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AC.50

태고교회는 주의 형상(image of the Lord)이라는 말로 표현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천사들과 영들에 의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마다 적어도 영과 천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계와 소통하고,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과 소통하는 것이지요. 영계를 통한 소통과, 천국을 통한 소통, 그리고 천국을 통해 주님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전혀 없는 구조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결합에 전적으로 달려 있어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난다면 그는 즉시 사라지고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understood by theimage of the Lordmore than can be expressed. Man is altogether ignorant that he is governed of the Lord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that with everyone there are at least two spirits, and two angels. By spirits ma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angels with heaven. Without communication by means of spirits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means of angels with heaven, and thus through heaven with the Lord, man could not live at all; his life entirely depends on this conjunction, so that if the spirits and angels were to withdraw, he would instantly perish.

 

[2] 사람은 거듭나기 전과 후에 있어 다스림을 받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그들이 사람을 강하게 지배합니다. 이때에도 여전히 천사들은 함께 있으나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만 사람이 가장 극단적인 악으로 떨어지지만 않도록 막아 주며, 실제로 그의 욕정을 통해 어떤 선으로 굽히고, 감각의 오류를 통해 진리로 굽힐 뿐입니다. 이때 사람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해 영계와는 소통하지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이 지배를 겨우 막고 있는 상태이므로, 천국과의 소통은 매우 미약합니다. While man is unregenerate he is governed quite otherwise than when regenerated. While unregenerate there are evil spirits with him, who so domineer over him that the angels, though present, are scarcely able to do anything more than merely guide him so that he may not plunge into the lowest evil, and bend him to some goodin fact bend him to good by means of his own cupidities, and to truth by means of the fallacies of the senses. He the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through the spirits who are with him, but not so much with heaven, because evil spirits rule, and the angels only avert their rule.

 

[3]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제는 천사들이 주도적으로 다스리며, 사람에게 모든 선과 진리를 불어넣고,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혐오를 일으키게 합니다. 물론 천사들이 이끌기는 하지만, 그것은 봉사의 방식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분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천사들과 영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기에서는 먼저 복수형으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라고 하고, 곧이어 단수형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다(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일하시지만, 다스림과 창조의 주체는 오직 주님 분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도 점을 이사야에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But when the man is regenerate, the angels rule, and inspire him with all goods and truths, and with fear and horror of evils and falsities. The angels indeed lead, but only as ministers, for it is the Lord alone who governs man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as this is done through the ministry of angels, it is here first said, in the plural number,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yet because the Lord alone governs and disposes, it is said in the following verse, in the singular number, “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This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Isaiah: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없이 땅을 펼쳤고 (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Jehovah make all things, stretching forth the heavens alone, spreading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천사들 자신도 자신들에게는 어떤 능력도 없으며, 오직 주님한테서 나오는 그분의 힘으로만 자기들은 일한다고 고백합니다. The angels moreover themselves confess that there is no power in them, but that they act from the Lord alone.

 

해설

AC.50은 바로 앞의 AC.49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를 뜻밖의 방향으로 깊게 들어갑니다. AC.49에서는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이 참으로 사람의 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50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의 형상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이해했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인간의 생명과 영계·천국의 연결,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다스리시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부터 현대 독자에게는 매우 낯선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은 자신이 주님에 의해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며,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고 합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소통하고, 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소통하며,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주님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결합이 없으면 사람은 전혀 살 수 없으며,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나면 즉시 소멸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천사들과 영들이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50의 문장 자체가 연결의 최종점을 주님에게 둡니다. 사람은 영들의 세계 및 천국과 연결되어 있고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주님과연결됩니다. 따라서 천사나 영이 생명의 독립적인 근원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 주님과의 결합에 의존한다는 것이 중심입니다. 앞의 AC.39-43에서도 이미 모든 참된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점이 반복해서 설명되었습니다.

 

