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사람이‘신앙으로,그리고그신앙에서사랑으로참된것을말하고선한것을행한다’고 하고,이어서‘신앙과사랑양쪽에서동시에함께행동한다’고 합니다.또 영적 인간의 생명이‘신앙의지식들과체어리티의행위들에속한것들로기뻐하고유지된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이런 상태는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AC.12는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따라서 아래의 예들은‘스베덴보리가AC.12에서바로이런경우를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AC.12가 말하는 상태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해해 보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그신앙에서사랑으로참된것을말하고선한것을행한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합시다.그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실제로 자기 곁의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이 경우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 실제로 도와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그가 단지 순간적인 기분이나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면AC.12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사랑해야한다’는 진리가 말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선한 행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정직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어떤 사람이‘정직하게살아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면 훨씬 유리한 상황이 찾아왔습니다.그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거짓을 피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면,단지 정직이라는 원칙을 알고 있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자기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을 실제 삶에서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행동을했으니이사람은AC.12의여섯번째상태에있다’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사람의 내적 상태는 외적인 행동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여기에서 예를 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의 거듭남 단계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사랑으로선을행한다’는 표현이 실제 삶과 무관한 추상적인 말이 아님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신앙과사랑양쪽에서동시에함께행동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이것 역시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기능처럼 기계적으로 나누기보다,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고 행하는 것이 함께 가는 상태로 이해하면 조금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사랑한다고 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부모는 무엇이 아이에게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고,필요하면 가르치고 바로잡으면서도 아이의 선을 진심으로 원합니다.여기에는 무엇이 옳고 유익한가를 살피는 것과 실제로 아이의 선을 원하는 것이 함께 필요합니다.이것 역시 진리와 선,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의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누군가 잘못했을 때 무조건 감싸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반대로 옳고 그름만 따지면서 상대방의 형편을 전혀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진정한 유익을 바란다면,우리는‘진리와선이함께한다’는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2의 또 하나 어려운 표현은 영적 인간의 생명이‘신앙의지식들과체어리티의행위들에속한것들로기뻐하고유지된다’는 것입니다.이것 역시 단순히‘착한일을하면기분이좋아진다’는 정도로 축소해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AC.12는 영적 인간의 생명이 무엇을 먹고 사는가를 설명하면서,자연적 생명은 음식과 물로 유지되고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는 것을 점점 소중히 여기고,알고 있는 선을 실제로 행하는 삶에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전에는 자기 이익과 인정만이 중요했는데,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 소중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이것은AC.12가 직접 제시한 구체적인 사례라기보다‘영적생명이무엇으로기뻐하고유지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적용입니다.
여기서‘기쁨’도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선을 행할 때마다 반드시 감정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때로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으며,용서하거나 참고 섬기는 일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기쁨을 단순한 감정적 즐거움과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점차 진리와 선에 속한 것들을 향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AC.12에서 특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상태가 앞선 상태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사람은 처음부터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앞선 상태들을 거치면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어 가며,이제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신앙으로,그리고그신앙에서사랑으로’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위의 생활 사례들도‘이행동하나를하면여섯번째상태’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와 실제로 사랑하고 행하는 선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처음에는‘옳으니까해야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참된 것을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는 것이 점점 함께 움직이게 됩니다.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말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 삶 안에서 함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AC.12의‘신앙과사랑양쪽에서동시에함께행동한다’는 표현도 조금 덜 추상적으로 들립니다.신앙은 머릿속에만 있고 사랑은 막연한 감정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사람이 참된 것을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서 선한 것을 원하며 실제로 행하는 삶 속에서 둘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모든 예보다 중요한 것은AC.12자체가 말하는 방향입니다.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을 가장 간단히 풀어 말한다면, ‘내가참되다고받아들인것이내가사랑하고행하는선과점점하나의삶을이루어가는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AC.11을 처음 읽으면 ‘자신을확증하다’(confirms himself)라는 표현에서 조금 멈추게 됩니다. 우리말의 ‘확증하다’는 보통 어떤 사실이 틀림없음을 증명하거나 확인한다는 뜻으로 들리고, ‘자신을확증한다’고 하면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스스로 옳다고 굳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먼저 AC.11의 문맥을 그대로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신앙으로말하며,그럼으로써자신이진리와선안에있음을확증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확증’의 중심은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자기 생각이 옳다는 증거를 모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신앙으로 말하게 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점점 확고해지는 상태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은 AC.10과 비교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습니다. 네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AC.11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이제 ‘신앙으로말한다’고 합니다. 즉 앞에서 받은 신앙이 단지 순간적으로 비추는 빛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말로 나타날 정도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확증한다’는 것을 ‘삶의경험을통해그진리가참이라는사실을확인한다’고 설명해도 될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것을 AC.11이 직접 내리는 정의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AC.11은 사람이 여러 경험을 해 보고 진리의 효용을 검증한 뒤 확신하게 된다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이 직접 말하는 것은 그가 이제 신앙으로 말하며 ‘진리와선안에서자신을확증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처음에는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진리를 ‘그렇다고하니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진리가 점점 자기 생각과 말의 바탕이 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길이 여러 번 다니다 보면 점차 익숙한 길이 되는 것처럼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확증’의 정확한 사전적 정의라기보다 AC.11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자신을확증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를 진리와 선 안에 세운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AC.6부터 계속되는 전체 문맥은 사람의 거듭남을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로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을확증한다’는 표현을 인간이 독립적으로 자기 안에 진리와 선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굳힌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사용하는 ‘확증’이라는 말까지 생각하면 또 하나의 구별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확증할 수도 있지만 거짓을 확증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확증’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좋은 영적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참이라고 받아들이고 무엇 안에서 자신을 굳히느냐가 중요합니다. AC.11에서는 그 대상이 분명히 ‘진리와선’이므로 좋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확증’이라는 단어만 떼어 읽으면 ‘자기가믿고싶은것을더욱굳게믿는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AC.11에서는 그런 완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아직 거듭남의 마지막 상태도 아닙니다. 바로 다음 AC.12에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여섯 번째 상태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11의 ‘확증’을 거듭남의 완성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여섯 상태 가운데 다섯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중요한 변화입니다.
