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

There Is a Correspondence

of All Things of Heaven

with All Things of Man

 

 

87.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이라는 게 뭔지 오늘날 사람들은 모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를 천국으로부터 멀어지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What correspondence is, is not known at the present day, for several reasons, the chief of which is that man has withdrawn himself from heaven by the love of self and love of the world.

 

자기 자신과 세상을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세상일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세상일은 그의 외적 감각에 어필하며, 그의 타고난 성향을 만족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적인 일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건 내적 감각에 어필하며, 내면을 기쁘게 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그는 그런 것들은 옆으로 제쳐놓고 말합니다. 이런 건 자기한텐 너무 고차원적이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For he that loves self and the world above all things gives heed only to worldly things, since these appeal to the external senses and gratify the natural longings; and he does not give heed to spiritual things, since these appeal to the internal senses and gratify the mind, therefore he casts them aside, saying that they are too high for his comprehension.

 

고대인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This was not so with the ancient people.

 

그들에게는 상응 지식은 여러 지식들 중에서 가장 주된 지식이었습니다. To them 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was the chief of knowledges.

 

그것으로 그들은 지성과 지혜를 얻었으며,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것으로 천국과 커뮤니케이션을 했습니다. 상응 지식은 천사의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By means of it they acquired intelligence and wisdom; and by means of it those who were of the church had communication with heaven; for 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is angelic knowledge.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었던 태고인들은 천사들처럼 상응 자체로 생각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who were celestial men, thought from correspondence itself, as the angels do.

 

그래서 그들은 천사들과 대화했고, 주님도 자주 그들에게 나타나셨으며, 직접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And therefore they talked with angels, and the Lord frequently appeared to them, and they were taught by him.

 

그러나 오늘날은 이 지식을 완전히 잃어버려서 아무도 상응이라는 게 뭔지 모를 지경이 되었습니다.72 But at this day that knowledge has been so completely lost that no one knows what correspondence is.72

 

 

88. 상응이 무엇인지를 모르고서는 영계(靈界, the spiritual world)라든지, 영계에서 자연계로 흘러드는 어떤 흐름(inflow)이라든지, 그리고 영계와 자연계 간 관계며, 영혼(the soul)이라 하는 사람의 영(the spirit of man)에 대한 것과, 이 영이 사람의 신체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또 사람의 사후 상태 등에 관한 어떠한 설명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상응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본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이 먼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Since, then, without a perception of what correspondence is there can be no clear knowledge of the spiritual world or of its inflow into the natural world, neither of what the spiritual is in its relation to the natural, nor any clear knowledge of the spirit of man, which is called the soul, and its operation into the body, neither of man’s state after death, it is necessary to explain what correspondence is and the nature of it.

 

이것은 앞으로 이어질 내용에 대한 일종의 길이 될 것입니다. This will prepare the way for what is to follow.

 

 

89. 먼저, 상응이란 무엇인가입니다. First, what correspondence is.

 

자연계 전체가 영계와 상응하며, 이는 대략적으로뿐 아니라 자연계를 구성하는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렇게 영계로부터 생겨나는 자연계 내 모든 것을 가리켜 상응물이라 합니다. The whole natural world corresponds to the spiritual world, and not merely the natural world in general, but also every particular of it; and as a consequence everything in the natural world that springs from the spiritual world is called a correspondent.

 

정확히 원인과 결과처럼, 자연계는 영계로부터 생겨나며, 영계에 의해 영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꼭 이해해야 합니다. It must be understood that the natural world springs from and has permanent existence from the spiritual world, precisely like an effect from its effecting cause.

 

해 아래 퍼져나가는 모든 것, 그리고 해의 열과 빛을 받는 모든 것을 자연계라 합니다. 자기들의 최소한의 것을 자연계로부터 받는 모든 것은 그 세계에 속합니다. All that is spread out under the sun and that receives heat and light from the sun is what is called the natural world; and all things that derive their subsistence therefrom belong to that world.

 

반면, 영계는 천국입니다. 천국에 있는 모든 것은 그 세계에 속합니다. But the spiritual world is heaven; and all things in the heavens belong to that world.

 

 

90. 사람은 가장 큰 이미지를 닮은 가장 작은 형태의 천국이요, 세상이기 때문에(※ 위 57번 글 참조), 사람 안에는 영계와 자연계 둘 다 존재합니다. Since man is both a heaven and a world in least form after the image of the greatest (see above, n. 57), there is in him both a spiritual and a natural world.

 

사람의 마음(mind)에 속하고, 또 사람의 이해와 의지(understanding and will)에 관련되는 내부의 일들은 사람의 영계를 이루는 반면, 사람의 몸에 속하고, 또 감각과 행동에 관련되는 외부의 일들은 사람의 자연계를 이룹니다. The interior things that belong to his mind, and that have relation to understanding and will, constitute his spiritual world; while the exterior things that belong to his body, and that have relation to its senses and activities, constitute his natural world.

 

따라서, 사람의 영계로 말미암아 (즉, 사람의 마음 및 이해와 의지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사람의 자연계의 (즉, 사람의 몸 및 몸의 감각과 행동들의) 모든 것을 상응이라고 합니다. Consequently, everything in his natural world (that is, in his body and its senses and activities), that has its existence from his spiritual world (that is, from his mind and its understanding and will) is called a correspondent.

 

 

91. 사람의 얼굴을 보면 상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From the human face it can be seen what correspondence is.

 

꾸미는 걸 배운 적이 없는 얼굴에서는 마음의 모든 어펙션(affection, 애정, 애착)이 유형에 따라 자연적 형태로 나타나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In a face that has not been taught to dissemble, all the affections of the mind present themselves to view in a natural form, as in their type.

 

이것이 왜 얼굴을 가지고 마음의 표지라 하는지 하는 이유입니다. 즉, 얼굴은 자연계에 드러난, 사람의 영계인 것입니다. This is why the face is called the index of the mind; that is, it is man’s spiritual world presented in his natural world.

 

같은 식으로, 이해에 관련된 것은 말로(in speech) 나타나고, 의지에 관련된 것은 몸의 움직임으로 나타납니다. So, too, what pertains to the understanding is presented in speech, and what pertains to the will is presented in the movements of the body.

 

그래서 몸에 나타나는 모든 것, 그것이 얼굴 표정이든, 말이든 아니면 몸의 무슨 움직임이든 다 상응이라고 합니다. So whatever effects are produced in the body, whether in the face, in speech, or in bodily movements, are called correspondences.

 

 

92. 또한 이 모든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속 사람이 무엇이며, 겉 사람이 무엇인지, 즉, 속 사람은 영적인 사람(the spiritual man), 겉 사람은 자연적인 사람(the natural man)이라 한다는 사실과, 또 이 둘이 다른 것이 마치 천국이 세상과 다르듯 다르다는 사실과, 또 겉 사람 혹은 자연적인 사람 안에서 발생하여 진행되는 모든 일은 그전에 속 사람 혹은 영적인 사람에게서 발생하여 진행되는 것이라는 사실 등입니다. All this shows also what the internal man is and what the external, namely, that the internal is what is called the spiritual man, and the external what is called the natural man; also that the one is distinct from the other as heaven is from the world; also that all things that take place and come forth in the external or natural man take place and come forth from the internal or spiritual man.

 

 

93. 사람의 속 혹은 영적인 것과 사람의 겉 혹은 자연적인 것 사이 상응에 대해서는 이 정도면 충분히 말씀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천국 전체와 사람에게 관련된 모든 것 사이 상응에 관해서 다루겠습니다. This much has been said about the correspondence of man’s internal or spiritual with his external or natural; now the correspondence of the whole heaven with everything pertaining to man shall be treated of.

 

 

94. 지금까지 천국 전체가 한 사람을 반영한다는 것과, 이 사람 모습의 이미지를 가장 큰 사람이라 한다는 걸 쭈욱 보여드렸습니다. It has been shown that the entire heaven reflects a single man, and that it is in image a man and is therefore called the greatest man.

 

또 천사 공동체들, 천국이 이들로 구성되는데, 이런 이유로, 이들은 마치 사람의 지체, 기관 및 내장들처럼 배치되어 있음도 쭈욱 보여드렸습니다. 즉, 일부는 머리에, 일부는 가슴에, 일부는 팔에, 이런 식으로 저마다 자신의 해당 부위에 있다고 말이지요. (※ 위 59 – 72번 글 참조) 그 결과, 어느 지체에 있는 공동체들은 사람의 해당 지체와 상응하고, 머리에 있는 공동체들은 사람의 머리와, 가슴은 가슴과, 그렇게 다른 모든 부분들도 서로 상응합니다. It has also been shown that the angelic societies, of which heaven consists, are therefore arranged as the members, organs, and viscera are in man, that is, some are in the head, some in the breast, some in the arms, and some in each of their particulars (see above, n. 59–72); consequently the societies in any member there correspond to the like member in man; those in the head corresponding to the head in man, those in the breast to the breast in man, those in the arms to the arms in man; and so with all the rest.

