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는 내적인 차원인데, 거기서 나온 선이라면 당연히 살아 있는 선이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핵심은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그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사람이 인정한다’는 것이 아직 완전히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AC.9의 사람은 이전 상태보다 분명히 진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외적인 규칙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했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는 여전히 ‘내가 선을 생각했고, 내가 선을 선택했고, 내가 선을 행했다’고 여깁니다. 선이 안으로부터 나타나고 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이 없다’는 말을 그 선행이 전혀 무가치하다거나 실제로 아무 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 행위의 외적인 유익성보다 영적인 생명의 귀속입니다. 선의 생명은 인간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동안에는 그 선을 아직 주님에게서 오는 살아 있는 선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변화만 생각하면 AC.9의 사람은 이미 상당한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선을 행하는가?’뿐 아니라 ‘그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를 묻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한 일을 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가 했다’, ‘내가 옳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고 자기 공로를 붙들 때에도 proprium은 매우 미묘하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사람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에서 사람은 실제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노력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께서 하실 것이다’라고 기다리는 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동시에 선을 행할 능력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 갑니다.

 

이 때문에 AC.9의 세 번째 상태는 지나가야 할 잘못된 상태라기보다 필요한 성장 과정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을 때 자기가 걷는다고 느끼는 것처럼,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도 처음에는 자기가 회개하고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자유감과 자기 활동감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시면서, 점차 선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깨닫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으로부터’라는 표현은 이미 완성된 거듭남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 사람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 영향이 겉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사람의 의식과 귀속은 아직 자기 자신에게 기울어 있을 수 있습니다. AC.8에서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했다면, AC.9에서는 그 구별이 실제 선행 가운데서도 더 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돌아볼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내가 기도하고 봉사하고 이웃을 돕고 말씀을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누구에게 공로를 돌리고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을 때 섭섭해하거나, 자신의 선행 때문에 자신을 더 높은 사람으로 여기거나,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진다면 ‘선한 일을 하는 나’를 붙들고 있는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했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9는 그러한 발견 자체가 거듭남의 과정 안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서 멈추게 하지 않으시고 점차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이끄십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선을 행하되 점점 더 자기 공로를 내려놓게 됩니다.

 

따라서 AC.9의 ‘생명이 없다’는 표현은 선행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그 선행이 어디에서 참된 생명을 받아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한 진전입니다. 그러나 그 선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려면 사람은 그 생명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결국 거듭남은 ‘내가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마음과 삶으로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AC.9 심화 1)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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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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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때는 뼈처럼 단단하고 검은 물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때는 반대로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이 말은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지만, 정말 진짜입니다. 천사적 영 안에 있는 모든 표현 하나하나, 모든 생각 하나하나, 그리고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 하나까지도 모두 살아 있으며, 그 가장 작은 요소들 안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은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은 그 안에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을 향한 신앙을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며, 여기서는 이러한 것들이 ‘생물’(living soul)로 상징됩니다. 또한 그것들은 일종의 몸을 지니고 있는데, 그걸 여기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what moves itself) 또는 ‘돌아다니는 것’(creeps)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들은 아직 사람에게는 깊은 비밀이며, 지금은 다만 본문에 ‘생물’(living soul, thing moving itself)이 나와서 잠깐 언급한 것입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 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 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 moves itself” or “creeps.” 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 soul,”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re treated of.

 