따라서 AC.11의 ‘자신을확증하다’는 표현은 우선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자기생각이옳다고고집한다는뜻이아니라,거듭남이진행되면서사람이신앙으로말하고진리와선안에서점점확고해지는상태를가리킨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적용하여 설명할 때에는 ‘배운진리가점차자기생각과말의바탕으로자리잡아간다’고 풀어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AC.11에서 왜 ‘신앙으로말한다’는 것과 ‘진리와선안에서자신을확증한다’는 것이 함께 나오는지도 조금 더 쉽게 보입니다.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서는 진리와 선이 더 이상 멀리서 들은 가르침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신앙으로 말할 수 있을 만큼 그 안에서 점차 확고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7
이말씀들안에거듭남에관한아르카나가들어있다는사실은,앞절에서땅이‘생물,가축,땅의짐승’(thelivingsoul, thebeast, andthewildanimaloftheearth)을낼것이라고말한반면,다음절에서는순서가바뀌어하나님께서‘땅의짐승,가축’(thewildanimaloftheearth, thebeast)을만드셨다고말하는데서도분명히드러납니다.이는사람이처음에는,그리고이후천적인간이되기까지는마치자기에게서인듯산출하기때문입니다.그래서거듭남은겉사람에서시작되어속사람으로나아갑니다.이런이유로여기다른순서가나오는것이며,겉에속한것들이먼저언급되는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livingsoul,thebeast,andthewildanimalofthe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wildanimaloftheearth,” and likewise “the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해설
AC.47은 아주 짧지만 창1:24-25의 문장을 얼마나 세밀하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단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순서의변화’입니다. 24절에서는 땅이 ‘생물,가축,땅의짐승’을 내라고 하지만, 2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땅의짐승,가축’을 만드셨다고 하여 앞에서와 순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작은 차이 안에도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정도의어순차이에정말의미가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AC.47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단순히 자연계 창조의 순서를 기록한 문장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을 담은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대상들이 왜 다른 순서로 언급되는가도 그에게는 설명되어야 할 말씀의 일부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설명의 중심은 ‘사람이처음에는,그리고이후천적인간이되기까지는마치자기에게서인듯산출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치자기에게서인듯’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실제로 영적 생명과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9-43에서 이미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47을 그 흐름과 분리해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마치자기에게서인듯’이라고 말할까요? AC.47은 그 이유나 작동 방식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렇게 산출하며, 바로 그 때문에 거듭남이 ‘겉사람에서시작하여속사람으로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이 두 진술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거듭남이겉사람에서시작한다’는 말을 ‘사람이외적인행동을반복하면그것이차츰속사람을변화시킨다’는 하나의 심리적 훈련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실제 삶의 순종과 행함은 거듭남에서 중요합니다. 바로 앞의 AC.44도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47자체는 ‘행동→ 습관→ 애정→ 속사람’이라는 단계나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또 ‘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라는 말을 주님께서 겉 사람에서 일을 시작하여 점차 속 사람으로 들어가신다는 공간적 이동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나는 사람이 경험하고 산출하는 질서를 설명하면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및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가는 AC가 진행되면서 훨씬 더 세밀하게 설명되므로, 이 한 문장에 그 모든 메커니즘을 미리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24절과 25절의 순서 변화가 왜 중요할까요? 24절에서는 ‘땅’이 무엇인가를 내는 장면이 먼저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마치자기에게서인듯’ 산출하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반면 25절에서는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땅의짐승을...만드시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AC.47이 특별히 설명하는 것은 단순히 ‘땅이하다가하나님이하신다’는 주어 변화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언급되는 것들의 순서도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순서에서 ‘겉에속한것들이먼저언급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뒤바뀐 순서는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질서를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각각의 ‘땅의짐승’과 ‘가축’을 다시 세분하여 ‘이것은외적행동,이것은습관,이것은길들여진애정’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세부 대응을 우리가 만들어 넣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외적인것들이먼저언급된다’는 설명을 그대로 중심에 두는 편이 좋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마치자기에게서인듯’과 ‘실제로자기에게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는 ‘내가생각하고,내가선택하고,내가행한다’고 경험합니다. 그러나 앞선 AC의 흐름에 따르면 그 안에 참으로 살아 있는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47은 이 둘을 서로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마치자기에게서인듯’ 산출한다는 표현으로 그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매우 중요해질 주제입니다. 다만 AC.47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 섭리, 공로 없음의 관계를 모두 완성된 교리로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것은 그보다 작지만 분명한 단서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에게는 ‘마치자기에게서인듯’ 행하는 상태가 있으며, 그 과정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현재 제목처럼 이것을 곧바로 ‘자기에서주님으로옮겨가는방향’이라고 요약하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모든 생명과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분명해졌지만, AC.47이 설명하는 순서 변화 자체의 직접적인 의미는 ‘자기에서주님으로주체가이동한다’기보다 ‘거듭남이겉사람에서시작하여속사람으로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 차이를 지켜 주어야 이 짧은 글이 말하는 아르카나가 오히려 더 선명해집니다.
AC.47은 동시에 말씀을 읽는 스베덴보리의 방식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 눈에는 같은 것을 조금 다른 순서로 쓴 문체상의 변화처럼 보이는 것도, 그는 거듭남의 질서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물론 여기서 곧바로 ‘성경의모든어순변화에는반드시별개의속뜻이있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7이 직접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창1:24-25의 순서 변화에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글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의 근원을 온전히 지각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자기에게서인듯’ 산출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가며, 창1:24와 25의 미묘한 순서 변화가 바로 그 질서를 표현합니다. AC.47은 단어 하나뿐 아니라 배열의 변화까지도 거듭남의 관점에서 읽어 내면서, 창세기 창조 이야기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얼마나 세밀하게 담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6
‘짐승’(beasts)이사람의애정(affections)을뜻한다는사실,곧악한사람에게서는악한애정을,선한사람에게서는선한애정을뜻한다는사실은말씀의많은구절을보면분명한데요,에스겔입니다. That “beasts” signify man’s affections—evil affections with the evil, and good affections with the good—is evident from numerous passages in the Word, as in Ezekiel:
이렇게여기서전반적으로‘용들’(whales),‘과수’(fruittree),‘짐승’(wildanimal),‘가축’(beast),‘기는것’(creepingthing),‘나는새’(fowl)가함께언급되는데,이것들이사람안의살아있는원리들을뜻하지않는다면,여호와를찬양하라는부름을받을수없었을것입니다. Here mention is made of the same things—as “whales,” the “fruittree,” “wildanimal,” the “beast,” “creepingthing,” and “fowl,” which, unless they had signified living principles in man, could never have been called upon to glorify Jehovah.
[3] 선지자들은‘가축’(beasts)과‘땅의짐승’(wildanimalsoftheearth),또‘가축’(beasts)과‘들의짐승’(wildanimalsofthefield)을조심스럽게구별합니다.그럼에도사람안의선한것들은‘가축’(beasts)이라합니다.마찬가지로,하늘에서주님과가장가까운이들도‘생물’(animals)이라하는데,에스겔서와요한계시록에서모두그렇게말합니다. The prophets carefully distinguish between “beasts” and “wildanimalsoftheearth,” and “beasts” and “wildanimalsofthefield.”Nevertheless goods in man are called “beasts,” just as those who are nearest the Lord in heaven are called “animals,” both in Ezekiel and in John:
또한복음이전파되는이들도‘피조물’(creatures)이라하는데,이는그들이새롭게창조되어야하기때문입니다. Those also who have the gospel preached to them are called “creatures,” because they are to be created anew:
주3. 여기이단어는‘비스트’(beasts, 짐승, 야수)가아닌, 흠정역(theauthorizedversion)에서처럼‘애니멀’(animals, 짐승, 동물)로정확하게번역되었습니다. 헬라어의‘준’(ζοόν, z¯oon)과, 라틴과영어의‘애니멀’은서로정확히대응하며, ‘생물’(alivingcreature)이라는의미에맞기때문입니다. 원전(theoriginal)해당구절들에서사용된단어는준이며, 만일‘비스트’ 사용을의도했다면썼을법한테르(θήρ, th¯er)나테리온(θηρίον, th¯erion)이아닙니다. This word is here correctly translated “animals” and not “beasts,” as in the authorized version, for z¯oon in Greek, and animal in Latin and English, precisely correspond to each other, and properly signify “alivingcreature.” Z¯oon is the word used in these passages in the original, and not th¯er or th¯erion, as would be the case if “beast” had been intended.
