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7을 읽으면 ‘악한영들은물러가고선한영들이가까이오며,천적천사들도가까이온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앞의 AC.50에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두영’을 악한 영들로 이해했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AC.87의선한영들은갑자기어디에서등장한것인가?’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앞에서 가졌던 전제 하나를 바로잡는 것이 좋습니다. ‘영들’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악한영들’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7만 보아도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어떤 번호에서 단순히 ‘영들’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자동으로 악한 영들이라고 확정하기보다, 그 번호의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직접 설명을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50의 ‘두영’에 대한 앞선 설명도 수정해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50이 사람과 영계 및 천국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영들’과 ‘천사들’을 구별했다고 해서, 거기서 말한 ‘영들’이라는 명칭 자체가 곧 ‘악한영들’을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선악을 확정하는 명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AC.87은 같은 ‘영들’ 가운데 ‘악한영들’과 ‘선한영들’을 명시적으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렇다면 AC.87에서 왜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을 따로 말할까요? 여기서는 원문이 말하는 데까지 정확히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이 가까이 오며 천적 천사들도 가까이 옵니다. 그리고 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어 멀리 달아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선한영들’과 ‘천적천사들’은 같은 명칭으로 묶이지 않고 서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AC.87한 번호만 가지고 이 두 부류의 존재론적 차이와 영계에서의 정확한 위치, 역할, 상태를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영들은천사들보다아래단계의존재들이다’, ‘아직완전히확정되지않은상태의존재들이다’, ‘선한영들은인간을더나은상태로이끄는역할을한다’는 식으로 전체 구조를 먼저 완성하면 AC.87이 직접 말하지 않은 내용까지 섞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구별은 스베덴보리가 영들의 세계와 천국, 영들과 천사들의 상태를 직접 설명하는 곳에서 차례로 확인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AC.87에서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충분합니다. ‘영들’이라는 말은 곧 ‘악한영들’이라는 고정된 뜻이 아니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또한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도 서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을 때 ‘영’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미리 정해 둔 하나의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하기보다, 그 문맥에서 어떤 영들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용어 문제를 넘어 앞으로 AC를 읽는 데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우리가 상응을 고정된 사전처럼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계의 존재들을 가리키는 명칭도 한 번 정한 설명을 모든 번호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50은 AC.50의 문맥에서, AC.87은 AC.87의 문맥에서 먼저 읽어야 하며, 여러 번호가 충분히 쌓였을 때 스베덴보리 자신이 보여 주는 전체 구조를 따라 정리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한영들은갑자기어디에서등장했는가?’라는 질문에 지금 가장 정확하게 답하면 이렇습니다. 선한 영들이 AC.87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서 ‘영들’을 너무 빨리 ‘악한영들’로만 한정해서 이해했던 것입니다. AC.87은 그 이해를 바로잡아 줍니다. 영들 가운데 악한 영들도 있고 선한 영들도 있으며, 이 번호에서는 천적 인간에게서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자세한 영들과 천사들의 질서는 앞으로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열어 줄 때 따라가면 됩니다. (AC.87심화1)
사람은주님에의해,육체안에서살아있는동안에도영들과천사들과말할수있도록창조되었습니다.실제로태고시대에는그렇게하였습니다.사람은육체를입은영이므로그들과하나이기때문입니다.그러나시간이흐르면서사람들이육체적이고세상적인것들속에자신을너무깊이잠기게하여그밖의것에는거의아무관심도두지않게되었기때문에,그길은닫혔습니다.그러나사람이잠겨있는육체적인것들이물러나자마자그길은다시열리고,사람은영들가운데있으면서그들과공동의삶을살게됩니다. Man was so created by the Lord as to be able while living in the body to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as in fact was done in the most ancient times;for,being a spirit clothed with a body,he is one with them.But because in process of time men so immersed themselves in corporeal and worldly things as to care almost nothing for aught besides,the way was closed.Yet as soon as the corporeal things recede in which man is immersed,the way is again opened,and he is among spirits,and in a common life with them.
