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3

여기서 나무들(trees) 퍼셉션을 의미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을 다룰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어의 성격에 따라 술어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trees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해설

AC.103은 바로 앞 AC.102에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한 것을 모든 말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고정된 상응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은 지금 창2에서 다루고 있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을 다룰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곧바로 덧붙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말씀에 같은 자연적 대상이나 같은 단어가 나온다고 해서 언제나 똑같은 속뜻을 가진다고 기계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상이 누구에게 또는 무엇에 관하여 서술되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주어의 성격에 따라 술어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점을 말합니다. 무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지가 달라지면 그것에 관하여 서술되는 것의 의미도 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102에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까닭은 나무라는 자연물이 말씀 어디에서나 오직 퍼셉션만을 의미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2에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고,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싸움이 그치며,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지성이 흘러드는 상태를 설명해 왔습니다. 특히 AC.99에서는 천적 인간이 자신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주님께서 흘러드신다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천적 인간의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들이므로 여기서는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은 상응을 자연물의 특징만으로 추론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일깨워 줍니다. 어떤 자연적 대상의 성질을 관찰한 뒤 그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할 것이라고 임의로 정해서는 안 되며, 앞의 어느 구절에서 특정한 의미로 해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이후의 모든 구절에 그 의미를 그대로 적용해서도 안 됩니다.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려면 현재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 그 표현이 어떤 문맥 안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주변의 다른 표현들과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103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의 차이가 같은 표현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지금 다루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오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퍼셉션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천적 인간을 다루는 현재 문맥에서는 동산의 나무들이 퍼셉션에 관계됩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는 그 사람의 생명과 질서가 다르므로, 나무라는 동일한 표현도 그 주제에 맞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으면서 각각의 상응을 발견하더라도 그것을 문맥에서 떼어 내어 고정된 대응표처럼 축적하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어떤 곳에서 동산이 지성을 의미했다고 해서 모든 동산이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고 단정하거나, 여기서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해서 말씀에 나오는 모든 나무를 곧바로 퍼셉션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상응에는 일관된 질서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의미는 현재 다루는 주제와 문맥 안에서 밝혀져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AC.102에서 나무들의 의미를 제시한 직후 AC.103에서 곧바로 덧붙이는 중요한 주의사항입니다.

 

따라서 AC.103은 짧은 한 문장이지만 앞으로 AC 전체를 읽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말씀의 어떤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을 때에는 그 단어만 따로 떼어 보지 않고, ‘지금 말씀은 누구에 관하여, 어떤 상태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은 천적 인간과 그의 에덴동산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칙을 기억하면 앞으로 같은 표상이 다른 문맥에서 서로 다른 의미로 설명되더라도 그것을 모순으로 보지 않고, ‘주어의 성격에 따라 술어의 성격이 달라진다는 말씀의 속뜻의 질서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03)

 

 

 

AC.104, 창2:9, ‘퍼셉션은 무엇인가 -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내적 감각’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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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 창2:9,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 신앙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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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2:9)

 

AC.102

나무(tree)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보기에 좋은 나무(tree desirable to behold)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tree good for food) 선에 대한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생명나무(tree of lives)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감각적인 것에서,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Atreesignifies perception; atree desirable to behold,the perception of truth; atree good for food,the perception of good; thetree of lives,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해설

AC.102는 창2:9에 나오는 여러 나무의 속뜻을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나무자체는 퍼셉션을 의미하고, ‘보기에 좋은 나무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대한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이어 동산 중앙의 두 나무 가운데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중심에는 천적 인간이 선과 진리를 어디에서 받아들이고 지각하는가 하는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먼저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는 것은 앞의 AC.96-99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퍼셉션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특별한 직관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 관계됩니다. AC.99에서는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그는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동산 안의 나무들은 바로 그러한 퍼셉션이 선과 진리에 관계하여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보기에 좋은 나무먹기에 좋은 나무도 단순히 아름답고 먹음직스러운 자연의 나무를 뜻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전자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후자는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여기서 진리와 선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지성과 사랑이 함께 다루어진 것처럼, 천적 인간은 진리를 단순히 바라보고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선을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동산의 풍성함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보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지각할 수 있는 내적 생명의 풍성함을 나타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사랑과 신앙이라고 병렬적으로만 말하지 않고 신앙이 사랑에서 나온다고 밝힙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질서와 일치합니다. 신앙이 먼저 독립적으로 서서 사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의미하는 생명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신앙의 생명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신앙에까지 생명을 주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기억지식 자체를 부정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AC.99에서 주님께서 천적 인간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했으므로, 기억지식은 그 자체로 거듭남에 방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신앙이 어디에서 나오느냐에 있습니다.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이 아니라,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이 축적한 기억지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거기에서 신앙을 만들어 내려 할 때 질서가 달라집니다.