 

이런 상응이 있어 사람은 존재를 지속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늘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천국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It is from this correspondence that man has permanent existence, for from heaven alone does man have permanent existence.

 

 

95. 천국이 두 나라,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the spiritual kingdom)로 나뉜다는 것도 앞서 해당 장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That 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 one called the celestial kingdom and the other the spiritual kingdom, may be seen above in its own chapter.

 

천적 나라는 보통 심장과 체내(體內, in the whole body) 심장과 관련된 모든 것과, 그리고 영적 나라는 폐와 체내 폐와 관련된 모든 것에 각각 상응합니다. The celestial kingdom corresponds in general to the heart and all things of the heart in the whole body, and the spiritual kingdom to the lungs and to all things of the lungs in the whole body.

 

사람 안에서 심장과 폐, 곧 동맥과 정맥을 통해 그와 관련된 나라를 다스리는 심장과, 힘줄과 운동 섬유를 통해 그와 관련된 나라를 다스리는 폐, 이렇게 둘이 함께 두 나라를 이루며, 모든 노력과 움직임 등 전체 활동을 관장합니다. Likewise in man heart and lungs form two kingdoms, the heart ruling there through the arteries and veins, and the lungs through the tendinous and motor fibers, both together in every exertion and movement.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영계에, 곧 그것이 그의 영적인 사람인데요, 거기에 두 나라, 곧 하나는 의지의 나라, 다른 하나는 이해의 나라가 있습니다. 선을 위한 애정으로 다스리는 의지의 나라와 진리를 위한 애정으로 다스리는 이해의 나라입니다. 이들 두 나라는 각각 몸의 심장과 폐의 나라와 상응합니다. So in every man, in his spiritual world, which is called his spiritual man, there are two kingdoms, one of the will and the other of the understanding, the will ruling through affections for good, and the understanding through affections for truth; and these kingdoms correspond to the kingdoms of the heart and of the lungs in the body.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적 나라는 천국의 자원하는 파트로서 거기는 사랑의 선이 다스리는 곳입니다. 영적 나라는 천국의 지성 파트로서, 거기는 진리가 다스리는 곳이지요. It is the same in the heavens; the celestial kingdom is the voluntary part of heaven, and in it good of love reigns; the spiritual kingdom is the intellectual part of heaven, and in it truth reigns.

 

이들이 사람 안 심장과 폐 기능에 각각 상응하는 것입니다. These are what correspond to the functions of the heart and lungs in man.

 

말씀에서 ‘마음’(심장, heart)이 의지와 및 사랑의 선을, 그리고 폐의 ‘숨’(breath)이 이해와 신앙의 진리를 각각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런 상응의 연유가 있어서입니다. It is on account of this correspondence that in the Word the “heart” signifies the will and also good of love, and the “breath” of the lungs signifies the understanding and the truth of faith.

 

같은 이유로, 심장으로 애정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전혀 그 안에 있지도 않고, 그것으로 말미암지도 않는 데 말입니다.73 For the same reason affections are ascribed to the heart, although they are neither in it nor from it.73

 

 

※ 각주

 

72. 상응 관련 지식은 다른 지식들보다 월등히 탁월합니다. (n. 4280) How far 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excels other knowledges (n. 4280).

 

상응 지식은 고대의 사람들에게는 가장 주된 지식(the chief knowledge)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에게는 완전히 잊혀진 지식입니다. 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was the chief knowledge of the ancient people; but at the present day it is wholly forgotten (n. 3021, 3419, 4280, 4749, 4844, 4964, 4966, 6004, 7729, 10252).

 

상응 지식들은 동방 국가들과 이집트에서 번창했습니다. The knowledge of correspondences flourished among the Eastern nations and in Egypt (n. 5702, 6692, 7097, 7779, 9391, 10407).

 

 

73. 천국에 있는, 가장 큰 사람의 심장과 폐의 상응에 관하여, 경험 이야기 The correspondence of the heart and lungs with the Greatest Man, which is heaven, from experience (n. 3883–3896).

 

심장은 천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하고, 폐는 영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하고 상응합니다. The heart corresponds to those in the celestial kingdom, and the lungs to those in the spiritual kingdom (n. 3885–3887).

 

천국에 마치 심장의 고동과 같은 어떤 고동과 폐의 호흡과 같은 어떤 호흡이 있습니다. 내적으로 말이지요. There is in heaven a pulse like that of the heart, and a respiration like that of the lungs, but interior (n. 3884, 3885, 3887).

 

거기 심장의 고동은 사랑의 상태에 순응하는 정도에 따라 다양하며, 호흡은 체어리티와 신앙의 상태에 순응하는 정도에 따라 다양합니다. There the pulse of the heart varies in conformity to states of love, and the respiration in conformity to states of charity and faith (n. 3886, 3887, 3889).

 

말씀에서, ‘심장’은 의지를, ‘심장으로부터’는 의지로부터를 의미합니다. In the Word the “heart” means the will, and “from the heart” means from the will (n. 2930, 7542, 8910, 9113, 10336).

 

또 말씀에서, ‘심장’은 사랑을, ‘심장으로부터’는 사랑에서부터를 의미합니다. In the Word the “heart” also signifies love, and “from the heart” means from love (n. 7542, 9050, 10336).

HH.1.12.87-95.'12장, 천국의 모든 것과 사람의 모든 것은 상응한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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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c6aV9ITt2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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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목은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라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정했습니다 ^^

 

그 이유는, 상당히 많은 기독교인이 ‘세 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사후 영계로 들어오기 때문인데요,

 

저 역시, 신대원 시절, 조직신학 시간, 어느 책인가...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너무 신선하게 와닿아 그다음부터는 각종 기도나 글, 설교 때, 참 많이도 썼던 생각이 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천국은 이 ‘세 분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한 분 주님’으로 모은 사람만이 들어가는 나라라는 것이며, 여기 ‘모았다’라는 표현은, 겉으로도 그렇게 말하고, 속으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걸 의미합니다.

 

이것은 천국이 내면의 나라, 내적(內的, internal) 나라이기 때문인데요,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속으로는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천국은 내가 속으로 하는 생각을 모두가 들을 수 있기 때문!

 

즉, 천국에서 하는 생각은 ‘소리 나는 생각’이기 때문이며, 그래서 속으로는 ‘세 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한 분 주님’을 말하는 사람은 그 즉시 드러나게 되고, 그 결과, 함께 할 수 없어 천국적인 방법으로 솎아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상적인 사람이면 저럴 수도 없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삼위일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합니다만...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비롯, 좀 깊은 교리적 이야기는 시간이 흐른 뒤 다루게 되면 다루겠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에 빗대어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은 영과 육, 그리고 활동이 있어 '사람'이듯 ‘주님’도 이 세 요소(?)가 있어 '한 분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속 사람, 곧 영에 해당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신성(the Divine)으로, 주님의 겉 사람, 곧 육에 해당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 인성(the Divine Human)으로, 그리고 활동에 해당하는 ‘성령’(the Holy Spirit, the Divine Proceeding)께서 주님으로부터 발출(發出, proceeding)되는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로, 이렇게 세 요소가 한 분 주님으로 계신 것을 삼위일체라 하며,

 

사람’한테서 영 따로, 육 따로, 그리고 활동 따로 떼어 생각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듯, 주님도 ‘한 분 주님’을 ‘세 하나님’, 곧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으로 따로따로 떼어 생각하는 순간, 주님은 더 이상 ‘한 분 주님’이 아니신 것입니다.

 

저도 이걸 극복하는데 참 오래 걸렸습니다만 저만 그런가요? 우리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개신교를 포함, 이 신(神)관 극복(?)이 결코 쉽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주님의 빛을 구합니다...

 

아, 그럼, 나는 어떡하지? 난 나이도 많은데다가 이걸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는데...’ 하시는 분들도 분명 계실 텐데요, 하지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세상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를 따라 사신 분들, 말로만이 아닌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진실한 삶을 사신 분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이해가 안 가더라도 사후, 천사들의 오리엔테이션을 받으실 때, 천국 빛으로 환해지고 밝아져 그때 주님에 대한 이런 사실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 곧 겉으론 교회를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을 엄청 오래 하셨어도 실제로는 악인의 삶, 곧 자기를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한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이러한 개념을 절대로 못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잠깐, 주님의 신성 호칭인 ‘여호와 하나님’과 신적 인성 호칭인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좀 나누겠습니다.

