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으며, 이러한 행복과 기쁨으로 말미암아 퍼셉션 능력은 생명을 얻습니다. 태고교회가 누렸던 것과 같은 사랑의 생명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의 생명은 쓰임(use)을 행할 때, 곧 쓰임의 선과 진리 안에 있을 때 생명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쓰임으로부터, 쓰임을 통하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생명을 주십니다. 쓸모없는 것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는데, 쓸모없는 것은 무엇이든 버려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의 모양(likenesses)이었으며, 그러므로 퍼셉션 능력에 있어서는 주님의 형상(images)이 되었습니다.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것, 따라서 무엇이 신앙에 속하는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것 자체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곧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데서 기뻐합니다.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sisted not only in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but also in the happiness and delight arising from well doing; without such happiness and delight in doing what is good the perceptive faculty has no life, but by virtue of such happiness and delight it receives life. The life of love, and of the derivative faith, such as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is life while in the performance of use, that is, in the good and truth of use: from use, by use, and according to use, is life given by the Lord; there can be no life in what is useless, for whatever is useless is cast away. In this respec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likenesses of the Lord, and therefore in perceptive powers they became images of him. The perceptive power consists in knowing what is good and true, consequently what is of faith: he who is in love is not delighted in knowing, but in doing what is good and true, that is, in being useful.
해설
AC.503은 퍼셉션에 관한 설명을 한층 더 깊은 곳으로 이끕니다. 앞의 AC.502에서는 태고교회의 완전성이 선과 진리를 얼마나 ‘명료하게 퍼셉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참된 퍼셉션에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아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행할 때 느끼는 ‘행복과 기쁨’이 함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머리로 진리를 알아보는 능력이 아니라, 선을 알고 그 선을 행하기를 사랑하며 실제로 행할 때 기쁨을 느끼는 살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퍼셉션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정확하게 분별하더라도 그것을 행하기 싫어하고, 오히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데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태고교회가 가졌던 살아 있는 퍼셉션과는 다릅니다. 퍼셉션의 생명은 ‘진리를 아는 것’과 ‘선을 사랑하는 것’과 ‘그 선을 행하는 데서 기뻐하는 것’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 글의 중심 개념인 ‘쓰임’(use)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은 단순히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적인 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이 마음속 감정으로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이루는 행동과 섬김으로 나타날 때 사랑은 ‘쓰임’을 통해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사랑의 생명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의 생명’이 바로 쓰임을 행할 때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과 신앙은 삶에서 분리된 관념이 아니라, 쓰임이라는 실제적인 형태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쓰임으로부터, 쓰임을 통하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생명을 주신다’는 문장은 AC.503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명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아 다시 선한 쓰임으로 흘려보낼 때 살아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공로나 능력으로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주님이십니다. 다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인간 안에서 실제적인 쓰임으로 흘러갈 때, 인간은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쓰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흘러가고 나타나는 질서입니다.
이것은 왜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님의 모양’이었으며 퍼셉션 능력에 있어 ‘주님의 형상’이 되었는가 하는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끊임없이 선을 베풀고 생명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데서 행복과 기쁨을 느낄 때 그는 자신의 작은 범위 안에서 주님의 사랑의 성품을 반영하게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님의 모양과 형상이었다는 것은 외적인 모습이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이 선한 쓰임으로 흘러가는 그 내적인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음을 뜻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내용을 매우 선명하게 압축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것 자체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곧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데서 기뻐합니다.’ 이것은 지식과 삶의 관계를 정확히 자리매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퍼셉션 자체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아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앎은 목적이 아니라 행함을 위한 것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은 많아져도 영적 생명은 그만큼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503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말씀과 AC를 읽는 목적까지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더 많이 알고, 상응을 더 정확히 이해하며, 교리를 더 정교하게 정리하는 것 자체가 마지막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 모든 앎은 결국 ‘나는 이것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누구에게 어떤 선한 쓰임이 될 것인가’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을 아는 기쁨은 마침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기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바로 그때 진리는 사랑과 결합하고, 신앙은 삶이 되며,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은 실제적인 영적 생명으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AC.503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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