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창2:15)

 

AC.122

‘에덴동산’(garden of Eden)은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는 것’(till it and take care of it)은 그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By the “garden of Eden” are signified all things of the celestial man, as described; by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is signified that it is permitted him to enjoy all these things, bu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because they are the Lord’s.

 

해설

AC.122는 창2:15의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씀의 속뜻을 매우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에덴동산’은 단순히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동산을 경작하고 지킨다는 것도 자연적인 농경 행위를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천적 인간이 주님께 받은 모든 것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지를 나타냅니다.

 

앞의 설명들을 생각하면 ‘에덴동산’ 안에는 사랑과 지혜와 지성, 그리고 그로부터 질서 있게 이어지는 이성과 앎까지 천적 인간에게 속한 모든 것이 포함됩니다. AC.121에서는 그 생명의 질서가 ‘동쪽’이신 주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에 속한 앎들에까지 이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122에서 말하는 ‘이 모든 것’은 사람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재산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의 생명과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해서 인간이 그것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에게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이 허락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과 지혜와 지성은 인간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 안에 주어지고, 인간은 그것을 자기의 생명처럼 느끼며 살아갑니다. 천적 질서는 인간이 아무것도 느끼거나 행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것을 충만히 누리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바로 여기에 AC.122의 중심이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 안에 사랑과 지혜와 지성과 선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들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로 누리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따라서 ‘내 안에 있다’는 것과 ‘나에게서 나왔다’는 것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사람 안에 있으므로 사람은 그것으로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이십니다.

 

이 점에서 ‘경작하며 지킨다’는 표현도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은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듯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합니다. 다만 그렇게 사용하면서 사랑과 지혜와 선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인간의 활동과 주님의 생명 사이의 질서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실제로 경작하고 지키지만, 그가 경작하고 지키는 모든 생명의 것은 주님께 속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121과도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주님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지혜를 통하여 지성이, 지성을 통하여 이성이 나오며, 이성을 통하여 기억에 속한 앎들이 생명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22는 그렇게 생명을 얻은 모든 것을 사람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누리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흐름의 출발점을 잊고 ‘이 지혜는 내 지혜이고, 이 선은 내 선이며, 이 생명은 나에게서 나온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천적 질서는 생명의 흐름뿐 아니라 그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질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을 ‘경작하며 지킨다’는 말씀에는 천적 인간의 매우 근본적인 삶의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자기 것으로 빼앗지도 않습니다. 받아서 누리고, 실제 삶 가운데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것임을 압니다. 주님께 받은 것을 마치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소유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것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에덴동산 안에서 살아가는 천적 인간의 질서입니다. (AC.122)

 

 

 

AC.123, 창2:15, ‘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AC.123천적 인간은 퍼셉션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의 것임을 인정합

bygrace.kr

 

AC.121, 창2:14, ‘천적 질서 - 주님으로부터 지혜와 지성과 이성을 거쳐 기억지식까지’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창2:14) AC.121천적 질서의 본질, 곧 생명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이 강들로부터 분명합니다. 곧 ‘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1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의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에 악을 언제나 악처럼 느끼고 거짓을 언제나 거짓처럼 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에게서 나오는 어떤 생각과 행동을 선하고 옳은 것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악이 선처럼 보이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실제 삶에서 ‘빛처럼 보였던 어둠’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다음 사례들은 AC.21의 상태를 판정하는 공식이 아니라, 그 표현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 ‘자기 의로움’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성실하게 살고 교회생활도 충실히 하며 큰 잘못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삶을 근거로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 ‘나는 적어도 저런 사람과는 다르다’는 마음이 자라날 수 있습니다. 본인에게는 이것이 바른 삶에 대한 확신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빛 가운데 자신을 보기 시작하면서, 선하게 살았다는 자기평가 안에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빛처럼 보였던 것이 더 큰 빛 가운데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섞인 선행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봉사하고 헌신하며 다른 사람을 실제로 돕습니다. 그 행동의 외적 쓰임 자체를 무조건 악하다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동기는 거듭남 과정에서 여러 요소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인정과 칭찬을 얻는 것이 점점 그 행동의 지배적인 목적이 되는 경우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선행 자체를 후회하거나, 다른 사람이 칭찬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면 ‘나는 이웃을 위해서 했다’고 생각했던 일 안에 자기 사랑이 얼마나 깊이 섞여 있었는지를 보게 될 수 있습니다. AC.21의 빛은 바로 이런 분별을 가능하게 합니다.

 

세 번째는 신앙적인 열심입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교리를 소중히 여기며 진리를 전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나는 진리를 알고 있고 저 사람들은 모른다’, ‘내 신앙이 더 높다’는 마음이 중심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 자체보다 ‘진리를 가진 나’가 중요해집니다. 이런 상태는 당사자에게 오히려 매우 밝은 신앙의 열심처럼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의 빛이 비칠 때 사람은 진리를 사랑하는 것과 진리를 이용하여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 같은 것이 아님을 조금씩 보게 됩니다.

