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며, 체어리티(charity) 행위들과 같은 선들을 행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는데,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들을 연한 (tender grass), 또한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나중에는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tender grass,and also theherb yielding seed,and afterwards thetree bearing fruit.

 

해설

AC.7의 첫 번째 상태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주님의 자비가 첫 번째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하고,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드러났습니다. 이제 AC.9의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의 말과 행위에 실제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분명하게 회개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회개를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슬퍼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감정으로만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AC.9에서 회개는 실제 말과 행위의 변화와 함께 나타납니다. 사람은 사람으로부터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으로부터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앞의 AC.8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하는 것들의 구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상태에서는 그 속 사람으로부터 사람의 말과 행위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회개는 단순히 외적인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뜻밖의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말하고 실제로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는데도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여전히 생기가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AC.9 자체가 곧바로 밝혀 줍니다.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가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선을 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의 근원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세 번째 상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선한 행위의 유무만으로 그 상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같은 선한 행위라도 그것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AC.9에서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생기 없는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생기 없다는 말을 행위는 아무 가치도 없다거나 실제로는 악한 행위다라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분명히 선들이라고 부르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아직 그 선의 참된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사람이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이어질 네 번째 상태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10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AC.9의 세 번째 상태는 거듭남이 이미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그 과정 가운데 있는 상태입니다. 선이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그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들을 창1:11-12에 나오는 식물들로 표현합니다. ‘연한 ’, ‘ 맺는 채소’, 그리고 나중에는 가진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AC.9에서는 이 세 식물 각각의 세부적인 상응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연한 풀은 반드시 이것, 맺는 채소는 반드시 저것, 열매 맺는 나무는 다른 특정 상태라고 세밀하게 나누기보다, 이 식물들이 세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선들을 표현한다는 사실을 우선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다만 그 순서 자체는 눈여겨볼 수 있습니다. 연한 풀에서 씨 맺는 채소로,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로 표현이 이어집니다. 실제 창1 본문에서도 땅에서 식물이 돋아나고 씨를 맺으며 열매를 맺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자연적 창조의 모습을 사용하여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에서 선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AC.9 한 단락만으로 그 각 식물에 세밀한 심리적 단계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람이 이 단계에서 실제로 행동한다는 사실입니다. AC.7에서는 첫 움직임이 주님의 자비였고, AC.8에서는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드러났습니다. AC.9에서는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사람 안에서 아무런 응답도 일어나지 않는 수동적인 과정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행동 가운데 아직 하나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선을 행한다고 느끼고, 그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인간의 행동을 부정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 행동의 생명과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아직 온전히 알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이 점 때문에 AC.9회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회개했다고 해서 사람의 영적 인식이 한순간에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이전과 다른 말을 하고 선한 행위를 시작하면서도, 여전히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이러한 불완전한 상태를 지나 더 깊은 질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내가 선을 행했으니 이것은 선이다라는 생각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므로 선한 행동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모두 AC.9의 질서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실제로 말하고 행합니다. 그러나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상태에서 점차 벗어나야 합니다. 그 다음의 거듭남 상태들이 바로 그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세 번째 상태의 선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생기 없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선들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단계를 건너뛰거나 무가치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AC.9에서 가장 중요한 대조는 선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보다 선을 행하지만 그것을 누구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느냐에 있습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이미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지만, 아직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 선들은 아직 생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창1의 식물들이 넷째 날의 해와 달보다 먼저 등장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사람에게 선한 말과 행위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사랑과 신앙의 참된 생명이 어떻게 그 안에서 밝혀지는지는 다음 상태에서 더 분명해져야 합니다. AC.9은 그 직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세 번째 상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회개하여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하기 시작하지만, 선을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선에는 아직 참된 생명이 없다.이것이 AC.9이 말하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입니다.

 

심화

1.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데 회개의 상태인가?

 

AC.9, 심화 1,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데 왜 ‘회개의 상태’인가?

