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9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뒤 곧바로‘이에대해서는드릴말씀이많지만,아직은때가아닙니다’라고 합니다.무엇을 그렇게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며,왜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우리가 대신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AC.49는‘아직은때가아니다’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독자들이감당할수없기때문’, ‘신비주의에빠질위험이있기때문’, ‘섭리적으로감추어두셨기때문’이라고 이유를 확정한다면 그것은AC.49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우리의 추론이 됩니다.
이 문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첫째,스베덴보리에게는‘태고교회사람들과주님께서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말씀을나누셨고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는 문제에 관하여 여기 기록한 것보다 훨씬 더 말할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둘째,그는 그것을AC.49에서는 아직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의도적으로 유보했다는 것입니다.이 두 가지 이상을 이 한 문장만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이 아무 의미 없는 편집상의 메모라는 뜻도 아닙니다.오히려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설명하지 않습니다.지금 설명하려는 본문의 중심에 필요한 만큼 말하고,다른 주제는 뒤로 남겨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AC.49의 중심은 태고교회의 현현 방식 자체를 상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왜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사람’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문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고 한 직후‘이러한이유로그들은주님외에는누구도사람이라고부르지않았다’고 이어집니다.따라서AC.49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태고교회와 주님의 교통에 관한 모든 세부가 아니라, ‘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는 사실과 그것이 태고교회의‘사람’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자연계의 대화 장면처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AC.49는 주님께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지만,그 현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각되었는지,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했는지,얼마나 자주 그러했는지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영적눈으로보았다’, ‘내적시야가열렸다’와 같은 세부를AC.49의 설명인 것처럼 덧붙이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영계 경험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및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그것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의‘얼굴과얼굴’교통이 정확히 같은 방식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서로 관련하여 연구할 수 있는 주제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아직은때가아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가장 안전한 답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주제에는더말할것이많이있지만,지금이자리에서는그것을다루지않겠다.’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그가 직접 밝히지 않았으므로 열린 채로 두는 것입니다.이것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는 독법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유보가AC.49의 중심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놀라운 영적 경험 자체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습니다.그것을 짧게 언급하고 곧바로 더 중요한 문제,곧‘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로 돌아갑니다.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을‘사람’이라고 불렀고,자기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사람의것’이라고 했습니다.AC.49에서 지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AC를 읽을 때에도 좋은 원칙이 됩니다.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완성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흥미로운 한 문장을 만났다고 해서 관련 교리를 모두 끌어와 그 빈칸을 채우기보다, ‘지금이글이말하는만큼’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렇게 읽으면AC의 긴 흐름 속에서 어떤 주제가 처음에는 짧게 언급되고 이후 점차 자세해지는 과정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드릴말씀이많지만,아직은때가아닙니다’는 신비한 비밀을 암시하므로 우리가 그 내용을 추측해야 한다는 초대가 아닙니다.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스베덴보리 자신이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고 경계를 그은 문장입니다.그 경계를 존중하면서AC.49가 지금 밝히는 핵심,곧 주님이 최고의 뜻에서 유일한‘사람’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는 데 집중하는 것이 이 문장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창1:26)
AC.49
태고교회,곧그교회의사람들과주님께서는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말씀을나누셨는데,그때주님은사람의모습으로나타나셨습니다.이에대해서는드릴말씀이많지만,아직은때가아닙니다.이러한이유로,태고교회사람들은주님외에는누구도‘사람’(man)이라는호칭으로부르지않았습니다.그들은주님에게서나온것들만을‘사람’(men)이라고했고,자기자신을그호칭으로부르는일은하지않았습니다.오직자기안에서인식된것들,곧주님에게서왔다고퍼셉션된모든사랑의선과신앙의진리만을‘사람의것’(ofman)이라했습니다.그것들은주님에게서나왔기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These they said were “of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예언서들에서‘사람’(man)과‘인자’(thesonofman)는최고의뜻으로는주님을뜻하고,속뜻으로는지혜와총명을뜻하며,따라서거듭난모든사람을뜻하게됩니다.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of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As in Jeremiah:
