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9에서 스베덴보리는 창2부터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단지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천적 인간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여호와하나님’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하나님’으로 호칭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먼저 AC.89가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호칭의 변화를 분명히 지적하고, 이것을 지금부터 앞에서 다루었던 영적 인간과는 다른 사람, 곧 천적 인간이 다루어진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AC.89자체에서는 왜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하나님’이라 하고 천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여호와하나님’이라 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한 번호만으로 ‘여호와는언제나사랑을의미하고하나님은언제나진리를의미한다’거나, ‘여호와하나님은언제나사랑과진리의결합을의미한다’는 식으로 고정해서 설명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차이를 설명하는 내용들을 찾을 수 있더라도, 그것을 확인하지 않은 채 AC.89의 짧은 언급만으로 전체 호칭 체계를 먼저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이 질문을 계기로 ‘예수’, ‘그리스도’, ‘주’, ‘구주’,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아들’, ‘인자’, ‘성령’등 주님에 관한 모든 호칭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도 AC.89의 독자가 지금 필요로 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러한 호칭들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각각 성경의 문맥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호칭을 설명하는 곳에서 살펴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여러 호칭이 나온다고 해서 먼저 각 호칭에 하나씩 고정된 ‘기능’이나 ‘작용’을 배정해 놓고 이후의 본문을 그 틀에 맞추어 읽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89의 호칭 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것을 천적 인간의 형성이 새롭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제시했으므로 반드시 주목해야 합니다. 창1에서 영적 인간이 형성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창2에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면서 ‘여호와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합니다. 독자는 우선 이 변화가 우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방법에서도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질 때 그 차이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이름 하나를 발견하자마자 미리 만든 의미표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 이름의 차이를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89에서는 우선 ‘하나님’에서 ‘여호와하나님’으로의 변화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주제가 전환되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지라는 데까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하나님에서여호와하나님으로바뀌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서 완전히 닫기보다 가지고 가는 편이 좋습니다. AC.89가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 주는 것은 호칭의 변화가 의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더 깊은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이후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들을 직접 설명할 때 하나씩 확인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먼저 만든 주님의 호칭 체계로 AC를 읽는 것이 아니라, AC자체가 주님의 여러 이름을 어떻게 열어 가는지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89심화1)
AC.85의 첫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천적 인간이‘일곱째날’이고 그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아르카나라면,왜 이것은 처음부터 좀 더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았을까요?말씀에 이 정도의 설명이라도 함께 주어졌다면 안식일과 창조의 날들을 둘러싼 많은 혼란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AC.85가 실제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는 이 아르카나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를 곧바로 설명합니다.‘천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이아무도없었고,영적인간의본성을아는사람도거의없었기때문’이라고 합니다.그리고 이러한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AC.85가 직접 주는 첫 번째 답은 분명합니다.‘일곱째날’과‘안식일’의 속뜻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바로 그것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를 모르면 왜 영적 인간의 형성이 여섯째 날과 연결되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 또는 안식일과 연결되는지도 알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앞의AC.67에서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 안에는‘다른삶의본성이무엇인지알지못하면결코알수없는’아르카나들이 있다고 한 것과도 닮아 있습니다.어떤 속뜻은 단어 하나의 암호를 알아내듯 풀리는 것이 아니라,그 속뜻이 가리키는 영적 실재 자체를 알아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AC.85의 안식일도 그런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천적 인간이라는 영적 상태를 알지 못하면 일곱째 날이 왜 천적 인간인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그렇다면주님께서는왜천적인간의본성을처음부터모든사람에게명백하게설명하지않으셨는가?’라고 물으면,AC.85한 번호만으로는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AC.85는‘왜이아르카나가알려지지않았는가’에 관하여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왜주님께서그것을더일찍명시적으로계시하지않으셨는가’라는 더 큰 섭리의 문제까지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자유,인간의 수용 상태,말씀의 문자와 속뜻의 관계,속뜻의 보존,신적 섭리와 계시의 때 같은 스베덴보리의 다른 가르침들을 곧바로AC.85의 확정적인 해답으로 끌어오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그러한 주제들은 이 질문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지만,각각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문제를 다루는 곳에서 확인하면서 연결해야 합니다.
