, a name signifying life, which is of love alone. By the female therefore is also signified the church, as has been previously shown; and by the male, a man [vir] of the church. The subject here is the state of the church when it was spiritual, and which was afterwards made celestial, wherefore “male” is mentioned before “female,” as also in chapter 1:26–27. The expression to “create” also has reference to the spiritual man; but afterwards when the marriage has been effected, that is, when the church has been made celestial, it is not said “male and female,” but “man” [homo], who, by reason of their marriage, signifies both; wherefore it presently follows, “and he called their name man,” by which is signified the church.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6, 27)

 

해설

AC.476은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의미하는지를 이해(understanding)와 의지(will)의 관계를 통해 설명합니다. ‘남자’(vir)는 이해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므로 신앙에 속한 것을 표상하고, ‘여자’는 의지와 거기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므로 사랑에 속한 것을 표상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믿는 행위가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쪽과 관계되고, 사랑은 그 진리를 원하고 기뻐하며 살아내는 의지의 쪽과 관계됩니다.

 

여자를 ‘하와’라 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와’는 생명을 의미하고, 스베덴보리는 생명이 본질적으로 사랑에 속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따라 살고, 그 사랑이 그의 의지와 삶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의지와 사랑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서로 연결됩니다. 교회의 생명 역시 단순히 진리를 알고 있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의지 안에서 살아 있게 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먼저 언급된 이유입니다. AC.476은 여기서 다루는 상태가 교회가 처음에는 ‘영적’이었다가 이후 ‘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영적 상태에서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사랑과 선으로 나아가므로, 이해와 신앙을 의미하는 ‘남자’가 먼저 나옵니다. 이것은 창1:26-27에서도 동일합니다. 또한 AC.472에서 살펴본 것처럼 ‘창조하다’라는 표현 역시 영적 인간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신앙과 사랑의 결혼이 이루어져 교회가 천적 상태에 이르면 표현이 달라집니다. 더 이상 ‘남자와 여자’라고 각각 말하지 않고 둘을 하나로 묶어 ‘사람’(homo)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남자나 여자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속뜻으로는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더 이상 서로 분리된 두 원리로 머물지 않고 하나의 생명을 이루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그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다’고 합니다. 둘이 결혼을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 점은 AC.472-473의 ‘형상’과 ‘모양’의 구별과도 정확히 이어집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신앙을 통하여 선으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천적 인간은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가 결혼을 이루어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모양’입니다. 따라서 창5:1-2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영적 상태에서 출발하여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루는 천적 상태에 이른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결국 ‘남자와 여자’에서 ‘사람’으로 표현이 바뀌는 것은 태고교회의 거듭남이 어디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선을 사랑하는 것, 신앙과 사랑이 따로 움직이는 동안에는 아직 결혼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둘을 결합하시면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나오고, 이해는 의지와 하나가 되어 움직이며, 사람의 내적 삶 전체가 하나의 질서를 이루게 됩니다. 바로 이 상태를 말씀은 ‘사람’(homo)이라 하고, AC.476은 이 ‘사람’이 곧 교회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AC.476 해설)

 

 

 

AC.477, 창5:2, ‘오직 주님만이 참된 사람이시며, 교회는 그분의 형상과 모양’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창5:2) AC.477‘사람’(man)이 태고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앞에서 자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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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5, 창5:2, ‘신앙과 사랑의 결혼을 이룬 교회’(AC.475-480)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and blessed them, and called their name man, in the day whe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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