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심화

2. 체어리티(charity) 무엇인가? :  한국어  단어로 번역하기 어려운가

 

AC.9 체어리티(charity)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자선이라고 하면 너무 좁고, ‘사랑이라고 하면 love와의 구별이 흐려지며, ‘선행이라고 하면 행위만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이웃 사랑이라고 하면 상당히 가까워지지만,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가 charity라는 말에 담아 사용하는 모든 의미를 언제나 충분히 전달하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번역과 해설에서는 charity를 기본적으로 체어리티라고 음역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낯선 말 하나를 굳이 더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개념을 가능한 한 같은 용어로 추적하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현대 영어에서 charity라고 하면 흔히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이나 기부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 charity는 그보다 훨씬 넓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거나 어려운 사람을 돕는 행위도 체어리티에 속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체어리티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말 이웃 사랑 charity의 중요한 의미를 상당히 잘 전달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love to the Lord,  주님을 향한 사랑 charity toward the neighbor,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함께 다루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이해할 때 이웃이라는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체어리티를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감정을 갖는 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은 사람 안의 애정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웃의 선을 바라고, 이웃에게 선한 것을 행하며, 자신의 맡은 일을 정직하고 올바르게 수행하는 실제 삶과 연결됩니다.

 

그렇다고 체어리티를 곧바로 선행이라고 번역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생깁니다. 선행은 이미 밖으로 나타난 행위를 강조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체어리티에는 행위뿐 아니라 그 행위를 낳는 사랑과 의지, 그리고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는 방향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행위는 체어리티가 삶 가운데 나타나는 중요한 형태이지만 체어리티 전체와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닙니다.

 

바로 AC.9의 표현도 이 차이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charity 자체라고 하지 않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실제로 그런 선들을 행하지만, 아직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 선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겉으로 체어리티처럼 보이는 행위를 한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 안에 체어리티가 완전하게 살아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AC.9의 사람도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하지만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는 단순히 외적으로 관찰되는 착한 행동의 목록만으로 정의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마음속의 좋은 의도만으로 제한할 수도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그 이웃의 선을 전혀 구하지 않는다면 체어리티의 삶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체어리티는 내적인 사랑과 의지, 그리고 그것이 삶에서 나타나는 선한 행위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기에 진리도 중요합니다. 이웃에게 선을 행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무조건 해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무엇이 실제로 선한지 알기 위해서는 진리가 필요합니다. 선과 진리가 서로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질서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 역시 맹목적인 호의나 감정적인 친절로만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악한 행동까지 돕는다면 그것을 참된 체어리티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당장 원하는 것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참된 선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에는 사랑뿐 아니라 무엇이 선한지를 분별하는 진리도 필요합니다.

 

이 점에서 자선은 너무 좁고, ‘선행은 행위 쪽으로 치우치며, ‘사랑은 너무 넓고, ‘이웃 사랑은 상당히 가깝지만 문맥에 따라 여전히 설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번역에서는 charity 체어리티라고 두고 그 의미를 문맥에 따라 해설하는 방식을 기본으로 삼습니다.

 

이렇게 하면 love charity의 구별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love라고 할 때마다 그것을 체어리티라고 번역할 필요가 없고, charity라고 할 때마다 단순히 사랑이라고 번역하여 두 개념의 표현상 차이를 없앨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AC를 계속 읽다 보면 신앙과 체어리티’,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 ‘체어리티의 생명 같은 표현이 반복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하나의 일관된 용어를 유지하는 것이 전체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를 한 문장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완전한 정의라고 하기보다는 이렇게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따라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려는 사랑과 삶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주님에게서 오는 이라는 말을 넣는 이유도 AC.9과 관계가 있습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살아 있는 선을 이해하려면 결국 선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유로 AC.9의 선한 행위들을 무가치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여전히 선들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은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은 먼저 선을 배우고 행하면서, 그 선의 참된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차 알아 갑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도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계속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알고 믿는 것과 선을 사랑하고 행하는 것은 거듭남 가운데 서로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창4의 가인과 아벨에 이르면 훨씬 더 본격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 AC.9에서는 체어리티의 모든 교리를 한꺼번에 다 설명하려 하기보다 두 가지를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첫째, 체어리티는 현대적인 의미의 자선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둘째, 체어리티는 단순한 감정이나 외적 선행 어느 한쪽으로 축소할 수 없으며,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사랑의 방향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 번역에서 체어리티라는 조금 낯선 말을 만나더라도  그냥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charity라는 말로 가리키는 개념을 계속 추적하기 위한 번역어라고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문맥에 따라 이웃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체어리티의  등의 설명을 덧붙일 수 있지만, 기본 용어는 체어리티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결국 체어리티는 남에게 좋은 일을 하는 만도 아니고 남을 좋아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도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이웃의 참된 선을 바라고, 진리에 따라 그것을 삶에서 행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AC.9에서는 아직 그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 처음 나타나는 세 번째 상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구별을 기억하면 앞으로 AC에서 체어리티가 등장할 때 그 의미를 훨씬 정확하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9, 창1 개요, '회개의 시작, 그러나 아직 생기 없는 선 : 자라나는 풀과 씨의 단계'

AC.9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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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심화 1. ‘회개(repentance)의 상태’ AC.9의 ‘회개(repentance)의 상태’라는 표현을 설명해 주세요. 이어지는 내용인,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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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심화

1.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데  회개의 상태인가?

 

AC.9에서 세 번째 상태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선들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선의 근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왜 벌써 회개의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AC.9 회개 내가 행하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깨달은 상태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아직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바로 그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 선들을 여전히 생기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AC.9 회개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사람이 이제 자기 선은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고 말하면 순서가 조금 뒤바뀝니다. 그 깨달음이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 AC.9의 설명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회개일까요? 이 질문에는 AC.9이 바로 이어서 말하는 사람의 실제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며,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을 행합니다. 즉 이전 상태와 달리 이제 실제 삶에서 선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회개를 단순히  죄를 짓고 몹시 후회하는 감정으로만 생각하면 AC.9의 표현이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에는 삶의 방향을 악에서 선으로 돌리는 실제적인 변화가 포함됩니다. 사람이 이전과 같은 삶에 그대로 머물면서 마음속으로 미안하다고 느끼는 것만이 회개의 전부는 아닙니다.