또 하나 조심할 것은‘속뜻이처음부터명백하게쓰여있었다면교회사적혼란이없었을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그렇게 생각할 충분한 인간적인 이유는 있습니다.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명백한 설명이 언제나 명백한 수용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이 문제는 주님의 계시 방식에 대한 우리의 추측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히는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처음의 질문을 접어 둘 필요는 없습니다.오히려 매우 중요한 질문으로 남겨 둘 가치가 있습니다.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지금까지알려지지않았다’,‘밝히는것이허락되었다’,‘이것은아르카나이다’라고 말하는 곳들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그때마다‘왜이제야밝혀지는가?’라는 질문이 다시 생길 수 있습니다.그런 본문들이 충분히 쌓이면 우리는 한 번호의 추측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의 여러 설명을 서로 대조하면서 더 신중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AC.85에서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먼저 가는 것이 좋습니다.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안식일이라는 아르카나가 알려지지 않았던 직접적인 이유는 천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적 인간의 본성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그보다 더 깊은 질문,곧‘왜이러한영적실재가오랫동안알려지지않도록허용되었는가?’는 여기서 성급하게 닫지 않고,앞으로AC가 그 답을 열어 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할 질문입니다.(AC.85심화1)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창2:4)
AC.89
‘하늘과땅의내력’(nativitiesoftheheavensandoftheearth)은천적인간의형성을뜻합니다.여기서그의형성이다루어지고있다는것은뒤따르는모든세부사항으로부터매우분명합니다.아직초목이자라지않았다는것,땅을갈사람이없었다는것,여호와하나님께서사람을지으셨다는것,그리고그후에들의모든짐승과하늘의모든새를만드셨다는것등이그러합니다.이들의형성은이미앞장에서다루어졌음에도여기서다시언급됩니다.이모든것으로부터여기서는다른사람이다루어지고있음이분명합니다.그러나이것은이제처음으로주님을‘여호와하나님’(JehovahGod)이라한다는사실에서더욱분명합니다.앞에서영적인간을다루는구절들에서는단지‘하나님’(God)이라고만하였습니다.더나아가이제는‘지면’(ground)과‘들’(field)이언급되는반면,앞에서는오직‘땅’(earth)만언급되었습니다. 또이구절에서는먼저‘하늘’(heaven)이‘땅’(earth)보다앞에언급되고,그후에는‘땅’(earth)이‘하늘’(heaven)보다앞에언급됩니다.그이유는‘땅’(earth)은겉사람을,‘하늘’(heaven)은속사람을의미하기때문입니다.영적인간에게서는개혁이‘땅’(earth),곧겉사람으로부터시작되는반면,여기서다루는천적인간에게서는속사람,곧‘하늘’(heaven)로부터시작됩니다.The “nativitiesoftheheavensandoftheearth” are the formations of the celestial man.That his formation is here treated of is very evident from all the particulars which follow,as that no herb was as yet growing;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as well as that Jehovah God formed man,and afterwards,that he made every beast and bird of the heavens,notwithstanding that the formation of these had been treated of in the foregoing chapter;from all which it is manifest that another man is here treated of.This however is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act that now for the first time the Lord is called “JehovahGod,” whereas in the preceding passages,which treat of the spiritual man,he is called simply “God”;and,further,that now “ground” and “field” are mentioned,while in the preceding passages only “earth” is mentioned.In this verse also “heaven” is first mentioned before “earth,” and afterwards “earth” before “heaven”;the reason of which is that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and “heaven” the internal,and in the spiritual man reformation begins from “earth,” that is,from the external man,while in the celestial man,who is here treated of,it begins from the internal man,or from “heaven.”
해설
AC.89는 창2:4부터 시작되는 내용이 창1의 창조 기사를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님을 먼저 밝힙니다. ‘하늘과땅의내력’은 속뜻에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뒤따르는 내용으로부터 매우 분명하다고 합니다. 창1에서는 이미 초목이 나고 사람과 동물과 새가 창조되었는데, 창2에서는 다시 아직 초목이 자라지 않았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다고 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후에 들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이미 앞 장에서 그 형성이 다루어졌는데도 다시 언급되는 것은 이제 ‘다른사람’이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른사람’은 두 번째 역사적 개인을 뜻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다룬 영적 인간과 구별되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말합니다. AC.83에서 영적 인간에게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84-88에서는 그 천적 인간을 일곱째 날과 안식일, 그리고 하나님의 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89부터는 그 천적 인간의 형성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부터 다른 사람이 다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본문상의 변화도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단지 ‘하나님’이라고 하였지만, 이제 처음으로 ‘여호와하나님’이라 합니다. 또한 앞에서는 ‘땅’만 언급되었지만 이제는 ‘지면’과 ‘들’이 등장합니다. 이 변화들은 우연한 표현상의 차이가 아니라 지금부터 천적 인간의 형성이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지입니다. 다만 AC.89는 왜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하나님’이라 하고 여기서는 ‘여호와하나님’이라 하는지 그 정확한 이유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에서는 우선 호칭의 변화 자체가 의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 차이의 더 깊은 이유는 별도로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지면’과 ‘들’역시 이 번호에서 아직 각각의 의미가 설명되지 않으므로 뒤따르는 해설을 기다려야 합니다.
