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68 심화

‘리메인스가 없으면 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는가?’

 

AC.468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리메인스를 보존하지 않으신다면 그는 필연적으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리메인스가 무엇이기에 인간의 영원한 생명과 이처럼 직접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리메인스를 단순히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이나 과거에 배운 종교적 지식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저장하고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과 연결된 순진함, 사랑, 자비, 체어리티 등의 상태입니다. 특히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기 전, 부모를 신뢰하고 이웃에게 호의를 품으며 주님과 천국에 관한 선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주님은 그러한 상태들을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람은 나중에 그것을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주님은 그것을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리메인스는 사람이 스스로 쌓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영적 저축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내면에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그렇게 중요할까요? 사람이 성장하면서 프로프리움(proprium), 곧 자기 자신의 것에 깊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만으로는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과 거짓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만일 사람 안에 이것과 다른 근원에서 온 것이 전혀 없다면, 주님께서 그에게 역사하실 접점도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존하신 리메인스 안에는 사람이 한때 받아들였던 선과 진리, 순진함과 체어리티의 상태가 있습니다. 주님은 거듭남의 과정에서 바로 이것들을 사용하여 사람을 자기중심적인 생명에서 돌이키고 선과 진리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구원한다는 말은 리메인스 자체가 주님과 별도로 어떤 구원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리메인스가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주님께서 친히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이며, 훗날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기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의 교리는 결국 인간의 공로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주님의 선행하시는 자비와 섭리에 관한 교리입니다. 사람이 아직 자신의 거듭남을 생각하지도 못하던 때부터 주님은 이미 훗날 그를 살리실 것을 준비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의지와 이성으로 받아들여 마치 자기 것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리메인스는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사람의 내면에 보존된 천국적인 기반이 됩니다. 악과 거짓의 영향만 있고 그 반대편에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의 상태가 전혀 없다면 참된 영적 선택과 거듭남의 가능성도 성립할 수 없습니다.

 

AC.468이 개인의 리메인스와 교회 전체의 리메인스를 나란히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는 것처럼, 인류 전체 안에서도 주님은 참된 교회와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언제나 어떤 사람들을 남겨 두십니다. 홍수 직전의 ‘노아’가 바로 그 원리를 보여 줍니다. 온 땅이 부패했다고 표현될 만큼 교회가 황폐해졌지만 모든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보존하신 마지막 리메인스가 있었고,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고대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과 인류 가운데 교회가 다시 일어나는 일이 같은 영적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 ‘남은 자’가 반복해서 등장하고, ‘십’과 ‘십분의 일’이 리메인스를 표상합니다. 사6:13의 모든 것이 베임을 당한 뒤에도 남아 있는 ‘거룩한 씨’, 암5:3의 백 명 가운데 남은 열 명, 창18:32의 소돔에 의인 열 명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은 모두 ‘완전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것’이라는 원리를 보여 줍니다. 중요한 것은 숫자의 크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남겨 두신 선과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가 없으면 영원히 멸망한다’는 AC.468의 말씀은 사람을 두렵게 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인간의 구원이 얼마나 철저하게 주님의 선행하시는 역사에 의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언제 어떤 선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이 자신의 내면 어디에 보존되어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알고 계시며, 사람이 훗날 거듭남의 길에 들어설 때 그것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이 점에서 ‘노아’는 우리 각 사람의 거듭남을 비추는 매우 깊은 표상이 됩니다. 우리 안의 상태가 아무리 황폐해지고 선과 진리가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은 인간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지키시고 때가 되었을 때 사용하시며,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영적 생명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단순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다시 주님께 돌아가고 거듭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그의 내면에 준비하고 보존해 두신 생명의 씨앗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AC.468은 ‘영적 생명과 천적 생명이 리메인스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AC.468 심화)

 

 

 

AC.468, 창5, ‘노아는 교회에 남아 있던 마지막 리메인스를 가리킨다’

속뜻 AC.468앞 장에서 말하고 보여 준 것으로부터, 이름들이 이단과 교리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을 뜻하며, 여기서는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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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5 심화

1.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처음부터 병행한 두 계열인가?’

 

창세기 4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은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두 계열로 보입니다.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오고, 장 마지막에는 아담과 하와에게 셋이 태어나며, 다음 장에서는 셋의 계보가 다시 이어집니다. 따라서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같은 시대에 나란히 존재했던 두 계보라고 이해하는 것은 문자적 서사에서는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계보들을 속뜻에서 읽을 때 문자적 혈통의 병행 관계를 그대로 교회의 역사에 옮겨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시합니다.

 

AC.435가 그 출발점입니다. 창4:25에서 다시 등장하는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나타났던 새 교회를 뜻하지만, 창5:1-4에서 다시 등장하는 사람과 아내와 셋은 ‘태고교회의 첫 후손’을 뜻한다고 합니다. 같은 아담과 그의 아내와 셋을 말하면서도 속뜻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과 창2에서 인간의 창조를 거듭 말하지만 전자는 영적 인간의 창조를, 후자는 천적 인간의 창조를 다루는 것을 그 예로 듭니다. 따라서 같은 인물과 사건이 반복된다고 해서 속뜻에서도 반드시 동일한 교회나 동일한 역사적 단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곧바로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은 속뜻에서 결코 병행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단정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42는 태고 시대에 ‘교회에서 분리된’(separate from the church) 많은 교리와 이단들이 있었으며, 각각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분리되었다’는 표현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을 일으킵니다. 어떤 교리들이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왔다면, 그들이 분리되어 나온 모체인 교회와 그 안에 남아 있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으로 시작되는 분리된 교리들의 계열만 존재했다고 생각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 ‘교회에 남아 있던 이들’을 곧바로 셋 계열과 동일시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AC.441은 에노스와 관련된 예배를 ‘가인과 라멕이라고 하는 이들에 의해 이전 교회가 소멸된 후의 새 교회의 예배’라고 명시합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이전 교회 → 소멸 → 새 교회’라는 전환이 있습니다. 따라서 셋과 에노스가 나타내는 교회를 처음부터 가인 계열과 나란히 존속해 온 또 하나의 교회라고 단순하게 규정하면, AC.441이 말하는 ‘이전 교회가 소멸된 후의 새 교회’라는 설명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게 됩니다.

 

AC.436이 제시하는 창4 전체의 연속적인 흐름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뜻하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의 표’를 통해 신앙 자체는 보존하셨습니다. 이후 여러 상태를 거쳐 라멕에 이르러서는 그렇게 보존되어 있던 신앙마저 황폐해집니다. 그리고 장 마지막에서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나타냅니다. 이런 속뜻의 흐름에서 창4는 단순히 두 집안의 역사를 번갈아 기록한 장이라기보다, 교회의 분리와 쇠퇴, 보존과 소멸, 그리고 새로운 교회의 형성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영적 서사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문자적 계보와 속뜻의 교회사를 서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이 서로 다른 두 족보이며, 두 계열이 시간적으로 나란히 존재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또한 속뜻에서도 AC.442의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분리된 교리들과 구별되는 교회가 존재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AC.434-442만으로 그 교회에 남아 있던 이들이 정확히 누구였는지, 그들이 셋 계열과 어떤 관계였는지, 두 교회적 흐름이 실제 시간 속에서 어느 정도 병행했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인 계열과 셋 계열을 ‘악한 계열과 선한 계열이라는 두 교회가 처음부터 끝까지 나란히 존속했다’는 단순한 도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반대로 ‘둘은 전혀 병행하지 않았고 하나가 완전히 끝난 뒤 다른 하나가 시작되었다’고 단정하는 것도 현재 본문보다 앞서 나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분명하게 밝히는 것은 다른 데 있습니다. 가인 계열을 통해서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여러 교리와 그로 인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가 전개되고, 셋과 에노스에서는 이전 교회가 소멸된 뒤 주님께서 일으키신 새로운 신앙과 새 교회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본래 교회에 남아 있던 이들이 누구였으며 이 여러 흐름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겹쳤는지는 이후의 설명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결국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세기의 족보를 속뜻의 교회사와 일대일로 대응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문자적 의미에서는 실제 계보의 흐름을 읽되, 속뜻에서는 각 이름이 나타내는 교리와 교회의 상태가 어떤 순서와 관계로 전개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AC.435, 436, 441, 442를 함께 놓고 보면, 창4의 중심은 두 혈통 가운데 어느 쪽이 어느 시기에 존재했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기보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교회를 황폐하게 하는지,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신앙을 보존하시며, 마침내 셋과 에노스로 나타나는 새로운 신앙과 교회를 일으켜 다시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가 가능하게 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AC.435 심화 1)

 

 

 

AC.435, 창4:25, ‘같은 사람과 아내가 다시 나오는데 왜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여기서 ‘사람’(man)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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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

여기서 ‘셋’(Seth)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그의 이름으로 설명됩니다. 그의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기’(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appointed another seed)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른 씨’(another seed)는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씨’(seed)가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의 AC.255에서 볼 수 있습니다. That “Seth” here signifies a new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is explained by his name, which it is said was given him because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That God “appointed another seed” means that the Lord gave another faith; for “another seed” is the faith through which comes charity. That “seed” signifies faith may be seen above (n. 255).

