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적이었던태고교회그자체를가리켜‘사람’(homo),그리고‘하나님의모양’이라하였습니다.(1절)The most ancient church itself, which was celestial, is what is called “man” [homo], and a “likenessofGod.” (verse 1)
이것은아담의계보를적은책이니라하나님이사람을창조하실때에하나님의모양대로지으시되(1절)
해설
AC.461은 창5:1의 ‘하나님이사람을창조하실때에하나님의모양대로지으시되’라는 말씀의 속뜻을 아주 압축하여 제시합니다. 여기서 ‘사람’과 ‘하나님의모양’은 먼저 어떤 한 개인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라 ‘태고교회자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태고교회를 특별히 ‘천적’이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5의 첫머리는 한 개인의 족보를 소개하는 데서 출발하기보다, 이 장에서 이어질 모든 교회의 출발점이 어떠한 상태의 교회였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태고교회가 ‘천적’이었다는 것은 그 교회의 사람들이 주님에 대한 사랑을 가장 중심에 두고, 그 사랑으로부터 신앙과 진리를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천적인 질서는 ‘먼저진리를알고그진리를통하여사랑에이르는것’이라기보다, 주님께 받은 사랑과 선으로부터 무엇이 참인지를 퍼셉션하는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태고교회가 ‘사람’이라 불렸다는 것은 단순히 그 구성원들이 인간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인간성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점은 ‘하나님의모양’이라는 표현과 직접 연결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모양이라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은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의 모든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일수록 주님의 모양이 그 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모양’은 인간 자신의 고유한 탁월함을 높이는 표현이라기보다,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워지는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만큼 참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AC.461의 ‘사람’(homo)이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은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신앙을 받아 참된 질서 안에 있는 사람, 더 넓게는 그러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사람’이라 불린 것은 그 교회가 이러한 천국의 질서를 가장 온전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창5가 바로 이 ‘사람’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이후 이어지는 교회들의 상태를 이해하는 기준점이 됩니다.
또한 AC.461은 창1의 인간 창조와 창5의 족보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창1에서 ‘하나님의형상대로’ 창조되는 사람은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아 가는 사람을 다루었고, 여기 창5에서는 그 출발점에 있었던 천적 태고교회가 다시 ‘사람’과 ‘하나님의모양’이라는 말로 제시됩니다. 따라서 창5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형성된 태고교회가 이후 어떠한 상태들을 거쳐 이어져 갔는지를 계속해서 보여 주는 장입니다.
결국 AC.461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사람’의 기준은 외적인 조건이나 인간 자신의 프로프리움에 있지 않습니다. 참된 인간성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가 ‘사람’이며 ‘하나님의모양’이라 불릴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5는 이 가장 처음의 천적 상태를 기준점으로 삼아, 이후 교회들의 상태가 어떻게 이어지고 달라져 가는지를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AC.461해설)
이장은특별히태고교회가이어지는여러세대를거쳐홍수에거의이르기까지계속되어간과정을다룹니다. This chapter treats specifically of the propagatio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rough successive generations, almost to the flood.
해설
AC.460은 창5의 ‘장개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보여 주는 짧지만 중요한 문장입니다. 창5의 본문은 여러 이름과 출생, 나이와 죽음이 반복되는 족보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장에서 특별히 다루는 것이 ‘태고교회가이어지는여러세대를거쳐홍수에거의이르기까지계속되어간과정’이라고 먼저 밝힙니다. 따라서 창5를 읽을 때에는 문자에 나타나는 족보의 형식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태고교회가 어떻게 이어지고 변화해 가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표현은 ‘이어지는여러세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이 흘러 한 세대 다음에 또 한 세대가 왔다는 정도의 말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본문 해설에서 더욱 분명해지겠지만, 창5에 등장하는 이름들은 속뜻으로는 태고교회로부터 차례로 이어진 여러 교회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 장의 관심은 각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일대기를 들려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 안에서 하나의 교회가 다음 교회로 이어지면서 그 상태가 어떻게 달라져 갔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창5의 족보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문자상으로는 이름들이 세대별로 이어지는 족보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속뜻으로는 태고교회에 속한 여러 교회가 차례로 이어지면서 나타낸 서로 다른 상태들의 연속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등장하는 이름들을 먼저 역사적 개인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 곧 내적 의미로는 그 이름들이 무엇을 나타내며, 그들을 통하여 주님께서 교회의 어떠한 상태와 변화를 보여 주시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이 과정의 끝을 AC.460이 ‘홍수에거의이르기까지’라고 정한다는 점입니다. 창5는 아직 홍수 자체를 다루지 않지만, 이 장에서 전개되는 태고교회의 역사는 홍수 직전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창5는 여러 세대와 교회의 상태를 각각 따로 떼어 보여 주는 장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연속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흐름이 어디에서 시작하여 어디까지 이르는지를 AC.460이 먼저 밝혀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반복해서 등장할 ‘낳고’, ‘살고’, ‘죽었더라’라는 표현과 여러 숫자를 읽는 데에도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아직 AC.460에서는 그 각각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모든 기록이 태고교회의 이어지는 세대들을 다루는 하나의 전체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개별 이름이나 숫자의 속뜻을 살필 때에도 언제나 ‘지금태고교회의어떠한상태와그이어짐을말하고있는가?’라는 전체 문맥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AC.460은 창5를 단순히 오래된 족보로 지나치지 않게 합니다. 말씀의 문자 안에는 태고교회가 세대를 거쳐 이어지고 마침내 홍수 직전까지 이르는 긴 영적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앞으로의 ‘장개요’와 본문 해설은 바로 그 역사를 하나씩 펼쳐 보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따라가면서 교회의 상태가 어떻게 이어지고 달라지는지, 그리고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주님께서 교회를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를 차츰 보게 될 것입니다. (AC.460해설)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9
천국은셋입니다.첫째천국은선한영들(goodspirits)이거하는곳이고,둘째천국은천사적영들(angelicspirits)이거하는곳이며,셋째천국은천사들(angels)이거하는곳입니다.영들,천사적영들,천사들은모두천적존재들과영적존재들로구분됩니다.천적존재들은앞에서다룬태고교회사람들처럼사랑을통하여주님으로부터신앙을받은이들입니다.영적존재들은신앙에관한지식들을통하여주님으로부터체어리티를받고,자신들이받은것으로부터행하는이들입니다. There are three heavens: the first is the abode of good spirits; the second, of angelic spirits, and the third, of angels.Spirits, angelic spirits, and angels are all distinguished into the celestial and the spiritual.The celestial are those who through love have received faith from the Lord, lik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treated of above.The spiritual are those who through knowledges of faith have received charity from the Lord, and who act from what they have received.