AC.89의 가장 중요한 설명은 창2:4의 어순에 있습니다. ‘이것이천지가창조될때에하늘과땅의내력이니’에서는 하늘이 땅보다 먼저 나오지만, 이어지는 ‘여호와하나님이땅과하늘을만드시던날에’에서는 땅이 하늘보다 먼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서까지 속뜻에서 의미 있게 읽습니다. ‘땅’은 겉 사람을, ‘하늘’은 속 사람을 의미하며, 영적 인간에게서는 개혁이 ‘땅’, 곧 겉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반면 천적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 곧 ‘하늘’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게 속 사람이 없고 천적 인간에게만 속 사람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사람 모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지만,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구별하는 것은 개혁과 형성이 시작되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곧바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형성 과정을 세부적으로 완성해 설명하기보다, 영적 인간의 개혁은 겉 사람으로부터,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원문 자체의 구별을 정확히 보존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89는 앞으로 이어지는 창2의 상세 해설을 읽는 중요한 안내판입니다. 초목과 지면과 들, 사람과 짐승과 새가 다시 등장한다고 해서 창1과 같은 내용을 되풀이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다루는 것은 천적 인간의 형성이며, ‘여호와하나님’이라는 이름과 ‘지면’과 ‘들’이라는 새로운 표현, 그리고 ‘하늘과땅’, ‘땅과하늘’의 순서가 그 전환을 보여 줍니다. 특히 영적 인간의 개혁이 겉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데 비하여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 이 번호에서 밝혀지는 핵심적인 차이입니다. 다만 이것을 인간이 자기 내면을 탐색하여 스스로 천적 인간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 AC.88에서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이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역시 그 형성의 주체가 인간 자신이라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창조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89해설)
심화
1.왜‘하나님’에서‘여호와하나님’으로바뀌는가?
AC.89에서 스베덴보리는 창2부터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주님을 단지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이제 천적 인간을 다루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여호와하나님’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에서 ‘여호와하나님’으로 호칭이 달라지는 것일까요?
먼저 AC.89가 실제로 말하는 범위를 정확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이 호칭의 변화를 분명히 지적하고, 이것을 지금부터 앞에서 다루었던 영적 인간과는 다른 사람, 곧 천적 인간이 다루어진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AC.89자체에서는 왜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하나님’이라 하고 천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여호와하나님’이라 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한 번호만으로 ‘여호와는언제나사랑을의미하고하나님은언제나진리를의미한다’거나, ‘여호와하나님은언제나사랑과진리의결합을의미한다’는 식으로 고정해서 설명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곳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차이를 설명하는 내용들을 찾을 수 있더라도, 그것을 확인하지 않은 채 AC.89의 짧은 언급만으로 전체 호칭 체계를 먼저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이 질문을 계기로 ‘예수’, ‘그리스도’, ‘주’, ‘구주’, ‘아버지’, ‘아들’, ‘하나님의아들’, ‘인자’, ‘성령’등 주님에 관한 모든 호칭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것도 AC.89의 독자가 지금 필요로 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러한 호칭들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만, 각각 성경의 문맥과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호칭을 설명하는 곳에서 살펴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여러 호칭이 나온다고 해서 먼저 각 호칭에 하나씩 고정된 ‘기능’이나 ‘작용’을 배정해 놓고 이후의 본문을 그 틀에 맞추어 읽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89의 호칭 변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것을 천적 인간의 형성이 새롭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제시했으므로 반드시 주목해야 합니다. 창1에서 영적 인간이 형성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는데, 창2에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면서 ‘여호와하나님’이라는 호칭이 등장합니다. 독자는 우선 이 변화가 우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방법에서도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질 때 그 차이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이름 하나를 발견하자마자 미리 만든 의미표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그 이름의 차이를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89에서는 우선 ‘하나님’에서 ‘여호와하나님’으로의 변화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주제가 전환되었음을 보여 주는 하나의 표지라는 데까지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하나님에서여호와하나님으로바뀌는가?’라는 질문은 여기서 완전히 닫기보다 가지고 가는 편이 좋습니다. AC.89가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 주는 것은 호칭의 변화가 의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변화의 더 깊은 이유는 스베덴보리가 이후의 본문에서 하나님의 이름들을 직접 설명할 때 하나씩 확인하면 됩니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먼저 만든 주님의 호칭 체계로 AC를 읽는 것이 아니라, AC자체가 주님의 여러 이름을 어떻게 열어 가는지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89심화1)
AC.86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전환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시작할때’, 바로 그 상태가 ‘안식일의저녁’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83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거기서는 사람이 여섯째 날에 이르면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그때 신앙이 아니라 사랑, 곧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시작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6에서는 바로 그 변화가 시작되는 상태를 ‘안식일의저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과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 사이를 서로 아무 관계 없는 두 상태처럼 끊어서 볼 것이 아니라,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어 가는 전환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녁’을 곧바로 어둠이나 악이나 타락의 상태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6은 이 ‘저녁’이 무엇인지를 직접 밝혀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미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고정된 사전처럼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어떤 표현이 다른 문맥에서 특정한 의미를 나타냈다고 해서 그 의미를 모든 곳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안식일의저녁’이 어떤 상태인지를 분명히 말하고 있으므로 그 설명을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동시에 이 상태를 몇 단계로 이루어진 별도의 심리적 과정처럼 세분할 필요도 없습니다. AC.86이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을 ‘안식일의저녁’이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가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표상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AC.85에서 유대교회에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제정되지 않았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여섯 날의 수고와 일곱째 날의 안식이 싸움과 평화를 표상했듯이, 저녁부터 시작되는 안식일도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표상한 것입니다. 다만 AC.86은 여기서 유대교회의 안식일 규례 전체의 역사나 그 세부적인 의미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녁부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켰다는 사실을 통하여 ‘안식일의저녁’이라는 전환의 상태를 보여 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적인간은아침’이라고 말하면서 이에 대해서는 곧 이어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침’의 의미를 미리 자세히 풀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이 번호에서 확실히 밝혀진 것만 붙들면 충분합니다. ‘여섯째날’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가 ‘안식일의저녁’이고, 천적 인간은 ‘아침’입니다. AC.83에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시작한다’고 한 설명과 AC.86에서 천적 인간이 ‘되기시작한다’고 한 설명이 서로 이어지면서,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의 변화가 한순간의 단절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어지는 거듭남의 질서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아침’에 관해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곧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리는 그 설명을 기다리면 됩니다. (AC.86해설)
‘하늘과땅과그모든만상’(heavensandtheearthandallthearmyofthem)은사람이‘여섯째날’(sixthday)이되었을때‘다이루어졌다’(finished)고합니다.그때신앙과사랑이하나를이루기때문입니다.신앙과사랑이하나를이룰때에는신앙이아니라사랑이,다시말해영적인것이아니라천적인것이주된것이되기시작합니다.이것이천적인간이되는것입니다. The “heavensandtheearthandallthearmyofthem” are said to be “finished,”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day,” for then faith and love make a one.When they do this,love,and not faith,or in other words the celestial principle,and not the spiritual,begins to be the principal,and this is to be a celestial man.