해설
AC.46은 바로 앞의 AC.45에서 제시한 중요한 원리, 곧 말씀에서 ‘짐승’이 인간의 애정을 뜻한다는 것을 수많은 성경 구절을 통해 확인하는 글입니다. 첫 문장부터 그 목적이 분명합니다. 짐승은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하며, 이것은 말씀의 많은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번 글에 성경 인용이 유난히 많은 이유도 새로운 주제를 계속 추가하려는 것이 아니라, ‘짐승=애정’이라는 해석이 창1:24-25에만 임의로 적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겔36:9,11과 렘31:27-28은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인용됩니다. 겔36에서는 황폐했던 땅이 다시 갈리고 심어지며 그 위에 ‘사람과짐승’이 많아지고 번성합니다. 렘31에서도 이스라엘과 유다의 집에 ‘사람의씨와짐승의씨’를 뿌리고, 이어서 세우고 심으시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가져오는 핵심 이유는 문자 그대로 사람과 동물의 개체 수가 늘어나는 것만으로는 거듭남에 관한 이 말씀의 속뜻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으며, 여기의 짐승이 사람 안에서 살아나는 내적인 것, 특히 애정과 관련된 것을 뜻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만 AC.46은 여기서 ‘사람의씨는정확히무엇이고짐승의씨는정확히무엇이다’라는 세부 대응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욜2:22의 ‘들짐승들아두려워하지말지어다’도 같은 방향에서 사용됩니다. 들의 풀이 돋고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는 회복의 장면에서 들짐승 역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듣습니다. 반면 시73:22에서는 시편 기자가 자신의 우매함을 고백하며 ‘주앞에짐승’과 같았다고 합니다. 이 두 구절만 보아도 ‘짐승’이라는 말 자체에 언제나 선한 뜻이나 언제나 악한 뜻 하나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AC.46의 첫 문장이 이미 말했듯이 악한 사람에게서는 악한 애정을, 선한 사람에게서는 선한 애정을 뜻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호2:18, 욥5:22-23, 겔34:25에서는 ‘들짐승’이 언약과 평화라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호세아에서는 들짐승과 새와 땅의 곤충과 언약을 맺고, 욥기에서는 들짐승이 사람과 화목하게 되며, 에스겔에서는 화평의 언약과 함께 ‘악한짐승’이 땅에서 그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함께 제시하는 것은 말씀에서 짐승과 들짐승이 단순한 동물 이야기를 넘어 사람의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겔34:25가 굳이 ‘악한짐승’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짐승’이라는 말 자체가 곧 악이라는 뜻이라면 ‘악한’이라는 구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43:20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들짐승이 여호와를 ‘존경한다’고 말합니다. 광야에 물이 생기고 사막에 강이 생겨 하나님의 백성이 마시게 되는 장면에서 승냥이와 타조 같은 들짐승도 하나님을 존경합니다. 문자적 자연물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사람 안의 살아 있는 원리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의 속뜻에서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될 수 있다고 봅니다.
겔31:6에서는 앗수르가 큰 나무로 묘사되고 그 가지에는 새들이 깃들이며 그 아래에서는 들짐승들이 새끼를 낳습니다. AC.46은 여기서 앗수르가 ‘영적인간’을 뜻하고 에덴동산에 비유된다고 짧게 설명합니다. 이 구절 역시 새와 짐승이 단순히 배경을 꾸미는 자연물이 아니라 영적 인간에게 속한 것들을 표현하는 말씀의 언어로 사용된다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제시됩니다. 다만 이번 글은 앗수르나 나무, 가지, 새 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해설하려는 곳은 아닙니다. 인용의 목적은 계속 ‘짐승이인간안의살아있는것들을표현한다’는 중심 주장에 있습니다.
시148은 이 논증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천사들뿐 아니라 바다의 큰 생물들, 과수, 짐승, 가축, 기는 것과 나는 새까지 모두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습니다. 개역개정의 ‘용들’에 해당하는 부분을 스베덴보리가 인용한 영어에서는 ‘whales’라고 표현합니다. AC.46은 바로 이 점을 붙들어,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의 ‘살아있는원리들’을 뜻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부름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이 이번 글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해석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렇다면짐승은선한애정입니까,악한애정입니까?’ AC.46의 대답은 ‘문맥과그짐승의성질에따라다르다’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단순한 암기표처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이유입니다. ‘짐승=애정’이라는 기본 관계가 있다고 해서 모든 짐승이 동일한 애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하고 온순한 동물과 해로운 동물이 다르고, 같은 ‘짐승’이라는 표현도 어떤 사람과 어떤 상태를 다루느냐에 따라 선한 애정 또는 악한 애정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앞으로 말씀의 상응을 읽는 데 계속 필요한 원리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AC.46후반부에서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구별이 나옵니다. 선지자들이 ‘가축’과 ‘땅의짐승’, 또는 ‘가축’과 ‘들의짐승’을 조심스럽게 구별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실제로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그 각각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축은질서잡힌높은애정이고들짐승은본능적인낮은애정’이라는 식으로 우리가 빈칸을 채우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6이 확실하게 말하는 것은 사람 안의 ‘선한것들’도 짐승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매우 놀라운 예를 하나 더 듭니다. 주님께 가장 가까운 하늘의 존재들도 에스겔과 요한계시록에서 ‘생물’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계7:11과 계19:4의 ‘네생물’이 그 예입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영어 단어입니다. 각주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곳의 말이 ‘beasts’가 아니라 ‘animals’로 번역되는 것이 정확하다고 설명합니다. 헬라어 ζῷον(zōon)은‘살아있는생물’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대목의 요점은 천사들을 야수에 비유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존재’라는표현이 얼마나 높은 영적 문맥에서도 사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본문에 덧붙여 놓은 AE.462의 설명, 곧 ‘모든천사’를 가장 낮은 천국, ‘장로들’을 중간 천국, ‘네생물’을 가장 높은 천국과 연결하는 설명은 AC.46자체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훗날 스베덴보리의 ‘계시록해설’에서 가져온 보충 자료입니다. 참고할 수는 있지만, AC.46의 논증 자체와 구별하여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번 글에서 직접 필요한 것은 ‘주님께가까운하늘의존재들조차생물이라고불린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막16:15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너희는온천하에다니며만민에게복음을전파하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표현은 영어의 ‘everycreature’, 곧 ‘모든피조물’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해 받는 이들이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새롭게창조되어야하기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창세기 1장의 창조와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AC전체의 큰 주제가 다시 만납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기존의 사람에게 종교 지식 몇 가지가 더해지는 일이 아니라 ‘새롭게창조되는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6에 왜 이렇게 많은 성경 구절이 한꺼번에 등장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의 구절을 완전히 해설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요엘, 시편, 예레미야, 호세아, 욥기, 이사야, 요한계시록, 마가복음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말씀에서 ‘짐승’, ‘들짐승’, ‘생물’, ‘피조물’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인간의 내적 생명과 연결되는지를 한꺼번에 보여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각각의 인용 구절을 따로 떼어 열세 편의 해설로 읽기보다, 이 인용들이 함께 무엇을 증언하는지를 보는 것이 AC.46을 이해하는 데 더 중요합니다.