 

AC.9에서 바로 그 변화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말하기 시작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실제로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영적으로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실제적인 선의 방향으로 삶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 보면 회개 아직 생기 없는 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회개의 상태에 들어가 실제로 선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삶의 방향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은 아직 온전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거듭남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인 상태의 변화라는 AC.6의 설명과도 잘 맞습니다. 첫째 상태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첫째에서 둘째로, 둘째에서 셋째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상태인 회개 역시 완성된 영적 인간의 상태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AC.9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사람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회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선이 어디에서 오는지 완전히 알게 된 다음에야 선한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배우고, 돌이키고, 말하고, 행하면서 거듭남의 다음 상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그래도 아직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회개하기  아닌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AC.9은 바로 그런 불완전한 상태를 세 번째 상태로 제시합니다. 사람은 실제 선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생기 없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이 단계의 회개와 선한 행위가 모두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여전히 선들이라고 부릅니다. 다만 사람이 그 선들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직 참된 생명을 가진 상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두 극단으로 가기 쉽습니다. 하나는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하니  선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일을 하고 있으니 이미 영적으로 충분히 살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AC.9은 어느 쪽도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 선이 나타났지만 아직 생기가 없는, 거듭남 도중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회개는 무엇에 대한 회개일까요? AC.9 한 단락은 구체적으로 어떤 죄목을 열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 공로를 죄로 깨닫고 회개하는 이라고 특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문이 직접 보여 주는 것은 회개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새로운 방향, 곧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하기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AC.9 회개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극적인 회심 장면을 상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눈물이나 강렬한 죄책감이 있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에 실제 변화가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감정을 포함할 수 있지만 감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여기서 일반적인 회개론 전체를 AC.9 한 문장 안에 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회개를 어떻게 더 자세히 설명하는지는 별도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AC.9에서 우리의 우선 과제는 이 세 번째 상태가 왜 회개의 상태라고 불리는지를 이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두 번째 상태까지는 주님의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고 리메인스가 드러나는 준비가 이루어졌다면, 세 번째 상태에서는 이제 그 내적인 변화가 말과 행위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합니다. 회개가 실제 삶의 방향 전환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여전히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며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킵니다. 그래서 그 선은 아직 생기 없는 것으로 불립니다. 앞으로의 거듭남에서는 이 선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가 더 분명해져야 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9 회개의 상태는 비약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의 연속성을 잘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회개했다고 해서 사람이 단번에 자기중심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 선의 근원을 완전히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돌이킴이 시작되고 실제 선이 나타나면서도 여전히 자기에게 속한 것이 섞여 있는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9에서 회개란 완성된 회개라기보다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돌이킴의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선에는 참된 생명이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회개할 정도로 무슨  죄를 지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회개를 주로  잘못을 저지른  크게 뉘우치는 사건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AC.9에서 중요한 것은 죄의 크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사람이 이전 상태에서 벗어나 선을 향하여 실제로 말하고 행하기 시작하는 것, 그러나 아직 그 선의 참된 근원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 바로 이 미완성의 전환이 여기서 말하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AC.9.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체어리티(charity)를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그런 게, 우리말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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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세 번째 상태'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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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심화

1. 시험, 불행, 슬픔을 통해 사람의 것들이 잠잠해지는가?

AC.8에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 나옵니다. ‘오늘날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왜 하필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어야 할까요? 그리고 실제로 주변을 보면 큰 고난을 겪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AC.8이 말하지 않는 것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을 겪어야 거듭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많이 거듭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원문 자체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없이는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예외의 가능성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중심을 사람에게 얼마나 고난이 필요한가?에 두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그 고난 가운데 무엇이 일어난다고 말하는가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시험과 불행과 슬픔을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하고, 세상 역시 사람이 자신의 삶과 쓰임을 수행하는 자리입니다. AC.8의 관심은 몸이나 세상을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에서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평소에는 이 구별이 쉽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몸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며 세상의 여러 관계와 일 가운데 살아갑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계획하는 것, 의지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삶의 전면에 놓입니다. 그런데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은 사람이 의지하고 있던 자연적 조건들이 언제나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합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병들 수 있고, 계획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 자체가 사람을 영적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전까지 강하게 활동하던 몸과 세상에 속한 관심들이 그러한 상황에서는 이전과 똑같은 힘으로 작용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문맥입니다. 실제로 몸과 세상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겉 사람이 파괴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죽은 것처럼 된다는 표현은 그것들의 활동이 잠잠해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AC.8에서 이것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목적은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는 데 있습니다.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면서 속 사람에 속한 것들과의 구별이 나타나고, 그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꺼내시기 위해 사람에게 고난을 보내신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AC.8은 각각의 불행이 왜 발생했는지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다면 주님께서 그의 사람을 꺾으려고 병을 주셨다고 해석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리메인스를 드러내기 위해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 글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AC.8이 설명하는 것은 고난의 개별적인 원인이 아니라, 거듭남의 이 상태에서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그 결과 이전에는 잘 구별되지 않던 주님의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는 상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의 후반부, ‘그런 고난 없이도 거듭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도 자연스럽게 답할 수 있습니다. AC.8 자체가 이미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거의 없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예외의 이유를 굳이 만들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 사람은 어린 시절 리메인스가 특별히 많아서 그렇다’, ‘이미 양심이 형성되어 있어서 그렇다’, 또는 겉으로는 몰라도 반드시 숨은 고난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AC.8은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이 상태가 시험과 불행과 슬픔 없이도 가능한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지 않은 예외의 이유를 우리가 채워 넣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모든 사람의 고난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체계를 만들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에 주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우리가 외부에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더구나 같은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영적 결과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AC.8 역시 시험, 불행, 슬픔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주체는 고난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고난 그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거나 일부러 고난을 찾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불행을 겪지 않았으니 아직 제대로 거듭나지 못한 것인가?라고 걱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나는 많은 고난을 겪었으니 영적으로 많이 성장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근거도 없습니다. AC.8이 우리에게 주는 기준은 고난의 양이 아닙니다.