이사야에서‘사람’(man)은속뜻으로는거듭난사람을,최고의뜻으로는유일한사람으로서의주님을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다니엘에게나타나셨을때에는‘인자’(thesonofman),곧사람이라일컬음을받으셨습니다.이는같은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of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4] 주님께서는복음서에서도자신을자주‘인자’(thesonofman),곧사람이라하시며,다니엘에서와같이영광가운데오실것을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of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여기‘하늘구름’(Thecloudsofheaven)은말씀의문자적의미를뜻하고,‘능력과큰영광’(powerandgreatglory)은말씀의속뜻을뜻합니다.이속뜻은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오직주님과그분의나라만을가리키며,바로여기서속뜻의능력과영광이나옵니다. The “cloudsof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andgreat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는 창1:26의 ‘우리가사람을만들고’에서 이제 ‘사람’이라는 말 자체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앞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영적인간’이며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사람’이라고 하며, 더 근본적으로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AC.49의 대답은 매우 강렬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자기들 자신조차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당황스러운 말입니다. ‘그러면인간은사람이아니라는뜻인가?’ 그러나 AC.49가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이나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과 태고교회의 영적 인식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참된 사람됨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자기 안에서 ‘사람의것’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AC.49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사랑의모든선’과 ‘신앙의모든진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단순히 사람이 선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들이 ‘주님에게서왔다고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람의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주님에게서나왔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48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9에서는 같은 원리가 ‘사람됨’에 적용됩니다.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가리키며, 속뜻에서는 주님에게서 지혜와 총명을 받아 거듭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만이참사람’이라는 말을 인간을 낮추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사람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생명을 만들어 내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갑니다. 따라서 이 말의 초점은 ‘누가인간자격이있는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참된영적생명의근원이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49의 첫 문장에는 또 하나 매우 놀라운 내용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해 ‘많이말할수있지만아직은때가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상상하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과, 바로 이것이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유보 문장은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일으키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사람’과 ‘인자’는 ‘최고의뜻’에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에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모든 성경 인용을 읽는 열쇠입니다.
렘4:23,25에서 예레미야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 빛이 없고 ‘사람이없다’고 말합니다. AC.49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사람’이라는 말이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서 ‘사람’의 속뜻을 지혜와 총명, 따라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사람이없다’는 표현 역시 그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함께 나오는 ‘공중의새가다날아갔다’는 표현도 앞의 AC.40에서 새가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된다고 설명한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49는 여기서 예레미야 전체의 황폐 상태를 단계별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세밀하게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45:11-12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가땅을만들고그위에사람을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속뜻의 ‘사람’을 거듭난 사람으로, 최고의 뜻의 ‘사람’을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과 연결합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자연계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의 ‘사람’이라는 표현에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겔1:26은 주님께서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보여 주는 직접적인 예로 인용됩니다. 에스겔은 보좌 위에 ‘사람의모양같은’ 형상을 봅니다. AC.49는 이 환상의 보좌나 남보석 등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태고교회사람들에게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고 한 것이 예언자들의 환상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최고의 뜻에서 ‘사람’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논증에 사용됩니다.
단7:13-14에서는 그 표현이 ‘인자’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니엘에게 보이신 분이 ‘인자’, 곧 ‘사람’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같은 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인자의 왕국과 권세에 관한 모든 세부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자’라는 호칭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인용의 직접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복음서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자주 ‘인자’라고 부르셨으며, 마24:30에서는 다니엘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49는 ‘사람’이라는 주제와 함께 말씀의 문자 의미와 속뜻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짧게 엽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구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큰영광’이 말씀의 속뜻을 뜻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오직주님과그분의나라만을가리키기’ 때문이며, 바로 거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AC.49가 직접 말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속뜻을깨닫는순간곧인자의재림이일어난다’는 식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이 확실히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심리나 도덕적 교훈을 흥미롭게 찾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사람’ 역시 결국 인간 자신에게서 설명이 완성되지 않고,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형상의 원형이신 주님을 보아야 한다는 방향이 여기서 열립니다.