AC.45가 ‘짐승은인간의애정을뜻한다’는 원리를 소개했다면, AC.46은 말씀 전체를 펼쳐 그 원리가 고립된 해석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중요한 균형도 가르쳐 줍니다. 짐승이라고 해서 모두 악한 것도 아니고, 모두 선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애정에도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듯이 말씀의 짐승도 그 성질과 문맥에 따라 서로 다른 애정을 표현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단어를보았으니뜻은이것이다’라고 기계적으로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문맥 속에서 어떤 생명과 어떤 애정이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5
태고시대를살았던사람들은이해와의지에속한것들을이렇게상징으로표현했습니다.그래서선지서들,그리고구약말씀전체에서보면늘서로다른동물들을가지고같은걸표현하는데요,짐승에는두종류가있습니다.해롭기때문에악하다하는짐승들이있고,해를끼치지않기때문에선하다하는짐승들이있지요.이때사람안의악들은곰이나늑대,개같은해로운짐승들로,그리고반대로선하고온순한것들은암송아지나양,어린양같은짐승들을가지고표현하는것이지요.여기이본문에서말하는‘짐승’(beasts)은선하고온순한짐승들이며,따라서애정들을뜻합니다.이는이본문이거듭나고있는사람들에대해다루고있기때문입니다.사람안에서몸과더가까이연결된더낮은것들은‘땅의짐승’(wildanimalsofthatearth)이라고하는데,이것들은욕정(cupidities)과쾌락(pleasures)을뜻합니다. Those who lived in the most ancient times thus signified the things relating to the understanding and to the will;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and constantly in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the like things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kinds of animals.Beasts are of two kinds; the evil, so called because they are hurtful; and the good, which are harmless.Evils in man are signified by evil beasts, as by bears, wolves, dogs; and the things which are good and gentle, by beasts of a like nature, as by heifers, sheep, and lambs.The “beasts” here referred to are good and gentle ones, and thus signify affections, because it here treats of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The lower things in man, which have more connection with the body, are called “wildanimalsofthatearth,” and are cupidities and pleasures.
해설
AC.45는 창1:24-25에 등장하는 여러 짐승이 왜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뜻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의 AC.44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를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고, 이제 여섯째 날 땅에서 나오는 생물들을 의지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AC.45는 그 가운데 특히 ‘짐승’이라는 표현에 초점을 맞춥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태고시대’ 사람들의 표현 방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고, 이러한 표현 방식이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단순한 문학적 비유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5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동물의 성질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태고시대’라는 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말을 들으면 흔히 석기 시대나 원시 인류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관심을 두는 것은 고고학적인 시대 구분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시대사람들이이렇게표현했다’는 말을 곧바로 ‘동굴에서살던원시인들이동물그림으로생각을표현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AC초반뿐 아니라 앞으로 태고교회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AC.45는 짐승을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해를 끼치기 때문에 악하다고 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고 하는 짐승입니다. 그리고 사람 안의 악들은 곰, 늑대, 개와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 양, 어린양과 같은 짐승들로 표현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동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문맥에 놓이는가에 따라 표현되는 내적 상태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주의점이기도 합니다. ‘짐승=악’, 또는 반대로 ‘짐승=애정’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대응표만 만들어 모든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45자체가 짐승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같은 동물 이미지라도 그것의 성질과 문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앞의 AC.42에서 큰 바다짐승이 창조의 좋은 질서 안에서도 등장하고 선지서의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사용되었던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러면 창1:24-25에 나오는 짐승들은 어느 쪽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다루는 짐승들은 ‘선하고온순한것들’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유도 직접 밝혀 줍니다. 지금 본문이 ‘거듭나고있는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맥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의 거듭남이 단지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의 의지와 애정까지 새로워지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애정’이라는 말을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과 같다고 생각하면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애정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지는가와 관계됩니다. 그래서 의지에 속한 것을 설명할 때 동물의 이미지가 사용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AC.45자체는 여기서 ‘동물이움직이므로애정도인간을움직인다’는 식의 상세한 이유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선 이 글이 직접 밝히는 것, 곧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 거듭나는 사람 안의 애정들을 뜻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 이르면 조금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안에서몸과더가까이연결된더낮은것들’을 ‘그땅의들짐승’이라고 부르며, 이것들이 ‘욕정과쾌락’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이 본문의 짐승들이 선하고 온순하며 애정을 뜻한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욕정과 쾌락이 등장하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의지에 속한 것들 안에서도 차이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의지적인 것이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습니다. AC.45는 바로 그것들을 ‘욕정과쾌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만으로 ‘욕정은본래중립적이므로없앨필요가없고방향만바꾸면된다’거나, 반대로 ‘몸과관련된모든쾌락은악하므로제거해야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둘 다 지나갑니다. AC.45는 여기서 그러한 거듭남의 구체적인 처리 방법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욕정’과 ‘쾌락’을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구’나 ‘즐거움’과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고 쉬고 아름다운 것을 즐기는 모든 자연적 욕구와 즐거움을 이 한 문장 때문에 악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고,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욕정’을 단순히 선하게 전환할 수 있는 중립적인 에너지라고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앞으로 AC가 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악한 욕망, 그리고 거듭남의 질서를 더 자세히 다룰 때 그 차이를 문맥에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5의 중심은 오히려 더 단순합니다. 말씀의 동물들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표현할 수 있으며, 해로운 동물들은 악한 것들을, 선하고 온순한 동물들은 선한 것들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금 창조의 여섯째 날은 거듭나는 사람을 다루기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은 그의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동시에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으며, AC.45는 그것들을 욕정과 쾌락이라고 구별하여 언급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AC.44와 AC.45의 연결도 선명해집니다. AC.44에서는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5에서는 그 의지 쪽에 속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애정’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거듭남은 무엇이 참인지 아는 이해만 새로워지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사랑하는가 하는 의지와 애정의 영역까지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 위의 생물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창1:24, 25)
AC.44
사람은땅과같아서,신앙의지식(knowledges)이먼저그안에뿌려지지않으면어떤선도산출할수없습니다.그래야무엇을믿어야하고,무엇을행해야하는지를알수있기때문입니다.말씀을듣는것은이해의역할이고,그말씀을행하는것은의지의역할입니다.말씀을듣고도행하지않는것은,믿는다고말하면서도그믿음에따라살지않는것과같습니다.이런경우에는듣는것과행하는것을분리하게되고,그결과마음이나뉘어,주님께서다음말씀에서‘어리석은사람’(foolish)이라하신사람들에속하게됩니다. Man, like the earth, can produce nothing of good unless the knowledges of faith are first sown in him, whereby he may know what is to be believed and done.It is the office of the understanding to hear the Word, and of the will to do it.To hear the Word and not to do it, is like saying that we believe when we do not live according to our belief; in which case we separate hearing and doing, and thus have a divided mind, and become of those whom the Lord calls “foolish” in the following passage:
이해에속한것들은앞서보인것처럼‘물들이내는기는것들’(thecreepingthingswhichthewatersbringforth)과‘땅위의새들’(thefowlupontheearth),그리고‘하늘의궁창에있는새들’(uponthefacesoftheexpanse)로,그리고의지에속한것들은여기‘땅이내는생물’(thelivingsoulwhichtheearthproduces)과‘가축’(thebeast)과‘기는것’(thecreepingthing),그리고‘땅의짐승’(thewildanimalofthatearth)으로각각가리키고있습니다.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re signified—as before shown—by the “creepingthingswhichthewatersbringforth,” and also by the “fowlupontheearth,” and “uponthefacesoftheexpanse”; but those which are of the will are signified here by the “livingsoulwhichtheearthproduces,” and by the “beast” and “creepingthing,” and also by the “wildanimalofthatearth.”
