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2:9)

 

AC.102

‘나무’(tree)는 퍼셉션을 뜻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tree desirable to behold)는 진리의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tree good for food)는 선의 퍼셉션을 뜻합니다.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A “tree” signifies perception; a “tree desirable to behold,” the perception of truth; a “tree good for food,” the perception of good; the “tree of live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해설

AC.102는 창2:9에 나오는 여러 ‘나무’의 속뜻을 먼저 한꺼번에 제시합니다. ‘나무’ 자체는 퍼셉션을 뜻하고, 그 가운데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진리의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의 퍼셉션을 뜻합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에서,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나무’를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교리를 뜻한다고 하지 않고 ‘퍼셉션’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에덴동산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했습니다(AC.98-101). 그러므로 그 동산에서 자라는 나무들도 그 사람 안에 독립적으로 축적된 지식의 목록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와 ‘먹기에 좋은 나무’가 각각 진리와 선의 퍼셉션을 뜻하는 것도 이 문맥 안에 있습니다.

 

특히 ‘생명나무’가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와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사랑이 근원이 되고 신앙이 거기서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곧바로 ‘감각이나 기억지식은 악하다’고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앞의 여러 번호에서도 이성과 기억지식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놓여야 함을 보았습니다. AC.102에서 대비되는 것은 지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신앙의 근원과 질서입니다.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려는 질서가 서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AC.102는 아직 이 각각의 의미를 자세히 증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창2:9의 여러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제시하는 개요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기본 구조를 붙들고, 이어지는 설명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AC.102 해설)  

 

심화

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 심화 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 심화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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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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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1, 창2:8, ‘동쪽은 주님을 뜻하며, 기도할 때 동쪽을 향한 표상적 관습’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주님이 ‘동쪽’(east)이시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the Lord is the “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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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안으로 흘러드시지만, 그의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싸우기 때문에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사람 자신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통하여[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없으므로 그는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이와 같이 지금까지 영적 인간에게서 뒤집혀 있던 질서가 이제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된 것으로 묘사되며, 이 질서, 곧 이 사람을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garden in Eden in the east)이라 합니다. 가장 높은 뜻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동쪽 에덴에 심으신 동산’(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은 주님 자신입니다. 가장 내적인 뜻, 곧 보편적인 뜻에서는 주님의 나라와,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놓이는 천국입니다. 그때 사람의 상태는 천국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 심지어 그의 말과 행동까지도 열려 있으며, 참으로 주님으로부터 열려 있고, 그 안에 천적이고 영적인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 하나하나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으며,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그는 퍼셉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Life, or the order of life, with the spiritual man, is such that although the Lord flows in, through faith,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in ejus intellectualia, rationalia, et scientifica], yet as his external man fights against his internal man, it appears as if intelligence did not flow in from the Lord, but from the man himself, through the things of memory and reason [per scientifica et rationalia]. But the life, or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is such that the Lord flows in through love and the faith of love into the things of his understanding, reason, and memory, and as there is no combat between the internal and the external man, he perceives that this is really so. Thus the order which up to this point had been inverted with the spiritual man is now described as restored with the celestial man, and this order, or man, is called a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the supreme sense, the “garden planted by Jehovah God in Eden in the east” is the Lord himself. In the inmost sense, which is also the universal sense, it is the Lord’s kingdom, and the heaven in which man is placed when he has become celestial. His state then is such that he is with the angels in heaven, and is as it were one among them; for man has been so created that while living in this world he may at the same time be in heaven. In this state all his thoughts and ideas of thoughts, and even his words and actions, are open, even from the Lord, and contain within the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for each one [of these] has the Lord’s life within it, which enables him to have perception.

