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1 심화

1. ‘형상’과 ‘모양’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

 

AC.51의 첫 문장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영적 인간은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 곧 닮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형상과 모양이 도대체 어떻게 다른 것인가? 형상은 조금 닮은 것이고 모양은 완전히 닮은 것이라는 뜻인가?’

 

먼저 AC.51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은 ‘형상’과 ‘모양’이 같지 않다고 분명히 구별합니다.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하고, 창세기 1장은 영적 인간을, 창세기 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두 말이 단순히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형상은 70퍼센트 닮은 상태이고 모양은 100퍼센트 닮은 상태’처럼 정도의 차이로만 이해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는 단순한 성숙도의 숫자 차이보다 더 깊습니다. AC가 앞으로 진행되면서 그는 두 인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 신앙과 사랑의 관계, 양심과 퍼셉션 등의 차이를 점차 설명합니다.

 

AC.51에서 가장 먼저 주어진 단서는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즉 형상에는 분명 원형을 따르고 닮는 관계가 있지만, 그것이 곧 모양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에 대응시킵니다.

 

이것을 앞의 AC.48과 연결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여섯째 상태에 이른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형상’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나 단순히 진리를 머리로만 아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영적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형상은 아직 미완성이고 모양만 완성이다’라고 단순화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영적 인간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참된 거듭남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형상’이라는 말 자체를 결함이나 실패의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아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닮음’은 ‘동일함’이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리 높은 천적 상태에 있어도 생명의 근원이 되지 않습니다. AC.39 이후 반복해서 본 것처럼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모양’ 역시 피조물이 창조주와 본질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AC.51보다 뒤의 설명들이 더 많은 빛을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구별하며,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선으로 인도되고, 천적 인간은 사랑과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설명할 때 ‘퍼셉션’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영적 인간은 머리로 살고 천적 인간은 가슴으로 산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48에서 이미 영적 인간도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행동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없고 천적 인간에게만 사랑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차이는 사랑의 유무보다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와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결합되는가에 더 깊이 관계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 인간이 계속 거듭나면 결국 천적 인간이 되는가?’ 현재 AC.51만으로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영적 인간과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을 구별하지만, 모든 개인의 거듭남을 ‘영적 단계 졸업 후 천적 단계 진입’이라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이후 저술에서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가 서로 구별되어 지속적으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영적’과 ‘천적’을 단순한 초급과 고급의 관계로만 생각하면 그의 전체 체계를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한편 창세기 1장과 2장의 연속된 설명 안에서는 분명 더 내적인 상태가 이어지는 흐름도 있습니다. 이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하므로 AC.51 한 문장만으로 ‘모든 영적 인간은 결국 천적 인간이 된다’거나 그 반대를 확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왜 AC.51은 영적 인간을 ‘빛의 아들’과 ‘친구’,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까요? 이 호칭들은 두 상태의 차이를 보여 주는 성경적 증거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곧바로 ‘친구보다 자녀가 한 단계 높은 신분’이라는 인간관계의 서열로 바꾸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1의 직접적인 목적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 서로 다른 호칭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빛의 아들’이라는 표현에는 영적 인간과 진리의 빛 사이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반면 ‘하나님의 자녀’에 관해 인용된 요1:13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성질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지만, AC.51은 이 한 글에서 그 차이를 모두 체계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설명을 기다리면서 이 구별을 열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형상’과 ‘모양’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둘 다 주님을 닮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지만 동일한 상태는 아닙니다. ‘형상’은 영적 인간에게, ‘모양’은 천적 인간에게 해당하며,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전자와 구별되는 더 내적인 성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단순히 ‘미완성 대 완성’, ‘낮은 단계 대 높은 단계’, ‘친구 대 아들’이라는 하나의 서열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AC를 계속 읽으면서 이 차이는 점점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그리고 이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의지와 이해의 질서를 살펴보면 AC.51의 짧은 구별이 왜 중요한지 더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렇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며,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이다. 형상은 모양 자체는 아니지만 모양을 따른다. 둘은 모두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거듭난 인간의 상태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둘의 내적 성질을 분명히 구별한다.’ 이것이 AC.51이 앞으로의 긴 설명을 위해 놓아 두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AC.51, 창1:26, ‘형상’과 ‘모양’ :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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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형상’(image)에 대해 말하자면, 형상은 닮음(likeness) 그 자체가 아니라 닮음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라고 말합니다. 영적 인간은 ‘형상’(image)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likeness), 곧 닮음(similitude)입니다. 이 장에서는 영적 인간을, 다음 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룹니다. ‘형상’(image)인 영적 인간을 주님은 ‘빛의 아들’(son of l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As regards the “image,” an image is not a likeness, but is according to the likeness; it is therefore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The spiritual man is an “image,” and the celestial man a “likeness,” or similitude. In this chapter the spiritual man i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the celestial. The spiritual man, who is an “image,” is called by the Lord a “son of light,” as in John: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요12:35, 36) 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 While ye have the light, believe in the light, that ye may be sons of light (John 12:35–36).

 

또한 ‘친구’(friend)라고도 하십니다. He is called also a “friend”: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15:14, 15) 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 (John 15:14–15).

 

그러나 ‘모양’(likeness), 곧 닮음인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son of God)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But the celestial man, who is a “likeness,” is called a “son of God,” in John: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주4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1:12, 13)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who were born not of bloods,4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 (John 1:12–13).

 

주4, 헬라어는 ἐξ αἱμάτων입니다. 아래 AC.374 [3]번 단락을 보세요. [편집자] The Greek is ex haimat¯on. See below, at n. 374[3]. [Reviser]

 

해설

AC.51은 창1:26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는 표현에서 ‘형상’과 ‘모양’을 구별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두 말을 거의 같은 뜻의 반복처럼 읽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첫 문장에서부터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고, 곧바로 영적 인간은 ‘형상’, 천적 인간은 ‘모양’, 곧 닮음이라고 구별합니다.

 

