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24)

 

AC.162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천국과 천적 인간의 모든 안에서 모든 것이시므로, 천국과 천적 인간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적이라 합니다.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천적 기원들,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는 것처럼, 특별히 혼인의 (the law of marriages) 그러합니다. 지상의 모든 혼인은 천적 혼인(celestial marriage), 천국의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혼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합니다. 혼인은 주님과 하나의 천국,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가 있는 그러한 혼인입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혼인의 (law of marriages) 남편과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우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며, 천적 인간의 본이 됩니다. 법은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 계시되었을 아니라 그들의 사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남자가 오직 아내만을 두었고, 그들은 하나의 집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이 사람이기를 그치고 사람이 되었을 때에는 여러 아내를 맞이하였습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은 그들의 혼인에서 천적 혼인을 표상했기 때문에, 부부의 사랑은 그들에게 일종의 천국이자 천국의 행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했을 그들은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다수에게서 오는 쾌락, 사람의 즐거움에서 행복을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마음의 완악함(hardness of heart)이라 하셨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여러 아내를 두는 것을 허락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 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It is the celestial (or heavenly) 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 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 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 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 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 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 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 and became external, 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 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 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 but in pleasure from a number, 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This is called by the Lordhardness of heart,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 as the Lord himself teaches:

 

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 8 둘이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5-9) 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Mark 10:59)

 

해설

AC.162는 창2:24둘이 몸을 이룰지로다를 혼인 자체의 질서로 확장하여 설명합니다. 출발점은 지상의 혼인이 아니라 천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이 인간 사회의 편의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특별히 혼인의 법이 그러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혼인은 단순한 사회 제도나 생활 방식이 아니라 천국의 질서가 지상에서 표상되는 매우 중요한 형식입니다.

 

이 설명의 중심에는 천적 혼인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의 모든 혼인이 천적 혼인으로부터, 그리고 그 혼인에 따라 파생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천적 혼인을 설명하면서 먼저 주님과 하나의 천국을 말하고, 이어 머리가 주님이신 하나의 교회를 말합니다. 따라서 혼인의 하나 됨을 이해하는 가장 깊은 기준은 두 인간이 서로에게만 집중하여 하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 됨의 근원이 한 분 주님에게 있다는 데 있습니다. 천국도 교회도 그분을 머리로 할 때 하나이며, 지상의 혼인도 이 천적 질서를 표상합니다.

 

바로 여기서 한 남편과 한 아내라는 혼인의 법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당시의 관습이나 인간이 만들어 낸 윤리 규정에서 도출하지 않고 천적 혼인으로부터 도출합니다. 한 남편과 한 아내가 혼인을 이룰 때 그들은 천적 혼인을 표상하고 천적 인간의 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일부일처는 이 단락에서 단순히 허용된 여러 결혼 형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천적 혼인에서 파생되는 혼인의 질서로 제시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이 법이 외적으로 계시되었을 뿐 아니라 속 사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들이 한 남자와 한 여자로 하나의 집을 이루었던 것은 단지 외적인 명령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가 그 질서와 상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부의 사랑은 일종의 천국이자 천국의 행복이었습니다. 혼인의 외적 형태와 그들의 내적 생명의 질서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변화를 혼인에서도 그대로 보여 줍니다. 그들은 더 이상 부부의 사랑 안에서 행복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다수에게서 오는 쾌락, 곧 겉 사람의 즐거움에서 그것을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아내의 수가 바뀌었다는 외적 사실보다 행복을 어디에서 퍼셉션하게 되었는가 하는 내적 변화입니다. 혼인의 외적 변화는 이미 일어난 인간 내면의 변화를 드러내는 결과였습니다.

 

이 때문에 AC.162가 막10:5-9를 인용하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주님께서는 모세가 허용한 것을 곧바로 창조의 본래 질서와 동일시하지 않으시고,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그렇게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신 뒤 창조 때로부터의 질서로 돌아가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말씀을 인용한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복수의 아내가 허락되었다는 사실이 혼인의 본래 법을 바꾼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허용된 것이 있었지만, 혼인의 기원과 기준은 여전히 천적 혼인에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마음의 완악함을 단순히 고집이 세거나 잔인하다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AC.162 자체의 흐름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속 사람이기를 그치고 겉 사람이 되었으며, 부부의 사랑에서 누리던 천국의 행복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막10장에서 모세의 허용을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창조의 처음을 다시 가리키신 것은, 인간의 변화된 상태와 혼인의 본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AC.162는 이렇게 창2:24를 천적 혼인에서 지상의 혼인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질서 안에 놓습니다. 한 분 주님, 하나의 천국과 교회, 한 남편과 한 아내, 그리고 하나의 집이라는 흐름의 중심에는 단순한 숫자상의 하나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 됨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부부의 사랑이 천국의 행복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혼인이 이 천적 질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혼인의 은 결혼생활에 관한 하나의 규칙을 넘어, 지상의 혼인이 어디에서 그 본과 질서를 받아야 하는지를 밝히는 말씀입니다. (AC.162 해설)

