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25

 

18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God said, It is not good that the man should be alone, I will make him a help as with him.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 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And Jehovah God caused a deep sleep to fall upon the man, and he slept; and he took one of his ribs, and closed up the flesh in the place thereof. 22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And the rib which Jehovah God had taken from the man, he built into a woman, and brought her to the man. 23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2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25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2:18-25)

 

AC.131

여기서는 proprium(3)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다룹니다.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nclined to their own,3 is here treated of.

 

3. 라틴어 proprium 원문에서 사용된 말로서, 여기와 다른 곳들에서 자기 자신의 (own)이라는 표현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형용사 proprius 사전적 의미는 자기 자신의(ones own), 고유한(proper), 오직 자기 자신에게 속한(belonging to ones self alone), 특별한(special), 개별적인(particular), 특유한(peculiar) 등입니다. 이것의 중성형인 proprium 명사로 사용될 때에는 소유물(possession), 재산(property) 뜻하며, 또한 특유한 성질(a peculiarity), 특징적인 표지(characteristic mark), 구별되는 표지(distinguishing sign), 특성(characteristic) 뜻하기도 합니다. 영어 형용사 own 웹스터 사전에서 ‘... 속하는(belonging to), 전적으로 또는 특별히 ... 속하는(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특유한(peculiar)이라는 뜻으로 정의됩니다. 그러므로 영어의 own proprius 매우 정확하게 대응하며, 라틴어 명사 proprium 대응하도록 own 명사로 만들어 사용하면 원문에 매우 가까운 번역이 됩니다. [개정자] The Latin word proprium is the term used in the original text that in this and other places has been rendered by the expressionown.The dictionary meaning of propius, as an adjective, isones own,” “proper,” “belonging to ones self alone,” “special,” “particular,” “peculiar.The neuter of this which is the word proprium, when used as a noun meanspossession,” “property”; alsoa peculiarity,” “characteristic mark,” “distinguishing sign,” “characteristic.The English adjectiveownis defined by Webster to meanbelonging to,” “belonging exclusively or especially to,” “peculiar”; so that our wordownis a very exact equivalent of proprius, and if we make it a noun in order to answer to the Latin proprium, we effect a very close translation. [Reviser]

 

해설

AC.131은 매우 짧지만 창2의 속뜻에서 새로운 구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 주는 표지입니다. 앞에서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 에덴동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그리고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네 강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 지혜와 지성, 이성과 앎이 흘러오는 질서를 설명했습니다. 특히 AC.125-130에서는 그 질서를 지키는 것과 뒤집는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 설명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기 시작한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다루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기울기 시작했다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직 창3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타락 자체를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후손들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온전히 받아 사는 이전의 천적 상태에서 조금씩 자기 자신의 것으로 향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AC.131은 완성된 악의 상태를 선언하는 문장이 아니라, 내적인 방향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과정을 여는 문장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라는 표현도 지금 단계에서는 너무 많은 후대의 설명을 미리 끌어와 규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바로 앞의 흐름만으로도 기본적인 방향은 분명합니다. AC.122에서는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AC.123-124에서는 천적 인간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이어 AC.128-130에서는 주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려는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131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말은 이 흐름과 분리해서 읽을 수 없습니다.

 

특히 AC.130의 바로가 나의 강은 것이라 내가 나를 위하여 만들었다고 말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앞에서는 모든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의 근원이 주님이라고 했는데, 질서가 뒤집히면 사람은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AC.131은 이제 이러한 자기에게로 향함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설명할 준비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중심에는 단순히 어떤 잘못된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보다 생명의 근원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변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대조를 제공합니다. 지금까지 천적 인간의 질서는 인간의 능력들이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퍼셉션하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 안에서 누리고 사용하는 상태였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은 인간에게 생각과 의지와 활동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어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읽을 때에도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 자체와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상태를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AC.131은 한 문장으로 다음 단락들의 독법을 미리 정해 줍니다. 이제부터 나오는 창2:18 이하의 말씀을 단순히 남자에게 여자가 필요하여 배우자를 창조하신 이야기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후손들이 자기 자신의 으로 기울기 시작한 상태와 관련하여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주님께서 그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는 이어지는 번호들이 설명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앞서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결국 AC.131은 앞의 긴 논의를 다음 구간으로 넘기는 작은 경첩과 같습니다. AC.129출발점은 주님이어야 하고 자기 자신이어서는 된다는 결론과 AC.130의 뒤집힌 에덴의 모습이 이제 태고교회 후손들의 실제 상태 변화로 이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주님의 것으로 받아들이던 상태에서 자기 자신의 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변화가 앞으로의 핵심 주제가 됩니다. (AC.131)

 

 

 

AC.132, 창2:18-25 개요, ‘인간에게 허락된 proprium’ (18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18절) AC.132사람은 주님께 인도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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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30, 창2:17, ‘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질 때 에덴과 네 강의 질서가 뒤집힌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2:17) AC.130세상으로부터 지혜로워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 그의 ‘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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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2:16)

 

AC.125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eat of every tree) 퍼셉션으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나무(tree) 퍼셉션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인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기억에 간직되어 있는 것을 숙고할 그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즉시 지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거짓된 것이 나타나면 그것을 피했을 아니라 심지어 혐오하기까지 했습니다. 천사들의 상태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이러한 퍼셉션을 대신하여 후에는 이미 계시된 것으로부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cognitio) 이어졌고, 뒤에는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부터 그것을 아는 (cognitio) 이어졌습니다. Toeat of every treeis to know from perception what is good and true; for, as before observed, atreesignifies perception. They had from the Lord continual perception, so that when they reflected on what was treasured up in the memory they instantly perceived whether it was true and good, insomuch that when anything false presented itself, they not only avoided it but even regarded it with horror: such also is the state of the angels. In place of this percep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however, there afterwards succeeded the knowledge [cognitio] of what is true and good from what had been previously revealed, and afterwards from what was revealed in the Word.

 

해설

AC.125는 창2:16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말씀에서 먹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 은 퍼셉션으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것입니다. 앞의 AC.102-104에서 천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는 것과 퍼셉션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에 관한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25는 그것을 먹는다는 표현과 연결하여, 천적 인간이 그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실제로 받아들이고 아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으로부터 계속적인 퍼셉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기억이 필요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들이 기억에 간직되어 있는 을 숙고했다고 명시합니다. 즉 그들의 기억 안에도 여러 내용이 저장되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다만 무엇이 참되고 선한가를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근거가 기억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들어 있는 어떤 것을 생각하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그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즉시 지각했습니다.

 

이 점은 AC.80 이후 계속 따라온 기억지식의 문제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감각과 기억에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AC.121에서는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 것이 천적 질서라고 했습니다. AC.125에서도 태고교회 사람들은 기억에 간직된 것을 실제로 숙고합니다. 그러나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참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기억 속의 것을 퍼셉션의 빛 아래에서 살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문제는 기억의 존재가 아니라 무엇이 무엇을 판단하고 지배하는가 하는 질서입니다.