 

오히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두 번째 상태의 본질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하고 참되다고 여기는 것이 정말 나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간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는지, 이것이 거듭남의 방향과 관련됩니다.

 

이렇게 보면 시험과 불행과 슬픔의 의미도 조금 달라집니다. 그것들은 주님께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반드시 보내셔야 하는 거듭남의 필수 과정이 아닙니다. AC.8오늘날이 두 번째 상태가 그러한 것들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관찰하면서, 그 이유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그 가운데 잠잠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고난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이것을 보내셨을까?라고 모든 원인을 해석하려 하기보다, 그 상황 가운데 내가 절대적인 것으로 붙들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주님께 속한 것과 자신에게 속한 것을 나는 구별하고 있는가?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편이 AC.8의 취지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누군가 불행을 겪는 것을 보고 사람은 사람이 너무 강해서 주님께서 꺾고 계시는 것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AC.8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해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 자신의 내적 질서를 이해하도록 주어진 설명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중요한 이유는 고통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AC.8의 표현대로라면, 그것들을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면서, 속 사람에 속한 것들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구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보존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의 중심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구별되어야 한다입니다. 고난은 그 구별과 관련하여 자주 나타나는 하나의 상황이며, 거듭남의 생명과 능력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에게서 옵니다.

 

 

 

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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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심화

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처음 이 표현을 읽으면 영계에 여러 종류의 영적 존재가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다 보면 이 짧은 표현이 상당히 넓은 세계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계는 모든 존재가 똑같은 모습과 상태로 살아가는 하나의 균일한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사랑과 신앙, 생각과 삶이 서로 다르듯 사후에도 그 차이가 드러나며, 그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상태와 공동체가 나타납니다.

 

먼저 (spirit)이라는 말 자체를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라고 할 때 언제나 한 종류의 존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이 말은 물질적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넓게 가리킬 수도 있고, 천사와 구별하여 아직 영들의 세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으며, 선한 영이나 악한 영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AC에서 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아직 천사가 되지 못한 중간 단계의 존재라고 고정해서 읽으면 문맥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은 죽어서 처음 영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본질적으로 영적 존재이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고 살아갑니다. 죽음은 그 물질적인 몸이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그 후 사람은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영적 몸을 가지고 계속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이 영이 된다는 말은 일상적인 설명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엄밀하게는 물질적인 몸을 벗은 인간이 영적 세계에서 영으로서의 자기 생명을 계속 살아간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처음 들어가는 곳과 관련하여 스베덴보리가 중요하게 설명하는 것이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입니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상태이자 중간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사람이 반드시 똑같은 기간 동안 머물면서 일정한 과정을 밟는 일종의 대기실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마다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사후에 겉과 속이 일치하게 되는 과정도 서로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사람이 지상생활 중 외적인 이유로 감추거나 조절했던 것들이 벗겨지면서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에 따른 실제 상태가 점차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들의 세계에는 매우 다양한 영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향하여 준비되는 사람도 있고 지옥을 향하여 가는 사람도 있으며,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외적인 것을 벗어 실제 내면이 드러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영계의 생물학적 종을 분류하듯 몇 가지 종류로 나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과 애정, 신앙과 사고, 삶의 목적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기 때문에 영들의 상태도 다양하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선한 영들 악한 영들이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단순히 두 종류의 종족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을 영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선과 진리를 기뻐하는 애정이 삶의 중심을 이룬 사람과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며 악과 거짓을 기뻐하는 사람은 사후에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영계에서는 이러한 내적인 차이가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천사에 대해서도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사는 인간과 전혀 다른 종류로 처음부터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한때 자연계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이 죽으면 영이 되고, 일정한 과정을 마치면 영이라는 종에서 천사라는 종으로 변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천사는 천국에 들어가 천국의 사랑과 질서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 영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옥의 악령이나 마귀도 처음부터 별도의 종족으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영계를 이해할 때 인간, , 천사를 서로 완전히 다른 세 종류의 존재로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의 생명은 자연계의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을 통하여 연속됩니다.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은 인간으로 살아가고, 죽음 이후에는 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와 결합하게 됩니다. 인간의 인격과 삶이 죽음으로 끊어지고 전혀 다른 존재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영계에는 그렇게 많은 공동체가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핵심은 사랑입니다. 천국에서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선을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은 무한히 다양하게 받아들여지며, 각 사람은 자신에게 고유한 애정과 쓰임을 가집니다. 비슷한 사랑과 쓰임을 가진 천사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함께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다양성은 천국의 질서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질서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악한 영들의 경우에도 다양성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수많은 형태로 나타나며,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과 욕망 역시 다양합니다. 따라서 지옥 역시 하나의 똑같은 악으로 이루어진 균일한 집단이 아닙니다. 서로 비슷한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 성질에 따라 결합합니다. 결국 영계에서 누구와 함께 있게 되는가는 외부에서 임의로 배치되는 문제라기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와 깊이 관계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지옥을 단순한 장소만으로 설명하지 않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천국과 지옥에는 실제로 장소와 환경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지만, 그 외적인 환경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서로 맞는 사람들은 서로 가까워지고, 맞지 않는 사람들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적 세계에서의 거리 가까움 역시 자연계의 물리적 거리와 똑같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상태의 유사성과 차이가 외적으로도 나타납니다.