해설
AC.83은 창2:1의 ‘다이루어지니라’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한 단계 더 설명합니다. AC.82에서는 사람이 이제 ‘여섯째날’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으며, ‘하늘’은 그의 속 사람, ‘땅’은 그의 겉 사람이고, ‘그모든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앎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83에서는 왜 이 모든 것이 사람이 ‘여섯째날’이 되었을 때 ‘다이루어졌다’고 하는지를 밝힙니다. 그 이유는 그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이루어졌다’는 것은 사람의 거듭남에 더 이상 아무 변화도 남아 있지 않은 절대적인 완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설명에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시작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에는 창1에서 다루어 온 영적 인간의 형성이 하나의 완성에 이르면서 동시에 천적 인간의 상태로 들어가는 새로운 전환이 시작됩니다.
그 전환의 핵심을 스베덴보리는 ‘신앙과사랑이하나를이룬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AC.81에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비교한 내용과 직접 연결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하지만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 그렇게 하고, 또한 그 신앙으로부터 행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사랑으로부터 행합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남기는 것이 아닙니다. AC.83은 신앙과 사랑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하나를이룬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달라지는 것은 그 둘의 관계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룰 때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시 ‘신앙이아니라사랑이’, ‘영적인것이아니라천적인것이’주된 것이 된다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신앙이아니라’라는 말을 신앙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 문장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에게도 신앙이 있지만, AC.81에서 이미 보았듯 그것은 ‘사랑에서나오는신앙’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것이아니라천적인것이주된것이된다’는 말도 영적인 것이 제거되거나 무가치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번호의 초점은 무엇이 없어지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주된것’이 되는가에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으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바로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은 AC.77에서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던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사랑과 신앙은 모두 천적 인간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지식의 나무가 신앙을 의미한다는 사실만으로 신앙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도 다시 확인됩니다. 다만 AC.83에서는 아직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나 이후의 타락을 설명하고 있지 않으므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해당 본문의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되기시작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만 하지 않고 ‘되기시작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을 서로 완전히 단절된 두 상태처럼 생각하기보다, 여섯째 날에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고, 이어지는 일곱째 날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가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 흐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AC.83에서 ‘여섯째날’의 완성은 끝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입니다. 창1에서 형성되어 온 영적 인간에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그 안의 질서가 변화하고, 사랑 곧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창1의 여섯째 날에서 창2의 천적 인간으로 이어지는 전환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단순히 ‘사랑이많은사람’이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83이 말하는 것은 감정의 강도가 아닙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그 하나 됨 가운데 사랑이 주된 것이 되는 내적인 질서입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핵심을 단순히 ‘사랑이신앙보다중요하다’고 요약하면 원문의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AC.82와 AC.83을 함께 읽으면 창2:1의 속뜻이 상당히 분명해집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땅’은 겉 사람이며, ‘그모든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앎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다이루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날’이 되어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 됨 가운데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며, 바로 이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AC.83해설)
이장은천적인간을다루는데,앞장이죽은사람으로부터형성된영적인간을다룬것과같습니다.그러나오늘날에는천적인간이무엇인지알려져있지않고,영적인간이나죽은사람이무엇인지조차거의알려져있지않으므로,그차이를알수있도록각각의본성이어떠한지를간략히말하는것이저에게허락되었습니다. 첫째,죽은사람은몸과세상에속한것외에는아무것도참되고선한것으로인정하지않으며,바로그것을숭배합니다.영적인간은영적이고천적인진리와선을인정합니다.그러나그는사랑에서라기보다는신앙의원리로부터그렇게하며,또한그것을바탕으로행합니다.천적인간은영적이고천적인진리와선을믿고퍼셉션하며,사랑에서나오는신앙외에는다른신앙을인정하지않고,또한그사랑으로부터행합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or a dead man,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First,then,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and this he adores.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and not so much from love.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죽은사람에게영향을미치는목적들은오직육체적이고세상적인삶만을향하며,그는영원한삶이무엇인지,주님이어떤분이신지도알지못합니다.혹안다하더라도믿지않습니다.영적인간에게영향을미치는목적들은영원한삶을향하고,그것을통하여주님을향합니다.천적인간에게영향을미치는목적들은주님을향하고,그것을통하여주님의나라와영원한삶을향합니다. Second: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or what the Lord is;or should he know,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죽은사람은싸움가운데있을때거의언제나굴복하며,싸움가운데있지않을때에는악과거짓이그를지배하고그는종이됩니다.그의결박은외적인것으로서,법에대한두려움,생명을잃는것에대한두려움,재산과이익을잃는것에대한두려움,그리고그가이러한것들때문에중요하게여기는평판을잃는것에대한두려움과같은것들입니다.영적인간은싸움가운데있지만언제나승리합니다.그를제어하는결박은내적인것이며,양심의결박이라합니다.천적인간은싸움가운데있지않으며,악과거짓의공격을받을때그것들을업신여깁니다.그러므로그는정복자라합니다.그는겉으로보기에는아무런결박에도제어되지않는듯하며자유롭습니다.