AC.9.심화1.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데 왜 ‘회개의 상태’인가? AC.9에서 세 번째 상태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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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체어리티(charity) 무엇인가? : 한국어 단어로 번역하기 어려운가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 왜 한국어 한 단어로 번역하기 어려운가

AC.9.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 왜 한국어 한 단어로 번역하기 어려운가 AC.9에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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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네 번째 상태'

AC.10 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의 빛을 받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한 것들을 행했으나, 그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겪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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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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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신앙의 지식들을 뜻하며, 그것들은 저장되어 있다가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곧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 것들로부터 분리됩니다.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이때까지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으며,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보존되어 온 것입니다. The second state is when a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os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nd those which are proper to man. The things which are of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and here are especially knowledges of faith, which have been learned from infancy, and which are stored up, and are not manifested until the man comes into this state. At the present day this state seldom exists without temptation, misfortune, or sorrow, by which the things of the body and the world, that is, such as are proper to man, are brought into quiescence, and as it were die. Thus the things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are separated from those which belong to the internal man. In the internal man are the remains, stored up by the Lord unto this time, and for this use.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state)를 첫 번째 상태와 분명히 구별합니다. 첫 상태가 전적으로 주님의 자비가 어둠 위에서 운행하는 준비 단계였다면, 두 번째 상태는 인간 안에서 ‘구별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단계’입니다. 이 구별이란 선과 악의 윤리적 분별 이전에,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이고 무엇이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지를 구별하는 인식의 시작을 뜻합니다. 이 구별 없이는 거듭남은 결코 진행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로 착각하는 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것들을 ‘리메인스(remains)라고 합니다. 리메인스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스스로 축적한 종교 지식이나 도덕적 자산이 아니라, ‘주님이 유아기부터 사람 안에 조용히 저장해 두신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기초적 지식들, 선한 감정의 흔적들, 순수한 애정, 주님을 향한 어린 마음의 인상들이 포함됩니다. 중요한 점은, 이 리메인스가 평소에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그것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며, 오직 이 두 번째 상태에 이르러서야 그것들이 작동할 준비를 갖춥니다.

 

이 상태가 오늘날에는 거의 항상 시험, 불행, 슬픔과 함께 온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유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주님이 고통을 기뻐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지 않고서는 속 사람이 드러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고유한 것, 곧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비롯된 욕망과 판단은 평소에는 매우 활발하여, 속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을 완전히 덮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섭리 안에서 외적 삶이 흔들리거나 제한되는 상황을 허용하시는데, 이로 인해 겉 사람의 활동은 약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조용해집니다.

 

이 과정은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황폐(vastation)의 초기 형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 사람의 것들이 약화되고 무력해질 때, 비로소 사람은 자신의 힘과 지혜에 의존할 수 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이때 속 사람 안에 저장되어 있던 리메인스가 깨어날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겪는 슬픔이나 시험은 거듭남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이 단락의 핵심 결과는 겉 사람과 속 사람의 분리입니다. 이는 인간이 둘로 쪼개진다는 뜻이 아니라, 내적 질서가 처음으로 형성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는 겉 사람의 사고와 욕망이 인간 전체를 지배했다면, 이제는 속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중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속 사람 안에 바로 리메인스가 있으며, 그것들은 주님께서 오랫동안 이 시점을 위해 보존해 오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신 것이 실제로 사용되기 시작하는 전환점입니다.

 

이 상태는 또한 인간의 신앙이 본격적으로 현실성을 갖기 시작하는 단계이기도 합니다. 이전까지 신앙이 있었다면 그것은 주로 외적 습관이나 전통, 혹은 지적 동의에 머물렀지만, 이제 신앙은 내면에서 삶과 연결될 가능성을 갖습니다. 그러나 이 가능성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직 구별의 시작일 뿐입니다. 무엇이 주님께 속한 것인지, 무엇이 자기에게 고유한 것인지에 대한 이 구별은 이후의 모든 상태를 관통하는 기준이 됩니다.

 

결국 AC.8은 거듭남이 감정적 각성이나 도덕적 결심으로 진행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먼저 ‘구별의 눈이 열리는 사건’이며, 이 구별은 종종 고통과 침묵, 상실의 시간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언제나 주님의 섭리가 있으며, 속 사람 안에 저장된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인간을 새롭게 하시려는 오랜 준비가 놓여 있습니다. 두 번째 상태는 그래서 고통의 단계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오랜 인내가 처음으로 열매를 맺기 시작하는 거룩한 전환의 단계입니다.

 

심화

1. 시험, 불행, 슬픔을 통해 사람의 것들이 잠잠해지는가?

 

AC.8, 심화 1, 왜 시험, 불행, 슬픔을 통해 겉 사람의 것들이 잠잠해지는가?