 

거짓된 것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피했을 뿐 아니라 혐오했다는 설명은 퍼셉션이 단순한 지적 판별 능력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참과 거짓을 머리로 구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거짓에 대한 정서적인 거부도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상태도 이와 같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은 현대적인 직감이나 순간적인 느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대한 내적 지각이며, 사랑과 삶의 상태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AC.125의 마지막 문장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영적 변화를 말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계속 유지된 것이 아니라, 그 뒤에는 이미 계시된 것으로부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cognitio)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고, 다시 그 뒤에는 말씀에 계시된 것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아는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사람에게 선과 진리를 알려 주시는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이 그것을 받아 아는 방식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으로 알았지만, 후대에는 주님께서 이미 계시하신 것을 통하여 알게 되고, 마침내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AC.123에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을 구별한 설명을 한층 더 구체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거기서 천적 인간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퍼셉션하기 때문에인정하지만, 영적 인간은 그것을 말씀으로부터 배웠기 때문에인정한다고 했습니다. AC.125는 그 차이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사라진 뒤 인간에게 계시와 말씀이 주어졌고, 사람은 이제 말씀에 계시된 선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으로부터 배우는 상태를 퍼셉션보다 못한 단순한 지식 상태로 폄하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퍼셉션을 잃은 후의 인간에게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알려 주시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자기 판단대로 무엇이든 취한다는 뜻과 정반대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 안에서 선과 진리를 알고 받아들입니다. 기억에 있는 것조차 그 퍼셉션 아래에서 판단합니다. 그리고 퍼셉션이 사라진 후에는 이미 주어진 계시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알게 됩니다. 이처럼 AC.125는 퍼셉션과 기억과 계시와 말씀의 관계를 한 문단 안에 압축하면서, 인간이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태에 따라 주님께서 주시는 방식으로 받아 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125)

 

 

 

AC.126, 창2:17, ‘신앙의 신비를 감각과 기억지식으로 탐구해서는 안 되는 이유’ (AC.126-130)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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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24, 창2:15, ‘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4지혜와 지성과 이성과 지식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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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2:11, 12)

 

AC.115

태고인들이 땅들(lands) 관하여 말할 그들은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가나안 땅과 시온산이 천국을 의미한다는 관념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장소들이 언급될 어떤 땅이나 산을 생각하기보다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 하윌라 (land of Havilah) 마찬가지입니다. 하윌라는 25:18에도 다시 언급되는데, 거기서 이스마엘의 아들들에 관하여 그들이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가는 길에 애굽 술까지 거주했다(dwelt from Havilah even unto Shur, which is before Egypt, as thou goest toward Assyria) 합니다. When the most ancient people spoke oflands,they understood what was signified by them, just as those at the present day who have an idea that the land of Canaan and Mount Zion signify heaven, do not so much as think of any land or mountain when these places are mentioned, but only of the things which they signify. It is so here with theland of Havilah,which is mentioned again in Genesis 25:18, where it is said of the sons of Ishmael, that theydwelt from Havilah even unto Shur, which is before Egypt, as thou goest toward Assyria.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술까지 이르러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25:18)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말씀에서 지성과 지성에서 흘러나오는 외에는 아무것도 지각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비손강이 하윌라 땅을 두른다(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두른다(compass) 말로 그들은 유입을 지각합니다. 또한 아론의 에봇 어깨에 있는 호마노를 금테로 둘렀을 때에도 (28:11), 그들은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함을 지각합니다. 이와 같은 예가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Those who are in a heavenly idea perceive from these words nothing but intelligence, and what flows from intelligence. So by tocompassas where it is said that the river Pishon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they perceive a flowing in; as also in the onyx stones on the shoulders of Aarons ephod being encompassed with ouches of gold (Exod. 28:11), they perceive that the good of love should inflow into the truth of faith.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보석에 새겨 테에 물리고 (28:11)

 

해설

AC.115AC.110에서 하윌라 이 마음을 의미한다고 한 설명을 더 깊게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태고인들이 땅들에 관하여 말할 때에는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의 독자에게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가나안 땅과 시온산을 예로 듭니다. 그것들이 천국을 의미한다는 관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들을 때 자연적인 땅이나 산 자체보다 그것이 의미하는 천국을 먼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윌라 땅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108에서 태고인들이 사람을 동산에,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강들에 비유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불렀다고 한 내용과 이어집니다. 태고인들에게 자연계의 사물과 장소는 영적인 실재와 단절된 이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윌라라는 지명을 접할 때에도 자연계의 특정 지역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내적인 것을 지각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창25:18의 하윌라를 인용하여 같은 지명이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창25:18의 하윌라와 술, 애굽과 앗수르에 관한 말씀에서 지성과 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을 지각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AC.115에서는 그 지명 하나하나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하윌라에서 술까지의 지리적 배열 전체에 의미를 하나씩 배정하기보다, 이러한 지명들이 천국적인 관념에서는 지성과 거기서 흘러나오는 것들에 관한 말씀으로 지각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어 설명의 초점은 비손강이 하윌라 온 땅을 두른다는 표현으로 옮겨 갑니다.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는 이 두름을 단순히 강이 어떤 지역의 둘레를 흐르는 모습으로만 지각하지 않고 유입으로 지각한다고 합니다. 앞의 AC.107에서 에덴에서 나오는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이고 그 강이 동산을 적시는 것은 지성을 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제 강이 땅을 두른다는 표현에서도 무엇인가가 다른 것 안으로 흘러들어 생명을 주는 질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유입을 아론의 에봇 어깨에 있는 호마노를 둘러싼 금테와 연결합니다. 앞의 AC.113에서는 금이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의미한다고 했고, AC.114에서는 보석들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것들을 표상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금이 호마노를 두르고 있다는 것은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명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과 진리가 나란히 놓여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유입된다는 관계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반복되어 온 천적 인간의 질서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랑과 떨어져 스스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으로부터 유입을 받아 살아 있습니다. 앞의 AC.112에서 지혜와 선은 사랑에서, 지성과 진리는 신앙에서 나오지만 결국 모두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선의 유입도 궁극적으로는 인간 자신의 선이 진리를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드는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115는 또한 말씀의 속뜻을 읽는 방식에 관해서도 중요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윌라’, ‘두른다’, ‘호마노’, ‘금테와 같은 표현을 각각 고립시켜 하나의 뜻만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한 문맥 안에서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를 봅니다. 특히 여기서는 두른다는 표현이 비손과 하윌라의 관계에서도, 금과 호마노의 관계에서도 유입이라는 질서를 드러냅니다. 자연적인 장면은 서로 다르지만 그 안에서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 그리고 지성 사이의 내적인 관계가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윌라 온 땅을 두르는 비손은 단순한 고대의 지리 묘사를 넘어, 천적 인간 안에서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이 지성과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드는 내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AC.115)

 

 

 

AC.116, 창2:13, ‘둘째 강 기혼 -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은 이해에 속한다’ (AC.116-117)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창2:13) AC.116‘둘째 강’(second river), 곧 ‘기혼’(Gihon)은 선과 진리,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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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4, 창2:11-12, ‘보석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4신앙의 진리는 말씀에서 ‘보석들’(stones)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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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2:10)

 

AC.108

태고인들은 사람을 동산(garden) 비유할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도 강들(rivers) 비유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렇게 비유하기만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불렀는데, 이것이 그들의 말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선지서들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때로는 그것들을 그렇게 비유하기도 하고 때로는 실제로 그렇게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when comparing man to agarden,also compared wisdom, and the things relating to wisdom, torivers”; nor did they merely compare them, but actually so called them, for such was their way of speaking. It was the same afterwards in the prophets, who sometimes compared them, and sometimes called them so. As in Isaiah:

 

10주린 자에게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어둠이 낮과 같이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같을 것이라 (58:10, 11) Thy light shall arise in darkness, and thy thick darkness shall be as the light of day, and thou shalt be like a watered garden, and like an outlet of waters, whose waters lie not (Isa. 58:1011).