그의결박은겉으로드러나지않는데,그것은선과진리에대한퍼셉션입니다. Third: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and when not in combat,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such as the fear of the law,of the loss of life,of wealth,of gain,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but is always victorious;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he despises them,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but is free. His bonds,which are not apparent,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AC.81은 창2에서 말하는 ‘천적인간’이 어떤 사람인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 장인 창1이 ‘죽은사람으로부터형성된영적인간’을 다루었고, 이 장인 창2는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먼저 밝힙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영적 인간과 죽은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셋의 차이를 알 수 있도록 각각의 본성을 간략히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81은 앞으로 창2를 읽을 때 계속 기준이 되는 중요한 비교표와 같은 번호입니다.
첫 번째 차이는 사람이 ‘무엇을참되고선한것으로인정하며,무엇으로부터행하는가’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여기서 ‘죽은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창1에서 이미 다루었던,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의 사람입니다. 그의 관심과 판단의 중심이 몸과 세상에 속한 것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를 ‘죽은사람’이라 합니다.
영적 인간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제한이 붙습니다. 그는 ‘사랑에서라기보다는신앙의원리로부터’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원리를 바탕으로 행합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그 신앙으로부터 행합니다. 다만 아직 사랑 자체로부터 알고 행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표현이 다시 달라집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퍼셉션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사용되지 않았던 ‘퍼셉션’이 여기에서 직접 등장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사랑에서나오는신앙외에는다른신앙을인정하지않는다’고 합니다. 그가 행하는 것도 바로 그 사랑으로부터입니다. 따라서 AC.77에서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던 것이 AC.81에 이르러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 사랑과 신앙은 서로 무관한 두 가지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에서나오는신앙’을 신앙이 사라진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천적 인간에게 신앙이 없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에서나오는신앙’을 인정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천적 상태를 ‘신앙을넘어사랑으로간상태’라고 단순화하면 원문의 표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차이는 신앙의 존재 여부보다 그 신앙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있습니다.
두 번째 차이는 ‘목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세 사람을 그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를 통해 다시 구별합니다. 죽은 사람의 목적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을 향합니다. 그는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지 못하며, 혹 안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몸과 세상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의 목적이 오직 그것만을 향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의 목적은 영원한 삶을 향하며, ‘그것을통하여주님’을 향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목적은 먼저 ‘주님’을 향하며, ‘그것을통하여주님의나라와영원한삶’을 향합니다. 이 순서는 AC.81이 직접 제시하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영원한 삶이 먼저 언급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 향하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주님이 먼저이며 그분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적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중심적인 목적이 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가지고 영적 인간은 자기 구원만 생각하고 천적 인간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지나치게 낮추어 말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 역시 영원한 삶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은 죽은 사람과 달리 모두 주님과 영원한 삶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목적의 질서에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세 번째 차이는 ‘싸움’과 ‘결박’입니다. 죽은 사람은 싸움 가운데 있을 때 거의 언제나 굴복하고, 싸움이 없을 때에는 악과 거짓의 지배를 받아 종이 됩니다. 그를 제어하는 것은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이나 재산이나 이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러한 것들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는 평판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외적인 결박입니다. 여기서 ‘결박’은 사람을 악에서 붙잡아 두는 제어의 수단을 가리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그 결박이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으며 언제나 승리하고, 그를 제어하는 결박은 ‘양심의결박’이라 합니다. 이것은 창1에서 거듭나는 영적 인간의 과정에 싸움이 있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싸움이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죽은 상태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싸우며, 그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다시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는 ‘싸움가운데있지않습니다.’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 그것들을 업신여기며, 그러므로 ‘정복자’라 합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에게 악과 거짓의 공격 자체가 전혀 없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악과거짓의공격을받을때’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차이는 공격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싸워서 이기지만, 천적 인간은 그것들을 업신여깁니다.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도 없는 것처럼 보이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에게도 ‘결박’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것은 외적으로 보이지 않는 ‘선과진리에대한퍼셉션’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천적 인간의 자유는 아무런 질서도 없고 아무 제어도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외적인 두려움이나 양심의 싸움에 의해 억지로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자체가 그의 내적인 결박이 됩니다.