 

해설

AC.99는 앞의 AC.98에서 ‘동쪽 에덴동산’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한다고 한 이유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두 사람 모두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차이는 주님께서 흘러드시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유입이 어떤 질서 안에서 이루어지며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퍼셉션하는가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도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십니다. 그러나 이때에는 겉 사람이 아직 속 사람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실제 질서가 그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성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통하여 생겨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뒤집혀 있던 질서’라는 말은 주님께서 실제로 유입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그 유입의 참된 질서를 그대로 퍼셉션하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이 질서가 회복됩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고,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도 그쳤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의 지성과 생명이 실제로 어디에서 오는지를 퍼셉션합니다. 이것은 AC.91에서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고 섬기기 시작하면 싸움이 그치고 평온이 뒤따른다고 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흘러드는 생명의 질서 안에 놓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회복된 질서, 더 정확히는 이러한 질서 안에 있는 사람을 ‘동쪽 에덴에 있는 동산’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한 사람의 거듭남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가장 높은 뜻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쪽 에덴에 심으신 동산’이 주님 자신이며, 가장 내적인 뜻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뜻에서는 주님의 나라와 천국을 뜻합니다.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천국의 천사들과 함께 있으며 마치 그들 가운데 하나인 것과 같은 상태에 놓입니다. 사람은 본래 이 세상에 살면서 동시에 천국에도 있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부분은 그러한 사람의 삶 전체가 어떤 질서 안에 놓이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의 생각과 생각의 관념들뿐 아니라 말과 행동까지 열려 있으며, 그 안에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그의 내면에 어떤 특별한 종교적 생각이 더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 모든 것 하나하나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천적 인간은 자신의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동쪽 에덴동산’은 아름다운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이 흘러들고 그 질서가 사람의 이해와 이성, 기억지식, 생각과 말과 행동에까지 이어지는 천적 인간의 온전한 생명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AC.99 해설)  

 

심화

1.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99 심화 1,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99 심화1.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99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질서가 ‘뒤집혀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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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0, 창2:8, ‘에덴은 사랑을, 동산은 지성을 뜻함을 보여 주는 이사야의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0‘동산’(garden)이 지성을 뜻하고, ‘에덴’(Eden)이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도 나타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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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동쪽 에덴동산,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 (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동산’(garden)은 지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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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

생명을 ‘숨을 내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호흡은 그들의 후손들에게서 점차 변화하였습니다. 이 호흡에 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태고 사람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다른 삶에 있는 사람들도 그러하지만,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그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wind)에 비유한 이유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사람의 거듭남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하십니다.주1 The reason why life is described by “breathing” and by “breath” is also that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perceived states of love and of faith by states of respiration, which were successively changed in their posterity. Of this respiration nothing can as yet be said, because at this day such things are altogether unknown.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well acquainted with it, and so are those who are in the other life, but no longer anyone on this earth, and this was the reason why they likened spirit or life to “wind.” The Lord also does this when speak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in John:1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3:8) The wind bloweth where it listeth, and thou hearest the voice thereof, and knowest not whence it cometh, or whither it goeth; so is everyone that is born of the spirit (John 3:8).

 

시편에서도 이와 같습니다. So in David: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33:6) By the word of Jehovah were the heavens made, and all the army of them by the breath of his mouth (Ps. 33:6).

 

29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30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104:29, 30) Thou gatherest their breath, they expire, and return to their dust; thou sendest forth thy spirit, they are created, and thou renewest the faces of the ground (Ps. 104:29–30).

 

‘숨’(breath)[spiraculum]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는 것은 욥기에서도 분명합니다. That the “breath” [spiraculum] is used for the life of faith and of love, appears from Job: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욥32:8) He is the spirit in man, and the breath of Shaddai giveth them understanding (Job 32:8).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욥33:4) The spirit of God hath made me, and the breath of Shaddai hath given me life (Job 33:4).

 

주1, 원어에서는 ‘바람’(wind), ‘영’(spirit), ‘숨’(breath)이 모두 같은 단어로 표현됩니다. In the original languages, “wind,” “spirit,” and “breath” are all expressed by the same word. [Reviser]

 