 

이는 신앙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다룬 말씀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Treating of those who receive faith and love. Again, speaking of the regenerate: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2)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24:6) As the valleys are they planted, as gardens by the rivers side; as lignaloes2 which Jehovah hath planted, as cedar trees beside the waters (Num. 24:6).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Jeremiah: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17:7, 8) Blessed is the man who trusteth in Jehovah; he shall be as a tree planted by the waters, and that sendeth forth her roots by the river (Jer. 17:78).

 

에스겔에서는 거듭난 사람들을 동산과 나무에 비유하는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부릅니다. In Ezekiel the regenerate are not compared to a garden and a tree, but are so called: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7 뿌리가 물가에 있으므로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내가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시기하였느니라 (31:4, 7-9) The waters made her to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and sent out its channels to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e was made beautiful in her greatness, in the length of her branches, for her root was by many waters. The cedars in the garden of God did not hide her; the fir trees were not like her boughs, and the plane trees were not like her branches, nor was any tree in the garden of God equal to her in her beauty; I have made her beautiful by the multitude of her branches, and all the trees of Eden that were in the garden of God envied her (Ezek. 31:4, 79).

 

구절들에서 분명한 것은, 태고인들이 사람 또는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을 동산(garden) 비유할 그를 적셔 (waters) 강들(rivers) 덧붙였으며, 물과 강들로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들을 의미했다는 것입니다. From these passages it is evident that when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man, or the things in man, to agarden,they added thewatersandriversby which he might be watered, and by these waters and rivers meant such things as would cause his growth.

 

2. 라틴 tentoria, 텐트(tents), 얼핏 santalos 대한 미스프린트 같음 [편집자 ] The Latin is tentoria, “tents,seemingly a misprint for santalos. [Reviser]

 

해설

AC.108은 앞의 AC.107에서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의미한다고 한 것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보여 줍니다. 태고인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유했고, 그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 자라게 하는 지혜와 지혜에 속한 것들을 물과 강에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문학적 비유만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태고인들은 실제로 이러한 방식으로 말했으며, 그들의 이러한 말하는 방식이 이후 선지서에도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 설명은 태고교회의 언어가 오늘날의 언어와 상당히 달랐음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 우리가 어떤 사람을 동산이나 강가에 심은 나무라고 하면 대개 아름다운 시적 표현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태고인들에게 이러한 자연의 형상들은 사람 안의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동산이라고 하고, 그를 자라게 하는 것을 물과 강이라고 말하는 것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그들이 내적인 것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동산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은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신앙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다룬다고 합니다. 흑암 가운데 빛이 떠오르고 메마른 상태가 물 댄 동산과 같이 되는 모습은 사람 안에 생명이 공급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산이 스스로를 적시는 것이 아니라 물을 공급받는다는 점입니다. 앞의 AC.107에서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가 지성을 준다고 한 것처럼, 사람 안의 영적 생명도 그 사람 자신을 근원으로 삼아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공급받는 생명입니다.

 

24:6과 렘17:7-8에서도 같은 모습이 이어집니다. 거듭난 사람은 강가의 동산과 같고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으며, 그 뿌리를 강변에 뻗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인용하는 까닭은 단순히 성경에 동산과 강이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물과 강은 동산과 나무가 자라도록 하는 것들과 관계되며, 속뜻에서는 사람이 거듭나고 그의 내적 생명이 성장하도록 하는 것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물가에 심어진 나무의 모습은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고 계속 공급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에스겔의 말씀에서는 이 점이 더욱 뚜렷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거듭난 사람들이 동산과 나무에 단지 비유되는것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불린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물이 나무를 자라게 하고, 강과 수로가 들의 나무들에게 흘러가며, 뿌리가 많은 물가에 있기 때문에 나무가 크고 아름다워집니다. 이것은 AC.107에서 강이 동산을 적시는 것이 지성을 주는 것이라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물과 강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것들을 살아 있게 하고 성장시키는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AC.108에서는 아직 물과 강이 의미하는 모든 것을 세부적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장도 물과 강이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들을 의미한다고 정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물은 언제나 이것을 의미하고 강은 언제나 저것을 의미한다고 고정하기보다, 현재의 문맥에서 그것들이 사람의 영적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과 관계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바로 앞 AC.103에서 같은 표현의 의미도 현재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고 했으므로, AC.108의 여러 표상 역시 그 원칙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AC.108은 창2의 에덴동산이 단지 한 장소의 묘사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생명과 그 성장을 표현하고 있음을 말씀 전체의 언어를 통해 확인해 줍니다. 사람이 동산이라면 그 동산은 물을 받아야 하고, 나무가 자라려면 그 뿌리가 물가에 있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사야와 민수기와 예레미야와 에스겔을 함께 인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말씀의 표현 방식이 창2에만 고립되어 있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구절을 관통하는 핵심은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거듭나고 성장한다는 데 있습니다. (AC.108)

 

 

 

AC.109, 창2:10, ‘지혜와 지성은 사람 안에 나타나지만 오직 주님의 것이다’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9지혜와 지성이 사람 안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들은 오직 주님의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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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7, 창2:10,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 -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가 지성을 주다’ (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에덴에서 흘러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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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며, 태고교회에는 이것이 매우 알려져 있었습니다. 퍼셉션은 천사들에게는 매우 완전하여, 그들은 그것으로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오는지와 무엇이 자기 자신들로부터 오는지를 알아차리고 알며, 또한 자기들에게 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단지 그가 가까이 오는 것과 그의 생각 가운데 하나의 관념만으로 압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없고 양심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양심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매우 많은 사람은 양심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며, 퍼셉션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At this day it is unknown what perception is. It is a certain internal sensation, from the Lord alone, as to whether a thing is true and good; and it was very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perception is so perfect with the angels, that by it they are aware and have knowledge of what is true and good; of what is from the Lord, and what from themselves; and also of the quality of anyone who comes to them, merely from his approach, and from a single one of his ideas. The spiritual man has no perception, but has conscience. A dead man has not even conscience; and very many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and still less what perception is.

