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0

‘애굽’(Egypt)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Euphrates)도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또한 이러한 기억지식이 나오는 감각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선지서의 말씀에서 분명합니다. 미가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As by “Egypt,” so also by “Euphrates,” are signified memory-knowledges, and also the sensuous things from which these knowledges come. This is evident from the Word in the prophets, as in Micah:

 

10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보리로다 11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12그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미7:10-12) My she-enemy hath said, Where is Jehovah thy God? The day in which he shall build thy walls [macerias], that day shall the decree be far removed; that day also he shall come even to thee from Asshur, and to the cities of Egypt, and to the river [Euphrates] (Micah 7:10–12).

 

선지자들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천적 인간과 같이 되게 하실 주님의 오심에 관하여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So did the prophets speak concerning the coming of the Lord who should regenerate man so that he might become like the celestial man. In Jeremiah: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렘2:18)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Egypt, to drink the waters of Sihor? Or what hast thou to do in the way of Asshur, to drink the waters of the river [Euphrates] (Jer. 2:18)?

 

여기서 ‘애굽’(Egypt)과 ‘유브라데’(Euphrates)는 마찬가지로 기억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Asshur)는 거기서 나오는 추론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where “Egypt” and “Euphrates” likewise signify memory-knowledges, and “Asshur” reasonings thence derived. In David:

 

8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나이다, 11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시80:8, 11) Thou hast made a vine to go forth out of Egypt; Thou hast cast out the nations; Thou hast planted her; Thou hast sent out her shoots even to the sea, and her twigs to the river (Euphrates) (Ps. 80:8, 11),

 

여기서도 ‘유브라데강’(river Euphrates)은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유브라데가 앗수르 쪽을 향한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였던 것처럼, 기억지식은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의 지성과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다음 말씀도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lso the “river Euphrates” signifies what is sensuous and of the memory [sensuali et scientifico]. For the Euphrates was the boundary of the dominions of Israel toward Assyria, as the knowledge of the memory is the boundary of the intelligence and wisdom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man. The same is signified by what was said to Abraham: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15:18) Un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 from the river of Egypt unto the great river, the river Euphrates (Gen. 15:18).

 

이 두 경계는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These two boundaries have a like signification.

 

해설

AC.120은 앞의 AC.118에서 ‘브랏’, 곧 유브라데가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한 설명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미가 조금 더 구체화됩니다. ‘애굽’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도 기억지식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러한 기억지식이 나오는 감각적인 것들까지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기억지식이 왜 천적 인간의 질서에서 가장 바깥쪽에 놓이는지도 점차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연계에서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이고 기억에 저장하는 것들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미7:10-12를 인용한 이유는 이 구절에 앗수르와 애굽과 강, 곧 유브라데가 함께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사람을 거듭나게 하셔서 천적 인간과 같이 되게 하실 주님의 오심에 관한 예언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여러 나라와 지역과 경계에 관한 표현도 단순한 지리적 이동에 머무르지 않고,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적인 질서와 관계됩니다. 앞에서 에덴의 네 강을 천적 인간의 내적인 것들에 관한 묘사로 읽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렘2:18에서는 애굽의 시홀 물을 마시는 것과 앗수르로 가서 유브라데 물을 마시는 것이 함께 언급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애굽’과 ‘유브라데’가 기억지식을 의미하고, ‘앗수르’는 거기서 나오는 추론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인용은 특히 중요합니다. 앞의 AC.119에서는 앗수르가 이성을 의미한다고 했지만, 여기서는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추론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성적 능력이 있다는 것과 그 이성이 무엇을 출발점으로 삼아 추론하는가는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근거로 위의 것들을 판단하려는 질서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이성의 명철함을 받는 질서는 같지 않습니다.

 

시80:8, 11의 포도나무는 애굽에서 나와 심어지고 그 가지가 바다까지, 넝쿨이 유브라데까지 뻗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유브라데강’이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연적인 경계와 영적인 경계의 관계를 통하여 직접 설명합니다. 유브라데가 앗수르 쪽을 향한 이스라엘 영토의 경계였던 것처럼, 기억지식은 영적이고 천적인 인간에게 있는 지성과 지혜의 경계입니다. 따라서 ‘경계’라는 말은 기억지식을 무가치한 것으로 낮추는 표현이 아니라, 그것이 내적인 생명이 자연적인 차원에 이르는 가장 바깥쪽에 놓여 있음을 나타냅니다.