이 점에서 AC.49는 앞의 AC.48과 다음 글들을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49는 곧바로 인간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먼저 주님을 바라봅니다.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 참으로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도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위대함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하는 사람됨과 관계됩니다.
동시에 여기서 ‘거듭난사람만사람이고다른사람은사람이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사람의 사회적 가치나 존엄을 분류하는 글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이 최고의 뜻과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글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스베덴보리의 매우 깊은 인간론을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는 주장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결국 AC.49가 말하는 ‘사람’의 비밀은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 안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소유라고 여기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을 ‘사람’이라 불렀고, 주님에게서 온 것들만을 ‘사람의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서의 ‘사람’과 ‘인자’, 에스겔과 다니엘의 사람 형상, 복음서의 인자, 그리고 말씀의 구름과 영광까지 이어지는 모든 인용은 결국 이 중심을 향합니다.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의 참된 지혜와 총명과 사람됨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깁니다.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을 경험합니다. 국기가 한 나라를 나타내고, 왕관이 왕권을 나타내며, 결혼반지가 부부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표상’은 사람이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상징보다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인물이나 장소, 사물이나 행위가 ‘표상한다’고 할 때에는 그 외적인 것이 말씀 안에서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제사는 문자적으로는 실제로 행해진 종교의식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제사들이 주님과 주님께 속한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라는 외적인 의식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상적 기능을 합니다.
이 점에서 ‘표상’과 단순한 ‘비유’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는 어떤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을 끌어와 비교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표상은 단지 설명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문학적 장치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이 실제로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상하도록 말씀 안에 배열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집트와 가나안, 성막과 성전, 제사와 절기 같은 것들이 문자적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것이 표상적 의미를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자적 이야기나 역사적 차원을 곧바로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상한다’는 말의 핵심은 외적인 것 안에 그것이 나타내는 더 내적인 것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그 문자가 나타내고 있는 영적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에서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것을 몸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과 그 안의 나무와 강, 뱀과 열매 같은 것들도 이후 AC의 해설을 따라가면 각각 태고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에 관한 것을 표상하고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임의로 ‘이것은이것을상징한다’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질서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상응과 속뜻의 연결을 따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AC.4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가장작은표현하나까지도’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고,의미하며,그안에품고’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문장이 앞으로 AC에서 ‘표상’이라는 말을 수없이 만나게 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이 단지 자연계의 대상들로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에 관한 영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 ‘외적인것이더내적인것을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표상이 자의적인 상징 놀이가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각각의 표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해당 문맥에서 하나씩 확인해 가야 합니다. (AC.4심화1)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5
태고시대를살았던사람들은이해와의지에속한것들을이렇게상징으로표현했습니다.그래서선지서들,그리고구약말씀전체에서보면늘서로다른동물들을가지고같은걸표현하는데요,짐승에는두종류가있습니다.해롭기때문에악하다하는짐승들이있고,해를끼치지않기때문에선하다하는짐승들이있지요.이때사람안의악들은곰이나늑대,개같은해로운짐승들로,그리고반대로선하고온순한것들은암송아지나양,어린양같은짐승들을가지고표현하는것이지요.여기이본문에서말하는‘짐승’(beasts)은선하고온순한짐승들이며,따라서애정들을뜻합니다.이는이본문이거듭나고있는사람들에대해다루고있기때문입니다.사람안에서몸과더가까이연결된더낮은것들은‘땅의짐승’(wildanimalsofthatearth)이라고하는데,이것들은욕정(cupidities)과쾌락(pleasures)을뜻합니다. Those who lived in the most ancient times thus signified the things relating to the understanding and to the will;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and constantly in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the like things are represented by different kinds of animals.Beasts are of two kinds; the evil, so called because they are hurtful; and the good, which are harmless.Evils in man are signified by evil beasts, as by bears, wolves, dogs; and the things which are good and gentle, by beasts of a like nature, as by heifers, sheep, and lambs.The “beasts” here referred to are good and gentle ones, and thus signify affections, because it here treats of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The lower things in man, which have more connection with the body, are called “wildanimalsofthatearth,” and are cupidities and pleasures.