 

이 점에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차이는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보다 더 깊습니다. AC.102는 두 경우 모두 신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신앙의 근원을 다르게 설명합니다. 생명나무에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신앙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창2의 두 나무를 이해할 때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앎과 신앙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천적 질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먼저이고, 이해와 신앙과 지식은 그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AC.102는 아직 각각의 나무가 왜 이러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상세히 논증하지 않습니다. 우선 상응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으며, 이어지는 번호들에서 그것을 더 풀어 갈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뒤의 설명을 미리 가져와 결론을 확대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제시한 대조를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동산의 나무들은 퍼셉션을 나타내며, 생명나무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오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으로부터 신앙이 나옵니다. 이 서로 다른 생명의 질서가 앞으로 두 나무에 관한 설명을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AC.102)

 

 

 

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하는 것은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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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1, 창2:8, ‘동쪽은 주님 -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 오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주님이 ‘동쪽’(east)이시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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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2:8)

 

AC.98

동산(garden) 지성을, 에덴(Eden) 사랑을, 동쪽(east) 주님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동쪽 에덴의 동산(garden of Eden eastward)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의미합니다. By a garden is signified intelligence; by Eden, love; by the east, the Lord; consequently by the garden of Eden eastward is signified the intelligence of the celestial man, which flows in from the Lord through love.

 

해설

AC.98은 창2: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라는 말씀을 본격적으로 해설하기 시작하면서, 먼저 동산’, ‘에덴’, ‘동쪽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힙니다. ‘동산은 지성을, ‘에덴은 사랑을, ‘동쪽은 주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의미를 서로 떨어진 상응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번호에서 말하려는 핵심은 마지막 문장에 있습니다. ‘동쪽 에덴의 동산전체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동산이 지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에덴동산을 단순히 아름답고 풍요로운 장소로만 읽지 않게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성은 많은 지식을 축적하거나 뛰어난 사고 능력을 소유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동산은 천적 인간의 동산이므로, 그 지성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질서 있게 자라나는 지성입니다. 앞의 AC.91에서도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적 영적 기원에서 나오는 것으로 새롭게 질서 잡힌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인간의 지적 능력이 제거된 상태가 아니라 그 능력이 올바른 근원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상태입니다.

 

에덴이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은 그 지성이 어떠한 생명에서 나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95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생명은 사람을 준비시키지만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98에서는 그 사랑이 천적 인간의 지성이 형성되는 통로로 나타납니다. 천적 인간은 먼저 진리를 지적으로 파악한 뒤 그것을 근거로 사랑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지각하고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에덴이 사랑이고 그 안에 동산이 있다는 것은 천적 인간에게서 지성이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동쪽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설명은 이 모든 것의 근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천적 인간의 사랑도 지성도 인간 자신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AC.88에서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라고 했고, AC.94-97에서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 자체가 주님께서 불어넣으시는 생명임을 계속 설명했습니다. 이제 AC.98은 에덴동산의 방향인 동쪽을 통하여 다시 한번 그 근원이 주님이심을 밝힙니다. 따라서 동쪽의 의미를 단순히 방위에 관한 상응으로 기억하기보다, 천적 인간에게 있는 모든 참된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마지막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이라는 표현은 천적 인간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지성이 먼저 독립적으로 형성된 다음 사랑이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사랑을 통하여 지성 안으로 흘러듭니다. 이것은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신앙이나 지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그 사랑을 통하여 지성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자기 지성을 신뢰하여 선과 진리를 찾아내는 지성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지각하는 지성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77에서 에덴동산을 천적 인간의 지성과 퍼셉션이라고 개요적으로 설명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당시에는 창2:8-9 전체의 의미를 먼저 요약했지만, 이제 상세 해설에서는 그 구조가 하나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AC.96에서는 퍼셉션이 생명의 숨과 연결되었고, AC.98에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고 합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지성은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발견하여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능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아 그 안에서 선과 진리를 지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천적 인간의 지성입니다.

 

결국 AC.98의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를 아름답게 압축하여 보여 줍니다. 동산은 지성이지만 그 동산은 에덴, 곧 사랑 안에 있으며, 그 모든 것의 근원은 동쪽이 의미하는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과 분리된 지성이 아니며, 인간 자신의 힘으로 획득한 독립적인 지성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랑을 통하여 지성 안으로 흘러드시고, 그 유입을 받아 지성이 살아 있을 때 인간 안에 참된 에덴동산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동쪽 에덴의 동산이 천적 인간의 지성을 의미한다고 하면서도, 스베덴보리가 굳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지성이라고 덧붙인 이유입니다. (AC.98)

 

 

 

AC.99, 창2:8, ‘뒤집힌 질서가 회복될 때,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옴을 지각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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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7, 창2:7, '생명이 숨과 호흡으로 묘사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생명이 ‘호흡’(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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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2:7)

 

AC.96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코에 숨을 불어넣으셨다(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것에 관해서는 이렇습니다. 고대에는, 그리고 말씀에서는 (nostrils) 냄새로 말미암아 기쁘게 느껴지는 모든 것을 이해했으며, 이것은 퍼셉션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로 번제와 주님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는 것들로부터 여호와께서 안식의 향기를 맡으셨다(smelled an odor of rest) 거듭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쁜 것이므로, 그의 코를 통하여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것입니다. 때문에 4:20에서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우리 코의 (breath of the nostrils)이라 합니다. As to its being said that Jehovah Go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case is this: In ancient times, and in the Word, by nostrils was understood whatever was grateful in consequence of its odor, which signifies perception. On this account it is repeatedly written of Jehovah, that he smelled an odor of rest from the burnt offerings, and from those things which represented him and his kingdom; and as the things relating to love and faith are most grateful to him, it is said that he breathed through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Hence the anointed of Jehovah, that is, of the Lord, is called the breath of the nostrils (Lam. 4:20).