이주제는이장의끝에서계속됩니다. A continuation of this subject will follow at the end of this chapter.
해설
AC.459는 AC.449부터 계속된 ‘천국과천국의기쁨’에 관한 첫 번째 경험담을 마무리하면서, 천국 자체의 질서를 간략하게 제시합니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천국을 어떻게 잘못 생각하는지를 주로 살펴보았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것, 다른 사람보다 큰 자가 되는 것, 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것, 편안히 쉬는 것, 찬란한 빛 가운데 있는 것, 영원히 찬양만 하는 것 등이 천국의 본질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천국이 실제로 하나의 단순하고 획일적인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깊이와 질서를 가진 세계임을 밝힙니다.
여기서는 천국을 셋으로 구분하여 첫째는 ‘선한영들’, 둘째는 ‘천사적영들’, 셋째는 ‘천사들’의 거처라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초기 저술에서 사용된 천국 구분 방식입니다. 따라서 뒤의 저작들에서 더욱 정리되어 나타나는 세 천국의 용어와 곧바로 일대일 대응시키기보다는, 이 시기의 AC가 천국에 서로 다른 내적 단계가 있음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천국의 생명이 모두 동일한 깊이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적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단계와 질서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문장입니다. 영들, 천사적 영들, 천사들은 다시 모두 ‘천적’과 ‘영적’으로 구분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천적’과 ‘영적’은 단순히 첫째·둘째·셋째 천국이라는 위치상의 구분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 다시 말해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어떠한 질서로 형성되어 있는가를 가리키는 더 근본적인 구분입니다.
천적 존재에 대해서는 ‘사랑을통하여주님으로부터신앙을받은이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창2와 창3을 거치며 계속 보아 온 태고교회의 질서입니다. 먼저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선을 지각하며, 그 선으로부터 무엇이 참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적인 사람에게 신앙은 사랑과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사랑에서신앙으로’ 나아가는 질서입니다.
반면 영적 존재들은 ‘신앙에관한지식들을통하여주님으로부터체어리티를받은이들’입니다. 이들은 천적인 사람들처럼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과 교리를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받아들이며, 주님께서 그 진리를 통하여 체어리티를 형성해 가십니다. 그리고 본문이 덧붙이듯이 그들은 ‘자신들이받은것으로부터행합니다.’ 따라서 영적인 사람에게도 신앙의 지식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배운 진리가 체어리티가 되고 마침내 삶과 행위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에서사랑으로’ 나아가는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구분은 어느 쪽은 주님에게서 받고 어느 쪽은 자기 힘으로 이루는 차이가 아닙니다. 본문은 양쪽 모두를 분명히 ‘주님으로부터’라고 말합니다. 천적인 사람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신앙’을 받고, 영적인 사람은 신앙의 지식들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체어리티’를 받습니다. 출발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생명의 근원은 모두 주님이십니다. 이것은 앞의 AC.457에서 천국의 무수한 다양성이 ‘오직주님으로부터,사랑을통하여’ 하나를 이룬다고 한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마지막의 ‘이주제는이장의끝에서계속됩니다’라는 문장은 AC.449-459가 독립된 삽입부임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이 천국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창5의 본문으로 들어갔다가, 장의 해설이 끝난 뒤 다시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한 경험으로 돌아옵니다. 따라서 AC.449-459는 창5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직접적인 절별 해설이라기보다, 창5앞에 놓인 하나의 독립된 영계 경험 기록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동시에 그 마지막에서 천적 질서와 영적 질서를 언급함으로써, 곧 이어질 창5에서 태고교회의 여러 후손과 그 교회의 변화 과정을 읽을 준비도 자연스럽게 갖추게 합니다. (AC.459해설)
악한영들은때때로주님의천국외에또다른천국이있다고생각하였으며,그들이할수있는곳이면어디든가서그것을찾아보도록허락받았습니다.그러나그들은당혹스럽게도다른어떤천국도결코찾을수없었습니다.악한영들은주님에대한증오와지옥에서겪는고통으로말미암아광기어린생각에빠지며,그리하여이와같은공상에매달리기때문입니다. Evil spirits have sometimes supposed that there is another heaven besides that of the Lord, and they have been permitted to seek for it wherever they could, but to their confusion they could never find any other heaven.For evil spirits rush into insanities both from the hatred they bear against the Lord, and from their infernal suffering, and catch at such fantasies.
