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05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에서 가장 강하게 들리는 문장은 아마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인간에게는 의지 자체가 없으며, 우리가 무엇인가를 원하고 선택하고 결심하는 것은 모두 탐욕일 뿐이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또한 거듭난 사람이 선을 원하고 행하는 것조차 실제로는 그의 의지가 아니라는 뜻일까요?

 

이 문장을 이해하려면 먼저 AC.105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주제는 인간에게 선택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생명나무’가 왜 동산 ‘가운데’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동산 가운데’를 속 사람의 의지라고 설명하고, 말씀에서는 이 의지를 ‘마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말해지기는 하지만 실제 생명의 근원으로서 사람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일상적인 선택이나 결심의 능력만을 가리키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맥의 초점은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생명의 중심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선한 의지의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반대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자기 의지라고 부를 때, AC.105는 그것을 ‘탐욕’이라고 부릅니다. 매우 강한 표현이지만, 그 목적은 선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두 가지 반대 방향의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지도 없으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선택하거나 행하지 않는다’는 식의 수동적인 이해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선을 원했으므로 그 선은 나에게서 나왔다’는 자기 공로의 이해입니다. AC.105의 논지는 어느 쪽도 아닙니다. 이 번호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사람이 선을 행하더라도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생명나무’가 중요해집니다. AC.105는 생명나무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한 뒤, 마지막에는 그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다’는 강한 표현만 따로 떼어 놓으면 인간에 대한 부정적인 선언처럼 보이지만, 전체 문맥에서 보면 강조점은 인간의 무가치함보다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05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인간에게 ‘네 안에서 선한 의지를 만들어 내어 그것으로 내게 오라’고 요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고 믿고 선을 원할 수 있게 하는 생명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이 생명을 만들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이 사랑하고 믿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중심에 있는 ‘생명나무’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일까요? AC.105 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의지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을 완성해서는 안 됩니다. 이 번호가 직접 다루는 범위에서는 인간의 모든 선택과 책임의 구조를 설명하기보다, 참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적어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선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고백과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결론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결국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 바로 뒤에 있습니다. ‘생명나무는 주님의 자비이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온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서 선의 독립적인 근원을 거두어 가는 까닭은 인간을 생명 없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께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에덴동산 한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생명의 중심에 자기 자신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자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105 심화 1)

 

 

 

AC.105, 창2:9,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 의지의 중심에 있는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SWC.레6 심화

2. ‘왜 제단의 불은 밤새도록, 끊임없이 꺼지지 않아야 했을까?’

 

레6에서 가장 강렬하게 반복되는 명령은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밤새도록 제단 위에 있고, 불은 아침까지 타고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더 놓아야 하며, 13절에서는 마침내 ‘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스베덴보리의 해설이 놀랄 만큼 직접적입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2177(창18:6)은 레6:13-17을 직접 인용한 뒤, 제단에서 계속 타야 했던 불은 ‘주님의 사랑, 곧 영원하고 영속적인 주님의 자비’를 표상했다고 설명합니다. AC.6832(출3:2) 역시 레6:12-13을 직접 인용하면서 이 영속적인 불이 신적 사랑을 표상했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처음부터 ‘우리의 신앙 열심을 절대로 식히지 말라’는 명령으로 읽으면 중심이 인간에게 옮겨집니다. 제단의 불이 가장 먼저 나타내는 것은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입니다. 꺼지지 않는 것은 우리의 감정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의 영적 상태는 끊임없이 변합니다. 뜨거울 때도 있고 차가울 때도 있으며, 밝은 아침 같은 때도 있고 긴 밤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밤이 되었다고 제단의 불까지 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때에도 주님의 사랑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불 위에 놓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원하지만 인간에게는 날마다의 응답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제의 예배로 오늘을 살 수 없고, 십 년 전의 뜨거웠던 체험으로 오늘의 악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매일 말씀 앞에 서고, 오늘 보이는 악을 피하며, 오늘 행할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두 방향이 동시에 있습니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오는 주님의 사랑과 자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사랑을 날마다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인간의 자유입니다. 전자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후자가 없다면 주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삶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꺼지지 않는 불’은 레6 전체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훔친 것을 돌려주고,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되고, 주님의 선을 받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과정 아래에서 주님의 사랑이 한순간도 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이 꺼질 때조차 주님의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바로 그 영원한 불에 날마다 다시 자신의 삶을 가져가는 과정입니다. (SWC.레6 심화 2)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SW.레6.심화3. ‘왜 번제의 재까지 거룩하게 다루어야 했을까?’ 번제가 모두 타고 나면 남는 것은 재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제사는 끝났고 재는 치워야 할 폐기물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레6

bygrace.kr

 

