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의 성경적 출발점은 사사기 3장 1절의 매우 인상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시려고’ 몇몇 민족을 남겨 두셨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이 말씀에서 곧바로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명제를 끌어내고, 그것을 6·25전쟁과 대한민국의 안보 현실, 북한과 공산주의, 주한미군, 그리고 현재의 정치적 대결에 연결합니다. 이어 사사기 전체를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다시 번성’이라는 순환구조로 설명하고, 이것을 개인의 삶과 국가의 역사에 적용합니다. 설교의 성경적 골격 자체는 분명히 사사기의 중요한 특징 하나를 포착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남, 압제당함, 부르짖음, 사사가 일어남, 구원받음, 다시 타락함이라는 반복 구조로 진행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사사기 3장의 ‘전쟁을 알게 하심’은 설교자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을 가리킵니다. 말씀에 기록된 전쟁은 역사적으로 실제 있었던 전쟁이지만, 말씀의 속뜻에서 전쟁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싸움, 곧 시험을 표상합니다. 사람이 거듭나려면 반드시 이 싸움을 통과해야 합니다. 선이 무엇인지 알고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악한 욕망이 일어날 때 그것을 거절하고, 거짓된 생각이 밀려올 때 진리를 붙들며,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충돌할 때 주님의 뜻을 선택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전쟁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본문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가나안 정복이 이루어졌지만, 모든 적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민족들은 그대로 남겨졌습니다. 자연적 의미만 보면 ‘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완전히 제거하지 않으셨는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거듭남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놀랍도록 정확한 인간의 영적 현실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처음 주님께 돌아왔다고 해서 자기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이 단번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씩 악을 보게 하시고, 싸우게 하시며, 이기게 하십니다. 아직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악은 당분간 잠잠하게 남겨 두십니다. 그것까지 한꺼번에 드러난다면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남겨 두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악을 좋아하셔서 보존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영적 성장을 위해, 시험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도록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난 여호수아 설교에서 살펴본 ‘허용의 섭리’와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뜻하시지 않지만, 악이 사람에게 드러나고 그것과 싸우는 과정까지 섭리 안에 사용하십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악이 있는지도 모른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험은 악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숨어 있던 악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사기 3장 1절의 ‘전쟁을 알지 못한 자에게 전쟁을 알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은 외부의 군사전쟁보다 먼저 영적 전쟁을 가리킵니다. 설교자가 ‘전쟁을 모르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하게 표현했는데, 그 표현을 영적으로 바꾸어 보면 오히려 깊은 진리가 됩니다. 거듭남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영적 싸움을 알게 됩니다. 자기애와 이웃 사랑이 충돌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가 충돌하며, 탐욕과 정직이 충돌하고, 자기 지혜를 믿고 싶은 마음과 주님의 지혜를 의지해야 한다는 신앙이 충돌합니다. 이 싸움을 한 번도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신의 악을 아직 심각하게 대면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전쟁’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다만 그 적은 먼저 북한이나 공산주의자나 특정 정당의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번 설교와 ‘스베덴보리의 렌즈’ 사이에 중요한 갈림길이 나타납니다. 설교자는 성경의 ‘가나안 전쟁’을 거의 즉시 대한민국의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옮겨 갑니다. 6·25전쟁, 북한, 주한미군, 특정 대통령과 정치세력, 광화문 집회가 계속해서 사사기의 ‘전쟁’과 겹쳐집니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는 방향이 반대입니다. 말씀은 밖의 적을 찾아내기 전에 내 안의 적을 찾아내도록 사람을 이끕니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 ‘블레셋 사람이 누구인가?’라고 물으며 오늘날의 어떤 정치세력이나 종교집단을 지목하기 시작하면, 말씀은 쉽게 타인을 공격하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내 안의 블레셋은 무엇인가?’라고 묻기 시작하면 말씀은 나를 회개시키는 거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이 일관되게 후자를 택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영혼 안에서 벌어지는 주님의 나라와 지옥 사이의 싸움입니다.

 

설교자가 제시한 ‘사사기의 사이클’도 이 관점에서 읽으면 훨씬 깊어집니다. 설교에서는 ‘번성하면 부패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잘되고 형편이 좋아지면 교만해지고, 심지어 ‘여자 하나 가지고 못 살고 바람을 피게 된다’는 매우 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예도 듭니다. 그러고 나면 하나님께서 ‘매를 때리시고’, 징계를 받은 사람이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사사를 보내 회복시키며, 다시 번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반복되는 타락을 아주 쉽게 기억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실제 영적 사이클은 단순한 ‘경제적 번성→도덕적 부패→재난→기도→경제적 회복’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 보면 ‘주님께서 주신 선과 진리→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김→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지배→거짓과 악에 사로잡힘→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음→주님께 도움을 구함→진리를 통한 구원→새로운 영적 자유’의 순환입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번성’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번성이 언제나 돈이 많아지고 사업이 잘되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번성과 증가는 선과 진리가 많아지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고, 이웃을 섬기는 기쁨이 늘어나며, 말씀을 이해하는 빛이 밝아지는 것이 진정한 번성입니다. 그러므로 ‘번성하는 상태에 계속 있으라’는 설교자의 권면을 영적으로 바꾸어 말하면 대단히 좋은 권면이 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리지 말고 계속 주님께 돌려드리라’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타락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평안해지면 여호와를 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영적 생활에서도 반복됩니다. 시험 가운데 있을 때는 간절히 기도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자기 힘으로 해결한 것처럼 느낍니다. 은혜를 받을 때에는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선을 자기 성품과 능력으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proprium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마침내 자기가 선하고 자기가 지혜롭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을 지닙니다.

 

따라서 ‘번성하면 부패한다’는 설교자의 관찰은 영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건드립니다. 그러나 문제는 번성 그 자체가 아닙니다. 선과 진리의 풍성함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내 것’으로 돌리는 순간입니다. 천사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과 지혜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 때문에 부패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아주 가진 것이 적은 사람도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며 교만하면 부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패의 원인은 풍요가 아니라 appropriation, 곧 주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취하는 데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어 ‘부패하면 하나님이 때리신다’, ‘뒤지도록 맞는다’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성경의 문자에는 실제로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가 그렇게 표현되는 곳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을 합니다. 하나님은 실제로 분노하시거나 사람을 해치기 위해 매를 드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며 자비 그 자체이십니다. 사람이 악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 악 자체가 고통스러운 결과를 낳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허용하시면서도 가능한 한 사람을 구원 쪽으로 돌리십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때리셨다’고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사람이 주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결과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에게 압제당하는 것도 같은 구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이 사람을 지배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욕망을 사용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욕망이 나를 사용합니다. 처음에는 화를 필요할 때만 낸다고 생각하지만 나중에는 분노가 나를 끌고 갑니다. 처음에는 돈을 필요에 따라 추구하지만 나중에는 탐욕이 모든 판단을 지배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이방 민족의 압제’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적에게 넘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선택한 악이 마침내 그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스라엘은 ‘부르짖습니다’. 설교자가 ‘부르짖음’을 강조하는 것은 사사기의 문자적 흐름을 잘 포착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의 한계에 도달해서야 비로소 주님을 진실하게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힘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동안은 주님의 도움을 입술로만 구할 수 있지만, 자신의 무능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면 기도가 깊어집니다. 이 점에서 설교자가 ‘부르짖으라’고 반복하는 데는 목회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큰소리로 주여를 외치면 하나님께서 뜻을 바꾸신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음량에 있지 않습니다. 통성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고, 아무 소리 없는 묵상기도도 진실한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의지의 방향입니다. 말없이 주님 앞에서 자신의 악을 인정하고 돌이키는 한 사람의 마음이 수천 명의 함성보다 더 깊은 기도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크게 ‘주여’를 외쳐도 자기 악을 그대로 사랑하고 있다면 그 외침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또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다’는 표현도 내적으로는 다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을 향한 주님의 뜻은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입니다. 변하는 것은 사람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등지고 있을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심판처럼 느껴지고, 사람이 돌아서 주님을 향하면 같은 사랑이 자비와 평화로 경험됩니다. 태양이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늘에서 햇빛 쪽으로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바뀌었다’기보다 사람이 주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더 깊은 설명입니다.

