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다.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으며, 이러한 행복과 기쁨으로 말미암아 퍼셉션 능력은 생명을 얻습니다. 태고교회가 누렸던 것과 같은 사랑의 생명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의 생명은 쓰임(use)을 행할 때, 곧 쓰임의 선과 진리 안에 있을 때 생명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쓰임으로부터, 쓰임을 통하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생명을 주십니다. 쓸모없는 것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는데, 쓸모없는 것은 무엇이든 버려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의 모양(likenesses)이었으며, 그러므로 퍼셉션 능력에 있어서는 주님의 형상(images)이 되었습니다.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아는 것, 따라서 무엇이 신앙에 속하는지를 아는 데 있습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것 자체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곧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데서 기뻐합니다.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consisted not only in the perception of what is good and true, but also in the happiness and delight arising from well doing; without such happiness and delight in doing what is good the perceptive faculty has no life, but by virtue of such happiness and delight it receives life. The life of love, and of the derivative faith, such as the most ancient church enjoyed, is life while in the performance of use, that is, in the good and truth of use: from use, by use, and according to use, is life given by the Lord; there can be no life in what is useless, for whatever is useless is cast away. In this respect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likenesses of the Lord, and therefore in perceptive powers they became images of him. The perceptive power consists in knowing what is good and true, consequently what is of faith: he who is in love is not delighted in knowing, but in doing what is good and true, that is, in being useful.

 

해설

AC.503은 퍼셉션에 관한 설명을 한층 더 깊은 곳으로 이끕니다. 앞의 AC.502에서는 태고교회의 완전성이 선과 진리를 얼마나 ‘명료하게 퍼셉션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참된 퍼셉션에는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아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실제로 행할 때 느끼는 ‘행복과 기쁨’이 함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머리로 진리를 알아보는 능력이 아니라, 선을 알고 그 선을 행하기를 사랑하며 실제로 행할 때 기쁨을 느끼는 살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강하게 ‘선을 행하는 데서 오는 이러한 행복과 기쁨이 없다면 퍼셉션 능력에는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퍼셉션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정확하게 분별하더라도 그것을 행하기 싫어하고, 오히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데 기쁨을 느낀다면 그것은 태고교회가 가졌던 살아 있는 퍼셉션과는 다릅니다. 퍼셉션의 생명은 ‘진리를 아는 것’과 ‘선을 사랑하는 것’과 ‘그 선을 행하는 데서 기뻐하는 것’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 글의 중심 개념인 ‘쓰임’(use)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쓰임은 단순히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실제적인 선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랑이 마음속 감정으로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이루는 행동과 섬김으로 나타날 때 사랑은 ‘쓰임’을 통해 생명을 얻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고교회가 누렸던 ‘사랑의 생명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의 생명’이 바로 쓰임을 행할 때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과 신앙은 삶에서 분리된 관념이 아니라, 쓰임이라는 실제적인 형태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특히 ‘주님께서는 쓰임으로부터, 쓰임을 통하여, 그리고 쓰임에 따라 생명을 주신다’는 문장은 AC.503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명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소유하고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아 다시 선한 쓰임으로 흘려보낼 때 살아납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공로나 능력으로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주님이십니다. 다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인간 안에서 실제적인 쓰임으로 흘러갈 때, 인간은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쓰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흘러가고 나타나는 질서입니다.

 

이것은 왜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님의 모양’이었으며 퍼셉션 능력에 있어 ‘주님의 형상’이 되었는가 하는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주님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끊임없이 선을 베풀고 생명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선을 행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데서 행복과 기쁨을 느낄 때 그는 자신의 작은 범위 안에서 주님의 사랑의 성품을 반영하게 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님의 모양과 형상이었다는 것은 외적인 모습이 닮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랑이 선한 쓰임으로 흘러가는 그 내적인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었음을 뜻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모든 내용을 매우 선명하게 압축합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아는 것 자체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행하는 것, 곧 쓰임 있는 사람이 되는 데서 기뻐합니다.’ 이것은 지식과 삶의 관계를 정확히 자리매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퍼셉션 자체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아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앎은 목적이 아니라 행함을 위한 것입니다. 진리를 더 많이 알수록 그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여 선한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은 많아져도 영적 생명은 그만큼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503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말씀과 AC를 읽는 목적까지 돌아보게 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더 많이 알고, 상응을 더 정확히 이해하며, 교리를 더 정교하게 정리하는 것 자체가 마지막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그 모든 앎은 결국 ‘나는 이것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누구에게 어떤 선한 쓰임이 될 것인가’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을 아는 기쁨은 마침내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기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바로 그때 진리는 사랑과 결합하고, 신앙은 삶이 되며, 우리가 배우는 모든 것은 실제적인 영적 생명으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AC.503 해설)

 

 

 

창5:9, AC.500-503 심화 1,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후대 교회로 갈수록 흐려졌는가?’

창5:9, AC.500-503 심화1. ‘왜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후대 교회로 갈수록 흐려졌는가?’ AC.500-503을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태고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직접 퍼셉션할 수

bygrace.kr

 

 

 

창5:9, AC.502, ‘점차 흐려지고 일반적이 되어 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

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점차 감소하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는데, 이는 열매나 그 씨앗에 관하여, 그리고 뇌에 관하여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습니다. 완전성은 명료하게 퍼셉션하는 능력에 있습니다. 그런데 퍼셉션이 덜 명료하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될 때 그 능력은 감소합니다. 그러면 더 분명했던 퍼셉션을 대신하여 더 흐릿한 퍼셉션이 뒤따르게 되고, 이와 같이 퍼셉션은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These three churches, “man,” “Seth,” and “Enosh,” constitute the most ancient church, but still with a difference of perfection as to perceptions: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first church gradually diminished in the succeeding churches, and became more general, as observed concerning fruit or its seed, and concerning the brain. Perfection consists in the faculty of perceiving distinctly, which faculty is diminished when the perception is less distinct and more general; an obscurer perception then succeeds in the place of that which was clearer, and thus it begins to vanish away.

 

해설

AC.502는 지금까지 말해 온 태고교회의 ‘쇠퇴’가 구체적으로 무엇의 쇠퇴였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사람’, ‘셋’, ‘에노스’라는 세 교회는 모두 태고교회에 속합니다. 따라서 셋이나 에노스가 나타났다고 해서 태고교회가 끝나고 전혀 다른 종류의 교회가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세 교회 모두 같은 태고교회의 큰 계열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별하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바로 ‘퍼셉션의 완전성’이었습니다.