SW.레6.심화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SW.레6.심화1. ‘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이웃에게 먼저 돌려주어야 했을까?’ 레6:1-7에서 가장 눈여겨볼 것은 범죄의 대상입니다. 맡긴 물건을 속이고, 도둑질하고, 착취하고, 잃어버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30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AC.30 [3]의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라는 문장은 스베덴보리 인간론의 중요한 원리를 아주 압축해서 말합니다. 여기서 ‘그것들’은 바로 앞에서 말한 사랑과 신앙이며, 특히 중요한 표현은 ‘in its recipient objects’, 곧 ‘빛을 받아들이는 대상 안에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의 의지와 이해가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연적인 태양빛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태양빛이 물이나 나뭇잎, 창문이나 돌에 비치면 빛은 각각의 대상 안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대상이 빛 자체의 근원은 아닙니다. 빛의 근원은 태양이고, 대상은 그 빛을 받아 그것이 나타나게 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의지와 이해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비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사람 안에서 사랑은 의지에,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사람은 ‘내가 사랑한다’, ‘내가 진리를 이해한다’, ‘내가 이것을 믿는다’고 느낍니다. 실제로 그것들은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서 일어나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이고 행합니다. 그러나 AC.30이 강조하는 것은 그 생명의 최초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라고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인다’는 말은 인간의 의지와 이해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수용체는 실제로 받아들이며, 사람은 자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에서도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악을 피하며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만 그 모든 과정에서 참된 사랑과 참된 신앙의 생명 자체를 자기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에서 살핀 AC.29의 ‘생명 없는’ 상태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하면서도 처음에는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자신이 실제로 행하고 선택하면서도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 자신의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의 근원을 올바르게 구별하게 합니다.

 

실제 삶에서도 이 원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기로 결정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는 실제로 상황을 판단하고, 도울 것을 선택하며, 자신의 손과 시간과 재물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참된 선, 곧 이웃을 위하는 사랑의 생명까지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냈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태양빛이 물체 안에 실제로 나타나면서도 그 빛의 근원이 그 물체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AC.30 [3]의 이 비유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은 가짜이고 주님만 모든 것을 하신다’는 식의 인간 부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실제로 살아 움직이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가르칩니다. 의지와 이해는 사랑과 신앙을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수용체이며,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그 수용체 안에 사랑을 일으키시고 진리로 비추십니다. 이것이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라는 비유의 핵심입니다. (AC.30 심화 1)

 

 

 

AC.30, 창1:14-17(AC.30-37), ‘사랑과 신앙의 광명체 : 사랑으로 생명을 얻는 신앙의 넷째 날’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곧 퍼셉션의 본성이 어떠한지, ‘생명나무’(tree of lives), 곧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의 본성이 어떠한지, 그리고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본성이 어떠한지는 뒤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But the nature of the “tree of the garden,” or perception; of the “tree of lives,” or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nd of the “tree of knowledge,” or faith originating in what is sensuous and in mere memory-knowledge, will be show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106은 창2:9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짧게 정리하면서, 이 절에서 등장한 세 가지 중요한 주제가 앞으로 더 자세히 밝혀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곧 ‘동산의 나무’인 퍼셉션, ‘생명나무’인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지식의 나무’인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입니다. AC.102에서 먼저 제시했던 세 가지 의미를 AC.103-105에서 일부 설명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으로 이 주제들이 모두 설명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금 창2:9을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안내가 됩니다. 특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아직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그것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을 뜻한다는 데까지입니다.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 사람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이후의 타락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앞으로 이어지는 설명을 더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지식의 나무’를 지식이나 이성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아직 하지 않은 말을 앞질러 하는 것이 됩니다.

 

‘생명나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C.105에서는 그것을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하면서, 마침내 ‘주님의 자비’라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06은 그 생명나무의 ‘본성’ 역시 뒤에서 더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붙들어야 할 중심은 생명나무를 어떤 교리적 정의 하나로 완전히 파악했다는 생각보다,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 있다는 지금까지의 질서입니다.