해설
AC.458은 매우 짧지만, 앞의 AC.449부터 이어져 온 천국에 관한 여러 잘못된 생각의 뿌리를 한층 더 깊은 곳에서 보여 줍니다. 앞에서는 천국을 높은 곳, 입장이 허락되는 장소, 편안히 쉬는 곳, 찬란한 빛 가운데 있는 곳, 혹은 영원히 찬양만 하는 곳으로 생각하는 여러 관념을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훨씬 근본적인 생각이 등장합니다. ‘주님의천국이마음에들지않는다면혹시다른천국이있지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는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천국의 본질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그리고 그 사랑에서 비롯되는 쓰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과 지배욕을 붙들고 있으면서도 행복하기를 원하는 영에게는 주님의 천국이 자신이 원하는 천국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행복은 원하지만, 그 행복을 이루는 천국의 사랑과 질서는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사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다른천국’을 상상하게 됩니다.
여기서도 주님께서는 그 생각을 단지 말로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어디든가서그것을찾아보도록’ 허락하십니다. AC.450의 영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자신들이 원하는 천국을 경험하도록 허락받았고, AC.455의 사람이 자신이 천국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찬란한 빛을 실제로 경험하도록 허락받았던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잘못된 생각을 강제로 빼앗기보다 그것이 실제로 어디에 이르는지를 스스로 경험하여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에서도 다른 천국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천국이라는 장소가 하나뿐이라는 말보다 훨씬 깊은 뜻을 지닙니다. 천국은 본질적으로 주님의 생명,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떠난 채 천국의 행복만 따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질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랑 없이 천국의 기쁨만, 체어리티 없이 행복만, 주님 없이 천국만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문은 악한 영들이 이러한 공상에 매달리는 원인으로 ‘주님에대한증오’와 ‘지옥에서겪는고통’을 함께 말합니다.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지배적인 악을 버리지 않으면서 그 악으로 인한 고통에서는 벗어나고 싶기 때문에, 자신이 변화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이 자기 안의 악한 사랑에 있는 한, 장소를 바꾸거나 다른 천국을 찾아다닌다고 해서 그 상태가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광기어린생각’이라는 표현도 단순히 이성을 잃었다는 의미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영적 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며, 악한 사랑이 사고를 지배하면 사람은 결국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을 가능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주님을 미워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천국의 기쁨을 원하며, 자기 사랑을 그대로 간직한 채 천국을 찾는 것 자체가 영적 질서에서는 모순인 것입니다.
결국 AC.458은 천국이 주님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어떤 독립된 행복의 세계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천국에는 AC.457에서 본 것처럼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이 있지만, 그 모든 다양성을 하나의 천국으로 이루는 근원은 ‘오직주님으로부터,사랑을통하여’ 오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는 무수한 공동체와 무수한 종류의 행복이 있어도 ‘다른근원에서오는또하나의천국’은 없습니다. 천국을 원하는 것은 결국 주님의 사랑과 질서를 원하는 것이며,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 사랑과 질서 안으로 이끄심으로써 천국의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AC.458해설)
이세상에서다른삶으로건너가는거의모든사람은지옥은누구에게나똑같고천국도누구에게나똑같다고생각합니다.그러나실제로는천국과지옥모두에끝없는다양성과차이가있으며,어느한사람의천국이나지옥도다른사람의것과결코정확히같지않습니다.이는어떤사람이나영이나천사도다른사람이나영이나천사와결코정확히같지않은것과같습니다.내가단지정확히똑같거나동일한둘이있을수있다고생각하기만했을때에도영들의세계와천사천국의주민들은두려움을느꼈습니다.그들은모든존재가수많은구성요소들의조화로이루어지며,그조화가어떠하냐에따라그존재도그러하다고말했습니다.또한절대적으로하나인어떤것이그자체로존립하는것은불가능하며,오직여러구성요소의조화로이루어진하나만이존재할수있다고말했습니다.이와같이천국의각공동체가하나를이루며,모든공동체가함께또한하나,곧보편적천국전체를이룹니다.그리고이것은오직주님으로부터,사랑을통하여이루어집니다.어떤천사는영들,곧첫째천국의기쁨을가장보편적인종류들만헤아려도약사백칠십팔가지나된다고열거하였습니다.이것으로부터우리는그보다덜보편적인종류들과각종류안에있는세부적인종류들이얼마나헤아릴수없이많은지를짐작할수있습니다.그천국에만도그렇게많은종류가있다면,천사적영들의천국에있는행복의종류들은얼마나한이없겠으며,더욱이천사들의천국에있는행복의종류들은얼마나더하겠습니까? Almost all who pass from this world into the other life suppose that hell is the same for everyone, and that heaven is the same for everyone.And yet in both there are endless diversities and varieties, and neither the heaven nor the hell of one person is ever exactly like that of another; just as no man, spirit, or angel is ever exactly like another.When I merely thought of there being two exactly alike or equal, horror was excited in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of spirits and of the angelic heaven, and they said that everyone is formed by the harmony of many components, and that such as is the harmony, such is the one, and that it is impossible for anything to subsist that is absolutely a one, but only a one that results from a harmony of component parts.Thus every society in the heavens forms a one, and so do all the societies together, that is, the universal heaven, and this from the Lord alone, through love.A certain angel enumerated the most universal only of the genera of the joys of spirits, that is, of the first heaven, to about four hundred and seventy-eight, from which we may infer how innumerable must be the less universal genera and the species in each genus.And as there are so many in that heaven, how illimitable must be the genera of happinesses in the heaven of angelic spirits, and still more so in the heaven of angels.
해설
AC.457은 천국의 기쁨에 관한 논의를 ‘다양성’이라는 매우 중요한 주제로 넓혀 갑니다. 세상에서는 흔히 천국을 모든 사람이 동일한 모습으로 동일한 행복을 누리는 하나의 장소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은 획일적인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사랑과 선의 질이 다르고, 그 사랑에서 비롯되는 쓰임과 기쁨도 다르기 때문에 천국에는 헤아릴 수 없는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지옥 역시 마찬가지로 각 사람의 지배적인 악과 거짓의 성질에 따라 상태가 서로 다릅니다.