처음 읽으면 ‘형상이 모양 자체는 아니지만 모양을 따른다’는 말이 상당히 난해합니다. 여기서 너무 빨리 ‘형상은 닮아 가는 과정이고 모양은 완성된 상태’라는 식으로 공식을 만들어 버리기보다, 우선 AC.51이 직접 제시하는 구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입니다. 형상은 모양과 동일하지 않지만 모양을 따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주제 차이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 곧 창세기 1장에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고, ‘다음 장’, 곧 창세기 2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창1과 창2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안내입니다. 창세기 2장을 단순히 창세기 1장의 자연계 창조 이야기를 다른 순서로 다시 기록한 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AC의 속뜻에서는 서로 다른 인간 상태를 다루는 것으로 읽는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의 사람이 ‘영적 인간’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1의 ‘영적 인간은 형상이다’라는 말은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따라 설명해 온 거듭남이 영적 인간, 곧 ‘형상’에 이르는 데까지 온 것입니다. 반면 ‘모양’인 천적 인간은 다음 장에서 다루겠다고 미리 알려 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영적 인간은 미완성 단계이고 천적 인간은 완성 단계다’, 또는 ‘모든 영적 인간은 계속 거듭나면 반드시 천적 인간으로 승급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1은 그런 체계를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으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므로, 지금은 그가 제시하는 ‘형상’과 ‘모양’의 구별을 먼저 받아들이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어서 AC.51은 매우 흥미롭게도 이 두 인간을 복음서의 서로 다른 호칭과 연결합니다. 먼저 ‘형상’인 영적 인간은 주님께서 ‘빛의 아들’이라고 부르신다고 하면서 요12:35-36을 인용합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이 인용의 직접적인 목적은 요한복음의 ‘빛’과 ‘어둠’에 관한 모든 상응을 자세히 해설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이 ‘빛의 아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앞의 창조 과정과 연결하면 이 표현이 낯설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의 거듭남에서 빛과 광명체는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AC.51은 여기서 ‘빛의 아들’이라는 말을 근거로 영적 인간의 모든 심리적 특성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빛의 아들은 아직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분별해야 하는 단계다’, ‘빛이 주어질 때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사라진다’는 등의 구체적인 영적 법칙을 이 인용에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형상인 영적 인간을 주님께서 빛의 아들이라 부르신다’는 연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을 또한 ‘친구’라고 한다면서 요15:14-15을 인용합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 말씀 역시 AC.51에서는 영적 인간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는 근거로 사용됩니다. 물론 본문 자체에서 주님은 친구와 종을 구별하시고, 친구에게 아버지께 들은 것을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AC.51은 여기서 ‘종 = 외적 순종, 친구 = 내적 일치’라는 완성된 상응 체계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친구이기 때문에 아직 아들은 아니며,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만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은 상태’라고 단계화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AC.51은 영적 인간을 ‘빛의 아들’과 ‘친구’라는 두 표현으로 가리키고, 이어 천적 인간을 다른 표현과 연결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호칭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이 짧은 글에서 계급이나 단계처럼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면 ‘모양’, 곧 닮음인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서 요1:12-13을 인용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AC.51에서 이 구절을 가져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천적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현재 해설처럼 ‘자녀란 아버지의 뜻이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존재이고, 사랑의 근원이 완전히 바뀐 상태’라고 자세한 거듭남 메커니즘을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요1:13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표현이 천적 인간과 연결된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은 중요합니다. 그 상태의 내적 성질은 다음 창세기 2장과 이후 AC에서 훨씬 더 자세히 펼쳐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구별하는 것일까요? AC.51의 첫 문장은 분명히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 차이를 여기서 충분히 해설하지는 않습니다.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이라는 짧은 표현만 줍니다. 그러므로 처음 읽는 독자가 ‘둘이 도대체 얼마나 다른 것인가?’, ‘형상은 덜 닮고 모양은 더 많이 닮았다는 뜻인가?’, ‘영적 인간이 나중에 천적 인간이 된다는 뜻인가?’라고 궁금해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이 문제는 AC.51 자체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면서 이후의 영적·천적 구별을 계속 읽는 데도 필요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형상’이라고 해서 가치 없는 불완전한 복제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상태에 이른 영적 인간을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따라서 ‘형상’은 아직 영적 생명이 시작되지 않은 낮은 상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모양’을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해지는 상태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49-50에서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주님의 형상이나 모양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되거나 주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해진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주님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이 점에서 AC.51은 앞의 세 글과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AC.48에서는 영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고, AC.49에서는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AC.50에서는 사람의 생명과 거듭남의 실제 주체 역시 주님 한 분임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AC.51은 그 주님의 ‘형상’과 ‘모양’ 사이에도 구별이 있음을 밝히면서, 창세기 1장의 영적 인간에서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으로 시선을 옮길 준비를 합니다.

 

따라서 AC.51의 중심을 ‘형상에서 모양으로 올라가는 거듭남의 단계’라고 너무 빨리 정리하기보다는, 먼저 스베덴보리가 의도적으로 구별한 두 인간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인간은 ‘형상’이며 ‘빛의 아들’, ‘친구’라고 불립니다. 천적 인간은 ‘모양’, 곧 닮음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립니다. 창세기 1장은 전자를, 창세기 2장은 후자를 다룹니다. 그리고 형상은 모양 자체는 아니지만 모양을 따릅니다. 이 짧은 구별이 앞으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심화

1. ‘형상’과 ‘모양’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

 

AC.51, 심화 1, ‘형상’과 ‘모양’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

AC.51.심화1. ‘형상’과 ‘모양’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 AC.51의 첫 문장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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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창1:26, ‘다스림의 방향 전환 : 이해에서 사랑으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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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창1:26, ‘우리'의 의미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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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심화

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을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 가운데 하나가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두 영은 악한 영을 말하는가?’, ‘두 천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호천사인가?’, ‘거듭난 사람에게는 악한 영들이 없어지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왜 하필 둘씩인가?’

 

AC.50 자체에서는 이 모든 질문을 상세히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뒤쪽으로 가면 스베덴보리가 같은 문제를 다시 다루며 훨씬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따라서 이번 심화에서는 AC.50이 직접 말하는 것과 뒤의 AC에서 보충되는 내용을 구별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AC.50은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소통하며, 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소통한다고 합니다. 이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그와 함께 있다’고 하고, 거듭난 상태에서는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AC.50의 ‘영들’은 천사들과 대비되어 영들의 세계와 사람을 연결하는 존재들이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악한 영들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AC.5848-5849에서 훨씬 명시적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천사들과 영들이 있으며, ‘천사들은 천국에서, 영들은 지옥에서’ 온다고 말하고, 모든 사람에게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그리고 두 영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과 소통하게 하고, 두 천사는 천국과 소통하게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50의 ‘두 영’을 단순히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적인 영 둘이라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뒤의 설명까지 함께 볼 때 지옥 쪽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영들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사람 옆에 지옥에서 올라온 악한 영 둘과 천국의 천사 둘이 몸으로 서서 늘 따라다닌다’는 식으로 자연계의 공간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함께 있음’은 영적 결합과 소통의 문제입니다. 그가 실제 영계의 공간과 가까움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 AC.50의 ‘함께 있다’를 자연계의 몇 미터 거리처럼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에게는 악한 영들이 완전히 없어지고 천사들만 남는가?’ AC.50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은 그 지배를 막는다고 하며, [3]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합니다. 즉 AC.50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천사와 악한 영의 존재 여부’라기보다 어느 쪽의 작용이 지배적인가 하는 상태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만으로 ‘거듭난 뒤에도 정확히 같은 영들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머문다’거나 ‘악한 영들은 일정 거리 밖으로 물러난다’는 세부까지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왜 둘인가?’라는 질문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것은 AC.50에는 답이 없지만, 뒤의 AC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합니다. AC.5977-5978에서는 인간에게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이 있으며, 천국에는 이에 대응하는 두 종류의 천사들이 있고 지옥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의 영들이 있기 때문에 둘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 가운데 한 종류는 사람의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 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 의지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사람의 사랑과 목적, 따라서 선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고, 이해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신앙과 원리, 따라서 진리에 속한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는 앞의 천사들을 천적 천사, 뒤의 천사들을 영적 천사라고 부릅니다.