 

네 번째는 이른바 ‘의로운 분노’입니다. 불의한 일을 보고 분노하는 것 자체를 모두 자기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과 불의를 보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거나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일어난 분노를 ‘나는 진리를 위해 화내는 것이다’라고 포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자기 상처와 진리에 대한 열심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후 더 밝은 빛 가운데 들어가면서 ‘내가 정말 진리를 위해 분노한 것인가, 아니면 내 proprium이 상처받았기 때문인가?’라고 묻게 됩니다. 바로 이런 질문 자체가 이전에는 하나로 보였던 빛과 어둠을 구별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다섯 번째로 목회나 신앙적 봉사에서도 같은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하려는 열망은 선한 목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역이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지나친 분노와 좌절이 일어난다면, ‘주님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안에 ‘내가 이루어야 할 일’이라는 자기 소유의 마음이 섞여 있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역 자체가 어둠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안에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proprium에서 나오는지를 구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사례들을 이해할 때 ‘proprium’을 인간의 개성이나 인격 전체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roprium의 문제는 사람이 가진 고유한 성격이나 재능 자체가 아니라,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매우 종교적이고 도덕적으로 보이는 일 안에서도 proprium은 작용할 수 있고, 반대로 자연적인 재능과 개성은 주님의 질서 아래에서 좋은 쓰임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자기 안에서 혼합된 동기를 발견했다고 해서 ‘그러면 내가 지금까지 한 모든 선은 가짜였다’고 절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AC.21은 사람에게서 나온 모든 행동을 분석하여 자기혐오에 빠지게 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신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전에는 서로 뒤섞여 하나처럼 보였던 것을 이제 구별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구별이 가능해져야 사람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붙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처럼 보였던 어둠’을 발견하는 것은 단순히 ‘내가 생각보다 나쁜 사람이구나’를 깨닫는 데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주님에게서 왔고 무엇이 아직 내 proprium에서 나오는가’를 분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AC.20에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했다면, AC.21에서는 그 첫 빛 안에서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것과 참된 빛이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빛과 어둠의 분별입니다. (AC.21 심화 1)

 

 

 

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20 심화

2.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

 

AC.20의 설명을 실제 인간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더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것을 선과 진리라고 여기다가, 새로 잉태되면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고, 더 빛 안으로 들어가면서 주님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아간다는 이런 내적 과정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것이 단순한 성경 해석에서 나온 것인지, 영계에서 관찰한 것인지, 아니면 스베덴보리 자신이 실제로 겪은 과정인지 궁금해집니다.

 

먼저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AC.20의 각 단계를 곧바로 스베덴보리 자신의 자서전으로 읽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깊은 내적 변화와 영적 위기를 경험했다는 사실과, 그가 자신의 생각과 정서와 꿈을 세밀하게 관찰했다는 사실은 그의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신학 저술기로 넘어가기 전후의 개인 기록은 그가 자기 사랑, 명예욕, 지적 자부심, 주님에 대한 의존 같은 문제를 매우 깊이 씨름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그에게 거듭남이 순전히 책상 위의 추상적인 주제만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므로 AC.20은 스베덴보리가 자기에게서 직접 겪은 단계를 기록한 것이다’라고 단정하면 한 걸음 너무 나갑니다. AC.20 자체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창1:3의 속뜻을 해설하면서 거듭나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일반적인 첫 상태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그의 개인적 영적 경험이 이런 설명을 이해하는 배경이 되었을 가능성과, AC.20의 교리를 그의 자전적 경험과 동일시하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적 감각이 열린 뒤 오랜 기간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반복해서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AC 자체에서도 그는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과 사후 인간의 상태, 천국과 지옥, 영들의 성질에 관한 경험을 매우 자주 기록합니다. 이것은 그의 신학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인간의 생각과 정서가 영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천국을 통해 흘러들고 악과 거짓은 지옥적 영향과 연결된다는 거대한 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AC.20의 여섯 날의 각 단계는 영계에서 여러 사람을 관찰하여 통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영계 경험을 교리의 중요한 확증으로 제시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창세기 1장의 거듭남 해석 자체는 무엇보다 말씀의 속뜻에 대한 해설로 제시됩니다. 따라서 ‘영계에서 보았기 때문에 창1을 그렇게 해석했다’고 한 방향으로만 설명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이며 가장 직접적인 층위가 바로 말씀입니다. AC는 처음부터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밝히는 저작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은 인간이 임의로 상징을 붙여 해석하는 문서가 아니라, 문자적 의미 안에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이 담겨 있으며 천국과 결합되어 있는 신적 말씀입니다. 따라서 창1의 빛, 낮과 밤, 물, 땅, 식물, 광명체, 동물, 사람은 서로 흩어진 비유가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과 주님의 나라에 관한 하나의 내적 질서를 이룹니다. AC.20의 첫 빛 역시 이 말씀의 속뜻 안에서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개인 경험, 영계 경험, 말씀의 속뜻이라는 세 가지를 어떻게 관계 지어야 할까요? 셋을 완전히 분리할 필요는 없지만, 모두 똑같은 무게의 ‘세 가지 자료원’이라고 기계적으로 병렬시키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AC에서 중심에 놓이는 것은 말씀과 그 속뜻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 경험은 그가 설명하는 영적 세계와 인간의 내적 구조를 이해하고 확증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며, 그의 개인적 경험은 그가 이런 문제를 단순한 관념으로만 다루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AC.20의 교리적 근거를 최종적으로 그의 개인 체험에 두는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에 부여한 위치와도 맞지 않습니다.