 

해설

AC.437은 창4:25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셋’과 ‘다른 씨’가 왜 새로운 신앙을 뜻하는지를 밝힙니다. 앞의 AC.434에서는 셋이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라고 했고, AC.436에서는 그것을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이라고 좀 더 분명하게 설명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그 해석의 근거를 창4:25 자체의 ‘다른 씨’라는 표현과 셋의 이름에서 찾습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다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순히 다시 ‘씨’를 주셨다고 하지 않고 ‘다른 씨’(another seed)를 주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다른 신앙’은 신앙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가인으로 나타났던 신앙과는 성격이 달라진 신앙을 뜻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지만, 셋은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가인과 셋은 모두 신앙과 관계되지만,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맺는 관계가 서로 다릅니다.

 

이 차이는 AC.436에서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은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신앙 자체를 완전히 없어지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의 표’를 통해 보존하셨습니다. 그 목적은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AC.437의 ‘다른 씨’는 그 긴 과정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가인과 같은 분리된 신앙이 그대로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 이어질 수 있는 ‘다른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씨’가 신앙을 뜻할까요? 바로 이 점 때문에 AC.437은 AC.255를 참조합니다. AC.255는 창3:15의 ‘여자의 씨’(seed of the woman)를 설명하면서, ‘여자’(woman)는 교회를 뜻하고 그 교회의 ‘씨’는 신앙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부터 교회가 교회라 불리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437에서 ‘다른 씨’가 ‘다른 신앙’을 뜻한다는 해석은 이번 글에서 갑자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세워진 ‘씨 = 신앙’이라는 상응에 근거합니다.

 

AC.255에 인용된 여러 성경 구절도 이 의미를 뒷받침합니다. 말2:14-15에서는 ‘하나님의 씨’(seed of God), 사44:3에서는 ‘네 씨’(thy seed), 계12:17에서는 여자의 ‘남은 자손’(remnant of her seed), 시89편에서는 다윗의 ‘씨’(seed)가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가운데 특히 ‘여자’가 교회를 나타내고 그 교회의 ‘씨’가 신앙을 나타낸다는 관계를 밝힙니다. 그러므로 창4:25의 ‘다른 씨’ 역시 단순히 아벨 대신 태어난 또 하나의 육적인 후손이라는 의미를 넘어, 새 교회에 주어진 새로운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창4:25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가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아벨은 앞에서 체어리티를 나타냈으므로, 여기에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아벨이 체어리티라면 아벨을 대신하여 주어진 셋도 체어리티를 뜻해야 할 것 같은데, 스베덴보리는 셋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AC.434-437을 함께 읽으면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셋은 아벨이 나타냈던 체어리티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체어리티가 다시 주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절의 에노스가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아벨 대신’이라는 말은 상응하는 의미가 단순히 ‘체어리티에서 체어리티로’ 일대일 교체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소멸된 체어리티가 다시 세워지기 위한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4:25의 구조가 상당히 정교합니다. 아벨이 나타내는 체어리티는 가인에 의해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마저 함께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보존하셨습니다.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자연적 선과 진리가 차례로 주어졌고, 마침내 셋이라는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절의 에노스에서 그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가 나타납니다. 창4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처음의 가인과 아벨 문제를 다시 풀어 가는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할 것은 주어가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다른 신앙을 주셨다는 뜻이라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스스로 자신을 고쳐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남아 있는 신앙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새 교회를 준비하시며, 마침내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시작의 중심에는 인간의 자기 회복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결국 AC.437에서 ‘셋’은 단순히 가인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인물도, 아벨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아들도 아닙니다. 그는 ‘다른 씨’, 곧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나타냅니다. 가인으로 나타난 신앙은 사랑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셋으로 나타난 신앙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신앙을 주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로써 창4:25은 가인과 아벨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어떻게 주님의 섭리 가운데 새로운 질서를 향해 나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글로 마무리됩니다. (AC.437 해설)

 

 

 

AC.438, 창4:26, ‘에노스는 체어리티를 신앙의 으뜸으로 여긴 교회를 의미한다’ (AC.438-442)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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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6, 창4:25,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까지, 신앙과 체어리티는 어떻게 다시 이어지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그 여자의 ‘아들’(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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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6

그 여자의 ‘아들’(son), 곧 그가 셋이라 이름한 아들이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을 뜻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또한 가인에 관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그에게 표를 주셨다’(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고 기록된 사실에서도 분명합니다. 이 주제가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가인’(Cain)으로, 체어리티는 ‘아벨’(Abel)로 나타냈으며, 분리된 상태의 그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체어리티가 그 신앙을 통해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으로 나타냈습니다. That by her “son,” whom she named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ay be attained,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previously stated, as well as from its being related of Cain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lest anyone should slay him.” For the subject as it stands in a series is as follows: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signified by “Cain”; charity, by “Abel”; and that faith in its separated state extinguished charity was signified by Cain slaying Abel. The preservation of faith in order that charity might be thereby implanted by the Lord was signified by Jehovah’s setting a mark on Cain lest anyone should slay him.

 

그 후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이 주님에 의해 신앙을 통해 주어진 것은 아다가 낳은 야발로 나타냈고, 신앙의 영적인 것이 주어진 것은 그의 아우 유발로 나타냈으며, 이들로부터 자연적 선과 진리가 나온 것은 씰라가 낳은 두발가인으로 나타냈습니다. 창세기 4장의 마지막 두 절에는 이 모든 것의 결론, 따라서 그 요약이 들어 있습니다. 곧 ‘사람과 그의 아내’(man and his wife)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라고 불렸던 그 새 교회를 뜻하고, ‘셋’(Seth)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을 뜻하며, 이제 이어지는 절의 ‘에노스’(Enosh)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를 뜻합니다. That afterwards the holy of love and the good thence derived were given by the Lord through faith was signified by Jabal whom Adah bare; and that the spiritual of faith was given, was signified by his brother Jubal; and that from these there came natural good and truth was signified by Tubal-Cain whom Zillah bare. In these two concluding verses of Genesis 4 we have the conclusion, and thus the summary, of all these matters, to this effect, that by the “man and his wife” is signified that new church which before was called Adah and Zillah, and that by “Seth” is signified the faith through which charity is implanted; and in the verse which now follows, by “Enosh” is signified the charity that is implanted through faith.

 

해설

AC.436은 창4의 가인 이후 이야기를 거의 한눈에 펼쳐 보이는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지금까지 가인, 아벨, 가인의 표, 야발, 유발, 두발가인, 그리고 마지막의 셋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 개별적으로 설명해 왔다면, 여기서는 그 모든 내용을 하나의 연속된 과정으로 묶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주제가 연속적으로 전개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고 하며 그 흐름을 다시 정리합니다. 따라서 창4의 인물들을 서로 독립된 상징들로만 읽어서는 안 되고,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와 소멸, 보존, 그리고 다시 결합을 향한 과정으로 읽어야 합니다.