해설
AC.45는 창1:24-25에 등장하는 여러 짐승이 왜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뜻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의 AC.44에서 스베덴보리는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를 주로 이해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고, 이제 여섯째 날 땅에서 나오는 생물들을 의지에 속한 것들과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AC.45는 그 가운데 특히 ‘짐승’이라는 표현에 초점을 맞춥니다.
첫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태고시대’ 사람들의 표현 방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했고, 이러한 표현 방식이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단순한 문학적 비유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AC.45의 관점에서는 서로 다른 동물의 성질이 인간 안의 서로 다른 내적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태고시대’라는 말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말을 들으면 흔히 석기 시대나 원시 인류를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관심을 두는 것은 고고학적인 시대 구분이 아니라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시대사람들이이렇게표현했다’는 말을 곧바로 ‘동굴에서살던원시인들이동물그림으로생각을표현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AC초반뿐 아니라 앞으로 태고교회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AC.45는 짐승을 크게 두 종류로 구별합니다. 해를 끼치기 때문에 악하다고 하는 짐승과,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에 선하다고 하는 짐승입니다. 그리고 사람 안의 악들은 곰, 늑대, 개와 같은 해로운 짐승들로, 선하고 온순한 것들은 암송아지, 양, 어린양과 같은 짐승들로 표현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짐승’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동물이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문맥에 놓이는가에 따라 표현되는 내적 상태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말씀의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주의점이기도 합니다. ‘짐승=악’, 또는 반대로 ‘짐승=애정’이라는 하나의 고정된 대응표만 만들어 모든 구절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45자체가 짐승에는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같은 동물 이미지라도 그것의 성질과 문맥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앞의 AC.42에서 큰 바다짐승이 창조의 좋은 질서 안에서도 등장하고 선지서의 부정적인 문맥에서도 사용되었던 것과 비슷한 원리입니다.
그러면 창1:24-25에 나오는 짐승들은 어느 쪽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다루는 짐승들은 ‘선하고온순한것들’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유도 직접 밝혀 줍니다. 지금 본문이 ‘거듭나고있는사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문맥의 짐승들은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의 거듭남이 단지 사람이 무엇이 참인지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의 의지와 애정까지 새로워지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애정’이라는 말을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과 같다고 생각하면 부족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애정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마음이 어디로 기울어지는가와 관계됩니다. 그래서 의지에 속한 것을 설명할 때 동물의 이미지가 사용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AC.45자체는 여기서 ‘동물이움직이므로애정도인간을움직인다’는 식의 상세한 이유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선 이 글이 직접 밝히는 것, 곧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이 거듭나는 사람 안의 애정들을 뜻한다는 데 머무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에 이르면 조금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안에서몸과더가까이연결된더낮은것들’을 ‘그땅의들짐승’이라고 부르며, 이것들이 ‘욕정과쾌락’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이 본문의 짐승들이 선하고 온순하며 애정을 뜻한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욕정과 쾌락이 등장하는지 의아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의지에 속한 것들 안에서도 차이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모든 의지적인 것이 같은 수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습니다. AC.45는 바로 그것들을 ‘욕정과쾌락’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짧은 문장만으로 ‘욕정은본래중립적이므로없앨필요가없고방향만바꾸면된다’거나, 반대로 ‘몸과관련된모든쾌락은악하므로제거해야한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둘 다 지나갑니다. AC.45는 여기서 그러한 거듭남의 구체적인 처리 방법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욕정’과 ‘쾌락’을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구’나 ‘즐거움’과 그대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고 쉬고 아름다운 것을 즐기는 모든 자연적 욕구와 즐거움을 이 한 문장 때문에 악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고,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욕정’을 단순히 선하게 전환할 수 있는 중립적인 에너지라고 설명해서도 안 됩니다. 