 

특히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는 AC.20의 문장은 스베덴보리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특수한 심리 경험이 아니라 그의 거듭남 교리 전체와 연결됩니다. 선은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며, 사람이 거듭날수록 자기가 선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은 이후 AC 전체에서 계속 깊어지는 주제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어느 특정한 위기나 회심 사건과 일대일로 대응시키기보다, 말씀의 속뜻 안에서 제시된 거듭남의 보편적인 질서로 읽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생애가 이 설명과 전혀 관계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개인 기록을 읽어 보면, 훗날 그의 신학에서 매우 중요해지는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것’, 자기 지성과 공로, 주님께 대한 의존 같은 문제들이 그에게도 실제적인 문제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스베덴보리 자신도 이러한 거듭남의 문제와 무관한 관찰자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디까지가 그의 개인적 체험이고 어디서부터가 말씀의 계시적 해설인지를 우리가 임의로 확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질문에 가장 안전하게 답한다면 이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의 허락으로 영계가 열린 상태에서 오랫동안 영적 세계를 경험했다고 증언했고, 자신의 내적 삶에서도 깊은 변화를 겪었으며, 무엇보다 말씀의 속뜻이 열려 그 안에서 인간 거듭남의 질서를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배경을 함께 고려할 수 있지만, AC.20 자체는 스베덴보리 개인의 체험담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 대한 해설로 읽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의 개인적 경험을 지나치게 확대하지 않으면서도, 그가 왜 인간의 내적 변화에 이토록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설명했는지를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20 심화 2)

 

 

 

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bygrace.kr

 

AC.20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심화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될 때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문장으로 읽으면 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3.심화

1. ‘일곱 번째 상태’와 수도원 전통의 ‘완덕’, ‘합일’의 비교

 

수도원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분명 서로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개념을 그대로 같은 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서로 닮은 영적 지향이 어디에 있으며, 그 지향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AC.13의 일곱 번째 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에게 창조의 여섯 날은 인간이 거듭나는 상태들을 나타내며, 그 뒤의 일곱째 날은 안식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안식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휴식이 아닙니다. 앞선 상태들에서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고 선을 행하는 것처럼 경험하지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실제로 싸우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더욱 인정하게 됩니다. 따라서 일곱 번째 상태의 안식은 인간의 proprium이 주도권을 쥐는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된 분이 되시는 질서와 관련됩니다.

 

이 점에서는 기독교 수도원과 신비 전통에서 말해 온 ‘완덕’이나 ‘합일’과 만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서방 기독교 영성에서는 영적 여정을 ‘정화’, ‘조명’, ‘합일’이라는 틀로 설명해 온 전통이 있으며, 여기서 합일은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더욱 깊이 일치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자기중심적인 의지가 약해지고 하나님의 뜻을 사랑하여 그 뜻에 따라 살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안식과 비교해 볼 만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도원 전통 전체를 ‘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영성’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수도원과 신비 전통 안에서도 합일은 황홀경이나 특별한 관상 체험만을 뜻하지 않았으며, 순종과 사랑과 덕의 삶, 기도와 일상생활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도록 변화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흐름이 있습니다. 따라서 차이는 ‘수도원 전통은 체험이고 스베덴보리는 삶이다’라고 양분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질서를 설명할 때 특별한 종교적 체험 자체를 그 상태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는 데서 찾는 편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떤 황홀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더라도 여전히 자기에게서 한다고 생각하는 상태가 있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속 사람 안에서 살아나기 시작하는 상태가 있으며, 더 나아가 사랑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 번째 상태를 판단하는 핵심은 특별한 감각적·신비적 경험이 아니라 인간 안의 사랑과 의지와 삶의 질서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에 있습니다.

 

또한 이 상태를 수도원이나 세상과 격리된 특별한 생활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볼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의 실제 무대는 인간의 삶 전체입니다. 가정과 직업과 인간관계와 맡겨진 쓰임 속에서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진리를 배우며, 선을 행하고, 그 선이 자기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이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따라서 일곱 번째 상태를 특정한 생활 형태나 수도 제도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일곱 번째 상태를 누구나 쉽게 도달하는 일반적인 단계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AC.13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 사람이 실제로 이 여러 상태 가운데 어디까지 이르는지를 말하면서,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도 드물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상태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하지만, 실제 인간에게서 그 충만한 상태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일곱 번째 상태의 ‘안식’을 이후에는 아무런 시험이나 영적 싸움도 없다는 절대적인 무전투 상태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핵심은 싸움의 주체와 인간의 내적 태도가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악과 싸워 이긴다고 여기기보다 주님께 의지하며, 주님께서 싸우시고 선을 이루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질서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단순히 갈등이 사라진 심리적 평온이라기보다 주님의 질서 안에서 오는 영적 평안과 관련됩니다.