 

출발점은 가인과 아벨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AC.436은 가인의 의미를 더욱 정확하게 표현합니다. 단순히 ‘신앙’이 아니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곧바로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가인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셨습니다. 앞에서 이 ‘가인의 표’를 신앙의 보존으로 설명했지만, AC.436은 이제 그 보존의 목적을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단순히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그 신앙을 통해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보존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을 보존하신 것은 그 신앙을 최종 상태로 인정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장차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실 수 있는 수단을 남겨 두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은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가인의 표는 악한 상태를 승인하거나 분리된 신앙을 이상적인 신앙으로 인정한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아직 남아 있는 신앙을 파괴되지 않게 보존하시고, 바로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심으십니다. 인간 편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여 새로운 교회의 출발점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이후 야발, 유발, 두발가인의 의미도 이러한 큰 흐름 안에서 다시 정리됩니다. 야발은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주신 ‘사랑의 거룩한 것과 거기서 나오는 선’을, 유발은 ‘신앙의 영적인 것’을, 두발가인은 이들로부터 나온 ‘자연적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인물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목축, 음악, 금속 기술의 기원을 말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으로는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 안에 다시 사랑과 선, 신앙의 영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 선과 진리를 마련해 가시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434-435에서 제기된 창4의 가인 계열과 창5의 셋 계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도 중요한 빛을 비춥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가인에게서 시작된 후손들의 계보와 셋에게서 시작되는 계보를 두 개의 나란한 혈통으로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AC.436은 속뜻으로는 창4의 가인 이후 이야기가 셋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과정임을 분명히 합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분리된 신앙이 보존되고, 그 보존된 신앙을 통하여 사랑과 선 및 영적인 것이 주어지며, 마침내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흐름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창4의 마지막 두 절이 ‘이 모든 것의 결론, 따라서 그 요약’이라고 직접 말합니다. 이것은 창4:25-26을 앞의 가인 계열과 전혀 관계없는 새로운 족보의 시작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단서입니다. 창4 전체에서 전개되어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이야기가 마지막 두 절에서 결론을 맺는 것입니다.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라고 불렸던 새 교회이고, 그들에게서 난 셋은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셋은 앞의 이야기를 지워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인물이 아니라, 앞에서 보존되고 준비되어 온 것이 새로운 질서 안에서 결실을 향해 나아가는 지점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AC.436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읽지 않은 창4:26의 에노스까지 미리 밝혀 줍니다. 셋이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통로가 되는 신앙’이라면, 에노스는 ‘신앙을 통해 심어진 체어리티’입니다. 이 둘의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셋 자체가 체어리티인 것이 아닙니다. 셋은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신앙이고, 에노스에 이르러 그 체어리티가 실제로 심어진 상태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셋과 에노스에 이르는 전체 흐름을 보면, 분리된 신앙에서 시작하여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그럼에도 신앙이 보존되며, 그 신앙을 통해 주님께서 다시 사랑과 선을 주시고, 마침내 새로운 신앙을 통해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지는 하나의 긴 과정이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주도권은 계속 주님께 있습니다. 체어리티를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은 보존된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AC.436은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신앙을 통해 심어진다고 거듭 말합니다. 신앙은 통로이며, 심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가인의 표에서부터 셋과 에노스에 이르는 과정의 중심에는 인간이 무너뜨린 것 가운데서도 남은 것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436은 창4의 어두운 역사를 단순한 쇠퇴의 기록으로 끝내지 않고, 그 쇠퇴 속에서도 새 교회를 준비하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여 주는 글이라 할 수 있습니다. (AC.436 해설)

 

 

 

AC.437, 창4:25, ‘다른 씨는 왜 체어리티로 이어지는 새로운 신앙을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7여기서 ‘셋’(Seth)이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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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5, 창4:25, ‘같은 사람과 아내가 다시 나오는데 왜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여기서 ‘사람’(man)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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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homo]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 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창4:25)

 

AC.434

여기서 ‘사람’(man)과 그의 ‘아내’(wife)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로 나타낸 새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아들’(son), 곧 이름을 셋이라 한 아들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는 것은 가인이 분리하여 소멸시켰던 체어리티가 이제 주님에 의해 이 교회에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The “man” and his “wife” here mean the new church signified above by “Adah and Zillah”; and by her “son,” whose name was Seth, is signified a new faith, by which charity might be obtained. By “God appointed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whom Cain slew,” is signified that charity, which Cain had separated and extinguished, was now given by the Lord to this church.

 

해설

AC.434는 라멕으로 끝난 계보 뒤에 왜 다시 아담과 그의 아내, 그리고 셋의 탄생 이야기가 나오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의 AC.432-433까지는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 그리고 마침내 라멕에게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되는 황폐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창4:25은 갑자기 다시 ‘아담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가족 계보가 다시 이어지는 장면으로만 보지 않고, 황폐 이후에 주님께서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장면으로 읽습니다.

 

먼저 여기서 ‘사람’과 그의 ‘아내’는 앞에서 ‘아다와 씰라’로 나타난 새 교회를 뜻합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아담과 하와가 곧 아다와 씰라라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으로는 서로 다른 인물들이 같은 교회의 새로운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의 라멕 계열에서 아다와 씰라가 등장한 뒤, 이제 ‘사람과 그의 아내’라는 표현을 통해 그 새 교회가 다시 언급됩니다. 따라서 창4:25은 이야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준비된 새 교회의 흐름을 이어 갑니다.

 

그런데 이 새 교회에는 ‘아들’이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셋(Seth)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으로 풀이합니다. 이 표현은 특히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셋은 단순히 가인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신앙’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의 가인은 결국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나타냈습니다. 반면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를 다시 얻을 수 있게 하는 신앙입니다.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창4:25의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이 중요해집니다. 아벨은 앞에서 체어리티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가인이 분리하고 소멸시킨 체어리티가 주님에 의해 이 새 교회에 다시 주어진 것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잃어버린 것을 인간 스스로 되살린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다시 주어졌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셋 자신이 곧 체어리티라고 하지 않고, 셋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라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씨’가 아벨을 대신한다는 말씀의 목적은 단순히 아벨이라는 인물을 셋이라는 인물이 대신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아벨이 나타냈던 체어리티가 다시 교회에 주어지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신앙이 셋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셋의 등장은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를 향하도록 질서가 회복되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것은 앞의 라멕 이야기를 지나온 독자에게 상당히 중요한 장면입니다. 라멕에게서는 ‘사람’과 ‘어린아이’가 모두 죽었습니다. 곧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소멸되어 ‘성한 곳이 없는’ 황폐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말씀은 그 황폐로 창4를 끝내지 않습니다. 바로 뒤에서 ‘하나님이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합니다. 황폐 이후에도 주님께서는 체어리티가 다시 존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신앙을 일으키시고, 그것을 통해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AC.434는 이 전환을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결국 셋의 탄생은 단순한 족보의 연장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 주님께서 새 교회에 그것을 다시 주시는 장면입니다. 가인이 나타내는 신앙은 체어리티를 분리했고 아벨을 죽였지만, 셋이 나타내는 새로운 신앙은 체어리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AC.434에서 중심에 계신 분은 셋 자체라기보다 새 교회를 일으키시는 주님이십니다. 인간에게서 신앙과 체어리티가 황폐해진 뒤에도 ‘다른 씨’를 주시고, 다시 사랑과 신앙이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여시는 분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AC.434 해설)

 

 

 

AC.435, 창4:25, ‘같은 사람과 아내가 다시 나오는데 왜 다른 교회를 의미하는가?’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창4:25) AC.435여기서 ‘사람’(man)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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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3, 창4:24,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왜 가장 거룩한 것의 침해를 뜻하는가?’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4) AC.433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것’(avenged sevenfold)이라는 말이 ‘가인’(Cain)이 나타내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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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9/27)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5, ‘하나님의 크신 사랑’, 찬95,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여섯 번째, 19절로 24절, AC 글 번호로는 405번에서 433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19-24)

 

제목은

 

황폐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

 

이며, 다음은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지난주에는 주님께서 ‘가인의 표’로 보존하신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 에덴 동쪽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아 성읍을 세우는 것을 읽었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가르침이 되고, 그 가르침이 하나의 교리적 세계를 이루며, 거기에서 다시 여러 분리가 이어지는 과정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가인의 계보가 마침내 라멕에게 이르는 장면입니다. 가인에게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도 아직 보존되었지만, 라멕에 이르면 신앙마저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시작을 보여 줍니다. 라멕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는 새 교회의 출현을 나타내고, 그들에게서 태어나는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통하여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신앙의 영적인 진리와 선, 그리고 자연적인 선과 진리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인간의 황폐가 주님의 역사의 끝은 아닙니다. 한 교회의 신앙이 소멸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시고,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신앙이 다시 삶으로 이어지는 질서를 세우십니다.’ 오늘은 라멕의 황폐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 그리고 그 황폐 가운데서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의 질서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405-433 요약입니다.