 

여기서 AC.500의 ‘덜 천적’이라는 표현이 더욱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셋이 최초의 태고교회보다 덜 천적이고, 에노스가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이 도덕적으로 더 나빠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의 특징인 퍼셉션 능력이 점차 약해졌다는 뜻입니다. 최초의 ‘사람’ 교회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매우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퍼셉션할 수 있었지만, 셋과 에노스로 이어지면서 그 퍼셉션이 점점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교회의 쇠퇴는 무엇보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분별하는 내적 능력의 쇠퇴’입니다.

 

특히 ‘더욱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는 표현을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일반적’이라는 것은 퍼셉션의 대상이 넓어졌다는 긍정적인 뜻이 아니라, 세밀하고 분명하게 구별하던 것이 점차 뭉뚱그려지고 희미해졌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처음에는 여러 선과 진리의 차이와 그 각각의 성질을 분명하게 알아차렸다면, 후대로 갈수록 그것을 그렇게 세밀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보다 막연하고 포괄적으로만 퍼셉션하게 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완전성은 명료하게 퍼셉션하는 능력에 있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501에서 사용한 열매와 씨앗, 그리고 뇌의 비유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장 내적인 중심에는 본질적인 생명이 가장 충만하고, 거기서 바깥으로 나아갈수록 그것이 점차 일반적이고 외적인 형태를 취합니다. 마찬가지로 최초의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가장 내적이고 명료한 형태로 존재했지만,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는 그것이 점차 흐릿해졌습니다. 따라서 ‘사람 → 셋 → 에노스’라는 계승은 단순히 세 교회의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퍼셉션이 ‘명료한 상태에서 덜 명료한 상태로’, 그리고 ‘구체적인 상태에서 더욱 일반적인 상태로’ 변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퍼셉션의 쇠퇴를 ‘있음’과 ‘없음’의 두 단계로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분명한 퍼셉션이 있었고 어느 순간 갑자기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먼저 덜 명료해지고, 더욱 일반적이 되고, 더 흐릿해지면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교회의 내적 생명이 쇠퇴하는 방식이 대개 점진적이라는 AC.497의 설명과도 일치합니다. 겉으로는 여전히 같은 태고교회이고, 퍼셉션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질과 명료함이 이미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것이 사라질 때 반드시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진리를 아주 분명하게 분별하던 것이 조금씩 흐릿해지고, 구체적인 선과 진리의 차이를 알아보던 것이 점차 막연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외적인 형태는 상당 기간 남아 있어도 그 안의 내적 생명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AC.501의 표현대로 하면 아직 열매의 모양은 남아 있지만 점차 그 속보다 껍질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늘날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되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495에서 이미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의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이후의 영적 교회에는 말씀에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형성되는 양심이라는 다른 길이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태고교회의 내적 감각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진리를 더욱 분명히 배우고,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받아들여 양심이 더욱 바르게 형성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져 간 역사는 결국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점점 더 분명하게 보고 있는가, 아니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점점 더 막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502 해설)

 

 

 

창5:9, AC.503, ‘선을 행하는 기쁨과 쓰임 안에서 살아나는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3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퍼셉션하는 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함으로써 생기는 행복과 기쁨에도 있었습니

bygrace.kr

 

창5:9, AC.501, ‘열매의 속과 씨앗에서 껍질로, 교회의 점진적인 쇠퇴’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1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뒤를 이어 나타났고,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는 교회들의 경우는 열매나 그 씨앗의 경우와 같았습니다. 그 한가운데, 곧 가장 내적인 곳에는 말하자면 열매의 열매 또는 씨앗의 씨앗이 있으며, 거기서부터 이어지는 부분들이 마치 일정한 질서를 따라 생명을 얻습니다. 가장 내적인 곳에서 둘레를 향하여 멀어질수록 그 안에는 열매나 씨앗의 본질이 점점 적어져, 마침내 열매나 씨앗이 끝나는 얇은 껍질이나 덮개만 남게 됩니다. 또는 뇌의 경우와도 같습니다. 뇌의 가장 내적인 부분에는 피질이라 하는 섬세한 유기적 형태들이 있으며, 거기서부터 그리고 그것들을 통하여 영혼의 작용들이 진행됩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일정한 질서를 따라 먼저 더 순수한 덮개들이 차례로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더 조밀한 덮개들이 이어지며, 마침내 뇌막이라 하는 일반적인 덮개들이 이어집니다. 이것들은 다시 더욱 일반적인 덮개들로 끝나며, 마지막에는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덮개인 두개골에 이릅니다. As regards the churches that in course of time succeeded one another, and of which it is said that one was born from another, the case with them was the same as it is with fruits, or with their seeds. In the midst of these, that is, in their inmosts, there are as it were fruits of the fruits, or seeds of the seeds, from which live as it were in regular order the successive parts. For the more remote these are from the inmost toward the circumference, the less of the essence of the fruit or of the seed is there in them, until finally they are but the cuticles or coverings in which the fruits or seeds terminate. Or as in the case of the brain, in the inmost parts of which are subtle organic forms called the cortical substances, from which and by which the operations of the soul proceed; and from which in regular order the purer coverings follow in succession, then the denser ones, and finally the general coverings called meninges, which are terminated in coverings still more general, and at last in the most general of all, which is the skull.

 

해설

AC.501은 앞의 AC.497과 AC.500에서 말한 ‘교회의 본질적인 것들이 점차 감소한다’는 원리를 두 가지 놀라운 비유, 곧 ‘열매와 씨앗’ 그리고 ‘뇌와 그 덮개들’을 통해 설명합니다. 핵심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면 교회가 낡아진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최초의 교회에는 가장 내적인 생명과 본질이 풍성하게 있었지만, 거기서 후대의 교회들이 차례로 이어져 나오면서 그 본질이 점차 외적인 것으로 옮겨 가고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태고교회에서 셋으로, 셋에서 에노스로, 다시 게난으로 이어지는 창5의 계보가 바로 이러한 과정을 나타냅니다.

 

첫 번째 비유는 열매와 씨앗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가장 안쪽에 ‘열매의 열매’ 또는 ‘씨앗의 씨앗’과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생명을 품고 다음 부분들을 발생시키는 중심을 가리킵니다. 그 중심에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열매나 씨앗의 본질은 점점 적어지고, 마지막에는 껍질과 덮개에 이릅니다. 이 비유를 교회에 적용하면, 태고교회의 최초 상태에는 교회를 참으로 교회이게 하는 내적 생명, 곧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퍼셉션이 중심에 있었지만, 후대의 교회로 갈수록 그 생명이 점차 약해지고 외적인 것들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장 내적인 것’과 ‘가장 외적인 것’을 단순히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열매의 껍질도 열매에 필요하고, 씨앗의 덮개도 씨앗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껍질이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 껍질만 남고 그 안의 본질이 사라지는 데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리, 예배 형식, 제도, 언어와 전통 같은 외적인 것들은 그 자체로 불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적인 생명을 담고 보호하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라는 내적 생명이 사라지고 외적인 형식만 남는다면, 그것은 마치 열매의 속과 씨앗은 없어지고 껍질만 남은 것과 같습니다.