 

사사기의 다음 단계는 ‘사사를 보내 주심’입니다. 설교에서는 이것을 ‘오늘날의 선지자’를 보내 주시는 것으로 설명하고, 선지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도 구별이 필요합니다. 성경의 선지자의 본질은 미래 사건을 예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선지자가 ‘진리의 가르침’을 표상합니다. 그리고 사사는 그 진리에 따라 악과 거짓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주님의 구원 능력을 표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부르짖을 때 주님께서 ‘사사를 보내신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카리스마적 지도자 한 사람을 보내신다는 뜻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말씀 한 구절을 통해서도, 양심을 통해서도, 한 사람의 조용한 충고를 통해서도, 때로는 실패와 고난을 통해서도 사람에게 구원의 진리를 보내십니다. 핵심은 그 사람을 특정 지도자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이번 설교를 해설할 때 특별히 중요합니다. 예배 전 기도에서부터 특정 목회자를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특정 날짜의 광화문 집회와 정치적 승리를 하나님의 뜻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어 설교 중에도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세우신다는 말과 현재의 정치운동 지도력이 서로 가까이 놓입니다. 이 구조가 반복되면 회중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성경의 사사·선지자→오늘의 특정 지도자’라는 연결이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구약의 사사나 선지자의 표상을 오늘날 특정 개인에게 직접 이전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씀의 표상은 먼저 주님 자신과,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인간 지도자는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자기애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라 해도 말씀의 ‘사사’나 ‘선지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직접 적용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말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선지자는 앞으로 될 것을 미리 다 보는 사람’이라고 설명한 부분 역시 수정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참된 예언은 미래의 정치 사건을 맞히는 능력보다 훨씬 깊습니다. 말씀은 ‘악을 계속 사랑하면 결국 그 악의 종이 된다’, ‘회개하면 주님께서 새로운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자기 사랑의 마지막은 지옥이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의 마지막은 천국이다’라는 영원한 미래를 보여 줍니다. 이것이 말씀의 예언적 성격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본문 자체가 놀랍도록 선명하게 ‘영적 전쟁’을 말할 수 있는 본문인데도, 그 전쟁이 거의 전부 정치적·군사적 전쟁으로 밖을 향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사사기 3장 1절은 ‘전쟁을 알지 못한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깊이 파고들었다면 ‘왜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이 필요한가’, ‘왜 주님은 우리의 모든 악한 성향을 한꺼번에 없애주시지 않는가’, ‘왜 신앙생활을 오래해도 반복해서 같은 악과 싸우는가’, ‘시험 가운데 천사들과 악한 영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사람의 자유는 어떻게 보존되는가’ 같은 매우 깊은 영적 주제들이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교에서는 이 놀라운 내적 전쟁이 6·25전쟁과 북한, 주한미군, 특정 정치인, 광화문 집회로 빠르게 치환됩니다. 정치와 국가 문제를 설교에서 전혀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정의와 자유, 국가의 평화와 국민의 안전 역시 이웃 사랑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영적 전쟁을 특정 정치세력과의 전쟁으로 동일시하는 순간,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지지하는 편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고, 반대편은 가나안 족속이나 마귀의 세력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회개의 방향이 뒤집힙니다. ‘내 안의 무엇이 주님을 거역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저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내 안의 간첩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자기애와 탐욕과 거짓과 교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외부의 실제 사람들에게만 적용하면 말씀은 자기 성찰의 거울에서 정치적 무기로 변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설교에서는 정치적 상대를 향한 매우 강한 욕설과 모욕적 표현이 반복됩니다. 특정 인물을 향하여 ‘개자식’, ‘늙은 새끼’, ‘죽은 놈’ 등의 표현을 사용하고, 일부 정치인이나 공직자에게 극형이 필요하다는 발언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을 단지 설교자의 독특한 화법이나 정치적 열정으로만 넘기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설교의 본문이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과 싸우면서 내가 그 악과 같은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과 싸우다가 증오에 빠지고, 불의와 싸우다가 모욕과 복수를 사랑하게 된다면, 외적으로는 적과 싸우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그 적이 상징하는 악에게 패배하고 있는 셈입니다.

 

천국의 선은 악에 단호하면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거짓을 분명히 드러내지만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는 데서 기쁨을 얻지 않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매우 엄하게 책망하셨지만 그들의 영원한 멸망을 즐거워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하여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전투성’은 증오가 강한 상태가 아니라, 악을 향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면서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를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

 

설교 중 ‘성경 전체가 다 정치로 되어 있다’, ‘아브라함도 위대한 정치가이고 모세도 정치가’라는 주장은 설교자의 정치신학을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물론 성경에는 왕과 국가, 전쟁과 법, 사회질서와 권력이 많이 등장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중심이 정치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본질을 지나치게 외적 차원으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중심은 주님과 그분의 나라,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국가와 왕, 전쟁과 평화도 결국 이 영적 실재를 표상하기 때문에 말씀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모세는 말씀 자체 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율법을 표상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역시 단순한 정치 지도자로 읽히지 않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의 인성과 그 인성이 신성과 하나 되어 가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이 인물들을 곧바로 현대 정치 지도자의 모델로 읽는 것은 말씀의 깊이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설교 후반에 다시 등장하는 ‘천년왕국’도 같은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전천년·후천년·무천년설을 설명하면서 천년왕국을 매우 강조합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말했듯, ‘천년왕국을 죽은 뒤에만 기다리지 말고 이 땅에서부터 체험해야 한다’는 직관 자체에는 중요한 영적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천 년’을 문자적인 천 년짜리 정치 체제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하고 충만한 어떤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주님의 나라가 사람 안에 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천년왕국’은 어느 정당이 집권하거나 어떤 국가 체제가 세워졌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이 왕이 되실 때 시작됩니다. 자기애가 내려가고 주님 사랑이 올라오며, 거짓이 물러가고 진리가 다스리며, 복수하고 싶은 욕망보다 용서와 정의가 우위를 차지할 때 그 사람 안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공동체가 교회의 내적 모습이며, 궁극적으로 천국의 질서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반복되는 ‘회복’과 ‘번성’도 이 관점에서 새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설교자는 ‘나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나를 번성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도록 인도합니다. 이것이 건강과 물질, 사회적 성공의 회복을 뜻한다면 신앙의 범위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회복은 인간 안에 잃어버린 천국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는데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 거짓말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이 진실을 사랑하게 되는 것, 자기 이익밖에 모르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게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사기의 사이클을 끝내는 길입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사이클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또 타락하고, 부르짖고 또 구원받고, 다시 타락합니다. 사사기 마지막에 가면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결국 인간 사사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구원이 필요합니다. 말씀 전체의 흐름으로 보면 이 반복은 궁극적으로 참된 구원자이신 주님을 기다리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거듭남의 과정과도 닮았습니다. 사람은 한 번의 회개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반복해서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며, 더 깊은 악이 드러나고 또 싸웁니다. 그러나 정확히 같은 원을 무한히 도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 순종한다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시험마다 조금씩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외적인 행동의 악과 싸우고, 다음에는 생각의 거짓과 싸우며, 더 나아가 그 밑에 있는 자기애와 지배욕의 뿌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사이클은 절망의 사이클만은 아닙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주님을 잊어버리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사람이 아무리 반복해서 넘어져도 진심으로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께서는 다시 구원의 길을 여신다는 자비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설교자가 반복해서 강조한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메시지는 소중한 복음적 요소를 지닙니다. 다만 그것을 ‘큰소리로 기도하면 원하는 상황을 바꾸어 주신다’는 차원보다, ‘자기의 무능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 악의 속박에서 건져 주신다’는 차원으로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의 찬송과 통성기도에서도 상당한 생명력은 느껴집니다. 설교자가 ‘찬송은 곡조 있는 설교’라고 표현한 것도 기억할 만합니다. 실제로 찬송은 진리를 정서와 결합시켜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전달하는 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음악과 노래는 정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진리가 단지 머리에만 있을 때보다 사랑과 정서에 결합될 때 사람의 생명에 더 깊이 들어갑니다. 이런 면에서 이 예배가 지적인 강의에 머물지 않고 회중의 정서 전체를 움직이려 한다는 점은 분명한 특징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분별이 필요합니다. 찬송과 통성기도로 마음이 강하게 고양된 직후 특정 정치적 주장과 집단행동이 하나님의 명령처럼 제시되면, 회중은 자신이 느끼는 종교적 감동과 특정 정치적 판단을 구분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강한 정서적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 ‘하나님이 보내신 지도자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반드시 승리한다’는 표현이 반복될수록 그 위험은 커집니다. 영적 감동이 있다고 해서 그 감동과 함께 제시된 모든 인간적 판단까지 신적인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계속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자유와 이성의 보존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강제로 믿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이성을 압도하고 자유를 빼앗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참된 신앙은 사람이 진리를 이해하고 자유롭게 받아들여 삶으로 선택할 때 그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 역시 회중에게 강한 감동을 주면서 동시에 각자가 말씀 앞에서 자유롭게 생각하고 분별할 수 있는 공간을 남겨 주어야 합니다.

