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4:26)

 

AC.336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Enosh), 하나의 사람(man, homo)이라 하는데, 이것이 교회의 이름입니다. (26) The charity implanted by faith is called Enosh, or another man [homo], which is the name of that church. (verse 26)

 

해설

AC.336은 바로 앞 AC.335와 한 문장처럼 이어서 읽어야 합니다. AC.335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의미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고 했습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입니다. 이제 AC.336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흐름은 매우 분명합니다. ‘은 새로운 신앙이고, ‘에노스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이며, 동시에 그 상태로 형성된 교회의 이름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체어리티의 근원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바로 앞 AC.335에서도 새로운 신앙이 주님에 의해 주어졌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체어리티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원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데 사용하시는 하나의 질서와 수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과 셋, 아벨과 에노스의 대조가 매우 인상적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의미했지만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었고, 그 신앙은 결국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반면 셋 역시 신앙을 의미하지만,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신앙은 아벨을 죽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지만, 셋의 신앙에서는 에노스가 나타납니다. 같은 신앙이라 하더라도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그 질이 전혀 달라진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대조를 곧바로 홍수 이후 영적 인간의 거듭남 순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바로 다음 AC.33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천적 인간으로 설명하면서, 그들에게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있었고, 그 신앙은 사실상 퍼셉션의 형태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AC.336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먼저 진리를 배우고 나중에 체어리티가 생기는 후대 영적 인간의 일반적인 거듭남 단계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은 AC.336이 직접 말하는 범위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그 체어리티를 에노스라고 했고, 그것이 그 교회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 상태가 태고교회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는 이어지는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에노스를 단순히 체어리티라고만 하지 않고 하나의 사람(another man, homo)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앞부분에서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이라는 뜻보다 더 깊은 교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살아 있고 서로 결합되어 있을 때, 그 상태가 참된 의미의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에노스를 하나의 사람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짐으로써 다시 교회라 할 수 있는 상태가 형성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무너졌지만, 셋과 에노스에서는 그 둘이 다시 교회 안에서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질서가 마련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에노스는 단순한 한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교회의 이름이 됩니다.

 

다만 하나의 사람이라는 말을 곧바로 최초의 태고교회와 똑같은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 하나의 사람이라는 표현은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다시 형성되었음을 보여 주지만, 그 상태가 최초의 태고교회와 어느 점에서 같고 어느 점에서 달랐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을 따라가며 살펴보아야 합니다. AC.336 한 문장만으로 그 차이를 모두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현재 블로그 해설에는 최초의 태고교회는 사랑으로부터 직접 퍼셉션을 가졌고, 에노스 교회는 셋으로 의미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대비가 들어 있습니다. 큰 방향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이것을 최초의 퍼셉션은 이미 사라졌고 이제 신앙을 먼저 배우는 새로운 방식이 시작되었다는 식으로 강하게 말하면 너무 앞서갑니다. 이어지는 AC.337은 여전히 태고교회의 참된 상태를 사랑에서 오는 퍼셉션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최초 상태와 완전히 동일하지 않은 새로운 교회적 상태라는 정도로 두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또한 AC.336의 마지막 표현인 이것이 교회의 이름입니다는 창세기 초기의 이름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에노스는 단순히 셋의 아들이라는 개인적 이름에 머물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실제로 하나의 교회의 이름이라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창4의 계보에서 인물들의 이름은 교리적, 교회적 상태의 계승을 표상하는 것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창4:25-26은 창4 전체의 긴 흐름을 매우 압축해서 마무리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은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고, 그 분리는 여러 파생 상태를 거쳐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다시 심으셨습니다. 셋과 에노스는 바로 그 새로운 시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노스가 단순히 체어리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체어리티가 심어진 하나의 교회적 상태 전체의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될 수 있는 상태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교회가 다시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참된 교회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선, 신앙과 체어리티가 주님 안에서 살아 있는 결합을 이룰 때 교회가 됩니다.

 

이 원리는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가인, , 에노스의 역사적 표상과 개인의 거듭남을 곧바로 일대일 대응시키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그 속뜻에서 드러나는 원리를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진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방향으로 가는지, 아니면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살아 있게 하시는 방향으로 가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특히 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 질문은 중요합니다. 많은 진리를 아는 것이 교회의 생명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그 진리가 주님께서 우리 안에 선과 체어리티를 이루시는 수단이 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결합될 때 에노스’, 하나의 사람이 나타난다는 AC.336의 짧은 말은 참된 교회와 참된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깊게 보여 줍니다.