 

지옥 쪽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한 종류는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 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 따라서 ‘두 영과 두 천사’라는 숫자는 단순히 네 명이라는 기이한 숫자 정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본 기능에 대응하는 영적 소통의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 안의 모든 생각 하나에는 ‘이해 담당 천사 한 명’, 모든 애정 하나에는 ‘의지 담당 천사 한 명’이 기계적으로 붙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것은 인간의 두 기본 기능과 천국·지옥의 두 종류 사이의 상응 관계입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조직도나 신경회로처럼 지나치게 세밀한 기계 구조로 바꾸면 오히려 그의 설명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또 ‘두 천사와 두 영이 있으므로 내 마음속에서 좋은 생각 하나와 나쁜 생각 하나가 항상 동시에 들려온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AC.50과 뒤의 관련 글들은 인간이 천국과 지옥 양쪽과 소통한다는 큰 구조를 설명하지만, 개별적인 생각과 느낌 하나하나를 우리가 어느 영의 직접 발언으로 판별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영적 존재 판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점은 인간의 책임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악한 생각은 악한 영에게서 왔으니 내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악을 남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유입되는가만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C.50에서는 그 자유의 전체 메커니즘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더 자세히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영들이 영향을 주므로 인간에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면 두 천사와 두 영은 각각 독립적으로 자기 힘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존재일까요? 이것 역시 AC.50이 단호하게 막습니다. 천사들은 ‘사역자들’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 천사들도 자기들에게 어떤 능력도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일한다고 고백한다고 합니다. 지옥 쪽의 영들이 작용하는 경우에도 인간의 존재와 생명 전체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AC.50의 ‘두 영과 두 천사’를 읽는 중심은 신비한 호위 존재 넷에 대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 역시 그 영적 질서 안에서 작용하며, 그 모든 것 위에서 주님 한 분이 섭리 가운데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거듭남을 이루신다는 것이 더 중요한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AC.50은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말하며, 뒤의 AC.5848-5849는 두 영을 지옥과의 소통, 두 천사를 천국과의 소통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AC.5977-5978은 그들이 왜 둘씩인지에 대해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에 각각 대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두 영과 두 천사’는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 그리고 천국과 지옥과의 영적 소통이라는 더 큰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50, 창1:26, ‘우리의 형상대로’ : 천사와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는 주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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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

태고교회는 ‘주의 형상’(image of the Lord)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천사들과 영들에 의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계와 소통하고,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과 소통하는 것이지요. 영계를 통한 소통과, 천국을 통한 소통, 그리고 그 천국을 통해 주님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전혀 살 수 없는 구조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이 결합에 전적으로 달려 있어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난다면 그는 즉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understood by the “image of the Lord” more than can be expressed. Man is altogether ignorant that he is governed of the Lord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that with everyone there are at least two spirits, and two angels. By spirits ma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angels with heaven. Without communication by means of spirits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means of angels with heaven, and thus through heaven with the Lord, man could not live at all; his life entirely depends on this conjunction, so that if the spirits and angels were to withdraw, he would instantly perish.

 

[2] 사람은 거듭나기 전과 후에 있어 다스림을 받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그들이 사람을 강하게 지배합니다. 이때에도 여전히 천사들은 함께 있으나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만 사람이 가장 극단적인 악으로 떨어지지만 않도록 막아 주며, 실제로 그의 욕정을 통해 어떤 선으로 굽히고, 감각의 오류를 통해 진리로 굽힐 뿐입니다. 이때 사람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해 영계와는 소통하지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이 그 지배를 겨우 막고 있는 상태이므로, 천국과의 소통은 매우 미약합니다. While man is unregenerate he is governed quite otherwise than when regenerated. While unregenerate there are evil spirits with him, who so domineer over him that the angels, though present, are scarcely able to do anything more than merely guide him so that he may not plunge into the lowest evil, and bend him to some good—in fact bend him to good by means of his own cupidities, and to truth by means of the fallacies of the senses. He the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through the spirits who are with him, but not so much with heaven, because evil spirits rule, and the angels only avert their rule.

 

[3]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제는 천사들이 주도적으로 다스리며, 사람에게 모든 선과 진리를 불어넣고,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혐오를 일으키게 합니다. 물론 천사들이 이끌기는 하지만, 그것은 봉사의 방식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천사들과 영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기에서는 먼저 복수형으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라고 하고, 곧이어 단수형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다’(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일하시지만, 다스림과 창조의 주체는 오직 주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도 이 점을 이사야에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But when the man is regenerate, the angels rule, and inspire him with all goods and truths, and with fear and horror of evils and falsities. The angels indeed lead, but only as ministers, for it is the Lord alone who governs man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as this is done through the ministry of angels, it is here first said, in the plural number,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yet because the Lord alone governs and disposes, it is said in the following verse, in the singular number, “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This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Isaiah: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사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Jehovah make all things, stretching forth the heavens alone, spreading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천사들 자신도 자신들에게는 어떤 능력도 없으며, 오직 주님한테서 나오는 그분의 힘으로만 자기들은 일한다고 고백합니다. The angels moreover themselves confess that there is no power in them, but that they act from the Lord alone.

 