 

AC.405-433은 지난번 AC.397-404에서 가인으로부터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하나의 교리적 계보를 이루어 내려온 바로 다음부터 시작합니다. 지난 범위에서 가인은 여호와의 얼굴 앞을 떠나 놋 땅에 거했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세웠으며, 그로부터 여러 후속적인 분리들이 하나의 계보를 이루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 분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번 범위의 첫 인물인 ‘라멕’에 이르면 그 계열은 마침내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황폐’에 이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말씀은 바로 그 황폐의 자리에서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동시에 보여 줍니다.

 

AC.405-407에서 ‘라멕’은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된 황폐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가인에게서 시작된 분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인에게서는 체어리티를 죽인 뒤에도 신앙 자체는 장래의 쓰임을 위하여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계속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자기 계보를 만들어 가면 결국 신앙 자체도 생명을 잃게 됩니다. 라멕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의 소멸을,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가인에게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일어났다면, 라멕에게서는 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되어 ‘신앙과 체어리티 모두의 소멸’에 이른 것입니다.

 

AC.407은 이러한 황폐가 가인의 계열에만 있었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교회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질서라고 설명합니다. 교회는 처음에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신앙에서 떠나고, 마침내 신앙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파뿐 아니라 고대교회와 유대교회, 초기 기독교회에서도 이러한 황폐가 나타났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가 황폐하더라도 언제나 어떤 ‘핵심’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경우에도 남은 부분이 있었으며, 그것이 홍수 이후까지 이어져 ‘노아’로 불리는 새로운 교회의 출발점이 됩니다. 황폐가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AC.405에 이미 등장했던 라멕의 두 아내 ‘아다’와 ‘씰라’의 의미가 중요해집니다. 라멕은 황폐를 의미하지만 그의 두 아내는 오히려 ‘새 교회의 출현’을 의미합니다. 아다는 새 교회의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의 어머니이고, 씰라는 자연적인 것들의 어머니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이전 교회의 신앙이 완전히 황폐해졌다고 선언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모습을 함께 보여 줍니다. 인간의 실패가 극점에 이른 바로 그곳에서 주님의 섭리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AC.408-411은 왜 새로운 교회가 이전 교회의 황폐 이후에 출현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이전 교회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이 모독적인 것들과 뒤섞여 있는 동안에는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그 상태가 끝에 이르면 새로운 ‘아침’이 밝아 오고 새 교회가 일어납니다. 중요한 것은 황폐 자체가 새 교회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황폐한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떤 핵심을 보존하시고, 이전 질서가 끝에 이른 뒤 새로운 시작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서들에서도 ‘황폐’, ‘황량’, ‘완결’, ‘끊어 버림’ 등의 표현 뒤에 새로운 교회의 출현이 이어지는 질서가 반복됩니다.

 

또한 새 교회는 진리를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아직 진리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의 많고 적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진리를 안다는 사실과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자기 사랑과 거짓에 맞추어 굳혀 버리면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집니다. 반면 아직 알지 못했던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따라서 새 교회의 출현은 기존의 종교적 지식이나 외적인 계승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내적인 상태와 관계됩니다.

 

AC.412 이후에는 아다와 씰라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을 통해 새 교회 안에 어떤 것들이 형성되는지가 펼쳐집니다. 여기서 창세기의 이야기는 갑자기 목축과 음악과 금속 기술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인간 문명의 기술사가 아니라 새 교회의 천적·영적·자연적 요소들이 어떻게 구별되어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아다에게서는 야발과 유발이 나오고, 씰라에게서는 두발가인과 나아마가 나옵니다. 이들은 각각 새 교회 안의 서로 다른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에 관한 교리를 나타냅니다.

 

먼저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라고 불립니다. AC.415-417에서 이것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을 의미합니다. 장막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니라 사랑의 거룩한 것을 나타내며, 가축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들을 나타냅니다. 이미 아벨도 양을 치는 자였지만 야발은 가인으로부터 일곱 번째 계열에 나타납니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최초의 목축인을 찾는 것이 본문의 목적이 아니라, 새 교회에서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선들이 다시 나타나는 영적 상태를 보여 주는 것이 중심입니다.

 

야발 다음에 나오는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입니다. AC.418-420에서 악기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진리와 선에 관계됩니다. 특히 수금은 영적 진리를, 퉁소는 영적 선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수금과 비파, 노래와 찬송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예배 음악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의 천적인 것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야발의 ‘장막’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보여 준다면, 유발의 ‘악기’는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의 진리와 선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발과 유발의 순서도 중요합니다. 먼저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선들이 있고, 거기서 신앙의 진리와 선들이 나옵니다. 이것은 가인의 질서와 정반대입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려 했지만, 새 교회에서는 다시 사랑과 선이 중심이 되고 거기에서 진리와 신앙이 흘러나오는 질서가 나타납니다. 지난 범위에서 무너졌던 ‘사랑에서 신앙으로’의 질서가 새 교회에서 다시 회복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AC.421-426에서는 씰라에게서 태어난 두발가인을 통해 새 교회의 ‘자연적인 것들’이 설명됩니다. 두발가인은 ‘놋과 쇠로 여러 기구를 만드는 자’인데, 속뜻으로 그는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놋’은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에 반대되는 악한 영역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외적인 삶에까지 내려와 생각과 말과 행동 가운데 표현되는 차원입니다. 새 교회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까지 질서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AC.424-426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말씀에 나오는 세공업자와 금속들을 폭넓게 다룹니다. 금은 천적 선을, 은은 영적 진리를, 놋은 자연적 선을, 쇠는 자연적 진리를 나타냅니다. 특히 쇠는 진리가 지닌 힘과 연결됩니다. 에스겔의 쇠벽, 다니엘의 모든 것을 부수는 쇠, 계시록의 ‘쇠 지팡이’가 인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쇠 지팡이는 단순한 강압적인 통치의 상징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속한 진리의 힘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진리의 힘은 인간이 자기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서 오는 진리 자체에 있습니다.

 

여기서 야발·유발·두발가인을 하나로 놓고 보면 새 교회의 구조가 매우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야발에게서는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선들이 나타나고, 유발에게서는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영적인 진리와 선들이 나타나며, 두발가인에게서는 그것들이 자연적인 선과 진리의 차원까지 내려옵니다. 곧 ‘천적 → 영적 → 자연적’ 질서입니다. 사랑이 중심에 있고, 그 사랑에서 진리가 나오며, 그 진리가 다시 자연적인 삶 속에서 선과 진리로 표현됩니다. 이것이 가인에게서 뒤집혔던 질서를 새 교회가 다시 회복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AC.427부터 말씀은 다시 라멕의 노래로 돌아갑니다.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는 말은 고백을 의미하고,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나타내며, ‘상처’와 ‘상함’은 더 이상 온전함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라멕의 황폐는 단순히 교리가 조금 잘못되었다거나 신앙생활이 약해졌다는 정도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생명이 소멸된 교회의 마지막 상태입니다.