 

심화

1.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 심화 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 심화1. 왜 체어리티가 심어지자 다시 ‘사람’[homo]이라 불리는가? AC.336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표현은 ‘another man [homo]’, 곧 ‘또 하나의 사람’일 것입니다. 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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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7, 창4, ‘참된 태고교회를 알아야 가인의 왜곡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37이 장은 태고교회의 퇴보, 곧 그 교리의 왜곡과, 그 결과 생겨난 이단들과 분파들을 가인과 그의 후손들의 이름 아래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참된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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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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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4:25)

 

AC.335

주제의 요약이 제시됩니다. 가인(Cain) 의미하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습니다. 신앙을 (Seth)이라 합니다. (25) A summary of the subject is given: that after faith, signified by Cain, had extinguished charity, a new faith was given by the Lord, whereby charity was implanted. This faith is called Seth. (verse 25)

 

해설

AC.335는 창4 전체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요약하면서,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의 이야기와 셋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신앙을 서로 맞대어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앞에서는 가인으로 의미된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아벨로 의미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그 분리된 상태는 여러 교리적 형태로 파생되었고, 마지막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AC.335는 그 모든 흐름을 한 문장으로 되돌아보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졌다고 합니다. 그 새로운 신앙이 입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라는 이름 자체만으로는 그 신앙이 참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가인의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높인 신앙이었습니다. 반면 셋의 신앙은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는 신앙입니다. 둘의 차이는 신앙의 존재 여부보다 그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 안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AC.335의 핵심 표현은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그 자체로 종착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리와 신앙을 주시는 목적은 그것을 통하여 인간 안에 선과 체어리티가 형성되고 살아나게 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셋으로 의미되는 새로운 신앙은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다시 살아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신앙입니다.

 

이 점은 AC.328의 원리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있다고 했고,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셋은 가인의 반대편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신앙을 보여 줍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심어질 수 있도록 그 길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교리적 구별이 필요합니다. AC.335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졌다는 표현을 곧바로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 나타나는 거듭남의 질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셋과 에노스는 여전히 태고교회 문맥 안에 있으며, 이어지는 AC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본래 성격을 사랑으로부터 오는 퍼셉션과 연결하여 계속 설명합니다. 따라서 셋의 새로운 신앙은 이미 퍼셉션이 완전히 사라지고 양심이 그 자리를 대신한 상태를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AC.335에서는 먼저 스베덴보리의 표현 그대로 붙드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가인으로 의미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을 주셨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신앙의 더 구체적인 성격과 그로부터 형성된 교회는 바로 다음 AC.336과 이어지는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점에서 AC.330가인의 AC.335은 매우 의미 있게 연결됩니다.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므로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35에서는 실제로 새로운 신앙이 주님께 주어지고,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 자체가 회복되었다는 뜻은 아니지만, 주님께서 신앙이라는 수단을 구원의 질서 안에서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가인의 표와 셋 사이에는 깊은 섭리적 연속성이 있습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주님께서는 신앙 자체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신앙을 새로운 질서 안에서 다시 사용하여 체어리티가 심어지게 하십니다. 인간이 왜곡한 것을 그대로 승인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다시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과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라멕은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특정 교리적 계열의 종말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한 계열에서 신앙이 소멸되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인류 가운데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실 길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AC.335의 셋은 바로 그 점을 보여 줍니다. 한 교회적 상태는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구원의 섭리는 종말에 이르지 않습니다.

 

4:25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는 말씀도 이 속뜻을 매우 아름답게 담고 있습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의미했고, 가인은 그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다른 를 주십니다. 뒤의 상세 해설에서 이 는 새로운 신앙과 연결됩니다. 다시 말해 체어리티가 소멸된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체어리티가 다시 형성될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의 씨를 마련하십니다.

 

여기서 셋을 단순히 죽은 아벨 대신 태어난 좋은 아들로만 읽으면 창4의 속뜻을 놓치게 됩니다. 셋은 아벨과 똑같은 것을 직접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벨은 체어리티였고, 셋은 그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신앙입니다. 바로 다음 AC.336에서는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가 에노스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창4:25-26새로운 신앙인 신앙을 통하여 심어진 체어리티인 에노스라는 연결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주님께서는 아벨을 단순히 되살려 원상복구하시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되돌리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이미 어떤 상태를 지나온 뒤에는 그 상태에 맞는 새로운 질서 안에서 다시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이 말을 곧바로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의 거듭남 질서와 동일시하기보다, 우선 태고교회 안에서 가인의 분리 이후 주님께서 새로운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을 마련하셨다는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또한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역사적 시간순으로만 읽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문자에서는 가인의 여러 후손과 라멕의 이야기가 진행된 뒤 마지막에 셋의 출생이 기록됩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서로 다른 교리적,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가인 계열의 모든 세대가 역사적으로 끝난 뒤에야 셋이 태어났다는 식의 연대표를 AC.335의 속뜻에서 끌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셋은 여전히 태고교회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이후 창5에서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은 태고교회의 여러 교회적 상태의 계승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 계열에서도 퍼셉션의 상태가 점차 변화하고 쇠퇴해 가며, 마침내 홍수에 이르는 큰 흐름이 전개됩니다. 그러므로 셋을 곧바로 홍수 이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으로 옮겨 놓아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35의 핵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가인은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주고, 셋은 주님께서 다시 신앙을 체어리티의 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세우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을 높여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그 신앙을 통하여 인간 안에 체어리티를 심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내어 줍니다.