해설

AC.97은 AC.96에 이어 왜 말씀에서 생명을 ‘숨을 내쉼’과 ‘숨’으로 묘사하는지를 설명합니다. AC.96에서는 콧구멍과 냄새가 퍼셉션과 연결되고,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기 때문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다고 했습니다. AC.97은 여기에 또 하나의 이유를 덧붙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셉션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독자에게 매우 낯선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를 인정하여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들이 전혀 알려져 있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전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태고교회의 호흡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를 현대의 호흡법이나 신체 현상으로 재구성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AC.97이 직접 알려 주는 범위는 그들의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 사이에 오늘날에는 잃어버린 어떤 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고대 사람들이 영 또는 생명을 ‘바람’에 비유한 이유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예로 요3:8을 듭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말씀하시면서 ‘바람이 임의로 불매’라고 하신 뒤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다’고 하십니다. AC.97에서는 바람과 영과 생명이 서로 무관한 표현들이 아니라, 거듭남과 생명을 설명하는 하나의 말씀의 언어 안에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33:6과 시104:29-30도 같은 이유로 인용됩니다. 여호와의 ‘입 기운’으로 하늘의 만상이 이루어지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시면 피조물은 먼지로 돌아가지만 주의 영을 보내시면 다시 창조되고 지면이 새롭게 됩니다. 특히 시104편의 ‘먼지’, ‘영’, ‘창조’, ‘지면을 새롭게 함’은 창2:7의 흙, 생명의 숨, 사람의 형성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생명의 근원은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마지막으로 욥32:8과 33:4는 ‘숨’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가리킨다는 것을 직접 뒷받침합니다. 전능자의 숨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며, 전능자의 숨이 사람에게 생명을 줍니다. 따라서 AC.94에서 ‘생명의 숨’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풀이한 것은 창2:7 한 구절만의 고립된 해석이 아니라 말씀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숨-영-생명-깨달음-창조’의 연결 속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AC.97의 핵심은 단순히 ‘숨은 생명을 뜻한다’는 대응 관계 하나에 있지 않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과 신앙의 상태와 호흡의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퍼셉션되었고, 말씀에서도 바람과 숨과 영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거듭남을 나타내는 데 사용됩니다. 창2:7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말씀 전체의 생명 언어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97 해설)

 

심화

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 심화 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 심화1. 태고교회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과 신앙의 상태를 ‘호흡의 상태’로 퍼셉션했는가? AC.97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사랑과 신앙의 상태들을 호흡의 상태들로 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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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8, 창2:8, ‘동쪽 에덴동산,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 (AC.98-101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창2:8) AC.98‘동산’(garden)은 지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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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6, 창2:7, ‘콧구멍과 향기와 퍼셉션, 사랑과 신앙의 생명을 불어넣으심’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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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6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콧구멍에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고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고대에는, 그리고 말씀에서는 ‘콧구멍’(nostrils)으로 냄새로 말미암아 기분 좋은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이것은 퍼셉션을 뜻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번제와 주님 및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는 것들로부터 여호와께서 ‘안식의 향기를 맡으셨다’(smelled an odor of rest)고 거듭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므로, ‘그가 그의 콧구멍을 통하여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주님을 ‘우리 콧구멍의 숨’(breath of the nostrils)이라 합니다(애4:20). As to its being said that “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case is this: In ancient times, and in the Word, by “nostrils” was understood whatever was grateful in consequence of its odor, which signifies perception. On this account it is repeatedly written of Jehovah, that he “smelled an odor of rest” from the burnt offerings, and from those things which represented him and his kingdom; and as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are most grateful to him, it is said that “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Hence the anointed of Jehovah, that is, of the Lord, is called the “breath of the nostrils” (Lam. 4: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애4:20)

 

또한 주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심’(breathing on his disciples)으로 같은 것을 뜻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nd the Lord himself signified the same by “breathing on his disciples,” as written in John: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요20:22)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ye the Holy Spirit (John 20:22).

 

해설

AC.96은 AC.94의 ‘그의 콧구멍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라는 표현에서 왜 하필 ‘콧구멍’과 ‘숨’이 사용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AC.94에서는 ‘생명의 숨’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시는 것을 뜻한다고 했고, AC.95에서는 신앙의 생명이 겉 사람을 준비하며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96은 그 생명이 왜 콧구멍을 통하여 불어넣어지는 것으로 묘사되는지를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고대와 말씀에서 ‘콧구멍’이 냄새로 말미암아 기분 좋은 것과 연결되며, 이것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코 = 퍼셉션’이라는 상응 공식을 하나 더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냄새를 맡아 어떤 것을 기분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모습과 퍼셉션 사이의 관계를 스베덴보리가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천적 인간의 퍼셉션은 앞에서도 계속 등장했으며, 이제 그것이 ‘콧구멍’이라는 말씀의 표현과 연결됩니다.