해설

AC.41은 앞의 AC.39에서 제시한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생명을 가진다’는 원리를 창1:20의 ‘생물’이라는 표현과 연결하여 한 걸음 더 깊이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은 단순히 사람이 숨 쉬고 생각하며 활동한다는 자연적 의미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고유한 것, 곧 proprium은 그 자체 안에 생명의 근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참된 생명은 오직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다’는 강한 표현도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가치하다거나 실제로 살아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거듭나기 전의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외형적으로 아무 선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독립적인 영적 생명의 원천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며, 선과 진리와 그것을 사랑하는 애정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AC.39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도록 허락받지만, 점차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나중에는 지각하게 된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매우 특이한 시각적 묘사로 표현합니다. 사람의 proprium에 속한 것이 눈에 보이게 나타날 때에는 ‘뼈처럼 단단하고 검은 물질’처럼 보이는 반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사람답고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묘사를 지나치게 해부하거나 구체적인 영계의 물질 구조처럼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1이 강조하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과 주님에게서 비롯된 것 사이에는 단순한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천사적 영에 관한 설명은 이 ‘생명’이 얼마나 깊은 곳까지 미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적 영의 말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 심지어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도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가장 작은 것 안에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1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어떤 생각이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생각이 정확하거나 논리적이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애정이 있으며, 그 애정으로 말미암아 그 생각 전체가 생명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AC.41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들이 ‘주님을 향한 신앙’을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창1:20의 ‘생물’(living soul)로 상징됩니다. 다시 말하면 ‘생물’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무엇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사람 안의 것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것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앞의 AC.39에서 풀과 나무가 아직 ‘무생물’에 비유되다가 이제 물에서 움직이는 생물과 새가 등장하는 이유도 이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이 살아 있는 것들이 ‘일종의 몸’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또는 ‘기는 것’으로 상징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그 의미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아직 사람에게 ‘깊은 비밀’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창1:20에 ‘생물’과 ‘움직이는 것’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기 때문에 잠깐 언급할 뿐이라고 선을 긋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여기서 영적 몸이나 천사의 사고 구조에 관한 상세한 체계를 미리 만들어 내기보다, AC.41이 밝히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AC.39-41의 흐름도 선명해집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서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는 과정을 설명했고, AC.40에서는 그렇게 살아나기 시작한 사람 안의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을 물고기와 새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1은 그 모든 것이 왜 ‘살아 있다’고 불릴 수 있는지를 밝힙니다. 생명은 사람 자신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가장 작은 생각과 애정에까지 스며듭니다.

 

그러므로 AC.41의 중심은 인간의 개성이나 활동을 없애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행한다’고 경험하면서도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아 가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을수록 proprium에 머물지만,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그의 생각과 애정은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창1:20의 ‘생물’은 바로 거듭남이 이처럼 ‘살아 있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심화

1. ‘천사적 영’

 

AC.41, 심화 1, ‘천사적 영’

AC.41.심화1. ‘천사적 영’ AC.41에 ‘천사적 영’(angelic spirit)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천사’라는 것인지 ‘영’이라는 것인지, 혹은 천사와 영 사이에 또 다른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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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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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창1:2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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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녁’은 모든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늘의 상태, 곧 거짓의 상태이며 신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이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빛의 상태, 곧 진리의 상태이며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다윗을 통해 하신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며, 그분이 오시는 때는 신앙이 없기 때문에 ‘저녁’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니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단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 여기서 ‘주야’에는 원문의 ‘저녁-아침’(evening-morning)이라는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에서 ‘아침’은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곧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해설

AC.2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을 단순한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언어로 해석하는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저녁’은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그늘의 상태, 곧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아침’은 이후의 상태로, 빛의 상태, 곧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루가 지나갔다는 뜻을 넘어, 거듭남 가운데 한 상태에서 그 다음 상태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AC.20에서 처음 빛이 나타났고 AC.21에서 빛과 어둠이 구별되었다면, AC.22에서는 그 변화의 방향이 ‘저녁에서 아침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더욱 일반적인 원리로 확장하여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21의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낮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밤에 비유된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사람 자신의 것이란 단순히 인간의 개성이나 자연적인 능력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여기는 proprium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여기던 질서에서 그것들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질서로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 원리를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먼저 인용하는 말씀이 삼하23:2-4입니다. 여기서 ‘돋는 해의 아침 빛’, ‘구름 없는 아침’,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이라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AC.22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아침’이 빛과 생명이 나타나는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을 말씀 자체에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아침의 빛 아래 새 풀이 돋아나는 모습은 빛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이 나타나는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만을 근거로 ‘새 풀’을 퍼셉션이나 특정한 영적 기능에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붙드는 중심은 ‘아침’입니다. 아침은 주님께 속한 빛이 나타나는 상태이며, 그 빛 아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개인의 거듭남을 넘어 주님의 세상 오심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고, 그분이 오시는 당시의 상태는 신앙이 없었으므로 ‘저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같은 사건을 모순되게 저녁과 아침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기 직전의 상태를 그 근본적인 신앙의 결핍 때문에 ‘저녁’이라 하고, 바로 그 상태 가운데 주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된 것을 ‘아침’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질서는 한 개인의 거듭남뿐 아니라 교회의 황폐와 주님의 오심이라는 더 큰 차원에서도 적용됩니다.