 

우리의 콧김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4:20)

 

그리고 주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심(breathing on his disciples)으로써 같은 것을 의미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nd the Lord himself signified the same by breathing on his disciples, as written in John: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0:22) He breathed on them and said, Receive ye the Holy Spirit (John 20:22).

 

해설

AC.96은 창2:7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씀 가운데 특별히 가 왜 언급되는지를 설명합니다. 현대 독자에게는 생명을 불어넣는 장면에서 굳이 가 언급되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고대인들과 말씀에서 냄새로 말미암아 기쁘게 느껴지는 것이 퍼셉션을 의미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는 단순한 신체 기관으로만 언급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내적으로 지각하는 퍼셉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코가 냄새를 맡는 감각과 관련되고, 그 가운데 기쁘게 느껴지는 냄새가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이것을 자연적인 후각의 성질에서 우리가 임의로 영적 의미를 추론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AC.96이 제시하는 근거는 고대인들의 표상적 이해와 말씀 자체의 용법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번제와 주님 및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는 것들에 관하여 여호와께서 안식의 향기를 맡으셨다고 말씀에 거듭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실제로 제물에서 나는 물질적인 냄새를 즐기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AC.96은 그 이유를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들이 주님께 가장 기쁘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번제와 그 밖의 제사에 사용된 것들은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것들을 표상하였고, 그것들이 나타내는 사랑과 신앙이 주님께 기쁜 것이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그것을 기쁜 향기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물의 냄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사랑과 신앙이며, 그 사랑과 신앙에 속한 것을 기쁘게 지각하는 것이 퍼셉션과 연결됩니다.

 

이제 그의 코를 통하여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말의 의미도 한층 분명해집니다. AC.94에서는 생명의 을 신앙과 사랑의 생명이라고 했고, AC.95에서는 신앙의 생명이 사람을 준비시키지만 사랑의 생명이 그를 사람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AC.96은 그 생명이 왜 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으로 묘사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에게 주어지는 신앙과 사랑의 생명은 단지 외적으로 배우고 이해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퍼셉션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앞에서 천적 인간의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났던 퍼셉션이 이제 창2:7라는 표현을 통해 생명의 숨과 연결되고 있습니다.

 

4:20우리 코의 이라는 말씀도 이러한 의미를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구절의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를 주님과 관련하여 이해하면서, ‘이라는 표현이 단순한 육체적 호흡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AC.94-96에서 인간은 자기 안에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는 존재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며, 인간은 그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의 생명도, 그것을 내적으로 지각하는 퍼셉션도 인간의 proprium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용되는 요20:22은 창2:7과 매우 깊은 연결을 보여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이 행동을 통하여 창2:7에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고,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두 장면 모두 생명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으며,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그 생명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요20:22은 창2:7이 단순히 자연적인 호흡이나 육체적 생명에 관한 표현이 아니라 영적 생명에 관한 말씀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빛을 던져 줍니다.

 

결국 AC.96AC.94-95에서 설명한 생명의 을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연결하여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합니다. 신앙과 사랑의 생명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의지적으로 실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래서 창2:7’, 말씀에 나타나는 기쁜 향기, 천적 인간의 퍼셉션,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시는 생명의 숨,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말씀이 서로 깊이 연결됩니다. 이 모든 표현은 영적 생명의 근원이 오직 주님께 있으며, 그 생명이 인간에게 흘러들어 신앙과 사랑을 살아 있게 하고 그것들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으로 지각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AC.96)

 

 

 

