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61에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합니다. ‘속사람과겉사람이어떻게하나로서활동하는지,또는어떻게하나처럼보이는지는하나가다른하나안으로유입되는것을알지못하면알수없습니다.’여기서 처음으로‘유입’(influx)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직접적인 열쇠로 제시됩니다.지금까지 우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구별된다는 것도 읽었고,동시에 천적·영적 생명이proprium에 결합되어 하나처럼 된다는 것도 읽었습니다.그렇다면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어떻게 실제 인간의 삶에서는 하나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처럼 나타나는 것일까요?AC.161은 그 답을‘유입’에서 찾기 시작합니다.
이 질문은 사실AC.161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앞의 여러 번호를 읽으면서 계속 쌓여 왔습니다.AC.149에서는 인간의proprium은 그 자체로 죽어 있으며,오직 주님의proprium만이 생명이라고 했습니다.그리고 인간은‘생명의기관’이라고 했습니다.AC.150에서는 더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오랫동안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알도록 허락받았으며,모든 생각의 관념이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했다고 합니다.여기까지만 읽으면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렇다면내가생각하고느끼고행동한다고경험하는것은무엇인가?모든생명이주님으로부터온다면나의삶은어디에있는가?’
AC.155는 이 질문에 천사들의 상태를 통해 중요한 실마리를 줍니다.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합니다.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살아간다는 경험이 서로 모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천사들은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조종당하는 무엇처럼 경험하지 않습니다.그들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AC.159에서는 이 관계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이라는 구조 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천적 인간은 무엇이 속 사람에게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게 속하는지를 분명하게 퍼셉션했으며,겉 사람이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 의해 어떻게 다스려지는지도 퍼셉션했습니다.그러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구별되지만 서로 단절되어 있는 두 영역이 아닙니다.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다스리시는 질서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바로 이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AC.161이‘유입’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AC.161은 여기서 유입에 관한 전체 교리를 설명하지 않습니다.오히려 아주 평범한‘행위’하나를 예로 듭니다.어떤 사람이 겉으로 선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의 행위입니다.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행위 안에 체어리티,곧 사랑과 신앙이 있어야 하며,다시 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셔야 그 행위를‘체어리티의행위’또는‘신앙의열매’라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외적인 행위만 떼어 놓고 보아서는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충분히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떻게 하나로서 활동하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외적으로 나타나는 행위와 그 행위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닙니다.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의 근원인 주님도 인간의 외적인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이들은 구별됩니다.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서로 단절된 채 존재하지 않습니다.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 하나의 행위가 됩니다.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이부분은속사람이고이부분은겉사람이다’라고 나누어 경험하지 않습니다.하나의 삶,하나의 의지,하나의 행동처럼 경험합니다.이것이AC.161이 말하는‘하나로서활동하고하나처럼보이는’상태를 이해하는 출발점입니다.
이 때문에‘유입’을 인간의 자유를 없애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오히려AC.155의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살면서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AC.161의 태고교회 후손들도 겉 사람 안에서,곧 자기들의proprium안에서 살기를 원했고,주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셨습니다.다만 주님께서는 그들을proprium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 안에 영적 천적인 것을 자비롭게 스며들게 하셨습니다.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삶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이 서로 경쟁하는 두 생명처럼 제시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주님에의해생명을얻은proprium’이라는 앞의 표현들이 다시 중요해집니다.인간의proprium자체가 생명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생명을 얻습니다.그런데 그렇게 생명을 얻은proprium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AC.155에서는 그것을 주님의‘신부와아내’라고까지 했으며,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고 지혜와 지성을 누린다고 했습니다.따라서 거듭남의 방향을‘나라는존재가점점없어지는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지금까지의 본문이 보여 주는 방향은 오히려 인간이 자기 생명의 참된 근원을 주님에게서 받아들이면서,그 생명을 자기 자신의 삶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입은‘주님께서안에서움직이시고인간은밖에서수동적으로따라움직인다’는 식의 단순한 그림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AC.161이 보여 주는 것은 훨씬 섬세합니다.속 사람과 겉 사람은 구별되지만 하나로서 활동합니다.천적·영적 생명과proprium도 서로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 안에서는 하나처럼 나타납니다.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실제 자기 삶처럼 살아가지만,그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이 여러 사실을 함께 붙들게 하는 개념이 지금 이 지점에서 등장한‘유입’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행하는 선한 일도 새롭게 보게 합니다.겉으로 보기에 같은 행동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저절로 체어리티의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AC.161이 행위를 예로 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행위 안에 체어리티,곧 사랑과 신앙이 있고,그 사랑과 신앙 안에 주님이 계실 때 비로소 그 외적인 행위는 안에 있는 것과 하나로서 활동합니다.결국 중요한 것은 외적인 행동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며,외적인 선행만으로 만족하는 것도 아닙니다.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밖의 삶과 행위 안으로 흘러들어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아직AC.161에서 유입에 관한 모든 것이 설명된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이제 그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그러므로 여기서 유입의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하려 하기보다,지금까지 읽은 것만으로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충분합니다. ‘나는내삶을내삶으로살아가지만,그생명의근원은나자신에게있지않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 우리의 실제 삶과 행위 안에 나타날 때,서로 구별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은 하나로서 활동하고 하나처럼 보입니다.이것이AC.161에서 처음 열어 보여 주는 유입의 의미입니다.(AC.161심화1)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해설
이 영상에서 강사가 다루는 본문은 역대상 4장 9-10절의 유명한 ‘야베스의기도’입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서도 ‘나의지경을넓혀주십시오’라는 구절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했던 기도입니다. 그 과정에서 ‘지경’은 사업의 확장, 재산의 증가, 사역의 성장, 영향력의 확대 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대표적인 ‘복을구하는기도’로 자리 잡았습니다. 강사가 문제 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는 히브리어 본문을 자세히 살피면서 마지막 구절을 ‘내게근심이없게하옵소서’라고만 읽을 것이 아니라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게하옵소서’라고도 읽을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하나님, 나를잘되게해주십시오’라는 기도에서 ‘하나님, 내가남을아프게하는사람이되지않게해주십시오’라는 기도로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볼 때 바로 이 방향 전환은 매우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히브리어 자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역대상 4장 9절에서 야베스의 어머니는 ‘내가수고로이낳았다’고 말하는데,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오체브’(עֹצֶב)는 고통, 슬픔, 수고 같은 뜻을 가집니다. 그리고 ‘야베스’(יַעְבֵּץ)라는 이름과 이 단어 사이에는 분명한 언어유희가 있습니다. 실제로 여러 번역과 주석도 이 점을 인정합니다. 다만 영상에서 설명하듯 야베스라는 이름이 단순히 ‘오체브의자음순서를바꾼단어’라고 어원적으로 확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본문이 두 단어의 유사한 소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경의 이름 풀이에서는 현대 언어학적 어원과 문학적인 언어유희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야베스라는이름과고통을뜻하는오체브사이에의도적인말놀이가있다’고 하는 정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더구나 고유명사 야베스의 첫 요드(י)를 곧바로 히브리어 미완료형의 접두사라고 분석하는 것 역시 지나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고유명사가 되면 그 자체로 이름이므로, 일반 동사의 활용형처럼 단순하게 역분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본문 저자가 ‘야베스 - 고통 - 근심’이라는 음성적 연결을 독자에게 의식시키고 있다는 강사의 큰 관찰은 옳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10절 끝의 ‘레빌티오츠비’(לְבִלְתִּי עָצְבִּי)입니다. 여기의 ‘오츠비’는 ‘고통하다, 슬프게하다’와 관련된 동사의 부정사 형태에 1인칭 단수 접미사가 붙은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부정사에 붙은 인칭 접미사는 문맥에 따라 행위의 주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고 객체처럼 이해되기도 하기 때문에, 강사가 소개한 두 방향의 가능성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영어 번역들도 갈립니다. NASB와 NET 같은 번역은 대체로 ‘그것이나를아프게하지않도록’, 곧 야베스가 고통받지 않도록이라는 방향으로 번역하지만, NKJV와 HCSB 계열은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도록’이라는 방향을 취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내가고통을야기하지않게해주십시오’는 임의로 만들어 낸 번역은 아닙니다. 다만 영상에서 ‘킹제임스번역이저처럼해석했다’고 말한 부분은 정확히는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KJV는 ‘thatitmaynotgrieveme’, 곧 ‘그것이나를근심하게하지않도록’이라고 번역하며, ‘thatImaynotcausepain’이라고 한 것은 NKJV입니다. 작은 차이 같지만 히브리어 해석을 중심으로 하는 영상이므로 이 구분은 중요합니다.
더구나 이 절의 히브리어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습니다. ‘웨아시타메라아’(וְעָשִׂיתָ מֵּרָעָה)라는 부분 자체가 해석상 어려움이 있는 표현입니다. 많은 번역본은 문맥을 따라 ‘나를악에서지켜주시고’, ‘재앙으로부터보호하시고’와 같이 이해하지만, 마소라 본문의 문법을 문자 그대로 풀면 매끄럽지 않습니다. NET 성경도 이 대목의 히브리어가 어렵다는 점을 주석에서 명시하고 다른 본문 가능성까지 논의합니다. 그러므로 10절 마지막을 하나의 문법 분석만으로 완전히 해결됐다고 말하기보다는, ‘본문자체가여러해석의가능성을가지고있으며, 그가운데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도록이라는이해도실제번역전통속에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오래된 유대교 주석 전통에서는 대체로 야베스 자신에게 손해와 고통이 닥치지 않게 해 달라는 의미로 읽어 왔습니다. 그러므로 ‘내가남에게고통을주지않게’라는 해석은 매우 아름답고 문법적으로 가능한 독법 가운데 하나이지만, 전통적 해석을 폐기하는 결정적 번역이라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나에게고통이오지않게해주십시오’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기복주의라고 규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보호와 건강과 평안과 생계와 필요한 자연적 복을 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무엇을 위해 구해지는가입니다. ‘나의지경을넓혀주십시오’가 ‘내소유를더늘려주십시오’, ‘나를더유명하게만들어주십시오’, ‘내사역을남들보다크게만들어주십시오’라는 자기중심적 욕망으로 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맡기신 쓰임을 더 잘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자연적 조건과 능력과 기회를 구한다면 같은 말도 전혀 다른 기도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외적 행위 자체보다 그 행위 안에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는지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야베스의 기도의 핵심은 ‘복을구했느냐, 복을구하지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그복의중심에누가있는가’입니다. 우리의 proprium은 복조차도 자기 자신을 향하게 만듭니다. ‘주님, 나의지경을넓혀주십시오’라고 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더인정받게해주십시오’, ‘내이름이더높아지게해주십시오’, ‘내가다른사람보다성공하게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같은 ‘지경’을 구하면서 ‘제가더많은사람에게선을행할수있게하시고, 더큰책임을감당하게하시며, 주님께받은것을더넓게쓰게하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똑같은 기도라 하더라도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른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강사가 마지막 구절을 ‘내가다른사람에게고통을주지않게해주십시오’라고 읽은 것은 ‘스베덴보리의렌즈’와 놀라울 만큼 잘 만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악을죄로여겨피하는것’을 기독교적 삶의 첫째요 본질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신적섭리’ 265번에서도 악을 죄로 여겨 삼가는 것이 기독교 종교의 본질이라고 설명하며, ‘참된기독교’ 535번에서는 체어리티의 첫째가 악을 피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나에게나쁜일이생기지않도록해주십시오’라는 기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 제안에있는악이다른사람에게흘러나가지못하게해주십시오. 제말과행동과욕망때문에다른사람이상처받지않게해주십시오. 그리고그악을단순히억제하는데서끝나지않고, 그것이주님께죄임을보고돌이키게해주십시오’라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도록’이라는 기도조차 단순한 도덕적 착함을 넘어가야 합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좋은사람이되겠다’고 결심한다고 해서 자신의 내면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외적 삶에서 악을 죄로 여기고 싸우며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악의 욕망을 내면에서 제거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합니다. ‘신적섭리’(Divine Providence, 1764)145번은 사람이 악을 죄로 여기고 그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면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악한 욕망을 제거하고 선의 애정을 심으신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야베스의 기도는 ‘제가남에게피해를안끼치도록제성격을잘관리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주의손이나와함께하사, 제가악을행하지않도록하시고, 제안에서악을일으키는것까지주님께서다스려주십시오’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야베스의 기도 가운데 ‘주의손으로나를도우사’라는 구절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따라서 ‘지경을넓혀주십시오’와 ‘주의손이나와함께하게하십시오’와 ‘악에서지켜주십시오’와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게하십시오’를 서로 떨어진 네 가지 소원으로만 읽지 않고 하나의 거듭남의 흐름으로 읽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제게주신선과진리의삶의영역을넓혀주십시오. 그러나그것을제힘으로소유하려하지않게하시고, 언제나주님의손이저와함께하게하십시오. 제안의악이그넓어진지경안으로흘러들지않게하시며, 제가받은능력과영향력이오히려다른사람을상하게하는도구가되지않게해주십시오.’ 이렇게 읽으면 ‘지경의확대’는 성공의 확대가 아니라 쓰임의 확대가 됩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재물이 많아질수록 더 많이 소유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며, 목회자의 영향력이 넓어질수록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은 영혼을 주님께 연결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대상 4장 10절에 스베덴보리가 직접 붙인 속뜻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과 쓰임의 교리 안에서 이 기도를 읽을 때 자연스럽게 열리는 적용입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이른바 ‘야베스의기도열풍’도 조금 다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지경을넓혀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는 사실 자체를 기복주의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지나칩니다. 성경에는 자연적 복을 구하는 기도가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연적 삶도 섭리하십니다. 그러나 자연적 복을 최종 목적으로 만들 때 신앙의 질서가 뒤집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을 섬겨야 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지위와 지식과 능력과 영향력은 모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선한 쓰임을 위한 수단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경을넓혀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버릴 것이 아니라 그 기도의 중심을 바꾸어야 합니다. ‘내지경을넓혀내것을크게해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께서제게맡기실수있는쓰임의지경을넓혀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영상의 가장 귀한 문장은 처음과 끝에 반복된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내가다른사람들에게고통을주지않도록그런내가될수있도록인도해달라.’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회개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저사람이나에게상처를주었습니다’, ‘저사람때문에내가고통받습니다’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시선을 다시 나 자신에게 돌리게 합니다. ‘그사람의악’은 그 사람이 주님 앞에서 다룰 문제이고, 내가 지금 살펴야 하는 것은 ‘내안의악’입니다. ‘나는누구에게고통을주고있지는않은가? 내proprium의자존심과지배욕과인정욕과탐욕과분노와냉혹함때문에가까운사람이힘들어하고있지는않은가?’ 이것을 보는 것이 자기 성찰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발견한 악을 ‘내성격이원래그래’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이것은주님께죄입니다’라고 인정하고 피하려 할 때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을죄로여겨피하는것’을 그토록 강조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강사의 해석을 이렇게 평가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어 주해 차원에서는 ‘내가고통을일으키지않도록’이라는 번역을 유일한 정답으로 밀어붙이기에는 조심할 점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내가고통을당하지않도록’이라는 해석 역시 충분한 문법적·번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실제 마소라 본문 자체에도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한 영상에서 KJV와 NKJV를 혼동한 작은 오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강사가 야베스의 기도를 자기중심적인 복의 청원에서 타인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구하는 기도로 전환한 것은 매우 좋은 신학적 통찰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게고통이없게하옵소서’와 ‘내가고통을주지않게하옵소서’ 가운데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둘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주님, 악으로부터저를보호하여주십시오. 그러나무엇보다제가악의통로가되지않게하십시오. 제지경을넓혀주십시오. 그러나그것이제proprium의지경이아니라주님의선과진리가흘러갈쓰임의지경이되게하십시오. 주의손이저와함께하시되, 그손으로제주변의장애물만치워달라고하지않게하시고, 먼저제안의악을보게하시며그것을죄로여겨피하게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야베스의 기도는 더 이상 ‘고통없는인생과성공을보장받는주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을받을수록더선한사람이되게하시고, 지경이넓어질수록더많은쓰임을감당하게하시며, 힘이커질수록아무도해치지않게하시고, 무엇보다그모든과정에서주님의손을떠나지않게해주십시오’라는 거듭남의 기도가 됩니다. 저는 야베스의 짧은 기도를 오늘 우리가 다시 드린다면, 바로 이 지점까지 가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
‘그를만나는자마다그를죽이리라’(everyonefindinghimwouldslayhim)는모든악과거짓이그를멸망시키리라는것을의미하는데,이는지금까지말한것으로부터따라나옵니다.그까닭은이렇습니다.사람이스스로체어리티를빼앗아버릴때그는자신을주님에게서분리합니다.사람을주님과결합시키는것은오직체어리티,곧이웃을향한사랑과자비이기때문입니다.체어리티가없는곳에는분리가있고,분리가있는곳에서사람은자기자신,곧자기의것(own)에맡겨집니다.그러면그가생각하는것은무엇이든거짓이고,그가의지하는것은무엇이든악입니다.바로이러한것들이사람을죽이는것,곧그에게생명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지않게하는것입니다. That “everyonefindinghimwouldslayhim” signifies that every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follows from what has been said.For the case is this.When a man deprives himself of charity, he separates himself from the Lord, since it is solely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that conjoin man with the Lord.Where there is no charity, there is disjunction, and where there is disjunction, man is left to himself or to his own; and then whatever he thinks is false, and whatever he wills is evil.These are the things that slay man, or cause him to have nothing of life remaining.