 

주님의 신성은 선과 진리로 되어 있으며, 그래서 주님의 호칭들은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주님의 신성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이 ‘여호와’요, 진리에 대한 호칭이 ‘하나님’이며, 주님의 신적 인성 호칭 중 선에 대한 호칭이 ‘예수’요, 진리에 대한 호칭이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지금 말씀을 열고, 확인하셔도 됩니다. 왜 어디는 ‘여호와’라 하시고, 또 어디는 ‘하나님’이라 하시는지, 왜 어디는 ‘예수’라 하시고, 또 어디는 ‘그리스도’라 하시는지 말이죠 ^^

 

주님은 제자들에게 앞뒤 무슨 기다란 형용 없이 단순히 ‘주님’으로 부를 것을 명하셨고, 그래서 주님 부활하신 후, 제자들은 늘 ‘주님’으로만 불렀습니다.

 

이 ‘세 하나님’이 가장 예리하게(?) 표현되는 곳이 바로 예배 마칠 무렵 하는 축도가 아닐까 하는데요, 물론 사도 바울은 고후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에서, 주님을 ‘세 하나님’으로 나누고자 하려는 의도는 절대 아니었겠지만, 이상하게도, 그리고 본의 아니게, 자꾸 저도 모르게 나누게 되는 것 같아, 저는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는 축도 때 부르는 호칭을 ‘주 여호와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좀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

 

네, 하여튼 결론은,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라는 겁니다. 주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이십니다. 한 분 주님 안에 여호와 하나님이 신성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신적 인성으로 계시며, 그리고 성령이 신적 진리로 발출하십니다.

 

참고로, 주님에게서 나온 것은 곧 주님 자신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에게서 발출된 신적 진리한테서도 주님의 인격이 느껴지며, 주님의 능력과 임재가 수반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 번째 위를 성령이라 합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2021-11-19(D6)-천국이야기(4), '천국의 하나님은 주님이시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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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20. 3절,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Verse 3.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라는 것이 뭔가 더 높은 차원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 때부터 시작됩니다. The first state is when the man begins to know that the good and the true are something higher.

 

온통 겉 사람 뿐이기만 한 사람들은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선이라고 여기며, 그리고 또 이런 자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호의적인 모든 걸 진리로 여깁니다. 그런 선들은 악이요, 그런 진리들은 거짓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Men who are altogether external do not even know what good and truth are; for they fancy all things to be good that belong to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and all things to be true that favor these loves; not being aware that such goods are evils, and such truths falsities.

 

그러나 그에게 뭔가가 다시 시작될 때, 그때 그는 그동안 자기가 믿어왔던 선이 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빛 가운데로 더욱더 다가갈 때, 이 빛이 바로 주님이신데, 이분이 바로 선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라는 사실을 또한 처음으로 알게 됩니다.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

 

인간은 주님을 스스로 계시는 분으로 알아야 함을 주님은 요한복음에서 가르치십니다. That men ought to know that the Lord exists he himself teaches in John: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요8:24) Except ye believe that I am, ye shall die in your sins. (John 8:24)

 

사람은 주님의 존재,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만 한다는 위의 말씀과, 또 주님은 선 또는 생명 그 자체시며, 진리 또는 빛 그 자체시라는 사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주님이 아니면 선도,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람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Also, that the Lord is good itself, or life, and truth itself, or light, and consequently that there is neither good nor truth except from the Lord, is thus declared: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요1:1, 3-4, 9)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God was the Word. All things were made by him, and without him was not anything made that was made. In him was life, and the life was the light of men. And the light shineth in darkness. He was the true light, which lighteth every man that cometh into the world. (John 1:1, 3–4, 9)

AC.20, 창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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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DAg-125I6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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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

 

17.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Verse 2.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byssi]; and the spirit of God was brooding upon the faces of the waters.

 

거듭남 이전 상태의 사람을 가리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은 선과 진리의 씨 심긴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의 마음을, ‘혼돈’은 그 땅에 선이 전혀 없음을, ‘공허’는 진리가 전혀 없음을 각각 가리킵니다. Before his regeneration, man is called the “earth void and empty,” and also the “ground” wherein nothing of good and truth has been sown; “void” denotes where there is nothing of good, and “empty” where there is nothing of truth.

 

그래서 그 결과, 이런 사람은 필연적으로 ‘흑암’의 상태, 곧 주님 신앙에 속한 모든 것과 영적, 천국적(heavenly) 삶에 속한 모든 것에 매우 어리석고 무지한 심각한 상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Hence comes “thick darkness,” that is, stupidity, and an ignorance of all things belonging to faith in the Lord, and consequently of all things belonging to spiritual and heavenly life.

 

주님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예레미야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Such a man is thus described by the Lord through Jeremiah: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렘4:22-23) My people is stupid, they have not known me; they are foolish sons, and are not intelligent; they are wise to do evil, but to do good they have no knowledge. I beheld the earth, and lo a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Jer. 4:22–23)

 

 

18. ‘깊은 위에 있고’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탐욕과 거기서 비롯되는 거짓을 말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전적으로 이런 상태이며, 그 가운데 완전히 잠겨 있습니다. The “faces of the deep” are the cupidities of the unregenerate man, and the falsities thence originating, of which he wholly consists, and in which he is totally immersed.

 

이 상태에서는 빛이라는 게 전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깊다’, 뭔가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하는 것입니다. In this state, having no light, he is like a “deep,” or something obscure and confused.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 여러 곳에서는 ‘깊음들’, ‘바다 깊은 곳들’이라 하셨는데, 그것은 사람에게 거듭남이 시작되면서 바짝 ‘마르게 될’, ‘소진될’ 것입니다. Such persons are also called “deeps,” and “depths of the sea,” in many parts of the Word, which are “dried up,” or “wasted,” before man is regenerated.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As in Isaiah: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 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이 돌아와 (사51:9-11) Awake as in the ancient days, in the generations of old. Art not thou it that drieth up the sea, the waters of the great deep, that maketh the depths of the sea a way for the ransomed to pass over? Therefore the redeemed of Jehovah shall return. (Isa. 51:9–11)

 

이런 사람은 또 천국에서 보면 마치 까만 덩어리처럼, 활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아주 극심한 궁핍 덩어리로 보입니다. Such a man also, when seen from heaven, appears like a black mass, destitute of vitality.

 

마찬가지로 보통은 같은 표현을 써서 사람의 황폐함을 나타내는데요, 선지자들이 자주 그랬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상태는 주님의 자비로 다음 단계인 거듭남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람은 거듭남이 시작되면 진리라는 게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선이라는 것을 통해 마음에 감동이 시작되는데요, 그런데 이때 먼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안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고 반발하는 일체의 요소들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이 죽어야 하는 것이지요. 새사람이 그 안에 잉태되려면 반드시 이런 일이 먼저 일어나야 합니다. The same expressions likewise in general involve the vastation of man, frequently spoken of by the prophets, which precedes regeneration; for before man can know what is true, and be affected with what is good, there must be a removal of such things as hinder and resist their admission; thus the old man must needs die, before the new man can be conceived.

 

 

19. ‘하나님의 영’, 이 표현은 주님의 자비를 가리키는 표현인데요,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 ‘품으시니라’ 하신 것입니다. 마치 암닭이 알을 품에 품는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운행하시는 ‘수면 위’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사람 안에 숨기시고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시며 보관하여 오신 것들인데요, 말씀 전체를 통하여, 이것을 가리켜 ‘리메인스’(remains), 혹은 ‘남은 자’(a remnant)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으로 이루어지며, 외적인 일들, 겉의 일들이 황폐해질 때까지, 결코 빛으로, 낮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런 것입니다. The things over which it moves are such as the Lord has hidden and treasured up in man, which in the Word throughout are called remains or a remnant, consisting of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of the good, which never come into light or day, until external things are vastated.

 

이 지식을 가리켜 여기서 ‘수면 위’라 하신 것입니다. These knowledges are here called “the faces of the waters.

AC.17-19,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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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pGHTrKDB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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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67. 6절,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Verse 6. And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because their substance was great, so that they could not dwell together.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내적, 천적인 것에 속한 것들은 다른 것들과 함께 할 수가 없음을,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속 사람에 의해 습득된 것들은 겉 사람 안에 습득된 것들하고는 함께 할 수가 없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signifies that the things belonging to the internal celestial things could not be together with the others; “because their substance was great, so that they could not dwell together” signifies that the things that had been acquired by the internal man could not agree with those acquired in the external man.