 

두 번째 비유인 뇌의 구조는 이 원리를 더욱 정교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장 내적인 곳에 있는 섬세한 유기적 형태인 피질에서 영혼의 작용이 시작되고, 거기서부터 점차 더 순수한 덮개, 더 조밀한 덮개, 뇌막,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개골에 이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정한 질서’입니다.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무질서한 붕괴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후대 교회들이 앞선 교회와 아무 관계 없이 우연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앞선 것으로부터 차례로 이어져 나온다는 AC.500의 설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창5의 ‘낳음’은 단순한 시간적 순서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태고교회에서 셋, 에노스, 게난으로 이어질 때 각각의 교회는 앞 교회에서 무엇인가를 이어받지만, 최초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 교회의 본질적인 천적 생명은 점차 감소합니다. 이것이 AC.500에서 에노스를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라고 한 이유입니다. 창5의 계보는 결국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내적인 퍼셉션이 후대로 갈수록 어떻게 변화하고 약해지는지를 하나의 연속적인 구조로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단순한 비관적인 쇠퇴론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내적인 것에서 시작된 생명이 여러 단계의 덮개를 거쳐 바깥까지 전달되듯이,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이전처럼 내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어도 그 상태에 맞는 방식으로 선과 진리가 이어지게 하십니다. 최초의 상태가 사라졌다고 해서 주님의 역사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형태 속에서 교회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창5에서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다’는 것은 쇠퇴인 동시에 보존이며, 변화인 동시에 연속입니다.

 

AC.501은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를 돌아보게 하는 매우 실제적인 기준도 제공합니다. 교회의 건강함은 겉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갖추고 있는가보다 그 모든 것의 ‘가장 안쪽에 무엇이 살아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교리를 알고, 예배를 드리고, 신앙의 형식을 갖추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구하는 생명이 없다면 우리는 어느새 열매 자체보다 그 껍질을 붙들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인 형식이 소박하더라도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의 생명이 살아 있다면 거기에는 교회의 본질이 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껍질의 화려함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아 있는 ‘씨앗의 씨앗’, 곧 모든 진리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사랑의 생명입니다. (AC.501 해설)

 

 

 

창5:9, AC.502, ‘점차 흐려지고 일반적이 되어 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창5:9) AC.502이 세 교회, 곧 ‘사람’(man), ‘셋’(Seth), ‘에노스’(Enosh)는 태고교회를 이루지만, 퍼셉션의 완전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교

bygrace.kr

 

창5:9, AC.500,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던 에노스와 그 뒤를 이은 게난’(AC.500-503)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노스’(Enosh)는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셋’(Seth) 교회보다 더욱 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Seth lived after he begat Enosh eight hundred and seven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And all the days of Seth were nine hundred and twelve years, and he died. (창5:7, 8)

 

AC.499

여기서 ‘날들’(days)과 ‘연수’(years)의 숫자들은 앞에서와 같이 때와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 역시 앞에서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그가 ‘죽었다’(died)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The “days” and numbers of “years” signify here as before the times and states. “Sons and daughters” too have the same signification as before; and so likewise as the statement that he “died.”

 

해설

AC.499는 창5:7-8에 등장하는 표현들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이기보다, 앞에서 이미 밝혀진 해석 원리가 에노스에 이르는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날들’과 ‘연수’는 교회가 지나온 때와 상태들을, ‘아들들과 딸들’은 그 교회에서 생겨난 진리들과 선들을, ‘죽었다’는 것은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두 절 역시 한 사람의 수명과 자녀와 죽음을 기록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속뜻에서는 한 교회가 일정한 상태들을 지나면서 진리와 선을 산출하고, 마침내 그 고유한 상태가 끝나는 전 과정을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먼저 ‘날들’과 ‘연수’는 AC.482-483, 486-488에서 살펴본 원리와 연결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자연적인 시간 자체가 중심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일어나는 상태와 그 변화가 중심입니다. 그러므로 셋이 구백십이 세를 살았다는 창5:8의 숫자도 단순히 생물학적인 수명의 길이를 말하는 데 속뜻의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셋이라 하는 교회가 시작되어 변화하고 지속되다가 끝나기까지의 상태들과 관계됩니다. AC.499가 구체적인 숫자의 의미를 여기서 다시 풀지 않고 ‘앞에서와 같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아들들과 딸들’ 역시 AC.489-491에서 밝혀진 원리를 그대로 따릅니다.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의미하며, 그 진리와 선의 어떠함은 그것들을 낳은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셋 교회가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것은 그 교회 안에서 여러 진리와 선이 생겨나고 전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단순히 하나의 이름으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존속하는 동안 다음 세대와 다음 교회에 이어질 수 있는 영적인 것들을 계속 산출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지막으로 ‘죽었다’는 표현은 AC.492-495에서 살펴본 것처럼 육체적인 죽음 자체보다 그 교회의 고유한 상태가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계열에서 그 죽음은 퍼셉션의 변화와 쇠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교회가 ‘죽었다’고 할 때 그 안에 존재하던 모든 선과 진리가 한순간에 완전히 소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교회를 그 교회이게 했던 특유의 상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게 되고, 그 가운데 보존된 것들은 다시 다음 교회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창5에 반복되는 ‘살고, 낳고, 아들들과 딸들을 낳으며, 모든 날들을 지낸 뒤 죽었다’는 일정한 형식에는 교회의 한 생애가 담겨 있습니다. 교회가 시작되고, 일정한 상태들을 지나며, 그 안에서 선과 진리가 생겨나고, 마침내 그 고유한 상태가 끝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음 교회가 이어집니다. 문자적으로는 거의 똑같은 문장이 되풀이되지만, 속뜻에서는 서로 다른 교회들의 탄생과 상태 변화와 결실과 종말이 차례로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반복은 또한 교회를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한 교회의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은 그 교회 가운데 생겨난 선과 진리를 헛되게 하지 않으시고 다음 상태를 위한 것으로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죽음’ 뒤에는 언제나 단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승이 있습니다. 셋의 상태가 끝나더라도 에노스가 이어지고, 그 뒤로 다시 다른 교회들이 이어집니다. 인간의 상태는 변하고 교회도 쇠퇴하지만, 그 모든 변화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며 인류 가운데 교회가 계속될 길을 마련하십니다. (AC.499 해설)