 

창15:18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 땅이 애굽 강에서 큰 강 유브라데까지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경계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약속의 땅을 둘러싼 자연적인 경계 역시 속뜻에서는 인간의 내적인 상태와 관계된 경계를 표현합니다. 이것은 앞의 AC.117에서 말씀의 역사적 부분에 들어 있는 모든 것도 아르카나를 의미하고 표상하며 그 안에 담고 있다고 한 원리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입니다.

 

AC.120은 또한 AC.80 이후 계속 남아 있던 감각과 기억지식의 문제를 상당히 선명하게 해 줍니다. 감각적인 것과 기억지식은 인간에게 없어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에게도 그것들은 존재하며 전체 질서의 경계를 이룹니다. 문제는 가장 바깥의 경계에 있는 감각과 기억지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과 신앙의 내적인 것들을 판단하려는 데 있습니다. AC.118에서 참된 이성의 명철함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의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고 했으므로, 거듭난 질서에서는 생명의 흐름이 가장 바깥에서 안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안을 거쳐 밖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AC.120의 여러 인용 구절은 모두 유브라데가 왜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을 의미하며, 왜 그것이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불리는지를 밝히는 데 기여합니다. 미가는 이 의미를 주님의 오심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큰 문맥에 놓고, 예레미야는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추론의 문제를 보여 주며, 시편과 창세기는 유브라데라는 실제 경계를 통하여 기억지식이 지성과 지혜의 경계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감각과 기억지식은 배척되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 놓여야 하며, 그 위에 있는 이성과 지성과 지혜 역시 궁극적으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AC.120)

 

 

 

AC.121, 창2:14, ‘천적 질서 -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지식까지’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천적 질서의 본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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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9, 창2:14, ‘앗수르는 이성을 의미한다 -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의 구별’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앗수르’(Asshur)가 이성적 마음, 곧 사람의 이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들에서 매우 분명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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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

‘앗수르’(Asshur)가 이성적 마음, 곧 사람의 이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들에서 매우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That “Asshur” signifies the rational mind, or the rational of man, is very evident in the prophets, as in Ezekiel:

 

3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겔31:3, 4) Behold, Asshur was a cedar in Lebanon, with fair branches and a shady grove, and lofty in height; and her offshoot was among the thick boughs. The waters made her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Ezek. 31:3–4)

 

이성은 ‘레바논의 백향목’(cedar in Lebanon)이라 하며, ‘굵은 가지들 사이에 있는 가지’(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는 기억에 속한 앎들을 의미하는데, 이것들이 바로 이와 같은 상태에 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The rational is called a “cedar in Lebanon”; the “offshoot among the thick boughs,” signifies the knowledges of the memory, which are in this very plight. This is still clearer in Isaiah:

 

23그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사19:23-25) In that day shall there be a path from Egypt to Asshur, and Asshur shall come into Egypt, and Egypt into Asshur, and the Egyptians shall serve Asshur. In that day shall Israel be the third with Egypt and with Asshur, a blessing in the midst of the land, that Jehovah Zebaoth shall bless, saying, Blessed be Egypt my people, and Asshur the work of my hands, and Israel mine inheritance. (Isa. 19:23–25)

 

이 구절과 그 밖의 여러 구절에서 ‘애굽’(Egypt)은 기억지식을, ‘앗수르’(Asshur)는 이성을, ‘이스라엘’(Israel)은 지성을 의미합니다. By “Egypt” in this and various other passages is signified memory-knowledges, by “Asshur” reason, and by “Israel” intelligence.

 

해설

AC.119는 앞의 AC.118에서 ‘앗수르’가 이성적 마음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에스겔과 이사야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AC.118에서는 힛데겔강이 이성 또는 이성의 명철함을, 앗수르가 이성적 마음을 의미한다고 했으며, 이성의 명철함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번호의 두 인용은 바로 그 가운데 ‘앗수르가 왜 이성을 의미하는가’를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먼저 겔31:3-4에서는 앗수르를 크고 아름다운 ‘레바논 백향목’으로 묘사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레바논 백향목이 이성을 의미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또한 그 나무의 가지들과 관련된 표현은 기억에 속한 앎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인용에서 백향목과 그 가지들은 단순한 거대한 나무의 모습이 아니라, 이성과 그것에 속하여 있는 앎들의 관계를 표현합니다. 특히 물과 깊은 물과 강들이 그 나무를 자라게 한다는 묘사는 앞에서 강과 물이 사람에게 지혜와 지성을 주고 자라게 하는 것들을 의미한다고 한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앗수르의 의미는 사19:23-25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말씀에는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이 함께 등장하며, 서로 왕래하고 함께 여호와를 섬기며 마침내 셋이 함께 복이 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이름의 의미를 직접 밝혀 ‘애굽’은 기억지식, ‘앗수르’는 이성, ‘이스라엘’은 지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앗수르 하나의 의미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서로 구별된다는 사실까지 보여 줍니다.