 

퍼셉션 역시 아직 다 밝혀진 것이 아닙니다. AC.104에서 그것은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중요한 설명이지만, AC.106은 그 ‘본성’이 앞으로 더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낯선 개념을 처음 만났을 때 즉시 익숙한 개념으로 바꾸어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점차 어떤 내용을 더해 가는지를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AC.106은 내용은 짧지만 독자에게 중요한 여백을 남깁니다. 주님의 말씀과 그 속뜻을 이해하는 일은 한 표현의 뜻을 한 번 확인하고 끝내는 일이 아니라, 이어지는 말씀 안에서 그 뜻이 점차 열리고 서로 연결되는 과정을 따라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창세기 첫 부분처럼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하게 읽어 온 말씀을 전혀 다른 깊이에서 다시 접할 때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기 이해 안에 넣으려 하기보다 지금 밝혀진 만큼 충실히 받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은 기다리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AC.106에서 우리는 퍼셉션과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에 관한 결론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턱에 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분명해진 것은 참과 선을 퍼셉션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의 근원도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신앙의 근원을 찾는 문제는 앞으로 더 밝혀질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에게 결론을 서두르게 하지 않고, 이어지는 말씀과 설명을 따라 그 차이를 더 분명히 보도록 이끕니다. (AC.106 해설)

 

 

 

AC.107, 창2:10,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뜻함’ (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에덴에서 흘러나오

bygrace.kr

 

AC.105, 창2:9,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 의지의 중심에 있는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며, ‘동산 가운데’(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의지는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서 가장 먼저 소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으므로,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에 관하여 말해지기는 하지만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탐욕이며, 이것이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지가 생명나무가 놓여 있는 ‘동산 가운데’(midst of the garden)이고,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으므로,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주님의 자비이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옵니다. The “tree of lives”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in the midst of the garden” is in the will of the internal man. The will,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heart,” is 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with man and angel. But as no one can do good of himself, the will or heart is not man’s, although it is predicated of man; cupidity, which he calls will, is man’s. Since then the will is the “midst of the garden,” where the tree of lives is placed, and man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the “tree of lives” is the mercy of the Lord, from whom comes all love and faith, consequently all life.

 

해설

AC.105는 창2:9의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라는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가장 깊은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고, 그것이 있는 ‘동산 가운데’는 속 사람의 의지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이 의지를 ‘마음’이라고도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서 가장 먼저 소유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명나무가 동산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의 생명의 중심과 관계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설명은 매우 강합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으므로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니며, 사람이 자기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탐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능력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선한 의지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선을 원하고 행하게 하는 선의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앞의 AC.99와 AC.104에서 계속 밝혀진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의 지성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하며, 퍼셉션 자체도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05는 그보다 더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의 지성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선을 원하는 의지의 생명 역시 그 근원이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인간이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있는 것은 ‘단지 탐욕’이라고까지 말할까요? 이 표현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철저히 구별하려는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생명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AC.105가 가리키는 생명의 질서는 그 반대입니다. 선한 의지와 사랑과 신앙과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며, 인간은 그것들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갑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나무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뜻한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모습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사람에게서 생명을 요구하시면서 그 생명을 스스로 만들어 내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선한 의지를 만들어 내어 먼저 주님께 가져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AC.105가 말하는 질서에서는 오히려 주님께서 그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사랑도 주님으로부터 오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도 주님으로부터 오며, 따라서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명나무’를 마지막에는 ‘주님의 자비’라고까지 풀이합니다. 생명나무의 중심에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없애기보다, 우리가 가진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묻습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사랑하고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AC.105가 보여 주는 천적 질서와 맞닿아 있습니다. 에덴동산 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결국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중심에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자비가 계셔야 함을 보여 줍니다. (AC.105 해설)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 심화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에서 가장 강하게 들리는 문장은 아마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bygrace.kr

 

 

 

 

AC.106, 창2:9, ‘퍼셉션과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의 본성은 뒤에서 더 밝혀진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bygrace.kr

 

AC.104, 창2:9, ‘퍼셉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영어만 읽으면 ‘move’는 ‘움직이다’, ‘brood’는 새가 알을 ‘품다’라는 서로 다른 말인데 왜 두 단어가 나란히 나오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 경우에는 Potts의 영어만 가지고 의미를 추측하기보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표현과 창1:2의 성경적 배경을 함께 보는 것이 좋습니다.