 

 

 

창5:9, AC.500, ‘셋보다 더욱 덜 천적이었던 에노스와 그 뒤를 이은 게난’(AC.500-503)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And Enosh lived ninety years, and begat Kenan. (창5:9) AC.500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에노스’(Enosh)는 세 번째 교회를 의미하는데, 이 교회는 ‘셋’(Seth) 교회보다 더욱 덜

bygrace.kr

 

창5:6, AC.498, ‘셋으로부터 이어져 나온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8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이 장에서 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

‘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가 ‘백오 세를 살았다’(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때와 상태들을 의미하며,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것은 그들로부터 ‘에노스’(Enosh)라 하는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Seth,” as was observed, is a second church, less celestial than the most ancient church, its parent, yet one of the most ancient churches; that he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signifies, as before, times and states; that he “begat Enosh” signifies that from them there descended another church that was called “Enosh.”

 

해설

AC.496은 창5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아주 간결하게 확인해 주는 글입니다. 창5:6의 문자적 본문은 셋이라는 사람이 백오 세에 에노스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족보 기록이지만, 속뜻에서는 ‘셋 → 에노스’가 한 개인에게서 다른 개인이 태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로부터 또 다른 교회가 이어져 나온 과정입니다. AC.470에서 이미 이 장의 이름들이 ‘사람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들’을 뜻한다고 밝힌 원리가 여기서 구체적으로 적용됩니다. 따라서 창5의 족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태고교회 이후 여러 교회가 어떤 상태를 거쳐 차례로 이어졌는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셋을 ‘두 번째 교회’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라고 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창5의 계승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최초의 태고교회가 지녔던 천적 상태가 그대로 복제되어 다음 교회로 전달된 것이 아니라, 후대의 교회로 갈수록 그 상태에는 차이가 생겼습니다. 앞서 AC.481-485에서 셋 교회는 태고교회와 닮았지만 퍼셉션의 차이로 구별되는 교회였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교회’라는 말에는 시간적인 후대라는 뜻뿐 아니라, 태고교회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적 상태라는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셋 교회를 이미 태고교회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난 교회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셋을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라고 하면서도 곧이어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쇠퇴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천적 교회의 성격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선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태고교회의 기본 질서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생생함과 완전함이 최초의 태고교회와 같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백오 세를 살았다’(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는 표현 역시 실제 연령 자체가 속뜻의 중심이 아닙니다. AC.482-483과 AC.487-488에서 살펴본 것처럼 ‘해’와 ‘연수’는 교회의 때와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기서 백오 년은 셋 교회가 어떤 상태를 지나 다음 교회인 에노스로 이어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105’라는 수 자체의 세부적인 의미를 풀지 않고, 앞에서 확립한 원칙대로 ‘때와 상태들’을 뜻한다고만 밝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숫자의 개별 상응을 억지로 풀기보다는, 창5의 연수가 교회 상태의 지속과 변화를 기록한다는 큰 원리를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에노스를 낳았다’(begat Enosh)는 표현은 창5의 ‘낳음’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한 교회에서 또 하나의 교회가 ‘태어난다’는 것은 앞선 교회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전혀 무관한 것이 새로 생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으면서도 그 교회만의 고유한 상태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에노스가 생겼다고 하지 않고, 셋으로부터 ‘또 하나의 교회가 이어져 나왔다’고 설명합니다. 창5의 족보는 바로 이러한 교회적 계승의 연속입니다.

 

이 점에서 AC.496은 앞으로 이어질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의 이름을 읽는 기본 틀을 마련합니다. 각각의 이름은 단순히 족보상의 한 사람을 지나가는 표지가 아니라, 태고교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의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를 읽으면서 중요한 질문은 ‘이 사람은 누구인가?’에만 머물지 않고, ‘이 이름으로 나타난 교회는 앞선 교회로부터 무엇을 이어받았으며, 그 상태는 어떻게 달라졌는가?’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창5의 긴 족보가 단순한 이름과 연수의 나열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의 상태가 변해 가는 가운데서도 교회를 이어 가시는 역사가 됩니다. (AC.496 해설)

 

 

 

창5:6, AC.497, ‘시간이 흐르며 본질적인 것들이 감소하는 교회’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5:6) AC.497‘셋’(Seth)이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인 두 번째 교회이면서도, 여전히 가장 오래된 교회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것은 위에서 셋에 관하여

bygrace.kr

 

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

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퍼셉션은 그 구성원들이 천사들처럼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과 진리는 시민 사회에서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가 하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선과 진리입니다.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으로부터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How the most ancient church decreased cannot appear unless it be known what perception is, for it was a perceptive church, such as at this day does not exist. The perception of a church consists in this, that its members perceive from the Lord what is good and true, like the angels; not so much what the good and truth of civic society is, but the good and truth of love to the Lord and of faith in him. From 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 it can be seen what perception is, and whether it has any existence.

 

해설

AC.495는 창5:5의 마지막 해설이면서, 앞으로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앞의 AC.492와 AC.494는 ‘죽었다’는 것이 그 교회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도대체 퍼셉션이 무엇이기에 그것이 사라진 것을 교회의 죽음이라고 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495는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태고교회를 ‘퍼셉션을 가진 교회’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단지 지식이 많거나 판단력이 뛰어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퍼셉션은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외부에서 어떤 교리를 듣고 논증을 거쳐 그것이 옳다고 결론 내리는 것보다 훨씬 내적인 방식으로, 주님으로부터 유입되는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들의 퍼셉션을 ‘천사들처럼’(like the angels)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퍼셉션을 막연한 직감이나 느낌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왠지 이것이 맞는 것 같다’고 느끼는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은 아닙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선입견도 매우 강한 확신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495가 퍼셉션의 내용을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을 믿는 신앙의 선과 진리’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중요합니다. 퍼셉션의 근원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며, 그 내용 역시 자기 욕망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믿는 삶에 관한 선과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또 여기서 시민 사회의 선과 진리를 구별합니다. 이것은 사회생활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주로 사회적 규범이나 세상사의 옳고 그름을 알아내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었으며,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 속한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일종의 초자연적인 정보 획득 능력이나 미래를 알아맞히는 능력과도 다릅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a confession of faith that is confirmed by the life)으로부터 퍼셉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존재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퍼셉션을 단순한 내적 느낌에 맡겨 두지 않습니다.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과 실제 삶이 서로 일치할 때, 그 삶을 통하여 그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의 어떠함이 드러납니다. 참된 퍼셉션은 말로만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느낀다’고 주장하는 데 있지 않고, 그 진리가 사랑과 선의 삶으로 나타나는 데서 확인됩니다.