 

심화

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 심화 2,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 심화1.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다’ AC.16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에 느껴지는 문장이 있습니다. ‘온 천국은 하나의 천적 인간인데, 이는 오직 주님만이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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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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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24)

 

AC.161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 안에서,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셨으며, 다만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안에 스며들게 하셨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보이는지는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없습니다. 이에 관하여 어떤 관념을 갖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 사랑과 신앙이 없고,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행위는 체어리티의 행위 또는 신앙의 열매라고 없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what is spiritual celestial, however, 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해설

AC.161에서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미 악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전의 천적 인간처럼 전적으로 속 사람의 질서 안에서 살기보다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을 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그들을 악한 상태라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이러한 상태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proprium에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곧이어 주님께서 영적 천적인 을 자비롭게 그 안에 스며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고 한 것, AC.154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한 것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proprium 안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생명의 근원이 proprium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면서 하나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유입(influx)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이 실제로 하나의 것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159에서 천적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입을 통하여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이것은 앞서 AC.155에서 천사들의 상태를 설명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곧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과 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AC.161에서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이 스며든다는 설명도 같은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유입을 추상적인 설명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듭니다. 어떤 행위가 겉으로 선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여기서 행위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사랑과 신앙은 그 행위를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AC.161에서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하나 됨은 둘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들어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둘이 몸을 이룰지로다를 해설하면서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고 한 내용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하나처럼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에서 질서 있게 받아들여져 하나의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61은 창2 후반부의 proprium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깊게 만듭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proprium 안에 무엇이 스며들어 있으며, 무엇이 그 삶과 행위의 내적 근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천적인 것이 그 안에 있고, 그것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유입되어 실제 삶에서 나타날 때, 인간은 자기 삶을 자기 삶처럼 살아가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두게 됩니다. 이것이 AC.161이 유입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여 주기 시작하는 중요한 질서입니다. (AC.161 해설)

 

심화

1. influx - 사람과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 심화 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 심화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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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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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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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22)

 

AC.152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했던 깊은 아르카나가 함축되어 있음을 분별할 있습니다. 그리고 여자(woman) 인간의 proprium 의미한다는 것은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다는 사실에서 있습니다.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It requires but little attention in anyone to discern that woman was not formed out of the rib of a man, and that deeper arcana are here implied than any person has heretofore been aware of. And that by thewomanis signified mans own may be known from the fact that it was the woman who was deceived; for nothing ever deceives man but his own, or what is the same,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1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있으나 3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4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5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6여자가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만큼 탐스럽기도 나무인지라 여자가 열매를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3:1-6)

 