 

이 점은 최근 여러 번호에서 계속 나타난 용어의 구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AC.111에서는 기억지식을 곧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여기는 겉 사람의 상태를 지적했습니다. AC.116에서는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이 이해에 속한다고 했고, AC.117에서는 애굽이 기억지식을, 구스 사람들이 앎을 의미한다고 구별했습니다. 이제 AC.119에서는 애굽의 기억지식과 앗수르의 이성과 이스라엘의 지성이 다시 구별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기억지식, 앎, 이성, 지성은 서로 바꾸어 써도 되는 비슷한 말들이 아니라 각각의 자리를 가진 개념들임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사19장의 인용 이유는 단순히 ‘앗수르’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 사이에 길이 열리고 서로 오가며 함께 섬긴다는 전체 장면 속에서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서로 관계를 맺는 질서가 표현됩니다. 이성은 기억지식과 단절되어 홀로 작용하는 것도 아니며, 지성 역시 이성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구별되면서도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함께 작용하고, 그 전체가 여호와께 복을 받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은 AC.118에서 유브라데, 곧 기억지식을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한 설명을 기억지식의 무가치함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다시 확인해 줍니다. 사19장에서 애굽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등장하지 않고 ‘내 백성 애굽’이라고까지 불리며 앗수르와 이스라엘과 함께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기억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이성과 지성과 어떤 질서 안에서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합니다. 자연적인 앎과 이성적 능력이 올바른 질서 안에 있을 때 그것들도 전체적인 영적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119에서 에스겔과 이사야가 인용된 이유는 충분히 분명합니다. 에스겔은 앗수르를 레바논 백향목으로 묘사함으로써 이성과 그에 속한 것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이사야는 애굽과 앗수르와 이스라엘을 함께 놓음으로써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의 구별과 관계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118의 ‘앗수르는 이성적 마음’이라는 해석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천적 인간 안에서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 제자리를 얻어 질서 있게 관계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119)

 

 

 

AC.120, 창2:14, ‘유브라데 - 기억지식과 감각적인 것들은 지성과 지혜의 경계다’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0‘애굽’(Egypt)과 마찬가지로 ‘유브라데’(Euphrates)도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또한 이러한 기억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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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8, 창2:14, ‘힛데겔과 유브라데 -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이성과 기억지식으로’ (AC.118-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창2:14) AC.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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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창2:14)

 

AC.118

‘힛데겔강’(river Hiddekel)은 이성, 또는 이성의 명철함을 의미합니다. ‘앗수르’(Asshur)는 이성적 마음을 의미합니다. ‘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강’(river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hur)은 이성의 명철함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브랏’(Phrath), 곧 유브라데는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이것은 최하위 또는 경계입니다. The “river Hiddekel” is reason, or 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Asshur” is the rational mind; the “river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hur” signifies that the clearsightedness of reason comes from the Lord through the internal man into the rational mind, which is of the external man; “Phrath,” or Euphrates, is memory-knowledge, which is the ultimate or boundary.

 

해설

AC.118은 셋째 강 힛데겔과 넷째 강 유브라데를 설명하면서 에덴에서 나온 네 강의 구조를 거의 완성합니다. 힛데겔은 이성, 또는 이성의 명철함을 의미하고, 앗수르는 이성적 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유브라데는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그것은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합니다. 앞의 두 강이 의지와 이해에 관계했다면, 이제 셋째와 넷째 강에서는 이성과 기억지식까지 나타나면서 천적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이 더욱 바깥쪽으로 펼쳐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특히 ‘앗수르 동쪽으로 흐르는 강’에 대한 설명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이 이성의 명철함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속한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힛데겔은 이성이고 앗수르는 이성적 마음이라는 각각의 의미보다, 그 둘 사이에서 무엇이 어떻게 흘러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이성의 참된 명철함은 겉 사람의 이성적 마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그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것은 AC.115에서 처음 분명하게 등장한 ‘유입’의 설명을 한층 구체화합니다. 거기서는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드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유입의 근원과 통로와 도착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성의 명철함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의 이성적 마음 안으로 들어옵니다. 따라서 사람의 이성이 참으로 밝아지는 것은 이성이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을 때가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일 때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99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거기서는 질서가 회복된 사람에게서 주님께서 사랑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습니다. AC.118에서는 그 가운데 특히 이성적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이성의 명철함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성은 거듭남에서 제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올바른 근원에서 생명을 받아야 할 겉 사람의 중요한 능력입니다.