 

 

1568.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이것은 내적, 천적인 것에 속한 것들은 다른 것, 곧 여기서는 ‘’으로 표상된, 그런 것들하고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This signifies that the things belonging to the internal celestial things could not be together with the others, that is, with those here signified by “Lot.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아브람은 주님, 여기서는 주님의 속 사람을 표상하는 반면, 롯은 주님의 겉 사람, 여기서는 주님의 겉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것들을 표상합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과 함께 지낼 수 없는 것들입니다. Abram, as before said, represents the Lord, here his internal man; but Lot represents his external man, here the things that were to be separated from the external man, with which the internal things could not dwell.

 

겉 사람 안에는 속 사람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한 애정(affections of good)이라든지, 거기서 나오는 기쁨과 즐거움(the delights and pleasures)이라든지 말이지요. 이런 건 속 사람의 선(the goods of the internal man) 및 기쁨과 행복(its joys and happiness)의 결과들, 효과들이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되면, 즉, 겉 사람에게 나타나는 이런 효과들은 속 사람과 완전한 상응 가운데 있게 되고, 그때 이들은 속 사람에게 속하게 됩니다. 겉 사람이 아니고 말입니다. There are many things in the external man with which the internal man can dwell, such as affections of good, and the delights and pleasures thence originating; for these are the effects of the goods of the internal man, and of its joys and happiness; and when they are the effects, they altogether correspond; and they are then of the internal man and not of the external.

 

이것은 알려진 대로, 효과가 아닌, 효과를 일으키는 원인에 속한 것이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면, 얼굴 가득 환히 빛나는 체어리티(charity)는 얼굴이 아닌, 내면에 있는 체어리티에 속한 것이며, 그것이 얼굴을 빛나게 하고, 겉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린아이들의 순진무구함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 표정이며, 몸짓이며, 자기들끼리 노는 모습 가운데 나타나는 순진무구함은 그 표정이나 몸짓에 속한 게 아니라 아이들의 영혼을 통해 아이들 안으로 흘러드는 주님의 순진무구하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전반적으로 순진무구함이 드러나는 것이며, 이런 것은 다른 모든 케이스들도 같습니다. For the effect, as is known, is not of the effect, but of the effecting cause; as, for example, the charity which shines forth from the face is not of the face, but is of the charity that is within, and which so forms the face, and presents the effect; or as the innocence of little children that shows itself in their looks, gestures, and play with each other, is not of the countenance or the gesture, but is of the innocence of the Lord that flows in through their souls; so that the manifestations of innocence are effects; and it is the same in all other cases.

 

[2] 이런 사실로 분명한 건, 겉 사람 안에는 속 사람과 같이 지내며 함께 할 수 있는 게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From this it is evident that there are many things in the external man that can dwell together and agree with the internal man.

 

하지만 그 반대, 곧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거나 같이 지낼 수 없는 것들 또한 무척 많다는 사실입니다. 자아 사랑, 세상 사랑이라는 샘에서 솟아나는 모든 케이스가 다 이런 건데요, 이런 건 모두 그 목적이 자기 자신이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But there are also very many which do not agree, or together with which the internal man cannot dwell; this is the case with all things that spring from the love of self, and from the love of the world, for all such things regard self as the end, and the world as the end.

 

이런 것들과, 주님 사랑, 이웃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the celestial things)들은 서로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 천적인 것들은 주님을 그 목적으로, 주님의 나라 및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모든 것들을 그 목적으로 삼고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With these the celestial things which are of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cannot agree; for these look to the Lord as the end, and to his kingdom and all things that are of him and his kingdom as the ends.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향한 목적은 밖이나 아래를(outward or downward) 향합니다만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향한 목적은 안이나 위를(inward or upward) 향합니다. 이 모든 것으로 분명한 건, 이 둘은 서로 절대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The ends of the love of self and the love of the world look outward or downward; but the ends of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look inward or upward; from all which it is evident that they disagree so much that they cannot possibly be together.

 

[3] 겉 사람과 속 사람 간 서로 상응하는 게 뭔지, 서로 함께 할 수 있거나 혹은 함께 할 수 없거나 하는 게 뭔지를 알려면 한 가지만 보면, 즉, 어떤 동기,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지, 혹은 같은 말이지만, 어떤 사랑으로 그러는지를 보면 됩니다. 사랑하는 게 사실은 목적이요, 무엇이든 귀히 여기는 그것이 곧 그런 행동의 근본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That it may be known what makes the correspondence and agreement of the external man with the internal, and what makes the disagreement, one needs only to reflect upon the ends which reign; or what is the same, upon the loves which reign; for the loves are the ends; for whatever is loved is looked to as the end.

 

살아온 삶의 퀄러티가 어떨 것인지, 그 결과, 사후 어떤 상황이 될지를 이런 걸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동기, 무슨 목적으로 살아왔는지, 나는 평생 무엇을 사랑하며 살았는지를 가지고 내가 살아온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의 삶이란 이것 말고 무슨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It will thus be evident of what quality the life is, and what it will be after death; for, from the ends, or what is the same, from the loves which reign, the life is formed; the life of every man is nothing else.

 

영원한 삶(생명)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 즉, 영적, 천적 삶, 이것이 영원한 삶인데, 세상 살 동안 제거되지 않아 아직 남아 있는 이런 것들은 저세상에서는 반드시 제거되는데요, 만일 저세상에서도 제거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면, 이런 사람은 영원히 불행해지는 것 말고는 무슨 다른 삶이 없습니다. The things that disagree with eternal life—that is, with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hich is eternal life—if not removed in the life of the body, must be removed in the other life; and if they cannot be removed, the man cannot be otherwise than unhappy to eternity.

 

[4] 다음과 같은 사실들, 곧 겉 사람 안에는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것들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과, 전자, 곧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은 후자, 곧 함께 할 수 없는 것들과 도저히 같이 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더 나아가, 겉 사람 안에 있는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은 속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며, 이는 곧,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는 사실, 이는 마치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것으로 빛나는 얼굴, 혹은 체어리티의 얼굴빛 같은 것이며, 혹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어린이들의 표정과 몸짓에 깃든 순진무구함 같은 것이라는 사실들을 지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These things are now said that it may be known that there are things in the external man which agree with the internal man, and things which disagree; and that those which agree cannot possibly be together with those that disagree; and further, that the things in the external man which agree, are from the internal man, that is, through the internal man from the Lord; like a face that beams from charity, or a face of charity; or like the innocence in the countenance and gestures of little children, as before said.

 

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은 사람과 사람 고유 본성에 속한 것입니다. But the things which disagree are of the man and what is his own.

 

이상 말씀드린 내용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의 의미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may be known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the land was not able to bear them that they might dwell together.

 

속뜻으로는, 이 본문은 주님에 관한 본문이며, 그래서 주님과, 주님 닮은 모든 것과 이미지 또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와 교회, 그리고 그 나라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 또한 그래서이며, 이렇게 사람들 안에 있는 것들을 여기서 다루어 나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In the internal sense, the Lord is here treated of; and because the Lord, every likeness and image of him is also treated of—his kingdom, the church, and every man of his kingdom or church; and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things which are in men are here set forth.

 

주님이 자신의 힘으로 악, 곧 마귀와 지옥을 정복하시고, 또한 그래서 그 인성(his human essence)에 대하여 천적(celestial)이 되시고, 신성(Divine)이 되시며, 여호와가 되시기 전, 주님께 속한 것들을 지금 주님의 예전 상태와 관련하여 살피고 있습니다. The things appertaining to the Lord, before he from his own power overcame evil, that is, the devil and hell, and so became celestial, Divine, and Jehovah, as to his human essence also, are to be considered relatively to the state in which he then was.

 

 

1569.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Because their substance was great, so that they could not dwell together.

 

이는 속 사람을 통해 습득된 것들은 겉 사람 안에 있는, 겉 사람을 통해 습득된 것들하고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의미라는 것을, 방금 말씀드린 내용을 통해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things that had been acquired by the internal man could not agree with those acquired in the external may be seen from what has just been said.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6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속뜻)

겉 사람 안에 있는 것으로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 안에 있는 것과 함께 갈 수 있는 것들은 속 사람에게 속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것, 곧 자기 사랑, 세상 사랑에 속한 것들은 속 사람에게 속할 수 없어 둘 사이 분리가 일어난다

 

※ 우리가 사랑하는 그것이 곧 우리의 운명을 결정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것을 목적으로 모든 걸 의도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속 사람 안에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 곧 우리 인생 전체를 통해서 해야 할 한 가지 일은, 우리의 겉 사람을 속 사람에게 맞추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영계는 겉과 속이 같이 가는 상태의 나라요, 천국은 속 사람의 상태, 곧 주님의 것으로 살아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삶은 겉과 속이 달라도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에 속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서도 늘 속에 맞춰서, 곧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을 목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겉을 속을 향해 정돈하는 것입니다.