 

그러므로 AC.335는 신앙을 낮추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의 참된 존엄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신앙의 존엄은 체어리티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데 있지 않고, 주님께서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심으시는 살아 있는 수단이 되는 데 있습니다. 가인과 셋은 모두 신앙을 의미하지만, 하나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가 심어지게 하는 신앙입니다. 그 차이가 바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심화

1. 가인 신앙이고,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 심화 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 심화1. ‘가인’도 신앙이고, ‘셋’도 신앙이라면, 무엇이 신앙을 참된 신앙답게 하는가? AC.335는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가인도 ‘신앙’을 의미하고 셋도 ‘신앙’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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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6, 창4:26, ‘에노스’(Enosh)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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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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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심화

1.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로운 교회가 이전 교회적 상태가 조금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져 극도의 모독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왜 새로운 교회는 이렇게 이전 상태의 가장 어두운 종말과 맞닿아 나타날까요?

 

먼저 이것을 주님께서 이전 교회를 일부러 타락시키신 뒤 새로운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타락과 왜곡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절하고 자신의 proprium을 따르는 데서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공급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까지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한 교회적 상태 안에 아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그것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보존하시고 이끄신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계속해서 선과 진리를 거부하고 왜곡하며,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까지 가하는 상태에 이르면 그 교회적 상태는 더 이상 본래의 교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이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실패한 상태를 강제로 수리하여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과는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마련하십니다. 인간의 한 상태가 끝나는 것과 주님의 구원의 섭리가 끝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 점에서 AC.330의 가인의 표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을 때, 그것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수 있도록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보존은 가인에서 이어지는 모든 상태가 반드시 올바르게 회복될 것이라는 보장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라멕에 이르러 그 계열은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고, AC.33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종말의 때에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특정한 한 교리적 계열의 성공에 매여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한 상태가 자유의 오용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구원의 길 자체까지 인간이 소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가 문자적으로 라멕의 아내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렇다면  교회가 라멕의 악에서 생겨난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초기의 가족과 계보는 속뜻에서 교회와 교리의 상태 관계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악이 변하여 새 교회가 되었다고 읽기보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의 상태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이 말씀의 계보 안에서 함께 묘사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새로운 교회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와 같다는 뜻도 아닙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교회는 아직 홍수 이전의 문맥 안에 있습니다. 노아의 교회는 이후 태고교회의 종말과 더 큰 거듭남 질서의 전환 속에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역사적 교회 시대를 가리킨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굳이 가장 어두운 종말과 함께 묘사할까요? 그것은 인간의 실패와 주님의 섭리를 동시에 보여 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선과 진리를 소멸시키고 모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가장 어두워져야 주님이 역사하신다는 법칙을 만들자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역사하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한 상태가 끝에 이르렀을 때, 주님의 섭리가 그 종말 너머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우리가 뒤늦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4 가장 어두운 는 절망의 증거라기보다 인간의 종말이 주님의 종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이 모두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른 상태에서도 주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다시 선과 진리가 결합되고, 체어리티와 신앙이 살아 있는 교회적 상태가 일어날 수 있도록 계속 섭리하십니다.

 

이것이 AC.334가 교회의 종말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희망을 품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전 교회의 내적 생명은 끝날 수 있지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가장 깊은 어둠보다 주님의 구원의 뜻이 더 멀리 갑니다.

 

 

 

AC.334 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 심화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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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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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 일어날  있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 AC.333에서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 교회적 상태에서 신앙마저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나타난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교리적 계열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과 주님의 교회 전체가 끝났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332가 말하는 라멕의 상태는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교리적 계열의 마지막을 나타냅니다. 그 안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더 이상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주님께서 더 이상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33은 바로 이 점을 보여 줍니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른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그 새로운 교회를 표상하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그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멕이 좋아져서 다시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가 끝난 자리에서 다른 교회적 상태가 새롭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한 교리적 계열의 성공 여부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어떤 상태가 자유의 오용과 왜곡 때문에 종말에 이를 수는 있지만, 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그 상태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의 길을 막더라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이 점에서 AC.330 가인의 와도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보존이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교리적 상태가 반드시 끝까지 살아 있는 신앙을 유지한다는 보장은 아니었습니다. 라멕에서 그 한 계열은 결국 신앙마저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33은 오히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즉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하나의 계열에만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르더라도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 자체가 소멸되지 않도록 계속 역사하십니다.