 

이 점은 태고교회가 왜 쇠퇴했는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들의 교회적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데 있었으므로, 사랑의 상태가 변질될수록 퍼셉션 역시 온전하게 유지될 수 없었습니다. 앞의 AC.494에서 설명한 것처럼 악이 반복되고 세대를 거쳐 유전적 악이 증가하면서 태고교회의 처음 상태가 점차 손상되었습니다. 사랑이 변하면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지각도 변합니다.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던 상태가 사라졌을 때, 말씀은 그것을 그 교회가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창5에서 각 교회가 퍼셉션의 차이에 따라 구별된다는 AC.483의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등은 단순히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각각 다른 상태의 교회들을 나타내며, 그 차이의 중심에는 퍼셉션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를 따라간다는 것은 단순히 세대가 바뀌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에 있던 퍼셉션이 여러 교회를 거치면서 어떻게 변화하고 마침내 소멸해 가는지를 따라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어떤 진리를 깊이 깨닫거나, 기도 중에 무엇이 옳은지를 강하게 느끼거나, 양심을 통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고 깨닫는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후대의 영적 인간에게 주님은 주로 말씀의 진리와 신앙, 그리고 그 진리로 형성된 양심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그와 구별되는 천적 교회의 고유한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퍼셉션이라는 개념이 오늘날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신앙의 본래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진리는 단지 머릿속에 저장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AC.495가 퍼셉션을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삶으로 확증되는 신앙고백’을 제시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제 삶에서 살아갈수록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나 주장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내면과 삶을 변화시킵니다.

 

결국 창5:5의 ‘죽었더라’를 이해하려면 먼저 무엇이 죽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AC.495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고유한 생명이었던 퍼셉션이 사라져 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퍼셉션의 본질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신앙의 선과 진리를 알아차리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의 쇠퇴는 단순한 조직의 쇠퇴나 교리 지식의 감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던 내적 생명의 쇠퇴였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창5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는 교회의 죽음이며, 동시에 모든 시대의 교회가 자신의 생명이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AC.495 해설)

 

 

 

창5:5, AC.492-496 심화 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창5:5, AC.492-496 심화1, ‘유전적 악은 어떻게 대대로 누적되며, 우리는 조상의 죄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AC.494는 태고교회가 쇠퇴한 주된 원인을 설명하면서 ‘유전적 악’(hereditary evil)이라는

bygrace.kr

 

창5:5, AC.492-495 심화 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창5:5, AC.492-495 심화2.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오늘날의 양심은 어떻게 다른가?’ AC.495는 태고교회가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에는 그러한 교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bygrace.kr

 

 

 

창5:6, AC.496, ‘셋으로부터 이어진 또 하나의 교회 에노스’(AC.496-498)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And Seth lived a hundred and five years, and begat Enosh. (창5:6) AC.496‘셋’(Seth)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번째 교회로서, 그 부모인 태고교회보다는 덜 천적이었지만, 여

bygrace.kr

 

창5:5, AC.494, ‘퍼셉션의 죽음과 유전적 악의 누적’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

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어떤 것이 이전에 그러했던 것과 같은 상태이기를 그치는 것입니다. 계시록에서는, That he “died” signifies that there was no longer such perceptio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word “die,” which is, that a thing ceases to be such as it has been. Thus in John:

 

1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2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3:1, 2) Unto the angel of the church in Sardis write, These things saith he that hath the seven spirits, and the seven stars; I know thy works, that thou art said to live, but art dead; be watchful, and strengthen the things which remain, that are ready to die; for I have not found thy works perfect before God. (Rev. 3:1–2)

 

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머니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으로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으리라 (렘22:26) I will cast out thy mother that bare thee, into another country where ye were not begotten, and there shall ye die, (Jer. 22:26)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어머니’(mother)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는 점차 쇠퇴하고 타락하여 처음의 온전함을 잃게 되는데, 그 주된 이유는 유전적 악의 증가입니다. 뒤를 잇는 모든 부모는 자신이 물려받은 악에 새로운 악을 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 안의 모든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은 일종의 본성을 띠게 되고, 그것이 자주 반복되면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 그들의 유전적 악에 더해지며, 자녀들에게 그리고 그렇게 후손들에게 전달됩니다. 이런 식으로 유전적 악은 후손들 안에서 엄청나게 증가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자녀들의 악한 성향이 그 조상들의 악한 성향과 아주 흡사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우리 안에 아담으로부터 심어졌다고 주장되는 것 외에는 유전적 악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견해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AC.313 참조). 진실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실제적인 죄들(actual sins)로 유전적 악을 만들고, 자신이 물려받은 악들에 그것을 더하며, 이런 식으로 그것이 축적되어 모든 후손 안에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감소합니다. 모든 교회에서 이것이 타락의 주된 원인이며, 태고교회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where “mother” signifies the church. For as we have said, the case with the church is that it decreases and degenerates, and loses its pristine integrity, chiefly by reason of the increase of hereditary evil, for every succeeding parent adds new evil to that which he has inherited. All the actual evil in the parents puts on a kind of nature, and when it often recurs, becomes natural to them, and is added to their hereditary evil, and is transmitted into their children, and so to posterity. In this way the hereditary evil is immensely increased in the descendants. That this is so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evil dispositions of children are exactly like those of their progenitors. Quite false is the opinion of those who think that there is no hereditary evil except that which they allege to have been implanted in us from Adam (see n. 313). The truth is that everyone makes hereditary evil by his own actual sins, and adds it to the evils that he has inherited, and in this way it accumulates, and remains in all the descendants, nor is it abated except in those who are being regenerated by the Lord. In every church this is the principal cause of degeneration, and it was so in the most ancient church.