2021-11-17(D4)-매일예배(2236, AC.1567-1569, 창13,6),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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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H9OSZwv0P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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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62. 5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Verse 5.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아브람의 일행 롯도’, 주님 안에 있었던 겉 사람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겉 사람에게 있는 풍성한 것들을 각각 의미하며, ‘양과 소’는 겉 사람의 소유들을, ‘장막’은 겉 사람의 예배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이런 것들은 스스로를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하고 있었습니다.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signifies the external man that was in the Lord;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signifies those things in which the external man abounds; “flock and herd” are the external man’s possessions; “tents” are his worship: these things were separating themselves from the internal man.

 

 

1563. 아브람의 일행 롯도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이것이 ‘주님 안에 있었던 겉 사람을 의미함’은 롯(Lot)이 표상하는 바가 감각적인(sensuous) 사람, 같은 말이지만, 겉 사람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external man that was in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of Lot as being the sensuous man, or what is the same, the external man.

 

누구나 다 그 안에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있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사람은 겉과 속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얘깁니다. (※ 전에 말씀드린 내용에 대해 보시려면 AC.978, 994-995, 1015 참조) That there is an internal and an external in every man, or what is the same, that man is internal and external, is known to everyone within the church (concerning which see what has been said before, n. 978, 994–995, 1015).

 

겉 사람은 그 생명을 주로 속 사람, 즉, 영이나 혼으로부터 받습니다. The external man receives its life principally from the internal man, that is, from the spirit or soul.

 

겉 사람의 생명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속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겉 사람의 유기적 그릇들(organic vessels), 곧 속 사람 특유의 것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담게 되어 있는, 겉 사람에게 있어 속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그릇들이 열리지 않는 한, 겉 사람한테 어떻게든 담길 수가 없습니다. Thence comes its very life in general; but this life cannot be received in its particulars, or distinctly, by the external man, unless its organic vessels are opened, which must be the recipients of the particulars and the singulars of the internal man.

 

※ 일단 무엇이든 뭘 담으려면 먼저 뚜껑이 열려야 하는데 안 열린다는 말이지요.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오직 주님의 생명,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에 대해서만 열리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이라고 다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모든 감각적 즐거움도 그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 안에서 그 쓰임새를 따라 누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활짝 열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정욕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때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 건 생명이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겉 사람의 생명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데 둘 사이 무슨 불일치가 있어 그릇이 안 열리고, 그래서 속 사람의 생명이 겉 사람에게 흘러들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수용체 노릇을 하게 될 이들 유기적 그릇들은 감각들, 특히 청각과 시각이라는 감각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그릇들이 열리면 속 사람은 속 사람 특유의 것들을 가지고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습니다. These organic vessels, which are to be the recipients, are not opened except by means of the senses, especially those of hearing and sight; and, as they are opened, the internal man can flow in with its particulars and singulars.

 

그릇들은 감각들을 매개로 해서 지식과 즐거움, 기쁨들을 통해서 열립니다. 지식을 통해서는 이해에 속한 것들이, 즐거움과 기쁨을 통해서는 의지에 속한 것들이 열립니다. They are opened with the senses as the media, by means of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and also by means of pleasures and delights; those belonging to the understanding by means of knowledges, and those belonging to the will by means of pleasures and delights.

 

[2] 이런 것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진리와 함께 갈 수 없는 지식은 자기를 겉 사람한테로 슬그머니 밀어 넣을 것이며, 천적 선과 함께 갈 수 없는 만족과 기쁨도 그럴 것이라는 거, 육체적, 세속적, 그리고 땅에 속한 모든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들의 경우도, 그런 것들이 목적이 될 때, 겉 사람을 밖으로, 아래로 끄집어내어 속 사람으로부터 제거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From these things it may be seen that it must necessarily happen that such knowledges as cannot agree with spiritual truths will insinuate themselves into the external man; and that such pleasures and delights will insinuate themselves as cannot agree with celestial goods; as is the case with all those things which regard corporeal, worldly, and earthly things as the ends; which, when regarded as ends, draw the external man outward and downward, and so remove it from the internal man.

 

※ 즉, 영적, 천적, 그리고 주님을 향하지 않는, 그와는 정반대로, 육체와 세상, 세속을 향하는 것들은 겉과 속의 하나 됨은커녕, 오히려 분리와 제거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먼저 흩어버리지 않으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하나 될 수가,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 되려면 반드시 이런 일들이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Wherefore, unless such things are first dispersed, the internal man cannot possibly agree with the external; so that before the internal man can agree with the external, such things must first be removed.

 

주님과 함께 이런 일들이 제거되거나 분리되는 바로 이런 것이 롯과 아브람 간 서로 헤어지는 걸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That with the Lord these things were removed or separated is represented and signified by the separation of Lot from Abram.

 

 

1564.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이것이 겉 사람한테 있는 풍부한 것들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바로 아래 설명된 ‘양’(flock), ‘소’(herd) 및 ‘장막’(tents)의 의미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things with which the external man abound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flock,” “herd,” and “tents,” explained just below.

 

여기 나오는 저들은 겉 사람의 소유들을 의미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롯은 주님의 겉 사람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They here signify the possessions of the external man; for by Lot, as before said, is represented the Lord’s external man.

 

겉 사람 안에 있는 그의 소유들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요, 하나는 속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There are two classes of possessions in the external man, namely, such as can agree with the internal, and such as cannot agree.

 

여기 ‘양과 소와 장막’이 함께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다음의 이어지는 7절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7절) By “flock, herd, and tents” are here signified those things which cannot agree, as is evident from what follows—“and there was strife between the herdmen of Abram’s cattle and the herdmen of Lot’s cattle” (verse 7).

 

 

1565. ‘양과 소’가 겉 사람의 소유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과 ‘’의 의미가 선이라는, 343번 및 415번 글을 보면 분명합니다만 그러나 여기서는 분리될 것들, 곧 선이 아닌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여기서는 이것들이 롯의 속성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그것은 곧 아브람과 분리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That “flock and herd” signify the possessions of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flock” and “herd,” as being goods (see n. 343 and 415); but here they signify things that are to be separated, and thus things that are not good, because they are attributed to Lot, who was being separated from Abram.

 

’과 ‘’는 또 선하지 않은 것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다음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That “flock” and “herd” signify also things not good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

 

스바냐에서는 In Zephaniah:

 

5해변 주민 그렛 족속에게 화 있을진저 블레셋 사람의 땅 가나안아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를 치나니 내가 너를 멸하여 주민이 없게 하리라 6해변은 풀밭이 되어 목자의 움막과 양 떼의 우리가 거기에 있을 것이며 (습2:5-6) I will destroy thee, that there shall be no inhabitant. And the sea coast shall be habitations dug out for shepherds, and folds for a flock. (Zeph. 2:5–6)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네가 목자와 그 양 떼를 분쇄하며 네가 농부와 그 멍엣소를 분쇄하며 네가 도백과 태수들을 분쇄하도록 하리로다 (렘51:23) I will disperse in thee the shepherd and the flock; and I will disperse in thee the husbandman and his yoke. (Jer. 51:23)

 

계속해서 In the same:

 

28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공격을 받은 게달과 하솔 나라들에 대한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일어나 게달로 올라가서 동방 자손들을 황폐하게 하라 29너희는 그들의 장막과 양 떼를 빼앗으며 휘장과 모든 기구와 낙타를 빼앗아다가 소유로 삼고 그들을 향하여 외치기를 두려움이 사방에 있다 할지니라 (렘49:28-29) Go ye up to Arabia, and lay waste the sons of the east; their tents and their flocks shall they take. (Jer. 49:28–29)

 

 

1566. ‘장막’이 속 사람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 중인 예배라는 것은 ‘장막’의 의미가 거룩한 예배라는, 414번 글과, 또 롯의 표상이 ‘장막’ 곧, 겉 사람의 예배로 서술되고 있음을 볼 때, 분명합니다. That “tents” are the worship of that which was separating itself from the intern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ent,” as being the holy of worship (n. 414); and also from the representation of Lot, as being the external man, of which “tents”—or worship—are predicated.

 

장막’의 정반대의 뜻이 거룩하지 않은 예배라는 것은 이어지는 다음 구절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in the opposite sense “tents” signify worship not holy, is also evident from the following passages of the Word.

