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5

태고인들은 ‘땅들’(lands)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들이 뜻하는 바를 이해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가나안 땅과 시온산이 천국을 뜻한다는 관념을 가진 사람들은 이 장소들이 언급될 때 어떤 땅이나 산을 생각하기보다 그것들이 뜻하는 것만을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하윌라 땅’(land of Havilah)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윌라는 창25:18에 다시 언급되는데, 거기서 이스마엘의 아들들에 관하여 그들이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가는 길에 애굽 앞 술까지’(dwelt from Havilah even unto Shur, which is before Egypt, as thou goest toward Assyria) 거주했다고 합니다. When the most ancient people spoke of “lands,” they understood what was signified by them, just as those at the present day who have an idea that the land of Canaan and Mount Zion signify heaven, do not so much as think of any land or mountain when these places are mentioned, but only of the things which they signify. It is so here with the “land of Havilah,” which is mentioned again in Genesis 25:18, where it is said of the sons of Ishmael, that they “dwelt from Havilah even unto Shur, which is before Egypt, as thou goest toward Assyria.”

 

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 (창25:18)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에서 지성과 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퍼셉션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두르다’(compass)는, 비손 강이 ‘하윌라 온 땅을 두른다’(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고 한 것처럼, 유입을 퍼셉션합니다. 또한 아론의 에봇 어깨에 있는 호마노가 금테로 둘러싸여 있는 것에서도(출28:11)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한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이와 같은 예는 그 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Those who are in a heavenly idea perceive from these words nothing but intelligence, and what flows from intelligence. So by to “compass”—as where it is said that the river Pishon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they perceive a flowing in; as also in the onyx stones on the shoulders of Aaron’s ephod being encompassed with ouches of gold (Exod. 28:11), they perceive that the good of love should inflow into the truth of faith.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보석을 새기는 자가 도장에 새김 같이 너는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그 두 보석에 새겨 금 테에 물리고 (출28:11)

 

해설

AC.115는 AC.110에서 ‘하윌라 땅’이 마음을 뜻한다고 한 해석을 태고인들의 말씀 이해 방식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인들은 어떤 ‘땅’에 관하여 말할 때 단지 지리적인 장소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땅이 뜻하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오늘날에도 가나안 땅이나 시온산을 천국과 연결하여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름을 들을 때 물리적인 땅이나 산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예를 듭니다. 즉 장소의 문자적 이미지 너머에 그 장소가 나타내는 영적인 관념이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하윌라 땅’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창25:18에서 이스마엘의 아들들이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가는 길에 애굽 앞 술까지’ 거주했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명들을 곧바로 하나씩 암호처럼 치환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말씀에서 ‘지성과 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하윌라를 포함한 이 지리적 묘사는 천국적인 관념 안에서는 인간의 지성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내적인 질서와 관계되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태고인들의 퍼셉션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들은 ‘하윌라 = 마음’이라는 대응표를 머릿속에서 찾아 문자에 대입했다는 식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은 그들이 그 말씀에서 지성과 지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퍼셉션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104에서 퍼셉션을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단순한 상징 해독이나 지적인 연상과는 다릅니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 안에서 그것이 담고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을 알아차리는 방식에 가깝습니다.

 

이어지는 ‘두르다’에 대한 설명은 창2:11의 움직임 자체에도 속뜻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비손 강이 하윌라 온 땅을 ‘두른다’는 말씀에서 천국적인 관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유입’을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앞에서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뜻했고, 하윌라 땅은 마음을 뜻했습니다(AC.110). 따라서 비손이 하윌라 땅을 두르는 모습은 단순히 강이 어떤 지역의 경계를 따라 흐르는 지리적 장면을 넘어, 지성과 관계된 것이 마음 안으로 흘러드는 생명의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는 것으로 시작된 ‘흐름’의 이미지가 여기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름’의 의미를 아론의 에봇에 있는 호마노를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출28:11에서 호마노는 금테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앞의 AC.113에서 금은 사랑의 선을 뜻했고, AC.114에서 호마노를 비롯한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표상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15는 금이 호마노를 둘러싼 그 모습을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선과 진리가 단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유입되어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AC.110에서 처음에는 상당히 낯설었던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 ‘사랑의 진리’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라는 구별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서로 분리된 네 가지 항목으로 늘어놓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들며, 그 결과 지혜와 지성과 선과 진리가 하나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그러면서도 AC.111에서 보았듯이 각각의 것은 서로 구별됩니다. 하나 됨은 차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서로 구별되는 것들을 질서 있게 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유입’의 궁극적인 근원입니다. AC.112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가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네 차례에 걸쳐 반복했습니다. 그러므로 AC.115의 ‘사랑의 선이 신앙의 진리 안으로 흘러든다’는 말도 인간 내부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자기 발생적인 과정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비손이 하윌라를 두르며, 금이 호마노를 둘러싸는 일련의 이미지들은 모두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흘러와 인간 안의 서로 다른 것들을 살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결합하는 모습을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AC.115 해설)

 

 

 

AC.116, 창2:13, ‘기혼은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것에 관한 앎을 뜻함’ (AC.116-117)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창2:13) AC.116‘둘째 강’(second river), 곧 ‘기혼’(Gihon)은 선과 진리,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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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4, 창2:11-12, ‘보석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들을 뜻하고 표상함’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4신앙의 진리는 말씀에서 보석들(precious stones)에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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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며, 태고교회에는 매우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퍼셉션은 천사들에게서는 매우 완전하여, 그들은 그것으로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오는지와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지를 알아차리고 알며, 또한 자기들에게 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단지 그가 가까이 오는 것과 그의 관념 하나만으로 알아차리고 압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없고 양심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양심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매우 많은 사람은 양심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며, 퍼셉션이 무엇인지는 더욱 알지 못합니다. At this day it is unknown what perception is. It is a certain internal sensation, from the Lord alone, as to whether a thing is true and good; and it was very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perception is so perfect with the angels, that by it they are aware and have knowledge of what is true and good; of what is from the Lord, and what from themselves; and also of the quality of anyone who comes to them, merely from his approach, and from a single one of his ideas. The spiritual man has no perception, but has conscience. A dead man has not even conscience; and very many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and still less what perception is.