 

마지막으로 ‘브랏’, 곧 유브라데는 기억지식을 의미하며 ‘최하위 또는 경계’라고 합니다. 이것 역시 앞에서 기억지식을 부정적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 이유를 다시 보여 줍니다. 기억지식이 최하위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불필요하거나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여기서 묘사되는 질서 가운데 가장 바깥쪽에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속 사람을 거쳐 이성과 같은 겉 사람의 능력에 이르고, 기억지식은 그 질서의 가장 바깥 경계에 놓입니다. 문제는 기억지식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고, 그 가장 바깥의 것을 근원으로 삼아 위의 질서를 거꾸로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18은 AC.80에서 제기되었던 문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천적 인간이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에서 출발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성과 기억지식을 버린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기억지식은 분명히 전체 질서 안에 자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성적 마음 역시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명철함을 받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성과 기억지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질서입니다.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이 스스로 근원이 되려 하는가, 아니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속 사람을 통하여 받아들이는가 하는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AC.118은 네 강에 관한 설명 가운데서도 유입의 방향을 매우 선명하게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사람에게 이성적 마음과 기억지식이 실제로 있지만, 참된 명철함의 근원은 그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기억지식은 그 질서의 최하위 또는 경계를 이룹니다. 이렇게 볼 때 에덴의 강들은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여러 능력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사람 안에서 질서를 이루며 받아들여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AC.118)

 

 

 

AC.119, 창2:14, ‘앗수르는 이성을 의미한다 - 기억지식과 이성과 지성의 구별’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19‘앗수르’(Asshur)가 이성적 마음, 곧 사람의 이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선지서들에서 매우 분명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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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7, 창2:13, ‘구스와 스바 -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을 의미하는 말씀의 지명들’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창2:13) AC.117더욱이 ‘구스 땅’(land of Cush), 곧 에티오피아에는 금과 보석과 향품이 풍부했는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들은 선과 진리,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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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5

태고인들은 ‘땅들’(lands)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들이 뜻하는 바를 이해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가나안 땅과 시온산이 천국을 뜻한다는 관념을 가진 사람들은 이 장소들이 언급될 때 어떤 땅이나 산을 생각하기보다 그것들이 뜻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하윌라 땅’(land of Havilah)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윌라는 창25:18에 다시 언급되는데, 거기서 이스마엘의 아들들에 관하여 그들이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가는 길에 애굽 앞 술까지’(dwelt from Havilah even unto Shur, which is before Egypt, as thou goest toward Assyria) 거주했다고 합니다. When the most ancient people spoke of “lands,” they understood what was signified by them, just as those at the present day who have an idea that the land of Canaan and Mount Zion signify heaven, do not so much as think of any land or mountain when these places are mentioned, but only of the things which they signify. It is so here with the “land of Havilah,” which is mentioned again in Genesis 25:18, where it is said of the sons of Ishmael, that they “dwelt from Havilah even unto Shur, which is before Egypt, as thou goest toward Assyria.”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창25:18)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에서 지성과 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퍼셉션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두르다’(compass)는, 비손 강이 ‘하윌라 온 땅을 두른다’(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고 한 것처럼, 유입을 퍼셉션합니다. 또한 아론의 에봇 어깨에 있는 호마노가 금테로 둘러싸여 있는 것에서도(출28:11)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한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이와 같은 예는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Those who are in a heavenly idea perceive from these words nothing but intelligence, and what flows from intelligence. So by to “compass”—as where it is said that the river Pishon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they perceive a flowing in; as also in the onyx stones on the shoulders of Aaron’s ephod being encompassed with ouches of gold (Exod. 28:11), they perceive that the good of love should inflow into the truth of faith.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 테에 물리고 (출28:11)

 