 

호세아에서는 In Hosea: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호9:6) The nettle shall inherit them; thorns shall be in their tents. (Hos. 9:6)

 

하박국에서는 In Habakkuk:

 

7내가 본즉 구산의 장막이 환난을 당하고 미디안 땅의 휘장이 흔들리는도다 8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강들을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들을 노여워하심이니이까 바다를 향하여 성내심이니이까 (합3:7-8) I saw the tents of Cushan; the curtains of the land of Midian were greatly moved; Jehovah was angry against the rivers. (Hab. 3:7–8)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목자들이 그 양 떼를 몰고 와서 주위에 자기 장막을 치고 각기 그 처소에서 먹이리로다 (렘6:3) Shepherds with their flocks shall come unto the daughter of Zion; they shall pitch tents against her round about; they shall feed down everyone his space. (Jer. 6:3)

 

시편에서는 In David: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 (시78:51) He smote all the firstborn in Egypt, the beginning of strength in the tents of Ham. (Ps. 78:51)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시84:10) I had rather stand at the threshold in the house of my God, than dwell in the tents of wickedness. (Ps. 84:10)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5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속뜻)

겉 사람의 여러 소유와 예배는 오직 속 사람과 함께할 때만 쓰임 받으며,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오히려 속 사람과의 분리를 가중시킨다

 

※ 겉 사람의 것이라고 무조건 다 나쁘며, 역기능을 하고, 악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순종입니다. 겉 사람에게 속한 감각과 즐거움, 기쁨 및 예배들이 만일 속 사람과 함께할 수 있다면, 속 사람을 섬겨 속 사람을 통한 주님의 뜻 받드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면 그때는 겉 사람에게 속한 것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주님께 열납되며,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의도가 없고, 그저 육체의 감각과 세상, 세속적 즐거움과 쾌락 추구에만 전념한다면 그때는 아브람의 조카 롯이 결국 아브람과 헤어지는 것처럼 겉 사람은 속 사람과 헤어지게 되며, 이렇게 되면, 겉과 속이 다르게 되어 사후, 영계에서 아주 안타까운 운명을 만나게 됩니다.

 

속 사람 안에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만 있으며, 그래서 주님은 오직 속 사람을 통해서만 말씀하시고, 사람을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질서는 주님, 속 사람, 겉 사람 순입니다. 이 순서를 잘 기억하고, 반드시 이 순서, 이 질서대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2021-11-16(D3)-매일예배(2235, AC.1562-1566, 창13,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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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qjD3OqCcZ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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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이야기 세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부터는 창세기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기 앞서, 거듭 당부드리는 몇 가지입니다.

 

첫째, 사람의 영과 육은 정말 다르듯 말씀의 영과 육, 곧 속뜻과 겉 글자의 뜻은 정말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말씀(the Word)은 어떻게든 주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는 인간을 또한 어떻게든 주님과 연결되어 있게 하시려는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주님의 관심은 오직 사람의 구원, 곧 거듭나서 천국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은 한마디로, 거듭남에 관한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넷째, 그래서 말씀은 그 주된 포커스가 오직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에 맞추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이 정도만 꼭 붙드셔도 앞으로 읽으시게 될 내용들을 향해 잘 준비된 마음, 착하고 좋은 마음 밭의 상태를 잘 유지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주님의 신성은 이런 마음 상태라야 한 방울 누수 없이 고스란히 다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그럼 시작합니다.

 

우리가 다 잘 아는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의 장,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첫 육 일간 기록입니다. 이것이 겉 글자의 의미 그대로이며, 저 역시 사십여 년 전인 대학생 시절, 창조과학회에 심취, 공대생으로서 뭔가 과학적으로도 이론적 뒷받침이 되는 것 같아 더 깊이 들어갔던 생각이 납니다 ^^

 

그러면서도 당시 아인슈타인과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의 글 등을 통해, 한편으로는 미니, 마이크로, 분자, 원자, 중성자, 소립자, 미립자의 세계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광활한 우주, 끝도 없는 유니버스의 세계로 등 양쪽 극단의 지식들을 조금, 아주 조금 접하고 제 안에 부인할 수 없었던 의문점들이 있었지요.

 

여기서 이런 얘길 말씀드리려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우주 저 수많은 은하 중 비교적 가깝다고 하는, 250만 광년(光年,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 거리에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만 해도 우리 태양계의 태양에 해당하는 항성 수가 1조 개... 이런 헤아릴 수 없는 별들을 그저 이 지구라는 조그마한 행성 하나를 밤에 반짝반짝 비추기 위한 용도로만 지으셨다고? 너무 비능률, 비효율적인 게 아닐까? 하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건 있었습니다 ^^

 

네, 이 얘긴 이쯤하고... 다시 창세기 1장입니다.

 

어쨌든 창세기 1장은 겉뜻으로는 창조 첫 육 일간 기록입니다. 그러나 속뜻으로는, 한 사람의 거듭남 전 과정과 관련된 여섯 단계 또는 상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번 천국 이야기 #3, ‘천국은 상태(狀態, state)의 나라’에서 말씀드렸듯 창세기를 포함, 말씀도 역시 ‘상태’ 관점에서 보시면 좋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을 무슨 계단처럼 딱딱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대략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해지는 노을, 아름다운 색조가 그레디언트하게 연이어져 딱딱 구분은 어려워도 대략적으로는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잠깐,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않은 사람 간 한 가지 차이점을 말씀드리면요, 거듭난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새 의지(will)와 새 이해(understanding, 이성, 사고력, 이해하는 능력)를 받아 그것으로 주님의 선을 행할 마음을 먹고, 주님의 진리를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의지라기보다는 탐욕으로 기우는 갈망(yearning)이 있고, 이성이라기보다는 잔머리에 가까운 머리굴림(reasoning)이 있습니다. 네, 두 사람은 이렇게 다릅니다.

 

첫 번째 상태는 거듭남이 시작되기 전 상태입니다. ‘혼돈’, ‘공허’, ‘흑암’이라고 하는 상태입니다. 이때 주님의 자비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입니다.

 

두 번째 상태는 주님의 것과 사람의 것 사이, 어떤 구분이 생기는 상태로서, 주님의 것은 ‘리메인스’(remains)라 하여, 모든 사람의 영유아기를 비롯, 어린 시절에 주님으로부터 이슬비처럼 내려 조용히 쌓이는 주님의 선과 진리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모든 사람의 속 사람 안에 영구 보관하시며, 나중에 이걸 가지고, 각 사람의 거듭남의 여정을 도우십니다. 이 리메인스는 사람이 어떤 큰 시험, 불행, 혹은 슬픔 등을 겪을 때, 비로소 깨어나며, 그 사람의 인생에서 이 리메인스가 깨어나면, 그때까지 그가 정신없이 추구하던 모든 세상에 속한 것들은 휴면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두 번째 상태 때, 주님께 속한 것과, 사람에게 속한 것 사이, 구분이 일어납니다. 참고로, 십일조의 기원이 바로 이 리메인스입니다.

 

세 번째 상태는 신앙의 말도 하고,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 선행, 기부, 자선)도 실천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기특하게도 전에 안 하던 이쁜 짓(?)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 활기,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런 걸 자기가 하는 줄로, 자기가 대단해서 하는 줄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풀’,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네 번째 상태는 애정 어린 사랑의 사람, 조명받은 신앙의 사람이 되는 상태입니다. 드디어 속 사람 안에 신앙의 불, 체어리티의 불이 켜집니다. ‘두 큰 광명체’입니다.

 

다섯 번째 상태는 자기가 하는 신앙의 말과 체어리티의 행위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음을 아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비로소 활기와 생명력을 갖는 상태입니다.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입니다.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의 말을 할 때도, 사랑의 선을 행할 때도 주님을 사랑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서 하는 상태입니다. ‘생물’, ‘짐승’입니다. 비로소 그는 영적 인간이 되었으며, 이런 그를 가리켜 ‘형상’(image)이라 합니다. 그의 영적 삶은 ‘먹을거리’라고 하는, 신앙의 지식과 체어리티의 일로 더욱 더 밝아지고, 지속되며, 그의 몸과 감각 등 자연적 삶 역시 그렇게 밝아지고, 지속됩니다. 이때 그의 겉 사람은 이런 그의 변화를 저항하며, 그래서 그의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 전투가 일어납니다.

 

이 마지막 상태인 여섯 번째 상태 끝에 가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이제 도저히 이 사람이 예전 삶으로 유턴할 가망이 없다 판단한, 그의 평생에 그를 지옥으로 끌어당긴 악한 영들은 그를 포기하고 물러갑니다. 전투란 서로 상대가 있어야 하는데, 악한 영들이 더 이상 싸움을 포기하고 물러감으로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드디어 쉴 수 있게 되며, 그래서 드디어 주님이 쉬실 수 있는 상태, 안식의 상태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속뜻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투는 사실은 우리 대신 주님이 싸우신 싸움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안식일인 것이며, 이 안식의 상태가 바로 일곱 번째 상태입니다.