 

특히 ‘어린아이’가 체어리티를 의미한다는 설명은 매우 중요합니다. 참된 체어리티에는 순진무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단순히 외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이웃의 선을 구하는 내적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라멕이 ‘어린아이’를 죽였다는 말은 단순한 도덕적 실패보다 깊은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 자체가 소멸된 것입니다.

 

AC.431-432에서는 가인의 ‘일곱 배’와 라멕의 ‘일흔일곱 배’가 서로 비교됩니다. 가인의 경우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도 장래의 쓰임을 위해 보존되어야 했으므로, 그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라멕은 그 보존된 신앙 자체를 소멸시켰을 뿐 아니라 그 신앙을 통해 태어나야 할 체어리티까지 소멸시켰습니다. 그래서 라멕의 상태는 훨씬 더 큰 신성모독으로 표현됩니다.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주님께서 인간처럼 분노하여 일흔일곱 배로 복수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함으로써 초래되는 정죄를 의미합니다.

 

마지막 AC.433은 왜 하필 ‘일흔일곱’이라는 수를 사용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일곱’은 일곱째 날과 연결되어 천적 인간과 천적 교회, 천적 천국을 의미하며, 가장 높은 의미로는 주님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말씀에서 거룩한 것 또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같은 숫자가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숫자가 무엇에 적용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마18:22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에서는 끝없는 용서를 나타내지만, 라멕의 ‘일흔일곱 배’에서는 지극히 거룩한 것을 침해한 데 따른 정죄를 나타냅니다.

 

이렇게 보면 AC.405-433은 처음과 끝에 라멕을 두고 그 가운데에 새 교회의 출현을 넣은 매우 인상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의 라멕은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황폐’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로 그 황폐 가운데 아다와 씰라가 등장하고, 그들에게서 야발·유발·두발가인이 태어나면서 새 교회의 천적·영적·자연적 질서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다시 라멕의 노래로 돌아와 이전 교회가 왜 황폐에 이르렀는지를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관점에서 확인합니다. 이전 교회의 죽음과 새로운 교회의 탄생이 하나의 본문 안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범위의 ‘가인의 표’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신앙을 보존하신 목적은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원히 유지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 신앙을 통하여 언젠가 다시 체어리티가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라멕의 계열에서는 그 가능성마저 소멸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황폐한 것을 억지로 되살리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그리고 그 새 교회에서는 다시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이 먼저 있고, 거기에서 영적인 진리와 선이 나오며, 그것이 자연적인 선과 진리의 삶으로까지 내려오는 질서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번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새 교회’가 단순히 새로운 조직이나 새로운 교파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이 보여 주는 것은 사람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하나의 질서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이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신앙의 진리와 선이 나오며, 그것이 우리의 자연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까지 질서 있게 해야 합니다. 내적인 사랑과 외적인 삶이 분리되지 않고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본문은 AC를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많은 진리를 배우고, 말씀의 상응을 공부하고, AC의 수많은 아르카나를 알아 갑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우리 안에서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의 질서를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에게 더 체어리티를 행하며, 그것이 우리의 실제 말과 행동에까지 내려온다면 그 진리는 살아 있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사랑과 체어리티가 소멸한다면, 지식의 양과 관계없이 라멕의 황폐가 우리 안에서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이번 본문은 황폐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라멕에게서 한 교회의 신앙이 끝났지만 주님의 교회가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황폐 가운데서도 어떤 핵심이 보존되었고, 아다와 씰라를 통하여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 나타났습니다. 인간이 실패한다고 해서 주님의 목적이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고, 새로운 빛을 주시며, 사랑과 신앙과 삶이 다시 올바른 질서를 이루도록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십니다.

 

결국 AC.405-433 전체의 흐름은 ‘가인의 계보가 라멕에 이름 → 신앙의 완전한 황폐 → 그 가운데 보존된 핵심 →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 교회의 출현 → 야발의 사랑의 거룩한 것과 선 → 유발의 신앙의 영적인 진리와 선 → 두발가인의 자연적 선과 진리에 관한 교리 → 천적·영적·자연적 질서의 회복 → 다시 라멕의 고백 → 신앙과 체어리티의 소멸 확인 → 일흔일곱 배로 표현된 지극히 거룩한 것의 침해와 정죄’로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 범위 AC.397-404가 ‘보존된 신앙을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여 주었다면, 이번 AC.405-433은 그 분리된 신앙의 계열이 결국 어디에 이르는지, 그리고 그 황폐 가운데서 주님께서 어떻게 다시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번 범위의 마지막 메시지는 황폐가 아닙니다. 라멕의 실패가 아무리 깊어도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깊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신앙만 보존되는 것도, 교리만 정교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에서 진리가 나오고, 진리가 다시 사랑을 섬기며, 그 사랑과 진리가 우리의 자연적인 삶에까지 내려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 → 신앙 → 삶’, ‘천적 → 영적 → 자연적’이라는 이 질서가 다시 세워지는 것, 바로 그것이 라멕의 황폐 한가운데서 아다와 씰라와 그 자녀들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 새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405, 창4:19, ‘라멕에게서 신앙이 소멸하고 새 교회가 일어나다 - 아다와 씰라의 속뜻’ (AC.405-4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가인으로부터 순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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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6, 창4:19, ‘라멕은 왜 신앙의 황폐를 의미하는가? -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6‘라멕’(Lamech)이 황폐(vastation), 곧 신앙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뒤에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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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7, 창4:19, ‘교회가 황폐해져도 남아 있는 핵심 - 노아로 이어지는 교회의 보존’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7교회 전체의 상태는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시간이 흐르면서 참된 신앙에서 떠나 마침내 신앙이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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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8, 창4:19, ‘교회가 황폐해진 뒤에야 새 아침이 밝는 이유 - 거룩한 것의 모독과 새로운 시작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8 교회가 더 이상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 황폐해졌을 때, 그때 비로소, 그 이전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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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9, 창4:19, ‘아다와 씰라는 왜 라멕의 아내인가? - 속 교회와 겉 교회는 하나입니다’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09‘가인’(Cain)이라 불린 이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이단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폐해졌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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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0, 창4:19, ‘교회의 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 알면서 거부하는 상태와 아직 알지 못하는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0황폐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알면서도 알려 하지 않거나, 보면서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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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1, 창4:19, ‘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왜 황폐의 마지막 때가 오는가? - 예언서에 나타난 황폐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창4:19) AC.411새 교회가 일어나기 전에 황폐의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예언서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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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2, 창4:20,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 야발 - 사랑의 거룩한 것과 그로부터 나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창4:20) AC.412‘아다’(Adah)는 앞에서와 같이 신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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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3, 창4:20, ‘아다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인 이유 - 야발이 뜻하는 사랑과 선’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3‘아다’(Adah)가 신앙의 천적인 것들의 어머니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그의 맏아들 야발이 ‘장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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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4, 창4:20, ‘장막에 거주한다는 것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 말씀의 장막과 성막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4‘장막에 거주한다’(dwell in tents)는 것이 사랑의 거룩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서 ‘장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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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5, 창4:20, ‘가축의 조상은 왜 사랑의 거룩한 것에서 나오는 선을 뜻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5‘가축의 조상’(father of cattle)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에서 나오는 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장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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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6, 창4:20, ‘야발이 최초의 목축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 의미된다는 사실은, 야발이 ‘장막과 가축의 우리에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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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7, 창4:21, ‘유발과 수금과 퉁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AC.417-420)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창4:21) AC.417‘그의 아우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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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8, 창4:21, ‘수금과 퉁소는 왜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는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8앞 절은 사랑에 속하는 천적인 것들을 다루었지만, 이 절은 신앙에 속하는 영적인 것들을 다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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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9, 창4:21, ‘수금은 신앙의 진리를, 퉁소는 신앙의 선을 의미하는 이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19천적인 것들이 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인 것처럼, 영적인 것들은 신앙의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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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0, 창4:21, ‘말씀에 여러 악기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창4:21) AC.420말씀에는 여러 가지 악기가 언급되며, 각 악기에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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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1, 창4:22, ‘두발가인과 나아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AC.421-426)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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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2, 창4:22, ‘레아와 라헬은 왜 외적 교회와 내적 교회를 나타내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2이 새 교회가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는 유대교회를 통해 알 수 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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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3, 창4:22, ‘두발가인은 왜 ‘아버지’가 아니라 ‘스승’이라고 불리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3두발가인은 야발과 유발의 경우처럼 ‘아버지’(father)가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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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4, 창4:22, ‘세공업자는 왜 선과 진리를 아는 사람을 뜻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4말씀에서 ‘세공업자’(artificer)는 지혜롭고 총명하며 지식을 갖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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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5, 창4:22, ‘놋은 왜 자연적 선을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5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놋’(brass)이 자연적 선을 뜻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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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6, 창4:22, ‘쇠는 왜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6‘쇠’(iron)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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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7, 창4:23, ‘라멕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고백하는가?’ (AC.427-431)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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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8, 창4:23, ‘라멕의 말은 왜 황폐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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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9, 창4:23, 왜 ‘사람’은 신앙을, ‘어린아이’는 체어리티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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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0, 창4:23, ‘어린아이는 왜 순진무구와 체어리티를 의미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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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1, 창4:23, ‘상처와 타박상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황폐를 뜻하는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창4:23)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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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2, 창4:24, ‘라멕의 일흔일곱 배 보복은 무엇을 뜻하는가?’ (AC.432-433)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창4:24) AC.432 이 말씀은 그들이 ‘가인’(Cain)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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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3, 창4:24,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왜 가장 거룩한 것의 침해를 뜻하는가?’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4) AC.433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것’(avenged sevenfold)이라는 말이 ‘가인’(Cain)이 나타내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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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405, 창4:19, ‘라멕에게서 신앙이 소멸하고 새 교회가 일어나다 - 아다와 씰라의 속뜻’ (AC.405-41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창4:19) AC.405가인으로부터 순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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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6, 창4:20, ‘야발이 최초의 목축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창4:20) AC.416사랑의 거룩한 것들과 거기서 나오는 선들이 의미된다는 사실은, 야발이 ‘장막과 가축의 우리에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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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1, 창4:22, ‘두발가인과 나아마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AC.421-426)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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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6, 창4:22, ‘쇠는 왜 자연적 진리를 의미하는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창4:22) AC.426‘쇠’(iron)가 자연적 진리를 뜻한다는 사실은 에스겔이 두로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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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33, 창4:24, ‘일흔일곱 배의 보복은 왜 가장 거룩한 것의 침해를 뜻하는가?’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4:24) AC.433가인이 ‘일곱 배로 보복을 받을 것’(avenged sevenfold)이라는 말이 ‘가인’(Cain)이 나타내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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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27(D1)