 

해설

AC.104는 앞에서 ‘나무’가 뜻한다고 한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직접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퍼셉션은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일종의 내적 감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내적 감각’ 자체보다 그 앞에 붙은 ‘오직 주님으로부터’입니다. 퍼셉션은 사람이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다가 발견하는 직감이나,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따라 생겨난 확신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AC.99에서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04에서는 그 퍼셉션 때문에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뿐 아니라,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오는지와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지도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나는 이렇게 느끼므로 이것이 옳다’는 자기 확신과는 오히려 반대 방향에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오는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퍼셉션의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어떤 생각이 자기 안에서 강하게 일어나거나 어떤 확신이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곧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104가 말하는 퍼셉션은 그런 주관적인 확신에 거룩한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서 참과 선을 알아차리는 것이었고, 천사들에게서는 그것이 너무나 완전하여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지와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지를 분별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퍼셉션을 높이는 동시에, 사람이 자기 느낌과 판단을 주님의 음성으로 쉽게 동일시하지 못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퍼셉션이 태고교회에는 매우 잘 알려져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 대신 양심이 있다고 구별합니다. 여기서 양심을 퍼셉션보다 열등한 가짜 기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이 번호에서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에게서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있고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뒤에서 이 차이가 더 밝혀질 때까지, 둘을 단순한 우열의 척도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에게는 양심조차 없다’는 말에서 ‘죽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거듭남의 문맥에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 곧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퍼셉션뿐 아니라 양심도 없다고 합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는 매우 많은 사람이 양심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퍼셉션은 더욱 알지 못한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특별한 영적 능력을 잃었다는 설명이라기보다, 사람이 자기 판단만을 중심으로 살아갈수록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참과 선인지 알아차리는 문제 자체가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결국 AC.104가 보여 주는 퍼셉션의 중심에는 인간의 특별한 영적 능력보다 주님이 계십니다. 퍼셉션이 귀한 것은 사람이 남보다 신비한 것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참과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음을 그 생명의 질서 안에서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며 우리가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것도 ‘나에게 퍼셉션이 있는가?’라는 특별한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참과 선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내 느낌과 판단을 주님의 것으로 쉽게 여기지는 않는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AC.104에서 퍼셉션을 설명하는 일은 결국 인간의 내면을 특별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모든 참과 선의 근원이신 주님께 시선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AC.104 해설)

 

 

 

AC.105, 창2:9,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 의지의 중심에 있는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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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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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

생명을 ‘숨을 내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호흡은 그들의 후손들에게서 점차 변화하였습니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태고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다른 삶에 있는 사람들도 그러하지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wind)에 비유한 이유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의 거듭남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하십니다.주1 The reason why life is described by “breathing” and by “breath” is also that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perceived states of love and of faith by states of respiration, which were successively changed in their posterity. Of this respiration nothing can as yet be said, because at this day such things are altogether unknown.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well acquainted with it, and so are those who are in the other life, but no longer anyone on this earth, and this was the reason why they likened spirit or life to “wind.” The Lord also does this when speak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in John:1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3:8) The wind bloweth where it listeth, and thou hearest the voice thereof, and knowest not whence it cometh, or whither it goeth; so is everyone that is born of the spirit (John 3:8).

 

시편에서도 이와 같습니다. So in David: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33:6) By the word of Jehovah were the heavens made, and all the army of them by the breath of his mouth (Ps. 33:6).

 

29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29, 30) Thou gatherest their breath, they expire, and return to their dust;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29–30).

 

‘숨’(breath)[spiraculum]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는 것은 욥기에서도 분명합니다. That the “breath” [spiraculum] is used for the life of faith and of love, appears from Job: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욥32:8) He is the spirit in man, and the breath of Shaddai giveth them understanding (Job 32:8).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욥33:4) The spirit of God hath made me, and the breath of Shaddai hath given me life (Job 33:4).

 

주1, 원어에서는 ‘바람’(wind), ‘영’(spirit), ‘숨’(breath)이 모두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 In the original languages, “wind,” “spirit,” and “breath” are all expressed by the same word. [Reviser]

 

해설

AC.97은 AC.96에 이어 왜 말씀에서 생명을 ‘숨을 내쉼’과 ‘숨’으로 묘사하는지를 설명합니다. AC.96에서는 콧구멍과 냄새가 퍼셉션과 연결되고,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다고 했습니다. AC.97은 여기에 또 하나의 이유를 덧붙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독자에게 매우 낯선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를 인정하여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태고교회의 호흡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를 현대의 호흡법이나 신체 현상으로 재구성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AC.97이 직접 알려 주는 범위는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 사이에 오늘날에는 잃어버린 어떤 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고대 사람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에 비유한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예로 요3:8을 듭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말씀하시면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라고 하신 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다’고 하십니다. AC.97에서는 바람과 영과 생명이 서로 무관한 표현들이 아니라, 거듭남과 생명을 설명하는 하나의 말씀의 언어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33:6과 시104:29-30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여호와의 ‘입 기운’으로 하늘의 만상이 이루어지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시면 피조물은 먼지로 돌아가지만 주의 영을 보내시면 다시 창조되고 지면이 새롭게 됩니다. 특히 시104편의 ‘먼지’, ‘영’, ‘창조’, ‘지면을 새롭게 함’은 창2:7의 흙, 생명의 숨, 사람의 형성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마지막으로 욥32:8과 33:4는 ‘숨’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가리킨다는 것을 직접 뒷받침합니다. 전능자의 숨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며, 전능자의 숨이 사람에게 생명을 줍니다. 따라서 AC.94에서 ‘생명의 숨’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풀이한 것은 창2:7 한 구절만의 고립된 해석이 아니라 말씀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숨-영-생명-깨달음-창조’의 연결 속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AC.97의 핵심은 단순히 ‘숨은 생명을 뜻한다’는 대응 관계 하나에 있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퍼셉션되었고, 말씀에서도 바람과 숨과 영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거듭남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창2:7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말씀 전체의 생명 언어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97 해설)

 

심화

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 심화 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 심화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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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동쪽 에덴동산,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 (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동산’(garden)은 지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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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창2:7, ‘콧구멍과 향기와 퍼셉션,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불어넣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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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2:2, 3)

 

AC.85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seventh day)이라는 것과, 그러므로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안식일이라 한 것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아르카나입니다. 천적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영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무지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을 천적 인간과 같은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 차이는 AC.81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seventh day), 곧 ‘안식일’(sabbath)이라는 것에 관하여는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라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 and called the sabbath, 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 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 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 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 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 as may be seen in n. 81. As regards the seventh day, 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 “seventh day” or “sabbath,” 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 and therefore he says: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막2:28)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Mark 2:27),