 

해설

AC.494는 창5:5의 ‘죽었더라’를 설명하다가 매우 중요한 주제인 ‘유전적 악’으로 들어갑니다. 먼저 ‘죽다’의 속뜻부터 분명히 합니다. 죽음은 ‘어떤 것이 이전에 그러했던 것과 같은 상태이기를 그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담으로 표상된 태고교회가 ‘죽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의 육체적 죽음 자체가 속뜻의 중심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를 특징짓던 퍼셉션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상태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계3:1-2의 사데 교회가 좋은 예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말씀은 육체적으로 죽었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교회로서 외적인 이름과 형태는 남아 있지만 그 안의 영적 생명이 쇠퇴한 상태를 ‘죽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고 하신 것을 보면, 죽음과 생명이 한 사람이나 교회의 내적 상태를 가리킬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렘22:26에서 ‘어머니’(mother)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설명도 같은 맥락입니다. 말씀은 교회의 발생과 쇠퇴와 종결을 가족의 출생과 죽음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왜 교회가 죽어 가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갑니다. 그가 제시하는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유전적 악의 증가’입니다. 사람은 앞선 세대로부터 악에 기울어지는 성향을 물려받는데, 거기에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행하고 반복한 악을 더합니다. 반복된 악은 점차 그 사람에게 일종의 본성처럼 자리 잡으며, 이렇게 형성된 것이 다시 후대에 유전적 성향으로 전달된다는 설명입니다. 따라서 세대가 거듭되면서 악에 대한 기울어짐이 누적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유전적 악’과 ‘실제적인 악’(actual evil)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려받은 악은 자신이 직접 행하여 만든 악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여러 성향을 물려받지만, 그것을 자신의 자유 안에서 실제로 받아들이고 행할 때 그것은 자신의 실제적인 악이 됩니다. 그리고 그 악을 반복하여 삶의 일부로 만들면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유전적 악에 다시 무언가를 더하게 됩니다. AC.494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세대 간 누적입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유전적 악을 오직 아담 한 사람의 범죄에서 모든 인류에게 전달된 것으로 보는 견해를 명시적으로 부정합니다. AC.313에서도 그는 유전적 악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 전해지고 세대를 거치며 축적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창3의 타락을 한 개인이 범한 최초의 죄가 법적 책임의 형태로 모든 후손에게 전가된 사건으로만 이해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유전되는 것은 조상의 죄에 대한 개인적 죄책 자체라기보다 악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성향이며, 각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 안에서 그것을 실제 악으로 만들 수도 있고 주님에 의해 거듭나면서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AC.494의 마지막 문장이 중요합니다. 유전적 악은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감소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여러 세대에 걸쳐 축적된 악의 경향을 뿌리째 제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으시면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사람이 악을 악으로 인정하여 물리치고 주님께로 향하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세대를 거쳐 내려온 악의 흐름이 한 사람 안에서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주님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이 설명은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태고교회가 처음부터 갑자기 악한 교회였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매우 깊은 퍼셉션을 가진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면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악한 방향으로 사용하고 그것을 반복하면서 악의 성향이 누적되었고, 그 결과 후대의 사람들은 앞선 세대보다 더 강한 유전적 악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이 점차 변질되고 마침내 사라져 간 배경에 이러한 인간의 세대적 변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후대 사람은 앞선 세대보다 무조건 더 악하다’는 단순한 공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94 자체가 동시에 거듭남이라는 반대 방향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악이 세대를 따라 축적될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은 각 세대의 각 사람에게 새롭게 역사하시며 그 악의 힘을 감소시키십니다. 인간에게는 유전적 성향이 있지만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사람에게 주어진 구체적인 상태 안에서 거듭남의 길을 여십니다.

 

따라서 창5:5의 ‘죽었더라’는 한 교회의 종결을 알리는 짧은 표현이면서 동시에 인간과 교회가 왜 쇠퇴하는가를 보여 주는 깊은 진단이 됩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세대를 지나며 인간의 악이 반복되고 누적되는 가운데 점차 그 처음의 온전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AC.494의 결론은 쇠퇴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누적된 흐름을 거슬러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며, 그 역사가 바로 거듭남입니다. ‘죽음’의 역사가 아무리 오래 누적되어도 주님은 그 가운데서 다시 생명으로 향하는 길을 여십니다. (AC.494 해설)

 

 

 

창5:5, AC.495, ‘태고교회의 쇠퇴를 이해하는 열쇠, 퍼셉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5태고교회가 어떻게 쇠퇴하였는지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태고교회는 퍼셉션을 가진 교회였으며, 오늘날

bygrace.kr

 

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

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사람이 죽음’(man’s dying)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해설

AC.492는 창5:5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는 말씀의 속뜻을 아주 간결하게 밝힙니다. 앞의 AC.486-488에서 ‘날들’과 ‘해들’이 단순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교회의 시대와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면, 이제 ‘죽었더라’ 역시 한 개인의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를 특징짓던 특정한 내적 상태의 종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교회가 없어졌다’고 하지 않고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창5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을 구별하는 핵심적인 특징이 퍼셉션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AC.483과 AC.491에서 보았듯이 이 교회들은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했으며, 각각의 교회는 그 퍼셉션의 어떠함에 따라 서로 구별되었습니다. 따라서 한 교회의 ‘죽음’은 그 교회를 그 교회 되게 하던 고유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창5의 반복되는 ‘죽었더라’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사람이 오랜 세월을 살다가 죽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족보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한 교회의 상태가 일정한 과정을 거친 뒤 끝나고 다른 교회적 상태로 넘어가는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낳았으며’가 교회의 계승과 그 안에서 산출된 선과 진리를 보여 준다면, ‘죽었더라’는 그 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이 마침내 소멸한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음’을 곧바로 모든 선과 진리의 완전한 소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한 교회의 특정한 퍼셉션이 끝났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491이 태고교회를 ‘다른 모든 후대 교회들의 으뜸이며 어버이인 교회’라고 한 것처럼, 한 교회의 상태가 끝나면서도 그로부터 이어지는 것이 다음 교회에 전달됩니다. 창5의 ‘낳음’과 ‘죽음’이 함께 기록되는 것은 바로 이 계승과 변화의 두 측면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죽음’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육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말씀은 사람과 교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생명이 살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태고교회의 경우 그 생명의 대표적인 형태가 퍼셉션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지식이나 특별한 능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를 특징짓던 주님과의 내적 교통 방식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짧은 글은 앞으로 창5에서 반복될 ‘죽었더라’를 단순한 족보의 마침표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 변화로 읽도록 준비시킵니다. 교회에는 시작과 성장뿐 아니라 쇠퇴와 종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주님은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고 선과 진리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는 교회들이 단순히 생겨났다 사라지는 기록이라기보다, 한 상태가 끝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다음 상태를 이어 가시는 섭리의 역사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492 해설)

 

 

 

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bygrace.kr

 

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

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도 그러하며, 다시 말해 선들과 진리들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은 분명하게 퍼셉션된 것들인데, 이는 그것들이 태고교회, 곧 다른 모든 후대 교회들의 으뜸이며 어버이인 교회에 관하여 서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same things are signified by “sons” and “daughters” in this chapter (verses 4, 7, 10, 13, 16, 19, 26, 30), but such as is the church,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that is, such are the goods and truths; the truths and goods here spoken of are such as were distinctly perceived, because they are predicated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

 

해설

AC.491은 AC.486-490에서 설명한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를 창5 전체에 적용하면서 한 가지 중요한 원리를 덧붙입니다. ‘아들들’은 진리를, ‘딸들’은 선을 의미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교회에서 그 진리와 선의 질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즉 어떤 교회가 어떤 내적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그 교회가 받아들이고 산출하는 진리와 선의 어떠함도 달라집니다.