 

이 일곱 번째 상태는 지상에서는 몇몇 성인(聖人)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천국의 상태입니다. (사실, 후세를 사는 우리는 이분들을 성인이라고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런 호칭에 대해 기겁을 하고, 정색을 할 겁니다...)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시대, 아담 교회 때 사람들이 바로 이런 상태였고, 그래서 그때는 천사들도, 그리고 주님도 친히 지상의 사람들과 직접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네, 그런 상태가 바로 일곱 번째 안식의 상태이며, 이런 사람을 가리켜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이라 합니다. 여섯 번째 상태에 도달한 인간을 영적 인간이라 하고, 여기서 악한 영들이 포기하고 물러간 사람들을 천적 인간이라 합니다.

 

참고로, 그래서 영적 인간의 이야기인 창세기 1장은 주님에 대한 호칭이 ‘하나님’이고, 천적 인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2장은 주님에 대한 호칭이 ‘여호와’이신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겨우 첫 번째 상태에, 그중에서 일부가 두 번째, 그중에서, 그중에서... 여섯 번째 상태만 해도 아주아주 극소수입니다.

 

창세기 이야기의 오프닝, 개략을 너무 많이, 자세히 다루었나요? 앞으로 장별, 절별 자세히 다루는 방식은 좀... 순서대로 나가되 특별한 주제, 이슈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이런 얘긴 생전 처음 듣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우리 안의 천사들은 저렇게, 저런 속뜻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영은 영, 육은 육인 것처럼, 우리는 육의 글자를 읽을 때, 천사들은 영의 글자, 곧 속뜻으로 읽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말씀의 속뜻으로 오십니다. 이 표현이 참 어려우실 듯한데요... 네, 어쨌든 그래서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시는 아름다운 분들마다 어서 이 말씀의 속뜻 공부를 좀 하셔야 합니다. 네, 그래서입니다 ^^ 아멘아멘, 할렐루야!

2021-11-15(D2)-창세기이야기(3), '창1 천지창조 이야기는 사람의 거듭남에 관한 이야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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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62. 5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Verse 5.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아브람의 일행 롯도’, 주님 안에 있었던 겉 사람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겉 사람을 풍성하게 하는 것들을 각각 의미하며, ‘양과 소’는 겉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고, ‘장막’은 그의 예배입니다. 이런 것들은 자신들을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하고 있었습니다.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signifies the external man that was in the Lord; “had flock and herd, and tents” signifies those things in which the external man abounds; “flock and herd” are the external man’s possessions; “tents” are his worship: these things were separating themselves from the internal man.

 

 

1563. 아브람의 일행 롯도 And Lot also, who went with Abram.

 

이것이 ‘주님 안에 있었던 겉 사람을 의미함’은 롯(Lot)이 표상하는 바가 감각적인(sensuous) 사람, 같은 말이지만, 겉 사람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external man that was in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representation of Lot as being the sensuous man, or what is the same, the external man.

 

누구나 다 그 안에 겉 사람과 속 사람이 있다, 혹은 같은 말이지만, 사람은 겉과 속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얘깁니다. (※ 전에 말씀드린 내용에 대해 보시려면 AC.978, 994-995, 1015 참조) That there is an internal and an external in every man, or what is the same, that man is internal and external, is known to everyone within the church (concerning which see what has been said before, n. 978, 994–995, 1015).

 

겉 사람은 그 생명을 주로 속 사람, 즉, 영이나 혼으로부터 받습니다. The external man receives its life principally from the internal man, that is, from the spirit or soul.

 

겉 사람의 생명 자체가 일반적으로는 속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겉 사람의 유기적 그릇들(organic vessels), 곧 속 사람 특유의 것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담게 되어 있는, 겉 사람에게 있어 속 사람과 연결되어 있는 그릇들이 열리지 않는 한, 겉 사람한테 어떻게든 담길 수가 없습니다. Thence comes its very life in general; but this life cannot be received in its particulars, or distinctly, by the external man, unless its organic vessels are opened, which must be the recipients of the particulars and the singulars of the internal man.

 

※ 일단 무엇이든 뭘 담으려면 먼저 뚜껑이 열려야 하는데 안 열린다는 말이지요.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들은 오직 주님의 생명,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에 대해서만 열리기 때문입니다. 감각적이라고 다 무조건 나쁜 건 아닙니다. 겉 사람의 모든 감각적 즐거움도 그것이 주님으로 말미암으며, 주 안에서 그 쓰임새를 따라 누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활짝 열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악한 정욕과 자아와 세상을 사랑함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때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런 건 생명이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겉 사람의 생명이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데 둘 사이 무슨 불일치가 있어 그릇이 안 열리고, 그래서 속 사람의 생명이 겉 사람에게 흘러들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수용체 노릇을 하게 될 이들 유기적 그릇들은 감각들, 특히 청각과 시각이라는 감각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그릇들이 열리면 속 사람은 속 사람 특유의 것들을 가지고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갈 수 있습니다. These organic vessels, which are to be the recipients, are not opened except by means of the senses, especially those of hearing and sight; and, as they are opened, the internal man can flow in with its particulars and singulars.

 

그릇들은 감각들을 매개로 해서 지식과 즐거움, 기쁨들을 통해서 열립니다. 지식을 통해서는 이해에 속한 것들이, 즐거움과 기쁨을 통해서는 의지에 속한 것들이 열립니다. They are opened with the senses as the media, by means of knowledges [scientifica et cognitiones], and also by means of pleasures and delights; those belonging to the understanding by means of knowledges, and those belonging to the will by means of pleasures and delights.

 

[2] 이런 것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적 진리와 함께 갈 수 없는 지식은 자기를 겉 사람한테로 슬그머니 밀어 넣을 것이며, 천적 선과 함께 갈 수 없는 만족과 기쁨도 그럴 것이라는 거, 육체적, 세속적, 그리고 땅에 속한 모든 것을 목적으로 삼는 것들의 경우도, 그런 것들이 목적이 될 때, 겉 사람을 밖으로, 아래로 끄집어내어 속 사람으로부터 제거되는 일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From these things it may be seen that it must necessarily happen that such knowledges as cannot agree with spiritual truths will insinuate themselves into the external man; and that such pleasures and delights will insinuate themselves as cannot agree with celestial goods; as is the case with all those things which regard corporeal, worldly, and earthly things as the ends; which, when regarded as ends, draw the external man outward and downward, and so remove it from the internal man.

 

※ 즉, 영적, 천적, 그리고 주님을 향하지 않는, 그와는 정반대로, 육체와 세상, 세속을 향하는 것들은 겉과 속의 하나 됨은커녕, 오히려 분리와 제거의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먼저 흩어버리지 않으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하나 될 수가,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속 사람이 겉 사람과 하나 되려면 반드시 이런 일들이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Wherefore, unless such things are first dispersed, the internal man cannot possibly agree with the external; so that before the internal man can agree with the external, such things must first be removed.

 

주님과 함께 이런 일들이 제거되거나 분리되는 바로 이런 것이 롯과 아브람 간 서로 헤어지는 걸로 표상되고 있습니다. That with the Lord these things were removed or separated is represented and signified by the separation of Lot from Abram.

 

2021-11-14(D1)-매일예배(2234, AC.1562-1563, 창13,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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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IPV5Nf_w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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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4(D1)-제9권46호통429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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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장

전체로나 부분으로나 천국이 사람을 반영하는 것은

주님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

It Is from the Lord’s Divine Human

That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Reflects Man

 

81. 천국은 전체로나 부분으로나 주님의 신적 인성으로 말미암아 한 사람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말하기를, 자기들은 주님 안에 있다 하며, 또 일부는 말하기를, 자기들은 주님의 몸 안에 있다 합니다. 그 의미는, 자기들은 주님의 사랑의 선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Because heaven as a whole and in part, from the Lord’s Divine human, reflects a man, the angels say that they are in the Lord; and some say that they are in his body, meaning that they are in the good of his love.

 

이것은 주님 자신 다음과 같이 가르치신 것입니다. And this the Lord himself teaches, saying,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요15:4-10) Abide in Me and I in you. As the branch cannot bear fruit of itself except it abide in the vine, so neither can ye, except ye abide in Me. For apart from Me ye can do nothing. Abide in My love. If ye keep My commandments ye shall abide in My love. (John 15:4–10)

 

 

82. 신성에 대한 이런 지각이 천국에는 있기 때문에, 천국 인플럭스(influx, 入流)를 받는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을 사람 모습으로 생각하는 능력이 그 안에 심겨져 있습니다. Because such a perception of the Divine exists in the heavens, to think of God as in a human form is implanted in every man who receives any influx from heaven.

 

그래서 고대인들이 주님을 그렇게 생각했고, 현대인들 역시 교회 안팎을 불문, 주님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Thus did the ancients think of him; and thus do the moderns think of him both outside of the church and within it.

 

단순한 사람들은 주님을 광채나는 마법사 에인션트 원으로 생각합니다. The simple see him in thought as the Ancient One in shining light.