사람마다 적어도 영과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 역시 처음 접하면 여러 질문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옆에 명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따라다닌다는 뜻인가?’, ‘ 영은 모두 악한 영인가?’, ‘ 하필 둘씩인가?하는 질문입니다. AC.50 자체는 그 모든 세부를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후 AC.5848-5849에서도 사람에게 두 영과 두 천사가 있어 각각 지옥과 천국과의 소통을 이루게 한다고 다시 말하며, AC.5977-5978에서는 왜 둘씩인지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 및 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의 두 종류와 연결하여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문제는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AC.50의 직접적인 관심은 숫자 자체보다 사람의 상태에 따라 이 영적 다스림의 양상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거듭나기 전과 거듭난 전혀 다르게 다스림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2][3]이 서로 대조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그들이 강하게 지배한다고 합니다. 천사들도 여전히 함께 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가장 낮은 악으로 빠지지 않도록 돌이키고, 그를 어떤 선과 진리 쪽으로 굽히는 정도라고 설명합니다. 이때 사람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해 영들의 세계와는 소통하지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은 그 지배를 막고 있기 때문에 천국과의 소통은 그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특히 눈에 띄는 문장이 있습니다. 천사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그의 욕정을 통해 어떤 선으로’, ‘감각의 오류를 통해 진리로굽힌다고 합니다. 이것을 욕정과 감각의 오류가 사실은 좋은 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50이 말하는 것은 사람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현재 상태에 있을 때 천사들이 그 사람에게 없는 높은 상태를 억지로 전제하여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처해 있는 상태 안에서 극단적인 악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며 어떤 선과 진리 쪽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욕정을 선한 에너지로 바꾸면 된다는 일반적인 거듭남 방법론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영들이 지배한다는 말을 사람에게 아무런 자유나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 악한 생각과 행동은 사실 악한 영들이 것이니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AC.50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천국·지옥 사이의 평형, 그리고 유입된 것을 사람이 어떻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가는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훨씬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AC.50은 지금 그 전체 메커니즘을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 거듭나기 전과 후에 주님의 다스림이 사람에게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3]에서는 상황이 바뀝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천사들이 다스리고, 사람에게 모든 선과 진리를 불어넣으며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혐오를 일으키게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천사가 선과 진리를 만들어 주는 존재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다음 문장에서 천사들이 인도하기는 하지만 오직 사역자들로서 그렇게 할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이 한 문장이 AC.50 전체를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앞에서는 영과 천사들의 작용을 매우 강하게 말하지만, 그들을 독립된 주체로 세우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사역자이고, 주님께서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수많은 중간 존재가 있어서 하나님은 간접적으로만 사람에게 접근하신다는 구조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강조점은 오히려 그 모든 사역 가운데 실제로 다스리고 배열하시는 분은 주님 한 분뿐이라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창1:26의 매우 유명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형상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자가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복수형으로 말씀하실까요? AC.50은 이에 대해 아주 분명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먼저 복수형으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한 것이며, 그러나 실제로 다스리고 배열하시는 분은 주님 한 분뿐이기 때문에 바로 다음 절에서는 단수형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AC.5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1:26우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여기서 우리를 여러 신들의 회의로 보지 않고, 주님과 그분을 섬기는 천사들의 사역이라는 관계 속에서 읽습니다. 그러나 창조와 거듭남의 실제 주체는 천사들이 아니라 주님 한 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사44:24을 인용합니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없이 땅을 펼쳤고.이 구절을 가져오는 직접 목적은 매우 분명합니다. ‘우리라는 복수형이 천사들도 창조의 공동 주체라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홀로 만물을 지으셨으며, 스베덴보리도 이어서 주님만이 다스리고 배열하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44:24의 하늘과 땅 각각의 세부 속뜻을 여기서 추가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은 무엇보다 주님 홀로라는 논증을 뒷받침합니다.

 

마지막 문장도 같은 균형을 확인합니다. 천사들 자신도 자기들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으며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힘으로만 일한다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AC.50은 천사들의 역할을 매우 크게 말하면서도 동시에 천사들에게 어떤 독립된 능력도 돌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천사와 영들을 통해 영계와 천국에 연결되어 있지만, 생명의 근원도, 다스림의 근원도, 창조와 거듭남의 주체도 주님 한 분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현재 해설처럼 하나님의 형상 = 주님의 통치가 막힘없이 흐르는 상태라고 하나의 공식으로 정의하기보다 AC.50이 말하는 만큼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주의 형상이라는 말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것을 이해했다고 한 뒤, 그들이 알고 있던 인간의 영적 연결과 주님의 다스림을 하나의 예로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에게서는 천사들이 사역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창1:26우리의 형상대로와 연결합니다.

 

따라서 AC.50하나님의 형상이 단순히 사람의 외모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동시에 이것을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성품 몇 가지로도 축소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참된 영적 생명 전체가 주님에게 의존하고, 주님께서 천국과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며 거듭나게 하신다는 더 큰 질서 안에서 형상을 바라봅니다. 다만 형상과 모양의 더 정확한 구별은 다음 AC.51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므로, 그 설명까지 여기서 미리 당겨 올 필요는 없습니다.

 

AC.50을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이 가장 눈에 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명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사람 곁에 있다는 신기한 정보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에게서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그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주님과의 결합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천사들과 영들의 모든 사역 배후에서 실제로 다스리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수형 우리뒤에 곧바로 단수형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가 이어집니다. 많은 사역자가 있어도 창조와 거듭남의 주체는 한 분이십니다.

 

심화

1. 영과 천사 누구이며, 둘씩 있는가?

 

AC.50, 심화 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심화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을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 가운데 하나가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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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창1:26, ‘형상에서 모양으로 : 빛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길’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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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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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1:26)

 

AC.49

태고교회, 교회의 사람들과 주님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man)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사람(men)이라고 했고, 자기 자신을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안에서 인식된 것들,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된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of man)이라 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man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men,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These they said wereof man,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 예언서들에서 사람(man) 인자(the son of man) 최고의 뜻으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manand theson of man,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날아갔으며 (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man)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최고의 뜻으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man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아들들과 손으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때문에 주님은 예언자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모양이 남보석 같고 보좌의 형상 위에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인자(the son of man),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같은 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son of man,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7:13, 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도 자신을 자주 인자(the son of man), 사람이라 하시며, 다니엘에서와 같이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son of man,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여기 하늘 구름(The clouds of heaven)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영광(power and great glory) 말씀의 속뜻을 뜻합니다.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옵니다. Theclouds of heaven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는 창1:26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이제 사람이라는 말 자체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앞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영적 인간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사람이라고 하며, 더 근본적으로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AC.49의 대답은 매우 강렬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자기들 자신조차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당황스러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가?그러나 AC.49가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이나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과 태고교회의 영적 인식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참된 사람됨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자기 안에서 사람의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AC.49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사랑의 모든 신앙의 모든 진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단순히 사람이 선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람의 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48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9에서는 같은 원리가 사람됨에 적용됩니다.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가리키며, 속뜻에서는 주님에게서 지혜와 총명을 받아 거듭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만이 사람이라는 말을 인간을 낮추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사람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생명을 만들어 내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갑니다. 따라서 이 말의 초점은 누가 인간 자격이 있는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참된 영적 생명의 근원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49의 첫 문장에는 또 하나 매우 놀라운 내용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해 많이 말할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상상하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과, 바로 이것이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유보 문장은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일으키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사람인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사람인자최고의 에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에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모든 성경 인용을 읽는 열쇠입니다.