 

이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표현이 ‘안식의 향기’입니다. 번제와 주님 및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는 것들에 관하여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맡으셨다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물질적인 연기나 냄새 자체를 즐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AC.96은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의 향기는 그것이 표상하는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과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생명의 숨’도 콧구멍을 통하여 불어넣으시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AC.94에서 그 생명이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했는데, AC.96에서는 바로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분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콧구멍, 향기, 퍼셉션, 사랑과 신앙, 생명의 숨은 서로 떨어진 주제들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애4:20의 ‘우리 콧구멍의 숨’과 요20:22의 주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 하신 말씀은 이 의미를 더욱 확증하기 위해 인용됩니다. 특히 요20:22에서는 숨을 내쉬는 행위와 성령을 받는 일이 직접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2:7의 ‘생명의 숨’ 역시 단순한 육체적 호흡에 머무르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전달이라는 속뜻을 갖는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렇게 AC.94-96은 하나의 연속된 설명을 이룹니다. 주님께서 겉 사람을 형성하시고, 그에게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주시며, 그 생명이 겉 사람에까지 미쳐 그를 살아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AC.96은 이 생명이 퍼셉션과 사랑과 신앙의 질서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콧구멍’, ‘향기’, ‘숨’이라는 말씀의 표현들을 통하여 보여 줍니다. (AC.96 해설)

 

심화

1. 왜 ‘콧구멍’은 퍼셉션을 뜻하는가?

 

AC.96 심화 1, 왜 ‘콧구멍’은 퍼셉션을 뜻하는가?

AC.96 심화1. 왜 ‘콧구멍’은 퍼셉션을 뜻하는가? AC.96에서 스베덴보리는 고대와 말씀에서 ‘콧구멍’으로 냄새로 말미암아 기분 좋은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이것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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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7, 창2:7, '호흡과 숨이 생명을 뜻하는 이유, 태고교회의 퍼셉션'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생명을 ‘숨을 내쉼’(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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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5, 창2:7, ‘신앙의 생명은 준비하고, 사랑의 생명은 그를 ‘사람’이 되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을 다룹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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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이 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루는데, 앞 장에서는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그 차이를 알 수 있도록 각각의 성질을 간략히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첫째, 죽은 사람은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하지만,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에서 그렇게 하며, 또한 그 원리에서 행동합니다. 천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그 사랑에서 행동합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 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 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 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 or a dead man, 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 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 First, then, 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 and this he adores. 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 and not so much from love. 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 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 죽은 사람을 움직이는 목적들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만을 향하며, 그는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도, 주님이 누구신지도 알지 못합니다. 혹 안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들은 영원한 삶을 향하며, 그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들은 주님을 향하며, 그분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Second: 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 or what the Lord is; or should he know, 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 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 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 죽은 사람은 싸움 가운데 있을 때 거의 언제나 굴복하며, 싸움 가운데 있지 않을 때에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므로 그는 종입니다. 그를 붙들어 매는 결박은 외적인 것으로,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재산과 이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평판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들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언제나 승리합니다. 그를 제어하는 결박은 내적인 것이며, 양심의 결박이라 합니다.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그것들을 업신여기므로 정복자라 합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결박에도 제어되지 않고 자유롭습니다. 그의 결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Third: 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 and when not in combat, 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 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 such as the fear of the law, of the loss of life, of wealth, of gain, 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 but is always victorious; 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 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 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 he despises them, 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 but is free. His bonds, which are not apparent, 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AC.81은 창1에서 다룬 영적 인간과 창2에서 다루는 천적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죽은 사람까지 포함한 세 상태를 직접 비교합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는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숭배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AC.67-72에서 육체의 죽음과 다른 삶을 다룬 직후라고 해서 여기의 ‘죽은 사람’을 사망한 사람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81의 세 구별은 한 인간이 거듭남 가운데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 번째 차이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근원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육체와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선과 진리를 인정하지만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에서’ 그렇게 하며 그 신앙에서 행동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믿을 뿐 아니라 퍼셉션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랑에서 행동합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신앙이 없어지고 사랑만 남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고, 행동 역시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질서가 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차이는 사람을 움직이는 ‘목적’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목적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에 머뭅니다. 영적 인간의 목적은 영원한 삶을 향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의 목적은 먼저 주님을 향하고, 그분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여기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은 모두 주님과 영원한 삶을 향하지만 그 질서가 다릅니다. AC.73에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나아간다고 했던 말은 단순히 같은 것을 더 강하게 믿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삶의 가장 깊은 목적의 질서가 달라지는 변화와도 관계됩니다.