 

이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 자체이시며 안식일 자체이심을 함축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식일, 곧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라 합니다. 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 and the sabbath itself. 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 from him, a sabbath, 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 다루는 태고교회는 그 뒤에 이어진 모든 교회보다 더욱 주님의 안식일이었습니다. 그 뒤의 주님의 모든 가장 내적인 교회도 역시 안식일이며, 거듭난 모든 사람도 천적 인간이 될 때에는 안식일입니다. 그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앞서 여섯 날의 싸움 또는 수고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유대교회에서 수고하는 날들과 일곱째 날인 안식일로 표상되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궤가 나아갈 때와 쉴 때에도 표상되었습니다. 광야에서 궤가 이동한 것은 싸움과 시험을 표상했고, 궤가 쉰 것은 평화의 상태를 표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궤가 떠날 때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here treated of, 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 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 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 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 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 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 and by the seventh day, which was the sabbath; 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 and when it rested, 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 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 and therefore, when it set forward, Moses said: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민10:35, 36) Rise up, Jehovah, and let thine enemies be scattered, and let them that hate thee flee before thy faces. And when it rested, he said, Return, Jehovah, unto the ten thousands of the thousands of Israel (Num. 10:35–36).

 

또 그곳에서는 궤가 여호와의 산을 떠나 그들을 위하여 ‘쉴 곳을 찾으려고’(to search out a rest for them) 갔다고 합니다. (민10:33) It is there said of the ark that it went from the Mount of Jehovah “to search out a rest for them” (Num. 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민10:33)

 

[3] 천적 인간의 안식은 이사야에서 안식일로 묘사됩니다. The rest of the celestial man is described by the sabbath in Isaiah:

 

13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58:13, 14) If thou bring back thy foot from the sabbath, so that thou doest not thy desire in the day of my holiness, and callest the things of the sabbath delights to the holy of Jehovah, honorable; and shalt honor it, not doing thine own ways, nor finding thine own desire, nor speaking a word; then shalt thou be delightful to Jehovah, and I will cause thee to be borne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 and will feed thee with the heritage of Jacob (Isa. 58:13–14).

 

천적 인간의 성질은 자기 자신의 바람에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하는 것이며, 그 주님의 뜻이 그의 ‘바람’(desire)이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데, 이것은 여기서 ‘땅의 높은 곳에 올려짐’(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으로 표현되며, 동시에 외적인 평온과 즐거움도 누리는데, 이것은 ‘야곱의 기업으로 길러짐’(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으로 나타납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 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 which is his “desire.” 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 - here expressed by “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 - and 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 which is signified by “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

 

해설

AC.85는 천적 인간이 왜 ‘일곱째 날’, 곧 ‘안식일’인가를 한층 더 깊이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은 아르카나였다고 하면서 그 직접적인 이유를 천적 인간의 본성이 알려져 있지 않았고 영적 인간의 본성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 인간 사이에는 AC.81에서 본 것처럼 큰 차이가 있는데도 사람들이 그 차이를 알지 못하여 둘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의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의 차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AC.85에서 더 근본적인 설명은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다’라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 자체이시며 안식일 자체이심을 함축하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도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식일, 곧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라 합니다. 결국 천적 인간이 안식일인 까닭도 그 안식이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교회와 개인에게 함께 적용됩니다. 태고교회는 뒤에 이어진 모든 교회보다 더욱 주님의 안식일이었고, 이후의 모든 가장 내적인 교회도 안식일입니다. 또한 거듭난 사람도 천적 인간이 될 때에는 주님의 형상이므로 안식일입니다. 그러나 그 안식에 앞서 ‘여섯 날의 싸움 또는 수고’가 있습니다. 유대교회의 수고하는 날들과 안식일, 그리고 광야에서 궤가 나아가고 쉬었던 일은 이 질서를 표상합니다. 궤의 이동은 싸움과 시험을, 궤의 쉼은 평화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AC.84에서 말한 ‘모든 싸움이 그친다’는 것은 AC.85에서 ‘평화의 상태’라는 적극적인 내용으로 한층 더 분명해집니다.

 

이사야의 안식일 말씀은 그 평화가 어떤 상태인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바람에 따라 행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하며,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이 바로 자기의 ‘바람’이 됩니다. 이것은 외적인 강제로 자기 욕망을 억누르는 상태와 다릅니다. AC.81에서 천적 인간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박에 의해 제어되지 않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가운데 자유롭다고 했는데, AC.85는 그 자유의 내적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의 뜻과 사람의 바람이 대립하여 억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을 기뻐하는 것이 그 사람 자신의 바람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안식은 단순한 무활동이나 싸움의 부재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이 있고 동시에 외적인 평온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를 이사야의 ‘땅의 높은 곳에 올려짐’으로, 후자를 ‘야곱의 기업으로 길러짐’으로 설명합니다. 결국 안식일의 깊은 중심에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질서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며, 주님의 뜻이 자신의 바람이 된 데서 오는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이로써 AC.74와 AC.84에서 이어져 온 질문도 상당히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 것은 여섯 날의 싸움과 수고 뒤에 오는 주님의 안식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쉬신다고 하는 것은 피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싸움이 그치고 주님의 평화가 자리 잡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안식의 궁극적인 근원은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다’라는 데 있습니다. (AC.85 해설)

 

심화

1. ‘이 아르카나는 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는가?’

 

AC.85 심화 1, ‘이 아르카나는 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는가?’

AC.85 심화1. ‘이 아르카나는 왜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는가?’ AC.85의 첫 문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고 그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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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6, 창2:2-3, ‘안식일의 저녁에서 아침으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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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4, 창2:2-3, ‘일곱째 날, 모든 싸움이 그치고 주님께서 쉬신다’ (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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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

이 말씀들은 사람이 이제 ‘여섯째 날’(sixth day)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늘’(heaven)은 그의 속 사람이고, ‘땅’(earth)은 그의 겉 사람이며, ‘그것들의 만상’(the army of them)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앎들인데, 이것들은 앞에서 큰 광명체들과 별들로 뜻해졌습니다. 속 사람을 ‘하늘’(heaven), 겉 사람을 ‘땅’(earth)이라 한다는 것은 앞 장에서 이미 인용한 말씀의 구절들에서 분명하며, 여기에 이사야의 다음 말씀을 덧붙일 수 있습니다. By these words is meant that man is now rendered so far spiritual as to have become the “sixth day”; “heaven” is his internal man, and “earth” his external; “the army of them” are love,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which were previously signified by the great luminaries and the stars. That the internal man is called “heaven,” and the external “earth,” is evident from the passages of the Word already cited in the preceding chapter, to which may be added the following from Isaiah: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사13:12, 13) I will make a man more rare than solid gold, even a man than the precious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mite the heavens with terror,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its place (Isa. 13:12–13).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자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저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6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고 내 손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사51:13, 16) Thou forgettest Jehovah thy maker,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but I will put my words in thy mouth, and I will hide thee in the shadow of my hand, that I may stretch out the heaven, and lay the foundation of the earth (Isa. 51:13, 16).