 

이것은 상응을 기계적인 대응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아들 = 진리’, ‘딸 = 선’이라는 기본적인 상응은 같더라도, 그 진리가 어떤 진리이며 그 선이 어떤 선인지는 그것들이 속한 교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집니다. 같은 ‘아들’이라는 표현도 태고교회에 관하여 사용될 때와 후대의 다른 교회에 관하여 사용될 때 그 진리의 내적 질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상응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어의 기본 의미뿐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교회적 상태와 문맥까지 함께 보아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진리들과 선들은 ‘분명하게 퍼셉션된 것들’입니다. 이 표현은 창5 초반부터 계속 강조되어 온 태고교회의 독특한 성격을 다시 확인해 줍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선과 진리는 주로 외부의 가르침을 배우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검토하여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그 교회의 ‘아들들과 딸들’은 바로 그러한 퍼셉션에서 나온 진리들과 선들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83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등 여러 교회가 주로 퍼셉션의 차이에 따라 구별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교회가 낳은 ‘아들들과 딸들’ 역시 똑같을 수 없습니다. 각 교회의 퍼셉션이 달랐으므로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와 선의 어떠함도 달랐습니다. 창5에 같은 표현인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가 계속 반복되지만, 속뜻에서는 매번 똑같은 진리와 선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교회 상태에 고유한 진리와 선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를 ‘다른 모든 후대 교회들의 으뜸이며 어버이인 교회’(the principal and parent of all the other and succeeding churches)라고 합니다. ‘으뜸’이라는 말은 태고교회가 최초이면서 가장 근원적인 교회였음을, ‘어버이’라는 말은 이후의 교회들이 그 교회로부터 이어져 나왔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5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낳음’의 언어로 연결되는 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앞선 교회의 선과 진리가 후대 교회에 전해지고, 후대 교회는 그것을 자신의 상태에 따라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형태의 선과 진리를 산출하는 교회의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는 지금 우리가 창5를 읽으며 계속 확인하고 있는 중요한 원리도 있습니다. ‘계승’은 ‘동일함’이 아닙니다. 셋 교회가 태고교회와 매우 비슷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았듯이, 이후의 교회들도 앞선 교회에서 이어지지만 각각 다른 퍼셉션과 다른 상태를 갖습니다. 따라서 창5의 계보는 동일한 교회가 이름만 바꾸어 계속되는 과정이라기보다, 앞선 교회로부터 받은 것을 다음 교회가 자신의 상태에 따라 이어받으면서 선과 진리의 어떠함도 함께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가 어떠한가에 따라 아들들과 딸들도 그러하다’는 AC.491의 짧은 문장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교회의 참된 상태는 이름이나 외적 형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 교회 안에서 어떤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어떤 선이 살아 움직이는가, 그리고 그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교회의 내적 어떠함은 결국 그 교회가 ‘낳는’ 진리와 선의 어떠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창5:4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라는 짧은 표현 안에는 태고교회의 풍성한 영적 생명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낳은 것은 단순한 후손이 아니라 분명하게 퍼셉션된 진리와 선이었으며, 그 진리와 선은 다시 후대 교회들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들이 태고교회로부터 점차 멀어지면서 퍼셉션의 상태가 달라지는 만큼 그들이 받아들이는 진리와 선의 질도 달라집니다. 이것이 창5의 반복되는 ‘아들들과 딸들’을 단순한 족보의 반복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과 계승의 역사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AC.491 해설)

 

 

 

창5:5, AC.492, ‘사라진 퍼셉션을 의미하는 사람의 죽음’(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bygrace.kr

 

창5:4, AC.490, ‘딸들이 의미하는 사랑과 신앙의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

‘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며, 특히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들’(daughters)은 선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예언서의 많은 구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는 옛날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교회의 잉태와 출생을 ‘아들들과 딸들’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에서는, That by “sons and daughters” are signified the truths and goods which they had a perception of, and indeed by “sons” truths, and by “daughters” goods, is evident from many passages in the prophets; for in the Word, as also in olden time, the conceptions and births of the church are called “sons and daughters,” as in Isaiah: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그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사60:3-5)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lift up thine eyes round about and see; all they gather themselves together and come to thee; thy sons shall come from far, and thy daughters shall be nursed at thy side; then thou shalt see and flow together, and thy heart shall be amazed, and shall be enlarged, (Isa. 60:3–5)

 

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의미합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and “daughters” goods.

 

[2] 시편에서는, In David:

 

11이방인의 손에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그들의 입은 거짓을 말하며 12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시144:11, 12) Deliver me and rescue me from the hand of the sons of the stranger, whose mouth speaketh vanity; that our sons may be as plants grown up in their youth, that our daughters may be as cornerstones hewn in the form of a temple, (Ps. 144:11–12)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방인의 아들들’(sons of the stranger)은 거짓된 진리들, 곧 거짓들을 의미하고, ‘우리 아들들’(our sons)은 진리의 교리들을, ‘우리 딸들’(our daughters)은 선의 교리들을 의미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stranger” signify spurious truths, or falsities; “our sons” signify doctrinals of truth; “our daughters,” doctrinals of good.

 

[3] 이사야에서는, In Isaiah:

 

6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끝에서 오게 하며, 8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을 이끌어 내라 (사43:6, 8) I will say to the north, Give up, and to the south, Keep not back; bring my sons from far, and my daughters from the ends of the earth; bring forth the blind people, and they shall have eyes; the deaf, and they shall have ears, (Isa. 43:6, 8)

 

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에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딸들’은 선들을 의미하고, ‘맹인들’(blind)은 진리를 보게 될 사람들을, ‘귀먹은 자들’(deaf)은 진리에 순종하게 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in which passage “sons” signify truths; “daughters,” goods; the “blind,” those who would see truths; and the “deaf,” those who would obey them.