 

2670, 7, 창4.7, 2026-09-27(D1)-주일예배(창4,19-24, AC.405-433), ‘황폐의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새 교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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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9/20, 창4:16-18, AC.397-404), ‘보존된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가인의 성읍 에녹’

※ 오늘(2026/09/2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4, ‘주 우리 하나님’, 찬94,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다섯 번째, 16절로 18절, AC 글 번호로는 397번에서 40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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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9/1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3, ‘영원한 하늘나라’, 찬93, ‘예수는 나의 힘이요’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네 번째, 9절로 15절, AC 글 번호로는 370번에서 396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9-15)

 

제목은

 

가인의 표,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

 

이며, 다음은 지난주부터 시작한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그동안 함께해오신 분들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 상태로,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으로 읽었습니다.

 

창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지난주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다가 마침내 ‘들’, 곧 교리의 영역에서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는 것을 읽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결국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다음 장면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고, 가인은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인의 표’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생명과 방향을 잃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올 길을 보존하십니다.’ 오늘은 가인의 실패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70-396 요약입니다.

 

 

AC.370-396은 지난주에 읽은 AC.359-369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직후부터 시작합니다. 지난주 본문에서 가인은 체어리티를 표상하는 아벨을 자기 아래 두려 했고, 마침내 ‘들’, 곧 교리의 영역에서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려는 교리가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번 AC.370-396은 바로 그 다음을 다룹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과의 결합을 잃은 신앙은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그렇게 타락한 신앙을 주님께서는 왜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가인의 표’를 주어 보존하시는가가 이번 리딩의 중심입니다.

 

AC.370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아벨의 행방을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아벨’은 체어리티이므로 이 질문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에게 ‘네 안의 체어리티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이제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거부하고,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밀어냈음을 의미합니다. 지난주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죽이는 데까지 갔다면,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체어리티에 대한 책임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AC.371은 여기서 매우 중요한 ‘퍼셉션과 양심’의 문제를 설명합니다. AC.370에서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천적 상태에서 멀어진 뒤에는 이러한 퍼셉션을 잃었고, 훗날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을 통하여 형성된 양심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반드시 외적인 음성을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에서는 퍼셉션으로, 후대의 영적 사람에게는 양심을 통하여 선과 진리가 내적으로 알려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 구별은 뒤의 AC.393에서 다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AC.372-376에서는 ‘네 아우의 피들의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는 말씀이 설명됩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히브리어에서 ‘피’가 단수가 아니라 ‘피들’로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이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의미하며, 특히 체어리티와 정반대되는 미움을 가리킵니다. 체어리티는 이웃의 선과 생명을 원하지만, 미움은 영적으로 이웃을 해치고 죽이려 합니다. 따라서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는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이 그 자체로 죄책을 드러내고 고발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모르셨던 사실을 피가 알려드린다는 뜻이 아니라, 악에는 그 악 자체의 죄책이 들어 있으며 영적 질서 안에서 그것이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도 중요합니다. 이 문맥에서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시킨 ‘분열 또는 이단’의 교리적 토대를 나타냅니다. 다만 여기서 ‘이단’을 오늘날 특정 교파나 사람에게 직접 붙이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했다는 데 있지 않고, 둘을 분리한 뒤 신앙을 독립시키고 체어리티 위에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더 중요한 질문은 ‘누가 이단인가?’가 아니라 ‘나는 어떤 진리를 전체의 질서에서 떼어 내어 절대화하고 있지는 않은가?’입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하게 말하면서도 그 진리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있다면 우리 역시 가인이 갈았던 땅을 갈 수 있습니다.

 

AC.377-382에서는 그 결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되면 주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결속도 끊어집니다. 신앙은 여전히 교리를 연구하고 논증하며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지만, 체어리티가 없다면 그 신앙은 생명 있는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에 머물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그 땅을 갈아도 땅은 더 이상 그 힘을 내어 주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를 계속 연구하고 확증하고 정교한 교리 체계로 만들어도 거기서는 참된 영적 열매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AC.381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닌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AC.382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의 여러 말씀을 인용하여 이것을 확증합니다. 특히 물을 찾아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은 진리를 찾고 있으면서도 그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지 않아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태를 잘 보여 줍니다. 진리를 많이 찾아다니는 것과 진리 안에 실제로 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선에서 분리된 진리는 결국 사람에게 영적 방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AC.383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나타납니다. 가인은 ‘내 죄악이 너무 커서 사함을 받을 수 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며 책임을 부인하던 가인이 이제 자기 상태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완전한 회개라고 볼 수는 없지만, 완전히 굳어 버린 상태와도 다릅니다. AC.384는 바로 이 점에서 가인 안에 ‘선의 어떤 것이 아직 남아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만일 선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자기 악 때문에 내적으로 고통받거나 그것을 인정하는 일조차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번 본문 후반의 ‘가인의 보존’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됩니다.