‘어느한사람의천국이나지옥도다른사람의것과결코정확히같지않다’는 말은 각 사람이 자기만의 독립된 천국이나 지옥을 소유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사람의천국’과 ‘한사람의지옥’은 그 사람이 천국이나 지옥을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고유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어떤 두 사람도 사랑과 사고와 삶의 모든 면에서 완전히 동일하지 않으므로, 그들이 경험하는 행복이나 불행의 질도 완전히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조화’에 관한 설명은 이 다양성이 어떻게 천국의 하나 됨과 양립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천국의 하나 됨은 모든 존재가 똑같아지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수많은 존재가 조화를 이루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하나의 화음이 서로 다른 음들의 조화로 이루어지고, 하나의 몸이 서로 다른 지체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천국에서는 ‘다름’이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참된 하나 됨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 때문에 ‘정확히똑같은둘’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영들과 천사들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표현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천국의 질서에서 살아 있는 하나 됨은 획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속의 조화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사랑, 똑같은 지혜, 똑같은 쓰임, 똑같은 기쁨을 가진다면 그것은 천국의 완전함이 아니라 오히려 천국을 이루는 살아 있는 질서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각 존재의 고유성을 없애어 하나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고유한 존재들이 사랑 안에서 조화를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 원리는 개인을 넘어 천국 공동체 전체에 적용됩니다. 각각의 천국 공동체가 그 안의 수많은 천사들의 조화를 통하여 ‘하나’를 이루고, 다시 서로 다른 모든 공동체가 함께 조화를 이루어 ‘보편적천국’이라는 하나를 이룹니다. 그런데 그 하나 됨의 근원은 공동체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본문은 그것이 ‘오직주님으로부터,사랑을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천국을 하나 되게 하는 중심은 동일한 개성이나 동일한 역할이 아니라 한 분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사랑입니다.
첫째 천국의 기쁨만 해도 가장 큰 범주로 나누어 약 사백칠십팔 가지나 된다는 천사의 설명은 이 다양성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도 세부적인 기쁨들을 센 숫자가 아니라 ‘가장보편적인종류들’만 헤아린 것입니다. 각각의 큰 범주 아래 다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와 세부적인 차이가 있으므로, 천국의 행복은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더 내적 천국으로 갈수록 그 다양성은 더욱 헤아릴 수 없게 됩니다.
결국 AC.457이 보여 주는 천국은 ‘모두가똑같아지는곳’이 아니라 ‘모두가주님안에서참으로자기답게되면서도완전한조화를이루는곳’입니다. 앞의 AC.454-456에서 천국의 행복이 사랑과 체어리티와 쓰임에 있음을 보았다면, 여기서는 그 사랑과 쓰임이 사람마다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천국 전체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차이를 없애어 하나 되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선과 쓰임과 기쁨을 사랑 안에서 하나의 천국으로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완전함은 획일성에 있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한한 다양성과 조화에 있습니다. (AC.457해설)
그들가운데가장많은가르침을받은사람들은천국의기쁨이오직주님을찬양하고영화롭게하는데있다고생각했습니다.그들은천국에서는체어리티의선을행하는다른어떤활동도없이오직주님을찬양하고영화롭게하는것자체가곧활동적인삶이라고생각했던것입니다.그러나그들은주님을찬양하고높이는것은여기서말하는활동적인삶자체가아니라,그러한삶에서자연스럽게나오는결과라는말을들었습니다.주님은찬양을필요로하시는분이아니라그들이체어리티의선을행하기를원하시며,그들은그것에따라주님으로부터행복을받게된다는것입니다.그러나이렇게가장많은가르침을받은사람들조차체어리티의선을행하는데서기쁨을생각하지못하고오히려종노릇하는것과같은삶을떠올렸습니다.하지만천사들은그러한삶이모든삶가운데가장자유로운삶이며,말로표현할수없는행복과결합되어있다고증언했습니다. The best instructed of them all said that heavenly joy consists solely in praising and glorifying the Lord, being a life destitute of any doing of the goods of charity, and that this is an active life.But they were told that praising and celebrating the Lord is not such an active life as is meant, but is an effect of that life; for the Lord has no need of praises, but wills that they should do the goods of charity, and that it is according to these that they will receive happiness from the Lord.But still these best instructed persons could form no idea of joy, but of servitude, in doing these goods of charity.But the angels testified that such a life is the freest of all, and that it is conjoined with happiness unutterable.
해설
AC.456은 지금까지 나온 잘못된 천국관 가운데 가장 종교적이고 경건하게 보이는 생각을 다룹니다. 앞에서는 천국을 편안히 쉬는 곳이나 찬란한 빛 가운데 머무는 곳으로 생각했다면, 여기서는 ‘영원히주님을찬양하고영화롭게하는곳’으로 생각합니다. 얼핏 보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천국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찬양 자체가 아니라, 주님을 찬양하는 것과 이웃에게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것을 서로 분리하여 전자만을 천국의 활동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본문이 이들을 ‘가장많은가르침을받은사람들’이라고 한 것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들은 천국이 단순한 휴식이나 감각적인 즐거움의 장소가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삶을 주님을 향한 찬양과 영화롭게 함에만 한정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선을 행하는 실제 삶은 그 중심에서 제외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배와 삶,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서로 떼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찬양하고높이는것은여기서말하는활동적인삶자체가아니라,그러한삶에서자연스럽게나오는결과’라는 말이 AC.456의 중요한 핵심이 됩니다. 이것은 찬양의 가치를 낮추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참된 찬양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사람 안에 들어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날 때, 그 삶에서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찬양은 천국적 삶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적 삶에서 피어나는 고백이며 기쁨입니다.