 

AC를 읽다 보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영들에 관한 표현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어떤 영들은 다른 영들을 가르치거나 돕고, 어떤 영들은 인간의 특정한 기억이나 애정과 관련되어 나타나며, 어떤 영들은 악한 욕망과 거짓을 자극하려 합니다. 또 여러 행성의 영들에 관한 기록이나 인간 몸의 기관들과 상응하는 영적 공동체들에 관한 기록처럼 오늘의 독자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내용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AC.5 여러 종류의 영들은 이후 펼쳐질 방대한 영계 기록을 미리 예고하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영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 유입되는 것과 악과 거짓에 속한 것이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 영이  머릿속에 생각을 넣으므로 나는  생각에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여러 유입 가운데서 자신에게 오는 것을 자기 것처럼 느끼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를 자유와 이성 안에서 선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유입에 관한 가르침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중요한 책임을 전제합니다. 선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릴 수 없고, 악한 충동이 일어났다고 악한 영이 시켰다며 책임을 넘길 수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안에 일어나는 것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며,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바로 이런 실제적인 선택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지금 어떤 종류의 영이 나에게 붙어 있는가를 알아내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특별한 영계 교통이 허락되었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영들과 직접 대화하거나 그들을 식별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영적 현상을 추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배우고, 자신의 악을 살피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그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5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들의 다양성은 인간의 내적 삶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지상에서 형성되는 사랑과 삶이 죽음 이후에도 얼마나 중요하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이 어떤 외적인 이름을 가졌는가보다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계의 존재들을 몇 개의 고정된 종류로 분류하여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에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사랑과 애정과 사고의 상태가 있고, 영적 세계에서는 그러한 내적인 차이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며, 서로 비슷한 상태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5에서 스베덴보리가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영계에는 여러 종족이 있다는 뜻으로 읽기보다 사후에도 인간의 고유한 삶과 사랑의 성질이 계속되며,  차이에 따라 영적 세계에는 헤아릴  없이 다양한 상태와 공동체와 질서가 존재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AC 전체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묻게 될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  나는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AC.5, 서문,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린 영계의 증언

AC.5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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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심화 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심화 1.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러니까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제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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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심화

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에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는 독자에게 가장 놀라운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자신이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도 그들과 말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는 영계의 존재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영들과 천사들과의 실제적인 교통이 지속적으로 허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이라는 표현입니다. AC 1권이 출판된 것은 1749년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그의 생애 말년에 과거를 회고하면서 쓴 것이 아니라,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세상에 내놓는 바로 그 시점에 이미 수년 동안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어 왔다고 밝힌 것입니다. 이후 그의 신학 저술 전체에 방대한 영계 경험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AC.5는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기록의 매우 이른 시기에 놓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꿈이나 한두 차례의 환시를 경험했다는 주장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들을 보았다고만 하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자신도 그들과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끊임없이, 중단됨 없이 계속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은 자신의 영계 경험을 순간적인 종교적 황홀경이나 특별한 꿈 몇 차례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에서 일상생활을 계속하면서도 영적 세계의 존재들과 의식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상태가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그렇다면 이것은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 글의 역할은 아닙니다. 반대로 현대인의 경험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환각이나 상상이라고 판정하는 것 역시 AC.5를 읽기 전에 이미 결론을 내리는 셈이 됩니다. 이 단계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읽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영적 세계를 상상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허락으로 영들과 천사들과 실제로 교통했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가 이후 제시하는 방대한 기록과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면서 판단할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삶에는 AC 출판 이전부터 중요한 내적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1740년대 전반 그는 오랫동안 해 온 자연과학과 철학적 탐구에서 점차 인간의 내면과 영적인 문제로 관심을 옮겨 가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의 개인 기록 가운데 잘 알려진 것이 흔히  일기라고 불리는 기록입니다. 그 안에는 꿈과 내적 갈등, 자기 성찰과 종교적 경험 등이 나타납니다. 이런 자료들은 훗날 그의 신학 저술이 갑자기 아무런 배경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상당한 내적 전환의 시기가 있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이 준비 기간의 꿈과 AC.5에서 말하는 지속적인 영계 교통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꿈을 꾸고 강렬한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과,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들과 천사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AC.5의 주장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전환에는 여러 단계와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보되, 후대에 전해진 유명한 일화 하나를 모든 것의 정확한 시작점으로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소명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1745년의 경험도 이런 구별이 필요합니다. 그의 생애를 전하는 여러 자료에서는 1745년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다루며, 주님으로부터 말씀의 영적 의미를 밝히는 사명과 관련된 경험이 있었다는 전승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장소와 구체적인 장면, 무엇을 보았고 어떤 말을 들었는지를 하나의 확정된 역사적 장면처럼 재구성할 때에는 자료의 성격을 구별해야 합니다. AC.5 자체가 우리에게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것은 훨씬 단순합니다. 이 책을 출판할 당시 스베덴보리는 이미 수년 동안 주님의 신적 자비로 영들과 천사들과 지속적으로 교통하는 일이 허락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경험을 어떤 목적으로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AC.5는 자신의 특별함을 소개하기 위한 자서전이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1-4에서 그는 말씀 안에 속뜻이 있으며, 창세기 첫 장들이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을   있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AC.5 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없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에 관한 증언은 그가 앞으로 말할 영적인 것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독자에게 밝히는 문맥 속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라는 표현은 중단됨 없이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일을 자기 지성의 성취나 특별한 영적 능력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것은 허락된 일이었습니다. AC.5의 문법 자체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자신이 영계를 열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경험의 중심에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스베덴보리보다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허락하신 주님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특별한 허락이 필요했을까요? AC.5 자체에서 스베덴보리가 곧이어 열거하는 내용을 보면 그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러 종류의 영들, 죽음 이후 인간의 상태, 지옥, 천국, 그리고 특히 온 천국에서 인정되는 신앙의 교리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즉 영계와의 교통은 단순히  세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과 천국과 지옥의 질서,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했다고 해서 그의 신학 전체를 천사들에게 배운 내용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의 첫 문장에서 그는 이것을 알 수 있는 근원을 주님으로부터라고 명시합니다. 이후 그의 저술에서도 주님과 말씀의 권위는 영이나 천사의 말보다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영들과 이야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진리의 최종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특별한 영계의 경험이 허락된 것 역시 주님께서 말씀과 영적인 질서를 밝히시는 더 큰 목적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기록을 앞으로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그가 어떤 영을 만나 그 영이 무엇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 영의 말이 곧 신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상태에 있으며, 선한 영도 있고 악한 영도 있으며,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이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AC.5에서 곧바로 여러 종류의 영들을 언급하는 것도 이러한 영계의 다양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다음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중단됨 없이라는 말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영적 이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신앙인이 영들을 보고 천사들과 대화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주님을 믿으며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영계의 시각적 경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영적 현상을 신앙의 목표로 삼으면 현상 자체에 마음을 빼앗길 위험도 있습니다. AC의 중심은 영을 보는 능력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고 그분의 질서 안에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스베덴보리를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그의 영계 경험이 놀랍기 때문에 그것만 좇아 읽으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거대한 사후세계 체험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영계 경험이 낯설다는 이유로 그것을 모두 제거하고 성경 해설만 취하려 하면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소명과 저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놓치게 됩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그 경험이 그의 말씀 해설과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5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이한 현상의 지속 기간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앞으로 말하려는 영계의 일들을 추측하거나 상상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보고 듣고 대화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허락되었으며 그 가운데 가르침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우선 그 증언을 그가 말한 그대로 정확히 이해한 뒤, 이후 수천 개의 AC 글을 따라가며 그 증언이 실제로 어떤 내용으로 펼쳐지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심화에서 만나게 될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았다고 하는 영계는 모든 영이 똑같은 상태로 존재하는 단순한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사후에 어떤 상태를 거치며, ‘’, ‘천사’, ‘악한  등의 표현은 어떻게 구별되는지 이해하기 시작하면 AC.5의 짧은 문장이 앞으로 펼쳐질 방대한 영계 기록의 문을 열고 있었다는 사실도 조금씩 보이게 됩니다.