해설

AC.152는 먼저 창2:21-22의 갈빗대와 여자 이야기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직접적인 입장을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실제로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별할 수 있으며, 이 말씀 안에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152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하는 범위에서는 이 장면을 먼저 신체적으로 여성이 만들어진 과정을 기록한 사건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사람들의 내적 상태에 관한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되어 온 해석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48-149에서는 뼈와 살의 의미를 통해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직접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AC.152의 첫 문장은 갑자기 등장하는 주장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진 속뜻의 설명을 전제로 한 결론입니다. 문자에 나타난 갈빗대와 여자의 장면 안에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생명을 얻는가 하는 더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여자(woman)가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창3의 이야기와 연결합니다. 그 근거는 속임을 당한 것이 여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2의 여자와 창3의 여자를 하나의 연속된 내적 의미 안에서 읽고 있다는 뜻입니다. 2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어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여자로 표현되었고, 이후 창3에서는 바로 그 여자가 속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연결을 통해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속이는 것은 오직 그의 proprium, 같은 말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문장만 떼어 놓으면 proprium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며 언제나 악하다고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의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주님께서 proprium을 주시며, 그들의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이 가장 참된 천적인 자체라고 했습니다. AC.151에서도 여자는 단순히 proprium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52의 마지막 문장을 앞의 설명들과 분리하여 proprium 전체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는 속임을 당하는상태에 놓인 인간의 proprium이 문제입니다.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으려 할 때, proprium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proprium이 인간을 속입니다. 이것은 AC.146에서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표상되고 보여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에게 proprium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받고 무엇의 지배를 받는가에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152는 창2와 창3 사이에 중요한 다리를 놓습니다. 2에서는 인간이 주님의 직접적인 인도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면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proprium을 그대로 죽어 있는 상태에 두지 않으시고 생명을 주어 인간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이 proprium이 이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쪽으로 기울게 되면, 3에서 여자가 뱀에게 속임을 당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 이야기는 창2와 단절된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된 proprium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여자 = proprium이라는 표현 역시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151-15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렇게 설명하는 것은 현재 창2-3의 이 특정한 문맥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상응의 의미는 다루는 주제와 문맥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여자가 등장할 때마다 무조건 proprium으로 바꾸어 읽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현재 이 여자를 왜 proprium으로 해석하는지를 그 이야기의 연속성과 함께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AC.152는 매우 짧은 번호이지만 창2 후반부의 해석을 창3으로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갈빗대와 여자는 인간 남녀의 기원에 관한 문자적 설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깊은 아르카나를 담고 있으며, 특히 여자가 속임을 당한다는 다음 장의 이야기를 통해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동시에 앞 번호들을 함께 읽으면 proprium 자체를 악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되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기울어 인간을 속이는 proprium을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게 됩니다. (AC.152)

 

 

 

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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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1, 창2:22, ‘여자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AC.151-155)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창2:22) AC.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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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2:19, 20)

 

AC.146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여기서 의미하는 것들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를 있습니다. 18절에서는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라고 하며, 곧이어 이미 앞에서 다루었던 짐승들(beasts) 새들(birds) 언급됩니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사람을 위하여 그를 돕는 배필을 찾지 못했다(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합니다. 이것은 그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에 관하여 그것들이 어떠한 성질을 지니는지 알도록 허락되었음에도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자신들에게 표상되고 보여진다 해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tated, the connection of what is signified may be seen. In verse 18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and presentlybeastsandbirdsare spoken of, which nevertheless had been treated of before, and immediately it is repeated that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which denotes that although he was permitted to know his quality as to the affections of good, and knowledges of truth, still he inclined to his own; for those who are such as to desire what is their own, begin to despise the things of the Lord, however plainly they may be represented and shown to them.

 

해설

AC.146AC.138부터 이어져 온 창2:18-20의 설명을 하나로 연결합니다. 문자 그대로 읽으면 조금 이상해 보이는 순서가 있습니다. 2:18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시겠다고 하신 뒤, 곧바로 이미 창1에서 다루었던 짐승들과 새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것들에게 이름을 준 뒤에는 다시 사람을 위하여 돕는 배필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AC.146은 이 반복과 배열이 속뜻에서는 하나의 연속된 인간 상태를 보여 준다고 설명합니다.

 

먼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것은 AC.138-140에서 설명한 것처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을 원하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혼자는 본래 결핍이나 고독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AC.139에서 살펴본 것처럼 주님의 인도 아래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가 혼자 거하는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후손들은 그 상태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다음에 짐승들과 새들이 등장하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AC.142에서 그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짐승들은 천적 애정들, 곧 의지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고, 새들은 영적 애정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그것들을 사람에게로 이끄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성질을 알게 하신 것이며, 사람이 이름을 준 것은 실제로 그 성질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AC.143-145는 다시 왜 동물이 애정을 의미하며 왜 이름을 주는 것이 그 성질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짐승들과 새들의 등장은 창2:18의 흐름을 중단시키는 삽입이 아니라 그 다음 단계입니다.