AC.97, 창2:7, '생명이 숨과 호흡으로 묘사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7생명이 ‘호흡’(breathing)과 ‘숨’(breath)으로 묘사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태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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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5, 창2:7, ‘신앙의 생명은 준비시키고, 사랑의 생명은 사람 되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2:7) AC.95여기서는 겉 사람의 생명이 다루어집니다. 앞의 두 절에서는 그의 신앙 또는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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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는데, 장이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룬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차이를 있도록 각각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간략히 말하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습니다. 첫째,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외에는 아무것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바로 그것을 숭배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 그렇게 하며,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행합니다. 천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사랑으로부터 행합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 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 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 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 or a dead man, 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 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 First, then, 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 and this he adores. 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 and not so much from love. 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 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 죽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목적들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만을 향하며, 그는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지 못합니다. 안다 하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목적들은 영원한 삶을 향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목적들은 주님을 향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Second: 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 or what the Lord is; or should he know, 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 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 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 죽은 사람은 싸움 가운데 있을 거의 언제나 굴복하며, 싸움 가운데 있지 않을 때에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고 그는 종이 됩니다. 그의 결박은 외적인 것으로서,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재산과 이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가 이러한 것들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는 평판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들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언제나 승리합니다. 그를 제어하는 결박은 내적인 것이며, 양심의 결박이라 합니다.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그것들을 업신여깁니다. 그러므로 그는 정복자라 합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에도 제어되지 않는 듯하며 자유롭습니다. 그의 결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데, 그것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Third: 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 and when not in combat, 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 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 such as the fear of the law, of the loss of life, of wealth, of gain, 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 but is always victorious; 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 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 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 he despises them, 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 but is free. His bonds, which are not apparent, 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AC.81은 창2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이 어떤 사람인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 장인 창1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고, 이 장인 창2는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먼저 밝힙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영적 인간과 죽은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셋의 차이를 알 수 있도록 각각의 본성을 간략히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81은 앞으로 창2를 읽을 때 계속 기준이 되는 중요한 비교표와 같은 번호입니다.

 

첫 번째 차이는 사람이 무엇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며, 무엇으로부터 행하는가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1에서 이미 다루었던, 아직 거듭나지 않은 상태의 사람입니다. 그의 관심과 판단의 중심이 몸과 세상에 속한 것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를 죽은 사람이라 합니다.

 

영적 인간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제한이 붙습니다. 그는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원리를 바탕으로 행합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그 신앙으로부터 행합니다. 다만 아직 사랑 자체로부터 알고 행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표현이 다시 달라집니다. 그는 영적이고 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합니다.영적 인간에게 사용되지 않았던 퍼셉션이 여기에서 직접 등장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가 행하는 것도 바로 그 사랑으로부터입니다. 따라서 AC.77에서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던 것이 AC.81에 이르러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 사랑과 신앙은 서로 무관한 두 가지가 아니라, 신앙이 사랑에서 나오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신앙이 사라진 상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천적 인간에게 신앙이 없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인정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천적 상태를 신앙을 넘어 사랑으로 상태라고 단순화하면 원문의 표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차이는 신앙의 존재 여부보다 그 신앙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있습니다.

 

두 번째 차이는 목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세 사람을 그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를 통해 다시 구별합니다. 죽은 사람의 목적은 오직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삶을 향합니다. 그는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도 알지 못하며, 혹 안다고 하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여기에서도 몸과 세상 자체가 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의 목적이 오직 그것만을 향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의 목적은 영원한 삶을 향하며, ‘그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목적은 먼저 주님을 향하며, ‘그것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을 향합니다. 이 순서는 AC.81이 직접 제시하는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영원한 삶이 먼저 언급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께 향하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주님이 먼저이며 그분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적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중심적인 목적이 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가지고 영적 인간은 자기 구원만 생각하고 천적 인간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지나치게 낮추어 말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 역시 영원한 삶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은 죽은 사람과 달리 모두 주님과 영원한 삶을 향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목적의 질서에서 차이가 나타납니다.

 

세 번째 차이는 싸움결박입니다. 죽은 사람은 싸움 가운데 있을 때 거의 언제나 굴복하고, 싸움이 없을 때에는 악과 거짓의 지배를 받아 종이 됩니다. 그를 제어하는 것은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이나 재산이나 이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러한 것들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는 평판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같은 외적인 결박입니다. 여기서 결박은 사람을 악에서 붙잡아 두는 제어의 수단을 가리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그 결박이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으며 언제나 승리하고, 그를 제어하는 결박은 양심의 결박이라 합니다. 이것은 창1에서 거듭나는 영적 인간의 과정에 싸움이 있었던 이유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에게 싸움이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죽은 상태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싸우며, 그 싸움에서 승리합니다.

 

천적 인간에 이르면 다시 놀라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 그것들을 업신여기며, 그러므로 정복자라 합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에게 악과 거짓의 공격 자체가 전혀 없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원문은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차이는 공격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싸워서 이기지만, 천적 인간은 그것들을 업신여깁니다.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도 없는 것처럼 보이며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에게도 결박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것은 외적으로 보이지 않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천적 인간의 자유는 아무런 질서도 없고 아무 제어도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외적인 두려움이나 양심의 싸움에 의해 억지로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자체가 그의 내적인 결박이 됩니다.