 

 

 

AC.5, 심화 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심화 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영들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도 질서와 구분이 있으며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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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이 모든 말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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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처음 접하면 상징이나 비유와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은 단순한 문학적 표현 방법이 아닙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 때문에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나타내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연계의 사물과 영적인 의미를 서로 별개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빛은 물리적인 빛이고, 물은 물이며, 나무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빛과 어둠, 물과 불, 산과 골짜기, 나무와 열매, 씨와 밭, 눈과 귀, 손과 발 같은 자연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영적인 의미를 품고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성경 저자가 자연물을 적절한 비유로 골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 자체가 서로 관계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상응의 중요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상응은 인간이 사후에 임의로 붙인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시인이 빛을 희망의 상징으로 사용하자고 결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관계는 창조의 질서 안에 근거합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로 독립된 최종 현실이 아니라 더 내적인 원인과 목적이 자연계에서 드러난 결과이자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질서 있는 관계가 있으며, 이것이 상응의 토대가 됩니다.

 

인간 자신이 상응을 이해하는 가장 가까운 예입니다.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얼굴과 눈빛과 목소리와 행동에 그 사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분노하면 표정과 몸짓과 말투가 달라집니다. 얼굴의 근육과 목소리가 사랑이나 분노 그 자체는 아니지만, 내적인 애정이 외적인 몸을 통하여 표현됩니다. 이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아무 관계 없이 우연히 붙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형식 안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이 상응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이 예를 너무 단순하게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웃는 얼굴 = 사랑이라는 고정된 상응표가 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거짓으로 웃을 수도 있고, 겉으로 감정을 숨길 수도 있습니다. 이 예의 목적은 단지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을 통하여 표현될  있다는 질서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개별적인 외적 모양을 기계적으로 해석하는 기술이 아니라 영적 원인과 자연적 결과 사이의 질서를 말합니다.

 

이 점에서 인간은 하나의 작은 세계와도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몸과 그 기관들이 영적인 것들과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눈은 보는 기능 때문에 이해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고, 귀는 듣고 받아들이는 기능 때문에 순종과 받아들임에 속한 것들과 관계됩니다. 손과 팔은 힘과 행위에, 발은 보다 자연적이고 외적인 삶의 차원에 관계됩니다. 이것 역시 신체 부위에 임의로 의미를 붙인 것이 아니라, 그 기관의 실제 기능과 영적인 기능 사이에 질서 있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응은 말씀 해석의 원리가 됩니다. 말씀은 자연적인 인간이 읽을 수 있도록 자연계의 언어와 사물과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연적인 표현들은 영적인 것들과 상응하기 때문에 동시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은 단지 태양이나 광명에 관한 말에 머무르지 않고 문맥에 따라 진리와 깨달음에 속한 것을 나타낼 수 있으며, ‘은 진리에 속한 것, ‘열매는 삶에서 나타나는 선에 속한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 진리,  = 진리, 나무 = 지식과 같은 단순한 암호표를 만드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상응은 살아 있는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같은 자연물이 말씀의 어느 곳에서는 선한 의미로 사용되고 다른 곳에서는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물이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하나의 상응을 설명하면서도 성경의 여러 구절을 길게 인용하고 서로 비교합니다.

 

상응에는 또한 층위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과 상응하고, 영적인 것은 더 내적인 천적인 것과 관계되며, 궁극적으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문자에서 속뜻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의 숨은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맞히는 일이 아닙니다. 외적인 표현을 통하여 그 안에 있는 영적인 질서를 보고, 그 영적인 질서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주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AC.1에서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가리킨다고 한 것과 연결됩니다.