 

이제 AC.146에서 그 연결이 선명해집니다. 사람은 proprium으로 기울었지만, 그 즉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내버려진 것이 아닙니다. 그는 먼저 주님께서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이 어떠한지를 알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이것은 AC.133에서 이미 요약되어 있던 내용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을 알고도 사람은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그래서 짐승들과 새들의 이름을 모두 준 뒤에도 사람을 위하여 그를 돕는 배필을 찾지 못했다고 다시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앞 번호들의 내용을 연결하는 설명이지만, AC.146의 마지막 문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 사람들은 주님의 것들이 아무리 분명하게 자신들에게 표상되고 보여진다 해도 그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이것은 단순히 인간이 선과 진리를 몰라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고, 그것들이 무엇인지까지 분명하게 보면서도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업신여기기 시작한다는 표현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람들이 처음부터 주님의 모든 것을 완전히 거부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것을 원하는데서 시작하여 주님의 것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지금 묘사되는 것은 하나의 진행 과정입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자기 삶의 근원으로 받아들이는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원하기 시작할 때, 이미 알고 있는 주님의 선과 진리조차 점차 낮게 평가하게 되는 방향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AC.140-141에서 설명한 proprium의 구별과 함께 읽을 때 더욱 중요합니다.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주님께서 proprium을 주시며,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46의 문제는 단순히 proprium 존재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을 원하면서 주님의 것들보다 그것을 앞세우는 방향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이라는 용어를 무조건 악과 동일시하기보다, proprium 안에 무엇이 있으며 인간이 그것을 어떤 근원에서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계속 구별해야 합니다.

 

AC.146은 결국 창2:18-20 전체가 왜 이 순서로 기록되어 있는지를 밝혀 줍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것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의 성질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돕는 배필에 대한 말씀이 짐승들과 새들의 장면을 사이에 두고 다시 반복됩니다. 이제 다음 단계에서는 이 인간에게 proprium이 어떻게 주어지는지가 갈빗대와 여자의 표상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AC.146)

 

 

 

AC.147, 창2:21, ‘갈빗대와 깊은 잠 - 자기에게서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 (AC.147-150)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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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5, 창2:19-20, ‘말씀에서 이름은 본질과 성질을 의미하다’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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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40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 인간의 proprium 의미한다는 것은 proprium 본질과 뒤에 이어지는 내용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는 교회의 사람은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proprium 허락되었는데, 그것은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 그러한 proprium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라고 것입니다. That bya help as with himis signified mans own, is evident both from the nature of this own, and from what follows. As however the man of the church who is here treated of was well disposed, an own was granted him, but of such a kind that it appeared as it were his own, and therefore it is saida help as with him.

 

해설

AC.140AC.138에서 제시한 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왜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하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proprium에 관한 매우 중요한 구별이 처음 나타납니다. 여기서 다루는 교회의 사람은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지만, 그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실제로 소유하는 자기 생명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proprium이었습니다.

 

이 설명은 AC.139의 마지막 문장과 직접 이어집니다. 태고교회의 이 후손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인간으로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욕구에는 이미 악의 방향이 들어 있었지만, AC.140은 이들이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지금 다루는 상태를 완전히 타락한 인간의 상태로 앞당겨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 가운데에서도 그들의 당시 상태에 맞는 proprium을 허락하십니다.

 

proprium의 성격을 보여 주는 핵심이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이라는 표현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의 것으로 경험되는 어떤 것이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주님과 독립된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서 AC.124에서는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이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AC.135에서도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40은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 자체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성격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이로써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과 나는 이것을 것으로 느끼며 살아간다는 인간의 경험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할 중요한 실마리가 생깁니다.

 

이 점에서 그를 돕는 배필이라는 표현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이 표현의 모든 세부를 풀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는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과 별개의 독립적인 생명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목의 초점은 인간에게 주님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생명 근원이 생겼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을 인간이 자기의 것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상태가 어떻게 허용되는가에 있습니다.

 

이것은 AC.122부터 계속되어 온 주님의 자기의 의 문제에도 중요한 빛을 던집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았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요구를 단순히 끊어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자기의 것으로 느끼는 실제로 자기에게서 생명이 나온다고 믿는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이제 조금씩 볼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proprium을 해석할 때 특히 중요합니다. 인간이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사랑한다’, ‘내가 행한다고 느끼는 것 자체를 곧바로 악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140에서 다루는 사람은 아직 선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그에게도 자기 자신의 것처럼 보이는 proprium이 허락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에게 자기의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의 근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에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있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구별의 전체 의미는 이어지는 설명을 더 읽은 뒤 확정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따라서 AC.140AC.132에서 시작된 허락된 proprium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은 주님으로부터 독립된 실제적인 자기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인간에게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보이는proprium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자기의 삶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관계가 앞으로 갈빗대와 여자에 대한 상세한 설명에서 어떻게 더 밝혀지는지를 계속 따라가야겠습니다. (AC.140)

 

 

 