 

AC.385-388에서는 가인이 자기 상태를 더 자세히 말합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고 합니다.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교회에 속한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하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다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진리에서도 떨어지고 선에서도 떨어지면 결국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 분별할 수 없게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처음에는 하나의 교리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 끝에서는 인간의 영적 방향감각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AC.389-391에서는 가인의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두려움이 설명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지고 자기 자신, 곧 proprium에 맡겨집니다. 그러면 생각에서는 거짓이, 의지에서는 악이 점점 지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악과 거짓에는 그 자체로 두려움과 형벌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밖에서 형벌을 만들어 가인에게 던지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악과 거짓 자체가 사람을 불안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지옥의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영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해치고 빼앗으려 하기 때문에 자기 역시 다른 존재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므로 죄의 형벌은 주님께서 분노하여 외부에서 부과하시는 어떤 것이라기보다, 악과 거짓이 그 자체 안에 품고 있는 결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이번 본문의 가장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하자 여호와께서는 가인을 죽이지 말라고 하시며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문자적으로만 읽으면 살인자인 가인을 왜 하나님께서 오히려 보호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AC.392-396의 속뜻을 따라가면 전혀 다른 의미가 열립니다. 가인을 보존한다는 것은 가인의 악을 승인한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된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섭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AC.393이 매우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먼저였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퍼셉션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천적 상태를 잃은 뒤에는 더 이상 같은 방법으로 주님께 인도될 수 없었습니다. 홍수 후의 영적 교회에서는 먼저 신앙의 지식이 주어지고, 그 신앙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주시며,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하면서 양심이 형성되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후대의 인간에게는 ‘신앙의 지식’이 주님께서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시는 중요한 수단이 된 것입니다.

 

AC.394는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결국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독립적인 교리로 만들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렇다고 신앙 자체를 완전히 사라지게 내버려 두셨다면 후대의 인간은 구원에 이르는 중요한 수단을 잃게 됩니다. 인간이 더 이상 태고교회처럼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신앙의 지식을 배우고 그 진리를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받는 길이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잘못되었음에도 ‘가인’이 완전히 죽임당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 ‘보존’과 ‘승인’입니다. 주님께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옳다고 인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장차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갈 수 있는 통로인 신앙 자체를 보존하신 것입니다.

 

AC.395에서 ‘칠 배’는 이 보존이 거룩하고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말씀에서 ‘일곱’은 거룩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AC.396은 마침내 ‘가인의 표’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표’는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나 상태를 다른 것과 ‘구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마나 몸에 실제로 어떤 신비한 표시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말씀의 속뜻은 아닙니다. ‘가인의 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AC.370-396 전체는 놀라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체어리티를 죽인 신앙의 비참한 결과를 끝까지 보여 줍니다. 아벨이 사라지고, 그의 피들이 땅에서 부르짖으며, 땅은 더 이상 힘을 내지 않고, 가인은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한 채 피하며 유리하게 됩니다. 체어리티를 제거함으로써 신앙이 더 강하고 순수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 자체가 생명과 방향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는 그 실패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작용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의 잘못을 옳다고 하시지 않으면서도 가인을 완전히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사랑의 질서를 무너뜨렸어도 장차 다시 사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신앙’이라는 통로를 보존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그 순간부터 가인의 길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특히 AC를 읽으며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는 더욱 조심스러운 말씀입니다. 깊은 아르카나를 안다는 것이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다른 사람의 신앙을 쉽게 판단하며, 그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작은 선과 진리까지 무시하게 된다면 우리는 다시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동시에 ‘가인의 표’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신앙과 모든 진리를 함께 없애 버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잘못된 상태 안에서도 장차 구원에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을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우리는 잘못된 것을 분별해야 하지만,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것까지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표는 악을 보호하는 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고 멀리 내다보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표입니다.

 

결국 AC.370-396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지난주의 ‘내가 가진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아벨을 잃은 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체어리티를 잃은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진리를 가지고 있어도 결국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고 유리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께서는 ‘가인’마저 완전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작은 선을 보시고,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오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며,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이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

 

따라서 이번 리딩은 ‘가인의 형벌’보다 더 깊은 곳에서 ‘주님의 섭리’를 보게 합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죽였지만, 주님께서는 그 인간을 곧바로 폐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보존하여 훗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셨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랑에서 신앙으로’라는 천적 질서가 무너진 뒤에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를 마련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표 안에 숨어 있는 놀라운 아르카나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AC.370-396의 전체 흐름은 ‘체어리티의 소멸 → 죄책의 드러남 → 주님과의 결합 상실 → 영적 결실의 상실 → 선과 진리의 방향 상실 → 내적 고통과 악의 일부 인정 → 악과 거짓에서 오는 두려움 → 가인의 보존 → 신앙의 보존 →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로 돌아갈 길의 보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깊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보다 더 깊습니다. 인간은 아벨을 죽이지만, 주님께서는 가인에게도 표를 주십니다. 그것은 가인의 길을 인정하시는 표가 아니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구원의 길을 끝까지 보존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섭리의 표입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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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1, 창4:9, ‘퍼셉션에서 양심으로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의 속뜻’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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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2,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2‘지키는 자’(keeper)가 된다는 것은 섬기는 것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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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3, 창4:10,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호소하느니라 -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과 죄책의 고발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AC.373‘네 아우의 피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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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4, 창4:10, ‘왜 아벨의 피가 부르짖는가? - 미움은 체어리티에 가하는 폭력입니다’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4‘피들의 소리’(voice of bloods)가 체어리티에 폭력이 가해졌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의 많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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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5, 창4:10, ‘부르짖는 소리는 왜 죄책의 고발을 뜻하는가?’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5‘부르짖는 소리’(voice crying)와 ‘부르짖음의 소리’(voice of a cry)는 말씀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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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6, 창4:10,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드러내는 죄책’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이로부터 ‘피들이 부르짖는 것’(crying of bloods)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따라 나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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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7, 창4:10,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집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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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8, 창4:11,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선 가인’ (AC.3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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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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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0,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신앙’ (AC.38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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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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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2, 창4:12, ‘피하며 유리하는 자란 누구인가?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된 신앙’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2‘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가 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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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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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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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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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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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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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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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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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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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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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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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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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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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5, 창4:15,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 일곱은 왜 거룩한 것을 뜻하는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5‘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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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6, 창4:15, ‘가인의 표는 무엇인가? - 주님께서 신앙을 구별하여 보존하신 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6‘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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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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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1, 창4:12,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왜 결실이 없는가?’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4:12) AC.381‘땅을 가는 것’(till the ground)이 이 분열 또는 이단을 배양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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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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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13(D1)

 

2668, 5, 창4.5, 2026-09-13(D1)-주일예배(창4,9-15, AC.370-396), ‘가인의 표, 인간의 실패보다 더 깊은 주님의 섭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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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9/06, 창4:6-8, AC.359-369),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 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다 함께 주를 경배하세’,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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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AC.31 [3]에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하신 규례를 언급합니다. 출27:20-21에는 순수한 감람유를 가져다가 등불을 켜고 회막 안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그것을 보살피도록 하는 명령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등불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실제로 지켰지만, 그 규례가 표상하는 천국의 내적 의미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스베덴보리는 여러 곳에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람이 자기가 하는 행위의 내적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 행위를 통하여 거룩한 것을 표상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표상’과 ‘그 표상을 행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 자신도 그 거룩한 상태 안에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제사, 절기, 성막과 성전, 제사장 직무와 의복 등은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도록 정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표상의 거룩함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얼마나 깊은 영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느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제도와 말씀에 부여하신 표상적 질서에서 나왔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제사장이 등불의 내적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고 해서 등불의 표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그 제물과 제단과 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해서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적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표상의 의미는 사람의 주관적인 해석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표상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그 의미를 몰라야 했다’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상응과 표상의 의미를 아는 것 자체가 표상을 파괴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더 오래된 교회들에서는 자연계의 사물들이 무엇을 상응하고 표상하는지에 관한 지식이 존재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해야 표상이 가능하다’는 것이 영적 원리는 아닙니다.