AC.8.심화1. 왜 시험, 불행, 슬픔을 통해 겉 사람의 것들이 잠잠해지는가? AC.8에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 나옵니다. ‘오늘날 이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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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세 번째 상태'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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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창1 개요, '첫 번째 상태'

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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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

번째 상태(state)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입니다. The first state is that which precedes, including both the state from infancy, and that immediately before regeneration. This is called avoid,” “emptiness,andthick darkness.And the first motion, which is the Lords mercy, isthe spirit of God mov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해설

AC.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날을 사람의 거듭남에서 이어지는 여섯 상태라고 밝혔습니다. 이제 AC.7부터 그 상태들을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첫 번째 상태는 빛이나 신앙이나 선한 행위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혼돈공허흑암으로 묘사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첫 번째 상태를 앞서는 상태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거듭남 바로 직전의 상태를 모두 포함시킵니다. 따라서 여기서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이 이미 진행되어 어느 정도 영적 성과가 나타난 단계를 뜻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에 앞서 있는 사람의 상태 전체를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1의 첫 장면과 잘 맞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자연적 창조의 첫 장면이 아직 질서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듯, 그 속뜻에서 사람의 거듭남 역시 처음부터 완성된 영적 질서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다만 AC.7은 아직 혼돈’, ‘공허’, ‘흑암각각의 속뜻을 자세히 풀지 않습니다. 그것은 뒤에서 창1:2를 본격적으로 설명할 때 더욱 분명하게 밝혀집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이 세 표현을 지나치게 세분하여 각각 어떤 특정한 영적 요소와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 이전의 첫 상태를 이 세 말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AC.7의 중심은 사실 이 어두운 상태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문장의 방향은 곧바로 번째 움직임으로 향합니다. 아직 사람에게 빛이 나타났다고 하지도 않았고, 사람이 회개했다고 하지도 않았으며, 신앙이나 사랑이 생겼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무엇인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창1:2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가 바로 그 첫 번째 움직임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이것이 AC.7에서 가장 중요한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듭남의 첫 움직임을 사람의 결심이나 지식이나 노력에서 찾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아직 수면’, 물들의 얼굴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앞당겨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AC.7 자체의 초점은 물의 상응을 자세히 밝히는 데 있지 않고,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묘사되는 상태 위에 주님의 자비가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7은 거듭남의 출발점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이 먼저 자기 안에 영적 빛을 만들어 낸 뒤 주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첫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번째 움직임으로 다가오는 것이 주님의 자비입니다. 거듭남은 그 자비에서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이 한 문장만으로 거듭남에서 인간의 자유와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결론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AC.7은 아직 그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이후 거듭남의 상태가 진행되면서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시험을 겪고, 회개하며,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 앞서 AC.7이 먼저 밝혀 두는 것은 그 시작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첫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것은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가 함께 언급된 것과도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AC.7은 유아기부터 거듭남 직전까지를 첫 번째 상태 안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유아기의 내적 구조나 유아에게 주어지는 선과 진리, 또는 리메인스의 형성과 보존에 관한 세부 교리를 모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내용은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할 때 충분히 다룰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7을 읽으면서 우선 기억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의 거듭남이 혼돈, 공허, 흑암으로 묘사되는 선행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 위에서 일어나는 번째 움직임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어야 AC.7의 균형이 살아납니다. 사람의 처음 상태만 보면 어둡지만, 그 어둠이 마지막 말이 아닙니다. 이미 그 위에 하나님의 영이 운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자비만 강조하면서 사람이 어떤 상태에서 시작하는지를 잊어버리면 거듭남이 왜 창조로 묘사되는지도 충분히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준비가 됩니다. AC.7에서는 아직 빛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번째 움직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그 움직임으로부터 거듭남의 다음 상태들이 차례로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AC.7은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그 모든 거듭남의 근원을 아주 짧은 말로 밝혀 줍니다. ‘ 번째 움직임은 주님의 자비입니다.1의 새 창조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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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창1 개요, '전체 개요' (AC.6-15)

창1 개요 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날’(days), 곧 여섯 ‘시기’(periods)는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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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days), 여섯 시기(periods)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해설

AC.6은 짧은 한 문장이지만, 이어지는 AC.7-13을 읽는 방향을 정해 주는 중요한 개요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을 사람의 거듭남에서 이어지는 여섯 상태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빛과 어둠, 궁창과 물, 땅과 식물,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그리고 마침내 사람의 창조를 읽을 때에는 그 자연적 대상들이 속뜻에서 사람의 거듭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주목할 말은 연속적 상태들(successive states)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을 서로 무관한 여섯 가지 영적 주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첫째 상태에서 둘째 상태로, 둘째에서 셋째로 이어지며 마침내 여섯째 상태에 이르는 하나의 연속된 거듭남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앞으로 AC.7-13에서 각각의 상태를 살펴보면 앞의 상태에서 없던 것이 다음 상태에서 나타나고, 사람의 내적 생명이 점차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days)이라고 한 뒤 곧바로 시기(periods)라고 덧붙인 것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을 자연계의 24시간으로만 읽어서는 그가 설명하려는 속뜻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1의 날들은 속뜻에서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거쳐 가는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이 점은 뒤의 AC.23에서 이 상태를 의미한다는 설명과 함께 더욱 분명해집니다.