 

4:23,25에서 예레미야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 빛이 없고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AC.49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사람이라는 말이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서 사람의 속뜻을 지혜와 총명, 따라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사람이 없다는 표현 역시 그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함께 나오는 공중의 새가 날아갔다는 표현도 앞의 AC.40에서 새가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된다고 설명한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49는 여기서 예레미야 전체의 황폐 상태를 단계별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세밀하게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45:11-12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가 땅을 만들고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속뜻의 사람을 거듭난 사람으로, 최고의 뜻의 사람을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과 연결합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자연계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의 사람이라는 표현에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1:26은 주님께서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보여 주는 직접적인 예로 인용됩니다. 에스겔은 보좌 위에 사람의 모양 같은형상을 봅니다. AC.49는 이 환상의 보좌나 남보석 등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것이 예언자들의 환상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최고의 뜻에서 사람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논증에 사용됩니다.

 

7:13-14에서는 그 표현이 인자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니엘에게 보이신 분이 인자’, 사람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같은 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인자의 왕국과 권세에 관한 모든 세부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자라는 호칭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인용의 직접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복음서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자주 인자라고 부르셨으며, 24:30에서는 다니엘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49사람이라는 주제와 함께 말씀의 문자 의미와 속뜻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짧게 엽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 구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영광이 말씀의 속뜻을 뜻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기때문이며, 바로 거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AC.49가 직접 말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속뜻을 깨닫는 순간 인자의 재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이 확실히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심리나 도덕적 교훈을 흥미롭게 찾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사람역시 결국 인간 자신에게서 설명이 완성되지 않고,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형상의 원형이신 주님을 보아야 한다는 방향이 여기서 열립니다.

 

이 점에서 AC.49는 앞의 AC.48과 다음 글들을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49는 곧바로 인간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먼저 주님을 바라봅니다.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 참으로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도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위대함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하는 사람됨과 관계됩니다.

 

동시에 여기서 거듭난 사람만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사람의 사회적 가치나 존엄을 분류하는 글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이 최고의 뜻과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글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스베덴보리의 매우 깊은 인간론을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는 주장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결국 AC.49가 말하는 사람의 비밀은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 안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소유라고 여기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을 사람이라 불렀고, 주님에게서 온 것들만을 사람의 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서의 사람인자’, 에스겔과 다니엘의 사람 형상, 복음서의 인자, 그리고 말씀의 구름과 영광까지 이어지는 모든 인용은 결국 이 중심을 향합니다.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의 참된 지혜와 총명과 사람됨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깁니다.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심화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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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창1:26, ‘하나님의 형상 : 주님의 통치가 천사와 영들을 통해 사람 안에 흐르는 상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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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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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8

이로부터 사람이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있을 때가 분명해집니다. 이때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그것들을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fishes of the sea), ‘하늘의 (fowl of the heavens) 합니다. 사람이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들을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을 생물(living soul), ‘가축(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신앙으로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fishes of the sea,and thefowl of the heavens.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living soul,and the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image of God,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AC.48은 지금까지 이어진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차이를 짧고 분명하게 정리하는 글입니다. 특히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가 실제로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앞에서는 물고기와 새, 생물과 짐승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 놓고 두 상태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먼저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신앙으로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이미 생명이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다섯째 날의 바다의 물고기하늘의 로 표현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섯 번째 상태를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지 않은 상태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48은 이때 산출되는 것들을 분명히 animate’, 곧 생명이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앞의 AC.39에서도 큰 광명체들이 켜진 뒤 사람이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에 와서 처음으로 영적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지만, 그 생명이 나타나는 중심이 아직 주로 이해에 속한 신앙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이해에 속한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세밀한 변화가 있습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사랑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도 신앙은 그대로 있으며, 거기에 그 신앙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함께합니다.

 

그래서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의 차이를 단순히 아는 단계와 행하는 단계라고만 나누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상태의 사람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AC.48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내적인 것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에서 말하며 그로써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처음 읽으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섯째 상태에는 사랑이 전혀 없고 여섯째 상태에서 갑자기 사랑이 생긴다는 뜻인가?그렇게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8은 거듭남 전체에서 사랑이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섯째 상태에서 사람이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이 글의 초점은 사랑의 최초 존재 여부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신앙과 함께 사랑이 실제 의지에 속한 원리로서 행동의 근원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기존 해설에서처럼 이를 처음에는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애쓰다가 나중에는 좋아서 자연스럽게 한다는 예로 설명하면 어느 정도 감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AC.48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상태에 반드시 심한 억지와 갈등이 있고, 여섯째 상태에 이르면 모든 선행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AC.48이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과 갈등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AC.48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행동의 근원에 관한 변화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이 전면에 나타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과 더불어,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 이제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 아니라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의 원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산출되는 것들이 창1:24-25생물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앞의 AC.44-46에서 이미 이 짐승들이 의지에 속한 것들, 특히 애정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에서 여섯째 날의 생물과 짐승으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피조물의 종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신앙의 상태에서 의지에 속한 사랑까지 포함하는 상태로 깊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AC.48의 절정입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임의로 하나님과 작동 방식이 같아지는 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8 자체가 그 이유를 간단히 제시합니다.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기때문에 영적 인간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서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의 여러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반복하여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신적인 생명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과 사랑이 그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져 삶으로 나타나는 상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AC.47과의 연결도 중요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 자기에게서인 산출하며,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8에서는 그 진행 가운데 여섯째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하게 되고, 사람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용어상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AC.48은 이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AC를 읽다 보면 영적천적이 서로 구별되는 더 세밀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적 인간이라는 말을 보고 곧바로 이후의 모든 영적·천적 구별을 이 한 문장에 끌어와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여섯째 상태에 이른 거듭난 사람을 영적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 창1:26 이하에서 형상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어집니다.