 

이 대목에서 단8:14, 26이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이천삼백 주야까지니’라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표현에는 ‘저녁’과 ‘아침’이 들어 있으며 Potts 역시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이라고 옮겨 AC.22의 논지를 드러냅니다. 더구나 단8의 문맥에서는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며 진리가 땅에 던져지는 황폐의 상황과, 이후 성소가 정결하게 되는 회복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단순히 ‘저녁’과 ‘아침’이라는 단어가 우연히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신앙과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와 그 뒤의 회복이라는 문맥이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영적 질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다만 단8의 ‘이천삼백’을 AC.22에서 별도의 예언 시간표로 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기서는 그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초점은 신앙이 없는 상태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는 상태가 ‘아침’이라는 데 있으며, 이를 통해 주님의 오심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22에서 단8:14, 26을 읽을 때도 숫자의 계산보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황폐한 상태에서 주님의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되는 구조를 붙드는 것이 본문의 논지에 더 충실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AC.22 전체를 하나로 묶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아침’이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따라서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모든 오심’은 주님의 역사적 성육신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이전의 어두운 상태에 빛이 시작되고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모든 경우에 ‘아침’이라는 영적 표현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아침은 새로운 창조의 표현이 됩니다. 창1의 창조가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설명과도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22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단순히 어두웠다가 밝아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 자신의 것에서 주님께 속한 것으로,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에서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로 나아가는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오심이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밤을 아침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심으로 아침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교회의 회복에서도 ‘아침’이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이유입니다. (AC.22 해설)

 

심화

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 심화 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 심화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를 처음 읽을 때 가장 어리둥절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단8:14, 26의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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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 창1:5, ‘날이 뜻하는 시간과 상태 : 거듭남의 날들을 읽는 원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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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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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4, 5)

 

AC.21

‘빛’(light)은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선’(good)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이 선처럼 보였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어둠이며, 단지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proprium에 속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아직 남아 있는 것들입니다.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낮’(day)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밤’(night)에 비유됩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말씀에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AC.21은 바로 앞 AC.20에서 처음 나타난 ‘빛’이 무엇이며, 그 빛이 이전의 ‘어둠’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설명합니다. AC.20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고,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AC.21에서는 그 첫 빛이 비침으로써 이전에는 구별할 수 없었던 두 근원이 드러납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4의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는 거듭남 가운데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분별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빛’이 선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 주님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21에서 선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사람이 그것을 얼마나 선하게 느끼는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칭찬받는가, 심지어 종교적으로 얼마나 경건해 보이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AC.20에서 ‘주님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라고 한 설명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빛이 나타났다는 것은 단지 사람이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지를 분별할 가능성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어둠’은 흥미롭게도 처음부터 어둠처럼 보였던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악이 선처럼 보이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둠인 것들이 ‘빛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21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영적인 어둠의 위험은 사람이 언제나 ‘나는 지금 어둠 속에 있다’고 느끼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선이라고 여기고 거짓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빛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AC.20의 첫 빛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빛이 비치기 전에는 어둠을 어둠으로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proprium에 속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proprium을 단순히 인간의 개성, 재능, 성격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문맥에서 말하는 proprium은 사람이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에게서 생각하고 의도하며 행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상태와 깊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사람 자신의 것’이 어둠이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자연적 능력이나 개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것이 영적으로는 빛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표현은 이러한 것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첫 빛을 받았다고 해서 이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AC.20에서도 사람은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AC.21에서도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어둠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달라진 것은 이제 그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빛 사이에 구별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첫 단계는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이전에는 하나처럼 보였던 것을 주님의 빛 가운데 서로 다른 것으로 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창1:4의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에서 분별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빛으로 자기 어둠을 완전하게 밝혀내는 것이 아닙니다. AC.20에서 빛 자체가 주님에게서 왔듯이,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를 참으로 분별하게 하는 기준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느낌과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빛 안에서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전에는 선처럼 보였던 악과 진리처럼 보였던 거짓이 무엇이었는지 점차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어 창1:5의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낮’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밤’에 비유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도 기준은 근원입니다. ‘낮’은 단순히 기분이 밝거나 신앙생활이 잘되는 때를 뜻하고 ‘밤’은 낙심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때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속한 것은 낮이며,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것은 밤입니다. 이 비유가 말씀에 자주 나온다고 스베덴보리가 덧붙이는 것도 빛과 어둠, 낮과 밤의 이러한 구별이 말씀 전체에서 반복되는 영적 언어임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21에서는 아직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의미까지 앞당겨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 AC.2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다룹니다. AC.21의 초점은 먼저 빛과 어둠이 ‘나뉘고’, 그것들이 낮과 밤으로 불린다는 데 있습니다. 첫 빛이 비친 뒤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 구별이 없으면 사람은 여전히 자기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어둠을 빛으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21은 거듭남에서 ‘분별’이 얼마나 근본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전에는 악이 선처럼,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지만 주님의 빛이 비치면서 그 둘이 나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 자신의 것이 즉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한 번 빛을 보았다는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과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을 구별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AC.20이 ‘빛의 첫 인식’을 말했다면 AC.21은 그 빛으로 비로소 시작되는 ‘빛과 어둠의 분별’을 보여 줍니다. (AC.21 해설)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 심화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의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에 악을 언제나 악처럼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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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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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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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이러한 선과 진리들은 부드러운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며, 이에 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해설