해설
AC.68에서 스베덴보리는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는 반론이 있을 것을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AC.69는 바로 그 문제에 대한 첫 번째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으며, 태고 시대에는 실제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로 그는 사람이 ‘육체를입은영’이며,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 하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영들과의 교류를 인간의 본래 창조 질서와 전혀 관계없는 예외적 현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길은 닫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속에 자신을 너무 깊이 잠기게 하여 그 밖의 것에는 거의 아무 관심도 두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육체적이고세상적인것들’을 육체나 세상 자체가 악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이 문제 삼는 것은 사람이 그것들 속에 자신을 ‘잠기게’ 하여 그 밖의 것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즉 자연적 삶 자체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관심을 거의 전부 차지하게 된 상태가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류의 길이 닫힌 이유로 제시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특히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잠겨 있는 육체적인 것들이 물러나자마자 그 길이 다시 열리고, 사람은 영들 가운데 있으면서 그들과 공동의 삶을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AC.69는 여기서 ‘육체적인것들이물러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이며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금욕이나 육체의 억압, 세상생활의 포기 같은 실천법으로 곧바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번호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류가 인간의 영적 본성과 관계되며, 인간이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 속에 깊이 잠김으로 그 길이 닫혔다는 것입니다.
AC.69는 따라서 AC.68의 ‘저는보았고,들었고,느꼈기때문입니다’라는 증언에 하나의 배경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인간에게 전혀 불가능한 능력이 특별히 새로 생긴 것으로 설명하기보다, 본래 인간의 창조 질서에 속했으나 닫혀 있던 길이 다시 열린 것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왜 자신에게 그 길이 열렸는지,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이러한 교류가 열리는 것이 바람직한지까지 AC.69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번호에서는 그 이상의 내용을 앞당기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제시하는 설명의 범위를 그대로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AC.69해설)
제가육체안에서살아있는동안에는영들과천사들과말하는것이결코가능하지않다고많은사람이말할것임을저는잘알고있습니다.또많은사람은이모든것이공상이라고할것이고,다른사람들은제가신빙성을얻기위해이런것들을이야기한다고할것이며,또다른사람들은그밖의여러반론을제기할것입니다.그러나저는이모든것에단념하지않습니다.저는보았고,들었고,느꼈기때문입니다. I am well aware that many will say that no one can possibly speak with spirits and angels so long as he lives in the body;and many will say that it is all fancy,others that I relate such things in order to gain credence,and others will make other objections.But by all this I am not deterred,for I have seen,I have heard,I have felt.
해설
AC.67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그러한 증언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자신도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육체 안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영들과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이며, 모든 것이 공상이라고 할 사람도 있고, 자신이 신빙성을 얻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고 의심할 사람도 있으며, 그 밖의 여러 반론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증언이 쉽게 받아들여지리라고 기대하면서 이 기록을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러한 반론들을 논증으로 반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자신의 체험이 공상이 아니라는 철학적 논증을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이 번호에서 그가 내놓는 것은 자신의 경험에 대한 증언입니다. ‘저는보았고,들었고,느꼈기때문입니다.’ 이것은 독자에게 아무 검토 없이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요구하는 문장이 아니라, 예상되는 반론들을 자신도 알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자신이 경험했다고 하는 것을 밝히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겠다는 말입니다.