 

여기서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는 아직 홍수 이전의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반면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는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 인간의 거듭남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더 큰 전환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어떤 곳에서 새로운 교회라고 말할 때마다 반드시 인류 역사의 새로운 대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상태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적 형성이 일어났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AC.333의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이 점은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시간표로 읽지 않는 데도 중요합니다. 라멕,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단순히 나쁜 아버지와 좋은 자녀들처럼 읽으면 속뜻의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 중심은 개별 인물의 도덕적 성격이 아니라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끝나고 새롭게 형성되는가에 있습니다.

 

AC.333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새로운 교회의 성격이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통하여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이 각각 교회의 천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종말 가운데서 새로 일어난 교회에도 다시 교회에 속한 여러 차원의 것들이 존재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태고교회 최초의 순수한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천적인 ’, ‘영적인 ’, ‘자연적인 이라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는 이어지는 AC에서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AC.333은 우선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그 교회 안에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는 큰 틀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라멕과 아다와 씰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말과  시작입니다. 라멕은 한 교리적 계열의 끝을 나타내고, 아다와 씰라는 그 끝의 자리에서 새롭게 일어난 교회를 나타냅니다. 인간의 한 상태는 끝날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끝을 새로운 시작의 자리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 교회를 바라볼 때에도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적 형식이나 제도가 쇠퇴한다고 해서 곧 주님의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외적인 조직이 계속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내적인 교회적 생명이 살아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실제로 결합되는 곳에서 새롭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33은 라멕의 종말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한 계열이 신앙에 속한 것까지 잃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인간이 종말을 만들 수는 있어도 주님의 섭리 자체를 종말시키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AC.332에서 AC.333으로 넘어갈 때 가장 깊이 붙들어야 할 아르카나입니다.

 

 

 

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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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에서 특별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믿고,  믿음에 따라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순서가 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그 질서가 달랐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을 가장 깊은 생명으로 가지고 있었으며,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직접 연결됩니다. 퍼셉션은 밖에서 배운 교리를 하나씩 논증하고 판단하여 이것이 참되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천적인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서로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사랑 안에 그 사랑에 속한 진리가 있었고, 진리는 자신을 낳은 사랑과 하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말은 단순히 사랑도 하고 신앙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과 근원이 사랑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선에 속한 진리를 지각했고, 그 진리는 다시 선을 표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어떻게 사는가를 서로 다른 질문처럼 나누기 쉬운 것과 달리,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과 지각과 삶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 천적 질서를 오늘날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이 거기서 나왔다고 해서, 오늘날 사람도 먼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충분히 가진 다음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오히려 먼저 말씀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진리를 신앙하며, 그것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은 거듭남의 방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를 가졌지만,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질서가 서로 반대인 것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진리는 결국 선과 결합되어야 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길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아는 진리는 의지와 삶 안으로 들어가 선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체어리티가 신앙보다 중요하다는 말을 교리와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진리는 거듭남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알지 못하면 올바르게 선을 행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는 진리가 선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스스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가인의 원리가 시작됩니다. AC.325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처음부터 신앙을 버린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과 분리하여 독립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알면 경계하기 쉽지만, 참된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전체적인 질서에서 떼어 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면 자신이 여전히 진리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리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퍼셉션이 약해진 사람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보존하며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한 교리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교리가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교리를 많이 알고 성경의 속뜻을 깊이 이해하며 신앙 고백이 정확하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게 되는 것은 큰 은혜이지만, 그 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많이 보고 더 깊이 안다고 여기기 시작한다면 오히려 가인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를 아는 목적은 남보다 높은 영적 지식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쓰임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25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그대로 되찾으려 하기보다 그 안에 있는 영원한 질서를 붙들어야 합니다.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시며,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삶으로 내려오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나타날 때 신앙과 체어리티는 다시 형제로 함께 있게 됩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나는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만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진리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입니다.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신앙이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는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사랑에서 분리되고 신앙이 삶에서 떨어져 독립적인 것이 되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 안의 가인이 태어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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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4:1-2)

 

개요

 

AC.325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였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아벨(Abel)이라 하였습니다. (1-2) The most ancient 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 but there arose 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 The doctrine of faith separated from love was called Cain; and charity, which is love toward the neighbor, was called Abel. (verses 12)

 

해설

AC.325는 창4의 속뜻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열쇠를 제시합니다. 4의 가인과 아벨을 단지 인류 최초의 두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읽는 데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어떻게 분리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읽게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아벨은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앞으로 전개되는 두 형제의 관계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보여 주는 교회의 영적 역사이기도 합니다.