 

이 점에서 첫 번째 비교와 세 번째 비교가 서로 만납니다. 첫 번째에서 천적 인간은 진리와 선을 퍼셉션한다고 했고, 세 번째에서는 그의 보이지 않는 결박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합니다. 퍼셉션은 천적 인간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방식일 뿐 아니라, 그가 자유롭게 살아가면서도 선과 진리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는 내적인 결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AC.77에서 처음 등장했던 퍼셉션의 의미를 한 단계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AC.81의 세 비교를 함께 보면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차이는 단순히 세 등급의 지식이나 도덕성의 차이가 아닙니다. 무엇을 선과 진리로 인정하는지, 무엇으로부터 행하는지, 삶의 목적이 어디를 향하는지, 악과 거짓을 대할 때 어떤 상태에 있는지, 무엇이 그를 제어하는지가 모두 달라집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에 머물고 외적인 결박에 붙들립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이고 천적인 선과 진리를 신앙으로 인정하고 그 신앙으로부터 행하며, 양심의 결박 안에서 싸워 승리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인정하고 사랑으로부터 행하며, 주님을 목적으로 삼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안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러므로 AC.81은 앞에서 짧게 반복되었던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라는 말을 처음으로 상당히 구체적으로 풀어 주는 번호입니다. 특히 신앙에서 행함사랑에서 행함’, ‘영원한 삶을 통하여 주님을 향함주님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함’, ‘싸워서 승리함싸움 없이 악과 거짓을 업신여김’, ‘양심의 결박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는 차이를 함께 붙들면, 앞으로 창2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이 어떤 상태인지를 훨씬 분명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AC.81 해설)

 

 

 

AC.82, 창2:1,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 - 각 사람이 먼저 교회여야 하는 이유’ (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이 말씀은 사람이 이제 ‘여섯째 날’(sixth day)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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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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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 (16-17)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16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6, 17)

 

해설

AC.80은 창2:16-17의 개요이며, 앞에서 계속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질서에 하나의 중요한 제한을 제시합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과 같은 사람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아는 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별이 나타납니다.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이 금지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금지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알려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2:16-17의 금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등장한다고 해서 지식이나 이성 자체가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AC.75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말했고, AC.78에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하며 이것들까지도 지혜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80의 문제는 인간이 알고 생각하고 배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 및 신앙의 아르카나를 무엇으로부터 알고 판단하려 하는가에 있습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AC.77에서는 에덴동산의 보기에 좋은 나무들이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이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80은 그 퍼셉션의 근원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오는 퍼셉션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퍼셉션을 인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직감이나 자기 확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어지는 문장이 그 뜻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혀 줍니다. 그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안 됩니다. 여기서 감각적인 것들은 인간이 감각을 통하여 받아들이는 외적인 것들과 관계되고, ‘기억지식은 사람이 배우고 경험하여 기억에 받아들인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 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AC.78에서 기억지식은 천적 인간의 겉 사람에게 속하는 것으로 이미 제시되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 AC.80은 자연계의 사실을 관찰하거나 기억지식을 배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적인 것의 진실 여부를 인간 자신이 결정하려는 질서를 경계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는 된다는 말을 질문이나 연구 자체의 금지로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의 속뜻을 밝히면서 끊임없이 설명하고 구별하고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C.80에서 금지되는 것은 탐구라는 행위 자체라기보다, 그 앞에 붙어 있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라는 방식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아내려 하는 것이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이 구별 때문에 AC.80을 반지성주의적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에게 이성과 기억지식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자연적인 사실을 감각과 관찰을 통하여 확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다루는 것은 신앙의 아르카나입니다. 자연적인 것들을 알아보는 데 사용하는 감각과 기억지식을 그대로 신적인 것의 최종 판단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가 단순한 인식 방법의 차이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여기서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닙니다. 2:17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이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AC.73에서 거듭남 이전의 사람이 죽어 있던상태라고 한 것과 AC.80에서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고 하는 것은 둘 다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AC.79AC.80을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공통점도 보입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AC.80에서는 선과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두 번호 모두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가지거나 아는 것 자체를 금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방향을 경계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를 여기서 proprium이나 인간의 자유에 관한 전체 교리로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AC.79AC.80이 보여 주는 직접적인 연결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80은 따라서 창2:16-17의 금령을 알지 말라는 명령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로부터 아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할 때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는 것이, 이 개요에서 스베덴보리가 창2:16-17에 관하여 먼저 제시하는 핵심입니다. (AC.80 해설)

 

심화

1. 개역개정에는 열매 들어가 있는가?’(2:16-17)

 

2:16-17을 개역개정과 AC에 실린 영어 성경으로 함께 읽으면 작은 차이 하나가 눈에 띕니다. 개역개정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번역합니다. 그런데 AC에 인용된 영어에서는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이라고 되어 있어 열매에 해당하는 단어가 따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개역개정은 왜 열매를 넣었을까요?

 

먼저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본문에도 이 두 절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별도의 명사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문자적으로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너는 먹을 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먹지 말라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따라서 AC에 실린 영어가 tree를 그대로 살린 것은 히브리어의 표현 구조와 잘 맞습니다.