 

창1:2의 히브리어에서 ‘운행하시니라’에 해당하는 동사는 רחף 계열의 말이며, 신32:11에서도 독수리가 자기 새끼 위에 ‘너풀거리는’ 모습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따라서 이 동사는 단순히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는 뜻만으로 읽기보다, 무엇인가의 위에서 움직이거나 너풀거리는 이미지를 가집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히브리어 단어 자체가 곧 암탉이 알을 품는다는 뜻이다’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19에서 결정적인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표현을 어떻게 해설하는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을 주님의 자비라고 밝히면서 그 자비의 운행을 새가 알을 품는 모습으로 설명합니다. Potts의 ‘brood’는 바로 이 설명을 전달하기 위한 말입니다. 따라서 ‘move’와 ‘brood’는 서로 경쟁하는 두 번역이라기보다, 성경 본문의 ‘운행’이라는 표현과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풀어 주는 ‘품음’의 이미지를 함께 보여 준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라는 비유는 AC.19의 전체 문맥과 잘 맞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감추어 보존하시며, 이것들을 리메인스라고 합니다. 아직 그것들이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았는데도 주님의 자비는 그 위에서 운행합니다. 그러므로 ‘품는다’는 그림은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을 보호하고 보존하며 장차 생명이 나타날 때를 준비하는 모습을 매우 자연스럽게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암탉, 알, 따뜻함 같은 요소 하나하나에 별도의 상응을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AC.19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사용하는 비유의 목적은 주님의 자비가 수동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 위에서 이미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아직 거듭남을 의식하지 못하고 ‘빛이 있으라’는 상태에 이르지 않았어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서 거듭남을 위한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번역에서도 ‘move’와 ‘brood’를 하나의 한국어로 억지로 합칠 필요는 없습니다. 창1:2의 성경 표현을 따라 ‘운행하다’를 살리고,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는 ‘품다’를 함께 제시하면 됩니다. 현재처럼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 ‘품는다’(brood)라고 옮기면 두 층위가 모두 드러납니다.

 

결국 ‘move’와 ‘brood’가 나란히 있는 이유를 ‘히브리어 한 단어에 두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너무 단순하게 정리하기보다, ‘창1:2의 운행이라는 성경 표현을 스베덴보리가 품음의 이미지로 해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렇게 읽으면 이 두 단어는 어색한 중복이 아니라 AC.19의 핵심, 곧 아직 빛이 나타나기 전부터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을 품고 계시는 주님의 자비를 보여 주는 매우 아름다운 표현이 됩니다. (AC.19 심화 2)

 

 

 

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bygrace.kr

 

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에,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반복해서 ‘자비’라는 말을 만나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한국어의 ‘자비’가 일상적으로 불교와도 자주 연결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차라리 ‘은혜’라고 번역하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두 말을 임의로 하나로 합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사용한 말을 구별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에서 영어 ‘mercy’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말은 ‘misericordia’입니다. 이것은 긍휼, 자비, 불쌍히 여김과 관련된 말입니다. 따라서 Potts가 이를 ‘mercy’로 옮겼을 때 한국어로 ‘자비’라고 번역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자비’가 반드시 불교적 용어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mercy’를 ‘자비’라고 하는 것은 다른 종교의 개념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는 기독교적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반면 ‘grace’는 일반적으로 ‘은혜’라고 번역합니다. 두 말은 서로 매우 가까우며 실제 신앙 언어에서는 겹치는 영역도 많기 때문에 ‘자비는 이것, 은혜는 저것’이라고 완전히 분리된 두 개념처럼 정의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뉘앙스에서 ‘mercy’는 비참하고 연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grace’는 값없이 베풀어지는 호의와 은혜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를 돕는 구별이지 두 단어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교리적 경계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19에서는 특히 왜 ‘자비’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지가 본문의 흐름에서 드러납니다. 사람은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고, ‘깊음’으로 표현되는 욕정과 거짓에 잠겨 있습니다. 아직 빛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사람이 먼저 선해져서 주님의 관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직 그런 어두운 상태에 있을 때부터 주님께서 그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감추어 보존하시고 그 위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런 문맥에서는 ‘자비’라는 말이 AC.19의 장면을 매우 잘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작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도 같은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보고 이해하며 인간의 구원과 거듭남에 관한 것을 알게 되는 근원을 자기 지성이나 공로에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는 표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mercy’를 사용하는 모든 곳을 하나의 간단한 공식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각의 문맥에서 그 말이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더 깊이 보면 주님의 자비는 주님의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속성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타락하고 연약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 사랑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향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와 긍휼의 언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비’를 단순히 불쌍해서 봐주는 감정 정도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AC.19에서 주님의 자비는 실제로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보존하고, 그것들 위에서 운행하며, 장차 거듭남에 사용하시는 적극적인 신적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어 번역에서는 ‘mercy’를 ‘은혜’로 바꾸어 익숙하게 만들기보다 ‘자비’로 구별하여 두는 편이 좋습니다. 독자에게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도 AC를 계속 읽으면서 ‘주님의 자비’가 어떤 문맥에서 반복되는지를 경험하면 그 말의 깊이가 점차 드러납니다. ‘grace’가 나오면 ‘은혜’, ‘mercy’가 나오면 ‘자비’라는 기본적인 구별을 유지하되, 둘을 서로 경쟁하는 신학 개념으로 만들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19에서 이 차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그림은 결국 ‘품으심’입니다. 아직 빛이 나타나기도 전에 주님의 자비는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며, 사람 안에 감추어 보존하신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새 생명을 만들어 내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그를 떠나지 않고 거듭남을 준비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자비’는 단순한 번역어 하나가 아니라 거듭남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AC.19 심화 1)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bygrace.kr