AC.141, 창2:18, ‘육체적·영적·천적 인간의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1인간의 proprium에 관해서는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인간에게서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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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9, 창2:18, ‘혼자 거하다 -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천적 인간의 상태’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39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을 ‘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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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2:18)

 

AC.139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던 사람들을 혼자 거하는(dwell alone)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교회에서도 그들이 이방 민족들을 몰아낸 혼자 거하는 것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말씀에서는 때때로 주님의 교회가 혼자(alone) 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에서는, In ancient times those were said todwell alonewho were under the Lords guidance as celestial men, because such were no longer infested by evils, or evil spirits. This was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also by their dwelling alone when they had driven out the nations. On this account it is sometimes said of the Lords church, in the Word, that she isalone,as in Jeremiah: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일어나 고요하고도 평안히 사는 백성 성문이나 문빗장이 없이 홀로 사는 국민을 치라 (49:31) Arise, get you up to a quiet nation that dwelleth confidently, saith the Lord, which hath neither gates nor bar; they dwell alone. (Jer. 49:31)

 

신명기에서는, In the prophecy of Moses: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33:28) Israel hath dwelt confidently alone. (Deut. 33:28)

 

그리고 발람의 예언에서는 더욱 분명하게, And still more clearly in the prophecy of Balaam: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백성은 홀로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23:9) Lo, the people dwelleth alone, and shall not be reckoned among the nations, (Num. 23:9)

 

라고 합니다. 여기서 민족들(nations) 악들을 의미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혼자 거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천적 인간이 되거나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를 받기를 원하지 않고, 유대교회처럼 여러 민족 가운데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이것을 원했기 때문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라고 것입니다. 원하는 사람은 이미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가 원하는 것이 그에게 허락됩니다. wherenationssignify evils.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disposed to dwell alone, that is, to be a celestial man, or to be led by the Lord as a celestial man, but, like the Jewish church, desired to be among the nations. And because they desired this, it is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for he who desires is already in evil, and it is granted him.

 

해설

AC.139AC.138에서 설명한 혼자(alone)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분명해지는 것은 혼자가 본래 부정적인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고대에는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사람들을 혼자 거하는사람들이라 했습니다. 그들이 혼자 거한다는 것은 사람들과 관계를 끊고 고립되어 산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악이나 악한 영들에게 시달리지 않고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된 천적 인간의 상태와도 잘 연결됩니다. AC.84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면 싸움이 그친다고 했고, AC.87에서는 악한 영들이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39에서 말하는 혼자 거함은 외적인 고독이 아니라 악의 침입과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께 인도받는 내적 상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는 오히려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던 가장 번성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가 유대교회에서도 표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을 몰아내고 혼자 거하는 모습은 주님의 교회가 악으로부터 분리되어 주님의 인도 아래 있는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에서는 홀로 사는 국민을 말하고,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는 모습을 말하며, 민수기의 발람의 예언에서는 백성은 홀로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라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들을 단순히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나 지리적 고립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거함이 주님의 교회가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인용합니다.

 

특히 민23:9민족들(nations)이 여기서는 악들을 의미한다는 설명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민족 자체를 악하게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구절의 속뜻에서 민족들이 악들을 나타내므로, ‘홀로 산다는 것은 악들과 뒤섞여 그 지배를 받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현실의 특정 민족이나 종교 집단과의 분리를 정당화하는 말씀으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것은 교회의 내적 상태입니다.

 

이제 이 설명을 창2:18에 적용하면 매우 중요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문자만 읽으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에서 혼자가 좋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139에 따르면 본래 혼자 거하는 은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의 인도를 받는 좋은 상태였습니다. 문제는 그 상태 자체가 좋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더 이상 그 상태를 원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 인도받는 천적 인간으로 혼자 거하기보다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천적 상태 자체를 좋지 않다고 판정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139은 그들이 이미 다른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AC.132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다시 말해 혼자가 나빠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혼자 거하는천적 상태를 원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의 원하는 사람은 이미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그가 원하는 것이 그에게 허락됩니다라는 문장은 이 변화의 심각성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인간에게 악을 넣어 주신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인간 쪽에서 주님의 인도만을 원하지 않는 욕구가 생겼고, 그 욕구 자체가 이미 악의 방향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인간이 원하는 것을 강제로 없애어 천적 상태에 붙들어 두시는 대신 그것이 허락되는 가운데 인간을 계속 이끌어 가십니다. 바로 그 과정에서 앞서 말한 proprium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따라서 AC.139는 창2:18혼자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번호입니다. ‘혼자는 고독이나 결핍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본래 주님의 인도 아래 악으로부터 구별되어 있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그 상태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창2:18의 전환점은 혼자 있는 인간에게 무엇이 부족했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천적 상태를 이상 원하지 않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서 찾아야 합니다. (AC.139)