 

[4]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렘3:24) Shame hath devoured the labor of our fathers from our youth; their flocks, their herds, their sons, and their daughters, (Jer. 3:24)

 

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들들과 딸들’은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합니다. ‘자녀들’(children)과 ‘아들들’(sons)이 진리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where “sons” and “daughters” signify truths and goods. That “children” and “sons” signify truths is plain from Isaiah:

 

22야곱이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겠고 그의 얼굴이 이제는 창백해지지 아니할 것이며 23그의 자손은 내 손이 그 가운데에서 행한 것을 볼 때에 내 이름을 거룩하다 하며 야곱의 거룩한 이를 거룩하다 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며 24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되며 (사29:22-24) Jacob shall not now be ashamed, neither shall his face now wax pale; for when he shall see his children the work of my hands in the midst of him, they shall sanctify my name, and shall sanctify the Holy One of Jacob, and shall fear the God of Israel; they also that erred in spirit shall know understanding, (Isa. 29:22–24)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거룩한 이, 이스라엘의 하나님’(holy one of Jacob, the God of Israel)은 주님을 의미하고, ‘자녀들’은 거듭난 사람들, 곧 선과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실제로 그 구절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where the “holy one of Jacob, the God of Israel,” signifies the Lord; “children” signify the regenerate, who have the understanding of good and truth, as is indeed explained.

 

[5] 또 이사야에서는, Again:

 

잉태하지 못하며 출산하지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이는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라 (사54:1) Sing, O barren, thou that didst not bear, for more are the sons of the desolate than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Isa. 54:1)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홀로 된 여인의 아들들’(sons of the desolate)은 초대교회, 곧 이방인들의 교회에 속한 진리들을 의미하고, ‘남편 있는 여인의 아들들’(sons of the married wife)은 유대교회에 속한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where the “sons of the desolate” signify the truths of the primitive church, or that of the Gentiles; the “sons of the married wife,” the truths of the Jewish church.

 

[6]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내 장막이 무너지고 나의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아니하니 (렘10:20) My tent is laid waste and all my cords are plucked out; my sons are gone forth of me, and are not, (Jer. 10:20)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또, where “sons” signify truths. Again:

 

그의 자손은 예전과 같겠고 그 회중은 내 앞에 굳게 설 것이며 (렘30:20) His sons shall be as aforetime, and their congregation shall be established before me, (Jer. 30:20)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들들’은 고대교회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스가랴에서는, where “sons” signify the truths of the ancient church. In Zechariah: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슥9:13) I will stir up thy sons, O Zion, with thy sons, O Javan, and make thee as the sword of a mighty man, (Zech. 9:13)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합니다. signifying the truths of the faith of love.

 

해설

AC.489는 AC.486에서 짧게 제시했던 ‘아들들은 진리, 딸들은 선’이라는 상응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입증합니다. 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단순히 ‘아들 = 진리, 딸 = 선’이라는 대응표를 하나 더 익히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첫 문단의 ‘교회의 잉태와 출생을 아들들과 딸들이라 한다’는 설명이 오히려 이 글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교회가 ‘잉태하고 낳는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새로운 진리와 선이 생겨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앞의 창5:3에서 한 교회가 다른 교회를 ‘낳는’ 것으로 표현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자연적 생명에서는 부모에게서 자녀가 태어나지만, 영적 생명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인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새로운 선과 진리가 생겨납니다. 따라서 창5:4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으며’라는 표현은 단순히 아담에게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녀들이 더 있었다는 의미에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계속해서 진리와 선이 산출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AC.486과 연결하여 이 진리와 선이 그들이 ‘퍼셉션한’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사람들에게 진리와 선은 단순히 외부에서 배우고 기억하여 보유하는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앞의 AC.483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교회들을 구별하는 주된 특징 자체가 퍼셉션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내적으로 퍼셉션했고, 그렇게 받아들여진 진리와 선이 그 교회의 ‘아들들과 딸들’이 되었습니다.

 

사60:3-5가 좋은 예입니다. 문자에서는 흩어졌던 아들들과 딸들이 돌아오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교회 안으로 진리들과 선들이 모여드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고 딸들은 안기어 온다’는 것은 단순한 가족의 재회가 아니라 주님께서 교회를 회복시키실 때 진리와 선이 다시 풍성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교회가 살아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선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시144편의 ‘이방인의 아들들’은 거짓된 진리들, 곧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아들’이라는 말 자체가 언제나 참된 진리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보여 줍니다. 무엇으로부터 태어났느냐에 따라 참된 진리가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들들’은 진리의 교리들을 의미하지만 ‘이방인의 아들들’은 거짓을 의미합니다. 상응은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치환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단어가 놓인 전체 문맥과 그 근원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사43:6, 8에서 ‘아들들’과 ‘딸들’이 돌아오는 것과 함께 ‘맹인’이 보고 ‘귀먹은 자’가 듣게 되는 것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진리와 선이 사람 안에 회복될 때 그는 비로소 영적으로 보기 시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보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과 연결되고, ‘듣는 것’은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아들들과 딸들의 귀환은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의 질서가 회복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54:1의 ‘홀로 된 여인의 아들들’과 ‘남편 있는 여인의 아들들’은 ‘아들’이 실제 혈육의 자녀를 넘어 교회에 속한 진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전자를 초대교회, 곧 이방인들의 교회에 속한 진리로, 후자를 유대교회에 속한 진리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어떤 여인의 자녀가 많아진다는 것은 속뜻으로는 그 교회 안에서 진리가 풍성해지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창5의 족보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셋, 에노스, 게난 등의 이름이 각각 교회를 나타내며, 그 연수는 그 교회의 상태와 상태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AC.489는 그 교회들이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반복되는 표현까지 열어 줍니다. ‘이름’은 교회를, ‘날들과 해들’은 그 교회의 상태와 변화를, ‘아들들과 딸들’은 그 교회 안에서 퍼셉션된 진리와 선을 나타냅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놓이면 창5의 족보는 단순한 인명과 수명의 목록이 아니라 교회가 이어지고 변화하며 그 안에서 진리와 선이 계속 산출되는 영적 역사가 됩니다.

 

무엇보다 ‘교회의 출생’이라는 표현은 진리와 선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영적 진리를 만들어 내거나 선을 생산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고, 그 생명이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으로 결합될 때 비로소 새로운 선과 진리가 태어납니다. 그러므로 창5의 ‘아들들과 딸들을 낳았다’는 반복되는 말은 태고교회의 생명력이 단순히 오래 존속했다는 데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그 안에서 계속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영적 결실을 맺었다는 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AC.489 해설)

 

 

 

창5:4, AC.490, ‘딸들이 의미하는 사랑과 신앙의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0말씀에서 ‘딸들’(daughters)은 자주 선들을 의미합니다. 시편에서는, In the Word “daughters” frequently denote goods; as in David: 9왕

bygrace.kr

 

창5:4, AC.488, ‘천사들에게 시간은 상태와 그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