해설
AC.389는 창4:14의 ‘나를만나는자마다나를죽이겠나이다’라는 말이 왜 ‘모든악과거짓이그를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앞의 AC.385에서 그 의미를 먼저 제시했고, 이제 이번 번호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 논리는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리면 주님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고, 주님과 분리되면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지며, 그렇게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생각하는 것은 거짓이 되고 의지하는 것은 악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악과 거짓이 사람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속뜻에서 ‘죽임’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이스스로체어리티를빼앗아버릴때’라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체어리티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 ‘주의얼굴을뵈옵지못함’ 등을 해석하면서 계속 확인해 온 원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을 받아들이고 선을 거부함으로써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강한 말을 합니다. ‘사람을주님과결합시키는것은오직체어리티,곧이웃을향한사랑과자비이다.’ 이것은 체어리티를 단순히 신앙생활에 추가되는 좋은 행실 정도로 보는 관점과 전혀 다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생명의 결속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사랑이나 선행이 주님과의 결합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87에서 바로 확인했듯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를 사람이 받아들여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살아낼 때, 그 체어리티 안에서 사람은 주님과 결합됩니다.
따라서 ‘오직체어리티가사람을주님과결합시킨다’는 말은 신앙이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가인 이야기 전체가 보여 준 것처럼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둘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진리는 선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결국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부정하는 것은 ‘체어리티없이도신앙만으로주님과결합될수있다’는 가인의 원리입니다.
이어지는 ‘분리가있는곳에서사람은자기자신,곧자기의것에맡겨진다’는 문장은 이번 번호의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proprium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 살아갈 때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만, 주님과의 결합을 거부하여 자기 자신에게 맡겨지면 인간의 고유한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자신에게맡겨진다’는 것은 인간이 참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의 것에 갇히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생각하는것은무엇이든거짓이고,그가의지하는것은무엇이든악’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과 의지가 함께 등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생각은 진리와 거짓의 측면에, 의지는 선과 악의 측면에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것만으로 살아가면 이해의 영역에서는 거짓이, 의지의 영역에서는 악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인간의 모든 자연적 사고와 의지를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도 자기의 것에서 올라오는 악한 충동과 거짓된 생각이 있는 동시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들과 싸우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것은 ‘주님과분리되어자기의것에맡겨진상태’입니다. 즉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삼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것은 악과 거짓이지만,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의지하고 생각하며 행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AC.379의 ‘의지가실제사람이다’라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악하게 산다면 실제로는 악을 의지하는 것이므로 거기에 신앙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89에서는 그 문제를 한 단계 더 근원적으로 설명합니다. 주님과의 결합을 잃고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의지는 악으로, 생각은 거짓으로 기울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변화는 단순히 생각의 내용을 바꾸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의지 안에 받아들이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살아가는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의 ‘바로이러한것들이사람을죽인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가인을 죽이는 것은 문자적으로 그를 찾아오는 어떤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악과 거짓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죽인다’는 말의 의미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그에게생명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지않게하는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죽음은 단순히 어떤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참된 생명에 속한 것이 사람 안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대목은 바로 앞 AC.384와 매우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가인에게 ‘아직선의어떤것이남아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인이 두려워하는 ‘죽임’은 무엇이겠습니까? 악과 거짓이 계속 지배하여 아직 남아 있는 생명에 속한 것마저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AC.389의 마지막 표현인 ‘생명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지않게한다’는 말은 AC.384의 ‘아직선의어떤것이남아있었다’는 말과 정확히 긴장을 이룹니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죽음의 위험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존이 필요합니다.
이제 ‘가인의표’가 왜 주어지는지에 대한 배경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잘못된 교리를 옳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분명 잘못된 것이며, 그 결과 가인은 선과 진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 생명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다면,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완전히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보존의 섭리가 필요합니다. ‘가인의표’는 바로 이 문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AC.389는 가인 이야기의 핵심 교리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고, 체어리티의 상실은 주님과의 분리를 가져오며, 그 분리는 사람을 자기의 것에 맡겨지게 합니다. 자기의 것만으로는 생각이 거짓으로, 의지가 악으로 향하고, 악과 거짓은 마침내 사람 안에서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체어리티를충분히실천하지않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신앙의 생명 자체를 그 근원이신 주님과의 결합에서 떼어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반대 방향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자기의 것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도 주님에게서 오고 진리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자기 것처럼 의지하고 생각하고 행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의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을 보면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가인의 길이 ‘체어리티의상실에서자기의것,그리고악과거짓과죽음으로’ 내려가는 길이라면, 거듭남의 길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체어리티와 신앙이 다시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을 이루는 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설교는 사무엘하 12장 1절로 6절, 곧 나단이 다윗에게 가난한 사람의 암양 한 마리를 빼앗은 부자의 비유를 들려주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설교의 상당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와 오늘의 정치 현실, 그리고 한국 교회 일부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인물 숭배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전개됩니다. 박요한 목사는 자신의 교회가 붙드는 두 가치를 ‘개혁’과 ‘애민’이라고 말하며, 특히 ‘강한자가약한자를괴롭히는것’, ‘상처입은사람을조롱하는것’, ‘자기가지지하는정치적인물을우상화하여그의어두운면을보지않으려하는것’을 기독교 신앙과 양립하기 어려운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린 시절부터 ‘인간을우상화하지않고’, 상처 입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교육의 비전으로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볼 때, 이 설교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의외로 이승만도, 명성황후도, 오늘의 정치인들도 아닙니다. 오히려 나단이 다윗에게 한 한마디입니다. ‘당신이그사람이라.’ 이 말이야말로 이 긴 설교 전체를 영적인 차원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다윗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암양을 빼앗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즉시 분노합니다. ‘이일을행한그사람은마땅히죽을자라.’ 그런데 다윗이 그렇게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악은 사실 자기 안에 있는 악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들었을 때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지만, 자기 자신의 삶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다루는 인간의 proprium 문제와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하고 판단할 때 자기 악을 정당화하고, 변명하고, 때로는 아예 보지 못합니다. 반면 타인의 악은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봅니다. 그래서 남의 탐욕은 탐욕으로 보면서 자기 탐욕에는 이유가 있고, 남의 권력욕은 악으로 보면서 자기가 지지하는 사람의 권력욕에는 명분을 붙이며, 남의 거짓에는 분노하면서 자기편의 거짓에는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좌우 어느 한 정치 진영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proprium 자체가 가진 보편적인 성향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설교의 정치적 메시지는 오히려 정치적 진영을 넘어서는 영적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박요한 목사는 ‘인간을우상화하지마세요’라고 반복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인간을 우상화하는 까닭은 단순히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서 ‘내가사랑하는나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질서, 내가 원하는 나라, 내가 원하는 성공, 내가 원하는 힘을 어떤 지도자가 대신 구현한다고 느끼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사람을통해확장된나자신’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정치적 우상화의 가장 깊은 뿌리에는 결국 자기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저사람을우상화하지말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한 인물을 우상에서 끌어내린 사람이 내일 다른 인물을 그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른쪽의 우상을 깨뜨리면서 왼쪽에 새로운 우상을 세울 수도 있고, 왼쪽의 우상을 비판하면서 오른쪽의 인물을 절대화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누구도우상화하지않는다’는 자기 자신의 판단과 정의감을 우상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한 ‘우상교체’가 아니라 인간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의 방향 전환입니다.
이 점에서 다윗 이야기는 매우 중요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그가 죄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의 죄를 끔찍할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밧세바를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려 하며, 마침내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박요한 목사가 잘 짚었듯이 성경은 다윗의 ‘앞모습’만 보여 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모습과 추한 모습을 모두 보여 줍니다. 이것 자체가 인간을 우상화하지 못하게 하는 성경의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이 ‘들켰다’는 사실이 아니라 ‘자기의악을자기악으로인정하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출발입니다. 회개는 ‘인간은모두죄인입니다’라는 일반적인 교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바로이것이내악입니다’라고 자기 삶에서 특정한 악을 보고, 그것이 주님의 뜻에 반하기 때문에 물리치려 하는 데서 실제적인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나단의 ‘당신이그사람이라’는 선언은 단순한 고발이 아닙니다. 다윗의 눈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놓는 진리의 빛입니다.
여기서 설교 전체를 향해서도 같은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승만, 명성황후, 한국 교회의 극우적 정치교육, 특정 정치세력과 지도자들의 문제를 매우 강한 언어로 비판합니다. 박요한 목사가 제시한 각각의 역사적 사실과 정치적 평가는 별도로 검증하고 논의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그들가운데누가악한가?’가 아니라 ‘이말씀을듣고있는내안에는이것이없는가?’입니다. 나단의 비유를 듣고 다윗이 ‘저런놈은죽어야한다’고 외치는 데서 끝났다면 아무런 회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씀의 목적은 다윗으로 하여금 다른 악인을 정확하게 평가하게 하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사람이바로당신입니다’라는 말씀을 듣게 하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설교가 정말 깊은 영적 설교가 되려면, ‘저정치인들이그사람이다’, ‘저극우기독교인들이그사람이다’, ‘저지도자들이그사람이다’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그리고나도그사람일수있다’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나단의 비유가 오히려 남을 심판하는 도구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것이 들어오면 설교의 정치적 소재 전체가 갑자기 거듭남의 문제로 바뀝니다.
박요한 목사가 강조하는 ‘애민’도 같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약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상처 입은 사람을 조롱하지 않으며,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조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와 상당히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상처입은자의손을만져주고안아줄수있는따뜻한사람’을 길러야 한다는 설교 후반의 말은 기독교 신앙이 삶의 선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서 귀합니다. 신앙은 사람을 더 잔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선하게 만들어야 하며, 교리가 참이라면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삶이라는 열매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민’과 ‘체어리티’를 완전히 같은 것으로 놓을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한 연민이나 따뜻한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것이며, 동시에 진리에 따라 지혜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돕는 것이 체어리티이고, 때로는 악을 제지하는 것이 체어리티이며, 때로는 잘못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도 체어리티가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분노를쏟아내는가’가 아니라 ‘이웃의참된선을위하여행동하는가’입니다.
이 기준을 적용하면 박요한 목사가 약자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거부하면서 ‘기독교인은써야할언어와쓰지않아야할언어가있다’고 말한 부분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거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을 비하하고 조롱하는 것과 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이것은 체어리티와 진리를 함께 붙들려는 태도와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준을 박요한 목사 자신의 언어에도 똑같이 적용해야 합니다. 설교 안에는 정치적 반대편이나 역사적 인물을 향한 매우 거친 표현과 조롱에 가까운 표현들이 적지 않게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번 설교가 스스로 제시한 ‘기독교인은써야할언어와쓰지않아야할언어가있다’는 기준과 긴장을 일으킵니다. 상대편의 조롱을 비판하면서 상대편을 조롱한다면, 주장하는 진리와 그것을 전달하는 형식 사이에 균열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중요한 것은 누구를 향한 조롱이냐가 아니라, 그 언어를 움직이는 정서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분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불의 앞에서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 약자가 짓밟히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하는 것은 체어리티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는 특히 자기 사랑과 결합하기 쉬운 정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약자를보호하기위한분노’였던 것이 어느 순간 ‘악인이라고판단한상대를미워하는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둘 다 정의로운 분노처럼 보이지만 영적 기원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행위의 외형만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이는 사랑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박요한 목사가 말하는 ‘애민’은 매우 좋은 출발점이지만, 그것이 참된 체어리티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사랑하는사람들에대한애민’을 넘어가야 합니다. 내가 정치적으로 동의하는 사람, 내가 피해자라고 인정하는 사람, 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가 몹시 싫어하는 사람에게조차 그의 인간됨을 부정하지 않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악은 악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 자체를 지옥에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을 즐기지 않는 것, 이것이 훨씬 어려운 체어리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 후반에 소개되는 어린 학생의 질문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원수를사랑하라고했는데이정치인도사랑해야합니까?’라는 질문에 어떤 교회 지도자가 그 정치인을 ‘사탄’으로 규정하고 ‘박멸해야한다’고 가르쳤다는 대목입니다. 사실 여부와 구체적 맥락은 별도로 확인해야 하지만, 박요한 목사가 이 사례를 통해 지적하는 문제 자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정치적 상대를 더 이상 하나의 인간으로 보지 않고 절대적인 악으로 규정하는 순간, 신앙은 체어리티를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진영에서 일어나든 동일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사람과 악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악은 거부해야 하지만 사람의 구원을 바라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지옥적인 것은 악과 거짓이지, 내가 미워하는 특정 인간 집단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수를사랑하라’는 말씀은 악을 선이라고 인정하라는 뜻이 아니라, 악을 거부하면서도 사람에게 선이 회복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할수록 더욱 어려우면서도 더욱 필요한 기독교적 태도입니다.
이제 다시 설교 제목 ‘한국교회는어떻게극우 양성소가되었나?’로 돌아가 봅니다. 여기서 박요한 목사가 말하는 ‘극우 양성소’는 문맥상 낡고 부패한 종교체제, 권력과 결탁하고 인간을 우상화하는 교회의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옛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악하고, ‘새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선한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참된 새로움은 제도와 간판을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사람의 속 사람이 새로워지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개혁의 가장 깊은 자리는 교단 총회도, 정치적 입장도, 예배 형식도 아닙니다. 한 사람의 속 사람입니다. 내가 진리를 이용하여 남을 심판하는가, 아니면 그 진리가 먼저 나를 심판하게 하는가? 내가 지지하는 사람의 악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는가? 내가 반대하는 사람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는가? 내 신앙은 결국 이웃을 향한 선한 삶으로 나타나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교회가 끊임없이 자신을 살피는 것이 참된 개혁에 더 가깝습니다.
그 점에서 이번 설교의 ‘개혁’과 ‘애민’이라는 두 기둥도 조금 다르게 배열해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개혁과애민’이 서로 나란히 서 있는 두 가치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의 결합으로 보는 편이 더 깊습니다. 진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드러내고 개혁하게 하며, 선은 왜 그것을 고쳐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진리만 있고 체어리티가 없으면 개혁은 정죄가 되기 쉽고, 체어리티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사랑은 방향을 잃기 쉽습니다. 참된 교회에서는 이 둘이 결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설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결국 정치적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왕궁 안에 홀로 서 있는 나단과 다윗입니다. 한 사람은 진리를 말하고, 한 사람은 그 진리 앞에 섭니다. 다윗에게는 나단을 제거할 권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단을 제거한다고 자기 안의 악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단의 말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윗에게 다시 시작할 길이 열립니다.
우리에게도 ‘나단’은 찾아옵니다.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양심을 통해, 때로는 다른 사람의 지적을 통해, 때로는 실패와 수치를 통해 찾아옵니다. 그때 proprium은 즉시 변명하고 싶어 합니다. ‘저사람도그러지않았는가’, ‘저쪽은더심하지않은가’, ‘내게도사정이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그 모든 비교를 멈추고 주님 앞에서 ‘그사람이바로나입니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이번 설교를 한 문장으로 다시 읽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박요한 목사가 마지막에 품었다는 교육의 비전도 의미가 달라집니다. 아이들에게 ‘누가좋은정치인이고누가나쁜정치인인가’를 먼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도 절대화하지 않는 법,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의 잘못도 볼 수 있는 법,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도 인간으로 대하는 법, 약한 사람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안의 악을 발견했을 때 변명하지 않고 돌이키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이라면 그것은 특정 정치 진영의 다음 세대를 만드는 교육이 아니라, ‘그사람이바로당신입니다’라는 말씀 앞에 설 수 있는 양심을 길러 주는 교육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이번 설교에서 가장 귀하게 건질 수 있는 결론입니다. 교회의 위기는 세상에 악한 사람이 많아서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자기편의 악을 악이라고 부르지 못할 때,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남에게만 적용할 때,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교회 안에서 이미 위기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개혁은 언제나 남을 향해 들었던 손가락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순간 시작됩니다. ‘그사람이바로당신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그렇습니다. 제가그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심판의 말씀이 오히려 거듭남의 문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이집트 사막의 어느 수도 공동체에 전해지는 두 수도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강문호 수도사 자신도 이 수도원을 직접 방문한 것은 아니라고 밝히면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곳에서 태어나 수도원 밖 세상을 거의 경험하지 못한 두 수도사가 어느 날 화면을 통해 사람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싸움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두 사람은 호기심이 생겨 ‘우리도 한번 싸워 보자’고 합니다.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지갑 하나를 가운데 놓고 한 사람이 ‘내 것이다’라고 하면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맞서면서 다투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자 뜻밖의 일이 벌어집니다. 한 수도사가 지갑을 집어 들고 ‘내 거다’라고 하자 다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 가져가라’고 해버린 것입니다. 싸움이 시작될 수가 없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여기에서 요한일서 3장 9절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를 인용하고, 이 두 수도사가 싸울 수 없었던 까닭을 ‘그 속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소와 말이 저마다 타고난 방식으로 일어나고 병아리가 물을 마신 뒤 본능적으로 머리를 드는 모습을 예로 들면서, 하나님의 씨가 사람 안에 자리 잡으면 선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이 점차 그 사람의 ‘본질’처럼 된다고 말합니다.