해설

AC.50은 바로 앞의 AC.49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를 뜻밖의 방향으로 깊게 들어갑니다. AC.49에서는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이 참으로 ‘사람의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50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의 형상’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이해했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인간의 생명과 영계·천국의 연결,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다스리시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부터 현대 독자에게는 매우 낯선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은 자신이 주님에 의해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며,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고 합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소통하고, 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소통하며,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주님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결합이 없으면 사람은 전혀 살 수 없으며,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나면 즉시 소멸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천사들과 영들이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50의 문장 자체가 연결의 최종점을 ‘주님’에게 둡니다. 사람은 영들의 세계 및 천국과 연결되어 있고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주님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천사나 영이 생명의 독립적인 근원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 주님과의 결합에 의존한다는 것이 중심입니다. 앞의 AC.39-43에서도 이미 모든 참된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점이 반복해서 설명되었습니다.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 역시 처음 접하면 여러 질문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내 옆에 네 명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늘 따라다닌다는 뜻인가?’, ‘두 영은 모두 악한 영인가?’, ‘왜 하필 둘씩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AC.50 자체는 그 모든 세부를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후 AC.5848-5849에서도 사람에게 두 영과 두 천사가 있어 각각 지옥과 천국과의 소통을 이루게 한다고 다시 말하며, AC.5977-5978에서는 왜 둘씩인지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 및 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의 두 종류와 연결하여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문제는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AC.50의 직접적인 관심은 숫자 자체보다 사람의 상태에 따라 이 영적 다스림의 양상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거듭나기 전과 거듭난 뒤 전혀 다르게 다스림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2]와 [3]이 서로 대조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그들이 강하게 지배한다고 합니다. 천사들도 여전히 함께 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가장 낮은 악으로 빠지지 않도록 돌이키고, 그를 어떤 선과 진리 쪽으로 굽히는 정도라고 설명합니다. 이때 사람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해 영들의 세계와는 소통하지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은 그 지배를 막고 있기 때문에 천국과의 소통은 그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특히 눈에 띄는 문장이 있습니다. 천사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그의 욕정을 통해 어떤 선으로’, ‘감각의 오류를 통해 진리로’ 굽힌다고 합니다. 이것을 ‘욕정과 감각의 오류가 사실은 좋은 것’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50이 말하는 것은 사람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현재 상태에 있을 때 천사들이 그 사람에게 없는 높은 상태를 억지로 전제하여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처해 있는 상태 안에서 극단적인 악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며 어떤 선과 진리 쪽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욕정을 선한 에너지로 바꾸면 된다’는 일반적인 거듭남 방법론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또 ‘악한 영들이 지배한다’는 말을 사람에게 아무런 자유나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내 악한 생각과 행동은 사실 악한 영들이 한 것이니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AC.50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천국·지옥 사이의 평형, 그리고 유입된 것을 사람이 어떻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가는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훨씬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AC.50은 지금 그 전체 메커니즘을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 거듭나기 전과 후에 주님의 다스림이 사람에게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3]에서는 상황이 바뀝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천사들이 다스리고, 사람에게 모든 선과 진리를 불어넣으며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혐오를 일으키게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천사가 선과 진리를 만들어 주는 존재’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다음 문장에서 천사들이 인도하기는 하지만 오직 ‘사역자들’로서 그렇게 할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이 한 문장이 AC.50 전체를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앞에서는 영과 천사들의 작용을 매우 강하게 말하지만, 그들을 독립된 주체로 세우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사역자이고, 주님께서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수많은 중간 존재가 있어서 하나님은 간접적으로만 사람에게 접근하신다’는 구조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강조점은 오히려 그 모든 사역 가운데 실제로 다스리고 배열하시는 분은 주님 한 분뿐이라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창1:26의 매우 유명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 형상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자’가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복수형으로 말씀하실까요? AC.50은 이에 대해 아주 분명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먼저 복수형으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한 것이며, 그러나 실제로 다스리고 배열하시는 분은 주님 한 분뿐이기 때문에 바로 다음 절에서는 단수형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AC.5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1:26의 ‘우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여기서 ‘우리’를 여러 신들의 회의로 보지 않고, 주님과 그분을 섬기는 천사들의 사역이라는 관계 속에서 읽습니다. 그러나 창조와 거듭남의 실제 주체는 천사들이 아니라 주님 한 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사44:24을 인용합니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이 구절을 가져오는 직접 목적은 매우 분명합니다. ‘우리’라는 복수형이 천사들도 창조의 공동 주체라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홀로 만물을 지으셨으며, 스베덴보리도 이어서 ‘주님만이 다스리고 배열하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44:24의 하늘과 땅 각각의 세부 속뜻을 여기서 추가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은 무엇보다 ‘주님 홀로’라는 논증을 뒷받침합니다.

 

마지막 문장도 같은 균형을 확인합니다. 천사들 자신도 자기들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으며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힘으로만 일한다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AC.50은 천사들의 역할을 매우 크게 말하면서도 동시에 천사들에게 어떤 독립된 능력도 돌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천사와 영들을 통해 영계와 천국에 연결되어 있지만, 생명의 근원도, 다스림의 근원도, 창조와 거듭남의 주체도 주님 한 분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현재 해설처럼 ‘하나님의 형상 = 주님의 통치가 막힘없이 흐르는 상태’라고 하나의 공식으로 정의하기보다 AC.50이 말하는 만큼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주의 형상’이라는 말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것을 이해했다고 한 뒤, 그들이 알고 있던 인간의 영적 연결과 주님의 다스림을 하나의 예로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에게서는 천사들이 사역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창1:26의 ‘우리의 형상대로’와 연결합니다.

 

따라서 AC.50은 ‘하나님의 형상’이 단순히 사람의 외모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동시에 이것을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성품 몇 가지로도 축소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참된 영적 생명 전체가 주님에게 의존하고, 주님께서 천국과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며 거듭나게 하신다는 더 큰 질서 안에서 ‘형상’을 바라봅니다. 다만 형상과 모양의 더 정확한 구별은 다음 AC.51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므로, 그 설명까지 여기서 미리 당겨 올 필요는 없습니다.

 

AC.50을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이 가장 눈에 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네 명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사람 곁에 있다’는 신기한 정보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에게서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그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주님과의 결합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천사들과 영들의 모든 사역 배후에서 실제로 다스리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수형 ‘우리’ 뒤에 곧바로 단수형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가 이어집니다. 많은 사역자가 있어도 창조와 거듭남의 주체는 한 분이십니다.

 

심화

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 심화 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심화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을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 가운데 하나가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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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창1:26, ‘형상에서 모양으로 : 빛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길’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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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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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뒤 곧바로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무엇을 그렇게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며, 왜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우리가 대신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AC.49는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 ‘섭리적으로 감추어 두셨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확정한다면 그것은 AC.49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우리의 추론이 됩니다.

 

이 문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에게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문제에 관하여 여기 기록한 것보다 훨씬 더 말할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그것을 AC.49에서는 아직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의도적으로 유보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상을 이 한 문장만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이 아무 의미 없는 편집상의 메모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설명하려는 본문의 중심에 필요한 만큼 말하고, 다른 주제는 뒤로 남겨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AC.49의 중심은 태고교회의 현현 방식 자체를 상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왜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문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직후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이어집니다. 따라서 AC.49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태고교회와 주님의 교통에 관한 모든 세부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과 그것이 태고교회의 ‘사람’ 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자연계의 대화 장면처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주님께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그 현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각되었는지, 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했는지, 얼마나 자주 그러했는지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적 눈으로 보았다’, ‘내적 시야가 열렸다’와 같은 세부를 AC.49의 설명인 것처럼 덧붙이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영계 경험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및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의 ‘얼굴과 얼굴’ 교통이 정확히 같은 방식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서로 관련하여 연구할 수 있는 주제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가장 안전한 답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는 더 말할 것이 많이 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것을 다루지 않겠다.’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그가 직접 밝히지 않았으므로 열린 채로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는 독법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유보가 AC.49의 중심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놀라운 영적 경험 자체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짧게 언급하고 곧바로 더 중요한 문제, 곧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로 돌아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고, 자기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AC.49에서 지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을 때에도 좋은 원칙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완성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한 문장을 만났다고 해서 관련 교리를 모두 끌어와 그 빈칸을 채우기보다, ‘지금 이 글이 말하는 만큼’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AC의 긴 흐름 속에서 어떤 주제가 처음에는 짧게 언급되고 이후 점차 자세해지는 과정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는 신비한 비밀을 암시하므로 우리가 그 내용을 추측해야 한다는 초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고 경계를 그은 문장입니다. 그 경계를 존중하면서 AC.49가 지금 밝히는 핵심, 곧 주님이 최고의 뜻에서 유일한 ‘사람’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는 데 집중하는 것이 이 문장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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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창1:26)

 