 

이 말씀들에서 ‘하늘’(heaven)과 ‘땅’(earth)이 모두 사람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말씀들은 일차적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지만, 말씀의 내적인 것들은 교회에 대하여 말한 것은 무엇이든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각 사람이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면 결코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성전이 아닌 사람은 성전이 뜻하는 것, 곧 교회와 천국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태고교회를 단수로 ‘사람’(man)이라 합니다. From these words it is evident that both “heaven” and “earth” are predicated of man; for although they refer primarily to the most ancient church, yet the interiors of the Word are of such a nature that whatever is said of the church may also be said of every individual member of it, who, unless he were a church, could not possibly be a part of the church, just as he who is not a temple of the Lord cannot be what is signified by the temple, namely, the church and heaven.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man,” in the singular number.

 

해설

AC.82부터 창2:1의 상세한 속뜻 해설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창조의 ‘여섯째 날’은 사람이 영적 인간으로 형성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땅’은 겉 사람이며, ‘그것들의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앎들입니다. 이것들은 창1에서 큰 광명체들과 별들로 묘사되었던 것들입니다. 따라서 창2:1은 앞 장의 창조 이야기를 마친 뒤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이루어진 영적 인간의 상태를 하나로 모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하늘’과 ‘땅’을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이해하는 근거를 밝히기 위해 사13:12-13과 사51:13, 16을 인용합니다. 이 인용들의 직접적인 목적은 각 구절의 모든 세부적인 속뜻을 여기서 해설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이 자연계의 하늘과 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하여도 서술될 수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특히 사13:12의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와 같은 표현은 흥미로운 별도의 질문을 일으키지만, 그것이 AC.82에서 이사야를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와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근거를 설명하는 마지막 부분이 중요합니다. 이사야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지만, 교회에 대하여 말한 것은 그 교회를 이루는 각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 사람이 하나의 교회가 아니라면 그 사람은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성전의 예로 설명합니다. 사람이 주님의 성전이 아니라면 성전이 뜻하는 교회와 천국에도 참으로 속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말씀에서 교회를 가리키는 표현과 한 개인의 거듭남을 가리키는 표현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중요한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이라는 말을 단순한 상응 사전의 고정 공식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82에서 중요한 것은 왜 교회에 관한 표현을 개인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가 하는 근거입니다. 교회는 그것을 이루는 사람들과 분리된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며, 각 사람 안에서 교회가 이루어져야 그들이 함께 교회를 이룹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태고교회 전체도 단수로 ‘사람’이라 합니다.

 

이렇게 보면 AC.82는 앞의 AC.81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81은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차이를 설명했고, AC.82는 그 가운데 창1에서 형성된 영적 인간이 ‘여섯째 날’이 된 상태를 다시 확인합니다. 이제 이 영적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 및 그 안의 사랑과 신앙이 완성된 상태에서, 다음에는 일곱째 날로 표현되는 천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될 것입니다. (AC.82 해설)

 

심화

1. 왜 주님은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시는가?

 

AC.82 심화 1, 왜 주님은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시는가?

AC.82 심화1. 왜 주님은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라고 말씀하시는가? 사13:12에서 여호와께서는 ‘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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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창2:1,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하늘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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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루는데, 앞 장에서는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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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동시에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표상으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그것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어 더욱 생명력 있게 하였는데, 이런 방식은 그들에게 더없이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런 스타일을 가리켜 한나는 예언 가운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 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 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 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이러한 표상들은 다윗의 시편에서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고 불립니다. (시78:2-4) Such representatives are called in David, “Dark sayings of old” (Ps. 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78:2-4)

 

창조와 에덴동산 등에 관한 이 모든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 스타일로,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에 나타납니다. 이 책들에서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내적 의미 안에 전혀 다른 것들이 담겨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글들에서 그 순서대로 설명하겠습니다. 셋째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은 태고교회에서 그토록 높이 존중되던 스타일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스타일처럼 연결된 역사적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담겨 있고, 그것들은 아름답게 연결된 질서를 따라 이어지며,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상태, 하늘 자체를 다루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넷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로,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왕으로서의 다윗이라는 인격 아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 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 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 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해설

AC.66은 창세기 1장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말씀의 문체와 속뜻의 관계를 한층 넓게 보여 주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64-65에서는 말씀에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66은 말씀 전체를 모두 똑같은 외적 형식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 둘째는 역사적 스타일,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 넷째는 다윗의 시편에 나타나는 스타일입니다. 네 스타일은 겉으로 나타나는 방식이 서로 다르지만, AC.66의 관심은 결국 그 서로 다른 외적 형식 안에 어떻게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가에 있습니다.

 