특히 ‘주님은찬양을필요로하시는분이아니다’라는 말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 상당히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찬양이나 예배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영광이나 만족을 채우기 위하여 인간과 천사의 찬양을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찬양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찬양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마음을 주님께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찬양이 참된 찬양이 되려면 예배의 시간에만 머물지 않고 체어리티의 선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단지 주님을 높이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과 선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456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게 합니다. 찬양을 오래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은 귀하고 거룩한 일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신앙생활의 완성으로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예배 가운데 뜨겁게 주님을 찬양하였더라도 그 예배가 이후의 삶에서 용서와 정직과 섬김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활동적인삶’에는 아직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예배당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계속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삶을 들으면서도 거기에서 기쁨을 생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종노릇’을 떠올렸습니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인간의 오래된 오해를 보여 줍니다.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자유이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고 섬기는 것은 의무와 속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에게는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이웃의 선을 자신의 기쁨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에게 쓰임이 되는 것을 억지로 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자신이 가장 하고 싶은 일로 느낍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는 삶이 ‘모든삶가운데가장자유로운삶’이며 동시에 ‘말로표현할수없는행복’과 결합되어 있다고 증언합니다.
결국 AC.456은 ‘찬양이냐체어리티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둘의 참된 질서를 회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선을 받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체어리티의 선을 행하며, 그 삶에서 다시 주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예배와 천국의 삶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고, 이웃 사랑의 삶은 다시 주님을 향한 찬양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찬양으로 자신의 영광을 채우려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가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가장 자유롭고 행복한 천국의 삶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AC.456해설)
세상에서말씀에관하여매우많은것을배웠던어떤사람은천국의기쁨이찬란한빛가운데있는데있다고생각했습니다.곧햇빛이황금빛으로보일때와같은빛가운데있는것이천국의기쁨이라고생각했던것입니다.그래서그역시천국의기쁨이안락하게쉬는삶에있다고여겼습니다.그가자신의생각이잘못되었음을알수있도록그러한빛이그에게주어졌습니다.그는그빛가운데있으면서마치천국에있는것처럼크게기뻐하였고,실제로자신이그렇게느낀다고말했습니다.그러나그는그곳에오래머물수없었습니다.그빛이점차싫증나게하였고,마침내는전혀기쁨이되지않았기때문입니다. One who in this world had been most learned in regard to the Word, had the idea that heavenly joy consists in being in a glorious light, like that which exists when the solar rays appear of a golden hue, so that he too supposed it to consist in a life of ease.In order that he might know himself to be in error, such a light was granted him, and he, being in the midst of the light, was as delighted as if he were in heaven, as indeed he said.But he could not remain long in it, for it gradually wearied him and became no joy at all.
해설
AC.455는 앞의 AC.454와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454에서는 천국의 행복을 ‘아무일도하지않고편안히쉬면서다른사람들의섬김을받는것’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다루었다면, 여기서는 그것이 한층 더 아름답고 영적인 모습으로 바뀝니다. ‘찬란한황금빛가운데영원히머무는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훨씬 천국적인 생각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역시 천국의 기쁨을 외적인 환경에서 찾는다는 점에서는 같은 오류라고 봅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 사람이 ‘말씀에관하여매우많은것을배웠던’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AC.450에서도 말씀에 관하여 특별히 밝은 깨달음을 가진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잘못된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천국에 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천국의 본질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천국에 관한 지식과 천국의 생명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생각한 ‘황금빛의찬란한빛’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빛을 천국의 행복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영계에서 빛은 진리와 지혜에 상응하고, 천국의 빛은 세상의 빛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찬란한 것으로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에서 반복하여 묘사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다운 천국의 빛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단순히 바라보고 그 가운데 편안히 머무는 것만으로 천국의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경험이 허락됩니다. 그는 실제로 황금빛처럼 찬란한 빛 가운데 놓였고 처음에는 크게 기뻐하여 자신이 천국에 있는 것 같다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도 앞의 경험들과 같은 방식이 나타납니다. 그의 잘못된 생각을 말로만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상태를 실제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그 생각의 한계를 스스로 알게 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처음에는 그토록 황홀했던 빛이 점차 그를 싫증나게 하였고, 마침내 ‘전혀기쁨이되지않았습니다.’ 외적인 자극은 아무리 아름답고 강렬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영원한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광경이 계속 새로워지는 것으로 영원한 기쁨을 유지하려 한다면, 결국 사람은 더 새롭고 더 강한 자극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바로 앞의 AC.454와 연결하면 그 이유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사들이 누리는 행복은 ‘쓰임안에,쓰임으로부터,쓰임에따라’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빛은 천국의 아름다운 환경 가운데 하나이지만,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 것은 빛 자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지혜가 천사들의 삶 속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과 쓰임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빛도 그 생명과 분리하여 생각하면 천국의 기쁨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AC.455는 결국 우리의 천국관을 다시 점검하게 합니다. 우리는 천국을 고통도 걱정도 없이 아름다운 빛과 풍경을 영원히 바라보며 쉬는 곳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을 ‘보는행복’이 아니라 사랑하고, 선을 행하며, 서로에게 쓰임이 되는 ‘살아있는행복’입니다. 아무리 찬란한 빛이라도 그것만으로는 결국 익숙해지는 게 다지만,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끊임없이 새로운 쓰임으로 흘러가는 생명은 천국의 기쁨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AC.455해설)