AC.49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 주님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man)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사람’(men)이라고 했고, 자기 자신을 그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안에서 인식된 것들, 곧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된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of man)이라 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 예언서들에서 ‘사람’(man)과 ‘인자’(the son of man)는 최고의 뜻으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man)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최고의 뜻으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이 때문에 주님은 예언자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같은 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 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도 자신을 자주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하시며, 다니엘에서와 같이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여기 ‘하늘 구름’(The clouds of heaven)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power and great glory)은 말씀의 속뜻을 뜻합니다. 이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옵니다.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는 창1:26의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이제 ‘사람’이라는 말 자체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앞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영적 인간’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사람’이라고 하며, 더 근본적으로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AC.49의 대답은 매우 강렬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자기들 자신조차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당황스러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나 AC.49가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이나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과 태고교회의 영적 인식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참된 사람됨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자기 안에서 ‘사람의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AC.49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모든 진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단순히 사람이 선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48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9에서는 같은 원리가 ‘사람됨’에 적용됩니다.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가리키며, 속뜻에서는 주님에게서 지혜와 총명을 받아 거듭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만이 참 사람’이라는 말을 인간을 낮추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사람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생명을 만들어 내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갑니다. 따라서 이 말의 초점은 ‘누가 인간 자격이 있는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참된 영적 생명의 근원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49의 첫 문장에는 또 하나 매우 놀라운 내용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해 ‘많이 말할 수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상상하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과, 바로 이것이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유보 문장은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일으키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사람’과 ‘인자’는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에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모든 성경 인용을 읽는 열쇠입니다.

 

렘4:23,25에서 예레미야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 빛이 없고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AC.49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사람’이라는 말이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서 ‘사람’의 속뜻을 지혜와 총명, 따라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사람이 없다’는 표현 역시 그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함께 나오는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표현도 앞의 AC.40에서 새가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된다고 설명한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49는 여기서 예레미야 전체의 황폐 상태를 단계별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세밀하게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45:11-12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속뜻의 ‘사람’을 거듭난 사람으로, 최고의 뜻의 ‘사람’을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과 연결합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자연계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의 ‘사람’이라는 표현에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겔1:26은 주님께서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보여 주는 직접적인 예로 인용됩니다. 에스겔은 보좌 위에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을 봅니다. AC.49는 이 환상의 보좌나 남보석 등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것이 예언자들의 환상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최고의 뜻에서 ‘사람’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논증에 사용됩니다.

 

단7:13-14에서는 그 표현이 ‘인자’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니엘에게 보이신 분이 ‘인자’, 곧 ‘사람’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같은 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인자의 왕국과 권세에 관한 모든 세부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자’라는 호칭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인용의 직접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복음서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자주 ‘인자’라고 부르셨으며, 마24:30에서는 다니엘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49는 ‘사람’이라는 주제와 함께 말씀의 문자 의미와 속뜻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짧게 엽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 구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이 말씀의 속뜻을 뜻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바로 거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AC.49가 직접 말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속뜻을 깨닫는 순간 곧 인자의 재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이 확실히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심리나 도덕적 교훈을 흥미롭게 찾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사람’ 역시 결국 인간 자신에게서 설명이 완성되지 않고,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형상의 원형이신 주님을 보아야 한다는 방향이 여기서 열립니다.

 

이 점에서 AC.49는 앞의 AC.48과 다음 글들을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49는 곧바로 인간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먼저 주님을 바라봅니다.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 참으로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도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위대함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하는 사람됨과 관계됩니다.

 

동시에 여기서 ‘거듭난 사람만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사람의 사회적 가치나 존엄을 분류하는 글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이 최고의 뜻과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글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스베덴보리의 매우 깊은 인간론을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는 주장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결국 AC.49가 말하는 ‘사람’의 비밀은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 안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소유라고 여기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을 ‘사람’이라 불렀고, 주님에게서 온 것들만을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서의 ‘사람’과 ‘인자’, 에스겔과 다니엘의 사람 형상, 복음서의 인자, 그리고 말씀의 구름과 영광까지 이어지는 모든 인용은 결국 이 중심을 향합니다.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의 참된 지혜와 총명과 사람됨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깁니다.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심화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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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창1:26, ‘하나님의 형상 : 주님의 통치가 천사와 영들을 통해 사람 안에 흐르는 상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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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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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4, 25)

 

AC.48

이로부터 사람이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있을 때가 분명해집니다. 이때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확증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그것들을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fishes of the sea), ‘하늘의 새’(fowl of the heavens)라 합니다. 사람이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들을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을 ‘생물’(living soul), ‘가축’(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신앙으로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 of the sea,” and the “fowl of the heavens.”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 soul,” and the “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 of 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AC.48은 지금까지 이어진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차이를 짧고 분명하게 정리하는 글입니다. 특히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가 실제로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앞에서는 물고기와 새, 생물과 짐승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 놓고 두 상태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먼저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신앙으로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이미 ‘생명이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다섯째 날의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로 표현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섯 번째 상태를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지 않은 상태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48은 이때 산출되는 것들을 분명히 ‘animate’, 곧 생명이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앞의 AC.39에서도 큰 광명체들이 켜진 뒤 사람이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에 와서 처음으로 영적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지만, 그 생명이 나타나는 중심이 아직 주로 이해에 속한 신앙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이해에 속한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세밀한 변화가 있습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사랑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도 신앙은 그대로 있으며, 거기에 그 신앙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함께합니다.

 

그래서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의 차이를 단순히 ‘아는 단계와 행하는 단계’라고만 나누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상태의 사람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AC.48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내적인 것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에서 말하며 그로써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처음 읽으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섯째 상태에는 사랑이 전혀 없고 여섯째 상태에서 갑자기 사랑이 생긴다는 뜻인가?’ 그렇게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8은 거듭남 전체에서 사랑이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섯째 상태에서 사람이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이 글의 초점은 사랑의 최초 존재 여부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신앙과 함께 사랑이 실제 의지에 속한 원리로서 행동의 근원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기존 해설에서처럼 이를 ‘처음에는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애쓰다가 나중에는 좋아서 자연스럽게 한다’는 예로 설명하면 어느 정도 감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AC.48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상태에 반드시 심한 억지와 갈등이 있고, 여섯째 상태에 이르면 모든 선행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AC.48이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과 갈등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AC.48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행동의 근원’에 관한 변화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이 전면에 나타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과 더불어,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 이제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뿐 아니라’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의 원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산출되는 것들이 창1:24-25의 ‘생물’과 ‘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앞의 AC.44-46에서 이미 이 짐승들이 의지에 속한 것들, 특히 애정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에서 여섯째 날의 생물과 짐승으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피조물의 종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신앙의 상태에서 의지에 속한 사랑까지 포함하는 상태로 깊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AC.48의 절정입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임의로 ‘하나님과 작동 방식이 같아지는 것’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8 자체가 그 이유를 간단히 제시합니다.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서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의 여러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반복하여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신적인 생명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과 사랑이 그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져 삶으로 나타나는 상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AC.47과의 연결도 중요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하며,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8에서는 그 진행 가운데 여섯째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하게 되고, 사람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용어상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AC.48은 이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AC를 읽다 보면 ‘영적’과 ‘천적’이 서로 구별되는 더 세밀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적 인간’이라는 말을 보고 곧바로 이후의 모든 영적·천적 구별을 이 한 문장에 끌어와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여섯째 상태에 이른 거듭난 사람을 ‘영적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 창1:26 이하에서 ‘형상’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어집니다.