 

이제 앞에서 살펴본 표상 상응의 차이도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둘은 매우 밀접하지만 같은 말은 아닙니다. ‘상응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의 관계와 질서를 말하고, ‘표상은 그 상응의 관계에 근거하여 자연적인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건이 영적인 것을 나타내 보이는 기능을 말합니다. 따라서 상응이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나타낼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라면, 표상은  자연적인 것이 실제로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에 더 가까운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제사와 성막과 성전은 수많은 영적인 것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상응입니다. 제단, , , 기름, , 등잔과 같은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실재와 아무 관계도 없다면 그것들은 단지 인간이 정한 종교적 상징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것이 상응의 질서 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과 예배 안에서 영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상응은 인간과 말씀을 넘어 천국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은 추상적인 생각만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사들에게도 집과 정원, 산과 강, 빛과 색 등 외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영계에서 그러한 외적 환경은 천사들의 내적인 애정과 사고에 상응하여 나타납니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내적인 상태와 외적인 환경 사이의 관계가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영계 경험을 통하여 상응을 이해했다고 설명하는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의 모든 것을 보면서 이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뜻할까?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상응의 교리는 일상의 모든 사건을 암호처럼 풀이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특히 어떤 질병이나 사고, 재난을 보고 곧바로 이것은  사람의 어떤 영적 상태를 뜻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상응은 다른 사람의 내면을 추측하거나 현실의 사건을 점치는 도구가 아닙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와 창조의 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원리이지,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의적으로 영적 해석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 점은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상응을 배우기 시작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경험입니다. 자연을 보면서 주님의 질서를 생각하고, 빛을 보면서 진리를, 봄의 새 생명을 보면서 거듭남을 생각하는 것은 아름다운 묵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오늘 비가 왔으므로 주님께서 나에게 특별히 이런 메시지를 보내셨다고 단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상응은 주님의 질서를 바라보게 하지만 인간의 추측을 계시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상응을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빛과 물과 나무와 산과 동물의 상응을 수백 가지 알고 있어도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그 지식 자체가 영적 생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상응을 아는 목적은 말씀을 통하여 더 깊이 주님을 알고, 진리를 배우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AC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도 상응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이제 AC.4로 돌아가면 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창조와 태고교회에 관한 것을 표상하고 의미하고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가 조금 더 이해됩니다.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이 영적인 것과 아무 관계도 없는 자연물이라면 그러한 해석은 단순한 상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상응이라는 창조의 질서가 있다면, 자연적인 언어로 기록된 말씀 안에 영적인 의미가 담길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결국 상응은 말씀의 속뜻을 풀기 위한 하나의 해석 기법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세계를 거쳐 자연적인 세계에 이르는 창조의 질서와,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하는 스베덴보리 사상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바로 그 상응의 질서에 따라 기록되었기 때문에 자연계의 인간이 읽는 문자 안에서 동시에 천국의 것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응을 배운다는 것은 성경에 숨겨진 암호표를 하나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다는 새로운 시선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말씀을 향할 때, 우리는 문자에서 멈추지 않으면서도 문자를 버리지 않고, 그 문자를 통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거쳐 궁극적으로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향하게 됩니다.

 

 

 

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 마음이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기록된 겉 글자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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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은 스베덴보리 사상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지만, 처음 들으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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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말입니다. 처음에는 상징과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표상에는 조금 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아주 쉽게 시작하면, ‘자연적인 어떤 것이 영적인 어떤 것을 눈앞에 나타내 보이는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과 장소, 사물과 행위, 사건 등이 그 자체의 문자적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드러내 보일 때, 그것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AC.4에서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창세기 첫 장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이 내적 의미에서 새로운 창조, 곧 인간의 거듭남을 일반적으로 다루고, 특별히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장에는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거나 의미하거나  안에 포함하지 않는 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은 단지 자연계의 사물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영적 상태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서 표상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징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상징은 사람이 어떤 의미를 정해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가 특정한 모양이나 색을 자기 단체의 상징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그 경우 그 모양과 의미 사이의 관계에는 인간의 약속이 크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씀에서 말하는 표상은 독자가 마음대로 의미를 정해서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질서가 있으며, 말씀은 그 질서에 따라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형태로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표상은 다음 심화에서 다룰 상응과 연결됩니다. 둘은 매우 가까운 개념이지만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닙니다. 가장 간단하게 구별하면, ‘상응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관계이고, ‘표상은 그 관계에 근거하여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적인 과 영적인 진리 사이에 상응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 빛이 문맥에 따라 진리에 속한 것을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때 빛은 영적인 것을 표상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이것은 무엇의 암호인가?라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을 하나씩 다른 단어로 치환하는 암호 해독처럼 생각하면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는 그것이 놓인 문맥과 말씀 전체의 질서 안에서 살펴야 합니다. 같은 사물이라도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가에 따라 선한 의미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의미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를 생각하면 표상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단, 제물, , 기름, 제사장의 의복과 여러 의식은 외적으로는 실제 예배의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것들이 그 자체 때문에 거룩했던 것이 아니라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표상했기 때문에 거룩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외적인 의식은 눈에 보이는 자연적인 형태이지만, 그것이 표상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입니다.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도 비슷합니다. 그것들은 말씀의 문자에서는 실제 장소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문맥에 따라 주님의 나라와 교회, 천국에 속한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중요한 것은 가나안이라는 장소 자체가  천국이다라는 단순한 등식이 아닙니다. 그 장소가 말씀 안에서 어떤 영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표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도 표상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왕이나 제사장, 족장과 선지자들이 내적 의미에서 어떤 영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성품 자체가 반드시 그가 표상하는 영적 실재와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표상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말씀 안에서 한 사람이 어떤 것을 표상한다는 것과 그 사람 자신이 실제로 그러한 내적 상태를 지녔다는 것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표상의 기능은 표상하는 사람 자신의 인격적 완전성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알면 구약의 여러 인물과 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어떤 왕이나 제사장이 말씀 안에서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그 사람 자신이 반드시 거룩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외적인 표상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내면과 구별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과 교회의 표상적 질서를 통하여 영적인 것을 나타내실 수 있으며, 그 표상에 참여한 사람 자신의 내적 상태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역사 표상의 관계도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에서 실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적 말씀에서는 실제 인물과 사건이 동시에 내적 의미를 담는 경우를 계속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창세기 초기의 모든 이야기를 먼저 현대적인 의미의 역사적 사건으로 확정한 다음 거기에 표상적 의미를 하나 더 얹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초기 장들의 성격과 이후의 역사적 말씀을 구별하여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해당 본문에 들어가면서 차례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표상은 실제로 있었느냐 아니냐를 결정하기 위한 개념이 아닙니다. 표상의 핵심 질문은 말씀 안에서 이것이 무엇을 나타내는가?입니다. 자연적인 인물과 사물과 사건을 통하여 어떤 영적 실재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표상은 문자적 의미와 속뜻 사이를 이어 주는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그러나 표상을 안다고 해서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표상이 상응에 근거한다면 그 의미는 인간의 상상이나 취향이 아니라 말씀의 질서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표현의 의미를 설명할 때 말씀의 다른 수많은 구절을 함께 제시하고, 같은 표현이 여러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봅니다. 표상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위한 허가증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질서를 더 세밀하게 살피도록 요구하는 개념입니다.