앞으로 AC가 인간의 자연적인 것과 악한 욕망, 그리고 거듭남의 질서를 더 자세히 다룰 때 그 차이를 문맥에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5의 중심은 오히려 더 단순합니다. 말씀의 동물들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표현할 수 있으며, 해로운 동물들은 악한 것들을, 선하고 온순한 동물들은 선한 것들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지금 창조의 여섯째 날은 거듭나는 사람을 다루기 때문에 여기 등장하는 선하고 온순한 짐승들은 그의 선한 애정들을 뜻합니다. 동시에 사람 안에는 몸과 더 가까이 연결된 낮은 것들도 있으며, AC.45는 그것들을 욕정과 쾌락이라고 구별하여 언급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AC.44와 AC.45의 연결도 선명해집니다. AC.44에서는 말씀을 ‘듣는’ 이해와 그것을 ‘행하는’ 의지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5에서는 그 의지 쪽에 속한 것들이 구체적으로 ‘애정’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거듭남은 무엇이 참인지 아는 이해만 새로워지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며 사랑하는가 하는 의지와 애정의 영역까지 새로워지는 일입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에 땅 위의 생물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창1:14-17)
AC.32
사랑과신앙을처음에는함께‘큰광명체들’(greatluminaries)이라하고,그다음에는사랑을‘더큰광명체’(greaterluminary),신앙을‘더작은광명체’(lesserluminary)라합니다.또한사랑을가리켜서는‘낮을다스린다’(rulebyday)하고,신앙을가리켜서는‘밤을다스린다’(rulebynight)고합니다.이런내용이바로아르카나(arcana)인데,특히이마지막시대에숨겨져있는것을이제제가설명해도좋다는주님의신적자비(theLord’sDivinemercy)가있었습니다.이아르카나가특히이마지막시대에가려져있는이유는,지금이세대의종말(theconsummationoftheage)이기때문이며,이때에는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기때문입니다.이는주님께서복음서에서다음과같이친히예고하신바와같습니다.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luminary,” and faith a “lesserluminary”;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by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bynight.”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여기서‘해’(sun)는사랑,곧어두워지는사랑을,‘달’(moon)은신앙,곧빛을내지못하는신앙을,‘별들’(stars)은신앙에관한지식들(theknowledgesoffaith),곧하늘에서떨어지는것들을뜻하며,이것들이바로‘하늘의권능들’(virtuesandpowersoftheheavens)입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which is darkened;by the “moon” faith,which does not give light;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which fall from heaven,and which are the “virtuesandpowersoftheheavens.”
[2] 태고교회는사랑자체외에다른어떤신앙도알지못했습니다.천적천사들역시사랑에속한신앙외에는어떤신앙도알지못합니다.온천국은사랑의천국이며,천국에는사랑의생명외에다른생명이없습니다.모든천국의행복이여기에서나오는데,그크기는어떤말로도설명할수없고어떤인간의생각으로도결코상상할수없습니다.사랑의영향을받는이들은마음으로주님을사랑하지만,동시에모든사랑과,그결과모든생명,곧사랑에서만나오는모든생명과모든행복이오직주님에게서만온다는사실을알고,고백하며,지각합니다(perceive).그들은자신에게서나오는사랑이나생명이나행복은조금도없다는것을분명히압니다.모든사랑이주님에게서온다는사실은주님의변화산사건에서큰광명체,곧‘해’(sun)로도표현되었습니다.기록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love the Lord from the heart,but yet know,declare,and perceive,that all love,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얼굴은가장안쪽의것들을뜻하고,옷은거기서나오는것들을뜻합니다.따라서주님의신성(theLord’sDivine)은‘해’(sun),곧사랑으로,그의인성(hishuman)은사랑에서나오는지혜,곧‘빛’(light)으로상징되었습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해설
AC.32는 넷째 날의 두 광명체를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앞의 AC.30-31에서 사랑과 신앙이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왜 사랑이 ‘더큰광명체’이고 신앙이 ‘더작은광명체’인지, 그리고 왜 이 사실이 자신의 시대에는 특별히 가려진 아르카나였는지를 설명합니다. 핵심은 사랑과 신앙이 서로 독립된 두 요소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하나의 질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큰광명체들’이라고 부르지만, 곧 사랑을 ‘더큰광명체’, 신앙을 ‘더작은광명체’라고 구별합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고 신앙은 밤을 다스립니다. 여기서 크고 작다는 말은 단순히 하나는 중요하고 다른 하나는 덜 중요하다는 가치 평가가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에 사랑이 먼저이며 주된 것이라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AC.30에서 이미 신앙의 마지막 단계가 ‘마음에속한신앙,곧사랑의신앙’이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이라고 설명한 것과 같은 흐름입니다.