첫째인 태고교회의 스타일은 지금까지 우리가 읽어 온 창세기 앞부분과 직접 관계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태고교회 사람들은 땅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후대 사람이 자연물 하나를 보고 의도적으로 ‘이것은 무엇을 상징할까?’ 하고 해석한 것과는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외적인 것을 말하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함께 생각하는 표현 방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표상들을 단순히 하나씩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만들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한 이유를 그것들에 더 큰 생명력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하며, 그런 방식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조와 에덴동산을 비롯한 앞부분을 읽을 때, AC가 그것을 단순한 상징 목록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표상의 이야기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서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바로 이 문맥에서 한나의 삼상2:3이 인용되는데, 여기서는 잠시 주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읽는 개역개정은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라고 되어 있는 반면, AC의 영어 인용은 ‘높은 것을 말하라, 높은 것을! 옛것이 네 입에서 나오게 하라’는 식으로 전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본문과 오늘날의 일반적인 번역은 개역개정과 마찬가지로 교만한 말을 금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AC의 영어 인용을 근거로 개역개정이 잘못되었다거나, AC가 그 구절의 ‘진짜 번역’을 제공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어 본문에서는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여 개역개정 문구를 그대로 두되, 스베덴보리가 여기에서 사용하는 인용 형태가 우리가 읽는 성경 번역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와 AC.66의 논증에서 이 인용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는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어 시78:2-4의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라는 말씀이 인용됩니다. AC.66은 특별히 이러한 표상들을 다윗이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굳이 시편의 모든 세부 표현을 하나씩 새로운 상응으로 풀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의 역할은 첫째 스타일의 표상들이 ‘예로부터’ 내려온 것이라는 설명을 뒷받침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바로 다음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와 에덴동산 등의 내용, 곧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가 태고교회 후손들로부터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시78의 인용과 다음 문장은 함께 읽는 것이 좋습니다.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라는 표현과 태고교회로부터 내려온 표상적 전승이라는 설명이 서로 연결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라면 상당히 큰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부터 아브람 이전까지의 내용을 모세가 직접 계시받아 처음 기록한 것이 아니라, 앞선 세대에게서 전해 받은 자료라고 보는 것인가?’ AC.66의 문장은 분명히 그렇다고 말합니다. ‘창조와 에덴동산 등에 관한 이 모든 내용, 아브람 시대까지의 기록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전해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AC.66이 직접 제시하는 상당히 중요한 주장입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현대 성서학의 문서설이나 구전 전승론과 동일시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그러므로 창1-11은 허구이다’라고 결론 내릴 수도 없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지는 둘째 스타일에서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에 나타난 그대로라고 분명하게 구별합니다. 이 문제는 AC의 창세기 앞부분 이해에 매우 중요하므로 별도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스타일은 ‘역사적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범위를 아브람 이후의 모세오경과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기, 열왕기로 명시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아주 중요한 말을 덧붙입니다. ‘역사적 사실들은 문자적 의미에 나타난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즉 이 둘째 스타일에서 스베덴보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이유로 외적 역사를 지우지 않습니다.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은 그대로이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에는 전체적으로도 부분적으로도 내적 의미 안에 ‘전혀 다른 것들’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AC.66의 둘째 스타일에서는 ‘역사인가 상징인가?’라는 양자택일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사실이면서 동시에 속뜻을 갖습니다.

 

이 구별은 창세기 앞부분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브람 이후의 역사적 스타일에 대해서는 ‘사실들이 문자 그대로’라고 명시하는 반면, 그 이전 태고교회 스타일에 대해서는 표상들을 ‘일종의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다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문장을 구별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AC.66 하나만 가지고 창1부터 창11까지 각 인물과 사건의 역사성 여부를 세세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재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첫째와 둘째 스타일을 서로 다르게 설명하며, 아브람 이후의 둘째 스타일에 대해서는 문자적 역사성을 명시적으로 확인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예언적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스타일이 태고교회에서 매우 높이 존중되던 스타일에서 생겨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태고교회 스타일처럼 연결된 역사 형식은 아니고 ‘단절되어’ 있으며,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예언서는 문자적으로 아무 뜻이 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곧 내적 의미 없이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고 강하게 말하지만, 그 목적은 문자 자체를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그 단절된 표현들의 내적 의미 안에 깊은 아르카나와 아름답게 연결된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65에서 말씀의 내적 의미가 ‘연속의 질서’를 가진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도 직접 열거합니다.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상태, 하늘 자체를 다루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룹니다. 여기서 특히 마지막 표현은 앞으로 말씀의 속뜻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을 곧 ‘모든 성경 구절은 무조건 주님의 지상 생애에 대한 암호이다’라는 공식으로 바꿔서는 안 됩니다. AC.66은 예언적 스타일의 내적 의미가 여러 차원을 다루며 가장 깊은 의미에서 주님을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 구체적인 관계는 실제 예언서 인용을 해설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넷째는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적인 언어 사이의 중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 다윗이라는 인격 아래에서 내적 의미로는 주님을 다룬다’고 합니다. 이 표현도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을 읽을 때 다윗의 역사적 인격과 개인적 언어를 곧 지워 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 외적 형식 아래 내적 의미에서는 주님을 다룬다는 것이 AC.66의 설명입니다. 따라서 시편의 ‘나’를 만날 때 곧바로 모든 문장을 독자의 개인 감정으로만 읽는 것도, 반대로 문자적 화자를 아무 의미 없다고 하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힌 것은 왕 다윗의 인격 아래 주님이 내적 의미에서 다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보면 말씀의 속뜻이 언제나 똑같은 외적 방식으로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스타일에서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자연적인 표상들을 역사적 연속으로 엮었습니다. 역사적 스타일에서는 실제 역사적 사실들 안에 전체와 세부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언적 스타일에서는 외적으로 단절되어 보이는 표현들 안에 깊은 아르카나가 아름다운 질서로 연결되고, 시편에서는 왕 다윗의 인격 아래 내적 의미로 주님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속뜻이 있다’는 하나의 원칙만 붙들고 모든 성경 본문을 동일한 방법으로 기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AC.66은 보여 줍니다.

 

그러나 네 스타일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통일성도 있습니다. 모두 말씀이며, 외적으로 서로 다른 형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안에는 문자에 다 드러나지 않는 내적 내용이 있습니다. 앞 AC.64에서 말씀의 속뜻을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이라고 했고, AC.65에서는 그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가 천사들에게 ‘영광’이라고 불렸습니다. AC.66은 이제 그 속뜻이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스타일 안에서 어떻게 담겨 있는지를 큰 윤곽으로 보여 줍니다.

 

또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이 네 가지 스타일을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한 네 계시 수준’처럼 읽는 것입니다. AC.66은 그런 서열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태고교회 스타일이 그들에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하며, 예언적 스타일은 그 스타일에서 생겨났고, 시편은 예언적 스타일과 일상 언어 사이에 있다고 설명하지만, 이것을 ‘첫째가 가장 높고 둘째는 낮고 셋째가 다시 높다’는 등급표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각각 말씀 안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스타일입니다.