 

 

 

AC.140, 창2:18, ‘돕는 배필 -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AC.140‘그를 돕는 배필’(a help as with him)이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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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8, 창2:18, ‘혼자와 돕는 배필 - 인간이 원하는 proprium’ (AC.138-141)

창2:18-25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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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7

창세기의 처음 장은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루는데, 교회는 처음 시기부터 멸망한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 합니다. 장의 앞부분은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이었던 가장 번성한 상태를 다루며, 여기서는 이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후손들을 다룹니다. The first three chapters of Genesis treat in genera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called man [homo] from its first period to its last, when it perished; the preceding part of this chapter treats of its most flourishing state, when it was a celestial man; here it now treats of those who inclined to their own, and of their posterity.

 

해설

AC.137은 지금까지 읽어 온 창세기 1장과 2,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3장을 하나의 큰 역사로 묶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의 처음 세 장이 전체적으로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그 태고교회를 그 처음 시기부터 마침내 멸망하는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까지 사람(man) [homo]이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람은 단지 한 개인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1-3의 속뜻에서는 태고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었던 사람들의 상태가 하나의 연속적인 역사로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 설명은 지금까지 우리가 창1과 창2를 읽어 온 흐름도 다시 정리해 줍니다. 1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이 단계적으로 묘사되었고, 2 앞부분에서는 그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된 상태가 다루어졌습니다. AC.137은 이 장의 앞부분을 태고교회의 가장 번성한 상태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번성했다는 것은 외적인 세력이나 물질적 풍요가 절정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니라, 태고교회가 천적 인간으로서 주님께 인도받고 퍼셉션으로 선과 진리를 알며, 모든 지혜와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질서 안에 있었던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제 창2 안에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납니다. AC.131에서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했고, AC.132-136은 창2:18-25가 바로 그 문제를 다룬다는 전체 개요를 제시했습니다. AC.137은 이 전환을 태고교회 전체 역사 속에 놓아 줍니다. 앞부분이 태고교회의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였다면, 이제부터는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창2 후반부는 창3의 타락 이야기와 단절된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태고교회의 상태가 변화해 가는 과정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후손들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한 사람의 어느 순간의 심리 변화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대를 따라 변화해 가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보고 있습니다. AC.127에서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를 탐구하려는 욕망이 태고교회 후손들의 타락의 원인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37은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되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과 그 후손들의 상태가 결국 창3까지 이어지는 큰 흐름 속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그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단계를 거쳐 멸망에 이르게 되는지는 앞으로의 본문을 따라가며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AC.137태고교회라는 말을 읽을 때 한 시점의 고정된 상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같은 태고교회 안에도 가장 번성한 상태가 있었고, 이후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그 후손들의 상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창1-3 전체가 그 처음 시기부터 마지막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흐름을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모두 천적 인간이었다는 식으로 모든 시기를 동일하게 묶어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자체에도 시작과 절정, 변화와 쇠퇴의 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창3을 읽을 때에도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3의 뱀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타락을 갑자기 등장한 한 개인의 단회적인 사건으로만 읽기보다, 이미 창2 후반부에서 시작된 태고교회 후손들의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어떻게 더 진행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37은 아직 그 구체적인 과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창1-3 전체가 태고교회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를 다루며, 바로 이 지점부터 이야기의 초점이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진 사람들과 후손들로 이동한다는 큰 구조를 붙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37은 짧지만 창1-3 전체의 독법을 결정하는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1의 거듭남, 2 앞부분의 천적 인간, 2 후반부에서 시작되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 그리고 앞으로 창3에서 전개될 태고교회의 쇠퇴와 멸망은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역사 안에 놓여 있습니다. 이 큰 틀을 기억하면 이제부터 상세히 설명될 창2:18-25도 단순히 최초 남녀의 창조와 결혼에 관한 이야기로만 읽지 않고, 태고교회가 가장 번성한 천적 상태에서 proprium으로 기울어 가기 시작하는 중대한 전환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137)

 

 

 

AC.138, 창2:18, ‘혼자와 돕는 배필 - 인간이 원하는 proprium’ (AC.138-141)