 

AC.48은 결국 다섯째 상태를 낮추고 여섯째 상태만 참된 것으로 만드는 글이 아닙니다. 다섯째 상태도 이미 살아 있는 거듭남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이해가 진리를 알고 신앙으로 확증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나타나고, 사람은 신앙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는 ‘영적 인간’, 곧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이 글의 흐름을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만 표현하기보다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이 되는 데로’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다섯째 날에 살아난 이해에 속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에는 의지에 속한 사랑과 함께 하나의 더 온전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창조의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 사이에서 AC.48이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AC.49, 창1:26, ‘참 사람은 오직 주님 : 사랑과 진리 안에서만 성립되는 사람됨'(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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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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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4, 25)

 

AC.47

이 말씀들 안에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앞 절에서 땅이 ‘생물, 가축, 땅의 짐승’(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을 낼 것이라고 말한 반면, 다음 절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 가축’(the wild animal of the earth, the beast)을 만드셨다고 말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그리고 이후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는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이런 이유로 여기 다른 순서가 나오는 것이며,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likewise “the 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해설

AC.47은 아주 짧지만 창1:24-25의 문장을 얼마나 세밀하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단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순서의 변화’입니다. 24절에서는 땅이 ‘생물, 가축, 땅의 짐승’을 내라고 하지만, 2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 가축’을 만드셨다고 하여 앞에서와 순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작은 차이 안에도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 정도의 어순 차이에 정말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AC.47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단순히 자연계 창조의 순서를 기록한 문장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을 담은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대상들이 왜 다른 순서로 언급되는가도 그에게는 설명되어야 할 말씀의 일부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설명의 중심은 ‘사람이 처음에는, 그리고 이후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는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실제로 영적 생명과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9-43에서 이미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47을 그 흐름과 분리해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이라고 말할까요? AC.47은 그 이유나 작동 방식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렇게 산출하며, 바로 그 때문에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이 두 진술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한다’는 말을 ‘사람이 외적인 행동을 반복하면 그것이 차츰 속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하나의 심리적 훈련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실제 삶의 순종과 행함은 거듭남에서 중요합니다. 바로 앞의 AC.44도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47 자체는 ‘행동 → 습관 → 애정 → 속 사람’이라는 단계나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또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라는 말을 주님께서 겉 사람에서 일을 시작하여 점차 속 사람으로 들어가신다는 공간적 이동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나는 사람이 경험하고 산출하는 질서를 설명하면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및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가는 AC가 진행되면서 훨씬 더 세밀하게 설명되므로, 이 한 문장에 그 모든 메커니즘을 미리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24절과 25절의 순서 변화가 왜 중요할까요? 24절에서는 ‘땅’이 무엇인가를 내는 장면이 먼저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하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반면 25절에서는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 만드시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AC.47이 특별히 설명하는 것은 단순히 ‘땅이 하다가 하나님이 하신다’는 주어 변화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언급되는 것들의 순서도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순서에서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뒤바뀐 순서는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질서를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각각의 ‘땅의 짐승’과 ‘가축’을 다시 세분하여 ‘이것은 외적 행동, 이것은 습관, 이것은 길들여진 애정’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세부 대응을 우리가 만들어 넣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외적인 것들이 먼저 언급된다’는 설명을 그대로 중심에 두는 편이 좋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과 ‘실제로 자기에게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는 ‘내가 생각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행한다’고 경험합니다. 그러나 앞선 AC의 흐름에 따르면 그 안에 참으로 살아 있는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47은 이 둘을 서로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한다는 표현으로 그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매우 중요해질 주제입니다. 다만 AC.47 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 섭리, 공로 없음의 관계를 모두 완성된 교리로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것은 그보다 작지만 분명한 단서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에게는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행하는 상태가 있으며, 그 과정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현재 제목처럼 이것을 곧바로 ‘자기에서 주님으로 옮겨가는 방향’이라고 요약하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모든 생명과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분명해졌지만, AC.47이 설명하는 순서 변화 자체의 직접적인 의미는 ‘자기에서 주님으로 주체가 이동한다’기보다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 차이를 지켜 주어야 이 짧은 글이 말하는 아르카나가 오히려 더 선명해집니다.

 

AC.47은 동시에 말씀을 읽는 스베덴보리의 방식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 눈에는 같은 것을 조금 다른 순서로 쓴 문체상의 변화처럼 보이는 것도, 그는 거듭남의 질서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물론 여기서 곧바로 ‘성경의 모든 어순 변화에는 반드시 별개의 속뜻이 있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7이 직접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창1:24-25의 순서 변화에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글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의 근원을 온전히 지각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가며, 창1:24와 25의 미묘한 순서 변화가 바로 그 질서를 표현합니다. AC.47은 단어 하나뿐 아니라 배열의 변화까지도 거듭남의 관점에서 읽어 내면서, 창세기 창조 이야기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얼마나 세밀하게 담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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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창1:24-25, ‘짐승'(beasts), 사람의 애정(affections)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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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

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5와 AC.46을 읽다 보면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고 하면서 어떤 곳에서는 선한 애정을, 다른 곳에서는 악한 애정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상응이라는 것은 하나의 자연물이 하나의 영적 의미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짐승 = 애정’이라면 선한 애정인지 악한 애정인지도 하나로 정해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질문은 상응을 처음 접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상응을 단순한 ‘영적 암호표’처럼 생각하면 ‘물 = 진리’, ‘나무 = 지각’, ‘짐승 = 애정’처럼 하나의 단어 옆에 하나의 뜻을 적어 놓고 모든 성경 구절에 똑같이 대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AC를 읽어 가면 상응은 그렇게 기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됩니다.

 