 

해설

AC.104는 지금까지 창2의 천적 인간을 설명하면서 여러 차례 등장했던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직접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하면서, 그것을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퍼셉션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이나 추론만으로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는 능력도 아니고, 막연한 느낌이나 직감도 아닙니다. 그 근원이 오직 주님으로부터온다는 것이 퍼셉션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이 설명은 앞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를 다룬 내용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그는 그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04에서는 그 지각이 무엇을 향하는지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은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감각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천적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진리와 선의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가는 생명의 질서와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퍼셉션이 태고교회에는 매우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사람이 당시 사람들이 경험한 퍼셉션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첫 문장에서 오늘날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현대의 직관이나 감정, 양심의 느낌을 그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내용, 곧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며 선과 진리에 관한 내적 감각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천사들에게서는 이 퍼셉션이 매우 완전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 뿐 아니라,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오고 무엇이 자기 자신들로부터 오는지도 알아차립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천사들이 선하고 참된 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천사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이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지각한다고 한 내용이 여기서는 천사들의 퍼셉션을 통하여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천사들은 자기들에게 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그의 접근과 그의 생각 가운데 단 하나의 관념만으로 안다고 합니다. 이 대목은 놀랍지만, AC.104는 아직 그 과정이나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천사들이 사람의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 읽는지까지 미리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이 사례가 보여 주려는 핵심은 천사들의 퍼셉션이 단순히 어떤 명제를 참이라고 판단하는 지적 능력보다 훨씬 깊고 완전하다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사람의 내적 상태의 질까지 지각할 수 있을 정도로 퍼셉션이 완전하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없고 양심이 있다는 문장은 AC.81에서 제시했던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영적 인간도 주님의 인도를 받지만 천적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퍼셉션으로 지각하는 것은 아니며, 그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AC.104는 아직 양심이 정확히 어떻게 형성되고 퍼셉션과 어떻게 다른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있고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구별을 그대로 받아 두고, 이어지는 설명을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에게는 양심조차 없다고 하는데, 여기서 죽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앞의 AC.81에서 설명한 것처럼 아직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AC.104는 퍼셉션과 양심을 통하여 앞에서 제시한 세 상태를 다시 보여 줍니다. 영적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는 양심조차 없고,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으며, 천적 인간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단순한 등급표로 읽기보다, 거듭남 가운데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인도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서로 다른 생명의 상태로 이해해야 합니다. (AC.104)

 

 

 

AC.105, 창2:9, ‘동산 중앙의 생명나무 -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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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은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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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2:7)

 

AC.97

생명이 호흡(breathing) (breath)으로 묘사되는 하나의 이유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를 통해 지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호흡은 그들의 후손에게서 점차 변화되었습니다.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태고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고, 저세상에 있는 이들도 그러하지만, 땅에서는 이제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또는 생명을 바람(wind) 비유한 이유입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의 거듭남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1) The reason why life is described by breathing and by breath is also that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perceived states of love and of faith by states of respiration, which were successively changed in their posterity. Of this respiration nothing can as yet be said, because at this day such things are altogether unknown.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well acquainted with it, and so are those who are in the other life, but no longer anyone on this earth, and this was the reason why they likened spirit or life to wind. The Lord also does this when speak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in John:1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사람도 그러하니라 (3:8) The wind bloweth where it listeth, and thou hearest the voice thereof, and knowest not whence it cometh, or whither it goeth; so is everyone that is born of the spirit (John 3:8).

 

시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So in David: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만상을 그의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33:6) By the word of Jehovah were the heavens made, and all the army of them by the breath of his mouth (Ps. 33:6).

 

29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104:29, 30) Thou gatherest their breath, they expire, and return to their dust;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2930).

 

(breath)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뜻한다는 것은 욥기의 다음 말씀에서도 있습니다. That the breath [spiraculum] is used for the life of faith and of love, appears from Job: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32:8) He is the spirit in man, and the breath of Shaddai giveth them understanding (Job 32:8).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33:4) The spirit of God hath made me, and the breath of Shaddai hath given me life (Job 33:4).

 

1, 원어에서는 바람(wind), (spirit), (breath) 모두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 In the original languages, wind, spirit, and breath are all expressed by the same word. [Reviser]

 

해설

AC.97은 생명이 왜 말씀에서 호흡으로 묘사되는지 또 하나의 이유를 설명합니다. AC.96에서는 코와 기쁜 향기가 퍼셉션과 관련되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번에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실제적인 상태를 근거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들은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를 통하여 지각했습니다. 따라서 창2:7은 단순히 육체가 호흡하기 시작했다는 자연적인 생명의 표현에 그치지 않고,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내적 생명과도 깊이 관련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태고교회의 호흡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를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없다고 명시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고도 합니다. 다만 태고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저세상에 있는 이들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AC.97에서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과 신앙의 내적 상태와 호흡의 상태 사이에 어떤 실제적인 관계가 있었다는 데까지입니다. 그 호흡의 방식이나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이 번호만으로 더 나아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 사람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에 비유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람과 숨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작용을 통하여 존재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생명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AC.97의 핵심 근거는 단순한 자연 관찰에 있지 않습니다. 태고 사람들이 자신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을 통하여 지각했던 경험과 말씀의 언어가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는 바람과 숨과 영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나타납니다.

 

3:8에서 주님께서 거듭남을 설명하시며 바람을 말씀하신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사람도 그러하니라는 말씀에서 주님은 바람을 통하여 성령으로 난 사람의 상태를 설명하십니다. AC.97에서 중요한 것은 바람의 자연적 특성을 하나하나 거듭남에 대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이 거듭남을 말씀하시면서 바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7의 생명의 숨과 요3:8의 바람은 모두 인간의 거듭나는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이어 시편의 두 구절은 숨과 영이 창조와 생명에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33:6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어지고 그 입의 기운으로 그 만상이 이루어졌다고 하며, 104:29-30에서는 주께서 호흡을 거두시면 피조물이 먼지로 돌아가고 주의 영을 보내시면 다시 창조되어 지면이 새롭게 된다고 합니다. 특히 후자의 말씀은 창2:7과 매우 가까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생명은 피조물이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받는 것이며, 주님께서 생명을 주심으로써 창조와 새롭게 됨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새로운 창조라고 한 AC.88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욥기의 두 구절은 이 이 특히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의미한다는 것을 뒷받침합니다. 32:8에서는 사람 안의 영과 전능자의 숨결이 이해를 주는 것으로 묘사되고, 33:4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지으시고 전능자의 기운이 그를 살리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94에서 생명의 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한 것은 창2:7 한 구절만을 고립시켜 얻은 해석이 아닙니다. 말씀 곳곳에서 주님의 영과 숨이 인간에게 이해와 생명을 주고, 창조하며, 새롭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동일한 용법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성경 인용의 언어적 배경을 압축해서 밝혀 줍니다. 원어에서는 바람’, ‘’, ‘이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이 표현들이 서로 연결되는 것은 우연한 비유의 반복이 아닙니다. 다만 이것 역시 세 단어가 언제나 모든 문맥에서 완전히 같은 의미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문맥에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따로 살펴야 합니다. AC.97이 보여 주는 핵심은 말씀의 언어 자체에서 바람과 영과 숨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2:7생명의 역시 그 넓은 의미망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AC.97)

 

 

 