창2:18-25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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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6, 창2:18-25 개요, ‘프로프리움 안에 주입된 이노센스’ (25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25절) AC.136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이노센스가 이 proprium 안에 스며들게 되어, 그 proprium이 여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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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1-23)

 

AC.134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proprium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그에게 proprium 주어집니다. 이것은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21-23) Wherefore he is let into a state of his own, and an own is given him, which is described by the rib built into a woman (verses 21 to 23).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중의 뼈요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1-23)

 

해설

AC.134AC.131부터 시작된 짧은 개요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주님께서는 먼저 그들에게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자, 이제 그들은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도록 허용되고 proprium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창2:21-23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는 장면이 바로 이 과정을 묘사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들어가도록 허용되고주어집니다라는 두 표현입니다. 인간이 단순히 주님에게서 벗어나 자기 힘으로 proprium을 만들어 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proprium을 원하지만, 그 상태로 들어가는 것조차 허용되며 proprium도 그에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 본문을 읽을 때에는 인간의 proprium을 주님과 완전히 독립하여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왜 주님께서 이것을 허용하시며 어떤 의미에서 proprium주신다고 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기다려야 합니다.

 

또한 AC.134는 창2:21-23여자를 해석하는 방향을 미리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이 문맥에서 여자는 우선 자연적 성별로서의 여성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proprium을 묘사합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근거로 남성과 여성의 가치나 우열을 논하는 것은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속뜻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갈빗대가 여자로 만들어지는 장면 전체가 태고교회 후손들에게 proprium이 주어지는 내적 과정을 나타낸다는 것이 AC.134의 요점입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여자 proprium이라는 고정된 상응 공식을 만들어서도 안 됩니다. AC.103에서 이미 보았듯이 어떤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놓인 주제와 문맥에 따라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는 AC.131부터 계속 다루고 있는 주제가 태고교회 후손들의 proprium이므로, 2:21-23의 여자가 그 proprium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왜 갈빗대이며, 왜 그것을 여자로 만드셨는지는 아직 AC.134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이 대목에서는 proprium 주어졌다는 말을 곧바로 악이 주어졌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132에서도 허락된 proprium이라고 했고, AC.134에서는 다시 proprium 주어진다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성향이 이 과정의 배경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주님께서 그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고 어떤 proprium을 주시는지는 아직 설명 중에 있습니다. 따라서 proprium의 성질에 대한 최종 판단은 다음 번호들을 읽은 뒤 내려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32-134에는 하나의 분명한 순서가 있습니다. 인간은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그에게 주님께서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인간이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자, 그가 자신의 proprium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시고 그에게 proprium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갈빗대와 여자의 이야기는 인간의 요구를 주님께서 단순히 거절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요구를 주님의 질서 안에서 다루시는 과정으로 읽기 시작해야 합니다.

 

AC.134는 아직 그 과정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창2:21-23이 무엇을 묘사하는지만 먼저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갈빗대가 proprium인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주시는 proprium 인간이 처음 원했던 proprium 같은 것인가같은 질문을 열어 둔 채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이 질문들이 이어지는 본문을 읽게 하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AC.134)

 

 

 

AC.135, 창2:18-25 개요,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다’ (24절)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24절) AC.135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보이게 됩니다. (24절) Celestial and 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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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3, 창2:18-25 개요, ‘먼저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다’ (19-20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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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19, 20)

 

AC.133

그리고 먼저 주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19-20) And first it is given him to know the affections of good and the knowledges of truth with which he is endowed by the Lord; but still he inclines to his own (verses 1920).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생물을 부르는 것이 이름이 되었더라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19, 20)

 

해설

AC.133은 창2:19-20의 동물들을 사람에게로 이끌어 이름을 짓게 하시는 장면이 앞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먼저 요약합니다. AC.132에서는 사람이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proprium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을 다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에게 곧바로 proprium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그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들이 사람에게 있기는 하지만 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점입니다. 원문도 그것들이 주님에 의해 부여된 이라고 명시합니다. 이것은 AC.122-124에서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도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한 설명과 그대로 이어집니다. 인간에게 선을 사랑하는 애정이 있고 진리를 아는 앎이 있지만, 그것들의 최초 근원은 주님입니다.