이 짧은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지점이 보입니다. 무엇보다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는 대목입니다. 싸움에는 반드시 두 개의 ‘내 것’이 필요합니다. 한쪽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다른 쪽에서도 ‘아니다, 내 것이다’라고 해야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가 가져라’ 하는 순간 싸움의 재료 자체가 사라집니다. 이 작은 이야기는 인간의 proprium이 어떻게 갈등을 만들어 내는지를 아주 단순하면서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단순히 물건에 대한 소유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 것’, ‘내 생각’, ‘내 판단’, ‘내 공로’, ‘내 지위’, ‘내 명예’, ‘내가 옳다’는 데 집착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모두 여기에 연결됩니다. 실제로 우리의 싸움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질 때문인 경우보다 ‘내가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누군가 내 의견을 무시했다고 느끼고, 내 체면을 손상했다고 생각하고, 내가 받아야 할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여기면서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납니다. 결국 겉으로는 여러 이유가 있어 보여도 그 깊은 곳에는 ‘나’와 ‘내 것’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두 번째 수도사가 ‘그래, 네 거다’라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그는 논쟁에서 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논쟁 자체를 필요 없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내 것’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과 맞설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의 질서와도 매우 잘 연결됩니다. 천국에서는 각자가 자기 자신만의 유익을 먼저 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유익을 기뻐합니다. 자신이 가진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움켜쥐기보다 그것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알고 서로 나누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적 삶의 중심에는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서로에게 쓰임이 될 것인가’가 놓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는 조금 더 깊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요한일서의 ‘하나님의 씨’를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없게 만드는 일종의 새로운 본질처럼 설명합니다. 이 방향에는 귀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실제로 거듭남이 깊어지면 사람은 단지 ‘죄를 지으면 안 되니까 참는 상태’를 넘어 ‘그 악 자체를 싫어하는 상태’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계명이 ‘하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악을 피하지만, 나중에는 그 악이 주님을 거스르고 이웃을 해친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에서 싫어하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 애정의 변화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은 강문호 수도사의 ‘본질이 달라진다’는 표현을 더욱 깊게 열어 줍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죄를 모르는 존재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도움을 받아 악과 싸우고 그것을 피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애정을 받습니다. 처음에는 ‘하면 안 되니까 하지 않는 것’이었던 일이 어느 순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됩니다. 반대로 처음에는 억지로 행하던 선이 점차 좋아지고 기뻐집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놀라운 변화입니다. 선이 의무에서 기쁨으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죄를 피하는 게 아니라 죄를 모르는’ 삶이라는 표현은 그 의도를 잘 살려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거듭난 사람이 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악을 너무 멀리하여 그것을 자기 삶의 선택지로 삼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사들은 악이 무엇인지 모르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과 진리 안에 있기 때문에 악과 거짓을 더욱 분명하게 분별합니다. 다만 그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악을 모른다’기보다 ‘악을 원하지 않는다’가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이번 영상의 ‘하나님의 씨’라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요한일서의 ‘씨’를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 안에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보존하시며, 훗날 그것을 통하여 인간을 거듭나게 하신다는 점에서는 아름다운 접점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받은 사랑, 말씀을 들으며 느꼈던 거룩한 정서, 양심을 따라 선을 행했을 때의 기쁨, 주님과 이웃을 향했던 순수한 마음 등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그리고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것들을 불러내어 사용하십니다.
다만 ‘하나님의 씨가 있으면 범죄하지 못한다’는 말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면 자칫 신앙생활의 실제 모습을 놓칠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시험은 있고 proprium은 계속 고개를 듭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 인간에게는 끊임없는 내적 싸움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므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악이 일어날 때마다 그것이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물러서는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선한지를 자랑하기보다 자기 안에는 선한 것이 없고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이 점은 이번 이야기의 핵심과도 맞닿습니다. ‘내 거야’라고 주장하지 않았던 수도사의 모습은 단지 물질에 욕심이 없는 모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더 어려운 내려놓음은 ‘내가 선하다’는 생각까지 내려놓는 것입니다. 재산을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만 자기 공로를 내려놓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수도복을 입고 청빈하게 살면서도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나는 더 거룩하다’, ‘나는 이것을 이루었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많은 재산과 책임을 가지고 세상 한가운데 살면서도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왔음을 인정하며 이웃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보다 그 형식 안에 있는 사랑의 질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이라는 환경 자체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의 싸움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속의 싸움까지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악은 단순히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한 내면의 애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참된 수도는 장소의 격리가 마음의 변화로 이어질 때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보다 자기 안의 ‘내 것’을 얼마나 내려놓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 점에서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두 수도사’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영적 비유로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싸움을 멈추는 가장 깊은 방법은 싸움의 기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일으키는 자기중심적 애정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것이다’라고 할 때 언제나 ‘그래, 네가 가져라’라고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의 앞에서는 진리를 말해야 하고, 약자를 보호해야 하며, 맡겨진 것을 책임 있게 지켜야 합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적인 양보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랑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을 자기 자존심과 승리를 위해 하느냐, 아니면 선과 진리와 이웃의 유익을 위해 하느냐입니다.
따라서 참된 평화는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평화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내적 질서입니다. 사람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바른 질서 아래 둘 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때 사람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저 사람이 인정해야 한다’, ‘내가 한 일을 사람들이 알아줘야 한다’, ‘내가 받아야 할 몫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이전에는 싸움거리가 되었던 것들이 더 이상 싸움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앞선 ‘사과나무 이야기’가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자기 지혜를 내려놓고 주님의 섭리에 맡기는 이야기였다면, 이번 ‘수도사 싸움’은 ‘내 것’을 내려놓음으로써 싸움 자체가 사라지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영상 모두 깊은 곳에서는 proprium을 다룹니다. 하나는 ‘내가 안다’는 proprium이고, 다른 하나는 ‘내 것이다’라는 proprium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이 ‘내가 안다’와 ‘내 것이다’가 조금씩 ‘주님께서 아십니다’와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옵니다’로 바뀌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가 인용한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라는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끝나기보다 훨씬 아름다운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심으시고,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갈수록 선은 점차 외부의 명령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이 됩니다. 처음에는 싸우고 싶은데 참습니다. 그다음에는 싸워서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대의 유익을 자기 유익처럼 기뻐할 수 있는 상태를 향해 갑니다. ‘죄를 참는 사람’에서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번 ‘수도사 싸움’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거듭남이란 죄를 짓고 싶은 자신을 억지로 눌러 놓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심으신 선과 진리가 삶의 사랑이 되어 마침내 이전에 좋아하던 악을 싫어하고 이전에 힘들어하던 선을 기뻐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그리고 두 수도사가 싸움에 실패한 이유를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싸울 줄 몰라서 싸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싸움을 만들어 낼 “내 것”이 힘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해야 할 것도 어쩌면 ‘평생 아무와도 부딪치지 않게 해주십시오’가 아니라 ‘부딪치는 순간에도 제 안의 proprium이 주인이 되지 않게 하시고, 선과 진리와 체어리티가 저를 이끌게 해주십시오’일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한복판에서도 가능한 수도이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심으신 ‘씨’가 마침내 삶의 열매가 되어 가는 길일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번 영상에서 강문호 수도사는 한 수도사와 사과나무에 관한 짧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수도사는 사과를 먹고 싶어 작은 묘목 하나를 심고 정성껏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연약한 사과나무가 잘 자라도록 이슬비를 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다음에는 햇볕을, 또 적당한 바람을, 나무가 커진 뒤에는 충분한 소낙비를 구합니다. 가을이 되어 열매가 맺힐 무렵에는 서리가 알곡을 여물게 한다고 생각하여 적당한 서리까지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수도사는 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자기가 판단하여 그때그때 하나님께 요청했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응답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서리를 맞은 사과나무가 얼어 죽어 버립니다. 수도사는 실망합니다. 자신은 사과나무가 잘되기를 바라며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하나님께 구했는데 결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이 수도사가 이웃 수도원에 갔더니 그곳에는 사과나무 한 그루가 무성하게 자라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었습니다. 놀란 수도사가 어떻게 이렇게 잘 길렀느냐고 묻자 다른 수도사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사과나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사과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 제일 잘 아십니다. 가장 적당한 때에, 가장 적당한 것을, 가장 적당한 양만큼 주셔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시오.’ 그는 이슬비와 햇볕과 바람과 소낙비와 서리의 시기와 양을 자신이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사과나무를 만드신 분이 사과나무를 자신보다 더 잘 아신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강문호 수도사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려는 핵심도 분명합니다.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짧은 이야기는 놀랍도록 깊은 ‘신적 섭리’의 문제를 품고 있습니다. 첫 번째 수도사의 잘못은 기도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오히려 아주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사과나무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은 이슬비가 필요하고, 다음에는 햇볕이 필요하며, 이제는 바람이 필요하고, 이만큼 자랐으니 소낙비가 필요하고, 가을에는 서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정한 순서대로 하나님께 그것을 요청합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인데,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모든 계획은 이미 사람이 세워 놓았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실행해 주시는 분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에서도 쉽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면서도 마음속에는 이미 가장 좋은 결과를 정해 놓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이 일이 이렇게 풀려야 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변해야 하며, 이 문은 열리고, 저 문제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물론 필요한 것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기도가 점점 깊어진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 받아 내는 것’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가 원하게 되는 것’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두 번째 수도사의 기도가 아름답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과나무를 심었고 돌보았으며 열매를 기다렸습니다. 다만 자기가 알지 못하는 영역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이 나무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이 나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체념이 아닙니다. 창조주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이 태도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좋은 그림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지금 보고 있는 한순간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자연적 삶에서 영원한 삶에 이르기까지 전체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신적 섭리’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세상에서 원하는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의 평안과 성공과 문제 해결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보십니다. 우리는 ‘이 일이 잘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일이 잘되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의 영원한 생명에 유익한지를 보십니다. 우리는 오늘을 보지만, 주님께서는 영원을 보십니다. 바로 이 시야의 차이가 첫 번째 수도사와 두 번째 수도사의 차이 속에 아름답게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우리가 구한 ‘햇볕’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비’가 내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바람이 불고, 생각하지 못했던 겨울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주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셨을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맑은 날만 인간을 성장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실패도, 기다림도, 좌절도, 때로는 우리의 계획이 무너지는 경험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쓰임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난 자체가 선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악과 고통을 만들어 우리를 교육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자연계의 질서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주님께서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향하도록 끊임없이 굽혀 이끄신다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섭리에 더 가깝습니다.
여기에서 사과나무는 인간의 거듭남을 생각하게 하는 좋은 상징이 됩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열매를 맺기까지 햇빛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비도 필요하고 바람도 필요하며 계절의 변화도 필요합니다. 인간의 영적 성장 역시 한 가지 경험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위로받을 때도 있고, 시험을 통과해야 할 때도 있으며, 말씀의 진리가 밝게 이해될 때도 있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을 조금씩 새롭게 하십니다. 우리는 어느 한순간만 떼어 놓고 ‘이것은 왜 필요합니까?’라고 묻지만, 주님께서는 한 사람의 거듭남 전체를 보고 계십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시험을 거듭남의 중요한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사람 안에 깊이 숨어 있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평온할 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잘될 때에는 자신이 얼마나 주님을 의지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길이 막히며, 내 판단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이 오면, 비로소 내 안의 proprium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왜 내 뜻대로 되지 않는가?’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도의 응답보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험이 우리 자신을 더 깊이 보여 주기도 합니다.
첫 번째 수도사의 사과나무가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는 나무를 잘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 목적 자체는 선합니다. 그러나 그 선한 목적 속에도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 안다’는 자기 지혜가 숨어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의 proprium은 노골적인 악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일과 선한 일 속에도 아주 미세하게 들어올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을 위해 이것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계획하고,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과까지 결정한 다음 주님께 그 계획을 승인하고 도와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인간은 단순히 악한 욕망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안다’는 자기 지혜까지 조금씩 내려놓게 됩니다.
그렇다고 두 번째 수도사의 태도를 ‘아무 계획도 세우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섭리를 믿는 삶은 수동적인 삶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성과 지혜를 사용해야 하고, 계획하고 판단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농부라면 계절을 살펴야 하고, 병이 나면 의사를 찾아야 하며, 맡은 일이 있다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과나무를 심었다면 물도 주고 가지도 돌봐야 합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충실히 하면서 ‘결과까지 내가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쩌면 ‘섭리를 믿는다’는 말의 가장 실제적인 의미일 것입니다.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고, 내일의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실하게 판단하되 내가 알 수 없는 것까지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되 ‘반드시 이것이어야 합니다’라고 주님의 손을 묶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이 내가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도 즉시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결론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 장면을 보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전체 이야기를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강문호 수도사는 이 이야기에 이어 요한복음 15장 16절, 곧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앞선 다섯 번째 ‘연못 이야기’에서 등장했던 포도나무와 가지의 말씀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지난 영상의 중심이 ‘주님 안에 거하라’였다면 이번 영상은 ‘그 안에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목적은 단순히 살아남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매를 맺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열매’는 특히 중요합니다. 말씀에서 열매는 삶으로 나타나는 선, 곧 선한 행위와 쓰임에 상응합니다. 신앙은 머릿속에서 진리를 많이 아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진리가 의지로 내려가 삶이 되고, 이웃을 향한 선한 행위로 나타날 때 비로소 열매가 됩니다. 따라서 ‘열매를 많이 맺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교회가 커지고, 사역의 결과가 많아진다는 의미보다 훨씬 깊습니다.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과 진리가 실제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더 정직해지고, 더 온유해지고, 자기 욕심을 덜 따르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 열매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과나무 이야기의 마지막 열매는 단순히 ‘사과’가 아닙니다. 주님께 맡긴 삶에서 맺히는 선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맺게 하시는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나무를 심고 돌보지만, 생명을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참된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열매가 많이 맺힐수록 인간이 해야 할 고백은 ‘내가 이렇게 훌륭한 열매를 맺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안에서 이 일을 이루셨다’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와도 다시 연결됩니다. 기도의 가장 깊은 목적은 세상의 조건을 내 뜻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기도하는 나 자신이 주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변화되는 데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 이슬비를 주십시오. 햇볕을 주십시오. 바람을 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깊어지면서 기도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주님, 지금 제게 무엇이 필요한지 저는 다 알지 못합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을 알게 하시고, 그것을 충실히 행하게 하시며, 제가 알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섭리에 맡길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기도를 덜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상 마지막의 ‘걱정, 근심, 무거운 짐을 다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 알아서 해주십시오’라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들으면 참 편안합니다. ‘알아서 해주십시오’는 무책임의 말이 아니라 신뢰의 말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붙들고 염려하며,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몫과 주님의 몫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내게 주어진 선을 행하고, 전체의 결과는 주님의 섭리에 맡깁니다.
어쩌면 우리의 많은 근심은 미래에 대한 지식까지 가지려 하기 때문에 생기는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이 일이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저 사람은 어떻게 변할까?’ 하며 아직 오지 않은 날의 짐까지 오늘 짊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 전체를 보여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필요한 만큼의 빛을 주십니다. 그것으로 오늘의 한 걸음을 걷게 하십니다. 내일이 오면 내일 필요한 빛을 다시 주십니다. 이것이 섭리 아래 사는 사람의 평안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수도사의 차이는 ‘기도한 사람과 기도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아닙니다. 둘 다 기도했습니다. 차이는 ‘내가 알고 있으니 그대로 이루어 주십시오’라는 기도와 ‘주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니 저는 제 몫을 행하며 주님께 맡깁니다’라는 기도 사이에 있습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결과를 자기 손에 쥐고 싶어 하는 기도이고, 후자는 결과를 주님의 지혜에 맡기는 기도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우리의 기도 역시 전자에서 후자로 조금씩 옮겨갈 것입니다.
이번 ‘사과나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담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섭리를 믿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내가 해야 할 선을 충실히 행하면서, 내가 볼 수 없는 내일과 영원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의 지혜와 사랑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수도사의 기도와 두 번째 수도사의 기도를 나란히 놓으면 아주 짧은 차이가 보입니다. ‘주님, 제가 보기에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에서 ‘주님, 주님께서 보시기에 필요한 것을 주십시오’로 바뀌는 것입니다. 말은 몇 글자밖에 달라지지 않지만 그 사이에는 proprium에서 섭리로, 자기 지혜에서 주님의 지혜로 옮겨가는 긴 거듭남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사과나무 한 그루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그 나무를 만드신 분이 가장 잘 아신다면, 하물며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을 함께 보고 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얼마나 더 잘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참된 기도는 결국 주님께 무엇을 알려드리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아시는 그 선한 뜻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여는 일이 되어 갑니다.