 

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창1:14-17)

 

AC.30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자라 가는지를 알지 않으면 분명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요한복음에서 밝히신 바입니다. What is meant by “great 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2]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데, 먼저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신앙인 기억 지식의 신앙을 받습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을 받고, 마지막으로는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을 받습니다.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3절로 13절까지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은 20절로 25절까지 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이제 처음으로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을 다루는데, 이것들이 바로 ‘광명체들’(luminaries)입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입니다. 이 두 광명체는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광명체들이 있어’(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라는 라틴어 단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라틴어 복수 표현인 [sint luminaria]가 아니고 말입니다. 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 “luminaries”; love being “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 “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 속 사람 안에서의 사랑과 신앙은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의 열과 빛과 같으므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됩니다. 이런 이유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set in the expanse of heaven)라고 하는데, 이는 속 사람 안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뿐입니다. 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해설

AC.30은 창세기 1장의 넷째 날, 곧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가 나타나는 장면을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넷째 날의 광명체들을 단순히 해와 달의 상징으로 바로 풀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무엇이며, 특히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생명을 얻어 가는지를 먼저 알아야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출발점에서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다’라고 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종교적 확신이나 교리 지식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바로 이 명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요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를 인용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AC.30에 인용된 직접적인 이유는 먼저 ‘달로 상징되는 신앙에는 순종이 포함된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신앙의 생명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에 있으며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개역개정의 후반부가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번역되어 있어 신앙과 삶의 순종이 분리될 수 없다는 점도 생각하게 하지만, AC.30은 여기서 그 어휘를 별도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의 직접적인 초점은 신앙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새로 창조되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세 상태를 구별합니다. 처음은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fides scientifica’입니다. 사람은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기억하지만 아직 그것이 신앙의 살아 있는 생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음은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입니다. 이제 사람은 단지 기억할 뿐 아니라 자신이 배우는 진리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마지막은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입니다. 이 마지막 신앙은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입니다.

 