어떤사람들은천국이안락하게쉬는삶, 곧다른사람들의섬김을받는삶에있다고생각합니다. 그러나그들은아무일도하지않고편히쉬는것만으로행복해질수는없다는말을듣습니다. 왜냐하면그렇게된다면모든사람이다른사람들의행복을자기자신의행복에종속시키기를원할것이며,모든사람이이것을원한다면아무도행복할수없기때문입니다.그러한삶은활동적인삶이아니라게으른삶이며,그안에서사람들은점점무기력해질것입니다.그러나그들도활동적인삶외에는행복이없다는것을알수있을것입니다.천사들의삶은쓰임(use)과체어리티의선(goodsofcharity)에있습니다.천사들은세상에서오는영들을가르치고교육하는일,사람들에게쓰임이되는일,사람들주위에있는악한영들이정해진한계를넘지못하도록제어하고사람들에게선을불어넣는일,죽은사람들을영원한생명으로일으키는일,그리고그영혼들의상태가허락한다면그들을천국으로인도하는일보다더큰행복을알지못하기때문입니다. Some think that heaven consists in a life of ease, in which they are served by others; but they are told that there is no possible happiness in being at rest as a means of happiness, for so everyone would wish to have the happiness of others made tributary to his own happiness; and when everyone wished this, no one would have happiness.Such a life would not be an active life, but an idle one, in which they would grow torpid, and yet they might know that there is no happiness except in an active life.Angelic life consists in use, and in the goods of charity; for the angels know no greater happiness than in teaching and instructing the spirits that arrive from the world; in being of service to men, controlling the evil spirits about them lest they pass the proper bounds, and inspiring the men with good; and in raising up the dead to the life of eternity, and then, if the souls are such as to render it possible, introducing them into heaven.
이모든일로부터천사들은도저히묘사할수없을만큼큰행복을지각합니다.이와같이그들은주님의형상이되며,이와같이이웃을자기자신보다더사랑합니다.그리고바로이러한이유로천국이천국인것입니다.그러므로천사들이누리는행복은쓰임안에(inuse),쓰임으로부터(fromuse),그리고쓰임에따라(accordingtouse)있으며,곧사랑과체어리티의선에따라있습니다.천국의기쁨이편안하게살면서아무일도하지않은채영원한기쁨을누리는데있다고생각하는사람들이이러한사실을들으면,그들을부끄럽게하기위하여그러한삶이실제로어떠한것인지를지각하도록허락됩니다.그러면그들은그러한삶이지극히슬픈것이며모든기쁨을파괴하는것이고,얼마지나지않아그것을싫어하고역겨워하게될것임을지각합니다. From all this they perceive more happiness than can possibly be described.Thus are they images of the Lord; thus do they love the neighbor more than themselves; and for this reason heaven is heaven.So that angelic happiness is in use, from use, and according to use, that is, it is according to the goods of love and of charity.When those who have the idea that heavenly joy consists in living at ease, idly breathing in eternal joy, have heard these things, they are given to perceive, in order to shame them, what such a life really is, and they perceive that it is a most sad one, that it is destructive of all joy, and that after a short time they would loathe and nauseate it.
해설
AC.454는 천국의 기쁨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천국의 행복은 ‘아무것도하지않고영원히편안하게지내는것’이 아니라 ‘쓰임’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수고와 피로를 경험하는 사람에게 영원한 안식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상태처럼 상상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천국의 안식과 전혀 다른 것으로 봅니다. 천국의 안식은 활동의 중지가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수고와 갈등이 사라진 가운데 사랑으로 기쁘게 활동하는 상태입니다.
본문 첫 부분은 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섬김만 받는 삶이 행복일 수 없는지를 매우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모두가 ‘다른사람이나를섬김으로써내가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모든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게 됩니다. 결국 누구도 참으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천국의 질서는 정반대입니다. 각자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기뻐하고 그 행복에 쓰임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서로의 행복이 서로를 더욱 풍성하게 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의 삶은 ‘쓰임과체어리티의선’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쓰임은 단순히 일을 많이 한다거나 계속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에서 이웃의 선을 바라며 실제로 그 선에 도움이 되는 모든 활동을 뜻합니다. 따라서 천국에서 활동과 사랑은 서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쓰임으로 나타나고, 쓰임은 사랑이 실제 생명이 되어 나타나는 형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의 쓰임을 매우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새로 영계에 온 영들을 가르치고,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며, 악한 영들이 한계를 넘지 못하도록 제어하고, 사람들에게 선을 불어넣으며, 죽은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일으키고, 준비된 영혼들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 천사들은 이러한 일을 의무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에서 ‘도저히묘사할수없을만큼큰행복’을 느낍니다. 다른 존재의 생명과 행복에 쓰임이 되는 것 자체가 그들의 기쁨인 것입니다.
특히 ‘이와같이그들은주님의형상이된다’는 표현은 쓰임의 가장 깊은 근원을 보여 줍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모든 존재에게 생명과 선을 주시며 그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자기 자신보다 이웃의 선을 바라며 쓰임의 삶을 살 때, 그들은 주님의 사랑이 흘러갈 수 있는 형상이 됩니다. ‘이와같이이웃을자기자신보다더사랑하며,바로이러한이유로천국이천국이다’라는 말은 천국의 본질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래서 ‘천사들이누리는행복은쓰임안에,쓰임으로부터,쓰임에따라있다’는 문장은 AC.454의 핵심 문장입니다. ‘쓰임안에’ 있다는 것은 천사의 행복이 실제 쓰임의 활동 가운데 있다는 뜻이고, ‘쓰임으로부터’ 있다는 것은 그 행복이 사랑이 실제로 흘러나가 이웃에게 선이 되는 데서 생긴다는 뜻이며, ‘쓰임에따라’ 있다는 것은 그 쓰임 안에 담긴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의 질에 따라 행복의 질도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행복은 활동에 대한 보상으로 나중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는 쓰임 자체 안에 이미 존재합니다.