AC.334의‘신앙과체어리티에속한모든것이소멸되고,그것들에폭력이가해졌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신앙과 체어리티는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들에게‘폭력’을 가할 수 있을까요?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영적인 폭력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이 없거나 체어리티가 부족한 상태보다 더 심각합니다.어떤 사람이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자신의 악과 거짓에 맞추어 왜곡하는 것은 다릅니다.또한 체어리티를 충분히 행하지 못하는 것과 체어리티 자체를 자기 욕망에 방해되는 것으로 여기며 배척하는 것도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가인 계열의 처음을 보면 이 차이가 잘 드러납니다.가인의 처음 문제는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오히려 신앙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마침내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AC.330에서는 그것이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 분리가 계속되면서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그 왜곡에서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가 생겨났으며,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이제AC.334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폭력이가해졌다’고 합니다.단순한 상실에서 적극적인 훼손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이웃을사랑하라’는 말씀을 잘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체어리티의 진리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말씀을 잘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웃을 해치고,더 나아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비틀어‘이것이오히려주님의뜻이다’라고 한다면 상태가 달라집니다.이제 진리는 악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거꾸로 사용됩니다.
신앙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사람이 어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진리를 알면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짓에 봉사하게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말씀의 진리를 자기 권력과 명예,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면 외적으로는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진리를 본래의 목적과 반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폭력’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질서의 전도입니다.본래 진리는 인간의 악을 드러내고 선으로 인도해야 합니다.그런데 인간의 악이 오히려 진리를 붙잡아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진리가 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악이 진리를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같습니다.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로 인도하고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그러나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고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려 합니다.그 질서가 계속 뒤집히면 처음에는 분리였던 것이 나중에는 체어리티의 소멸과 신앙의 왜곡,그리고 마침내 선과 진리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진행될 수 있습니다.
창4:23의 라멕의 말은 바로 이러한 종말의 상태를 표상적으로 묘사합니다. ‘나의상처로말미암아내가사람을죽였고나의상함으로말미암아소년을죽였도다.’AC.334의 개요에서는 사람과 소년 각각의 세부 의미를 미리 모두 확정하기보다,이 말씀이 교회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파괴하는 상태와 관련된다는 큰 그림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를‘극도의모독’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모독은 단순히 거룩한 것을 모르는 상태가 아닙니다.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고,거룩하지 않은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데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집니다.주님으로부터 온 것이proprium을 섬기는 수단으로 뒤집히는 것입니다.
교회 차원에서도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체어리티가 약한 것과 체어리티를 신앙에 방해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다릅니다.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권력과 명예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왜곡하는 것도 다릅니다.특히 사람의 악을 드러내고 돌이키게 해야 할 말씀이 오히려 그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면 진리의 본래 기능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화를 다른 교회나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저사람은진리에폭력을가한다’고 다른 사람의 내면을 쉽게 판정하기보다,먼저 내 안에서 진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나는 진리를 통하여 나 자신을 고치고 있는가,아니면 진리를 이용하여 나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특히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이것은 중요한 경고입니다.진리를 많이 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그 진리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아르카나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다른사람보다깊이안다’는 우월감을 강화한다면 진리의 목적이 조금씩 뒤집히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개인적 적용을 곧바로AC.334가 말하는‘극도의모독’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AC.334는 라멕으로 표상되는 매우 깊은 종말의 상태를 말합니다.우리는 그 원리를 통하여 자기 안에서 같은 방향의 작은 시작을 미리 살피고 피할 수 있습니다.작은 자기 합리화 하나가 곧 라멕의 극단적 상태라는 뜻이 아니라,질서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데 이 말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을 압축하면‘분리에서폭력으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갈라놓았습니다.그러나 그 분리를 계속 허용하면서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진리가 왜곡되었으며,마침내 신앙에 속한 것마저 사라지고 선과 진리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AC.334의 경고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입니다.진리를 모르는 것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알고 있는 진리를 자기 악과 자기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주님께서 주신 진리는 우리의proprium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악에서 돌이켜 선으로 이끌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오히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삼았습니다.그런데 그 길의 마지막인 라멕에서는‘신앙에속한것이아무것도남아있지않게’됩니다.신앙을 높이려 했는데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역설은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진리는 선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따라서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처음에는 여전히 진리의 지식과 형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그 진리가 자기 목적을 잃게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사람이 무엇이 참된지를 알고 믿는 것은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그런데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무엇을믿는가’자체만을 신앙의 본질로 만들면,진리는 점차 삶과의 연결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교리도 남아 있고 성경에 관한 지식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매우 강하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 진리가 삶의 선을 향하지 않는다면,인간의proprium은 그 진리를 자기 생각과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이때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문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진리 때문에 자기 생각을 고치기보다,자기 생각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해석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진리는 더 이상 자신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됩니다.신앙의 언어는 남아 있지만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은 점점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매우 역설적입니다.처음에는‘신앙이중요하다’는 데서 시작합니다.그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그리고 그 분리가 계속되면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지키려 했던 신앙 자체마저 변질됩니다.
이것은 진리가 선에서 생명을 받는다는 스베덴보리의 기본 질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신앙의 지식이 아무리 정확해도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지 않는다면,그 지식만으로는 살아 있는 신앙을 이루지 못합니다.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AC.332를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말씀으로 사용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우리 안에서도 아는 것이 사는 것보다 앞설 수 있고,교리적 확신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처음에는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배운 진리가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과 자기 의를 지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이 경고는 더욱 중요합니다.AC에 관한 지식이 많아지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속뜻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신앙의 생명이 깊어진 것은 아닙니다.오히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더 분명하게 보고,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며,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AC.325부터AC.332까지 이어 보면 그 흐름은 분명합니다.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이어 교리가 왜곡되고,그 왜곡된 상태가 확장되어 여러 파생 교리를 낳고,마지막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됩니다.
결국 라멕은‘신앙을버린사람’의 단순한 표상이 아닙니다.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높이고 신앙을 그 생명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마침내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그래서AC.332의 가장 무거운 질문은‘나는신앙을얼마나강하게붙들고있는가?’만이 아니라‘내신앙은무엇과결합되어있는가?’입니다.
AC.327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문제는 이것입니다.사랑과 신앙을 분리한 것이 왜 결국 사람의 상태를‘악하게’만드는가 하는 것입니다.단순히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교리적으로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람이 곧 악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AC.327을 그렇게 개인에 대한 단순한 판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여기서는 태고교회 안에서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그 교회적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어떤 결과에 이르렀는지를 보여 줍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말하는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해야 합니다.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진리는 무엇이 선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문제는‘구별’자체에 있지 않습니다.선과 진리는 구별되고 신앙과 체어리티도 구별됩니다.서로 다른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문제는 그 구별이‘분리’로 변할 때입니다.진리가 선과의 관계를 잃고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관계를 잃으면,진리는 더 이상 자신이 존재하는 본래의 목적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상태는 매우 의미심장합니다.가인은 신앙을 버린 사람이 아닙니다.오히려 신앙을 가지고 있고 제물도 드립니다.외적으로는 매우 종교적인 상태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관심의 중심이 점차‘이진리를어떻게살아갈것인가?’에서‘무엇이옳은교리인가?’,더 나아가‘내가옳다는것을어떻게증명할것인가?’로 옮겨갈 위험이 생깁니다.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진리는 여전히 진리입니다.그러나 선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진리는 인간의proprium에 의해 자기 사랑이나 자기 우월성을 위해 사용될 수 있습니다.원래 진리는 사람 자신의 악을 비추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이끌어야 하는데,오히려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문제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람의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왜 가인의 분노가AC.327에서 중요한지가 드러납니다.자신의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이것이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그러나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분노가 일어납니다.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체어리티를 향한 적대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분리가악이된다’는 말은 단순히 두 교리를 구별하여 설명하는 순간 악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신앙이 자기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적인 것을 자처하고,그 상태가 계속되면서 삶과 애정의 질서까지 뒤집히는 것을 말합니다.AC.325의 분리가AC.326에서는 예배의 분리로 나타났고,AC.327에서는 사람들의 상태 자체가 악해지는 데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경고가 있습니다.말씀과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무엇이 참된지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그러나 그 모든 진리가 나를 주님께 더 가까이 이끌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 대신,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사용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진리의 목적을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말씀 해석과 속뜻을 공부하는 우리에게도 이 경고는 그대로 적용됩니다.아르카나를 많이 알고 상응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영적인 생명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오히려 그 지식이 체어리티와 분리되면 자신을 높이는 또 하나의 지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우리가 진리를 배우는 목적은 진리를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AC.327의‘상태가악해졌다’는 말은 매우 엄중합니다.창4의 최초 살인은 어느 순간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속뜻에서 보면 그 비극의 시작은 훨씬 앞에 있었습니다.사랑과 신앙이 분리되고,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마침내 사람의 내적 상태까지 악하게 되었을 때 아벨을 죽이는 다음 단계가 준비됩니다.
결국AC.327이 보여 주는 것은‘분리’의 위험입니다.신앙과 체어리티,진리와 선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진리는 선 안에서 목적을 이루고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붙들 때 가장 깊이 물어야 할 질문은‘이것이얼마나정확한가?’만이 아니라‘이진리가나를어떤사랑과어떤삶으로이끌고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 여기1강,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4강 1부
‘죄론’의문을열다:죄를행위가아니라‘삶을움직이는사랑’으로보기
4강은 앞선 강의들과 연결되면서도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교회시대의 이기는 자, 광야의 연단, 영계의 구조와 사후의 상태 등을 비교적 큰 틀에서 살펴보았다면, 이제 강사는 그 모든 문제를 한 사람의 실제 내면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그렇다면과연무엇을정결하게해야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강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죄론’을 시작합니다. 죄론을 공부하는 목적도 명확하게 밝힙니다. ‘죄성과정욕의지배를받게될때나타나는어두운마음과몸의행실과생활’을 세밀하게 분별하고, ‘선과악, 빛과어둠, 영성과육성, 영적행실과육적행실’을 구별함으로써 철저한 자기 성찰과 회개생활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게도 거듭남은 막연하게 ‘좋은사람이되어가는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점점 더 구체적으로 보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 앞에서 물리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죄론을 ‘기본진리’ 가운데 하나의 독립된 과목 정도로 놓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과목들을 꿰는 중심축으로 이해합니다. ‘입문’에서 말하는 휴거 성도의 자격도 죄 문제와 관계되고, ‘교회시대이기는자’도 죄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된 성도이며, ‘영계론’에서도 사후 심판과 천국·지옥의 문제가 결국 죄와 연결되고, ‘속죄복음’은 하나님께서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를 다루며, ‘성화된성도들의생애’는 죄 문제를 해결한 성도들의 삶이고, ‘성장론’ 역시 죄와 싸우며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앞서 목사님께서 보여 주신 ‘핵심진리’의 목차와 여러 권의 책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여기서 아주 잘 드러납니다. ‘핵심진리’는 여러 교리를 병렬적으로 모아 놓은 책이라기보다, ‘인간이어떻게죄에서벗어나하나님께속한사람으로변화되는가?’라는 하나의 문제를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는 체계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출발점에는 상당한 힘이 있습니다. 오늘날 죄를 말할 때 우리는 흔히 몇 가지 외적인 행위를 먼저 떠올립니다. 거짓말, 음란, 탐욕, 미움, 폭력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처음부터 훨씬 깊은 곳을 보려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범죄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것을 낳는 ‘죄성’과 ‘정욕’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4강은 단순한 윤리 강의가 아니라 일종의 ‘내면해부’로 들어갑니다.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행동을하게만든내안의무엇이있는가?’를 묻기 시작합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은 접점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단순히 밖으로 나타난 행위가 아닙니다. 행위 이전에 의지가 있고, 의지 안에는 사랑이 있으며, 그 사랑에서 생각과 의도가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아주 경건하고 선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 행위의 목적이 자기 영광, 자기 명예, 자기 이익이라면 그 행위의 내적 성질은 외관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작고 보잘것없는 행동이라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안에는 천국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외관을 보지만 주님은 그 행위를 낳은 의지와 목적을 보십니다.
이번 강의에는 이것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 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강사는 자기 자신을 예로 들면서 지금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있지만, 마음속에 ‘여러분들에게인정받고싶고여러분들에게칭찬받고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강단도 자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인데 거기서 ‘자기자랑’이 나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깊은 뿌리를 ‘타락한정욕’에서 찾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이번 4강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정욕’이라는 말은 이미 성적 욕망이라는 일상적인 의미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인정받고싶다’, ‘칭찬받고싶다’, ‘내가한일을알아주었으면좋겠다’는 마음까지 정욕의 영역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이번 강의에서 말하는 정욕은 단순히 육체의 몇 가지 본능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고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려는 광범위한 애정과 욕망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바로 여기서 AC를 읽어 온 우리에게는 ‘proprium’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둘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은 ‘욕심이많다’ 정도보다 훨씬 깊습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게서 선을 행한다고 여기는 그 ‘자기것’, 그리고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는 타락한 의지 전체와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음식과 성욕과 재물욕을 상당히 절제하고도 proprium에 깊이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저사람들과달리정결하다’, ‘나는영적인사람이다’, ‘나는진리를제대로알고있다’는 마음이 생긴다면 오히려 훨씬 알아보기 어려운 proprium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강단 위의 자기 자신에게까지 칼날을 돌리는 것은 귀하게 볼 부분입니다. 죄론을 남에게 적용하기 시작하면 금세 위험해집니다. ‘저사람은탐욕스럽다’, ‘저목사는명예욕이많다’, ‘저성도는육적이다’ 하면서 죄론이 타인을 분류하고 판단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지금말씀을전하고있는나에게도인정받고싶은마음이있다면그것을보아야한다’고 말합니다. 죄론의 칼날이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회개의 기본 질서와도 잘 맞습니다. 회개는 타인의 악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을 살피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강의에는 이 문제를 아주 일상적인 자리까지 끌어내리는 재미있는 경험담도 등장합니다. 강사가 평신도 시절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면서 아이들에게 ‘무엇을먹든지무엇을마시든지하나님의영광을위하여’ 한 주간 살아 보자고 했다고 합니다. 자신도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 물 한 모금을 마셔도 ‘하나님께영광’, 밥 한 숟가락을 먹어도 ‘하나님께영광’ 하며 감사했는데, 밥을 거의 다 먹었을 무렵 그릇 밑에서 죽은 바퀴벌레를 발견합니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평안하게 하나님께 감사하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화가 다소 우스워 보이지만 강사가 하려는 이야기는 상당히 진지합니다. ‘나는하나님께영광을돌리며먹고있다’고 생각했는데 환경 하나가 바뀌자 내면의 상태가 즉시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평온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만으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찾아왔을 때 내 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오는지를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내면이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시험 이해에서도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시험은 인간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사람 안에 잠재해 있던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평상시에는 자기 자신도 모릅니다. 자신이 인내심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주님을 신뢰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뜻과 반대되는 일이 생기고, 인정받지 못하고, 손해를 보고, 자존심이 상하고, 원하는 것이 좌절될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사랑의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시험은 고통스럽지만 거듭남에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악은 싸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번 강의의 ‘죄론’이 단순한 죄 목록 공부가 아니라는 것이 다시 분명해집니다. 강사가 원하는 것은 ‘이것은죄, 이것은죄아님’이라는 체크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빛가운데사는행실과어둠속에사는행실을세밀하게분별하는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분별하는 눈을 갖자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것을 왜 하고 있는가, 내가 이것을 얻었을 때 왜 기쁜가, 이것을 빼앗겼을 때 왜 이렇게 화가 나는가,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 왜 마음이 무너지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죄론은 추상적인 조직신학이 아니라 영성생활의 실제가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자기 안을 깊이 들여다본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나친 자기 관찰은 사람이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만 시선을 두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내안에이런악이있구나’를 발견한 다음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 삶에서 그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며,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와 싸우는 일조차 proprium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이것까지끊었다’, ‘나는저사람보다정결하다’, ‘나는이정도로연단받았다’는 또 하나의 자기 의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회개의 방향은 자기혐오가 아니라 주님을 향합니다. 인간은 자기 안의 악을 보지만 악만 바라보고 앉아 있지 않습니다. 악에서 얼굴을 돌려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삶으로 행합니다. 악을 제거하는 이유도 ‘아무욕망도없는인간’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이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빈집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이 거하실 집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4강 첫머리에 흐르는 ‘정결’이라는 주제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결은 인간성의 삭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감정과 애정과 기쁨을 하나씩 없애어 무감각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난 사람은 오히려 더욱 풍성하게 사랑하고 더욱 깊게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서 기쁨을 얻는지가 달라집니다. 자기만을 위한 기쁨에서 이웃의 선을 기뻐하는 쪽으로, 소유하는 기쁨에서 유용하게 쓰는 기쁨으로, 인정받는 기쁨에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쪽으로 사랑의 중심이 이동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4강의 첫 질문인 ‘무엇을정결하게해야하는가?’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답한다면, 단순히 ‘욕망을제거해야한다’고 하기보다 ‘우리사랑의질서가정결해져야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는가, 왜 사랑하는가,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 그리고 그 사랑 아래 다른 모든 사랑들이 어떤 질서로 놓여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결국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도 이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4강은 이제 본격적인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강사는 ‘죄성’과 ‘정욕’을 구별하기 시작하고, 정욕 자체는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기능인데 타락하면서 자기 만족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정욕을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과 여러 욕망으로 세분하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부터는 ‘핵심진리’의 인간론과 스베덴보리의 ‘사랑의질서’가 상당히 가까이 접근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4강 2부에서 별도의 주제로 충분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4강 1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모으면 이렇습니다. ‘죄를알려면먼저행동만보아서는안됩니다. 그행동을낳고있는내안의사랑과목적을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 보탭니다. ‘그사랑을발견하는목적은자신을정죄하는데있는것이아니라, 잘못된사랑의질서를주님께서바로잡으실수있도록자유가운데악을죄로알고물리치는데있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공용복 선생의 ‘죄론’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상당히 깊은 대화를 시작합니다.