 

AC.48은 결국 다섯째 상태를 낮추고 여섯째 상태만 참된 것으로 만드는 글이 아닙니다. 다섯째 상태도 이미 살아 있는 거듭남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이해가 진리를 알고 신앙으로 확증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나타나고, 사람은 신앙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는 영적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이 글의 흐름을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만 표현하기보다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이 되는 데로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다섯째 날에 살아난 이해에 속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에는 의지에 속한 사랑과 함께 하나의 더 온전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창조의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 사이에서 AC.48이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AC.49, 창1:26, ‘참 사람은 오직 주님 : 사랑과 진리 안에서만 성립되는 사람됨'(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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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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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심화

1. ‘스베덴보리가 AC 초기부터 여러 인용 구절의 속뜻을   있었던 이유

 

AC.28을 처음 읽으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이제 겨우 창세기 1장을 설명하는 AC.28인데,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학개, 스가랴, 시편 등 말씀의 여러 곳을 자유롭게 오가며 그 구절들을 겉뜻이 아니라 속뜻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해설하면서 그때그때 처음 속뜻을 알아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혹시 글을 쓰는 동안 주님께서 필요한 성경 구절을 하나씩 생각나게 하시고 그 뜻까지 알려 주셨던 것일까요?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글 번호 순서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순서를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28이 창세기 주석의 스물여덟 번째 글이라는 사실은 독자인 우리가 설명을 스물여덟 번째 단계까지 읽었다는 뜻이지, 스베덴보리가 그때 비로소 스물여덟 번째 속뜻을 발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그가 이미 열렸다고 말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펼쳐 보이는 저술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자신의 학문적 연구나 추론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곳곳에서 그는 이전에는 누구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말씀의 아르카나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렸다고 말하며, 자신에게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것들을 기록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기 이해를 존중해서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독창적인 상징 해석법을 만들어 성경에 적용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어 보여 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고 있으면 주님께서 곁에서 다음에 인용할 성경 구절을 하나씩 불러 주셨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장면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28은 자신의 집필 과정이 그런 방식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계시와 조명 아래 기록했다는 것과, 매 문장과 인용 구절을 받아쓰기처럼 직접 전달받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그 과정을 세밀하게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AC.28에서 여러 예언서와 시편을 한꺼번에 인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말씀의 속뜻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이해가 있습니다. 속뜻은 창세기에만 따로 존재하는 암호 같은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같은 대상과 표현이 말씀 안에서 같은 영적 실재와 연결되는 상응의 질서가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을 설명하면서 이사야의 물, 스가랴의 물, 시편의 물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AC.28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여러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한 뒤 사11:9, 19:5-6, 2:6-7, 14:7-8, 69:33-34 등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그리고 이 그릇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슥12:1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구절을 독립적으로 길게 주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성경책에 등장하는 동일하거나 관련된 표현들이 하나의 영적 의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독법을 알려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서 이사야, 예레미야, 시편, 복음서 등의 여러 구절을 인용할 때, 그것들을 단순한 참고 성구 정도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그 인용들을 통하여 말씀의 한 부분에서 발견되는 영적 의미가 다른 부분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AC를 계속 읽다 보면 하나의 표현에 대한 설명이 여러 성경책을 가로질러 점점 풍성해지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의 상응을 알면 말씀의 모든 구절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물은 지식이다라는 공식을 외운 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물에 무조건 같은 한 단어를 대입하면 속뜻이 자동으로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과 연결되는 다른 표현들, 다루어지는 주제와 상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상응은 사람이 임의로 만든 상징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는 영적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주석이 아직 AC.28인데 어떻게 다른 성경의 속뜻까지 알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AC의 글 번호는 스베덴보리가 속뜻을 발견해 간 시간 순서가 아닙니다. 그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열렸다고 증언하며,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는 그것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를 따라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말씀 전체가 하나의 상응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한 표현을 설명하면서 다른 성경책의 관련 구절들을 함께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순간 주님께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구절을 생각나게 하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답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모든 내적 의미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돌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실제 집필 순간마다 주님의 조명이 어떤 심리적·의식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을 더 정확하게 존중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보면 AC.28의 수많은 성경 인용은 오히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한 권의 숨은 뜻만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한 표현을 통하여 말씀의 여러 부분이 어떻게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지를 조금씩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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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 심화

1.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라는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멈추게 되는 대목입니다.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해 내는 것까지 주님께서 하나하나 직접 꺼내 주신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인간이 배우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AC.27이 직접 말하는 범위부터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유입되고,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온 것들은 그곳에서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 저장되며,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가 AC.27이 직접 밝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어떤 생각이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주님께서 직접 꺼내시는 것인지까지 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표현에서 한 가지 중요한 원리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남에 필요한 선과 진리는 사람이 한 번 배우고 기억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받아들여 기억 속에 간직하게 된 것들을 이후의 삶에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진리를 지금 배우면서도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헛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머물러 있던 것이 훗날 삶의 어떤 상황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예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래전에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당시에는 별다른 감동 없이 지나갔는데, 여러 해 뒤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그 말씀이 문득 떠오르고, 이전과 전혀 다르게 마음에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 말씀 때문에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거나 어떤 행동을 바꾸게 될 수도 있습니다. AC.27이 바로 이런 구체적인 경우를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 속에 저장된 것이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는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는 예입니다.