해설

AC.115는 AC.110에서 ‘하윌라 땅’이 마음을 뜻한다고 한 해석을 태고인들의 말씀 이해 방식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인들은 어떤 ‘땅’에 관하여 말할 때 단지 지리적인 장소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이 뜻하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오늘날에도 가나안 땅이나 시온산을 천국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들을 때 물리적인 땅이나 산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예를 듭니다. 즉 장소의 문자적 이미지 너머에 그 장소가 나타내는 영적인 관념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하윌라 땅’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25:18에서 이스마엘의 아들들이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가는 길에 애굽 앞 술까지’ 거주했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명들을 곧바로 하나씩 암호처럼 치환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말씀에서 ‘지성과 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하윌라를 포함한 이 지리적 묘사는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는 인간의 지성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내적인 질서와 관계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태고인들의 퍼셉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들은 ‘하윌라 = 마음’이라는 대응표를 머릿속에서 찾아 문자에 대입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은 그들이 그 말씀에서 지성과 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퍼셉션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104에서 퍼셉션을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단순한 상징 해독이나 지적인 연상과는 다릅니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 안에서 그것이 담고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을 알아차리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이어지는 ‘두르다’에 대한 설명은 창2:11의 움직임 자체에도 속뜻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비손 강이 하윌라 온 땅을 ‘두른다’는 말씀에서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유입’을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앞에서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뜻했고, 하윌라 땅은 마음을 뜻했습니다(AC.110). 따라서 비손이 하윌라 땅을 두르는 모습은 단순히 강이 어떤 지역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지리적 장면을 넘어, 지성과 관계된 것이 마음 안으로 흘러드는 생명의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것으로 시작된 ‘흐름’의 이미지가 여기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름’의 의미를 아론의 에봇에 있는 호마노를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출28:11에서 호마노는 금테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앞의 AC.113에서 금은 사랑의 선을 뜻했고, AC.114에서 호마노를 비롯한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15는 금이 호마노를 둘러싼 그 모습을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선과 진리가 단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유입되어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AC.110에서 처음에는 상당히 낯설었던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 ‘사랑의 진리’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라는 구별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서로 분리된 네 가지 항목으로 늘어놓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며, 그 결과 지혜와 지성과 선과 진리가 하나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그러면서도 AC.111에서 보았듯이 각각의 것은 서로 구별됩니다. 하나 됨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질서 있게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유입’의 궁극적인 근원입니다. AC.112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네 차례에 걸쳐 반복했습니다. 그러므로 AC.115의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든다’는 말도 인간 내부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자기 발생적인 과정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비손이 하윌라를 두르며, 금이 호마노를 둘러싸는 일련의 이미지들은 모두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흘러와 인간 안의 서로 다른 것들을 살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결합하는 모습을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AC.115 해설)

 

 

 

AC.116, 창2:13, ‘기혼은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을 뜻함’ (AC.116-117)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창2:13) AC.116‘둘째 강’(second river), 곧 ‘기혼’(Gihon)은 선과 진리,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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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4, 창2:11-12,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들을 뜻하고 표상함’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4신앙의 진리는 말씀에서 보석들(precious stones)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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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창2:7)

 

AC.94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form man, dust from the ground)는 것은 그의 겉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5절에서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no man to till the ground)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는 것은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는 뜻이며,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man became a living soul)는 것은 그의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form man, dust from the ground” is to form his external man, which before was not man; for it is said (verse 5)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To “breathe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is to give him the life of faith and love; and by “man became a living soul” is signified that his external man also was made alive.

 

해설

AC.94는 창2:7의 세 표현을 차례로 해석하면서 천적 인간의 형성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첫째는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둘째는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 셋째는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을 각각 겉 사람의 형성,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음, 그리고 마침내 겉 사람까지 살아 있게 됨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단순히 육체를 만들고 거기에 생물학적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의 속뜻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이 인간의 겉 사람에까지 이르는 천적 인간의 형성을 묘사합니다.

 

먼저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겉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지면’은 앞의 AC.90과 직접 연결됩니다.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있는 동안에는 그의 겉 사람이 ‘땅’이라 불리지만, 천적 인간이 되면 ‘지면’ 또는 ‘들’이라 불린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이 형성된다는 것은 이미 천적 인간의 문맥 안에서 겉 사람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앞 AC.89에서도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 곧 ‘하늘’로부터 시작된다고 했으므로, 이것은 겉 사람이 자기 힘으로 새로 만들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질서에 따라 겉 사람이 형성되는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겉 사람이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상당히 강하게 말합니다. 그 근거가 창2:5의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전에 육체를 가진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속뜻에서 아직 겉 사람이 천적 질서 안에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참된 의미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이라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인간을 넘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 안에 있는 인간이라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도록 형성되어 갈 때 비로소 그것도 ‘사람’이 됩니다.