AC.98, 창2:8, ‘에덴동산 -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 (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동산’(garden)은 지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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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창2:7, ‘코와 향기와 퍼셉션 -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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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5

천적 인간이 일곱째 (seventh day)이며, 따라서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하였다는 것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르카나입니다. 천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영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무지로 인해 사람들은 영적 인간을 천적 인간과 같은 것으로 여겨 왔지만,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AC.81에서 있습니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seventh day) 또는 안식일(sabbath)이라는 것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는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라는 사실로부터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seventh day,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 and called the sabbath, 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 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 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 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 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 as may be seen in n. 81. As regards the seventh day, 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seventh dayorsabbath,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 and therefore he says: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Mark 2:27),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 자체이시며 안식일 자체이심을 함축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식일,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라 합니다. 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 and the sabbath itself. 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 from him, a sabbath, 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는 뒤를 이은 모든 교회보다 더욱 주님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이후의 모든 주님의 가장 내적인 교회도 역시 안식일이며, 거듭난 사람도 천적 인간이 안식일입니다. 그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앞서 여섯 날의 싸움 또는 수고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유대교회에서 수고하는 날들과 안식일인 일곱째 날로 표상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이 법궤가 나아갈 때와 때에도 표상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법궤가 나아간 것은 싸움과 시험을 표상하였고, 법궤가 것은 평화의 상태를 표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법궤가 떠날 모세가 말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here treated of, 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 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 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 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 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 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 and by the seventh day, which was the sabbath; 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 and when it rested, 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 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 and therefore, when it set forward, Moses said: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10:35, 36) Rise up, Jehovah, and let thine enemies be scattered, and let them that hate thee flee before thy faces. And when it rested, he said, Return, Jehovah, unto the ten thousands of the thousands of Israel (Num. 10:3536).

 

그곳에서는 법궤가 여호와의 산을 떠나 그들의 곳을 찾기 위하여(to search out a rest for them) 갔다고 합니다. (10:33) It is there said of the ark that it went from the Mount of Jehovahto search out a rest for them(Num. 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길을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곳을 찾았고 (10:33)

 

[3] 천적 인간의 안식은 이사야에서 안식일로 묘사됩니다. The rest of the celestial man is described by the sabbath in Isaiah:

 

13만일 안식일에 발을 금하여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58:13, 14) If thou bring back thy foot from the sabbath, so that thou doest not thy desire in the day of my holiness, and callest the things of the sabbath delights to the holy of Jehovah, honorable; and shalt honor it, not doing thine own ways, nor finding thine own desire, nor speaking a word; then shalt thou be delightful to Jehovah, and I will cause thee to be borne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 and will feed thee with the heritage of Jacob (Isa. 58:1314).

 

천적 인간의 본성은 이와 같아서 그는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하며, 주님의 뜻이 그의 (desire) 됩니다. 이리하여 그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데, 이것이 여기서는 땅의 높은 곳에 올림을 받는 (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으로 표현되며, 동시에 외적인 평온과 기쁨을 누리는데, 외적인 평온과 기쁨은 야곱의 기업으로 양육되는 (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 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 which is hisdesire.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and 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 which is signified by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

 

해설

AC.85AC.84에서 제시한 천적 인간은 일곱째 이라는 아르카나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를 먼저 말합니다. 천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영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사람들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AC.81을 가리킵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신앙의 원리로부터 선과 진리를 인정하고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우는 사람이며,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인정하고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악과 거짓을 업신여기는 사람으로 구별되었습니다.

 

AC.85가 천적 인간을 일곱째 또는 안식일이라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천적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밝히기 위해 막2:28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를 인용합니다. 그는 이 말씀이 주님께서 사람 그 자체이시며 안식일 그 자체이심을 함축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안식일인 것은 그가 주님과 독립하여 스스로 안식의 상태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AC.85는 뒤에서 거듭난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안식일인 이유를 그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주님은 안식일 그 자체이시고 천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입니다. 이 구별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도 안식일,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라 합니다. 이로써 안식일의 속뜻은 단순히 일을 멈추는 날이라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그 근원은 주님 자신에게 있으며, 주님의 나라의 상태가 영원한 평화와 안식으로 묘사됩니다.

 

이 원리는 교회에도 적용됩니다. 여기서 다루는 태고교회는 그 뒤를 이은 모든 교회보다 더욱 주님의 안식일이었으며, 이후의 모든 주님의 가장 내적인 교회도 역시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되어, 모든 거듭난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될 때 안식일입니다. 이것은 AC.82에서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다고 했던 원리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안식에 앞서는 것이 있습니다. 여섯 날의 싸움 또는 수고입니다. 이것은 AC.84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에 이르면 모든 싸움이 그친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싸움과 안식의 질서가 유대교회에서 수고하는 날들과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상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제정되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이어지는 법궤의 인용도 바로 이 싸움과 안식의 대조를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법궤가 광야에서 나아간 것이 싸움과 시험을 표상하고, 법궤가 쉰 것이 평화의 상태를 표상했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민10:35-36에서 법궤가 떠날 때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라고 하고, 쉴 때에는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라고 한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자리에서는 대적이나 이스라엘의 수많은 종족 각각의 상응을 따로 풀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법궤의 나아감은 싸움과 시험, 쉼은 평화의 상태라는 인용 목적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10:33그들의 곳을 찾기 위하여라는 말씀도 같은 이유로 이어집니다. AC.85가 여기서 직접 강조하는 것은 법궤의 광야 여정과 쉼을 통하여 싸움과 안식의 질서가 표상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법궤가 앞서가는 것의 세부적인 상응이 무엇인지를 이 번호에서 새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3]에서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사58:13-14를 통하여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인용만 한 뒤 멈추지 않고 그 의미를 직접 풀이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85의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천적 인간의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행동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이 단지 외부에서 그에게 명령되는 뜻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AC.81에서 천적 인간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도 없는 것처럼 보이며 자유롭지만, 그의 보이지 않는 결박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한 설명을 한층 더 이해하게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 주님의 뜻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외부에서 강제로 시키는 명령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선하신 뜻이 그의 뜻이 되기 때문에 그는 그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간에게 더 이상 의지가 없다거나 인간이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문 자체가 주님의 선하신 뜻이 그의 이 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AC.85가 말하는 안식은 행동이나 의지가 사라지는 상태가 아니라, 천적 인간의 뜻이 주님의 선하신 뜻과 일치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결과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내적인 평화와 행복을 누리며, 이것이 땅의 높은 곳에 올림을 받는 으로 표현됩니다. 동시에 외적인 평온과 기쁨을 누리며, 이것이 야곱의 기업으로 양육되는 으로 의미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두 표현의 의미를 직접 밝혀 주므로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따라서 사58:13-14AC.85에 인용된 핵심도 분명합니다. 안식일의 외적인 규정을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의 안식이 자기 자신의 뜻을 따라 행동하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이 자신의 뜻이 된 상태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에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 외적인 평온과 기쁨이 있습니다.