해설
AC.44부터 창조의 여섯째 날이 시작됩니다. 앞의 다섯째 날에는 물고기와 새가 등장했고,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했습니다. 이제 땅에서 생물과 가축과 짐승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초점이 의지에 속한 것들로 옮겨갑니다. 따라서 AC.44는 단순히 ‘아는것에서행하는것으로가야한다’는 일반적인 교훈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해에 속한 것과 의지에 속한 것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사람을 ‘땅’에 비유합니다. 땅에 씨가 먼저 뿌려져야 무엇인가를 낼 수 있듯이, 사람 안에도 먼저 ‘신앙의지식’이 심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식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AC.44는 ‘아는것보다행하는것이중요하니지식은별로필요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을 행하기 위해서도 먼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아야 하므로 신앙의 지식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들어오는 것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해와 의지의 역할을 아주 간단하게 구별합니다. ‘말씀을듣는것은이해의역할이고,그것을행하는것은의지의역할’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쪽을 가리킵니다. 반면 ‘행한다’는 것은 그것이 실제로 의지되고 삶으로 나타나는 쪽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AC.44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와 의지가 ‘구별되지만분리되어서는안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이해하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교리를 설명하고, 자신이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 삶은 전혀 다르게 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상태를 ‘듣는것과행하는것을분리하는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나뉜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때문에 마7:24,26이 인용됩니다. 여기서 AC.44의 목적은 ‘반석’과 ‘모래’ 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풀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두 종류의 사람을 분명하게 대조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행하고’, 다른 사람은 똑같이 말씀을 ‘듣지만행하지않습니다.’ AC.44가 주목하는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함께 있느냐, 서로 분리되어 있느냐입니다.
따라서 ‘믿는다고말하면서믿는대로살지않는것’이 왜 그렇게 심각한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단순히 실천력이 부족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해에서는 어떤 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면서 의지에서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람 안의 두 중요한 기능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이것이 AC.44가 말하는 ‘나뉜마음’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신 것을 스베덴보리가 바로 이 문맥에서 가져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창1:24에서 왜 갑자기 ‘땅은생물을내라’고 하는지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는 앞에서 설명했던 ‘물들이내는기는것들’과 새들을 이해에 속한 것들이라고 하고, 이제 땅이 내는 ‘생물’, ‘가축’, ‘기는것’, ‘땅의짐승’을 의지에 속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즉 창조의 순서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해에 속한 것들이 먼저 준비되고, 이제 의지에 속한 것들이 살아나기 시작하는 과정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해에속한것’과 ‘의지에속한것’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고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알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이해 쪽의 일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미워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보복하려는 마음을 억제하고 그에게 악을 행하지 않으며 가능한 선을 행하려고 하는 것은 의지와 삶의 문제입니다. 앞의 이해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 것이 의지와 삶에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예는 AC.44의 직접적인 예가 아니라, ‘듣는것과행하는것’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한 설명입니다.
그렇다고 거듭남을 단순히 ‘배운것을열심히실천하면된다’는 도덕 훈련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까지의 AC.39-43이 계속 강조했듯이 참된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사람은 말씀을 통해 무엇을 믿고 행해야 하는지 배우고 실제로 그것을 행하지만, 그 안의 선과 생명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 것이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 지금 설명되고 있는 과정입니다.
AC를 처음 읽는 독자라면 여기쯤에서 ‘왜이책은계속선과진리,이해와의지,사랑과신앙같은이야기를반복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닙니다. 거듭남이란 결국 사람이 무엇을 참이라고 이해하는가와 무엇을 선이라고 사랑하고 원하는가가 주님 안에서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창세기의 서로 다른 날과 서로 다른 피조물을 설명하면서도 이 관계가 계속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AC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질문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AC.44의 중심을 ‘지식보다행함이중요하다’라는 한 문장으로만 줄이면 부족합니다. 지식은 필요합니다. 이해도 필요합니다. 먼저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듣고 이해하는 데서 멈추면 이해와 의지가 분리됩니다.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어야 합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에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새로운 단계, 곧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것에서 의지와 삶에 속한 것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22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2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And God blessed them, saying,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fill the waters in the seas, and the fowl shall be multiplied in the earth.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fth day.(창1:22, 23)
AC.43
주님으로말미암아생명을지니게된모든것은크게열매맺고번성합니다.이것은사람이육신안에살아있는동안에는그다지드러나지않지만,다른삶에서는놀라울정도로그러합니다.말씀에서‘열매맺다’(befruitful)라는표현은사랑에속한것들에대해사용되고,‘번성하다’(multiply)라는표현은신앙에속한것들에대해사용됩니다.사랑에속한‘열매’(fruit)안에는‘씨’(seed)가들어있는데,이씨로인해그것은크게번성합니다.또한말씀에서주님의‘축복’(blessing)은열매맺음과번성을뜻하는데,이모든것이축복에서나오기때문입니다. Everything that has in itself life from the Lord fructifies and multiplies itself immensely; not so much while the man lives in the body, but to an amazing degree in the other life.To“befruitful,”in the Word, is predicated of the things that are of love, and to“multiply,”of the things that are of faith; the“fruit”which is of love contains“seed,”by which it so greatly multiplies itself.The Lord’s“blessing”also in the Word signifies fruitfulness and multiplication, because they proceed from it.
해설
AC.43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처음 나타난 살아 있는 것들이 왜 곧바로 ‘생육하고번성하라’는 축복을 받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39-41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3은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에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열매맺고번성한다’는 것입니다.