이 점에서 첫 번째 비교와 세 번째 비교가 서로 만납니다. 첫 번째에서 천적 인간은 진리와 선을 ‘퍼셉션한다’고 했고, 세 번째에서는 그의 보이지 않는 결박이 ‘선과진리에대한퍼셉션’이라고 합니다. 퍼셉션은 천적 인간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방식일 뿐 아니라, 그가 자유롭게 살아가면서도 선과 진리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내적인 결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AC.77에서 처음 등장했던 퍼셉션의 의미를 한 단계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AC.81의 세 비교를 함께 보면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차이는 단순히 세 등급의 지식이나 도덕성의 차이가 아닙니다. 무엇을 선과 진리로 인정하는지, 무엇으로부터 행하는지, 삶의 목적이 어디를 향하는지, 악과 거짓을 대할 때 어떤 상태에 있는지, 무엇이 그를 제어하는지가 모두 달라집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에 머물고 외적인 결박에 붙들립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선과 진리를 신앙으로 인정하고 그 신앙으로부터 행하며, 양심의 결박 안에서 싸워 승리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인정하고 사랑으로부터 행하며, 주님을 목적으로 삼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AC.81은 앞에서 짧게 반복되었던 ‘영적인간에서천적인간으로’라는 말을 처음으로 상당히 구체적으로 풀어 주는 번호입니다. 특히 ‘신앙에서행함’과 ‘사랑에서행함’, ‘영원한삶을통하여주님을향함’과 ‘주님을통하여주님의나라와영원한삶을향함’, ‘싸워서승리함’과 ‘싸움없이악과거짓을업신여김’, ‘양심의결박’과 ‘선과진리에대한퍼셉션’이라는 차이를 함께 붙들면, 앞으로 창2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를 훨씬 분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AC.81해설)
AC.74는 바로 앞의 AC.73을 이어받습니다. AC.73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되며 창2에서는 바로 이것을 다룬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을 창2:2-3의 ‘일곱째날’과 연결하여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며,그날에주님께서쉬십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천적인간은일곱째날’이라는 말은 천적 인간이 문자 그대로 어떤 하루라는 뜻이 아닙니다. 창1에서 여섯 날은 사람이 거듭나는 연속적인 상태들을 나타냈으며, 이제 그 과정에 이어지는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2:2-3에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신다는 말씀도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연결됩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천적인간이쉰다’고 하지 않고 ‘그날에주님께서쉬신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현행 해설은 이것을 ‘주님의신적작용이방해받지않고그대로흘러가는상태’, ‘주님이사람안에서편히거하실수있는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방향은 앞으로의 설명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겠지만, AC.74자체는 아직 그 의미를 풀어 주지 않습니다. 이 번호에서는 우선 천적 인간과 일곱째 날, 그리고 주님의 안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을 곧바로 ‘더이상무엇을이루기위해애쓰지않아도되는상태’라고 정의하거나, 천적 인간에게는 ‘삶이더이상투쟁이아니라흐름이된다’고 설명하는 것도 여기서는 조금 이릅니다. 창1에서 여섯째 날까지 거듭남의 과정과 싸움이 있었고, 일곱째 날이 그 뒤에 온다는 큰 흐름은 분명하지만, 왜 이 상태를 특별히 주님의 안식이라 하는지는 뒤의 설명을 따라가며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AC.74를 사후의 천국 상태와 바로 연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행 해설은 여기서 천국을 ‘안식의상태’로 설명하고, 천적 인간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며 사랑에서 나오는 활동이 수고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확장합니다. 그러나 AC.74의 문맥은 AC.73과 마찬가지로 사후 소생을 설명하는 부분이 아니라 창2:1-17의 속뜻을 개괄하는 부분입니다. 지금은 거듭나는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가는 흐름 안에서 일곱째 날을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창1과 창2의 연결도 여기에서 다시 분명해집니다. 창1에서 여섯 날에 걸쳐 진행된 거듭남이 창2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창2:2-3의 일곱째 날은 앞의 여섯 날에 이어집니다. AC.73에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고 한 뒤 AC.74에서 그 천적 인간을 일곱째 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연속성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74는 천적 인간의 모든 특징을 설명하는 번호가 아닙니다. 이 번호가 하는 일은 훨씬 단순합니다. 창2:2-3의 일곱째 날이 속뜻에서 천적 인간을 가리키며, 바로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쉬신다는 사실을 개괄적으로 알려 주는 것입니다. 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지, 주님께서 그 안에서 쉬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뒤의 본문 해설에서 차츰 밝혀질 것입니다.
AC.73과 AC.74를 함께 읽으면 창2의 출발점이 선명해집니다.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되며,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날’입니다. 그리고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이것이 지금 스베덴보리가 독자에게 먼저 제시하는 창2:1-3의 큰 그림입니다. (AC.74해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창2:1-17)
AC.73
사람은죽어있던상태에서영적인간이된다음,영적상태에서천적상태가됩니다.지금여기에서는바로이것을다룹니다.(1절)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as is now treated of(verse 1).