 

AC.66은 그래서 창세기 1장을 마치는 글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AC를 읽는 방법을 준비시키는 글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주로 첫째 스타일에 속하는 창조의 표상적 연속을 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 이후로 가면 둘째인 역사적 스타일을 만나게 되고, AC가 그 실제 역사 속의 모든 것에서 어떻게 내적 의미를 밝히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예언서와 시편이 인용될 때도 그들의 서로 다른 스타일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에는 속뜻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모든 본문을 똑같은 상징 해독법으로 읽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의 서로 다른 외적 형식을 존중하면서 그 안의 영적이고 천적인 내용을 밝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성경과 AC의 순서는 바뀌지 않습니다. 먼저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안에는 태고교회의 표상적 스타일도, 실제 역사의 스타일도, 예언의 스타일도, 시편의 스타일도 있습니다. AC는 그 차이를 없애거나 성경의 표현을 자기 체계에 맞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말씀 안에 어떤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밝히려 합니다. 따라서 AC.66이 가르치는 좋은 독법은 ‘문자를 버리고 속뜻으로 가자’가 아니라, ‘말씀의 외적 형식을 정확히 읽으면서 그 안에 주님께서 두신 더 깊은 뜻을 따라가자’는 방향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심화

1. 왜 AC의 삼상2:3 인용은 개역개정과 이렇게 다른가?

 

AC.66 심화 1, 왜 AC의 삼상2:3 인용은 개역개정과 이렇게 다른가?

AC.66 심화1. 왜 AC의 삼상2:3 인용은 개역개정과 이렇게 다른가?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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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6 심화 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

AC.66 심화2. 모세가 창조와 에덴동산의 기록을 태고교회 후손들에게서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AC.66에는 처음 읽는 독자를 상당히 놀라게 할 만한 문장이 있습니다. ‘창조, 에덴동산 등에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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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7, 창2 앞,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의 본성’ (AC.67-72)

AC.67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다른 삶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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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5, 창1, ‘영광’이라 불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 : 천사들의 지각

AC.65제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는 말씀 속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전혀 이해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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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태고교회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이 그들의 후손들 가운데서 사라지자, 이 아르카나 역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들의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 안에 담긴 행복을 느끼고 인식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한 내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내적인 것들, 즉 속의 것들로만 기뻐했습니다. 겉의 것들은 눈으로 보기만 했고, 그것들이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겉의 것들은 그것들이 그들의 생각을 속의 것들, 곧 내적인 것들로, 그리고 거기서 천적인 것들로, 결국에는 그들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로 돌이키게 해줄 때에만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누리는 행복이 바로 거기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understanding)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will)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marriage)이라 불렀습니다. 그 교회로부터 이런 식으로 말하는 방식이 전해져 내려왔는데, 그로 인해 선에 대한 애정으로 교회를 가리켜 ‘딸’(daughter)과 ‘처녀’(virgin), 곧 ‘시온의 처녀’(virgin of Zion), ‘예루살렘의 처녀’(virgin of Jerusalem)라 하였고, 또한 ‘아내’(wife)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들에 대해서는 다음 장 23절과 3장 15절에서 더 보게 될 것입니다. What is meant by “male and female,” in the internal sense, was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hen the interior sense of the Word was lost among their posterity, this arcanum also perished. Their marriages were their chief sources of happiness and delight, and whatever admitted of the comparison they likened to marriage, in order that in this way they might perceive its felicity. Being also internal men, they were delighted only with internal things. External things they merely saw with the eyes, but thought of what was represented. So that outward things were nothing to them, save as these could in some measure be the means of causing them to turn their thoughts to internal things, and from these to celestial things, and so to the Lord who was their all, and consequently to the heavenly marriage, from which they perceived the happiness of their marriages to come. The understanding in the spiritual man they therefore called male, and the will female, and when these acted as a one they called it a marriage. From that church came the form of speech which became customary, whereby the church itself, from its affection of good, was called “daughter” and “virgin”—as the “virgin of Zion,” the “virgin of Jerusalem”—and also “wife.” But on these subjects see the following chapter, at verse 23, and chapter 3, verse 15.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5)

 

해설

AC.54는 창1:27의 마지막 표현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를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뜻에서는 물론 남성과 여성의 창조를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남자와 여자’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태고교회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르카나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태고교회 사람들이 결혼과 자연계의 외적인 것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길게 설명합니다.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가 주의할 것은 AC.54가 자연적인 남녀나 실제 결혼을 부정하고 그것을 단지 인간 심리의 비유로 바꾸려는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실제 결혼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매우 큰 행복과 기쁨의 근원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혼이라는 자연적 현실을 통해 더 내적인 결합을 보았습니다. 자연적인 결혼과 그 속뜻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것 안에서 내적인 것을 보았다는 것이 이번 글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결혼이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이든 결혼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결혼에 비유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결혼의 행복을 지각했습니다. 오늘날 독자에게는 조금 낯선 표현이지만, 이 문장은 태고교회가 ‘결합’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들이 결혼을 바라보는 방식은 외적인 모습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AC.54는 그들을 ‘내적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외적인 것들을 눈으로 보았지만, 생각으로는 그것들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외적인 것 자체가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는 말은 자연계의 사물이나 삶을 무가치하게 여겼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의 요점은 외적인 것이 그 자체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것을 보면 그들의 생각은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으로 향했고, 내적인 것에서 다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모든 것’이신 주님께로 향했습니다. 이 흐름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응과 표상이라는 것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좋은 사례입니다. 자연적인 것을 버리고 영적인 것만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 안에서 더 내적인 것을 보았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자연계는 막다른 곳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생각을 그 자체에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실재를 향하게 했습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들의 결혼을 경험하면서 그들은 그보다 더 내적인 ‘천상의 결혼’을 생각했고, 자기들의 결혼에서 누리는 행복이 바로 그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여기서 ‘천상의 결혼’이라는 말이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상당히 어렵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천국에 가면 이루어지는 남녀의 결혼’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실제 남녀의 결혼과 아무 관계가 없는 추상적인 심리 현상으로만 이해해서도 곤란합니다. AC.54 자체에서는 이 용어의 전체 교리를 아직 펼치지 않습니다. 다만 태고교회 사람들이 자연적인 결혼의 행복을 더 높은 결합에서 오는 것으로 퍼셉션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 개념은 앞으로도 AC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설명을 거쳐 스베덴보리는 마침내 창1:27의 ‘남자와 여자’가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힙니다. ‘그들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를 남자라 불렀고, 의지를 여자라 불렀으며,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불렀다.’ 이것이 AC.54의 핵심 문장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현실의 모든 남성은 이해를 대표하고 모든 여성은 의지를 대표한다는 심리적 성별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54가 직접 말하는 것은 ‘영적 인간 안에 있는’ 이해와 의지입니다. 한 인간 안에 있는 두 기능을 남자와 여자라는 결혼의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성에게는 이해만 있고 여성에게는 의지만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AC.54의 속뜻에서 한 영적 인간 안에 이해와 의지가 있고, 그 둘의 관계가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현실 남녀의 지적 능력이나 감정적 성향을 분류하는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벗어납니다.