 

AC.85 전체의 흐름은 하나로 이어집니다.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며, 주님의 가장 내적인 교회도 안식일이고, 거듭난 사람도 천적 인간이 될 때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입니다. 그 안식에 앞서 여섯 날의 싸움 또는 수고가 있으며, 이것이 유대교회의 수고하는 날들과 안식일, 그리고 법궤의 나아감과 쉼으로 표상되었습니다. 그리고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는 사58:13-14를 통하여 설명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하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뜻이 됩니다. 바로 이 상태에서 그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 외적인 평온과 기쁨을 누립니다. (AC.85 해설)

 

심화

1. 아르카나는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는가?’

 

AC.85 심화 1, ‘이 아르카나는 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는가?’

AC.85 심화1. ‘이 아르카나는 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는가?’ AC.85의 첫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고 그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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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6, 창2:2-3, ‘안식일의 저녁 -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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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4, 창2:2-3,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모든 싸움이 그친 안식의 상태다’ (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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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1)

 

AC.82

말씀은 사람이 이제 여섯째 (sixth day)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heaven) 그의 사람이고, (earth) 그의 사람이며, 그것들의 만상(the army of them) 사랑과 신앙 그것들에 관한 앎들인데, 이것들은 앞에서 광명체들과 별들로 의미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늘(heaven)이라 하고 사람이 (earth)이라 한다는 것은 장에서 이미 인용한 말씀의 구절들로부터 분명하며, 여기에 이사야의 다음 말씀을 덧붙일 있습니다. By these words is meant that man is now rendered so far spiritual as to have become thesixth day”; “heavenis his internal man, andearthhis external; “the army of themare love,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which were previously signified by the great luminaries and the stars. That the internal man is calledheaven,and the externalearth,is evident from the passages of the Word already cited in the preceding chapter, to which may be added the following from Isaiah: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3:12, 13) I will make a man more rare than solid gold, even a man than the precious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mite the heavens with terror,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its place (Isa. 13:1213).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6내가 말을 입에 두고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51:13, 16) Thou forgettest Jehovah thy maker,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but I will put my words in thy mouth, and I will hide thee in the shadow of my hand, that I may stretch out the heaven, and lay the foundation of the earth (Isa. 51:13, 16).

 

말씀들로부터 하늘(heaven) (earth) 모두 사람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말씀들이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지만, 말씀의 내적인 것들은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무엇이든 교회의 사람에게도 말할 있는 그러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결코 교회의 일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성전이 아닌 사람은 성전이 의미하는 , 교회와 천국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태고교회가 단수로 사람(man)이라 합니다. From these words it is evident that bothheavenandearthare predicated of man; for although they refer primarily to the most ancient church, yet the interiors of the Word are of such a nature that whatever is said of the church may also be said of every individual member of it, who, unless he were a church, could not possibly be a part of the church, just as he who is not a temple of the Lord cannot be what is signified by the temple, namely, the church and heaven.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man,in the singular number.

 

해설

AC.82부터 창2 본문의 상세 해설이 시작됩니다. 앞의 AC.73-80은 창2:1-17의 개요였고, AC.81은 이 장에서 다룰 천적 인간을 죽은 사람과 영적 인간에 비교하여 설명하는 배경이었습니다. 이제 AC.82는 창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를 직접 풀이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이 사람이 여섯째 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81의 첫 문장과 연결됩니다. 앞 장인 창1에서는 죽은 사람으로부터 영적 인간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루었고, 이제 그 과정이 여섯째 날의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여섯째 은 자연적인 하루가 아니라 거듭남을 통하여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형성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창2:1하늘은 그의 속 사람이고 은 그의 겉 사람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여기서 속 사람이 하늘이라고 해서 속 사람 자체를 천국과 단순히 동일시하거나, 겉 사람이 땅이라고 해서 겉 사람을 악한 부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다루는 사람은 이미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이며, 그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것들의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앎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앞에서 큰 광명체들과 별들로 의미되었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창2:1은 창1과 단절된 새로운 창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1에서 형성되어 온 영적 인간의 상태를 이어받습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그 만상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속뜻에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앎들이 형성된 상태와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을 자신의 해석으로만 제시하지 않고 말씀의 다른 구절들을 인용하여 뒷받침합니다. 앞 장에서 이미 여러 구절을 인용했다고 한 뒤, 여기에서는 사13:12-13과 사51:13, 16을 덧붙입니다. 이 두 인용에서 우리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금이나 오빌, 학대자, 시온 등 모든 표현의 속뜻을 새로 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AC.82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하늘이 사람에 대하여 서술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13:12-13에서는 사람이 언급된 문맥에서 하늘이 진동하고 땅이 흔들리는 것이 함께 말해집니다. AC.82는 이 구절을 인용한 뒤 말씀들로부터 하늘과 땅이 모두 사람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결론짓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왜 사람이 금보다 희귀한지, 하늘의 진동과 땅의 흔들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적 붕괴를 나타내는지까지 우리가 먼저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자리에서 이사야를 인용한 직접적인 논증 목적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안전합니다.

 

51:13, 16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여호와께서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시는 일이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그를 보호하시는 문맥과 함께 나타납니다. 이것 역시 AC.82에서는 하늘이 사람에게 서술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학대자가 무엇에 상응하는지, 그늘시온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 번호에서 따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두 인용 뒤에 AC.82의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원리가 나옵니다. 이 말씀들은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지만, 말씀의 내적인 것들은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무엇이든 교회의 사람에게도 말할 있는 그러한 본성을 지닌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번 두 이사야 구절만을 위한 설명에 그치지 않고, 왜 말씀의 속뜻에서 교회와 한 사람의 거듭남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결코 교회의 일부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자신이 교회라는 말을 외적인 교단이나 조직의 구성원 자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에서 교회를 이루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의 질서가 각 사람 안에도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관하여 말한 속뜻이 각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은 교회를 이루는 영적 실재가 그 교회의 구성원 안에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성전의 비유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의 성전이 아닌 사람은 성전이 의미하는 것, 곧 교회와 천국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핵심은 외적인 성전 건물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성전이 속뜻에서 교회와 천국을 의미한다면, 그것이 나타내는 영적 질서가 사람 안에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단수로 사람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가 역사적으로 한 개인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이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전체를 단수의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한 사람은 서로 전혀 관계없는 두 주제가 아니라, 말씀의 내적인 것들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AC.82에서 하늘은 사람이고 땅은 사람이다라는 설명과 사람이 교회여야 한다는 설명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교회에 관하여 말하는 하늘과 땅이 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유를 스베덴보리가 바로 뒤에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원리를 지나치게 확대하여 교회의 모든 역사적 사건이 언제나 개인의 심리 상태와 정확히 일대일로 대응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82가 말하는 것은 말씀의 내적인 것들이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을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는 본성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의미와 적용은 각각의 본문에서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 확인해야 합니다.

 

AC.82는 이렇게 창2:1의 짧은 말씀에서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힙니다. 사람은 이제 여섯째 날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고, 그의 속 사람은 하늘, 겉 사람은 이며, 그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앎들입니다. 그리고 말씀에서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각 사람이 먼저 자기 안에서 교회여야 그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태고교회를 단수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AC.82 해설)

 

심화

1. 주님은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시는가?