이 세 단계는 앞에서 지나온 창조의 날들과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이 창1:3-13의 ‘생명 없는 것들’로 표상되고,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은 창1:20-25의 ‘생명 있는 것들’로 표상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생명 없는’이라는 말은 기억 지식이나 이해가 무가치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반드시 필요한 준비입니다. 그러나 아직 신앙의 생명이 사랑과 결합하여 살아 움직이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AC.29에서 열매까지 나타났는데도 아직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었던 이유도 이 문맥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제 AC.30에서 처음으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함께 등장하고, 이것들이 ‘광명체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은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사랑과 신앙’이라고 병렬시키지 않고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신앙은 사랑과 독립하여 스스로 생명을 가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와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이 두 광명체가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스베덴보리는 라틴어 표현에서도 읽어 냅니다. 그는 ‘sit luminaria’라는 단수 표현과 ‘sint luminaria’라는 복수 표현을 의도적으로 대조하면서, 사랑과 신앙이 둘로 분리된 영적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 안에서 결합되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중요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와 그것과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자연계의 열과 빛에 비유합니다. 속 사람 안의 사랑은 열과 같고, 신앙은 빛과 같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둘의 근원과 수용에 있습니다. 광명체가 ‘하늘의 궁창에’ 놓인다는 것은 속 사람 안에 놓인다는 뜻이며,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놓입니다. 즉 사랑은 의지와 연결되고 신앙 또는 진리는 이해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아르카나가 나옵니다. 사랑과 신앙이 의지와 이해 안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들의 근원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그것들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날 뿐이라고 말합니다. 햇빛이 물체에 비쳐 그 안에서 보이더라도 빛의 근원이 그 물체가 아닌 것처럼, 인간 안에 나타나는 참된 사랑과 신앙의 생명도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 그릇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며, 자유 가운데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는 자신이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도,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이 ‘오직 주님의 자비’라는 AC.30 마지막 문장은 바로 이 근원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넷째 날의 전환점은 단순히 ‘신앙을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 속에 있던 신앙이 이해로 나아가고, 마침내 사랑과 결합하여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조차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소유하지 않고, 그 근원이 주님임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앞의 날들에서 준비되었던 모든 것이 이제 사랑이라는 큰 광명체와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라는 작은 광명체의 빛 아래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AC.30이 넷째 날의 광명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신앙의 본질과 성장 과정을 밝히는 이유입니다. (AC.30 해설)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AC.30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

AC.30 심화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AC.30 [3]의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

bygrace.kr

 

 

 

AC.31, 창1:14-17, ‘해와 달과 별 : 사랑과 신앙의 밝아짐과 어두워짐’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bygrace.kr

 

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또는 암탉이 자기 알을 품듯이 ‘품는다’(brood)고 합니다. 그것이 운행하는 대상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인데, 말씀 전체에서 이것들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 자’(remnant)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 나오는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은 바로 이러한 지식들을 말합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19는 창1:2의 마지막 말씀,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의 속뜻을 밝힙니다. 앞선 AC.17-18이 거듭남 이전의 인간을 ‘혼돈과 공허’, ‘흑암’, ‘깊음’으로 묘사했다면, 여기서는 그처럼 어두운 상태의 인간에게 이미 주님의 자비가 역사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출발점은 사람이 먼저 자신을 고치거나 주님께 올라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버리지 않고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에 있습니다.

 

‘운행하다’(move), 또는 ‘품다’(brood)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암탉이 자기 알을 품는 모습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세부적인 상응을 임의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사람 안에 보존해 두신 것들 위에서 계속 역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의 현재 상태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아무것도 없는 존재처럼 대하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아직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주님께서 그 안에 감추어 두시고 보존하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1:2의 마지막 장면은 단순히 흑암 가운데 무엇인가 움직이고 있다는 모습이 아니라,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생명을 자비로 품고 계시는 주님의 역사를 보여 줍니다.

 