 

이제 AC.4의 마지막 문장이 조금 더 선명하게 들립니다. 창세기 1장의  하나의 표현도 없으며,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창조와 태고교회에 관한 것을 표상하거나 의미하거나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은, 창조 이야기의 몇몇 장면에만 상징적인 교훈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체 이야기와 그 안의 세부가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서 영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결국 표상은 눈에 보이는 말씀의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 사이에서 나타내 보이는 기능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적인 것이 어떻게 영적인 것을 그렇게 나타낼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더 근본적인 원리가 바로 상응입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했다면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기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나타낼  있는가? 그 질문이 바로 다음 심화 상응으로 이어집니다.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 사상을 이해하는 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처음 들으면 굉장히 어려운 철학 용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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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AC.1-3의 원리로 본 창1'

AC.4 마음이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기록된 겉 글자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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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사람(internal man)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앞으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중요한 개념입니다. 처음에는 겉으로 보이는  마음속의  정도로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그보다 훨씬 깊은 인간의 영적 구조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지나치게 복잡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단순히 몸은  사람이고 마음은  사람이라고만 이해해 두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3에서 스베덴보리가 속 사람을 처음 언급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인간의 구조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사람에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듯이 말씀에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외적인 것이 내적인 생명과 분리되면 몸만 남은 것과 같듯이, 말씀도 그 내적인 생명과 분리하여 문자만 보면 영혼 없는 과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에서는 우선 인간에게 내적인 차원과 외적인 차원이 있다는 기본적인 구별만 붙잡아도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속 사람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속 사람을 단순히 남에게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화를 낼 수도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보이지 않는 생각이라고 해서 모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욕망과 계산, 기억과 상상, 세상적인 판단 역시 몸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사람 안에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다고 해서 곧 영적인 의미의 속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중요한 구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보다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에 더 가깝습니다. 인간은 자연계에 살면서 감각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비교하고, 추론하며, 자연적인 필요와 목적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외적 또는 자연적 차원과 깊이 관계됩니다. 반면 인간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천국의 질서에 따라 자연적인 삶을 바라보고 이끌 수 있는 더 내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사람에 접근하는 더 정확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 역시 단순히 육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몸은 물론 인간의 가장 외적인 부분에 속하지만, 스베덴보리가 AC 전체에서 말하는  사람 또는 외적 인간은 흔히 자연적인 마음과 그에 속한 애정과 사고까지 포함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사용하는 지식, 기억, 감각에 기초한 사고, 자연적인 욕구와 관심 등이 이 외적 차원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사람=마음,  사람=이라는 이분법으로 이해하면 뒤의 AC를 읽으면서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영적 차원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람 안에는 언제나 선한 생각만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은 거듭나기 전에는 자신의 내적 질서가 제대로 열려 있지 않으며, 자연적인 욕망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삶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적인 것을 열고 질서 있게 하시며, 그곳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점차 외적인 삶에까지 내려가도록 이끄십니다.

 

여기서 유입이라는 개념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님께서  사람이라는  지점에 직접 생명을 넣으시고 그것이  사람으로 흘러간다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그려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에 여러 내적·외적 단계와 질서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생명과 질서는 근원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의 내적인 것을 통하여 외적인 삶에 이른다는 기본 방향만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겉으로 나쁜 행동 몇 가지를 고쳤다고 해서 곧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평판 때문에 정직할 수도 있고, 처벌이 두려워 악을 피할 수도 있으며, 자기 이익을 위해 친절하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행동만 보면 선해 보이지만 그 행동을 움직이는 사랑과 목적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의지와 이해가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겉 사람은 중요하지 않고 속 사람만 중요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남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속에서 선을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악을 행한다면 아직 질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겉으로 선하게 행동하면서 속에서는 오직 자기 이익만을 사랑하는 것도 온전한 질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질서 있게 하실 때, 사람이 내적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선과 진리가 자연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도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어느 날 자기 속 깊은 곳에서 완전히 새로워진 다음 그 변화가 자동으로 밖으로 퍼져 나간다는 단순한 과정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자연적인 삶에서 자신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여 피하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외적인 삶의 선택과 훈련도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사용하여 사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함께 질서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거듭남에는 안에서 밖으로라는 질서가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말씀을 배우고 행하는 외적인 과정도 그 질서를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을 인간 안의 가장 깊은 중심(inmost)과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가장 깊은 것, 내적 인간, 합리적 차원, 자연적 차원 등을 문맥에 따라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사람=인간의 가장 깊은 지점이라고 고정하면 이후 그의 인간론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AC.3에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세부 구조를 미리 모두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연적인 외적 차원보다 더 내적인 영적 차원이 있으며 인간은 그 내적인 것을 통하여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별은 사후의 인간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그때 처음 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지상에서 살 때부터 본질적으로 영이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고 살아갑니다. 죽음은 그 영적 인간에게서 물질적인 몸이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사람은 모두 없어지고  사람만 남는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몸은 벗지만, 사람에게는 사후에도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질서가 있으며, 기억과 사고와 애정도 지속됩니다. 지상에서 형성된 삶의 성질이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에게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이렇게 말해도 좋겠습니다.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행동보다  깊은 곳이 있어. 주님께서는 우리가 겉으로 착한 척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선한 것을 사랑하고 진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셔. 그리고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우리의 말과 행동에도 나타나도록 이끌어 주셔. 이것은 속 사람의 모든 구조를 설명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람 = 남에게 숨긴 생각이라는 오해를 피하면서 거듭남의 방향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AC.3으로 돌아가면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말씀에 비유했는지가 좀 더 분명해집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가 자연계에서 읽고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주어진 외적 형태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외적인 것이 내적인 생명을 표현하도록 창조된 것처럼 말씀의 문자도 그 안의 내적인 것을 담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핵심은  마음속에 숨겨진 진짜 를 찾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자연적인 삶 전체를 새로운 질서 안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따로 움직이지 않고, 내적으로 사랑하고 인정하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겉 사람과 속 사람'