 

끝으로 이번 설교 전체에서 가장 아깝게 느껴지는 것은 설교자가 잡은 본문의 핵심 자체는 상당히 좋았다는 점입니다. ‘사사기는 사이클로 되어 있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쟁을 가르친다’, ‘번성 가운데 부패하지 말아야 한다’, ‘징계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시고 회복하신다’는 각각의 명제에는 깊이 발전시킬 수 있는 영적 씨앗들이 들어 있습니다. 자막에서도 설교자는 이 순환을 반복해서 ‘번성→부패→징계→부르짖음→사사→회복→번성’으로 요약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해 한 단계 더 안으로 들어가면, 이 사이클의 무대가 먼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전쟁은 내 안의 선과 악의 전쟁이며, 가나안 족속은 내 안에 남아 있는 악과 거짓이고, 압제는 내가 사랑한 악이 도리어 나를 지배하는 상태이며, 부르짖음은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는 회개이고, 사사는 주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의 진리이며, 회복은 주님께서 내 의지와 이해성을 다시 질서 안으로 돌려놓으시는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사사기는 정치적 전투의 교본보다 훨씬 더 무서운 책이 됩니다. 왜냐하면 적을 밖에서 찾을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자가 문제다’, ‘저 정치인이 문제다’, ‘저 세력이 문제다’라고 말하기 전에, 말씀은 ‘네 안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족속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다른 사람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과장은 용납하고 있지는 않은지, 정치인의 교만은 비난하면서 자신의 영적 교만은 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반대편 사람을 증오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사사기 3장이 가르치는 가장 깊은 ‘전쟁을 아는 법’입니다. 영적 전쟁을 아는 사람은 적을 향해 가장 큰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사람입니다. 강한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 앞에서 자신의 proprium을 내려놓는 사람입니다. 외부의 승리를 확신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싸우신다는 사실을 믿고 자신은 선과 진리의 편에 서는 사람입니다.

 

지난 여호수아 설교가 ‘땅을 분배받는 것’이었다면 이번 사사기 설교는 그 땅을 받은 뒤 ‘그 땅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거듭남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더 깊은 싸움이 시작됩니다.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계속 주님의 것으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다시 자기 것으로 취하여 우상을 섬길 것인가 하는 싸움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우리가 가져갈 가장 중요한 한 문장을 새롭게 만든다면, ‘전쟁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겠습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과 악이 싸우는 영적 전쟁을 반드시 알게 되며, 그 싸움에서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의지하여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사기의 사이클’을 한 문장으로 다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주님께 받은 선을 자기 것으로 돌릴 때 사람은 악의 지배 아래 들어가지만,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주님께 돌아서면 주님께서는 진리를 보내어 그를 다시 영적 자유와 선의 삶으로 회복시키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사기의 전쟁을 오늘 우리의 전쟁으로 읽는 가장 내적인 길입니다.

 

 

 

SY.69, 전광훈 목사, 20260816,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1부, ‘하나님의 나라’와 ‘대한민국’이 하나로 겹쳐질 때이 긴 예배와 설교를 처음부터 따라가다 보면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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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38, 전광훈 목사, 20260802, ‘자유통일을 위한 120만 광화문 전국 주일 연합예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설교의 출발점인 여호수아의 ‘땅 나누기’는 말씀의 속뜻으로 볼 때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가나안 땅은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이 점령한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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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설교의 중심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를 교회의 성장이나 성공, 은사나 신비 체험, 신학적 지식, 심지어 선교적 업적 자체에 두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두자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빌3:14의 ‘푯대를 향하여’를 중심에 놓고, 요단강에 발을 담그는 제사장들, 애굽으로 돌아가는 모세, 골리앗에게 달려가는 다윗, 아합 앞에 서는 엘리야의 모습을 연이어 제시하면서 이제 막 출발하는 교회가 처음부터 방향을 정확히 정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를 ‘GPS’라는 친숙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출발점에서 좌표가 조금만 어긋나도 먼 훗날에는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하므로 교회의 좌표를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 전체를 관통하는 이 중심 명제는 매우 귀합니다.

 

특히 설교 초반에 제시되는 교회상은 주목할 만합니다. 설교자는 건물이나 숫자보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죄인이 들어와도 과거 때문에 정죄하거나 배척하지 않으며, 부자나 유명인이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특별대우를 받는 대신 연약한 사람이 사랑받고, 서로의 것을 나누며, 직분과 서열보다 겸손과 순결과 거룩함이 존중받는 교회를 꿈꿉니다. 반대로 직분과 권위, 시기와 경쟁, 험담과 배척으로 가득한 교회를 매우 강하게 비판합니다. 표현은 때때로 거칠지만 그가 지향하는 방향은 분명합니다. 교회는 외적 규모나 사회적 힘으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주님의 사랑이 얼마나 실제로 살아 있느냐에 따라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교회 이해와 상당히 가까운 곳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교회는 본질적으로 건물이나 교단, 조직 자체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 있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천 명이 모이고 거대한 조직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천국적인 교회가 되는 것도 아니며, 아주 작은 공동체라고 해서 교회성이 약한 것도 아닙니다. 외적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그 외적 형식 안에 내적인 것이 살아 있을 때입니다. 설교자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것’보다 ‘한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자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설교자가 예수님 곁에 세리와 죄인들과 사회적으로 멸시받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부분도 중요합니다. 그의 요지는 ‘과거가 더러웠던 사람이 교회에 들어왔을 때 그의 과거를 계속 꼬리표처럼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관용 이상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사람은 현재 자연계에서 드러나는 이력만으로 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그 사람의 의지와 사랑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과거에 어떤 악 가운데 있었더라도 그것을 죄로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서며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바로 그 자리에서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한 사람의 과거를 끊임없이 끄집어내어 현재의 그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거듭남이라는 복음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설교가 가장 힘 있게 전개되는 곳은 바울에 관한 부분입니다. 설교자는 바울에게 선교도, 신유도, 신비 체험도, 신학도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였고 놀라운 능력을 경험했으며 ‘셋째 하늘’에 관한 체험도 있었고 뛰어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그리스도를 얻는 것’을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3:8 이하의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를 중심으로 설교가 깊어집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구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서신은 스베덴보리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는 ‘말씀’의 책들과 동일한 방식의 내적 의미, 곧 연속적인 아르카나를 지닌 책으로 다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빌3의 각 문구를 창세기나 출애굽기, 선지서나 복음서처럼 상응을 따라 속뜻으로 풀어 가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말이 영적으로 무가치하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여기서 표현된 ‘그리스도를 얻고자 한다’는 신앙적 고백은 매우 귀하며, 그 내용을 주님의 가르침과 스베덴보리가 밝힌 거듭남의 질서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거나 예수님에 대해 뜨거운 감정을 갖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는다는 것 역시 외적인 행동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진리가 사람의 의지와 삶 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의 푯대’라는 선언은 결국 ‘내 사랑의 질서가 주님의 질서를 닮아 가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사랑하고 타인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상태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유용한 일을 기쁨으로 행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실제 내용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설교가 강조하는 ‘내가 죽는 것’도 조금 더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자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기를 원했다는 것을 매우 강하게 표현하면서, 고난과 죽음을 마치 적극적으로 환영하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돌에 맞은 바울이 다시 성으로 들어간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죽고 싶어서’라고까지 표현하고, 뒤에서는 ‘내가 죽기를 미치도록 갈망하고’라는 강렬한 말을 사용합니다. 설교자의 의도가 육체적 죽음이나 자살을 권하는 것이 아님은 문맥상 분명합니다. 그 자신도 이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영적으로 정돈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죽어야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의 지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파괴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인격을 살리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 존재를 혐오하라는 말이 아니며, 고통 자체를 사랑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상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우는 상태, 자신의 지성과 의를 신뢰하는 상태가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가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이것이 영적인 의미에서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따라서 설교 후반의 ‘고통이 오면 뛰어가서 환영하십시오’라는 권면은 그 열정은 이해하면서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고통 자체를 선이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고난은 때로 시험의 장이 되고, 주님께서는 그 시험을 통해 우리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시고 정화하시며 선을 더욱 굳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고통을 일부러 찾아다니거나 부당한 학대를 계속 허용하거나 자신에게 해를 가하는 상황을 ‘십자가’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고통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으며 진리와 선을 선택할 때 그 시험이 거듭남을 섬기게 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셨으므로 나도 고난받아야 한다’보다 더 깊은 질문은 ‘예수님께서는 고난 가운데서 무엇을 이루셨는가’입니다. 주님의 전 생애는 지옥들과 싸우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계속적인 시험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육체적 고통의 양을 주님과 비슷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올라오는 악과 거짓의 충동과 싸우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시험과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설교자가 벧전2를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아름답습니다.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는 것은 천국적 삶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상대방의 죄를 내가 짊어지고 내가 죽어야 한다’는 설교자의 표현은 신학적으로 구별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악에 복수하지 않고 그것을 견딜 수는 있으며, 용서하고 그 사람의 회복을 바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악 자체를 내가 대신 담당하여 구속하는 것은 주님께 속한 일입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속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가운데 이웃을 대하는 것입니다.