첫 문장이 이 글 전체의 중심입니다. ‘그안에주님으로부터오는생명을가진모든것은엄청나게열매맺고번성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무엇인가의 수가 많아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열매 맺고 번성하는 것을 창1:22의 ‘생육하고번성하라’는 말씀과 연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매우 흥미로운 말을 하나 덧붙입니다. 이러한 열매 맺음과 번성은 사람이 육신 안에서 사는 동안에는 그다지 크게 나타나지 않지만 ‘다른삶’에서는 놀라울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놀라울정도’가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또 왜 사후에는 그렇게 되는지를 AC.43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을 ‘시간과공간의제약이없어지기때문에기하급수적으로증가한다’는 식으로 구체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다른 삶에서 훨씬 더 놀라운 열매 맺음과 번성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오히려 우리에게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영적 성과의 크기로 그 사람 안에 있는 생명의 모든 가능성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 역시 ‘지금아무변화가없어보여도사후에는자동으로엄청나게성장한다’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3의 주어는 분명히 ‘그안에주님으로부터오는생명을가진모든것’입니다. 강조점은 인간 자신의 잠재력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다음 스베덴보리는 ‘열매맺다’와 ‘번성하다’를 구별합니다. 말씀에서 ‘열매맺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대해 말한다고 합니다. 창1:22의 두 동사가 단순히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서로 구별되는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말씀에서 ‘열매’와 ‘번성’ 같은 표현을 만날 때에도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사랑에 속한 ‘열매’ 안에 ‘씨’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씨로 말미암아 열매가 크게 번성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너무 멀리 나가 ‘씨는언제나정확히무엇을뜻한다’는 별도의 체계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43이 강조하는 것은 사랑에 속한 열매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다시 번성할 수 있는 씨를 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연의 열매 속에 씨가 들어 있어 다시 새로운 생명을 낳듯, 이 표현을 통해 사랑에 속한 것과 신앙에 속한 것의 열매 맺음과 번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AC.43은 ‘주님의축복’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축복’은 열매 맺음과 번성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축복에서나오기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22의 순서를 그대로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이그들에게복을주시며’라고 하고, 이어서 ‘생육하고번성하라’고 합니다. 곧 생육과 번성의 근원이 그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복’이라고 하면 건강, 형통, 보호, 물질적 풍요 등을 먼저 떠올릴 수 있습니다. AC.43은 여기서 그러한 모든 의미를 포괄적으로 정의하려는 글은 아닙니다. 따라서 ‘말씀에서복은언제나외적인복과관계없고오직내적성장만을뜻한다’고 일반화해서도 안 됩니다. 이 글이 분명히 밝히는 것은 창1:22의 문맥에서 주님의 축복이 ‘열매맺음과번성’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이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 안에서 열매 맺고 번성하게 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축복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보면 AC.43은 앞의 몇 글을 아름답게 마무리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살아난다고 했고, AC.40에서는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이 살아 있는 물고기와 새로 나타났으며,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실제로 생명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AC.42에서는 그 기억 지식의 개별적인 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들까지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43에서는 그렇게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들이 ‘열매맺고번성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중심은 ‘나는얼마나많은영적열매를만들어냈는가?’라는 자기 평가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갑니다. 열매 맺음과 번성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것의 성질이며, 그것이 가능한 것 자체가 주님의 축복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고 증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에 속한 열매를 맺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번성하게 합니다. 창조의 다섯째 날에 하나님께서 살아 있는 것들을 만드시고 곧바로 복을 주신 장면은 바로 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ul that creepeth, which the waters caused to creep forth after their kinds, and every winged fowl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창1:21)
AC.42
앞서말했듯이‘물에서번성하여움직이는모든생물’(everylivingsoulthatcreepeth, whichthewaterscausedtocreepforth, Fishes)은주님에게서오는신앙으로이제생명을얻은기억지식을뜻합니다.그리고‘큰바다짐승들’(greatwhales, Whales)은그러한지식들의일반원리를뜻하는데,개별적인것들은이일반원리아래에있으며,또거기에서나옵니다.우주안에있는그어떤것도어떤일반원리아래있지않은것은없는데,그래야그것이존재하고유지될수있기때문입니다.그래서‘고래’(Whales)나‘큰물고기’(greatfishes)는선지자들에의해종종언급되며,그때마다기억지식의일반원리를뜻합니다.애굽왕바로는인간의지혜또는지성,곧일반적으로말해지식(scientia)을표상하는데,그래서‘큰악어’(greatwhale)라고합니다.에스겔을보면, “Fishes,”as before said, signify memory-knowledges, now animated by faith from the Lord, and thus alive.“Whales”signify their general principles, in subordination to which, and from which, are the particulars; for there is nothing in the universe that is not under some general principle, as a means that it may exist and subsist.“Whales,”or“greatfishes,”are sometimes mentioned by the prophets, and they there signify the generals of memory-knowledges.Pharaoh the king of Egypt (by whom is represented human wisdom or intelligence, that is, knowledge [scientia] in general), is called a“greatwhale.” As in Ezekiel:
이말씀은기억지식을수단으로삼아,그러니까자기자신으로부터신앙의신비속으로들어가려는사람들을뜻합니다.이사야에서는by which words are signified those who desire to enter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and thus from themselves.In Isaiah:
여기‘바다에있는용을죽이시리라’(slayingthewhalesthatareinthesea)는그런사람들이진리의일반원리조차알지못하게된상태를뜻합니다.예레미야에서도By“slayingthewhalesthatareinthesea”is signified that such persons are ignorant of even the general principles of truth. So in Jeremiah:
여기‘좋은음식’(delicacies)이라한것은신앙의지식(knowledges)을뜻하며,요나를삼킨고래처럼그것들을삼켰다는뜻입니다.이처럼‘큰뱀’(whale)은신앙의지식에관한일반원리를단지기억지식으로만지니고,그런방식으로행하는사람들을뜻합니다. denoting that he had swallowed the knowledges of faith, here called“delicacies,”as the whale did Jonah; a“whale”denoting those who possess the general principles of the knowledges of faith as mere memory-knowledges, and act in this manner.
해설
AC.42는 창1:21의 ‘큰바다짐승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앞의 AC.40에서 물고기는 겉 사람에게 속한 ‘기억지식’(memory-knowledges)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물고기 하나하나보다 더 큰 것이 등장합니다. 바로 ‘큰바다짐승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개별적인 기억 지식들을 포괄하는 ‘일반원리들’(general principles)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이 ‘일반원리’라는 말부터 조금 어렵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여러 개별 지식을 한데 묶어 이해하게 해 주는 보다 포괄적인 지식이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실을 각각 따로 가지고만 있지 않습니다. 비슷한 것들을 묶고, 그 관계를 파악하고, 보다 큰 개념 아래에서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우주안에는어떤일반원리아래있지않은것이하나도없다’고 말하면서, 개별적인 것들이 존재하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창1:21의 거대한 물고기 또는 큰 바다짐승은 바로 이러한 ‘기억지식의일반적인것들’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AC.42는 ‘큰바다짐승’이라는 상징 자체를 처음부터 악한 것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창1:21에서는 하나님께서 큰 바다짐승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좋았더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큰바다짐승=악한지식’이라는 고정된 상응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의 첫 설명에서 큰 바다짐승은 우선 기억 지식의 일반 원리를 뜻합니다. 이후 선지서에서 인용되는 부정적인 사례들은 그러한 지식과 일반 원리가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하여 잘못 사용될 때 어떤 모습이 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먼저 애굽 왕 바로를 예로 듭니다. 겔29:3에서 바로는 자기 강들 가운데 누운 ‘큰악어’로 묘사되며 ‘나의이강은내것이라내가나를위하여만들었다’고 말합니다. AC.42는 바로가 ‘인간의지혜또는지성,곧일반적으로말해지식’을 표상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의 초점은 단순히 ‘애굽이나악어가나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기억 지식과 인간의 지성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특히 ‘내것이라’, ‘내가만들었다’는 말은 바로 앞의 AC.39-41에서 계속 강조했던 ‘선과진리와생명의근원은인간자신이아니라주님’이라는 주제와도 자연스럽게 대비됩니다.