AC.3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겉 글자만 보겠다는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기독교 세계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과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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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라는 표현은 AC.2의 가장 중요한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뿐 아니라, 뒤에서 계속 만나게 될 인간과 주님, 천국과 거듭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명’, ‘ 생각’, ‘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느끼고,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며, 내가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생명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이며,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생명을 가지고 계시다가 그 일부를 떼어 인간에게 나누어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주님에게서 독립된 작은 생명 하나를 자기 안에 소유하고 있는 존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와 다릅니다. 인간은 매 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생명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고, 인간은 그 생명의 수용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을 아무 의지도 없는 그릇이나 기계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자기 것처럼느끼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선택한다고 경험합니다. 자기 것처럼의 상태가 있어야 인간에게 자유가 있을 수 있고, 자유가 있어야 선을 받아들이고 악을 거절하는 일이 사람 자신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을 단지 움직여지는 도구로만 느낀다면 사랑도 신앙도 거듭남도 자유로운 인간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가르침과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가르침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가야 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자기 것처럼 받아 생각하고 의도하고 행동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 뒤에는 내가 했다고 자랑하지 않고 모든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릴 수 있으며, 동시에 악을 행하고서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책임을 돌릴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어려운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는가?생명 자체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악은 주님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이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뒤틀고 변질시킬 때 악과 거짓이 나타납니다. 햇빛 자체는 깨끗하지만 그것이 통과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따라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다만 이 비유에서도 햇빛을 주님 자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고, ‘근원에서 오는 것은 선하지만 수용하는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만 이해하면 됩니다.

 

이제 다시 AC.2로 돌아오면 왜 스베덴보리가 여기에서 갑자기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말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의 직접적인 관심은 인간의 생명론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말씀에는 생명이 있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바로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생명은 종이와 잉크에 어떤 신비한 힘이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사람을 영적으로 살게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말씀 안에 있는 신적 진리와 선이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주님을 향하며, 주님께서 그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질서 있게 하실 때 말씀이 그의 삶에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알고 외우는 것과 그 말씀이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듭남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거듭남은 이미 가지고 있던 자연적 생명을 조금 개선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고 강제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자기 안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선을 행하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모든 과정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그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의 실제 삶이 됩니다.

 

이제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라는 말을 처음보다 조금 다르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창조의 과거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존재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진리를 이해하며,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수용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지를 바로 알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AC.2가 말하는 말씀의 생명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말씀은 우리를 말씀 자체에 붙잡아 두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 말씀 안에서 주님을 향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갈 때, 말씀의 생명은 단지 책 안에 있는 교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열리기 시작합니다.

 

 

 

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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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라는 표현은 얼핏 보면 단순한 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Arcana Co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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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라는 표현은 얼핏 보면 단순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큰 줄거리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지만 세부 표현들은 그것을 꾸며 주는 문학적 요소에 불과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말씀은 전체로서뿐 아니라 그 안의 개별적인 것들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품고 있다고 봅니다.

 

전체적으로라는 말은 말씀 전체나 한 책, 한 장, 하나의 이야기처럼 비교적 큰 단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앞으로 창세기 1장을 해설하면서 스베덴보리는 그 장 전체를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에 관한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개별적으로라는 말이 붙으면서 이야기가 훨씬 깊어집니다. 창세기 1장의 전체 줄거리만 거듭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 저녁과 아침,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 해와 달과 별, 동물과 사람 등 각각의 표현도 그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AC.2에서는 이것을 더욱 강하게 표현하여 가장 작은 세부적인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하나에 이르기까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어느 부분은 신적이고 어느 부분은 단순한 부수적 기록이라고 나눌 수 없다는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를 보여 줍니다. 역사처럼 보이는 부분, 족보처럼 보이는 부분, 반복되는 이름과 숫자, 장소와 방향 같은 세부까지도 말씀 안에서는 전체의 내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든 단어에 하나씩 고정된 비밀 암호가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단어 하나를 떼어 놓고 임의의 영적 의미를 붙이는 방식이 아닙니다. 각각의 표현은 그것이 놓여 있는 문맥과 다른 표현들과의 관계, 그리고 말씀 전체의 내적 질서 안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같은 자연적 대상도 문맥에 따라 그 상응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며, 하나의 절을 이해하기 위해 앞뒤의 여러 절과 관련된 수많은 표현을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의 진짜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전체개별이 서로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체의 내적 의미가 개별 표현들을 통해 펼쳐지고, 개별 표현들은 서로 연결되어 전체의 의미를 이룹니다. 창세기 1장이 전체적으로 거듭남을 말한다면, 그 안의 각각의 날과 창조물과 순서도 서로 무관하게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질서 안에서 연결됩니다.

 

그리고 AC.2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하는지를 밝힙니다. 그 중심은 인간의 거듭남 자체도, 천국 자체도, 교회 자체도 아닙니다. ‘생명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말은 단순히 성경의 모든 부분에 의미가 있다는 주장보다 더 깊습니다. 말씀의 모든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모든 연결의 가장 깊은 중심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원리를 알고 나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왜 그렇게 세밀한 책인지도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이름 하나, 숫자 하나, 방향 하나, 반복되는 말 하나까지 오래 붙드는 것은 세부에 집착해서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그 세부 역시 말씀에 속하며, 따라서 전체의 내적 생명에서 떨어져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앞으로 AC를 읽는 하나의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큰 줄거리를 보면서 작은 표현을 놓치지 않고, 작은 표현을 살피면서 전체의 흐름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갈수록 결국 말씀 전체와 그 모든 세부가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AC.2가 이 짧은 표현 안에 담고 있는 중요한 뜻입니다.

 

 

 

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이라는 표현은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한 진리를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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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다'

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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