 

첫 문장인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습니다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사랑을 통하여(through love)라는 말은 단순히 주님을 사랑하면서 믿었다는 정도보다 깊은 뜻을 가집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사랑은 신앙에 나중에 덧붙여지는 하나의 덕목이 아니라 신앙이 나오는 근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은 서로 독립된 두 가지라기보다 하나의 생명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와 이해가 하나를 이루고 있었으며, 선을 사랑하는 의지에서 그 선에 속한 진리에 대한 지각이 나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신앙은 어떤 교리 내용을 먼저 배우고 논증하여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고, 그 진리를 살아가는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AC.325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짧은 표현은 바로 이러한 천적 질서를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에서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여기서 창4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처음부터 신앙 자체가 거짓이거나 악했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기 생명의 근원인 사랑에서 분리되어 독립적인 것으로 서기 시작했다는 데 있습니다. 가지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나무의 줄기와 뿌리에서 끊어질 때 생명을 잃는 것처럼, 신앙과 진리도 사랑과 선 안에 있을 때 살아 있지만 그것에서 분리되면 본래의 생명을 잃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상태가 가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인을 단순히 신앙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라고 규정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가인을 처음부터 단순히 악이나 거짓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본래 교회 안에 있던 신앙이 사랑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 그 구별이 점차 분리로 굳어져 독립적인 교리가 되어 가는 상태가 가인으로 표상됩니다. 이후 창4에서는 이 분리가 더욱 진행되면서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앞세우고,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반면 아벨은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친절한 감정이나 몇 가지 구제 행위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으로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고 행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은 본래 경쟁 관계가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를 없애야 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아벨을 가인의 형제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325는 앞의 AC.324에서 말한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이 어떻게 생겨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회의 쇠퇴는 언제나 처음부터 노골적인 거짓이 밖에서 들어오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참된 것 하나가 전체적인 질서에서 떨어져 나와 자신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세울 때에도 시작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참된 것이지만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되면 질서가 무너집니다. 진리는 선을 섬겨야 하지만, 선과 삶에서 분리된 진리가 자기 지성과 자기 의를 세우는 수단으로 변하면 가인의 원리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 태고교회의 질서를 오늘날 인간의 거듭남에 그대로 시간적인 순서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고 해서 오늘날의 영적 인간도 먼저 완성된 사랑을 가진 뒤에야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갖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새로운 의지를 형성하시고 선과 진리를 결합하시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질서는 같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을 단순히 악과 으로 대응시키는 것은 아직 너무 이릅니다. 4의 첫 비극은 아벨이 들에서 죽을 때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먼저 본래 하나의 생명을 이루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의 살인은 그 내적인 분리가 끝까지 진행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AC.325는 창4 전체를 읽는 데 하나의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줍니다. ‘내가 가진 신앙은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가, 아니면 그것들과 분리되어 스스로 서려 하고 있는가?4는 이제 그 작은 분리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 심화 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 심화1.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 AC.325에서 특별히 깊이 살펴볼 표현은 ‘태고교회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다’는 첫 문장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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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6, 창4:3-5, 가인의 제물, 아벨의 제물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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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4, 창4,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들과 에노스라는 새로운 교회 (AC.324-337)

창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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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4 심화

1. 4 5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계열

 

 성급한 질문일  있지만, 그리고 이미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4, 5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가인 이후  여러 대가 흐르도록 태고교회는 처음엔 어두운 세월을 지내다가  이후 회복된 걸로 보기에는 태고교회라는 위상(?) 어딘가  어색하기 때문입니다. 4 시간순으로 읽으면,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여러 대가 흐르도록 나이만 먹다가 수백, 수천 년이 흐른 후에야 셋이라는 자녀를   되는데... 이건 ... 차라리 4 따로, 5 따로, 그러니까 가인 계열과  계열이 나란히 동시대를 살다가 홍수를 맞이하는, 이런 이해가  나을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4와 창5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4에서는 가인에게서 에녹,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여러 대가 이어지고, 라멕에게서 다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긴 계보가 모두 소개된 뒤 창4:25에 와서 다시 아담이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연대기처럼 직선적인 시간순으로만 읽으면, 마치 가인의 여러 대 후손이 모두 지나간 뒤에야 아담과 하와가 셋을 낳은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을 해석하는 방식에서는 이러한 계보의 가장 중요한 의미가 개인들의 출생 연대를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가인과 에녹, 이랏 등의 이름은 말씀의 속뜻에서 특정한 교리와 교회적 상태를 나타내며, 셋과 에노스 및 창5의 여러 이름들 역시 이어지는 교회적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도 먼저 누가 정확히   먼저 태어났는가?보다 말씀이 어떤 교회적 계열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4는 특히 태고교회 안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들과 그 변화를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계열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구별되기 시작하고, 그 구별이 분리로 굳어지면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며, 그 뒤에도 그 교리적 상태가 여러 형태로 파생되는 과정이 이어집니다. 반면 창4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에서 다시 이어지는 계보는 태고교회 안의 또 다른 교회적 계승과 상태의 연속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4 가인 계열이 역사적으로 완전히 끝난 다음 5  계열이 시작되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은 한 계열의 영적 역사를 충분히 보여 준 뒤 서술의 초점을 다른 계열로 옮겨 그 계열의 상태들을 다시 처음부터 펼쳐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4와 창5를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큰 시대 안에서 전개되는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의 서술로 함께 읽는 것은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여기서 함께 또는 나란히라는 말을 역사적 동시성에 관한 정밀한 연대표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 해석이 직접적으로 밝히는 것은 각 이름이 나타내는 교회적 상태와 그 상태들의 연속이지, 가인 계열의 어느 인물이 셋 계열의 어느 인물과 정확히 같은 시기에 살았는지를 확정하는 연대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계열이 같은 태고교회 시대 안에서 전개되었다는 것과  세대를 일대일로 맞추어 동시대라고 확정한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창4:25에서 셋이 등장하는 것도 훨씬 자연스러워집니다. 이것을 반드시 가인의 여러  후손이 모두 지나간  비로소 셋이 태어났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 없이, 말씀의 서술 초점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적 계열에서 셋으로 표상되는 다른 교회적 계열로 옮겨가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5에서는 다시 아담에서 시작하여 셋과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로 이어지는 계열을 하나의 연속된 교회적 역사로 보여 줍니다.