 

세 번째 차이는 영적 싸움과 사람을 제어하는 결박에서 나타납니다. 죽은 사람은 싸움에서 거의 언제나 굴복하고, 싸움이 없을 때에는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그를 제어하는 것은 법이나 생명, 재산, 이익, 평판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외적인 결박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으면서 승리하고, 그를 제어하는 것은 양심이라는 내적인 결박입니다. 천적 인간은 더 이상 같은 방식의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이 공격해 와도 그것들을 업신여깁니다. 그에게도 결박이 있지만 그것은 외적으로 강제하는 결박처럼 드러나지 않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으로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는 겉으로 보기에 어떤 결박에도 제어되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이 세 구별은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을 서로 완전히 별개의 인간 종류로 나누기 위한 분류표라기보다, 앞 장과 이 장에서 다루는 거듭남의 상태 차이를 이해하게 하는 설명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천적 인간을 단순히 영적 인간보다 ‘더 높은 사람’이라고만 이해하면 AC.81의 세밀한 구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는 차이는 선과 진리를 어디에서 받아들이는가, 무엇이 삶의 주된 목적이 되는가, 악과 거짓 앞에서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 세 기준을 붙들면 앞으로 창2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훨씬 정확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81 해설)

 

 

 

AC.82, 창2:1,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 (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이 말씀들은 사람이 이제 ‘여섯째 날’(sixth day)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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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의 퍼셉션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탐구’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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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 (16-17절)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6, 17절)

 

해설

AC.80은 창2:16-17의 개요이며,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질서에 하나의 중요한 제한을 제시합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과 같은 사람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아는 것’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이 금지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금지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알려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2:16-17의 금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등장한다고 해서 지식이나 이성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AC.75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말했고, AC.78에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하며 이것들까지도 지혜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80의 문제는 인간이 알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 및 신앙의 아르카나를 무엇으로부터 알고 판단하려 하는가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AC.77에서는 에덴동산의 보기에 좋은 나무들이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80은 그 퍼셉션의 근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을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직감이나 자기 확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뜻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그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것들’은 인간이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외적인 것들과 관계되고, ‘기억지식’은 사람이 배우고 경험하여 기억에 받아들인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AC.78에서 기억지식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AC.80은 자연계의 사실을 관찰하거나 기억지식을 배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적인 것의 진실 여부를 인간 자신이 결정하려는 질서를 경계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질문이나 연구 자체의 금지로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의 속뜻을 밝히면서 끊임없이 설명하고 구별하고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C.80에서 금지되는 것은 탐구라는 행위 자체라기보다, 그 앞에 붙어 있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라는 방식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 하는 것이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80을 반지성주의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자연적인 사실을 감각과 관찰을 통하여 확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것은 ‘신앙의 아르카나’입니다. 자연적인 것들을 알아보는 데 사용하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그대로 신적인 것의 최종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가 단순한 인식 방법의 차이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 여기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닙니다. 창2:17의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이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AC.73에서 거듭남 이전의 사람이 ‘죽어 있던’ 상태라고 한 것과 AC.80에서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AC.79와 AC.80을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도 보입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두 번호 모두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가지거나 아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방향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를 여기서 proprium이나 인간의 자유에 관한 전체 교리로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AC.79와 AC.80이 보여 주는 직접적인 연결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80은 따라서 창2:16-17의 금령을 ‘알지 말라’는 명령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아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할 때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는 것이, 이 개요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16-17에 관하여 먼저 제시하는 핵심입니다. (AC.80 해설)

 

심화

1. 왜 개역개정에는 ‘열매’가 들어가 있는가? (창2:16-17)

 

AC.80 심화 1, 왜 개역개정에는 ‘열매’가 들어가 있는가? (창2:16-17)

AC.80 심화1. 왜 개역개정에는 ‘열매’가 들어가 있는가? (창2:16-17) 창2:16-17을 개역개정과 AC에 실린 영어 성경으로 함께 읽으면 작은 차이 하나가 눈에 띕니다. 개역개정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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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루는데, 앞 장에서는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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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그러한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15절) The celestial man is su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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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그 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동산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뜻하고, 지식[scientiae]의 나무는 신앙을 뜻합니다. (8-9절) 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 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 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verses 8–9).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8, 9절)

 

해설

AC.77은 천적 인간의 ‘지성’이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개요로 보여 줍니다. AC.75에서는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을 다루었고, 이제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이 문맥에서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의 지성과 관계되는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다만 왜 ‘에덴’이고 왜 ‘동쪽’인지까지 AC.77이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그 구체적인 속뜻은 뒤따르는 해설을 기다려야 합니다.