AC.46 자체가 좋은 예입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기본적인 연결은 유지됩니다. 짐승은 인간의 ‘애정’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애정 자체에 선한 애정과 악한 애정이 있으므로,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문맥과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자연계의 동물들도 모두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도움이 됩니다. AC.45에서 스베덴보리는 해를 끼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을 구별했습니다. 곰, 늑대, 개와 같은 동물을 악한 애정의 예로 들고, 암송아지, 양, 어린양 같은 동물을 선하고 온순한 것의 예로 들었습니다. 따라서 ‘동물’이라는 큰 범주가 애정과 상응한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동물이 동일한 종류의 애정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같은 표현도 문맥의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AC.46에서 들짐승이 하나님과의 언약과 평화 속에 등장하는 구절들이 있는가 하면, 겔34:25에서는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들짐승’이라는 말을 발견하자마자 무조건 선이나 악 가운데 하나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태를 다루는 말씀인지, 그 짐승이 어떤 관계 속에서 등장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상응이 임의적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기본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에 문맥에 따른 변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 애정 사이의 관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애정의 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선한 사람 안에서 주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하는 애정과, 자기와 세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악한 애정은 모두 ‘애정’이라는 점에서는 같은 범주에 속하지만 그 질과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상응을 읽을 때 ‘이 자연물의 정확한 정답은 무엇인가?’라고만 묻기보다 ‘이 자연물이 인간의 어떤 영역과 관계되며, 지금 이 문맥에서는 그 영역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 더 좋습니다. 짐승의 경우에는 ‘애정과 관계된다’는 기본 관계를 먼저 붙들고, 그다음 그 애정이 선한지 악한지, 온순한지 해로운지, 질서 안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문맥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앞으로 AC를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자연물이 긍정적인 문맥과 부정적인 문맥에 모두 등장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때마다 스베덴보리가 마음대로 뜻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기본적인 상응 관계 안에서도 대상의 질과 상태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서 또 하나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 원리를 근거로 독자가 마음대로 문맥에 맞추어 의미를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긍정적인 구절이니까 좋은 뜻, 부정적인 구절이니까 나쁜 뜻’이라고 임의로 정하는 것도 상응의 해석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전체에 반복되는 용례와 상응의 질서를 통해 이러한 의미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AC를 읽을 때에는 개별 상응 하나를 떼어 자유롭게 응용하기보다, 그가 여러 구절을 서로 어떻게 연결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AC.46에 그토록 많은 성경 구절이 인용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의 구절만 보고 ‘짐승은 애정을 뜻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과 예레미야와 호세아와 시편과 이사야와 계시록 등 말씀 전체에서 짐승과 생물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지를 함께 보여 줍니다. 상응은 한 구절에 억지로 끼워 넣는 해석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 글 자체가 보여 주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짐승이 어떻게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짐승’과 ‘애정’이라는 기본적인 상응 관계는 유지되지만, 인간의 애정 자체가 선하거나 악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는 짐승의 의미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달라집니다. 중요한 것은 단어 하나에 뜻 하나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상응이 말씀 전체의 문맥에서 어떤 상태와 질을 나타내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AC의 상응 해석이 조금 덜 낯설어집니다. 상응은 단순한 단어 사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의 내적 상태를 자연계의 형상들을 통해 표현하는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AC.46, 창1:24-25, 말씀의 짐승들은 왜 인간의 애정을 뜻하는가?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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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4, 25)

 

AC.46

‘짐승’(beasts)이 사람의 애정(affections)을 뜻한다는 사실, 곧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한다는 사실은 말씀의 많은 구절을 보면 분명한데요, 에스겔입니다. That “beasts” 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9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11내가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을 많게 하되 그들의 수가 많고 번성하게 할 것이라 너희 전 지위대로 사람이 거주하게 하여 너희를 처음보다 낫게 대우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겔36:9, 11, 거듭남에 대해 말하는) Behold, I am for you, and I will look back to you, that ye may be tilled and sown, and I will multiply upon you man and beast, and they shall be multiplied and bring forth fruit; and I will cause you to dwell as in your ancient times (Ezek. 36:9, 11, treating of regeneration).

 

요엘입니다.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욜2:22)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 for the dwelling places of the wilderness are become grassy (Joel 2:22).

 

시편에서도 In David also: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시73:22) So foolish was I, I was as a beast before thee (Ps. 73:22).

 

예레미야에서 거듭남을 다루며 In Jeremiah, treating of regeneration:

 

27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28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7, 28) Behold the days come, saith Jehovah, that I will sow the house of Israel and the house of Judah with the seed of man, and with the seed of beast, and I will watch over them to build and to plant (Jer. 31:27–28).

 

[2] ‘들짐승’(Wild animals)도 비슷한 의미인데요, 호세아입니다. “Wild animals” have a similar signification, as in Hosea: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 of the heavens, and with the creeping thing of the earth (Hos. 2:18).

 

욥기입니다. In Job:

 

22너는 멸망과 기근을 비웃으며 들짐승을 두려워하지 말라 23들에 있는 돌이 너와 언약을 맺겠고 들짐승이 너와 화목하게 살 것이니라 (욥5:22, 23) Thou shalt not be afraid of the wild animals of the earth, for thy covenant is with the stones of the field, and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be at peace with thee (Job 5:22–23).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맺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 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에서 잘지라 (겔34:25) I will make with you a covenant of peace, and will cause the evil wild animal to cease out of the land, that they may dwell confidently in the wilderness (Ezek. 34:25).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사43:20)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shall honor me, because I have given waters in the wilderness (Isa. 43:20).

 

에스겔입니다. In Ezekiel: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겔31:6) All the fowls of the heavens made their nests in his boughs, and under his branches did all the wild animals of the field bring forth their young, and under his shadow dwelt all great nations (Ezek. 31:6).

 

이는 앗수르에 대한 말입니다. 앗수르는 영적 인간을 뜻하며, 에덴동산에 비유됩니다. This is said of the Assyrian, by whom is signified the spiritual man, and who is compared to the garden of Eden.

 

시편입니다. In David:

 

2그의 모든 천사여 찬양하며 모든 군대여 그를 찬양할지어다, 7너희 용들과 바다여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라, 9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수와 모든 백향목이며 10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시148:2, 7, 9-10) Glorify ye him, all his angels, glorify Jehovah from the earth, ye whales, fruit trees, wild animal, and every beast, creeping thing, and flying fowl (Ps. 148:2, 7, 9–10).

 

이렇게 여기서 전반적으로 ‘용들’(whales), ‘과수’(fruit tree), ‘짐승’(wild animal), ‘가축’(beast), ‘기는 것’(creeping thing), ‘나는 새’(fowl)가 함께 언급되는데, 이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 “whales,” the “fruit tree,” “wild animal,” the “beast,” “creeping thing,” and “fowl,” 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자들은 ‘가축’(beasts)과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earth), 또 ‘가축’(beasts)과 ‘들의 짐승’(wild animals of the field)을 조심스럽게 구별합니다. 그럼에도 사람 안의 선한 것들은 ‘가축’(beasts)이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서 주님과 가장 가까운 이들도 ‘생물’(animals)이라 하는데,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에서 모두 그렇게 말합니다.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earth,” and “beasts” and “wild animals of the field.” 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 “beasts,” 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 “animals,” both in Ezekiel and in John: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주3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7:11)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and the elders, and the four animals (Rev. 7:11),3

 

※ AE.462에 의하면, 여기 ‘모든 천사’(the angels)는 일층천, 즉 가장 낮은 천국 천사들을, ‘장로들’(the elders)은 이층천, 즉 중간 천국 천사들을, ‘네 생물’(the four animals)은 삼층천, 즉 가장 높은 천국 천사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계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the lamb (Rev. 19:4).

 

또한 복음이 전파되는 이들도 ‘피조물’(creatures)이라 하는데, 이는 그들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 “creatures,” 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

 

 

주3. 여기 이 단어는 ‘비스트’(beasts, 짐승, 야수)가 아닌, 흠정역(the authorized version)에서처럼 ‘애니멀’(animals, 짐승, 동물)로 정확하게 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의 ‘준’(ζοόν, z¯oon)과, 라틴과 영어의 ‘애니멀’은 서로 정확히 대응하며, ‘생물’(a living creature)이라는 의미에 맞기 때문입니다. 원전(the original) 해당 구절들에서 사용된 단어는 준이며, 만일 ‘비스트’ 사용을 의도했다면 썼을 법한 테르(θήρ, th¯er)나 테리온(θηρίον, th¯erion)이 아닙니다. This word is here correctly translated “animals” and not “beasts,” as in the authorized version, for z¯oon in Greek, and animal in Latin and English, precisely correspond to each other, and properly signify “a living creature.” Z¯oon is the word used in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and not th¯er or th¯erion, as would be the case if “beast” had been intended.