AC.9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를 매우 짧게 설명하지만, 실제 신앙생활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단락입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에게 실제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는 회개하기 시작하고,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상당히 거듭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 사람은 아직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 때문에 AC.9를 ‘세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위선적으로 선을 행한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가 거짓으로 경건한 척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실제로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회개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거짓 신앙의 상태라기보다 거듭남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심으로 선을 행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결심했다’, ‘내가 선을 행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 때문에 그 사람이 행하는 것들이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강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 사람이 행한 모든 선행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선행의 외적인 모양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입니다. AC.2에서 이미 말씀의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듯이, 인간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도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이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아직 그 근원을 자기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AC.8과 AC.9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AC.8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구별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곧바로 자신의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삶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9에서는 바로 그 중간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이미 선을 원하고 행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배우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회개도 해야 하고 악을 피해야 하며 선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된 선의 능력과 생명이 자기 고유의 것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인정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 번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신앙생활에서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전보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하고, 이웃을 돕고, 교회에서 봉사하며,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변화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신앙적이라고 여기거나, ‘나는 이 정도로 변화했다’며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기 시작한다면 아직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AC.9는 바로 이 미묘한 자기 귀속을 드러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도 거듭남 가운데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과 진리를 ‘부드러운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창1:11-13의 셋째 날과 연결됩니다. 아직 완성된 생명이 아니라 처음 땅에서 싹트기 시작하는 생명입니다. 특히 식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전의 혼돈과 흑암의 상태에 비하면 분명한 진전입니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없다’는 표현만 떼어 이 세 번째 상태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으며, 다만 그 선과 진리의 참된 생명의 근원을 아직 충분히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다음 상태로 나아가는 데 중요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 선을 행한다’는 데서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신다’는 인식으로 옮겨 갑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책임과 행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성실하게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되 그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AC.9가 앞으로 열어 놓는 거듭남의 중요한 방향입니다.

 

따라서 AC.9의 세 번째 상태는 매우 역설적인 단계입니다. 사람은 이미 회개하고 있으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을 행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선을 행하는 가운데 아직 남아 있는 proprium이 드러납니다. ‘내가 했다’는 생각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꺾으시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릴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 번째 상태는 ‘선을 행하기 시작한 상태’이면서 동시에 ‘그 선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배우기 시작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AC.9 해설)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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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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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 창1 개요,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네 번째 상태’

AC.10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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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창1 개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는 두 번째 상태’

AC.8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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