 

동산 안의 나무들도 구별됩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진리와 선의 ‘지식’을 말하지 않고 ‘퍼셉션’을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개요만 가지고 퍼셉션의 성격을 모두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천적 인간의 지성 안에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이 있으며, 창2:9의 서로 다른 나무들이 그것을 묘사한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두 나무가 언급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뜻하고,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뜻합니다. 이 대목은 이후 창2와 창3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특히 ‘지식의 나무’ 자체를 처음부터 악한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AC.77에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분명히 ‘신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후 지식의 나무와 관련하여 문제가 생길 때에는 신앙 자체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단순화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이 어떤 질서와 관계 안에 놓이는지가 어떻게 설명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AC.77은 이처럼 천적 인간의 지성을 하나의 동산으로, 그 안의 나무들을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으로, 그리고 그 중심적인 두 나무를 사랑과 신앙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창2:8-9의 상세 해설이 아니라 개요입니다. 그러므로 에덴, 동쪽, 나무, 보는 것, 먹는 것,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를 각각 고정된 상응표처럼 미리 완성하기보다, 지금은 이 모든 것이 천적 인간의 지성 안에서 서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전체 그림을 붙들고 뒤따르는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AC.77 해설)

 

 

 

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강,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것들’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뜻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흘러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속한 모든 것에 대한 앎[cognitio]입니다. 이것들은 속 사람에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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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창2:1-17 개요, ‘그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 (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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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심화

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비교적 익숙하지만 ‘천적 인간’이라는 말은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한국어에서 ‘천적’이라고 하면 흔히 ‘서로 잡아먹는 관계의 천적(天敵)’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번역에서 사용하는 ‘천적’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어 celestial을 옮긴 말로, ‘하늘의’, ‘천국적인’, 더 정확하게는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천적 차원에 속한 성질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celestial과 spiritual을 매우 자주 구별합니다. 우리말로는 각각 ‘천적’과 ‘영적’이라고 옮깁니다. 둘 다 자연적·세속적인 것과 대비되는 넓은 의미에서는 영적인 것에 속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전문적인 용법에서는 서로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천적’은 특히 사랑과 선, 의지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되고, ‘영적’은 신앙과 진리, 이해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됩니다.

 

AC.52는 이 차이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와 ‘새’가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 ‘짐승’이 나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을 설명하는 시8에서는 ‘짐승’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새’와 ‘물고기’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어느 쪽에는 사랑이 있고 어느 쪽에는 사랑이 없다’가 아니라 ‘무엇이 먼저인가’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 나타나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 나타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을 ‘머리로만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나 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거듭난 인간이며 AC.48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마찬가지로 천적 인간을 ‘생각이나 진리가 필요 없는 사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52에서 천적 인간을 나타내는 순서에도 새와 물고기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짐승이 먼저입니다. 이것은 이해와 진리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 이해에 속한 것들이 그 뒤에 놓이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 차이는 앞의 AC.51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 곧 닮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영적 인간은 ‘빛의 아들’과 ‘친구’라고 불리고,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호칭들을 곧바로 높고 낮은 신분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두 상태의 성질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AC.52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는 ‘사랑으로 선을 행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의 다스림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한다는 것과 대비됩니다.

 

이 대목을 쉽게 설명하려고 ‘영적 인간은 옳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천적 인간은 좋아서 선을 행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어느 정도 방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정확한 정의로 굳히면 곤란합니다. 영적 인간 역시 사랑으로 행동하며, 천적 인간 역시 진리와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인간의 차이는 단순히 ‘의무 대 자발성’보다 더 깊은 내적 질서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이후 설명까지 넓혀 보면 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선과 사랑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형성되는 ‘양심’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를 설명할 때는 천적 인간과 퍼셉션이 특별히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천적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 직감으로 안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퍼셉션은 단순한 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또한 양심이 퍼셉션보다 가치가 낮은 가짜 영적 기능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서로 다른 인간 상태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시는 서로 다른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적’이라는 말 자체도 여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어의 ‘천적’(天敵)이 아니라 celestial을 번역한 전문 용어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 자체에도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의 구별이 있으며,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천적’은 단순히 ‘아주 영적인’, ‘영적보다 한 단계 높은’이라는 정도 표현이 아니라 독특한 성질을 가진 범주입니다.