겔32:2는 처음 읽으면 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바로가 ‘바다가운데의큰악어’이며, 강에서 움직이면서 발로 물을 휘저어 더럽힌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곧바로 ‘기억지식을수단으로삼아,그러므로자기자신으로부터신앙의신비속으로들어가려는사람들’을 뜻한다고 풀이합니다. 독자는 당연히 ‘어떻게저구절에서이런뜻이나오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AC.42안에서 확실하게 붙들 수 있는 연결고리는 이렇습니다. 물고기는 기억 지식을 뜻하고, 큰 물고기 또는 고래는 그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들을 뜻하며, 바로는 인간의 지혜 또는 지성, 곧 지식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기억지식을수단으로삼아’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면서 그것을 ‘자기자신으로부터’ 하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붙인 ‘andthusfromthemselves’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많이 알고 생각하고 질문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지식과 지성을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는 궁극적인 근원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
이 점은 앞의 AC.39-41과 함께 읽으면 더 분명해집니다. 거기서도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AC.42에서도 기억 지식과 지성 자체를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1:21의 물고기와 큰 바다짐승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좋다’고 하신 것들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독립적으로 생겨난 지혜처럼 붙들고, 그 힘으로 신앙의 신비를 지배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사27:1의 인용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바다에있는용을죽이시는것’이 그러한 사람들이 ‘진리의일반원리조차알지못하게된상태’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 한 절의 모든 상징을 여기서 따로 해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2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목적은 분명합니다. 큰 바다짐승이 ‘일반적인것들’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것이 상실되거나 죽임을 당하는 모습은 진리의 일반적인 것들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렘51:34에서는 느부갓네살이 ‘큰뱀같이나를삼키며나의좋은음식으로그배를채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좋은음식’이 신앙의 지식을 뜻하며, 그것을 고래가 요나를 삼킨 것처럼 삼켰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 경우의 ‘고래’는 ‘신앙의지식에관한일반원리를단지기억지식으로만지니고,그런방식으로행하는사람들’을 뜻한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핵심은 지식을 많이 소유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살아 있는 신앙의 것이 되지 못하고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머무르는 상태입니다.
이 대목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매우 중요한 구별을 줍니다. AC.40에서 기억 지식은 결코 악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생명을 얻은 기억 지식은 창조의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살아 있는 물고기로 표현됩니다. AC.42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 지식에는 개별적인 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것들이 있으며, 이 질서 자체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지식을 단지 기억 속에 쌓아 두거나, 자기 지식으로 신앙의 신비를 장악하려 하면 같은 상징이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42를 ‘지식은위험하다’는 경고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방대한 학문과 지식을 사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글이 묻는 것은 지식의 양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내가알고있는것들이어떤질서안에있으며,그것을가지고신앙의신비에접근할때그출발점을어디에두고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억 지식이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살아날 때 그것은 거듭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것을 자기 지혜의 소유물로 붙들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 하면, 같은 지식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42의 여러 선지서 인용을 읽으면서 ‘스베덴보리는도대체어떻게이런구절에서이런속뜻을알아내는가?’라는 또 하나의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이것은 겔32:2한 절만 더 자세히 풀이한다고 해결되는 질문이 아닙니다. 앞으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을 때 반복해서 만나게 될 중요한 문제이므로, 이 질문은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창1:20)
AC.41
사람의본성(own, proprium)에속한것은그자체로는생명이없으며,그것을눈으로볼수있게될때는뼈처럼단단하고검은물질처럼보입니다.그러나주님에게서오는것은생명을지니고있으며,그안에는영적인것과천적인것이들어있습니다.이것은눈으로볼수있게될때는반대로사람다운모습으로,살아있는것처럼나타납니다.이말은믿기어려우실지모르지만,정말진짜입니다.천사적영안에있는모든표현하나하나,모든생각하나하나,그리고생각의가장미세한부분하나까지도모두살아있으며,그가장작은요소들안에는주님에게서나오는애정이들어있습니다.주님은생명그자체이시기때문입니다.그러므로주님에게서오는모든것은생명을지니고있습니다.그러므로주님에게서오는모든것은그안에생명을지니고있습니다.그것들은주님을향한신앙을그안에담고있기때문이며,여기서는이러한것들이‘생물’(livingsoul)로상징됩니다.또한그것들은일종의몸을지니고있는데,그걸여기서‘스스로움직이는것’(whatmovesitself)또는‘돌아다니는것’(creeps)이라하는겁니다.그러나이러한진리들은아직사람에게는깊은비밀이며,지금은다만본문에‘생물’(livingsoul, thingmovingitself)이나와서잠깐언급한것입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movesitself” or “creeps.”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soul,” and the “thingmovingitself,” are treated of.
해설
AC.41은 앞의 AC.39에서 제시한 ‘주님에게서오는것만이생명을가진다’는 원리를 창1:20의 ‘생물’이라는 표현과 연결하여 한 걸음 더 깊이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은 단순히 사람이 숨 쉬고 생각하며 활동한다는 자연적 의미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고유한 것, 곧 proprium은 그 자체 안에 생명의 근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참된 생명은 오직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본성에속한것은그자체로는생명이없다’는 강한 표현도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가치하다거나 실제로 살아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거듭나기 전의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외형적으로 아무 선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독립적인 영적 생명의 원천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며, 선과 진리와 그것을 사랑하는 애정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AC.39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도록 허락받지만, 점차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나중에는 지각하게 된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매우 특이한 시각적 묘사로 표현합니다. 사람의 proprium에 속한 것이 눈에 보이게 나타날 때에는 ‘뼈처럼단단하고검은물질’처럼 보이는 반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사람답고살아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묘사를 지나치게 해부하거나 구체적인 영계의 물질 구조처럼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1이 강조하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과 주님에게서 비롯된 것 사이에는 단순한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천사적 영에 관한 설명은 이 ‘생명’이 얼마나 깊은 곳까지 미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적 영의 말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 심지어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도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가장 작은 것 안에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1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어떤 생각이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생각이 정확하거나 논리적이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애정이 있으며, 그 애정으로 말미암아 그 생각 전체가 생명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AC.41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들이 ‘주님을향한신앙’을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창1:20의 ‘생물’(living soul)로 상징됩니다. 다시 말하면 ‘생물’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무엇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사람 안의 것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것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앞의 AC.39에서 풀과 나무가 아직 ‘무생물’에 비유되다가 이제 물에서 움직이는 생물과 새가 등장하는 이유도 이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이 살아 있는 것들이 ‘일종의몸’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스스로움직이는것’ 또는 ‘기는것’으로 상징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그 의미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아직 사람에게 ‘깊은비밀’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창1:20에 ‘생물’과 ‘움직이는것’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기 때문에 잠깐 언급할 뿐이라고 선을 긋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여기서 영적 몸이나 천사의 사고 구조에 관한 상세한 체계를 미리 만들어 내기보다, AC.41이 밝히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AC.39-41의 흐름도 선명해집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서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는 과정을 설명했고, AC.40에서는 그렇게 살아나기 시작한 사람 안의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을 물고기와 새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1은 그 모든 것이 왜 ‘살아있다’고 불릴 수 있는지를 밝힙니다. 생명은 사람 자신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가장 작은 생각과 애정에까지 스며듭니다.