4강 2부
‘정욕’은처음부터악한것이아니다:창조된애정과타락한욕망,그리고사랑의질서
4강 1부에서 강사는 죄를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동에서 찾지 않고, 그 행동을 낳는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제 2부에서는 그 내면을 움직이는 ‘정욕’이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강의가 사용하는 ‘정욕’이라는 말의 범위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정욕’이라고 하면 성적인 욕망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 강의에서의 정욕은 훨씬 넓습니다. 강사는 그것을 크게 ‘애정’과 ‘욕망’으로 나누고, 애정에는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 등이 있으며, 욕망에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수면욕 등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욕’은 인간의 자연적 삶을 움직이는 광범위한 애정과 욕구를 가리키는 하나의 포괄적인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 강의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 하나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정욕자체가처음부터죄악된것은아니다’라고 봅니다. 인간에게 애정이 있고 음식에 대한 욕구가 있고, 이성에게 끌리는 마음이 있고,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곧 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유지하고 인간관계를 이루며 자연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신 기능입니다. 문제는 타락 이후 이 기능들이 본래의 질서를 잃고 ‘자기를만족시키는방향’으로 변질되었다는 데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이번 4강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을 놓치면 ‘핵심진리’의 죄론을 모든 자연적 욕구를 악하게 보는 금욕주의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대목에서 강사가 말하는 것은 ‘배고픔이죄다’, ‘남녀간의애정이죄다’, ‘부모와자녀가서로사랑하는것이죄다’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정상적인 기능이 타락을 통하여 방향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강의가 문제 삼는 것은 욕구의 ‘존재’보다 욕구의 ‘지배’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야 할 인간의 중심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능들이 이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만족시키는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연적인 애정과 욕구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쉬는 것, 가족을 사랑하는 것, 직업을 갖고 일하는 것, 재산을 소유하는 것,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런 것들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어떤 ‘질서’ 안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낮은 사랑이 높은 사랑을 섬기면 선한 질서 안에 있지만, 낮은 사랑이 높은 사랑 위로 올라가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면 질서가 전도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목적-원인-결과’의 질서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가장 안쪽에는 사람이 무엇을 궁극적으로 사랑하는가라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생각과 판단이 ‘원인’이 되며, 그것이 실제 행동이라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똑같이 돈을 버는 사람이라도 돈을 버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가족을 돌보고 맡겨진 일을 충실히 수행하며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재산을 얻는 것과, 재산 자체를 최고의 선으로 여기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 위에 서려는 것은 외적으로는 모두 ‘돈을버는행위’이지만 내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명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명예나 지위를 갖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그 지위를 통하여 더 큰 유용성을 수행하고 공동체를 섬기기 원한다면 명예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용성은 핑계가 되고 ‘내가높아지는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때 사람은 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존경을 이용하여 자기 proprium을 만족시키게 됩니다. 1부에서 강사가 자기 자신에게 적용했던 ‘말씀을전하면서도사람들에게인정받고칭찬받고싶은마음’이 바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핵심진리’가 말하는 ‘타락한정욕’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질서가전도된사랑’ 사이에는 상당히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적 기능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하지 않고, 그것이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상태를 문제 삼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보다 정교하게 ‘사랑들의질서’라는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사랑이 있으며, 그 사랑들은 서로 위아래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가장 높은 곳에는 주님 사랑이 있어야 하고, 그 아래에는 이웃 사랑이 있으며, 그 아래에서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봉사해야 합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도 그 자체로 완전히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랑을 섬기는 위치에 있을 때에는 유용한 기능을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사랑’을 무조건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돌보거나 좋아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신앙은 병적인 자기부정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을 돌보고, 건강을 지키고, 필요한 것을 얻고, 자신의 직업과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은 그 자체로 자기 사랑의 악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주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질서 안에 있다면 오히려 필요합니다. 문제는 ‘나’가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기 행복과 자기 영광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때 자기 사랑은 지옥적인 사랑으로 전도됩니다.
바로 여기서 ‘핵심진리’가 정욕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자기만족’이라는 표현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만족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선을 행하고 기뻐하는 만족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돕고 기뻐하는 만족도 있으며, 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느끼는 만족도 있습니다. 천국의 천사들에게도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천국의 기쁨은 자연계의 기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만족을느끼느냐’가 아니라 ‘무엇에서만족을느끼느냐’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결정적입니다.
가령 누군가 어려운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회복되는 것을 보며 기뻐합니다. 그 기쁨 자체는 악한 자기 만족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는 선을 행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내가이런일을했다는것을알아주었으면좋겠다’는 마음이 중심이 되고, 칭찬을 받지 못하면 섭섭하고, 다른 사람이 더 인정받으면 불편해진다면 그때 숨어 있던 다른 사랑이 드러납니다. 겉으로는 동일한 선행이지만 내적으로는 두 사랑이 서로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이 두 가지가 아주 깔끔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처음부터 순수한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만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도 인정받고 싶고, 봉사하면서도 감사받고 싶으며,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남은 이런 혼합된 동기 속에서 시작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가진 작은 선한 의도를 붙드시고,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안에 섞여 있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조금씩 드러내어 정결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내동기가100퍼센트순수하지않으니나는위선자다’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른 결론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혼합된 동기를 발견하는 것이 거듭남의 일부입니다. 어제까지는 ‘나는주님만을위해봉사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누군가 나를 인정하지 않자 화가 납니다. 그 순간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나를사랑하는것은맞지만, 그사랑안에아직사람에게인정받고싶은마음도섞여있구나.’ 이것을 보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 악을 물리치면서 선한 동기가 점점 더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이 점에서 ‘핵심진리’의 강한 자기 성찰은 매우 유익하면서도 동시에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끝없이 파헤쳐 ‘이것도정욕, 저것도정욕, 이것도자기만족’이라고만 하면 결국 사람은 자기 안에서 선한 것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자기 정죄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자기 성찰의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 절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선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에게로 돌이키게 하는 데 있습니다. 내가 내 힘으로 선해질 수 없음을 알게 될수록 ‘모든선은주님에게서온다’는 사실을 실제 삶에서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proprium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proprium을 매우 부정적으로 말하기 때문에 처음 읽는 독자는 ‘그렇다면인간에게자기라는것은없어져야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인격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아 자유롭게 자기 것처럼 행하게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때때로 말하는 ‘천적proprium’, 곧 주님에게서 받은 새로운 own의 신비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사랑하고 행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아는 상태입니다. 거듭남은 ‘나’가 사라지는 과정이 아니라, 거짓된 ‘나’에서 참된 ‘나’로 변화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강의에서 ‘정욕을죽인다’는 표현도 이러한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적 애정 자체를 죽인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죽이고, 부부간의 애정을 죽이고, 음식의 맛을 느끼는 기쁨을 없애고, 일을 성취하는 만족을 제거하는 것이 거듭남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애정들이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것은 애정 그 자체라기보다 그 애정을 지배하고 있는 자기중심적 질서입니다.
강사는 이것을 ‘우상’이라는 강한 표현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다른 것이 올라가면 그것이 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성경적으로도 매우 직관적입니다. 우상은 반드시 나무나 돌로 만든 신상일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더 의지하고, 그것을 잃으면 자기 존재 전체가 무너질 것처럼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실제로 마음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지배적사랑’이라는 개념으로 더욱 깊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수많은 애정이 있지만 그 모든 애정을 조직하고 방향을 결정하는 중심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가장 깊은 목적으로 삼으면 다른 자연적 사랑들이 그 아래에서 질서를 찾습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가장 높은 목적으로 삼으면 종교적 행위조차 그 사랑을 섬길 수 있습니다.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고, 설교도 하고, 헌금도 하면서 그 모든 것을 자기 명예와 자기 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는무엇을좋아하는가?’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가장사랑하는것은무엇인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보는 한 방법은 ‘무엇을잃을때내가가장크게흔들리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돈을 잃을 때인가, 명예를 잃을 때인가, 사람의 인정을 잃을 때인가,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인가, 가족에 대한 내 뜻이 좌절될 때인가. 이런 순간에 평소 감추어져 있던 지배적 사랑의 일부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강사가 정욕의 첫 번째 형태로 ‘혈육간의애정’을 다루기 시작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매우 깊고 자연스러운 사랑입니다. 그러나 강사는 마태복음 10장 37절, 곧 ‘아비나어미를나보다더사랑하는자는내게합당하지아니하고아들이나딸을나보다더사랑하는자도내게합당하지아니하다’는 말씀을 가져와, 가족 사랑조차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강의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순위입니다.
이 점에서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상당 부분 동의하면서 한 가지를 더 보탭니다. 혈육간의 사랑은 자연적 사랑이지만, 거듭나면서 그것이 영적 사랑으로 높아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내자녀니까’, ‘내부모니까’, ‘내가족이니까’ 사랑합니다. 이것은 자연적 혈연애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면서 ‘이사람이주님께속한한영혼이기때문에’, ‘그사람의영원한선을원하기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더해집니다. 그러면 혈연을 넘어서는 체어리티가 그 자연적 사랑 안으로 들어옵니다.
이 차이는 실제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자녀를 사랑한다면서 자녀의 잘못을 무조건 감싸는 것은 영적 사랑이 아닐 수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며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악의 기준을 바꾼다면 혈육간의 애정이 높은 사랑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랑의 자리를 빼앗은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의 영원한 선을 위해 때로는 바로잡아 주고, 부모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양심에 어긋나는 요구에는 따르지 않는다면 자연적 사랑이 영적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모나 자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인간적인 사랑을 파괴하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을 더욱 참된 사랑으로 만들라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면 결국 자녀를 ‘나의것’으로 사랑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를 주님의 사람으로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그의 영원한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애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애정의 ‘질’을 변화시킵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을 받아들이면서 같은 행동 안에도 전혀 다른 생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거듭난 뒤에도 사람은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음식도 즐깁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더 이상 삶의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더 높은 사랑을 섬기는 질서 안에 들어갑니다.
여기에서 이번 4강의 ‘정욕’이라는 용어를 독자는 특별히 조심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강의가 사용하는 넓은 의미의 ‘정욕’을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음란한욕망’과 동일시하면 강의 전체가 크게 왜곡됩니다. 이 강의에서 정욕은 인간의 자연적 애정과 욕망이라는 넓은 영역을 가리키며, 핵심 문제는 그것이 타락하여 ‘자기만족’과 결합하고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식욕, 성욕, 물욕, 명예욕 등의 설명 역시 ‘이욕구가존재하는것이죄인가?’보다 ‘이욕구가누구를섬기고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 사이의 작은 차이도 점점 보이기 시작합니다. ‘핵심진리’는 정욕을 ‘십자가에못박고’, ‘끊고’, ‘죽이는’ 언어를 강하게 사용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악한 사랑을 물리치는 싸움을 분명히 말하면서도 전체 구조를 ‘질서의회복’으로 설명하는 데 훨씬 강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 설명을 함께 놓으면 서로를 보완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핵심진리’의 언어는 악과 실제로 싸워야 한다는 긴장을 일깨우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은 그 싸움의 목적이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하는 데 있지 않고 주님 아래 바른 질서로 되돌리는 데 있음을 보여 줍니다.
결국 4강 2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욕이있다’는 사실보다 ‘정욕이어디에자리하고있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는 종의 자리에 있으면 그것은 자연적 삶을 풍성하게 하는 기능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인의 자리로 올라가면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자기에게로 끌어당깁니다. 바로 그때 자연적인 것이 육적인 것으로 전도되고, 선물로 주어진 것이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렌즈’로 이번 부분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거듭남은사랑을없애는것이아니라사랑의질서를바로잡는것입니다.’ 인간에게서 애정과 욕망이 사라지는 것이 천국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흘러오는 사랑이 가장 깊은 중심을 차지하고, 그 사랑 아래 이웃 사랑과 자연적 애정들이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는 것이 천국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가 지금 이 땅에서부터 사람의 내면에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 거듭남입니다.
이제 강의는 여기서 한층 더 구체적으로 들어갑니다. 혈육간의 애정을 비롯한 여러 정욕이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하나님보다 앞자리를 차지하는지, 그리고 주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과 ‘사람이떡으로만살것이아니요’라는 말씀을 통하여 식욕과 인간의 육적 요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정욕을십자가에못박는다’는 강한 표현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이 지점부터는 ‘절제’와 ‘억압’, ‘시험’과 ‘거듭남’을 구별하는 일이 중요해집니다. 그것을 4강 3부에서 충분히 살펴보겠습니다.
4강 3부
‘정욕을십자가에못박는다’는것 : 억압이아니라주님아래로돌아오는것
4강은 ‘정욕’을 인간에게 처음부터 악하게 주어진 어떤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애정과 욕망이 타락 이후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것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강의는 자연스럽게 매우 실천적인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렇다면이렇게타락한정욕을어떻게해야하는가?’입니다. 여기서 강사가 반복하여 사용하는 표현이 ‘정욕을십자가에못박는다’, ‘끊는다’, ‘죽인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의 ‘그리스도예수의사람들은육체와함께그정욕과탐심을십자가에못박았느니라’는 말씀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이 표현은 강렬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의렌즈’로 그 의미를 조금 세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있는 모든 욕구와 애정을 없애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거듭남은 곧 자기 억압이나 금욕생활이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실제로 겨냥하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좋아하는마음’ 자체가 아닙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식욕도 있고, 성욕도 있고, 가족에 대한 애정도 있으며, 친구와 사물에 대한 애정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능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나 사람을 지배하기 시작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정욕을십자가에못박는다’는 말을 이 강의 자체의 앞뒤 맥락에서 읽어도, 인간의 자연성을 파괴한다는 뜻보다는 하나님보다 앞선 자리를 차지한 욕망의 지배를 끝낸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깊은 곳에서 만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악은 생각으로 ‘악이구나’ 하고 아는 것만으로 제거되지 않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악을 죄로 알고 피해야 합니다. 그것도 단지 사회적 평판이 나빠질까 봐, 처벌받을까 봐, 건강을 해칠까 봐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주님을거스르는것이기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회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정욕을십자가에못박는다’는 강의의 강한 언어에는 단순히 악을 이해하는 데 머물지 말고 실제로 싸우라는 중요한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악을행하지않는것’과 ‘악한애정자체가사라진것’은 같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고 해서 그 욕망의 뿌리까지 이미 제거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올라오는데도 말씀 때문에 하지 않는 단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때 사람 안에서는 실제 전투가 일어납니다. 한쪽에서는 오래된 proprium의 애정이 끌어당기고, 다른 쪽에서는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그것은하지말라’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시험은 바로 이런 내적 충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초기에는 ‘억제’가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화가 난다고 즉시 화를 쏟아내지 않고, 욕심이 생긴다고 그대로 따라가지 않으며, 음란한 욕망이 일어난다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고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을 조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최종 목적이 아닙니다. 계속 이를 악물고 평생 욕망을 눌러 놓는 상태가 천국적인 상태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더 깊은 일을 하십니다. 인간이 악을 반복해서 죄로 알고 물리칠 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악에 대한 애정 자체가 약해지고 반대로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애정이 강해지도록 하십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십자가에못박는다’는 말이 훨씬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하고싶지만하지않는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예전에는하고싶었던것을이제는원하지않는것’으로 변화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을행하는것이기쁜것’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단순한 행동 교정과 거듭남의 차이입니다. 행동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문제를 주님의 광야 시험과 연결합니다. 주님께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뒤 주리셨을 때 시험하는 자가 ‘네가만일하나님의아들이어든명하여이돌들로떡덩이가되게하라’고 했고, 주님께서는 ‘사람이떡으로만살것이아니요하나님의입으로부터나오는모든말씀으로살것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강의에서는 이것을 식욕이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는 예로 읽습니다. 육체는 떡을 요구하지만 인간의 생명은 떡보다 더 높은 곳, 곧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 적용에는 분명한 실천적 의미가 있습니다. 배고픔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주님께서도 ‘주리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육체적 필요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 필요에 지배당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음식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음식이 삶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성욕은 결혼과 인류의 지속에 관계된 자연적 기능이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을 자기 만족의 대상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전도될 수 있습니다. 휴식은 몸과 마음의 회복을 위해 필요하지만, 쉼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어 맡겨진 유용성을 외면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재물 역시 생활과 유용성을 위해 필요하지만, 소유 그 자체가 최고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시 ‘욕구가있느냐없느냐’가 아니라 ‘그욕구가어떤질서아래있느냐’입니다.