천지와만물이다이루어지니라(1절)
해설
AC.73부터 창2:1-17의 개요가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2:1이 무엇을 다루는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사람은죽어있던상태에서영적인간이된다음,영적상태에서천적상태가됩니다.’ 이 짧은 문장은 창1과 창2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여기서 ‘죽어있던상태’는 육체적으로 죽은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의 AC.67-72에서 사후의 삶과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지는 일을 말했기 때문에 그렇게 오해하기 쉽지만, AC.73에서는 다시 창세기 본문의 거듭남에 관한 설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창1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나기 전의 사람을 ‘죽은사람’이라 했고, 창조의 여섯 날을 거치면서 사람이 점차 영적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창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을 다룹니다.
따라서 AC.73은 사후에 사람이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계속 상승한다는 설명이 아닙니다. 현행 해설은 ‘사후삶역시성장과변화의과정’이며 ‘이땅에서영적삶을얼마나성실히살았는가에따라천적상태로들어가는깊이와속도도달라진다’고 설명하지만, AC.73은 그런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창1에서 시작된 인간의 거듭남이 창2에서 어떻게 더 깊은 상태로 나아가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영적’에서 ‘천적’으로 간다는 표현도 이 번호에서는 우선 그 순서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 왜 영적 상태 다음에 천적 상태가 오는지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앞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적 인간은 이해와 진리를 중심으로 살고 천적 인간은 의지와 사랑을 중심으로 산다는 전체 구도를 미리 충분히 전개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3은 우선 독자에게 창2가 다룰 새로운 상태를 알려 주는 개요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창1과 창2사이의 큰 전환은 분명합니다. 창1의 여섯 날을 거치며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었고, 이제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일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창2는 창1과 무관한 두 번째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앞에서 진행되던 거듭남의 연속선 위에 놓여 있습니다. 창1에서 이루어진 상태가 끝이 아니라, 그 위에서 더 깊은 변화가 이어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지금여기에서는바로이것을다룹니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는 창2:1의 ‘천지와만물이다이루어지니라’를 문자적인 창조의 완성만으로 읽지 않고, 속뜻에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상태의 변화와 연결합니다. 다만 AC.73은 아직 ‘천지와만물’ 각각의 의미나 ‘다이루어지다’의 세부적인 속뜻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창2:1이 전체적으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가는 일을 다룬다고 개괄할 뿐이며, 구체적인 설명은 뒤의 번호들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창2를 읽는 기본 방향이 정해집니다. 창1에서 다룬 것은 죽어 있던 사람이 거듭남을 통하여 영적 인간이 되는 과정이었고, 창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따라서 AC.73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단절점이라기보다, 창1에서 시작된 거듭남이 한층 더 깊은 상태로 이어지는 전환점입니다. 이 구별을 붙들고 읽으면 앞으로 등장하는 ‘일곱째날’, ‘안식’, ‘에덴동산’, ‘생명나무’ 등의 설명이 어떤 큰 흐름 안에 놓여 있는지를 차츰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AC.73해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사람이‘신앙으로,그리고그신앙에서사랑으로참된것을말하고선한것을행한다’고 하고,이어서‘신앙과사랑양쪽에서동시에함께행동한다’고 합니다.또 영적 인간의 생명이‘신앙의지식들과체어리티의행위들에속한것들로기뻐하고유지된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이런 상태는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AC.12는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따라서 아래의 예들은‘스베덴보리가AC.12에서바로이런경우를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AC.12가 말하는 상태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해해 보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그신앙에서사랑으로참된것을말하고선한것을행한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합시다.그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실제로 자기 곁의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이 경우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 실제로 도와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그가 단지 순간적인 기분이나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면AC.12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사랑해야한다’는 진리가 말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선한 행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정직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어떤 사람이‘정직하게살아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면 훨씬 유리한 상황이 찾아왔습니다.그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거짓을 피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면,단지 정직이라는 원칙을 알고 있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자기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을 실제 삶에서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행동을했으니이사람은AC.12의여섯번째상태에있다’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사람의 내적 상태는 외적인 행동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여기에서 예를 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의 거듭남 단계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사랑으로선을행한다’는 표현이 실제 삶과 무관한 추상적인 말이 아님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신앙과사랑양쪽에서동시에함께행동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이것 역시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기능처럼 기계적으로 나누기보다,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고 행하는 것이 함께 가는 상태로 이해하면 조금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사랑한다고 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부모는 무엇이 아이에게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고,필요하면 가르치고 바로잡으면서도 아이의 선을 진심으로 원합니다.여기에는 무엇이 옳고 유익한가를 살피는 것과 실제로 아이의 선을 원하는 것이 함께 필요합니다.이것 역시 진리와 선,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의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누군가 잘못했을 때 무조건 감싸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반대로 옳고 그름만 따지면서 상대방의 형편을 전혀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진정한 유익을 바란다면,우리는‘진리와선이함께한다’는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2의 또 하나 어려운 표현은 영적 인간의 생명이‘신앙의지식들과체어리티의행위들에속한것들로기뻐하고유지된다’는 것입니다.이것 역시 단순히‘착한일을하면기분이좋아진다’는 정도로 축소해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AC.12는 영적 인간의 생명이 무엇을 먹고 사는가를 설명하면서,자연적 생명은 음식과 물로 유지되고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는 것을 점점 소중히 여기고,알고 있는 선을 실제로 행하는 삶에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전에는 자기 이익과 인정만이 중요했는데,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 소중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이것은AC.12가 직접 제시한 구체적인 사례라기보다‘영적생명이무엇으로기뻐하고유지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적용입니다.