 

또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는 대응을 지나치게 기계적인 사전처럼 사용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창1:27의 속뜻을 설명하면서 태고교회의 결혼에 대한 인식과 영적 인간 안의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연결합니다. 이후 다른 문맥에서 ‘남자’, ‘여자’, ‘남편’, ‘아내’ 등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다시 보아야 합니다.

 

AC.54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이해와 의지가 각각 따로 있다는 사실보다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해와 의지의 구별은 결합을 위한 구별입니다. 둘이 없어져 하나의 기능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로 작동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53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AC.53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4에서는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앞에서는 둘의 질서를 구별했다면 이번에는 둘의 결합에 시선이 놓입니다.

 

그렇다고 ‘이해에 들어온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사랑이 되면 그것이 곧 결혼이다’라는 하나의 고정된 거듭남 공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특히 영적 인간의 진행을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표현일 수 있지만, 앞의 AC.52-53에서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4의 더 근본적인 요점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로 변한다는 데 있지 않고,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우리가 앞에서 보아 온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생명은 한쪽 기능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AC.54 자체는 ‘이해 = 진리 = 신앙’, ‘의지 = 선 = 사랑’이라는 모든 대응 관계를 한꺼번에 체계화하는 글은 아닙니다. 지금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만큼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스베덴보리는 이 태고교회에서 하나의 언어 습관이 비롯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교회 자체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딸’과 ‘처녀’, 예를 들어 ‘시온의 처녀’, ‘예루살렘의 처녀’라고 불렸으며 또한 ‘아내’라고도 불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에서 교회가 여성적 표현으로 등장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여기서도 ‘교회 = 여자’라는 하나의 고정된 공식만 기억하기보다 왜 그런 표현이 사용되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AC.54가 직접 밝히는 이유는 ‘선에 대한 애정’입니다.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과 관련되기 때문에 딸·처녀·아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에 대해서는 창2:23과 창3:15에서 더 보게 될 것이라고 직접 예고합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 ‘아내로서의 교회’, ‘여자와 여자의 후손’, ‘남편과 아내의 모든 상응’을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AC 자체가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하므로 그때까지 남겨 두는 것이 오히려 전체 흐름을 따라가는 좋은 독법입니다.

 

AC.54에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상응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외적인 것을 보면서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인 것을 생각했고, 거기서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주님께로 생각이 향했습니다. 상응은 그들에게 외워 둔 상징 사전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AC를 읽으며 상응을 공부할 때에도 중요한 주의를 줍니다. ‘남자 = 이해’, ‘여자 = 의지’라고 외우는 것만으로 태고교회의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아닙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의 시선은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내적인 것에서 천적인 것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께 향합니다. 상응의 목적은 자연적인 상징 자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더 내적인 것과 주님을 보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 안에서 결혼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그들의 실제 결혼은 행복과 기쁨의 주된 근원이었고, 그 행복의 근원을 더 높은 천상의 결혼에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해와 의지가 하나로 작동하는 것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로 다른 둘이 각자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채 하나로 작동하는 것이 결혼이라는 표현 속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AC.54의 중심을 ‘남자는 이성적이고 여자는 감정적이다’라는 자연적 성별 구분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실제 결혼은 중요하지 않고 인간 내면의 이해와 의지만 중요하다고 읽어서도 안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자연적인 결혼은 더 내적인 결합을 비추는 귀한 표상이었고, 그들은 자기들의 결혼의 행복이 천상의 결혼에서 온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결국 AC.54는 창1:27의 ‘남자와 여자’를 통해 인간 안의 두 기능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와 의지는 구별되지만 하나로 작동할 때 ‘결혼’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이 결혼의 언어는 인간 개인 안에서 끝나지 않고 교회를 ‘딸’, ‘처녀’, ‘아내’라고 부르는 말씀의 표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결합의 시선은 더 깊이 들어가면 천적인 것으로, 마침내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셨던 주님께 향합니다.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 심화 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심화1. ‘천상의 결혼’이란 무엇인가? AC.54에는 매우 중요한 표현 하나가 등장합니다. ‘천상의 결혼’(heavenly marriage)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들의 결혼이 주는 행복이 이 천상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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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5, 창1:28, ‘결혼의 열매 : 신앙과 사랑의 결합에서 생육과 번성이 일어나는 거듭남의 확장'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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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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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뒤 곧바로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무엇을 그렇게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며, 왜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우리가 대신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AC.49는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 ‘섭리적으로 감추어 두셨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확정한다면 그것은 AC.49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우리의 추론이 됩니다.

 

이 문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에게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문제에 관하여 여기 기록한 것보다 훨씬 더 말할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그것을 AC.49에서는 아직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의도적으로 유보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상을 이 한 문장만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이 아무 의미 없는 편집상의 메모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설명하려는 본문의 중심에 필요한 만큼 말하고, 다른 주제는 뒤로 남겨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AC.49의 중심은 태고교회의 현현 방식 자체를 상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왜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문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직후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이어집니다. 따라서 AC.49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태고교회와 주님의 교통에 관한 모든 세부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과 그것이 태고교회의 ‘사람’ 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자연계의 대화 장면처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주님께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그 현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각되었는지, 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했는지, 얼마나 자주 그러했는지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적 눈으로 보았다’, ‘내적 시야가 열렸다’와 같은 세부를 AC.49의 설명인 것처럼 덧붙이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영계 경험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및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의 ‘얼굴과 얼굴’ 교통이 정확히 같은 방식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서로 관련하여 연구할 수 있는 주제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가장 안전한 답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는 더 말할 것이 많이 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것을 다루지 않겠다.’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그가 직접 밝히지 않았으므로 열린 채로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는 독법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유보가 AC.49의 중심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놀라운 영적 경험 자체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짧게 언급하고 곧바로 더 중요한 문제, 곧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로 돌아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고, 자기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AC.49에서 지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을 때에도 좋은 원칙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완성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한 문장을 만났다고 해서 관련 교리를 모두 끌어와 그 빈칸을 채우기보다, ‘지금 이 글이 말하는 만큼’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AC의 긴 흐름 속에서 어떤 주제가 처음에는 짧게 언급되고 이후 점차 자세해지는 과정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는 신비한 비밀을 암시하므로 우리가 그 내용을 추측해야 한다는 초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고 경계를 그은 문장입니다. 그 경계를 존중하면서 AC.49가 지금 밝히는 핵심, 곧 주님이 최고의 뜻에서 유일한 ‘사람’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는 데 집중하는 것이 이 문장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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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창1:26)