 

설교나 성경 공부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내용이 어느 순간 다른 말씀과 연결되어 떠오르거나,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이 어떤 일을 겪은 뒤 새롭게 이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 역시 모든 경우에 지금 주님께서 기억을 직접 꺼내셨다고 단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기억과 지식도 주님의 섭리 밖에 있는 독립된 영역이 아니며,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할은 없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실제로 말씀을 읽고, 진리를 배우고, 생각하고, 기억하며, 그것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사람이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as of oneself) 선을 행하고 진리를 따라야 하면서도, 실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인정해야 한다는 원리를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불러내신다는 말을 인간의 자유와 활동을 지워 버리는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사람은 창고를 채우고 주님은 그것을 꺼내 쓰신다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나누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배우고 기억하는 능력 자체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사람에게 보존되는 것 가운데에는 그가 의식적으로 공부해서 기억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는 리메인스의 가르침까지 생각하면, 주님의 준비와 보존은 사람이 의식하는 범위보다 훨씬 깊습니다. AC.27에서는 그 모든 문제를 미리 펼치기보다, 우선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주님에 의해 필요에 따라 사용된다는 사실에 머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는 표현은 인간의 기억 활동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배우고 간직한 진리가 단순한 지식으로만 끝나지 않고, 주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거듭남을 위해 쓰일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운 진리가 오늘 곧바로 삶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더 깊이 사용하실지는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27의 이 짧은 표현은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정반대입니다. 사람은 자유롭게 배우고 생각하고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있는 선과 진리의 생명과 그 선한 쓰임의 궁극적인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그것을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시는 이 질서 안에서, 기억 속의 지식도 단순한 저장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됩니다.

 

 

 

AC.27, 창1:9,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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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4 심화

1. 기억 지식(memory-knowledges, scientifica)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은 처음 들으면 낯설게 느껴지지만, 사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아주 평범한 종류의 지식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가 라틴어로 ‘scientifica’, 영어로 ‘memory-knowledges’라고 부른 것은 특별한 신비한 지식이 아니라,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모든 사실 지식’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보고 듣고 배우고 읽으면서 머릿속에 쌓아 두는 정보들입니다.

 

가장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서울은 한국의 수도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또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또 성경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버지다’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입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 꺼내 쓰지만, 그 자체가 곧 삶의 성품이나 사랑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지식을 스베덴보리는 ‘기억 지식’이라고 부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학교 공부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역사 연도, 과학 공식, 지리 정보, 언어 단어, 직업 기술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의사는 의학 지식을, 목수는 목공 기술을, 목회자는 성경 지식을 많이 기억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기억 속에 축적된 지식입니다. 바로 이런 것들을 통틀어 스베덴보리는 ‘memory-knowledges’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이 개념을 특별히 강조하는 이유는 ‘이 지식이 사람의 겉 사람(external man)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을 크게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겉 사람은 세상과 접촉하는 부분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공부하고 배우면서 지식을 쌓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기억 지식은 대부분 ‘겉 사람의 창고’에 저장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기억 지식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고 쓸모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 들어올 때, 그것을 담을 그릇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이해하려면 먼저 성경 이야기, 사람의 삶, 여러 상황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기억 지식입니다. 마치 씨앗이 자라기 위해 흙이 필요한 것처럼, 영적 진리가 작용하려면 기억 지식이 바탕이 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많이 읽어서 성경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합시다. 아브라함 이야기, 모세 이야기, 복음서 이야기 등을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기억 지식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느 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때 그 성경 지식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삶을 움직이는 진리’가 됩니다. 즉 기억 지식이 속 사람과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기억 지식을 종종 ‘재료’나 ‘도구’처럼 설명합니다. 목수가 집을 짓기 위해 나무와 연장을 사용하는 것처럼, 사람의 속 사람은 기억 지식을 사용하여 진리를 이해하고 선을 행합니다. 기억 지식은 그 자체가 영적 생명은 아니지만, ‘영적 생명이 활동할 수 있는 재료’가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기억 지식이 ‘선한 방향으로도, 잘못된 방향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지식이라도 어떤 사람은 그것을 통해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 지식을 이용해 자기 생각을 정당화하거나 남을 이기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지식이 많다고 해서 곧 지혜로운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지혜는 지식이 ‘선한 사랑과 결합될 때’ 생깁니다.