다만 주님의 광야 시험을 ‘식욕을절제하신사건’ 정도로만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시험들은 한 인간이 자신의 육체적 욕망을 절제한 사건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계로부터 취하신 유전적 인간성을 통하여 지옥들과 싸우셨고, 계속되는 시험과 승리를 통해 그 인간성을 신성하게 하시는 영화의 과정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의 시험 역시 지옥 전체와의 신적 전투라는 깊은 차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을떡으로만들라’는 시험에도 말씀의 속뜻에서는 훨씬 깊은 아르카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강의의 실천적 적용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층위를 구별하면 됩니다. 문자적 차원에서는 ‘육체의요구가하나님의말씀보다우선해서는안된다’는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의 속뜻에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신적 전투와 영화라는 훨씬 깊은 실재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는 전자의 적용을 폐기하기보다 후자의 깊이를 더해 줍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한 가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정욕을 ‘죽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강한 의지력을 가진 사람은 금식할 수도 있고, 술을 끊을 수도 있으며, 성적 욕구를 억제할 수도 있고, 돈과 명예를 포기하고 매우 검소하게 살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도 상당한 수준의 금욕을 이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 자체가 거듭남의 증거일까요?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매우 신중합니다. 외적인 절제만으로는 사람의 내적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을 버린 것처럼 보이면서도 ‘나는세상을버린사람’이라는 자기 의를 사랑할 수 있고, 명예를 포기하면서도 ‘나는명예를초월한영적인사람’이라는 더 은밀한 명예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심지어 겸손 자체를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자연적 욕망 하나를 억제했는데 그 에너지가 더 깊은 proprium으로 옮겨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악과 싸우는 방식은 매우 독특한 긴장을 갖습니다. 사람은 악과 싸울 때 ‘마치자기힘으로하는것처럼’ 싸워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주님께서알아서제거하시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로 결단하고, 피하고, 거절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싸움의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유와 인플럭스가 함께 작용하는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싸우지만 승리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점은 ‘핵심진리’가 강조하는 ‘끊어라’, ‘죽여라’, ‘십자가에못박으라’는 언어에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그 말을 ‘내의지력으로나를정결하게만들라’고 받아들이면 신앙생활은 엄청난 자기 프로젝트가 됩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은 자기 의에 빠지고 실패한 사람은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주시는능력으로, 마치내가하는것처럼악을물리친다’고 이해하면 인간의 책임과 주님의 역사가 동시에 살아납니다.
바로 여기에서 ‘시험’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시험은 단순히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얼마나 약한지를 알게 되는 자리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나는이것쯤이길수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시험이 오면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경험합니다. 그때 사람은 proprium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내려놓고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러므로 시험의 목적은 강한 ‘자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새로운 사람을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AC의 거듭남 이야기와도 아주 깊이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악한 영들과 선한 천사들의 인플럭스 사이에서 실제적인 영적 싸움을 경험한다고 설명합니다. 악한 영들은 인간의 악과 거짓을 자극하고, 주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해 선과 진리를 흘려보내십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에게는 그것이 ‘내생각’, ‘내욕망’, ‘내갈등’처럼 느껴집니다. 바로 그 가운데 자유가 보존됩니다. 인간은 어느 쪽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하며, 반복되는 선택을 통해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어 갑니다.
그래서 ‘정욕을십자가에못박는다’는 것은 단 한 번의 극적인 결단으로 모든 욕망이 사라지는 사건이라고 보기보다, 긴 거듭남의 과정으로 보는 편이 좋습니다. 오늘 하나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서 싸우고, 얼마 뒤 그보다 더 깊은 동기를 발견하고 또 싸우며, 어느 정도 정결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더 은밀한 자기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때로 평생 계속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 생애 전체에 걸친 일이며, 그 깊이는 인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여기에서 ‘완전’이나 ‘성화’를 이해하는 방식에서도 공용복 선생의 전통과 스베덴보리 사이에 앞으로 매우 중요한 대화가 필요해집니다. ‘죄성을완전히제거한다’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두 체계 사이의 거리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유전적 악 자체가 마치 어떤 물질처럼 뽑혀 없어져 다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악은 주님에 의해 억제되고 사람이 그 악에서 돌이켜 선을 사랑하도록 변화됩니다. 그래서 천국의 천사들도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기 proprium만 놓고 보면 아무 선도 없음을 압니다. 바로 그 인정 때문에 더욱 자유롭게 주님의 선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화의 가장 깊은 표지는 ‘나는이제악이없는사람이다’라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오히려 ‘내게있는모든선은주님에게서온다’는 내적 인식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점입니다. 거듭날수록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 위대한 존재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욱 깊이 압니다. 동시에 그것이 비참함이나 자기혐오로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에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롭고 평안해집니다.
이렇게 보면 ‘정욕을십자가에못박는다’는 표현의 궁극적인 방향도 조금 달리 들립니다. 그것은 ‘나는이제아무욕망도느끼지않는다’는 상태가 아니라 ‘더이상그욕망을주인으로섬기지않는다’는 상태입니다. 배고픔은 있지만 음식이 주인은 아닙니다. 재산은 있지만 재물이 주인은 아닙니다. 가족을 깊이 사랑하지만 가족이 주님보다 위에 있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이 기쁠 수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다고 해서 선을 행하는 이유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자연적 삶은 그대로 존재하지만 그 위에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십자가’의 실천적 의미를 깊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인간성을 없애는 도구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지배가 죽는 자리입니다.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요구, 내 뜻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요구, 내가 인정받아야 한다는 요구, 내가 소유해야 한다는 요구가 주님 앞에서 내려놓아지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사랑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악을 끊는 것 뒤에는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이 와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핵심진리’의 강한 금욕적 언어를 굳이 약화시킬 필요도 없고, 반대로 문자 그대로 자연적 욕망의 제거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는 그 언어를 ‘사랑의질서회복’이라는 더 큰 틀 안에 놓아 줍니다. 정욕과 싸우십시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적 생명 자체와 싸우지는 마십시오. 악을 끊으십시오. 그러나 선한 애정까지 잘라내지는 마십시오. 자기 사랑의 지배를 내려놓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자기 자신을 돌보는 책임까지 버리지는 마십시오. 핵심은 무엇을 없애느냐보다 ‘누가주인인가’입니다.
그래서 4강 3부의 중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습니다. ‘정욕을십자가에못박는다는것은인간의모든애정과욕망을죽이는것이아니라, 그것들이주님의자리를차지하지못하도록그지배를끝내는것입니다.’ 그리고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이 싸움은 단순한 억압에서 사랑의 변화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하고싶지만말씀때문에하지않는사람’이었다면, 나중에는 ‘주님께서기뻐하시는것을나도기뻐하는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제 강의는 이 원리를 혈육간의 애정과 가족 관계에 더욱 구체적으로 적용하면서, ‘아비나어미를나보다더사랑하는자’, ‘자기부모와처자와형제자매와더욱이자기목숨까지미워하지아니하면’이라는 복음서의 매우 강한 말씀을 다룹니다. 그리고 이 대목을 ‘대환란’이라는 공용복 선생의 독특한 종말론적 틀과 연결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가 상당히 가까이 가다가 다시 분명하게 갈라지는 중요한 지점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4강 4부에서 충분히 살펴보겠습니다.
앞선 4강 2부와 3부에서 강사는 ‘정욕’이 처음부터 악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연적 애정과 욕망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자기중심적으로 변질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욕을 ‘십자가에못박는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욕구를 억압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는 데까지 왔습니다. 이제 강의는 그 원리를 가장 민감한 영역 가운데 하나인 ‘혈육간의애정’에 적용합니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형제자매처럼 인간에게 가장 깊고 자연스러운 사랑도 주님보다 앞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마태복음 10장 37절의 ‘아비나어미를나보다더사랑하는자는내게합당하지아니하고아들이나딸을나보다더사랑하는자도내게합당하지아니하며’라는 말씀과 누가복음 14장 26절의 매우 강한 말씀을 가져옵니다. 강의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혈육간의 애정 자체가 악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귀한 사랑이라도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하면 영적 질서가 뒤집힌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자칫 오해하기 쉽습니다. ‘부모를사랑하지말라’, ‘자녀에게정을떼라’, ‘가족을멀리할수록영적이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복음의 방향 자체가 이상해집니다. 예수께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폐기하신 것도 아니고, 자녀와 배우자를 냉정하게 대하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더사랑하는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이 주님 사랑과 충돌할 때 무엇이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랑의 양을 줄이라는 명령이라기보다 사랑의 질서를 묻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매우 섬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혈연에 기초한 사랑은 자연적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가 부모를 사랑하는 것은 창조 질서 안에 있는 매우 중요한 애정입니다. 그러나 자연적 사랑이라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영적 사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자식이기때문에’ 사랑하는 것과 ‘그사람의선과영원한생명을바라기때문에’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자연적 혈연애만으로도 가능하지만, 후자에는 체어리티가 들어옵니다. 거듭남은 전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전자 안에 후자가 들어오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녀가 악을 행해도 무조건 감싸 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부모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반드시 선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녀의 악을 도와주고 그 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결국 그 자녀의 영원한 선을 해친다면, 사랑처럼 보이는 애정 안에 소유욕과 자기애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내자식이니까’라는 이유로 선과 진리의 기준까지 바꾸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녀가 당장은 싫어하더라도 그 사람의 참된 선을 위해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면서도 끝까지 사랑한다면 자연적 혈연애 안으로 영적 사랑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가족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을 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족을 더 바르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을 ‘내것’으로 사랑하는 데서 주님께 속한 한 사람으로 사랑하는 데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도, 배우자도, 자녀도 궁극적으로 나의 소유가 아닙니다. 모두 주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도록 잠시 관계 안에 맡겨진 것입니다. 이 질서가 세워지면 가족에 대한 사랑은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려는 사랑에서 자유로워지고, 상대의 진정한 선을 바라는 사랑으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천국관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지상에서의 혈연관계 자체가 영원한 관계의 최종 토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계에서는 사람의 내적 사랑과 상태가 드러나며, 같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결합합니다. 그렇다고 지상의 부모와 자녀, 부부의 사랑이 무의미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의 관계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을 돌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중요한 학교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혈연 자체가 영원한 결합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 안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었느냐가 중요합니다.
따라서 ‘혈육간의애정을끊는다’는 강의의 표현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혈육이라는이유만으로선과진리보다앞세우는자기중심적애착을끊는다’고 이해하면 훨씬 안전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자연적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사랑을 영적인 것 아래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4강 전체에서 계속 발견되는 중요한 보완입니다. ‘핵심진리’에서는 ‘끊는다’, ‘죽인다’, ‘십자가에못박는다’는 전투적 표현이 강하고, 스베덴보리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싸움인지를 ‘질서’라는 언어로 보다 세밀하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부분부터 강의는 가족애의 문제를 종말론과 연결하기 시작합니다. 강사는 현재의 ‘교회시대’에는 사람이 자원하여 말씀에 순종하면서 혈육간의 애정과 여러 정욕을 다룰 수 있지만, 앞으로 ‘7년대환란’, 특히 ‘후3년반’과 같은 극심한 환경에서는 사람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유와 가족과 자기 생명까지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취지로 설명합니다. 그 과정에서 강의는 ‘반강제적으로’ 행실을 닦게 되는 상황을 말하고, 적그리스도의 통치와 대환란을 실제 미래 역사 속에서 일어날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의렌즈’와 ‘핵심진리’ 사이의 차이가 상당히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작은 용어 차이가 아니라 말씀을 읽는 기본 방식의 차이와 관계됩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에서는 다니엘과 요한계시록의 예언을 실제 역사적 미래 사건의 시간표와 연결하는 종말론적 틀이 매우 중요합니다. 앞서 보여 주신 ‘다니엘서와요한계시록에나타난각시대비교표’에서도 이러한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교회시대’, ‘대환란’, ‘천년그리스도왕국’, ‘새하늘과새땅’ 등을 역사적 순서 안에 배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을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특히 ‘마지막때’, ‘심판’, ‘새하늘과새땅’은 자연계 우주의 물리적 파괴와 재건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상태와 그 종결, 심판, 그리고 새 교회의 출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봅니다. ‘전쟁’도 단순히 미래의 군사전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의 영적 전투를 나타내며, 숫자와 기간 역시 말씀의 상응에 따라 영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7년’이나 ‘3년반’을 미래 달력의 정확한 기간으로 놓고 종말의 시간표를 구성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의 계시록 해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존중하면서 분명하게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핵심진리’가 종말의 환난을 강조하는 목적 자체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금 주어진 은혜의 때에 자기 신앙을 점검하고, 세상과 육에 붙들리지 말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주님을 선택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강력한 목회적 권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면의 영적 핵심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그 메시지를 미래에 일어날 특정한 7년의 정치·사회적 재난에만 묶어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시험받고, 기존의 종교적 외관이 무너지고,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드러나는 영적 상태로 더 깊이 읽습니다.
특히 ‘반강제적으로정결하게된다’는 개념은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에서는 매우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데 ‘자유’가 본질적이기 때문입니다. 강제된 것은 인간의 내적 생명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외부의 공포 때문에 악을 하지 않는 것과 악 자체를 죄로 미워하여 하지 않는 것은 영적으로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감옥에 있기 때문에 범죄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악한 사랑이 제거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대환란 같은 극단적인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성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도 어떤 사람은 더욱 완고해지고, 어떤 사람은 절망하며, 어떤 사람은 주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고난 자체에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신비한 자동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 속에서 인간이 자유롭게 무엇을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주님께서는 환난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섭리 가운데 선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지만, 환난이 사람의 자유를 대신하여 거듭남을 만들어 내지는 않습니다.
이 점은 시험과 강제를 구별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시험은 매우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이 자기 자유가 사라진 것처럼 느낄 만큼 내적인 압박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자유가 보존됩니다. 선과 진리를 붙들 것인지, 악과 거짓에 굴복할 것인지의 싸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지켜 주십니다. 자유가 없으면 사랑도 없고, 사랑이 없으면 어떤 것도 인간 자신의 생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자원하여정욕을끊지않으면나중에환난을통해강제로끊게된다’는 식의 설명은 목회적으로는 강한 경각심을 줄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지금자유가운데주님의진리를받아들이고악과싸우는것이중요하며, 인간이그것을계속거절할수록자기안의악은더욱굳어질수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환난은 그 사람의 상태를 드러낼 수 있고, 거짓된 의존을 흔들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을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목회적 차이를 낳습니다. 신앙생활의 동기가 ‘앞으로대환란이오니까지금준비해야한다’는 두려움에만 놓이면, 신앙의 중심이 자칫 미래의 재난으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은 ‘오늘나는무엇을사랑하고있는가?’입니다. 대환란이 내일 오든 오지 않든, 오늘 내 안에서 자기 사랑이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세상의 종말보다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내 안에서 선과 진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종말론도 갑자기 우리의 현재 삶 가까이로 옵니다. ‘마지막때’는 단순히 먼 미래의 세계사적 사건만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오래된 영적 상태가 끝나고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것과도 상응적으로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의지하던 거짓이 무너지고, 내가 감추어 두었던 악이 드러나며, 주님께서 새로운 진리와 선을 세우시는 과정에는 작은 의미의 심판과 새 창조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을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을 개인 심리로 환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무엇보다 교회의 보편적 영적 상태와 마지막 심판, 새 교회의 형성을 다룹니다. 다만 그 동일한 신적 질서가 개인의 거듭남에도 반영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다시 가족애의 문제로 돌아오면 강의가 왜 이 두 주제를 연결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극단적인 상황은 ‘내가정말무엇을가장사랑하는가’를 드러냅니다. 평상시에는 ‘나는주님을가장사랑한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족과 재산과 명예와 안전과 주님의 진리가 충돌하는 순간이 오면 사랑의 질서가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대환란의 세부 시간표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강의가 던지는 실존적인 질문은 그대로 남습니다. ‘나는정말주님을가장사랑하는가?’
그러나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가족에게 냉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사랑할수록 사람은 가족을 더욱 선하게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나는하나님을사랑하기때문에가족은중요하지않다’며 배우자와 자녀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다면, 그것은 높은 사랑이 아니라 종교적 언어를 입은 proprium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닙니다. 참된 주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맡겨진 이웃 가운데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가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위하여가족을버린다’는 식의 극단적인 영성을 경계하게 합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관계를 충실하게 돌보는 것도 유용성(use)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가족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는 것과 가족에 대한 책임을 버리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하나는 사랑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의 의무를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자기부인’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자신은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위험이 생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자기부모와처자와형제와자매와더욱이자기목숨까지미워하지아니하면’이라는 강한 말씀도 성경 전체의 빛 아래에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를 감정적 증오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배우자와 자녀를 실제로 미워하라는 뜻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과 충돌하는 경우 어떤 자연적 애정도 최종적인 주인이 될 수 없다는 철저한 우선성을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말하면 모든 낮은 사랑이 가장 높은 사랑 아래에서 질서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서 목사님께서 보여 주신 ‘영적성장에대한도표’를 생각하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핵심진리’는 출애굽-광야-가나안이라는 성경의 역사를 인간의 영적 성장과 연결합니다. 그렇다면 가족, 재산, 명예, 자기 생명에 대한 애착이 흔들리는 경험은 일종의 ‘광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평소 의지하던 것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광야의 목적 역시 단순한 박탈이 아닙니다. 옛것을 빼앗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게서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광야 뒤에는 가나안이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뒤에는 부활이 있어야 하고, 악을 버린 자리에는 선한 사랑이 들어와야 합니다.