 

이 때문에 ‘영적 인간이 계속 성장하면 모두 천적 인간이 되는가?’라는 질문에도 조심해서 답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설명에서는 영적 인간 다음에 천적 인간이 등장하므로 하나의 더 깊어지는 흐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술에서는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 영적 천사와 천적 천사가 지속적으로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영적 단계 졸업 후 천적 단계로 승급한다’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두 상태를 완전히 관계없는 두 종류의 인간으로 떼어 놓는 것도 현재 창세기 해설의 흐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창1의 거듭남에서 창2의 더 내적인 상태로 이어지는 진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둘은 분명히 구별되지만, 그 관계의 모든 세부를 하나의 간단한 단계표로 만들지 않는다’는 태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어느 상태든 생명의 근원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AC.49-50에서 반복해서 본 것처럼 선과 진리와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영적 인간이 이해와 신앙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지성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며, 천적 인간이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사랑에서 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두 경우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서로 다른 질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AC에서 ‘영적’과 ‘천적’을 만나면 단순히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라고 번역해 읽기보다 먼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습니다. 대체로 ‘영적’은 진리·신앙·이해와, ‘천적’은 선·사랑·의지와 특별히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기계적인 일대일 사전처럼 적용해서는 안 되고 각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AC.52에서 가장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그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거듭난 인간이지만,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질서를 이루는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적’이라는 낯선 용어는 바로 그 차이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말입니다. 앞으로 태고교회, 퍼셉션, 창세기 2장,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을 읽어 갈수록 이 구별은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AC.52, 창1:26, ‘다스림의 방향 전환 : 이해에서 사랑으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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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심화

1. ‘형상’과 ‘모양’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

 

AC.51의 첫 문장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영적 인간은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 곧 닮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형상과 모양이 도대체 어떻게 다른 것인가? 형상은 조금 닮은 것이고 모양은 완전히 닮은 것이라는 뜻인가?’

 

먼저 AC.51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은 ‘형상’과 ‘모양’이 같지 않다고 분명히 구별합니다.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하고, 창세기 1장은 영적 인간을, 창세기 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두 말이 단순히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형상은 70퍼센트 닮은 상태이고 모양은 100퍼센트 닮은 상태’처럼 정도의 차이로만 이해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는 단순한 성숙도의 숫자 차이보다 더 깊습니다. AC가 앞으로 진행되면서 그는 두 인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 신앙과 사랑의 관계, 양심과 퍼셉션 등의 차이를 점차 설명합니다.

 

AC.51에서 가장 먼저 주어진 단서는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즉 형상에는 분명 원형을 따르고 닮는 관계가 있지만, 그것이 곧 모양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에 대응시킵니다.

 