 

초심자에게 가장 쉽게 설명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읽고, 경험을 통해 얻는 ‘머릿속 정보 창고’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사랑과 연결되어 삶 속에서 사용될 때, 비로소 ‘지혜’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기억 지식’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AC.24에서 주님이 ‘속 사람 안의 지식’과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구별하신다고 할 때의 뜻은 이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이 있고, 그보다 더 깊은 곳에는 ‘삶과 사랑과 연결된 진리’가 있습니다. 기억 지식은 겉 사람의 창고이고, 속 사람은 그 지식을 사용하여 진리와 선을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런 구별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글이 훨씬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AC.24, 창1:6-7,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AC.24-2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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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심화

1. 저녁이 먼저이고 아침이 뒤따르는가? : 거듭남의 영적 질서

 

AC.22,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에서 이 morning  evening을 단8:14, 26과 연결하는 게 여전히 좀 어리둥절합니다. 단순히 주야라는 표현이 나오기 때문인 건 아닐 텐데... 이 부분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단순히 단8:14에 ‘evening’과 ‘morning’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곧바로 창1의 ‘저녁’과 ‘아침’에 mechanically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그렇게 연결하는 이유는, 그가 말씀 전체에 공통으로 흐르는 하나의 영적 언어, 곧 ‘상응의 질서’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에서 ‘저녁’과 ‘아침’이 한 번 정의되면, 이후 말씀의 다른 곳들에서도 그 표현은 같은 영적 구조 안에서 읽혀야 한다는 전제가 있는 것입니다. AC.22에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세운 원리는 이것입니다. ‘저녁’은 빛이 약해진 상태, 곧 신앙이 거의 없거나 꺼져 가는 상태이고, ‘아침’은 다시 빛이 오는 상태, 곧 진리와 신앙의 빛이 살아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저녁’과 ‘아침’은 단순한 시간 표시가 아니라 ‘교회와 인간의 영적 상태 변화’를 가리키는 표지입니다. 이 전제를 가지고 다니엘서로 가면, 거기서의 ‘저녁-아침’도 단지 시간 계산이 아니라 ‘신앙이 거의 사라진 상태로부터 다시 회복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핵심은 ‘주야라는 단어가 같으니까 연결한다’가 아니라, ‘저녁과 아침이 성경 안에서 반복해서 같은 영적 패턴을 가리킨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단8:14는 시간표를 넘어서 ‘황폐와 회복’의 리듬을 담고 있고, 창1은 그 리듬의 기본 문법을 먼저 보여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단8장의 문맥 자체를 보면 왜 스베덴보리가 이 본문을 끌어오는지가 더 분명해집니다. 다니엘 8장은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고, 진리가 땅에 던져지고, 거룩한 것들이 훼손되는 장면을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역사 속 박해와 성전 모독의 맥락이지만, 스베덴보리식으로 읽으면 이것은 곧 ‘교회 안에서 신앙의 빛이 꺼져 가는 상태’, 다시 말해 ‘저녁’입니다. 거룩한 것이 짓밟히고 진리가 흐려질 때, 그 상태는 시간상 밤이 아니라 영적으로 저녁이며 흑암입니다. 그런데 그 본문에서 ‘저녁에서 아침까지’ 또는 KJV 표현처럼 ‘unto evening-morning’이라는 말이 나오고, 그 뒤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거나 회복되는 말이 이어집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는 ‘, 이것은 단지 해가 지고 뜨는 자연의 시간이 아니라, 신앙이 무너진 상태에서 다시 회복되는 영적 상태의 전환을 말하는구나’ 하고 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8:14의 ‘저녁-아침’은 ‘신앙이 사라진 교회의 상태에서 주님에 의해 다시 빛이 회복되는 상태’의 압축어가 됩니다. AC.22에서 ‘주님이 세상에 오시는 때가 왜 저녁이냐’고 말할 때도 같은 논리가 작동합니다. 주님이 오셔야 할 만큼 교회가 이미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 시기는 ‘저녁’이고, 바로 그 오심으로 인해 새 빛이 시작되기 때문에 그 오심은 ‘아침’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오심은 ‘저녁 같은 시대’ 속에 일어나는 ‘아침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연결 방식입니다.

 

조금 더 쉽게 비유하면, 창1은 ‘저녁-아침’이라는 단어의 뜻을 먼저 알려 주는 ‘사전’이고, 단8은 그 단어가 실제 역사와 교회 상태 속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여 주는 ‘실전 문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창1에서 ‘저녁’은 빛이 사라진 상태, ‘아침’은 빛이 회복된 상태라고 이미 뜻풀이가 주어졌기 때문에, 다니엘에서 성소가 짓밟히고 진리가 무너진 상황에 ‘저녁-아침’이 나오면, 그것은 곧 ‘황폐 후 회복’으로 읽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더 나아가 ‘주님의 오심’이라는 큰 축을 넣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에서 모든 회복의 중심 사건은 결국 주님의 오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이라는 말을 단순히 교회 개혁의 시점 정도로만 보지 않고, 가장 궁극적으로는 ‘주님이 오셔서 다시 빛이 되시는 때’로 읽습니다. 그러므로 단8:14를 창1과 연결하는 것은 억지 숫자 놀이나 단어 반복이 아니라, ‘신앙의 상실  주님의 개입  빛의 회복’이라는 성경 전체의 영적 패턴을 읽어낸 결과입니다.

 

성경에서 저녁은 단지 해가 진 시간이 아니라, 진리의 빛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아침은 단지 해가 뜨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빛을 주시는 상태입니다. 다니엘서는 교회가 무너진 저녁을 말하고, 그 저녁 끝에 다시 오는 아침, 곧 회복을 말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저녁과 아침을 다니엘서의 저녁과 아침에 연결하는 것입니다.’

 

 

 

AC.22,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C.22-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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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3. 리메인스는 겉의 것들이 황폐해질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가?

 

AC.19 해설에는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크게 지배되고 있을 때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드러나 활동하기 어렵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리메인스로 보존해 두셨다면, 왜 그것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실까요? 왜 겉의 것들이 어느 정도 황폐해질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일까요?