결국 AC.454는 천국의 ‘영원한안식’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영원한 휴식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삶은 처음에는 편안해 보일 수 있지만 곧 생명과 기쁨을 잃고 무기력해집니다. 반대로 천국에서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끊임없이 쓰임으로 흘러가며, 그 흐름 자체가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영원히쉬는곳’이라기보다 ‘사랑으로기쁘게쓰임이되는곳’이며, 천국의 안식은 활동이 없는 안식이 아니라 자기 사랑의 수고가 사라진 가운데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는 안식인 것입니다. (AC.454해설)
어떤사람들은천국에대하여너무나거친개념을가지고있어서,천국은단지들어가는것을허락받는데있다고생각합니다.실제로그들은천국을하나의방과같은곳으로생각하여,문이열리면그문을통하여들어가도록허락받고,문지기들이그들을안으로들여보내는것이라고생각합니다. Some entertain so gross an idea of heaven that they suppose it to be mere admission, in fact that it is a room into which they are admitted through a door, which is opened, and then they are let in by the doorkeepers.
해설
AC.453은 매우 짧지만, 앞의 AC.449-452에서 계속 바로잡아 온 잘못된 천국관 가운데 또 하나의 중요한 유형을 보여 줍니다. 이번에는 천국을 ‘입장허가를받아들어가는장소’로 생각하는 관념입니다. 즉 천국과 지옥을 사람의 내적 상태와는 별개로, 죽은 뒤 어느 문 앞에서 입장 여부가 결정되는 두 장소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너무나거친개념’이라고 하는 까닭은 천국을 전적으로 외적인 장소와 절차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는 사람이 세상에서 어떠한 사랑을 품고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보다, 마지막에 천국의 문이 열리느냐 닫히느냐가 결정적인 문제가 됩니다. 천국이 마치 들어가기만 하면 누구든 그 순간부터 행복해지는 공간처럼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의 경험들이 이미 보여 주었듯이 천국의 본질은 장소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AC.450에서는 ‘사랑과체어리티안에있는사람이있는곳,곧그안에주님의나라가있는사람이있는곳이면어디에나’ 천국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공간적으로 어떤 경계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이 천국의 사랑과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천국의 ‘문’도 단순한 출입구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보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그 사랑을 실제 삶으로 살아갈 때 그의 내면은 천국과 조화를 이루어 갑니다. 천국은 죽은 뒤 갑자기 외부에서 주어지는 낯선 삶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부터 사람 안에 형성해 가시는 생명의 완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AC.453은 구원 역시 단순한 ‘입장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데까지 우리를 이끕니다. 물론 천국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획득하는 곳이 아니며 모든 구원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천국의 생명을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그 생명에 따라 살아가는 거듭남의 과정 없이, 외적 허가 하나만으로 내적 상태가 천국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짧은 글은 바로 다음 경험들을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천국에들어가기만하면행복할것’이라는 생각이 정말 옳다면, 어떤 사람이든 천국에 들여보내기만 하면 행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경험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천국의 상태와 맞지 않는 사랑을 가진 사람에게 천국의 생명은 오히려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단순히 ‘천국에들어갈수있는가’가 아니라 ‘내안에천국을받아들일수있는생명이형성되어있는가’입니다.
결국 AC.453은 천국을 미래의 어떤 장소로만 바라보던 시선을 현재의 삶으로 되돌립니다. 중요한 것은 죽은 뒤 천국 문 앞에서 누가 나를 들여보내 줄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주님께서 내 안에 사랑과 체어리티와 선과 진리의 생명을 이루어 가시도록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문은 단순히 외적으로 열리는 문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내면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AC.453해설)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눅18:1-8)
기도에 의존하면 안 되는 이유는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기도하는 사람은 그가 구하는 것이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는 오직 주님만 아신다고 항상 생각하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를 들어주실지 말지를 주님께 맡겨야 하고 그에 따라 겟세마네의 가장 쓰라린 시험 가운데서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해야 한다. (천국의 비밀 8179, 이순철 역) prayer is not to be relied upon. For in prayer from the Divine it is always thought and believed that the Lord alone knows whether it is profitable or not; and therefore the suppliant submits the hearing to the Lord, and immediately after prays that the will of the Lord, and not his own, may be done, according to the Lord’s words in His own most grievous temptation at Gethsemane (Matt. 26:39, 42, 44).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39)
오늘부터 18장입니다. 오늘 말씀이 있기 바로 전인, 요 앞 장 17장에서 주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은, 교회의 마지막 때 환난과 심판이 있는데, 그때 신앙인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것이었는데요, 교회의 마지막 때 모습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24장 1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거짓 선지자’는 교회의 거짓된 교리를 의미하고, ‘불법’은 교회들이 저지르는 악을 뜻합니다. 교회의 상태가 이렇다 보니, 교회의 마지막 때 신앙인들에게는 시험이 참으로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분별력을 잃고 거짓 진리에 휩쓸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세상 즐거움에 빠져 신앙을 포기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신앙인들에게 닥치는 시험을 창세기에서는 노아 시대에 큰 홍수가 났을 때, 방주에 오른 사람들이 오랫동안 격랑 속을 떠다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 당시 사도들도 그런 시험을 겪었고, 그리고 오늘 이 시대 우리도 역시 그런 시험 가운데 있는데요, 그렇다면, 이런 환난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시험을 극복하고 마음속에 주님의 새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요?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오늘 말씀에서 주님께서는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로 다시 오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험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항상 기도하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본문에는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로 그리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절과 3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2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어떤 도시에 사는 과부가 재판장에서 가서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달라고 하는데, 특이한 것은, 그 재판장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도시’나 ‘성읍’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는데요, 그러니까 과부는 교회의 교리 안에서 생활하는 어떤 신앙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재판장은 누굴까요? ‘재판장’은 보통 진리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진리가 아니라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의 지식,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합니다. 