특히 ‘보았고,들었고,느꼈다’는 세 표현은 앞으로 이어질 기록의 성격을 다시 한번 보여 줍니다. AC.67에서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보았던것’을 밝히겠다고 했고, 여기서는 거기에 ‘느꼈다’를 더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다른 삶에 관한 자신의 기록을 단순한 사상이나 추론의 결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하는 경험의 증언으로 제시합니다. 이 단계에서 독자가 붙들어야 할 것은 그 증언을 미리 참이라고 증명하거나 거짓이라고 반박하는 일이 아니라,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어떤 성격의 증언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지를 정확히 읽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AC.68은 앞으로 이어지는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을 읽는 독자의 태도와도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론이 있을 것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먼저 적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반론들이 있음에도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밝히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후의 기록은 이 한 문장의 선언 위에서 읽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의 의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하는 경험을 증언하는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AC.68해설)
AC.67을 처음 읽는 독자는 거의 즉시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는 ‘다른삶의본성’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삶’은 무엇이며, 그 ‘본성’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AC.67은 아직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예고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뒤에 나올 내용을 모두 앞당겨 설명하기보다, 앞으로의 독서를 위해 필요한 정도만 먼저 짚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다른삶’은 이 세상의 육체적 삶과 구별되는 사후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삶은 단지 죽은 뒤에도 어딘가에서 존재한다는 막연한 관념이 아닙니다. AC.67에서 그는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었고 그 기간 동안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그가 말할 ‘다른삶’은 자신의 추측이나 철학적 사변으로 제시되는 세계가 아니라, 직접 듣고 보도록 허락되었다고 그 자신이 증언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AC.67은 단순히 ‘사후의삶이있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그 삶을 향하고 있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다른삶의본성’을 아는 것과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서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속뜻이 인간의 영적 생명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실재를 다루고 있다면, 그 실재가 어떠한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그 속뜻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삶의본성’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AC를 읽기 전에 영계에 관한 모든 지식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AC.67부터 이어지는 기록 자체가 독자에게 그 삶을 차례로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완성된 영계 지식을 요구한 뒤 속뜻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밝히는 과정에서 필요한 다른 삶의 본성도 함께 열어 보이려 합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지금부터 그가 밝히는 내용을 따라가면서 두 가지를 함께 배우게 됩니다. 다른 삶이 어떠한가를 알아 가는 동시에, 왜 그러한 지식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지도 알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7뒤에 영계에 관한 기록이 이어지는 것은 창2의 해설과 무관한 이야기가 갑자기 끼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다고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은 앞으로 말씀의 속뜻을 읽기 위해 독자의 시야를 넓혀 주는 역할을 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적 삶만이 인간 존재의 전부라는 전제에서 벗어나, 말씀의 속뜻이 향하고 있는 영적 삶의 실재를 함께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삶의본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AC.67한 번호에서 완전히 닫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시작되어 앞으로 계속 답을 얻게 되는 질문입니다. AC.67에서 우선 붙들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은 서로 떨어진 두 주제가 아니며,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그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 가는 것이 속뜻의 아르카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다른삶’이 실제로 어떠한지는 이어지는 그의 증언을 따라가며 확인하게 됩니다. (AC.67심화1)
AC.67은 창2의 본문 해설에 들어가기 전에 스베덴보리가 왜 ‘다른삶’, 곧 사후의 삶에 관한 자신의 경험을 먼저 밝히려 하는지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하면서,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아르카나를 알기 위해 ‘다른삶의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한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바로 그 삶을 향하고 있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지는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은 창2해설과 무관하게 삽입된 별도의 사후세계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으로 제시됩니다.