 

다만 이것을 그러므로 1 자연계의 창조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에서 스베덴보리가 지금 설명하려는 것은 창1에 담긴 속뜻입니다. 문자에는 천지와 빛과 물과 땅과 광명체와 생물과 사람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 문자 안의 속뜻에서는 사람의 거듭남,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이 때문에 창조거듭남은 이 장의 속뜻에서 깊이 연결됩니다. 거듭남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스스로를 조금 더 개선하는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여섯 상태를 보면 처음의 사람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서 출발하고, 그 가운데 빛이 나타나며,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하는 것들이 구별되고, 선과 진리가 생겨나고, 마침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상태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질서가 속뜻에서는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열립니다.

 

여기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표현이 전반적으로(in general)입니다. AC.6은 여섯 상태의 세부 내용을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AC.7-13에서 각 상태를 하나씩 개괄하기에 앞서, 이 여섯 날 전체가 무엇을 다루는지를 먼저 알려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한 문장만 가지고 각 상태의 기간이나 개인별 진행 방식까지 자세히 추론하기보다, 우선 여섯 날은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기본 원리를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원리를 알고 나면 창1의 반복되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도 단순한 시간 표시와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뒤에서 저녁과 아침을 사람의 상태 변화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창1의 순서를 따라간다는 것은 자연계의 창조 순서를 따라가는 것인 동시에, 속뜻에서는 한 사람이 이전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옮겨 가는 거듭남의 흐름을 따라가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섯 상태를 인간이 스스로 밟아 올라가는 자기계발의 여섯 단계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 전체에서 생명과 빛과 선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다가 점차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아 가는 것도 중요한 흐름이 됩니다. 따라서 창1의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사람이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AC.6 자체는 아직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에서의 참여 방식을 설명하는 글이 아니므로 여기에서 그 문제를 자세히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근원과 능력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과, 1의 여섯 날이 그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AC.6은 창1의 속뜻을 읽기 위한 첫 번째 안내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첫째 날에는 자연계에서 무엇이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사람의 거듭남에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가?라는 질문도 함께 하게 됩니다. 그리고 AC.7부터 그 여섯 상태가 하나씩 펼쳐집니다.

 

첫째 상태는 거듭남 이전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시작합니다. 둘째 상태에서는 주님에게 속한 것과 사람 자신의 것 사이의 구별이 시작됩니다. 셋째 상태에서는 회개 가운데 선한 일을 행하기 시작하지만 아직 그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넷째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불붙고, 다섯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굳게 하며, 여섯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부터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이 전체 흐름이 바로 AC.6이 말하는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입니다.

 

그러므로 창1의 여섯 날은 속뜻에서 여섯 개의 서로 떨어진 교훈이 아니라 하나의 거듭남이 진행되는 여섯 연속적 상태입니다. AC.6은 아직 그 상태들을 설명하지 않고 문을 열어 줄 뿐입니다. 이제 AC.7부터 그 첫째 상태가 무엇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AC.7, 창1 개요, '첫 번째 상태'

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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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이 모든 말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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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그러나 내적 의미가 없다면 아무도 이것을 결코 없습니다. 예로 창세기의 장들을 있습니다. 문자적 의미로는 세계의 창조와 에덴동산, 그리고 최초로 창조된 사람 아담에 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글들에서 모든 것이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며, 아르카나는 지금까지 번도 계시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충분히 밝혀질 것입니다. 장은 내적 의미에서 새로운 창조, 인간의 거듭남을 일반적으로 다루며, 특별히는 태고교회를 다룹니다. 실제로 장에는 하나의 표현도 없으며,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거나 의미하거나 안에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AC.4는 서문의 흐름에서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AC.1-3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문자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고, 그 모든 것의 생명은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오며, 문자만으로 본 말씀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에서는 그 원리를 실제 창세기에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장들의 속뜻은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에 처음으로 답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창세기 첫 장들은 천지의 창조, 에덴동산, 아담과 하와 등 인류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스베덴보리도 이것이 문자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 외에 다른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관심은 문자에 적혀 있는 이야기를 지우는 데 있지 않고, 그 문자 안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아르카나’, 곧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첫 열쇠가 바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창조를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거듭남으로 읽습니다. 이것은 AC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빛이 있으라하시고, 물을 나누고, 마른 땅이 드러나며, 식물이 나고,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물고기와 새와 동물이 생기며, 마침내 사람이 창조되는 순서는 속뜻에서 주님께서 아직 영적으로 무질서한 인간을 단계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창조는 과거에 있었던 자연계의 창조라는 문자적 표현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받아 영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하나의 창조입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자기 안에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으므로 거듭남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이 점에서 창1: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은 AC의 속뜻 안에서 한 인간 안에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이야기로 열리게 됩니다.