이 사랑과 신앙의 질서가 AC.32에서 ‘특히이마지막시대에숨겨져있던아르카나’라고 불립니다. 그 이유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설명합니다. 지금이 ‘세대의종말’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순서는 ‘사랑이거의없고,그결과신앙도거의없다’입니다. 살아 있는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얻기 때문에, 사랑이 사라지면 참된 신앙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아는 것 자체가 그 시대에는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24:29을 인용합니다. 여기서는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으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의미를 직접 풀이합니다. ‘해’는 사랑이며 그 사랑이 어두워지고, ‘달’은 신앙이며 그 신앙이 빛을 내지 못하고,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이며 그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가지고 별도의 복잡한 종말론적 도식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32에서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해와 달과 별의 어두워짐이 사랑과 신앙과 신앙에 관한 지식이 무너지는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태고교회의 언급은 이 마지막 시대와 정반대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사랑자체외에다른어떤신앙도알지못했다’고 말하며, 천적 천사들도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떤 신앙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역사에 속한 모든 사람이 끝까지 동일한 상태에 있었다거나, 태고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후에 천적 천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태고교회의 본래적인 천적 성격과 천적 천사들의 질서가 나란히 제시되는 것입니다. 두 경우 모두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더 나아가 ‘온천국은사랑의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사랑 자체를 독립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곧이어 그는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이 모든 사랑과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고,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천국의 사랑이 참된 사랑인 이유는 천사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의 근원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29-31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람은 거듭남의 초기에는 자기가 선을 행하고 자기가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점차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AC.32의 천적 상태에서는 이것이 더욱 분명합니다. 천적 천사들은 자기에게서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이 조금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사랑하지 않거나 수동적인 존재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주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 사랑의 생명과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지각합니다.
마지막 변화산 사건은 이 모든 설명의 절정을 이룹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사랑이주님에게서온다’는 사실이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큰 광명체인 ‘해’로 표현되었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얼굴은 해처럼 빛났고 옷은 빛처럼 희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얼굴이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은 ‘해’, 곧 사랑으로, 그의 인성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곧 ‘빛’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여기서도 AC.32가 실제로 말한 만큼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변화산의 모든 세부를 새롭게 해석하거나 얼굴과 옷에 관한 전체 상응 체계를 이 자리에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본문에서 필요한 핵심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근원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으며, 그것이 변화산에서 ‘해’라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1의 더 큰 광명체가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단순한 추상적 상징이 아니라 결국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AC.32의 중심은 ‘해=사랑,달=신앙’이라는 대응표 자체보다 더 깊습니다. 사랑과 신앙은 둘이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조차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질서가 사라지면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으며 별들이 떨어지는 상태가 되고, 이 질서가 살아 있을 때에는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의 경우처럼 사랑 안에 신앙이 살아 있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었고, 주님의 신적 자비로 다시 설명하도록 허락되었다고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입니다. (AC.32해설)