또한 이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앞으로 밝힐 내용을 추론이나 사변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는 것이 허락되었고, 그 기간 동안 자신이 ‘듣고보았던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67은 이후 이어질 영계에 관한 기록의 성격을 미리 밝혀 주는 서문이기도 합니다. 독자는 앞으로 나오는 내용을 스베덴보리가 철학적으로 구성한 사후세계 이론이 아니라, 그 자신이 주님의 허락 아래 듣고 보았다고 증언하는 내용으로 만나게 됩니다. 이것은 그 증언의 진위를 여기서 별도로 논증한다는 뜻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자신의 기록을 어떤 성격의 것으로 제시하는지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67은 아직 ‘다른삶의본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을 알 수 없다고 말한 뒤, 이제 자신이 여러 해 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에서 영계의 구조나 사후 인간의 상태를 미리 완성해서 설명하기보다,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의 본성이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기록을 읽으면서 독자는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차례로 알게 되고, 동시에 그것이 왜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지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AC.67해설)
AC.5에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는 독자에게 가장 놀라운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 자신이 ‘수년동안끊임없이,중단됨없이영들과천사들과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도 그들과 말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는영계의존재를믿는다’는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영들과 천사들과의 실제적인 교통이 지속적으로 허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수년동안’과 ‘끊임없이,중단됨없이’라는 표현입니다. AC제1권이 출판된 것은 1749년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그의 생애 말년에 과거를 회고하면서 쓴 것이 아니라,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세상에 내놓는 바로 그 시점에 이미 수년 동안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어 왔다고 밝힌 것입니다. 이후 그의 신학 저술 전체에 방대한 영계 경험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AC.5는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기록의 매우 이른 시기에 놓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꿈이나 한두 차례의 환시를 경험했다는 주장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들을 ‘보았다’고만 하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자신도 그들과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끊임없이,중단됨없이’ 계속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은 자신의 영계 경험을 순간적인 종교적 황홀경이나 특별한 꿈 몇 차례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에서 일상생활을 계속하면서도 영적 세계의 존재들과 의식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상태가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그렇다면이것은객관적으로증명된사실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 글의 역할은 아닙니다. 반대로 현대인의 경험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환각이나 상상이라고 판정하는 것 역시 AC.5를 읽기 전에 이미 결론을 내리는 셈이 됩니다. 이 단계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읽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영적 세계를 상상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허락으로 영들과 천사들과 실제로 교통했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가 이후 제시하는 방대한 기록과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면서 판단할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삶에는 AC출판 이전부터 중요한 내적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1740년대 전반 그는 오랫동안 해 온 자연과학과 철학적 탐구에서 점차 인간의 내면과 영적인 문제로 관심을 옮겨 가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의 개인 기록 가운데 잘 알려진 것이 흔히 ‘꿈일기’라고 불리는 기록입니다. 그 안에는 꿈과 내적 갈등, 자기 성찰과 종교적 경험 등이 나타납니다. 이런 자료들은 훗날 그의 신학 저술이 갑자기 아무런 배경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상당한 내적 전환의 시기가 있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이 준비 기간의 꿈과 AC.5에서 말하는 지속적인 영계 교통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꿈을 꾸고 강렬한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과,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들과 천사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AC.5의 주장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전환에는 여러 단계와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보되, 후대에 전해진 유명한 일화 하나를 모든 것의 정확한 시작점으로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소명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1745년의 경험도 이런 구별이 필요합니다. 그의 생애를 전하는 여러 자료에서는 1745년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다루며, 주님으로부터 말씀의 영적 의미를 밝히는 사명과 관련된 경험이 있었다는 전승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장소와 구체적인 장면, 무엇을 보았고 어떤 말을 들었는지를 하나의 확정된 역사적 장면처럼 재구성할 때에는 자료의 성격을 구별해야 합니다. AC.5자체가 우리에게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것은 훨씬 단순합니다. 