 

유대교회의 특별한 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회의 많은 사람이 내적인 것보다 외적인 것에 강하게 기울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율법과 규례를 주셨고, 그 외적 예배가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도록 질서 지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내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정해진 규례를 수행하는 동안 그 외적 행위는 주님께서 정하신 표상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의미를 모르면서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게 지킬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명령의 모든 깊은 의미를 알아야만 그것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여호와께서 명하신 율법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외적 명령을 준수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대인들의 무지를 그 자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 의미를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표상 교회가 될 수 있었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내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만 머무는 것은 그 자체로 더 높은 영적 상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러한 인간의 상태 속에서도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시고, 외적인 예배를 통하여 천국의 것들이 표상되도록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주님의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상태가 이상적이어야만 주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처한 상태를 아시고, 그 상태에 맞추어 당신의 질서를 보존하십니다. 유대교회의 외적 예배 역시 그런 의미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내적 이해가 충분하지 않았음에도,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를 통하여 주님과 천국에 관한 표상들이 역사 속에 계속 존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AC.31에서 말하는 ‘항상 타는 등불’은 무엇을 표상했을까요? 여기서는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만큼만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규례가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상의 세부적인 의미는 ‘적절한 곳에서’ 설명하겠다고 여기서 유보합니다. 그러므로 AC.31만을 가지고 ‘저녁은 반드시 이런 상태이고, 등불이 밤새 타는 것은 반드시 이런 교회사적 보존을 뜻한다’는 식으로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에는 스베덴보리가 밝힌 만큼과 우리가 그 원리를 따라 추론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심화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이렇습니다. 유대교회의 사람들이 모든 규례의 내적 의미를 알아야만 그 규례가 표상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표상의 근거는 인간의 이해가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영적 질서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의미를 몰랐다는 사실 자체가 표상을 가능하게 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내적인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외적 예배까지 사용하여 천국의 것들을 표상하고 보존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타는 등불’은 유대인들이 그 의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보다, 그 규례를 통하여 주님께서 무엇을 표상하도록 하셨느냐에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31에서는 그것이 바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이며, 주님께서 그것들을 속 사람 안에서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고 다시 겉 사람의 삶에까지 나타나게 하시는 질서입니다. (AC.31 심화 3)

 

 

 

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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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심화 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심화2. 사60의 ‘새 교회’는 어느 교회를 말하는가? AC.31 [2]에서 스베덴보리는 사60:1-3, 20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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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 심화

1.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에는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것들은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 것이든 모두 그곳에 ‘기억 지식’(scientifica)으로 머물며,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짧지만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배우고 기억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단지 기억 속에 쌓여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거듭남의 과정에서 주님에 의해 사용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거기에서’라는 말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문장의 흐름상 ‘거기’는 속 사람 안에 있는 어떤 별도의 영적 저장소가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겉 사람의 기억’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뿐 아니라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라도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가면 그곳에서는 기억 지식으로 머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어린 시절에 들었던 말씀이나 부모와 교사에게 배운 선한 가르침, 훗날 읽고 배운 성경의 진리들이 오랫동안 기억 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했거나 실제 삶과 연결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삶의 어떤 상황에서 그 말씀이 다시 떠오르고, 이전에는 단순한 지식이었던 것이 자신의 삶을 비추는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AC.27의 표현을 실제 삶에 적용해 본다면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만 특정한 기억이 떠오르는 모든 현상을 곧바로 ‘주님께서 불러내셨다’고 판정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억 지식’ 자체가 곧 영적 생명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기억하며, 선과 진리에 관한 말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사람이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AC.27은 오히려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조차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그곳에서 기억 지식으로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기억 속에 무엇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와 그것이 실제로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가는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억 지식이 하찮다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외적으로 배우고 기억해 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이후 거듭남 가운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읽고 배우고 기억하는 일, 선과 진리에 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들이 기억 속에 들어갈 당시에는 단순한 지식처럼 보일 수 있지만, AC.27은 그것들이 그곳에 머물다가 나중에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기억은 거듭남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은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데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이 표현을 리메인스(remains)와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 및 그와 관련된 상태들을 가리키며, 인간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AC.27에서 직접 말하는 것은 ‘속 사람의 리메인스 저장소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의 기억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이 된 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는’ 것입니다. 두 주제 사이에 더 넓은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AC.27 한 문장만으로 둘을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이것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불러내시는 것일까요? 천사나 선한 영들을 통해서인지, 퍼셉션이나 양심을 통해서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인간이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천사와 영들의 매개가 있다는 사실, 또한 퍼셉션과 양심의 서로 다른 상태들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러나 AC.27은 여기서 그 작동 방식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근거로 ‘주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기억 지식을 꺼내신다’거나 ‘양심을 통하여 리메인스를 활성화하신다’는 식의 일정한 메커니즘을 확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설명이 됩니다.

 

오히려 AC.27에서 확실하게 붙들어야 할 것은 더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람의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은 그곳에 기억 지식으로 머물며, 그것들이 나중에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신의 기억과 생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거듭남의 생명과 질서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선과 진리를 배우고 기억하는 일은 그 자체가 거듭남의 완성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일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받아들여 기억 속에 간직한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중에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라는 표현의 중심은 기억의 세부적인 작동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AC.27의 중심은 진리와 선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기억 지식으로 모여 ‘바다’를 이루고, 그곳에 머물러 있던 것들이 이후 주님에 의해 사용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사람이 배운 지식 자체를 영적 생명으로 착각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주님께서 그 지식들을 거듭남 가운데 쓰실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기억 지식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며, 생명의 근원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AC.27 심화 1)

 

 

 

AC.27, 창1:9, ‘물이 모이고 땅이 드러남 : 기억 속에 모인 진리와 겉 사람의 준비’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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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의 ‘혼돈’, ‘공허’, ‘흑암’을 자신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속 사람이나 거듭남,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 채 지낼 수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하면 ‘그 사람의 속 사람을 비출 빛을 조금이라도 일찍 켜 줄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적 생명을 염려하는 데서 나오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먼저 AC.17의 표현을 정확히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혼돈’은 선이 없는 상태이고, ‘공허’는 진리가 없는 상태이며, ‘흑암’은 주님 신앙과 영적, 천적 삶에 대한 어리석음과 무지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어떤 사람이 교회 용어나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모르기 때문에 곧 영적으로 완전히 버려진 상태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주님께서 그 사람의 내면에서 보존하고 준비하시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후 AC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리메인스’가 바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그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랑받고 사랑했던 경험, 순진함,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진실을 기뻐했던 순간처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것들이 사람 자신도 모르는 깊은 곳에 간직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존하십니다. 훗날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 들어갈 때 주님께서는 이러한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신앙 지식의 정도만으로 그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지금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빛을 앞당겨 켜 줄’ 수 있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빛 자체를 켜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영적 빛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 사람을 직접 열 수도 없고, 어떤 진리를 강제로 이해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진리는 자유 가운데 받아들여져야 그 사람의 삶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뜻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상태를 무시한 채 영적 진리를 밀어 넣으려는 것은 주님의 방법과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의 진리를 전할 수 있고, 상대방이 질문할 때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 사람이 선을 사랑하고 악을 악으로 인식하도록 돕는 삶의 본을 보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한마디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한 번 경험한 진실한 사랑이 훗날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중요한 준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 어떤 씨앗이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아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특정한 신학 용어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고, 악을 피하며, 자신의 종교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선을 추구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영적 진리를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에도 사람은 자신의 내적 상태에 따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기회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와 영원한 운명을 성급하게 판단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결국 모든 사람은 때가 되면 반드시 빛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고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시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습니다. 리메인스가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도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면서도 사람의 선택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빛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그 빛을 향해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빛을 앞당겨 켜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우리의 역할과 주님의 역할을 구별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의 내면을 억지로 열어 빛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진리와 사랑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도, 교우에게도, 교회 밖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지금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조급해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언젠가 저절로 다 잘될 것이라고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고 선을 행하며, 그 진리가 언제 어떻게 생명이 될지는 주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어쩌면 ‘빛을 조금 일찍 켜 주고 싶다’는 목회자의 마음 자체도 주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의 도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중심은 ‘내가 그 사람을 깨우겠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필요한 빛을 주실 때, 제가 그 일을 방해하지 않고 쓰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AC.17의 흑암 다음에는 곧 주님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흑암 속에 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지막 시선은 그 사람의 어둠이 아니라, 그 어둠 위에서도 이미 일하고 계시는 주님께 향해야 합니다. (AC.17 심화 1)

 

 

 

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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