 

다음으로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은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의 AC.76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AC.76에서도 천적 인간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고 했는데, AC.94는 이제 그 생명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밝힙니다. 따라서 ‘생명의 숨’은 단순히 호흡이나 육체적 생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입니다. 앞서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면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된다고 했던 흐름도 여기와 연결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도’가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되지만 그 생명이 속 사람에만 머물러서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AC.91에서는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며,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평온이 마치 비와 안개처럼 겉 사람을 적신다고 했습니다. AC.92에서는 그것을 ‘내적인 평화로부터 나오는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94에서는 그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이르러 겉 사람 ‘또한’ 살아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내려와 전체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살아 있음’도 자연적 생존과 구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은 육체적으로 살아 있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의미에서는 아직 참된 생명을 받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참된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AC.94에서는 그것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이 생명이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흘러들 때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삶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을 표현하고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AC.94는 AC.89 이후의 흐름을 매우 선명하게 완성합니다.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되고(AC.89), 겉 사람은 ‘지면’과 ‘들’이 되어 속 사람의 질서 아래 놓이며(AC.90),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고(AC.91), 내적인 평화에서 나오는 생명을 받아 선과 진리를 산출합니다(AC.92-93). 그리고 이제 ‘생명의 숨’, 곧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이르러 그 겉 사람도 살아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겉 사람까지 형성하시고 살리시는 거듭남의 완성을 묘사합니다. (AC.94)  

 

심화

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 심화 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 심화1. 왜 겉 사람은 이전에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는가? AC.94에는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설게 느껴지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형성하셨다’는 것은 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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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5, 창2:7, ‘신앙의 생명은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은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을 다룹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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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3, 창2:5-6, ‘평화의 언약과 복된 비 - 악과 거짓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천적 인간’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2:5, 6)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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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AC.63 마지막에는 처음 읽는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을 한 사람의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어 왔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도 없는데 갑자기 ‘하늘’로 인도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 ‘이것이 사후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단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뒤에 붙인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따라서 AC.63만 가지고 ‘하늘, 천적 낙원’의 뜻을 모두 확정하려 하기보다, 이것이 다음 장의 일곱째 날 설명으로 넘어가는 연결 문장이라는 사실을 먼저 보는 것이 좋습니다.

 

문맥상 이 사람이 여기서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여섯 상태를 말했고, AC.63은 여섯째 날 끝에서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고 전투가 그치며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된다’는 말 역시 지금까지 설명해 온 거듭남의 연속선상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곧바로 ‘하늘은 장소가 아니라 오직 마음의 상태라는 뜻이다’라고 결론 내려도 될까요? 그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실제 사후의 천국도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표현 하나를 근거로 ‘천국은 장소가 아니고 인간 내면의 상태일 뿐이다’라고 하면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를 지나치게 축소하게 됩니다.

 

반대로 ‘하늘로 인도된다’는 말이 있으니 이 사람이 여기서 죽어 실제 사후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읽는 것도 현재의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 지금 설명되는 것은 창조의 여섯 날에 대응하는 인간의 거듭남이고, 스베덴보리는 그 다음 상태를 다음 장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늘, 곧 천적 낙원’이 여섯째 날 이후에 이어지는 거듭남의 상태와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이며 왜 ‘하늘’과 ‘천적 낙원’이라고 불리는지는 창2와 이어지는 AC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밝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AC.63의 마지막 문장은 독자에게 일종의 예고편과 같습니다.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창조가 이제 새로운 상태로 넘어갑니다.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치고, 악한 영들이 떠나며 선한 영들이 대신하고, 사람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거기서 멈추며 ‘다음 장에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AC 전체를 이미 알고 있다면 일곱째 날, 천적 인간, 안식, 천상의 사람의 상태 등을 미리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따라 설명하는 순서를 그대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창세기 1장이 끝났으니 이제 창세기 2장의 말씀 자체가 먼저 나오고, 그 말씀을 AC가 어떻게 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과 AC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AC.63의 마지막 한마디를 가지고 다음 장의 의미를 우리가 먼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창2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속뜻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AC는 말씀보다 앞서 독자를 끌고 가는 책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것을 밝히는 해설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로 인도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현재 단계의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것은 사망 장면을 묘사하는 문장이 아니라 거듭남의 여섯째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문맥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곧 천적 낙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리도 그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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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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