이 책을 출판할 당시 스베덴보리는 이미 ‘수년동안’ 주님의 신적 자비로 영들과 천사들과 지속적으로 교통하는 일이 허락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경험을 어떤 목적으로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AC.5는 자신의 특별함을 소개하기 위한 자서전이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1-4에서 그는 말씀 안에 속뜻이 있으며, 창세기 첫 장들이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사람이어떻게그런것을알수있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AC.5는 ‘이것이참으로그러하다는사실은주님으로부터가아니고서는아무도알수없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에 관한 증언은 그가 앞으로 말할 영적인 것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독자에게 밝히는 문맥 속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신적자비’라는 표현은 ‘중단됨없이’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일을 자기 지성의 성취나 특별한 영적 능력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것은 ‘허락된’ 일이었습니다. AC.5의 문법 자체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자신이 영계를 열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경험의 중심에는 ‘특별한능력을가진스베덴보리’보다 ‘특별한목적을위하여허락하신주님’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특별한 허락이 필요했을까요? AC.5자체에서 스베덴보리가 곧이어 열거하는 내용을 보면 그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러 종류의 영들, 죽음 이후 인간의 상태, 지옥, 천국, 그리고 특히 온 천국에서 인정되는 신앙의 교리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즉 영계와의 교통은 단순히 ‘저세상이실제로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과 천국과 지옥의 질서,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했다고 해서 그의 신학 전체를 ‘천사들에게배운내용’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의 첫 문장에서 그는 이것을 알 수 있는 근원을 ‘주님으로부터’라고 명시합니다. 이후 그의 저술에서도 주님과 말씀의 권위는 영이나 천사의 말보다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영들과이야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진리의 최종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특별한 영계의 경험이 허락된 것 역시 주님께서 말씀과 영적인 질서를 밝히시는 더 큰 목적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기록을 앞으로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그가 어떤 영을 만나 그 영이 무엇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 영의 말이 곧 신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상태에 있으며, 선한 영도 있고 악한 영도 있으며,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이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AC.5에서 곧바로 ‘여러종류의영들’을 언급하는 것도 이러한 영계의 다양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다음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중단됨없이’라는 말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영적 이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신앙인이 영들을 보고 천사들과 대화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주님을 믿으며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영계의 시각적 경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영적 현상을 신앙의 목표로 삼으면 현상 자체에 마음을 빼앗길 위험도 있습니다. AC의 중심은 영을 보는 능력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고 그분의 질서 안에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스베덴보리를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그의 영계 경험이 놀랍기 때문에 그것만 좇아 읽으면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가 거대한 사후세계 체험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영계 경험이 낯설다는 이유로 그것을 모두 제거하고 성경 해설만 취하려 하면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소명과 저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놓치게 됩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그 경험이 그의 말씀 해설과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5의 ‘중단됨없이영들과천사들과함께지내게되어’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이한 현상의 지속 기간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앞으로 말하려는 영계의 일들을 추측하거나 상상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보고 듣고 대화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허락되었으며 그 가운데 가르침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우선 그 증언을 그가 말한 그대로 정확히 이해한 뒤, 이후 수천 개의 AC글을 따라가며 그 증언이 실제로 어떤 내용으로 펼쳐지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심화에서 만나게 될 ‘여러종류의영들’이라는 표현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았다고 하는 영계는 모든 영이 똑같은 상태로 존재하는 단순한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사후에 어떤 상태를 거치며, ‘영’, ‘천사’, ‘악한영’ 등의 표현은 어떻게 구별되는지 이해하기 시작하면 AC.5의 짧은 문장이 앞으로 펼쳐질 방대한 영계 기록의 문을 열고 있었다는 사실도 조금씩 보이게 됩니다. (AC.5심화1)
이것이참으로그러하다는사실은주님으로부터가아니고서는아무도알수없습니다.그러므로미리말씀드릴것은,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저는이제수년동안끊임없이,중단됨없이영들과천사들과함께있으면서그들이말하는것을듣고,또저도그들과말할수있도록허락받았다는것입니다.이렇게하여저는지금까지어떤사람에게도알려진적이없고,사람의생각속에조차들어온적이없는사후세계의놀라운것들을듣고볼수있었습니다.저는여러종류의영들에관하여,죽음이후영혼들의상태에관하여,지옥곧불신앙가운데있는자들의비참한상태에관하여,천국곧신앙안에있는자들의복된상태에관하여,그리고특히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신앙의교리에관하여가르침을받았습니다.이러한주제들에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이어지는글들에서더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nor into his idea.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hell,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heaven,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on which subjects,of the Lord’s Divine mercy,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5는 짧은 서문 AC.1-5의 마지막 글이면서, 앞의 네 글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속뜻이 있으며,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고, 문자와 내적 의미의 관계가 인간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와 같으며, 창세기 첫 장들이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이것을어떻게알았는가?’AC.5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그의 첫 번째 대답입니다.