 

그러나 한국어에서는 나무에서 먹는다또는 문맥에 따라 나무를 먹는다는 표현이 독자에게 어색하거나 오해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먹는 것은 나무 자체가 아니라 나무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역개정의 나무의 열매는 이 뜻을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전달하기 위해 먹는 대상을 명시적으로 풀어 준 번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열매가 히브리어 원문에 별도의 단어로 있는데 영어 번역이 빠뜨린 것도 아니고, 반대로 개역개정이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임의로 첨가했다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AC를 읽을 때 이 차이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개별 표현을 매우 세밀하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개역개정의 열매라는 번역 표현을 근거로 창2:16-17의 속뜻에 원문에 없는 별도의 열매상응을 추가해서는 안 됩니다. AC.80에서 스베덴보리가 해설하는 것은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알려 하거나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통하여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려 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AC와 함께 읽을 때는 개역개정의 자연스러운 한국어와 원문의 표현 구조를 함께 기억하면 좋습니다. 예배에서 개역개정을 읽을 때는 그대로 나무의 열매라고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AC의 속뜻을 검토할 때는 히브리어와 AC의 영어가 실제로 나무에서 먹는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번역문에 명시적으로 보이는 단어와 원문에 실제로 있는 단어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개역개정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 번역AC 속뜻 해설이 서로 다른 일을 한다는 점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성경 번역은 원문의 뜻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한국어로 전달해야 하고, AC 해설에서는 그 번역 뒤에 있는 원문의 표현까지 확인하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근거로 속뜻을 설명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2:16-17에서는 개역개정의 열매를 그대로 존중하여 읽되, AC의 상응을 판단할 때 그것을 원문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단어처럼 취급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AC.80 심화 1)

 

 

 

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는데, 앞 장이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룬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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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절) The 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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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8-9) 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 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 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verses 89).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8, 9)

 

해설

AC.77은 창2:8-9의 개요입니다. AC.73에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다음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가 되는 것을 창2에서 다룬다고 했고,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라고 했습니다. AC.75에서는 그의 기억지식과 이성을,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을 말했습니다. 이제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된다고 하고, 그 동산 안에 있는 나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간략하게 밝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는 앞에서 계속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이 개요에서 천적 인간의 지성을 묘사합니다. 다만 왜 에덴인지, 동산인지, 동쪽인지에 관한 각각의 속뜻은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AC.77은 창2:8-9의 상세 해설이 아니라 개요이므로,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연결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 동산 안의 나무들이 나옵니다.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보기에 좋은 것과 먹기에 좋은 것을 구별하고 각각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에 연결합니다. 그러나 왜 보는 이 진리와 관계되고 먹는 이 선과 관계되는지까지 AC.77에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개요에서는 그 대응 관계를 먼저 확인하고, 세부적인 근거는 뒤의 본문 해설을 기다리는 편이 안전합니다.

 

여기서 퍼셉션이라는 말은 앞으로 천적 인간과 태고교회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용어가 됩니다. 다만 AC.77 한 번호만으로 퍼셉션의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천적 인간의 지성을 묘사하는 에덴동산 안에 진리에 대한 퍼셉션과 선에 대한 퍼셉션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퍼셉션이 정확히 어떤 것이며 일반적인 직감이나 주관적인 확신과 어떻게 다른지는 앞으로의 설명을 따라가며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나무가 특별히 언급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가 직접 그 의미를 밝혀 주므로 그대로 붙들어야 합니다. 특히 지식의 나무가 신앙을 의미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지식의 나무라는 이름만 보고 지식이나 이성 자체를 악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AC.75에서도 천적 인간에게 기억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이미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AC.77에서 곧바로 생명나무는 좋은 것이고 지식의 나무는 나쁜 것이라고 나누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생명나무가 사랑을 의미하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을 의미한다고 할 뿐, 신앙 자체가 악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후 두 나무가 어떤 질서와 문맥 속에서 다시 등장하는지는 그때의 설명을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창3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가져와 지식의 나무를 부정적인 원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같은 이유로 이 번호만으로 사랑과 신앙의 전체적인 관계를 미리 체계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행 해설은 천적 인간에게 사랑이 중심이고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며,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된다는 차이까지 설명합니다. 이러한 구별은 앞으로 매우 중요하지만, AC.77의 역할은 그 전체 질서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가 각각 사랑과 신앙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먼저 제시합니다.

 

AC.77에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각각의 상응을 서로 연결하여 아직 제시되지 않은 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동쪽은 주님이고, 에덴동산은 지성이며, 생명나무는 사랑이므로, 에덴동산은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지성이다라고 여기서 바로 결론을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각의 요소가 뒤에서 어떻게 설명되고 서로 어떤 관계를 이루는지를 스베덴보리 자신의 순서를 따라 확인하는 편이 더 충실합니다.

 

따라서 AC.77은 짧지만 앞으로 에덴 이야기를 읽기 위한 중요한 표지판을 여러 개 세워 줍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안의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그리고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이 연결들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각각의 의미와 관계는 창2의 실제 본문 해설을 따라가면서 하나씩 더 깊어질 것입니다. (AC.77 해설)

 

 

 

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강,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것들’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입니다. 이것들은 속 사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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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창2:1-17 개요, ‘그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 (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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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심화

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비교적 익숙하지만 천적 인간이라는 말은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한국어에서 천적이라고 하면 흔히 서로 잡아먹는 관계의 천적(天敵)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번역에서 사용하는 천적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어 celestial을 옮긴 말로, ‘하늘의’, ‘천국적인’, 더 정확하게는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천적 차원에 속한 성질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celestial spiritual을 매우 자주 구별합니다. 우리말로는 각각 천적 영적이라고 옮깁니다. 둘 다 자연적·세속적인 것과 대비되는 넓은 의미에서는 영적인 것에 속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전문적인 용법에서는 서로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천적은 특히 사랑과 선, 의지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되고, ‘영적은 신앙과 진리, 이해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됩니다.