 

먼저 AC.19가 직접 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수면을 사람이 살아오면서 배우고 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 감추어 보존하신 리메인스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겉의 것들이 황폐해지기 전에는 빛이나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미리 나오면 즉시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표현은 AC.19의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왜 그것들이 그렇게 보호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덧붙인 해설이라고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메인스는 단순히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그 안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에 관계된 모든 것, 특히 순진함과 체어리티,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애정과 그것에 관계된 진리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장차 그의 거듭남에 사용하시기 위해 보존하십니다. 그래서 리메인스는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곧바로 그것들이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하지 않으실까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겉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아도 그것을 자기 목적에 맞추어 사용할 수 있고, 선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명예나 이익을 앞세울 수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리메인스 자체가 본래부터 불안정하거나 쉽게 썩어 버리는 데 있다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낼 사람의 외적 상태가 아직 주님의 질서에 충분히 순응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겸손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경건하게 보이거나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겸손을 말하지만 실제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 향해 있습니다. 이것은 AC.19가 직접 제시한 사례는 아니지만, 선과 진리가 자기 사랑의 지배 아래에서 어떻게 자기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인정하며 그에 따라 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AC.19황폐해짐은 중요합니다. 여기서 황폐는 단순히 인생이 불행해지거나 고난을 많이 겪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맥에서는 사람이 의지하고 있던 겉의 것들이 약해지고,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여겼던 상태가 흔들리면서, 주님께서 안에 보존해 두신 것을 받아들일 여지가 생기는 과정과 관계됩니다. AC.17-19가 묘사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도 바로 거듭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의 이러한 상태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은 사람이 아직 그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선과 진리를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보존하시고,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이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인간의 현재 모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주님의 자비가 이미 그 사람 안에서 오래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표현도 조금 더 조심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리메인스 자체가 밖으로 나오면 더러워진다는 뜻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조차 자기 목적에 맞추어 이해하고 사용하려는 위험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겉의 것들이 점차 물러나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될 때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이 점은 리메인스 교리를 매우 따뜻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사람이 아직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던 시기에도 주님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훗날 주님께로 돌아설 때 사용하실 수 있도록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그의 안에 보존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자비로 준비하고 보존해 오신 것들을 사용하시면서 시작됩니다.

 

 

 

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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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와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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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2. move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 brood가 나란히 나와요. 이게 좀 어색한데요, 이 둘이 어째서 나란히 나오는 건가요?

 

영어 문장만 보면 ‘move’와 ‘brood’가 서로 다른 뜻을 가진 단어인데, 나란히 붙어 있으니 왜 이렇게 설명하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단순한 영어 문장 문제가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 성경 번역 전통,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이 함께 얽혀 있는 부분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왜 두 단어가 함께 나오는지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먼저 성경 원문을 보면 창1:2의 히브리어 표현은 ‘merachefet(מְרַחֶפֶת)입니다. 이 동사는 기본적으로 ‘떠 있다’, ‘흔들리다’, ‘진동하다’, ‘맴돌다’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 번역에서는 ‘the Spirit of God was moving over the waters’라고 번역합니다. 여기서의 move는 단순한 이동이라기보다 ‘부드럽게 움직이며 감싸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물 위를 스치듯이 감싸며 움직이는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성경 전체를 보면 이 동사가 한 번 더 등장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신32: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같은 동사가 독수리가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보호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말에는 단순한 이동 이상의, 생명을 돌보고 보호하는 이미지가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AC.19에서 이 이미지를 한층 더 구체화하여 ‘암탉이 알을 품듯이(as a hen broods over her eggs)라고 설명합니다.

 

바로 여기서 ‘brood’라는 번역이 나옵니다. 영어 ‘brood’는 ‘암탉이 알 위에 앉아 품어 생명이 자라도록 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그래서 일부 성경 해석 전통에서는 창1:2의 장면을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라 ‘생명을 준비시키는 보호와 따뜻한 덮음’으로 이해했습니다. 마치 암탉이 알을 품듯이 하나님의 영이 물 위에 임해 생명의 탄생을 준비한다는 이미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두 가지 뉘앙스를 ‘함께 살리기 위해 move brood를 나란히 사용한 것’입니다. 즉, 히브리어 단어 하나 안에 두 가지 이미지가 동시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움직이며 감싸는 이미지(move)이고, 다른 하나는 ‘생명을 품어 키우는 이미지(broo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의미를 모두 의식하고 설명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신학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the spirit of God을 주님의 자비’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 자비가 인간에게 작용하는 방식이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봅니다. 주님의 자비는 단순히 멀리서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는 ‘move’라는 말만 쓰지 않고,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라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이 이미지는 창세기 전체의 영적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우주의 창조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거듭남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셨다’는 장면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아직 혼돈 상태에 있는 인간의 마음 위에 주님의 자비가 임하는 장면’입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는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준비하는 사랑’으로 작용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brood’라는 이미지가 매우 적절해집니다.

 

그래서 이 문장을 번역할 때 한국어로는 보통 이렇게 풀어 설명하면 자연스럽습니다. ‘운행하다’는 단순히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알을 품는 새처럼 생명이 태어나도록 따뜻하게 감싸며 움직이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혼돈 상태 위에서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호하고 준비하는 사랑으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move brood가 함께 나오는 이유는 영어 표현의 중복 때문이 아니라 ‘히브리어 표현이 지닌 움직임과 새가 생명을 보호하는 이미지를 함께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는 ‘움직이며 감싸는 작용’, 다른 하나는 ‘생명을 품어 자라게 하는 보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이미지를 함께 사용하여 ‘주님의 자비가 인간의 거듭남을 준비하는 방식’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AC.19, 심화 3, 리메인스는 왜 겉의 것들이 ‘황폐해질’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가?