여기서‘기쁨’도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선을 행할 때마다 반드시 감정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때로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으며,용서하거나 참고 섬기는 일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기쁨을 단순한 감정적 즐거움과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점차 진리와 선에 속한 것들을 향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AC.12에서 특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상태가 앞선 상태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사람은 처음부터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앞선 상태들을 거치면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어 가며,이제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신앙으로,그리고그신앙에서사랑으로’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위의 생활 사례들도‘이행동하나를하면여섯번째상태’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와 실제로 사랑하고 행하는 선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처음에는‘옳으니까해야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참된 것을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는 것이 점점 함께 움직이게 됩니다.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말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 삶 안에서 함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AC.12의‘신앙과사랑양쪽에서동시에함께행동한다’는 표현도 조금 덜 추상적으로 들립니다.신앙은 머릿속에만 있고 사랑은 막연한 감정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사람이 참된 것을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서 선한 것을 원하며 실제로 행하는 삶 속에서 둘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모든 예보다 중요한 것은AC.12자체가 말하는 방향입니다.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을 가장 간단히 풀어 말한다면, ‘내가참되다고받아들인것이내가사랑하고행하는선과점점하나의삶을이루어가는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AC.12심화1)
거듭남과정중인모든사람이이상태에이르는것은아닙니다.오늘날에는대부분의사람들이첫번째상태까지만이르고,어떤이들은두번째상태까지만,또다른이들은세번째,네번째,혹은다섯번째상태에도이르지만,이렇게여섯번째상태까지이르는이는적고(few),일곱번째상태에이르는이는거의(scarcely)없습니다.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do not all arrive at this state. The greatest part, at this day, attain only the first state; some only the second; others the third, fourth, or fifth; few the sixth; and scarcely anyone the seventh.
해설
AC.13은 앞에서 설명한 거듭남의 여러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정도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짧게 덧붙입니다. 여기서 ‘이상태’는 바로 앞 AC.12에서 설명한 여섯 번째 상태를 가리킵니다. 곧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며, 신앙과 사랑으로부터 함께 행동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앞의 여섯 상태를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차례차례 통과하여 마침내 같은 지점에 도달하는 고정된 프로그램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절을 사람들의 영적 수준을 판정하는 서열표처럼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다섯번째상태이고저사람은두번째상태다’라고 외적인 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AC.13의 목적이 아닙니다. 앞선 AC.7-12에서 살펴본 상태들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는 것이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분류하기 위한 기준표가 아닙니다. 특히 외적으로 경건하게 말하거나 선을 행하는 모습만으로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알 수는 없습니다. AC.9에서도 이미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하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아직 생명이 없는 상태가 있을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의 모양만이 아니라 그 행동이 어떤 내적 원리에서 나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13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일곱번째상태’입니다. 그러나 AC.13자체는 이 일곱 번째 상태가 무엇인지 여기서 다시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의 흐름과 AC.12마지막에서 사랑이 지배권을 얻고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한 내용, 그리고 이어지는 창조의 일곱째 날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짧은 문장만을 근거로 일곱 번째 상태를 여러 영적 개념과 곧바로 동일시하여 상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상태가 깊어질수록 실제로 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다고 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왜 뒤의 상태로 갈수록 사람이 줄어드는지를 AC.13이 설명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인내하지 못해서인지, 시험이 어려워서인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지를 이 번호만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13은 이유를 분석하기보다 단지 실제 상태의 차이를 짧게 알려 줍니다.
또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atthisday)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은첫번째상태에있고,어떤사람들은두번째,어떤사람들은세번째,네번째,다섯번째상태에있으며,여섯번째상태에이르는사람은적고일곱번째상태에이르는사람은거의없다’는 말을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통계적 법칙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대부분’, ‘적은이들’, ‘거의아무도없음’이라는 표현 역시 정확한 비율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대부분이첫번째상태에있다’는 말을 곧바로 ‘대부분의신앙인이자기사랑과세상사랑속에있으면서도그것을깨닫지못하고있다’는 식으로 확대하는 것도 AC.13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말하는 거듭남의 여러 상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정도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AC.13은 매우 짧지만 앞의 AC.7-12를 읽는 방식에 중요한 균형을 잡아 줍니다. 창조의 날들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준다고 해서 그것을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같은 속도와 같은 깊이로 통과하는 일률적인 단계표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남으로 이끄시는 질서는 분명하지만, 실제 사람들의 상태는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은 다른 사람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판단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지금 내 안에서 무엇을 질서 있게 하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데 있어야 합니다. AC.13은 거듭남의 높은 상태를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과 비교하도록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 거듭남이 얼마나 깊고 실제적인 주님의 역사인지를 겸손하게 바라보게 하는 짧은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13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