 

이렇게 보면 수도원 전통의 ‘완덕’이나 ‘합일’과 스베덴보리의 ‘일곱 번째 상태’ 사이에는 비교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인간이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변화를 말하며,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것을 중요하게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일곱 번째 상태를 어떤 특정 수도 전통의 완덕론이나 신비적 합일론과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창조의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이라는 말씀의 속뜻 안에서, 인간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고 마침내 주님께서 주된 분으로 역사하시는 안식의 질서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13을 수도원 영성과 연결하여 읽을 때 가장 유익한 질문은 ‘어떤 특별한 합일 체험에 도달했는가?’가 아니라 ‘내 삶의 주도권이 실제로 누구에게 있는가?’일 것입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여전히 내 힘과 공로로 붙들고 있는지, 아니면 주님이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인정하며 주님께서 나를 이끄시도록 내 삶을 맡기고 있는지를 묻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째 날의 안식은 세상을 떠나 얻는 특별한 종교적 경지가 아니라, 인간의 중심이 proprium에서 주님께로 옮겨 가면서 주님의 사랑과 질서가 삶을 다스리게 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AC.13 심화 1)

 

 

 

AC.13, 창1 개요, ‘모두가 같은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 거듭남의 현실’

AC.13거듭남 과정 중인 모든 사람이 이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첫 번째 상태까지만 이르고, 어떤 이들은 두 번째 상태까지만, 또 다른 이들은 세 번째, 네 번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로 지나치게 좁아지고, ‘사랑’이라고 하면 감정적인 사랑과 구별하기 어려우며, ‘인애’라고 하면 현대 한국어에서 뜻이 즉시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웃 사랑’은 상당히 가까운 표현이지만, 이것 역시 charity가 실제 삶과 행위 안에서 나타나는 폭넓은 의미를 언제나 다 담아내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과 해설에서는 charity를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라고 음역하여 사용하고, 그 의미를 문맥에서 풀어 설명합니다.

 

체어리티의 가장 기본적인 방향은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주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charity toward the neighbor)를 함께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체어리티는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감정을 느끼거나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웃의 선과 유익을 바라며, 실제 삶에서 그 선을 행하려는 의지와 삶의 방향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는 현대 영어의 charity에서 흔히 떠올리는 ‘자선 행위’보다 훨씬 넓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도 체어리티의 한 표현이 될 수 있지만, 체어리티 전체가 그것으로 한정되지는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정직하게 수행하는 것,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는 것,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자신의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참된 유익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 역시 체어리티와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체어리티를 단순한 ‘착한 행동’과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겉으로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 행동의 동기와 목적까지 언제나 선한 것은 아닙니다. 칭찬받기 위해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때로는 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해 그의 잘못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에는 단순한 감정적 친절을 넘어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선한 것인지를 분별하는 진리도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지 어떤 교리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지적인 동의가 아닙니다. 진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선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그래서 이후 AC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끊임없이 다루어집니다. 진리가 삶과 분리되어 머릿속 지식으로만 남아 있으면 아직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 역시 진리의 인도 없이 단순한 호의나 감정에 머물러서는 온전한 질서를 이루기 어렵습니다.

 

AC.9에서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체어리티의 일들’(works of charity)을 언급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이제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하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에 속한 선들을 행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앞선 상태보다 큰 진전입니다. 체어리티가 생각 속의 이상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행위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AC.9의 핵심 문제는 그 사람이 아직 그 선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9는 ‘체어리티의 일을 행한다’는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사람은 실제로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 수 있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도왔다’, ‘내가 이런 좋은 일을 했다’, ‘나는 저 사람보다 사랑이 많다’는 생각이 중심에 자리 잡으면 체어리티의 외적인 행위 안에도 proprium이 개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선들이 아직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선의 참된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 번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거듭남의 중요한 시작입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을 행하면서 배우고, 자기 안에 섞여 있는 동기들을 발견하며, 점차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선을 선택하고 행하는 가운데 그 사람을 이끄십니다.

 

그래서 체어리티는 한두 번의 특별한 선행보다 삶 전체의 방향과 더 깊이 관련됩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시간만 체어리티의 시간이 아니라 가정에서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 직장에서 맡은 일을 처리하는 방식, 돈을 사용하는 태도, 다른 사람의 명예를 다루는 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같이 일상의 수많은 선택 속에서 체어리티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삶에서 분리된 종교적 활동 하나가 아니라, 이웃의 선과 유익을 향하도록 삶이 질서 잡혀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번역과 해설에서 영어 charity를 ‘체어리티’라고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뜻을 설명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풍성한 의미를 하나의 한국어 단어로 성급하게 축소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문맥에 따라 ‘이웃을 향한 사랑’, ‘이웃의 선을 위한 삶’, ‘체어리티의 행위’ 등이 무엇을 뜻하는지 풀어 설명할 수 있지만, 기본 용어 자체는 ‘체어리티’로 유지합니다. 이렇게 해야 이후 AC에서 신앙과 체어리티, 사랑과 체어리티, 선과 진리의 관계가 점점 더 정교하게 전개될 때 동일한 개념의 흐름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결국 체어리티는 단순한 자선도, 따뜻한 감정도, 외적인 선행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선과 유익을 바라며 삶으로 행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리고 신앙은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삶 속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에 완성된 상태가 아니지만, 사람이 실제로 체어리티의 일을 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는 거듭남의 중요한 진전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선을 행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배우도록 이끄십니다. (AC.9 심화 2)

 

 

 

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bygrace.kr

 