 

그렇다고 가인 계열을 단순히 악한 계열’, 셋 계열을 선한 계열이라고 나누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은 처음부터 아무런 진리도 없는 순수한 악을 뜻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독립적인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하고, 이후 점차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서 변질됩니다. 반대로 셋으로 이어지는 계열 역시 아무런 쇠퇴 없이 처음의 가장 순수한 천적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노아까지 이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가 여러 상태를 거치며 결국 그 시대의 종말을 향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라는 말 자체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태고교회는 단지 가장 처음의 순수한 아담 상태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최초의 천적 상태에서 시작하여 여러 후속 교회와 상태들을 거쳐 그 교회 시대의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큰 흐름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는 매우 높은 천적 상태도 있고, 점차 쇠퇴하는 상태도 있으며, 본래의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교리적 상태도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창1-9의 속뜻을 당시 지상에 살던 모든 사람의 역사적 상태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장들에서 직접 추적하는 것은 무엇보다 교회와 그 교회의 연속적인 상태들입니다. 물론 그 속뜻에 담긴 영적 원리는 오늘의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수 있고, 한 교리나 지식을 전체보다 높일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에서도 다시 생명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보편적 적용과 당시 모든 인류가 똑같은 교회적 상태를 동시에 거쳤다는 주장은 서로 다른 것입니다.

 

결국 AC.324에서 붙들어야 할 것은 두 가지 흐름입니다. 인간 편에서는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 교리들이 독립하면서 여러 교회적 상태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는 그 분열과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는 섭리가 계속됩니다. 4와 창5를 이러한 관점에서 함께 읽으면, 가인과 아벨, 셋과 에노스, 그리고 창5의 긴 계보는 단순한 고대 가족사의 연속을 넘어 교회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며,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교회의 생명을 이어 가시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역사로 열리게 됩니다.

 

 

 

AC.324, 창4, 교회에서 분리된 교리들과 에노스라는 새로운 교회 (AC.324-337)

창4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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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Jehovah. 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And she added to bear his brother Abel; and Abel was a shepherd of the flock, and Cain was a tiller of the ground.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And unto Cain and unto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art thou wroth,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17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18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25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n,and called his name Seth; for God hath appointed me another seed instead of Abel; for Cain slew him.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o Seth, to him also there was born a son; and he called his name Enosh: then began they to call upon the name of Jehovah.

 

개요

 

AC.324

여기서는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 이단들(heresies) 다루며, 후에 에노스(Enosh) 하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진 것에 관하여 다룹니다. Doctrines separated from the church, or heresies, are here treated of; and a new church that was afterwards raised up, called Enosh.

 

해설

AC.324는 한 문장으로 된 짧은 글이지만 창4 전체의 속뜻을 여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겉으로 보면 창4는 가인과 아벨의 출생과 제물, 아벨의 죽음, 가인의 추방과 후손들, 라멕과 그의 자녀들, 그리고 마지막의 셋과 에노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을 단순히 최초 가족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연대기로만 읽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점차 구별되고 마침내 분리되면서 여러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생겨나는 과정과, 그 쇠퇴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을 다룹니다.

 

먼저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교리들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사랑과 신앙은 서로 독립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생명 안에서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퍼셉션으로 지각하였으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쇠퇴하면서 본래 함께 있던 것들이 점차 갈라지기 시작합니다. 4에서 가인은 이러한 과정 가운데 나타나는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표상하게 됩니다.