 

또한 용서는 악을 악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반복적으로 해를 입으면서도 무조건 참는 것이 언제나 사랑인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진리를 말하고 경계를 세우며 악이 더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향한 체어리티일 수 있습니다. 천국의 사랑에는 따뜻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는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보완된다면 설교자가 말하는 ‘욕을 당하고도 욕하지 않는 삶’은 훨씬 건강하고 깊은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설교 후반부에서 다시 교회 이야기로 돌아가는 것도 좋습니다. 설교자는 ‘자기 의로 충만한 의인’보다 자기 죄를 알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교회, 큰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큰 자로 여김받는 교회,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사실보다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는 교회를 꿈꿉니다. 여기에는 복음서에서 반복되는 주님의 가르침과 통하는 매우 중요한 직관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지상의 지위와 명성이 질서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적 신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랑이 어떠한지가 중요합니다. 섬김을 사랑하는 사람은 높아지려 하지 않지만 바로 그 때문에 천국의 질서 안에서는 큰 자가 됩니다.

 

다만 ‘자기 의는 전혀 없고 내 죄밖에 없다’는 표현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더 섬세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을 인간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는 것은 옳습니다. 모든 참된 선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거듭난 인간에게 실제로 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지 죄인으로 남겨 두고 외부에서 의를 덮어씌우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이해를 실제로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행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본래 주님으로부터 왔음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난 삶의 아름다운 역설입니다. ‘내가 행하지만 그것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설교에서 가장 귀한 문장인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그대로 보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문장의 깊이가 훨씬 더 깊어집니다. 예수님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단지 그분에 관한 지식을 늘리는 것도, 감동적인 체험을 많이 갖는 것도,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자 자신이 선교와 신유와 신비 체험과 신학을 모두 궁극적 목표에서 내려놓은 것은 바로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이 있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천국적이 되는 것도 아니며, 없다고 해서 주님에게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비 체험 자체를 경계하거나 낮게 보는 방향으로까지 갈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방대한 영계 경험을 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문제는 영적 체험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사람을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환상이나 계시나 놀라운 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허락하신 영적 체험이 그를 더욱 겸손하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게 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고, 말씀을 더욱 사랑하게 한다면 그 열매를 함부로 멸시할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체험이냐 이성이냐’라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것이 선과 진리의 질서 안에 있는가입니다.

 

설교자가 교회의 미래를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로 가득한 교회’라고 그리는 마지막 장면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이 말은 ‘모두가 비슷한 종교적 말투와 행동을 갖게 되는 공동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입니다. 각 사람은 서로 다른 성품과 은사와 유용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가 하나의 중심, 곧 주님을 향합니다. 마치 인체의 서로 다른 기관들이 하나의 생명을 섬기듯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는 모두가 똑같아지는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을 따라 서로를 섬기면서 하나가 되는 곳입니다.

 

이 점에서 설교 초반과 마지막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처음에는 ‘어떤 교회를 꿈꾸는가’를 묻고, 마지막에는 성도들에게 눈을 감고 그 교회를 상상해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습니다. 이것은 목회적 호소로서 힘이 있습니다. 교회의 출발점에서 건물과 숫자와 영향력이 아니라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갈 것인가’를 묻는 것은 언제나 필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은 아름다운 공동체 이상을 공유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속 사람에서 실제로 거듭남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악을 보고 인정하며,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피하고, 주님께 선을 행할 힘을 구하며, 실제 생활에서 이웃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되면서 외적인 신앙이 내적인 신앙이 되고, 알고 있던 진리가 삶의 선과 결합합니다. 그때 교회는 조직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의 ‘GPS’ 비유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바꾸어 말한다면 이렇습니다. 목적지를 ‘예수님’이라고 입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내가 걷는 길이 그 목적지와 일치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는가, 아니면 진리가 나를 변화시키도록 허용하는가. 내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는가, 아니면 유용한 사람이 되려 하는가. 나에게 상처 준 사람을 속으로 계속 정죄하는가, 아니면 진실을 분별하면서도 그의 최종 상태는 주님께 맡기는가. 내가 가진 신학과 체험과 은사를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는 데 사용하는가, 아니면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하는가. 바로 이런 일상의 작은 선택들이 실제 GPS의 경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 설교의 가장 좋은 부분은 역설적으로 가장 단순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 이 문장을 굳이 고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우리에게 ‘그렇다면 예수님을 향해 간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인가’를 더욱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것은 고통을 많이 겪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며, 신비 체험을 부정하거나 반대로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신학적으로 누구보다 정확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 자신의 실제 삶에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푯대를 향하여’라는 제목도 새로운 깊이를 갖습니다. 푯대는 단순히 저 멀리 바라보는 목표가 아닙니다. 주님은 목적지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향해 내딛는 매 걸음의 생명이십니다.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려 애쓸 때, 나보다 약한 사람을 이용하지 않고 보호할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때,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을 선택할 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길 때, 우리는 이미 그 푯대를 향하여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설교는 전체적으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 폐기하거나 경계해야 할 설교라기보다, 상당히 귀한 중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몇몇 강한 표현들을 거듭남과 시험, proprium,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결합이라는 관점에서 조금 더 깊고 안전하게 다듬어 들으면 좋은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의 성공보다 예수 그리스도’, ‘직분보다 겸손’, ‘정죄보다 용서’, ‘유명인보다 회개하는 한 영혼’, ‘자기 자랑보다 섬김’을 앞세우는 방향은 소중합니다. 여기에 ‘자기 죽음’을 자기혐오가 아니라 proprium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거듭남으로, ‘고난’을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허락하실 때 선과 진리가 굳어지는 시험의 장으로, ‘그리스도를 닮음’을 외적인 고난의 모방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오히려 더욱 풍성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설교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이것 하나로 모입니다.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고 있는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질문을 다른 질문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게 만듭니다. ‘내가 주님을 푯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 나의 사랑, 생각, 말, 판단, 돈의 사용, 사람을 대하는 태도, 용서, 정직, 섬김과 유용한 삶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가?’ 그렇다면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종교적 영웅이 되는 일이 아니라, 날마다 자신의 proprium에서 한 걸음 물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자신의 삶이 되도록 허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들이 하나둘 모일 때, 설교자가 그토록 간절히 꿈꾸었던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도 비로소 외적인 이상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국을 조금씩 드러내는 실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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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셨으며, 다만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그 안에 스며들게 하셨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보이는지는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유입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습니다. 이에 관하여 어떤 관념을 갖기 위해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없고, 또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 행위는 체어리티의 행위 또는 신앙의 열매라고 할 수 없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what is spiritual celestial, however, 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해설