결국 4강에서 반복되는 ‘끊는다’는 언어를 우리는 계속 이 방향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혈육간의 애정을 끊는다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 대한 자기중심적 소유욕을 끊는 것입니다. 식욕을 끊는다는 것은 음식을 즐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음식의 지배를 끊는 것입니다. 물욕을 끊는다는 것은 재산을 전혀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명예욕을 끊는다는 것은 모든 책임과 직분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을 끊는 것입니다. 결국 끊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의 기능이 아니라 그 기능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놓은 ‘전도된질서’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proprium이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인간의 proprium은 무엇이든 ‘나의것’으로 붙잡으려 합니다. ‘내자녀’, ‘내재산’, ‘내명예’, ‘내사역’, 심지어 ‘내신앙’, ‘내성화’, ‘내영성’까지 붙잡습니다. 거듭남은 이 모든 것을 물리적으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자녀도 주님의 것이고, 재산도 주님께서 유용성을 위해 맡기신 것이며, 사역도 주님의 것이고, 진리도 내 지혜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인식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맡겨진 것을 더 충실하게 돌볼 수 있습니다.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4강 4부의 중심을 ‘스베덴보리의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가족보다더사랑한다는것은가족을덜사랑하는것이아니라, 가족을내것으로소유하려는사랑에서벗어나주님안에서더욱참되게사랑하는것입니다.’ 그리고 ‘환난’의 핵심 역시 고난 자체가 사람을 정결하게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환난 속에서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지가 드러나고 그 자유 가운데 주님을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번 부분에서 ‘핵심진리’와 스베덴보리는 한편으로 상당히 가까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주님보다높은자리를차지한자연적애정은내려와야한다’는 데서는 깊이 만납니다. 그러나 미래의 문자적 ‘7년대환란’과 ‘후3년반’을 통해 사람이 반강제적으로 정결해진다는 종말론적 틀에서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이 차이를 어느 한쪽을 조롱하거나 재단하는 방식으로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이 그 표현을 통해 무엇을 경고하려 했는지를 먼저 충분히 듣고, 그 다음 스베덴보리는 같은 문제를 자유와 사랑, 영적 심판과 말씀의 속뜻이라는 관점에서 어떻게 다르게 설명하는지를 보여 주면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음부터 지키려 했던 ‘스베덴보리의렌즈’의 역할일 것입니다.
그리고 4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혈육간의 애정에서 다른 정욕들, 특히 인간의 육체적 욕망과 자기 만족의 문제로 시선이 이동하면서 ‘죄성’과 ‘정욕’의 관계가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동시에 ‘악을끊는것’과 ‘성화된사람이되는것’이 과연 같은 것인가라는 더 깊은 질문도 생깁니다. 이 부분은 4강의 죄론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므로, 다음 4강 5부에서 충분히 이어가겠습니다.
4강 5부
‘죄성’과 ‘정욕’은어떻게결합하는가 : 욕망의문제가아니라그욕망을지배하는생명의문제
4강은 이제 한층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강사는 ‘정욕’을 혈육간의 애정, 남녀간의 애정, 친구간의 애정, 사물에 대한 애정과 식욕·성욕·물욕·명예욕·수면욕 등으로 넓게 설명하면서, 이것들이 본래부터 죄악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연적 삶을 위해 주신 기능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어떻게 죄의 통로가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사는 ‘죄성’과 ‘정욕’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을 이 둘이 결합한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이 구별은 이번 4강의 죄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강사의 설명을 먼저 그대로 따라가 보면, 정욕은 인간에게 본래 주어진 자연적 기능입니다. 먹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식욕이 있고, 인류가 이어지도록 남녀간의 애정과 성적 기능이 있으며, 가족 공동체를 이루도록 혈육간의 애정이 있고, 자연계에서 살아가도록 사물과 소유에 대한 관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강사는 ‘죄성’은 이와 다른 것으로 설명합니다. 죄성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며, 마귀의 죄악된 성질이 인간에게 들어와 하나님께서 주신 정욕과 결합함으로써 그 정욕을 변질시켰다고 봅니다. 그 결과 본래 생명을 보존하고 질서를 이루기 위한 기능이었던 정욕이 ‘자기만족’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설명에서 반드시 붙들어야 할 좋은 통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된인간성’과 ‘타락한인간성’을 구별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몸이 악해서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감정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도 아니며, 무엇인가를 좋아하고 원하는 능력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몸과 자연적 욕구 자체를 죄악시하면 구원은 자연스럽게 ‘몸에서벗어나는것’, ‘감정을없애는것’, ‘욕구를느끼지않는것’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창조관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을 처음부터 악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창조된 것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자기중심적으로 사용되는 데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렌즈’와 상당히 가까워집니다. 스베덴보리도 인간의 자연적 차원 자체를 악으로 보지 않습니다. 몸은 영혼의 감옥이 아니며 자연계의 삶도 버려야 할 저급한 실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연적인 것은 더 높은 영적인 것을 받아 표현하는 최종적인 그릇입니다. 그래서 거듭남도 자연적인 것을 폐기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에 순종하도록 질서를 바로잡는 과정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자기만을 위해 독립적으로 살려고 할 때 문제가 생기며, 속사람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을 실제 삶으로 표현할 때 자연적인 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자리가 됩니다.
다만 ‘죄성은마귀의것이인간안으로들어와정욕과결합한것이다’라는 설명에서는 스베덴보리와 조금 다른 언어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어떤 악한 ‘물질’이나 ‘성질’이 마귀에게서 인간 안으로 옮겨 들어온 것처럼 이해한다면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인간 안에 독립적인 실체처럼 주입되는 어떤 물질이 아닙니다. 인간에게는 영계로부터 끊임없는 인플럭스가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하여, 악과 거짓은 지옥으로부터 흘러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가운데 자유를 가지고 자신에게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며, 자기가 사랑하여 받아들인 것을 자기 것으로 삼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귀가내안에죄성을집어넣었기때문에내가이렇게되었다’고만 말하면 자칫 악의 책임을 외부로 돌릴 여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악한 인플럭스가 지옥에서 온다고 하면서도 인간의 책임을 결코 없애지 않습니다. 악이 밖에서 유입된다는 것과 내가 그것을 자유 가운데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동시에 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고 그것을 반복하여 행하면 그 악은 그의 삶에 습관으로 자리 잡고, 마침내 그의 의지와 결합합니다. 그때 그는 ‘악이들어왔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그것을 받아들여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으면서 계속 만나게 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에게서 선한 것은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고, 악한 것 역시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독립적인 생명이 아니라 지옥으로부터 유입됩니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것들이 모두 ‘내것’처럼 느껴집니다. ‘내가생각한다’, ‘내가원한다’, ‘내가사랑한다’고 느낍니다. 이 ‘마치자기것처럼’ 느끼는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인간일 수 없고, 거듭남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자유 안에서 무엇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죄성과정욕의결합’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바꾸어 표현한다면, 자연적 애정과 욕구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식욕 자체가 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식욕이 절제되지 않고 오직 자기 쾌락만을 목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재물을 얻는 능력이 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이 유용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우월감과 안전과 지배의 궁극적인 근거가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기쁠 수 있지만, 인정받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면 진리조차 사람의 박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강사가 반복하는 ‘자기만족’이라는 말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그러나 2부에서 살펴보았듯 모든 만족을 악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선을 행한 뒤 느끼는 기쁨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었을 때의 기쁨도 있으며, 맡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했을 때 느끼는 만족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은 기쁨이 없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에서 나오는 기쁨이 충만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만족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사랑하기때문에기쁜가’입니다.
이것은 죄를 분별하는 데 아주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고 그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기쁩니다. 그 기쁨이 곧 자기중심적인 정욕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에는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에게 감사하지 않자 갑자기 화가 나고, ‘내가너에게얼마나해주었는데’라는 마음이 올라온다면 그 순간 내 선행 안에 섞여 있던 다른 목적 하나가 드러납니다. 나는 그 사람의 선만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그 사람에게서 인정과 보답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행한 선을 전부 거짓이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의 동기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흔히 혼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과 악이 처음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서 ‘나는순수한선으로이것을했다’거나 ‘전부악한동기였다’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경우보다, 선한 애정과 자기 사랑이 섞여 있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혼합된 상태에서 인간을 이끌어 가십니다.
예를 들어 목회자가 말씀을 전합니다. 정말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전합니다. 동시에 설교를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자의 사랑까지 가짜였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어느 날 후자의 동기를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사람들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설교를 더 칭찬하거나,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때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때 비로소 ‘아, 내안에이것도있었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바로 그 발견이 회개의 재료가 됩니다.
그래서 자기 성찰은 자신에게서 악을 발견하는 작업이지만, 자기 자신을 끝없이 의심하는 작업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이것을좋아하니정욕인가? 이것을먹고기쁘니육적인가? 가족을사랑하니혈육의정에빠진것인가? 칭찬을받고기쁘니내모든사역이거짓이었는가?’ 하는 식으로 가면 영적 삶은 자유를 잃고 끊임없는 자기검열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그렇게 인간을 자기 내면에 갇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악을 발견하면 그것을 주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고 실제로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운 뒤, 다시 주님과 이웃을 향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성과정욕을찾아낸다’는 강의의 요청을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을 수 있습니다. 모든 감정의 밑바닥을 끝없이 파헤쳐 숨은 죄를 찾아내라는 뜻이라기보다, 실제 생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악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내가 계속해서 사람을 깎아내리는가, 인정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하는가, 돈 때문에 진리를 양보하는가, 가족의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가, 성적 욕망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인격이 아니라 대상으로 보는가, 분노 때문에 사람을 해치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인 악을 주님 앞에서 다루는 것이 회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회개를 매우 실제적인 생활의 문제로 다루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내적 악을 한꺼번에 볼 수도 없고, 그것을 모두 자기 힘으로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하나씩 드러내십니다. 사람이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싸우면 그 싸움을 통하여 더 깊은 내면이 열립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양파 껍질을 한꺼번에 벗기는 것처럼 일시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상태에서 상태로 진행됩니다.
이것을 ‘리메인스’와 연결해서 보면 더욱 깊어집니다. AC에서 우리가 계속 만나게 되는 리메인스는 주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인간 안에 보존하시는 선과 진리의 상태들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악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곳에 보존해 두신 선과 진리를 시험과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죄성과 정욕을 발견했다고 해서 ‘내안에는악밖에없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AC의 인간 이해와 맞지 않습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온 것은 악하지만, 주님께서 인간 안에 심고 보존하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새로운 생명을 위한 토대가 됩니다.
이 차이는 죄론의 분위기를 크게 바꿉니다. 자기 안의 악을 보는 일은 분명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발견의 배후에는 이미 주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악을 보여 주시는 것은 정죄하여 버리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건져내시기 위해서입니다.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어둠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안의 어둠을 더 선명하게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영적으로 퇴보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진리의 빛 아래 드러나기 시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죄성’이라는 말도 조금 조심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죄성을 인간 존재의 본질 그 자체처럼 이해하면 ‘나는존재자체가악하다’는 결론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인간은 악 그 자체가 아닙니다.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온 존재이지만, 동시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생명을 받고 있으며 거듭날 수 있도록 자유와 이성을 부여받은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은 악한 존재를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악의 지배에서 건져내어 새로운 의지와 이해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성을죽인다’는 표현도 인간의 인격이나 자아 자체를 파괴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인간이 ‘나에게서선이나온다’, ‘내지혜로진리를안다’, ‘내가나의주인이다’라고 여기는 proprium의 지배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proprium의 지배가 내려갈수록 인간은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더 참된 개성을 갖게 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지만 서로 똑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각각의 애정과 유용성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합니다. 주님에게 가까워질수록 인간은 획일화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고유한 모습을 더 온전히 드러냅니다.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죄론이 가진 강한 ‘자기부인’의 언어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이해는 매우 흥미롭게 대화할 수 있습니다. 공용복 선생의 전승은 인간 안의 죄성과 정욕을 철저히 찾아내어 끊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촉구합니다. 그 강점은 신앙을 지식이나 교리적 동의에 머물지 않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 삶이 변해야 하고, 숨은 욕망과 싸워야 하며, 하나님보다 앞선 것이 있다면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진지한 성화의 요청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 ‘그러나누가그것을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던집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기 죄성을 제거하여 마침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자유 가운데 악을 물리칠 때 실제로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후자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싸워야 하지만 승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모든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균형이 무너지면 성화는 쉽게 자기 의가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악이 물러난 자리는 반드시 선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탐욕을 끊었는데 체어리티가 생기지 않았다면 아직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아닙니다. 음란을 끊었는데 결혼의 거룩함과 상대방을 인격으로 존중하는 사랑이 생기지 않았다면 역시 충분하지 않습니다. 명예욕을 끊었는데 유용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빈자리만 생긴 것입니다. 혈육에 대한 소유욕을 끊었는데 가족의 영원한 선을 바라는 사랑이 생기지 않았다면 사랑 자체가 메말라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악을제거하는과정’인 동시에 ‘선이심어지는과정’입니다. 둘은 함께 갑니다. 거짓이 제거되는 만큼 진리가 자리를 잡고, 악한 애정이 물러나는 만큼 선한 애정이 살아납니다. 이것이 단순한 금욕과 거듭남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금욕은 ‘하지않는다’에서 끝날 수 있지만 거듭남은 ‘사랑한다’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여기서 4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강사가 죄론을 공부하는 목적을 ‘선과악, 빛과어둠, 영성과육성, 영적행실과육적행실을분별하고철저히자기성찰하여회개생활을하기위한것’이라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죄론의 목적은 죄에 관한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서 무엇이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리고 실제 삶에서 그 질서를 바꾸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그 변화의 가장 깊은 곳에는 ‘지배적사랑’의 변화가 있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향해 살아갑니다. 생각은 그 사랑을 섬기고, 지식도 그 사랑을 섬기며, 심지어 종교도 그 사랑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자기 사랑이 지배적이면 성경 지식마저 자기 우월감을 위해 사용할 수 있고,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가 지배적이면 자연적 재산과 능력과 지위까지 이웃의 유용성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궁극적인 질문은 ‘내게욕망이있는가없는가?’가 아니라 ‘내생명의중심에서무엇이나를움직이고있는가?’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성’과 ‘정욕의결합’이라는 이번 강의의 설명을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조금 더 깊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애정들이 proprium의 지배 아래 들어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섬기는 것이 타락의 질서이며, 거듭남은 그 자연적 애정들이 다시 속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같은 식욕, 같은 재산, 같은 가족, 같은 직업, 같은 재능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움직이는 중심 사랑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목적은 인간을 ‘욕망없는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사람에게도 애정이 있고 열망이 있으며 기쁨이 있습니다. 오히려 지상에서보다 훨씬 강하고 순수합니다. 다만 그들은 자기만을 위해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고, 남보다 높아지기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유용성을 수행하기를 기뻐하며, 자기 영광보다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합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질서가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4강 5부의 중심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죄성의문제는인간에게욕망이있다는데있지않습니다. 하나님께서주신애정과욕망이자기사랑의지배아래들어가자기만족을궁극적인목적으로삼게된데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욕망들을 하나씩 잘라내어 무감각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다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읽을 때 공용복 선생의 ‘죄성과정욕을철저히다루라’는 요청은 약화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어집니다. 단순히 식욕이나 성욕처럼 눈에 잘 보이는 욕망 몇 가지를 절제했다고 안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 ‘내가옳아야한다’, ‘내가인정받아야한다’, ‘내뜻대로되어야한다’, ‘내신앙이더높아야한다’는 proprium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연적 욕망을 이기는 것보다 종교적인 모습을 입은 자기 사랑을 발견하는 일이 때로는 훨씬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 지점이 ‘핵심진리’의 죄론과 AC의 거듭남 이해가 서로에게 가장 유익하게 말을 걸 수 있는 자리일 것입니다. ‘핵심진리’는 우리에게 ‘실제로싸우고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에 ‘그싸움에서누구의힘을의지하고있으며, 무엇이당신의새로운사랑이되어가고있습니까?’라고 한 질문을 더합니다. 두 질문을 함께 붙들면 죄론은 단순한 금욕도, 단순한 교리도 아닌 실제 거듭남의 문제가 됩니다.