첫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참으로그러하다는사실은주님으로부터가아니고서는아무도알수없습니다.’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관한 지식의 궁극적인 출처를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학문적 연구만으로 발견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앞으로 밝히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해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알게 된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AC.5는 단순한 영계 체험담의 서두라기보다, 앞으로 자신이 말할 것의 출처에 관한 선언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지는 표현에서도 같은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능력을 얻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경험이 실제적이었다는 매우 강한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험의 원인을 자기 능력이나 공로에 돌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주님의신적자비’라는 표현은 이 짧은 AC.5의 처음과 마지막에 등장하여 사실상 글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수년동안끊임없이,중단됨없이’라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어느 날 잠깐 환상을 보았거나 꿈속에서 영적인 광경을 경험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하며 듣고 말하는 상태가 계속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후 AC에 등장하는 영계에 관한 수많은 기록을 이해할 때에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단편적인 환상이나 상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므로그의모든주장은참이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과 ‘그가무엇을주장하는지를정확히이해하는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는 독자에게 자신의 경험을 강제로 증명하려는 단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말하는지를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 읽는 독자는 이 단계에서 그의 영계 경험을 즉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보다, 우선 ‘저자는자신이이런경험을주님으로부터허락받았다고주장하며이책을쓰고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후의 내용을 따라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보고 들었다고 하는 내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천국을보았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여러종류의영들’, ‘죽음이후영혼들의상태’, ‘지옥’, ‘천국’, 그리고 ‘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신앙의교리’를 차례로 열거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AC곳곳에 삽입될 영계 기록들의 주요 주제를 미리 보여 주는 작은 목차와도 같습니다. 실제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해설하는 글 사이사이에 사후세계와 영들, 천국과 지옥, 인간의 영적 구조 등에 관한 기록을 광범위하게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음이후영혼들의상태’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만 떼어 읽으면 인간이 지상에서는 단지 물질적인 존재였다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을 따라가면 인간에게는 지상생활 중에도 영적인 내면이 있으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통하여 살아간다는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의 생명이 끝나거나 전혀 다른 존재가 새로 생기는 사건이라기보다, 물질적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생명을 계속 살아가는 전환입니다. 따라서 AC.5의 ‘soulsafterdeath’는 그 이후의 가르침 전체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옥을 ‘불신앙가운데있는자들의비참한상태’, 천국을 ‘신앙안에있는자들의복된상태’라고 표현한 것도 이후 AC를 읽으면서 점차 깊어질 부분입니다. 여기서 ‘신앙’을 단순히 어떤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의 관계를 계속 설명하며,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신앙이 참된 신앙일 수 있는지를 매우 깊이 다룹니다. 따라서 이 짧은 서문의 ‘신앙안에있는자’와 ‘불신앙가운데있는자’를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종교적 소속이나 교리 동의 여부로 미리 고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신앙의교리’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제시할 신앙의 교리를 자기 개인의 신학 체계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이 ‘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교리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문장을 과장해서 확대하기보다, 그가 이후 실제로 무엇을 ‘신앙의교리’라고 설명하는지 AC를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5에서는 그 내용을 아직 상세하게 제시하지 않고 앞으로 더 말하겠다고만 예고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AC.5가 말씀의 속뜻에 관한 계시와 영계 경험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해서 ‘천사들에게창세기의속뜻을배워적었다’고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의 첫 문장은 지식의 궁극적인 출처를 ‘주님으로부터’라고 밝히고,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을 통하여 사후세계에 관한 여러 사실을 듣고 보았으며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천사들이스베덴보리에게가르쳐준신학’으로 압축하는 것은 이 단락 자체보다 더 나아간 설명이 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그의 영계 경험을 흥미로운 초자연적 현상 자체로 소비하면 AC의 중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영계에 관한 모든 기록을 주변적인 장식으로 제거해 버려도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놓치게 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록을 그가 제시하는 전체 질서 안에서 읽는 것입니다. 영계에 관한 지식 역시 결국 주님과 말씀, 천국과 교회, 인간의 거듭남과 영원한 삶을 이해하는 데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5에서 가장 먼저 기억할 말은 ‘영들과천사들’보다 오히려 ‘주님의신적자비’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놀라운 경험을 말하면서도 그 경험의 출처와 허락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말하려는 사후세계의 여러 사실과 신앙의 교리 역시 자기 자신을 중심에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알려지고 허락된 것을 전하려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5는 하나의 짧지만 잘 짜인 서문을 이룹니다. AC.1은 말씀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AC.2는 그 말씀의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밝힙니다. AC.3은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합니다. AC.4는 그 원리를 창세기에 적용하여 창세기 1장이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AC.5는 ‘그것을어떻게알수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 지식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자신에게 영적 세계와의 특별한 교통이 허락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제 서문은 끝나고 AC.6부터 창세기 1장의 실제 해설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조의 여섯 날을 인간의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인 상태로 개관한 뒤, 창1:1부터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를 풀어 갑니다. 따라서 AC.5는 단순히 ‘스베덴보리가영계를보았다’는 놀라운 이야기로 서문을 끝내는 글이 아닙니다. 독자가 이제부터 읽게 될 방대한 해설이 어떤 주장 위에 서 있는지를 밝히고, 그 문턱에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의 근원을 ‘주님의신적자비’에 두는 글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AC.5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