마음이오직문자적의미에만붙들려있는동안에는,그안에이러한것들이들어있다는사실을그누구도볼수없습니다.예를들어창세기의첫장들에서문자적의미로발견할수있는것은세상의창조와,낙원이라불리는에덴동산과,처음창조된사람으로서의아담에관한것뿐입니다.누가그밖의것을생각하겠습니까?그러나이어지는페이지들에서이내용들이지금까지결코드러난적이없는아르카나(arcana)를품고있다는사실이충분히입증될것입니다.실제로창세기1장은그속뜻으로는일반적으로인간의새로운창조,곧그의거듭남을다루며,구체적으로는태고교회(theMostAncientChurch)를다룹니다.그리고그방식은가장작은표현하나까지도이러한것들을표상하고,의미하며,그안에품고있지않은것이하나도없을정도입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Who supposes anything else?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or of his regeneration,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signify,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AC.4는 앞선 AC.1-3에서 제시한 말씀에 관한 원리를 실제 성경 본문에 처음 적용합니다. AC.1에서는 구약의 겉 글자 안에 하늘의 깊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했고, AC.2에서는 말씀의 가장 작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AC.3에서는 이러한 내적인 생명과 분리된 문자를 영혼 없는 몸에 비유했습니다. 이제 AC.4에서는 독자가 실제로 읽게 될 창세기의 첫 장들을 가리키며, 앞에서 말한 원리가 바로 이 본문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처음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문자적 의미에서 독자가 실제로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인정합니다. 창세기의 첫 장들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세상의 창조와 에덴동산, 그리고 처음 창조된 사람으로서의 아담이 보입니다. 그래서 ‘누가그밖의것을생각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자적 의미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오직’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으면 그 안에 있는 다른 것들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AC.3에서 문자와 내적인 생명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했던 것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창세기 1장에 대한 AC의 첫 번째 결정적인 해석이 제시됩니다. 창세기 1장은 속뜻으로 ‘일반적으로는인간의새로운창조,곧그의거듭남’을 다루며, ‘구체적으로는태고교회’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 그리고 여섯 날의 질서가 하나씩 해설되면서 이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AC.4에서는 그 세부 내용을 미리 설명하기보다, 창조 이야기가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는 큰 방향을 정확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와 ‘구체적으로’의 구별도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속뜻은 한 인간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는가, 곧 어떻게 거듭나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구체적으로는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라고 부르는 교회의 상태를 다룹니다. 따라서 앞으로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개인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AC.4에서 두 방향을 함께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태고교회가 정확히 어떤 교회이며 그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이후 해당 번호들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앞으로 AC전체의 해설 방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창세기 1장은 대략적으로만 거듭남을 상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작은표현하나까지도’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고,의미하며,그안에품고’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AC.2에서 말씀의 모든 것이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다고 한 선언이 창세기 1장에 직접 적용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 스베덴보리가 단어 하나와 표현 하나까지 세밀하게 해설하는 것은 부수적인 관심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개별적인 것들에도 속뜻이 있다는 그의 말씀 이해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마지막 표현 때문에 ‘표상’과 ‘상응’이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AC.4원문에는 실제로 ‘표상하고’(represent), ‘의미하며’(signify), ‘그안에품는다’(enfold)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 자연적인 사람과 사물과 사건이 어떻게 영적인 것을 표상하고 의미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만나게 됩니다. 그 관계를 이해하는 데 ‘표상’과 ‘상응’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다만 AC.4자체는 아직 그 두 개념의 전체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 질문을 심화로 넘기고 본문에서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까지도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을 품고 있다는 선언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4는 AC서문에서 하나의 중요한 경계선입니다. 앞의 세 번호가 ‘말씀에는속뜻과생명이있다’는 원리를 세웠다면, 이제 AC.4는 그 원리를 창세기 1장에 직접 적용하여 ‘이창조이야기는속뜻으로인간의새로운창조,곧거듭남과태고교회를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선언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페이지들에서충분히입증될것’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창세기 1장의 세밀한 해설 자체가 바로 그 입증 과정입니다. (AC.4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