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인데 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어서 ‘그가 행하는 것들은 생명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속 사람은 주님과 연결되는 내적인 차원인데, 거기서 나온 선이라면 당연히 살아 있는 선이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핵심은 ‘속 사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그 선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사람이 인정한다’는 것이 아직 완전히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AC.9의 사람은 이전 상태보다 분명히 진전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외적인 규칙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회개하기 시작했고,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는 여전히 ‘내가 선을 생각했고, 내가 선을 선택했고, 내가 선을 행했다’고 여깁니다. 선이 안으로부터 나타나고 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이 없다’는 말을 그 선행이 전혀 무가치하다거나 실제로 아무 선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그 행위의 외적인 유익성보다 영적인 생명의 귀속입니다. 선의 생명은 인간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에게 귀속시키는 동안에는 그 선을 아직 주님에게서 오는 살아 있는 선으로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섬세한 거듭남의 문제입니다.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변화만 생각하면 AC.9의 사람은 이미 상당한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선을 행하는가?’뿐 아니라 ‘그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두는가?’를 묻습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악한 일을 할 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내가 했다’, ‘내가 옳다’,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고 자기 공로를 붙들 때에도 proprium은 매우 미묘하게 살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사람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남에서 사람은 실제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노력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악을 죄로 여겨 피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주님께서 하실 것이다’라고 기다리는 것은 거듭남이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동시에 선을 행할 능력과 선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 갑니다.

 

이 때문에 AC.9의 세 번째 상태는 지나가야 할 잘못된 상태라기보다 필요한 성장 과정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어린아이가 처음 걸을 때 자기가 걷는다고 느끼는 것처럼, 거듭남을 시작한 사람도 처음에는 자기가 회개하고 자기가 선을 행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자유감과 자기 활동감을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하게 하시면서, 점차 선의 참된 근원이 어디인지를 깨닫도록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속 사람으로부터’라는 표현은 이미 완성된 거듭남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 사람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시작되고 그 영향이 겉 사람에게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사람의 의식과 귀속은 아직 자기 자신에게 기울어 있을 수 있습니다. AC.8에서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기 시작했다면, AC.9에서는 그 구별이 실제 선행 가운데서도 더 깊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돌아볼 때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내가 기도하고 봉사하고 이웃을 돕고 말씀을 공부한다는 사실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누구에게 공로를 돌리고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을 때 섭섭해하거나, 자신의 선행 때문에 자신을 더 높은 사람으로 여기거나, 자신의 신앙적 성취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진다면 ‘선한 일을 하는 나’를 붙들고 있는 proprium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견했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AC.9는 그러한 발견 자체가 거듭남의 과정 안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서 멈추게 하지 않으시고 점차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이끄십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선을 행하되 점점 더 자기 공로를 내려놓게 됩니다.

 

따라서 AC.9의 ‘생명이 없다’는 표현은 선행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그 선행이 어디에서 참된 생명을 받아야 하는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속 사람으로부터 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한 진전입니다. 그러나 그 선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려면 사람은 그 생명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결국 거듭남은 ‘내가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마음과 삶으로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AC.9 심화 1)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

bygrace.kr

 

AC.9, 창1 개요, ‘선을 행하지만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세 번째 상태’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때는 뼈처럼 단단하고 검은 물질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그 안에는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될 때는 반대로 사람다운 모습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이 말은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지만, 정말 진짜입니다. 천사적 영 안에 있는 모든 표현 하나하나, 모든 생각 하나하나, 그리고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 하나까지도 모두 살아 있으며, 그 가장 작은 요소들 안에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은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오는 모든 것은 그 안에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을 향한 신앙을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며, 여기서는 이러한 것들이 ‘생물’(living soul)로 상징됩니다. 또한 그것들은 일종의 몸을 지니고 있는데, 그걸 여기서 ‘스스로 움직이는 것’(what moves itself) 또는 ‘돌아다니는 것’(creeps)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들은 아직 사람에게는 깊은 비밀이며, 지금은 다만 본문에 ‘생물’(living soul, thing moving itself)이 나와서 잠깐 언급한 것입니다. Whatever is proper to man has no life in itself, and whenever it is made manifest to the sight it appears hard, like a bony and black substance; but whatever is from the Lord has life, containing within it that which is spiritual and celestial, which when presented to view appears human and living. It may seem incredible but is nevertheless most true, that every single expression, every single idea, and every least of thought in an angelic spirit, is alive, containing in its minutest particulars an affection that proceeds from the Lord, who is life itself. And therefore whatsoever things are from the Lord, have life in them, because they contain faith toward him, and are here signified by the “living soul”: they have also a species of body, here signified by “what moves itself” or “creeps.” These truths, however, are as yet deep secrets to man, and are now mentioned only because the “living soul,”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re treated of.