 

해설

AC.46은 바로 앞의 AC.45에서 제시한 중요한 원리, 곧 말씀에서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는 것을 수많은 성경 구절을 통해 확인하는 글입니다. 첫 문장부터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짐승은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하며, 이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 성경 인용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새로운 주제를 계속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짐승 = 애정’이라는 해석이 창1:24-25에만 임의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겔36:9,11과 렘31:27-28은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인용됩니다. 겔36에서는 황폐했던 땅이 다시 갈리고 심어지며 그 위에 ‘사람과 짐승’이 많아지고 번성합니다. 렘31에서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고, 이어서 세우고 심으시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핵심 이유는 문자 그대로 사람과 동물의 개체 수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거듭남에 관한 이 말씀의 속뜻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여기의 짐승이 사람 안에서 살아나는 내적인 것, 특히 애정과 관련된 것을 뜻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46은 여기서 ‘사람의 씨는 정확히 무엇이고 짐승의 씨는 정확히 무엇이다’라는 세부 대응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욜2:22의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도 같은 방향에서 사용됩니다. 들의 풀이 돋고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회복의 장면에서 들짐승 역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반면 시73:22에서는 시편 기자가 자신의 우매함을 고백하며 ‘주 앞에 짐승’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 두 구절만 보아도 ‘짐승’이라는 말 자체에 언제나 선한 뜻이나 언제나 악한 뜻 하나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AC.46의 첫 문장이 이미 말했듯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호2:18, 욥5:22-23, 겔34:25에서는 ‘들짐승’이 언약과 평화라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호세아에서는 들짐승과 새와 땅의 곤충과 언약을 맺고, 욥기에서는 들짐승이 사람과 화목하게 되며, 에스겔에서는 화평의 언약과 함께 ‘악한 짐승’이 땅에서 그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제시하는 것은 말씀에서 짐승과 들짐승이 단순한 동물 이야기를 넘어 사람의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겔34:25가 굳이 ‘악한 짐승’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짐승’이라는 말 자체가 곧 악이라는 뜻이라면 ‘악한’이라는 구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43:20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들짐승이 여호와를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광야에 물이 생기고 사막에 강이 생겨 하나님의 백성이 마시게 되는 장면에서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도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문자적 자연물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의 속뜻에서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겔31:6에서는 앗수르가 큰 나무로 묘사되고 그 가지에는 새들이 깃들이며 그 아래에서는 들짐승들이 새끼를 낳습니다. AC.46은 여기서 앗수르가 ‘영적 인간’을 뜻하고 에덴동산에 비유된다고 짧게 설명합니다. 이 구절 역시 새와 짐승이 단순히 배경을 꾸미는 자연물이 아니라 영적 인간에게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씀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됩니다. 다만 이번 글은 앗수르나 나무, 가지, 새 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해설하려는 곳은 아닙니다. 인용의 목적은 계속 ‘짐승이 인간 안의 살아 있는 것들을 표현한다’는 중심 주장에 있습니다.

 

시148은 이 논증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사들뿐 아니라 바다의 큰 생물들, 과수, 짐승, 가축, 기는 것과 나는 새까지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개역개정의 ‘용들’에 해당하는 부분을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에서는 ‘whales’라고 표현합니다. AC.46은 바로 이 점을 붙들어,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이번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해석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짐승은 선한 애정입니까, 악한 애정입니까?’ AC.46의 대답은 ‘문맥과 그 짐승의 성질에 따라 다르다’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단순한 암기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짐승 = 애정’이라는 기본 관계가 있다고 해서 모든 짐승이 동일한 애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하고 온순한 동물과 해로운 동물이 다르고, 같은 ‘짐승’이라는 표현도 어떤 사람과 어떤 상태를 다루느냐에 따라 선한 애정 또는 악한 애정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말씀의 상응을 읽는 데 계속 필요한 원리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AC.46 후반부에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구별이 나옵니다. 선지자들이 ‘가축’과 ‘땅의 짐승’, 또는 ‘가축’과 ‘들의 짐승’을 조심스럽게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 각각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축은 질서 잡힌 높은 애정이고 들짐승은 본능적인 낮은 애정’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빈칸을 채우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6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사람 안의 ‘선한 것들’도 짐승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매우 놀라운 예를 하나 더 듭니다. 주님께 가장 가까운 하늘의 존재들도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 ‘생물’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계7:11과 계19:4의 ‘네 생물’이 그 예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영어 단어입니다. 각주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곳의 말이 ‘beasts’가 아니라 ‘animals’로 번역되는 것이 정확하다고 설명합니다. 헬라어 ζῷον(zōon)은 ‘살아 있는 생물’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대목의 요점은 천사들을 야수에 비유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라는 표현이 얼마나 높은 영적 문맥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본문에 덧붙여 놓은 AE.462의 설명, 곧 ‘모든 천사’를 가장 낮은 천국, ‘장로들’을 중간 천국, ‘네 생물’을 가장 높은 천국과 연결하는 설명은 AC.46 자체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훗날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설’에서 가져온 보충 자료입니다. 참고할 수는 있지만, AC.46의 논증 자체와 구별하여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글에서 직접 필요한 것은 ‘주님께 가까운 하늘의 존재들조차 생물이라고 불린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막16:15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표현은 영어의 ‘every creature’, 곧 ‘모든 피조물’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해 받는 이들이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창세기 1장의 창조와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AC 전체의 큰 주제가 다시 만납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기존의 사람에게 종교 지식 몇 가지가 더해지는 일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6에 왜 이렇게 많은 성경 구절이 한꺼번에 등장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의 구절을 완전히 해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요엘, 시편, 예레미야, 호세아, 욥기, 이사야, 요한계시록, 마가복음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말씀에서 ‘짐승’, ‘들짐승’, ‘생물’, ‘피조물’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인간의 내적 생명과 연결되는지를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인용 구절을 따로 떼어 열세 편의 해설로 읽기보다, 이 인용들이 함께 무엇을 증언하는지를 보는 것이 AC.46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합니다.

 

AC.45가 ‘짐승은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는 원리를 소개했다면, AC.46은 말씀 전체를 펼쳐 그 원리가 고립된 해석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중요한 균형도 가르쳐 줍니다. 짐승이라고 해서 모두 악한 것도 아니고, 모두 선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애정에도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듯이 말씀의 짐승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애정을 표현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 단어를 보았으니 뜻은 이것이다’라고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문맥 속에서 어떤 생명과 어떤 애정이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심화

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6, 심화 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심화1. 왜 같은 ‘짐승’이 선한 애정도, 악한 애정도 뜻하는가? AC.45와 AC.46을 읽다 보면 조금 혼란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고 하면서 어떤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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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 창1:24-25, ‘순서가 말해 주는 거듭남 : 자기에서 주님으로 옮겨가는 방향'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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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창1:24-25, ‘짐승’(beasts), ‘땅의 짐승’(wild animals of that earth)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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