 

그런데 AC.4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 하나를 덧붙입니다. 창세기 1장은 내적 의미에서 새로운 창조, 인간의 거듭남일반적으로다루지만, ‘특별히태고교회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오직 개인의 심리적 변화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동시에 인류의 가장 오래된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형성을 보고 있습니다.

 

개인의 거듭남교회의 역사는 서로 무관한 두 해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단순히 외적인 조직이나 제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이루는 선과 진리는 사람 안에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따라서 한 인간이 거듭나는 질서와 교회가 형성되는 질서는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묘사되는 영적 창조의 질서는 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의 거듭남에 적용되면서, 특별히 인류 최초의 교회인 태고교회가 형성된 상태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태고교회(Most Ancient Church)라는 말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아주 오래된 교회라는 일반명사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특정한 명칭입니다. 그는 창세기 초기의 사람들에게 오늘날과는 매우 다른 영적 상태가 있었으며, 특히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퍼셉션의 상태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이후 AC를 따라가면 에덴동산, 아담, 하와, , 가인과 아벨 등의 이야기를 통하여 이 교회의 상태와 변화와 쇠퇴가 차례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AC.4에서는 아직 태고교회의 모든 특징을 미리 배울 필요 없이, ‘창세기 초기 이야기가 개인의 거듭남뿐 아니라 태고교회의 영적 역사도 담고 있다는 정도를 우선 붙잡으면 충분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AC.1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에 하나의 표현도 없으며,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새로운 창조와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거나 의미하거나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1 전체가 대략 거듭남을 상징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빛과 어둠, 저녁과 아침, 날과 물, 궁창과 땅,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 그리고 그것들이 나타나는 순서까지도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AC.6부터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의 표현 하나하나를 그렇게 읽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표상상응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집니다. 자연계의 빛이 영적인 빛과 아무 관계도 없다면 창세기의 빛이 영적인 것을 나타낼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무관한 두 세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하나의 질서 안에서 서로 상응한다고 봅니다. 이 상응을 바탕으로 자연적인 사람과 사물과 사건이 영적인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으며, 이것을 이해하는 데 표상이라는 말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속뜻은 독자가 문자에 마음대로 의미를 덧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주장하는 상응과 표상의 질서를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이 거듭남을 다룬다고 해서 오늘 나의 경험을 창조의 각 절에 임의로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빛은 나에게 이런 느낌이고 바다는 저런 경험이다라는 식의 주관적인 상징 해석과 스베덴보리의 상응 해석은 다릅니다. AC는 말씀 전체에서 반복되는 용례와 영적 질서를 따라 각 표현의 의미를 설명하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의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의 여러 곳을 인용하고, 앞뒤 AC 글들을 계속 연결합니다. 앞으로 AC를 읽을 때 개별 상응을 고립시키지 않고 전체 문맥 안에서 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또한 창세기 1장을 거듭남으로 읽는다고 해서 자연계의 창조에 관한 질문을 AC가 모두 해결하려 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AC.4에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현대적인 의미의 우주론이나 지질학적 연대를 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앞으로 펼쳐 보이려는 것은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 따라서 AC를 읽을 때에는 창조가 과학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과 창조 이야기가 말씀의 속뜻에서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질문을 우선 구별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제 AC.1-4의 흐름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1은 말씀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AC.2는 그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습니다. AC.3은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AC.4는 마침내 그 원리를 창세기에 적용하여 창세기 1장은 속뜻에서 새로운 창조, 거듭남을 일반적으로, 태고교회를 특별히 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AC.4는 앞으로 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여행의 안내판과도 같습니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만 묻지 않고 말씀은 인간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는지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 ‘교회는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는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모든 일을 이루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함께 묻게 됩니다. 바로 그 질문을 가지고 AC.6부터 창세기 1장의 첫날로 들어가게 됩니다.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심화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말입니다. 처음에는 ‘상징’과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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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심화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처음 접하면 ‘상징’이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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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이 모든 말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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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겉 사람과 속 사람'

AC.3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겉 글자만 보겠다는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기독교 세계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과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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