AC.161에서 먼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 태고교회의 후손들을 ‘악하지 않았고 여전히 선했다’고 분명히 말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미 악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이전의 천적 인간처럼 전적으로 속 사람의 질서 안에서 살기보다 겉 사람 안에서, 곧 자기들의 proprium 안에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을 원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그들을 악한 상태라고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이러한 상태를 허락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허락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proprium에 내버려 두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곧이어 주님께서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그 안에 스며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고 한 것, AC.154에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한 것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proprium 안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그 생명의 근원이 proprium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면서 하나처럼 보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유입’(influx)을 제시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둘이 실제로 하나의 것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AC.159에서 천적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되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입을 통하여 하나로서 활동합니다.

 

이것은 앞서 AC.155에서 천사들의 상태를 설명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곧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과 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AC.161에서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이 스며든다는 설명도 같은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유입을 추상적인 설명으로 끝내지 않고 하나의 ‘행위’를 예로 듭니다. 어떤 행위가 겉으로 선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 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 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여기서 행위는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사랑과 신앙은 그 행위를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 역시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AC.161에서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하나 됨은 둘 사이의 구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흘러들어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함께 활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를 해설하면서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고 한 내용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하나처럼 보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인간 안에서 질서 있게 받아들여져 하나의 삶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61은 창2 후반부의 proprium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깊게 만듭니다. 인간에게 proprium이 허락되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proprium 안에 무엇이 스며들어 있으며, 무엇이 그 삶과 행위의 내적 근원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영적 천적인 것이 그 안에 있고, 그것이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 안으로 유입되어 실제 삶에서 나타날 때, 인간은 자기 삶을 자기 삶처럼 살아가면서도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에게 두게 됩니다. 이것이 AC.161이 유입이라는 개념을 통해 보여 주기 시작하는 중요한 질서입니다. (AC.161 해설)

 

심화

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 심화 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 심화1. ‘influx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하나처럼 보이는 이유’ 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 또는 어떻게 하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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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2, 창2:24, ‘혼인의 법’(the law of marriages)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2:24) AC.162모든 진리와 정의의 법은 천적 기원들, 곧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온 천국은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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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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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

‘부모를 떠나는 것’(leave father and mother)은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내와 합하는 것’(cleave unto his wife)은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고, ‘한 몸이 되는 것’(be one flesh)은 그 둘이 거기에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되게 되었습니다. To “leave father and mother” 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 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 to “cleave unto his wife” 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 to “be one flesh,” that they are there together;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해설

AC.160은 창2:24의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말씀을 앞에서 계속되어 온 속 사람, 겉 사람, proprium의 변화라는 흐름 안에서 해설합니다. AC.159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으며,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것을 천적 인간이 퍼셉션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겉 사람에 속한 proprium을 원하면서 이 구별을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AC.160은 바로 그 변화된 상태를 창2:24의 세 표현을 따라 설명합니다.

 

먼저 ‘부모를 떠나는 것’은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겉 사람을 잉태하고 낳는 것은 속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부모는 자연적인 부모에 관한 교훈에 머무르지 않고, 겉 사람의 근원이 되는 속 사람을 가리킵니다. 앞 번호에서 천적 인간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질서를 퍼셉션했다고 했는데, 이제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그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는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의 아내와 합하는 것’은 속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거나 겉 사람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났다고 해서 속 사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방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내’는 AC.156에서 설명했듯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으로 인해 받게 된 표현입니다.

 

‘한 몸이 되는 것’은 그 둘이 거기에서 함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되어 구별이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앞의 AC.159가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뚜렷하게 구별된다고 명시했고, 이번 번호의 마지막도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한 몸’은 구별 자체의 소멸보다, 변화된 상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함께 있게 된 것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이전에는 속 사람과,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겉 사람이 영이었으나 이제는 육이 되었다’는 문장은 특별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처음에는 영적이었지만 이제 타락하여 육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일반적인 도식으로 바꾸어 버리면 현재 문맥의 세밀한 흐름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을 원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에서 ‘육’으로의 변화도 그 상태 변화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이 그 의미를 붙들어 줍니다. ‘이렇게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그것들이 하나처럼 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proprium은 천적·영적 생명 자체가 아닙니다.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둘이 완전히 동일한 하나가 되었다고 하지 않고 ‘하나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도 생명의 근원과 그것을 받아 자기 삶처럼 누리는 proprium 사이의 구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AC.135와 매우 밀접하게 이어집니다. AC.135에서도 천적 생명과 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보이게 된다고 했습니다. 당시에도 중요한 것은 ‘결합’과 ‘하나처럼 보임’을 ‘동일해짐’으로 바꾸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AC.160은 이제 창2:24의 ‘한 몸’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같은 내용을 다시 설명합니다. 천적·영적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그것이 인간의 proprium에 결합됨으로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의 생명과 하나처럼 경험되는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AC.160은 ‘부모를 떠남’, ‘아내와 합함’, ‘한 몸이 됨’을 각각 떨어진 상응어로 읽기보다 하나의 상태 변화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속 사람에게서 물러나고, 속 사람이 겉 사람 안에 있게 되며, 그 둘이 함께 있게 되고,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되는 흐름입니다. 이것은 AC.131부터 시작된 천적 인간의 후손들이 proprium으로 기울어 가는 과정의 한 단계이며, 동시에 주님께서 그 proprium을 단순히 버려 두지 않으시고 생명과 결합시키시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AC.160)

 

 

 

AC.161, 창2:24,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스며들게 하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1이 태고교회의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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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9, 창2:23,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잃어버린 천적 인간의 후손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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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9

그러나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지를 쉽게 퍼셉션할 수 없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은 겉 사람과 구별되며, 참으로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어서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 그리고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어떻게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는지를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이 천적 인간의 후손들의 상태는 겉 사람에게 속한 그들의 proprium을 원한 결과 너무나 달라져, 그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하고,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이러한 퍼셉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 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 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 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 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 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해설

AC.159는 앞에서 다루어 온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붙들어야 할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결합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이 사라져 둘이 뒤섞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AC.159는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매우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퍼셉션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교리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뜻보다 훨씬 깊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 가운데 무엇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퍼셉션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결합’이 함께 존재하는 질서였습니다.

 

특히 ‘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주도권의 근원은 겉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겉 사람이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속 사람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것은 창2 전반에서 계속되어 온 천적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와 모든 능력이 주님께 속한 것임을 퍼셉션했습니다. 이제 같은 질서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의 후손들에게서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이었습니다. 이 점은 AC.131 이후 계속된 흐름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proprium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으며, 마침내 그 proprium이 그들에게 허락되었습니다. AC.159는 이러한 변화가 단지 ‘자기 것을 갖고 싶어 했다’는 정도에 머물지 않고,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퍼셉션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고 설명합니다.