이제 4강은 이러한 죄성과 정욕의 문제를 더욱 실제적인 생활의 영역으로 가져가면서, 인간이 자신의 행실을 어떻게 살피고 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하는지로 나아갑니다. 여기에서는 특히 ‘성화’를 죄를 하나씩 제거하여 어떤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생명이 사람의 의지와 삶을 점점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할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공용복 선생의 전승과 스베덴보리 사이의 공통점뿐 아니라 차이까지 가장 섬세하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4강 6부에서는 바로 그 ‘성화와거듭남’의 문제를 중심으로 4강의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4강 6부
‘죽은행실’을회개한다는것 : 큰일보다생활구석구석, 그리고성화는사랑의열매로드러난다
4강의 마지막 흐름은 지금까지 다루어 온 ‘죄성’과 ‘정욕’을 다시 매우 평범한 일상으로 끌어내립니다. 강사는 죄론을 연구하는 목적을 단지 인간의 타락 구조를 설명하는 데 두지 않습니다. ‘죽은행실이무엇인지알아야구체적으로무엇을회개해야하는지도알수있다’고 말합니다. 죽은 행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철저한 회개생활도, 영적인 성장도 제대로 이루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론은 결국 ‘빛가운데사는행실’과 ‘어둠속에사는행실’을 생활 속에서 세밀하게 분별하기 위한 공부라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서 4강 전체의 초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처음에는 ‘죄성’, ‘정욕’, ‘타락’, ‘마귀’ 같은 상당히 무거운 단어들이 등장했지만, 강의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거대한 악행 몇 가지가 아닙니다. 평범한 하루 가운데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고, 무엇 때문에 화를 내며,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작은 불편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입니다. 죄론을 공부하는 이유가 죄에 관한 전문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죄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생활구석구석의죽은행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강사가 들었던 ‘밥그릇밑의죽은바퀴벌레’ 이야기가 그래서 단순한 웃음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무엇을먹든지무엇을마시든지하나님의영광을위하여’ 살겠다고 결심하여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에도 감사했는데, 예상하지 못했던 불쾌한 상황 하나가 나타나자 방금 전까지의 평안이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강사는 바로 그런 순간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던 내면의 근원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합니다. 평소에는 숨어 있어서 자신도 모르던 것이 환경의 자극을 만나 ‘행실’로 튀어나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로 보면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내적인 사랑과 애정은 외적 상황을 통해 모습을 드러냅니다.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진행될 때에는 누구나 어느 정도 온유하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과 다른 일이 생기고, 무시당하고, 손해를 보고, 기대가 좌절되고, 몸이 불편해질 때 무엇이 올라오는지를 보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proprium의 일부가 드러납니다. 시험이 인간에게 없던 악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바퀴벌레를 보고 불쾌해진 것 자체를 곧바로 영적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 꼭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가 불결한 것을 싫어하고 위험한 것을 피하려는 자연적 반응 자체는 창조된 기능입니다. 문제는 그 자연적 반응이 어떤 마음과 결합하여 밖으로 나타나느냐입니다. 불편을 느끼는 것과 그 불편 때문에 사람에게 분노를 쏟아붓는 것은 다릅니다. 싫은 맛을 느끼는 것과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것도 다릅니다. 자연적인 감각과 영적인 악을 그대로 동일시하면 사람은 모든 인간적인 반응을 죄로 의심하는 과도한 자기검열에 빠질 수 있습니다.
강의 후반부는 오히려 이 문제를 매우 현실적인 방향으로 가져갑니다. 식사에서 음식이 조금 짜더라도 짜증을 내기보다 물을 타서 먹든지 덜 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그런 작은 상황에서 ‘입으로상급을쌓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상급을 보실 때 ‘큰사업을했는가, 큰교회를목회했는가, 많은헌금을했는가’ 같은 외적 규모를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사랑의열매를맺으며했는가’를 보신다고 강조합니다. 큰일을 했든 작은 일을 했든, 유명한 사람이든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든 생활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죄와 정욕을 회개하면서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대목이 4강 전체에서 매우 귀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앞에서 ‘죄성제거’, ‘정욕을십자가에못박음’, ‘이기는자’, ‘익은열매’ 같은 매우 높은 단계의 언어가 반복되었습니다. 그런 언어만 듣다 보면 독자는 자칫 성화를 어떤 특별한 영적 경지, 평범한 사람이 좀처럼 도달할 수 없는 높은 단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강의의 끝으로 갈수록 성화의 현장이 다시 식탁과 말투와 사람 관계와 작은 불편으로 내려옵니다. 큰일보다 작은 일을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생활의종교’를 생각하면 상당히 깊은 접점이 있습니다. 천국적인 삶은 특별한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하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자기 직업과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맡겨진 일을 정직하고 충실하게 수행하고, 다른 사람의 선을 바라며, 불의와 악을 죄로 알고 피하는 것이 영적인 삶의 실제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야 거듭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직업을 버리고 종교적 활동만 해야 천국적인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연계의 수많은 관계와 책임 가운데서 선과 진리를 삶으로 만들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큰교회를목회했는가’보다 ‘순간순간사랑의열매를맺었는가’라는 강사의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상당히 의미 있게 들립니다. 외적 결과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 안의 사랑이 자기 명예와 자기 지배를 향하고 있다면 영적인 성질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세상에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사람이 자기 가족과 이웃에게 정직하고 온유하게 대하며, 자기에게 맡겨진 작은 쓰임을 충실히 행했다면 그 삶 안에는 실제 천국적인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급’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빛을 줍니다. 강의는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면 ‘큰상급’을 쌓을 수 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상급을 외부에서 별도로 지급되는 보상으로만 이해하면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된 선의 행위 안에는 이미 그 행위의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용한 일을 하는 사람이 그 사람의 선에서 기뻐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상태가 천국적 상급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착한일을많이하면나중에큰상을받는다’는 계산으로 선을 행하면 아직 자기 유익이 목적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일이선하기때문에’, ‘주님께서기뻐하시기때문에’, ‘이웃에게유익하기때문에’ 행하고 그것 자체에서 기쁨을 얻는다면 선과 상급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천국은 공로점수를 많이 모은 사람이 더 좋은 상품을 받는 곳이 아니라, 각 사람이 사랑하는 선과 쓰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행복을 받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강 마지막에 부르는 노래의 내용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으로하지않는모든말과행함’은 천국에서 상급받지 못하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버리고 주님께서 칭찬하실 은밀한 선행을 하라는 방향으로 강의가 마무리됩니다. 결국 4강의 죄론이 도착하는 곳은 ‘죄를얼마나많이알고있느냐’가 아니라 ‘사랑으로살고있느냐’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귀결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핵심진리’의 ‘성화’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을 조금 더 정밀하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강의에서는 죄성의 뿌리가 제거되고, 영적 할례를 받고, 생명과를 먹으며,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어 ‘익은열매’가 되는 비교적 분명한 완성 단계가 강조됩니다. 다른 강의에서도 성화가 사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아 있는 동안 가능하며, 그런 사람들이 ‘처음익은열매’, 곧 이기는 자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거듭남이 단지 죽은 뒤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연계의 삶 가운데 실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분명합니다. 인간이 이곳에서 자유와 이성을 가지고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의지와 이해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실제로변화되어야한다’는 공용복 선생의 강한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그러나 ‘완성’을 말하는 방식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 안의 모든 유전적 악이 존재론적으로 뿌리째 뽑혀 다시는 아무 가능성도 남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악은 주님에 의해 질서 아래 놓이고 억제되며, 인간은 그 악을 사랑하지 않고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에게서 선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proprium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선하지 않으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계속 흘러온다는 것을 압니다.
이 점은 ‘성화’를 자기 소유로 만들지 못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안전장치가 됩니다. ‘나는죄성문제를해결했다’, ‘나는익은열매다’, ‘나는생명과를먹은사람이다’라고 자신의 영적 상태를 확정적으로 소유하기 시작하면, 역설적으로 그 순간 proprium이 가장 거룩한 옷을 입고 돌아올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명예욕은 버렸지만 ‘영적으로높은사람이라는명예’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용복 선생의 전승 안에도 이 위험을 완화하는 매우 귀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앞서 확인했듯 ‘훌륭한성도는무엇을많이가진사람도, 능력이많은사람도아니라회개를잘하는성도’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진리를 잘 지키지 못하더라도 진리는 낮추지 말고 그대로 증거하되, 자신의 부족함은 회개해야 한다는 취지입니다. 이것은 높은 ‘완전’의 언어와 함께 반드시 붙들어야 할 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은 ‘나는이제회개할것이없다’로 가기보다 오히려 주님의 빛이 더 밝아짐에 따라 자기 안의 더 미세한 동기까지 보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간음과 도둑질 같은 큰 악만 죄로 보였는데, 나중에는 말 한마디 안의 자기 자랑, 사람을 은근히 낮추는 마음, 감사받고 싶은 동기,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아집까지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퇴보가 아닙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계에서 햇빛이 희미할 때는 방 안이 깨끗해 보이지만 강한 햇빛이 들어오면 공중의 먼지까지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진리가 사람 안에 더 깊이 들어올수록 자기 proprium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드러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이 ‘나는내안에서악을전혀발견하지못한다’가 아니라 오히려 ‘악을더빨리알아차리고, 그것을자기것으로변호하지않으며, 주님께돌이키는것’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공용복 선생의 ‘회개를잘하는성도가훌륭한성도’라는 말과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은 꽤 아름답게 만납니다. 완전함을 자기 무결점의 확신으로 이해하기보다, 주님의 빛 앞에서 계속 자기 것을 내려놓으며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상태로 읽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화’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영혼을 완성하여 하나님께 제출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자신의 질서를 세워 가시는 과정이 됩니다.
그리고 이때 ‘회개’도 죄책감을 오래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강의는 죄와 정욕을 ‘철저히회개’하라고 반복하지만, 스베덴보리의 회개에는 반드시 실제 생활의 변화가 포함됩니다. 악을 보고,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다음 실제 상황에서 그것을 행하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화를 내고 나서 오래 자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왔을 때 한 번 말을 삼키는 것이 회개의 실제 열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강의가 말하는 ‘생활구석구석’과도 정확히 만납니다. 대단한 순교의 순간이 와야만 이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 찾아오는 작은 선택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끊고 싶을 때 기다려 주는 것, 내 공로를 이야기하고 싶을 때 입을 다무는 것,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 즉시 변명하지 않는 것, 불편한 사람에게도 필요한 친절을 베푸는 것,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맡은 일을 정직하게 하는 것 같은 작은 선택들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사랑과 진리가 실제 자연적 삶 속에 내려옵니다.
다른 강의에서 소화 데레사를 예로 들어 ‘크고위대한일을해서성화된사람이된것이아니라작은일을잘감당했다’고 설명하고, 생활 속의 ‘작은원수’ 앞에서 ‘사랑은자기유익을구하지아니하며, 성내지아니하며, 오래참는다’는 말씀을 적용해 순간순간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을 말한 것도 바로 이 전통의 일관된 방향을 보여 줍니다. 거대한 ‘익은열매’라는 개념이 실제로는 작은 일상의 선택을 통해 익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익은열매’를 특별한 신비 체험이나 높은 영적 상태의 자기 인식으로만 이해하면 평범한 성도는 언제나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작은 관계와 작은 말과 작은 책임 안에서 선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열매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천국적 생명은 특별한 장소에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엌과 식탁과 사무실과 교회 복도와 전화 한 통 속에서도 자랄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에서는 이것을 ‘자연적차원에까지선과진리가내려와야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속으로 좋은 생각만 하고 실제 행위가 없다면 거듭남은 완성되지 않습니다. 선은 의지를 통하여 행위가 되어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적인 행위가 영적인 것의 최종적인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연계에 살아 있는 동안의 실제 행위가 그토록 중요합니다. 자연적 삶 안에서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그것이 인간의 생명에 고정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행실’의 반대는 단순히 ‘종교적으로보이는행실’이 아닙니다. 생명이 있는 행실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진리를 통하여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똑같이 설교하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식사하고, 일하지만 그 안을 움직이는 생명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기 인정과 자기 유익이 움직이면 외관은 선해도 내적인 성질은 달라지고, 체어리티와 쓰임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하면 일상적인 작은 행동 안에도 천국적 생명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4강 전체가 처음과 끝에서 아름다운 원을 이룹니다. 처음에는 ‘죄론을왜공부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답은 ‘무엇을회개해야하는지알기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그렇다면무엇을보아야하는가?’라고 묻습니다. 답은 거대한 사건보다 ‘생활구석구석’입니다. 결국 죄론은 지옥의 죄 목록을 공부하는 학문이 아니라, 내 삶의 작은 자리들에서 어떤 사랑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를 살피는 공부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4강의 강점을 상당히 높이 보고 싶습니다. 죄를 추상적인 ‘원죄’나 법적인 유죄 상태로만 놓아두지 않고, 사람의 애정과 욕망과 행실까지 들어가 실제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믿었으니죄문제는다끝났다’는 식으로 삶의 변화를 약화시키지 않습니다. 신앙이 실제 성품과 행동에까지 내려와야 한다는 긴장은 매우 귀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렌즈’가 여기에 계속 보태는 것은 세 가지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자연적 애정과 욕망 자체를 악으로 만들지 말고 그 ‘질서’를 보자는 것입니다. 둘째, 죄와 싸우는 인간의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셋째, 성화를 ‘죄가전혀없는자기완성’보다 지배적 사랑이 변화되어 선과 진리가 삶의 기쁨이 되는 거듭남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특히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죄를안짓는사람’과 ‘선을사랑하는사람’은 완전히 같은 표현이 아닙니다. 전자는 두려움이나 억압으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후자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천국의 사람은 단지 악을 못 하게 된 사람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자유이고 기쁨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완성 방향은 ‘하지않음’에서 ‘사랑하여행함’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강의 마지막 찬양의 ‘사랑으로행하라’는 방향과도 잘 만납니다. 결국 오랜 죄론 강의의 마지막 말이 ‘죄를무서워하라’만이 아니라 ‘사랑으로행하라’가 된다는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죄를 벗는 목적이 사랑하기 위해서이고, 정욕의 지배를 끊는 목적도 더 자유롭게 선을 사랑하기 위해서이며, 자기중심적 만족을 내려놓는 목적도 주님과 이웃의 선에서 기쁨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4강 전체를 관통했던 ‘정욕’이라는 말도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정욕은 이 강의의 용법에서 인간의 애정과 욕망을 넓게 가리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모두 악한 것이 아니라 육체의 자연적 기능으로 주어졌지만 타락하여 자기중심적 방향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자연적애정들이자기사랑과세상사랑의지배아래들어간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듭남은 그 애정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사랑과 체어리티 아래 다시 질서 있게 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식욕도 쓰임을 섬기고, 재물도 쓰임을 섬기며, 명예도 쓰임을 섬기고, 가족 사랑도 그 사람의 영원한 선을 섬깁니다. 인간의 자연적 삶 전체가 주님의 생명이 흐르는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것을버린다’보다 더 깊은 변화일 수 있습니다. 물건을 버리기는 비교적 쉬울 수 있지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은 훨씬 깊은 질서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칭찬을 전혀 듣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는 것보다 칭찬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영광으로 붙잡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자유일 수 있습니다. 가족과 관계를 끊는 것보다 가족을 깊이 사랑하면서도 ‘내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사랑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보다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 사랑에 지배되지 않는 것이 더 깊은 거듭남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자연계의 삶과 쓰임을 매우 중요하게 보는 이유입니다. 거듭남은 인간을 자연계 밖으로 꺼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삶 안에 천국의 질서를 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삶도 무위와 정지가 아니라 쓰임의 삶입니다. 사람은 지상에서부터 그 쓰임의 기쁨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4강의 ‘생활구석구석’이라는 표현은 아주 좋은 끝맺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높은 영계 지식도, 복잡한 종말론도, 성화의 단계도 결국 생활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열매가 없다면 생명으로 내려오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특별한 지식이 많지 않아도 하루의 작은 관계들 속에서 악을 죄로 피하고 선을 사랑하며 쓰임을 행하는 사람 안에는 이미 천국의 질서가 형성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공용복 선생의 ‘회개를잘하는성도가훌륭한성도’라는 말도 다시 떠올릴 만합니다. 완전한 사람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 아래 무엇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을 인정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훌륭한 성도라는 것입니다. 이 문장을 ‘익은열매’와 함께 읽으면 ‘핵심진리’의 성화론을 지나치게 딱딱한 완전주의로만 읽지 않게 해 주는 중요한 균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의렌즈’는 거기에 한 문장을 더할 수 있겠습니다. ‘회개를잘한다는것은자기악을많이생각하는것이아니라, 악에서실제로돌아서서주님으로부터오는선을삶으로행하는것입니다.’ 회개의 마지막은 죄책감이 아니라 새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이번 4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죄론의목적은인간을죄에사로잡아두는것이아니라, 무엇이주님의생명을막고있는지를발견하여그것을회개하고, 생활구석구석에서사랑의열매가나타나게하는데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더하면 이렇게 깊어집니다. ‘그열매는인간이자기힘으로만들어하나님께바치는것이아니라, 인간이자유가운데악을물리칠때주님께서그의의지와삶안에심어자라게하시는선의열매입니다.’
이렇게 해서 4강은 6부로 마무리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처음에는 ‘죄란무엇인가’에서 출발하여 ‘정욕’, ‘죄성’, ‘사랑의질서’, ‘십자가에못박음’, ‘가족애와대환란’, ‘성화와거듭남’을 지나 마지막에는 ‘생활구석구석의사랑의열매’로 돌아왔습니다. 앞서 한 편으로 너무 압축해서 보았을 때보다, 이렇게 여섯 부분으로 따라오니 이 강의가 단순히 ‘욕망을죽이라’는 금욕 강의가 아니라 ‘무엇이사람의생명을지배하고있으며그것이실제생활에서어떤열매를맺는가’를 묻는 꽤 치밀한 죄론이라는 점이 훨씬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거듭남론이 이 강의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정욕의제거’보다 ‘사랑의질서회복’, ‘인간의성취’보다 ‘주님으로부터오는새생명’ 쪽으로 한층 더 깊게 열어 줄 수 있다는 것도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