 

해설

AC.41은 앞의 AC.39에서 제시한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생명을 가진다’는 원리를 창1:20의 ‘생물’이라는 표현과 연결하여 한 걸음 더 깊이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은 단순히 사람이 숨 쉬고 생각하며 활동한다는 자연적 의미의 생명이 아닙니다. 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고유한 것, 곧 proprium은 그 자체 안에 생명의 근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참된 생명은 오직 생명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때문에 ‘사람의 본성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다’는 강한 표현도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가치하다거나 실제로 살아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거듭나기 전의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외형적으로 아무 선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생명의 ‘근원’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 안에 독립적인 영적 생명의 원천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며, 선과 진리와 그것을 사랑하는 애정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AC.39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도록 허락받지만, 점차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나중에는 지각하게 된다고 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차이를 매우 특이한 시각적 묘사로 표현합니다. 사람의 proprium에 속한 것이 눈에 보이게 나타날 때에는 ‘뼈처럼 단단하고 검은 물질’처럼 보이는 반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사람답고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묘사를 지나치게 해부하거나 구체적인 영계의 물질 구조처럼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1이 강조하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과 주님에게서 비롯된 것 사이에는 단순한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천사적 영에 관한 설명은 이 ‘생명’이 얼마나 깊은 곳까지 미치는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적 영의 말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 심지어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도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가장 작은 것 안에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애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1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어떤 생각이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 생각이 정확하거나 논리적이라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 생각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애정이 있으며, 그 애정으로 말미암아 그 생각 전체가 생명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AC.41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들이 ‘주님을 향한 신앙’을 그 안에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이 창1:20의 ‘생물’(living soul)로 상징됩니다. 다시 말하면 ‘생물’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무엇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사람 안의 것들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살아 있는 것이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앞의 AC.39에서 풀과 나무가 아직 ‘무생물’에 비유되다가 이제 물에서 움직이는 생물과 새가 등장하는 이유도 이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이 살아 있는 것들이 ‘일종의 몸’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 또는 ‘기는 것’으로 상징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그 의미를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들은 아직 사람에게 ‘깊은 비밀’이라고 하면서, 지금은 창1:20에 ‘생물’과 ‘움직이는 것’이라는 표현이 등장했기 때문에 잠깐 언급할 뿐이라고 선을 긋습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여기서 영적 몸이나 천사의 사고 구조에 관한 상세한 체계를 미리 만들어 내기보다, AC.41이 밝히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AC.39-41의 흐름도 선명해집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서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되는 과정을 설명했고, AC.40에서는 그렇게 살아나기 시작한 사람 안의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을 물고기와 새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AC.41은 그 모든 것이 왜 ‘살아 있다’고 불릴 수 있는지를 밝힙니다. 생명은 사람 자신에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은 가장 작은 생각과 애정에까지 스며듭니다.

 

그러므로 AC.41의 중심은 인간의 개성이나 활동을 없애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사랑하고, 내가 행한다’고 경험하면서도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아 가는 데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붙잡을수록 proprium에 머물지만, 그것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수록 그의 생각과 애정은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창1:20의 ‘생물’은 바로 거듭남이 이처럼 ‘살아 있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심화

1. ‘천사적 영’

 

AC.41, 심화 1, ‘천사적 영’

AC.41.심화1. ‘천사적 영’ AC.41에 ‘천사적 영’(angelic spirit)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천사’라는 것인지 ‘영’이라는 것인지, 혹은 천사와 영 사이에 또 다른 종

bygrace.kr

 

 

 

AC.42, 창1:21, ‘큰 바다짐승들’

하나님이 큰 바다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reated great whales, and every living so

bygrace.kr

 

AC.40, 창1:2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새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녁’은 모든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늘의 상태, 곧 거짓의 상태이며 신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이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빛의 상태, 곧 진리의 상태이며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다윗을 통해 하신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며, 그분이 오시는 때는 신앙이 없기 때문에 ‘저녁’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니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단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 여기서 ‘주야’에는 원문의 ‘저녁-아침’(evening-morning)이라는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에서 ‘아침’은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곧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해설

AC.2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을 단순한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언어로 해석하는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저녁’은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그늘의 상태, 곧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아침’은 이후의 상태로, 빛의 상태, 곧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루가 지나갔다는 뜻을 넘어, 거듭남 가운데 한 상태에서 그 다음 상태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AC.20에서 처음 빛이 나타났고 AC.21에서 빛과 어둠이 구별되었다면, AC.22에서는 그 변화의 방향이 ‘저녁에서 아침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더욱 일반적인 원리로 확장하여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21의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낮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밤에 비유된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사람 자신의 것이란 단순히 인간의 개성이나 자연적인 능력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여기는 proprium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여기던 질서에서 그것들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질서로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 원리를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먼저 인용하는 말씀이 삼하23:2-4입니다. 여기서 ‘돋는 해의 아침 빛’, ‘구름 없는 아침’,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이라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AC.22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아침’이 빛과 생명이 나타나는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을 말씀 자체에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아침의 빛 아래 새 풀이 돋아나는 모습은 빛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이 나타나는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만을 근거로 ‘새 풀’을 퍼셉션이나 특정한 영적 기능에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붙드는 중심은 ‘아침’입니다. 아침은 주님께 속한 빛이 나타나는 상태이며, 그 빛 아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개인의 거듭남을 넘어 주님의 세상 오심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고, 그분이 오시는 당시의 상태는 신앙이 없었으므로 ‘저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같은 사건을 모순되게 저녁과 아침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기 직전의 상태를 그 근본적인 신앙의 결핍 때문에 ‘저녁’이라 하고, 바로 그 상태 가운데 주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된 것을 ‘아침’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질서는 한 개인의 거듭남뿐 아니라 교회의 황폐와 주님의 오심이라는 더 큰 차원에서도 적용됩니다.