그러므로 AC.41의 중심은 인간의 개성이나 활동을 없애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생각하고,내가사랑하고,내가행한다’고 경험하면서도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아 가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을수록 proprium에 머물지만,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그의 생각과 애정은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창1:20의 ‘생물’은 바로 거듭남이 이처럼 ‘살아있는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창1:20)
AC.40
‘물들이번성하게하는것들’(creepingthingswhichthewatersbringforth)은겉사람에속한기억지식을뜻하고,‘새들’(birds)은일반적으로이성적이고지적인것들을뜻하는데,이가운데지적인것들은속사람에속합니다.‘물속에서돌아다니는것들’(creepingthingsofthewaters),곧‘물고기들’(fishes)이기억지식을뜻한다는사실은이사야를보면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thingswhichthewatersbring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That the “creepingthingsofthe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 그러나이의미는에스겔을보면더분명한데,거기서주님은새성전,곧일반적으로는새교회를,그리고교회에속한사람인거듭난사람을묘사하십니다.거듭난사람은누구나주님의성전이기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여기‘엔게디에서부터에네글라임까지의어부들’(FishersfromEn-gediuntoEn-eglaim)과‘그물치는것’(spreadingofnets)은자연적인사람을신앙의진리로가르칠사람들을뜻합니다. “FishersfromEn-gediuntoEn-eglaim,” with the “spreadingof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3] ‘새들’(birds)이이성적이고지적인것들을뜻한다는점도선지자들을보면분명합니다.이사야에보면,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여기서‘들짐승’(wildbeast)이실제짐승을뜻하지않고,‘새’(bird)도실제새를뜻하지않는다는점은,주님께서그것들과‘새언약을맺는다’(makeanewcovenant)고하는것만봐도누구나분명히알수있습니다. That “wild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anewcovenant” with them.
해설
AC.40은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생물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물들이번성하게하는것들’, 곧 물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들과 물고기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지식’을 뜻하고,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지적인것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먼저 ‘기억지식’이라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외부로부터 배우고 기억 속에 받아들이는 지식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읽어 알게 된 내용, 교리를 배우면서 얻은 지식, 자연계와 삶을 통해 습득한 여러 사실 등이 모두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옵니다. AC.40은 이러한 기억 지식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섯째 날에는 그것들이 ‘생물’로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로 앞의 AC.39와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아직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할 때 그에게 있는 것들이 식물처럼 ‘생명이없는것들’에 비유되지만,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기 시작하면 ‘생물’에 비유된다고 했습니다. AC.40은 이제 그 생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물고기는 기억 지식에, 새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에 대응합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당연히 ‘왜물고기가기억지식을뜻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40은 그 이유를 추상적인 설명으로 풀기보다 말씀의 여러 구절을 제시하여 그 대응을 보여 줍니다. 먼저 사50:2-3에서 바다와 강의 물이 없어지자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목말라 죽는 장면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은 물고기가 단순히 자연계의 물고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인간의 내적·영적 상태와 관계된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에스겔의 새 성전 환상이 이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고 합니다. 겔47:8-10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다에 이르자 물이 되살아나고 고기가 심히 많아집니다. 그리고 어부들이 서서 그물을 칩니다. AC.40은 여기서 ‘엔게디에서부터에네글라임까지의어부들’과 ‘그물치는것’이 ‘자연적인사람을신앙의진리로가르칠사람들’을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이것이 왜 물고기와 기억 지식의 관계를 보여 주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치려면 그 진리들이 자연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AC.40은 바로 이러한 겉 사람의 기억 지식들을 물고기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겔47장의 풍성한 물고기와 어부들은 단순한 어업의 번성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 교회와 거듭난 사람 안에서 자연적인 사람이 신앙의 진리로 가르침받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인용됩니다.
여기서 ‘새성전’과 ‘새교회’와 ‘거듭난사람’이 함께 언급되는 것도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지 외적인 종교 조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가 한 사람 안에 받아들여질 때 그 사람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교회의 모습을 갖습니다. 그래서 AC.40은 새 성전을 ‘일반적으로는새교회’, 그리고 ‘교회에속한사람,곧거듭난사람’과 연결합니다. 이어 ‘거듭난사람은누구나주님의성전’이라고 그 이유까지 직접 밝힙니다.
AC.40의 두 번째 중심은 ‘새들’입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 역시 자신의 생각만으로 제시하지 않고 선지서의 여러 구절을 인용합니다.
사46:11의 ‘동쪽에서부르는날짐승’, 렘4:25의 ‘공중의새가다날아갔으며’, 겔17:22-23의 백향목 아래 깃드는 ‘각종새’가 그 예입니다. AC.40이 이 구절들을 연이어 제시하는 목적은 각 구절의 모든 세부 속뜻을 여기서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번 글의 초점은 ‘새’가 말씀에서 단순히 자연계의 새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렘4:25의 ‘사람이없으며공중의새가다날아갔다’는 표현은 이런 독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사람이 없어지자 새들까지 날아간 광경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선지서의 표현 안에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AC.40에서는 그 가운데 ‘새들’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마지막으로 호2:18을 인용하는 이유도 중요합니다. 거기서는 주님께서 ‘들짐승과공중의새와땅의곤충과더불어언약을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표현을 근거로 ‘들짐승’이 단순히 들짐승을, ‘새’가 단순히 새를 뜻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동물들과 영적인 의미의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이 본문의 궁극적인 뜻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읽는 방법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중요합니다. 그는 문자적 의미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에 관한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여러 선지서에서 물고기와 새가 어떤 문맥에 놓이는지를 비교하면서 그 영적 의미를 밝혀 갑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도 있습니다. ‘물고기 =기억지식’, ‘새 =이성적·지적인것들’이라는 대응을 알았다고 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물고기와 모든 새를 문맥과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같은 뜻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0자체도 여러 말씀을 함께 제시하면서 그 문맥 안에서 대응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상응은 단어를 암호처럼 치환하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연결 속에서 살펴야 합니다.
또 하나 처음 읽는 독자가 궁금해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인것’과 ‘지적인것’이 무엇이 다르기에 스베덴보리가 ‘그가운데지적인것들은속사람에속한다’고 따로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AC.40은 여기서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본문만으로 둘을 억지로 명확하게 정의하기보다, 적어도 새가 인간의 단순한 기억 지식보다 높은 이성적·지적 영역을 나타내며 그중 지적인 것이 속 사람에 속한다는 정도를 먼저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문제는 별도로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섯째 날의 첫 장면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배우고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겼다면, 이제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면서 겉 사람의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도 살아 있는 영적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창조 이야기에서는 물속에 생물들이 번성하고 하늘에는 새들이 날기 시작합니다.
AC.40의 핵심은 지식을 버리고 이성을 억누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인간에게 있는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능력들이 어떤 영적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 줍니다. 물고기는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새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다섯째 날에 생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제 이러한 것들도 앞의 AC.39에서 말한 ‘살아나는’ 상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