 

그 결과 후손들은 더 이상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구별된다는 것을 퍼셉션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는 AC.156에서 말한 올바른 결합과 구별해야 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면서도 주님의 질서 안에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후손들은 그 구별 자체를 잃어버리고 둘을 하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참된 결합은 구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구별된 것들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러한 변화가 왜 일어났는지를 다시 proprium과 연결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proprium으로 기울 때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는 이러한 지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 있는 설명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proprium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께서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를 더 이상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겉 사람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원하는 것을 곧 자기 존재 전체의 생명으로 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AC.159는 AC.147-155에서 계속 다루어 온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또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문제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경험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AC.155의 천사들도 특별히 그 근원을 의식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반면 여기의 후손들은 proprium으로 기울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과 그 질서를 퍼셉션하지 못하게 됩니다. 바로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AC.159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하는 열쇠는 ‘구별되어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음’에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다른 것에 속하지만 분리되어 제각기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심으로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proprium으로 기울면 이 질서에 대한 퍼셉션이 흐려지고, 사람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하나라고 여기게 됩니다. AC.159는 proprium으로의 기울어짐이 단순한 도덕적 타락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생명의 근원과 내적 질서를 퍼셉션하는 방식의 변화이기도 했음을 보여 줍니다. (AC.159)

 

 

 

AC.160, 창2:24,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다 - 천적·영적 생명이 proprium에 결합됨’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AC.160‘부모를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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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8, 창2:23, ‘사람 - 지혜롭고 지성 있는 속 사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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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7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했기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 사람들[proprii]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곧 한 집안이나 한 가족에 속하거나 어떤 정도로든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라반은 야곱에게, Inasmuch as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ied the own of the external man in which was the internal, therefore in ancient times all those were called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who could be called their own [proprii], and were of one house, or of one family, or in any degree of relationship. Thus Laban said of Jacob,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창29:14)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Gen. 29:14)

 

라고 했습니다. 또 아비멜렉은 그의 외삼촌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 관하여, And Abimelech said of his mother’s brethren, and of the family of the house of his mother’s father,

 

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삿9:2)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Judges 9:2)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도 자신들에 관하여 다윗에게, The tribes of Israel also said of themselves to David,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삼하5:1)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2 Sam. 5:1)

 

라고 했습니다.

 

해설

AC.157은 AC.156에서 설명한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라는 표현이 고대에는 실제로 어떤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는지를 성경의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 줍니다. AC.156에서는 이 표현이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7은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고대 사람들이 한 집안이나 한 가족에 속하거나 어떤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이라는 표현입니다. AC.156에서는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이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하고,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7은 그 둘을 한 문장 안에서 다시 결합하여, 이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 속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뼈와 살’은 속 사람과 아무 관계 없이 홀로 존재하는 겉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이 그 안에 있으면서 결합되어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을 같은 ‘뼈와 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원문의 ‘[proprii]’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사용해 온 ‘proprium’과 같은 어근에 속하지만, 현재 문맥에서는 한 사람의 내적인 proprium을 그대로 가리키는 전문용어라기보다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곧 자기 집안과 가족과 친족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단어 하나를 기계적으로 같은 뜻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속한다’는 기본적인 의미가 인간의 proprium과 친족을 가리키는 고대 표현 사이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는 라반이 야곱에게 한 말입니다. 라반은 야곱에게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라고 합니다. 야곱이 라반과 친족 관계에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아비멜렉은 외가 친족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골육’임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다윗에게 나아와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세 본문 모두 뼈와 살이라는 표현이 단순히 육체를 구성하는 신체 부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속해 있는 가까운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세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창2:23의 표현이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문자에서도 자기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자기에게 속한 존재를 나타내는 표현이며, 고대의 언어에서도 같은 방식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창2의 표현이 속뜻에서 속 사람과 결합된 겉 사람의 proprium을 나타낸다는 해석은 이러한 고대의 언어 사용과도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 AC.157은 앞의 ‘이름’에 관한 AC.144-145와도 방법상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떤 표현의 속뜻을 제시한 뒤 그것을 임의의 상징 풀이로 끝내지 않고, 고대인들이 실제로 그 말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했는지, 그리고 말씀의 다른 곳에서 그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살핍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고대 표현이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속뜻만을 가진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번호가 확증하는 것은 ‘뼈와 살’이 자기에게 속한 사람과 밀접한 결합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AC.157은 앞 번호에서 설명한 ‘여자’에서 ‘아내’로의 변화도 간접적으로 더 이해하게 합니다. AC.156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을 이제 아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AC.157에서는 그 결합이 ‘자기에게 속함’이라는 관계의 언어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은 단순히 두 부분이 나란히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proprium이 서로 결합되어 하나에게 속한 것으로 관계 맺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결국 AC.157의 핵심은 ‘뼈와 살’이라는 표현 안에 들어 있는 ‘자기에게 속함’과 ‘결합’의 의미입니다. 라반과 야곱, 아비멜렉과 그의 친족, 이스라엘 지파들과 다윗의 사례는 모두 그 의미를 문자적 언어의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창2:23의 속뜻에서는 그 관계가 속 사람이 그 안에 있는 겉 사람의 proprium에 적용됩니다. 이렇게 AC.156에서 제시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 AC.157에서는 고대의 친족 언어를 통하여 한 번 더 확증됩니다. (AC.157)

 

 

 

AC.158, 창2:23, ‘사람 - 지혜롭고 지성 있는 속 사람’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8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 곧 같은 말로 지성 있고 지혜로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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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6,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속 사람과 결합한 proprium’ (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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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창2:23)

 

AC.156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은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뼈’(bone)는 생명을 덜 얻은 이 proprium을, ‘살’(flesh)은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또한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하며, 다음 절에 언급된 것처럼 속 사람이 겉 사람과 결합되기 때문에, 앞에서 ‘여자’(woman)라고 했던 proprium을 여기서는 ‘아내’(wife)라고 합니다. ‘이제’(Now)는 상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때 이렇게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y the own of the external man; “bone,” this own not so much vivified, and “flesh,” the own that is vivified. Man, moreover,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from his being so coupled with the external man as is stated in the subsequent verse, the own which was before called “woman” is here denominated “wife.” “Now” signifies that it was thus effected at this time because the state was changed.

 

해설

AC.156은 창2:23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proprium의 의미를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로 연결합니다. 먼저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은 겉 사람의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도 뼈와 살은 같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뼈’는 생명을 덜 얻은 proprium을, ‘살’은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서도 생명의 정도가 구별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AC.147-149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AC.147에서는 갈빗대가 생명력이 거의 없는 인간의 proprium을, 갈빗대 대신의 살은 생명력이 있는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149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이 그 자체로는 죽어 있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살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6에서는 같은 뼈와 살의 구별을 ‘겉 사람의 proprium’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제시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뼈를 ‘생명을 얻지 못한’ proprium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을 덜 얻은’ proprium이라고 한다는 점도 그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이 그 차이를 더 설명하지 않으므로 지금 단계에서 그 이유를 별도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창2:23의 사람과 여자는 속뜻에서 단순히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인물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현재 문맥에서 사람은 속 사람을,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것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AC.156은 이 proprium이 겉 사람의 proprium임을 명시합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각각 설명되던 ‘사람’, ‘여자’, ‘proprium’, ‘뼈와 살’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안에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앞에서 ‘여자’(woman)라고 했던 것이 여기서는 왜 ‘아내’(wife)라고 하는지가 처음으로 밝혀집니다. 그 이유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AC.151에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여자’라고 하고 뒤에서는 ‘아내’라고 한다고만 했으며, 그 차이를 아직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때 그 차이를 미리 정하지 않고 기다렸던 이유가 여기서 확인됩니다. AC.156에 이르러 스베덴보리 자신이 ‘아내’라는 표현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과 직접 연결합니다.