 

여기서 heresies이단들이라고 번역할 때에는 오늘날 한국 교계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단이라는 말과 완전히 같은 의미로만 이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324의 관심은 어느 현대 교단이나 집단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본래 교회의 하나 된 생명에서 어떤 교리가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이 되는 현상입니다. 이후 설명에서 보게 되듯 가인의 문제도 신앙 자체가 악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마침내 자신을 체어리티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따라서 분리구별을 잘 구별해야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구별될 수 있으며 실제로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집니다. 그러나 구별된다고 해서 서로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을 때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4는 이 둘의 구별이 어떻게 분리로 변하고, 그 분리가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지를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통하여 보여 줍니다.

 

그리고 AC.324의 후반부는 이 장 전체를 읽는 데 또 하나의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교회에서 여러 교리들이 분리되어 나오고 이전의 상태가 쇠퇴해 가지만,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에노스라 하는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집니다. 4의 속뜻에는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분리와 쇠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교회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함께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4:26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씀은 바로 이 에노스와 연결됩니다.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와 똑같은 형태로 되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라, 달라진 인간의 상태 가운데 새로운 교회적 형태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노스의 등장은 단순히 족보에 한 사람이 더 추가되었다는 의미를 넘어, 한 교회적 상태가 쇠퇴하는 가운데 또 다른 교회적 상태가 시작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점에서 AC.324는 창3의 마지막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3 마지막에서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나가게 되었지만 생명나무의 길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그 길을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창4에서는 타락 이후의 인간과 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며, 그 가운데서도 주님과 인간의 연결이 어떻게 보존되어 가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창4를 읽을 때 가인 계열을 단순히 나쁜 사람들의 족보’, 셋과 에노스를 좋은 사람들의 족보로 읽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이름들은 말씀의 속뜻에서 교리와 교회의 여러 상태를 표상합니다. 가인에서 시작된 어떤 교리적 상태가 어떻게 발전하고 변질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서 왜 새로운 교회인 에노스가 등장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324는 결국 창4 전체에 두 개의 큰 흐름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인간이 사랑과 신앙을 분리하고, 부분적인 것을 전체보다 앞세우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흐름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인간의 쇠퇴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새로운 교회를 일으켜 세우시는 흐름입니다. 앞으로 AC.325-337은 창4의 각 절을 먼저 개괄하면서 바로 이 두 흐름을 차례로 펼쳐 보이게 됩니다.

 

심화

1. 4 5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계열

 

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

AC.324 심화 1. 창4와 창5는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하는가? - 가인 계열과 셋 계열좀 성급한 질문일 수 있지만, 그리고 이미 몇 차례 거듭 고민했던 질문이지만... 창4, 창5를 시간순으로 읽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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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5, 창4:1-2, 가인과 아벨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And the man knew Eve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Cain, and said, I have gotten a man [v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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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3, 창4 앞, 사후의 삶을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사례를 이 장 끝에서 살펴봅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 AC.323이 장의 끝에서는,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이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의 몇 가지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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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심화

1. 태고 시대

 

AC.45에는 태고 시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석기 시대, 동굴 생활, 돌도구, 사냥과 채집 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곧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원시적인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와 의지의 상태를 동물로 표현할 만큼 깊은 영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태고 시대와 현대의 역사학·고고학에서 사용하는 시대 구분을 그대로 같은 것으로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의 선사시대 구분은 주로 도구, 생활 방식, 유물과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반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태고 시대를 말할 때 스베덴보리의 주된 관심은 그러한 기술사적 분류가 아니라 태고교회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 사람들은 영적으로 깊었다는 말을 석기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높은 영적 상태에 있었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AC.45도 그런 역사학적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표현 방식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 두면 현대 고고학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불필요하게 정면충돌시키지 않고 그의 글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특별히 돌리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퍼셉션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이 무엇이 선하고 참인지 교리와 지식을 통해 배우고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방식과는 다른 내적인 지각을 가리킵니다. AC를 계속 읽으면 태고교회와 퍼셉션의 관계가 훨씬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따라서 AC.45 태고 시대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그러한 전체 문맥 안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동물들을 가지고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을 표현했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AC.45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상징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며, 그와 같은 표현이 이후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들의 구체적인 언어생활이나 의사소통 방식을 상상하여 복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추상어가 없어서 동물 그림으로 말했던 원시인들이라는 뜻도 아니고, 반대로 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오늘날의 신학자보다 더 많은 교리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영적 상태의 깊이를 같은 척도로 재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자연과학, 역사, 언어, 기술에 관해 과거 사람이 알지 못했던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현대인이 그만큼 더 깊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의 높은 영적 상태를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현대 과학과 기술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두 종류의 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AC를 읽는 데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류의 역사를 단순히 옛날에는 무지했고 오늘날은 발전했다는 한 방향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지식과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의 내적 상태가 주님을 향해 얼마나 열려 있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저술에서 태고교회가 높은 상태로 묘사되는 것을 현대의 기술 발전에 대한 부정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태고교회를 낭만적인 완전무결한 황금시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이하와 AC의 설명을 따라가면 바로 그 태고교회 안에서도 인간의 proprium이 강해지고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모든 사람이 완전했던 시대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이후의 설명과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특별히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와 그들에게 있었던 천적인 성질과 퍼셉션이지, 아주 먼 옛날이라는 시간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45에서 태고 시대를 만났을 때 석기 시대와 어떻게 맞지?라는 질문에 너무 오래 붙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이렇게 구별하면 충분합니다. 현대 역사학의 시대 구분은 인간의 외적인 생활과 물질문화를 중심으로 하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태고 시대는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중심으로 합니다. 두 설명은 애초에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AC.45의 문장도 훨씬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원시인들이 놀랍게도 고등 신학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에 속한 내적인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표현했으며, 그러한 상징적 표현이 이후 말씀에도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자연의 형상과 인간의 내적 상태 사이의 관계를 오늘날과는 다르게 지각했던 태고교회의 영적 상태가 놓여 있습니다.

