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4.심화
1. 왜 AC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과 진리’를 말하는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왜 이 책은 처음부터 계속 선과 진리 이야기인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그리고 이제 AC.44에서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까지 비슷한 구도가 계속 나타납니다. 창세기에는 빛과 어둠, 물과 땅, 풀과 나무, 해와 달, 물고기와 새, 짐승이 나오는데,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다시 인간 안의 선과 진리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질문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 질문을 잘 이해하면 앞으로 AC를 읽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수많은 교리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두 주제로 골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생명과 거듭남을 설명할 때 이 둘의 관계가 매우 근본적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인간을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사람에게는 무엇인가를 알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면이 있고,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원하며 행하는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크게 이해와 의지로 구별합니다. 진리는 이해와 특별히 관계되고 선은 의지와 특별히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 = 이해, 선 = 의지’라는 기계적인 공식으로만 외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좋아하고 원하여 실제로 행하는 것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AC.44가 바로 그 문제를 매우 실제적인 언어로 보여 줍니다. 말씀을 ‘듣는 것’은 이해의 역할이고, 그것을 ‘행하는 것’은 의지의 역할입니다. 사람은 들으면서 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참인지 알면서도 그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신앙을 말하면서도 그 신앙에 따라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의 문제는 추상적인 철학이 아니라 ‘내가 아는 진리가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하나가 되어 있는가?’라는 삶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창세기 1장을 설명하면서 이 문제가 계속 나타날까요? 지금 스베덴보리가 창조 이야기를 한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속뜻으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진리가 비치고, 서로 다른 것들이 구별되고, 지식이 생기고, 그 지식들이 살아나며, 마침내 이해에 속한 것뿐 아니라 의지에 속한 것들도 새롭게 되어 갑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날들이 진행될수록 선과 진리의 관계도 같은 모습으로 단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다른 단계에서 나타납니다.
이 점에서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 ‘행함과 들음’을 완전히 같은 말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며 사용되는 문맥도 다릅니다. 그러나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와 관계되고 사랑은 선과 관계되며, 이해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기능과 관계되고 의지는 선을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서로 다른 용어들이 계속 선과 진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천국을 설명할 때도 선과 진리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생명은 단순히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 상태도 아니고, 막연히 좋은 감정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태도 아닙니다. 천사들의 생명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그것들이 결합된 삶과 관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거듭남도 결국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며, 선과 진리의 결합은 그 설명에서 계속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 그리고 궁극적으로 주님을 다룬다고 봅니다. 따라서 말씀 속의 수많은 자연물과 사건이 속뜻에서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의 여러 상태와 관계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성경의 모든 단어를 ‘이것은 선, 저것은 진리’라는 두 칸짜리 표에 넣어 해석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응은 훨씬 다양하고 문맥에 따라 세밀하게 달라집니다. 다만 그 다양한 상응들이 결국 사람의 사랑과 신앙,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의 상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선과 진리는 둘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경쟁 구도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만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지만, ‘마음만 착하면 진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이 선인지 알기 위해 진리가 필요하고, 알게 된 진리는 실제 선한 삶을 향해야 합니다. AC.44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 사람 안에 심겨야 한다고 한 뒤 곧바로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의 결합을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따라서 AC에서 선과 진리가 계속 등장하는 것을 ‘또 같은 이야기’라고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번에는 선과 진리의 관계가 거듭남의 어느 단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라고 물으며 읽으면 좋습니다. 창조 첫째 날의 빛에서 말하는 진리와 여섯째 날의 이해와 의지의 관계는 똑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거듭남이 진행됨에 따라 같은 근본 문제가 점점 더 깊은 차원에서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계속 말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사람의 영적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삶을 이루는 것과 깊이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AC를 읽을 때 선과 진리가 또 나왔다고 생각하기보다, ‘이번에는 이 둘이 어떻게 만나고 있으며, 아직 무엇이 분리되어 있고, 거듭남이 그것을 어떻게 하나로 만들어 가는가?’라고 살펴보면 글의 흐름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끝까지 선, 진리 이야기만 한다’는 첫인상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두 단어를 되풀이하는 책이라기보다, 인간의 내면이 주님에 의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지를 선과 진리의 관계를 통해 아주 오랫동안, 여러 각도와 여러 단계에서 추적하는 책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AC.44, 창1:24-25, ‘지식에서 생명으로 : 이해와 의지가 하나 될 때 나타나는 참된 신앙’(AC.44-48)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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