 

AC.82 심화 1, 왜 주님은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시는가?

AC.82 심화1. 왜 주님은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시는가? 사13:12에서 여호와께서는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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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창2:1,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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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는데, 앞 장이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룬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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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표상으로 표현했을 아니라, 그것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어 더욱 생명력 있게 하였는데, 이런 방식은 그들에게 더없이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스타일을 가리켜 한나는 예언 가운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 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 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 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이러한 표상들은 다윗의 시편에서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이라고 불립니다. (78:2-4) Such representatives are called in David, “Dark sayings of old(Ps. 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78:2-4)

 

창조와 에덴동산 등에 관한 모든 내용,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 스타일로,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나타납니다. 책들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내적 의미 안에 전혀 다른 것들이 담겨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순서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셋째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스타일은 태고교회에서 그토록 높이 존중되던 스타일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스타일처럼 연결된 역사적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없습니다. 내적 의미 안에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고, 그것들은 아름답게 연결된 질서를 따라 이어지며, 사람과 사람, 교회의 여러 상태, 하늘 자체를 다루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넷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로,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안에서는 왕으로서의 다윗이라는 인격 아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 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 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 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AC.66은 창세기 1장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말씀의 문체와 속뜻의 관계를 한층 넓게 보여 주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64-65에서는 말씀에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66은 말씀 전체를 모두 똑같은 외적 형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 둘째는 역사적 스타일,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 넷째는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입니다. 네 스타일은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AC.66의 관심은 결국 그 서로 다른 외적 형식 안에 어떻게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가에 있습니다.

 

첫째인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 온 창세기 앞부분과 직접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후대 사람이 자연물 하나를 보고 의도적으로 이것은 무엇을 상징할까?하고 해석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외적인 것을 말하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함께 생각하는 표현 방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표상들을 단순히 하나씩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만들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한 이유를 그것들에 더 큰 생명력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하며, 그런 방식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와 에덴동산을 비롯한 앞부분을 읽을 때, AC가 그것을 단순한 상징 목록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표상의 이야기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바로 이 문맥에서 한나의 삼상2:3이 인용되는데, 여기서는 잠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은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라고 되어 있는 반면, AC의 영어 인용은 높은 것을 말하라, 높은 것을! 옛것이 입에서 나오게 하라는 식으로 전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과 오늘날의 일반적인 번역은 개역개정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말을 금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AC의 영어 인용을 근거로 개역개정이 잘못되었다거나, AC가 그 구절의 진짜 번역을 제공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어 본문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여 개역개정 문구를 그대로 두되, 스베덴보리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인용 형태가 우리가 읽는 성경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와 AC.66의 논증에서 이 인용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시78:2-4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AC.66은 특별히 이러한 표상들을 다윗이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굳이 시편의 모든 세부 표현을 하나씩 새로운 상응으로 풀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의 역할은 첫째 스타일의 표상들이 예로부터내려온 것이라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78의 인용과 다음 문장은 함께 읽는 것이 좋습니다.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이라는 표현과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표상적 전승이라는 설명이 서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라면 상당히 큰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부터 아브람 이전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직접 계시받아 처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앞선 세대에게서 전해 받은 자료라고 보는 것인가?AC.66의 문장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합니다. ‘창조와 에덴동산 등에 관한 모든 내용,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제시하는 상당히 중요한 주장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그러므로 1-11 허구이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에서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이 문제는 AC의 창세기 앞부분 이해에 매우 중요하므로 별도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범위를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로 명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아주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즉 이 둘째 스타일에서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외적 역사를 지우지 않습니다.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내적 의미 안에 전혀 다른 것들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66의 둘째 스타일에서는 역사인가 상징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속뜻을 갖습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앞부분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에 대해서는 사실들이 문자 그대로라고 명시하는 반면, 그 이전 태고교회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문장을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66 하나만 가지고 창1부터 창11까지 각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세세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첫째와 둘째 스타일을 서로 다르게 설명하며, 아브람 이후의 둘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문자적 역사성을 명시적으로 확인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스타일이 태고교회에서 매우 높이 존중되던 스타일에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연결된 역사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서는 문자적으로 아무 뜻이 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곧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지만, 그 목적은 문자 자체를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그 단절된 표현들의 내적 의미 안에 깊은 아르카나와 아름답게 연결된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65에서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연속의 질서를 가진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도 직접 열거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상태, 하늘 자체를 다루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여기서 특히 마지막 표현은 앞으로 말씀의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을 곧 모든 성경 구절은 무조건 주님의 지상 생애에 대한 암호이다라는 공식으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AC.66은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여러 차원을 다루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을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관계는 실제 예언서 인용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넷째는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의 중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 다윗이라는 인격 아래에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을 다룬다고 합니다. 이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을 읽을 때 다윗의 역사적 인격과 개인적 언어를 곧 지워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 외적 형식 아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룬다는 것이 AC.66의 설명입니다. 따라서 시편의 를 만날 때 곧바로 모든 문장을 독자의 개인 감정으로만 읽는 것도, 반대로 문자적 화자를 아무 의미 없다고 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힌 것은 왕 다윗의 인격 아래 주님이 내적 의미에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보면 말씀의 속뜻이 언제나 똑같은 외적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스타일에서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자연적인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습니다. 역사적 스타일에서는 실제 역사적 사실들 안에 전체와 세부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언적 스타일에서는 외적으로 단절되어 보이는 표현들 안에 깊은 아르카나가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되고, 시편에서는 왕 다윗의 인격 아래 내적 의미로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속뜻이 있다는 하나의 원칙만 붙들고 모든 성경 본문을 동일한 방법으로 기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AC.66은 보여 줍니다.

 

그러나 네 스타일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통일성도 있습니다. 모두 말씀이며, 외적으로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안에는 문자에 다 드러나지 않는 내적 내용이 있습니다. AC.64에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했고, AC.65에서는 그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가 천사들에게 영광이라고 불렸습니다. AC.66은 이제 그 속뜻이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스타일 안에서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큰 윤곽으로 보여 줍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한 계시 수준처럼 읽는 것입니다. AC.66은 그런 서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스타일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하며, 예언적 스타일은 그 스타일에서 생겨났고, 시편은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 언어 사이에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것을 첫째가 가장 높고 둘째는 낮고 셋째가 다시 높다는 등급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각각 말씀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스타일입니다.

 

AC.66은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마치는 글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AC를 읽는 방법을 준비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첫째 스타일에 속하는 창조의 표상적 연속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 이후로 가면 둘째인 역사적 스타일을 만나게 되고, AC가 그 실제 역사 속의 모든 것에서 어떻게 내적 의미를 밝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예언서와 시편이 인용될 때도 그들의 서로 다른 스타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에는 속뜻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본문을 똑같은 상징 해독법으로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형식을 존중하면서 그 안의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성경과 AC의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먼저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도, 실제 역사의 스타일도, 예언의 스타일도, 시편의 스타일도 있습니다. AC는 그 차이를 없애거나 성경의 표현을 자기 체계에 맞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말씀 안에 어떤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따라서 AC.66이 가르치는 좋은 독법은 문자를 버리고 속뜻으로 가자가 아니라, ‘말씀의 외적 형식을 정확히 읽으면서 안에 주님께서 두신 깊은 뜻을 따라가자는 방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심화

1. AC 삼상2:3 인용은 개역개정과 이렇게 다른가?

 

AC.66 심화 1, 왜 AC의 삼상2:3 인용은 개역개정과 이렇게 다른가?