재판장이 진리의 지식을 뜻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는 건 주님에 대해서나 이웃에 대해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재판장은 사랑 없는 진리, 즉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지식, 진리에 관한 지식을 뜻합니다. 과부는 누굴까요? ‘과부’는 남편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삶 가운데서 선을 행하기는 하는데 진리가 없어서 잘못 행하는 걸 말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웃의 호의는 받아들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베풀기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선한 행동 같지만, 상대가 원치 않을 때는 자칫 인간관계가 소원해질 수도 있지요. 그런가 하면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서도 그게 잘못인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요, 예를 들면 이런 게 모두 선만 있고 진리가 없어서 생기는 일입니다. 신앙인들이 스스로 진리 없음을 느낄 때, 말씀을 통해 또는 교리 공부를 통해 진리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진리를 통해 모든 종류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인데요, 이것이 바로 과부가 재판장에게 달려가 원한을 풀어달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한’은 진리가 없음으로 인해 생겼던 모든 어리석은 행동들을 뜻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종류의 과부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과부가 선은 있는데 진리가 없는 과부라면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과부는 반대로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는 과부입니다.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에 대해 아는 건 많은데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 사람입니다.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인데요, 이 경우에 ‘과부가 재판장을 찾아가는 것’은 의지가 약한 신앙인들이 진리를 통해 그것을 극복하려고 기도하면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부가 자꾸 찾아가자 마침내 재판장이 마음의 결심을 합니다. 그것에 대해 4절과 5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재판장은 처음 얼마 동안은 과부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신앙인들이 진리를 통해 영적 문제들을 해결하려 할 때, 처음에는 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 신앙인들이 처음 가지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진리에 관한 지식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진리에 관한 지식은 마치 나무토막과 같은 것이어서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태에서는 영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진리의 지식들은 어떻게 해야 능력 있는 진리로 변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진리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신앙인들이 가진 진리에 관한 애정을 ‘과부가 수시로 재판장을 찾아가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과부처럼 우리도 거듭남에 관한 모든 문제를 재판장인 진리와 그 능력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신앙인들이 진리를 통해 거듭남에 관한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쓸 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이런 애정 가운데로 오셔서 죽어 있던 진리의 지식 속으로 주님의 생명을 불어넣으시고, 그렇게 해서 그 지식을 살아있는 진리로 만드십니다. 바로 그때가 본문에서 재판장이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제는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리라 결심하는 순간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라는 것은 사랑 없는 진리가 주님에 의해 사랑 있는 진리로 변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는 건 사랑 있는 진리로 이제는 어떤 시험에서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냅니다. 과부가 품고 있었던 ‘원한’은 뭘까요? 진리 또는 선이 없음으로 해서 그동안 지옥의 영들에게 당했던 수모와 아픔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6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재판장은 신앙인들이 처음 가지는 진리인 진리의 지식을 뜻합니다. 재판장을 불의하다 하는 것은 진리의 지식은 그 자체로 사랑 없는 진리이며, 그러므로 의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비록 사랑 없는 진리라도 신앙인들이 그걸 붙들고 거듭나기를 힘쓸 때, 주님은 그 지식 안으로 오셔서 그것을 살아있는 진리로 만드시고, 그것으로 항상 시험에서 이길 수 있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이 말씀의 속뜻은, 말씀의 문자적 진리에라도 순종하면, 그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재판장의 말을 듣는 것은 순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하십니다. 여기서는 불의한 재판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한을 풀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여기 ‘하나님’은 뉘십니까? 말씀의 내적 의미로 다시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말씀의 내적 진리를 통해 그동안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 곧 속뜻 안에는 지옥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에 대해 이사야서 30장 2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
고 하셨습니다. ‘일곱 배’란 그때의 진리의 능력이 전보다 완전하고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진리인, 말씀의 내적 진리를 붙들고 각자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문제를 바로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되 오래 참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말씀의 내적 진리로 오신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미친다면 모든 원한이 속히 풀릴 것입니다. 병이 고쳐지고, 가난에서 건짐을 받을 것이고, 그 밖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주님이 말씀의 내적 진리로 다시 오셨다는 것과, 그 진리 가운데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진리의 능력이 속히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믿음은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새 교회 가르침 ‘신앙에 관한 교리’ 69항을 보면,
인애는 믿음의 생명이고 본질이다. 그러므로 인애에서 분리된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의 교리 69, 이순철 역)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is no faith, because charity is the life of faith: its soul, and its essence. (F.69)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 신앙의 본질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인애, 체어리티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시험에서 번번히 넘어진다면, 자신이 과연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으면 진정한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간단하고 쉬운 일이라도 매일 같이 체어리티를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진실한 믿음이 생기고 그것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흘러들어와 우리들의 삶을 높이 들어 올릴 것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는 낙심하지 마시고, 과부의 심정으로 재판장이신 주님께 매달리시기 바랍니다. 만약 시험에서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는다면, 시험을 통해 이루시려는 주님의 목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우리들의 영적 행보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잘못이 있다면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때 막혔던 혈관이 뚫리는 것처럼 진리의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쏟아져 들어와 모든 문제가 풀릴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