 

AC.49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 주님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man)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사람’(men)이라고 했고, 자기 자신을 그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안에서 인식된 것들, 곧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된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of man)이라 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These they said were “of 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 예언서들에서 ‘사람’(man)과 ‘인자’(the son of man)는 최고의 뜻으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 of 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man)은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최고의 뜻으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이 때문에 주님은 예언자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같은 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 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도 자신을 자주 ‘인자’(the son of man), 곧 사람이라 하시며, 다니엘에서와 같이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여기 ‘하늘 구름’(The clouds of heaven)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power and great glory)은 말씀의 속뜻을 뜻합니다. 이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옵니다. The “clouds of 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는 창1:26의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이제 ‘사람’이라는 말 자체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앞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영적 인간’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사람’이라고 하며, 더 근본적으로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AC.49의 대답은 매우 강렬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자기들 자신조차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당황스러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나 AC.49가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이나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과 태고교회의 영적 인식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참된 사람됨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자기 안에서 ‘사람의 것’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AC.49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모든 진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단순히 사람이 선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48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9에서는 같은 원리가 ‘사람됨’에 적용됩니다.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가리키며, 속뜻에서는 주님에게서 지혜와 총명을 받아 거듭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만이 참 사람’이라는 말을 인간을 낮추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사람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생명을 만들어 내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갑니다. 따라서 이 말의 초점은 ‘누가 인간 자격이 있는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참된 영적 생명의 근원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49의 첫 문장에는 또 하나 매우 놀라운 내용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해 ‘많이 말할 수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상상하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과, 바로 이것이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유보 문장은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일으키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사람’과 ‘인자’는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에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모든 성경 인용을 읽는 열쇠입니다.

 

렘4:23,25에서 예레미야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 빛이 없고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AC.49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사람’이라는 말이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서 ‘사람’의 속뜻을 지혜와 총명, 따라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사람이 없다’는 표현 역시 그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함께 나오는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표현도 앞의 AC.40에서 새가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된다고 설명한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49는 여기서 예레미야 전체의 황폐 상태를 단계별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세밀하게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45:11-12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속뜻의 ‘사람’을 거듭난 사람으로, 최고의 뜻의 ‘사람’을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과 연결합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자연계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의 ‘사람’이라는 표현에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겔1:26은 주님께서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보여 주는 직접적인 예로 인용됩니다. 에스겔은 보좌 위에 ‘사람의 모양 같은’ 형상을 봅니다. AC.49는 이 환상의 보좌나 남보석 등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것이 예언자들의 환상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최고의 뜻에서 ‘사람’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논증에 사용됩니다.

 

단7:13-14에서는 그 표현이 ‘인자’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니엘에게 보이신 분이 ‘인자’, 곧 ‘사람’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같은 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인자의 왕국과 권세에 관한 모든 세부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자’라는 호칭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인용의 직접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복음서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자주 ‘인자’라고 부르셨으며, 마24:30에서는 다니엘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49는 ‘사람’이라는 주제와 함께 말씀의 문자 의미와 속뜻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짧게 엽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 구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큰 영광’이 말씀의 속뜻을 뜻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며, 바로 거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AC.49가 직접 말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속뜻을 깨닫는 순간 곧 인자의 재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이 확실히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심리나 도덕적 교훈을 흥미롭게 찾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사람’ 역시 결국 인간 자신에게서 설명이 완성되지 않고,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형상의 원형이신 주님을 보아야 한다는 방향이 여기서 열립니다.

 

이 점에서 AC.49는 앞의 AC.48과 다음 글들을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49는 곧바로 인간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먼저 주님을 바라봅니다.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 참으로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도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위대함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하는 사람됨과 관계됩니다.

 

동시에 여기서 ‘거듭난 사람만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사람의 사회적 가치나 존엄을 분류하는 글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이 최고의 뜻과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글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스베덴보리의 매우 깊은 인간론을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는 주장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결국 AC.49가 말하는 ‘사람’의 비밀은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 안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소유라고 여기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을 ‘사람’이라 불렀고, 주님에게서 온 것들만을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서의 ‘사람’과 ‘인자’, 에스겔과 다니엘의 사람 형상, 복음서의 인자, 그리고 말씀의 구름과 영광까지 이어지는 모든 인용은 결국 이 중심을 향합니다.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의 참된 지혜와 총명과 사람됨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깁니다.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심화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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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창1:26, ‘하나님의 형상 : 주님의 통치가 천사와 영들을 통해 사람 안에 흐르는 상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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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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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을 경험합니다. 국기가 한 나라를 나타내고, 왕관이 왕권을 나타내며, 결혼반지가 부부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표상’은 사람이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상징보다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인물이나 장소, 사물이나 행위가 ‘표상한다’고 할 때에는 그 외적인 것이 말씀 안에서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제사는 문자적으로는 실제로 행해진 종교의식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제사들이 주님과 주님께 속한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라는 외적인 의식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상적 기능을 합니다.

 

이 점에서 ‘표상’과 단순한 ‘비유’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는 어떤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을 끌어와 비교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표상은 단지 설명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문학적 장치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이 실제로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상하도록 말씀 안에 배열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집트와 가나안, 성막과 성전, 제사와 절기 같은 것들이 문자적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것이 표상적 의미를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자적 이야기나 역사적 차원을 곧바로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상한다’는 말의 핵심은 외적인 것 안에 그것이 나타내는 더 내적인 것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그 문자가 나타내고 있는 영적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에서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것을 몸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과 그 안의 나무와 강, 뱀과 열매 같은 것들도 이후 AC의 해설을 따라가면 각각 태고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에 관한 것을 표상하고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임의로 ‘이것은 이것을 상징한다’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질서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상응과 속뜻의 연결을 따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AC.4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안에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문장이 앞으로 AC에서 ‘표상’이라는 말을 수없이 만나게 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이 단지 자연계의 대상들로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에 관한 영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 ‘외적인 것이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표상이 자의적인 상징 놀이가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각각의 표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해당 문맥에서 하나씩 확인해 가야 합니다. (AC.4 심화 1)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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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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