AC.66 심화1. 왜 AC의 삼상2:3 인용은 개역개정과 이렇게 다른가?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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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6 심화 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

AC.66 심화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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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창2 앞, 왜 말씀의 속뜻을 알려면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야 하는가?

AC.67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고, 또한 다른 삶의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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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창1, ‘영광’이라 불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 : 천사들의 지각

AC.65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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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속뜻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태고교회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사라지자, 아르카나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비교할 있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안에 담긴 행복을 느끼고 인식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내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내적인 것들, 속의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겉의 것들은 눈으로 보기만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겉의 것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생각을 속의 것들, 내적인 것들로, 그리고 거기서 천적인 것들로, 결국에는 그들의 모든 되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해줄 때에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누리는 행복이 바로 거기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understanding) 남자라 불렀고, 의지(will) 여자라 불렀으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 그것을 결혼(marriage)이라 불렀습니다. 교회로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로 인해 선에 대한 애정으로 교회를 가리켜 (daughter) 처녀(virgin), 시온의 처녀(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virgin of Jerusalem) 하였고, 또한 아내(wife) 부르게 되었습니다.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23절과 3 15절에서 보게 것입니다. What is meant bymale and female,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daughterandvirginas thevirgin of Zion,thevirgin of Jerusalemand also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아담이 이르되 이는 중의 뼈요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23)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머리를 상하게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것이니라 하시고 (3:15)

 

해설

AC.54는 창1:27의 마지막 표현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를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뜻에서는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창조를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남자와 여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태고교회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르카나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태고교회 사람들이 결혼과 자연계의 외적인 것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길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가 주의할 것은 AC.54가 자연적인 남녀나 실제 결혼을 부정하고 그것을 단지 인간 심리의 비유로 바꾸려는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실제 결혼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매우 큰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혼이라는 자연적 현실을 통해 더 내적인 결합을 보았습니다. 자연적인 결혼과 그 속뜻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 안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다는 것이 이번 글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혼의 행복을 지각했습니다. 오늘날 독자에게는 조금 낯선 표현이지만, 이 문장은 태고교회가 결합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바라보는 방식은 외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AC.54는 그들을 내적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외적인 것들을 눈으로 보았지만, 생각으로는 그것들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외적인 것 자체가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말은 자연계의 사물이나 삶을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요점은 외적인 것이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보면 그들의 생각은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으로 향했고, 내적인 것에서 다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이 흐름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응과 표상이라는 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좋은 사례입니다.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것만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 안에서 더 내적인 것을 보았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연계는 막다른 곳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생각을 그 자체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실재를 향하게 했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의 결혼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그보다 더 내적인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고,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바로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이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천국에 가면 이루어지는 남녀의 결혼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실제 남녀의 결혼과 아무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심리 현상으로만 이해해서도 곤란합니다. AC.54 자체에서는 이 용어의 전체 교리를 아직 펼치지 않습니다. 다만 태고교회 사람들이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을 더 높은 결합에서 오는 것으로 퍼셉션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앞으로도 AC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설명을 거쳐 스베덴보리는 마침내 창1:27남자와 여자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힙니다.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를 여자라 불렀으며, 둘이 하나로 작동할 그것을 결혼이라 불렀다.이것이 AC.54의 핵심 문장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현실의 모든 남성은 이해를 대표하고 모든 여성은 의지를 대표한다는 심리적 성별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이해와 의지입니다. 한 인간 안에 있는 두 기능을 남자와 여자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성에게는 이해만 있고 여성에게는 의지만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AC.54의 속뜻에서 한 영적 인간 안에 이해와 의지가 있고, 그 둘의 관계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현실 남녀의 지적 능력이나 감정적 성향을 분류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을 지나치게 기계적인 사전처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1:27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태고교회의 결혼에 대한 인식과 영적 인간 안의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연결합니다. 이후 다른 문맥에서 남자’, ‘여자’, ‘남편’, ‘아내등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AC.54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해와 의지가 각각 따로 있다는 사실보다 둘이 하나로 작동할 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해와 의지의 구별은 결합을 위한 구별입니다. 둘이 없어져 하나의 기능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53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AC.53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4에서는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할 그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앞에서는 둘의 질서를 구별했다면 이번에는 둘의 결합에 시선이 놓입니다.

 

그렇다고 이해에 들어온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사랑이 되면 그것이 결혼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거듭남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특히 영적 인간의 진행을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표현일 수 있지만, 앞의 AC.52-53에서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4의 더 근본적인 요점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한다는 데 있지 않고,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우리가 앞에서 보아 온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생명은 한쪽 기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AC.54 자체는 이해 = 진리 = 신앙’, ‘의지 = = 사랑이라는 모든 대응 관계를 한꺼번에 체계화하는 글은 아닙니다. 지금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만큼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스베덴보리는 이 태고교회에서 하나의 언어 습관이 비롯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교회 자체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처녀’, 예를 들어 시온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라고 불렸으며 또한 아내라고도 불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교회가 여성적 표현으로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여기서도 교회 = 여자라는 하나의 고정된 공식만 기억하기보다 왜 그런 표현이 사용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54가 직접 밝히는 이유는 선에 대한 애정입니다.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과 관련되기 때문에 딸·처녀·아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창2:23과 창3:15에서 더 보게 될 것이라고 직접 예고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아내로서의 교회’, ‘여자와 여자의 후손’, ‘남편과 아내의 모든 상응을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 자체가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하므로 그때까지 남겨 두는 것이 오히려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좋은 독법입니다.

 

AC.54에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상응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외적인 것을 보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을 생각했고, 거기서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주님께로 생각이 향했습니다. 상응은 그들에게 외워 둔 상징 사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AC를 읽으며 상응을 공부할 때에도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고 외우는 것만으로 태고교회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의 시선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께 향합니다. 상응의 목적은 자연적인 상징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내적인 것과 주님을 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서 결혼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들의 실제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 행복의 근원을 더 높은 천상의 결혼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로 다른 둘이 각자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채 하나로 작동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AC.54의 중심을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정적이다라는 자연적 성별 구분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실제 결혼은 중요하지 않고 인간 내면의 이해와 의지만 중요하다고 읽어서도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자연적인 결혼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는 귀한 표상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결국 AC.54는 창1:27남자와 여자를 통해 인간 안의 두 기능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와 의지는 구별되지만 하나로 작동할 때 결혼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 결혼의 언어는 인간 개인 안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를 ’, ‘처녀’, ‘아내라고 부르는 말씀의 표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결합의 시선은 더 깊이 들어가면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모든 이셨던 주님께 향합니다.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심화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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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창1:28, ‘결혼의 열매 :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서 생육과 번성이 일어나는 거듭남의 확장'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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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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