AC.19.심화3. 리메인스는 왜 겉의 것들이 ‘황폐해질’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가? AC.19 해설에는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크게 지배되고 있을 때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드러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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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 심화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도 ‘주님의 자비(mercy)’라는 표현이 나오네요. 대한민국 기독교인들은 개신교인들을 포함, 보통 ‘자비’보다 ‘은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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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본문 중,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의 차이를, 해설에서는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음, 곧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 부여하는 것을,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걸 가리킨다고 했는데, 이 부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네, 이 부분은 AC.16에서 아주 짧게 지나가지만, 사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목사님께서 적어 주신 해설 문장, 곧 ‘창조는 생명의 근원을 주시는 것,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설명은 방향이 아주 정확합니다. 다만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여전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니, 조금 더 천천히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큰 원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들도 그냥 수사적으로 겹쳐 쓴다고 보지 않습니다. 특히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처럼 나란히 오는 표현은, 다 비슷해 보여도 각각 다른 국면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즉 주님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한 단어로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세 동사를 통해 그 과정의 깊이와 순서를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6의 핵심은, 인간의 새 창조가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시작과 질서와 구현을 가진 전인적 과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창조하다(create)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없던 생명의 원리를 주님께서 넣어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지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 열릴 수 있는 영적 생명입니다. 사람이 전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중심으로만 살다가, 어느 순간 참된 선과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이 이대로는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하나님 쪽으로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 이 모든 출발이 ‘창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결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씨를 심으시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전혀 생명이 없던 땅에 처음으로 씨가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완전히 어두운 방에 처음으로 빛이 켜지는 것과 같습니다. 방의 구조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그 빛으로 무엇을 할지도 아직 모르지만, 일단 빛이 들어온 것 자체가 결정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다음 ‘형성하다, 짓다(form)는 그렇게 시작된 생명에 모양과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씨가 들어왔다고 바로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듯, 빛이 켜졌다고 곧바로 삶이 정돈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안에 들어온 진리와 선의 씨앗은 자라기 위해 배열과 분별과 구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형성, 곧 지음은 인간 안에서 무질서하게 섞여 있던 것들을 나누고, 위아래를 세우고, 중심과 주변을 정리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처음에는 종교적 열심과 자기 의, 참된 순종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 정말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은 그 사람 안에 분별을 세워 주십니다.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 속하는지, 무엇이 기억 지식이고, 무엇이 살아 있는 진리인지, 무엇이 자기 본성의 욕구이고, 무엇이 주님께서 주시는 선한 감동인지 조금씩 구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형성이고, 지음입니다. 그러므로 형성은 이미 주어진 생명을 ‘아름답고 바른 형식’ 안에 놓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설계도 없이 쌓여 있던 자재들이 하나의 집 구조를 이루어 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또는 태아가 단순한 생명 덩어리가 아니라 점차 눈, 귀, 손, 발을 갖춘 인격적 형체로 자라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들다(make)는 그렇게 창조되고 형성된 것이 실제 삶에서 구현되고 굳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지 계획이나 가능성의 단계가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 그것이 행동과 습관과 성품이 되어 가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진리가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선을 좋아한다고 해서 당장 선한 삶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진리와 선이 말과 선택과 관계와 습관 속에서 실제로 ‘만들어져’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와 형성의 단계에서는 이미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를 상하게 한 사람을 대할 때, 분노 대신 절제하고, 보복 대신 인내하고, 마음속 판단을 내려놓는 쪽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그 진리가 그의 삶 안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make는 삶의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는 차원입니다. 집의 비유로 말하면, 설계와 구조가 끝난 후 실제로 그 집에 사람이 살고, 방이 쓰이고, 문이 열리고 닫히고, 불이 켜지고 꺼지는 단계입니다. 즉 살아 있는 사용의 단계입니다.

 

이 세 단어를 한 번에 붙들면, 스베덴보리가 왜 굳이 셋을 구별했는지가 더 또렷해집니다. ‘창조’는 시작의 은혜이고, ‘형성’은 질서의 은혜이며, ‘만듦’은 구현의 은혜입니다. 창조가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형성이 없으면 시작된 것이 무질서하게 흩어지며, 만듦이 없으면 모든 것이 관념과 가능성에만 머물고 실제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하셨다’는 한 문장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심으시고, 그 생명을 정리하시고, 마침내 그것이 삶이 되게 하시는 전 과정을 포함합니다.

 

초심자에게는 이렇게 풀어도 이해가 쉽습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심으시고’(창조), 그다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정리하시며’(형성), 마지막에는 그것이 실제 성품과 행동이 되게 ‘빚어 가십니다’(만듦). 또는 신앙의 말로 하면, 주님은 먼저 우리를 깨우시고, 그다음 가르치시고, 마지막에는 살게 하십니다. 이 셋이 합쳐져야 비로소 사람이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AC.16의 이 구별은 단지 단어 공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안에 겨우 씨앗만 들어온 상태인데, 벌써 열매 맺지 못한다고 낙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주님은 먼저 창조하시고, 그다음 형성하시고, 그다음 만들어 가신다고. 그러므로 아직 질서가 덜 잡혀 있거나, 실제 삶이 더디게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단계가 다 주님의 일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사람은 조급함 대신 신뢰를 배우게 됩니다.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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