이것을 앞의 AC.48과 연결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여섯째 상태에 이른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형상’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나 단순히 진리를 머리로만 아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영적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형상은 아직 미완성이고 모양만 완성이다’라고 단순화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영적 인간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참된 거듭남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형상’이라는 말 자체를 결함이나 실패의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아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닮음’은 ‘동일함’이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리 높은 천적 상태에 있어도 생명의 근원이 되지 않습니다. AC.39 이후 반복해서 본 것처럼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모양’ 역시 피조물이 창조주와 본질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AC.51보다 뒤의 설명들이 더 많은 빛을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구별하며,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선으로 인도되고, 천적 인간은 사랑과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설명할 때 ‘퍼셉션’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영적 인간은 머리로 살고 천적 인간은 가슴으로 산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48에서 이미 영적 인간도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행동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없고 천적 인간에게만 사랑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차이는 사랑의 유무보다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와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결합되는가에 더 깊이 관계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 인간이 계속 거듭나면 결국 천적 인간이 되는가?’ 현재 AC.51만으로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영적 인간과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을 구별하지만, 모든 개인의 거듭남을 ‘영적 단계 졸업 후 천적 단계 진입’이라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이후 저술에서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가 서로 구별되어 지속적으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영적’과 ‘천적’을 단순한 초급과 고급의 관계로만 생각하면 그의 전체 체계를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한편 창세기 1장과 2장의 연속된 설명 안에서는 분명 더 내적인 상태가 이어지는 흐름도 있습니다. 이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하므로 AC.51 한 문장만으로 ‘모든 영적 인간은 결국 천적 인간이 된다’거나 그 반대를 확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왜 AC.51은 영적 인간을 ‘빛의 아들’과 ‘친구’,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까요? 이 호칭들은 두 상태의 차이를 보여 주는 성경적 증거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곧바로 ‘친구보다 자녀가 한 단계 높은 신분’이라는 인간관계의 서열로 바꾸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1의 직접적인 목적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 서로 다른 호칭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빛의 아들’이라는 표현에는 영적 인간과 진리의 빛 사이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반면 ‘하나님의 자녀’에 관해 인용된 요1:13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성질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지만, AC.51은 이 한 글에서 그 차이를 모두 체계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설명을 기다리면서 이 구별을 열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형상’과 ‘모양’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둘 다 주님을 닮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지만 동일한 상태는 아닙니다. ‘형상’은 영적 인간에게, ‘모양’은 천적 인간에게 해당하며,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전자와 구별되는 더 내적인 성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단순히 ‘미완성 대 완성’, ‘낮은 단계 대 높은 단계’, ‘친구 대 아들’이라는 하나의 서열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AC를 계속 읽으면서 이 차이는 점점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그리고 이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의지와 이해의 질서를 살펴보면 AC.51의 짧은 구별이 왜 중요한지 더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렇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며,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이다. 형상은 모양 자체는 아니지만 모양을 따른다. 둘은 모두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거듭난 인간의 상태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둘의 내적 성질을 분명히 구별한다.’ 이것이 AC.51이 앞으로의 긴 설명을 위해 놓아 두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AC.51, 창1:26, ‘형상’과 ‘모양’ :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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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뒤 곧바로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무엇을 그렇게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며, 왜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우리가 대신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AC.49는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 ‘섭리적으로 감추어 두셨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확정한다면 그것은 AC.49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우리의 추론이 됩니다.

 

이 문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에게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문제에 관하여 여기 기록한 것보다 훨씬 더 말할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그것을 AC.49에서는 아직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의도적으로 유보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상을 이 한 문장만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이 아무 의미 없는 편집상의 메모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설명하려는 본문의 중심에 필요한 만큼 말하고, 다른 주제는 뒤로 남겨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AC.49의 중심은 태고교회의 현현 방식 자체를 상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왜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문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직후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이어집니다. 따라서 AC.49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태고교회와 주님의 교통에 관한 모든 세부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과 그것이 태고교회의 ‘사람’ 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자연계의 대화 장면처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주님께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그 현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각되었는지, 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했는지, 얼마나 자주 그러했는지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적 눈으로 보았다’, ‘내적 시야가 열렸다’와 같은 세부를 AC.49의 설명인 것처럼 덧붙이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영계 경험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및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의 ‘얼굴과 얼굴’ 교통이 정확히 같은 방식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서로 관련하여 연구할 수 있는 주제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가장 안전한 답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주제에는 더 말할 것이 많이 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것을 다루지 않겠다.’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그가 직접 밝히지 않았으므로 열린 채로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는 독법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유보가 AC.49의 중심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놀라운 영적 경험 자체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짧게 언급하고 곧바로 더 중요한 문제, 곧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로 돌아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고, 자기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AC.49에서 지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을 때에도 좋은 원칙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완성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한 문장을 만났다고 해서 관련 교리를 모두 끌어와 그 빈칸을 채우기보다, ‘지금 이 글이 말하는 만큼’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AC의 긴 흐름 속에서 어떤 주제가 처음에는 짧게 언급되고 이후 점차 자세해지는 과정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는 신비한 비밀을 암시하므로 우리가 그 내용을 추측해야 한다는 초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고 경계를 그은 문장입니다. 그 경계를 존중하면서 AC.49가 지금 밝히는 핵심, 곧 주님이 최고의 뜻에서 유일한 ‘사람’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는 데 집중하는 것이 이 문장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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