 

이 대목에서 단8:14, 26이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이천삼백 주야까지니’라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표현에는 ‘저녁’과 ‘아침’이 들어 있으며 Potts 역시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이라고 옮겨 AC.22의 논지를 드러냅니다. 더구나 단8의 문맥에서는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며 진리가 땅에 던져지는 황폐의 상황과, 이후 성소가 정결하게 되는 회복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단순히 ‘저녁’과 ‘아침’이라는 단어가 우연히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신앙과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와 그 뒤의 회복이라는 문맥이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영적 질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다만 단8의 ‘이천삼백’을 AC.22에서 별도의 예언 시간표로 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기서는 그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초점은 신앙이 없는 상태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는 상태가 ‘아침’이라는 데 있으며, 이를 통해 주님의 오심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22에서 단8:14, 26을 읽을 때도 숫자의 계산보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황폐한 상태에서 주님의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되는 구조를 붙드는 것이 본문의 논지에 더 충실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AC.22 전체를 하나로 묶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아침’이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따라서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모든 오심’은 주님의 역사적 성육신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이전의 어두운 상태에 빛이 시작되고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모든 경우에 ‘아침’이라는 영적 표현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아침은 새로운 창조의 표현이 됩니다. 창1의 창조가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설명과도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22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단순히 어두웠다가 밝아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 자신의 것에서 주님께 속한 것으로,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에서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로 나아가는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오심이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밤을 아침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심으로 아침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교회의 회복에서도 ‘아침’이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이유입니다. (AC.22 해설)

 

심화

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 심화 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 심화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를 처음 읽을 때 가장 어리둥절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단8:14, 26의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

bygrace.kr

 

 

 

AC.23, 창1:5, ‘날이 뜻하는 시간과 상태 : 거듭남의 날들을 읽는 원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ygrace.kr

 

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light day, and the darkness he called night.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4, 5)

 

AC.21

‘빛’(light)은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선’(good)이라고 합니다. 주님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둠’(darkness)은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데, 이는 악이 선처럼 보였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어둠이며, 단지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proprium에 속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아직 남아 있는 것들입니다.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낮’(day)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밤’(night)에 비유됩니다. 이러한 비유들은 말씀에 자주 나옵니다. Light is called “good,” because it is from the Lord, who is good itself,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 Whatsoever is of the Lord is compared to “day,” because it is of the light; and whatsoever is man’s own is compared to “night,” because it is of darkness. These comparisons frequently occur in the Word.

 

해설

AC.21은 바로 앞 AC.20에서 처음 나타난 ‘빛’이 무엇이며, 그 빛이 이전의 ‘어둠’과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설명합니다. AC.20에서 사람은 처음으로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하고, 빛 안으로 더 들어가면서 주님이 계시며 그분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이심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AC.21에서는 그 첫 빛이 비침으로써 이전에는 구별할 수 없었던 두 근원이 드러납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4의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는 거듭남 가운데 일어나는 매우 중요한 분별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빛’이 선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아주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며, 주님은 ‘선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21에서 선을 판단하는 궁극적인 기준은 사람이 그것을 얼마나 선하게 느끼는가, 사회적으로 얼마나 칭찬받는가, 심지어 종교적으로 얼마나 경건해 보이는가에 있지 않습니다. 선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AC.20에서 ‘주님이 선 자체요 진리 자체’라고 한 설명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빛이 나타났다는 것은 단지 사람이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 참으로 주님에게서 오는지를 분별할 가능성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해 ‘어둠’은 흥미롭게도 처음부터 어둠처럼 보였던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새로 잉태되고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악이 선처럼 보이고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둠인 것들이 ‘빛처럼 보였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21에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영적인 어둠의 위험은 사람이 언제나 ‘나는 지금 어둠 속에 있다’고 느끼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악을 선이라고 여기고 거짓을 진리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빛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AC.20의 첫 빛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빛이 비치기 전에는 어둠을 어둠으로 분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proprium에 속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proprium을 단순히 인간의 개성, 재능, 성격 같은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의 문맥에서 말하는 proprium은 사람이 선과 진리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자기에게서 생각하고 의도하며 행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상태와 깊이 관련됩니다. 따라서 ‘사람 자신의 것’이 어둠이라는 말은 인간의 모든 자연적 능력이나 개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것이 영적으로는 빛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표현은 이러한 것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첫 빛을 받았다고 해서 이전의 proprium에 속한 것들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AC.20에서도 사람은 자기의 선들이 선이 아님을 ‘알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AC.21에서도 이전에 빛처럼 보였던 어둠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달라진 것은 이제 그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빛 사이에 구별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첫 단계는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한순간에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이전에는 하나처럼 보였던 것을 주님의 빛 가운데 서로 다른 것으로 보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 때문에 창1:4의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에서 분별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빛으로 자기 어둠을 완전하게 밝혀내는 것이 아닙니다. AC.20에서 빛 자체가 주님에게서 왔듯이,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를 참으로 분별하게 하는 기준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느낌과 판단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빛 안에서 자신을 살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전에는 선처럼 보였던 악과 진리처럼 보였던 거짓이 무엇이었는지 점차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어 창1:5의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빛에 속하므로 ‘낮’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어둠에 속하므로 ‘밤’에 비유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도 기준은 근원입니다. ‘낮’은 단순히 기분이 밝거나 신앙생활이 잘되는 때를 뜻하고 ‘밤’은 낙심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때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속한 것은 낮이며,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것은 밤입니다. 이 비유가 말씀에 자주 나온다고 스베덴보리가 덧붙이는 것도 빛과 어둠, 낮과 밤의 이러한 구별이 말씀 전체에서 반복되는 영적 언어임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21에서는 아직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의 의미까지 앞당겨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음 AC.22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다룹니다. AC.21의 초점은 먼저 빛과 어둠이 ‘나뉘고’, 그것들이 낮과 밤으로 불린다는 데 있습니다. 첫 빛이 비친 뒤 사람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 구별이 없으면 사람은 여전히 자기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어둠을 빛으로 오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AC.21은 거듭남에서 ‘분별’이 얼마나 근본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전에는 악이 선처럼, 거짓이 진리처럼 보였지만 주님의 빛이 비치면서 그 둘이 나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 자신의 것이 즉시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한 번 빛을 보았다는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에게서 오는 것과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을 구별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AC.20이 ‘빛의 첫 인식’을 말했다면 AC.21은 그 빛으로 비로소 시작되는 ‘빛과 어둠의 분별’을 보여 줍니다. (AC.21 해설)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 심화1. ‘빛처럼 보였던 어둠’과 proprium : 실제 사례들 AC.21의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라는 표현은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거듭남 이전에 악을 언제나 악처럼 느