 

이 결합은 AC.155의 ‘천국의 결혼’과도 이어집니다. AC.155에서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주님의 ‘신부와 아내’라고 하면서, 그 가장 깊은 내용이 천국의 결혼을 바라본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6에서는 현재 인간 안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는 모습이 ‘사람’과 ‘아내’라는 표현을 통해 나타납니다. 다만 현재 번호는 이 결합과 AC.155의 천국의 결혼 사이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두 표현을 곧바로 완전히 동일한 하나의 교리로 펼치기보다 본문이 제시하는 연결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Now)라는 한 단어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상태가 변화되었기 때문에 이때 이렇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2:23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에서 ‘이제’는 단순히 사건의 시간적 순서를 나타내는 말이 아닙니다. 앞의 상태와 다른 새로운 상태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어지고, 그것이 속 사람과 결합하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2를 역사적 사건의 연속으로만 읽는 것과 상태의 변화로 읽는 것의 차이를 다시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제’라는 시간 표현조차 현재 다루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가 달라졌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갈빗대에서 여자가 지어지고, 여자가 사람에게 이끌려 오고, 사람이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일련의 흐름은 속뜻에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고, 마침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상태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AC.156은 짧지만 앞의 여러 번호를 정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뼈와 살은 겉 사람의 proprium 안에서 생명의 정도를 나타내고, 사람은 속 사람을 의미하며, 앞에서 여자라고 했던 proprium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면서 아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로 이 결합으로 상태가 변화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중심은 개별 상응어를 따로 암기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속 사람과 결합하여 새로운 상태에 이르게 되는 전체 흐름을 보는 데 있습니다. (AC.156)

 

 

 

AC.157,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2:23) AC.157‘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이 속 사람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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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5, 창2:22, ‘주님의 신부와 아내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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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부터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더 많은 것들이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깊은 내용이 주님 자신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는 그러한 것이며, 말씀의 모든 생명은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구절도 그 가장 깊은 내용에서는 천국의 결혼을 바라봅니다. 천국의 결혼은 proprium 안에 존재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며, 이 proprium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 결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하는 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어떠한 것인지는 간단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한다는 점만 말해 두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곧 변화를 퍼셉션하는 그러한 보편적인 애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 안에 있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바로 이 proprium을 의미합니다. The words “a rib was built into a woman” have more things inmostly concealed in them than it is possible for anyone ever to discover from the letter;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uch that its inmost contents regard the Lord himself and his kingdom, and from this comes all the life of the Word.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regarded in its inmost contents. The heavenly marriage is of such a nature that it exists in the own, which, when vivified by the Lord,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Man’s own thus vivified has a perception of all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and consequently possesses all wisdom and intelligence conjoined with inexpressible happiness. But the nature of this vivified own, which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cannot be concisely explained. Suffice it therefore to observe that the angels perceive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although when not reflecting on the subject they know no other than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but there is 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 that at the least departure from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they perceive a change, and consequently they are in the enjoyment of their peace and happiness, which is inexpressible, while they are in their general perception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It is this own also that is meant in Jeremiah, where it is said: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이 구절에서도 천국의 결혼이 의미되며, 여기서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 여자에 관하여 ‘둘러싸는 것’(to compass)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까닭은 이 proprium이, 살이 된 갈빗대가 심장을 둘러싸는 것처럼 둘러싸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signified in this passage also, where by a “woman” is meant the own vivified by the Lord, of which woman the expression “to compass” is predicated, because this own is such that it encompasses, as a rib made flesh encompasses the heart.

 

해설

AC.155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말씀의 속뜻을 지금까지보다 훨씬 깊은 층위로 이끕니다.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라고 했습니다. AC.154에서는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은 악하고 흉측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5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은 ‘천국의 결혼’을 바라보고 있다고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이 주님 자신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며, 바로 여기에서 말씀의 모든 생명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말씀을 단순히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심리적 설명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도 이미 속뜻이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중심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주님과 어떤 관계 안에 들어가는가를 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여기서 ‘천국의 결혼’이라고 합니다.

 

그는 천국의 결혼이 proprium 안에 존재하며, 그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결합이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버린 뒤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됩니다. AC.151에서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자기 자신이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셔서 주님과 결합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proprium에는 놀라운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 결과 지혜와 지성을 누리고, 거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결합됩니다. 여기서도 순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와 지성이 인간 자신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함으로써 그것들을 누리게 됩니다. 앞에서 계속 강조된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라는 질서가 천국의 결혼 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생명을 얻은 proprium의 성질을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여기서 천국의 결혼이나 주님의 신부와 아내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끌어와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스베덴보리는 지금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천사들의 상태 한 가지를 제시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압니다. 이 짧은 설명은 AC.140 이후 계속되어 온 문제에 매우 중요한 답을 줍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산다’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천사들조차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지금 이 생명은 주님에게서 흘러오고 있다’고 의식적으로 분석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상태에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이라는 AC.140의 표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생명은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인간과 천사는 그것을 참으로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받아 누립니다.

 

그 보편적인 퍼셉션은 단순한 교리 지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즉시 변화를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명제를 머리로 암기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명의 질서 안에서 실제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질서에서 벗어나는 순간 상태의 변화를 느끼며,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 안에 있을 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AC.154에서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렘31:22의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를 인용하여 같은 천국의 결혼을 확증합니다. 여기서 ‘여자’(woman)는 다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하고, ‘둘러싸는 것’(to compass)은 살이 된 갈빗대가 심장을 둘러싸듯 이 proprium이 둘러싸는 성질을 가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신체의 모양을 보고 우리가 임의로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현재의 갈빗대와 여자, 심장의 관계 안에서 그 의미를 직접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붙들어야 합니다.

 

결국 AC.155는 지금까지의 proprium 논의를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이끕니다. 그 자체로 죽어 있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며, 그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되고, 그 안에서 천국의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상태의 천사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면서도 가장 깊은 곳에서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삶의 경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는 근원을 밝혀 줍니다. AC.140부터 계속되어 온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자기 자신의 것처럼 경험되는 proprium’의 문제가 여기서 상당히 깊고 아름다운 답을 얻습니다. (AC.155)

 

 

 

AC.156,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속 사람과 결합한 proprium’ (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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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4, 창2:22, ‘악 자체인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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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

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이며, 따라서 인간은 그 자체로는 악과 거짓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보이도록 제시될 때, 더 추한 것은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통해 제게 분명해졌습니다. 다만 그 모습은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눈에 보이도록 제시되는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달아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나며,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실제로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을 한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며,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벌거벗은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그들은 가슴을 두른 꽃 화환과 머리 위의 관으로 다양하게 단장하고, 다이아몬드 같은 기운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Nothing evil and false is ever possible which is not man’s own, and from man’s own, for the own of man is evil itself, and consequently ma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This has been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en the things of man’s own are presented to view in the world of spirits, they appear so deformed that it is impossible to depict anything more ugly, yet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 own, so that he to whom the things of the own are visibly exhibited is struck with horror, and desires to flee from himself as from a devil. But truly the things of man’s own that have been vivified by the Lord appear beautiful and lovely, with variety according to the life to which the celestial of the Lord can be applied; and indeed those who have been endowed with charity, or vivified by it, appear like boys and girls with most beautiful countenances; and those who are in innocence, like naked infants, variously adorned with garlands of flowers encircling their bosoms, and diadems upon their heads, living and sporting in a diamond-like aura, and having a perception of happiness from the very inmost.

 

해설

AC.154는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강한 표현으로 규정하면서도, 동시에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얼마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대조합니다. 첫 문장만 보면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이며 인간은 악과 거짓일 뿐’이라는 선언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후반부에서는 바로 그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154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두 상태를 반드시 함께 보아야 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며,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AC.150에서 자기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산다고 믿는 사람이 악과 거짓을 자기에게 귀속시킨다고 한 설명과 이어집니다. 인간이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살려고 할 때, 그 proprium에서는 선과 진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AC.149-150에서 이미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proprium의 악은 단순히 인간이 개별적으로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정도보다 훨씬 근원적인 문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다시 자신의 영계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영계에서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때에는 더 추한 것을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흉측하게 보이며, 그것을 자기 앞에서 보게 된 사람은 공포에 사로잡혀 마치 악마에게서 도망하듯 자기 자신에게서 달아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모습이 모두 똑같다고 하지 않고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고 덧붙입니다. 따라서 여기에서도 proprium은 획일적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루고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그러나’가 AC.154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은 앞의 흉측한 모습과 정반대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했던 설명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인간을 proprium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신다는 지금까지의 흐름이 여기서 다시 확인됩니다.