 

 

 

AC.45, 창1:24-25, ‘짐승으로 드러나는 마음 : 애정과 욕정의 질서화’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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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 의미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읽으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도 결국 쇠퇴하고 황폐해져 종말을 맞았는데 어떻게 태고교회 전체를 두고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또 바로 이어 천적 천사들을 언급한다고 해서 태고교회 사람들 모두가 천적 천사가 되었다는 뜻일까요?

 

먼저 첫 번째 질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한 교회를 그 교회의 고유한 영적 성격에 따라 말하는 경우와, 그 교회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쇠퇴해 가는 과정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AC 전체에서 천적 교회로 설명됩니다. 그 교회의 고유한 질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중심에 있고, 신앙이 그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말은 태고교회의 역사에 속한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언제나 동일한 사랑의 상태에 있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태고교회 역시 쇠퇴했고, 마침내 그 본래의 천적 상태를 잃었습니다. 그러므로 AC.32의 표현은 그 교회를 특징짓는 고유한 영적 질서, 곧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천적 교회의 성격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여기서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진리가 필요 없었다거나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사랑과 신앙이 오늘날 흔히 생각하듯 서로 독립된 두 요소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신앙에 속한 진리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랑에서 분리된 별도의 신앙을 그들은 참된 신앙으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2의 전체 논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사랑은 광명체이고, 신앙은 작은 광명체입니다.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데 세대의 종말에는 사랑이 거의 없어졌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어졌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사랑과 신앙이 분리된 상태와 대조되는 예로 태고교회를 제시합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가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로 이어서 천적 천사들을 언급할까요? 스베덴보리의 문장을 자세히 보면 태고교회 사람들이 모두 천적 천사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태고교회에 관한 진술에 이어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즉 두 집단의 모든 개인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나타나는 같은 천적 질서를 나란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라고 불리는 것과 천국에 천적 천사들이 있다는 것은 서로 관련되지만, 그렇다고 태고교회의 모든 구성원의 사후 운명이 자동으로 천적 천국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한 교회의 영적 성격을 말하는 것과 그 교회에 속했던 모든 개인의 최종적인 영적 상태를 판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특히 태고교회가 후대로 가면서 쇠퇴하고 황폐해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구별은 더욱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천적 천사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오히려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어서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고, 모든 천국의 행복이 거기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은 그 사랑과 생명과 행복을 자기 자신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얻는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2의 관심은 태고교회 사람들의 사후 분류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심은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입니다. 태고교회라는 지상의 천적 교회의 고유한 상태에서도, 천적 천사들의 천국적 상태에서도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사랑에 속하며,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는 말을 태고교회의 쇠퇴와 모순되는 절대적인 역사 진술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태고교회를 그 고유한 천적 성격에 따라 말하고 있으며, 그 성격을 오늘날 천적 천사들의 상태와 나란히 놓아 사랑과 신앙의 본래 질서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구별을 줍니다. 어떤 교회를 말할 때 그 교회가 나타내는 고유한 영적 성격과, 그 교회에 속한 모든 개인의 실제 상태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태고교회가 천적 교회였다고 해서 그 역사의 모든 사람이 천적 인간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며, 천적 천사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반대로 태고교회가 후에 쇠퇴했다는 이유로 그 교회의 본래 천적 성격까지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AC.32에서 태고교회천적 천사들이 나란히 등장하는 까닭은 둘을 동일한 집단으로 보기 때문이 아니라, 양쪽에서 같은 천적 질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는 바로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사랑에 속하며, 모든 사랑과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2가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을 함께 언급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AC.32 심화 3)

 

 

 

AC.32, 창1:14-17,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다 : 마지막 시대에 드러나는 광명체의 아르카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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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세 가지를 한 문장 안에서 연결합니다. 사랑과 신앙에 관한 이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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