 

AC.52는 이 차이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 가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 짐승이 나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을 설명하는 시8에서는 짐승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물고기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어느 쪽에는 사랑이 있고 어느 쪽에는 사랑이 없다가 아니라 무엇이 먼저인가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 나타나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 나타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을 머리로만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나 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거듭난 인간이며 AC.48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마찬가지로 천적 인간을 생각이나 진리가 필요 없는 사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52에서 천적 인간을 나타내는 순서에도 새와 물고기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짐승이 먼저입니다. 이것은 이해와 진리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 이해에 속한 것들이 그 뒤에 놓이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 차이는 앞의 AC.51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 곧 닮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영적 인간은 빛의 아들 친구라고 불리고,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호칭들을 곧바로 높고 낮은 신분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두 상태의 성질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AC.52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는 사랑으로 선을 행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의 다스림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한다는 것과 대비됩니다.

 

이 대목을 쉽게 설명하려고 영적 인간은 옳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천적 인간은 좋아서 선을 행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어느 정도 방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정확한 정의로 굳히면 곤란합니다. 영적 인간 역시 사랑으로 행동하며, 천적 인간 역시 진리와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인간의 차이는 단순히 의무  자발성보다 더 깊은 내적 질서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이후 설명까지 넓혀 보면 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선과 사랑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형성되는 양심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를 설명할 때는 천적 인간과 퍼셉션이 특별히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천적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 직감으로 안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퍼셉션은 단순한 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또한 양심이 퍼셉션보다 가치가 낮은 가짜 영적 기능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서로 다른 인간 상태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시는 서로 다른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적이라는 말 자체도 여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어의 천적(天敵)이 아니라 celestial을 번역한 전문 용어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 자체에도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의 구별이 있으며,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천적은 단순히 아주 영적인’, ‘영적보다  단계 높은이라는 정도 표현이 아니라 독특한 성질을 가진 범주입니다.

 

이 때문에 영적 인간이 계속 성장하면 모두 천적 인간이 되는가?라는 질문에도 조심해서 답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설명에서는 영적 인간 다음에 천적 인간이 등장하므로 하나의 더 깊어지는 흐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술에서는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 영적 천사와 천적 천사가 지속적으로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영적 단계 졸업  천적 단계로 승급한다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두 상태를 완전히 관계없는 두 종류의 인간으로 떼어 놓는 것도 현재 창세기 해설의 흐름을 놓칠 수 있습니다. 1의 거듭남에서 창2의 더 내적인 상태로 이어지는 진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둘은 분명히 구별되지만,  관계의 모든 세부를 하나의 간단한 단계표로 만들지 않는다는 태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어느 상태든 생명의 근원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AC.49-50에서 반복해서 본 것처럼 선과 진리와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영적 인간이 이해와 신앙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지성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며, 천적 인간이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사랑에서 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두 경우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서로 다른 질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AC에서 영적 천적을 만나면 단순히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라고 번역해 읽기보다 먼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습니다. 대체로 영적은 진리·신앙·이해와, ‘천적은 선·사랑·의지와 특별히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기계적인 일대일 사전처럼 적용해서는 안 되고 각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AC.52에서 가장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그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거듭난 인간이지만,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질서를 이루는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적이라는 낯선 용어는 바로 그 차이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말입니다. 앞으로 태고교회, 퍼셉션, 창세기 2,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을 읽어 갈수록 이 구별은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AC.52, 창1:26, ‘다스림의 방향 전환 : 이해에서 사랑으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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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심화

1. 형상 모양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

 

AC.51의 첫 문장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영적 인간은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  닮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형상과 모양이 도대체 어떻게 다른 것인가? 형상은 조금 닮은 것이고 모양은 완전히 닮은 것이라는 뜻인가?

 

먼저 AC.51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은 형상 모양이 같지 않다고 분명히 구별합니다.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하고, 창세기 1장은 영적 인간을, 창세기 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두 말이 단순히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형상은 70퍼센트 닮은 상태이고 모양은 100퍼센트 닮은 상태처럼 정도의 차이로만 이해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는 단순한 성숙도의 숫자 차이보다 더 깊습니다. AC가 앞으로 진행되면서 그는 두 인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 신앙과 사랑의 관계, 양심과 퍼셉션 등의 차이를 점차 설명합니다.

 

AC.51에서 가장 먼저 주어진 단서는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이라는 표현입니다. 즉 형상에는 분명 원형을 따르고 닮는 관계가 있지만, 그것이 곧 모양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에 대응시킵니다.