bygrace.kr

 

 

 

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bygrace.kr

 

AC.20, 창1:3, ‘빛의 첫 인식 :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알고 주님을 알기 시작하는 때’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으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생명이 없습니다. 이러한 선과 진리들은 부드러운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되며, 이에 관해서는 이어지는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해설

AC.9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를 매우 짧게 설명하지만, 실제 신앙생활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단락입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에게 실제 변화가 나타납니다. 그는 회개하기 시작하고,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같은 선을 행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미 상당히 거듭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바로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 사람은 아직 이러한 것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 때문에 AC.9를 ‘세 번째 상태에서는 사람이 위선적으로 선을 행한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가 거짓으로 경건한 척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실제로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선을 행합니다. 회개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거짓 신앙의 상태라기보다 거듭남이 실제로 진행되고 있으나 아직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심으로 선을 행하면서도 속으로는 ‘내가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결심했다’, ‘내가 선을 행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 때문에 그 사람이 행하는 것들이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상당히 강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 사람이 행한 모든 선행이 아무 가치도 없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선행의 외적인 모양이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입니다. AC.2에서 이미 말씀의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했듯이, 인간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도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이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동안에는 아직 그 근원을 자기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AC.8과 AC.9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AC.8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구별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사람이 곧바로 자신의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삶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9에서는 바로 그 중간 상태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이미 선을 원하고 행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악을 행하던 사람이 선을 행하게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면서 그 선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배우는 과정까지 포함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고 인정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서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회개도 해야 하고 악을 피해야 하며 선도 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된 선의 능력과 생명이 자기 고유의 것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인정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 번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태는 신앙생활에서 매우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전보다 성경을 열심히 읽고, 기도하고, 이웃을 돕고, 교회에서 봉사하며,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 변화 때문에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신앙적이라고 여기거나, ‘나는 이 정도로 변화했다’며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기 시작한다면 아직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AC.9는 바로 이 미묘한 자기 귀속을 드러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 것도 거듭남 가운데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문제입니다.

 

마지막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과 진리를 ‘부드러운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창1:11-13의 셋째 날과 연결됩니다. 아직 완성된 생명이 아니라 처음 땅에서 싹트기 시작하는 생명입니다. 특히 식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전의 혼돈과 흑암의 상태에 비하면 분명한 진전입니다. 인간 안에서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없다’는 표현만 떼어 이 세 번째 상태 전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거듭남의 길을 걷고 있으며, 다만 그 선과 진리의 참된 생명의 근원을 아직 충분히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이 다음 상태로 나아가는 데 중요합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 선을 행한다’는 데서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선을 행할 수 있게 하신다’는 인식으로 옮겨 갑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책임과 행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성실하게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되 그 선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AC.9가 앞으로 열어 놓는 거듭남의 중요한 방향입니다.

 

따라서 AC.9의 세 번째 상태는 매우 역설적인 단계입니다. 사람은 이미 회개하고 있으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을 행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선을 행하는 가운데 아직 남아 있는 proprium이 드러납니다. ‘내가 했다’는 생각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선을 행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꺾으시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릴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 번째 상태는 ‘선을 행하기 시작한 상태’이면서 동시에 ‘그 선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배우기 시작해야 하는 상태’입니다. (AC.9 해설)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 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 심화1. ‘속 사람으로부터 행한 선인데 왜 생명이 없는가?’ AC.9를 읽으면 얼핏 모순처럼 보이는 문장이 나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독실하게 말하며 체어리티의 일과

bygrace.kr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AC.9 심화2. ‘체어리티(charity)란 무엇인가?’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charity’는 우리말 한 단어로 온전히 옮기기 매우 어려운 중요한 용어입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

bygrace.kr

 

 

 

AC.10, 창1 개요,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네 번째 상태’

AC.10네 번째 상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는 이전에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들을 행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가 겪고 있던 시험과 곤경의 결과였으며, 신앙과

bygrace.kr

 

AC.8, 창1 개요,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이 구별되는 두 번째 상태’

AC.8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불리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온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