 

따라서 창2:19-20에서 사람이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장면도 아직은 단순히 인간이 자연계의 동물들을 분류하고 명명하는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방향이 제시됩니다. AC.133이 먼저 해석의 열쇠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각각의 표현이 어떻게 풀리는지는 기다려야 하지만, 적어도 이 장면이 사람에게 주님께서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는 과정과 관련된다는 것은 이미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뒤에도 사람은 여전히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이 표현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proprium을 원하는 까닭이 주님께서 주신 것이 부족해서라고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선의 애정과 진리의 앎을 알게 되었는데도, 그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에게 고유한 어떤 것을 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proprium의 문제는 단순히 무지에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에게 속한 것으로 느끼고 살아가기를 원하는 성향과 연결되어 있음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 점에서 AC.133AC.123과도 의미 있게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으로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주님께서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이 사라진 뒤 proprium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원하는 방향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앞으로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AC.133에서는 아직 proprium 자체를 악이라고 단정하거나, 반대로 인간의 독립성과 자유를 위한 좋은 것으로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 본문이 말하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고 분명합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먼저 알게 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어집니다. 주님께서 이 기울어짐을 어떻게 다루시며 어떤 proprium을 허락하시는지는 이어지는 본문이 설명할 것입니다.

 

AC.133은 짧지만 창2:18-25의 진행 순서를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인간이 proprium을 원하자 곧바로 그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주님께서 이미 주신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고도 인간이 여전히 proprium으로 기울어지는 상태에서 다음 단계가 시작됩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중심 질문은 인간에게 무엇이 부족했는가?보다 주님께 받은 모든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원했는가?에 있습니다. (AC.133)

 

 

 

AC.134, 창2:18-25 개요,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다 - 인간에게 proprium이 주어짐’ (21-23절)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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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2, 창2:18-25 개요,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절) AC.132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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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

 

AC.132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자신의 proprium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존재이므로, 여기서는 그에게 허락된 proprium 다룹니다. (18) Since man is such as not to be content to be led by the Lord, but desires to be led also by himself and the world, or by his own, therefore the own which was granted him is here treated of (verse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

 

해설

AC.132는 창2:18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이하의 말씀을 해설하기 시작하면서, 그 중심 주제가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이라고 밝힙니다. 바로 앞 AC.131에서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32는 왜 이 문제가 생겼는지를 설명합니다. 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AC.128-130의 흐름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은 감각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신앙의 신비를 판단하려 했고, AC.129에서는 사람의 출발점이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AC.130에서는 그 질서가 뒤집힐 때 에덴과 네 강 전체가 어떻게 반대 상태를 나타내는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그 모든 설명의 밑바닥에 있는 인간의 성향을 proprium이라는 말로 붙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AC.132에서 특히 주의 깊게 보아야 할 표현은 그에게 허락된 proprium입니다. 앞 번호들만 읽으면 proprium은 단순히 제거되어야 할 악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인간에게 어떤 proprium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proprium을 단순히 자기 사랑의 정수 자체와 같이 하나의 부정적인 정의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다고 하는지, 그리고 그 proprium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이어지는 설명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 인도받는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 인도받는 의 대조는 인간이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128-129에서도 이성과 기억지식과 학문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자기 생명의 근원으로 삼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신의 능력을 통하여 자유롭게 살아 내는 것과, 자기 자신을 주님과 별개의 독립적인 근원으로 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122부터 이어진 흐름도 다시 눈에 들어옵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고 경작하고 지키지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23에서는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인간이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며, AC.130의 바로는 나의 강은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이제 AC.132에서는 이러한 자기 의 문제가 proprium이라는 용어 아래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창2:18 이하의 말씀을 곧바로 proprium 악하다는 결론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본문은 인간이 proprium을 원한다는 현실과, 그 때문에 어떤 proprium이 인간에게 허락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말합니다. ‘허락되었다는 한 단어 때문에라도 여기에는 단순한 정죄 이상의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이러한 성향을 어떻게 다루시며, 그것을 어떤 질서 안에서 인간의 삶과 연결하시는지가 앞으로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AC.132는 창2 후반부를 읽는 새로운 질문을 제시합니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다는 말씀은 여기서 단순히 사회적 고독이나 결혼의 필요를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만 인도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에 의해서도 인도받기를 원하는 인간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로 그 상태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인간에게 어떤 proprium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주님의 질서 안에 놓일 수 있는지가 이제부터 이어질 설명의 중심이 됩니다. (AC.132)

 

 

 

AC.133, 창2:18-25 개요, ‘먼저 주님께 받은 선의 애정들과 진리의 앎들을 알게 하시다’ (19-20절)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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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1, 창2:18-25 개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 (AC.131-137)

창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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