 

이것을 앞의 AC.48과 연결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여섯째 상태에 이른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형상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나 단순히 진리를 머리로만 아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영적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형상은 아직 미완성이고 모양만 완성이다라고 단순화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영적 인간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참된 거듭남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형상이라는 말 자체를 결함이나 실패의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아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닮음 동일함이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리 높은 천적 상태에 있어도 생명의 근원이 되지 않습니다. AC.39 이후 반복해서 본 것처럼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모양 역시 피조물이 창조주와 본질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AC.51보다 뒤의 설명들이 더 많은 빛을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구별하며,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선으로 인도되고, 천적 인간은 사랑과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설명할 때 퍼셉션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영적 인간은 머리로 살고 천적 인간은 가슴으로 산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48에서 이미 영적 인간도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행동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없고 천적 인간에게만 사랑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차이는 사랑의 유무보다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와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결합되는가에 더 깊이 관계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 인간이 계속 거듭나면 결국 천적 인간이 되는가? 현재 AC.51만으로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영적 인간과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을 구별하지만, 모든 개인의 거듭남을 영적 단계 졸업  천적 단계 진입이라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이후 저술에서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가 서로 구별되어 지속적으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영적 천적을 단순한 초급과 고급의 관계로만 생각하면 그의 전체 체계를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한편 창세기 1장과 2장의 연속된 설명 안에서는 분명 더 내적인 상태가 이어지는 흐름도 있습니다. 이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하므로 AC.51 한 문장만으로 모든 영적 인간은 결국 천적 인간이 된다거나 그 반대를 확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왜 AC.51은 영적 인간을 빛의 아들 친구’,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까요? 이 호칭들은 두 상태의 차이를 보여 주는 성경적 증거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곧바로 친구보다 자녀가  단계 높은 신분이라는 인간관계의 서열로 바꾸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1의 직접적인 목적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 서로 다른 호칭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빛의 아들이라는 표현에는 영적 인간과 진리의 빛 사이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반면 하나님의 자녀에 관해 인용된 요1:13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성질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지만, AC.51은 이 한 글에서 그 차이를 모두 체계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설명을 기다리면서 이 구별을 열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형상 모양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둘 다 주님을 닮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지만 동일한 상태는 아닙니다. ‘형상은 영적 인간에게, ‘모양은 천적 인간에게 해당하며,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전자와 구별되는 더 내적인 성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단순히 미완성  완성’, ‘낮은 단계  높은 단계’, ‘친구  아들이라는 하나의 서열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AC를 계속 읽으면서 이 차이는 점점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그리고 이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의지와 이해의 질서를 살펴보면 AC.51의 짧은 구별이 왜 중요한지 더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렇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며,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이다. 형상은 모양 자체는 아니지만 모양을 따른다. 둘은 모두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거듭난 인간의 상태이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의 내적 성질을 분명히 구별한다. 이것이 AC.51이 앞으로의 긴 설명을 위해 놓아 두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AC.51, 창1:26, ‘형상’과 ‘모양’ :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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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뒤 곧바로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무엇을 그렇게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며, 왜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우리가 대신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AC.49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감당할  없기 때문’,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 ‘섭리적으로 감추어 두셨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확정한다면 그것은 AC.49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우리의 추론이 됩니다.

 

이 문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에게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문제에 관하여 여기 기록한 것보다 훨씬 더 말할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그것을 AC.49에서는 아직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의도적으로 유보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상을 이 한 문장만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이 아무 의미 없는 편집상의 메모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설명하려는 본문의 중심에 필요한 만큼 말하고, 다른 주제는 뒤로 남겨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AC.49의 중심은 태고교회의 현현 방식 자체를 상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왜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문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직후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이어집니다. 따라서 AC.49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태고교회와 주님의 교통에 관한 모든 세부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과 그것이 태고교회의 사람 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자연계의 대화 장면처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주님께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그 현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각되었는지, 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했는지, 얼마나 자주 그러했는지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적 눈으로 보았다’, ‘내적 시야가 열렸다와 같은 세부를 AC.49의 설명인 것처럼 덧붙이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영계 경험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및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의 얼굴과 얼굴 교통이 정확히 같은 방식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서로 관련하여 연구할 수 있는 주제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가장 안전한 답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주제에는  말할 것이 많이 있지만, 지금  자리에서는 그것을 다루지 않겠다.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그가 직접 밝히지 않았으므로 열린 채로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는 독법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유보가 AC.49의 중심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놀라운 영적 경험 자체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짧게 언급하고 곧바로 더 중요한 문제,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로 돌아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고, 자기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이라고 했습니다. AC.49에서 지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을 때에도 좋은 원칙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완성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한 문장을 만났다고 해서 관련 교리를 모두 끌어와 그 빈칸을 채우기보다, ‘지금  글이 말하는 만큼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AC의 긴 흐름 속에서 어떤 주제가 처음에는 짧게 언급되고 이후 점차 자세해지는 과정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는 신비한 비밀을 암시하므로 우리가 그 내용을 추측해야 한다는 초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고 경계를 그은 문장입니다. 그 경계를 존중하면서 AC.49가 지금 밝히는 핵심, 곧 주님이 최고의 뜻에서 유일한 사람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는 데 집중하는 것이 이 문장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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