그것이 바로 ‘리메인스’(remains), 또는 ‘남은 자’(remnant)입니다. AC.19는 여기서 그것을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는 우선 그 직접적인 설명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동시에 리메인스를 단순히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좋은 추억이나 종교 지식 전체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사람이 자기 힘으로 모아 둔 영적 자산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 숨겨 두시고 보존해 두신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후 AC에서는 리메인스가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 순진함과 체어리티에 속한 상태들까지 포함하는 훨씬 깊은 개념으로 펼쳐지지만, AC.19에서는 그 전체 교리를 미리 끌어오기보다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사람 안에 무엇인가를 이미 보존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수면’(the faces of the waters)은 무엇일까요? AC.19는 여기의 ‘수면’이 바로 이러한 참된 것과 선한 것에 관한 지식들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창1:2의 문자에서는 흑암 아래의 물과 그 위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 안에 주님께서 감추어 보존하신 것들과 그 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자비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알고 다시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를 읽으면, 이 말씀은 창조 이전의 한 장면을 넘어 주님께서 사람의 거듭남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AC.19에는 리메인스가 ‘겉의 일들이 황폐해지기 전까지는 결코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중요한 말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18의 ‘황폐’와 연결됩니다. 아직 사람의 겉에 속한 것들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들이 거듭남의 새로운 생명으로 전면에 나타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고도 그것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선한 것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공로나 명예로 돌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19가 직접 제시한 사례는 아니지만, 왜 사람에게 속한 것이 물러나는 과정과 주님께서 보존하신 것이 빛 가운데 나오는 과정이 서로 연결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리메인스 자체가 불안정하거나 쉽게 오염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낼 사람의 외적 상태가 아직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고 이해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러나 ‘황폐해질 때까지 리메인스가 빛이나 낮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주님께서 그 이전에는 사람 안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창1:2의 그림은 정반대입니다. 아직 ‘빛’도 ‘낮’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영은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직 자기 안에서 분명한 영적 빛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주님의 자비는 이미 그 사람 안에 보존된 것들 위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AC.18의 황폐를 단순히 버림받음이나 파괴로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쪽에서는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는 것들이 물러나는 과정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모든 과정 가운데 주님의 자비가 이미 사람 안에 보존하신 것들 위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9는 리메인스 교리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현재 모습만 보고 ‘저 사람 안에는 아무런 선도 남아 있지 않다’고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다고 해서 그 모든 세월 동안 주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리메인스가 있다는 사실이 사람의 거듭남을 자동적으로 보장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그 사람이 훗날 선과 진리를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것들을 자비로 준비하고 보존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AC.19의 중심은 리메인스라는 개념 자체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자비’입니다. 리메인스가 존재하는 것도 주님께서 감추어 보존하셨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훗날 거듭남에 사용되는 것도 주님의 역사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1:2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어두우면서도 동시에 희망적입니다. 아직 빛은 나타나지 않았고 사람은 여전히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흑암 속에서도 주님의 자비는 이미 사람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 보존하신 것들 위에서 운행하며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말씀에서 마침내 ‘빛이 있으라’는 새로운 상태가 시작됩니다. (AC.19 해설)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

bygrace.kr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bygrace.kr

 

 

 

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bygrace.kr

 

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7

첫 번째 상태는 앞서는 상태로서, 유아기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의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첫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 “voi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 “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7은 AC.6에서 예고한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 가운데 첫 번째 상태를 설명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첫 번째 상태는 아직 본격적인 거듭남이 시작된 상태가 아니라 그것에 ‘앞서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범위를 유아기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의 상태까지로 잡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첫 번째 상태’란 어느 한순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유아기에서 시작하여 거듭남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지나온 상태를 포괄합니다. AC.6에서 여섯 날을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이라고 한 직후, 그 첫 상태를 이렇게 거듭남에 앞서는 긴 상태로 설명한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상태를 창1:2의 ‘혼돈’(void), ‘공허’(emptiness),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AC.7에서는 아직 이 세 표현이 각각 무엇에 상응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혼돈은 선의 부재이고 공허는 진리의 부재이다’와 같이 각각의 의미를 미리 확정하여 풀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첫 상태 전체를 이 세 표현으로 묘사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은 아직 거듭나기 전이며, 창세기 문자 그대로의 모습으로 말하면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 상태입니다. 바로 이 상태를 바탕으로 이후의 창조, 곧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AC.7의 중심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 자체보다 그 위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움직임’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첫 움직임을 놀랍게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창1:2의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과 연결합니다. 아직 사람에게 빛이 생겼다고 하지도 않았고, 사람이 무엇을 알고 믿거나 행했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거듭남의 첫 상태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움직임은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입니다. AC.7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주님의 자비가 먼저 움직이십니다.

 

따라서 AC.7에서는 이후의 교리를 너무 많이 앞당겨 설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수면’을 곧 리메인스라고 확정하거나, ‘운행하다’를 어미 새가 알을 품는 모습으로 자세히 해설하거나, 이 첫 상태가 이후 거듭남의 모든 국면에서 반복된다고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한 의미들은 이후 번호들을 따라가면서 차례로 확인하면 됩니다. AC.7 자체가 지금 독자에게 보여 주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충분히 깊습니다. 거듭남에 앞서는 인간의 첫 상태는 유아기부터 거듭남 직전까지를 포함하며, 그것은 ‘혼돈’, ‘공허’, ‘흑암’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바로 그 상태 위에서 최초로 움직이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입니다. 창조의 첫 빛이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고 기록된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거듭남의 첫 상태와 연결합니다. (AC.7 해설)

 

 

 

AC.8, 창1 개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는 두 번째 상태’

AC.8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bygrace.kr

 

AC.6, 창1 개요, ‘여섯 날, 여섯 상태: 거듭남의 질서를 여는 해석의 문’

AC.6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날(days), 곧 여섯 시기(periods)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