 

이 때문에 AC.154는 AC.141과 함께 읽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AC.141에서는 천적 인간과 천사에게도 proprium이 있으며, 그 proprium 안에는 주님의 것들이 있고 그것은 주님에 의해 다스려지므로 ‘가장 참된 천적인 것 자체’라고 했습니다. 반면 AC.154에서는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고 합니다. 두 문장은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AC.154 자체가 그 구별을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으로서의 proprium은 악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므로 proprium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고 언제나 동일한 영적 성질을 가진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인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인지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후반부의 모습들은 이러한 차이를 영계의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를 부여받았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은 매우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들과 소녀들처럼 나타나고, 이노센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꽃 화환과 관으로 단장한 어린아이들처럼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에서의 실제 나이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내적 생명의 성질입니다. 앞에서는 proprium의 성질에 따라 그 흉측함이 달라진다고 했고, 여기서는 주님의 천적인 것이 적용될 수 있는 생명의 성질에 따라 아름다움도 다양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영계에서 외적인 모습이 내적인 생명의 성질을 드러낸다는 설명이 이 대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특히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표현은 현재 문맥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AC.148에서는 가슴이 체어리티를 의미한다고 했고,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생명 없는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154에서는 체어리티를 부여받거나 체어리티에 의해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아름답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따라서 ‘proprium이 생명을 얻는다’는 말이 점차 구체적인 내용을 얻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근거로 아직 체어리티와 proprium의 관계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기보다 이후의 설명을 더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지막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상태의 아름다움은 단순히 외적인 모습의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살아 움직이며 뛰놀고,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앞부분의 죽음과 추함, 뒷부분의 생명과 아름다움과 행복은 서로 대응되는 대조를 이룹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proprium 안에 갇혀 있을 때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 있을 때의 차이가 영계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AC.154는 proprium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번호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 자체’라는 문장은 분명히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에 같은 번호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다’고 말한다는 사실도 똑같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지워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는 죽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으로 살아 있게 하시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이것이 AC.141에서 시작하여 AC.147-154를 거치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는 proprium의 중요한 아르카나입니다. (AC.154)

 

 

 

AC.155, 창2:22, ‘주님의 신부와 아내 -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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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3, 창2:22, ‘짓다 -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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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3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하지만, 앞에서 거듭남을 다룰 때처럼 여자가 ‘창조되었다’(created), ‘형성되었다’(formed), 또는 ‘만들어졌다’(made)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짓는 것’(build)이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이 말이 말씀에서 사용되는데, 거기서 ‘짓는 것’(build)은 악들에 관하여, ‘일으켜 세우는 것’(raise up)은 거짓들에 관하여, ‘새롭게 하는 것’(renew)은 그 둘 모두에 관하여 사용됩니다. 이사야에서는, The rib is said to be “built into a woman,” but it is not said that the woman was “created,” or “formed,” or “made,” as before when treating of regeneration. The reason of this is that to “build” is to raise up that which has fallen; and in this sense it is used in the Word, where to “build” is predicated of evils; to “raise up,” of falsities; and to “renew,” of both; as in Isaiah: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사61:4) They shall build the wastes of eternity, they shall set up again the ancient desolations, and they shall renew the cities of the waste, the desolation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Isa. 61:4)

 

라고 합니다. 이 구절과 다른 구절들에서 ‘황폐한 곳들’(Wastes)은 악들을 의미하고, ‘무너진 곳들’(desolations)은 거짓들을 의미합니다. ‘짓는 것’(build)은 전자에 적용되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set up again)은 후자에 적용됩니다. 이러한 구별은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들에 의해 주의 깊게 지켜지는데,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경우가 그러합니다. “Wastes” in this and other passages signify evils; “desolations,” falsities; to “build” is applied to the former, to “set up again” to the latter, and this distinction is carefully observed in other places by the prophets, as where it is said in Jeremiah: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를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춤추며 나오리라 (렘31:4) Yet still will I build thee, and thou shall be built, O virgin of Israel. (Jer. 31:4)

 

해설

AC.153은 창2:22에서 왜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built into a woman)고 표현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먼저 주목하는 것은 동사의 선택입니다. 앞에서 인간의 거듭남을 설명할 때에는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표현들이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여자가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 않고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우연한 표현상의 변화로 보지 않고, 현재 다루는 인간의 상태와 관련된 의미 있는 구별로 읽습니다.

 

그 이유는 ‘짓는 것’(build)이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이미 짧게 제시되었지만, AC.153에서 그 근거가 본격적으로 설명됩니다. 지금 다루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은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새롭게 천적 인간으로 형성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조상들의 천적 상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했고 proprium으로 기울었습니다. 따라서 현재 필요한 것은 처음의 창조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넘어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짓다’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AC.151에서 ‘여자’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을 의미한다고 한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갈빗대는 생명을 얻지 못한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입니다. 따라서 갈빗대를 여자로 ‘짓는 것’은 인간이 원했던 proprium을 주님께서 그대로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울어진 상태에 있는 것을 일으켜 세워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짓다’라는 한 동사가 지금까지의 proprium 논의와 연결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말씀의 선지서에서 사용되는 동사들을 더욱 세밀하게 구별합니다. ‘짓는 것’(build)은 악들에 관하여 사용되고, ‘일으켜 세우는 것’(raise up)은 거짓들에 관하여 사용되며, ‘새롭게 하는 것’(renew)은 악과 거짓 모두에 관하여 사용된다고 합니다. 이사야 61장의 ‘황폐한 곳들’과 ‘무너진 곳들’을 인용하는 이유도 이 구별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황폐한 곳들’은 악들을 의미하고 ‘무너진 곳들’은 거짓들을 의미하며, 전자에는 ‘짓다’가, 후자에는 ‘다시 일으켜 세우다’가 적용됩니다.

 

여기서는 이 구별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비슷한 동사들을 우리가 임의로 나누어 각각 다른 속뜻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이 이러한 구별을 ‘주의 깊게’ 지켰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현재 본문에서는 ‘짓다’, ‘일으켜 세우다’, ‘새롭게 하다’를 비슷한 뜻의 수사적 반복으로만 보지 않고, 각각 악과 거짓의 회복에 관련된 구별된 표현으로 읽어야 합니다. 동시에 이것을 근거로 말씀에 나오는 모든 동사의 동의어적 차이에 우리가 임의의 상응을 만들어 붙여서도 안 됩니다. 여기서는 AC.153이 직접 밝힌 범위가 기준입니다.

 

렘31:4의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라는 말씀은 ‘짓다’의 의미를 다시 확증합니다. 이미 무너진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시는 장면에서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창2:22의 ‘짓다’ 역시 단순히 무엇인가를 제작한다는 뜻보다, 이미 기울어지고 넘어진 것을 주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다루는 태고교회 후손들의 상태와 잘 맞습니다.

 

AC.153은 또한 창2 후반부를 단순한 ‘proprium의 획득’으로만 읽지 않게 해 줍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인도 아래 있기를 원하여 proprium으로 기울었다는 것만 본다면 이 과정은 타락의 시작으로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표현 안에는 이미 그 상태를 향한 주님의 회복의 역사도 들어 있습니다. 인간은 기울어졌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시고, 생명 없는 proprium을 생명을 얻은 proprium으로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장면에는 인간의 기울어짐과 주님의 회복하시는 역사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다만 ‘짓는 것’이 악들에 관하여 사용된다는 말을 ‘주님께서 악을 지으신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문맥에서 ‘짓는다’는 것은 이미 악으로 인해 황폐해지고 넘어진 것을 다시 세우는 데 적용되는 표현입니다. 사61:4와 렘31:4의 인용도 바로 그 회복의 문맥입니다. 따라서 이 동사는 악의 발생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 무너진 상태를 다시 일으키시는 주님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갈빗대를 여자로 ‘짓는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점입니다. (AC.153)

 

 

 

AC.154, 창2:22, ‘악 자체인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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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2, 창2:22, ‘여자가 proprium을 의미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2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도 여자가 남자의 갈빗대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며,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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