 

그러나 이런 인사이트는 자기중심적 지성으로 악하게 살아 천국 인플럭스를 거절한 사람들한테는 소멸되었습니다. But this insight has been extinguished in all those that by self-intelligence and by a life of evil have rejected influx from heaven.

 

자기중심적 지성으로 그걸 소멸해온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원하는 반면, 악한 삶을 통해 그걸 소멸해온 사람들은 아예 하나님 자체를 원하지 않습니다. Those that have extinguished it by self-intelligence prefer an invisible God; while those that have extinguished it by a life of evil prefer no God.

 

둘 중 어느 쪽도 그런 인사이트가 존재한다는 걸 모릅니다. 그게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에서 사람의 안으로 근본적으로 흘러들어오는 건 주님의 신성 그 자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천국에 가기 위해 태어나는데, 하지만 신성에 대한 컨셉 없이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Neither of these are aware that such an insight exists, because they do not have it; and yet it is the Divine heavenly itself that primarily flows into man out of heaven, because man is born for heaven, and no one without a conception of a Divine can enter heaven.

 

 

83. 이런 이유로, 천국에 대한 컨셉이 전혀 없는, 즉 천국이 비롯되는 신성에 관한 컨셉이 전혀 없는 사람은 사후에 깨어나 천국의 첫 번째 문턱도 넘지 못합니다. For this reason he that has no conception of heaven, that is, no conception of the Divine from which heaven is, cannot be raised up to the first threshold of heaven.

 

이런 사람은 천국에 접근하자마자 어떤 저항과 일종의 아주 강한 반발을 지각합니다. 천국에 대하여 수용적이어야 할 그의 내면이 천국 형태가 되지 않도록 오히려 닫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천국에 더 다가갈수록 그의 내면은 아주 더 타이트하게 닫힙니다. As soon as such a one draws near to heaven a resistance and a strong repulsion are perceived; and for the reason that his interiors, which should be receptive of heaven, are closed up from their not being in the form of heaven, and the nearer he comes to heaven the more tightly are they closed up.

 

이것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주님은 부인하는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소시니아인들 같이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Such is the lot of those within the church who deny the Lord, and of those who, like the Socinians, deny his Divinity.

 

그러나 교회 밖에서 태어나 말씀이 없어 주님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But the lot of those who are born out of the church, and who are ignorant of the Lord because they do not have the Word, will be described hereafter.

 

 

84. 아브라함, 롯, 여호수아, 기드온, 마노아와 그의 아내 및 그밖의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신을 보면 옛사람들이 신을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That the men of old time had an idea of the Divine as human is evident from the manifestation of the Divine to Abraham, Lot, Joshua, Gideon, Manoah and his wife, and others.

 

그들은 하나님을 한 사람으로 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 그를 온 우주의 하나님으로 경배하며, 하늘과 땅의 하나님, 여호와로 불렀습니다. These saw God as a man, but nevertheless adored him as the God of the universe, calling him the God of heaven and earth, and Jehovah.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분이 주님이셨음을 주님은 요한복음 8장 56절을 통해 친히 가르치십니다.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주님이심을 그분의 말씀으로 알 수 있습니다. That it was the Lord who was seen by Abraham he himself teaches in John 8:56; and that it was he who was seen by the rest is evident from his words: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요8:56)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요1:18; 5:37) No one hath seen the Father, nor heard his voice, nor seen his form. (John 1:18; 5:37)

 

 

85. 그러나 겉 사람에 속한 감각적 컨셉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사람들한테는 하나님이 사람이라는 사실은 거의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감각의 사람은 신에 대한 생각도 세상과 거기 속한 걸로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데요, 그는 어떤 신성과 영성의 사람을 생각할 때도 같은 식으로, 그러니까 일종의 육(肉)적이고 자연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But that God is man can scarcely be comprehended by those who judge all things from the sense conceptions of the external man, for the sensual man must needs think of the Divine from the world and what is therein, and thus of a Divine and spiritual man in the same way as of a corporeal and natural man.

 

그래서 그는 결론짓기를, 만일 하나님이 사람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온 우주만큼 커야 하며, 만일 그가 하늘과 땅을 다스리신다면, 세상 왕들이 하듯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다스리실 것이라고 말이지요. From this he concludes that if God were a man he would be as large as the universe; and if he ruled heaven and earth it would be done through many others, after the manner of kings in the world.

 

만일 그가 천국에는 이 세상 같은 무슨 공간이 없다는 말을 들으면 그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If told that in heaven there is no extension of space as in the world, he would not in the least comprehend it.

 

오직 자연과 자연의 빛으로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그로서는 자기 눈에 보이는 공간 확장으로만 그런 걸 생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For he that thinks only from nature and its light must needs think in accord with such extension as appears before his eyes.

 

하지만 천국을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정말 가장 큰 실수입니다. But it is the greatest mistake to think in this way about heaven.

 

그곳의 공간 확장은 세상의 확장과 다릅니다. Extension there is not like extension in the world.

 

세상에서의 공간은 정해져 있고, 그래서 측정 가능한 것이지만, 천국의 공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그래서 측정불가입니다. In the world extension is determinate, and thus measurable; but in heaven it is not determinate, and thus not measurable.

 

천국 공간과 그 확장에 관해서는 나중에 영계의 공간과 시간과 연결지어 더 깊이 다루겠습니다. But extension in heaven will be further treated of hereafter in connection with space and time in the spiritual world.

 

좀더 말씀드리면, 사람들은 시력이라는 게 얼마나 멀리 뻗어나가는지, 즉 태양과 별을 넘어 훨씬 저 멀리 뻗어나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사람의 생각과 사고에 속한 내적 시야는 훨씬 더 넓게 확장되며, 그래서 더 깊은 내적 시야일수록 훨씬 더 멀리 계속 확장된다는 걸 말이지요. Furthermore, everyone knows how far the sight of the eye extends, namely, to the sun and to the stars, which are so remote; and whoever thinks deeply knows that the internal sight, which is of thought, has a still wider extension, and that a yet more interior sight must extend more widely still.

 

그러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내적이시고, 가장 높으신 주님의 시야, 신성의 시야에 대해서는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까요? What then must be said of Divine sight, which is the inmost and highest of all?

 

생각, 사고라는 게 이런 확장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의 여러 장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천국의 모든 것은 거기 있는 모두와 공유되며, 천국을 만들고 또 가득 채우는 주님의 신성에 속한 모든 것 또한 그렇게 공유됩니다. Because thoughts have such extension, all things of heaven are shared with everyone there, so, too, are all things of the Divine which makes heaven and fills it, as has been shown in the preceding chapters.

 

 

86. 천국 천사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즉, 생각으로도 선뜻 잡히지 않는 어떤 추상적 형태라 여기고 앉아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지성인입네 한다는 사실과, 자기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배움이 없고 단순무식하다 한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사실은 정반대인데도 말입니다. Those in heaven wonder that men can believe themselves to be intelligent who, in thinking of God, think about something invisible, that is, inconceivable under any form; and that they can call those who think differently unintelligent and simple, when the reverse is the truth.

 

그들은 또 말하기를, “스스로를 지성인이라 믿는 자들로 하여금 살펴보게 하시지요. 자신들이 자연, 즉 누구는 눈앞에 보이는 자연을, 누구는 자연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가리켜 하나님이라고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천사는, 영은, 사후에도 여전히 사는 그들의 영은, 사람 안에 있는 천국의 삶은, 지성을 구성하는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것은 볼 줄 모르는 장님은 아닌지를 말입니다. 반면, 그들이 단순하다 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 곧 하나님은 사람 모습으로 계신 신이시며, 천사는 하늘에 사는 사람이고, 그들의 혼은 사후에도 천사들처럼 사는 것이요, 사람 안에 있는 천국의 삶은 신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이라는,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They add, “Let those who thus believe themselves to be intelligent examine themselves, whether they do not look upon nature as God, some the nature that is before their eyes, others the invisible side of nature; and whether they are not so blind as not to know what God is, what an angel is, what a spirit is, what their soul is which is to live after death, what the life of heaven in man is, and many other things that constitute intelligence; when yet those whom they call simple know all these things in their way, having an idea of their God that he is the Divine in a human form, of an angel that he is a heavenly man, of their soul that is to live after death that it is like an angel, and of the life of heaven in man that it is living in accord with the Divine commandments.”

 

천사들은 이들이 지성인이며, 천국에 적합한 자들인 반면, 저들은 비지성, 몰지각, 어리석은 자라 합니다. Such the angels call intelligent and fitted for heaven; but the others, on the other hand, they call not intelligent.

HH.1.11.78-86. '11장, 천국이 사람 모습임은 주의 신적 인성에서 비롯된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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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_Nz8lXrUezQ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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